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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3-134)


복되고 아름다운 성령의 공동체

시편 133-134편


 

교회가 회복되고 개혁되려면 먼저 예배를 회복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계시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긴다는 의식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모이기를 기뻐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공동체가 되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시편 133편은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노래합니다. 가족과 사회 공동체 간의 관계, 개인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또한 134편은 밤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제사장과 무리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마땅히 그를 송축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축복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함께하는 아름다움(시 133:1-3)

예배는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연합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현대에는 세상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영향력이 교회에도 침투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합을 방해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되어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1-3)

 

시편 133편은 형제간의 화목과 연합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세 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형제가 연합함에 대한 칭송(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열세 번째인 133편은 공동체의 연합에 대한 칭찬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합니다. 첫마디인 ‘보라!’라는 외침은 시인과 함께한 무리의 주목을 끌며, 그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하게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는 육체적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적, 영적 가족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공동체의 ‘연합’과 ‘함께 거주하는 것’의 유익에 있습니다. ‘연합’이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같이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이들을 하나로 묶는 이유가 존재하기에 연합합니다. ‘함께 거주하는 것’은 장소와 환경을 공유하는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도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함께 성을 쌓았습니다(창 11:1-9). 아브람과 조카 롯도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왔으나(창 12:31; 13:1) 소유가 많아지자 연합과 동거가 깨지고 갈라서야 했습니다(창 13:5-12). 야곱과 에서도 헤어졌습니다(창 36:7). 그러나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다른 환경에서 거주하면서도 유다인 구원을 위해 함께 힘썼습니다(에 6:31-17; 9장).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유사합니다(느 8:9).

본 시의 공동체가 연합하여 함께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려는 공통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각 가정과 친척과 지파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예루살렘 여정에 오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시 122:4). 이처럼 순례길의 연합과 동거는 즐거움을 주고 큰 격려가 됩니다(시 122:1). 시인은 이런 모습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설명합니다. ‘연합과 동거’에 항상 ‘선’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악’과 ‘위험’이 소리 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나임)란 단어는 ‘기분 좋은’, ‘즐거운’, ‘사랑스러운’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135:3)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147:1)도 아름답고 즐거운 대상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 공동체의 연합의 동거함에 나타나는 선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동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과 동거를 이끌어가도록 공동체를 독려합니다.

 

(2) 형제가 연합함에 대한 비유(2-3)

 

시인은 형제의 연합은 두 가지 직접 비유로 설명됩니다. 첫째는 영적 환경의 예로, 아론의 머리에 내린 보배로운 기름과 같습니다. 여기서 ‘보배로운’ 기름을 직역하면 ‘선한(최상의) 기름’을 의미합니다. 기름의 질과 가치가 높다는 뜻입니다. 기름은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고, 성막/성전의 예배나 의식의 성별된 재료(출 30:22-33; 민 7:1)로 쓰이고, 손님에 대한 환대의 표시 등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호 2:22)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2절에서는 이 기름을 아론과 연결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공동체의 영적 차원을 염두에 둡니다. 이스라엘의 첫 제사장 아론은 제사장의 대표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대표로 여기 등장합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기름을 발라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했으므로, 보배로운 이 감람 기름은 머리에 붓는 거룩한 기름(관유)이 됩니다(출 30:25). 기름이 수염에 흘러 겉옷의 옷깃까지 흘러 내려가는 모습은 공동체의 연합의 부단한 지속성, 향기로운 영향력, 한계 없는 확대 등을 기대하게 합니다.

둘째 비유는 물리적 환경의 예입니다. 형제의 연합과 동거는 시온의 산들 위에 내린 헐몬의 이슬 같습니다. 아론의 기름처럼 이슬도 그 가치와 흘러내림과 풍요로움이 암시되었습니다. 헐몬 산은 갈릴리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로 해발 2,850미터입니다. 이 산의 세 봉우리에 늘 눈이 쌓여 있고, 여기서 물이 흘러 남쪽 지역의 식수원 역할을 합니다. 이런 지형학적 특색으로 밤에 많은 이슬을 내려 동식물만 아니라 경작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강수량이 적은 이스라엘 지역에 이슬이나 비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깁니다(창 27:28; 슥 8:12). 하나님의 축복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려 생명과 풍요를 공급하듯 형제의 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3b)

 

하나님께서 연합하는 공동체에게 영생의 축복을 명하십니다. 이 생명의 축복은 바로 앞에서 이슬이 시온에 내려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의미상 연결됩니다. 좋은 기름과 이슬의 근원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표로 하는 거룩한 성도와 하나님이 택한 시온에 거주하는 그의 언약 백성(시 132:13-18), 즉 하나님으로 연합된 공동체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그들을 성장, 풍요로움, 선, 아름다움의 공동체로 인도하십니다.

 

성전을 지키는 자들의 축복(시 134:1-3)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예배 자리에 와서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듣는 것으로 예배를 다 드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송축하는, 즉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자가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내리시는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1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1-3)

 

시편 134편은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을 격려하며 축복하는 찬양 시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로,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여호와를 송축하라(1-2)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인 자들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배경에서 보면, 133편에서 예루살렘 순례길에 동행하는 무리가 연합하여 함께하는 것을 경축하고, 134편에서 그들이 연합한 목적을 따라 그들이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을 같이 송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합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연결됩니다. 본 시 1절의 ‘보라!’라는 시인의 외침은 그 앞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종은 성전에 예배하러 온 순례자들이나 예루살렘 거주민일 수 있으며, 2절을 고려하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집중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은 밤에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장자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도록 선택된 자들입니다(민 8:18-19). 조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대상 23:30), 제사를 드리며(민 28:4), 성전 이곳저곳에서 맡은 일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대상 23:24-32).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인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 그를 송축합니다. 2절의 ‘성소를 향하여’는 원문에서 ‘성소’만 나왔으므로, ‘성소에서’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어떤 번역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송축하라는 의미로서, 함께 모인 무리의 예배와 송축의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임을 암시합니다. 성소를 향한 모습과 함께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시 28:2; 애 3:41; 딤전 2:8).

 

(2)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리라(3)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는 무리에게 제사장의 축도가 따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1-3절에서 사람들의 ‘송축하다’와 하나님의 ‘복 주다’는 각각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둘 다 ‘축복하다’의 뜻인 바라크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하는(바라크) 자에게 하나님의 복 주심(바라크)으로 화답합니다. 이 화답은 제사장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 중 하나입니다(민 6:23-26).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적극적인 의도가 나타납니다.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시 115:15;121:2; 124:8; 134:4), ‘시온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언약 백성이 된 점을 함축합니다. 창조주와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마땅한 자세입니다. 성전에 올라온 발걸음은 마지막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시온에서(시 132:13-14) 주시는 풍성한 축복은 시온의 거주지를 넘어 이스라엘과 온 땅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슥 14:9-11, 16; 미 4:6-8).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뭉칠 확률보다 반목할 확률이 높은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배자이자 순례자인 우리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신 복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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