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7-01)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기쁨의 본질
시편 137편 1-9절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으면, 신앙의 본질이 약해지고 그에 따른 삶의 기쁨과 목적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외적인 성취나 물질적인 부유함이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고 그분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의 기쁨과 목적을 회복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 유다 멸망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합니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잊지 않습니다. 또한 멸망의 날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을 하나님이 그대로 갚아주시기를 고대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꿉니다.
바벨론 포로들의 애곡(1-4)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직면했을 때, 상실감과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위기 상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들의 애곡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서 우리 신앙의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1-4)
유다 백성이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애통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주전 722년) 지 약 140년 후, 남유다도 바벨론에게 무너졌습니다(주전 586년), 유다의 멸망 3년 전인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먼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왕하 25:1-2). 시드기야 11년에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 및 모든 집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어,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했습니다(왕하 25:9-12). 멸망 전후에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감으로써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한 무리는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국 바빌로니아의 수도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란 뜻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뜻하며, 바벨론은 이 두 강 중 유프라테스 강 남동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여러 강변’은 유프라테스의 강변들을 가리킵니다. 이 강은 2,850킬로미터로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강이며, 에덴동산(창 2:14)과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역을 관통해, 남쪽에서 티그리스강과 합류하여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시인과 무리의 몸은 바벨론에 있으나 마음은 시온에 있습니다. 이 땅 바벨론에서 그들은 이방인일 뿐입니다. 시온을 생각하니 애통의 눈물이 흐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해발 780미터의 구릉) 남서쪽 산등성이를 가리키나,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지칭하거나 대체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시온은 다윗이 점령해서 거주했던 곳이므로, ‘다윗 성’으로도 알려졌습니다(삼하 5:7,9). 이후 솔로몬 때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축되자(대하 3:1), 예루살렘과 시온은 ‘하나님의 산’, ‘거룩한 산’(시 2:6)으로 불렸습니다. 이처럼 시온은 다윗 왕의 영화나 하나님의 임재가 깃든 곳이었지만, 이제는 바벨론과 이방 나라에게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열방 중에 큰 나라요 공주 같았던 시온이 열방의 노예가 되었습니다(애 1:1). 무리가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는 순례길에서 기대에 차 바라보던 시온산(시 122:2; 125:2)이 기억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시인과 무리에게 수금을 타며 노래 한 곡조를 부르라고 시켰습니다(3). 그들은 시온에서 동포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온 자들이요, 포로들의 조국과 고향을 폭력으로 황폐케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로의 주인이 되었고, 자기만족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 그것도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수금을 연주하였으며, 언제 노래를 불렀습니까? 물론 잔치를 열 때 노래와 연주가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때 수금과 비파를 타고 나팔과 피리를 불었습니다. 바벨론인들의 ‘시온의 노래’ 요구에 무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는 다름 아닌 ‘여호와의 노래’였습니다(4).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땅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수 있습니까?(4) 4절의 ‘이방 땅’은 직역하면 ‘이방의 흙’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부정한 지역임을 암시합니다. 노래를 거절한 그들은 수금을 강변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2).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5-6)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목적을 잃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어떻게 지켜 나갈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5-6)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마음이 ‘만약에’라는 문장 형식 셋을 통해 나타납니다. 첫째, 시인은 혹시라도 예루살렘을 잊게 된다면, 수금을 연주하는 그의 오른손도 이미 수금 타는 법을 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5). 하반부의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에서 ‘그의 재주를’은 원문에 나오지 않으나, 의미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첨가되었습니다. 이 5절의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 수금 연주에 오랜 시간을 보내면 손이 연주하는데 익숙해져서, 수금에 손이 닿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곡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이나 병이 들어 수금 연주를 잊을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해석으로, 예루살렘을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며 예배를 잊는 것이므로, 수금 타는 일이 쓸모없어져 잊힐 것임을 뜻할 수 있습니다. 둘째와 셋째 가정법은 연결되어 하나로 나옵니다. 만약 시인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예루살렘을 자신의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라고 저주합니다. 이 문장들에서 나타나듯,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잊지 않는 행위’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비록 포로 신세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쪽을 택했습니다(1). 어떤 상황이든 예루살렘의 회복을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결정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기원(7-9)
고통 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정의를 간구해야합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고통과 불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시편 기자의 이 기도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전달하는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7-9)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을 추억하는 백성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 족속에 대해 울분을 터뜨립니다. 먼저 에돔 족속에 대해 보복의 기원을 합니다. 7절은 ‘에돔 자손들을 대항하여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에서와 야곱) 중 장자인 에서의 별명이며(창 25:30), 후에는 에서의 족속을 지칭합니다(창 36:9). 에서와 에돔 족속은 형제지간이면서도 야곱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갖고 이스라엘 역사 내내 시시때때로 못살게 굴었습니다(창 27:41; 32:1-12; 민 20:14-21; 왕하 8:20-22; 대하 25:11-14; 암 1:11-15; 겔 35:5). 특히 유다 왕 시드기야 11년(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다를 함락시켰을 때(왕하 25:1-21; 렘 39:1), 에돔도 가담했습니다(겔 35:1-36:15; 암 1:1; 옵 1:11-14; 애 4:21-22). 유다 포로들은 당시에 에돔이 ‘헐어 버리라, 헐러버리라, 예루살렘의 기초까지’라고 외치며 유다를 공략한 일을 떠올립니다. 에스겔 35:12에서도 에돔은 ‘이스라엘 산들이 황폐하였고 우리에게 먹이로 주어졌다’며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말을 단순히 유다에게 행한 폭력으로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자랑과 욕은 하나님을 거슬러 우쭐대고, 하나님을 거슬러 교만한 말을 퍼부은 것으로 여기셨습니다(겔 35:13). 그러므로 에돔이 이스라엘의 유업이 황폐된 것을 기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세일 산과 그 전부를 황폐하게 함으로써 분명히 심판하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겔 35:3-9, 14-15).
에돔을 향한 응징의 기도는 8-9절에서 바벨론을 향한 보복의 기원으로 넘어갑니다. 시인과 그의 무리는 바벨론을 ‘멸망할 딸’로 부릅니다(8). ‘딸’은 바벨론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애 4:21-22). 이들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바벨론에게 갚는 자가 행복한 자이며, 그들의 아이들을 잡아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한 자임을 선언합니다(8-9). 이런 저주의 기도는 잔인하게 들리나, 이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잔인한 학살과 악행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 21:23-25)처럼 하나님께 동등한 보복을 요청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9절의 기도는 8절의 기원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의 에돔에 대한 기도와 8-9절의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을 구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을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대해서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렘 25:14-17). 시간이 흘러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이스라엘이 유다로 돌아오게 됨으로써(주전 538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대하36:20-23; 스 1장).
우리의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응답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간절히 구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분의 평안과 위로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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