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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9-01)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식과 인도하심

시편 139편 1-12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삶을 깊이 이해하신다는 중요한 진리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완벽하게 아시며, 우리의 길과 행위를 세심하게 살피십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깊이 이해하시고, 그 전능하신 지식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를 마음에 새기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의 지혜와 사랑으로 각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가려질 수 없으며, 모두 그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1-6)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우리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뢰와 겸손을 갖추어야 하며, 그분의 지혜와 인도하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1-6)

 

시편 139:1-18은 한 단락을 이루어, 하나님의 지식(1-6), 편재성(7-12), 사람의 창조와 그를 향한 계획(13-18)에 대한 시인의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경이로움을 찬양합니다. 첫 단락, 1-6절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묵상입니다. 138편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도 땅의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들 살피고 아시며, 그들을 마땅히 다스리심을 기술했습니다(시 138:6). 본 시에서는 시인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이 다 아심에 주목하며, 이에 탄복하고 감사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펴보셨고, 자기를 아셨다고 진술합니다(1). 1절의 ‘살피다’는 ‘조사하다’, ‘정탐하다’, ‘맛을 감별하다’ 등의 뜻이며, 3절의 ‘살피다’는 ‘자로 재다’의 뜻으로, 둘 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자세히 점검했음을 부각합니다. ‘알다’는 지식적인 습득이 아닌 하나님과 시인의 유기적인 관계를 함축합니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점검 영역과 아시는 내용은 첫째, 시인의 일상의 활동을 비롯한 모든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시인의 앉고 일어섬, 나가고 누움이 포함되었습니다(2-3). 또한 그는 시인의 모든 행위를 익숙히 다 아십니다(3). 둘째,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에 계셔도 시인의 생각을 인지하십니다(2). 셋째,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한마디를 발설하기도 전에 무엇을 말할지 다 아십니다(4). 이와 같이, 2-4절은 하나님께서 시인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아셨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흠을 찾으려고 각 사람을 살살이 조사한다거나 알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세한 조사를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피지 않고도 각 사람의 모든 생각과 언행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16-17). 여기서 점검이 강조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내용에 빠진 것이 없고 정확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현재 악안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 있는 시인의 상황(19-24)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면밀하게 살펴 진의를 아시므로, 그가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고 떳떳함을 진술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의 모든 것을 파악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과 뒤(전체)를 안수하심으로써(5),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수는 시인의 떳떳함을 확증해줍니다. 이에, 시인은 자신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너무 높아서 움켜잡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6).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 싶다거나 얻으려고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이를 통해 시인과 각 사람을 세심히 돌보시는 점이 너무 놀랍고,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식의 풍요, 무한함, 깊이에 탄복하여 감탄과 감사를 금치 못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7-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디서든지 찾아오시며, 어떤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믿고,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 임재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순간에도 빛이 되시며, 우리의 길을 비추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빛을 의지해야 합니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7-12)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공간의 제약 속에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편재성의 경이로움은 미루어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시인은 ‘사람이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라고 외칩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사람이 당신의 영으로부터 어디로 가며, 당신의 얼굴로부터 어디로 피하리이까’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얼굴’은 문맥상 같은 의미로 ‘하냐님’ 자체를 지칭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향하거나 얼굴빛을 비추는 행동은 종종 그의 은혜나 호의, 축복을 베푼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민 6:26; 시 4:6; 80:19).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의 실제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 앞을 떠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부각합니다. 하나님의 편만함은 시공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그들과의 관계의 영역 속에서도 긴밀히 나타납니다.

시인은 먼저, 수직적 공간에서의 ‘하늘’과 ‘스올’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을 묵상합니다(8). 그가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며, 스올에 침상을 펴더라도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이 두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극과 극을 나타내며, 영적으로도 극과 극을 암시합니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첫째, 하늘은 우주 공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지칭하며, 스올(음부)은 하늘에서 가장 먼 곳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물이나 바다 밑바닥에 구덩이가 있고, 이 구덩이의 맨 밑에 스을이 있다고 여겼습니다(사 14:11-15; 시 88:6; 욥 38:16-17). 둘째, 하늘은 하나님과 그의 천군 천사가 거하시는 곳이며,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창 37:35; 시 88:3-7)으로 구더기와 지렁이가 덮인 곳입니다(사 14:11; 욥 24:20). 그러므로 스올의 대체어로 ‘죽음’(시 116:3; 잠 5:5), ‘무덤’이나 ‘구덩이’(시 30:3), 아바돈(잠 15:11) 등이 사용됩니다. 셋째,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의인을, 스올은 궁극적으로 죄인을 기다립니다(욥 24:19; 계 21:8). 넷째, 하늘은 광명이 있으나, 스을은 혹암으로 덮였습니다(욥 17:13). 다섯째, 스올로 내려간 죄인은 건져줄 자가 없지만, 스을로 내려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께서 소리를 들으시며(욥 2:2), 그 권세에서 속량하십니다(시 49:15; 호 13:14). 이처럼 상극의 장소인 하늘과 스올에도 하나님께서 실재하십니다. 그의 능력과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9-10절에서는 ‘새벽’과 ‘바다 끝’을 대조하며 수평적 공간과 방향 속에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묵상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여 성도를 보살피시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새벽 날개’는 ‘바다 끝’의 대조적 표현으로 사용되어 장소와 방향을 제시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를 직역하면 ‘내가 새벽의 날개를 들어올리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떠서 그 빛이 날개처럼 퍼진 것을 묘사하면서 동녘의 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다’란 단어는 ‘지중해’를 가리키므로 ‘바다 끝’은 ‘서쪽 끝’을 지칭합니다. 종합하면, 시인이 동쪽 끝으로 가든, 서쪽 끝으로 가서 살든, 하나님의 손이 그를 인도하며,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꽉 붙들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10).

마지막으로, 시인은 ‘흑암’과 ‘빛’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과 그의 다스림을 묵상합니다(11-12). 빛과 흑암의 대조는 8-10설과 상징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계신 하늘과 동트는 곳’은 ‘빛’과 연결되며, ‘죽은 자가 있는 스올과 해가 지는 곳’은 ‘어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빛과 흑암은 물리적인 밝음과 어둠올 나타내므로, 일차적으로는 문자적 해석이 적절합니다. 이것들은 또한 선과 악, 은혜와 곤경, 구원과 심판, 질서와 무질서 등의 영적, 도덕적 암시도 나타내므로 상징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으나, 모든 면에서 적용되지는 않으므로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11절에서 시인은 빛에 있으나 흑암이 그를 짓눌러(‘덮고’로 번역됨), 그의 주변에 있는 빛이 밤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을 짓누르는 그 흑암은 하나님에게는 결코 어둡지가 않습니다(‘숨기지 못하며’로 번역됨, 12). 하나님에게는 밤이라도 낮처럼 빛날 것이며, 흑암과 빛이 같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점입니다. 그에게는 어둠과 악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요일 1:5). 빛이 온 세상을 비추듯, 빛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편만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빛은 흑암을 몰아냅니다. 빛이 흑암을 비추어 물러가게 하듯, 하나님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춰 악한 자들을 다 색출하고 떨쳐버릴 것입니다(욥 38:12-13). 셋째,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비춰집니다(욥 29:3). ‘빛’은 은혜, 보호, 구원, 생명 등을 상징합니다(시 4:6; 80:19).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됩니다(욥38:15). 넷째,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에게는 흑암도 빛이 됩니다. 이 말은 악이 선이 되고, 심판이 구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평안과 보호가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그리므로 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흑암 속에서도 그의 광명을 힘입어 다닐 수 있습니다(욥 29:3;시 23:4).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식과 그분의 모든 곳에 함께하심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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