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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09-01)


다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9장 1-12절


법정에서 다투는 과정에서 진실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진실보다 거짓이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거짓 주장하는 사람이 거짓의 각본을 정확하게 제시해서 각본을 맞추었고, 진실은 정확히 답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아무리 좋은 각본을 꾸며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들어납니다. 사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고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탄의 모습을 늘어내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 마지막 절에서 독수리가 화를 삼중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9장은 첫째 ‘화’로서 다섯째 나팔 재앙을 기술합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엽니다. 거기서 황충이 나옵니다. 황충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길게 다르고 있습니다. 앞의 네 가지 나팔과는 달리 세 가지 나팔은 재앙이라고 부릅니다. 가혹함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1-2)

세상에 악한 문화는 점점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듭니다. 처음에는 강력하게 거부하다가 그러한 일들을 계속 접함으로 그 문화들을 아주 쉽게 받아 드리게 됩니다. 성도들은 더러워져 가는 세상의 문화를 선교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되고 어두워진 환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새롭게 해야 할 사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1-2)
 
넷째 나팔은 암흑의 심판입니다. 이제 다섯째 나팔 심판으로, 남아 있는 세 개의 화 가운데 첫째입니다. 그 심판은 우상 숭배자들(땅에 사는 자들)에 대한 황충 심판입니다. 황충은 메뚜기입니다. 넷째와 다섯째 나팔 심판은 출애굽 재앙의 동기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1) 다섯째 나팔과 하늘에서 떨어진 별(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1절의 해석은 복음주의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떨어진’이란 단어로 ‘사탄’으로 보고(이사야 14:12; 누가복음 10:18), 또 다른 학자들은 ‘천사’로 해석합니다. 필시 천사를 가리킬 것입니다. 20:1에서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라고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졌다’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천사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하나님에게로부터 그곳을 열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무저갱(無底坑)’은 ‘음부’, ‘스올’을 의미합니다(누가복음 8:30-31). 이곳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의미하는 곳으로 어두움의 권세를 잡은 자들, 짐승과 사탄이 한시적으로 갇혀 있는 곳입니다(11:7;17:8;20:1-3).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최종적으로 벌을 받는 곳은 불과 유황 못입니다(20:10).
 
(2) 무저갱의 문을 열다(2)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무저갱의 열쇠’로 무저갱을 열자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러므로 무저갱은 불이 계속 타오르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 연기가 얼마나 심한지, 해와 공기가 어두워질 정도입니다. 군대라는 귀신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것으로 보아(누가복음 8:21), 이것은 고통스러운 장소일 것입니다.
무저갱이 열리자 연기가 올라와서 해가 가려져서 어두움이 임합니다. 네 번째 나팔의 재앙도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말씀에 기갈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움의 의미는 창세기 19:28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고, ‘치솟음’와 ‘연기가 올라옴’과 단어에 일치하고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무저갱의 그림 자체가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 상태를 의미합니다(창세기 19:10-11). 그러므로 무저갱이 열림으로 어두워진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로, 이 세상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어둠은 영적인 맹목을 상징합니다. 그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음이 강퍅해짐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일어나는 메뚜기 재앙(3-1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통한 재앙이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방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 나팔소리로 임한 재앙이 계속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3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7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3-11)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첫 출애굽 때 역사상 유례없는 메뚜기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출애굽기 10장),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큰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황충의 권세(3-4)
 
무저갱에서 첫 번째는 연기가 나오고, 다음으로 더불어 황충이 땅으로 올라옵니다. ‘황충(蝗蟲)’은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풀무치라고도 불립니다. 이 ‘황충’이 엄청나게 하늘에 떴다면 온 대지는 깜깜해집니다. 그러나 황충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단순히 곤충 메뚜기로 보기 힘들게 합니다. 황충으로 묘사한 세력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 권세는 전갈의 권세에 비유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황충이 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납니다(사사기 7:12). 그래서 황충의 파괴력은 아주 강력합니다. 황충이 지나가면 모든 푸른 식물들을 모두 갈아먹어 버려서, 모든 농사를 끝장을 내버립니다.
하지만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4)라고 권합니다. 황충의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기는 못합니다. 첫째 나팔 재앙이 땅과 수목과 푸른 풀을 태운 반면에(8:7), 황충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과 각종 나무와 물은 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는 악인들만 해할 수 있습니다.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 것으로 볼 때, 악한 세력의 일부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악한 세력이 다른 악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악이 다른 악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해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삶을 먹고 불로 사릅니다(17:16). 황충이 등장하는 다섯째 나팔 재앙은 메뚜기가 애굽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고, 우박에 상하지 않는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메뚜기가 다 먹어 치운 출애굽의 여덟째 재앙을 연상 시킵니다(출애굽기 10:14-15).
 
(2) 황충의 해악(5-6)
 
황충의 모양은 메뚜기 같지만 쏘는 것은 전갈 같습니다. 황충은 악인들을 죽이지는 않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합니다. 황충이 ‘다섯 달 동안’ 나타나는 기간은 유대 월력으로 4-8월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그 고통은 전갈에 쏘이는 정도로 극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고 싶어 하지만 죽지도 못합니다(6). 이 고통은 여섯째 인 재앙을 떠올립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악인들은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6:16). 순교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절정은 죽음이지만, 악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절정은 죽음 그 이상입니다. 황충이 악인들을 괴롭히는 다섯 달은 서머나 교인들이 환난을 받는 열흘보다는 확연히 길지만(2:10), 요한계시록에 여러 번 언급되는 마흔두 달보다는 훨씬 짧습니다(11:2~8: 12:6, 14; 13:5)
 
(3) 황충의 모양(7-10)
 
본문에서 언급된 황충은 실제 황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황충의 실제 모습보다는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실제보다는 훨씬 더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황충들의 전체 모습은 마치 전쟁용 말들과 같으며, 메뚜기의 모습이 전쟁용 마구(馬具)를 쓴 말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황충이 쓰고 있는 금관 같은 것은 더듬이 끝의 노란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유력한 해석은 흰 말을 탄 자가 쓴 면류관처럼(6:2), 금관 같은 것을 승리를 상장하는 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충의 이빨이 사자의 이 같다는 묘사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황충의 파괴력을 말합니다. 황충에 대한 묘사는 요엘 1:8에 나와 있는데, 메뚜기 군대의 이빨을 사자의 이빨에, 그 어금니를 암사자의 어금니에 비유합니다. 호심경, 즉, 흉갑이 있다는 설명이나, 날갯소리가 전차와 말들이 달리는 소리 같다는 표현은 메뚜기 떼와 쉽게 연상됩니다.
반면에 메뚜기의 형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황충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고,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머리털 같은 것이 황충의 더듬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황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 황충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충이나 메뚜기는 꼬리가 없습니다. 또한 황충은 풀을 해치는 것이 이치인데, 요한계시록의 황충은 풀을 해하지 않고 사람들을 해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황충은 우리가 아는 곤충 황충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종의 초자연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4) 황충의 왕-무저갱의 사자(11)
 
황충들에게는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볼루온’이라는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무저갱의 사자입니다. ‘아바돈’은 ‘파괴’를 뜻하고, ‘아볼루온’은 ‘파괴자’를 의미합니다. 아바돈이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들의 왕이므로, 아바돈이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은 용이나 큰용, 옛뱀, 마귀 등으로 불립니다(12:9;20:2).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무저갱입니다(20:1-3). 아바돈이 사탄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바돈이 사탄은 아니더라도 악의 세력을 대표할 만한 강력한 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바돈’과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은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이 악의 세력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강력한 이름값을 하는 이 지도자는 사람들의 최고 통치자일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황충은 왕이 없습니다. 나팔 심판은 비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로마 황제들이 종종 자신을 가리켜 아폴로가 성육신하였다고 주장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때때로 메뚜기로 표현됩니다. 또한 아볼로는 ‘아볼루온’과 같은 어원입니다. 아볼로는 악의 파괴자입니다. 요한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암흑 속에 거하는 자들은 반드시 흑암의 세력에게 징벌을 받습니다. 불경건한 자의 눈을 영구적으로 불신앙의 커튼으로 가리는 역할을 메뚜기가 합니다.
 
 

둘 째 화의 예고(12)

사탄의 공격이 제아무리 무섭게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 대상과 공격 기간을 제한 시켜 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12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12)
요한은 지상에 임한 지옥과 같은 심판을 ‘첫째 화’라고 부릅니다. 이후에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즉 두 개의 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아직도 남아 있는 두 화를 언급하면 끝납니다. 혹자는 첫째 화를 일곱 인의 심판(6장)으로, 둘째 화를 일곱 나팔의 심판(8-9장)으로, 셋째 화를 일곱 대접의 심판(16장)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사탄의 공격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사탄은 하나님의 주권과 허락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을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성도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당신의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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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2-02)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장 6-21절


초대교회 성도들이 인사말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이 의미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달라는 것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셨다고 시작했고,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 가실 일들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이자, 성경 66권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약속한 말씀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본문에는 여러 증언들이 나옵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시작인 1장 3절과 마지막 22장 7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6-9)  

이 단락은 요한계시록 본문의 중심 글을 마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결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본서에 기록된 내용에 순종하고 거룩함을 지켜 구원의 상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본문은 6-10절, 11-15절, 16-17절 등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6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6-9)

본문은 예언의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 책에 담긴 예언을 잘 지키라는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장차 될 일을 알리려고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장차 될 일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본문은 1:1-3a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종들에게 장차 될 일을 보이셨다는 것과 장차 될 일은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1) 두루마리의 예언의 본질(6)

마무리 주제는 두루마리 예언입니다. 요한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라고 두루마리 예언의 신적 권위를 확증하는 말로 화두를 연입니다. 다니엘 2장은 하나님 나라는 악의 제국에 궁극적인 승리를 하고, 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적 환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2:45의 데오도션 역은 ‘이 꿈은 진실되고(ἀληθινὸν) 그 해석은 신실하다(πιστὴ)’고 확증합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다니엘 2:45을 활용합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다니엘의 ‘이 일 후에’를 ‘속히’로 변경한 주해의 산물입니다. 긴박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개시성을 함축합니다. 두루마리의 예언은 다니엘에게는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이미 시작되어 언제라도 실현될 수 있는 확실한 일입니다. 1:1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요한은 교회에 전달한 예언입니다. 요한은 ‘선지자들의 영’을 대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언의 영을 주십니다.

(2) 두루마리 예언의 역할(7)

반드시 속히 될 일은 구원과 심판의 성취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1:3)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된 말씀은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서언은 계시에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선언하지만, 종언은 계시에 불순종하는 이들 모두를 저주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임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진정한 예배(8-9)

요한은 다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했던 천사를 경배하려고 합니다(요한계시록 19:10). 천사는 숭배를 금하는데, 이는 자신이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천사는 요한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권면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착각한 것을 기록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통해 두루마리 예언의 궁극적 권위는 전달자인 천사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하기 위함입니다. 천사 숭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우상숭배는 미묘하고 난해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반응(10-15)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상을 갚아 주리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황제 숭배와 같은 사탄의 압박을 받았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음에 틀림없습니다.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자들은 심판을, 그것을 견디어 승리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긴박감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10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0-15)

본문은 교회에게 거룩하라고 권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13절을 가운데 두고 11-12절과 14-15절 등 두 단학으로 나뉘는데, 두 단락 모두 같은 내용을 다룹니다. 그것은 ‘거룩하라’는 권면입니다. 전반부(11-12)는 두 상반되는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거룩할 것을 권하고, 후반부(14-15)는 각각의 사람이 받는 복과 심판을 대조함으로써 거룩할 것을 권합니다.

(1) 두루마리 예언을 인봉하지 말라(10)

다니엘 12장과 일곱 우레의 메시지(10:4)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는 왜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까? 다니엘의 경우에는 두루마리가 비밀로 감춰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예언들을 요한의 독자들은 엄청난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곱 우레 심판으로는 우상숭배자들이 강퍅해집니다. 회개를 유발하는 재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재앙 대신에 두 증인의 신실한 증언을 통해 두루마리 예언이 선포될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이제 두루마리의 일곱 인은 개봉되었습니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2)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반응(11-13)

주님이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바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내버려두’고 더러운 자들은 그대로 더러운 채 두어라.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다시는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이제는 강퍅한 자와 신실한 증인의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반응한 대로 보상합니다. 상은 종말론적 상급으로 구원입니다(이사야 62:11). 첫째는 불의하고 부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개와 점술가와 음행자와 살인자와 우상숭배자와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거짓이 그 특징입니다. 신앙공동체 내부에 들어와 있는 가짜 신자들입니다.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의 특성입니다. 이들은 최후 심판을 위해 성 밖에 있게 됩니다. 성의 출입이 금지됩니다. 둘째는 정의롭고 거룩한 자들입니다.

(3) 두루마리 예언을 지키지 않은 자의 보상(15)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출입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요한은 첫째와 둘째를 일종의 대차구조로 구성합니다. 초점은 두루마리 예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자들의 상급입니다. 불의와 부정은 정의와 거룩과 상반됩니다. 안식이 거룩의 근본이고, 희년이 정의의 기초입니다. 땅에서 안식과 희년을 지키는 신실한 증인들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역사의 처음과 끝을 관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적 권위로 확언합니다.

 

두루마리 예언은 초청과 경고(16-19)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승리의 복음입니다. 요한은 또한 성령과 교회가 세상을 생명수로 초대하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목이 마른 자나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시라는 복음입니다. 계시의 주체자인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6-19)

본문은 다윗의 뿌리이며 자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기원과 요한계시록을 듣는 사람들에게 재림 때 있을 복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두루마리 예언의 원천이신 예수(16)

이제 최종적인 초청과 경고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와 성령과 신부가 초청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으로 초청합니까? 주 초청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예언자들을 보내 신실하게 증언하게 하십니다. 어린양 예수는 증인의 모델이십니다(11장). 예수는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 곧 광명한 새벽 별입니다. 요한은 ‘열방의 귀의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독자들에게 친숙한 구약 예언을 인유합니다. 다윗의 뿌리는 이사야 11:10의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의 후손인 왕이 세워지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모든 열방이 모여드는 비전을 이사야 11장에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뿌리는 예수입니다. 광명한 새벽 별(민수기 24:17)은 신약에서 메시아 별과 같습니다(베드로후서 1:19). 여명과 함께 떠오르는 별은 어둠을 물리치고 종말론적 시대의 빛을 가져오는 별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비치면 열방이 그 빛으로 나오는 비전을 예언합니다(60:1-3). 히브리어 ‘자라흐’는 보통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예루살렘에 그의 영광으로 떠오르는 여호와의 이미지는 여명의 이미지입니다.

(2) 두루마리 예언으로의 초청(17)

요한은 두 가지 예언적 본문(이사야 11:10; 60:3)을 인용하여 예수에게 적용합니다. 열방은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 모여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열방의 구원자로서 예수는 요한에게 계시해왔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의 교회가 열방을 향한 자신의 증언에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성령도 열방을 초청합니다. 계시록에서 성령의 역할은 종말론적입니다. 성령은 환상과 예언적 신탁으로 하나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백성의 기도를 인도하고, 세상을 향한 백성의 선교적 증언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도록 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관점으로 자신들의 현재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신부도 열방을 초청합니다.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21:2). 즉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 시에 있는 교회입니다. 신부는 어린양이 오실 때 혼인 준비가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의로운 행위의 세마포를 입고 줄을 서 있는 교회입니다(19:7-8).

신부는 파루시아의 관점으로 보는 교회입니다. 예수와 성령과 신부의 초청은 17절에서 네 가지 명령법을 구성합니다. 생명수로의 초청입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청장은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열방의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디다케 11:6). 파루시아(주님의 재림)의 기도는 두루마리의 예언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경고가 마지막으로 선포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법조문으로 보고 있으며, 옛 율법 조문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신명기 4:1-2, 19-20).

(3) 두루마리 예언에 대한 경고(18-19)

요한계시록을 듣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 어느 것이든 더하거나 그 예언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제하여 버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저주입니다.

계시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명기에 따르면, 거짓 선지자의 미혹하는 메시지에 더한 경고입니다. 신명기 4장이 모델로 삼고 있는 고대 근동 조약 문서들도 의도적인 변조에 대비하여 성문화된 규제와 저주의 수단으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약속과 반응(20-21)

주의 재림으로 완성될 심판과 구원은 모든 성도와 함께 죄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입니다. 이 소망을 붙잡고 인내로써 연단을 받아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음성에 귀 기울임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0-2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줄 상을 가지고 속히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하며, 맞을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것을 알릴 수 있을까요?

(1) 약속과 반응(20)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교회에게 교회의 가장 큰 소망인 ‘주 예수께서 속히 오신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오신다는 약속은 요한계시록 내용을 증언하신 이의 증거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실한 증인입니다. 두루마리 예언의 종언에 직접 참여합니다. ‘반드시 오리라’고 약속합니다. 주의 파루시아는 초림과 최후 임재 사이에 계속됩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는 성찬에서 ‘마라나타’라고 외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주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그야말로 모든 역사가 지향하는 것들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에 누구든지 값없이 동참할 것을 성령과 신부가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초청에 응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과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축원(21)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불완전한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들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갈증을 해소시켜주시고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하게 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 둘 사이에 긴장은 계속됩니다. 파루시아를 위한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는 제국이 해체되고 열방이 돌아오는 ‘그 날’을 향해 신실한 중언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한은 아시아의 여러 교회에서 이 편지를 읽고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편지를 마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이고 적절한 끝맺음입니다(고린도전서 16:23; 고린도후서 13:13; 에베소서 6:23).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에 감사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행위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함으로 맡겨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그리스도돟의 인격과 사역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칭찬과 존귀로 상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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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2-01)


새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생활

요한계시록 21장 22절-22장 5절


 ‘그리스도의 초상’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모습이 다릅니다. 과거 초창기 한국에서는 도포 입으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각 나라나 시대에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도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욕망으로 왜곡된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의 예수님은 허상일 뿐입니다. 이제 참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요한은 이제 새 예루살렘 성 내부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성전이 없고, 해나 달이 쓸모가 없습니다. 밤이나 바다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가 이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과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분명히 구별됩니다. 성 내부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교제가 다 회복됩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 되심(22-27)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십니다. 오늘도 친히 자기 백성의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장막을 치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따라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뿐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2-27)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성전의 재건을 꿈꿔온 유대인에게는 상상 못할 일이지만, 주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시작되어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1) 성전이 보이지 않음(22)

새 예루살렘에는 현재 지상에서처럼 건물로 된 성전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예언은 개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성전이 재건된 것으로 말씀합니다(요한복음 2:19-22; 마가복음 14:58; 15:29).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전의 ‘머릿돌’(마태복음 21:42; 마가복음 12:10-12; 누가복음 20:17-18; 사도행전 4:11; 로마서 89:32-33; 에베소서 2:20)로 묘사합니다. 계시록에서 성소는 예외 없이 하늘 성소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창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패턴에서 에덴은 창조의 성전이고 아담은 대제사장입니다. 첫 창조의 실패를 새 창조에서는 어린양이 성취합니다.

(2) 해와 달이 쓸모 없음(23)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등불이 되어 밝혀주실 것이기에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떠한 빛의 근원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어린양이 등불입니다. 성도는 촛대이기 때문입니다.

(3) 성에 들어가는 자와 못 들어가는 자(24-27)

종말에 열방이 시온으로 순례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2:2,5에서 제기한 이 주제는 이사야 60:3,5,11에서 장엄하게 선언됩니다. 요한은 이사야 사상을 함축하여 인유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음녀는 착취와 수탈로 축적합니다. 신부는 자발적인 헌신을 공존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이사야 60-61장의 문맥 그 어디에도 왕들과 열방이 자신들의 영광(도사/δοζα) 또는 명예(티메/τιμη)를 들고 올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부, 재물’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열방의 부요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방이 가져오는 영광과 존귀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최고조로 조명하기 위함입니다. 열방이 그동안 착취와 축적으로 바벨론에 세금과 노동을 상납하던 행태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나눔과 섬김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러 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이웃과의 연합은 예배의 진정한 목적입니다(이사야 11:6-12). ‘만국’과 ‘땅의 왕들’은 이사야 60장에서 도출된 용어입니다. 하지만 계시록 자체의 논리적 흐름으로는 ‘만국’ 열방을 말하는 사중 정형문-‘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0:11은 족속 대신에 ‘임금’으로 대체합니다. 그 결과가 ‘땅의 왕들’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한 분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열방의 귀의 사상’은 15:4 이후에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 열방의 귀의는 신학으로 우선적인 주제임을 증명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노래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모든 열방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열방은 겁을 먹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저주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파루시아와 아마겟돈 전쟁(18-19장)에서 최후 심판을 당한 자들이 결국에는 강요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어떤 제안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열방에 대하여 제시하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1)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11:13; 14:6; 15:4). (2) 짐승으로서 지속적으로 우상숭배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거절하고 저주하며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여 최후 심판에 이르는 것(14:9-11; 16:9,11,21; 17:14; 19:17-21). 모든 열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열방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까? 계시록은 이러한 사상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증인들의 중언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강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회개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21:8,27;22:15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계시록을 보편적 구원을 예건하는 책으로 보려는 시도들은 본문에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회복(1-5)

에덴을 파괴하였던 하나님의 저주가 떠나고, 이제 다시 첫 창조의 순간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며 자원하는 기쁨으로 왕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 있거나 거짓말 한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1-5)

요한은 신부 새 예루살렘을 새로운 에덴으로 묘사합니다. 어린양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어린양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 노릇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바벨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생명수 강(1-2a)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생명수는 생명의 근원이다. 죽음과 대조된다.

(2) 생명나무(2b)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 에스겔 47:8-9, 12에 있는 강은 많은 물을 소생시킵니다. 그 안에서 피조물들이 헤엄칠 수 있도록 ‘생명’을 줍니다. 나무들이 자라서 그 잎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에서는 그 강을 ‘맑은 강’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에서 ‘소생’은 ‘치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치유하기를 영원히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새 창조에서는 치유되어야 할 죽음이나 고통이 없습니다(2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고통을 단번에 치유하십니다(21:4; 7:16-17). 열방의 치유는 요한계시록 5:9의 뜻을 발전시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열방이 치유되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깁니다. 따라서 생명나무 잎의 치유는 비유적인 그림입니다. 어린양 그리스도가 회개하는 열방의 치유를 위해 죽임을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3) 저주가 없음(3-4)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다.’ ‘저주’는 ‘헤렘’입니다. 아나데마(ἀνάθεμα)와 카타데마(κατάθεμα)로 번역됩니다. 구약에서 ‘헤렘’은 죄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7:27-29). 봉헌한 물건 또는 봉헌(devotion) 또는 금지(ban)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적인 물건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면, 파괴하든지 혹은 용기에 담아서 구별해둡니다. 봉헌된 것에 대해 신실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여호수아 7:1; 22:20).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보내신 파괴적인 저주로부터 면제를 받습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형태의 저주도 없을 것입니다.

(4) 밤이 없음(5a)

다시는 밤이 없습니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21:1-4) 형식의 절정입니다. 바다와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과 밤이 다시는 없습니다.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스가랴 14:11).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세상에서 그들을 위협해왔던 모든 범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할은 촛대입니다. 성도들은 신적 등불의 빛을 담고 최종적으로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세상의 ‘등불’입니다(21:23). 구약 성도의 반복되는 기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춤으로써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민수기 6:25-26; 시편 4:6; 31:16; 67:1; 80:3,7,19; 119:135). 이 기도는 요한계시록 22:5에서 종합적이고도 완성적으로 응답됩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약 본문은 민수기 6:25-27의 대제사장적 축복입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는 말씀이 지향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22장의 하나님 나라 완성입니다.

(5) 성도들의 왕노릇(5b)

다섯째, 성도들이 세세노록 왕 노릇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합적 완성입니다. 이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4-6의 천년왕국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는 천년왕국 이후에 반역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성도들의 통치를 받습니까? 통치는 첫 창조에서 아담에게 맡겨진 창조적 활동입니다(창세기 1:28; 시편 8편).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에는 인간에 대한 통치 개념은 없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새로운 창조될 예루살렘 안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충만해지는 것들이 있고, 완성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무너질 것만 같던 곳(교회)이, 언젠가 ‘떠날’ 곳(세상)이 ‘새롭게’ 된다는 성경의 진리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채롭게 합니다. 그 완성을 향해 우리는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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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1-02)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장 9-21절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며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모든 건축물이 구조적 특징이 있듯이 새 예루살렘 성도 내외적으로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들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가 누리게 될 영광의 새로운 특면은 무엇입니까?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은 사실상 절정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21:2에서 짧게 소개된 신부가 이제 실제로 등장합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입니다. 음녀 바벨론과는 확연히 대조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구조, 열두 가지 보석으로 단장한 모습을 소개합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신부는 사실상 대제사장의 위엄과 광채를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최초 관찰(9-10)

결혼식에서 신부는 가장 주인공입니다. 신부들은 새하얀 옷을 입고서 순결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티 없는 제물을 원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거룩함이 없다면 교회나 성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분문의 말씀 속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지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9-10)

새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곽으로 돌로 싸였고, 열두 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신구약 백성으로 구성된 새 창조된 공동체가 얼마나 완전하고 장엄한지를 보여줍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을 닮은 공동체가 참 성전입니다.

(1) 어린양의 신부가 초청(9)

21:11-22:5은 21:9-10에서 언급된 신부와 도성의 이의를 확대합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에스겔 40-48장의 패턴을 따라 묘사합니다. 기존 예루살렘 성과 정전의 물리적인 차원을 다 허뭅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그림으로 승화시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코이노니아로 우아하게 빚어냅니다. 그래서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입니다. 바벨론은 정치가 경제, 종교 체제와 동맹을 맺고서 666 체제를 구현하는 곳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오직 어린양에게 신실한 신부입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와 평화와 코이노니아를 실현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두 도시는 각기 동일한 복장으로 치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금, 귀금속, 진주: 참조, 17:4; 18:12,16; 21:18-21). 그러나 각기 전혀 다르게 사역합니다. 동사 ‘보이다’(데이크노우)는 단순히 환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하늘 시각으로 영적 현실을 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부 새 예루살렘과 음녀 바벨론을 대조하여 신부가 음녀를 대체함을 의도적으로 제시합니다. (1) 정숙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21:2,9)와 땅의 임금들로 더불어 행음한 음녀(17:2); (2) 화려함은 하나님의 영광인 신부(21:11-21)와 제국의 착취로 축척한 것이 화려함인 음녀(17:4; 18:12-13,16); (3) 만국을 빛 가운데로 다니게 만드는 신부(21:24)와 만국을 타락시키고 기만하는 음녀(17:2; 18:3,23; 19:2); (4)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가는 신부(21:24)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음녀(17:18); (5)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는 신부(21:26)와 온 세상으로부터 재물을 착취하고 치부하는 음녀(18:12-17); (6)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을 하거나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신부(21:27)와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을 지니고 복술을 행하는 음녀(17:4,5; 19:23); (7) 만국을 치유하는 생명수와 생명나무(21:6; 22:1-2)와 만국을 취하게 만드는 음녀의 포도주(14:8; 17:2; 18:3); (8) 생명과 치유(22:1-2)와 도살의 피(17:6; 18:24); (9) 하나님 백성이 들어가라고 요청받는 신부(22:14)와 나오라고 요구를 받는 음녀(18:4).

 

새 예루살렘에 등장(11-14)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는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거룩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이렇게 완전하게 변화시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의지하며 새롭게 변화되어가길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능력으로 교회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1-14)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가 길이와 높이와 너비가 같은 정방형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이 성전의 소성을 지닌 지성소임을 알게 해줍니다. 새 예루살렘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천국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새 예루살렘(11)

새 예루살렘의 모습도 바벨론과 분명히 대조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빛으로 비추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입니다(요한복음 1:14). 21:10b은 21:2a을 거의 축어적으로 반복합니다. 보석으로 단장한 신부의 장식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19:7-8). 매우 귀한 보석과 벽옥과 수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는 또 다른 은유적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백성에게서 반영됩니다(빌립보서 2:15). 둘째, 크고 높은 성곽과 열 두 문이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은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성격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21:27; 22:14-15). 각 문마다 한 천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에스겔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열두 장로들과 비교할만합니다. 요한계시록 21:1-22:5에는 이사야 50-66장이 상당수 인유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신부로(이사야 62:5; 요한계시록 21:2,9), 새 이름(이사야 62:2; 요한계시록 22:4)과 문(이사야 62:10; 요한계시록 21:12 이하). 이러한 인유들은 이사야 62:6의 파수꾼과 연결됩니다. 셋째, 문들의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입니다. 넷째,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습니다. 숫자 24는 성전 제의를 위해 다윗이 조직한 제사장(역대상 24:3-19)과 레위인 문지기(26:17-19)의 24반차를 반영합니다. 귀금속으로 된 기초석들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열두 귀금속을 인유하고 있는데, 이들 각 돌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출애굽기 28:21; 39:14). 나라와 제사장(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속량을 입은 성도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에스겔의 이스라엘 특수주의를 넘어서 열방을 품는 보편주의로 나아갑니다. 열두 기초석 위에 열두 문이 있습니다. 새 시대의 이스라엘 지파는 열방으로부터 귀의한 셀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666과 대조된 신부 새 예루살렘(15-17)

성(城)의 역할은 성 안에 사는 사람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성에 거주할 사람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야 하고, 성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는 방패막이기가 되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음녀에게 미혹되어 이 ᄄᆞᆼ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 자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음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린양을 따르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15-17)

성의 문과 성곽을 측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측량은 하나님의 미래 현존과 더불어 속량을 입은 자들의 안전과 죄가 전혀 없음을 보증하는 포고문입니다. 거주민들을 어떤 해로움이나 오염, 미혹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입니다(21:27; 22:14-15).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이 본 환상을 뛰어넘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단지 정사각형일 뿐이지만, 새 예루살렘은 입방체(cubic)입니다. 필로는 제사장 흉패의 직각 모양을 절대적인 안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사람과 관련하여 완벽 또는 완전을 상징합니다. 16-17절의 묘사는 고대 바벨론 성에 대한 기술과 현저하게 유사합니다. 바벨론은 눈에 띄게 도성을 통과하여 흐르는 강이 있었고, 그 강의 양쪽 측면에는 가로수로 조경한 간선도로가 뻗어 있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음녀 바벨론의 창의적인 대안입니다. 성의 길이와 높이와 너비 그리고 성곽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묘사합니다. 상징서 해석을 요구합니다. 15-17절의 측량은 유대 신자들뿐 아니라 속량된 인류까지 다 포함합니다. 성의 엄청난 크기가 이방인을 포함합니다. 요한은 에스겔 40-48장 환상에서 상세한 장면을 단순화하고 요약합니다. 에스겔 환상이 내포하는 몇몇 요소들을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성곽을 측량하니 144규빗입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입니다. 144규빗은 7:4-9과 14:1, 3의 144,000을 반향 합니다. 인간의 총량과 천사의 측량이 같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요한이 독자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요한의 환상을 표면적인 차원이나 문자적인 의미로만 숙지하려고 한다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666 체제는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체제입니다. 이에 저항하는 새 예루살렘은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하는 체제를 상징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고귀함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의 자질을 갖춘 신부 새 예루살렘(18-21)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게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순간마다 그 성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3:20).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는 이 땅의 시민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18-21)

새 예루살렘 성은 정금입니다. 정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속성의 은유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전체를 금으로 덧칠했음을 반영합니다(열왕기상 6:20-22). 성곽의 기초석을 장식하는 열두 보석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있는 열두 돌(출애굽기 28:17-20; 39:8-14)과 이사야 54장의 복합 인유입니다. 아론의 옷은 지상의 성막의 작은 복사판입니다. 지상의 성막은 하늘 성막을 모델로 삼습니다. 보석으로 장식된 흉패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 거하는 지성소의 축소판입니다. 출애굽기는 열두 지파에 적용하고, 요한은 열두 사도에게 적용합니다. 사도들은 최고의 주요 증인들이며 종말의 진정한 이스라엘인 교회의 대표들입니다(21:14). 진주 문은 이사야 54:11-12에 대한 인유입니다.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합니다. 한 개의 진주로 한 개문 전체를 만들려면, 대략 66미터 높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진주는 세상에 없으므로 상징적입니다. 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추가적으로 강조합니다. 성에는 큰길이 있는데, 중인들의 시신을 늘어놓고 불경한 세상이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도록 방치되는 곳입니다(11:8-9). 이전에 수치를 당하던 거리가 이 시즌 그들의 영원한 영광이 거리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존하십니다.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성도들을 부르시고, 거룩함과 아름다움,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우리들의 믿음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해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오늘부터라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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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1-01)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

요한계시록 21장 1-8절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궁극적 영광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이 땅에서 누려 보지 못한 안락하고 편안하며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천국을 꿈꾸곤 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세상의 물질적 풍요와는 다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하는 영광스러운 미래는 무엇입니까?

 

음녀 바벨론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전이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옛 창조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자리를 양보합니다. 새 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에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땅에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고 선포하십니다. 새 창조의 때가 이르면, 이기는 자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1-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거나 곡하거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만물이 새 것이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절서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하늘과 새 땅의 질서 속에 거하며 거룩한 천국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1-5)

최후의 심판과 불못을 본 요한이 이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마치 결혼한 신부처럼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완성될 교회를 가리킵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1)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자리를 내어 줍니다.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새롭다’는 형용사는 질적인 구별을 나타냅니다. 옛 것의 소멸이 아니라, 새 것과 옛 것 사이에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갱신과 변혁을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이사야 65:16-17; 고린도후서 5:14-17; 골로새서 1:15-18). 새 창조의 세계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악한 존재가 출몰하는 곳이며,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2) 새 예루살렘(2)

대신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옵니다. 어린양의 신부처럼 단장을 합니다(이사야 61:10). 성경이나 초기 유대교에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낙원에 갈 뿐입니다. 낙원은 천국(하나님 나라)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땅에서 통치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신앙생활은 영육 이원론이나 현실도피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성도가 땀과 피를 흘려야 할 곳은 땅입니다. 땅은 하나님 창조의 본질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멸망했습니다. 신부 새 예루살렘이 음녀를 대체할 것입니다. 음녀에서 신부로 전이되는 마지막 과정에 요한은 맛보기로 신부를 짧게 소개합니다. 그리고 21:9-22:5에서 충분하게 소개합니다. 성도는 지금 제국의 그늘에서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협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신부를 소개합니다.

(3) 새 성전으로서의 임마누엘(3-4)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있고,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21:1-3). 여기서 백성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요한은 에스겔 37:27-28과 스가랴 2:10-11에서 ‘하나님의 장막’ 개념을 도출합니다. 이 두 구절은 구약 소망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형태를 채택합니다. 스가랴는 많은 민족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개종자로서 합류하여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요한계시록 21:3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신실한 증인의 복음에 반응한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광야 이스라엘의 성막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성전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했고, 자신의 왕권을 높이려고 했으며, 하나님을 조종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데반은 솔로몬의 성전을 우상의 전당이라고 단정합니다(사도행전 7:48). ‘손으로 지은 곳’은 칠십인역에서 우상의 전당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두 번이나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은 더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아니고, 도둑의 소굴로 변질되었습니다(누가복음 19:46).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장막이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 속에 돌아옵니다. 그 결과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됩니다. 옛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겪었던 고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국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로서 경제적 착취와 인권 유린과 정당한 권리의 강탈과 정서적이고 육신적인 고통을 받았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났습니다.

(4) 새 창조의 선언(5)

요한은 이사야가 꿈꾸었던 새 창조의 예언(43:18-19; 65:17; 66:22)을 마음껏 활용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 바울은 이들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봅니다.

요한은 이사야 새 창조 예언의 완전한 성취를 묘사합니다. 새 창조의 완성된 성취를 부각하려고 요한은 이사야의 표현에 ‘모두’를 첨부합니다. 이전에 부분적으로만 시작했던 새 창조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선언합니다. 만물이 새 창조로 변혁될 것입니다. 현재 동사(포이오)는 미래에 새 창조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화해주는 ‘예언적 현재’입니다. 히브리어의 예언적 완료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를 예견합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확실하게 신적 승인이 선포 됩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5b). 두 가지를 확증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창조의 약속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행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약속의 절대 취소 불가능성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 말씀은 타당하고 신뢰할 만하다.’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승인 도장을 찍으십니다: ‘이루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새 창조를 승인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이사야 41:4; 44:6; 48:12).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의 초반과 후반에 각각 나타납니다(1:8,17; 22:13). 일종의 상극법입니다. 양극단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1:8과 21:6 사이에 서술되고 묘사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습니다.

 

새 창조의 귀결(6-8)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르지 않는 생수를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를 원하십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깊은 영적 생수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에게 허락하실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망하길 바랍니다. 새 창조 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6-8)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임할 새 예루살렘 성을 상속받을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입니다. 불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에 이른 ㄴ자들과 달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거룩하고 정직한 길로 걸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임마누엘의 복(6-7)

새 창조를 선언하고 승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두 부류를 구별하십니다. 마치 백 보좌 심판의 결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같습니다(마태복음 25장). (1) 먼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인데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줄 것이다’(이사야 49:10). ‘생명수 샘물’의 소유격은 동격 병렬 용법(‘물 근원, 곧 생명이라’) 또는 형용사적 용법(‘살아있는 물의 근원’; 이사야 12:3은 구원의 샘물)으로 이해됩니다. ‘생수’는 영생을 대변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근원입니다(22:1,17: 예레미야 2:13; 시편 36:8-9; 요엘 3:18; 요한복음 4:10; 7:38; 요한계시록 7:17),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누리는 영원한 교제의 삶입니다.

‘값없이’(도레안)는 ‘자유롭게’(마태복음 10:8; 로마서 3:24; 데살로니가후서 3:8), ‘공짜로’(요 15:25; 고린도후서 11:7; 갈라디아서 2:21)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샘물 근원’(하나님 구원의 현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55:1).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아들은 유업을 상속받는 자입니다(시편 2:7-8; 사무엘하 7:14).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도의 유업입니다. 새로운 가나안 땅입니다.

(2) 불 못에 들어가는 자들(8)

불 못에 들어가는 자들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타협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가짜 신자들이며,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빠진 자들입니다. 음녀 바벨론이 주는 포도주를 마신 자들입니다.

용과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이 던져진 유황불 못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이들의 목록은 여덟 가지입니다.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a) 두려워하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소심한 자입니다. 짐승과의 전투에서 용감한 신앙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신실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b)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교회 내부의 타협하는 자들입니다. 흉악한 행동은 우상숭배 주변에서 나타나는 불경한 행동들입니다. 살인자들은 박해자들입니다(13:15; 17:6). 음행은 우상의 제단에서 벌어지는 제의적 매춘 행위입니다. 점술과 마술은 신약 시대 훨씬 이전부터 우상숭배와 결부되어 실행되어 왔습니다. (c) ‘거짓말(프쉬데신)하는 모든 자들’로 마무리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가짜들입니다. 경건한 신앙의 모양은 있는데, 실상은 바알 숭배자들입니다. 앞의 일곱 가지 목록에 속한 모든 자는 다 거짓말쟁이들이며, 사탄을 닮았습니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공동체는 신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아닌 음녀 바벨론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진 곳에 하나님의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이 완성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늘도 영적 축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더욱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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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0-01)

 


그리스도의 천년왕국과 성도

요한계시록 20장 1-15절


뜨거운 참숯 불가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숯가마에 참나무를 넣고 숯을 만든 다음, 숯을 빼고 다음 날부터 그 가마 안에 들어가서 찜질을 합니다. 들어간 순간에 숨이 막히고, 죽을 건만 같습니다. 한 5분 동안 정도 땀을 내고 나옵니다. 이러한 곳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불못’은 훨씬 더 뜨거운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계시록 전체 속에서 가장 신학적인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두 짐승은 처형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용입니다. 천사가 용을 사로잡아서 무저갱에 넣었습니다. 천 년 동안 열방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한자님의 백성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천 년 이후에 용은 잠깐 놓임을 받습니다. 땅의 백성을 모아서 성도와 최후의 전쟁을 합니다. 최후의 패배를 당하고 두 짐승이 있는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하늘에 백 보좌 심판대가 세워집니다.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무저갱 속 용의 천 년 구속(1-3)

성경은 반드시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교훈합니다. 마귀와 함께 하나님을 배신하고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악을 따르는 모든 자가 그 아비 마귀와 함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악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진리를 외면하고 악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에 대해 계시록은 철저하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1-3)

역사의 끝에 일어날 심판 장면으로, 사탄과 그에게 속한 자들의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열방을 미혹하던 사탄의 삼위일체 중 이제 우두머리 용만 남았습니다. 666 체제는 이미 붕괴되었습니다. 666이 현실 속에 정치, 경제 제도로 구현되었던 음녀 바벨론도 멸망을 당했습니다. 음녀의 자리에 신부 예루살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두 짐승(바벨론을 표면에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한 정치와 종교 세력)을 전면에 내세운 용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용은 태고로부터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역사 가운데서 제거되는지를 20장 전체는 확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20장 이후부터는 에스겔 37-48장의 흐름을 따릅니다. 이스라엘의 부활(37장), 곡과 마곡과의 전쟁(38-39장), 새 예루살렘 성전(40-48장). 다만 에스겔에는 천 년이 없고, 계시록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계시록 내부에서 20장은 12장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12장은 사탄이 에덴 동산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어떻게 하나님 백성과 갈등을 이루어왔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부터 최후 심판까지 하나님 백성과 사탄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동전의 양면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한 면은 사탄의 운명(1-3)이고, 다른 한 면은 성도의 운명입니다(4-6). 사탄은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서 권세와 활동에 심각한 제재를 받습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합니다.

(1) 무저갱 속 용의 천년 구속(1)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온 천사에 대한 묘사는 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별 대한 묘사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2) 용의 결박(2)

용은 태고에 천사장 미가엘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땅에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열방을 미혹해왔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제국적인 체제를 가진 나라를 통해 핍박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속에서 메시아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갖은 술수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1-3절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용에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합니다.

(3) 용을 천 년 동안 무저갱 속에 결박(3)

용이 이제까지 휘둘렀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 법정에 성도들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한 정치 경제 체제를 통해 활동을 펼칩니다. 성도를 박해하고 열방을 미혹합니다. 땅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가택연금으로 활동과 권한에 제재를 받는 정치인과 같습니다. 자신은 결박되어 있어도 대리인이나 부하들을 통해 할 일을 더 왕성하게 합니다. 용은 최후의 시간에는 잠깐 놓인 후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성도의 천년 왕국(4-6)

사탄은 교회를 흔들어 타격을 어려움을 끼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위협하고 미혹하고 분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됩니다. 이 첫 부활에 참여하여(에베소서 2:6) 훗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첨함을 받아 주와 함께 영원한 부활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복’은 없습니다.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4-6)

용의 가택연금의 다른 측면입니다. 몇 가지를 정리하며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늘 보좌에 앉은 자들은 두 증인과 같이 신실한 증인들(11장)입니다. 666 체제에 저항하며 어린양의 성전(聖戰)에 참여한 군대 십사만 사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통치합니다. 미래나 하늘에서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땅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삶을 통해 시행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동사무소와 같습니다. 둘째, 통치는 무엇입니까? 상징적입니다. 통치는 우선적으로 재판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가 입의 칼로 대적을 무찌릅니다. 입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세상을 심판합니다. 하늘 법정에서 성도가 활동할 수 있도록 판결이 났습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세상을 구원하거나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김이 바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며 통치합니다.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는 왕 되심을 삶의 모든 영역에 선포하면, 세상과 부딪히고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언론 등 모든 영역에서 시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우리 삶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 통치입니다. 셋째, 천 년은 문자적이지 않습니다. 상징적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숫자를 초지일관 상징적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한 구절로 모든 성경을 짜 맞추려는 시도는 무모합니다. 넷째, 소위 말하는 천년왕국설은 요한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한 이론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논리보다는 상상력을 추구합니다. 강요보다는 설득을 합니다. 다섯째, 성도는 육신적으로 죽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첫째 부활에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 즉 영적 사망이자 영원한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용의 최후 멸망(7-10)

불신자의 영혼이 불과 우황 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첫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한 자들로서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임을 말했습니다.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누리는 영광인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7-10)

사탄은 잠깐 놓여 최후 전쟁 준비를 합니다. 땅의 모든 곳에서 지원군을 불러 모읍니다. 엄청난 수를 소집합니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 예언의 성취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신앙 공동체를 공격하지만 패배를 당합니다.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자신의 묘지를 판 꼴이 됩니다. 결국 앞서 두 짐승이 던져진 유황불 못에 용도 던져집니다.

 

백 보좌 심판과 생명책(11-15)

악의 세력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들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지금도 승리하고 있으며 마침내 영원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성결한 믿음을 지켜 가야 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1-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마지막 심판을 묘사합니다. 이 마지막 심판으로 영벌과 영생에 들어갈 사람이 결정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역사의 마지막에,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때 발생합니다. 이때 땅의 역사는 끝이 나고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동안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그들의 수고를 인하여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벌을 내리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 흰 보좌(11)

흰 보좌에 앉으신 이는 심판을 베푸십니다. 옛 하늘과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길을 내어줍니다. 흰색은 심판이 성도의 신실한 증언이 옳다고 입증하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정의로운 심판입니다. 백 보좌 심판은 성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심판입니다. 불신자의 심판입니다. 이미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보관하던 바다와 사망과 음부도 백 보좌 심판을 위해 죽은 자를 내놓습니다. 죽은 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죄의 권세 속에서 영적 사망을 당한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자들입니다(에베소서 2:1). 우상숭배를 한 자들입니다. 666 체제에 순응하며 사탄의 통치를 받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2) 생명책(12a)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생명책은 신자에게는 구원의 책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책입니다. 요한은 다니엘 7장과 12장의 두 가지 책을 인유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추면만을 강조합니다.

(3) 죽은 자의 둘째 사망 심판(12b-1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백 보좌 심판을 받습니다. 두 짐승이 유황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용도 따라서 던져집니다. 불신자들도 심판을 받고 던져집니다. 최종적으로 사망과 음부도 던져집니다. 죽은 자를 담던 용기도 불 못에 던져버립니다. 세상의 모든 악한 체제는 종언을 고합니다. 요한은 신자의 심판과 생명책을 연관시켜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신자의 심판을 다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5장과 같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진짜 신자는 행위의 벌이 아닌 상급을 다루는 심판을 받습니다.

20장은 바벨론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의 긴장 속에 읽는 하나님 나라가 주제입니다. 21세기의 우상은 경제와 기술과 웰빙입니다.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제도는 666 체제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적 통치에 참여합니까?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시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가치와 방향 감각을 가지고 저항하는 삶의 예배로 신실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탄의 가치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통치입니다. 순교와 선교가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 받고 첫째 부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사탄의 미혹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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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9-02)


 백마 타고 오신 예수님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현상에서는 정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편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용기 얻기를 원합니다.

 

어린양이 이제는 백마 탄 신적 용사로 등장합니다.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6:15)이 다가왔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철장으로 다스리는 아이(12:5)는 이제 심판하러 옵니다(19:15). 심판을 받은 자들은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됩니다. 13장의 두 짐승도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어린양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바벨론 멸망 이후에 바벨론의 동맹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제 용만 남았습니다(20:1-3).

 

백마를 탄 신적 용사(11-16)

성도는 십자가 군병으로 우리 앞에 나가 대적과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승리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한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 탄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1-16)

17:1-19:10은 음녀 바벨론의 환상이고, 21:9-22:5은 신부 새 예루살렘의 환상입니다. 19:11-21:8은 음녀 바벨론에서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4: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요한이 올라갑니다. 두루마리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19:1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신적 용사가 전쟁하러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듣고 보는 환상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늘 무대에서의 신적 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19:11 이후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볼 일도, 들을 일도 없습니다. 하늘이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땅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입니다.

요한은 계시록 앞 단락들에서 이 파루시아(19:11-21)를 예고하는 다섯 가지 지표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1) 6:15의 인 심판을 받는 자들은 19:18에 등장합니다. 심판을 피한 자들이 이제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6:17에 예고한 심판이 19:11-21에 기술됩니다. (2) 12:5에서 철장으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어린아이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19:15에서 심판하기 위해 땅으로 돌아옵니다. (3) 14:20의 포도 추수에서 천사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들을 밟는 자의 정체는 남겨두었습니다. 19:15에서 그 정체가 밝혀집니다. 신적 용사인 그리스도입니다. (4) 16:14,16에서 악한 영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투’를 위해 왕들을 모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와 19:15에서만 등장합니다. 왕들의 모음은 시편 2:2을 인유하는데 19:19에서 분명하게 반향 합니다. (5) 17:14에서 어린양의 타이틀은 짐승과 왕들의 정복자로서 19:16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추종자들은 19:14에서 하늘 군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다섯 가지 지표들은 파루시아 환상에서 수렴되어, 일종의 합주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신적 용사의 등장(11-14)

성전(포)의 이미지가 전체 단락을 지배합니다. 바벨론을 배후에서 조종한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하러 옵니다. 구약과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원들과 유대 백성이 기대했던 종말의 성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요한은 모든 기대를 넘어서서, 하늘에서 오는 신적 용사를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스가랴 9장에서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어린양은 이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라이벌이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왕과 그의 기병대를 연상시킵니다.

신적 용사는 한편으로 대적을 심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오십니다. 하늘 군대도 백마를 타고 흰 옷을 입고 뒤따릅니다. 이들이 입은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섬기던 하늘의 군대입니다. 흰색은 박해를 받은 성도들이 ‘옳다고 인정’을 받는 정당성 입증과 관련된 색입니다. 신적 용사가 벌이는 전투는 문자 그대로의 전투가 아닙니다. 12장에서 미가엘과 용이 벌인 하늘 법정의 전쟁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악의 세력들과 싸웁니다. 하나는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자입니다(11-12). 그래서 이름이 ‘충신과 진실’(신실과 참)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분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 백성이 옳음을 입증한다는 약속을 지키러 옵니다. 그래서 거짓과는 반대되는 참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신실한 증인(11장)입니다. 피 뿌린 옷은 신실한 증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의 피 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백마를 탄 기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문학적 기교로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a) ‘충신과 진실’로 칭합니다. (b) 자기만이 아는 이름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다른 누구에게 일려진 이름은 이마와 옷에 드러나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무엇입니까? 16절에서 드러납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입니다. 다리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용사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옷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자신만이 알도록 기록된 이름이지만, 요한은 세심한 독자가 눈여겨볼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름은 여호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nomen ineffabile, 필로, 모세의 생애 3:519, 529)입니다. 여호와는 대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금으로 된 명찰에 쓰여 있는데, 유대인들은 읽을 때 발음을 하지 않기에 어떻게 부르는지 모릅니다.

(2) 신적 용사의 성전(15-16)

15절은 네 가지 구약 본문을 복합 인유합니다(이사야 49:2; 11:4; 시편 2:9; 이사야 63:2-6). 하나님 백성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본문들입니다. 입의 검(이사야 49:2; 11:4)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 11:4을 칠십인역은 ‘그 입의 호흡으로 악인들을 도살할 것이다’로 번역합니다. ‘검’의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히브리서 4:12과 지혜서 18:15-16에서도 검증됩니다. 지혜서 본문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들을 동등하게 여기는데, 이집트인들을 응징하였던 ‘예리한 검’과 더불어 하늘 보좌로부터 튀어나옵니다. 두 본문에서 검의 은유는 심판의 실행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철장으로 다스리다’는 시편 2:9의 인유입니다. 시편 2:8-9, 12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불경한 왕들을 전복한다고 예언합니다. 이들 왕들은 주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세를 취하고 공모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63:2-6은 포도주 틀을 밟는 자의 정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합니다. 포도주 틀에 있는 포도를 짓밟듯이 철저한 심판입니다.

 

짐승에 대한 심판(17-18)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이 강해 보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악한 세력의 미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짐승과 추종자들에게 예비하신 궁극적인 심팜을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7-18)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음녀 바벨론이 주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부역했던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 군대에 다가올 멸망을 에스겔 39:4, 17-20에 선포된 곡과 마곡의 패망에 사용된 이미지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포식성 새들의 초대는 다가올 패망의 확실성을 비유적으로 강조합니다. 왜 이 시점에서 에스겔을 인유하고 있습니까? 악의 세력의 말세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는 다른 구약 예언들(다니엘 2, 7-12장; 스가랴 14장)에서도 도출할 수 있었겠지만 에스겔 39장의 그림이 포함된 이유는 이 단락의 주요 요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곡과 마곡을 패망시키신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만드십니다. 신적 이름의 계시가 주목적입니다. 그리스도도 심판과 구원을 통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름을 열방에 알릴 것입니다.

 

두 짐승의 심판(19-21)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두렵지만,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합니다.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19-21)

이 단락은 16:14와 20:8의 복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은 16:14과 20:8에서와 같이 최후 전쟁에 대한 동일한 전주곡을 언급한다. 16:14에서 귀신의 영들이 온 땅에 거주하는 왕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혹합니다. 20:7-8에서 사탄은 열방, 즉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아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나올 것입니다. 왕들과 그들의 군대는 자신의 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귀신의 영향력으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전투는 그리스도와 그의 하늘 군대를 대항하여 수행됩니다. 시편 2:2의 인유입니다. 전투 결과는 두 짐승의 포획입니다. 13장에서 등장한 두 짐승으로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입니다.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그리스도의 칼로 처형되고, 그 시신은 공중의 새들이 먹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중인 이야기의 패러디입니다. 두 중인과 같은 처벌을 받는데, 살아나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 장사도 치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바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멸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은 현실에서 악의 세력에 핍박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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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9-01)


 바벨론의 멸망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 18장 21절-19장 10절


운동 경기는 마지막 끝날 때가지 긴장을 풀지 않고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이겨놓은 경기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야구에 비유하면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2대 1로 지고 있더라도, 마지막 투구에서 말루 홈런을 쳐서 역전을 한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상황까지 계속 지고 있던 상황이라도 마지막 한 순간에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운동선수라면 막판 뒤집기의 승리에 대한 기쁨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집니다. 바벨론 멸망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위예술입니다. 바벨론 심판의 최종 선고입니다. 최종 여성 가지 목록은 바벨론에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늘에서는 승전가가 올려 나옵니다. 18:20의 지시가 시행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됩니다. 신부가 준비하고 축하객이 초청됩니다. 요한은 너무 흥분하여 또 실수합니다.

 

바벨론을 위한 장송곡(18:21-24)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좁아서 걷기 힘들어도 생명과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통치자로서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항상 아름다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23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21-24)

20절에서 초상집에서 애곡하는 분위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제 애가가 아닌 축가를 부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19:1-10). 하나님의 준비를 21-24절에서 바벨론 심판이 가져오는 냉엄한 실재로 나열합니다.

(1) 힘쎈 천사와 큰 맷돌(21)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바벨론은 존재감 자체가 완전히 지워집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사라지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바벨론은 거주민이 없는 유령 도시가 됩니다. 완전한 황폐함의 이미지를 여섯 번의 연속적인 ‘아니하고’를 통해 표현합니다(이사야 13:20-22).

(2) 바벨론이 상실한 여섯 가지(22-23a)

‘바벨론은 결코 다시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를 다섯 가지 ‘아니하다’로 구체적인 내용을 나열합니다. 바벨론에는 풍악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미술과 음악과 세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구가해온 바벨론의 명성은 끝이 났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도시 생활의 특색인 청사초롱 빛과 결혼하는 장면이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3) 바벨론이 황폐하게 된 이유(23b-24)

왜 음녀 바벨론은 이렇게 황무하게 되었습니까? 요한은 바벨론 멸망으로 인한 황무함의 원인 세 가지를 최종적으로 선고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의 상인들은 정치적 축재자입니다. ‘왕족’(메기스탄)은 ‘높은 자’, ‘우두머리’입니다. 대부호가 되어서 자기 영화에 도취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합니다(이사야 23:9의 휘브리스). 정치를 이용하여 축재한 자들은 자신만만하고 거들먹거립니다. 결국은 신성 모독의 길을 걷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위대하다’고 부릅니다(11:8; 14:8; 16:19; 17:1,5,18; 18:2,10,16,19,21,23).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호칭이고,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둘째, 모든 열방을 미혹한 ‘복술’입니다. ‘복술’(파르마케이아)은 이사야 47:9과 나훔 3:4의 인유입니다. 복술은 마술이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여러 종류의 약품을 혼합하여 주술 행위를 하고 마시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18:3, 6에서 바벨론이 혼합된 포도주로 미혹하는 은유는 당시의 주술적 관습이나 행위를 발전시킨 표현입니다. 로마 황실과 귀족에서 연회를 할 때 마술을 행하였습니다. ‘미혹’은 음행, 즉 우상숭배와 연결됩니다. 이세벨은 음행과 복술로 이스라엘을 미혹했습니다(열왕기하 9:22). 셋째, 바벨론의 번영 배후에는 하나님 백성과 사회적 희생자들의 피가 있습니다. 피는 온갖 종류의 종교적 정체적 핍박과 경제적 착취를 상징합니다. 성중에서 피가 발견되었습니다(유레데). ‘발견되다’는 바벨론이 ‘결코 보이지 않는다’를 염두에 둔 언어유희입니다. 바벨론이 번성할 때는 약자와 희생자들의 피가 흥건했다는 표현입니다. 경제활동과 사교 행위는 본성상 정치나 종교와는 무관하게 중립적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은 바벨론 멸망을 관찰하면서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바벨론은 인간을 향하여 악독한 폭력을 자행하던 곳인 동시에 소수 특권층인 왕들과 거상들이 축재를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체제는 바벨론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길로 걸어갑니다. 부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의 할렐루야 공연(19:1-8)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 보좌에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편 115:13).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찬양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8)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18:20에 ‘성도들아 즐거워하라’는 권면에 대한 하늘 성도들의 응답입니다. 1-6절의 사중적인 할렐루야는 할렐 시편들(시편 113-118)을 인유합니다. 이들 시편들은 출애굽 사건을 최고조로 조명합니다. 특히 랍비 문헌은 할렐 시편과 사악한 자의 최후 파멸을 결부시킵니다.

(1) 첫 번째 할렐루야 : 허다한 무리의 찬양(1-3)

무엇을 찬양합니까? 첫째,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탈리오 원칙은 신적 정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피로 땅을 황폐하게 한 자는 황폐해집니다. 둘째는 바벨론 멸망으로 인해 찬양합니다. 연기가 올라가는 장면은 바벨론 멸망을 상징합니다(14:11).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더불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표현합니다(8:4). 셋째, 아멘 할렐루야는 신적 비준을 뜻한다. 지금은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들이 찬양할 때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가 통치하신다.’ 구약에서 대적의 심판은 하나님 왕권 확립의 신호입니다(시편 93:1; 96:10; 97:1; 역대상 16:31; 이사야 52:7; 스가랴 14:9).

이사야의 복음의 내용은 ‘주가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이사야 40:9; 52:7; 61: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 이미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잔치는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자리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스스로 혼인 예복을 준비해 왔습니다. 음녀 바벨론에 저항하며 신실한 중언을 하였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인데 성도의 ‘옳은 행실’(디카이오마타)을 가리킵니다.

7절에서는 신부가 옷을 준비해왔습니다. 8절에서는 신부의 옷이 주어집니다.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수동성과 우리가 ‘이루어가는’ 능동성의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양면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동사 ‘주어지다’(에도데)를 ‘허락하다’, ‘승인하다’로 번역합니다. 어린양이 준비한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신부의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음녀 바벨론의 복장(18:16)과 대조됩니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9-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성도들을 초대하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치스러운 옷을 입던 바벨론은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지만, 고난의 옷을 입어야 했던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아름답고 거룩한 신부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9-10)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전하며 기록하라고 명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음녀들과 대조적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다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영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복(9)

천사의 선언입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은혜로운 복입니다. 일곱 우레 심판을 기록하지 말라던 천사는 이 축복 선언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요한은 또 실수를 범합니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홍분하면 실수합니다. 천사는 함께 섬기는 종이고 함께 예배하는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천사를 숭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종인 메신저를 수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풍조가 교회에 팽배합니다. 바벨론 멸망을 두고 서로 다른 음성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옵니다. 애곡하는 소리와 승리의 함성입니다. 18-19장의 특징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쪽에 마음을 들 것인지 선택하기를 요구합니다. 현재 제국적 체제에 부역해왔던 독자들은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이세벨과 발람의 목소리가 권력자와 경제적 강자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계시록의 끝까지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울려 나오는데, 이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목소리입니다. ‘부정한’ 것이 여전히 새 예루살렘 도성의 문에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의 역사를 주의 깊게 상고하고, 국제적인 경제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국제 무역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까지 중립적인지를 평가해보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2) 요한의 천사 경배와 천사의 교정(10)

바벨론과 더불어 왕들과 권력자들이 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부와 지위와 권세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권력이 대다수의 자원을 착취하고 고갈시켜나간, 하나의 문화적인 형태를 띤 난잡한 성행위입니다(a cultural promiscuity).

정치학이나 경제학은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며, 그들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가설을 계시록은 장려하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구속이 필요 없다고 수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목음을 신실하게 증언한다는 기준은 신조의 고백이나 교회 생활이 아닌 바벨론에 대한 저항이 그 판단 기준입니다.


새 노래의 기백을 회복하여 제국의 이야기와 싸워 이길 전투력을 높여야 합니다. 피상적인 종교성 제외에서 벗어나 예배와 저항으로 충만한 선교적 기세를 축적하고 발휘해야 합니다. 담보된 승리 속에서 소망의 인내로 할렐루야를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린양은 승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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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8-02)


바벨론 멸망의 애가

요한계시록 18장 9-20절


 눈에 보인 권력은 독재자라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동화와 적응합니다. 가능하면 그 권력에 의해 피해보지 않고 수혜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독재자가 망하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재자 때문에 권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권이 없어지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로마제국은 하룻밤 사이에 멸망을 당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보고 세 집단이 통곡합니다. 로마와 매춘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땅의 왕들, 그동안 제국의 보호 아래서 치부했던 땅의 성인들, 그리고 해양산업 종사자들이 통곡합니다. 그 사이에 멸망하는 로마를 행해 불쑥 터져 나오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애가(哀歌)입니다.

 

첫 번째 애곡 집단 : 땅의 왕들(9-10)

세상의 영화(榮華)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바벨론과 같이 부를 약속하는 세상의 경제적 기반이 신속히 무너지게 될 것을 알고 세속주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과 부를 태우는 자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탄식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처럼 언제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9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9-10)

본문은 땅의 왕들은 로마제국과 거래(음행)하며 사치를 누려왔습니다. ‘사치’는 부요하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 단어의 다른 뜻은 ‘관능적(官能的)’입니다. 악의적인 탐욕을 부리는 행동입니다.

로마 지방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로마의 제국적 체계를 지지하고 후원하였습니다. 에스라 4서는 명확하게 판단합니다. 아시아는 경제적 부도덕에 협력함으로써 ‘로마의 매력과 유혹에 공동 분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5:46-53). 경제 복지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짐승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에게 로마는 크고 견고합니다. 그래서 추종하고 부역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과 같이 순식간(한 시간)에 멸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손실만 계산하고 애통해 합니다. 로마에 대한 애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왕들이 17:16에서 음녀를 멸망시킨 주역들인지도 모릅니다. 그간 혜택을 누려온 로마의 멸망을 거리를 두고 서서 두려워하며 통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곤경을 당하는 자들과의 공감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물질적 빈곤만 생각하고, 자기들에게 닥칠 심판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애곡 집단Ⅰ : 땅의 상인들1(11-13)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부를 축적하고 사치하는 것이 죄가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과도한 치부와 사치를 정죄하십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우상 숭배는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전하면서(골로새서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부리가 된다고 교훈했습니다(디모데전서 6:9-1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의식 없이 돈을 사랑하며 사치를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를 일삼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러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경건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11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다(11-13)

본문은 음녀 바벨론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상인들도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그들이 파는 상품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눈물은 오늘날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의 비인격성과 잔인함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1) 상인들이 애통하는 이유(11)

땅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주요 고객이 말했기 때문에 통곡합니다. 다시 판로를 개척하기엔 막막합니다. 인도주의적 공감력이 전혀 없습니다(15).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신분과 지위,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만 생각합니다. 상거래의 파트너는 이용의 대상일 뿐 공감의 대상은 아닙니다. 몇몇 필사자들은 ‘그녀를 애곡하다’를 ‘자신들을 두고 애곡하다’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실수입니다.

(2) 상인들의 거래 품목(12-13)

이제 로마와 거래했던 상품의 목록들이 총 열거됩니다. 총 스물여덟 가지인데, 4×7=28입니다. 로마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지 수들입니다. 이 물품은 극도의 사치품들입니다. 로마 수입물 중에 가장 비싸고, 사치와 향락을 위한 것들입니다(플리니 자연사 37:204). 여기에 로마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자연 생산품 중 열세 가지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수입이 증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를 거쳐 계시록이 기록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절정에 이릅니다. 특히 아라비아, 동 아프리카, 인도의 동방 무역은 급증했습니다. 왜 부자들의 향연을 위해 로마 세계 전역에서 수입한 외래 식품은 빠져 있습니까? 14절에 불쑥 튀어나오는 탄식으로 그 몫은 남겨두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이 당대 로마 도덕군자들의 비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 로마 귀족들의 근면하고 엄격하고 단순한 생활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상류층의 부패와 향락을 비판하면서도 로마제국의 권력과 풍요는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로마제국 자체를 신랄하고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비판합니다. 로마가 가진 사악한 근성을 폭로하고 비판합니다. 비판의 절정은 마지막 두 항목, 노예무역과 사람의 영혼 매매입니다. 로마는 부와 사치를 위해 세계를 정복하며 노략질했고 정복한 땅에서 세금을 수탈하여 부와 풍요를 누렸습니다. 또 노예와 부속민의 노동을 착취하였습니다. 로마의 사치와 풍요는 로마를 치장하는 복장과 보석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16). 로마가 음녀임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17:4). 음녀의 옷은 경제 체제가 종교적 후광을 입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제사장의 의복과 비슷합니다. 12-13절의 스물여덟 가지 목록과 비교할 때, 두로의 거래 목록(에스겔 27:12-24)에 포함되지 않은 열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은 그중 세 가지 ‘세마포와 진주와 자주색 옷’을 언급합니다. 이것들은 칠십인역에서 대제사장의 의복 묘사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곱게 단장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스라엘은 화려함을 믿고 창녀가 되어버렸습니다(에스겔 16:13) 로마제국도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음녀의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도 동일하게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21:2,10-23).

 

두 번째 애곡 집단Ⅱ : 땅의 상인들2(14-17a)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을 구원하고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완전한지 사망과 슬픔과 굶주림이 한꺼번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4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14-17a)

요한은 상인들의 애곡 중에 갑자기 터져 나오는 탄식의 소리를 끼워 넣습니다. 스물여덟 가지 목록 중에 노예와 인간의 영혼이란 간명하지만 음산한 언급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노예들은 그저 몸뚱이뿐입니다. 거기에다 더 많은 상품들이 부가되어서 긴 목록을 이루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토를 달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혼들’이라. 로마제국의 영혼이 탐하던 맛있고 빛난 과실입니다. 단어 ‘탐욕’(에피두미아스)은 십계명의 탐심과 창세기 3:6의 선악과를 반향 합니다. 인간을 소비재로 간주하고 탐욕을 부렸습니다. 첫 번째 도시를 세웠던 바벨탑 세대 이후에 가인의 길을 완성한 장본인이 로마제국입니다(요한일서 2:16;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60). 로마제국의 사치는 수백만 노예를 희생시킨 결과입니다. 사치품들은 탐욕스러운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중심부의 소수 특권층에게로 향합니다. 주변부는 엘리트들의 단순한 공급원일 뿐입니다. 소수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부유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도에 지나치게 추구합니다. 그 결과 나머지 인간은 숨겨진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한은 왜 제국의 부역자들을 악하게 보았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경제적 착취로부터 유익과 혜택을 얻던 자들입니다. 신자는 주변 사회와 무엇을 공유해야 할지, 무엇에 공감해야 할지, 누구와 연대할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통곡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머나의 니골라 당과 두아디라의 이세벨의 교훈에 빠진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요지는 ‘타협하지 말라’, ‘부역하지 말라가 아니라’, ‘도리어 비판하라’, ‘즐거워하라’입니다(20). 독자들 중에 제국에 부역하면서 호의호식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바벨론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결단하라는 요청이자 경고입니다.

 

세 번째 애곡 집단 : 뱃사람들의 애통(17-19)

돈은 중요하지만, 결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인생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가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급작스럽게 한 순간에 몰락하면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어제 부러움의 대상이 오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선장과 선객과 선원들도 더 이상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합니다.

17…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19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b-19)

뱃사람들의 애통은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며, 머리에 티끌을 뿌리는 애곡의 표현만 추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애통은 로마제국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통곡입니다. 로마는 해양강국입니다. 그동안 로마제국의 경제적 번영 때문에 치부하였는데,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즐거움(2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가치와 문화에 끝까지 저항하며. 하나님 없는 성공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곤경을 선택하고 숱한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인 손길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을 청종하는 삶에 따르는 고난과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신원하실 것입니다.

20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20)

예레미야 51:48-49의 인유입니다. 우상숭배에 부역한 자들의 절망은 성도들의 환희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입니다.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온 하늘과 성도와 사도와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기도(6:9-10)에 대한 응답이 바벨론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피해자들입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없는 용서나 연민의 요구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고 또 다른 폭력입니다. 값싼 동정심으로는 누구도 포용하거나 치유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냅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탈리오 원칙은 성경의 원리입니다(신명기 19:19-21).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옳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약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정의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명예가 변호됩니다.

20b절은 ‘바벨론이 성도를 법정에서 고발한 죄목을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했는데, 이는 성도가 옳다고 입증하기 위함이다’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인 심판에서 성도들이 탄원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은 크고 강한 성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세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의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참다운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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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18-01)


음녀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 18장 1-8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잘 될 수 있었고, 선한 사람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한 자들을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바벨론을 소개하고 그 멸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서술합니다. 18장은 17:16의 간략한 언급의 확대판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바벨론은 더럽고 가증한 곳으로, 정치와 경제의 세계적 영향력으로 만국을 무너지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합니다. 심판은 임박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도망가라!’호소합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해야 하는 이유(1-3)

성도들은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체계나 물질주의는 우리 시대의 바벨론으로서, 부와 명예를 약속하며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부를 획득한 사람은 바벨론처럼 오만하게 되고 그것들이 영원히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판은 한 순간에 임하게 되어 집니다. 지금 삶 가운데 타협하거나 물들지 않고 떨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버리시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1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1-3)

바벨론은 화려하고 권세가 있습니다. 실제 생황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짐승에 의해 음녀가 죽임을 당한 후,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온 다른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하늘 법정에 바벨론을 피의자로 세우는 일종의 기소장과 같습니다. 요한은 하늘의 포고령을 전달하는 천사를 더 권위 있게 묘사합니다. 하늘에서 다른 천사가 내려와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합니다.

(1) 큰 권세를 가진 다른 천사(1)

바벨론보다 더 찬란한 영광과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힘찬 목소리로 바벨론의 최족적인 멸망을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들은 그가 전할 메시지의 성격에 알맞게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됩니다.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진 것은 옛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이 등장할 것을 알리고 여호와의 영광을 묘사한 에스겔 43:2의 장면과 비슷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모습은 바벨론의 멸망 선언과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강림 모습과 비슷합니다.

(2) 바벨론 멸망의 선언(2)

바벨론은 처음에는 영광스러웠지만 멸망하고 나면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짐승들이 거하는 도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 화려한 도시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는 것은, 그 도시의 철저한 폐허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에돔이 폐허가 된 것(이사야 34:11-15)과 옛 바벨론이 폐허가 된다고 예언한 내용(예레미야 51:37)을 반영합니다.

(3) 바벨론 멸망의 이유(3)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간략이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행한 음행(우상숭배)의 진노의 포도주 때문입니다(3).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행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당연히 세상에서 멸망해야 합니다. 바벨론만 아니라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하고 바벨론이 행한 사치에 도취되었으며, 바벨론 때문에 더럽혀진 땅의 왕들과 상인들도 멸망됩니다(이사야 13:19-22; 예레미야 50:39,40; 51:37).

큰 성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를 첫째, 모든 민족이 바벨론의 음행으로 빚은 포도주에 취하여 무너졌으며, 둘째, 세상 왕들이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했으며, 셋째, 세상 상인들이 바벨론의 사치 덕분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자신들만 타락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타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향한 천사들의 외침(4-8)

세상은 공룡과 같이 거대합니다. 그들의 욕망에 대한 부르짖는 소리는 위축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비교할 때 우리는 정말 작아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겉으로는 거대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면 모두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믿음으로 보면서, 지금보다 더 당당해지고 더 편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4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4-8)

바벨론 멸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린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지체 없을 것이며 변함없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제 천사는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백성을 향한 요청(4-5)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멸망하는 바벨론에 머무는 자는 그의 죄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짐승의 지배권이 극에 달한 음녀 바벨론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소비문화 가운데서, 요한은 쓰고 그의 독자들은 읽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언약의 용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요한은 좋든 싫든 바벨론의 풍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타협하여 순응하든, 침묵하고 중립을 지키든, 제국의 체제에 부역하는 자가 됩니다. 비록 동조하여 살지는 않지만 바벨론의 주권이 강하게 미치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전망이 필요한 자들을 향하여 계시록을 통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각이 있다면, 그 수중에서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관에 기초하여 일상생활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바벨론이 다스리는 천년 왕국에서의 유배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우상 숭베적 타협과 물질의 풍요와 정치적 안전으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는 하나님 백성에게 비슷한 경고를 합니다(예레미야 51:45; 이사야 52:11; 고린도후서 6:17).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도는 탈출해야 합니다. 요한은 문자 그대로 지리적인 탈출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가치와 생활 방식과 단호하게 결별하라는 경고입니다.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고 타협하거나 동화하지 말라는 호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바벨론의 사악한 뜻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시의 사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경제적 안전보장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입니다. 유혹을 뿌리치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큽니다. 로마제국의 영향력은 너무 막강합니다. 로마의 진노와 음행의 포도주로 열방은 로마 황제 숭배 요구를 뿌리 칠 수 없었습니다. 거역하면 로마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렇게 순응하며 경제적 이익에 취하게 만듭니다.

한번 마시면 중독되어서 바벨론의 파괴적 영향력에 저항하려는 모든 욕구들을 제거해버립니다. 중독되면, 맹목적인 탐닉을 하게 되고, 감각과 분별력이 마비됩니다. 로마제국의 죄는 열방을 정치적 안전보장과 경제적 풍요를 미끼로 황제 숭배의 길로 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상인들의 배만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로마가 제공하는 평화(Pax Romana)는 속임수입니다. 로마에 부속된 나라의 백성은 엄청난 세금과 부역을 제공하였습니다. 로마가 제공하는 혜택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다 돌아갔습니다. 하층민들은 노동 착취와 세금 수탈로 신음하고 있는 평화가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는 자신의 경제적 자원을 신뢰하라고 열방에게 강요합니다. 바벨론식 교만의 표현이고 우상승배의 형식입니다. 이에 대한 신적 응답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2) 정의의 복수를 위한 요청(6-7a)

이 단락의 핵심 단어는 ‘갚아주라’입니다. 로마제국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라! 썩은 잔도 갑절로 갚아주라! 호사스러움과 사치를 고통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탈리오 법의 적용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같은 맥락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흔히 정교분리의 의미로 잘못 해석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없습니다. 마카비 시대의 슬로건을 인유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드려라! 가이사가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주라! 로마가 유대에 은택을 베풀었다면,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압제와 고통을 안겨주었으면, 그대로 갚아주라는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문제는 갚아주어야 할 주체가 누구입니까? 본문은 침묵합니다. ‘갚아주라’는 동사(아포도테)는 2인칭 복수입니다. 신실한 증인들인 ‘내 백성’의 저항적 행동을 촉구합니다. 천사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활동하는 짐승과 동맹국들을 향한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3) 몰락에 대한 예언(7b-8)

역사적 바벨론의 교만과 패망은 역사의 끝자락에서 범세계적인 바벨론 체제가 맞이하는 모형론적인 패턴입니다. 바벨론의 정치적 경제적 안전보장이 갑자기 사라지면, 교만한 자부심은 근거가 없고 미혹임이 날날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자기 우상화입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47:7-8의 인유입니다. 안전하다고 자부하고 안주하던 바벨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당한 역사적 사실이 모형론적 이미지입니다(다니엘 5:30).


오늘도 세상인 바벨론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기 원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락으로 유혹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악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요셉처럼 밖으로 뛰어 나가야 합니다. 이 세속적인 유혹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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