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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1-01)


두 증인의 최후 승리

요한계시록 11장 1-13절


오늘날은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점점 전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비행기들이 아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비행기는 이륙하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 비행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0-11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적 사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본보기가 11장에 두 증인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처럼 권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짐승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우상숭배자들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ㄴ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을 보고 우상숭배자 중에 남은 자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성전을 측량(1-2)

종말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이며 사회악이라는 오해가 팽배해집니다. 점점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절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2)

11:1-13은 두루마리 계시(12-14장)의 축소판입니다. 두루마리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가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 단락을 요한의 나머지 환상들과는 두렷하게 구별되는 형식상의 독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장을 인유한 11:1-2은 계시록에서 유일한 상징적 행동으로 예언합니다. 에스겔 4장과 다니엘 11장을 인유한 11:3-13 환상 해석이 아닌 이야기식 예언으로, 비유를 통한 해석입니다.

(1) 성소와 제단 측량(1)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팡이처럼 생긴 갈대를 주면 성전과 거기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사용한 갈대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측량용 자입니다(에스겔 29:6;40:5). 성전 측량은 에스겔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스겔 3장) 그의 예언 매시지를 구현하는 상징적 행위를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선지적 사역을 위임받은 후에 성전 측량과 같은 일종의 ‘상징적 선지적 행위’를 시행합니다.

(2) 성전 바깥뜰은 짓밟힘(2)

‘성전과 제단 및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은 그들이 보호받음을 상징하고, 반면 측량이 안 되는 성전 바깥마당은 보호받지 못함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참 유대인(2:9;3:9),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있으므로, 성전은 제사장 백성인 교회와 연관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제사장으로 언급됩니다(1:6). 우선 성전과 바깥마당은 참 성도와 형식적 성도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보호를 받지만,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은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성전과 바깥마당이 동일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성전이 측량된 것은 교회가 내적으로 보호받음을, 바깥마당이 측량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외적 환난에 노출됨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종말론적 박해를 비켜 갈수 없음을 말합니다. 바깥마당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짓밟힐 것이라는 말은 교회가 받을 핍박을 나타냅니다. 마흔두 달의 기간도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돼지 같은 부정한 동물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시기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에 해당하는 마흔두 달이었습니다(다니엘 7:25;12:7). 따라서 마흔두 달은 종말에 임할 극심한 박해를 가리키는 상징적 수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증인의 예언과 권능(3-6)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은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할 것입니다.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는 아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최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사탄에게 져서 늘 패배자처럼 살지 말고 마음에 힘을 내어 승리자들처럼 살아가고 복음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3-6)

복음을 절할 때 그것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대치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증인이 행한 놀라운 이적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두 증인의 증언(3-4)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두 증인은 1260일을 예언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마흔 두 달과 같은 기간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마흔 두 달 동안 교회는 능동적으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두 증인은 중인으로서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중인이 둘이라는 것은 자격을 갖추었음을 상징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증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증인 혹은 세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신명기 17:6;19:15). 베옷은 이사야와 선지자가 입던 옷입니다(이사야 20:2).

‘두 증인’은 또한 ‘두 감람나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등잔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에 대해 말하는 스가랴 4장과 연관됩니다(스가랴 4:3). 여기에서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학개 1-2장; 스가랴 4장),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과 왕 같은 역할을 하는 두 증인, 즉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불립니다(1:6;5:10). ‘두 증인’은 ‘두 촛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므로(1:20), 두 촛대인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권능(5-6)

권세를 받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동안 누구도 그들을 해하지 못합니다. 두 증인에 대한 묘사에는 엘리야의 이미지와 모세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리는 것과 그들에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열왕기상 17:1; 열왕기하 1:10,12). 두 증인이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과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는 것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시킵니다.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의 권세를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두 증인의 죽음(7-10)

고난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교회가 얻을 영광은 곧 주님이 받으신 영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고, 마치 예수님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참 증인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성실하게 계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7-10)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세속의 힘에 의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적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원수의 공격이 강할수록, 우리에게 반드시 보장된 영생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두 증인은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 두 증인의 죽음(7-8)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전쟁을 일으켜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은 교회가 박해와 순교를 당함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승리하지만, 환난을 겪습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은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영직 세력을 가리킵니다. 대적들은 두 증인을 너무나 증오한 나머지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하지도 못하게 막고, 오히려 축제를 즐긴다. 사흘 반이라는 기간은 3년 반이는 박해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의 수치(9-10)

두 증인의 시체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 불리는 큰 성, 곧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의 길에 방치될 것입니다.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죄악의 도시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여 재앙을 받은 나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표현에 근거해 큰 성을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큰 성은 로마를 가리킵니다(17:18). 신약성경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상호배타적인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두 증인의 부활(11-13)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그들은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약속인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세상의 어려움은 잠깐이지만, 내세에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난을 대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는 고난을 당합니다. 두 증인은 세상의 멸시를 받고 순교를 당합니다. 성도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1) 두 증인의 부활(11)

세상 사람들이 만끽하는 축제는 단기간, ‘3일 반’에 끝날 것입니다. 이 말은 증인들이 짧은 기간만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3일 반’은 증인들이 힘 있게 증언한 1260일에 비하면 대단히 짧은 기간입니다. ‘3일 반’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이 증인들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3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가 그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하나님의 영의 기운으로 살아나 거대한 군대가 되었듯이 말입니다(에스겔 37:10).

(2) 두 증인의 승천(12)

요한은 여기에 두 증인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용을 첨가합니다(12a). 사흘 반 후에 두 증인은 부활하고 승천합니다. 두 증인의 부활로 인해 대적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두 증인은 원수들의 목격 하에 승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증언 사역을 인정하셨음을 암시합니다.

(3) 열방이 주께 돌아옴(13)

큰 지진으로 인해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사람 7,000명이 죽는 것은 상당한 피해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참 회개를 의미하는지, 단지 두려움의 표시인지에 대한 해석은 평평하게 갈립니다. 14:6~7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표현은 참 회개를 의미하므로, 여기에서도 참 회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타당해 보입니다. 둘째 화가 지나갔으나 셋째 화가 속히 올 것이라는 진술은 여섯째 나팔 재앙이 끝났고 일곱째 나팔 재앙이 곧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9:21에서 끝났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어떤 영광을 받으셨던가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대로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보면 결국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이 광야와도 같은 인생길을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걸어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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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0-01)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사명

요한계시록 10장 1-11절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 침을 받지 않은 자들은 결국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진리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이 구원 얻는 길을 알게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먼저 단 말씀을 늘 먹어야 합니다. 또한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나팔 심판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우상숭배자들은 그토록 재앙을 받아도 회개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회개하게 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심판이 아닌 신실한 증인이 답입니다. 우레 심판은 취소됩니다. 재앙으로는 회개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어린양이 인을 뗀 두루마리를 요한이 삼키고, 신실한 증언을 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힘센 다른 천사와 두루마리(1-4)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와 심판의 목소리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당신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애타는 부르짖음을 잘 듣고 계십니까!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영혼을 살리는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기쁨으로 먹고, 인생의 진리와 가치관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영접한 것을 말합니다.

1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4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1-4)

본문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 막간 역할을 한 삽입구에 해당합니다. 이 10:1-11:14까지 삽입구로, 지금 설명하려는 것들이 확인과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삽입구를 기록해야 할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을 다시 확인시키며, 강조하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1) 힘센 다른 천사의 모습(1)

요한계시록 8장과 9장에서는 첫째 나팔 재앙부터 여섯째 나팔 재앙을, 11:15-19에서는 일곱째 나팔 재앙을 묘사합니다. 그 사이에 낀 요한계시록 10장에서는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힘센 천사가 등장합니다. 구름, 무지개, 태양, 불기둥 등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천사에게 부여된 초월적 위엄과 권능을 나타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와 대조적으로 이 힘센 천사는 오른발로 바다를,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왼발로 땅을 밟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악한 세력에게 속한 영역을 이 힘 센 천사가 제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 세계에 걸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걸쳐 실현됩니다.

(2)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2)

천사의 손에는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이미 펴 놓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두루마리와 5장에 등장한 두루마리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와 달리 10장의 두루마리는 작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지만, 10장의 두루마리는 펼쳐져 있습니다. 5장의 두루마리는 어린양이 받지만, 10장의 두루마리는 천사의 손에 있습니다. 두 두루마리의 관계를 어떻게 보든, 5장의 두루마리는 10장 이전의 계시와 연관되고, 10장의 두루마리는 10장 이후의 계시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장에 등장한 봉인된 두루마리가 계시의 은밀성을 나타낸다면, 10장에 등장하는 열린 두루마리는 계시의 공개성을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22:10). 즉, 종말론적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계시가 점점 더 공개성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힘센 다른 천사의 행동(3-4)

작은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일곱 우레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요한이 일곱 우레가 말한 내용을 기록하려 하자 기록하지 말고 봉인하라는 말이 하늘에서 들립니다. 아마도 이것이 심판의 전부가 아니고, 더 완벽한 심판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은 일곱 천둥이 말을 했다는 사실만 기록할 뿐, 그 말의 내용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일곱 우레는 모종의 종말론적 재앙과 연관될 것입니다. 일곱 우레라는 표현 자체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우레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세 종류의 재앙 외의 재앙에 해당할 것입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이 인봉되었다는 것은 일곱 우레의 재앙이 취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재앙 일부가 왜 취소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본문에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종말론적 환난의 날들을 감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24:22). 천사는 창조주를 향하여 지체하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합니다(6). 이 말은 일곱 우레가 말한 재앙을 취소함으로써 종말론적 사건들을 신속하게 진행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고(5-7)

하나님께서는 복음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지체하지 않고 확실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지체하지 않고 복음에 약속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은 자는 말씀이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쓰디쓴 고통과 아픔도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경험하고,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

5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5-7)

천사는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대로 성취해 나갑니다. 천사에 대한 장황한 소개는 이 단락에 계속되는 선언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천사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엄숙히 맹세하면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합니다.

(1) 천사의 맹세(5-6)

이 힘센 천사는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창조주 하나님께 지체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심판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므로 종말의 완성은 그만큼 가까워진 셈입니다. 오른손을 드는 것은 맹세할 때의 몸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자 그 종말을 완성하는 심판주입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 심판의 예언이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7)

그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연관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 지금 드러난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입니다(로마서 16:25-26).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복음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심판을 의미합니다. 일곱째 나팔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복음은 완성될 것입니다.

 

만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8-11)

불철주야 주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하기에 힘쓰고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게 되어 결국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삶에 적용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8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8-11)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메시지기도 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받을 종말론적 심판은 요한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힘센 천사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했다면, 이제부터 요한 자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개인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11장에서 나오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1)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8-10)

‘두루마리’는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다시 예수님에게서 천사에게로, 그리고 천사에게서 요한에게 전달됩니다. 요한이 힘센 천사에게서 그 두루마리를 받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났던 음성은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그 책을 주면서 그것을 먹으라고 요구합니다. 요한은 그 명령에 천사에게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먹었습니다. 천사가 시킨 대로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행동은 그 책에 담긴 메시지를 그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선지자적 메시지에 몰입함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에스겔 2:8-3:3). 그 책은 배에서는 쓰지만 입에는 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순서적으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정상적인 순서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에스겔 3:3), 천사가 순서를 바꿔 말한 것은 그 책에 담긴 기대 밖의 내용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배에 쓴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을 말하는 말씀은 달지만, 박해를 말하는 구절은 씁니다. 또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는 말은 계시를 받는 과정은 달콤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은 힘듦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과 비교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에스겔이 말씀을 전하면서 겪었던 경우와 같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단순히 지적 전달에 그치지 않고 가슴을 통해 내면화하는 힘든 과정을 거질 때, 사람들에게 더 권위 있게 다가갈 것입니다. 이 땅에 고통이 임한 후에 새 예루살렘이 도래한다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2) 세상에 예언하라는 명령(11)

요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하여 말씀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그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다시 예언한다는 것은 2장과 3장을 통해 요한이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와 교회들이 감당해야할 사명, 증거의 사명입니다.

그 예언의 사명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심판의 내용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 중인 요한에게 하나님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져다 먹고,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게 다시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시 냉소와 조소와 거절과 핍박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가기 전에 먼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열국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상황에서 나온 에스겔 2:9-10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세상 임금들 앞에서 전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내용에서도 본문의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0:18). 제자들은 ‘관원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마가복음 13:9). 이것은 구약성경(시 119:46)에사도 확증되고, 사도 바울의 일생에서도 검증된 것입니다(사도행전 9:15;25:13-26:32;27:24). 요한이 전할 말씀은 교회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모든 생명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꿀같이 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또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쓰디쓴 고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감당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맗씀을 체험한 자는 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의 쓴맛과 단맛을 체험하고,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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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9-02)


여섯째 나팔 재앙

요한계시록 9장 13-21절


 세계 곳곳에서 해일, 지진, 자연재앙 그리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이러한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펴서 준비된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항상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로 치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들은 준비되지 않아 도적같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인 악마들은 불신자를 심판하는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첫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더 큰 둘째 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섯째 나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첫째 화에서 죽음은 면했습니다. 이제 전쟁을 통한 죽음의 재앙이 다가옵니다.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은 더 강퍅해질 것입니까? 회개할 것입니까?
 

여섯째 나팔과 네 천사(13-15)

우리는 세상을 믿으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잘해주다가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과 건강, 또 소유를 가졌습니다. 인생은 무한정 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디에 충성하고, 무엇으로 행복을 여기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예배하고, 누가 당신의 생명을 생명 되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13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13-15)
첫 화라고 일컬어진 다섯째 나팔에는 황충을 사용하여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심판한 대상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하나님께는 배교하고 불순종한 자들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이어 역시 ‘화’라고 불리는(8:13) 마지막 두 나팔이 뒤따릅니다. 
(1) 여섯째 나팔과 제단의 음성(13)
여섯 번째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나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뿐에서 음성이 나온다는 말은 뒤이은 사건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모든 일이 진행됨을 암시합니다.
‘제단’은 앞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한 곳으로 성도들의 기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6:9-11). 또한 ‘금 제단’은 천사가 금 향로에 많은 향을 받은 후에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 앞으로 드린 곳이기도 합니다(8:3-4). 이런 일련의 모습은 여섯 번째 재앙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금 제단에서 음성이 나와 심판을 시행되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아래 진행되는 종말의 역사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종말의 때를 살아갈 때 더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풀려난 네 천사(14-15)
금 제단에서 나는 음성이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소리가 들립니다. 언뜻 이 모습은 ‘네 천사’는 땅 네 모퉁이에 서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7:1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7장의 천사들은 땅에 서 있는 반면에, 9장의 천사들은 유브라데 강에 결박당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20:2에서 천사는 사탄을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결박했습니다. 따라서 9장의 네 천사는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네 천사에 이어 2억 명의 대규모 마병대가 등장하는 것으로 아마(16), 이 천사들은 마병대를 이끄는 악의 세력으로 보입니다. ‘네 천사’는 선한 천사일 수 있고, 타락한 천사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천사입니다. 그가 결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결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제어를 받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점에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9:20-21에 나타나듯이 다섯째 나팔 재앙뿐만 아니라 여섯째 나팔 재앙도 악인들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악인들에게 극도의 고통을 안기지만, 여섯째 나팔 재앙은 악인들을 죽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 출애굽 열 재앙의 이미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네 천사가 죽일 사람 3분의 1은 과반은 못 되더라도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이것은 넷째 인의 재앙으로 인해 사망에 처한 땅 4분의 1보다 큰 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된 숫자의 문자적 의미에 너무 연연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 차이는 종말론적 재앙이 점점 확대되고 강화됨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강 건너편에서 오는 마병대(16-19)

심판을 불러온 죄인들은 대부분 완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그만한 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자신에게는 그러한 심판이 지나가길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회개하길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회개치 않으면 다양한 심판의 도구들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16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16-19)
회개하면 소망이 있겠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멸망당합니다. 멸망당할 자들은 하나님의 인이 없습니다. 그 인이 없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강력한지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동원된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마병대의 수(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 즉 2억 명에 달합니다. 여기에서 2억에 달하는 실제 군대를 찾으려는 시도는 그의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숫자들의 상징성에 비추어 볼 때, 2억이라는 수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큰 수로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병대의 초자연적인 모습과 상상할 수 없는 큰 규모의 군대는 이들의 악마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들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무수한 군대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천사들이 부추겨서 일어납니다(에녹1서 56:5-8). 홍수의 때에 와서 심판과 파멸을 가져오는 징벌의 천사들입니다(에녹1서 66:1).
(2) 마병대의 모습(17)
요한은 환상가운데 본 군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유그라데 강 건너편에 있던 파르티아 제국의 마병대 모습으로 용맹스런 전설을 이용하여 시각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나왔던 황충과 비슷합니다. 둘 다 사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 탄 자들은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을 차고 있었습니다. 사자 머리 같은 머리를 한 말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용맹했던 파르티안 제국의 기마병들을 연상시켜 줍니다. 기마병들이 호심경을 차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말들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온다는 묘사는 이 기병대가 인간 기병대가 아닌 초자연적인 성격을 띠는 군대임을 암시합니다.
(3) 마병대의 재앙(18-19)
이 재앙으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와서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재앙은 소돔과 고모라가 받은 심판과 출애굽 열 가지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창세기 19:24). 소돔과 고모라와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이번에도 로마제국, 사탄의 나라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귀, 짐승, 거짓 선지자,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라는 자들, 그리고 악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습니다(14:10;19:20;20:10;21:8).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뱀 같은 꼬리에는 사람을 해치는 머리가 있습니다. 말들의 입에 있는 힘은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다고 합니다. 꼬리에 있는 힘에 대해서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뱀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므로(12:9;20:2), 뱀 같은 꼬리라는 표현에서 말들의 악마적 특성을 유추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앞서 황충은 전갈 꼬리에 사람을 해하는 힘이 있었습니다(9:10). 입에는 나오는 능력은 사람을 죽이지만, 꼬리는 사람을 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나팔 재앙과 여섯째 나발 재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두 나팔 재앙의 묘사는 앞선 네 나팔 재앙에 비해 구체적입니다. 여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마병대는 다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전투용 발 모양의 황충을 연상시킵니다. 황충과 마병대 모두 초자연적이고 악마적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첫째부터 넷째 나발 재앙과 달리,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재앙은 모두 악인들을 괴롭히거나 죽인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생존한 우상숭배자들의 반응(20-21)

우상숭배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악한 영의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반역하고 우상 숭배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증명해 줍니다.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20-21)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사람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자초합니다. 이 심판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회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심판에 대한 결과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 회개하지 않는 행동(20a)
여섯째 나팔 재앙을 통해 삼분의 일이 죽었고 삼분의 이가 살아남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라고, 그들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살아서 회개할 기회를 주어졌지만, 큰 재앙에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보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 재앙은 다섯째 나팔 재앙과 마찬가지로 악인들에게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 우상숭배(20b)
그들의 행동을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무서운 심판을 목격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리어 금, 은 그리고 돌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깁니다. 살려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하기보다는 살아남은 자신들을 칭송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지 않는 행동(21)
우상숭배의 결과로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은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이들은 우상 숭배를 계속했습니다. ‘손으로 행한 일’은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함을 말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금, 은, 동, 목석이기 때문에 보지도 목하고 듣지도 못하고 다니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궁극적으로 우상 뒤에 있는 여러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악인들은 살인과 음행과 도둑질 같은 부도덕한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복술’은 신비한 약을 써서 마법이나 주술을 부리는 행위로, 종종 우상 숭배와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한 심판의 시기를 저울질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고 잘못에서 돌이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지 않은 굳은 마음을 용서하시길 기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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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주해(08-01)


일곱째 인 개봉과 네 나팔의 심판

요한계시록 8장 1-13절


요한계시록은 이름 그대로 계시의 책입니다. 우리가 그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진리와 진실을 보게 하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계시합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는 기도의 실체를 계시록을 통해 만납니다.

  

요한계시록 8장은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기도는 응답되어 하늘의 포고령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일곱 나팔 심판이 시행됩니다. 일곱 나팔 중에 첫 네 번째 심판은 인 심판과 패턴과 같이 짧지만 강렬합니다. 이 땅 삼분의 일이 영향을 받는데, 그 대상은 불신자들입니다. 독수리는 아직 세 가지 화가 남아 있음을 경고합니다.

 

일곱 천사와 일곱 나팔(1-6)

악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분투합니다. 힘과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여전히 악과 불의가 활동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악의 존재를 보며 불평만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1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1-5)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째 인 재앙이 언급되고, 7장에서 십사만 사천과 승리한 큰 무리가 묘사된 후에, 8장에서 다시 일곱째 인이 등장합니다. 일곱째 인은 인 시리즈의 결론 부분입니다. 불신 세계를 징벌하시기를 간청하는 성도들의 간구가 공식적으로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1) 하늘의 반시간 침묵(1)

어린양이 일곱째 인을 떼시자, 다른 인을 떼실 때와 달리 하늘에 반 시간쯤 고요가 임합니다. 고요함이 일곱째 인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요함을 바로 뒤따르는 일곱 나팔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고요함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습니다. 고요함 직후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것으로 보아, 이 고요함이 적어도 일곱 나팔 재앙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처음 대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이 뒤이어 나타나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인의 개봉으로 종말론적 재앙의 절정에 해당하는 사건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등장한 반 시간의 고요함에 의아해하면서 다음 장면을 숨죽이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2) 일곱 나팔의 도입(2)

일곱째 인을 떼면서 이어진 고요함 이후에 등장한 것은 특정한 하나의 재앙이 아니라 또 다른 일련의 일곱 나팔 재앙입니다. 이것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 시간의 고용함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을 연결하는 모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3-4)

6절에서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는데, 그 전에 다소 놀랍게도 성도의 기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금향로를 든 한 천사가 많은 향을 받아 성도의 기도와 합해 하나님 앞에, 즉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립니다. 이 장면은 네 생물과 24장로가 향, 즉 성도의 기도가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있던 모습과 비슷합니다(5:8). 천사는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습니다.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발생합니다. 천사가 성도의 기도가 드려졌던 제단에서 불을 담은 이상, 그 불에는, 성도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포함하는 불이 땅에 쏟아지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성도의 기도가 이 땅에서 발생하는 종말론적 재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암시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을 증언하는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항상 기도해야하는 의무도 지닙니다.

(4) 하늘 보좌의 포고령(5)

향로를 가진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았다가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들은 8:1의 고요함과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사징들입니다(11:19;16:18). 자연 현성들은 시내 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인 폭풍 신현의 현상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19:16-19). 그 후에(8:7-9:21) 일련의 나팔로 인해 재앙들이 야기되는데, 이것은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려졌던 재앙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7-10장). 하나님께서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심판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만이 악의 세력과 이 세상 신들을 주관하는 분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처음 네 나팔의 재앙들(6-12)

세상 거대한 악의 세력이 무너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문화와 가르침이 바뀌고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그 사람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의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가 견고하고 그것을 조장하는 악의 세력이 거대하다고 해도 믿음으로 개도해야 합니다.

6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6-12)

일곱 나팔은 그 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 나팔은 주로 무생물에게 영향을 주며(8:7-13), 다섯 째 나팔부터 일곱째 나팔은 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9:1-21; 11:15-18). 그래서 다섯째 나팔부터 일곱째 나팔은 ‘화’라고 표현되었습니다(8:13;9:12;11:14).

(1) 첫째 나팔 심판(6-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 섞인 불 우박이 땅에 내립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일곱째 재앙인 우박과 피 재앙과 연관이 있습니다(출애굽기 9:23). 이 때 내린 불 때문에 땅 삼분의 일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해치는 모든 종류의 파괴를 상징합니다. 본문 묘사에 영향을 준 성경은 요엘 2:30인데, ‘이것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심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하나님의 심관이 임했다는 사실을 알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경고하기에 충분하다. 노아 시대에는 물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불심판으로 경고했는데, 마지막에는 지진으로 모는 이들에게 경고할 것입니다(히브리서 12:26).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당시 하나님은 우박을 사용하여 원수들을 멸절시켰습니다(여호수아 10:11). 나팔 재앙으로 인해 땅이 삼분의 일만 해를 입는 것은 이 재앙이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2) 둘째 나팔 심판(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붙는 산이 바다에 빠져 바다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하고 그곳에 있는 생명체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첫째 재앙인 나일 강의 물이 피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7:20). 이번 것은 불붙는 산이 바다에 빠져 이렇게 된 것입니다. 환경오염이 발생했고, 그와 관련하여 인간 교역이 깨졌고 배도 파손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완전한 심판은 아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큰 심판입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을 받지 않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3) 셋째 나팔 심판(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횃불 같은 별이 강에 떨어져 강물 삼분의 일이 써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횃불은 세상에 고통을 주려고 내려온 천사 또는 악한 인간을 상징하는 천사로 이해됩니다(9:1). 이것 역시 애굽에 내린 첫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일 강의 물은 피가 되어 사람들이 먹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사람의 생명줄인 민물이 써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 죽게 됩니다. 이것은 쑥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쑥과 쓴 물’을 먹여 고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명백한 표현입니다(예레미야 9:12;23:15). 이로 인해 쓴 물을 마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릅니다.

(4) 넷째 나팔 심판(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천체(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 내린 아홉째 재앙인 흑암 재앙과 같습니다(출애굽기 10:21). 흑암 재앙으로 애굽은 온 땅이 칠흑 같이 깜깜해졌으나(출애굽기 10:21-23), 나팔 재앙으로 인해서는 삼분의 일만 어두워진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해와 달 삼분의 일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해나 달의 밝기가 (삼분의 일로) 약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광원체가 밝히는 시간 중에 삼분의 일이 어둡게 되어 낮 시간 삼분의 일(대략 네 시간)과 밤 시간 삼분의 일(대략 네 시간)이 빛이 전혀 없어 깜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일식과 월식으로 낮밤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네 시간 정도 어두움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두려워 할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천체가 빛을 상실하여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전조로 이해하였습니다(요엘 3:14,15; 아모스 8:9). 하나님께서 천체를 어둡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종일 흑암 속에서 지내지 않고 삼분의 일만 어둡게 하시는 것은 그분이 심판의 와중에서도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식으로 이 일이 발생하는지는 성경 필자들의 관심 밖입니다.

 

독수리의 경고(13)

장차 완전한 정의를 드러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미약한 변화에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장차 모든 악과 불의가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날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들의 불의는 끝끝내 감추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13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13)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가며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앞으로 세상에 있을 재앙을 경고하면서 화를 세 번 선포합니다. 이것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라는 말씀대로 앞으로 세상에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대라. 독수리가 여호와의 집 위에 있느니라’(호세아 8:1). 독수리는 시체가 있는 곳에 몰려듭니다. 이처럼 독수리와 주검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독수리는 치명적인 심판의 전조를 알리는 상징입니다. 네 나팔로 인해 사람들은 혹독한 심판을 겪었으나 앞에 제시된 심판은 사람들을 직접 겨냥하지 않고 무생물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된 네 재앙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혹독한 화가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는데, 세 화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해자는 심판입니다.


 요즘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임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비록 노아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 비웃음을 당할 시대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사명은 마지막 때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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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7-01)

 


영적 전투 중인 있는 교회

요한계시록 7장 1-17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7장은 여섯째와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삽입된 내용입니다.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제기된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하십니다. ‘얼마나 오래?’, ‘그 수가 차기까지!’ 그 수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을 따라 종말의 성전에 참여할 영적 군대로,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승리합니다. 그 결과 열방에서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1-8)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모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사역하는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1-8)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 위치한 막간에, 8장에서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데, 이로써 한 장면이 일단락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그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인을 쳐서 소유권이나 보호 대상임을 표시하듯, 악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중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그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1) 바람을 잡은 네 천사(1)
요한이 다음으로 본 환상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 환상입니다. 네 천사는 네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네 천사와 네 바람이 연결된 것은 스가랴의 환상과 관련이 있습니다(스가랴 6:1-5). 천사들이 땅의 사방에 선 것은 그들이 땅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였음을 표합니다. 천사들은 재난을 가져오는 바람을 붙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해를 받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행합니다. 바람은 태풍을 일으켜 파멸을 가져오는 세력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14:18)와 물을 담당하는 천사(16:5)도 등장합니다.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바람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해 심판하십니다(예레미야 49:36).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하시며 그분의 백성에게 인을 치시려고 하고 인 치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한 자들을 구별하시 인 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며 그분을 대적하는 위험천만한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향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음을 얼려주어야 합니다.
(2) 인을 가진 다른 천사(2-3)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천사는 앞서 언급한 심판을 행할 네 천사를 향해 하나님의 종들 이마에 인 침을 받기까지 땅과 바다와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인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네 천사가 일으킬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인 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인 침을 말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NIV는 이 부분을 ‘그의 소유의 인’(his seal of ownership)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도장을 우리에게 찍으시고 ‘첫 번째 불입금’(first installment, NRSV)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고(에베소서 1:13),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4:30).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인 침’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하기 때문에 심판 중의 보호를 말하는 에스겔 9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에스겔 9:4-6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판에서 제외될 것이지만,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은 엄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언치침은 지엄한 심판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은 아마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일 것입니다. 14:1에 따르면,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 치심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혹은 어린양)의 이름이 그 종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22:4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인 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서 받는 하나님의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진밀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3) 인 침을 받는 십사만 사천(4)
요한은 인 침 받은 자의 수를 듣는데,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에 달합니다. 이는 666(13:18)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숫자 중 하나입니다.
9절에서도 다시 설명하지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 소개합니다(7:9). 잠시 후 살펴보겠지만, 이 큰 무리가 앞서 언급한 십사만 사천과 같은 무리인지 아닌지는 중요성만큼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십사만 사천과 큰 무리는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라고 산술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4) 각 지파를 구성한 십사만 사천(5-8)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씩 인 침을 받은 자들의 합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목록이 다소 독특합니다, 이러한 목록은 성경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에는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 있고, 요셉의 아들 중 므낫세는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없고 대신 요셉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해석은 첨예하게 갈립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은 분명 십사만 사천이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점도(21:12)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1:26). 이는 분명 불가능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묵시록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이 상징적 언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십사만 사천’을 교회로 보는 해석에 좀 더 무게를 실어 줍니다. 144,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수인 12의 제곱에 1,000을 곱한 수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수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을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칭 유대인들을 사람의 회당으로 부르면서(2:9: 3:9),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유대인들을 참 유대인들로 다시 정의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참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2:28-29). 666과 같은 상징인 숫자가 번번하게 사용되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이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십사만 사천’을 그리스도인들로 보는 견해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십사만 사천’이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하는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전체 그리스도인 중 일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1: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서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교회 전체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 열매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십사만 사천이 완전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 중 순교자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길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다면 십사만 사천은 뒤이어 언급된(9),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은 대상일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십사만 사천(9-14)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은 어린 양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군대로서(14:1)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어린 양의 삶을 무기로 삼습니다. 끊임없이 환난이 닥쳐올지라도 어린 양의 피로 정결하게 되는 연단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견딘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보상하십니다.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9-14)
천국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감격스러운 찬양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본 천국에서는,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서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수는 상징적인 수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소개합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속량 받고 어린양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1)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찬송(9-10)
요한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를 들은 후에, 아무도 셀 수 없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바라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속량을 입은 세계 각 처에서 나오는 성도들입니다(14장 참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창세기 12:1-3). 성도는 인종, 신분, 성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갈라디아 3:28). 이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순결한 승리자들이 입는 옷입니다(3:4-5). 이들은 큰 환난을 견디고 이긴 자들입니다(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것처럼(요한복음 12:13), 큰 무리가 손에 들고 있는 종려 가지는 승리와 환희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및 천사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 큰 무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루신 구원을 큰 소리로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입니다.
(2) 하늘 보좌의 천사들의 화답(11-12)
10절의 찬송에 대해 화답하는 차원으로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선포합니다. 큰 무리의 찬양에 화답하듯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주위에서 있던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경배합니다. 이름은 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심을 거듭 강조합니다.
(3) 흰 옷 입은 자들(13-14)
요한계시록에는 역설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처음 보기에는 모순되지만, 놀라운 방식으로 상징적 의미를 창출합니다. 독자의 기대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 5장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했는데, 돌아보니 도살을 당한 어린양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순교자들이 흰 두루마리를 씻습니다. 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습니다. 피로 씻는데 어떻게 희게 되었습니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피에 깊어 담근 옷’을 입습니다. 창세기 49:11(그 웃을 포도주에 빨며)의 인유입니다. 흰 옷은 불게 물들어야 합니다. 장세기 49장에서 설정된 기대를 뛰어넘는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붉은 흰 옷’이란 역설이 창출됩니다. 하얗게 하려고 씻었는데 붉게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어린양의 피로 물든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의 섬김과 찬양(15-17)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수 샘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죄로 인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결핍을 해결하셔서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15-17)
하나님의 백성들은 숫자적으로 한정된 144,000명이 아니라 셀 수 없는 많은 큰 무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 공동체의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우신 섭리를 찬양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천국에서 누릴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결한 흰 옷을 입고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보좌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죄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찬양의 고백입니다.
큰 환난을 이긴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주림과 목마름’과 ‘해나 뜨거움’이 없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삶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21:3).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승리자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모르는 곳입니다. 또한 해나 어떤 열기에도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큰 환난을 이긴 자들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어떤 결핍이나 상해에도 노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안녕과 위로와 보호는 미래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당시의 성도들도 경험할 수 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라는 표현은 시편 23편을 떠올립니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기에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시편 23:1).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복을 영원히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임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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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6-01)

 


여섯 인을 떼시는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6장 1-17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항상 환영받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배척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핍박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라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믿는다는 사람이 핍박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 받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렇게 예고하신 것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실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곧바로 기도와 찬양으로 두루마리를 위하신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루마리가 펼쳐집니다. 6장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인을 떼서는 장면이며, 연속적인 세 가지 일곱 심판 시리즈의 첫 번째입니다. 일곱 인 심판은 전 인류의 4분의 1이 대상이며, 신자와 불신자가 그 대상입니다. 심판의 튀지는 신자에게는 기도를, 불신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처음 네 가지 짧은 인 심판(1-8)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악이 득세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린 양의 길을 갈 때 고난을 당하지만, 그난은 성도들의 참된 표지이고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갚아 주십니다. 이제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1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1-8)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일곱 인을 떼기에 함당하신 어린양이 소개되었고, 6장에서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기 시작하십니다. 어린양이 처음 네 개의 인을 떼자 네 생물이 각각 말을 호출합니다. 말들의 등장은     스가랴 1:8-11과 6:1-8을 배경으로 합니다.

(1) 첫째 인 재앙 – 정복(1-2)

어린양이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등장합니다. 흰말을 탄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흰말 탄자의 정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재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19장을 근거로(19:11) 흰말 탄자를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흰말탄자의 승리는 세상에서 복음이 거두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뒤이어 나오는 세 말의 부정적 이미지와 맞지 않습니다. 또한 6장의 흰말 탄자를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6장의 흰말탄자는 활을 사용하지만,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을 사용하십니다(19:15). 흰말탄자는 단 하나의 면류관(στεφανος)을 받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관들(διαδηματα)을 쓰셨습니다(19:12). ‘στεφανος’(스터파노스)는 경기에서 우승한자에게 주는 화관을, ‘διαδημα’(디마데마)는 왕관을 가리킵니다. 흰말탄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며 싸우십니다(19:11). 무엇보다도 6장에서는 첫째 인을 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을 떼신 어린양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바로 흰말을 타고 나가시는 것은 어색합니다. 어린양은 일곱 인의 집행자보다는 주관자에 가깝습니다.

둘째, 대다수의 학자는 첫째 인이 모종의 전쟁이나 정복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흰말탄자는 전쟁에 나가 승리합니다. 흰말탄자가가지고 있는 활은 전쟁 무기입니다. 그는 이미 이기고 있으며 계속 이기려고 합니다. 로마 시대에 전승자(戰勝者)는 흰말 네 필이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3:5; 7:9), 흰말 탄자가 받는 면류관 역시 전쟁의 승리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참조, 3:11). 어떤 세력에 대한 승리인지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첫째 인의 재앙은 모종의 전쟁으로 인한 재앙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은 뒤따르는 말들의 재앙적 성격과 잘 맞습니다.

(2) 둘째 인 재앙 – 전쟁(3-4)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붉은 말을 탄자는 땅에서 화평을 제해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습니다. 이는 필시 전쟁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으로, 전쟁 이미지와 잘 어울립니다. 활과 마찬가지로 칼도 전쟁 무기입니다. 화평을 제해 버린다는 말은 전쟁을 일으킴을 의미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은 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가 사용되었으므로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재앙은 적어도 어린양과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이루어짐을 암시합니다.

(3) 셋째 인 재앙 – 기근(5-6)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시자 이제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앞의 두 말과 다르게 검은 말에 탄자는 무기가 아니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재앙은 기근을 나타내는데, 아마 앞서 언급된 전쟁들의 결과일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은 이 재앙의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고, 밀 한 되는 한사람의 하루양식에 해당합니다. 평상시에는 한 데나리온으로 밀 열 되를 살 수 있는데, 한 되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암시합니다. 보리는 보통 가축 사료용이었는데, 가난한 자들이 먹었습니다(참조, 요한복음 6:9), 한 데나리온으로 3인 가족이 하루 식사들 해결하려면 밀 대신 보리를 사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라는 말의 의미는 난해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백성이 보호를 받을 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밀과 보리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반면에 감람유와 포도주는 사치품이므로 기근 중에도 부자들은 별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다른 유력한 해석은 기근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뿌리가 깊어 비교적 가뭄에 잘 견디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감람유와포도주를 해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재앙이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임을 암시합니다.

(4) 넷째 인 재앙 – 사망(7-8)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의 이름은 사망인데, 음부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들은 땅 사분의 일에 이르는 권세를 얻습니다. 넷째 인은 말 그대로 사망을 말합니다. 사망과 나란히 사용된 음부, 즉 하데스는 사망의 동의어, 유의어로 사용됩니다(1:18; 20:14). ‘청황색’은 ‘잿빛’ 혹은 ‘창백한’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시체 혹은 죽음의 색입니다.

청황색 말을 탄자는 칼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입니다. 이는 마치 앞의 재앙들을 요약해 놓은 것 같습니다. 칼은 둘째 인에 등장하는 큰 칼을, 흉년은 셋째 인에 등장하는 저울을 떠올립니다. ‘사망’은 ‘전염병’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칼과 기근과 역병과 들짐승은 인류를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등장합니다(에스겔 14:21).

 

다섯째 인 재앙/순교자의 부르짖음(9-11)

성도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고난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난 받는 성도들을 괴롭혔던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9장에서는 때가 차면 순교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9-11)

다섯 번째 인은 복음을 바르게 믿고 전하는 이들도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이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은 즉각적인 도움이나 해결책을 주시 않습니다. 즉각적인 응답 보다는 앞으로 더 순교자가 나올 것인데,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1) 순교자들의 기도(9-10)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시자, 하늘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 탄원은 언뜻 복수의 뉘앙스를 띠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나 스데반의 기도와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누가복음 23:34; 사도행전 7:60), 그런데 놀랍게도 순교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하고 참되시다는 진리를 근거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무죄한 피에 대해 신원하는 것은 거룩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합니다. 정의와 심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영원히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공의도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거룩하고 참됩니다.

(2) 기도에 대한 응답(11)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순교자들의 탄원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잠깐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2:17; 3:5: 7:9). 순교자들이 받은 흰 두루마기는 그들이 옮고 그들을 죽인 자들이 옮지 않음을 재차 입증해 줍니다.

하늘 제단이 속해 있는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실현된 곳입니다. 하늘에서 쉬고 있는 순교자들은 땅에 살면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의 처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 땅은 카이사르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 곧 순교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수고에서 벗어나 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3).

천상의 순교자들은 다른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종말이 완성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순교자의 수가 차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끈이 옵니다(마태복음 24:14). 그렇다고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중언의 삶을 사는 자들인데, 이들에게 증언과 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12:11; 20:4).

다른 인들과 달리 다섯째 인이 열린 후에는 재앙이 발생하는 것 갑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순교자들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종의 재앙이 암시된 것도 사실입니다. 순교자들의 단원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탄원 후 악인들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여섯째 인의 재앙은 다름 아니라 어린양의 진노입니다(16). 하나님은 순교지들의 수가 찬 후에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악인들에 대한 예고편 격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3) 우주적인 징조(12-14)

여섯째 인이 열리면서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며,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떠나가고, 모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해와 달의 색이 변하고 명의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는 짓은 하늘에 생기는 이변을 말하고, 큰 지진과 산과 섬의 이동은 지각 변동을 말합니다. 자연계에 임하는 재난은 나팔 재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8:7-13).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징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재림 직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입니다(마태복음 24:29) 또한 곳곳에서 지진이 발생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4:7).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기에(21:1), 자연 질서의 변동은 예측 가능한 종말론적 현상입니다. 달리 말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자연과 우주로 확대됩니다.

(4) 어린양의 진노(15-17)

하늘과 땅에 큰 격변을 불러일으키는 여섯때 인의 재앙은 땅의 임금과 왕족과 장군과 부자와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에게 임합니다. 이 재앙은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이 재앙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상류층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력과 연대해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입니다. 종말론적 재난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진노가 자유인과 노예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은 권력이나 재력 혹은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불의한자들에게 재앙이 내려옴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로마서 2:11).

이 재앙은 누구도 버틸 수 없다. 이 재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다섯째 나팔 재앙이 임하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9:5). 아이러니하게도,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박해는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20:4). 성도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마태복음 10:28). 반면에 약인들에게 입하는 어린양의 진노는 축음의 고통보다 더 큽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겪는 고난뿐 아니라 어린양을 대적하는 자들의 고난도 언급합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섯째 인의 재앙이 대표적 예입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불 못이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불과 유황의 고난 역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14:9-11).

악인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임을 알지만,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여섯째 나팔재앙에 살아남은 자들 역시 회개하지 않습니다(9:20-21), 넷째 대접과 다섯째 대접 재앙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16:9,11). 아는 것과 회개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비웃겠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쏟아질 것입니다. 그 종말의 때까지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힘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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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5-01)

 


경배를 받으시는 어린 양

요한계시록 5장 1-14절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계획하신다면 그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그 나라와 백성의 정체성과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역사와 교회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이며 그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5장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중심의 예배이며, 보좌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원심력적 예배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어린양이 취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늘 보좌의 프로젝트가 시행됩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들과 청사들, 모든 피조물이 찬양으로 어린양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담 되어 이 땅에 세 가지 연속적인 일곱 심판 시리즈의 시동을 겁니다.

 

두루마리와 어린 양(1-7)

악은 득세하고 교회는 수세에 몰리고 성도들은 모진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구속의 역사는 정체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희망마저 보이지 않지만, 보좌에 앉으신 주가 계시기에 탄식은 탄성으로, 슬픔은 환희로 바꿘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주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막을 수 없고, 그분의 의지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1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1-7)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한 찬양의 예배입니다. 5장은 죽임당한 어린양 중심의 예배입니다. 4장의 예배는 하늘 보좌를 향한 구심적 예배입니다. 보좌에 앉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계획은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됩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일곱 인으로 봉해져서 누구도 열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1)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1)

이제 5장에서는 보좌로부터 열방을 향한 원심적 예배가 진행됩니다. 그 출발점은 ‘두루마리’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왜 두루마리는 인봉되어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다니엘 12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세계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궁극적으로 제국에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두 천사가 역사의 결말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목격합니다. 들었으나 깨닫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알려고 했으나. 처사는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합니다. 다니엘에게는 멀리 떨어진 종말적 미래지만, 요한과 독자들에게는 직접 영향을 미치는 내용입니다. 즉시 공개되어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니엘이 봉인한 두루마리가 해제되는 과정을 쓰고 있습니다.

(2) 누가 인을 떼기에 합당하나(2-5)

요한은 봉인된 두루마리를 보았지만, 정착 그것을 펴고 인을 뗄 자격이 있는 자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숨겨진 역사의 종말을 알려 줄 사람이 없어 보이자 요한은 크게 울고 있습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했으므로 그가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기는 자에게 다양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2-14장이 그 내용입니다. 따라서 인이나 나팔 심판은 그 내용이 아닙니다. 두루마리는 10장에서 요한이 소화하여 예언적 선포를 할 때 드러납니다. 11장은 두루마리의 맛보기에 해당합니다. 봉인이 해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백성은 여전히 이사야 29:9-12의 상황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천상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합니다. 제국의 모습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대적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압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역사는 제국의 손에 이끌려 갈 것이며, 시련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악한 제국에 대한 심판과 그리스도인의 승리도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유업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절망합니다.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순종하는 인류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인류가 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적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친히 참 인류와 참 이스라엘이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양밖에는 인을 뗄 자가 없습니다.

(3) 두루마리를 위하신 어린 양(6-7)

요한이 절망하고 있는 중에 한 장로가 일곱 인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다윗의 후손에게 약속한 메시아입니다(사무엘하 7:14-16; 시편 2:8). 다윗의 뿌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다윗 계통의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동산이 대적으로 인해 초토화될 것이나, 그루터기(이사야 6:13)에서 나온 가지와 뿌리와 싹을 통해 동산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 동산에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이 돌아오고, 이방인도 올 것입니다. 이사야 11:1-10의 예언입니다. 예수는 나사렛(가지)입니다. 사자가 이겼는데, 사자가 아닌 도살을 당한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사자의 승리는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완수되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사자와 같은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는 악과 죽음을 모두 정복하셨습니다. 이사야 40-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죽음을 통해 그 백성의 죄를 사하고 악의 세력에 승리합니다. 신적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중에 하늘에서 둘려온 음성(‘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도 신적 아이러니를 반영합니다. 시편 2편과 이사야 42장의 결합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이겼고, 일곱 일을 떼시기에 합당합니다. 어린양은 다니엘 7장의 인자와 같은 이에게 부여한 권세(일곱 뿔)을 가졌습니다. 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들을 찾는 하나님의 영(일곱 눈, 참조. 스가랴 4:10, 역대하 16:9)이 함께합니다.

 

성도들의 기도(8)

세상의 고난 가운데 기도할 힘을 잠시 잃었을 때,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든지 입술에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때, 신속하게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도의 기도가 하늘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향으로 어린 양께 그려집니다.

8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십니다. 두루마리는 기도와 찬양을 통해 어린양이 어떤 권세와 영광과 능력을 가졌는지를 드러냅니다. 왜 성도의 기도가 언급되었습니까? 기도는 두루마리가 개봉되어 선포되어야 할 이유를 나타냅니다. 기도는 6:9-10과 8:1-5에서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 시리즈가 하늘에서 시행하도록 만드는 정당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기도가 하늘 보좌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과 구원의 계획을 결정하고 시행 포고령을 내리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는 탄원과 더불어 제국과 그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위한 청원입니다.

 

어린 양께 드리는 찬양의 반응(9-14)

성도들은 천상의 예배를 모본으로 삼아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해야 합니다. 경제적 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도 강력한 힘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욕망을 채워 줄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린 양은 우리의 욕망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영원토록 경배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9-14)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시어 사자와 같은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입술에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기에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어린양은 구속의 행위로 인하여 찬양 받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됩니다. 어린양의 희생제사는 찬양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근거입니다. 9-14절의 찬양은 1-7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또한 전체 계시록의 주제를 설명하는 노래입니다.

(1) 첫 번째 찬양 - 네 생물과 24장로(9-10)

내 생물과 24장로는 새 노래를 불러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세 하늘과 새 땅 및 새 예루살렘 등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종말론적 사건들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것입니다.

‘새 노래’는 새 창조에 대한 찬양입니다. 구약에서 ‘새 노래’는 항상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찬양의 표현입니다(참조, 시편 33:3; 40:3; 96:1; 98:1; 144:9; 149:1; 이사야 42:10). 대적에 대한 신적 용사의 신성한 승리를 칭송하는 신앙을 위한 성전(聖戰) 용어입니다. 유대 문헌에서 이들 새 노래 본문들을 다양하게 적용 하였습니다: 다가올 세상에서 메시아 도래의 시기에, 구속 이후에, 이스라엘의 부활에, 네 번째 왕국의 패배에. ‘새 노래’라는 개념은 9-10절의 내용에 잘 들어맞습니다. 사실 9-10절은 광야 이스라엘의 소명과 사명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19:5-6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여 재해석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지만, 요한은 계시록에서 열방을 전문적으로 나타내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사용하여, 그 적용 범위를 열방으로 확대합니다. 창세기 10장과 다니엘 7장 사상의 발전입니다.

(2) 두 번째 – 천사(11-12)

천사들은 왕권이 가지는 일곱 가지 속성들을 어린양에게 돌리며 찬양합니다. 만만과 천천은 보좌를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보좌 예배 참석자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다니엘 7:10에서 파생된 표현입니다. 천사들은 어린양을 절대주권을 가진 왕으로 찬양합니다. ‘능력과 부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역대상 29:11-12에서, ‘지혜’는 다니엘 2:20에서 도출하여 일곱 완전수로 재구성합니다.

(3) 세 번째 찬양 - 모든 피조물의 찬양(13-14)

어린양의 찬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함께 찬양합니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해서임을 보충 설명합니다. 구약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의 한계를 넘어 성부와 성자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5장 예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선교적입니다. 보좌로부터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예배입니다.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두루마리가 등장합니다. 둘째, 기도와 찬양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예배입니다. 셋째,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하늘 보좌에서 인정받습니다. 유일신론에서 삼위일체로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속량하셔서 하나님의 소유 삼으시고, 나라와 제사장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제사장의 사명과 의의 통치를 구현하는 소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사명 없는 속량, 소명 없는 죄 사함은 복음의 왜곡입니다. 영광스런 부르심을 따라 삶으로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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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4-01)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4장 1-11절


 한 어머니가 딸을 전도해서 교회로 대리고 왔습니다. 딸은 교회에 이곳저곳에 있는 새신자실과 각 부서실 그리고 식당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싸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등을 들었습니다. 딸은 황급하게 어머니 손을 이끌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이런 교회는 다니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첫날 많은 것을 보았구나! 지금까지 난 한 가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보았단다. 딸아! 예배드리고 가자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들을 많이 봅니다. 이 딸처럼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요한은 지상교회들을 돌아본 후, 이제 천상을 돌아봅니다. 천상 교회를 통해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보좌 주위에 흰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24보좌에 앉고, 주변에는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과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상의 경험을 통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을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하늘 보좌로의 초대(1)

우리는 빠르게 변화되며 화려한 다양한 문화들을 봅니다.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두고 땅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늘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땅에 하찬한 것들을 집중하게 됩니다. 바울은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골로새서 3:2). 땅의 교회들을 살핀 요한에게 이제 하늘 보좌를 보여주십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1)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소개했지만, 지상에 속한 교회는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요한에게 완벽한 천상 교회를 보여주십니다. 4장 이후에서는 범우주적 계시가 나옵니다. 첫 번째로 보인 것은 열린 하늘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늘 예배입니다.

(1) 하늘 문(1a)

밧모섬에 있던 요한은(1:9) ‘성령에 감동되어’(2) 천상의 교회를 살펴봅니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1:10처럼 ‘성령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1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4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보좌가 있는 곳을 봅니다. 열린 하늘문을 통해서 본 환상은 2개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는데, 예배 이미지와 정치 이미지다.

(2) 하늘의 음성(1b)

요한에게 나팔 소리 같이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 올라오라고 말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은, 앞서 요한에게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1:10).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왜 하늘 보좌로 올라오라고 하시겠습니까? 6-16장까지의 일곱 심판 시리즈는 하늘 보좌로부터 시행되기에 중요합니다. 다니엘 7장이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네 짐승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네 짐승은 네 제국(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입니다(다니엘 2장). 고난 받는 하나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시고 짐승을 심판하십니다. ‘인자와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등장합니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인자와 같은 이’에게 열방(나라와 백성과 언어)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십니다. 다니엘이 하늘 어전회의에 참여했듯이, 요한도 하늘 보좌의 배에 참여합니다.

땅에 있는 교회는 로마제국의 압박 속에 생존의 기로에서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무소불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복음을 증언하기는커녕 타협하며 동화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신실한 중인이 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돌파구는 바로 하늘 보좌의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 7장에서와 같이 대적을 정복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으로 세우신다는 계획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를 경험하는 곳이 아닙니다. 감정의 위안을 얻는 곳이거나 현실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늘 보좌의 시각으로 현실을 전망하는 통찰력을 얻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하늘 보좌의 예배에 참여합니까?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입니다(요한계시록 3:8). 하늘 보좌는 성막의 지성소를 상징하고, 하늘 문은 지성소 가까이에 있는 성소의 분향단을 상징합니다.

 

하늘 보좌의 구성원(2-8a)

지상 교회들이 세상에서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인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영광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2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2-8a)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는 황제의 권좌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의 왕좌(16:10)가 철옹성 같아 보여도 하늘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이의 영광은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 같이 빛나고, 무지개가 보좌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이 보았던 천상 교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보좌 앉으신 이(2-3)

먼저 요한의 눈에 집중된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입니다. 천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 주변에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지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은 유대 문학에서 신적 위엄과 영광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있는 열두 개의 보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합니다. ‘무지개’는 화려함과 노아의 언약을 상기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초월성을 보호하면서도, 영광과 권세와 구원하시는 은총을 신비적으로 표현합니다.

(2) 이십사 장로(4)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보좌 주위에는 24개의 보좌가 있고,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금관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24장로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거룩함과 순결함을, 이들이 쓰고 있는 금관은 왕권과 같은 권세를 나타냅니다.

보좌 주위에 이 24장로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위에 쓰여 있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21:12) 및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 쓰여 있는 12사도의 이름과(21:14) 연관될 수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가능성이 큰 해석은 24장로를 천사와 같은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늘에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 있으며(시편 89:7)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좌우편에는 하늘의 만군이 있습니다(열왕기상 22:19). 24장로는 이들과 맞먹는 천상의 존재들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장로와 천사는 비슷한 일을 합니다. 예를 들면, 24장로와(5:8) 천사(8:3-4) 모두 성도의 기도가 담긴 향을 관장합니다. 또한 계시를 알리는 친사의 역할을(1:1) 장로가 수행하기도 합니다(5:5;7:13-14).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천사들 역시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8:3; 요한복음 20:12).

일곱 교회 메시지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면류관과 흰 옷과 통치권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24장로는 이기는 자로서 약속의 신실함을 증명합니다. 누구나 이기는 자는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보좌와 면류관은 정치적인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입니다(이사야 24:23).

(3) 일곱 영(5)

요한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영’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및 권능을 상징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에는 우레, 번개, 구름, 큰 나팔 소리 등이 동반되었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출애굽기 19:16). 번개, 음성, 우레(=지진)'는 하나님의 신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표현 방식입니다. 심판이 하늘 보좌에서 명령이 하달되어 땅에서 실현됨을 시사 합니다.

하늘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스가랴 4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입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역대하 16:9). 7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충만한 상태로 존재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1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1:10), 4장에서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비전을 봅니다(2).

(4) 네 생물(6-8a)

요한이 또 바라본 것 중에 하나는 보좌 주위에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었습니다. 이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10장에 묘사된 내 생물, 즉 그룹들 및 이사야 6장에 묘사된 스랍들을 연상시킵니다. ‘네 생물’은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피조물 중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들을 나타냅니다. 네 생물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또한 ‘네 생물’의 여섯 날개와 가득한 눈은 이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늘 깨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네 생물’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며 찬양합니다.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하늘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용된 다양한 표현들과 더불어, 이 표현은 하나님의 또 다른 초월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하늘에 있는 투명한 유리 바다의 모습은 이 세상의 혼탁한 바다의 모습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하늘 보좌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되고 하나님의 위엄이 온전히 나타나는 고요한 곳입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8b-11)

모든 영광과 존귀는 오직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만 경배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이미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린도후서 4:15). 이제 요한은 하늘에 속한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8…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8b-12)

천상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위에 24장로들과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대리인으로서 ‘많은 눈으로’ 세상을 살피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1) 네 생물의 찬양(8b-9)

하늘 보좌의 예배는 네 생물과 24장로가 주도하여 끊임없이 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영광을 돌려드림이 그 초점입니다. 먼저, 네 생물은 온 우주의 생명체를 대표하여 찬양을 드립니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은 영광을 돌려드림입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능자이십니다(1:8). 역사에 대한 주권은 주 만군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십니다. 출애굽기 3:14(‘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짐승인 로마 황제를 패러디합니다. 반면에 짐승은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올 자’(17:8)입니다. 짐승은 현재에 어떤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를 바로와 같이 모조품으로 전락시키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삼중 거룩송입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거룩하다’ 삼중송은 로마의 제국적 본성에 대한 저항적 찬송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안식의 거룩을 파괴하는 체제에 저항합니다. 24장로들은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는 ‘엎드리고, 경배하고, 자신의 면류관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갑니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집니다. 장로들은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고대 도시의 대표들이며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의 상징인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져버립니다. 포기하며 갖다 바칩니다. 둘째,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 속에는 새 장조에 대한 기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피조세계는 죄악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 땅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는 ‘처음 것은 다 지나갔다’(21:4)를 거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로 발전되어 완성됩니다. 창조에서 새 창조로의 여정에는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간절합니다(이사야 43:18-19; 65:17). 첫째 창조는 퇴보하였지만 완전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 기대가 장로들의 찬양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2)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10-11)

오한계시록 4장의 예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서 보좌를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중심에 계십니다. 성령과 네 생물이 예배자의 중심입니다. 여기에 24장로와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많은 무리’와 모든 피조물(5:13)이 점차 동참합니다. 둘째는 예배의 형태가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밤낮 드리는 찬양 예배입니다. 찬양 속에는 계시록의 창조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창조와 역사와 생명의 절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 유일성, 창조주의 진정한 초월성이 그것입니다. 새 창조에 대한 기대를 듬뿍 담고 있습니다. 셋째, 예배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예배는 감정도 미학도 논리도 아닙니다. 예배는 저항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군왕들과 우상들에게 돌리는 숭배 행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를 지배하거나 억압하고 얽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과 전복 행위가 예배입니다. 장로들도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으로 던지며, 명예와 권위를 포기하고 봉헌합니다. 교회의 예배는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고 횡제를 신격화하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누구를 경배할 것입니까? 진정한 예배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짐승(제국)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세계 권력 구조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항하고 전복하고 대안을 만들어갑니다.


세상의 고난과 핍박이 가득한 땅을 보면 비참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의 하나님 나라를 볼 때, 성도들은 희망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뜻을 세우시면 반드시 이루어가지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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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3-03)


일곱 교회(7) :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종종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너무 한쪽으로 기우러진 모습이 때로는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추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않는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안에 있는 열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열정이 없어서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잃어버린 열정이 회복되길 기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일곱 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모습은 토해 버리고 싶을 만큼 역겨웠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말하지만,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문 밖에 서서 두드리며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권면(14-17)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9:23)처럼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헐벗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책망만 받았겠습니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4-22)

열심과 충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일한 삶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 장애물입니다. 세속적 부요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고 미지근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지 않습니까!

(1) 수신자(14a)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가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부유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로부터 약 70km로 떨어진 곳으로 에베소와 교통과 금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에는 양털이 생산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재정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에 황제 숭배가 심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핍박 없이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들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참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아십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4b)

라오디게아 교회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그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 근본이십니다. ‘아멘’, ‘충성’, ‘참’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불립니다. 19:11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1:17)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요한복음 1:3).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사데 교회는 저의 죽은 혼수상태지만 몇몇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죽었다고 봐야 할 교회를 신실한 증인으로 살리기 위해 맞춤형 계시자로 그리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책망(15-17)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기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15a). 그 이유는 어려움을 모르고,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 없고 책망만 열거됩니다.

① 냉정한 진단(15-16)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만 들은 교회인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들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미지근한 교인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섬기려 타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타협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확실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타협은 세상과 하나님을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4).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타협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사실상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협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착각에 빠진 진단(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핍박이 없는 그런 교회였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칭찬만 들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외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책망만 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번성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으며(2:9),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작은 교회였습니다(3:8).

(4) 그리스도의 처방(18-20)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명령하시며 미지근한 그들을 입에서 토하여 내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둘 중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미지근한 상태로 있는 그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① 질병에 대한 처방(18)

장점이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적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위선 중의 위선은 무조건 회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유효적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상세하게 맞춤형 처방을 내놓습니다. 첫째는 도시의 장점이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임을 지적합니다(18). 먼저 영적 빈곤을 영적 부요로 바꿔야 합니다.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부자 도시에 산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금을 제련하듯이 정결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잠언 27:21; 말라기 2-3; 스가랴 13:9; 베드로전서 1:6-9). 다음으로 영적 벌거벗음을 영적 단정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긴 옷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상업 중심지에 살고 있는 교회가 낮 뜨겁게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입니다. 성경에서 벌거벗음은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이사야 43:3; 에스겔 16:23; 23:29; 나훔 3:5).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자가 가장 수치스럽습니다. 다음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 영적 시각장애인이 됩니다. 세상은 선악에 대한 분별, 모조품과 진품에 대한 구분, 가짜 뉴스와 진실에 대한 판단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가짜를 퍼트리는 본거지가 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 됩니다. 영적 통찰력의 회복이 요구됩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나은 점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아닙니다. 진리를 넘고 역사의 방향을 알기에, 세상에 영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② 사랑하니 책망(19)

둘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19).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사랑(헤세드)은 언약에 대한 신실한 반응입니다. 언약적 상호 책임을 지기에 책망하고 징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언약에 대한 열정을 폭력으로 표현한 거룩한 전통이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랬습니다(민수기 25장). 마카비 가문이 그랬다. 사악한 헬라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유대를 해방시켰습니다. 신약의 열심당원이 그랬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로마의 폭정에 결사 항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열정을 가졌습니다(요한복음 2:17).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빌립보서 3:6).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 열정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항거하며,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열정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③ 신실한 청지기(20)

셋째로,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20).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는 종교화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립니다. 전형적인 해석은 신자의 집에 손님으로 오신 그리스도, 또는 성찬이 시간에 문밖에 서 있는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공관복음의 파루시아 비유들의 전승사적 발전입니다. 누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4장의 깨어 있는 청지기의 비유, 마가복음 13:33-37의 문지기 비유가 이 구절의 원래 전승입니다. 그리스도는 밤중에 도착하는 주인의 모습입니다. 주인은 먼 거리에 불일이 있어서 언제 집에 도착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주인의 귀환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집이나 문을 신자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알레고리는 도둑과 같이 오시는 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5) 그리스도의 약속(21-22)

20절에 이어서 21절은 어린양의 대잔치, 종말론적인 메시아 잔치의 주제를 부각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는 약속은 사실상 경고입니다. ‘이기는 자’는 미완성 독립격입니다. 약속의 유업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을 말합니다. ‘이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앞에서 처방한 해결책을 시행하여 회개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부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영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디모데전서 6:9), 아직도 많은 사람이 현실적 부와 영적 복을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도는 현실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스스로 채찍질하여 신 경주에 매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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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3-01)


 일곱 교회(5,6) : 사데,빌라델비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 1-13절


교회를 평가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규모와 교인의 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과 신실한 충성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길 바랍니다.

 

사데 교회와 빌리델비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두 교회는 대조적입니다. 사데 교회는 몽유병 환자 또는 식물인간 닽은 교회입니다. 반면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지만 큰 교회입니다. 사탄의 회당을 굴복하게 만든 교회입니다. 승리한 교회며 어려움을 극복한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메시지(1-6)

사람의 겉모습이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몸과 정신이 다 건강한 것은 아니듯, 눈에 보이는 교회의 활동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반드시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하다고 모든 꽃이 나중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가짜 꽃인 조화(造花)는 화려하지만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자신들이 살아 있는 교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6)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행실은 요한계시록에 반복해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도들은 깨끗한 행실을 상징하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여 합니다.

(1) 수신자(1a)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 7교회 중에 가장 성적표가 좋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형식주의 신앙과 영적 무기력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서 사데 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같습니다. 사데에는 가장 큰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이라는 말과 어감이 비슷합니다. 신앙고백과 명성에 비해 영적 건강은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데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b)

좋지 못한 성적표에서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초라한 등불 같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서 사데 교회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1b)로 나타나십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와 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붙잡혀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필요성이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의 강한 역사를(1:4,16), ‘일곱 별’은 교회를 이끄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말합니다(1:2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강한 역사와 교회의 지도자를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품고 사데 교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온 교회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3) 교회의 모습(1c)

하나님의 열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보시고 평가하신 것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c)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행위를 볼 때, 그들은 명목 상 살아 있을 뿐 실상은 죽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즉 사데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영적으로 죽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외적 핍박이나 내적 미혹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2:23).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7:16). 즉 보이는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마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인들은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순종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4) 처방(2-3)

사데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행위의 온전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1절에서 죽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는 것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곧 사라질 판이었기에, 사데 교회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데 교회에 아직 회개의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심판이 선포되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18:4).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했던 것처럼(2:5), 사데 교회는 이전에 받고 들은 것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회개는 처음 신앙을 기억하고 다시 지키는 것입니다.

(5) 칭찬(4)

사데 교회 교인들의 대다수가 사실상 죽은 성도였지만, 그 중에는 몇 명은 살아 있는 성도였습니다. 본문에서 놀랍게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고 소개합니다. 이들은 교회 안의 분위기와 다르게 옷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사데 교회가 온전하지 않은 행위 때문에 책망 받은 후에 옷이 깨끗한 교인들이 칭찬을 받는 것으로 보아, 깨끗한 옷은 성결한 신앙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깨끗한 옷은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연상시킵니다(19:8).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생실을 상징합니다.

(6) 상급(5-6)

본문에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이기는 자’에게 세 가지 약속이 제시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어린양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 종말론적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이기는 자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데 교회 교인들이 입게 될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기는 자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기록된 책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 32:32-33에 처음 등장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므로(21:27),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자는 말입니다. 반면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20:15).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 앞에서 당신을 시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사람 앞에서 당신을 부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32-33).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7-13)

오늘날 교회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은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에 맞게 더 많은 일들과 더 많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13)

우리는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든 충성과 순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과 하늘의 기쁨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1) 수신자(7a)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가운데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킴으로서,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라고 하는 지역은 사데의 동남쪽 약 40Km 떨어진 고원도시로써, ‘작은 아덴’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포도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암미아(Ammia)라고 하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기 시작하면서, 큰 부흥(AD 100-160년)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암미아는 초대교회 내에서 필립의 네 딸들과 대등한 지위를 가졌던 여인으로, 예언과 은사가 있어서 교회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그 당시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많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도전도 복음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7b)

빌라델비아 교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여닫으시는데, 예수님께서 닫으시며 누구도 열 수 없고, 여시면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십니다(5:5). 예수님께서 여닫으시는 것은 하늘나라, 곧 새 예루살렘의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1:18).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9-10)

서머나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인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이듯(요한복음 8:44) 사탄의 회당인 자칭 유대인들의 특징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짓말은 시각한 죄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 못에 들어갑니다(21:8,27; 22:15), 반면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사천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들입니다(14:5). 요한계시록은 거짓말을 피하고 진리를 증언할 것을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와도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유대인 중 몇 명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발 앞에 절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발 앞에 절하는 비전을 말하고(이사야 49:23), 요한은 유대인들이 교회의 발 앞에 절하는 비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참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 유대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인내는 고난을 전제합니다. 인내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2:2,19;13:10;14:12). 로마서에 따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로마서 5:3-4).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박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를 요구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온 세상에 임할 종말론적 시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종들과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 시험의 때를 무사히 통과해 이기도록 지켜 주십니다.

(4) 상급(11-13)

① 면류관(11)

예수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믿음을 굳게 잡고 버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면류판을 바라보며 환난을 이겨냅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로마와 교회를 공격하는 자칭 유대인 및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면류관을 뺏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악의 세력입니다. ‘면류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στεφανος/스테파노스인데, 이는 운동 경기에서 이긴 자가 받는 ‘화관’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② 성전의 가둥(12-13)

‘이기는 자’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즉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건물의 기둥이 옮겨지지 않듯이, 그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또한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및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 적힐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징합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짐승의 표, 곧 짐승의 이름을 받듯이(13:16-17),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을 것입니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14:1),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22:4).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도 기록됩니다. 이것은 이기는자만이 알고 누리게 될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고,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주님은 교회가 핍박 중에도 인내로 말씀을 ‘지켰기’에 시험의 때에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작은 능력이 작은 증언의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증언하는 힘은 약함과 십자가를 지는 신실함에서 발현됩니다. 부족한 중에도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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