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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7-01)


음녀 바벨론의 종말

요한계시록 17장 1-18절


초등학교 앞에서는 아주 싸고 초등학생 입맛에 딱 맡은 식품이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에 맞게 100원이나 200원이면 살 수 있지만, 대부분 ‘불량식품’이라고 불립니다. 불량식품은 입에 달고 맛이 있지만, 자주 당겨서 자주 찾게 됩니다. 불량식품이라고 불리운 것은 건강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본문부터는 영적인 세계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곱 천사 중 한 천사가 요한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심판의 시작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을 보여주심으로 시작됩니다.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왜 바벨론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서론 : 바벨론의 멸망(1-2)

사탄은 선악과 사건 때부터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미혹해서 영혼과 육체를 더럽히려 합니다. 로마는 음란 문화와 수많은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로마보다 그다지 나올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악한 문화에 젖어들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1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1-2)

17장에 대한 서론입니다. 더 넓게는 17:1-19:10의 서론이고, 주제는 로마 제국의 멸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물과 바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의 상징입니다. 음녀는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영적 간음, 즉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1)

일곱 대접을 쏟은 천사들(15:1; 16장) 중 한 천사가 요한에게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고 멸망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여기서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로 등장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이 환상에는 일곱 대접 재앙과 그 재앙의 결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앉았다’는 것은 주권 행사를 함축합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는 하나님 백성을 핍박하는 많은 악한 나라들과 매춘을 일삼는 제국에 대한 요한의 통찰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많은 부속민을 거느리고 있는 제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로마와 열방의 왕들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후견인과 후견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2) 땅의 임금들의 매춘부(2)

요한은 이를 ‘음행’이라고 합니다. 열방의 통치를 받는 우상숭배자들은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매춘부가 돈으로 몸을 팔아 성적인 봉사를 한다는 대중적인 인식을 활용합니다. 로마가 제시하는 경제적 번영과 군사적 안전보장은 한 번 맛을 들이면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큰 유혹입니다. 한 번 마시면 진리에 눈멀게 하고, 영적으로 맹목적이게 만듭니다(이사야 29:9).

 

큰 음녀, 바벨론의 환상(3-6a)

현재 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면 현실의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입니다.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종말의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결말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결망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멸망하거나 사라져 버릴 것을 쫓아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헛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을 놓아 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3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3-6a)

본문에서는 요한이 본 환상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본 것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큰 음녀인 바벨론의 모습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붉은 빛’은 음녀가 입은 옷의 색깔이며, 사치와 영광의 빛이며, 죄의 색깔입니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악녀의 모습이 그대로 들러났습니다.

짐승의 모습은 12:3의 용과 13:1의 짐승과 어구적으로 동일입니다. 짐승은 사탄의 정치적 대리인입니다. 동일한 짐승의 활동을 다른 각도로 서술합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성격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음녀와 짐승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지만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사탄과 동맹 관계임을 폭로합니다. 둘은 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고, 우상숭배자들을 미혹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독자는 짐승의 붉은빛과 음녀의 붉은빛 옷을 성도의 피로 읽어냅니다. 머리와 열 뿔은 다니엘 7장의 인유로 악한 왕국의 권세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은 신적인 권위를 주장하여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는 특징들을 상징합니다. 666 자체가 신적 삼위일체를 흉내 내는 신성모독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는 바벨론의 무역 목록(18:12)에서 대표 상품들입니다. 국제적인 무역을 통한 경제적 결탁을 상징합니다. 손에 든 금잔은 예레미야 51:7-8의 인유로 바벨론이 열방을 취하게 하는 본성을 나타냅니다. 여기 가증한 물건은 세상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신적 진노의 대상입니다.

음행의 더러움은 우상숭배의 배후에 귀신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음녀의 자줏빛 옷은 황족과 부유한 엘리트들과 결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음녀의 복장이 화려하고 고상해도 본질상 흉하다, 창녀를 홍내 낼 뿐입니다. 큰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크다’는 것은 어느 한 시대에 미치는 능력의 크기가 얼마 정도인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 그 영향력과 악명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냅니다. 생존 유지에 필요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큰 것은 자원이 제한된 이 세상에서는 그 자체로 죄악입니다. 강탈하여 잉여를 축적한 결과가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법정에 세울 때 두 가지로 죄목을 요약합니다. 먼저 바벨론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우상숭배 체제에 권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입니다. 둘째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자입니다. 음녀의 금잔에 가득 찬 것은 성도와 증인의 피 입니다. 큰 음녀 바벨론은 제국적인 정치, 경제 체제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크고 화려하고 매력적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큰 음녀 바벨론의 본성(6b-15)

지금도 돈과 권력이라는 강력한 우상이 온 새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추종하라고 가르치는 숭배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를 비웃고, 자기들의 신을 섬기라고 유혹하며 위협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우상숭배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드시 심판 받습니다.

6…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5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6b-15)

17,18장은 바벨론 멸망을 다루는데, 17장은 정치적, 종교적인 측면에서. 18장은 문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그 결과를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17장에서는 여자 이미지인 음녀로 소개되고, 18장에서는 도시 이미지인 바벨론으로 소개됩니다.

(1) 요한의 경탄(6b-7)

요한은 음녀를 보고 놀랍게 여깁니다. 천사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라고 호통합니다. ‘놀라움’은 다니엘 4:17,19이 배경입니다. 다니엘이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다니엘은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책망을 받습니다. 왜 요한은 놀랐게 여겼습니까? 요한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두 번이나 천사를 숭배하려고 했다가 책망을 받습니다(19:10; 22:8). 요한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반응은 불경한 세상이 짐승에게 보이는 흠모와는 대조됩니다.

음녀의 모습이 신부 예루살렘과 비슷합니다(21:18-21). 구약의 대제사장의 복장을 연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환상에 대해 두려움과 당황스러움과 흠모의 마음으로 다가 갔지만, 결국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당황하고 두려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번역은 ‘경이로워 했다’일 것입니다.

바벨론의 본성을 통찰하기 위해 성도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다. 첫째, 광야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3). 광야는 성도가 보호와 양육을 받는 곳이며, 뱀과 악한 영들이 성도를 핍박하고 심판을 받는 곳입니다(12:13-17). 제국은 성령의 눈으로 광야에서 볼 때 정확하게 파악됩니다.

둘째, 비밀을 확실히 인지해야 합니다(5). 비밀은 다니엘의 인유입니다(다니엘 4:9).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고 짐승의 나라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직전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비밀은 그리스도와 그 백성의 고난을 통해서 아이러니하게 성취됩니다. 짐승의 나라는 패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돌아오기 이전에도 이미 내부에서 스스로 배반하고 멸망하기 시작합니다.

셋째, 지혜가 필요합니다(9). 지혜는 하나님 나라와 제국의 본성에 대한 분별력이며, 제국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제국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면, 제국을 숭배하게 됩니다. 정부의 정치와 경제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지 혹은 바알의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보지 못한 채 종교적 측면만 보면 우상승배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넷째, 어린양이 제국의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이겼습니다. 성도가 제국에게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14).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 이기는 길입니다. 다섯째, 제국의 위엄과 자태에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흠모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큰 음녀 바벨론의 멸망(16-18)

하나님께서는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셨고, 악한 바벨론을 악한 바사를 통해 징벌하셨습니다.

16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18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16-18)

요한은 13장과 17장에서 네로 전설을 최대한 활용합니다(13:3,12,14; 17:8,11). 네로는 죽지 않고 단지 사라졌을 뿐이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설입니다.

13장은 네로의 치명적인 상처와 죽음으로부터의 회복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17장은 네로의 실종과 출몰이란 주제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를 패러디합니다. 짐승은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의미심장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널리 사용되었지만, 계시록에서는 이 단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13:1의 표현과 똑같은 표현으로 바다는 태고로부터 혼돈의 장소입니다. 17:8의 요지는 죽은 네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이 용이 원래 불러냈던 무저갱에서 다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네로는 로마를 통치하다가 없어졌는데 다시 귀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환은 통치가 아닌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짐승에 대한 요한의 설명은 창의적인 상상력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의 시대 로마제국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입니다.

요한은 단지 기독론적 패러디를 제국에 투사하지만은 않는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와 라이벌을 이룰 만큼 신적이고 메시아적인 구성 요건을 갖추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로마는 열방과 짐승에게서 혼연일치의 지지와 위임을 받았지만(12) 결국 배신을 당한다. 사탄은 일정 기간 사용하고 효용성이 떨어지면 버립니다. 동맹국의 반란과 경제와 종교 체제의 배신으로 로마는 망합니다.


 우리 시대에 다가오는 큰 음녀인 바벨론과 같은 유혹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바벨론의 문화에 유혹은 잠시 동안은 달콤한 쾌락입니다. 잠시 쾌락 때문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은 영혼을 죽이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악한 세력에 대해 잘 저항하며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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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6-02)

 


진행될 일곱 대접 심판(2)

요한계시록 16장 10-21절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바벨론 제국 같은 세력을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악한 세력들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때로는 의롭지 않은 자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유는 악이 원래 파괴적인 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악이 스스로 자신을 파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들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은 자신의 악 때문에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첫 번째 네 천사의 대접 재앙은 자연에 대한 재앙이었다면, 본문의 다섯째 천사부터 마지막까지는 두 짐승과 용 그리고 바벨론에 대한 심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제 세 가지 대접 재앙은 더 강도가 심해지고 긴 심판이 임합니다. 짐승의 보좌에 쏟는 심판으로 맹목적인 삶이 주는 고통을 받습니다. 아마겟돈의 전쟁은 맞이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바벨론이 받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다섯째 대접 재앙(10-11)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에게 대한 심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제 그것을 시행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최종적으로 악한 사탄의 중심을 공격합니다. 인간의 악은 고통과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숫자, 색깔, 여러 상징적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짐승의 제국은 어둡고 악성종기의 전염병처럼 주체성을 상실하고 짐증의 체제에 편입됩니다.

10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10-11)

온 천하 왕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만만했겠지만, 도둑같이 오시는 주님의 급습, 곧 일곱째 대접의 심판을 한꺼번에 당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권세와 종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멸을 당하게 됩니다.

(1) 짐승의 왕좌에 대한 재앙(10a)

다섯째 대접 재앙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라고 합니다. 재앙의 대접을 쏟아 부은 곳은 짐승의 왕좌였습니다. ‘짐승의 왕좌’는 바벨론, 즉 로마제국입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고통(10b-11a)

전체 나라가 어두워졌습니다. ‘어두워지는’ 것이 실제로 흑암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 지, 아니면 영적으로나 도덕적인 어두움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암흑천지로 만들어버린 것(출애굽기 10:22-23)은 애굽의 태양신 ‘라(Ra)’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바로는 태양신 ‘라’가 성육신한 자로 여겼습니다. 애굽인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가련한 처지를 비관합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느낄수록 더욱 무거운 심리적인 짐을 지게 됩니다. 영적 고통은 극에 달합니다. 로마도 바로와 같습니다. 암흑천지는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상징합니다. 암흑의 심판은 눈이 멀어 맹목적인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에서 흑암은 기근과 같은 극심한 영적, 경제적 환경을 말하기도 하고(이사야 8:21-22), 신에게 버림 받은 자의 심리를 말할 때도 쓰입니다(베드로후서 2:17; 유다서 13).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자기 혀를 깨뭅니다. 쿰란 문헌을 보면 흑암의 천사가 우상숭배자로 하여금 흑암의 길로 인도하고 참람한 말을 하는 혀를 가지도록 만둡니다(1QS 3:20-21; 4:11).

(3) 우상숭배자들의 반응(11b)

맹목적인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통해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욕하여 그 성품을 왜곡합니다. 더는 회개의 여지기 없을 정도로 완악해집니다.

 

여섯째 대접 재앙(12-16)

예수님께서는 임하는 날, 즉 재앙의 날입니다. 그 날은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깨어있는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주님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벌거벗은 수치는 구약적 배경으로 볼 때 우상 숭배와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갖추어 입으라는 권면은 성도의 신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12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2-16)

옷을 잘 지키는 자는 종말론적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극렬한 핍박 가운데서도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성도의 고귀한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 치러야할 영적인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될 것입니다.

(1) 동방 왕들의 대로가 열림(12)

여섯째 나팔 심판의 발전입니다. 유프라테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습니다. 이만 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불신자 3분의 1을 죽입니다(9:13-21).

(2) 세 더러운 영이 온 천하 왕들을 소집(13-14)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각각 666 체제에서 나옵니다. 사탄은 로마 황제와 거짓 선지자들과 결합하여 666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인 정치, 경제적 체제입니다.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귀신들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있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한 곳에 모입니다. 그곳이 아마겟돈입니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옛날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의 패러디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온 천하 왕들은 또 다른 종류의 출애굽으로 멸망의 장소로 들어갑니다. 요한의 시대에 바벨론은 로마제국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선으로 하여 대치하고 있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입니다. 자살한 네로가 환생하여 파르티아 군대와 함께 로마를 공략하러 온다는 소문으로 로마는 혼란에 빠졌습니다(시빌 신탁 4:115-139; 에녹 1서 56:5-7). 요한은 로마의 집단 심리를 잘 이용합니다. 왜 개구리가 미혹하는 영들을 대변하는 소재로 선택되었습니까? 개구리 우는 소리는 크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개구리 소리는 공허한 소음으로 영혼 없는 의견과 추측을 상징합니다. 무엇보다 개구리는 더럽고 미혹하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더럽다는 말은 바벨론의 음행과 관련이 있습니다(17:4). 개구리 영들이 미혹하는 대상은 온 천하 왕들입니다. 애굽의 개구리 재앙으로 오직 왕들만이 타격을 입었습니다(시편 104:30).

(3) 성도를 향한 경고(15)

바벨론의 체제를 숭배하는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왕들은 전쟁을 위해 한 곳 아마겟돈에 소집됩니다. 여기 전쟁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 전쟁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불경스런 세계 체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따로 준비하신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구약에 예언된 종말의 전쟁입니다(스가랴 12-14장; 스바냐 3장; 요엘 1:11,31). 아마겟돈은 문자적으로 ‘므깃도 산’입니다. 갈멜 산 근처에 있는 산이며, 구약에서 여러 번 결정적인 전투와 대량 살육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왜 요한은 갑자기 므깃도 산을 언급합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엘리야 시대를 되돌아 보도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맞불기 위해 모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중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바알은 잠을 잤습니다. 그 결과 거짓 선지자들은 도륙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악한 세력들을 아마겟돈으로 다 불러 모으십니다. 세 가지 더러운 개구리 영이 속이는 활동을 하도록 풀어주십니다. 이는 제국의 제체에 부역하고 결속한 나라들을 한 번에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심판을 위한 전쟁입니다. 요한은 아마겟돈이 가진 모형론적 의미와 예언적 의미를 결합하여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왕들이 패배하였습니다(사시기 5:19-21). 거짓 선지자들이 멸망을 당했습니다(열왕기상 18:4). 아마겟돈은 예루살렘을 대항하는 모든 열방이 멸망을 당한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이 통곡하며 회개하는 곳입니다(스가랴 12:9-12).

(4) 아마겟돈 전쟁(16)

성도는 아마겟돈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깨어는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비유에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깨어 자기 옷을 지키라.’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는 잠을 잘 때 벌"벗고 잡니다. 벌거벗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수치를 당일 수 있습니다. 복장을 갖추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벌거벗음은 음행의 이미지이고 우상숭배의 상징입니다. 대접 심판은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가혹한 심판입니다. 

 

일곱째 대접 재앙(17-21)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악한 영들의 꾐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은 하나님을 모방하여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악한 영과 하나님을 구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잠시 악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의 결국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의 성공에 대해 부러운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17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21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17-21)

큰 지진을 통해 땅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만든 체제가 전복됩니다. 섬과 산악이 사라지는 것은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 대한 타격과 무력화를 의미합니다.

(1) 큰 지진의 재앙(17-18)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 그 순간 마지막 심판이 완료 ‘되었다’는 선언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울려나옵니다(비교 21:6). 여기서 ‘공중’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활동 영역을 염두에 두면서 언급한 것입니다(에베소서 2:2). ‘되었다’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수되었음을 의미합니다(비교 요한복음 19:30).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내리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2) 바벨론의 멸망(19-20)

이제 제국의 체제는 최종적인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군은 한 자리에 모여서 멸망을 당합니다. 왜 멸망을 받습니까? 바벨론이 한 일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열방에게 진노를 드러내며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의 정치, 경제 체제에 합류 또는 협력하지 않은 자들에게 분노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부역하는 자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제국이 가진 특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희석되지 않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14:8,10). 요한은 대지진과 큰 우박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세계 체제에 최후 심판을 가합니다. 일곱째 대접 재앙은 물리적인 지구의 붕괴를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독자들은 상징적인 이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 예언자들이 열방의 심판을 묘사할 때 은유적 언어로 서술해왔습니다(예. 이사야 24장).

무시무시한 일이 인류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가장 적합한 은유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지진과 큰 우박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핵폭발이 될 것이다. 땅에 있는 전체 사회적 정치적 체제의 붕괴를 기술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대지진은 묵시문학에서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길을 열기 위해 옛 우주를 파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우박 재앙을 마지막 목록으로 채택하십니까? 묵시문학에서 요한만이 특별하게 도성의 멸망을 위해 지진의 효과를 최고조로 부각합니다. 시내산 인유의 특징을 극대화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출애굽 행진은 여리고 함락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여리고 함락은 아모리 족속에게 내린 큰 우박으로 마무리됩니다(여호수아 10:11). 요한은 전체 출애굽 사건을 인유하여 새로운 출애굽의 모델로 삼습니다. 여리고 함락은 마지막 심판의 결정적인 핵심 모델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재앙이 크면 클수록 회개하지 않고 신성 모독하는 행위를 지속합니다. 더 이상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3) 큰 우박 재앙과 우상숭배들의 반응(21)

일곱째 대접 재앙은 17-20장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발생하는 일들을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17-20장은 일곱 대접에서 그리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환상들입니다. 우리 시대에 우상과 같은 세계적 경제 사회, 환경, 정치 체제의 붕괴가 임박하였다고 한다면, 신실한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심판은 폭력의 역사를 끝장낼 것입니다. 새로운 대안적 세상을 열 것입니다. 돈과 권력을 의지했던 개인과 사회는 마비되고 와해될 것입니다. 아마겟돈은 전쟁 없는 샬롬의 세계를 열망하는 반전이 있을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어린 양의 거룩한 옷을 입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악한 일에 고집하지 않고, 거룩함에 속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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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6-01)


진행될 일곱 대접 심판(1)

요한계시록 16장 1-8절


연말이면, 한 해를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이룬 것이 많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상실감이나 공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무조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매 시간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노력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반드시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발생하는 각종 재앙들은 ‘빨리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 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장차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일곱 대접 심판이 시행됩니다. 무대 설정은 마쳤고, 실제 공연만 남았습니다. 처음 네 재앙은 땅과 바다와 강과 해에 마치는 짧은 재앙입니다. 온 우주에 전면적으로 미치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없습니다. 심판의 연기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받을 재앙이 얼마나 강도가 높은지, 제국에 타협하고 순응한 자들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심한지를 나타냅니다.

 

네 가지 대접 재앙들(1-4)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과연 이러한 환란과 고통을 이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개인적인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는 하나님의 큰 물줄기의 역사 가운데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백성의 승리와 원수에 대한 심판에 대해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모든 고난과 환란의 역사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1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1-4)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큰 소리가 성전에서 들려 왔습니다. 이것은 이 재앙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행하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며, 짐승을 따른 사람들이고 자비보다 힘을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무대를 소개했지만, 본문은 이제 심판의 집행하고 있습니다. 

(1)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1)

나팔 심판과 비슷합니다. 단지 효력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팔 심판은 우주의 3분의 1을 망라하고, 대접 심판은 우주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나팔 심판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심판을 연기하고 삽화가 있었지만 대접 심판은 전혀 없습니다.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은 동일한 순서로 재앙을 당하는 대상들을 표현합니다. 땅-바다-강-해-어둠에 있는 사악한 자의 영역과-유프라테스(마귀들의 영향을 받은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최후 심판으로 전체 세계,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의 모델은 출애굽 재앙입니다. 출애굽 재앙의 징벌 자체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이 심판이 의로우며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독특성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함을 증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접 심판에서 마음의 강퍅함으로 인해 불경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 강퍅함은 우상승배의 표현으로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성도를 핍박합니다. 나팔 시리즈가 비유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것을 대접 시리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진술합니다. 나팔 심관과 대접 심판 시리즈는 문학적으로, 주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병행합니다.

일곱 천사는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천사들은 대접 일곱은 ‘땅’에 쏟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땅’은 땅과 바다와 물과 해 등 피조세계 전체를 총칭하는 용어이며, 일곱 대접은 피조 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심판이 시행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재앙의 실행이 은유적이라면 그 효력도 은유적입니다. 유대 문헌에서는 출애굽 재앙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합니다(지혜서 15-17장). 요한은 대접 재앙을 같은 해석 전통 속에서 묘사합니다.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요한의 시대에 모든 악과 고난의 현실을 만드는 로마 제국을 심판하십니다. ‘쏟아붓는다’는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단의 기단부에 희생제물의 피를 붓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레위기 4:6-7, 17-18). 이를 통해 죄로 더럽혀진 하나님 백성을 정결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접 심판은 죄로 더럽혀진 땅을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합니다.

(2) 땅을 향한 첫째 대접 재앙(2)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 우상숭배한 자들의 몸에 독한 종기가 났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우상숭배자’와 ‘땅에 거하는 사람’은 동의어입니다. 이들은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할 때 애굽인들의 행동이 이들과 같았습니다. 요한은 출애굽 열 재앙 중에 인체에 미친 재앙으로 종기 재앙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비방한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에서의 여섯째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되어 애굽인들에게만 내려진 것처럼, 여기서도 재앙이 어린 양에게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입니다. 이 재앙은 짐승에게 속하여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내려집니다.

(3) 바다를 향한 둘째 대접 재앙(3)

둘째 대접은 ‘바다 가운데 있는 생물’에게 임합니다. 그들은 해양 경제에 의존하던 자들을 은유합니다. 바다가 피로 변하여 고통과 죽음을 맛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불경한 인류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24회). 17:1의 ‘많은 물’은 온 땅에 있는 불신자에 대한 그림입니다(17:15). 사탄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습니다’(12:18). 사악한 나라들에 대한 사탄의 주권을 말합니다. 불경한 나라들은 ‘바다의 모래’와 비교됩니다(20:8).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13:1).

‘바다’는 짐승이 지배하는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로마제국의 군사와 무역에 대한 심판입니다. 로마제국은 해양 군사력과 산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으며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 재앙은 전 세계적으로 겪는 경제적 환란을 가리킵니다. 경제적인 재앙은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짐승의 표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양 무역은 지역과 국가를 초월한 무역 체제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로마의 경제적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가장 신랄한 비판입니다. 로마는 전 세계에 걸쳐서 소중한 자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로마 경제의 근간은 정복 전쟁을 통해 얻은 노예 노동입니다. 과도한 세금과 부역을 통해 부속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로마인들은 향연과 오락에 빠져서 풍요를 탐닉하였습니다. 이것이 로마가 말하는 평화이고 정의였습니다. 주후 66년에 발생한 유대의 대로마 항쟁도 세금과 빚과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의한 저항운동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하고 약한 나라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경제 체제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심판에 직면합니다. 둘째 대접 재앙은 해양 산업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 경향을 지닌 나라들의 경제적 재난을 대변합니다.

(4) 강을 향한 셋째 대접 재앙(4)

강과 물 근원의 심판은 바다에 대한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나일강에 내린 재앙(출애굽기 7:17-21; 시편 78:44)을 인유합니다. 나일강은 애굽 경제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농경 산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기근은 치명적입니다. 강과 물 근원의 심판은 바벨론과 같은 제국에 대한 경제적 심판입니다. 어떤 심관입니까? 그 열쇠는 천사의 찬양과 제단의 응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5-7)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믿는 자들에게 핍박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없어 보이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모두 체크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 결산대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5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5-7)

*****

(1) 천사의 고백(5-6)

천사는 심관의 실행자이고, 제단은 하늘 보좌의 제단에서 기도하는 순교한 성도들입니다. 천사와 제단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롭다고 찬양으로 화답합니다. 왜 이렇게 찬양합니까? 6절과 18:24은 어구적으로 병행합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혔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상기시킨다. 나봇의 피를 흘려 포도원을 강탈한 이세벨은 행한 그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18장은 바벨론이 로마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로마의 죄악의 근원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세벨의 바알 경제법에 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희년제도를 초토화한 장본인입니다. 그 딸 아달랴는 남쪽 유다의 희년 경제를 붕괴시켰습니다. 두 나라의 패망 원인은 바알 경제 정책으로 희년 경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 제국의 본거지이며, 바알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에 바알 경제법을 확산시킨 주범입니다. 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와 두 번에 걸쳐 벌인 포에니 전쟁으로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용병들은 카르타고에서 바알 경제법으로 엄청난 재력을 쌓아서 로마에 가져왔습니다. 요한의 시대에 이르면, 소수 엘리트의 손에 농경지가 집중된 부재 지주 제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점령지의 토지 강점과 매매를 통해 축척된 부를 바탕으로 로마는 경제 성장과 호황을 누렸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경제법인 희년법을 거스르는 경제는 심판을 받습니다. 희년 경제의 기본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노동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레위기 25장).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자들은 황폐하게 됩니다(11:18). 부동산 투기로 불로소득을 취하고, 서민과 청년 세대에 고통을 안기는 자들이 받을 심판이 둘째 대접 재앙입니다.

(2) 제단의 응답(7)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에 대해 제단이 참되고 의롭다고 반응합니다. 제단이 의인화되었는데, 이것은 제단에 있는 성도들의 응답을 표현한 것입니다(6:9-11).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대신하여 악인들을 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고 흡족해 합니다.

 

넷째 대접 재앙(8-9)

심판은 뒤틀리고 방향과 내용을 상실한 상태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일종의 종합평가이며 재편을 위한 시작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알면서도 굴복하지 않으려 합니다. 재앙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경고하시는데도 애써 외면합니다.

8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8-9)

고통과 아픔은 죄인들이 돌이키도록 진지한 성찰을 가져다줍니다. 뽑고 파괴하는 것은 심고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회개를 위해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1) 해를 통한 재앙(8-9a)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길 원하십니다(요한복음 3:16). 모든 인류를 심판에 이르지 않길 원하시며,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요한계시록 2:21).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거부합니다. 더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면, 결국 심판에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분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해가 권세를 받아서 사람들을 불로 태웁니다. 해는 피조 세계의 질서를 대변합니다. 우상숭배는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피조세계가 인간을 심판합니다. 이 재앙은 요한계시록 7:16에서 속량을 입은 자들이 받는 고난의 반전이자 패러디입니다. 순교자들을 핍박한 자들이 겪은 고난은 상징적으로 굶주림과 기근입니다.

(2) 사람들의 완고한 반응(9b)

이제 그 대적이 그 고난을 받습니다. 경제적인 안전보장이 박탈됩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거짓말을 합니다. 짐승이 행하는 짓입니다(13:1,5,6; 17:3).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짐승이 되어버렸습니다. 666은 거짓 선지자와 결탁하여 인간을 짐승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정치, 경제 체제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영상을 돌리지 않습니다. 셋째,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퍅해집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성도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억울함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회개의 길로 나가기보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더 살아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닮아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길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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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5-01)


준비된 일곱 대접 심판

요한계시록 15장 1-8절


폭풍 전야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합니다. 그러나 고요한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엄청난 바람과 파도에 의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고요하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고요할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무한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이 분명히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어 집니다.

 

15장은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넜을 때, 찬양했던 노래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와 대비하여 어린양의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의 시행을 위한 준비로 마무리됩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두루마리(12-15장)의 절정입니다. 노래와 재앙은 연동교합 방식으로 결합되어 서로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일곱 대접 심판에 대한 예고(1)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똑똑해지지만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은 사라지고, 모이기만 하면 자기 가족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평하고 살벌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린 것이 마땅합니다. 출애굽의 홍해사건을 경험한 자들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어린 양의 승리를 통해 넉넉히 이기게 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찬양합니다.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 

본문은 일곱 대접(15:1-16:21)의 도입부입니다. ‘하늘에 크고 이상한 이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12:1의 ‘하늘의 큰 이적’과 12:3의 ‘하늘의 또 다른 이적’과 연결되는 이적입니다. 이곳에서 ‘이상한’은 ‘놀랄 만한’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경외롭고 놀라운 사역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1절은 요한계시록에서 주요 단락들 사이의 전환은 선행하는 단락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락을 도입하는 문학적 장치인 ‘연동 교합’(interlocking) 기법을 사용합니다. ‘어린양의 노래’(15:2-4)는 두루마리(12:1-14:20)의 결론이자 동시에 대접 심판 시리즈(16장)의 서론입니다. 두루마리가 용의 삼위일체(666)에 대한 어린양의 승리로 인해 두 가지 추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린양의 노래’는 어린양의 승리를 극대화하며,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곡식 추수의 의미를 모세의 노래의 패턴을 따라 강조합니다.

재앙을 수행하는 일곱 천사에게 재앙이 들려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실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양의 승리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도입합니다(15:1,5-8). 포도 추수 환상은 대접 심판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됩니다.

 

어린양의 승리의 노래(2-4)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해야할 것은 요행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은 않고서는 그분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판의 때가 되면,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찬양하고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2-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만국의 왕이십니다. 만국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전능하신 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두려운 이름인 동시에 찬양 받으실 영광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사만 사천의 신실한 증언으로 열방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 사상은 두 증인의 이미지(11장)와 곡식 추수의 환상(14장)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애굽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1) 유리 바다 가에 선 ‘이기는 자들’(2)

십사만 사천이 짐승과 더불어 싸운 전투는 홍해를 건넌 시간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닥을 이스라엘이 건널 수 있도록 유리 바다처럼 만드셨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물로 뒤덮여 있던 땅을 성령이 바람으로 말려서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유리 바다는 솔로몬 성전에서 놋대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추격군이 유리 바다에서 수몰되었습니다. 유리 바다는 전투가 벌어진 장소입니다. 불로 뒤섞여 있습니다.

짐승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은 유리 바다에 서서 승리의 새 노래를 부립니다. ‘불이 섞인 유리(수정) 바다 같은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 수정 바다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보았던, 하나님의 발아래에 펼쳐진 청옥과 상응하고(참조 출애굽기 24:10), 성전의 놋 바다도 연상시킵니다. 승리한 어린양의 군대는 모세의 이스라엘과 같이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바다’는 어린양이 짐승을 심판한 장소입니다. 성도들은 어린양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성도들의 승리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를 당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의 눈으로는 이겼습니다. 핍박과 타협의 유혹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타협에 저항하며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짐승을 이겨왔던 자들’(2)은 짐승의 지배와 생활 방식을 거절하고 순응하지 않은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들입니다.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삶은 어린양과 같은 편이라는 증거입니다. 죽임을 당한 표는 어린양의 군대에 동참하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하나님의 거문고(하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 어린양의 노래(3-4)

승리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구원자의 예표인 모세가 불렀던 노래이며(출애굽기 15장), 노래의 주제는 어린양과 구분의 승리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의 노래’가 이제는 ‘어린양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새로운 출애굽을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쟁취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7:14;12:11).

그런데 문제는 어린양의 노래와 모세의 노래가 내용상으로 전혀 일치하지 않은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요한의 전문적인 성경 주해 솜씨가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구약을 언어의 무기고로만 활용하지 않습니다. 주해를 통해 창출된 의미를 해석에 활용합니다. 구약과 유대 문헌에서는 모세의 노래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도출하는 수많은 본보기들이 있습니다. 필로는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2-31)를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모압 왕 시스라로부터의 구출을 애굽 왕 바로로부터의 구출로 해석했습니다(필로의 성서고대사 32장). 이사야 12장도 새로운 출애굽을 표현할 때 모세의 노래를 시편 105편을 인유하여 재해석합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를 이사야 12장과 시편 105편을 활용하여 주해한 창의적인 작품입니다.

요한의 ‘모세의 노래’는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4)라고 어린양의 승리를 새로운 출애굽으로 찬양합니다. 그 결과는 다섯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로서 전능하심을 드러냈습니다. (2) 열방에 왕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3) 다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우월성을 증명하셨습니다. (4)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5) 열방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모세의 노래가 가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요한은 열방을 품는 보편주의로 변혁합니다. 모든 열방이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신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모세의 노래 핵심 구절인 출애굽기 15:11을 예레미야 10:6-7; 시편 86:8-10;98:1-2과 연결합니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대망해온 열방의 귀의란 보편주의의 선율에 리듬을 맞추어 노래를 해석한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러 올 것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의 실행 준비(5-8)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는 다루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심판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항상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는 심판을 받기 전까지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혹시 오늘 회개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본문은 끝까지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끝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5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5-8)

요한은 일곱 나팔 심판을 마지막 재앙으로 부릅니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마지막 시리즈이기에 마지막 재앙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재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인 심판과 나팔 심판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들 심판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심판이었습니다. 삽화가 있는 심판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소개되는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심판의 연기도 없습니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입니다. 5-8절에서 일곱 대접 심판이 실행될 준비를 합니다.

(1) 하늘 증거 장막(5)

요한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환상을 보았습니다. 11:19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전쟁 이후 행하시는 심판을 선언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15:5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 재앙이 소개합니다. ‘증거 장막’은 성전의 특정한 장소인 지성소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29:43). 성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성막 그 자체나 그 안에 있는 법궤를 강조하기보다는 법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것들을 가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들의 ‘증인’입니다.

(2) 일곱 대접의 전달(6-7)

대접 심판은 성전의 이미지 속에서 시작됩니다. 성전과 대접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소의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와 연결됩니다(5:8; 6:9-10; 8:2-5). 성도의 탄원기도가 하늘에 상달됩니다. 탄원기도의 내용은 우상숭배자들의 심판과 피의 신원입니다(요한계시록 6:9-10), 1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는 너무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마지막 재앙)에 가득 차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대접’의 이미지는 구약 두 군데에서 도출됩니다. 첫째는 대접들이 30회 언급된 성막이나 성전의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봉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대접과 제단의 이러한 연결 관제는 대접 재앙들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8:3-5)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과 5:8에서 성도의 기도들을 대변하는 ‘향이 가득한 금 대접’ 사이의 어구가 비슷합니다. 성도의 복수를 위한 기도(5:8; 6:9-11; 8:3-5)는 대접 심판으로 가득히 담아서 응답됩니다. 둘째는 이사야 51:17, 22입니다. 두 번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의 대접’을 언급합니다.

이전에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에 쏟아 부은 이 대접은 이제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인 바벨론에 부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대접은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대접 심판은 하늘 증거 장막의 성소가 열리면서 시작합니다. 법궤와 시은소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세계의 축이고 하늘 문이 있는 곳입니다. 신적 자비가 아니라 신적 진노의 시작으로 기술됩니다. 요한은 특이하게 나팔 심판을 ‘일곱 재앙’으로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레위기 이외에는 이 용어를 쓴 사례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레위기 26:21의 인유입니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 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우상숭배 하여 배교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의 경고입니다. 네 번 반복된 경고(26:18,21,24,28)를 통해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의 강도가 더 높아진다고 경고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한 성전(8)

일곱 대접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지는 8절이 잘 나타냅니다. 8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표현입니다(이사야 6장; 에스겔 10장). 하나님 현존은 진노를 표현할 때에는 너무도 무시무시합니다. 어떤 천상의 존재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실 때는 하나님을 제지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참조, 다니엘 4:35). 따라서 중보기도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성도를 박해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성도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순교자는 생길 수 없습니까? 돈과 권력으로 호령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짐승이 있고, 신이 된 시장이 있습니다. 소비주의 시대에 탐욕스러운 자본과 시장의 신에게 굽힘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시대의 짐승과 우상들과 싸우고 기도하며 저항하는 증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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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4-02)


마지막 때 심판 : 두 종류의 추수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


가을철에 추수한 곡식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풍족해집니다. 특히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을 보며 한 해의 수고를 다 잊습니다. 추수는 무계획적으로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봄철부터 씨를 뿌릴 때, 계획하고 예고된 일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인간의 마지막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심판은 예고 없이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모든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앞에서 세 천사들이 예고한 내용(6-12)이 두 가지 심판됩니다. 하나는 신자의 구원을 위한 곡식 추수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신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하여 최후 심판의 양면성을 보게 합니다. 인자는 예리한 낫으로 익은 곡식을 추수합니다.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진 다른 천사는 포도 추수를 하여 포도주 틀에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 틀을 밟는 자는 누구입니까?

 

성도의 구원을 위한 곡식 추수(14-16)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의 기간 동안 교회를 향한 핍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을 그렇게 핍박하고 교회를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는, 교회가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합니다. 심지어 박해가 심했던 지역일수록 교회는 더 순수하고 영롱했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없고 물질이 많은 곳에서는 교회들이 알아서 타락했고, 알아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14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4-16)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 때에 이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겠지만, 그 전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 심판이 없다면 의인들은 소망의 끄나풀이라도 잡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을 향한 심판은,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됩니다. 그러니깐 심판은 구원을 위한 심판과 형벌을 위한 심판으로 나눈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두 가지 심판이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추수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1) 인자와 같은 이와 예리한 낫(14)

처음 문단(14-16)은 인자가 흰 구름 위에 앉아 심판하시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을 주관하신 분입니다(1:13; 마태복음 24:30). 추수를 친히 행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는 다니엘 7:13-14에 대한 정확한 인유입니다. 본문에 묘사된 심판 언어는 다니엘 7:13에서 왔지만, 본문은 전통적으로 인자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폭풍의 구름을 언급하는 것(시편 18:9)과 다르게 흰 구름에 앉으신 인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됩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와 언어에 대한 왕권과 영광과 주권을 받으십니다. 인자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은 인자를 왕이신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인자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낫은 추수하는 상황을 그려줍니다. 심판을 마지막 추수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곡식 추수의 때에 대한 천사의 청원(15)

이 ‘다른 천사’는 14장에 연이어 등장하는 세 천사들(14:6,8,9)와 구별되는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천사는 ‘인자와 같은 이(그리스도)’에게 땅의 곡식을 추수를 시작하시라고 부탁합니다. 천사는 하늘 성전에서 나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므로,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따른 자들과 짐승을 따른 자들을 같이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곡식을 거두어야할 이유는 곡식이 다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때가 무르익으면,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구원과 심판으로 완성됩니다.

천사는 그리스도에게 ‘낫을 휘둘러 거두시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에 임합니다(마태복음 13:30). 이 상황은 구약성경(이사야 17:5; 예레미야 51:33; 요엘 3:13)만 아니라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마태복음 13:30,39). 세상 끝에는 의인과 악인, 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밀 추수는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마지막 심판 즉, 종말론적인 심판입니다(마태복음 13:36; 누가복음 10:2; 요한복음 35-36).

(3) 곡식 추수(16)

인자는 천사의 부탁에 따라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셨습니다. 그 후에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3:30;40-43, 비교 말라기 3:18, 4:1).

 

불신자의 심판을 위한 곡식 추수(17-20)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영혼들을 추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가 씻긴 사람은 곡식처럼 하나님 나라로 거둬들일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인내하며 살아간 성도들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욕심을 따랐던 자들은 결국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17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17-20)

하나님의 심판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복이지만,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추수한 후에, 이제 포도를 틀에 던져 포도주를 짜듯이, 악인들을 맹렬한 진노의 틀에서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1) 예리한 낫을 가진 또 다른 천사(17)

이번에는 포도를 추수하는 상황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추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추수를 주도합니다. 왜 인자 대신에 천사가 등장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천사가 마지막 추수하는 천사로 등장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추수 때 추수꾼으로 천사들을 동원하신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마태복음 11:30,39,41;16:27). 날카로운 낫을 가진 것은 포도 추수가 심판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천사에게 낫을 휘둘러 포도 추수를 하라고 부탁하는 또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옵니다. 그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로 설명되었고 그 불은 제단의 불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단은 성도들의 신운의 기도가 모아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땅에 쏟는 장소입니다(6:9-10; 8:5). 그 천사는 다섯째 천사에게 ‘포도가 익었’으니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부탁합니다. 포도가 익어 추수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대주재께 ‘어느 때까지’ 자신의 피를 갚아주지 않으시겠느냐고 탄원한 것과 연결됩니다(6:10). 포도 추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신원하시는 진노의 표현입니다.

(2) 포도 추수의 때에 대한 천사의 명령(18)

추수하는 천사는 제단의 불을 관리하는 천사였습니다. 포도 추수에 사용된 이미지는 특별히 이사야 63:1-6 말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이사야 본문에서는 장차 남쪽 에돔과 보스라에서 오시는 주님께서 만국을 짓밟은 용사로 등장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그들의 원수를 칼로 심판하십니다(이사야 63:4). 그날은 원수 갚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심판 즉, 악한 자들을 위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내용을 추수 장면으로 묘사한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예레미야 25:30; 예레미야애가 1:15; 요엘 3:13).

(3) 포도 추수(19)

구약성경에서 포도 추수는 기쁨의 축재였습니다(예레미야 3:12,13; 요엘 3:18; 아모스 9:13,14). 그런데 포도를 추수하는 상황에서 천사가 낫을 휘둘러 성 밖에서 포도송이를 거두어 즙을 짤 때 포도주 틀에서 흘러나온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피’였습니다. 축제의 포도주가 심판의 피로 바뀐 것은 축제가 심판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축제 이미지가 하나님의 심판 이미지와 연결된 이 장면에서는 기쁨과 두려움의 대조와 구원을 행하는 중에 행해지는 심판에 강조가 있습니다.

‘성 밖’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며, 예수님의 중인들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11:8; 참조. 마태복음 21:39; 히브리서 13:12,13), 포도원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이사야 5:1-7; 마태복음 21:33-46). 성 밖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사는 장소입니다. 심판이 성 밖에서 이루어지는 깃은 세상이 우리 주님과 주의 증인들에게 행한 것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응하려는 것(lex talionis, 보복법) 때문입니다.

(4) 포도주 틀의 위력(20)

포도주 색의 피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밖에서부터 말굴레(약 2m) 높이로 천육백(1,600) 스타디온까지 퍼질 것입니다. 천육백 스타디온(186m×1600=320km)은 이사야 63:6에서 취한 것인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인 320km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사무엘상 3:20), 천육백(1,600)이라는 숫자는 4×4×10×10으로 조합이 되었는데, 4라는 수가 세상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5:6; 7:1), 천육백(1,600)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 포괄적인 규모를 나타내려고 제시된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 구석구석까지 퍼질 것이다(참조, 사무엘하 24:15). 물론 여기서 포괄하는 범위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보편성을 표현합니다.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같은 심판은 19:15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성안은 깨끗하게 남아 있다. 성안에는 더러움이 들어 설 여지가 없다(21:27),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계시될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엄격한 구분과 새 예루살렘의 거룩함과 연결됩니다(21:26,27). 본문(14:14-20)에 추수가 이처럼 밀 추수와 포도 추수 등 두 가지로 언급된 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을 구원하고 악인들을 심판한다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실 그날에는 주님을 거부하고 조롱하던 자들이 모두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져 밟힐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다면 우리는 고난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견딜 수 있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한 기대를 붙들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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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4-01)


어린양을 따르는 교회의 승리

요한계시록 14장 1-13절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에 대규모 연합 예배를 드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니다. 한국교회가 연합한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함께 연합 예배를 드리게 되면, 많은 교회 성도들이 협력하여 천 명이 넘는 연합 찬양대를 이루어 찬양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 찬양의 소리를 마치 천국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입니다. 그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13장만 보면 공포의 무기력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4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십사만 사천이 어린양의 성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고 승전가를 부릅니다.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장면을 본 이스라엘의 노래와 같습니다. 하늘의 세 천사가 영원한 복음과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 숭배자들의 심판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하늘에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승전가를 부르는 어린양(1-5)

성도들은 항상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예수를 따라가며 제자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반드시 구원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혹시 식어져 있는 믿음이라면 다시 전의를 불태워 바다 위에 선 용과 담대히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5)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한 사람도 잊지 않고 모두 구원하셔서 하늘의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든지 항상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땅에서 사탄과 사탄의 동역자들의 두 짐승의 무서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짐승 숭배의 거부한 것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요한에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종말론적인 현상을 시각적 이미지를 물론, 청각(2), 미간(8:11; 10:8-10), 후각(8:3-4;9:17-18), 촉각(1:17;3:15-16;9:5)을 통해서도 소개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시각(1)과 청각(2-3)적인 묘사, 그리고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시온산에 선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1)

요한은 시온산에 서 있는 어린 양이 있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 십사만 사천명을 보았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 시온 산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거하는 영원한 거처로서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입니다(갈라디아서 4:26; 히브리서 12:22-24). 그곳에서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아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장소에 와 있습니다(아사야 24:21; 요엘 2:32; 미 4:6-7). 땅은 사단의 통치 영역이며 짐승의 활동 무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브리서 12:1)

이 ‘십사만 사천 명’은 ‘짐승과 그 우상의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15:2)로서, 사탄의 표를 받지 않고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리십니다. 이것은 마치 소나 양을 소유를 표할 때, 이마에 불인장(火印)으로 표시하는 의미와 같습니다. 한 번 표시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사도 바울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자랑했습니다.

(2) 하늘 보좌에 올려 퍼지는 새 노래(2-3)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천사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입니다(2). 그 소리는 우렛소리처럼 크고 거문고 소리처럼 우아 했습니다. 또한, 천상의 성도들인 십사만 사천 명은 ‘새 노래’를 부릅니다. 새 노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을 때, 특히 원수를 물리쳤을 때 불렀던 승전가였습니다(출애굽 15:1-8; 시편 33:3; 40:3; 96:1; 144:9; 149:1; 이사야 42:10).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노래가 ‘모세의 노래’라고도 불립니다(15:3). 그것은 모세가 출애굽과 홍해 도하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에 부른 노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노래는 아무나 부른 것이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를 자격 있는 사람들만 불렀습니다.

(3) 십사만 사천의 자격(4-5)

‘십사만 사천 명’은 여자(17:2-5)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순결한 사람들이라고 소개됩니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는 금욕이나 은둔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고린도후서 11:2) 짐승이나 음녀를 따르지 않고 정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참석하여 새노래를 부를 자격은 구원받은 신부들로 구속 받은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탄과 더불어 영적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거짓말이 없는 자 그리고 순결한 자만이 구원의 반열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의 위협적인 공격 앞에서도 믿음을 지켜 승리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세 천사들의 승전 메시지(6-1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지만, 먼저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6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6-11)

세 천사가 공중에서 날아가면서 차례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들어야 할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천사들은 은혜와 멸망과 경고를 예고하는 천사들입니다. 그 천사들은 각각 새로운 소식들을 선포합니다.

(1) 첫째 천사의 메시지-영원한 복음(6-7)

다른 천사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으니 하나님께 경배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사탄이 일시적인 성공으로 미혹되어 있는 영혼들에게 외칩니다. 영원한 멸망이 임하기 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신부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복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2) 둘째 천사의 메시지-바벨론 멸망(8)

다음 천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8)라고 외쳤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여 그 피를 포도주처럼 마신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영원한 나라를 위한 생각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셋째 천사의 메시지-짐승 숭배자들의 심판(9-11)

세 번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았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를 싫어하시며 결국 그들은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짐승과 우상을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자는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인내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성공에 취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성공에 대한 예물을 주고받습니다(11:10). 실제로는 한순간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를 향한 격려와 위로(12-1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있겠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영원한 파괴와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따라온 삶의 결과가 기대와 다를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지 말고, 그 고난 너머에 있는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2-13)

요한은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으로 새로운 음성을 듣습니다. 마지막 영적 전쟁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1) 성도의 인내(12)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같이 하며, 인내하여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내린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로써 지키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온 마음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분만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영원한 안식(13)

요한은 천사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안에서 죽인 자들에 대한 복이 선포됩니다. 본문은 천사들의 일련의 경고(6-12)를 ‘복이 있다’는 말로써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복이 있다’는 선언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새롭게 평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그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이 땅에서 행한 수고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에게는 복이 있습니다(마태복음 5:10-12).

말할 때, 성령께서 더 확증하시길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적인 승리가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인내해야합니다.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인 음란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순결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면 천국에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천상에서 놀라운 새노래로 찬양하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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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3-02)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1-18절   


‘모조품’을 영어로 ‘이미테이션(imit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짜 물건을 젊은 세대들의 언어로 ‘짝퉁’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짝퉁은 허술하게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명품의 경우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진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짜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가짜일 뿐입니다. 겉모양만 대충 보고 속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짝퉁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는 짐승 후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용처럼 말을 합니다. 큰 이적으로 미혹합니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우상숭배하게 만듭니다. 우상숭배 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짐승의 수인 666을 받게 합니다. 그 표가 없으면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666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 지도자이고 둘째 짐승은 종교 지도자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등장(11-12)

교회가 초림부터 재림까지 사탄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지만 교회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해 주시는지, 그 보호 속에서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은 그들이 증인의 삶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증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이라는 것을 계속보고 있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제국의 정책을 선전하고 황제숭배를 동해 권력을 유지하고 개인적 이익을 챙기는 식민지의 토착 권력자들입니다.
11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1-12)
사탄도 삼위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들도 하나님의 행세를 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먼저 용이 성부 하나님을 모방하고, 바다에서 올라온 한 짐승이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고(1-10), 이제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도와서 용의 뜻을 전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들에게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섬기도록 하고, 그를 선전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1) 둘째 짐승의 특징(11)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위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르지만 성품은 비슷합니다. 일곱 뿐이 아니라 두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짐승들처럼 생겼다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니엘 8장에 나오는 두 뿔 가진 숫양과 비슷한 모습입니다(다니엘 8:3).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그림이 두 뿔을 가진 어린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어린양을 흉내 내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6). 짐승은 양처럼 생겨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흉내 냅니다(11; 5:6). 그가 어린양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가 하는 말(言)에서 나탑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19:13)과 달리 짐승은 용처럼 말을 합니다. 용처럼 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사탄 같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은 말로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고 속였던 뱀과 같습니다.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종교적 대리인입니다. 온 땅과 거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속이는 도구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짐승은 저항해야 할 어떤 숭배의 대상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치 지도자를 숭배하게 만드는 자들의 원조입니다. 바람과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결국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 모두 용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2) 둘째 짐승의 권세(12)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을 경배하듯이(4), 땅에서 올라온 짐승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이적을 행합니다. 이 짐승은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서 공공연히 활동합니다. 반기독교적인 제국을 선전하는 ‘거짓 선지자’입니다(19:20).
종교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반대되는 것을 지지하거나 결탁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킵니다. 특정 사상과 기독교를 동일시합니다. 경계가 필요합니다. 광범위하게 지지되고 있는 이념은 ‘명백’하고 ‘상식적’이며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권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하기를 원하는 소집단의 강력한 기득권을 감싸주거나 두둔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 짐승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이 첫째 짐승의 말과 활동을 정상적이며 훌륭하다고 보도록 설득합니다. 이에 대항하는 행동과 의견은 반사회적이며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요한은 짐승의 지배 과정에서 감추고 있던 정체를 폭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적을 행하는 것에 미혹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마태복음 24:24; 마가복음 13:22).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활동(13-17)

사람들은 외형을 중요시 합니다. 하지만 너무 겉만 봐서는 안 됩니다. 나타나는 형상만 보면 속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무엇을 더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나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때로는 회유나 위협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떠난 은사나 체험이나 영성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13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3-17)
짐승의 표가 찍힌 오른손은 제국의 충성하는 우상숭배자들의 행위이며, 이마는 의식을 말합니다. 충성은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제궁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동화하지 많으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시장에서도 매매는 어려웠고 빈곤과 조기 사망의 원이 되었습니다.
(1) 둘째 짐승의 이적(13)
둘째 짐승은 일반적인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들의 활동은 기적과 미혹과 종교적 탄압으로 요약됩니다. 먼저 그는 큰 이적을 행합니다(마태복음 24:24). 엘리야의 권능을 흉내 낼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서 모세의 이적을 모방하여 재현한 애굽 술사들과 같습니다. 정치 지도자에게서 권위를 위임 받습니다. 원래는 사탄이 준 권세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우상에게 생기를 부여하며, 다양한 마술적 기교로 숭배자들을 현혹합니다. 실제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다양한 마술 행위가 넘쳐났으며, 유대교에서도 마술이 통용되었습니다. 복화술로 말 못하는 우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을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성령의 이름으로 보여 온 종교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인생 기적을 거둔 기독교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외부의 미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 지역주의에 헌신하는 것, 특정한 공공사업에 이바지하는 것이 신앙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강요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 군국주의나 나치즘이 그 예입니다.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들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더 경계해야 할 대상은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와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풍요와 번영이란 바알의 가치로 변질시킵니다.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와 행동 방식과 타협하도록 미혹합니다. 단군신상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일부 기독교 세력들은 특정 정치인의 동상에는 침묵하고 용인하고 장려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가장한 유사종교이며 이단적인 교훈입니다.
(2) 둘째 짐승의 우상숭배 활동(14)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미혹합니다. 미혹은 사탄의 주목기입니다. 에덴부터 지금까지 그 버릇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사탄은 이적을 행함으로 자신들의 권위에 확실을 줍니다. 13절의 ‘이르기를’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지시하고 명령하고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묵묵히 따르게 받습니다. 미혹의 목표는 우상숭배입니다. 첫째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치명적인 정치적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서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교회에게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며, 우상을 만들도록 부추깁니다. 참람함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요한의 시대에는 로마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대체하는 것은 다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돈도 사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안식에 여주행하는 생산과 소비주의도 우상입니다. 이단의 교주들도 우상입니다.
(3) 둘째 짐승의 핍박(15)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통제합니다. 외부 세력이 진정한 교회에 고난을 주는 것은 종교 탄압과 핍박입니다. 기독교 내부에서 저항하는 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통제와 억압입니다. 재국은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바벨탑의 망령은 시대마다 나타납니다. 한 언어와 생각만이 건건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건설적인 의견도 이단이나 불순세력으로 배도하여 죽입니다. 제국은 온실이나 인큐베이터를 좋아하지만 광야는 좋아하기 않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거북하고 불편하여 침묵시킵니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5)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신앙적인 고난입니다.
어떻게 저항합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교회는 불 가운데 들어가서 견인(堅忍)되어야 합니다.
(4) 둘째 짐승의 표(16-17)
666은 무엇입니까? 666의 의미를 푸는 열쇠는 계시록의 본문과 당시의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여섯째 심판은 우상숭배자들이 받는 심판입니다.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 666은 용과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의 삼위일체입니다. 6은 불완전수이며, 7은 완전수입니다. 8은 새 창조의 수입니다. 666은 사탄의 삼위일체를, 777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888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요한이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문학적 기법 중 하나가 ‘수비학’입니다. 네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숫자사로 환산하면 666입니다. 로마에 퍼진 네로의 환생설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안에서 666의 의미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66만 놓고 묵상하면 오해의 늪에 빠집니다. 666과 더불어 144를 봐야 합니다. 666은 인간의 수요 짐승의 수입니다. 144는 새 예루살렘의 수입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입니다. 14장에서 144,000이 666을 이기고 승전가를 부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666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체제입니다. 특정 인물이 아닙니다. 반면에 144는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모든 체제입니다.
666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역사 속에서 부상했다가, 어린양의 군대 144,000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사라졌습니다. 666은 사탄이 그 근원입니다. 사탄은 정치 세력과 종교 세력과 동맹을 맺고,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해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시켜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자는 666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에게 주는 경고(18)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분별력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불완전으로 뭉쳐진 악의 삼위일체를 이루고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사탄의 교묘한 유혹과 거짓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18)
지혜와 총명(18)은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13장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용이 앞장세운 짐승의 정체를 분별하고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주변 사회를 지배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짐승의 체제에 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해 상상력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정치적입니다. 예배는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하늘의 시각에서 갖도록 만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의 전조가 드리운다 해도 ‘저항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배제와 소외로 협박하는 ‘순응하라’는 사회적 압박을 성도는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맞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권력 구조에 대하여 치밀하게 선지자적 비판을 가합니다. 제국의 모든 혜택을 거부하는 것은 로마가 자신의 권세와 번영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유일한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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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3-0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요한계시록 13장 1-10절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정의와 자비가 작동하고 구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요한은 짐승의 나라를 반대합니다. 짐승의 나라는 살인적인 억합 구조를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행사합니다. 그러나 누가 세상의 진짜 주인입니까?

 

용이 바다 모래에 섭니다. 사탄은 교회를 어떻게 핍박합니까? 바다에서 첫째 짐승이, 모래에서 둘째 짐승이 올라옵니다. 이들은 사탄의 대리인들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정치 지도자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 지도자입니다. 용과 더불어 666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습(1-4)

바다 짐승과 땅 짐승은 욥기 40-4장에서 등장하는 두 짐승,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모델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짐승은 역사 이전에 하늘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습니다. 계속 패배하지만, 낮은 자세로 계속 미혹합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으나 재기하여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계획을 능동적으로 수행합니다. 하늘 보좌에서의 참소권(讒訴權)은 박탈을 당했으나, 계속하여 핍박하고 미혹합니다.

1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1-4)

13장은 12장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용(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이(교회)를 핍박하는 기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용은 하늘에서 쫓겨나서 땅에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사탄의 하수인들은 두 짐승인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의 도움을 받아 여자의 남은 자손인 교회를 해치려 합니다. 먼저, 용의 권세를 받아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어떻게 교회를 핍박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첫째 짐승의 특징(1-2)

요한은 바다에서 첫째 짐승이 올라옵니다. 이 첫째 짐승은 용(사탄)의 아바타입니다. 앞에 나온 용과 비슷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특징은 용이 준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의 짐승에게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합니다. 12:3에 용의 모습과 비교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용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영화로운 이름을 가진 것처럼, 반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게 하는 것처럼(1:6), 짐승은 사람들에게 사탄을 경배하도록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처럼, 짐승도 상처를 입고 죽지만 다시 살아납니다(13:3,12,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보좌를 가지신 것처럼(12:5,10), 이 짐승도 용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받습니다(2,4).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용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정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사탄은 용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과 권세를 찬탈하는 자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다니엘서 7장 3,7절의 바다에서 나온 네 짐승의 모습을 종합하여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은 매우 사납게 생겼으며 굉장한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대적한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본문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가지 더 추가됩니다. 짐승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치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세상은 짐승을 추종합니다.

요한과 당시 성도들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당대에 로마 세력을 염두하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장하여 마치 자신이 세상의 권세를 장악한 것처럼 아시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과 로마의 황제들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아우구스투스 이외에 여러 황제들을 로마 시민에 영향을 주는 신(gods)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네로의 후계자들은 네로가 죽은 뒤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짐승의 권세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국가와 국가의 원수와 인간 정신을 창고하고 신뢰하고 예배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참신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2) 첫째 짐승의 어린양 패러디(3)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몇 가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머리 일곱 개 중에서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이 짐승도 큰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났습니다(13:12,14). 온 세상이 이런 놀라운 기적은 더 많은 사람들로 그 짐승을 따르게 했고, 짐승에게 그런 능력을 준 용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3) 첫째 짐승의 권세(4)

이러한 짐승의 행동은 모방일 뿐이지 예수님의 능력을 따라잡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셨던 것처럼 이 짐승은 용에게 권세를 받았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은 사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무시무시한 권세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 공포로 무기를 삼습니다. 악의 세력은 항상 공포를 무기 중 하나로 사용합니다. 무시무시한 공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드는 일을 좋아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활동(5-8)

사탄은 오늘도 하나님을 모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탁월한 사탄의 재주는 여전히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다니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의 활동 기간에 제한을 두셨습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짐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가 되면 그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본 것입니다.

5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5-8)

사탄이 많은 능력을 가졌고,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사탄을 경배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1) 첫째 짐승의 비방(5-6)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위력 있는 말로써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지 소개되었습니다. 그 기간은 한정된 기간인 마흔두 달 즉,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말씀을 증언하는 기간이고(11:3), 교회가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기간입니다(12:6,14). 짐승은 이 기간 내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늘에 사는 자 즉, 교회를 비방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이 활동하는 기간은 용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권세 역시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에게 자신을 모독하게 허용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정하시고 은혜로우신 목적과 심판과 영광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있습니다. 짐승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비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독을 당사시고, 성도들은 고난을 받으며, 악은 창궐하고, 세상은 거짓 신을 따릅니다.

(2) 첫째 짐승의 핍박(7)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짐승을 따를 것입나(7)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감정적이지만 전 세계 백성을 장악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 총체어 입니다.

(3) 첫째 짐승의 숭배(8)

세상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짐승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 신’으로 대접받습니다(고린도후서 4:4).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8).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과 그 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짐승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7-8). 창세 이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13:8) 은 짐승에게 경배합니다(8). 그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고, 하늘에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횡포와 권세를 견디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성도에게는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9-10)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반드시 비용 계산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된다는 것은 악한 세상에 동조하지 않으며 고난과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기복주의와 만사형통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에 비해 약속된 장래의 영광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 길을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9-10)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입니다. 믿음과 안내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인내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참고 인내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들을 귀 경고(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촉구합니다. 듣지 않는 우상숭배자들은 더욱 마음이 강퍅해질 것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사탄의 통치(속임수와 과장과 신성모독)를 받는 정치를 통해 사회 각 영역에서 실행되는 현상입니다. 종교적인 구분만 하라면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속아서 도리어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를 신앙의 눈으로 보되,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어떻게 사탄의 통치가 실현되는지를 분별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2) 성도의 시험대(10)

짐승의 활동 결과,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짐승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인내와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10). 성도는 짐승의 공격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절대적인 보호를 받지만, 육신적으로는 구금과 죽임을 당합니다. ‘죽이다’는 성도의 고난을 묘사합니다(6:8,11). 고난을 당하는 성도에게는 영적 분별력과 더불어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실한 증인으로 고난을 받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 위탁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9). 생존과 생명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순복해야 하지만, 정부가 위임된 권위의 한계를 넘어서,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고 종교적인 수준의 요구를 할 때에는 저항해야 합니다. 저항과 불복종으로 인해 정부가 징벌을 내리면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2:18-20, 로마서 13:1-7).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핍박은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에서도 오직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의 전조입니다.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고 악한 세상에 맞서야 합니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곧 승리의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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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2-01)


용과 교회와의 영적 전쟁

요한계시록 12장 1-18절


세상 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먼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싸움을 간파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단지 인간 통치자만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와 악한 영들과 직면합니다. 피상적인 헛발질이 아닌 견고한 진영을 분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12장은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영적 전쟁을 묘사합니다. 용이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게 하지만 여자는 아이들 낳습니다. 여자는 용을 피하여 3년 반 동안 광야로 피합니다. 다른 장면으로 하늘에서 이와 상응하는 전투가 있습니다. 미가엘과 사탄의 전쟁입니다. 사탄이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납니다. 원래 장면으로 돌아가서, 용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홍수로 삼키려 하나 땅이 강물을 삼켜버립니다. 용이 분노하여 바다 모래 위에 섭니다.

 

땅에서 떨어지는 여자와 용의 전투(Ⅰ)(1-6)

11장은 두루마리의 축소판이고, 12-15장은 확장판입니다. 전체 주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창세기 3:15의 원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하늘과 땅에서 사탄과 하나님 백성 간에 갈등이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도록 합니다. 주요 목적은 사탄의 공격에 대비하여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보호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신실한 증인의 삶을 견고히 고수하도록 격려합니다. 12장은 1-11장에서 발전시켜 왔던 주제, 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을 더 심도 있고 상세하게 다룹니다. 사탄 자체가 제국적인 악의 근원입니다. 독자는 12장을 읽으면서, 땅의 박해자들의 배후에는 악마 자신이 거느리는 영적으로 악한 세력들이 서 있음을 인지하게 되고, 이러한 인식은 신실한 증인으로서 더욱더 감내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에베소서 6:12-13).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1-6)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으로 성령님에 의해서 해석되어 합니다. 본문에는 많은 상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상징과 이적 그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여자의 해산(1-2)

요한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1)로 시작합니다. ‘하늘’은 계시의 출처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보여줍니다. 우선 독자를 하늘로 초대하고 중요한 표적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한 여자가 소개됩니다. 그 여자는 찬란한 영광을 지녔는데, 여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는 여자의 겉모습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태양을 옷으로 입고, 발아래에 달이 있고 왕처럼 열두 별로 만든 관을 썼습니다. 12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수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존재한 믿음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 여자는 17:3,4에 언급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진 음녀와 대비됩니다.

해를 입은 여자는 사내아이를 임신하였는데, 그 아이를 낳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임신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표상은 아사야 26:17,18과 아이를 낳은 모습을 그린 이사야 66:7-9에서 온 것입니다. 이사야 26장은 파멸된 이스라엘이 장차 후손이 많아지게 될 것을 예언한 본문인데, 이것은 마치 아이를 낳는 여자가 해산의 수고로 아이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66장은 진통하는 즉시 아들을 순산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2) 용(3-4a)

‘여자’에 맞서는 ‘용’이 나오는데, 그 ‘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용’은 머리에 일곱 개 뿔이 열 개 있었습니다. 몸집이 거대했고 붉은 색을 띄었습니다. ‘용’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원수를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시편 74:12; 이사야 27:1; 에스겔 29:3). 붉은 용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회화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탄은 애초부터 여자를 괴롭혔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여자와 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창세기 3:15). 여자와 사탄의 전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미혹하고 여러 모습으로 괴롭혔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지만 모조품입니다. 그 속임수에 하나님 백성 3분의 1이 배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사탄의 모습을 창의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 백성을 괴롭힌 제국들의 이미지를 이리저리 모자이크하여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로마제국은 그 절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산고의 진통을 겪습니다(이사야 26:20;66:14). 그리스도는 하나님 백성의 고난 속에서 출현합니다. 시편 2편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3) 용과 여자의 갈등(4b-5)

용은 그리스도를 삼키려고 기다립니다(4b). 여자가 아들 곧 남자를 낳자 그 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려갑니다. 이러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자 용은 공격 대상을 잃고 맙니다. 그의 공격은 실패로 끝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의 승천은 단지 용의 공격을 피하는 소극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의 탄생 목적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11:15). 하지만 사탄은 메시아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것이 독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4) 여자의 피신(6)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여자는 용과 함께 남습니다. 이때 여자는 하나님께서 양육하기 위해 예비하신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 동안 보호하고 양육합니다.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여자는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습니다. 하늘로 도피하지 않고, 신실한 증언을 통해 사탄의 통치에 저항합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1260일이 상징하는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승천하여 보내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양육을 받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운명입니다. 성경 전승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현존하는 곳이고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곳입니다(시편 23;78편). 시련과 보호의 장소다(신명기 8:14-16). 영적 피난처이며 훈련과 양육을 받는 곳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가엘과 사탄의 전투(7-12)

교회를 패하게 하려는 사탄의 표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사탄은 육신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주 무기로 삼지 않습니다. 사탄은 ‘네가 이러고도 성도 맞아?’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우리의 구원 자체를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격합니다. 이때 엉뚱한 것으로 사탄을 대적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7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7-12)

요한은 12장에서 여자와 용의 전쟁을 3부작으로 나눠, 1-6절은 태고부터 시작된 전투를, 13-17절은 현실 속 영적 전투를, 중간에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성합니다. 13-17절은 사탄과의 전쟁의 핵심적 해석이며 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처럼 삽입되어 있는 이 말씀은 단순한 삽입이 아니라 앞뒤로 전계되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밝혀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7-12절까지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사탄의 정체와 패배(7-8)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미가엘과 용과의 큰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용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용의 패배는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미가엘은 실제로 싸우는 야전사령관이 아닙니다. 천국 지도에서 사탄의 깃발을 제거하는 참모입니다.

9절의 중요한 의의는 용을 마귀, 사단을 묘사하는 그림에 있습니다. 용은 ‘옛 뱀’으로 불리며(창세기 3:1,14), 하나님 백성의 오랜 원수입니다. 옛 뱀, 사탄은 중상모략하고 기만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뱀과 그의 대리자들은 동산에서 시작하였던 것을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마귀의 기만하는 역할을 과감하게 박탈하고 참소하는 역할을 무력화합니다. 마귀와 그 천사들을 하늘에서 내쫓아버리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에 대한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박탈과 무력화입니다. 마귀가 잃어버린 ‘곳’(장소)은 지금까지 특권을 누려왔던 고소의 자리로 이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의 특권으로 승인하셨던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교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인간 종들을 통하여 기만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뱀의 이미지를 채택하여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방신의 이미지입니다. 사탄은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합니다.’ 다니엘 2장의 ‘돌’이 신상을 깨트립니다. 그 돌은 다니엘 7장의 인자입니다. 다니엘 7장의 인자는 종말에 이전의 압제적인 제국들을 대체합니다. 초기 유대 문헌은 돌을 하나님의 대적들, 특히 로마를 무찌르는 ‘오실 메시아’와 동일시하였습니다(에스라4서 13:6-8). 사탄은 제한된 의미에서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하늘 전투에 상응하여 성도들이 사탄을 이겼습니다.

(2) 하늘 보좌에서의 승전가(10-11)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쫓기자마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였음을 선포하고 큰 음성이 들립니다. 이 음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승리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승리에 환호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점에서 용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내쫓긴 사건을 찬송으로써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가 나타난 반면에 사탄은 쫓겨났다는 것과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그들의 말씀 증언으로써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순교를 감수하면서까지 어린야의 피와 증언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겼습니다.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로 사탄을 이겼다는 말은 사탄이 어린양의 피에 일찍이 패배했음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역을 통해 사탄을 이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70명의 사역으로 인해 사탄은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누가복음 10:18). ‘참소자’는 ‘고발자’(accuser, NASB)를 뜻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발한 사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욥기 1:6-12). 하늘 전투에서 패배한 사탄은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성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3) 사탄 패배의 여파(12)

본문에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과 ‘땅과 바다’ 등 두 부류로 나눕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원수들은 땅과 바다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13:8). 성도들은 용(사탄)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즐거워합니다. 반면에 땅과 바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자기가 내쫒긴 분풀이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떨어지는 여자와 용의 전투(Ⅱ)(13-17)

사방에서 혹독한 고난이 융단 폭격같이 쏟아지더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독수리 날개처럼 보호해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 주님의 손길이 교회를 건져 든든하게 받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갈수록 맹렬해지는 사탄의 공격이 그의 최종적인 패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시간표임을 읽어 내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13-17)

마귀는 교회를 파괴하려고 끊임없이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용은 두 번째로 땅에 떨어진 여자와 전쟁하고 있습니다.

(1) 용의 여자 박해(13)

요한은 독자를 다시 현실 속으로 초대합니다. 태초는 종말에도 반복됩니다. 박해를 받는 현장입니다. 13절은 6절과 12절이 남겨둔 주제를 다시 꺼내 듭니다. 6절은 성도의 공동체가 신적인 피난처로 피신하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공동체에 대한 용의 핍박에 관한 명백한 언급이 없습니다. 12절은 용이 하늘에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용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보좌로의 등극을 훼방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상실감과 무능력으로 인해 분노합니다. 13절은 이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용이 격노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동사 디오코(διωκω)는 ‘핍박하다’ 또는 ‘뒤쫓다’로 번역됨 수 있습니다. 마치 바로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바로는 용의 모델입니다.

(2) 여자의 피신(14)

용은 여자를 없애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여자는 안전합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는 삼 년 반 동안 아무리 큰 환난(12:15,16)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독수리의 날개로 안전한 곳에 데려가며(이사야 40:31), 물이 엄습하여도 그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14절은 6절의 진수를 이제 다시 진술합니다. 삼 년 반(1260일)은 교회가 광야 생활을 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큰 독수리 두 날개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양육하십니다.

(3) 용의 여자 공격(15-16)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에도 사탄은 계속 박해합니다. 홍수로 여자를 휩쓸어버리려고 합니다. 입에서 물을 토합니다. 홍수는 문자적이지 않습니다. 쿰란 공동체에서 홍수는 속임수와 핍박의 상징입니다. 뱀의 입에서 나오는 홍수의 이미지는 속임수와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상징합니다. 사탄의 본성입니다. 교회에 침투하여 속여서 꾀고 교회를 파멸시키는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4) 용의 분노와 대대적인 공격(17)

땅이 활을 삼켜서 사탄의 분노에 찬 시도를 좌절시킵니다. 바지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땅이 삼키고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 무리를 땅이 삼킨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좌절된 용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바다 모래에 섭니다. 바다 모래는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등장시켜,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우리가 이어서 감당하는 신실한 순종 없이 우상숭배의 거짓과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의 악은 멈취질 수 없습니다. 영적 활력을 가진 증인의 삼은 종교적인 ‘말의 죽음’을 불식하고 이기는 자의 삶이 되게 해줍니다. 사탄은 오늘도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단한 공격을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전투의 현장에서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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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1-02)


두 증인의 최후 승리

요한계시록 11장 14-19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천국의 맛, 순종의 맛, 사랑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즉석음식들과 같은 신앙생활에 길들여진 삶은 천국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맛’을 아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그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도 복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것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이 가장 강력한 증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받고 살아있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나팔 심판이자 셋째 화가 시작됩니다. 9장의 여섯째 심판이자 둘째 화와 연결됩니다. 나팔 시리즈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그 내용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세상 나라가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갑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심판을 받고, 성도는 상을 받습니다. 하늘 성전의 언약궤가 보입니다. 그것은 속량의 상징이자 심판의 상징입니다.

 

셋째 화 예고(14)

우리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상 나라의 힘과 권세는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는 유한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의 화려함은 꽃과 같지만 곧 시들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하는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받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항상 이 사실만은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14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14)

13절까지 내용은 독수리가 전해주는 화 세 개 중에 두 번째 화에 해당합니다(9:13-11:13). 본문은 지진이 나서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하는 혹독한 화가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 더 남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첫째 화(9:1-12)와 둘째 화(9:13-11:13)에 이어서 11:15-19에는 셋째 화가 소개됩니다.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결된다고 10:7에서 그리스도가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재앙도 없고, 오직 하늘 찬양만을 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여섯 가지 나팔 재앙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가혹한 심판이 가해졌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당시의 바로와 같이 더 강퍅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회개 유도 전략을 바꿨습니다. 우레 심판을 취소하고 두루마리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두 증인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열방이 대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일곱째 나팔은 그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왕 노릇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립되어갑니다. 사실 찬양에는 심판과 구속의 행위가 기술되어 있습니다(11:18-19). 하나의 노래가 환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의 화(禍)도 나팔의 내용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우상숭배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확립은 다른 어떤 나팔 재앙보다도 가혹한 재앙입니다.

 

일곱째 나팔(15-18)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요한계시록 20:13; 베드로전서 1:17)이 우리를 신원하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불신 세력의 유혹에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우리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최후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를 박해하는 악한 세력의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5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24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15-18)

24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 모두를 보응하실 것입니다.

(1) 하늘의 찬양(15)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상황을 묘사합니다. 일곱째 인을 뗄 때는 고요함이 있었습니다(8:1). 그런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는 고요함이 아니라 큰 음성이 울립니다. 이후에 벌어질 장관에 어울리는 내용을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상 나라는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15-18, 참조 19:1-1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무대 설정은 완전히 갖추어졌습니다. 어린양이 교회에 하나님의 일곱 눈이자 일곱 영이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복음 증거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순교적 증언으로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동을 걸어 행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요점 정리하여 찬양으로 선포합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이시다.’ 하나님의 비밀(10:7)이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그 성취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보좌 예배에서 찬양을 통해 그 성취가 선포됩니다.

(2) 24 장로의 찬양(16-18)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할 때 반응하는 하늘의 찬송을 소개합니다. 이 찬송을 주도하는 자는 24장로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다시 왕 노릇하신다는 것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상을 주시게 된 것을 감하여 그분께 경배하며 찬송합니다.

① 24장로의 경배(16)

하늘 보좌의 구성원 중에 24장로들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늘 보좌의 장로들은 진짜 장로답습니다.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장로가 얼마나 장로다운지 표시가 납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을 숭상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제의적 태도입니다. 장로들이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이지만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와 찬양의 반응을 보입니다. 심지어 4:10에서는 자신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면류관’은 명예이자 권위의 상징입니다. 24장로는 정치적인 직함입니다. 장로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대표들입니다. 대표로서의 권위와 명예와 위엄을 다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왕 되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왜 장로들이 하늘 보좌의 대표로서 찬양을 하십니까? 땅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게 신앙고백이자 하늘 포고문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② 왕이신 하나님(17)

땅의 공동체는 지금 로마제국의 지배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상하는 움직임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제국인 로마가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법적인 왕이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세상에서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사탄은 세상 제국을 통해 세상을 향한 자신의 가치와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짐승이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고, 나라가 하나님 백성의 손에 넘어갑니다. 왕의 등극이나 왕국의 설립에 당연히 나팔을 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비밀을 대표하고 있는 교회에 포고문으로 전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다.’ 전형적인 표현을 변형합니다. 미래(‘장차 오실 이’)를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로 대체하고,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로 부연합니다. 바로가 그 백성을 억압하고 있을 때, 광야 가시떨기 나무에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현존하십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희생시켜서라도 현재를 강조합니다.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들어오셔서 친히 왕 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증거입니다. 신실한 증인들도 양을 따라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사탄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사탄은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지만, 현재는 없다.’ 사탄의 결정적인 취약점을 파고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을 패러디를 통해 강조합니다. 누가 진짜 왕입니까? 누가 세상을 통치하기에 합당합니까? 로마 황제는 모조품입니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지극히 정치적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이 찬양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어린양을 경배할 것입니까? 짐승을 숭배할 것입니까? 단지 종교적인 질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질문입니다.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합니다. 국가에 대해서는 매국노 또는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잘못된 정치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③ 심판과 보상(18)

하나님께서 신원하시는 때가 임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과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분명하게 가르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반면에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자 이방인들이 분노합니다(시편 2편). 하나의 대차대조기법으로 성도의 보상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이방의 진노와 심판(a) - 성도의 보상(b)-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멸망(a′)의 구조로 구성됩니다. 신실한 증인에게 주실 상급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성도가 옳다고 인정받음을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은 ‘그리스도가 왕이시다’라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열방은 분노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분노에 심판으로 대응하십니다. 증언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죽은 자들은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자들’입니다(a-a'). 황폐하게 하는 자들은 황폐하게 됩니다. 노아 홍수는 땅을 황폐하게 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파괴한 자들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레위기 25:23). 제국은 땅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듭니다. 제국은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통해 적출과 축적을 합니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땅과 사람을 위한 규범입니다. 제국은 이를 통째로 무시합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아합의 집안처럼 황폐하게 됩니다. 바벨탑과 같은 제국을 건설하고 땅을 황폐하게 한 세상의 모든 정치 집단은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여 황폐하게 만듭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를 악의 위협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장소가 됩니다.

 

하늘 성전과 언약궤(19)

최후의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순간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을 받을 순간입니다. 이처럼 심판은 믿는 사들에게 소망의 때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구원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확신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구원을 확신하게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때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묵묵히 이겨야 합니다.

19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9)

하늘의 참 성전이 열린 것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신 결과입니다. 성전에 안에서 언약궤가 보입니다. 땅의 성막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입니다. 하늘과 땅은 실재와 그림자로 상응합니다. 하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상징합니다. 성전의 언약궤는 바벨론 포로 기간에 사라졌습니다. 유대 전승은 언약궤가 돌아온다고 기대합니다. 성경은 문자적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기대합니다. 마태는 임마누엘로, 요한은 성육신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 개념은 11:19에서 시작되어, 새 하늘과 새 땅(21:3), 새 예루살렘(21:33)에서 반복 확대됩니다. 하늘의 언약궤의 등장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림을 상징합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신현과 동시에 심판의 마지막 행동을 시사하는 정형문입니다.


예배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여원하신 왕을 알현하는 시간입니다. 단정한 마음으로 겸손히 예배할 때 우리의 예배는 하늘로 이어질 것입니다.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눈앞에 밝히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세상 나라를 압도하며 담대하게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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