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시편(067-01)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시편 67편 1-7절


 

하나님의 은혜는 주의 백성에게 영혼의 양식입니다.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겸손한 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악인들은 세상의 욕망과 거짓을 갈망하지만,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마음은 거룩을 향한 마음입니다. 의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거룩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은혜의 빛으로 가능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은혜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일들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이며 재판장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복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민에게서 찬송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1-2)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를 비출 때 어둠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와 평강, 호의와 축복만이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자신을 향한 그 축복을 통해 주의 도와 구원이 온 땅에 알려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생명의 길이 이방에게도 알려져 그들도 자신들의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2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복을 베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과 내용이 흡사하여 이를 떠올리게 합니다(민 6:24-26). 제사장의 지침 기도의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얼굴을 그들에게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얼굴을 그들에게 향하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하는 여섯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1) 주의 복을 구함(1)

 

기도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비추는 모습(1; 시 4:6; 31:17; 80:19; 민 6:25)은 하나님 얼굴의 빛을 드는 모습(시 4:6) 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누군가에게 향하는 모습(민 6:26)과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향하여 보고 계시는 표면적인 모습과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피시는 내면적인 태도를 함축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욥의 머리에 비추었다는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욥 29:3).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이나 등불이 누군가를 비출 때는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게 은혜와 평강, 축복과 호의, 구원 등을 베푸시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시 31:17; 민 6:25,26). 하나님의 빛이 그 사람과 함께한다면 흑암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욥 29:3).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관심과 은혜가 자신의 공동체에 지속되기를 갈망하며 기원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에 반대되는 상황의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누군가로부터 숨기시는행동(시 13:1: 30:7: 사 64:7; 미 3:4)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잊었고 그가 처한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 참견하지 않고 침묵과 무관심으로 반응하시며(시 44:24) 그를 대적처럼 여기신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나타냅니다(욥 13:24).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라도 그분의 은혜를 갈망한다면 우리도 얼굴을 하나님께 들어야 하며(욥 22:26)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24:6; 27:8: 105:4).

 

(2) 만국에 전파될 주의 구원(2)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기원한 시인은 그 결과로 공동체의 안위와 복을 기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 소식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은혜를 특히 하나님의 길(‘도’로 번역됨)과 구원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방향과 방법을 포함한 그분의 말씀이 만국에 알려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고 구원하는 일이 만국에 알려져 그들도 하나님의 길과 구원의 은혜를 구하고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를 갈망합니다.

 

만민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6)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과 지혜로운 통치는 창조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불의가 춤추고 악인이 형통하고 불신이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매번 이 땅 위의 권력은 때가 되면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불의한 권력 앞에서 처세하기보다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의 날을 고대하며, 지금 눈에 보이는 거대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인으로 인정할 때, 우리의 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찬양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3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 5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5)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에게서 ‘모든 민족들’에게로 전파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바다처럼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 높아지기를 하라고 있습니다. 구원의 노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만민의 주 찬양(3)

 

시인은 온 땅에 있는 만국과 거기 사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 시편은 짧게 7절로 구성되었지만 1절을 제외하고 매 절에 ‘땅’, ‘나라’, ‘백성’, ‘민족’ 등 세상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모든’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며, 마지막 7절에서는 ‘땅의 모든 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뛰어넘어 온 세계 나라와 민족을 향한 관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첫째, 시인은 세계의 어떤 나라나 민족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제외되지 않고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줍니다. 둘째, 세계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듣고 그들도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셋째, 온 세계 각 지역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과 감사로 찬양을 드리게 될 때를 재촉합니다.

 

(2) 왕이신 하나님(4)

 

시인은 하나님 찬양의 이유로 그가 세상의 재판장이며 왕이 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어려움에서 그들을 구하실 때마다 그의 은혜와 공의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온 땅 만국의 백성 또한 공평히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은혜의 다스림을 받는 만국은 이에 화답하여 모두 기뻐하며 하나님께 목소리와 악기로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3) 만민의 주 찬양(5)

 

시인은 앞서 3절에서처럼 5절에서도 모든 민족의 찬송을 반복하여 기원합니다. 시인이 만국을 향한 열정을 가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택하셨지만, 그분이 단지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한 백성에게만 찬송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므로 땅의 모든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권능과 지위에 합당한 찬송을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만국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 주시고, 이름을 크게 만드시고, 그가 복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자손과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겠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2:3). 이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 축복과 아브라함을 ‘복’으로 만드시는 최종적인 목적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창 12:3). 다만 여기서 기억할 것은 오늘 시인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자체의 어떤 행위나 성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통해서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통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를 찬양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6-7)

추수는 이 땅이나 자신들의 공이 아니라 이 땅에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내리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땅 끝의 모든 사람이 우리가 누리는 복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찬양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나만 잘 살기 위해 차별과 구별과 배척을 선택하는 세상에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부요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6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시인은 땅이 소산을 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인정합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서 수고와 애씀이 필요합니다. 땅의 소산은 성실히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는 심어도 거두지 못하고, 수고해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1) 주의 복을 구함(6-7a)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공동체에게 내려주신 축복의 예로서 땅이 소산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소산이 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산으로 축복을 주실 것을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건기와 우기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주셨고 파종과 추수에 혜택을 주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셨으며 우박이나 폭풍을 보내지 않으셨고 병충해를 막아주셨고 곡식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셨으며 약탈자나 이방인의 침략이 없게 지켜주셨음을 의미합니다(학 1:10-11;2:15-19; 호 2:22). 이처럼 땅이 소산을 낸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결과입니다(슥 8:12).

 

(2) 만국의 경외를 받으실 하나님(7b)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기도를 시작한 시인은 마칠 때에도 다시금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두 차례나 더 반복하여 말하면서(6,7)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근원이심을 재확인 해주고, 그분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라는 약속(민 6:27)이 이루어지기를 재촉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복 내리심을 통해 땅의 모든 끝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이며 심판주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섬기며 예배하기를 바라봅니다.


징계는 잠깐의 굴복을 가져오지만, 복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추운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은혜의 햇빛은 스스로 마음을 열게 만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나라와 민족이 기쁨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은혜는 햇빛과 같아서 영혼을 자라게 하며, 소생하게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66-02)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인 예배

시편 66편 10-20절


 

신을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창조하셨고,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역사입니다.

 

  •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시련을 주어 시험하시는 것은 그들을 순은과 정금같이 단련하여 하나님의 성결하고 성숙한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회개하여 마음에 죄악을 없애고 서원의 기도를 드리며 구원을 간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였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시험과 인도(10-12)

신앙생활은 만사형통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에게는 고난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 고난까지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이 사라지는 만사형통의 종교가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어 시험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시인은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것은 은금과 같은 광석을 뜨거운 용광로에 넣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타오르는 용광로에서 광석에 붙어 있거나 들어 있는 철과 흙 등 불순물이 다녹으면 단단하고 조잡했던 광석이 순도 높은 값진 보석으로 탄생되어 나오듯이, 사람이 연단을 받는 동안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기간을 견디고 나와 성결하고 성숙한 믿음과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언약으로 맺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의 언약에 순종하여 ‘보배와 같은 그의 소유’이자 ‘제사장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출 19:5-6).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물과 같은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고 고난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는 시기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역경 중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거리에 일렬로 눕혀 그들의 등을 도로처럼 만든 후 말이나 병거를 타고 그들을 짓밟고 지나가게 하신 일도 있었다고 시인은 증거합니다. 시인의 이런 표현은 원수들에게 당한 짓밟힘의 비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는데(사 51:23; 수 10:24), 여기서 시인이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적들에 의해 패배하였고 그로 인한 수모와 굴욕을 당했으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과 물을 통과였다고 말합니다. ‘불과 물’은 앞서 언급한 홍해나 요단을 건넌 사건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고 여러 종류의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든, 시인이 전달하려는 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온갖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연단하셨고, 결국은 그들을 고난에서 건져 안전하고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단한 후 하나님의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하셨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연단과 구원은 이스라엘이 물과 불 속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물이 그들을 쓸어버리거나 불꽃이 그들을 사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사 43:2)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인이 선언하였듯이(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음을 증명해줍니다.

 

서원을 갚는 시인(13-15)

서원은 조건이나 거래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고난은 영혼에 아픔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심으로 영혼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입술의 고백은 온 천하에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13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13-15)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주신 일을 증언하며 계속 사람들을 찬양에 초대합니다. 시인은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므로 그에게 서원을 갚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포합니다. 시인은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입니다”(14)라고 ‘내 입술’과 ‘내 입’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며 하나님께 서원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청중 앞에서 확실히 밝힙니다.

시인이 서원을 갚는 데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먼저, 서원을 한 경우 서원을 갚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민 30장)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서원을 이행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 즉, 그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도 순종입니다(신 12:11-14). 셋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이때 시인은 번제의 희생 제물로 살진 짐승들인 숫양들, 수소와 염소들을 드린다고 진술합니다. 이 살진 짐승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합한 질 좋은 제물임을 나타내며, 더구나 이 제물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조건인 한 마리의 소나 양이나 염소(레 3장; 22:18-23 참고)보다 더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 이런 점들에서 시인이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으며 그에게 아낌없이 드리기를 원하고 그렇게 드리려고 작정했음이 잘 나타납니다. 넷째, 제물의 연기(‘향기’로 번역됨)에 대한 언급에서 시인의 순종이 드러납니다. 이 연기는 제단의 불 위에서 제물을 태워(화제)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로서 시인이 서원제에 적합한 방법으로 제사(레 3:3)를 드렸음을 보여줍니다. 화제는 또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레 3:5, 16)이므로 예배자인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참회, 겸손, 감사, 환대, 헌신과 하나님께서 시인을 용서하고 제사를 받으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16-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소리에 속지 않으십니다. 기도자의 중심으로 보시고 깊은 생각까지 판단하십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은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고난은 마음속에의 쓰레기를 치우고 영혼을 맑게 하십니다. 고난을 체험한 성도는 믿음이 더 깊어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16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16-20)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입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혀로 찬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죄를 묵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입니다. 그 후에야 응답된 기도가 찬양으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찬양에 초청 (16)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화답의 표시로 서원제를 드리겠다고 선언한 시인은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간증을 전하려 합니다. 앞서 “와서 보라”(5)고 했던 것처럼 시인은 이제 “와서 들으라”(16)고 하며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때 초청을 받은 자들이 보고 듣게 될 내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과 구원의 일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다른 점이라면,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베푸신 일을 진술하는 반면 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인 한 사람에게 하신 일을 진술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두 군데 모두 초청을 받은 자들에게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그들이 시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능력과 구원의 왕이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시인의 간증(17-19)

 

시인이 그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를 찬송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마음에 어떤 죄악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며 죄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회개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간구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겸손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인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이셨고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고 보살피시는 분이며 곤경을 주어 연단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점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증명되었습니다.

 

(3) 하나님 찬양(20)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1)고 외치며 시를 시작한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 찬양을 촉구하며 시를 마감합니다(20). ‘하나님께서 송축 받으시리로다’라는 그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찬양받기에 마땅하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 외침은 이미 8절에서 만민을 향해 ‘하나님을 송축하라’는 시인의 촉구에 대한 화답으로도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는 온 땅(1,4)이나 만민들(8)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대상임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두지 아니하신 점을 들어 감사하는데, 이 두 가지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의 하신 일과 성품을 표현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즉, 인애와 성실, 긍휼 등의 성품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역으로, 이러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동과 성품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일치되어 나타납니다. 덧붙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하고 견고한 왕국을 약속하셨을 때 그의 인자하심을 다윗으로부터 거두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신 후 다윗의 왕국과 그의 왕좌가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셨듯이(삼하 7:15-16), 이제 시편 66편에서도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인자하심을 계속적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시작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분이 우리를 만나주셨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예배와 찬양은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 응답을 받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과 예배의 감격을 회복할 때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66-01)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시편 66편 1-9절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무엇보다도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조성하셨고 지금도 유지하고 계시고 때문입니다.

 

  • 온 땅에 사는 만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놀라온 권능의 역사를 베풀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와 거기에 사는 백성 모두를 다스리고 보살피시려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을 찬양하라(1-4)

때로는 기쁜 소리를 높여서 찬양해야 하며, 때로는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의 역사에 믿음으로 참여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입술의 찬양이나 기술적인 찬양에 그치지 않고 우리 전체로 찬양하고 온 삶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대적을 이기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 방식입니다.

 

1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1-4)

 

시인은 온 땅 즉, 온 땅에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그가 단순히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몇몇 사람이나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명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를 포함한 우주의 왕이라는 점이 함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온 세계와 우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도하는 자, 세계를 품은 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서 다양하고 적절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먼저, 즐거운 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말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며 함성을 외치듯, 승리의 환호를 지르듯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기쁨으로 외치라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또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되 영광스럽게 찬양해야 합니다. 여기서 찬양은 악기로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시인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언급하고 또한 영광스럽게 찬양하라고 요구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름이란 그 소유자의 존재와 능력과 성품 등을 다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서 그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구실을 합니다. 시인은 만민이 그의 초청을 받아들이되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도 모른 채 찬양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그의 왕 되심, 전지전능하심, 거룩하심, 정의와 은혜 등을 떠올리며 그가 우주의 왕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가 만민의 영광과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분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한 찬양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 영광스러운 찬양이 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그에게 아뢰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놀라운(엄위한'으로 번역됨) 일과 그에 수반된 결과를 찬양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와 능력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능력의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도 자기를 높이지 말고 승리의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경배하다’는 ‘절하다’라는 뜻이므로 온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를 노래해야 합니다.

 

와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라(5-7)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고 구원자이심을 깊이 깨닫기 원합니다. 그러면 온 맘 다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5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셀라)(5-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갈라진 홍해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하신 일입니다.

 

(1) 시인의 명령:와서 보라(5a)

 

시인은 온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와서 직접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경험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선택하여 특별히 보호하고 구원하셨지만, 그가 온 세계의 왕이시므로 궁극적으로 만민을 돌보고 구원하실 것임을 그들이 분명히 알고 체험하기를 시인은 소망합니다. 시인은 3절에 언급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예로 사람들이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한 사건을 듭니다. 여기서 바다가 육지가 된 일과 사람들이 강을 걸어서 건넌 일을 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각각 홍해와 요단을 건넌 두 사건으로 읽는 것도 적절합니다. 유사한 용례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된 시편 114편에서도 나오는데, 이때 시인은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바다가 보고 도망하였고 요단은 물러섰다…바다야 네가 왜 도망하느냐 요단아 네가 어찌 물러서느냐”(시 114:3,5)라고 노래하며 홍해와 요단을 건넌 사건을 언급합니다.

 

(2)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5b-7)

 

시인이 실제 일어났던 나님의 행사를 진술하는 주된 목적은 온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지,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아 그분에 대한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을 갖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과거에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출 14:31). 시인과 그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시 66:6). 이때 6절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변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강을 그들이 걸어서 건넜다’로 번역되며, 그 다음 문장은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로 번역되었지만(개역개정) 문자적 번역은 ‘거기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자’입니다. 앞의 번역을 따르면 시인과 공동체가 기적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기뻐했다는 의미로 또는 과거의 기적 사건을 기억하며 그 장소에서 기뻐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의 문자적 번역을 따른다면, 시인이 청중에게 과거 기적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자고 요청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번역과 해석이든 여기서 시인이 확실하게 진술하려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구원을 베푸셨다는 점과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시인과 모두의 기쁨이 되신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런 놀라운 사건을 통한 하나님 찬양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온 땅에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백성에게 행하신 일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가 능력의 왕이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여 그들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일 가운데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나 과학을 뛰어넘는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신다. 동시에 인애와 정의를 비롯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눈앞에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시는데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믿기를 거부하거나 머뭇거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과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시인의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을 완악하고 고집 센 반항자라고 칭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살피고 계시며, 그의 다스리심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하나님께 도전하여 반역하기를 그치라는 시인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라(8-9)

 

능력으로 영원히 온 나라들을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온 나라들을 살펴서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들의 영혼을 살려두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은총을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신실하신 구원과 보호의 역사입니다.

 

8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8-9)

 

인생 가운데 고난의 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을 고난의 불 속에 넣어 담김질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성숙하도록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1) 시인의 명령:하나님을 송축하라(8)

 

능력의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해야 하는 것은 온 세계 백성의 의무입니다. 시인은 재차 세상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이번에 시인이 언급하는 하나님 송축의 이유는 그가 생명을 제공하고 주관하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의 생사가 하나님께 달려있었듯이 현재와 미래에도 인생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특히 그의 백성이 어려움과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구원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권위와 능력으로 백성을 강압적으로 눌러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복종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의 실족함 즉, 발이 흔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표현하는데, 이때 실족함이란 어려움이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이 흔들릴 때 도와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발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랑의 마음과 능력과 강한 의지를 이미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2)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9)

 

하나님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고 그가 주시는 안전과 보호를 체험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이 특권을 그의 성도만이 아니라 만민이 함께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고대합니다. 시인처럼 온 세계 만민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으로 세계를 다스리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를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는 날을 우리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계 7:9-12; 19:6).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백성을 보살피십니다. 악이 강하고, 세상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65-01)

 

 


온 땅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복

시편 65편 1-13절


 

최고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수고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감사와 애정을 표현할 때, 그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추수를 마치고 성전을 향해 감사의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이들의 찬양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과 온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이 충만하게 나타나길 바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시편 65편은 하나님의 통치 행위를 묘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4)에서는 시온에 위치한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후반부(5-13)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시온산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열방의 모든 부분에 동일하게 적용됨을 알려줍니다.

 

시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1-4)

 

상황이 변해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신뢰의 표현이며,큰 성취 앞에서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그분께 대한 진정한 감사의 표현입니다(1절). 죄는 하나님의때를 신뢰하지 못하고 악인의 때를 좇을 때 범하게 됩니다. 사죄의 은총의 시작은 기다림입니다. 소극성입니다. 주님의 처분을 관대하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1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1-4)

 

먼저 1-4절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 시편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시온 중심성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1) 시온에서 하나님을 찾음(1)

 

‘시온에서 잠잠함이 주님께 찬양이 된다’고 고백하면서 1절은 시작합니다. 시편 62편 말씀을 다시금 읽는 듯합니다. 그런데 왜 ‘잠잠함이 찬양이 된다’고 고백했습니까? 물론 ‘잠잠함이 찬양이 된다’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이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시편 65편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시온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서원을 주께 이행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2) 시온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능력(2-3)

 

2-3절에서는 시온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의 합의입니다. 그 함의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악이 사람보다 강하기에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악들보다 더 강하시므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시온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시온에 거하는 복(4)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권세를 말한 후, 4절은 주의 뜰에 살게 된 사람은 복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며 기도하면 모든 은총을 얻어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절 하반절은 ‘우리가 주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합니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죄 사하심의 권세를 높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피조세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5-13)

추수란 하늘의 것을 이 땅에 가져오는 일입니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성도의 감사와 찬양이있으니,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온 땅에 나타납니다. 이제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늘의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2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5-13)

 

1-4절의 내용은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온 성전에 대한 메시지로서, 독자들에게 크게 새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65편은 매우 특별하게도 이러한 성전 중심의 메시지를 피조세계 전체를 위한 메시지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대의 방향성이 바로 5-13절에 나타납니다. 시온에서 다스리시며 용서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피조세계 전체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1)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5)

 

5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역사가 매우 놀라움을 고백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한 지역인 시온 성전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펼쳐집니다.

 

(2)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6-7)

 

6절은 주님께서 권능으로 띠를 띠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능’이라는 단어는 ‘게부라’라는 단어로 3절에 나오는 ‘이기다’라는 단어의 원어인 ‘가바르’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즉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는 곧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의 ‘산을 세운다’는 표현과 7절의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을 진정케 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산이 높이 올라오게 하시고,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셔서 육지를 만드신 장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민의 소요를 진정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만민’이란 ‘민족들’ 혹은 ‘열방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민의 소요를 진정시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심을 뜻합니다. 창조주로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섭리주가 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시I(8-10)

 

8-10절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표현합니다. 8절에서는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이 즐겁게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원문을 보면 ‘아침과 저녁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이 즐거워 외치게 된다’입니다. 따라서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 즉 하루하루의 삶이 복되고 즐거운 시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시며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9-10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복되게 하심을 묘사합니다. 땅에 물을 주시고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곡식을 허락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말합니다. 밭고랑과 밭이랑에 물을 주시며 필요에 따라 때를 기억하여 비를 주시는 은총이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8절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시간적 영역을 복되게 하심을 말했다면, 9-10절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공간적 영역을 복되게 하시고 그 공간을 은총으로 채워주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시Ⅱ(11-13)

 

11-13절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예시를 이어갑니다. 특별히 11절에서는 ‘주께서 선한 것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루하루의 시간을 복되게 하셨음을 말했는데, 이제 11절에서는 ‘한 해’를 복되게 하심을 말하면서 더 깊은 주제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한 해를 주신다는 것 역시 시간적 영역에 은총을 주신다는 의미인데, ‘관 씌우신다’는 표현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의미를 추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하십니다. 5절이 말한 대로 ‘놀라우심’은 하나님께 속한 특징인데,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이제 피조세계 속에 넘치도록 역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2-13절은 공간적 영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함을 다시금 묘사합니다. 들의 초장에 하나님의 기름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며, 초장은 양 떼로 덮이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이게 된다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피조세계의 공간들이 가득히 넘치게 되는 장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편 65편은 시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곧 피조세계 전체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시온은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현하는 모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역이 단순히 한 시간이나 한 공간이라는 제한을 두지 말고,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땅 끝까지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들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뢰와 감사와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시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질서 있고 조화로운 안식의 사람, 샬롬의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빚어주실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64-01)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의 존재

시편 64편 1-10절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고 똑똑하고 과학이 발달한 첨단의 시대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금만 힘이 생기고 소유가 늘어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착각합니다.

 

 

  • 본 시편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며(1-2), 악인들의 계획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고(3-6),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용사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 후(7-9), 의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찬양하는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0).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 요청(1-2)

세상은 큰 울음소리도 흘려듣지만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고통당하는 백성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악인의 계략에서 건져 주십니다. 은밀히 공격하는 대적들에게서 ‘숨을 곳’이 되어주십니다. 그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숨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1-2)

 

시편 64편은 하나님께 대한 구원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라며 하나님을 부르고, 원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과연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는 것입니까? 그 내용이 2절에 간략하게 등장합니다. 악을 꾀하는 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들의 계획 때문에 시편 기자는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까지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묘사(3-6)

원수들의 무기는 칼처럼 날카로운 혀와 화살같이 독한 말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딥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과 비방으로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사냥꾼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예고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러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악인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정려하고 힘을 합쳤습니다.

 

3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6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3-6)

 

1-2절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 후 시편 기자는 이제 3-6절에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악인들에 대한 집중적인 묘사를 제시합니다. 먼저 3-4절은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3절은 악인들이 입으로 펼쳐내는 언사가 칼과 같고 화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칼과 화살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이며, 다른 이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됩니다. 따라서 악인들이 칼과 화살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악인들이 의인들을 죽이기 위한 말을 한다는 뜻이 됩니다. 4절은 이에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악인들은 그 독하고 악한 말을 칼과 화살과 같이 사용하되, 숨은 곳에서 갑자기 자신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 사람을 겨냥해서 씁니다. 즉 악인들이 하는 말은 의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의인들을 억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하는 악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 일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7절 이하에 내려가면 명확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5-6절은 악인들에 대한 묘사를 이어갑니다. 3-4절이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5-6절은 그런 악한 말을 하고 있는 악인들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5절에서는 악인들이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격려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격려합니다’는 말은 ‘강하게 합니다’는 뜻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강하게 붙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이것이 악인들의 정체입니다. 악한 일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하고 뭉치는 것이 바로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하려고 하는 일은 바로 ‘몰래 올무를 놓는 일’입니다. 원어를 보면 ‘올무들을 놓는다’라고 복수형태를 사용합니다. 즉 길을 올바로 잘 가고 있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올무를 여러 개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이것들을 보리요’ 하면서 의인들이 올무를 보지 못하여 그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속마음은 6절에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악한 계획을 꾸며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습니다’라며 기뻐합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행태를 향해 시편 기자는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다’고 한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곳까지 죄악으로 물들어 있기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역사와 죄에 물든 생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7-9)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맘 놓고 거만하게 떠들던 악인들의 입은 닫히고, 탄식하며 기도하던 의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즐거운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그들의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그들이 친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어 조롱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7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8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9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7-9)

 

이제 7절부터는 3-6절에서 언급한 악인들이 어떤 최종적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화살로 쏘신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화살로 쓴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4절에서 악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과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악인들은 의인들을 악한 말이라는 화살로 쏘아 넘어뜨리려 했으나, 정작 화살을 맞아 넘어지게 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악인들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인들을 향해서 화살을 쏘시는 분은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은 이러한 악인들이 맞게 되는 멸망이 바로 자신들의 악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이 엎드러지나니’라는 말은 ‘그들이 그를 엎드러지게 하나니’라는 뜻으로, 악인들이 스스로를 엎어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혀는 그 자신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3-4절에서 의인을 상하게 하려고 악한 말을 꾸며냈는데, 그 악한 말이 악인들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인들을 보는 자들이 다 머리를 흔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악인들이 받는 형벌을 보고 만족스러워하거나 혹은 그 형벌로 인해 놀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악인들이 받는 벌을 보고 놀라서 도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의인을 넘어뜨릴 줄로 예상되었으나, 놀랍게도 악인들 자신에게 그대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이러한 모든 일의 결과,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앞서 4절에서 악인들은 온전한 의인들을 향해 화살을 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악인들이 맞는 종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을 그 악인들에게 갚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10)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생각을 좇아 삽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반면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10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64편의 마지막 구절인 10절은 ‘의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64편에서 ‘의인’이라는 단어는 10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오직 ‘악인’ 혹은 ‘악을 꾀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해 왔습니다. 악인에 반대되는 말은 4절에서 ‘온전한 자’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10절은 64편의 마지막 구절로서, 악인들의 계획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졌지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의인’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그 앞을 막아서는 간교한 악인들의 계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도우심을 기대하고, 악인들과 싸우시며 그들의 악한 계획을 물리쳐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마음이 정직한 자 곧 마음이 올바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악인들의 계획을 만나게 될 때, 64편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악인들의 악함을 물리쳐주시고 의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믿으며 담대한 신앙으로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우리를 공격하고 힘들게 해도,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악인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악인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무지(無知)만 못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63-01)

 


광야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 63편 1-11절


 

인생은 고단합니다. 산을 넘으면 강을 만나고, 강을 건너 한숨 돌리면 깊은 계곡, 메마른 광야를 만납니다. 인생의 어느 한순간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 시편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윗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이 서론 역할을 하며, 11절이 결론 역할을 하는데, 그 중간에 나타난 2-10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다윗의 신앙을 묘사해줍니다. 다윗은 과거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자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를 멸하여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다(1)

하나님께서 고난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고 다시 성소로 돌아가 감격의 제사를 드릴 것을 소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이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절망 중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본 시는 다윗은 대적에게 쫓겨 유다 광야에 피신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기도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것이 우리가 시편 63편에서 찾아내야 할 주제이다. 다윗은 물이 없어서 마르고 지치는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광야에서는 물을 갈망하게 되는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은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사모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신앙이 가능할까? 다윗은 2절부터 자신의 이러한 신앙의 이유를 풀어나간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던 과거의 모습(2)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곳이 이미 성소입니다. 삶이 유린되고 일상의 무너진 시공일지라도 기도하는 곳은 어디든 성소입니다.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비롯 그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다윗은 자신의 과거 신앙을 회상합니다. 비록 지금은 광야에서 원수에게 쫓기고 있으나, 과거에 자신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지금도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회상하는 과거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해 성소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모습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모습인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I(3-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자에게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이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

 

이렇게 과거에 하나님께 제사로 예배드리던 모습을 회상하면서, 다윗은 매우 중요한 한 단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은 사무엘하 7:8-16에 나오는 다윗 언약의 결론부(삼하 7:15)에 나오는 단어입니다(개역개정에는 ‘은총’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헤세드’이다). 다윗 언약에서 인자하심은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뜻합니다. 즉 다윗 가문이 비록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인자하심’은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다윗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원수에게 쫓겨서 광야에 와 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윗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주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게 할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은 다윗이 평생에 하나님을 송축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임을 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므로,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Ⅱ(5-8)

우리는 물질의 축복을 늘 갈급해합니다. 그렇다고 축복의 기준이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물질의 욕심에 끌려 수많은 우상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신들 속에 파묻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5-8)

 

5-8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고 기대하며 찬양해야 할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5절 상반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이 기름진 것을 먹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기름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기름진 것과 만족의 주제는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광야의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지금은 광야에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모함과 신뢰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부터 6절까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5절 하반절은 다윗이 기쁜 소리로 주님을 찬양함을 말하며, 6절에서는 밤에 침상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밤이 새도록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다윗의 모습을 그립니다. 7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기뻐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7절 상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이 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광야라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기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5-7절에서 다윗이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은 광야라는 주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있지만 광야에 매여 있거나 광야로 인해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은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다윗을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어주신다고 표현합니다. 광야에서 즐거워하며, 고난 가운데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역사를 일으켜주심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멸망(9-10)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심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합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도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9-10)

 

이미지와 이어지는 9-10절은 다윗을 죽이려는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9절과 10절은 모두 상반절과 하반절을 대조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영혼을 멸하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9) 다윗을 칼에 붙이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광야에서 승냥이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10). 지금은 광야에서 다윗이 죽게 될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모든 일들은 새롭게 전환되어 오히려 다윗은 살아나고 대적들이 죽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땅입니다. 그 전환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왕(11)

광야는 시인을 절망에 빠뜨리지 못합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만을 따르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광야는 세상에서 버려진 자가 하나님을 얻는 곳이고, 헛된 것에서 멀어짐으로 참된 것에 가까워지는 곳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소가 아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장소입니다.

 

11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

 

본 절은 63편의 결론으로, 1절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왕’이란 물론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왜 ‘나’라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까? 바로 자신의 상황을 더욱더 객관화하기 위함입니다. 1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관계성을 표현했다면, 11절에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왕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관계임을 서술합니다. 광야에서조차 하나님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즐거워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객관적인 관점에서 담담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맹세하는 자는 자랑하게 될 것이지만,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으로 인해 맹세하는 자’란 63편 전체에서의 다윗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기대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지 않고 자 것입니다.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자는 그 입이 막히게 다윗은 하나님 편에 섰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뿐 아니라 앞으로도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면서 기쁜 소리를 외치는 감격을 계속해서 맛보게 될 것입니다.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신뢰의 노래를 불러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광야는 절망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광야와 같은 삶을 힘겨워합니다. 그 이유는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메마른 인생에도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걸어가도 영혼이 만족하여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60-01)


절망에서 승리로 나아가려면

시편 60편 1-12절


 

승리에 익숙한 사람과 실패에 익숙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승리에 익숙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어떤 실패를 만나도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덤덤합니다. 공부하기를 포기한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아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적을 높이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일등인 인생은 작은 실수에도 크게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발판으로 해서 더 열심히 보완하고 노력합니다.

 

 

  • 가나안 정복 전쟁의 상황에서 패배하여 다윗이 주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우리를 버리셨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시인합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선언합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애통과 간구(1-5)

환난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의 원인이 나태, 무분별, 무지 때문일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해결책은 하나,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승리의 깃발을 주셔서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4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5○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1-5)

 

시인은 하나님을 부른 후 곧바로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흩으셨습니다. 주님이 분노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도 없고 접속사도 없이 연이어 나오는 세 개의 동사로 자신들이 당한 상황을 하나님께 탄식하며 몹시 괴롭고 힘든 것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주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버리셨고 그 결과 그들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숴져 버렸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잘못한 자녀를 회초리로 때리는 어머니 품으로 자녀가 뛰어들 듯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2-3절은 주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주께서 지진이 나게 하셔서 땅이 흔들리게 하시고 갈라지게 하셨습니다(2). 지진으로 인해 땅이 흔들림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시 18:7; 46:3,6; 사13:13; 24:18–20). 시인은 하나님께 갈라진 틈을 메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지진은 전쟁에 대한 비유로, 땅이 갈라짐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혼돈과 좌절과 낙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은 이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고 합니다(3).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것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쓰러지는 비참함을 표현합니다.

 

4절은 여러 다른 번역들이 시도되고 있으며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고 했는데 “진리를 위하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단어는 ‘화살’로 보고 ‘달게 하다’는 ‘피하다’로 본다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활쏘는 자) 앞에서 피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3절의 내용에 애통이 나오고 간구가 나온 형식에 따라 4-5절도 애통(4)에 이어 간구(5)가 나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도움을 주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셔서 화살을 피하게 하셨다.’이처럼 이런 구원의 경험에 비추어, 주께서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주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호소(6-8)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는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붙잡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을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삶도 쉬워집니다.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들어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지라도 승리의 확신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승리의 가능성은 확실히 커집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받고 다윗이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6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7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8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6-8)

 

시인의 “응답하소서”의 간구가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다’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패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함으로 하나님께 구원과 승리를 요청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이 다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고 합니다.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한다는 것은 땅을 나누고 분배하여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장소이고 숙곳은 요단 동쪽에 있는 얍복강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세겜과 숙곳이 왜 언급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스라엘 북쪽 지역의 요단 동편과 서편의 땅 전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길르앗과 므낫세는 요단 동편 땅 전부를 가리킵니다. 길르앗 남쪽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차지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이고 유다는 남유다의 중심 지역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지역입니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라는 명칭이 붙습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전쟁 장비요 규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휘봉이라면, 에브라임은 방어를 유다는 공격을맡는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 주위의 주요 나라인 모압, 에돔, 블레셋이 언급됩니다. ‘모압이 나의 목욕통이라’는 것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돌아와 몸을 씻을 때 씻을 물을 가져오는 종의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모압이 정복됨을 암시합니다. ‘에돔에 나의 신발을 던진다’는 것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블레셋에게 ‘외치라’는 것은 패배로 인한 두려움으로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9-12)

생각이 행동을 규정짓지만 때로는 행동이 생각을 규정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생각이 짧아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패들이 큰 성공을 위한 학습과정이 되고 디딤돌과 발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생각만큼 좋은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처럼 승리의 확신과 승리의 기도만큼 승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9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9-12)

 

6-8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이스라엘의 영광된 모습과 대비되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곤경이 묘사됩니다. 9절에서 “나”는 시인을 가리키며 시인은 왕으로 보입니다. 9절과 10절에 의하면 왕이 에돔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돔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옵 3), ‘누가 난공불으로 보이는 성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궁극적으로 그 답은 여호와입니다. 이 진리 앞에 시인이 다시 한번 탄식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군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에 대한 경험은 주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과 확신을 가져옵니다. 시인은 구원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11절과 12절은 “대적”이라는 말로 서로 연관되어 뿐 아니라 교차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11절 상반점과 12절 하반절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그는 우리의 대적을 밝으실 이심이로다.” 11절 하반절과 12절 상반절은 인간의 도움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 대조적인 평행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구원은 첫됨이니이다//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승리를 위해 시도하는 인간의 모든 전략과 전쟁 기술과 무기와 군사에 따른 전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막강해도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대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과 함께 씩씩하게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전쟁의 패배로 인해 생긴 국가적 곤고함과 굴욕의 시기 동안에 드려지는 백성들의 기도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절과 유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절로 인한 패배의 경험은 백성들의 믿음과 방향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자신들에게 재확신시킵니다. 시인과 백성이 여전히 고통스런 상황에 있지만 그들의 전망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단념하고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의존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둡니다.


살다 보면 때로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패배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3가지 승리의 재료를 더해야 합니다. 바로 ‘승리의 확신, 승리의 기도, 승리의 행동’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수단과 방법만 의지하지 마십시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59-01)


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시편 59편 1-17절


 

항상 가시 같은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 가시는 성가시고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그 가시가 깨끗하게 정리되고 없어졌으면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 가시가 있는 것이 때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됨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과연 악인들을 보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 시인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악을 행하며 피 흘리기를 즐기는 강한 자들이 매복하고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힘과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찬양합니다.

 

도움을 위한 간구(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억울함, 부당하게 조롱과 핍박,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감수하는 손해 등을 아십니다. 성도가 부당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이유, 아무리 암담해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소망을 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셀라)(1-5)

 

1-2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며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때 네 가지 대적에 대한 표현과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가 나옵니다. 대적은 “나의 원수”, “일어나 치려는 자”, “악을 행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이 표현들은 대적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임을 보여줍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문자적으로 ‘피의 사람들’로서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폭력도 사용할 수 있는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나를 건지시고”(x2), “나를 높이 드소서”, “나를 구원하소서”입니다. ‘높이 들다’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다’는 의미입니다. 대적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다 복수형일 뿐 아니라 네 번 반복함으로 대적이 강력하며 시인의 상황이 매우 위협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간구 역시 네 번 반복됨을 통하여 시인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간청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3절과 4절 상반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로 대적들의 공격적인 행동이 묘사됩니다. 원문에서는 3절 앞에 간구의 이유를 표현하는 ‘왜냐하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보소서”가 나옵니다. 이는 대적으로 인해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하나님께 대적들의 행동을 주목해서 보시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회를 노려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는 것입니다. 이 대적들은 강한 자들이며 시인을 치려고 모여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해치기 위해 함께 매복해 있는 위급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대적에 대해 어떤 잘못이나 죄나 허물이 없음을 천명하며 죄에 대해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합니다. 시인에게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적들이 달려와서 시인을 칠 준비를 하는 적극성과 자발성을 보입니다. 시인은 무죄한 가운데 억울하게 공격을 당한다고 항변하며 자신을 돕기 위해 일어나 살펴주시기를 구합니다.

앞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구한 것과 달리 5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심판과 악을 행하는 모든 자의 심판을 구하면서 개인을 위한 기도에서 공동체를 위한 간구로 나아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깨어 일어나셔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행동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고 징벌하시기를 구합니다. 왜 시인이 자신의 위급한 상황에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자들의 심판을 구하고 있습니까?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합당하지 않은 행동이요 믿음이 없는 세상의 악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6-7)

세상은 그 어떤 것도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살아가면서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평소에 의지하던 대상은 다 무너지고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6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6-7)

 

시인이 대적들의 위협을 들개의 영상으로 다시 묘사합니다. 그들은 마치 들개처럼 밤에 나타나서 울며 성을 돌아다닙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암시하며, 밤에 울부짖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다’는 것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는 들개들처럼 대적들이 거리에서 떠들어대며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도시를 자기들 세상으로 만들고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즐기며, 거침없이 떠들어대고 말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위협하여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듣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 심중 깊은 곳에 어느 누구도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고 제지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시 10:4; 14:1; 53:1; 73:11; 94:7).

 

신뢰의 고백(8-10)

성도들은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연결성과 연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해야 합니다. 한순간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쉬지 말고 헌신과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8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8-10)

 

시인은 대적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고 하며 그들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시 10:4)하는 교만한 세상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시 2:4;37:13). 시인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며 요새이니 내가 주를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강한 대적들이 나를 죽이려 매복했지만 대적보다 강한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며, 대적들이 온를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는 요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계심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나를 맞아 주시고 앞서 가며 대적들을 물리쳐서 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11-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원수를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그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보응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한과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11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11-13)

 

대적들이 보응받는 것을 확신한 시인이 대적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구합니다(11).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잊지않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기 위해 죽이지 말고 그들을 흩으시고 낮아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대적들이 죽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낮아져서 과거에 함께 모여 강하고 교만했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셨음을 생생히 보여주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분임을 시인이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대적들의 입과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죄입니다(12). 그들은 교만하여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고 거짓말을 하므로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악인들이 멸망을 당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3).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이스라엘에서 드러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14-15)

성도의 삶은 탄식으로 시작해도 찬송으로 끝납니다. 억울함으로 시작해도 감사의 찬송으로 뒤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과 방패와 피난처와 요새와 구원이 되십니다. 다급하게 부르짖던 다윗의 탄식의 기도는 이번에도 역시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14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14-15)

 

부분에서 6-7절에 나왔던 대적들의 들개 영상이 다시 나타납니다. 14절은 6절과 동일하나 15절의 내용은 7절과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먹을 것을 찾는 배고픈 들개로 그립니다.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이 부분에서 다시 대적을 언급하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과 나아가 악인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고 있지만 대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가까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신뢰의 고백과 찬양(16-17)

다윗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며 위험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을 의뢰할 때 오히려 자기 대적들보다 훨씬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평안입니다.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

 

 

시인은 아침에 주님의 힘과 인자하심을 높이 노래하겠다고 말합니다. 밤새 돌아다니는 들개와 같은 대적의 위협을 받았던 시인이 죽음과 공포의 밤을 보내고 생명과 구원의 시간인 아침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의 내용은 여호와는 요새요 피난처이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지혜롭게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인들을 벌하기는 하시지만, 죽이지는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 또한 예수님처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성도가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58-01)

 


악한 통치자들을의 이를 꺾으소서

시편 58편 1-11절


 

악한 세상을 보며 낙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아도 별 변화가 없을 때에는 솔직히 절망에 빠지고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셨다거나 세상에 무관심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견해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악한 통치자가 정의롭게 재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과 폭력을 행함으로 사회에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시인이 탄식하며 악한 통치자들을 책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들을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보상해주실 것을 확신하고 사람들이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탄식과 책망(1-2)

성경은 사회지도층의 범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부분이 없는지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을 가진 자들의 부패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으심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1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1-2)

 

시인은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사람의 아들들아, 너희가 정말 올바르게 판결하느냐?’고 물으며 시를 시작합니다. 권력을 가진 왕들, 통치자들, 지도자들은 재판이 바르게 이루어져 사회에서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서로가 ‘옳다 그르다’하는 시비가 붙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여 해결이 나지 않을 때, 최종적으로 시비를 가르고 그 결정을 양편이 다 받아들이게 되는 최고의 권위가 재판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재판은 그 나라의 도덕의 척도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하는 지도자들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정의를 세우고, 또한 부자든 가난하든 힘 있는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판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 나라는 중심에서부터 부패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은 1절 질문의 대답이 ‘아니다’임을 전제하고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고 땅에서 손으로 폭력을 달아준다.’고 말합니다. 중심 곧 마음은 내적 생각을, 손은 외적으로 실제 행함을 말합니다. 이들은 마음속에서 악을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세상에서 악을 행합니다. 악행에 대한 최후의 보루인 재판정에서도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달아주는 저울이나 저울질하는 것은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는 재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달아준다는 것은 재판이 폭력을 일삼는 곳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회 전반에 온갖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인한 악들이 횡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모습에 대한 비유(3-5)

세상에는 어디든 불의한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그 세력이 나라나 공동체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세력은 때로 뱀의 독처럼 치명적이고, 사자의 어금니처럼 강력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에 대해 감히 대적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그 어둠의 세력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인 첫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3-5)

 

3절은 악한 통치자들로 인해 사회에서 악이 횡행하는 것을 통해 악인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그려봅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갔다.’ 이 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악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 악한 본성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시작할 때부터 악으로 물들어 있어 악과 거짓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악과 거짓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존재의 시작부터 악과 하나 된 악인들의 모습을 뱀과 독사로 비유합니다(4). 악인들이 품고 있는 악은 마치 뱀의 독과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뱀의 독처럼 악인들이 뿜어내는 악한 영향력은 사람들을 죽이고 치명적인 해를 끼칩니다. 또한 악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다고 합니다. 귀를 막았다는 것은 일부러 듣지 않고 불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을 강조합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는 술사가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듣지 못하고 능숙한 술객이 주문을 외우고 요술을 부려도 따르지 않습니다. 술사나 술객은 피리 소리와 요술로 무서운 독사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다룹니다. 그런데 독사가 귀머거리라면 술사가 아무리 능숙하다 할지라도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이 귀머거리 독사와 같습니다. 아무리 지도자들의 특권과 책무와 위치와 역할의 중요함을 말한다고 해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경고나 책망, 권면이나 회의 그 어느 것도 듣지 않아 그들을 설득하고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악을 행사하여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의 규정인 율법을 지킬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의 규정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듣고 배울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을 때 결국 자기 마음속의 악한 본성이 계획한 대로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6-9)

아무리 세상에서 큰 권세와 힘을 가진 자라 해도 하나님께서 한 번 일하시면 결국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의 불의한 힘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에라도, 우리에게는 그들의 모든 모의를 무효로 돌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6-9)

 

시인이 이런 악한 통치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6a). 먼저,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어달라’고 기도합니다. 5절의 독사를 연상하여 이를 말한 것인지 6절 하반절의 젊은 사자의 어금니와의 평행 속에서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는 악한 통치자들이 악과 폭력을 행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내시기를 구합니다. 젊은 사자에게 있어서 먹잇감을 사냥할 때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 어금니인데, 이것을 꺾는 것은 그의 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통치자들에게서 그들의 악한 영향력과 힘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7절에서는 악인들이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고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급히 흐르다가 사라지는 물은 여름철에 말라 있다가 우기에 갑자기 물이 많아져 급류가 되어 흐르는 이스라엘 지역의 와디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와디의 급류가 무섭고 위험하지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위협적인 악인들의 세력이 속히 사라지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화살을 쏘려고 겨눌 때 부러지게 해달라는 간구는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악인들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고 조산한 아이가 살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달팽이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따라서 가뭄에는 완전히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유산되거나 조산된 아이가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뭄에 말라죽는 달팽이처럼 유산되어 살지 못하는 아이처럼 악인들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9절은 본문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원문에 “가마솥”이라는 단어에 2인칭 복수 소유격이 붙어 ‘너희 가마솥’이라고 한 것을 볼 때 가마솥은 악한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마솥에 물이나 음식을 넣고 뜨겁게 데우려고 가시나무들을 모아 불을 지폈는데 솥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생나무든 불붙은 나무든 바람이 불어 다 날아가 버린 경우처럼 악한 통치자들이 가마솥에서 음식을 삶듯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계획과 실행을 다 날려버리고 제거해버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위의 비유들을 통한 간구는 통치자가 철저하게 악에 물들어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귀를 막아 어떤 권면이나 설득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수많은 악의 희생자들이 하나님께 악의 권세를 깨뜨려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확신(10-11)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세를 얻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비참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악한 자가 오히려 잘 되는 것 같은 현실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임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0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0-11)

 

시인은 심판을 간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고 의인들이 승리한 후에 의인들이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억울함이 해결되고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10).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악인은 심판하시지만, 의인에게는 반드시 보상하시는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인과응보의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비로 우리의 눈에는 세상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당하고, 억울한 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습니다. 이 진리를 믿으며 불의한 세상 가운데에서라도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057-0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성숙한 탄원

시편 57편 1-11절


 

우리는 문제 상황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느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숨었던 어둡고 음치만 동굴이 하나님의 날개 그 동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고난의 장소가 찬송의 장소로 바뀌는 기적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 시인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지존하시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보호를 위한 간구(1-3)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개 그늘’과 같은 말은 화석처럼 생명력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에게는 그 동굴이 자신을 덮는 안락한 이불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어디라도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장소가 되는 기적, 이 기적을 우리도 인생의 ‘동굴’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은혜는 대가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필요를 돕고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두 번 연이어 간구한 것은 상황이 위급하고 절박함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를 파멸시키려는 재앙을 만난 시인이 하나님께 이 재앙에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이요 그를 의지하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목적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2).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우주의 왕이요 가장 높으신 지존자이십니다. 또한 그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그들의 필요와 안전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는 절박한 위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보호를 간구합니다.

1-2절의 간구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3절은 서술보다는 소망을 나타내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시고’에서 무엇을 보내시는지, 목적어가 없는데, 3절 끝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에 근거하여 인자와 진리가 목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여주시고 나를 삼키려는 자를 꾸짖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인자와 성실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증언법으로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특히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에서 사용되며 하나님이 그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하신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는데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사랑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과 능력을 소유하신 지존자이시며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대적으로 인한 탄식(4)

하나님께서는 인자와 진리로 원수들의 날카롭고 살벌한 공격을 파하실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원수들의 공격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라고 찬송합니다.

 

4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4)

 

시인이 대적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합니다. 시인은 언제 달려들어 해칠지 모르는 사자들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상황(단 6:16-24)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불을 뿜어내어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람들 중에 누워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적대감을 뿜어내며 모든 것을 파멸시켜버리는 사람들 속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는 적대감으로 가득 찬 대적들 속에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 있습니다. 더구나 대적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며,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다고 합니다. 창이나 화살, 날카로운 칼은 모두 사람을 해치는 전쟁 무기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공격하되 전쟁의 무기로 공격하여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렴(5, 11)

캄캄한 동굴에서 절박하게 부르짖던 모습은 사라지고 높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이러한 반전을 가증케 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11)

 

5절과 11절에 나오는 후렴은 이 시를 크게 간구와 찬양,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5절은 첫 부분인 간구를 마치는 후렴구로 사용됩니다. 후렴구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절대주권을 가진 위대한 왕이심을 선언하며 그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 있는 시인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승리로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전제로 합니다. 특히 대적들이 절대주권을 행사함으로 이를 탄식하는 4절과 6절 사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는 5절은 이 시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대적의 멸망에 대한 확신(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 원통함을 다 헤아리십니다.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그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절박하게 부르짖은 다윗은 이제 구원의 확신과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6○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6)

 

6절에서 다시 대적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대적들은 몰래 그물을 치거나 구덩이를 파서 동물을 잡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잡으려고 은밀하게 함정을 파놓고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 영혼이 억울하다’는 것은 대적들의 공격에 시인의 기가 꺾이고 쓰러지는 경험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대적들의 공격에 쓰러지는 경험을 했지만, 대적들은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졌습니다. 여기서 “빠졌도다”는 완료형으로 나오지만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합니다. 대적들이 스스로 판 함정에 시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빠지게 될 것을 시인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악의 부메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찬양(7-10)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기간을 보내다 보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찬송이 사라지고, 이 터널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가운데 그 영광을 드러내어 주실 것임을 기억한다면,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기쁨과 찬송을 깨워서,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새벽을 깨워서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7-10)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좌신 가운데 시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집니다. 여기서도 두 번 반복하여 마음의 확고함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뢰가 견고하므로 노래하고 찬송하겠다고 말합니다(7). 8절의 “내 영광”은 결과 11절의 “주의 영광”과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오히려 “내 영광”은 7절의 “내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7절의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와 8절의 ‘내 영광이 깰지어다’가 서로 연관됩니다. 시인의 마음이 확정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찬양으로 자신을 깨우고 비파와 수금을 깨우고 새벽을 깨웁니다. 확신에 찬 시인은 새벽에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하루의 어떤 시간이기보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시간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새벽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 다른 것, 이전(어제)의 낮과 밤과는 대조되는 미래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새벽이나 아침에 기대되었습니다(시 46:5; 90:14; 143:8). 시인은 곧 있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대하며 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시인의 찬양은 개인에서 만민과 뭇 나라로 확장됩니다. 7-9절은 시인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찬양할 준비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10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찬양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와 진리를 인해 찬양합니다. 시인이 찬양으로 깨우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의 근거는 여호와의 변하지 않는 신실한 언약적 사랑입니다. 11절은 찬양의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절대주권을 가지신 우주의 왕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하며 찬양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문제에 사로잡혀 주위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자기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고통을 토로하되 자기 문제에 골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할 때, 하나님께서 울의 관점을 바꿔 주시고 찬송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