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로마서(05-01)


칭의에 동반된 축복

로마서 5장 1-11절


미국의 헨리 위드 비쳐 목사는 “고난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옵니다. 이는 사람을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하며, 불쌍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씨를 천 배로 늘리기 위해 쟁기질로 땅을 비옥하게 하듯, 고난은 우리에게 기쁨과 영적인 결실을 더하여 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은 경험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하기 쉽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유익을 찾기보다는 또 다시 좌절과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고난을 통한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과의 화해가 결국 그들을 최종적인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평화와 소망(1-4)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죄(罪)’라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통해 죄의 문제를 잘 해결이 될 수 있는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1-4)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들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할 것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경험하는 결과들을 제시합니다. 그 의로움에 근거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⑴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얻은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곳에서 ‘화평’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4). 이는 인간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평을 받자!’가 아니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권세와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평안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란 거짓입니다.

⑵ 즐거움을 누리는 삶(2)

바울은 4장까지에서 다른 또 하나의 주요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상기시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 아니라 잠시 동안 주어질 뿐이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을수록 만족되지 않고,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기쁨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우리 내면에 주신 기쁨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를 들어간 것처럼, 은혜의 장막 안으로 들어간 능력과 권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⑶ 소망을 누리는 삶(3-4)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환란은 인내를, 그리고 그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를 훈련시킨 후에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평온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순탄해야 되지 않는가? 만사형통(萬事亨通)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의 만사형통(萬事亨通)만을 말씀하진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은 만사형통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더 많이 당합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이나 죄악에 정당히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받습니다. 왜,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방법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고난받을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은 왕의 품위(品位)가 있어야 합니다. 왕이 내시(內侍)같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 사람들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죄악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자녀와 같은 행동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더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0:22,23).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받아도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소망을 이루는 줄 알이로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소망(所望)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하늘 나라의 소망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망의 근거로서의 하나님 사랑(5-8)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을 받는다면,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나가서 환난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소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에 대한 것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인 천국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핍박합니다.

⑴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5)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울은 5절에서 그 복음의 약속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즐거워 할 수 있는 비결을 보여 주십니다.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비결을 바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5에 이르기 전까지 ‘성령’이라는 단어를 3회만 사용할 정도로 아껴왔습니다. 5-7장에서 이 세대의 죄와 사망의 다스림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음 세대의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역설하게 될 바울은, 8장에 이르러서야 그 생명의 결정적인 운반자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스데반 집사님께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면서 돌에 맞아서 기쁘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7:55-56).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성령이 충만하여’(7:55)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의 말씀에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원인을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간순간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배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성령에 의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른땅에 물을 부어서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듯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우리의 심령에 풍성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날마다 담대하게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의 죄악에 패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씀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국(敵國)에게 패배해서 승리한 적군의 장군 앞에서 패배했다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해 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⑵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6-8)

하나님의 사랑이 말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5-8절에서 바울은 ‘죽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한 대상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그 사랑이 주는 충격을 더 해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동료 인간들 중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음을 바울은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라서 1:18-32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사망(1:32)의 다스림에서 헤어 나올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충격적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원수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큽니다.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순종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 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의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불뱀의 심판을 하셨을 때,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셔서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아나셨듯이 말입니다(민수기 21:9).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화해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9-11)

마귀는 거짓 것들인, 육신 쾌락, 세상적인 물질, 욕심을 채우는 만족 등과 같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잠시 순간적인 만족은 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만족들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의 고통이 따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능력이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9-11)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신분과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된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은 의로움과 구원(9)

마지막 소단락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희생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즉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a)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셨다면,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 우리를 그 그리스도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것은 더더욱 자명한 일입니다(9b).

⑵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을 통한 화해와 구원(10)

10절은 이를 재차 확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감수하신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부활 생명에 동참케 하실 것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화해하다’라는 단어는 외교적인 용어입니다. 한때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동맹국이 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당시에는 ‘화목’이 가능하려면, 항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묘사하는 화목은 상식을 뒤집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이 단어는 4회 더 등장하는데, 고린도후서 5:18-20에 3회나 사용됩니다. ‘화해’라는 말은 5:1에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평화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과 고린도후서 5:18-20 모두에 나타난 화해의 가르침에서 눈여겨볼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 화해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린도후서 5: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화해 사역을 위해 순종하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둘째로, 두 본문 모두 화해의 개념을 하나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주제와 성도가 얻는 의로움의 혜택과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21) 9-10절 모두에서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미래적 구원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한 현재적 의로움과 화해의 관계와 연결시킵니다.

⑶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자랑함(11)

바울이 재차 확인하듯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미래적 구원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 있으므로 그리스도 이 외에 자랑할 자가 없습니다. 잠시, 성도들은 뜻하지 않는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란 사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들에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성도들은 자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도록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이미 세상을 이기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4-02)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

로마서 4장 13-25절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빛과 소금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사들이 배울 수 있는 모범입니다.

 

이 단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할례와 분리시킨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을 율법과도 분리시킵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많은 후손이 일어난 것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의롭다 함 받은 것과 병행시키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아브라함 이야기를 설명해 나갑니다.

 

믿음으로 되는 후손(13-16)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율법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3-16)

바울은 앞에서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할례나 혈통 그리고 전통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⑴ 약속을 받을 상속자들(13-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만약 율법에 의해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언약의 상속자가 죄는 방법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특별히 계시한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특별한 위치에 서게 하는 근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할례 대신 율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라고 단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할례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그 약속을 상속한다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도 파기된다고 단언합니다(14). 이전 단락 10-11절에서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의롭다 함 받았다는 시간적 순서를 중요시 합니다. 다메섹 체험 이전의 바울과 1세기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긴 약속들과 그 언약의 징표인 할례는 430년 뒤에 모세 언약과 율법을 통해 확대되고 발전되고 완성 됩니다. 구약성경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옛 언약의 체계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할례, 율법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미리 율법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세기 26:5)는 근거 구절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할례와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을 소유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바울이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구약의 문맥 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해석학적 준거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아브라함 이야기와 이스라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 약속과 율법을 분리(갈라디아서 3:17-18)시키기 직전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임을 결정적으로 선언합니다. 바울의 논리는 과연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일 때만 참입니다.

⑵ 진노에 이르게 하는 율법(15-16)

바울은 그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잠깐 언급합니다. 다메섹 체험 이전의 바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율법은 오히려 범법함을 더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후 그가 깨닫게 된 율법의 숨겨진 구속사적 기능을 바울은 이후의 편지에서 계속 풀어 나갑니다.

⑶ 믿는 자들에게 주는 은혜의 상속(16)

바울은 ‘그러므로 그 약속은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고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응답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약속이 그분의 은혜, 곧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주기는 그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자손의 약속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오직 그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인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이 진행된 것과 같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 머물고 그 은혜의 약속들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합니다(16). 율법을 통해서 은혜의 약속들이 주어진다면 오직 유대인에게만 그 약속이 흘러갈 뿐입니다. 이래서는 아브라함을 열방의 조상으로 부르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16). 여기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윤리가 아니라, 그 뜻을 유대인들의 문화적, 시대적 옷에 입혀 주신 역사적 도구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13-16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상속자 개념입니다. 앞으로 바울은 ‘맏아들’(로마서 8:29) 되셔서 우리가 얻을 유업을 이미 다 상속하시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 속에서 ‘맏아들’의 중요한 기능과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상속입니다(로마서 8:14-17).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언약의 약속을 이미 상속하셨습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과 완전한 하나님 백성의 지위인 의로움에 먼저 이르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맏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도 동일하게 상속자 된다는 이해는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바울이 16절에서 상속자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와 유사한 표현임을 주목하라. 즉, 이 단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서 언약적 신실하심을 다하시고, 언약의 약속을 상속하시고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 그 상속한 것들을 나누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바울의 구속사적 이해가 일관되게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성격(17-21)

생명을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17-21)

기독교는 구원받은 것,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주신 칭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값없이 받았다면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율법적으로 철저히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약속(17)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창세기 17장 5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아브람과 동일시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육신의 자손들에게 주신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약속들이 영적인 것으로 변했다거나 폐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살펴보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의롭게 되는 방법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표본이 됩니다. 그래서 그의 방법대로 따라가면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됩니다. 그의 구원과 복이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고령이고 사라는 불임을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임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성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심하거나 믿음 없음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이루어졌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② 율법을 주신 시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 400년 후에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롭게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보다 먼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법을 넘어서 거룩한 삶을 삽니다. 율법이 족세처럼 억매이도록 하면서 이것을 제대로 지키고 살아야만 얻는 구원의 방편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한 실천 유무로 하나님의 백성 자격을 논한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국 백성으로서 자격이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만 주신다면 율법대로 살았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로 주어진 약속은 율법을 폐하고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불러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⑵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18-21) -------------- 이후는 정리가 덜 되었음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높이 사셨고,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 처녀의 몸에서 구주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이 그림자인 셈입니다. 남자 없이 아이가 생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에 대해 동일한 ‘상속자(相續者)’가 된 것입니다. ‘상속’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선조나 재산가로부터 재산을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에 믿음의 후손이라면 이러한 모든 복들이 우리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가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믿을 만한 약속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끝까지 믿었습니다. 환경을 보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누린 축복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90세와 자신이 100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난 후에 사라도 비웃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생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을 경험하고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불가능한 상태를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이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이자 언약 신앙, 창조 신앙입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신앙은 그릇된 것입니다. 당신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연약하지지 않길 바랍니다. 환경이나 상황들을 보면 도무지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켜 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 바울은 아브라함이 소망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미 백 세가 되어 그의 몸이 죽은 것 같았고 그의 아내 사라의 태 또한 닫힌지 오래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17) 그리고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19)라고 말하면서, 죽음과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의 주제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4-25절에서 바울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기능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도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진정한) 자손으로 암시됩니다(갈라디아서 3:16).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통해 성취된 의로운 약속(22-25)

만약 많은 유산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신이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 유산은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자신의 소유인들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믿음으로 얻는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이제 화목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게 해줍니다.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2-25)

⑴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함을 우리(22-24)

성경에서는 믿음의 조상을 본보기로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24)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선배의 믿음의 삶이 현재 우리의 위치에서 적용되어질 때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⑵ 죄와 의로움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25)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을 본받아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앞서 간 길잡이가 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선배가 많다는 것은 전정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듯이 우리도 그러한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가 세상의 후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제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신 방식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절정에 열방을 의롭다 하시는 방식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의롭다 함 받는 이들이 믿은 대상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3-4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믿음의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고,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서 하나님께 언약적 신실함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신 분으로 조명합니다. 24절은 아브라함의 나이 백 세에 후사를 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믿음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언약적 신실함을 다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24; 참조 로마서 1:4). 25절이 말하는 대로, 그의 ‘내어줌’은 우리의 죄를 사하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희생제물(로마서 3:25)이었습니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의로움을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의로움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로마서 1:2). 그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제한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로서 의로움을 획득하셨습니다. 아들 하나님에게 의로움이 부족해서였겠습니까? 바울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먼저 의로움을 얻으시고,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의로움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의로움’의 지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성도가 얻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전에 하나님의 믿음(신실하심)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를 부르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이 제작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믿음 이전에 예수님의 믿음(신실하심)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4-01)


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신칭의

로마서 4장 1-12절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더욱 진가를 발합니다. 하지만, 다이어몬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받아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위대한 가치를 깨닫습니까?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정의에 대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의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대해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의롭다 하심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의 법이 실효성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1-3)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십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랑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1-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음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고, 믿음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역사 위로 들어 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결과입니다. ‘의’는 약속이 잘 지켜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신실함’ 또는 ‘믿음’은 ‘그 약속을 잘 지키는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언약을 전제로 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신실한 표현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전하고 싶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자들, ‘의롭다’고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하신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실하심’, ‘예수님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이 아닙니다. 이미 1:18절에서 3:20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의인 아브라함과 노아 그리고 엘리야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니, 세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믿음을 자랑할 수 있느냐?’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본문에서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는 근거 질문 제기(1)

사도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이 문장을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 것이 육신을 따른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바울은 4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시는 방법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⑵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2-3)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의 ‘행위’ 혹은 ‘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그는 유대인들도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만큼 행위에 있어서 매우 의로웠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으로 위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면, 유대인들도 복음에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행위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3:30에서 바울은 이미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아님을 천명하고, 다시 4:1에서 그 ‘육신의 표시’를 따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되었는지 질문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는 할례를 지칭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의롭게 된 ‘방법’은 결정적으로 그가 의롭게 된 ‘때’에 달려 있습니다. 즉, 할례 받기 ‘이전’에 그가 보인 믿음을 통해 이미 의롭다 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선택되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지와도 어떤 ‘업적’이나 ‘일’과도 상관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입니다. 이제 바울은 독자들이 인정하거나 물을 수 있는 권위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창세기 15장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반적인 은혜의 약속을 듣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창세기 15:6에 의하면,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4장 전체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5:6의 전후 문맥은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5:6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시작된 순간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부름 받아 땅과 자손을 얻을 약속과 열방을 위한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미 같은 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세기 12:4), 벧엘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12:8).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즉, 창 15:6의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는 구원의 첫 관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오히려 창 12장에서 아비 집을 떠나는 장면은 어려운 순종의 결단을 위한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그 증거로 3절에서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을 근거로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의로움’이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약속 안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는 사실은, 로마서 3:28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선포를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 내용에 전말은 아브라함은 아무리 기대려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주인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는 방법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구원에 대한 우월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더 나가서 이 구원이 교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대로 구원은 우월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은 것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4-8)

사람들이 일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안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죄 사함의 복을 선물해주십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8)

사도 바울은 앞 절에서 인용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람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심과 선택하심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⑴ 불경건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얻는 의로움(4-5)

사도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선택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 4절에서 상업적 비유 하나를 듭니다. 어떤 일꾼이 일을 하고 상급(개역개정에 ‘삯’이라 번역)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보수를 받은 것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4). 재미있는 것은, 4절에서 바울이 ‘미스토스(μισθ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 15:1 칠십인역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이라는 상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과 자손의 상급을 얻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공헌을 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대가’ 혹은 ‘보수’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받을 상급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아브라함은 그것에 ‘믿음’으로 반응하였을 뿐입니다. 5절은 4절의 상업적 비유와 바울의 요점을 연결시킵니다. 아브라함도 ‘일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또한 비유 속의 일하지 않는 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볼 때, ‘경건하지 않은 자’란 표현을 통해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들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반응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을 뿐, 할례와 율법 때문에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⑵ 죄사함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한 다윗의 고백(6-8)

사도 바울은 6절 이하에서, 이 동일한 진리를 시편 32:1-2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언어들을 통해서 더 보편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도 범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단순하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무런 수고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사전 행동이나 공헌 없이 은혜와 선물로 죄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들의 복에 대해서 이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신뢰이든, 신실함이든)을 (인간의) ‘일’에 포함시키지 않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로마서 3:21-26에서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한 바울은 4:1-8에서 오직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로움의 지위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이야기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재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구원에 대해 아무 자격이나 공로도 없는 당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9-12)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유대인은 그들이 율법을 맡은 것을 자랑하며 유대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할례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9-12)

아브라함이 이방인처럼 무할례자 신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먼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믿음의 징표로써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할례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9-10)

바울은 이미 3:30에서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로마서 2:25-29;3:29-30).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언약 백성의 표지가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와서 본격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앞의 논의를 다시 정리한다(9). 아브라함도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할례와 무할례가 아니라 믿음의 소유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⑵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11-12)

10-12절에서 바울은 이를 재미있는 논리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였습니다(10). 둘째, 할례의 표지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로움을 인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11). 셋째,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보여준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의로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2). 이상의 논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의 원래 문맥이나 구약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의문점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분명하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그 시간적 순서들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할례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자손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놀랍게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해석의 출발점에서 갈라디아서 3:16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뿐입니다. 로마서 3:21-26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의 소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통해 그 소명을 성취하셨다. 아브라함 자손의 이야기는 결국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여겨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11).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12).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믿을 때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혹시 할례와 같이 외적인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를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로 삼고 나타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느 정도 억울한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한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것이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먼저 다가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상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3-03)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

로마서 3장 21-31절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심신산골길을 통해서 전라도에서 보름을 걸려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 새로운 ‘신작로(新作路)’라는 길이 생겼습니다. 한양까지 2-3일 만에 갈 수 있도록 생활이 정말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점점 다리가 놓아지고 새로운 길이 뚫렸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과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에 대해 해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옛날 길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바울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창조주와 심판자이신 한 분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 모두를 의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도 나타내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다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함이 가지는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멸망 앞에 있는 인류에게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어떤 작은 희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21-22절에서 요약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1-26)

바울의 고발은 강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18-3:20).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단정합니다. 모든 인류를 자연 상태로 두면 아무런 소망이 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해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21-22)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21)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시작합니다. 1:18-3:20의 긴 단락을 할애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구원을 자기고 오셨습니다. ‘이제’, ‘율법과 상관없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개념은 어떤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신실함을 더하며 정상적인 관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표현하는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들이 먼저 파괴한 언약적인 관계를 회복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선지자들과 더불어(12) 율법도 복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움이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참조 10:4). 이 단락의 31절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물론 31절의 율법은 구속사 전체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재해석된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21절에 이어 22절에서도 재차 언급하며,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한정적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뢰와 신실함 곧 ‘피스티스’를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로움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칩니다(22).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 성취하시고, 열방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믿음/신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22에서나 갈라디서 2:16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그 상호관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 구문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번역 때의 장점은, 그것의 결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두게 합니다.

⑵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23-26)

‘하나님의 의’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 승하심으로, 즉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들어났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①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23-24)

바울은 다시 죄의 노예 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과 그것으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1세기 사람들이 노예시장에서 흔하게 사용하던 속량이라는 상업용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비하신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23). 그리스도께서 노예인 우리의 몸값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였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로 붙잡혀 있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그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24)입니다.

②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명(25-2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절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석적 난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힐라스테리온’을 ‘화목제물’과 ‘속죄소’ 모두로 번역할 수 있음은 도움말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25절에 등장하는 첫 부사구 두 개의 용법 또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가 누구의 믿음(신실함)인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 속죄소로 세우신 것’이 그의 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입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가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워진다는 생각은 예수의 사역을 우리의 믿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의 ‘피스티스’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보여주신,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그를 화목제물(속죄소)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25절과 26절에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피스티스 예수로 말미암은 자들도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피스티스 예수’도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그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으로 말미암는 자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믿음(신실하심)에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 ‘예수의 믿음/신실함을 공유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울 신학의 중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배풀어 주신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세 가지 문제(27-31)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는 율법이 말하는 원리대로라면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율법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면 자랑할 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은혜와 믿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27-31)

우리가 의로움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21-26절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 있다면, 그 어떤 인간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설명할 때 나올 수 있는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⑴ 구원에 대한 자랑의 문제(27-28)

바울은 먼저 ‘자랑할 데가 어디냐?’라고 묻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자기들의 특별한 위치에 대해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17-20,23)? 바울은 ‘있을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자문자답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22,25-26) 은혜로만(3:24)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배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인류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온 해결책이기에 사람들이 서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법을 따른다면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자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28절은 27절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는 ‘무슨 (율)법으로냐? 행위로냐?’라고 묻습니다. 율법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행함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리므로 사람이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대답합니다.

⑵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29-30)

여기에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29)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본 유대인의 특징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방인들이 거짓 신인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참되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예레미야 10:10)만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유대인만이 여호와를 알고 경배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창조주이시며 만민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신명기 7:6)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도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부명하게 보이셨습니다(참고 요나서). 게다가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어서(로마서 3:23)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토대 위에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쉐마’를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할례자든지 무할례자든지 배경에 관계없이 똑같은 믿음의 조건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⑶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문제(31)

마지막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바울은 특징적인 감탄조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하고 난 뒤에,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개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끌었을 때(20;갈라디아서 3:23-25), 율법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그 위치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듭 구원의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3장 22-31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무려 여덟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은 무기치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에서 7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의 고백을 재정의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인 쉐마를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재정의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만을 통해서 열방을 차별 없이 부르십니다. ‘믿음의 율법’(27)이란 표현은 31절에서 다시 설명됩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성도들의 믿음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구속사 속에서 율법은 이 믿음의 출현을 기다립니다(갈라디아서 3:23-25), 그런 점에서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31)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는 구원의 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새롭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깨닫고 흔들림 없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3-0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장 9-2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충만히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자랑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믿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나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이 땅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율법으로는 오직 죄만 깨달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가(9)

자신을 평가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평범하게 생활하다가도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시험을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가장 힘든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나으냐?’라고 묻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지배받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기고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헬라인, 스스로 도덕적인 행위로 의롭다 칭함을 받기를 원하는 유대인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보면 자격이 미달이란 것입니다. 누구도 인간의 의는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자격 미달인 죄인입니다. 누가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격 미달이라는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인생을 경험하고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전도서 7:20).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단정하십니다. 본문에서도 또한 사도 바울은 다른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사람들을 평가하십니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2-3)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으로 적게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양심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흉악한 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정말 거룩한 것처럼 착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는 때로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평가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의롭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말 전도하거나 가르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앞에서 죄와 심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면서 누가 낫다고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도토리 키 재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십니다. 종종 우리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헌금이나 봉사 등을 비교해 보면, 주일날 한 번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고는 우리들의 자랑거리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성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계속해서 이 땅 가운데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 나가야 합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징(9-1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인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9-18)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서 이런 죄인의 모습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의인은 없고 모두 죄인들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신다면, 우리들은 깨달음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서 무익하게 됩니다.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살면서 마치 대단한 것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다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선하고 유익한 일에 쓸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들의 특징을 시편에서는 죄인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2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편 36:1-2)

죄인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혀로는 선함을 말하지만 속임을 베풀고, 입술에는 선을 품어낸 것처럼 하지만 독사의 독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저주하고 죽이는데 발 빠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앞에 놓인 길이 파멸과 고생의 길이며, 그들에게서는 평화를 찾을 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들이 회복해야할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축복과 회복해야할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만이 우리에게 참된 축복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깨닫는 지식을 주셨고,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의 길입니다. 시편 기자는 선을 행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편 37:25-26)

우리들이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은 축복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요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잃어버린 축복이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축복들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의 한계(19-20)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학식이 풍부하여 세상의 학문을 두루 통달한 자도, 배우지 못하여 지식이 없는 자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권력자나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도 모두 이 선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으로 지칭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잘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9-20)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가진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신 이유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데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우리의 죄성이 드러나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추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또 다른 의인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과 같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과 행실을 점검하면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회개해야 할 죄들이 많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 지름길입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3-01)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문점

로마서 3장 1-8절


사람들은 살아가면 많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해서 많은 질문과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친절하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풍성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길 축복합니다.

 

그 동안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민족들은 멸망해도 자기 민족만은 구원을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인 이방인은 물론이고 유대인들까지도 죄인임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몇 가지 반론들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 반론들을 대략적으로 논합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1-2)

 

로마서는 ‘복음’에 대해 소개하지만, 처음부터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먼저 소개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지만, 속에는 이방인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2)

 

앞에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죄와 심판 아래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성들이나 이방인 성도들 모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심판하신다는 주장을 듣고, 제기될 세 가지 질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비교했을 때,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다음으로 ‘우리가 불의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들어난다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해도 되는가?’ 등입니다.

 

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1)

첫 번째 질문인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입니다. 이 첫 번째 질문은 2장 17-24절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 아니다’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반문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은 할례나 혈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의 특권의식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외형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들만이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여겨왔던 내용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 일뿐, 몸에다 할례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⑵ 그에 대한 대답(2)

이제 이런 질문이 대두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는 자문에, 즉각적으로 ‘유대인의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깐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 언약의 후손으로 할례 받은 것이 하나도 유익이 없느냐?’는 이런 질문입니다. 바울의 즉각적으로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대답합니다. 절대로 유대인 됨이나 할례 받음이 무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할례가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책임을 맡겨준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유대인들이 소중한 존재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의 유익한 하나님의 일은 많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펼쳐 나가는 말씀의 통로이자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구약성경을 의미한 것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소유했다고 해서 저절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유리한 점입니다.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서약합니다. 출애굽 19:5-8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2:1-29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언약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언약(계약) 관계에서는, 한편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편은 자동적으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유지하십니다(참조 15:8).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참되십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하나님의 신성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성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유지하고 전달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존재할 이유(3-4)

빛이 어두움 가운데서 더 밝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인간의 불신실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변명의 의지가 없고, 하나님의 지혜는 그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결국 불순종하였음을 지적합니다.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유대인들의 유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인데,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 질문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3)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인 아브라함을 통해 온 민족이 복을 얻는 계획은 사라지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 말씀을 받은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하여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을 따라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사라지는 것이냐 라는 지적합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4a)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 때문에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약속을 깬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신다고 바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구절은 시편 51:4의 후반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칠십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4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시편 51:4)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며 지은 시이며, 51:4은 다윗의 신실치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더 쉬운 성경으로 살펴보면,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유죄 선고가 마땅할 뿐입니다. 주님의 유죄 선고는 옳습니다.’(새번역성경)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과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인간의 신실치 못함(다윗의 범죄)에 의해 뒤집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지만, 그 말씀에 대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실로만,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이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심을 확증시켜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킨 궤변(5-8)

인간의 하나님의 모든 길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불순종하면 이방인들을 통해서 사역해 나갈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상상도 못할 불경건한 생각이라고 할 것입니다.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5-8)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실패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결코 폐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불의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⑴ 불의하지 않는 하나님(5-6)

바울은 몇 가지 부가적인 질문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시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즉시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실치 못함과 범죄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사람들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더 악한 일을 해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불의하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이 범죄한 유대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⑵ 예상 가능한 두 가지 반론(7-8)

바울은 질문과 대화식을 통한 교육 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제기될 만한 추가적인 질문들을 먼저 던집니다. 5절에서 ‘언약의 파트너인 유대인들의 신실하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들어났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합당합니까?’, ‘유대인의 불신앙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를 질문에 파생되는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집니다. 바울은 ‘나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더 풍성히 드러내어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죄인처럼 심판하겠느냐?’(7)입니다. 심지어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8)라는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받았던 비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바울이 그런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설명한 복음은 악을 더 조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6:1,15). 이 단락에서 바울은 일단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의할 수 없다’(5,6)는 강한 부정만을 남기고 추가적인 논의는 뒤 단락으로 넘깁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8)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 분임을 다시 상기시킵니다(참고 6). 세상을 심판하실 분에게 불의가 있다면 그가 세상을 심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주제는 다음 3:29-30절에서 다룹니다.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사람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사람에게는 구원과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나면 진노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죄과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의로움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반박하기보다는 강한 부정을 하고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5:20-6:4에서 다시 이 문제를 자세히 거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궤변으로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냈으니,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방인처럼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궤변이요 억지입니다. 그리고 책임 회피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바울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율법 소유와 할례의 특권을 박탈한 다음, 3:1-8에서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답변합니다. 3:1-4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 안에 있는 유대인의 유익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3:5-8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방종주의의 위험을 취급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1-05)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결과

로마서 1장 24-32절


현대인의 삶을 보면, 굶주린 하이에나 무리와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죄악을 찾아 어슬렁거리며 헤맵니다. 아주 고상한 죄를 찾아서 죄악의 쓰레기통을 찾아다닙니다. 죄악만 들통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을 뒤진 짐승들은 음식물 냄새가 배듯이, 말하지 않아도 삶의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1:18)고 했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네 가지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방식 모두가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써, 그 진노가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세 가지는 현제적 심판이며,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일어나고 있습니다(24-31). 마지막 심판은 미래적인데, 사람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32).

 

더러움에 버려두신 하나님(24-25)

요즈음 문명이 발달하여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비닐로 열을 보호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철에 강한 바람에 의해 비닐이 걷히면, 식물은 얼어 죽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닐하우스처럼 보호받습니다. 하나님 아래 있으면 항상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손길을 거두시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복음’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포함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한동안 악을 심판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거나 악을 용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타협도 아닙니다.

 

⑴ 방치로 심판하신 하나님(24a)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어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바로 그 점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이 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신’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표현은 후렴처럼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1:24a; 26a; 28b).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면 하늘 날벼락 같은 혼쭐을 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임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 할 때, 하나님의 반응은 ‘버려두심(방치)’의 법칙입니다. ‘내버려 두심(παραδιδωμι)’은 문자적으로 ‘넘겨주다(hand over)’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⑵ 방치된 인류(24b)

‘어떻게 ‘방치(放置)’ 또는 ‘유기(遺棄)’가 하나님의 진노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치한 것이 좋지 않으냐?’,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으냐?’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깨닫지 못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b)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치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保護)’하심을 ‘간섭(干涉)’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들어 가게 그냥 방치해 두셨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의도한 대로 막대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니 하는 일마다 망할 짓이었습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부모의 간섭이 싫어서 가출한다고 전해듭니다. 부모의 보호로부터 떠난 순간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며,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합니다. 아직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시기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깐 대부분 가출 청소년들이 탈선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부양의 의무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녀들에게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충전 전자기기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 그 전원이 소진되어 방전되면, 아무 소용없는 일도 할 수 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불과합니다.

 

⑶ 진리를 거짓으로 변환(25a)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상태를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1)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들도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울은 ‘더러운 정욕’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되어버립니다. 브레이크 없는 차는 속도를 내면 낼수록 무서운 흉기로 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범하는 죄의 정도에 따라 더욱 부패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가장 불쌍한 성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18)

성도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을 방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⑷ 인간들이 버리려는 하나님(24b)

바울이 부정적이고 무거운 교훈을 하다가, 잠시 밝은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다시 짧게 설명합니다. 아무리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여도 인간이 어떠한 거짓 행위도 하나님의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영광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25b)고 찬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오직 찬양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버려두심으로 진노하신 하나님(26-27)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는 싹이 날 환경이 알맞으면 납니다. 싹은 성장하고, 시간이 흐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자연 순리의 ‘뿌려짐의 법칙’입니다. 사람의 행위도 그렇습니다. 선한 씨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씨도 뿌려면 반드시 그 열매가 맺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간 인간들의 특징은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대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탕한 삶에 ‘내버려두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내버려두심’, ‘방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를 때까지 악 가운데 방치 하십니다.

 

⑴ 방치된 인간들(26-27a)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들에게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성적인 욕망’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성적인 욕망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어할 수 없는 발정난 암나귀와 같습니다(예레미야 1:24).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 대부분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리인 성적인 윤리를 벗어납니다. ‘불륜’도 부끄럽지만, 본문에서는 ‘동성애’까지 거론합니다. 그래서 ‘성적 타락’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저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관계가 파괴됩니다. 첫 번째 관계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되고, 다음으로 ‘사람들과 관계 파괴’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순리대로 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신 처음 파괴된 예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동성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동성애’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여 ‘부자연스러운(역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이 만든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바울이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당시에 망령된 문화는 ‘동성애’을 용인하고 심지어 높이 기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죄인 줄 모르고 ‘동성애’가 합법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명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동성연애’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거나 창조하신 뜻대로 사는 형태가 아니라고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본보기로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 이방인 상류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문화가 이방인의 죄성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동성애’는 죄었습니다. 레위기 18:22-23에 이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목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죄는 아니지만 죽어 마땅한 죄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모습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동성애를 들고 있습니다. 정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은 동성애의 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자와 남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였습니다(26,27).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인격체로서 사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컷이 수컷의 관계로, 암컷과 암컷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⑵ 방치된 인간들의 결과(27b)

바울은 그들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질서를 교란하고 무질서하게 한 ‘상당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창조질서 가운데 있는 ‘관계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구원의 파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잃어갑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관계가 아니라 투쟁 관계가 형성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수고해도 열매를 제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만물과 관계 회복을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자신과의 바른 관계, 다른 사람과의 바른 관계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에 대해 온전한 인격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적인 문란으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이 세대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28-32)

모든 시대의 유혹은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하와에게 유혹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유혹을 허락하는 것은 성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죄는 사단에게 틈을 줄 때 생각이 들어오고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8-32)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길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하셨습니다. 방치되었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점점 빈집처럼 퇴락해 갑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⑴ 상실한 마음으로 방치(28b)

두 번째 진노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상실한 마음으로 두셨다’(28b)라고 표현합니다. ‘상실한 마음’이란 올바른 도덕적 결정을 내리기에 부적격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존해야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행동을 하기에 부적절한 마음입니다.

 

⑵ 산실한 마음의 결실(29-31)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개념도 없던 악덕의 목록까지도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비슷한 목록들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으로 참고할만한 성경들이 있습니다(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10-11; 고린도후서 12:20-21; 갈라디아서 5:19-21).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이 제목들을 읽어가다 보면, 벌레가 가득한 재래식 화장실 내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질서나 구조도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목록에 열거되어 있는 악덕들이 대부분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수많은 악행들이 사사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를 깨뜨리고 사회에 독을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고 근원입니다. 우상숭배는 악덕의 홍수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창조 세계를 무서운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 자기의 존재와 가치만 주장하다가 무차별하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⑶ 결론(32)

바울은 죄에 대한 결과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라고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들까지도 ‘하나님의 정하심’과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19).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일을 행합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두둔해 줍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간적인 불복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된 도적임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32절에서 21-31절까지의 모든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는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그래서 하나님도 무가치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들을 버려두십니다. 그들의 잔인성은 자신들뿐 아니라 타인들도 이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진실함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허망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 자신의 죄를 알 만한 것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인간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속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에도 한계가 있고, 기다림에도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2-03)


유대인의 불신앙

로마서 2장 17-29절

 


 

‘전문가적 변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에 더 타락하기 쉬운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의사이기에 환자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법조인이기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에 능숙하고, 목사이기에 말씀을 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비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 백성이 출현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율법(17-24)

신앙생활은 하다 보면 다양한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데 삶은 세속적인 상태로, 많은 영적 지식으로도 말씀대로 살지 않을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은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의 소유가 그들을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17-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증의 초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전혀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로마서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가장 잘 묘사한 소단락입니다.

 

⑴ 유대인의 자부심(17-20)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라고 지칭한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인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라고 하면서, 이제 이야기 주제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곳에 등장한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것’, ‘율법에 의지하는 삶’,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은 옛 언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 단락의 핵심 단어는 ‘율법’입니다. 2: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노모스’를 통해,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가 유대인들의 토라,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문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약과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갈라디아서 2:21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됨과 율법에 대한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과 같은 말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분간케 합니다. 바울은 17-20절 단락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다가 의도적으로 두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17)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서’(20)인데, 두 구절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속사 전체 속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되, 그 뜻을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인종적인 옷에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라는 자연히 구속사 속에서 시대적인, 문화적인, 인종적인 한계를 지닌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윤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적인 외피(外皮)를 벗겨내는 해석의 작업이 요청되었습니다.

19-20절은 이러한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비유, ‘맹인의 인도자와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입니다. 20절에서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⑵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모독 받으심(21-24)

21-24절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달라진 바울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21-22절은 율법으로 이방인을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유대인이 이방인과 동일한 도둑질, 간음, 이방 신전에 대한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23-24).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분명 다메섹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습니다.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도 무익하며(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할 것(28,29)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분리합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유대인들의 소명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럴수록 율법에 대한 열심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레위기 18:5). 다메섹 이전의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6)라고 생각하고 동족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2:21 이하에서 바울이 율법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가능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로움을 이미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 속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이 가지는 구속사적 기능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심지어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라는 한 사람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 구속사의 놀라운 성취를 깨닫게 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에 대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문제(죄, 사망)를 해결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계획을 이루기에는 율법이 턱없이 ‘연약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의 연약함’(8:3)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주신 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과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할례(25-29)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율법의 정신을 따르면 참할례 받은 자처럼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어떤 이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친숙한 면인 할례를 거론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 때부터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⑴ 진정한 할례(25-27)

25-26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율법을 범하지만, 정작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지키는 상황을 설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이후의 단락들에서 주어지는 바울의 설명 때문에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음을 밝히는데,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대로 그 노예 됨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소유하는 유대인에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음을 밝혀나갑니다.

 

⑵ 내면적 유대인(28-29)

25-29절 단락도 다메섹 이후 바울의 선이해가 반영된 진술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8: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이면적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28-29). 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프뉴마’, 곧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8장에서 다룰 성령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27). ‘판단’(27)과 함께 ‘칭찬’(29)은 종말적 심판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의 인 지심에 있습니다.

2장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마저도, 우리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2-02)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바울

로마서 2장 9-16절


 

오래전 제주 모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사회적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해보인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범죄로 인해 충격을 주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만한 분들이 신뢰와 존경을 잃은 행동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의 이탈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9-18)고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9-11)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지, 배타적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불신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9-10절은 7-8절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9절과 10절 모두에 등장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 언약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들이었음과,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7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삶’이 ‘영광과 존귀, 썩지 않음과 평화’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영광과 존귀’라는 표현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종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시편 8편의 약속이 ‘선을 행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 문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행위’는 로마서 1:5의 ‘믿음의 순종’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12-16)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거룩하고 위대해 보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말씀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2-16)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대화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은 그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배지 역할을 할 뿐,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행하는 자(12-13)

바울은 로마서에서 2:12에 이르러서야 ‘노모스’(율법)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닌 선민,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죄인, 이방인’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분을 벗어납니다. 2:1-11 단락, 나아가 1:18-32 단락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 ‘범죄하다’와 ‘심판받다’라는 단어는 12절에서도 사용되면서 12-16절 단락을 앞 단락들과 연결시켜줍니다.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한 자들은 모두 ‘망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마르타노’(범죄하다)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서서, 신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로마인들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단어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의인, 곧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단순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8-30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할 책임마저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이 중심이 되는 언약 체계 속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책임이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동사는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의로움은 16절의 ‘최후의 심판’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심의 법(14-15)

14-15절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라면, 10절과 함께,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신학적으로 그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10절뿐만 아니라 14-15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14절의 '본성으로'를 선행 구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날 때부터 (본성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에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2:27에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또한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14), 이를 15절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백성에게 임할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14-15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이 새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다가온 심판의 날(16)

15절의 내용은 16절의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을 증거 합니다.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율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달하려 합니다. 16절은 바울의 복음이 심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죄인들이 라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2-01)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로마서 2장 1-8절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나 처벌을 논의할 때, 매우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이 정죄된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하면서도, 쉽게 정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거룩하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치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논할 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에게 돌아섭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우월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판단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심판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1-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 또한 스스로 자기 기준에 맞추었을 뿐이지 그렇게 우수한 편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두 그만그만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다른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대들에게 경고합니다.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1-4)

 

지금까지 로마서 1:18-32까지 ‘이방인들에 대한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삶을 유지하면서 당시 만연한 도덕적 부패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초점이 이방인으로부터 유대인에게로 집중합니다. 먼저, 남을 정죄하는 도덕주의자들도 죄 아래 있으며(1-16), 다음으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역시 죄의 능력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17-29).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훨씬 더 낫다고 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조건으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1-2)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기준은 변함없는 진리로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약속의 백성이므로 구원을 받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멸망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앞에서 이방인의 죄와 심판을 논할 때, 유대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눈을 돌려 유대인들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1)라고 선언합니다. 이방인의 죄악을 지적할 때, 도덕적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죄악으로 범람한 로마 사람들을 보면서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 또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에게는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탈선을 혐오하며 정죄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이방인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내세우며, 자기들은 정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 속에 빠진 자들을 향해 자기기만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특히 도덕적인 이교도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정죄합니다. 사람들은 빈도와 한계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죄악, 또한 이방인의 죄악만큼 중합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 정죄했던 유대인들은 더한 것입니다. 도덕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비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발각되는 것을 모면해보려는 흔한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2) 진리로 판단하신 하나님(3-4)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신적인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진리(2:2-4), 공정함(5-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신을 ‘영’이시며(요한복음 4:24), ‘빛’이시고(요한일서 1:5), ‘사랑’(요한일서 4:8,16)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하나님’(시편 31:5; 이사야 65:15)이라는 소개합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중 하나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심판은 진리대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할 이 심판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핑계할’ 수 없고(로마서 2:1)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일 수 있고 자기 시대를 타락한 시대라고 정죄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역시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있었고,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의로운 척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삶 속에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유대인들의 행동은 가증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고 범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정죄하였던 정죄로 스스로 정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경고합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5-47)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인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암송하고, 금식과 길거리 기도도 하였고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십일조도 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나 음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정말 깨끗하게 경건한 성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강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반열에 설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바늘처럼 예민하고 냉혹했던 것입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족집게로 빼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판단(判斷)’이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판단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판단력,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판단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혹독하게 평하고 있는 ‘판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서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죄악이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저하지 않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판단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시기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있거나 무정함과 무자비함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尺)로 사용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준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먼저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5-8)

하나님께서도 혹시 잘못된 실수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으로만 가지고 평가하신다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문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본문에는 자세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왜 의로운지에 대한 언급하고(5),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점에서 의로운 심판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

 

우리가 당시에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과 반박하고 논쟁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변명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과 행동에 대해 정당화시키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를 감지한 바울은 단호하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1) 심판이 미루어진 이유(5)

바울이 주장한 심판에 관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상들을 다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심판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르신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아냥거리는 반론일 것입니다. 그런 질문할 사람들에게 바울은 반박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길게 참고 계신 것을 비웃고 있느냐? 그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실 것 같은가? 진노의 날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회개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로 용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계속될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바울은 ‘네 고집(문자적으로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때문이라고 아주 혹독하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까지 거대한 저수지와 같이 쌓아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멈춘 것은 잠시일 뿐이지, 결국에 진노의 뚝이 쌓아진 높이만큼 심판의 뚝이 터지면 강력하게 임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6-8)

바울은 시편과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게 그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6)입니다(시편 62:12; 잠언 24:12).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기준을 두고 공정하게 실행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냉철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사랑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죄를 범해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성도 중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인데 설마 심판하시겠어!’ 또는 ‘하나님의 자녀니깐 죄를 지어도 봐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심함으로 조건에 따라 봐주기나 용서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적인 혈통이나 많은 봉사 그리고 헌신으로 죄과를 덮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구제역 때문에 돼지를 살처분합니다. 살아있는 짐승들을 땅에 묻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짐승을 묻은 근처에서 지하수에 핏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죄악은 절대로 어떤 것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죄안에 머물러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만, 절대로 만족을 줄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죄를 쫓아가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당신은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살기를 바랍니다. 죄를 즐기는 삶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온갖 불의하고 추악한 일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3:15).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없거나 더딘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일과 무리에 동조하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처럼 그의 선한 모습을 닮아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