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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3)


일곱 교회(4) : 두아디라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는 죄를 범하고도 회개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지속적으로 성숙한 신앙을 보여 오던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하여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경고의 말씀을 통해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지혜를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두아디아 교회는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으로 위기에 처한 교회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바알의 경제사상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경제적 풍요와 성장을 추구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두아디라에 나타난 그리스도(18)

주님께 칭찬 받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 가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는 계속 자라 가야 합니다. 또한 종교적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신비 체험에 이끌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8-29)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 교회들 중에 교차대구 형식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당시 교회의 신앙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평균치입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무역에 최적화된 곳으로 제조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상인들이 상주해 있었으며, 바울이 두아디라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났듯이(사도행전 16:14) 이곳은 옷감의 재료인 양털 제조업도 성행했습니다.

(1) 수신자(18a)

요한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18)고 밝힙니다. 두아디라는 산업의 중심지로서 노동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어 곳이었습니다. 주석을 제련하여 많은 철모를 생산하였고, 각종 섬유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산업을 길드의 수호신인 아폴로(Apollo)가 돌봐준다고 믿었습니다.

또 주후 83년에 죽은 도미티 아누스 황제의 아들은 별이 되어 제우스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일곱 별로 둘러싸인 장갑 위에 앉아있는 형상의 데나리온이 두아디라에서 주조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8b)

이러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는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과 믿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업, 즉 행위를 알아주십니다. 심판을 하시고 적들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은 자신만이 유일한 왕이요, 시편 2:7에 예언된 주권자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19)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지상명령인 사랑 및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믿음의 본을 보인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섬김과 인내의 행위’로도 칭찬을 받습니다. 이 행위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섬김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사역도 포함합니다. 인내 혹은 참음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 줄곧 요구되는 중심 주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랑과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아지는 신앙의 진전을 보였습니다. 이 점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교회였습니다.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며 그들의 행위가 약해진 것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신앙의 진보가 있다는 것은 근성, 내공이 있다는 뜻입니다.

(4) 그리스도의 책망(20-21)

두아디라 교회는 핍박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사탄은 핍박만 하지 않았지만,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여러 가지 유혹의 미끼를 던집니다. 강한 전투력을 가진 신앙인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사탄의 차선책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① 이단을 용납(20)

먼저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깨달음이 적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이끈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정신을 따랐던 것입니다(열왕기상 18:4-19; 열왕기상 9:22).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며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14-15), 두아디라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미혹에 넘어가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세벨은 남편 아합과 함께 바알 숭배를 부추긴 인물입니다(열왕기상 16:31). 자칭 사도(2)와 자칭 유대인(9)같이, 이세벨은 자칭 선지자일 뿐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행음은 육체적 죄와 더불어 영적 죄를 가리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성장을 추구하다가 기독교 교리가 부족하여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퇴보가 아닌 진보, 쇠퇴가 아닌 성장은 좋습니다. 그러나 진보와 성장에 집착하다 보면,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주변 사회 환경과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영향을 받는 온도계가 아니라 영향을 주는 온도조절기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② 이세벨 용납(21)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했습니다. 이세벨은 발람, 니골라 당을 주관하는 목자이며 거짓 선지자입니다. 어떤 교훈을 했는지는 명백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이세벨은 악성 바이러스와 같았습니다. 한번 들어오면, 몸 전체를 망가트립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합의 시대로 돌아가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북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가득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종교는 사회 경제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냅니다. 종교와 정치, 경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증거는 나붓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이세벨은 바알 종교와 더불어 페니키아의 경제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던 경제관은 희년 경제법입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사고팔 수 없는 유업입니다. 바알의 경제관은 토지는 사고팔 수 있는 상품입니다. 유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소득의 본질입니다. 토지는 그 핵심입니다. 토지를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면, 삶의 터전을 잃은 사회적 약자는 영구적으로 취약 계층으로 내몰립니다. 불평 등이 극심화 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도입된 바알 경제법은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개혁을 담당한 예후 왕가에도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그 영향력은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때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입니다. 미가는 바알 경제관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경고한 때에,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의 집으로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른다’(미가 6:16)고 책망했습니다. 이것이 북왕조 멸망의 이유입니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조 유다의 여호람과 혼인하여 6년간 통치하면서, 희년토지법을 붕괴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이세벨의 문제는 우상숭배만이 아니라, 경제의 기본을 붕괴시키는 바이러스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에서 경제적 허브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무역 길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산업 모두가 길드에 가입하여 경제 활동을 했습니다. 모든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유대교와 같이 길드의 수호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헌물 봉헌에 참여할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도시의 축제는 부도덕한 행동들이 동반되었습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종교와 경제를 분리시킵니다. 우상숭배만 하지 않으면, 경제 문제는 타협해도 되고, 영과 육을 분리시킵니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버가모와 두아디라는 비슷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버가모에서는 거짓 교사가 침투할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서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견고한 성을 만들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5) 회개를 촉구(22-23)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라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큰 환난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 환난의 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영적 간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경제적 동기로 우상승배를 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예레미야 17:9-10),

두아디라 교회는 왜 우상승배에 연루되었습니까? 경제적 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지속적으로 이세벨의 죄에 참여할지, 회개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세벨이 당한 결말을 똑같이 당할 것입니다.

 (6) 약속(24-28)

교회 공동체가 신앙적 성장을 이뤄가는 가운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사단과 깊은 교제에 참여한 자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은 이들에게 만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거부한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현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훈은 ‘사탄의 깊은 것’과 관련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팽팽히 나뉩니다. 첫째로, 이세벨이 노골적으로 사탄의 깊은 것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짐작건대 이세벨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마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주장을 펼 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 표현은 이세벨의 교훈에 대한 냉소적 비판일 가능성도 큽니다. 아마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사탄의 깊은 것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9). 마찬가지로 자칭 선지자인 이세벨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안다고 가르쳤지만, 실상은 사탄의 깊은 것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해석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① 만국을 다스림(26-27)

‘이기는 자’, 곧 끝까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은 것과 같은권세를 이기는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메시아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고(12:5)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 것입니다(19:15). 이기는 자 역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듯 한 것입니다. 이는 시편 2:9을 인용한 것입니다. ‘운명의 역전’은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르느라 환난을 겪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신원해주시는 날, 자신들을 박해한 자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② 새벽별(28)

‘이기는 자’는 새벽별(morning star)을 받을 것입니다. 22:16에서 ‘광명한 새벽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을 책임지십니다. 지금까지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표현 뒤에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했지만,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부터는 그 순서가 바뀝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이세벨의 교훈과 행위를 따르지 않은 신실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실과 위협을 감수하며 지조를 지킨 이들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돈과 음행은 여전히 강력한 유혹이며, 이단은 교회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세력입니다. 남은 자로서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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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2)


 일곱 교회(2,3) : 서머나와 버가모 교회

요한계시록 2장 8-17절


사람들은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버가모는 믿음 생활하기에 나쁜 환경이었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사탄의 왕으로 지배당하고 우상으로 충만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버가모 성도들은 안디바 성도가 죽은 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환경을 핑계로 세상과 타협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비교적 건강한 교회입니다. 가난한 도시에 자리 잡은 교회지만, 부요한 교회입니다. 위협적인 집단인 유대인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신실한 증인이 무엇인지를 증명한 교회입니다. 환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의 기로에 선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타협과 융화를 통해 동화할 것입니까? 충성된 종 안디바가 그 모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권면(8-11)

고난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마땅히 받게 되는 참된 믿음의 표지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을 세상은 언제나 미워하며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교회를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교회를 고난 속에서 지켜 주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임하신 교회는 서머나 교회입니다.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8-11)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아시아의 왕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아시아의 첫 번째 도시라는 타이틀을 걸고 에베소와 경쟁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특권은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1) 수신자(8a)

서머나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는 ‘몰약’이란 뜻입니다. 몰약은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누르고 부서질수록 더욱 향기를 뿜어냅니다. 고난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절망적입니다. 반전의 가능성은 고난 중의 소망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8b)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으로, 죽었다 살아나신 이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 교회가 반전 드라마를 쓰게 하는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받고 있는 고난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고난과 핍박이 심할수록,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와 부활의 향기로 역사를 장식합니다.

(3) 칭찬(9)

왜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궁핍에 직면했습니까? 고대 도시는 시민 사회입니다. 도시의 질서와 번영을 위해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요구합니다.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애국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도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도록 배제합니다.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합니다. 거부하면 거래에서 배제됩니다. 서머나 교회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었던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시민 종교에 참여하여 종교적 애국심을 발휘하며 상업적 유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 것입니까? 여기에 유대인들의 비방과 고소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황제 숭배도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면제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신론자이고 애국적이지 않다고 비방하고 고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소명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닌 로마제국을 통한 사탄의 통치에 부역하는 자들입니다. 진짜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입니다.

(4) 격려와 약속(10)

서머나 교회는 다행히 예수님께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수고의 향기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켰습니다. 고난이 거셀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게 퍼져 갑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몇 사람이 투옥되는 시험이 닥칩니다.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10일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시험을 받았던 일시적인 시련의 기간을 상징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왕에 대한 충성 표시이자 신과의 혼연일체가 된다는 일상적인 의례 행위입니다. 거부하는 것은 불이익과 함께 사회적 파장이 따릅니다.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교묘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압박을 가합니다. 정치적인 타협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저항해야 합니다. 사탄은 육신적으로 투옥시키고 심지어 죽일 수 있어도, 둘째 사망의 권세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며 주신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마태복음 10:28). 고난에 직면한 교회는 죽기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누구에게 충성했습니까? 국가에? 교회가 애국종교를 지향하는 것은 사탄과 타협하는 길입니다. 집단에? 교회에? 목사에게? 사탄이 주는 거짓 메시지들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피스토스 πιστος)는 신실함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피스티스 πιστος)을 신실함으로 증명했습니다(야고보서 2:21-22). 순교를 각오하고 신실한 증언을 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국가나 사회에 충절을 바치지 않거나, 이익집단의 논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난과 격리와 모함과 혐오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희생시키도록 요구할 때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시민 사회나 어떤 종교 집단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제국의 유혹에 저항하야 합니다. 시민종교의 편이함을 거부해야 합니다.

(5)경고와 약속(11)

이기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가리킵니다(21:8). 이기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권면(12-17)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합니다. 무력으로 박해하기도 하고 교묘하게 미혹하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큰 효과를 거둔 듯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서 교훈을 받아 사칸과의 싸움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1-17)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세상 문화를 접해야 하지만,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핍박은 이겨 냈지만 거짓 선지자에는 미혹된 버가모 교회는 속히 회개해야 했습니다.

(1) 수신자(12a)

버가모 교회는 핍박이 매우 심한 곳이었습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것으로 안디바가 순교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에는 거대한 제우스 제단이 있었습니다. 또 황제 숭배가 성행했던 도시로, 그곳에는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2b)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셨습니다(이사야 11:4). 예수님께서는 1차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악의 나라들에 칼을 겨누고 심판하습니다. 사형 처결권을 가진 로마제국에 대한 논박입니다. 진정으로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쪽 날이 선 날카로운 칼을 가지신 분으로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죄와 타협하며 믿음을 저버린 자는 벌하십니다.

(3) 그리스도의 칭찬(13)

버가모 지역은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의 중심지로서 믿음을 갖고, 지켜 나가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증인 안디바가 죽음을 방하며 버가모 교회는 심각한 영적 전쟁을 치렀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순교자가 있을 정도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정의를 내세운 로마의 불의한 사회 체제를 심판하십니다. 제국의 힘에 타협하여 배교하는 교회를 향해서 칼을 겨누고 계십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 숭배가 문제입니다. 1세기 당시까지 로마 중앙정부는 로마 황제 숭배를 조직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핍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지방정부가 앞다투어 자발적으로 황제 승배의 신전을 유치하였고, 간헐적으로 기독교를 반애국적, 반시민사회적, 또는 무신론자로 몰아서 핍박하였습니다. 충성된 중인 안디바가 순교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안디바는 집단 기억으로 남아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책망(14-16)

사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고, 경제를 통해서 삶의 현실을 통제하고 조종합니다. 종교와 정치 또는 종교와 경제의 분리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대 사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한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는 저항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타협을 하게 만습니다. 이것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입니다. 발람은 ‘그가 백성을 삼킨다’는 뜻입니다. 니골라는 ‘그가 백성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위에 굴림하며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점쟁이의 교훈입니다. 성공과 행운을 위해서는 신앙을 팔아먹도록 만드는 교훈입니다(유다서 1:11).

요한 당시에 발람의 추종자들은 우상숭배논 거부하지만, 우상에게 봉헌한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식사는 영양 보충의 기회가 아니라 사회적 교제의 자리입니다. 집단의 응집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의식입니다. 발람의 추종자들은 상권을 장악한 길드에 참여하고, 황제 숭배 의례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방 신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헛것에 제사를 드린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거짓 교사들은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주장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만드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탐욕은 부요를 가져오고, 신앙은 가난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발람은 누구입니까?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해야 교회가 사회적 영향 권력을 끼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교회가 부와 권력과 손을 잡고 그들을 옹호하게 만듭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교리적 순결성에 너무 무관심하다가, 타협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습니다.

(5) 약속(17)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발람의 길을 따를 것입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까? 감춰진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은 잔치의 초대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감춰진 만나’는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이 누린 만나를 상기시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의 상징입니다. 흰 돌은 보통 사면 투표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출입증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흰 돌은 세상 권력이 우상숭배 하는 제의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범죄로 판결한 결정을 뒤집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들 약속은 우상숭배의 종교, 사회적 환경 속에서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특히 거짓 진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수용해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요즘 내 믿음을 위협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은 무엇입니까? 안디바의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버가모 교회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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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2-01)


일곱 교회(1) : 에베소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7절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 중에 청춘의 연인들의 사랑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항상 같이 다니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러던 종종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첫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은 지역에 많은 다른 교회들이 있었지만, 요한은 당시의 묵시문학처럼 숫자를 통해 의미를 창출합니다. 첫 번째 가장 좋지 않은 모델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를 소개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이방인 세계에서 기독교가 시작하는 무렵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성의 사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체 교회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정확하게 관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주는 분이기에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면면히 알고 있기에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잘 알고 계십니다. 무슨 정보나 소문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속에 그리스도는 함께 계셔서 코이노니아를 하시기에, 경험적으로 잘 아십니다.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사이에 계시는 분입니다(요한계시록 1:12-13, 30). 우리 주님은 교회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놀랍도록 세미하고 정확하게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각 교회의 장점을 격려하시고, 그 단점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물론 일일이 점검하면서 지적하시는 귀찮은 분은 아닙니다. 너그럽게 신실하게 기다리십니다.

(1) 수신자(1a)

에베소 교회는 복음이 처음 소아시아에 전파될 때 그곳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행정관이 소아시아에 방문할 때 들어가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 지역의 관문 도시였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모습(1b)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메시지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내용은 교회마다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의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점검하시는 제사장처럼 등장하십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모습은 부활 승천하셔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에베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빈틈없이 살피십니다. 그래서 ‘안다’고 하십니다. 신의 부재 시대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바로 이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2-3)

거짓은 사람을 속이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교회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은 사칭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더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자칭 사도라 하고, 거짓 유대는 자칭 유대인이라며, 거짓 선지자는 자칭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낸 메시지 중에 첫 대상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는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했으며, 악한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첫째는 행위(works)와 수고(labors)와 인내(endurance)입니다. 이 세 가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유사 합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데살로니가전서 1:3), 기독교 신앙에서 세 개의 기둥인 믿음, 소망, 사랑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믿음은 행위로 증명됩니다. 사랑은 수고로 열매를 맺습니다. 소망은 인내로 생명력을 가진다. 둘째는 교리적 정통성(데살로니가전서 1:3)과 신학적 분별력으로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를 검증하여 배척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순회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순회 사역을 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손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순회 사역자들 중에는 잘못된 교리와 도덕적 흠결과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로마 사회의 견유철학자들과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말은 달콤한데,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말을 내뱉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들과 비교될까봐 매우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량 사역을 하며 친히 일하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분별이 어렵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검증이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무법자들과 이단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비느하스와 마카비와 같은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단 척결에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책망(4)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점점 형식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밥벌이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에베소 교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마치 현재 에베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현재의 에베소는 에게 해로부터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신약 시대에는 소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였습니다.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리적인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가이스텔 강의 입구에 있는 에베소는 강에서 내려오는 퇴적물들로 항구가 막히고 습지로 변해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Orthodoxy)을 지키다가 정행(Orthopraxy)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칭찬’만 보면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균형 잡힌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책망한 바리새인들의 냄새가 납니다(누가복음 11:42). 손 대접하기와 구제, 목회적 배려와 훈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와 수고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마르다와 같이 비난하는 마음과 불평이 생깁니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를 대기 일쑤고, 열정적인 사람은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교리적 순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웃과 사회에 담을 쌓고 경계를 하는 태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부의 문제에 골몰하다가 외부에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주변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이 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진보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인 태도를 지닙니다. ‘정통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킨다.’(William Barclay). 첫사랑은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의 사랑입니다. 끼리끼리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잃어버렸다’(아피에미,ἀΦίημι)는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결혼관계로 말하자면 이혼의 위기에 처했습니다(예레미야 2:2).계시록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마태복음 24:12).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고 동화되어가는 사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다음 세대는 첫 세대가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을 상실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해결책(5-7)

사람들은 외형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열심히 헌신하고 있으면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교회의 일을 해나갈 때 습관적이고 의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의 숨은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자신도 모르는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5-7)

교회 사이를 다니셨던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보시면서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기꺼이 고난을 수고와 인내로 받았습니다. 또한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을 밝혀내고 거절했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1) 권고(5-6)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망각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심각한 경고를 받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이 없습니다.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한 경고입니다. ‘촛대’는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의 상징입니다(스가랴 4장). 이스라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이방인의 빛입니다(이사야 42:6-7; 49:6).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마태복음 5:14). 촛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일곱 촛대 메노라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세상을 밝혀 비추는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촛대가 서있는 교회입니다(참조. 스가랴 4:11-14).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음을 선언하는 영적인 사망 선고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기억과 회개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생각하고’로 번역하지만, 성경 전승에서 기억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단어 므네모뉴오(μνημογευω)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상고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역사적 신앙인 기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신앙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신앙적 회귀 본능은 신앙 생명에 본질적입니다. 신앙적 기억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방향 감각을 사실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역사적 기억에 정초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잠회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 재설정(re-orientarion)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디모데후서 1:6).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앞 세대와 같이 신실한 복음 증거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중해 사회에서 사랑은 들러붙는 것(attachment)이고, 미움은 떨어지는 것(detachment)입니다. 그래도 에베소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니골라 당을 미워합니다. 니골라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니골라(백성을 정복한다)와 발람(백성을 삼킨다)은 같은 뜻을 가진 헬라어와 아람어입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점쟁이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훼손한 장본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미움은 거리를 두고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니카오)와 니골라(니콜라이테스 백성을 정복하다)는 언어적 유희입니다.

(2) 상급(7)

예수님의 말씀은 성려의 말씀과 동일시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던 생명나무는(창세기 3:24), 새 예루살렘에 다시 등장합니다(22:2).

생명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에덴에서와 같은 친밀한 교제의 회복을 원한다는 초청입니다. 인류와 신앙의 원천으로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선물들, 하나님과의 격의 없는 친밀한 교제뿐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가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원래 소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입니다. 과연 관문 도시에 자리를 잡은 교회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합당합니다. 창조의 원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베소 교회는 반드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형편을 아시고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바라며 더욱 수고하고 인내해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또한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기 위해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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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1-02)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장 9-20절


병든 부모님께서 계시면 자녀들이 수고합니다. 자녀들은 최선을 다해서 부모님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간호합니다. 열심히 간호의 결과로 부모님의 건강이 좋아졌다면, 그 동안에 자녀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건강해진 것 하나만으로도 그 동안 수고에 대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복음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모든 고난을 씻어줄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친 제자입니다. 그는 지중해 있는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으로 계시를 받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환상을 보고 그분이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부분은 시각적인 환상으로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요한의 자기소개서(9-11)

‘사명자는 고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데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환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뜻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동참시켜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함께 사명을 감당하며 시련을 견뎌내는 공동체로 성장해야 합니다.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9-11)

사도 요한은 안락한 환경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유배를 당해 밧모 섬에 갇혀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밧모 섬에서 기도하던 중에 이 환상들을 보고 본 것입니다. 본 환경을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 요한과 그의 소명(9-10)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모든 교회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곳마다 거친 박해의 파도가 휩쓸고 있었습니다.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소개는 요한이 영적 권위로 지시하거나 교육하려 들지 않고, 다만 수신자들과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시 성도들과 함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밝힙니다. 편지를 읽는 수신자들과 함께 고난을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도’이지만 성도들을 향해 동일하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다른 지역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처럼 요한 자신도 동일한 고난에 동참하며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이해한 호칭입니다.

유배당한 밧모 섬에서 바울은 계시록을 받았습니다. 계시를 받을 당시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라고 회상합니다. ‘주의 날’은 ‘주님에게 속한 날’ 즉, 그분이 부활하셔서 그분의 날로 인정된 일요일을 가리키는 ‘주일’입니다. 그는 주일날에 예배드리면서 성령의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성령의 영감아래 있던 것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성령을 통해 ‘나팔소리’와 같은 큰 음성으로 계시가 임했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크고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요한이 받은 환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언하신 말씀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1:19, 4:1,2; 17:3; 21:10).

(2)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11)

요한은 초자연적인 ‘나팔 소리’와 같은 속에서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당시 고난당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물론 당시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한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장차 심판의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거짓 선지자들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는 위로의 책이지 공포의 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요한처럼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보시고 인도하심을 알게 될 때, 더욱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모습(12-16)

예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감찰하시고 최종적인 심판의 권능으로 온 우주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생명을 위협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그들마저 심판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면 주님께서 먼저 싸워 주실 것입니다.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12-16)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는 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핍박을 견디지 못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사람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위로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 위로는 고난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 계심을 밝힙니다.

(1) 일곱 금 촛대 환상(12)

요한은 뒤에서 들리는 ‘편지를 보내라’라는 소리에 몸을 돌이켰습니다(12). 틀림없이 그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 분이 위대하고 위엄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요한은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와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처음 본 것은 일곱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는 하나의 줄기에 일곱 자기 모양을 한 촛대인데, 스가랴 4장에서 온 것입니다(스가랴 4:1-14). 스가랴에서는 일곱 촛대가 하나님의 일곱 눈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일곱 영들은 촛대로 상징된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입에 참여하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20).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촛대에 임재하시고, 일곱별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2) 인자와 같은 이의 환상(13-16)

요한이 보았던 환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은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6)을 회화적으로 묘사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초월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일곱 촛대뿐만 아니라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를 봅니다. 이 ‘인자 같은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모종의 방식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함께 계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모습은 대제사장이 입던 옷입니다(출애굽기 25:6; 28:4; 29:5; 39:29; 에스겔 9:2; 28:4; 39:29; 다니엘 1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을 직접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금띠는 왕의 권세와 부요함을 상징합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완성자이심을 알리십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끄시는 중보자이심을 보여줍니다.

더 나가서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은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부리는 분이라는 것이며,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또한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비단 얼굴뿐만 아니라 그분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요한이 본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인 양털, 눈, 불꽃, 청동, 큰 물소리와 같이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권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위엄 찬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서, 압도되어 그리스도의 발 앞에 요한은 쓰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성취해 가십니다. 오늘도 대제사장으로서 성도들과 교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핍박당하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겠습니까! 외형적으로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영광의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교회 사이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으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요한의 반응과 예수님의 명령(17-20)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만물의 시작과 끝은 아래 있고, 부활의 권능으로 죽음의 권세까지 무력화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난을 인내하는 성도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요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17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7-20)

성경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본 사람들마다 모두 그 위엄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죄인들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쓰러졌습니다. 요한 또한 그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한 행동이 동일합니다. 

(1) 요한의 반응(17)

요한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친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지금까지 지상에서 사역하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의 초월적인 모습 앞에 요한은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모습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에스겔 1:28; 다니엘 8:17; 10:9; 마태복음 17:6; 사도행전 26:14).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인자’로 계시된 ‘권세가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환난에 동참하던 신실한 종이었지만, 순결하고 거룩한 예수님 앞에서 서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현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요한뿐만 아니라 고난당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의로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를 줍니다. ‘처음과 나중’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원이며 역사의 마지막 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와 소망을 북돋웁니다. 반면에 짐승(로마 제국)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현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2) 그리스도의 현현(18)

첫째, 예수님께서는 ‘곧 살아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존(永存)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천국뿐만 아니라 사망과 음부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라고 소개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로마 제국의 권세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 안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패는 사탄의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 고난을 통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졌습니다.

(3) 그리스도의 미래(19)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8-19)고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본 사건들을 엄격하게 시간 구분을 가리켜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이 어구는 ‘예언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공식’입니다. 요한이 본 요한계시록에 나온 전체 환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기록하여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지만(1), 그것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도 망라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4) 요한이 본 환상의 설명(20)

요한은 자기가 성령에 인도하심으로 본 것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요한이 본 ‘일곱 금 촛대’(12)은 일곱 교회를 가리키고, ‘일곱 별’(16)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사자’란 단어는 (anggeloi/앙겔로이)인데 ‘사자’란 번역은 애매모호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공동체의 수호천사들을 의미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차선으로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하늘의 대응 천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에 처한 일곱 교회를 살피고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교회의 주인입니다. 세상은 악한 자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바라보고 통치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 당한 고난은 바로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장차 받게 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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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1-0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1장 1-8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장차 속히 이루실 일들을 보여 주시며 그 내용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계시록을 읽을 때,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해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하면 왠지 어렵고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많은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접하길 꺼려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요한계시록을 금기 서적으로 취급하기도 했지만,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서 덮어두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이 책을 기록한 당시에는 성도들이 로마에 의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곧 다시 오실 것이며, 그들을 새하늘과 새땅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인내로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라고 부탁하신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입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주신 이유(1-3)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무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인간적으로 지식과 총명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새로운 영의 눈으로 영의 것을 보아야만 충분히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책은 대표적인 계시의 책입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먼저 그 계시를 주신 분이 누구인지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1-2)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절에서 요한계시록과 계시의 순서 및 계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전달과정을 설명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계시록은 말씀의 권위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 줍니다.

 (1) 표제(1a)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라고 계시록을 시작합니다. 본 편지는 요한의 계시가 아니라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받은 계시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 ‘계시’를 아니라 ‘묵시’라고 해야 옳습니다. ‘묵시’는 계시이고 예언이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의 늪에서 피어오르는 소망의 꽃이 묵시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입니다. 하늘로부터 시공간을 뚫고 질곡의 현실을 돌파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상징과 은유의 세계로 초대하여, 현실을 넘어설 통찰력과 비판력과 저항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묵시는 구약 이스라엘의 선지자 전통에 서서 예언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2) 계시의 경로와 증언(1b-2) 

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일어날 일은 언제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초점은 어느 시점에 묵시가 성취될 것인지에 있지 않고,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가까움과 빠름이 아닌 즉각성을 의미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장차 속히 될 일들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다 기록하므로 증언합니다. 이 말씀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말씀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반적으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승리 그리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감추어진 것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이성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만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영안이 열려지지 않는 타락한 이성으로 요한계시록을 접근한다면 무리수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난을 받은 성도들에게 ‘장차 될 일’(1:1;19)을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제국의 핍박 때문에 기독교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망을 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현재와 임박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려고 계획하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그 계획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사말-기원과 축원(3-6)

과거 잘못된 종말론자들의 주장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종말에 대한 논의 및 거론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점차 너무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지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 그만큼 세상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져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의미에서 준비된 성도를 만들어 갑니다. 이제 요한은 이 편지에 대한 수신자들을 소개합니다.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3-6)

밧모섬 있던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당시 편지 형식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서두에서 자신이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함으로 이 편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계시임을 밝힙니다. 이 편지를 통해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하나님과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님과 일곱 영이신 성령님의 이름으로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1) 지복(至福) 선언(3)

요한계시록에는 7가지 복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 첫 번째 복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3)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을 전제합니다. ‘예배 중에 말씀을 읽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목적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계시의 내용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깝다’는 것으로 종말론적 긴박감을 더합니다. 신구약의 지복 선언(예:시편 1:1; 마태복음의 팔복, 누가의 사복사화)은 반전의 언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의 지복 선언이 있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일곱 지복선언은 예언 메시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실 충만한 시적인 축복을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나타난 7가지 복
1)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켜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2) 계 14:13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3)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계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5) 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6)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으리라.
7)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2) 수신자(4-5a)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는 먼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온 소아시아, 즉 지금 터키에 해당하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당시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장차 될 일이므로 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편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기원(5b)

요한은 서두에서 요한계시록의 근원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함으로 이 편지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로 기록한 계시임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짜 나라인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핍박을 받는 성도들에게 진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➀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이 표현은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계시하신 의미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표현은 바로 ‘여호와’로 지칭하는 하나님의 고유명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며, 역사의 시작이며 끝이십니다.

‘오실 자’는 하나님께서는 미래적 실존이 아닌 구원과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도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사탄이 가짜임을 폭로합니다. 사탄은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자’(17:8,11)입니다. 사탄의 세력으로 세워진 로마제국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러도, 여호와 하나님과 견줄 수 없는 짝퉁 나라임을 증명합니다.

➁ 성령 하나님

성령님을 ‘그(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또한 성령님을 4:5에서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을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에 계십니다.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동등한 권세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성령님을 ‘일곱 영’으로 표현했겠습니까? 이사야 11:2와 스가랴 4:2-7을 결합하여 인유(引誘)한 표현입니다. 이사야 11:2에서 성령은 지략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과 여호와를 아는 영으로, 또 스가랴에서는 이는 성전 안의 일곱 가지가 달린 금촛대(메노라)로 표현합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성령은 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메시아의 종말론적 통치를 확립하기 위한 장비를 구비하도록 하십니다. 스가랴는 일곱 영을 4번 언급한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축은 힘으로도 아니고 능으로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합니다(스가랴 4:6).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는 짐승과 같은 세상 힘이 아닌 신적일 영으로 이뤄집니다. 스가랴 4:3에서 일곱 등물은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일곱 영이신 성령님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감찰하십니다(역대하 16:9). 성령님께서 선택한 자는 무엇이든지 강력하게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세상의 짐승이 명백하게 불가항력적인 힘과 세계적인 힘을 과시하는 세상에서 성령은 여전히 신실한 종을 찾으시고, 능력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십니다.

➂ 성자 하나님

요한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성자 그리스도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5)라고 소개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그 의 능력과 권세를 이 세상에 실현하실 성령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시고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 땅에 온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표현으로 설명되는데, 1) 충성된 증인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 3)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증인이 되셨습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사야 43:10-13과 시편 89:27,37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 그리스도가 죽음에 이르는 핍박을 당하시만, 아버지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 참고 견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 신실한 증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이사야 43:10-13).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주의 통치자로(이사야 55:4) 하나님 보좌 우편에 등극합니다(시편 110:1).

(4) 축원(6)

요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라고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를 사랑하고, 둘째, 그의 피로 죄에서 해방하셨으며, 셋째,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형식으로는 영광송이지만, 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축복하시고 안부를 전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나라와 제사장’으로 이중직분을 수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은 출애굽기 19:6과 베드로전서 2:9을 반합니다.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또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여 이중직을 수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증인으로 죽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며 증언하셨습니다. 부활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개시입니다. 교회도 이방 사회 가운데서 신실한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죽기까지 고난과 순교를 당하고 복음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것으로 신실하게 왕 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소명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수되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옛 이스라엘의 직무를 전수받아서 수행하여야 합니다.

 

선언과 계시(7-8)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 분입니다. 모든 세상과 민족들은 하나님을 세상의 주관자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어야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보다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7-8)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시면 한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과 민족들과 다시 회복하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양으로 죽으심으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1) 선언(7)

요한은 송영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사도행전 1:9-11). 실제로 그리스도를 처형했던 자들과 대적했던 자들이 비록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들은 그들이 찌른 자를 보게 될 것입니다(스가랴 12:10).

이 경건한 남은 자들은 민족을 대표할 것입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의 범위를 초월하여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7)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열방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온다는 소망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실현되는 방법에 대한 계시는 전적으로 새롭습니다. 이때까지 봉함된 두루마리의 내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개시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열방의 멸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열방의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7절은 교회가 여기에 동참하라는 선언입니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8)

요한계시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8)라고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끝이신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역사의 원천이요 목표이십니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과 함께 인사말을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림은 초라한 베들레헴에 오셨지만, 재림은 장차 구름을 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본 모습 그대로 오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승리자로 오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고,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될 것이며, 짐승을 따르던 자들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개로 인사말을 마무리합니까? 묵시를 받은 종은 계시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위임을 받은 자는 누구의 권위로 직무를 수행하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핍박을 받고 있던 교회는 짓눌려서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타협과 순응과 동화만이 살 길로 보이지만, 교회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세상에 파송 받았습니다. 교회는 로마제국과 대결할 신분과 사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은 영광중에 재림하시는 모습에 대한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까? 등과 기름이 준비된 신부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임하시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 분을 따라 살아가면 진정한 행복한 삶을 맛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 준비는 인간의 방법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신대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대로 순종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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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 대부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해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종종 사람들이 자의적인 유추해석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 주해는 요한계시록을 너무 교리와 조직, 그리고 상징들에 대해 지나치게 해석하려 들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의하게 주해를 시도했습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을 더 알기를 원하신다면 구체적으로 다룬 다른 주석들을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신도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쉽고 평이하게 접근해 나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저자인지를 밝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본에서 찾는 내증(內證)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전승을 통하여 증거를 찾는 외증(外證)가 있습니다.

(1) 내증 : 요한계시록은 요한 문헌 중에서 저자를 밝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계시록 앞부분에서 세 번(1:1,4,9) 마지막 부분에서 한 번(22:8) 소개합니다. 더 나가서 자신을 계시록에 나타난 일들의 목격자요(1:2,19-20;22:8) 참여자라고 소개합니다(1:2; 참고22:18).

(2) 외증 : 주후 2세기까지는 전통 초대교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을 저자로 인정했습니다. 이레네우스, 클레맨트, 오리겐, 터툴리안과 같은 교부들 또한 저서에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

요한계시록의 기록기시에 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초기연대(주후 64-69년)와 후기연대(주후 95-96년)로 양분됩니다. 확실한 증거들은 찾기 어렵지만, 학자들 사이에는 후기연대, 즉 도미시안 황제(즉위기간 주후 81-96) 말기인 주후 95-96년을 가장 선호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장소

사도 요한은 터키와 그리스 중간인 에게 해에 떠있는 밧모(Patmos) 섬에서 기록하였습니다(1:9). 이 섬은 로마 제국의 유배지로 사용했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증거로 인해 그 섬에 유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1:9).

 

요한계시록의 수신자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는 1세기 말엽(주후 95-96년), 당시에 터키 지방 소아시아에 존재했던 일곱 교회들입니다(1:4,11). 그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주님께 직접적인 명령으로 계시록을 기록하고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1:11,19; 2:1 등).

 

요한계시록의 배경

오순절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 이방 종교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종교에 대해 관대했던 로마가 주후 1세기말에 대제국을 건설한 후 황제 숭배사상을 도입하였습니다. 마침내 로마에서는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동기

요한계시록의 일차적인 기록 동기는 심각한 박해로 고난당하며 배교의 유혹을 받고 있던 당시 성도들을 위로하고 고난을 이겨낸 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사단의 세력과 더불어 투쟁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종말의 때에 사단의 박해를 받게 될 미래의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이후에 있을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보여줌으로써 승리하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의 세속적 역사 및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의 끝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본서는 종말의 책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 및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본서는 새로운 시작의 책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

요한계시록은 이미 다른 성경에서 다룬 여러 기록들에 대해 최종적 성취의 성격을 지니고 띠고 있습니다. 본서에 나타난 기본 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일들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될 것입니다. 이를 자각하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이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2) 재림하실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계획하셨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구원의 최종계획은 필히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가 바로 그리스도 재림의 날입니다.

(3) 성도의 고난

하나님 뜻을 거역한 사단은 인간을 미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이 세상을 환란에 빠뜨릴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은 역사 가운데 계속 있어 왔으나 역사의 마지막, 즉 그리스도 재림의 날 직전에 가장 심각한 형태로 임할 것입니다.

(4) 마지막 심판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구속사를 역행한 모든 무리들을 심판하신다. 이 심판은 역사상 있어 왔던 모든 심판보다 훨씬 심각할 뿐 아니라 다시 반복되지 않는 최후적 성격을 지닌다.

(5) 신천지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된 인류의 범죄로 부패하였던 이 세상은 없어지고 오직 의와 평화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다. 성도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신천 신지의 도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

1:1-8 서론

1:9-3:22 첫째 환상 :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일곱 교회

   (1) 그리스도의 환상 계시(1:9-20)

    (2)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2:1-3:22)

4:1-16:21 둘째 환상 : 하늘 보좌 환상과 세 가지 심판 시리즈

    (1) 하늘 보좌 환상(4:1-5:14)

        ➀ 성부 하나님 중심의 구심적 예배(4:1-11)

        ➁ 어린양 그리스도 중심의 원심적 예배(5:1-14)

    (2) 일곱 인 심판시리즈(6:1-8:5)

        ➀ 네 가지 짧은 심판(6:1-8)

        ➁ 두 가지 긴 심판(6:9-17)

        ➂ 144,000의 삽화(7:1-17)

        ➃ 일곱째 인 심판(8:1,3-5)

    (3) 일곱 나팔 심판 시리즈(8:2, 8:5-9:21)

        ➀ 네 가지 짧은 심판(8:6-13)

        ➁ 두 가지 긴 심판(9:1-21)

        ➂ 작은 두루마리와 두 증인의 삽화(10:1-11:14)

        ➃ 일곱째 나팔 심판(11:15-19)

    (4) 두루마리 예언(12:1-15:4)

        ➀ 용과 여자의 전투(12:1-17)

        ➁ 두 짐승과 666(13:1-18)

        ➂ 어린양의 승리와 복음 선포 그리고 마지막 추수(14:1-20)

        ➃ 어린양의 노래(15:2-4)

     (5)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15:1,15:5-16,21)

        ➀ 일곱 대접 삼판의 도입(15:1,5-8)

        ➁ 네 가지 짧은 심판(16:1-9)

        ➂ 세 가지 긴 심판(16:10-21)

17:1-21:8 셋째 환상 : 음녀 바벨론 환상과 새 하늘과 새 땅

    (1) 음녀 바벨론(17:1-19:10)

    (2) 바벨론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19:11-21:8)

21:9-22:5 넷째 환상 : 신부 새 예루살렘

22:6-2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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