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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1)


악인의 번영함을 보고 받은 교훈

시편 73편 1-16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삽니다. 내가 아무리 넉넉해도 더 부요한 사람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도 자칫 이런 세상의 잣대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신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 때문입니다.

 

  • 이 시는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악인의 형통 사이에서 마음의 고통을 억제하지 않고 쏟아내는 시인의 흔들림과 내적 투쟁을 오롯이 표현했습니다. 시인은 재난 같은 하루를 맞이하는 것 같아 악인의 평안을 질투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폭로하듯 쏟아내는 격렬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족자를 압도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삶의 위기(1-4)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유행에 민감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을 누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상대적 빈곤 의식 속에서 질투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지금은 거치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라도 악인의 형통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1-4)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단지 이스라엘 혈통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1)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1)

 

본 시는 ‘참으로 선하시도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면서 선(善,토브)의 주체와 대상을 분명히 합니다. 그 대상은 이스라엘(1)과 마음이 깨끗한 자입니다(16).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엘로힘)을 시행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평행되게 배열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가 동의적인 개념처럼 해석되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대상이 이동한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언약 백성이면서 언약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시인은 그 초점을 ‘마음’이 정결한 자, 청결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자에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개인과 동일시한 것이며 또한 개인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운명과 일치시켜 공동체적 의미로 확장한 셈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신앙의 명제를 밝힌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73편에서 반복되는 단어이며(1,7,13,21,26) 시인의 관심사인데, 이는 인간의 양심과 의지와 지혜와 정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중심을 일컫는 몸의 기관입니다. 때문에 시인은 내면의 순결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개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토브’, 곧 선하심과 친절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2) 그러나 악인의 형통함과 강건함(2-4)

 

그러나 시인의 신앙 명제와 시인의 고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1)라는 말을 덧붙였던 시인에게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나의 발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2). 개역개정은 생략했지만 ‘그러나’(바)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했지만, 시인에게 삶의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삶의 어떤 경험이 그의 확신을 뒤집은 것입니까? 시인은 곧바로 이유를 밝힙니다. 시인은 ‘왜냐하면’ 내가 오만한 자들을 질투했고 악인들의 평안을 보고 시샘했기 때문(3)이라고 합니다(3). 오만하거나 거만한 자들로 번역되는 말은 ‘빛나는 자들’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평안’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악인의 ‘샬롬’, 곧 번영과 성공뿐만 아니라 부족함 없는 완전한 상태를 시샘했습니다. 시인이 잠깐 동안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성공하고 있었고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에게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위배 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질투하다’라는 동사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망,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이 내재된 말입니다(참조, 왕상 19:10). 악인들의 평안을 보며 내면에 솟구치는 열망에 시인도 아찔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고통스럽습니다. 자랑하는 오만한 자들이나 악인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 몸에 윤기가 흘렀기 때문입니다(4). “그 힘이 강건하여”라는 표현에는 몸에 기름기가 많다는 문자적인 의미에 약간의 조롱이 포함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짐승에게 쓴 표현이고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풍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참조, 창 41:4; 겔 34:3).

 

뒤집힌 삶의 현실과 깊어지는 내적 투쟁(5-16)

우리의 마음은 참 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 앞에서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악이 유혹은 달콤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보라는 뱀의 유혹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유혹은 의심이었습니다.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5-16)

 

시인은 의롭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찾아오는 것은 형통이 아니고 고난이 죄자 인생이 허무해졌습니다. 악인의 형통이 부럽고 손해 보고 산 삶을 후회할 뻔했습니다. 시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괴로웠지만, 악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악을 확대 재생산하지도 않았습니다.

 

(1) 재앙 없는 악인들의 삶과 교만(5-6)

 

인류의 노고가 악인들에게는 없고, 사람이 으레 당하는 것도 당하지 않습니다(5). 시인은 보편적 인류를 뜻하는 낱말 ‘에노쉬’와 ‘아담’을 사용해 인류가 대체로 직면하는 삶의 ‘노고’(아말)나 이러저러한 질병이나 아픔으로 ‘고통당하는’(강조 수동형 동사) 일들조차 악인들을 비껴가는 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평안과 성공(4)보다 더 큰 문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수고와 고통조차 악인들에게 닥치지 않는 현실의 비애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폭력은 그들에게 둘러싸는 옷이 됩니다(6). 보편적 인간이 당하는 수고로움과 고난을 겪지 않는 악인의 자만과 우쭐함이 목걸이로 치장하는 그림으로 비유됩니다.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은 단지 장식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높은 신분을 상징합니다(창 41:42). 이에 더해 외출할 때 몸을 감싸주는 의복을 입듯 폭력이 일상화된 악인들의 삶을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오만(7-9)

 

그들의 눈은 살쪄서 튀어나왔고, 마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7). 몸의 기관 중에서 눈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낄 때 가장 먼저 활동하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양심과 의지와 지혜의 자리로서 인간 내면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몸 안팎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지방질로 비대해진 눈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개역개정).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새번역)라는 번역이 암시하듯, 악인들은 상상을 벗어난, 곧 제한받지 않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젖습니다. 조롱하고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폭언을 즐깁니다(8). 이것은 악인들의 조롱과 악한 말, 그리고 학대하고 탄압하는 폭력적 언행을 고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지도층 인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에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서 걸어 다닙니다(9). 시인은 하늘과 땅을 막론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악인들의 두려움 없는 망언과 교만의 극치를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10-12)

 

그의 백성도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셔버렸습니다(10). 문맥상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켜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새번역)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하시다’(1)라는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는가?’(11)이 말을 하는 이들이 누군지 불분명합니다. 모호하지만, ‘그의 백성’은 단수형이고 악인들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이 모독적인 발언은 악인들의 말입니다. 격정에 찬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보라! 이들은 악인들이다. 언제나 근심 없고 재산은 늘어만 간다’(12) ‘보라’는 불의에 대해 외치는 소리입니다. 시인은 근심도 없이 재산을 증식하는 악인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차오르는 내적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4) 시인의 불행과 내적 투쟁(13-16)

 

‘참으로 헛되다!’ 악인이 번성하는 현실을 말한 후 첫마디입니다. ‘참으로 선하시다’(1)라고 고백했던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이제 쓸모없게 되어 괴롭다. 더군다나 시인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고 자기 삶을 돌아보며 탄식합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번성하는 악인들 앞에서 처참하게 고통당한 자의 격정적인 호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향합니다. 악인들이 한 말을 내가 했더라면, 내가 당신의 아들들의 세대와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5).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무 상관없는, 곧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깊이 생각했지만, 이것이 자기 눈앞에 근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16). 삶의 실상과 진실 앞에서 알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마저 고통일 뿐이라는 시인의 절규와 내적 투쟁과 갈증이 오롯합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부러워하면 세상에 지는 겁니다. 언제나 진정한 형통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선을 놓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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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2)

 


고통받는 자를 위한 왕의 사랑

 

시편 72편 12-20절


세상 왕의 악한 통치를 경험해본 사람은 의롭고 사랑이 많은 왕을 모시는 행복을 알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구원과 감사와 평화가 깃듭니다. 그 백성인 우리가 가는 곳에 드러나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통치할 때 왕과 백성은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왕은 긍휼과 정의의 재판장이 되어주며 백성은 그를 존중하고 위해서 기도합니다. 왕과 백성들의 이상적인 관계는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기타 모든 면에서 풍요로움을 가져옵니다. 왕의 이름이 장구하리라는 약속과 그를 통해 온 민족이 복을 받는 것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왕의 공의로운 통치(12-14)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또 약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와 거짓과 악한 구조에 저항하여 그들의 생명도 나의 생명만큼 고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2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12-14)

 

왕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통치를 기원한 시인은 다시 왕의 본연의 의무인 백성을 향한 공의로운 통치를 간구합니다. 12-14절에 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궁핍한 자, 도움을 못 받은 가난한 자, 압박과 강포를 당하는 자로서 2-4절에서 소개된 백성과 같은 상황에 있는 무리입니다. 실제 백성 중에는 선을 행하는 무리와 악을 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잠 29:13). 하나님의 관심은 그를 경외하는 진정한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에게 악을 끼친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심판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관심도 이런 자들을 신원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2-4절과 마찬가지로 왕은 공의의 재판과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권리를 찾아줍니다. 이런 일에 있어 왕은 그들에 대한 긍휼과 그들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고 이유 없이 당하는 힘없는 자들은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원해줍니다.

이처럼 왕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인간 왕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돼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왕은 온 백성의 영적 지도자, 영적 대표가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그도 먼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사항은 한 가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제사장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출 19:5-6). 하나님께서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므로 그가 택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바라셨습니다(레 19:2). 이 점은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7:14-20의 하나님이 규정하신 왕의 규례를 보면 왕이 해야 할 평생 의무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필사하여 그의 평생 옆에 두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복을 누릴 수 있듯이,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공의와 긍휼을 자신의 삶과 백성의 삶에 실천할 때 진정한 왕이 될 것이며 그의 왕국이 지속될 것입니다(왕상 9:4-9).

 

왕의 우주적 통치(15-17)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고, 그의 은혜를 입은 열방의 백성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찬송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축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백성은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그를 통해 백성이 복을 받는 이 아름다운 관계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뤄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15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17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15-19)

 

왕의 긍휼과 공의로운 다스림을 경험할 때 백성들은 그가 자신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하나님의 진정한 왕임을 알게 되므로 이에 마땅한 존경과 감사로 화답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왕에게 예물을 바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송축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에게 다시스, 스바, 시바와 같은 먼 곳 왕들과 민족들이 진귀한 예물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왕에게 굴복하고 복종한다는 표현이며 강제성도 있지만(8-11), 자국 내에서 백성이 왕에게 진귀한 보배를 바치는 것은 그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자발적인 존경과 감사의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은 그 왕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종일 그를 축복하는 말을 쉬지 않습니다(“찬송하리로다”로 번역됨). 이와 같은 공의로운 인간 왕과 백성의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와도 유사하여,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정의와 긍휼을 베풀고 백성은 자원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으로 화답합니다.

시인은 왕과 백성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늘어가는 것만 아니라 산과 들에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고 백성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경제, 사회 등 다방면으로 풍요와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이때 곡식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는(16) 표현은 들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 레바논의 자랑인 백향목(사 6:13)을 비롯한 수목들이 흔들려 풍성한 소리를 내듯 한다는 의미입니다. 백성이 땅의 풀처럼 번성한다는 것은 그의 백성을 별처럼, 모래처럼 늘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시킵니다(창 22:17).

나라의 번영에 덧붙여 시인은 왕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것을 고대하며 간구합니다. 시인은 왕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시에서 ‘해’나 ‘달’(17,5,7)은 자연 세계에서 변함없이 항상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영속성, 지속성, 확실성을 내포합니다. 왕의 이름의 장구함은 두 가지 함축성이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축복이 이 왕과 후손에게 임함을 나타냅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성품, 능력, 가능성 등을 함축하고 있어 그 사람을 대표하는 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영원한 이름’으로 소개하시며 자기의 성품과 능력이 변함없음을 선언하셨고(출 3:15)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높이고 찬양함으로 응대했습니다(삼하 7:26: 시 135:13). 사람의 경우는 이름의창대함을 약속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창 12:3; 삼하 7:9), 특히 아브라함에게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 다윗은 영원한 왕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왕으로 알려졌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세주와 만민의 축복이 되셨습니다. 둘째, 왕의 이름의 장구함은 그의 나라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본 시와 시편에서 언급하는 영원한 나라는 다윗 왕국으로 시작하여 종말의 메시아 왕국에서 완성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그와 그 후손에게 하늘의 날과 같이 영원하고 견고한 왕국, 세계에서 으뜸가는 왕국을 맹세하셨습니다(삼하 7:13,16;23:5; 시 89:3-4,28-29).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 왕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영원한 왕국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후손의 왕국을 버리지 않겠다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표현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우주의 왕으로 다시 보내셔서 만국을 통치하실 때 비로소 영원한 다윗 왕국이 완성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 다윗의 왕국은 역대기 저자가 부르듯 ‘여호와의 왕국’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대상 28:5; 대하 13:8;28:5;29:23: 벧후 1:11).

 

송영: 하나님의 통치 찬양(18-19)

찬양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고 드러내는 일이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한 일을 과시하려는 마음이나 내 이름을 드러내려는 이들에겐 찬양은 공허한 울림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홀로 드러내는 순전한 찬양으로 영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18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18-19)

 

18-19절의 하나님 송영의 내용은 원래 이 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편 제2권의 끝을 표시하는 편집적 기능으로 이해됩니다. 시편 제1-4권까지 각 권 맨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절에 이와 유사한 하나님 송영이 나와 각 권의 마지막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시 41:13;72:18-19;89:52; 106:48). 제5권의 경우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146-150편까지가 하나님 송영으로서 시편 전체의 끝을 장식합니다.

송영의 내용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찬송하다”(18,19)로 번역된 단어는 ‘축복하다’의 수동형으로서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보통 ‘송축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홀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란 칭호는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참된 신이며 능력의 신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되어주신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므로 그의 이름과 영광도 영원하며 온 땅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름과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나오는 “아멘 아멘”은 백성의 찬송이며 화답입니다.

맨 마지막 문장인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19c)는 72편 이후로 다윗의 시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편의 수집과 편집 과정의 증거로 초기에 수집된 다윗 시선집의 끝을 알리는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홀로 놀라우신 일을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과 자비로운 사랑의 통치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영광을 온 땅에 가득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 그분 이름이 높임 받으실 수 있도록 힘써 주님과 함께 일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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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2-01)


하나님의 판단력으로 다스리는 왕

시편 72편 1-11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를 이루시기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며, 기도가 실천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 하나님을 따르는 왕은 그가 주신 판단력과 공의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 결과 온 나라에 평화가 깃들고 의인이 흥왕하게 됩니다. 왕의 통치는 영원하며 땅 끝까지 이르므로 온 세계 왕들과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적인 왕(1)

왕은 결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공의를 왜곡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특히 힘없고 약한 가난한 자들을 향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공의와 정의를 적용하여 억울한 피해를 막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와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이 위임받은 권력을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판단력(공정한 마음)과 정의로운 마음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그렇게 사용하는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1)

시편 72편은 시편 제2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인간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1절에 소개된 ‘왕’와 ‘왕의 아들’은 같은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두 사람이라면 왕의 아들이 이번에 새 왕이 되므로 적법한 왕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시 45:16). 시인은 “하나님이여”라고 기도를 시작하며 백성을 다스릴 때 왕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판단력(또는 정의)과 공의를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판단력과 공의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서 규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 대신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통치 속성인 판단력과 공의를 가져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간구는 솔로몬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할 때 제대로 판결할 수 있도록 지혜와 판단력을 하나님께 간구한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왕상 3:9-12). 솔로몬은 백성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통치 방법임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과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고, 백성들에게는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하나님임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라고 권면함으로써 영적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왕상 8장).

 

왕의 공의로운 통치(2-4)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연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자연을 파괴하는 동안 자연도 인간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우리가 나누고 사랑하고 평화를 구할 때 사람은 물론 자연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2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2-4)

왕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받아야 백성을 하나님 방식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태도를 가지고, 공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치를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시 45:7). 그렇다면 이때 왕이 돌봐야 할 백성은 누구입니까? 나라의 백성은 왕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2절에 언급하듯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출 19:5).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백성들로 소개된 자들은 삶 속에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무리라는 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억울하고 압박 받는 자들을 소개합니다(2,4,12,13).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벙어리, 고독한 자, 간곤한 자, 궁핍한 자를 예로 들었습니다(잠 31:8). 시편 113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자들의 예로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잉태하지 못한 여자를 언급했습니다(시 113:6-9). 이런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 시에서 언급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란 단지 물질적인 부족함을 느끼는 무리만이 아니라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신앙적이든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도움이 필요한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웃과 가족에게 소외당하고 마음에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이런 백성들은 가족과 사회의 관심과 긍휼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왕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입니다. 왕이 이들을 성실하게 변호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핍박하는 자를 심판할 때 그의 왕권도 견고하게 되며(잠 29:14) 이스라엘 온 산지, 즉 나라 전체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시 72:4).

 

왕의 영원한 왕국(5-7)

왕의 통치는 해와 달이 있을 동안 영원할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왕의 나라는 강성할 것이고, 왕의 통치가 때맞춰 내리는 비와 땅을 넉넉히 적시는 소낙비(폭우) 같을 것임을 믿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정의가 만개하고(혹은 의인이 번성하고) 평화가 것이며, 왕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5-7)

 

공의를 실천하는 왕이 있는 나라는 평화롭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백성들은 왕이 자기들을 어떻게 보살피고 정의를 구현하는지 보았으므로 해와 달이 지속되듯 변치 않고 ‘주’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5). 여기서 ‘주’(당신)는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왕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1, 2절에 나오는 ‘주’는 분명히 하나님을 지칭하므로 여기서도 일관성 있게 하나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인간 왕의 공의로운 통치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을 계속 경외할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2절부터 시작하여 17절까지 줄곧 ‘그’(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문맥상 ‘왕’으로 읽는다면 자연스럽습니다. 이 경우는 왕의 공의로운 통치를 보고 백성이 그 왕을 계속적으로 존경할 것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둘 다 시의 전체 주제인 ‘공의의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의의 왕의 다스림’에 벗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그대로 두어도 해석상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왕의 공의로운 다스림은 물이 꼭 필요한 풀 위와 땅에 내리는 비와 같이 백성에게 유익을 줍니다. 건기와 우기만 있어 물의 소중함이 더 절실한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충족할 수 없는 큰 유익과 축복을 뜻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파종과 추수 때에 맞춰 내리는 이른 비(가을비)와 늦은 비(봄비)를 종종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하듯(호 6:3; 욜 2:23) 6절의 비나 소낙비는 백성에게 임한 왕의 은혜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공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나라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들의 합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왕만 공정하고 의롭게 다스린다 해서 나라의 명화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왕을 따라 백성들도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 중에서 의인이 늘어나고 흥왕하게 될 것이며 달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나라에 평화가 유지됩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역할은 무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도자였을 때는 그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종용하였으므로 그나마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랐지만, 가나안 정착 후 여호수아가 죽자 백성은 곧 우상을 섬기고 자기 눈을 기준 삼아 제멋대로 살게 되었습니다(삿2:10-13; 17:6). 다윗의 경우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자였으므로(왕상 9:4; 14:8) 그 시대의 백성만이 아니라 후대의 왕들과 백성들이 따라가야 할 표본이 되었습니다(왕하 22:2; 대하 28:1). 그러나 여로보암이나 므낫세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왕으로 통치했을 때는 백성이 더한 악을 행하게 되었고(왕상 14:16; 대하 33:9).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죄를 범한 것은 왕이 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왕상 14:16: 16:2).

 

왕의 우주적 통치(8-1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또 영원토록 변함없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스라엘 왕들을 통해 펼쳐졌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펼쳐집니다.

 

8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8-11)

 

백성의 좋은 지도자인 왕의 나라는 영원할 뿐 아니라 그의 통치가 세상 모든 땅과 바다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라는 어구는 두 가지 단어로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다는 지중해를 강은 유브라데를 가리키지만 전체적으로는 온 세상을 지칭합니다. 이와 같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의 모습은 시편 2:8에 언급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왕의 위세와 우주적 통치는 땅 끝까지 영향을 미쳐 온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왕을 대적하던 자들조차 왕에게 나와 굽히고 티끌을 핥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굽히다’는 무릎을 꿇어 복종하며 경배하는 모습을(시 22:29), ‘티끌을 핥다’는 완전히 패배하여 수모를 당하는 모습(창 3:14; 사 49:23: 미 7:17)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둘째, 온 세계의 왕과 민족이 왕을 경배하고 섬길 것입니다. 다시스, 스바, 시바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진귀한 예물을 들고 와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의의 왕이 온 세계 모든 왕을 다스리게 되므로 땅 끝에 있는 민족들까지 다 그 앞에서 경배할 것입니다(시 22:27-28). 지금까지 언급된 이상적인 왕국은 다윗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며 (삼하 7장),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높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무름을 예수의 이름으로 꿇게 하시고 모든 자가 그를 주라 칭할 때 완벽하게 실현될 것입니다(빌 2:10).


기도는 단순한 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여는 열쇠이자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의 실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합시다. 기도 중에 의지는 새로워지고 성령께서 복음으로 충만케 하시고 주의 뜻을 행하는 자로 우리가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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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1-02)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

시편 71편 17-24절


 

버려진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입니다. 누군가에게 버려졌을때 설상가상으로 큰 어려움들이 많이 닥쳐오기 때문에 충격은 몇 배로 더 커집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나이가 많아쇠약해진 때에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면 자존감이 추락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시인은 하나님만이 성도의 의지가 되는 분이며 고난 중에 구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심판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성실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는 시인(17-18)

공의와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큰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어려서부터 경험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17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18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7-18)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 것(5-6)만이 아니라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17). 이 말은 시인이 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배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나 부모나 다른 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암송하기 위해 읊조리며 자라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을 신뢰하며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히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였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또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는 이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이때 시인은 9절의 간구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마시고 계속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다시금 간구합니다. 한편, 여기서 반복되는 “버리지 마소서”라는 간구(9,12,18)는 원수들의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11)는 주장을 생각나게 하여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현재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시인을 버리셨다고 봐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무응답과 무관심을 이제 받아들이고 포기해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고, 떠나시고, 내버려 두시고,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같이 느끼는데(2,9,12) 이런 유사한 상황은 성경의 다른 책이나 시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 13:1; 27:9; 44:24; 욥 13:24). 그러나 시편 27편의 시인이 권면하듯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시 27:7-14). 이 시기는 단련의 기회이며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잠깐이고 우리의 인내를 위함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로 칭찬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욥 42:5; 잠 7:14; 벧전 1:7; 4:12-16). 더구나 본 시편에서 시인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면 그의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잠 20:22: 시 37:34),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찾으라”고 하셨지(욜 2:12-14; 암 5:4) 방관하거나 포기하고 죄의 형벌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행동,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행동을 책망하셨습니다(호 7:10, 13-14; 암 4:6-12; 미 2장). 이처럼 죄로 인한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의 때이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의 때에 능력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호 12:6; 약 5:13).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다른 점입니다(시 79:6; 렘 10:25), 하나님 백성만이 가지는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주장(11)이 허무맹랑한 말이며 억측이라고,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놀라운 일을 전할 때를 기다립니다. 노년의 때를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점점 나이 들고 쇠약해지는 때인 것 같습니다(9,18). 어렸을 때나 지금 나이 들어 노년의 시기를 바라보는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고 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고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19-21)

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앞에서 낙망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땅 깊은 곳과 같은 외롭고 힘든 곳, 아무도 찾는이 없는 고난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깊은 곳에 내려갔던 만큼 더 높은 곳으로 올리시고 창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20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21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19-21)

시인은 이제 공의를 베풀어 그의 백성을 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이 시에서 하나님의 성품 중 ‘공의’를 가장 강조하였습니다. 현재 그가 무고히 고난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확실히 나타나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크고 놀라운 일(17, 19)입니다. 특히 고난과 재난에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땅 깊은 죽음의 장소에서라도 그들을 소생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가 신뢰할 분이며 고난의 때에 공의의 구원을 기대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한 축복과 위로도 간구합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소서”의 문자적 번역은 “나의 창대함을 더하소서”인데 이 기도는 마치 “성공하게 하소서”, “유명하게 만드소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 근거로는 첫째, 앞에 19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큰 일’과 ‘창대함’이란 단어가 모두 히브리어로 ‘큰’이라는 같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므로 시인이 말하는 창대함이란 자신의 명예나 명성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그 큰 일과 같은 창대한 일을 자기에게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소서” 뒤에 나오는 “다시 나를 위로하소서”도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 위로해달라는 요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자신의 수치를 씻어주시고 괴로움에서 기쁨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으로 이해되므로 위 같은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셋째, 이 시편 전체에서 시인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의도는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전하고 찬양하겠다는 의지만 반복된다는 점도 이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켜 천하 만민 중에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습 3:19-20)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 덕분에 수치가 아닌 칭찬을 얻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성실과 공의를 찬양(22-24)

믿음의 사람도 고난을 잘 견뎌내고 회복의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까? 지금 깊은 땅속과 같은 상황이라도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갑절로 창대하게 하시고 지난 모든 고난조차 기억나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4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22-24)

공의의 하나님이 자기를 고난에서 건져 위로하시길 구한 시인은 이제 기도를 마치며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하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시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기뻐 외치며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여러 고난과 행복을 겪는 시간과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공의와 사랑을 시인은 찬양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목소리로 찬양하든 소리쳐 외치든 하나님의 속성과 하신 일에 감사하므로 시인에게 진정한 기쁨이 넘칩니다. 시의 곳곳에 ‘항상’, ‘종일토록’, ‘더욱 더욱’(6,8,14,15,24)과 같은 표현이 나와 시인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22)를 포함하여 시 전체에서 시인이 자주 부르는 하나님의 호칭하나 하나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겼습니다. 처음으로 나온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이집트에서 구출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나라가 되길 원하신 것(출 19:4-6)을 상기시킵니다. 덧붙여,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속량자’로 부르는 데에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삼하 4:9; 왕상 1:29)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건져 구속하신 사건과 언약을 떠오르게 합니다(신 7:8; 시 111:9). 구속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찬송의 대상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찬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종일 읊조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중얼거린다는 것은 시편 1:2에서 행복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삼고 그 말씀을 중얼거리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말씀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이 이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성실과 공의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 재난이 일어날까 살피는 자들(“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13,24)이 결국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공의의 심판이 임할 때 하나님의 공의와 성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시인의 첫 간구인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의 기도도 같이 응답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에게 없는 신실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시면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보호하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백발이 되어도, 깊은 땅 속에 갇힌 것과 같은 고난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강한 팔로 더 든든하게 붙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세월 지나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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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1-01)


어릴 때부터 변함없이 신뢰한 하나님

시편 71편 1-16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인생에서 수많은 굴곳을 경험합니다. 똑같이 환난이 닥쳐왔을 때 어떤 성도는 주저앉아 버리거나 낙심합니다. 반면에 어떤 성도는 묵묵히 견디며 의연하게 이겨 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어려운 문제나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잘 이겨 낼 수 있을까요?

 

  •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나이 들어 늙을 때까지 늘 든든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현재 원수들이 그를 해하려 할 때에도 시인은 하나님만 신뢰하며 그의 구원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이때 그가 잘못했는데 구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무고하게 고통 받고 있으므로 공의의 하나님이 상황을 살피시고 그의 공의를 따라 신속히 그를 구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구원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뢰의 고백과 구원의 요청(1-4)

우리 인생에서 이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안전과 승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쇠하고 사라집니다. 이 세상은 다 그렇습니다. 존재 의원이신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이 그 영원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4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1-4)

본 시편은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고백과 구원 요청으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함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께”라고 첫마디를 외치며 “내가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시인은 자신이 피난처 삼는 분이 오직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여호와여”라고 부르는 데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시인의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음과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임이 암시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 자체에서 시인이 현재 고난에 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잇따라 나오는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마소서”(1)라는 간구가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 그가 당하는 수치는 그를 죽이려는 자들의 간계와 비방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 4, 7, 10-11, 13, 24절에 대부분 간접적으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신뢰를 바탕으로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시인은 “나를 건지소서”, “나를 풀어주소서”, “당신의 귀를 내게 기울이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항상 가서 숨을 바위가 되어주소서”, “나를 구원하라고 명하소서”, “악인의 손에서 풀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건지소서”, “풀어주소서”, “구원하소서”는 모두 ‘구원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동사지만, 각 동사가 가진 의미를 풀어보면 ‘위험에서 잡아채어 건지소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소서’, ‘나를 도와 승리하게 하소서’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간구는 하나님만이 시인을 건져줄 수 있으며 그럴 능력이 있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때 시인은 특별히 하나님의 공의로 자기를 구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시인이 하나님의 공의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현재 고난이 자기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상황을 공정하게 살펴보시고 자기를 원수들에게서 구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시인의 이런 기대는 ‘혹시나’ 하는 의구심 섞인 기대가 아니라 “당신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나이다”(3)라는 선포에서 알 수 있듯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입니다. 시인의 간구와 기대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뢰와 관련된 단어와 표현은 1절의 “주께 내가 피하나이다”와 더불어 “내가 항상 가서 숨을 바위”, “나의 반석”, “나의 요새”로 나왔습니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안전을 얻고 위험으로부터 숨어 보호받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잇달아 나오는 “나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나의 반석”, “나의 요새”라는 표현에는 시인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도 드러납니다.

시인은 무엇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하나님께 보호받으려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악인의 손, 즉 악인의 세력이었습니다. 시인은 악인을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로 정의하였습니다. 4절에서 악인은 단수로 나왔지만 10절과 13절을 보면 한 명이 아니고 악인의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시인이 추구하는 가치인 ‘공’와 정반대 속성인 ‘악’과 ‘불의’와 ‘홍악함’을 지니고 이를 휘두르는 자들입니다.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찬양(5-8)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따돌리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노년에 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강한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5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8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5-8)

 

하나님의 구원을 간청한 시인은 이제 그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늘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찬양하고 있음을 진술합니다. “진실로 당신은 나의 소망이시라”라며 고백을 시작한 시인은 그가 어릴 때부터 특히,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이 신뢰하는 분이었다고 밝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붙들어주셨고 탯줄을 끊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시며 태어날 때부터 그를 돌봐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찬양은 늘 하나님께 향합니다.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관심사였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눈초리와 구설수에 오르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징조”란 출애굽에서 일어난 기적과 표적(출 4:21; 4:34), 선지자들이 전하는 저주나 심판의 전조(왕상 13:3), 병 치료와 같은 이적(대하 32:24) 등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기이한 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로서, 이런 표적들은 이를 목격하거나 들은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본 시편의 시인에게는 어떤 징조가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원수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11)는 원수들의 말을 고려했을 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여전히 견고한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고난에 처하여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믿음은 이렇듯 한결같습니다.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신 점을 언급하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감을 표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점들을 눈여겨보시고 어려움에서 구하시기를 바람에서입니다.

 

시인의 간구(9-13)

자신을 하나님께서 버리실까 봐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다윗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 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노인이 되었을 때나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소망이시라는 다윗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10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11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12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3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9-13)

 

시인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버리지 않았듯이 하나님도 시인이 늙어가고 육체가 쇠약해지는 때에도 계속 그의 피난처가 되시기를 시인은 소원합니다. “나를 내던져버리지 마소서”,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간구는 출생 때부터 시인의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살펴달라는 요청입니다. 시인은 육체적으로 약해졌고 정신적으로도 고통 받아 힘겹습니다. 특히 그의 원수들이 그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하고 “그를 뒤쫓아서 잡으라! 그를 건질 자가 없다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원수들은 서로 작당하여 시인의 목숨을 노리며 앙심을 품고 그에게 재앙이 언제 닥치나 하고 탐색하는 자들입니다. 시인이 원수들의 이런 비열한 행동과 모욕적인 거짓말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런 원수들의 악행을 그의 간구에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수치와 욕이 오히려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멸망 당하길 간구합니다(1,13).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모르는 체하지 마시고 서둘러 도우시길 간구합니다(12). 하나님께서 신속히 그를 고난에서 잡아채지 않으시면 원수들의 비방과 거짓 소문은 사실을 진술한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수치를 주시고 의인의 수치를 거두시며, 악인을 멸망에 내버려 두시고 의인을 멸망에서 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하나님 찬양과 선포(14-16)

버려진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입니다. 누군가에게 버려졌을때 설상가상으로 큰 어려움들이 많이 닥쳐오기 때문에 충격은 몇 배로 더 커집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나이가 많아 쇠약해진 때에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면 자존감이 추락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4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14-16)

 

시인은 “그러나 나는”이라고 외치며 원수들은 죄 없는 시인에게 앙심을 품고 모해하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을 기다리며 계속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셀 수 없이 많은 공의와 구원을 하루 종일 전하겠다고 다짐하며 선포합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시인이 겪고 있는 고난에서 시인을 구원하시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의 사건이 하나 더 늘어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힘과 공의로 성취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간섭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알릴 것입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께서 시인을 건지시지 않았지만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건지실 것을 확신하고 이를 선포함(15-16)으로써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재확증하고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의 응답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도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심연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끌어 올리십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그 하나님께 계속 간구하면 어느새 우리의 부르짖음이 찬양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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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0-01)

 


여호와여, 나를 도우소서

시편 70편 1-5절

 


 

성도들은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대부분 긴급한 일이 있을 때 많이 드려집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귐이기 때문에 잠잠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긴급한 일에 간절히 구하는 기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이 신속히 임하길 간구합니다. 그는 자기를 조롱하고 멸하려 하는 원수들 속에서 외롭고 괴롭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시인의 목숨을 찾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내리길 간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주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서두르소서(1)

강청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낙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목말라하지 않고 갈급해하지 않으면 응답 또한 더디게 올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임하셔서 우리의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

 

시인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는 일을 ‘서두르시는 것’입니다. 시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서두르소서”(1),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속히 내게 임하소서”(5), 그리고 시의 마지막 문장으로 나오는 “지체하지 마소서”(5)라는 간구가 이점을 증명해줍니다. 이 두 명령형은 긍정형과 부정형으로 이루어졌을 뿐 그 내용은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서둘러 자기를 구원하시길 간구합니다. 이런 간구의 내용은 1절에서 “나를 건지소서”와 “나를 도우소서”라는 명령형으로 나오고, 5절에서는 “당신은 나의 도움이시요”와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라는 서술형으로 나오지만 이러한 다른 문장형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가장 절실한 구원자와 도움임이 더 강조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1, 5절에 나오는 “도움”에 해당하는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지만, “건지다” 동사의 경우는 시인을 구한다는 뜻이지만 서로 다른 단어로 나왔습니다. 1절에 나오는 “건지다”는 누군가를 위험에서 잡아채거나 끌어내어 구조한다는 뜻이며 5절의 “건지다”는 누군가를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두 단어의 의미처럼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조하는 일이 재빠르게 일어나고 그 결과로 안전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원수와 성도에 대한 간구(2-4)

우리의 기도가 정말로 간절하고 갈급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속히 임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해야 하는 ㄱ덧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2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4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2-4)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을 심판하시되, 그들이 악한 행위로 인해 수치와 수모를 당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그들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악한 행위는 보통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1) 나의 원수들을 심판하소서(2-3)

 

하나님의 신속한 도움을 갈망하는 시인은 어떤 상황에 처했습니까? 2-3, 5절을 살펴보면 시인의 현재 고난은 시인을 경멸하고 그가 죽기를 바라는 원수들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이 시편뿐 아니라 탄식이나 탄원을 담고 있는 대부분의 시편에는 시인이 어쩌다가 고난에 처하게 됐는지, 원수가 그 고난의 원인인 경우 그 원수가 대체 누구인지, 그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창세기나 사사기나 사무엘서와 같이 이야기 형식이 대부분인 책을 이해할 때와는 달리 시편에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에 해당하는 자세한 줄거리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게 적절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신속히 구원해달라고 요청한 후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의 심판을 간구합니다. 간구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원수들의 특징과 악행에 대한 고발이며, 둘째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간청입니다. 먼저, 시인의 원수들은 시인을 죽이려 드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자기들이 다른 이의 생사를 주관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기를 찾아 없애려 하는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수치와 낭패를 당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둘째, 원수들은 시인의 고난이나 상함을 그들의 낙과 기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시편 1:2에서 행복한 사람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소개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재앙에서 건지심으로써 그들이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수모를 당하길 간구합니다. 셋째, 원수들은 시인을 비웃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아하, 아하”하는 웃음은 조롱과 멸시가 내포되었습니다. 이 웃음에는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안됐다”, “꼴좋다” 등의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 원수들은 비열하여 그들의 추악한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야유를 받는 대상이 수치스럽고 무안을 느낄 때 더 기뻐합니다. 시인은 조롱받는 자기가 아니라 원수 본인들이 수치를 느끼고 시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길 간구합니다.

성경에 자주 기록되는 악인의 소행에서 나타나는 악인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호 5:4).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쉽게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선하고 성결하게 사는 길을 버리고 자기들의 유익을 추구하며 삽니다. 공법과 정의를 쓸개나 쑥처럼 쓴 것이라 여기고 악행을 저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암 6:12). 자신의 승리나 성공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며 교만하게 행동합니다(암 6:13).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제사와 예물을 드리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자기만족에서 나옵니다(시 40:6-8: 암 4:4-5: 미6:6-7).

 

(2) 성도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소서(4)

 

원수들의 심판을 간구한 시인은 이제 정반대의 무리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이 소개하는 참된 성도에 대한 정의와 그들을 위한 간구는 원수에 대한 정의와 정반대로 서술되었습니다. 원수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멸하기 위해 그 사람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이 괴롭히는 자의 상처를 기뻐하고 조롱하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의 핍박 대상을 향해 “아하, 아하라며 비웃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며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의 주권으로 우주를 다스리시며 각 성도의 삶을 주관하고 살피고 베푸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감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각자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함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잠 3:5-7),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사회적, 종교적 재건에 힘쓸 때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스 9장; 느 1:4-11)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었음을 언급했습니다(스 7:6,9: 8:18; 느 1:8,18). 다니엘도 왕들의 꿈이나 불가사의한 일을 설명하면서 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늘 고백하였습니다(단 2:27-30).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시인도 하나님의 진정한 성도 중 하나라는 점이며, 성도를 위한 간구는 시인 자신의 구원을 위한 간청도 된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 자이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어서 자기를 건져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의 위대함을 선포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5)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따져 봅니다. 여의치 않다 판단되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도와줄 사람도 찾지 못하면 그제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아무리 큰 문제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5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대적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과 기쁨이 있기를 간구한 후 시인은 다시 자신의 곤고한 상황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먼저 시인은 “그러나 나는”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목을 끕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가 목숨이 위태롭고 도움이 필요하여 외롭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을 확실히 아시고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이 내용은 “속히 내게 임하소서”(A)와 “지체하지 마소서”(A')라는 간구가 “당신은 나의 도움이시요”(B)와 “당신은 나를 건지시는 분이시오니”(B')라는 고백을 감싸고 있는 대구교차형태(A-B-B'-A')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도움’과 ‘구원자’(누군가를 위험한 곳에서 탈출시켜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의미)로 표현한 문장이 가운데에 나오는 이 형식은 시인이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는 데 있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밑받침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꼐서 시인에게 이미 도움과 구원자이셨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다시금 시인의 도움과 구원자이심을 지체 없이 증명해주시길 시인은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한 응답을 믿으며 간절히 구하십시오. 동시에 응답이 더디게 올지라도 낙망하지 않는 믿음을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속히 응답하시든 더디게 응답하시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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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9-01)

 

 


믿음 때문에 고난 당할 때

시편 69편 1-12절


 

과거로 돌아가 현실에서의 반전을 꾀하는 ‘타임슬립’은 이야기에 이따금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굳이 과거로 돌아가 주인공이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반전을 구현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펜이 쥐어진 이상 구원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시인은 그를 향한 원수들의 까닭 없는 비방과 억지로 인한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정직하게 행하였지만 원수들의 악행으로 가족에게서조차 따돌림을 받고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 고난 속에서도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고충과 결백을 호소하면서 그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1-5)

시간을 지체했다간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튀어나온 첫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호소였습니다. 깊은 물과 수렁에 비유된 원수들에게서, 그들의 미움과 모략에서 시인은 절박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그 손을 잡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3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4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5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1-5)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물들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 왔고, 깊은 물과 수렁에 빠졌고, 큰물이 그를 덮친다고 묘사합니다. 깊은 물과 수렁에 빠져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1) 시인의 간구(1a)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이 첫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시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구조를 요청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깊은 어려움에 빠진 시인(1b-5)

 

시인이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는 이유는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을 깊은 물에 빠진 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깊은 수렁과 물속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진흙과 물이 그를 에워싸며 물살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시인이 언급한 ‘물들’, ‘깊은 수렁’, ‘깊은 물’, ‘큰물’과 같은 단어는 어려운 처지를 가리키는데 자주 사용되며(14-15; 시 32:6; 40:2; 144:7; 욥 22:11) ‘스올’이나 ‘무덤’을 연상시킵니다(시 18:4-5, 16). 그러므로 시인이 묘사하는 현재 상황은 자기가 큰 어려움에 갇혀 죽을 위기에 있으며 거기서 손을 쓰거나 빠져나올 방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름으로써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 구원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때에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피곤하고 목이 타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응답을 기다리므로 눈이 침침해지는 등 육체적으로도 연약해졌다고 설명합니다.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일시적이지 않고 오래전부터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데서도 시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음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다릴 줄 압니다. 이는 시인이 인내할 줄 알아서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실 능력자임을 확실히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 시인은 1-2절에서 설명한 깊은 수렁의 실체를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시인을 미워하고 원수같이 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시인의 편에는 아무도 없고 힘도 없지만 그를 상대하는 원수들은 아주 많고 강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당하게 시인 한 사람을 미워하고 파멸시키는 데 자신들의 힘을 모으고 협력하였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서로 만나 미움, 불의, 불공평 등 악을 공유하게 되면 그 악의 성장력이 빠르고 뭉치는 힘이 강하여 그들의 상대에게 더 큰 악행을 저지르며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쉬워집니다(잠 1:11-14). 시인은 강하고 많은 원수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훔치거나 약탈하지도 않은 것을 원수들에게 물어줘야 하는 억울한 일조차 겪고 있습니다(출 22:1-4; 레 6:1-7).

시인은 하나님을 다시 부르며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합니다. “바로 당신이 나의 우매함을 아시며 나의 죄가 당신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고나 언행에 미련함이나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동시에 이런 연약함과 죄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므로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시는 부분이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시인의 이런 고백은 내용의 흐름 상 갑작스럽게 들리지만, 그 의도는 자신이 때로 미련하고 죄를 짓지만 원수들의 것을 도둑질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참말이며 현재 겪는 모든 일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면서 시인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셔서 속히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6)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해주셔야 할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들에게서 당하는 비방과 수치의 원인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함께 낙심하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실망이 아닌 희망이 되어달라고 간구합니다.

 

6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 원수의 불의, 자신의 결백을 고백한 후 이제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이 자기 때문에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인이 겪는 부당한 고난이 자기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에게도 부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의한 원수들의 계략대로 시인이 도둑질하지 않은 것을 물어주어 죄인으로 판결난다면 자기에게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를 구하지 않으심과 매한가지라고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즉, 불의를 멸하고 정의를 신원하시기를 호소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주 만군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른 데서도 나타납니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하는 데 자주 사용된 호칭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의 용사와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호칭입니다. 시인의 원수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도 공동체를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라 부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기다리며 바라는 자들’로 부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의 왕 되심과 그의 주권과 심판의 능력에 호소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히 구원해 주실 것을 재차 간구합니다.

 

수치와 비방을 받는 시인(7-12)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무고하게 비난당하는 억울한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이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억울함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난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래서 믿음의 지체들에게 힘을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7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10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12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7-12)

 

시인이 원수한테서 비방 받는 원인은 하나님 때문에,그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당신을 위하여 비방을 받았나이다”(7), “당신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9),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라는 시인의 말들이 그의 고난과 그가 받고 있는 비방이 하나님과 관련되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당면한 문제는 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 점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의 간섭을 촉구합니다.

원수들의 부당한 행동으로 시인이 당하는 고난의 영역은 더 넓어졌습니다. 원수들이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트집 잡고 헐뜯고 거짓말을 일삼고 거짓 소문을 퍼트려 시인에 대한 소문이 흉흉해지므로 시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그의 형제자매조차 그를 외면하고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여 시인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더해갔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비방과 가족의 따돌림을 되받아치지 않고, 그 대신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누가 죽었을 때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신을 낮추고 기도할 때 입는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창 37:34;사 37:1: 욘 3:7).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 때문에 듣는 비방을 참아내며 원수에게 보복하기보다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태도가 도리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문에 모여 장사하고 물건을 사는 자, 재판이나 모임에 참여한 자, 성을 출입하는 자 등 마을의 여느 사람들에서부터 술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자들에게까지 시인은 비난과 조소와 욕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시인처럼 비웃음거리가 되고 괴롭힘을 당할 때 참기 어렵지만 그 원인이 나의 실수나 죄라면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고, 아니라면 감사하며 참아내야 합니다. 남의 악한 언행과 죄로 인해 내가 다른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는 태도를 익혀 주를 진정하게 바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절망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분도, 사면에 막힌 절망의 늪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어떤 고통과 고립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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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3)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오는 찬송

시편 68편 24-35절


 

예전에 한 마을에 해마다 성대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축제를 통해 그들의 왕을 경배하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의 행차였는데, 이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길가에 나와 왕을 환영하며 찬양했습니다. 왕이 마차를 타고 마을 중심으로 들어오면,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고 사람들은 춤추며 노래했습니다. 이 장면은 마을 사람들에게 왕의 권위와 사랑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능력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열방의 모든 왕과 백성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가 계시는 처소로 나와 그분께 예물을 드리고 찬양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시온으로 행차하시는 하나님(24-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며,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삶과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항상 그분을 찬양하고 송축해야 합니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26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24-27)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성소로 행차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임재하시며,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어떻게 하나님께 올려져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시온으로 행차하시는 하나님(24)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성소로 행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로 행차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법궤를 시온 성의 성소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본 시편의 1-3, 7-8절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 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이자 전사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세워 행진하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들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전쟁에 나가는 장면으로 본다면, 24절부터는 전쟁 후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궤를 메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11-18)과 원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19-23)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므로, 24절의 하나님의 행차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전사의 입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나와 하나님의 행차 장면을 목격하고 하나님 찬양에 동참합니다. 전쟁을 위해 도성을 떠난 하나님의 법궤가 다시 성소로 돌아온 것은 전쟁의 승리를 함축합니다(삼상 4:3-10). ‘그들이 당신의 행차하심을 보았다’(24)는 말은 하나님의 법궤를 도성으로 옮기는 의식이 실제로 진행되었음과 전쟁의 승리가 실제임을 강조합니다.

 

(2) 하나님을 맞이하는 백성들(25-27)

 

하나님의 법궤를 따라 노래하는 자들, 소고 치는 자들, 악기 연주자들의 행렬이 이어지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은 홍해의 기적 직후(출 15:20-21)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삼상 18:6-7) 많은 여인들이 나와 소고와 경쇠 등 악기를 잡고 노래하며 춤추던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기적의 소식이나 승전의 소식을 축하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기쁨의 행렬에는 베냐민 지파를 선두로 유다. 스불론, 납달리 지파의 고관들도 함께하고 있다고 시인은 언급합니다. 이 네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체의 대표로 소개되었습니다. 각각 기업으로 받은 땅의 위치에 따라 베냐민과 유다 지파는 남쪽의 지파(유다 왕국)를 대표하고,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북쪽의 지파(이스라엘 왕국)를 대표합니다. 이 단락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하는 부분은 시인이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며 모든 백성의 왕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인 하나님과 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다른 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섬기고 있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동체의 기쁜 소식을 본인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인 희소식으로 받아들여 이에 감격하며 “이분이 바로 나의 왕, 나의 하나님께서다”라고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드높이고 있습니다.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28-31)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즐기는 백성들을 흩으시고,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는 분입니다.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며,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그분의 능력 안에서 굳건히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우리는 그분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8○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9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30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28-3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분임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방 가운데 경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시인의 간구(28)

 

28절의 ‘네 하나님께서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라는 문장은 ‘하나님이여 당신의 능력을 베푸소서’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능력을 베푸소서’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능력은 29-35절을 토대로 볼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열방을 심판하심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 열방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심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28-31)

 

하나님께서 열방의 왕들과 군대를 무찌르고 예루살렘 성소에서 그분의 위엄을 나타내시므로 온 세상의 왕, 고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왕들 중 뛰어난 왕에게는 그의 원수들이 앞에 나와서 부복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왕들도 그에게 공세와 예물을 바치며 열방이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까(시 72:8-11)? 하물며 온 땅과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자들이 나와 경배한다니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분께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짐승과 같은 이집트 왕(‘갈밭의 들짐승’)이나 이방의 고관들(‘수소의 무리’)이나 백성의 무리(‘만민의 송아지’)를 제압하고 그들의 값비싼 소유물(‘은 조각’)을 짓밟아 하나님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시기를 요청합니다. 여기서 수소나 송아지는 앞에 나온 이집트 왕과 같은 열방의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포악하고 들이받는 습성을 가진 들짐승이나 소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백성을 습격하여 치고 학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폭력적이고 전쟁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여 흩으심으로써 권능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나 구스(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모든 열방이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고, 그가 계신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며 경배할 것입니다. 본 시편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선지자들도 이러한 날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집트와 구스에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온 산에 나오게 될 것을 바라보았고(사 18:7; 19:21) 열방이 시온의 성전에 몰려올 날을 예언하였습니다(사 2:2-3; 미 4:1-2). 또한 이집트나 앗수르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백성이 되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며(사 19:24-25) 온 세계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집트와 열국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슥 14:16-18) 만국이 기꺼이 하나님께 나와 경배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을(32-35)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왕국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능력과 위엄은 무한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과 힘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삶의 어려움과 도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2-35)

 

이제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께서 열국 위에 왕으로 좌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땅의 모든 나라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오래전부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출현하시는 분’으로 설명하면서 그분이 세상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세상의 왕이셨으며 전능하신 분임을 밝힙니다. 하늘을 타고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4절에서 그분이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시고, 그의 백성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셨던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33절에서는 4절에서 소개된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세상의 왕이시며, 과거 시내산에서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늘과 땅이 요동하며 반응하였듯이(8) 지금도 그분이 나타나실 때 여전히 하늘에 뇌성이 울리며 세상을 진동시키는 전능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제는 땅의 모든 왕국이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분을 경배해야 함을 부각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나타내셨으니 우리도 이제 이에 화답하여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능력을 돌리라’는 명령(34)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여 그 권위와 권세에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땅의 예루살렘 성소나 하늘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장엄하고 놀라우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위엄의 원천이시므로 자신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앞서 5-6, 9-10, 19-20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날마다 그의 백성의 짐을 대신 지며 도우십니다. 시인은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강조하면서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자랑스러움 그리고 백성으로서 누리는 특권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제 열방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러한 특혜를 누리며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목도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믿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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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2)


전능자의 승리와 백성의 기쁨

시편 68편 11-23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는 길은 쉽지만 않습니다. 그 길은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난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침묵의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며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수록 믿음도 더욱 굳건해지도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 시온에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을 위해서 날마다 그들이 지고 갈 짐을 대신 지시며 그들을 고난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의 삶을 사는 자들은 빠짐없이 찾아내어 응징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승전 소식(11-14)

우리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은 강력하며,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를 승리로 인도합니다.

 

11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11-14)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11-14절의 기록은 본 시편 68편 첫 부분(1-3)에 나오는 시인의 기원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1) 하나님의 승전 소식(11)

 

11절에서 주가 주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전투를 개시하셨을 때 그분의 말씀과 능력으로 열방의 군대를 치셔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승리를 적군에게는 패배를 가져다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승전 소식에 여자들이 나와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합니다.

 

(2) 패배자와 승리자(12-13)

 

이처럼 승전의 소식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들어 기쁨을 나누지만, 하나님께서 치신 군대와 그 우두머리들은 패배의 소식을 서로 전하기도 전에 앞다투어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전쟁에서의 큰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에 머물고 있던 여인들까지도 적들이 남긴 물건들을 서로 나눕니다. 그 약탈물 중에는 은과 금 깃털을 두른 비둘기 모양의 장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 우리(또는 모닥불) 사이에 누워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돌아갈 전리품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승전 소식(14)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얻으신 것은 그분의 권능과 전능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를 언급하는 14절의 ‘하나님께서 왕들을 흩으실 때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살몬이 세겜의 살몬(삿 9:48)인지 15절 이하에 나오는 바산의 높은 산들 중 하나인지 확실히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살몬에 눈을 내려 적을 몰아내셨다는 의미인지 쌓인 눈을 연상시킬 만큼 패배자가 많았다는 의미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났으며 큰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눈이 내려 적군을 친 사건은 기록된 바 없지만, 비슷한 예로 여호수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려 이스라엘에게 대승을 안겨주신 사건(수 10:11-14)이나 다윗이 기도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뇌성과 우박과 번개를 날려 원수들을 쫓아내신 사건(시 18:13-14)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15-18)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이 시온에 세워졌고,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깊은 관계를 나타내며, 시온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15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7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15-18)

 

권능으로 열방을 쳐서 승리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시온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15-18절에서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16절에 두 번, 18절에 한 번 나타나며, 17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문장이 나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중점을 둡니다.

 

(1)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15-16)

 

하나님께서 시온에 임재하심을 선포하면서, 시인은 먼저 바산의 높은 산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이며 바산도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포합니다. 바산은 갈릴리 북동쪽에 위치한 곳이며, 높은 산들이 있는 곳은 대부분 동편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람들은 가나안의 북쪽에 위치한 시론 산(헤르몬 산; 해발 2800미터)과 같은 높은 산들을 이방신들의 거주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바산의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선언하는 이유는 험하고 높은 이 모든 산에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들의 세력이 침투할 수 없으며, 이 산들이 모두다 하나님의 소유이자 피조물임을 확실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2) 승리의 전사 하나님의 임재하심(17-18)

 

하나님의 소유인 바산의 높은 산들은 하나님께서 거주하기 원하시는 산을 시기심으로 바라봅니다. 16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거주하기 원하시고 영원히 계시는 산은 29절에서 명백히 밝히듯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해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둔 곳이고 예배 장소로 지정하신 곳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겠다고 약속하신 거주지(신 12:5,11; 출 15:17; 왕상 8:13)입니다. 바산의 산들이 시온 산을 질투한다는 말은 시온 산이 바산의 높고 위엄스러운 산들에 비할 바가 못 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바산의 산과 같은 멋진 거주지를 택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시온 산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셨는지 의구심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이런 질문에 빗대어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신 이유가 외형적인 수려함이나 인간이 바라보는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그들의 인구가 많아서 이거나 강한 민족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기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듯이(신 7:7) 시온을 택한 것도 그곳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68). 시온이 지금은 바산의 산보다 빼어나 보이지 않더라도 종말에는 이 산이 모든 산 위에 높이 솟아 만방이 그곳으로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의 통치를 찬양하는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출중한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사 2:2-3).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강력한 군대인 천군천사와 함께 높은 곳(하늘 또는 시온)으로 올라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패한 자들을 사로잡아 그들이 더 이상 반역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승전하신 왕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더불어 패망한 자들로부터 예물을 받으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직접 선택하신 시온 산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예고합니다(출 15:17-18; 왕상 8:13; 시 132:13-14).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19-23)

우리는 삶의 무거운 짐과 어려움을 홀로 감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에 우리는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 20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23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19-23)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거하시면서 열방을 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며, 그분이 온 세상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고, 대적들을 물리치시며, 열방을 다스리십니다.

 

(1)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19-20)

 

과거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위기에서 구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에도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니 그분을 찬송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큰 위기나 특정한 시간에서만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얻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백성은 그분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의 원수들은 심판과 죽음을 선고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로 여기는 자는 죄 속에 걸어가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를 짓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의 정수리를 깨뜨리기를 기원하는 시인의 기도는 섬뜩하게 들리지만 이러한 간구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벌하실지 관심을 두었다거나 잔인한 보복의 마음을 품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그토록 미워하시며 죄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의지를 가지셨고 죄인을 분명히 심판하시는 분임을 시인이 제대로 알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정의로운 심판과 판결을 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2)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1-23)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들(21)은 하나님께만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핍박하므로 그분의 백성들의 원수들(23)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원수들을 쳐서 깨뜨리시지만(21),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바산과 바다 깊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원수들을 쳐서 깨뜨려(23; ‘심히 치고’로 번역됨)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바산의 산이나 바다 깊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신다는 표현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발을 악인의 피로 담근다는 말은 죄에 대한 마땅한 심판을 받은 원수들의 피에 발을 씻는 모습(시 58:10)을 표현한 것으로 원수들의 완전한 패망을 의미합니다. 개들이 원수들로부터 제 몫을 챙긴다는 말은 개들이 그들의 피를 핥고 살을 먹는 것을 묘사한 것(왕상 21:19; 22:38; 왕하 9:36-37)으로서 역시 원수들의 완전한 패망을 뜻합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이와 같이 분명히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68편 11-23절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그분의 능력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우리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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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1)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시편 68편 1-10절


 

하나님께서는 앞서 가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앞서 가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앞서 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의 일어나심은 전쟁을 위한 것이고, 원수들을 무찌르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이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광야에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 전쟁의 용사이자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친히 강림하셔서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나타나심에 천지가 요동하며 악인들이 흩어지고 의인들은 기뻐 뛰놉니다. 거룩한 처소에 임재하신 구원과 승리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이 처한 어려움을 일일이 돌아보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들을 안전히 이끌어주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찬양(1-3)

성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거룩한 용사로 활약하시면 원수는 흩어지고 주를 미워하는 자는 도망합니다. 바람에 연기가 몰려가듯이, 불 앞에서 밀이 녹듯이 악인은 철저하게 망하겠지만, 의인은 주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향한 요청이고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서는 곳에 오늘도 찬양이 솟아날 것입니다.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1-3)

 

한숨과 탄식과 울음과 울부짖음이 있던 곳이 찬양과 기쁨의 춤이 있는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흥망성쇠는 우리가 가진 자원과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1) 악인들의 반응(1-2)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즉 하나님께서 행동을 개시하시면 악인들과 의인들은 현저하게 대조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1절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무리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행진할 때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모세가 외친 기도(민10:35)를 유사하게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목적지로 두고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떠날 때 하나님께서 군사의 우두머리로서 그들 앞에 나아가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본 시편 단락에서도 행동을 개시하신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전쟁의 용사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들의 반응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들의 반응까지 기원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에 능한 용사이신 하나님의 출현에 악인들은 흩어지고 멸망하되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기대합니다. 시인은 이런 대조를 보여주면서 악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함께 밝힙니다. 그들은 의인들을 침략한 원이지만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악인들이라고 시인은 설명합니다. 의인들에 대한 정의는 본 단락에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악인들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해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호의적으로 여기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악인들을 연기를 불어 흩어버리듯 몰아내고 초가 불 앞에서 녹아 없어지듯 망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타오르는 연기나 불(2) 그리고 뿔뿔이 도망가는 원수들(1)은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절에서 원수들과 관련하여 나온 동사들(흩어지다, 도망하다. 몰아냄을 당하다, 망하다)은 원수들이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암시합니다. 패배한 원수들은 용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각각 흩어져 도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겐 고통과 눈물이 함께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들은 승리의 소식을 듣게 되고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즐거워하게 됩니다.

 

(2) 의인들의 반응(3)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께 원수를 몰아내고 멸해달라는 요구는 매정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정의의 심판을 보여주시라는 요구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맘껏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4-6)

절망스런 처지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이들은 형통하게 하시지만, 자기 가진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도리어 메마른 땅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단순히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중에도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분의 구원을 신뢰하여 도움을 기다리는 자를 주께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오만한 자리는 아무리 선망의 대상이라도 결국 메마른 광야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4-6)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충만하시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요동하는 모든 것은 변할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신성은 유한한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유한한 피조물은 부끄러워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하나님 안에 살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찬양에 초청(4)

 

시인은 위 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용사로 오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강림하신 전능하신 왕이며 그의 백성을 보살피시는 사랑의 왕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서 구원의 하나님께서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는 당할 자 없는 강력한 용사지만 그의 백성에게는 한없이 정의와 자비를 베푸시는 왕입니다. 시인은 하늘을 타고 땅으로 내려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께서 고아에게는 아버지가 되어주고 과부에게는 공정한 재판장이 되어주며 외로운 자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갇힌 자들을 끌어내어 형통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5-6). 솔로몬도 하나님께 구하였듯이(시 72:1-4, 12-14) 이와 같이 백성을 의로 판결하고 가난하고 압제당한 자를 변호하며 생명을 건져주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경외를 실천하는 이상적인 왕의 본분입니다(신 17:18-20).

 

(2) 하나님의 보살피심(5-6)

 

5-6절에 언급된 왕의 주목을 받는 자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하며 필요를 공급받지 못하는 외롭고 괴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과 상반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살피신다는 말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도움을 기다리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살피시고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찍어 바짝 타버린 불모지에 거하는 것처럼 애타게 도움을 기다려도 아무런 원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는 물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아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자라지만, 사람을 신뢰하거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광야에 있는 마른 나무나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 그의 현재나 미래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시 1:3-5; 렘 17:5-8).

이와 같이 시인은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인식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그분께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을 맞이하는 공동체는 그분을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 앞에서 기뻐 뜁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기쁨과 평안만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7-10)

죽음의 땅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앞장서실 때 땅은 흔들렸고 시내산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진동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이 생명력으로 충실하도록 때에 따라 비를 쏟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지친 땅은 생기를 얻었고 미래가 없던 가난한 이들도 풍성한 음식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7○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7-10)

 

공동체를 향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보살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출애굽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공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7-8)

 

7-8절은 출애굽 과정과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앞서 행진하며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과정 중 시내산 등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땅이 지진을 일으키고 하늘이 비와 천둥과 번개를 떨어뜨린 일들을 묘사합니다. 두 군데 모두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용사로서, 이스라엘의 보호자 되신 왕으로서, 또한 사람과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찬송합니다. 1-6절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의 임재와 다스리심에 기쁨의 환호와 찬양의 소리를 내며 반응하였습니다. 7-8절에서는 그들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산들도 하나님의 강림과 그분의 통치 앞에서 떨며 진동하고 하나님을 맞이하며 그분께 순복하였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9-10)

 

시인은 이제 9-10절에서는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단계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신실하게 보살피고 공급해주셨는지를 찬양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흡족한 비를 내리셔서 그의 기업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기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물이 부족한 가나안 땅에 비를 충분히 내려 메마른 땅이 풍성한 작물을 낼 수 있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후자를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성한 비와 양식을 공급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하셨다고 진술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다고 하신 약속(창 17:8)이 이루어졌음을 확증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무리 중 가난한 자를 위해서도 호의를 잊지 않으셨다고 언급함으로써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보호하고 보살피고 공급하심에 대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그 일이 계속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한결같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곤핍할 때 하나님은 비를 주십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백성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기에 우리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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