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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9-01)


억제된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시편 129편 1-8절


 

원수들에게는 없고 하나님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한 차이가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원수들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방패가 되는 순간, 지지 않을 것 같은 악인의 시간도 역사 속에 묻힙니다. 하나님은 적의 낮보다 더 긴 주의 낮을 선물하십니다

 

  •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동안 이방인들로 인해 핍박을 받아 왔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압박을 끝내시고 이스라엘을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공의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핍박(1-2)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이방 민족의 압제와 공격에서 벗어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 민족이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연단을 위해 이방 민족이 고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1-2)

 

원문에서 시편 129편의 첫 마디는 ‘여러 번’(많이)으로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이 괴롭힘 당한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나,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이 이스라엘의 ‘어릴 때부터’임을 1-2절에 부각합니다. ‘어릴 때’는 127:4의 ‘젊은 자의 자식’에서 ‘젊은 자’로 번역된 단어(네우림)로서, 아동이나 청소년 시절보다는 결혼 전 청년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청년의 때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은 지금까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핍박 받은 상황은 2절에서 1절과 같은 문구로 반복되어 박해의 장구함, 빈번함과 더불어 혹독한 고통 또한 짐작케 합니다. 한편, 1절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말하라)’이란 어구는 118:2에도 나오며,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하나인 124:1,2에도 나오는데, 두 군데 모두 129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열방의 공격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회고하며 찬양합니다. 이 어구는 이처럼 시인이 자신과 함께한 청중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동참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12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2절의 ‘그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였노라’라는 문장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박해자들이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핍박했지만, 결국 이스라엘보다 우세할 수도 이길 수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힘이 강해졌거나, 전쟁과 정치에 뛰어난 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오로지 전쟁의 승패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삼상 17:47)의 간섭과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1-2절은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않으나, 시인과 청중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 점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핍박의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3-4)

이스라엘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요 구원자로 자처하셨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이상 어떤 나라와 세력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떠오르면 주의 낮이 적의 낮보다 길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공의가 역사하도록 구합니까.

 

3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3-4)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받아 온 핍박은 이스라엘의 등(신체의 일부)이 밭처럼 갈려 고랑이 생길 만큼 고통스럽고 비참했습니다. 사람들은 밭을 갈 때 보통 소를 이용해 땅을 일구어 고랑을 만들고, 소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쉬려고 할 때면 채찍으로 때려 일을 재촉했습니다. 시인은 이를 비유로 하여, 이스라엘의 핍박자들이 이스라엘의 등을 밭으로 삼아 갈고, 거기에 고랑을 길게 지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그들로부터 채찍과 몽둥이 따위로 맞아 등에 상처가 나고 여기저기가 움푹 패여 줄이 만들어져, 마치 일궈진 밭에 생긴 고랑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고랑을 길게 지었다’는 말은 고랑의 길이가 충분한데도 억지로 길이를 더 늘려 만들어나갔다는 의미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이 혹독했음을 암시합니다. 밭의 고랑이 일정하게 만들어지면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심을 때 용이하지만, 소처럼 학대받아 이스라엘의 등에 생긴 피와 상처의 고랑은 고통의 흔적과 슬픔의 기억만을 남길 뿐입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를 주어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명백하게 선언합니다(‘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2절에서는 원수들과 이스라엘 간의 승부를 언급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는데, 4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원수를 향한 심판을 직접적으로 밝힘으로써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박해한 자들은 ‘악인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128:1). 이 악인들이 이스라엘을 오래 잔혹하게 핍박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통해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습니다. ‘줄’은 사람이나 짐승을 옭아매는 밧줄이나 끈(삿 15:13)을 뜻합니다. 위 3절을 고려하면, 여기서 ‘줄’은 악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소처럼 채운 멍에를 가리키며 핍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악인들의 핍박은 하나님의 정의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원(5-8)

시인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합니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역사 속으로 완전히 퇴장하게 되길, 지붕 위 풀처럼 추수 전에 시들어버리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등진 자는 하나님과 등진 자이므로, 그들의 날도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5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5-8)

 

4절에서 선포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5-8절에서 이스라엘의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는 간구를 통해 화대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을 학대한 자들의 정체는 1-3절에서는 ‘그들’로서 모호했으나, 4절에서 ‘악인들’로 나타났고, 5절에 와서는 ‘시온을 미워하는 모든 원수’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 전체에서 2,4,5-8절에 설명되는데, 2절에서는 원수들을 주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줌으로 시작했고, 4절에서 여호와를 주어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언했으며, 마지막으로 5-8절에서는 다시 원수들을 주어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단계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원수들의 적대 관계는 두 그룹만의 일로 머물거나 두 그룹 간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지 않고, 세 그룹 핍박 받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공격한 원수들,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원수들을 심판한 하나님의 관계로 확대되었고, 이 세 그룹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었습니다. 특히 5-8절에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심판이 시에서 가장 길게 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두드러집니다. 또 이 단락은 4절에서 기술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정의를 확증하며 이스라엘을 옭아맨 줄을 끊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증명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으로, 첫째, 그들은 다 수치를 당하고 물러날 것입니다(5). ‘수치를 당하고 물러난다’는 표현은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퇴장하거나 전쟁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모습(시 35:4; 40:14; 83:17) 등 완전한 패배와 멸망을 뜻합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을 괴롭힌 열방과 민족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모리, 아말렉, 바산,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두로, 시돈, 아람, 앗수르, 바벨론 등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등을 통해 예고되었고(사 13-23장; 렘 46-51장: 겔 25-32장), 역사의 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풀처럼 말라 사라질 것입니다(6-7). 이스라엘을 학대당하는 소에 비유했다면,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소 같은 가축에 비교될 수 없고, 붕에 난 풀에나 빗댈 수 있습니다. 풀이 밭에 나면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붕 위에 풀이 나면 잘 자라는 듯 보이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므로 잘 자랄 수 없고 햇볕에 이내 말라버립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 풀처럼 쓸모없게 되고자라기도 전에 말라 죽기를 기원합니다. 7절의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은 6절의 지붕에 난 풀들이 추수하는 자들의 손에 몇 뿌리 잡히지도 않고, 단을 묶어 품에 안아 나르는 자에게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물론이 말은 원수들이 지붕 위의 풀을 거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이 추수할 밭의 곡식이 지붕에 듬성듬성 자란 풀들처럼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져 베어 단으로 묶어 나르지도 못할 만큼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대적들은 지나가는 자들에게서조차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8) 8절의 ‘지나가는 자들’은 원수와 관련이 없는 제3자들로서, 추수 때에 그곳을 지나간다면 으레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 마땅한데도(룻 2:4), 아무런 축복의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은 6-7절에 설명된 대로 그들의 추수가 볼품없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악행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 경악하거나 비웃는 경우(왕상 9:8)이기 때문입니다. 위 5-8절은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는 간구지만, 이 ‘간구’를 문자 그대로 ‘아직 안 이루어진 일을 바라는 기도’ 또는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을 바라는 기도’로 봐서는 안 됩니다. 내용은 간구이지만, 2절에서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음을 밝혔고,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줄을 이미 끊으셨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성취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심판보다 구원을 즐거워하시고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구원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 일입니까. 이전 싸움에서 패했다면 구원을 간구할 오늘조차 우리에게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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