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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2-02)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

로마서 12장 9-21절


살아가다보면 잔치에 초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결혼식’, ‘백일잔치’, ‘회갑잔치’, 그리고 슬픈 일은 ‘장례식’까지 초대를 받습니다. 모든 초대에 중심에는 알고 보면 ‘사랑의 초대’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축복해 주길 원하며, 때로는 위로해 달라는 초대입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하기 원하고 사랑을 받길 원합니다. 본문은 성도들을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사랑의 현장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바른 공동체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3-8). 이제는 개인이 삶에서 성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태도에 대해 서술합니다. 성도의 생활은 한 마디로 사랑의 생활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아름다운 말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조그만 일에서부터 어려운 일까지 힘써 노력할 때 아름다운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할 것(9)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목표만 우선할 수 없는 것이 공동체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개인도 존중해 주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원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일반적인 원칙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살아갈 일반적인 원칙인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바울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드러나야 할 덕목 중 가장 먼저 거짓 없는 사랑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근거한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은 어떤 이익을 챙기려는 사랑입니다.

⑴ 사랑하라(9a)

기독교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삶의 원리도 당연히 ‘사랑’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가진 사랑은, 첫째는 거짓 없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⑵ 분별하라(9b)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큰 실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선악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에 속하고 악을 미워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디모데후서 2:15)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기준에서 때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기준이 달라져 버립니다. 선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도 혼돈스러울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신도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 선을 행하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대한 사랑(10-13)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들어나야 하는 곳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신 사랑의 모습이 잘 들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진행된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되어진 것입니다.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0-13)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랑이 진행되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형제를 다정하게 사랑으로 대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명령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좋은 관계를 맺고, 부지런히 행동하며 열심히 주를 섬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시작되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마음에 샘솟듯이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기쁘기 때문에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나눔과 섬김이 나타납니다. ‘밥퍼 목사’로 잘 알려진 최일도 목사님이 속한 ‘다일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동체는 다양한 은사들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해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합니다.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립보서 2:15-16)

사랑이 변하지 않고 순수하면 정말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변질되면 악취가 진동합니다. 마치 좋은 음식은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이고 먹음직스러보이지만, 변질되면 코로 맡을 수 없는 음식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처럼 사랑도 변질되면 사람들의 냄새가 진동해서 악취가 진통해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며 존경해야 합니다. 사랑은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붕대(繃帶)입니다. 서로 달란트를 가지고 사랑할 때 공동체는 하나 되며, 하나 될 때 건강한 교회가 되어집니다. 건강한 교회가 성장하고 영적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에게 대한 사랑(14-21)

성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교(架橋) 역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옳은 행실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따라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힘들지만 사랑의 최고봉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4-21)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 평범한 사랑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끼리 사랑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사랑하고 권합니다. 그래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하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원수들까지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알게 되면, 원수를 축복하는 일은 적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신이 주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 받은 사랑으로 원수를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만지시고 치유시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능력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길 원하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더 큰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 임하시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당신은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당신보다 나보다 낫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데 솔선수범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히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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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2-01)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1-6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헬라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카리스마’의 본래 뜻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알맞게 주셨습니다. 각자 받은 선물은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턴 새로운 부분이 전개됩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실천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대원리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1-2)

모든 성도들은 예배하길 원합니다. 예배처럼 흥분과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과 태도로 예배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삶의 예배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

바울은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라고 찬양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12장부터 하나님의 찬양하는 성도들은 찬양이 그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 기뻐하신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⑴ 살아있는 예배의 성격(1)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는 직영하면 ‘이치에 맞는 예배’입니다. 그가 말하는 예배의 성격을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것

예배는 분명한 자신의 신앙고백 위에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음을,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신앙고백 위에 드려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② 예배는 몸으로 드린 것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몸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더 강조하면 예배는 피를 요구합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제사)는 제단에서 속죄양을 잡고 각을 뜨고 제단 불 위에 태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죄악된 행위까지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린 것이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준비가 아닙니다. 주일날 거룩하게 몸으로 드려진 예배를 위해서 6일 동안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성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나가서 정성껏 몸으로 준비하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③ 예배는 영으로 드린 것

예배는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몸으로 드려지긴 하지만 영과 영이 통하는 곳입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영이 열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들이마시고 인간의 죄악을 내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과 영이 교통하여 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⑵ 예배를 위한 삶(2)

바울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인지 부연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면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곳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본능에 의해 지배된 세대입니다. 타락한 본성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중심의 시대, 본능에 지배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타락한 본성으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바쁘긴 하지만 방향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 때,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② ‘마음으로 새롭게 변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시달려서 강퍅해진 마음을 말씀으로 쟁기질을 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방치하면 묵은 땅이 되어 집니다.

③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고

세상 사람들처럼 방향이 없어서 바쁘긴 하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분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기에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당신이 새롭게 변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예배의 축복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선물(3-6)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부르셔서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각 은사들이 지혜롭게 발휘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도록 하십니다.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4-8)

교회도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서로 존중하며 협력할 때 교회 공동체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떤 자세로 예배의 삶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자만심을 품지 말라(3)

먼저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3)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었다면, 아무도 그 말씀을 전할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수를 잡아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의 원리는 제시하는데,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b)라고 두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사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은사가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준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이방인도 유대인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11장까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무엇이 ‘믿음’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죽을 자임을 아는 태도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고, 하나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신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신 스스로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만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주실 있다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고 이것이 다름 아닌 지혜입니다. 믿음이 있어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는 삶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만큼만, 마음이 품을 만큼만 품어야 합니다. 자신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은 지나치게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간섭하다 보면 자신도 동일한 범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⑵ 서로 협력한 공동체(4-5)

바울은 이 원리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고 로마 교회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항상 몸으로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에베소서 4:1-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여러 기관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룹니다. 각 기관들은 다른 기관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각 기관들이 서로 도와서 온전한 하모니를 이루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각 지체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한 색깔만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주로 한 지도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지도자 자신의 스타일만을 성도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건강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잖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사용될 가치가 있도록 존귀한 존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지체도 소월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⑶ 다양성으로 섬기는 공동체(6-8)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그 각 사람에게 주신 많은 기능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그 직분을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그 지체마다 직분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다양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성원은 각자 다른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능 없는 몸의 지체가 없듯이 어떤 지체도 덜 중요하고, 더 중요한 지체가 없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전체 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라고 하면, 의학적으로 이것을 ‘병(病)’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6a)라고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왜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전한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은혜이듯이, 성도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모든 은사도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노력하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닌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자 받은 은사를 서로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로서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은사마저도 로마 교회 성도들의 다른 은사보다 더 우월하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섬기고 구제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축복입니다. 다 각자 다르고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달란트는 각자가 다른 것입니다. 각자 역할과 특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부서와 역할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일반적인 일을 할 순 없습니다.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달란트를 따라서 섬김으로 모두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섬깁니다. 어떤 부서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 쓰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은사)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 다른 은혜의 선물을 주셔서 하나님의 공동체와 사람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기억해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를 통해 섬기는 것은 다양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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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03)


비밀스런 경륜을 가지신 하나님

로마서 11장 25-32절


 

집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이 있고, 가치 없는 물건도 있습니다. 또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귀한 물건도 있고, 될 수 만 있으면 빨리 버려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물건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버려야할 물건들을 담는 것이 ‘쓰레기통’입니다. 집안에 버릴 것을 제때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 먼지 나는 것을 모두 버려야만 새로운 물건을 구입해서 새롭게 리모델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과거의 쓰레기와 같은 것들은 모두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쓰레기통에 담아야할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버려야할 것들을 소개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25-27)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구원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기존 틀을 깨고, 옛 잘못된 생활과 신앙을 버리고,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25-27)

사도 바울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⑴ 유대인들의 영적인 교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최고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멋있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자신들이 생각한 기준에서 일뿐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교만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 당신들은 의롭거나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행위로 완벽하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빨리 버려야할 것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⑵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겸손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25절).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들을 돌이키시는 사건이요, 그들의 죄를 없이 하시는 은혜의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을 이루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⑶ 구원에 대한 생각을 변화

과거의 구약 시대 때에 주셨던 율법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급작스럽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 방법을 따라 노력을 해보았지만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 약속을 따라서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믿음 생활한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신앙을 붙잡고 나가야 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가 시내산 광야에서 하나님과 영적이 교제하는 장소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聖幕)입니다. 성스러운 텐트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동하기 때문에 성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고 왕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왕 중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건축된 뒤에는 성막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구약에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이 건축되었는데도 성막을 고집하듯이 그런 영적인 방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과거의 생각을 버리고 시대에 맞는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⑷ 새로운 구원의 방법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붙잡고 있는 율법과 할례의식 등이 아니라 새롭게 그리스도를 오셨습니다. 이제는 책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계명 그리고 살아있는 율법인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올 때, 그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나갔던 방법이 이제는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의 산 제사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비극 중에 비극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줄 아는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씩씩거리고 있다는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집안에 쓰레기가 가득한데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 속에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외형적인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쓰레기로 가득한다면 쓰레기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고집합니다. 바꾸어야할 때를 놓칩니다. 시기를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 같이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면 버리시길 바랍니다. 포기할 것들이 있다면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안되는 것을 집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28-29)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바른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8-2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모름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 9:3-5)

유대인들은 바울의 고집으로 하나님의 뜻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갔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핍박하므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흘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정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과거의 영적 쓰레기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사정에 따라서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이중적인 입장에 있었습니다. 복음의 측면에서는 복음을 거부하였기에 원수된 자들입니다.

 

구원의 경륜에 참여한 자(30-32)

이제는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움을 사람들이 어떻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할 지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0-32)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으로 열렸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혜택을 입어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문을 꼭 닫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활짝 여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중요한 원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순종치 아니함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긍휼은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 선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니깐, 이방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이방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선택한 민족이나 사람은 끝까지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함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주셔서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로 하여금이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이 흘러넘칩니다. 먼저 받은 사람들이 넘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열방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복음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Back to the Jerusalem’이라는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선교의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면 내국에게는 전도, 외국에는 선교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의 통로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힘있게 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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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02)


끝까지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3-24절


어린 시절에 들이나 산에는 ‘야생배나무’, 또는 ‘아그배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사과나무과’에 속하지만 작은 구술만한 배처럼 생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야생배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 나무에 배나무를 접붙이면 큰 배를 수확할지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배에게 큰 배를 접붙임으로 큰 배를 수확한다면, 그 배나무는 야생배나무가 아니라 훌륭한 배나무로 변할 것입니다. 그냥 작은 ‘아그배’를 열리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에서 큰 배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교마함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간절한 소망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도 율법이라는 모든 껍질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울(13-17)

복음이 이방인에게 열렸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을 바라보면, 이방인들에게 당부합니다.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3-1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한편에서는 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많이 돌아오는데,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는 공생(共生)의 길임을 말씀합니다. 이제 이방인들에게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자신의 직분에 대해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직임을 받은 사람인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그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르심을 받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인은 성도들도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 직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맡은 자리가 사람들의 이목에 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와 직분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세우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요셉처럼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자리이든지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데 그 사람만 가면 그 자리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바울이 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빛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자리가 바울처럼 빛나게 하는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놀라운 간증과 기적과 축복이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재확인시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의 직분과 사도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대해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수고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참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축복 받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돌아오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더 열심히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를 통한 비유(16-18)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접붙임을 통해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의미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6-18)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구원관계에 대해 설명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이고, 참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꺾인 돌감람나무’로 표현합니다. 돌감람나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꺾인 돌감람나무 가지는 얼마나 더 가치가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꺾인 가지는 그대로 두면 말라서 비틀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없이 다만 불에 던져 넣을 뿐입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가치 없고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버림임을 받을 수밖에 없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감람나무 가지가 참감람나무 가지가 되어서 뿌리의 모든 공급과 자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새로운 참감람의 열매’가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근본적인 본질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일나무는 항상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결과를 맺습니까?

42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3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4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3-45)

돌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어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것도 꺾인 가지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이방인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 훌륭한 감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참감람나무였던 유대인들은 돌감람나무가 되었습니다. 열매가 과거에 이방인들처럼 형편없는 열매였습니다. 그라나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자긍하면서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접붙임을 위한 사역자(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19) 이방인인 돌감람나무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참감람나무로 접붙이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그 사역을 매우 귀중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사역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당신도 바울처럼 주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원대한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20-24)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멸망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0-24)

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20-22)

돌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접붙임이 되고, 참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a). 유대인은 원 가지(뿌리)이고 이방인은 접붙인 지류(가지)인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접붙여진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약속된 특권을 대신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구원 받은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자랑이 될 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에 대해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둘째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거나 방자하게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20b). 만일 그렇게 처신한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꺾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근거가 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음의 사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敬畏)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은 외예가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서는 참감람나무 가지이든지 돌감람나무 가지이든지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칙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있지만 준엄(峻嚴)하심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준엄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나 혈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다 꺾기우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를 구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아도, 즉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충분이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만은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판과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있습니다.

⑵ 유대인에 대한 구원(23-24)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 참감람나무가 원뿌리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에게 대해 믿어야 합니다. 참감람나무 임에도 믿지 않는 것은 꺾인 가지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믿음이 없다면 참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꺾인 가지이기 때문에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이나 지명들이 모두 생소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익숙한 문화와 환경들, 그리고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들이 믿기 시작하면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믿었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뿌리에 접붙이지 않으면 그가 참감람나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 인자의 원리,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실만한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강조하고 준엄하심을 간과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생명력 넘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요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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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1-01)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12절


지난번 뉴스에 ‘과자들의 과대포장’이란 제목으로 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포장은 큼지막한 데, 외형적인 부피에 막상 10%도 안 되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겉포장은 분명히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포장은 튼튼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포장이 아무리 화려해도 내용물이 변변치 않으면 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삶에는 형식과 본질이 있습니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구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선민 민족이었던 유대 민족들이 전반적으로 구원에 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을 받게 된 동기가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들의 악한 결정에 의해 된 것이라고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이스라엘(1-5)

종종 잘못된 자녀들 중에는 자신이 잘못된 것을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장성해서 하는 말이 ‘왜 어릴 때에 나를 잡아주지 않았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을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적반하장으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반열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로마서 10:21). 지금도 2000년 동안 한결같이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5)

사도 바울은 앞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이유로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취하지 않고 율법이라는 껍데기만 취했던 결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⑴ 자신을 통한 증명(1)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에서 포기하지 않았음을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설명합니다. 자신도 혈통적으로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디모데전서 1:15)고 고백합니다. 자신같이 부족한 사람도 구원의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인 율법에 메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사도행전 9:1-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이라는 껍데기를 취하던 자신의 아주 어리석은 삶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껍질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본질에 대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본질을 구하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질을 추구하도록 소개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면서, 가망성이 조금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인생을 바꾸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알곡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안타깝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 나니깐, 과일을 깎아서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먹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받은 백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⑵ 역사를 통한 증명(2-5)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가장 암흑과 같은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셨던 것을 설명합니다. 그 시기가 바로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를 통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당시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은 이방 시돈(Sidon)사람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왕비 이세벨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매우 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북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하도록 장려하고 이방 종교의 부도덕한 생활을 유행시키고 베니게(Phoenicia)에서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바알 선지자 450명을 불러드렸습니다(열왕기상 16:31-33).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참함을 토로하면서 “나만 남았나이다”(왕상 19:10)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생각에는 모두 죽고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혼자 싸워간다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8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

엘리야에게는 뜻밖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칠천 명을 감추어 두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거부한 것 같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이사야 6: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사랑한 백성들 섣불리 심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지 않으면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욱 폐쇄적인 삶으로 갇혀 살아갑니다. 새로운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가 그런 이기주의와 편견적인 결과인 실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마음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다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남겨두신 성도’입니다. 오늘날 점점 어두움이 찾아오는 저녁처럼, 영적으로 세상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중요한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만족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남아있길 원치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초대교회에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남겨주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있어서 우리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당신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 가족과 이 시대와 이 지역을 향한 구원 역사를 강력하게 이루어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버림 받게 되었던 이스라엘(6-10)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도 상대방이 거절하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가 매우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의 통찰력은 위대합니다. 그는 시대와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알곡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 후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세워져서 모든 열방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잠시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이 작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위해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모든 관계는 쌍방적인 역할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로 잘못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계속 베푸셔서 참 순종하는 자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족시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신 전반적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들을 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을 잘 깎아가지고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챙기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욕심에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욕심으로 잘못된 판단력을 가진 것입니다.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인 율법만 가지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은혜로 일어난 사건이지 율법을 따라 행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제깨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11-12)

세상에서도 잘못된 관계를 지속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서 넘어진 것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1-12)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제거된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공포요, 진노입니다. 다행인 것은 아직도 구원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것을 ‘넘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짐’에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는 유대인들이 받아야할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결과,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이 흘러갔기 때문에 이방에서 복음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됨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회복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넘어졌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오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순종하였다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전케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믿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2)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성경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됩니다. 영어 성경 ESV에서 “If their failure means riches for the Getiles, how much more will their full inclusion mean!”(만약 그들의 실패로 이방인들이 부유해졌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그들의 전체에게 있겠는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풍성이 주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순종한다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뜨겁게 하려는 데는 방해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넘어집니다. 그러면 당신이 받아야 누려야할 축복을 타인에게로 가버립니다.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살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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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0-03)


핑계할 수 없는 이스라엘

로마서 10장 14-21절


광주광역시 양림동 언덕 위에는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선교하시다가 돌아가신 23명의 선교사들과 가족들도 잠들어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좋지 않은 미개국인 와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순교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까지 복음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왔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주님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열악한 곳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자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지만, 듣고도 모른척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거부당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전파됨으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깨달고 돌아왔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도 부릅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겠습니까?

 

복음 전파의 과정(14-17)

복음 전파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자신에게 기회 있을 때 충성해야 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하는 일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4-17)

복음 전도자들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은 육화되었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말씀이 새겨져 있고,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입과 마음에 있어 실천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⑴ 복음 전파의 과정(14-15a)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부터 받는 사람까지 설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받았던 사람으로부터 전파한 사람까지 역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 증거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를 사용한 네 개의 질문을 통해 다섯 단계로 복음 증거와 그에 대한 반응을 소개합니다. 각 질문은 원인과 결과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 질문은 이전 질문과 꼬리물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전 질문의 원인 과정을 다음 질문의 결과로 사용하는 형태입니다. 전체적으로 (1) 어떻게 그들이 그를 부름(결과) - 그들이 그를 믿지 않음(원인) → (2) 어떻게 그들이 믿음(결과) - 그들이 듣지 못함(원인) → (3) 어떻게 그들이 들음(결과) - 선포가 없음(원인) → (4) 어떻게 그들이 선포함(결과) - 보내심을 받지 못함 (원인)의 구조입니다. 바울은 꼬리 물기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복음이 사람들에게 들려질려면 누군가는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전하는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전파하는 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멀리 나가서 전파할 순 없지만, 가까운 곳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 이전에 말씀을 들어야 하며 듣기 이전에 선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하는데, 이것이 믿음의 가장 근원이 되는 기본입니다. 믿음이란 기본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기에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수고를 통해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하고,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면, 점점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⑵ 복음 전하는 사람(15b-17)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로 표현합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선포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습니다(사 52:7).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때를 떠올리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누군가 7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소식을 전할 때 그 발이 얼마나 복된 발걸음이 되었겠습니까! 과거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35년 동안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으로부터 해방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기쁜 발걸음이 되었겠습니까! 기쁨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발은 복된 발걸음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만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로 이끄는 소식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사형수에게 감형을 얻고 출옥하는 것보다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지를 말합니다. 당신이 말씀을 전파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새로운 선교지에 선교사님이 부임하길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은 네가 가장 적격이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을 정말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이 안일함에 빠질까봐 명하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안일한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기력한 삶을 깨고 힘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영적인 전투를 해나갈 때, 그리스도인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력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봉사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수고할 때, 당신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그들도 당신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 수고하는 발길은 얼마나 아름다운 발길이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일에 당신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무시하는 이스라엘(18-21)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봉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라고 소개합니다.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8-21)

유대인이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했지만, 오히려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진입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새로운 백성으로 편입하는 이방인의 모습을 봄으로써 시기와 질투를 느끼게 되고, 결국 그들도 구원 대열에 합류하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⑴ 부정적인 이스라엘의 반응(18-20)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담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질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들었는데도 복음을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시편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은 이미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편 19: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온 세상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온 땅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못들었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것만 최고로 생각하는 집착(執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이론을 들어보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형상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집착하면, 주변에서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흘러버리고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외에 다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눈에 콩깍지 썼다.’고 말합니다. 종종 고집을 부리다가 나중에 현실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온 땅에 전파되는 복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이사야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21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명기 32:21)

또한 이사야는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이사야 65:1)

이방인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었고, 그의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나가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지만, 무슨 이유로든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를 거슬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⑵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21)

불순종과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으로 돌아오길 기다린 하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이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한 불순종한 그들에게 아직까지도 손을 벌리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2000년이 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면서 수많은 영혼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구원 열정은 식을 줄 모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자 절절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일은 영광스럽고 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사랑의 열정을 본받아 기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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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0-02)


변하지 않는 구원 법칙

로마서 10장 5-13절


아주 오래전에 서울대학교를 일반대학도 입학할 수 없는 점수로 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2학기를 버티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두었습니다.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일류대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월등해야 합니다. 잠을 줄이고 더욱 많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헌신해야만 일류대에 들어갈 실력이 되고 입시를 통과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가령 구원을 얻는 방법이 이렇게 어렵다면 어떻겠습니까?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유대인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고 헛된 노력을 다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율법은 의와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의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로 시인하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5)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계명을 어기면 연약한 죄, 죄인 된 죄, 하나님과 원수 된 죄를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5)

바울은 9:30-10:4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담긴 새 언약 약속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언약을 고집하여 그분 선택의 긍정 결과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를 통해 그들 문제를 부연하는데, 특별히 ‘의’를 얻는 방법에 집중합니다. 그는 먼저 옛 언약이 말한 내용 소개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난 의에 대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에서 난 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추구하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결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진단하지만, 율법 추구 자체가 문제라는 식의 논증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담담하게 레위기 18:5을 인용해 율법에서 난 의를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 가르침의 기원이 하나님이었기에, 의에 대한 가르침도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난 의의 원리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는 무엇입니까? 이 개념은 언약 관계를 배경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약 백성의 의무 이행과 관련 있습니다. 언약 관계에는 상호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관계에 신실해야 하며(시 25:10), 백성은 올법이 제시한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 관계에 충실해야 합니다(신 4:40). 법에서 난 의는 언약 백성이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언약 백성다운 상태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신 6:25). 이런 의의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에서 난 의는 모든 언약 백성이 반드시 추구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통해 새 언약 백성이 된 신자도 율법을 통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세 율법의 모든 조항을 문자적으로 다 따를 필요는 없지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핵심 정신인 하나님 사랑/사람 사랑을 반드시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합니다(13:10; 참조, 갈 5:14; 요일 3:23).

 

믿음에서 난 의(6-13)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행위)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믿음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6-13)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부르는 자를 차별 없이 구원해 주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합니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니다.

(1) 메시아(메시아)에 대해(6-7)

‘그러나’로 율법에서 난 의와 대조되는 ‘믿음에서 난 의’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설명을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를 짚고 가야 합니다. 첫째, 5절과의 대조점은 모세와 예수님이 아니라, 의를 얻는 방법, 곧 율법과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에서 난 의의 개념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한 것에 대한 사람의 긍정 반응이고, ‘의’는 사람의 반응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상호 작용 과정 설명에서 이 의는 사람이 구원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두 영역 설명에서는 죄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 통치 영역 안으로 옮겨져 새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율법에서 난 의와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개념을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향한 구원 방식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즉, 유대인은 율법으로, 비유대인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둘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데, 사람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도 함께 계시합니다. 순종에는 복과 생명이 있지만, 불순종에는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신 28장). 문제는 언약 백성이 이것을 다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근원적 죄와 파생 죄악들을 중단하지 않은 유대인의 역사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계속 신실했고 새 언약을 약속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 대신 예수님을 심판하심으로 죄인에 대한 율법의 저주를 끝냈고, 그의 부활로 구속 과정이 성공했음을 확증했습니다(4:25). 이제는 옛 언약 안에 있는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그 주권적 일하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죄 용서와 함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기서 바울이 말한 의와 관련한 대조는 (1) 구원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과정과 관련 있으며, (2) 믿음에서 난 의는 율법에서 난 의를 얻지 못한 자에게 새롭고 완전한 기회를 주는 하나님 은혜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해 설명합니다(6b-13). 몇몇 요소를 차례로 소개하는 과정으로 진행합니다. 첫 단계는 믿음의 내용인 메시아에 대해서입니다(6-7). 바울은 ‘너’의 마음속에서 하늘에 올라가겠다거나 땅 밑 무저갱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올라가겠다는 것은 이미 성육신한 메시아를 모셔 내리는 것이고, 내려가겠다는 것은 부활한 메시아를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12-13을 변형한 형태이며, 핵심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육신해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 사역을 완수했으니 새 언약 성취를 위해 다른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복음의 내용에 대해(8-10)

‘그러나 무엇을 말하느냐?’ 표현으로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를 소개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복음 증거 과정입니다. 바울은 신명기 30:14을 인용해 말씀이 ‘너’에게 가까워 ‘너’의 입과 마음에 있다고 하고는, 그 말씀을 복음 전도자(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8). 복음 안에는 이 땅에 와서 구속 사역을 끝낸 메시아에 대한 증거가 있기에, 유대인은 다른 곳에서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복음에 대해 바른 반응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인 믿음의 반응입니다. 만일 ‘너’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 구원에 이릅니다(9-10). 두 가지 관찰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a) 입으로 시인 - (b) 마음으로 믿음(구원받음) - (b) 마음으로 믿음- (a) 입으로 시인(구원받음) 형태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인간 인격의 중심이고 입이 마음의 표현 통로이기에, 이 둘은 안에서의 믿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과 시인의 내용입니다.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십자가 사역을 포함한 구속 사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상호 작용 과정 중 하나님께서 하신 첫 단계입니다. 시인하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주라는 것입니다. 두 영역을 배경으로 구원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또한 창조주 대신 자신을 사고 체계의 중심에 세운 것과 반대이기에 근원적 죄에 대한 완전한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3) 복음을 통한 공평한 구원(11-13)

믿음에서 난 의의 또 다른 요소를 다룹니다. 이번에는 구원의 차별 없는 개방성입니다. 성경이 메시아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 당하지 않는다(11; 참조.사 28:16; 롬 9:33)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모두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12; 참조. 1:16; 3:22). 그렇기에 9-10절처럼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의 주가 되시고, 그들은 구원 과정에 참여해 예수님께서 주는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믿음에서 난 의는 (1) 옛 언약의 한계 위에 약속된 새 언약 구원의 성취로서 (2)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3) 복음 전파자의 증거로 전해져 (4) 유대인/비유대인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5) 오직 마음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자만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대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도 은혜의 기회를 열어 주셨음에도 그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아 지금의 상태가 되었음을 분명히 지적하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율법 돌판을 소유한 자나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과 입에 둔 율법의 목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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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0-01)


참된 구원의 지식

로마서 9장 30절 -10장 4절


훌륭한 의사일수록 질병을 섣불리 단정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질병을 진단하고 노력합니다. 환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원인을 찾습니다. 원인을 찾아내야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질병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원인과 그것에 대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른 개념을 설명했던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와 회복의 문제를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했던 원인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0-33)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율법은 그 기능과 목적을 오해했습니다. 율법 자체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우리의 한결같은 반응은 ‘믿음’뿐입니다.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

의로운 행위를 위한 그들의 열심은 이해하기만,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구약에서도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한 자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른 이방인(30-31)

30-31절에서 바울은 구속사의 절정에서 일어난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의로움을 얻었으나, 의로움을 추구하였던 유대인들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얻은 그 의로움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고 부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4:3). 바로 그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을 상속받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4:16).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믿음을 보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30절은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한 ‘믿음’과 ‘의로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준 셈입니다.

(2) 율법 행위에 의지하여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1-32)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32절의 ‘행위’는 31절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율법의 준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추구한 이유는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절의 ‘의로움의 율법’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율법 준수를 통해 반응함으로써 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31절이 말하듯이, 율법이 의로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율법을 따라간 유대인들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표현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수행한 구속사적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 선명하게 제시했습니다. 로마서 5:20; 7:13 등이 말해주는 대로,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그 결과인 사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붓는 예상치 못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진정한 의로움과 생명을 가져오시도록 돕는 보조적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율법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이전에 주어진 율법의 제한된 영광에 붙잡혀 정작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3) 걸림돌과 구원의 반석이 된 예수 그리스도(32)

32b-33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용하여 이를 기독론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사야 8:14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걸림들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사야 28:16 칠십인역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한 돌, 곧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을 두어 기초를 삼으시는데, 그를(혹은 그것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8:14의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이사야 28:16의 ‘돌’에 관한 언급들과 교체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돌들에 관한 말씀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는 분명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신명기 21:22-23 말씀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8:16에 등장하는 돌들에 관한 원래의 묘사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로서, 시온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기초가 되는 돌입니다. 이사야 28:16의 원래 구절들을 불러올 수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의미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18, 24이 말하듯이,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은 이스라엘(10:1-4)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울은 살았습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 유대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길 원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4)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근심을 쏟아내던 바울은(9:1-5)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을 열망합니다(1).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 의를 따라감으로 구원받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1)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원하는 바울(1)

바울은 이스라엘 동족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1).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2)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한 그릇된 이스라엘의 열심(2-3)

그러나 그 열심은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2). 바울은 3절에서 곧바로 이를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 아들의 이야기인 ‘복음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선포했습니다. 3:25-26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따르지 않았던 ‘지식’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9:31-32에서 바울이 밝혔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얻는 의로움을 고집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세우려는 ‘자기 의로움’은, 3절 하반절에서 부연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는 것’자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그릇된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의로움을 계시하신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둔함과 교만함입니다.

(3) 율법의 목적과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4)

바울은 4절을 ‘그리스도는 율법의 텔로스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텔로스’는 ‘목적’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마침/끝’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이전 단락의 논의들에서 율법이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사망을 퍼붓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은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율법에게 부여하신 숨겨진 기능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을 주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의 십자가 사역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취가 있었지만, 역시 연속성 속에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텔로스’에서 ‘마침’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합니까?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은 이미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6:15),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7:4) 등과 같이 말하면서 율법을 이 세대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오셔서 종지부를 찍은 이 세대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율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비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악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가지는 애초의 구속사적 기능을 다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 유효 기간이 다한 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의 ‘텔로스’라는 한 단어 속에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의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과 마침이 되신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원문에서는 ‘판티’ 곧 ‘모든’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9-11장 단락에서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보았듯이, 육신 아래서 죄의 노예로 살면서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다’(1:16).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항상 말씀에 붙들려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무서워한 것은 말씀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순종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말씀에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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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9-02)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없음

로마서 9장 19-29절


독수리는 새끼들이 날아야할 시기가 지나서 날지 않으면,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고 합니다. 넓은 창공을 날아오른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올라야 위엄있는 독수리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중년이 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여, 과거의 습관이나 전례에 따라 안전하게만 행동하려고 하지,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고 굳어진 습성을 ‘타성에 젖다.’라고 합니다. 타성에 젖는 이유 중에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성의 보호막을 깨고 나와야만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책망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바울은 토기장이 그릇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진흙을 사용해서 어떤 그릇을 만들든 그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듯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창조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자유(19-23)

구원은 물론이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려 하셨다 가도 멸하시기로 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에 따라서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을 풍성함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19-23)
긍휼히 여길 자와 심판할 자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정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슨 책임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꼐서는 공평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항의(19)
19절은 9:6-18, 특히 18절에 대해 예상 가능한 반박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긍휼히 여길 자와 완악하게 할 자를 스스로 결정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들을) 여전히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뒤에는 ‘왜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느냐?’는 질문도 전제되어 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여 성공)하였느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완악하게 할 자를 완악하게 하셨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완악한 자들을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17-18절에서도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께 저항하였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역사 속에서 항상 동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면, 그는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이 애초에 강조한 바다. 19절의 이 가상의 질문자는 마치 인간이 아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반박한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결정의 자유(20-21)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20-23절에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권과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0절에서 사용된 동사 ‘플라쏘’는 창세기 2:7-8, 15에서도 사용된 동사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1절에서는 ‘만들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진흙덩이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그 생김에 대해서 항변할 수 없고, 진흙으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천한 그릇’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선 그것은 구속사 속에서 언약의 범위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9-11장의 전체 문맥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현재 새 언약의 백성 범위에서 제외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가능성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구속사적인 특권을 누려왔다 하더라도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 속에서 ‘천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과 흡사합니다(17-18).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들 자신입니다(롬 3:3). 그러나 만약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그러한 ‘천한 그릇’으로 계획하셨다 한들 누가 이에 대해서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20a)?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에게 ‘천한 그릇’의 역할을 맡기든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22-23)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이 긍휼히 여기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22-23절은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다시 설명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에 진노로 심판하려 하셨다가도, 멸하기로 준비된 그 진노의 그곳에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22). 또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을 따라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2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해당 될 수 있습니다. 결국 22-23절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모두를 선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3:21-26; 5:1-11; 8:31-39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에게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그들과의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스스로 부르시는 하나님(24-29)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하나님의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극히 소수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4-29)
은혜로 회복하시기로 한 그릇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남은 자들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적다고 항의할 일이 아닙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부르신 하나님(24)
바울은 24절에서 이미 그 하나님의 관용의 대상이 되어 긍휼함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바로 바울과 로마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9:6-13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긍휼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에 해당합니다. 1:18-32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은 이들입니다.
(2) 백성 아닌 자들을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25-26)
25-29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호세아와 이사야 선지자의 글들을 인용합니다. 호세아 2:23의 인용을 통해 바울은 백성 될 수 없는 자들을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표현합니다(25). 호세아가 말한 백성이 누구였든지 간에,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름 받는 새 언약 백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27-29)
본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5-26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른다는 표현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자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로마서 3:21-26; 5:1-11, 8:31-39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호세아 2:23에 이어 호세아 1:10의 인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26)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8:14-1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상속자로서 물려받을 영광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개역개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단수로 번역했지만, 원문의 복수 의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8:29에 등장하는 ‘맏아들’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상속자들이 된 많은 아들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호세아 1:10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호세아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에 해당하는 것으로, ‘맏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유업을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27-29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긍휼의 그릇’(24)으로 부름 받은 이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10:22을 인용하여 ‘남은 자’라는 단어를 도입합니다. 이미 앞 단락인 9:6-13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만 약속과 긍휼을 받는다는 점을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한 바울은, 이제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를 비롯한 예언서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남은 자’ 사상을 불러와 하나님 백성의 범위를 더 좁힙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27). 28절에서 곧이어 인용된 이사야 10:23의 의미도 로마서 문맥 안에서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완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시행하실 것이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굳이 추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새 언약 백성으로 진입하는 일이 철저하게 진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11장에서 다룰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전개 될 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29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1:9 말씀은 그마나 주께서 남은 자를 남겨두셨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전멸하는 것을 면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 인용을 통해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칭함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남은 자’라는 개념을 불러와야 할 만큼 소수만이 하나님 백성의 범위에 들어와 있는 기막힌 구속사적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시고 시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셨다면, 그들은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오늘도 감사와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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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9-01)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원

로마서 9장 1-5절


어떤 건강식품 광고에서 사장이 나와서 ‘이렇게 좋은 걸, 말로 표현한 길이 없네!’라고 제품에 대한 안타까워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 생각에는 제품은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깐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고아고를 볼 때마다, 한 성도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깐,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은 전해도 왜 믿지 않을까요?’라고 안타까워하던 생각이 납니다.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깐 안타까움을 토로일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선민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동족이기 때문만 아니라 선민 민족으로 누려야할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슬픔과 고통(1-2)

성령충만한 삶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닮은 생각과 꿈 그리고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 속에서 성령충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1-2)

사도 바울은 앞 31-39절에서 감정적으로 찬양하던 언어에서 갑자기 냉정하게 법정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1절은 9-11장 전체의 풍조를 범정에서 마치 검사나 변호사가 피고인을 놓고 격돌하는 것으로 정립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부터 자기가 쓰는 것이 법적으로도 거짓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써 양심상 성령 안에서 참말을 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고 그 뜻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첫머리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1)고 단언한 것도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 모든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11)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직한 영과 성령 충만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미숙한 성도들은 이런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10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 1:10-11)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바울은 정직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동족을 위한 거룩한 고통(3)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은 믿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역을 하면 할수록, 구원 받지 못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 속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예전에 벅찬 감격으로 개선가를 부르던 장군과 같은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큰 근심과 걱정은 자신의 골육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자기 민족으로부터 메시아 탄생과 하나님 말씀을 보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지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겸손하게 받아 들렸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흘러가지 않고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는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를 나눈 가족은 타인보다 더 관계가 낫다는 가족의 중요성을 의미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 이방인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대단히 극단적이고 무거운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동족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방법이 모세나 그리스도의 희생처럼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끓어지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간절히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절박한 소원에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자신이 희생해서 동족 이스라엘을 돌아올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대속적인 죽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바울은 이처럼 사역 속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신 것에 대해 헤아려보면 너무나도 감사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끊어질지라도 구원을 바라는 소원은, 구원에 대한 사실을 전하고 싶은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골육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안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민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모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중보 기도했던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중보기도자로 서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가족에 구원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절실한 구원의 바람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혼자 열심히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가족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의 구원이 놀라운 구원이라면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특권(4-5)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방인의 사역을 하면서도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식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5)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특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여러 축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기득권을 받았고, 그의 영광을 누렸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받았던 특권들은 모두 7개입니다. 이 목록은 로마서 8:15-33에 나오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유대인에게 주어졌는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 양자됨(출 4:22)과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출 16:10; 24:17; 40:34; 왕상 8:11), 하나님과 맺은 언약(창 15:18; 삼하 7:12-16; 렘 31:31-34), 율법을 맡음(신 5:1-22), 성전 예배와 하나님의 약속들(특히 메시야)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이 차지하고 있었던 특권들이었습니다. 그 특권들 중에 최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음으로 인해서 복음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들이 주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고 우월감에 빠져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그들을 정복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그들에게서 난 것이 그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들은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일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셔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절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모욕했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이스라엘은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지만,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결정하거나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지는 삶을 말입니다.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름으로 바울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던 전철을 한국교회의 불순종으로 재현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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