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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5-01)


들으시며 심판하실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55편 1-23절


 

운전자가 눈을 갈리고 운전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런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빌 3:14; 롬 8: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르심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곁길로 빠지고 맙니다.

 

  • 거짓과 죄악과 폭력을 행하는 악인들로 인해 분쟁과 재난과 억압이 떠나지 않는 성에서 시인은 악인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도망가서 피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친구가 배반하여 시인을 대적하므로 괴로움과 분노 속에서 하루 종일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도움을 위한 기도(1-3)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제대로 보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집니다(히 4:12-13; 요일 1:5). 우리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눈이 건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눈이 악한 것에 고정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간청합니다(1).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마시고 굽어 살펴보시고 응답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근심과 한탄 속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방황하며 혼란스럽다고 합니다(2). 3절에서는 고통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원수들이 재앙을 내게 쏟아부으며 분노하고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향하여 분노와 적개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압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탄식(4-8)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은 무엇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4-8)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후, 이 속에서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립니다(4-8).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과 떨림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입니다(4-5). 죽음의 공포와 전율 속에서 시인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라도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6-7).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험악한 상황인가를 암시해줍니다. 시인은 피난할 수 있는 곳으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기를 바합니다(8). 폭풍과 광풍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원수의 소리와 압제(3)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내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9-11)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고시를 형성하고, 친구를 사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과 위협을 당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9-11)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오히려 피난처라고 생각할 만큼 시인이 사는 곳이 험악한 상황임을 앞에서 암시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시인이 사는 성 안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개정과 달리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이 원수의 심판을 구하는 간구, ‘멸하소서, 주여(아도나이), 혀를 나누소서(잘라 버리소서)’로 시작됩니다. 평행을 이루는 ‘멸하소서’와 ‘혀를 나누소서’는 혼돈과 나눔(분열)이 일어나게 하여 대적들을 심판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혼잡과 나눔으로 심판하셨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명령형으로 심판을 간구한 후,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 하반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심판을 간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시인이 성내에서 악인으로 인한 강포와 분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내에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싸움입니다. 10-11절은 성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10절의 “그들”은 강포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위는 성을 지키는 자들이 성 안팎의 문제들을 빨리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인데, 폭력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악인들이 성안을 휩쓸고 다녀서 성안이 폭력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성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고 파괴 행위들이 난무하며, 거리에는 압제와 거짓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할 성에 온갖 범죄가 자행되어 성안이 거짓과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배반과 심판 간구(12-15)

눈을 가린 베일이 주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들보도 동일한 작용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하십니다. 일단 내 눈의 들보가 맑고 순수한 동기로 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2-15)

 

앞에서 성안에 악이 가득 찬 것을 말하다가 12절 이하에서 갑자기 자신의 원수가 친구라는 내용이 나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원수를 멸해달라고 간청한 후, 하반절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나왔는데, 12절도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연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 내용을 보면, ‘원수가 나를 대적하여 과격하게 말한다면 참았을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대항하여 자기를 높인다면 그를 피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대적하면 원수니까 대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여 거칠게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나의 동료요,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다.’ 더구나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무리 속에서 함께 성전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14). 이들은 단순히 세상적인 우정만 있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귄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원수의 대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 아마도 2b-5절, 9-11절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이 친구의 배신일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원수들에게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죽음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하는 곳마다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15).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16-19b)

순종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밝아져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고, 급기야는 한낮의 태야과 같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의인이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마 13:43) 이 세상에서 온전케 되던 의인들은 심판의 날에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9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셀라)(16-19b)

 

배신의 상처로 인해 격렬하게 원수의 심판을 구한 후, 시인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여호와를 바라보며 주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하루 종일 근심하고 탄식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그 소리를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대적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원하다’는 완료형이지만 기원을 표현합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을 ‘태초부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악인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배신한 친구의 모습(19c-21)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쳤다면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려 하지 말고 먼저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했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구원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19c…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19c-21)

 

시인은 친구의 교활한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를 배반하고 언약을 저버립니다. 그들의 말은 버터와 기름처럼 부드럽지만, 마음은 전쟁터처럼 살벌하고 언제든지 찌를 수 있도록 칼집에서 뽑아놓은 칼과 같습니다. 언제든 손쉽게 악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고백(22-23)

우리가 짐을 지고 가면,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맡겨 놓을 곳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기꺼이 우리의 짐을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3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2-23)

 

22절 말씀은 시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네 짐 곧 너의 염려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신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만큼 든든한 위로의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확신에 차서 이런 권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했던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며 속이는 사자들을 파멸시키실 것을 간구합니다. 자신은 변함없이 주를 의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보재진 양과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눅 10:3). 양이 이리 떼를 이길 수 없듯이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반드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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