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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4)


이방인에 대한 심판 이유

로마서 1장 18-23절


 

한 환자에게 ‘당신은 암이지만 수술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병은 내가 압니다. 그냥 소화제 몇 약을 먹으면 금방 건강할 것입니다.’라고 고집부렸습니다. 주변인들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은 죄악이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썩어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손질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무한한 애정으로 믿음의 진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제 복음에 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왜 필요한지를 소개합니다. 사람들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분명히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체계적으로 ①죄의 정의 ②죄의 발단 과정 ③죄의 결과 등으로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이교 세계를 심판하시는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막음(18)

오늘날 현대인을 보면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누가 누가 더 죄를 짓는가?’고 경주하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죄를 자랑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대박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죄는 절대 자랑거리가 아니라 회개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죄에 대해 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소개합니다. 18절은 18-23절의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이것은 또한 17절과 대조되는 평행 구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의 표출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해 대적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죄를 거론하면 싫어합니다. 특히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싫어합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또 죄의 결과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듣고 싶은 내용뿐만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회개와 심판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17)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2:5). 구체적으로 그의 불의(不義)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진노의 대상은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남”으로, 누구도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지만,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노의 대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모든 자에게 임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개인적인 의의 표현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대결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며.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수많은 종교가 많이 있는데, 기독교만 완고하게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비방하는 사람들은 ‘경건치 않고 불의’합니다. ‘경건’의 의미는 ‘신성한 존재 앞에서 절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불경건’이란 ‘마음에 경배의 대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사람 대 사람의 실수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도덕적 차원에서 죄를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수라고 정의합니다. 즉, 죄를 영적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자마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란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하지만,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건치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의인 줄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용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자세하게 다루십니다. 죄가 무엇이며,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알면 치료법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을 알아야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만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지만, 제시해주신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것은 죄악입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바르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의는 야고보 사도에 의해 제대로 정의가 되었습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6-27)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날마다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사람이나 물질에 대한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물질이나 사람들과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정작 내면에는 불의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를 행하지는 않지만 불의를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언행이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이하지 않는 죄악(19-23)

봄철에 만발한 꽃을 보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안했지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하면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만물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를 집어넣어 놓으셨습니다.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9-23)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은 피조 세계에 나타나 있고, 누구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다루는 구원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계시’라고 불립니다.

 

⑴ 능력과 신성을 인간에게 밝히 드러내심(19-20)

바울은 인간이 우상숭배자로 전략하게 된 과정이 잘 지적합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생득적 지식’과 자연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로 구분됩니다.

① 생득적 지식

먼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생득적 지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태어날 때부터 주셨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깊은 세계에서 절대자를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라도 위기에 봉착하면 ‘아이쿠 하나님!’하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세상 어디를 가 봐도 반드시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인간과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짐승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예배합니다. 사람들은 순간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진정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② 일반 계시

다음으로, 인간은 자연 만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사시사철을 하나님 능력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면 싹이 오르고,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식을 공급해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살펴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한 번도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여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드러냅니다. 시편 기자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편 19:1-6)

 

이처럼 만물은 소리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 합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의 광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⑵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21-22)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보다 못하고 천한 미물(微物)들을 신으로 경배한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다. 종종 대학교 컴퍼스 안에서 건물이나 기계를 구입해 온 후에, 교수란 사람들이 기계나 건물이 잘 사용되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학식과 문명이 있는데, 지금까지 신(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느냐?'고 고상한 척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종교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신(하나님)이 될 수 없는 미물들에게 경배하고 있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사람의 양심과 자연 만물 속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웅장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경배하는 종교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연을 경배하는 신앙을 ‘샤머니즘(shamanism)’이나 ‘범신론(汎神論)’라고 부릅니다. 자연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들어 있지만, 그 자체가 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만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을 가지고 경배하니깐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습니다.

 

⑶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 인간(23)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우상숭배자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만들어 그것들을 경배합니다. 우상의 대상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짐승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벌레들까지도 경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천지 만물 속에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기중심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셔서 받았을 분 그것은 과분하고 형언할 수 없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감당할 것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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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3)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이유

로마서 1장 16-17절


종교개혁자 루터는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살리라’라는 ‘이신칭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은 다양했습니다. 문학 석사학위를 받기하고, 법률학 수료했고, 엄격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헌신적으로 신학 공부해서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영혼을 만족시킬 순 없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인 ‘이신칭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본문은 2절이지만 로마서의 전체 주제를 담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긴장과 흥분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의에 가득 찬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복음 안에 있는 의, 믿음, 삶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선물로 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며 영광스럽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소극적인 측면: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16)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복음입니다. 믿음으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립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죄인이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많은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장본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볼 때 그들의 유대교의 신앙을 기준으로서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든가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핍박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한 배경이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로마 시대이며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에 속하였던 것입니다. 즉 유대 나라나 유대인들은 속국으로서 천대를 받았었습니다. 로마는 모든 정치, 경제, 지식과 철학 등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피지배국인 유대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기독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로마에서 활동한 학자들이나 지배계층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향해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다!’라고 조롱했습니다. 당시 헬라-로마를 중심으로 지식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증거가 있는 지식을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잘 설명해 줍니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22-23)

 

그 당시 사람들은 헬라의 화려한 학문과 로마 강력한 무력 앞에 위축되었습니다. 헬라 사람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했고, 로마 사람은 군사력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우월성을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로마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힘만이 진리라는 ‘힘의 철학’을 주장했습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 철저하게 순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힘의 논리’ 앞에서 복음(福音)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발생지는 로마가 점령한 작은 유대에서 왔으며, 대부분 기독교인은 엘리트가 아닌 약한 사람이나 노예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사형당한 예수님은 자랑거리가 아닌 수치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고, 로마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바울은 그런 조롱을 마음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에 대해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인 복음에 대한 확신했습니다. 그는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분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행 9장).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b)고 주장합니다. 당당하게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헬라인 앞에서나 권력을 자랑하는 로마인들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당당하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로마는 그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인류의 죄와 죽음의 세력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결하지 못했던 인류의 죄악이 발흥(發興)하였고, 강력한 로마는 점점 타락해져 결국에는 로마까지 멸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새로운 소망을 줍니다. 바울은 몸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능력입니다(살전 1:5).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떠한 사악한 죄인, 더럽고 추악한 삶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영국은 해적의 나라에서 신사의 나라가 되었고, 해적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가 변화하여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온갖 가난과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살았지만, 복음이 들어온 지 120년 만에 세계에서 10대 강국으로 변했습니다. 복음이 생활의 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영혼을 변화시켜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복음이 나타나는 영역(16b)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습니까? 한 가지 알 것은 이것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시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거룩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

 

복음은 단순하게 유대인이나 몇몇 사람에게만 전파될 폐쇄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구우너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칠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그 명령을 따라 전 세계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인 도마는 인도로, 시몬는 북아프리카로, 요한은 복음 전하다가 밧모섬로,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제자들 역시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 당했습니다.

복음 전파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울은 순서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6c)라고 합니다. 복음이 우연히 유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진행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유대인으로부터 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먼저 받아야 할 특혜를 누려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방인,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 전파의 순서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진행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좋은 소식은 유대로부터 시작하여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복음이 당신에게까지 임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당신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복음을 전달해야 할 차례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복음에는 당신이 모르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한 복음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없는 곳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에게 복음의 주자로 배턴을 넘겨주셨습니다. 복음이 당신에게 멈추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에 빚진 자의 자세로 기회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곳을 향하여 어디에나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곳이 당신이 사는 근처일 수 있습니다. 또 더 나가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같은 이방 민족들에게 선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영역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인 측면:복음은 구원의 능력(17)

이러한 복음에 어떠한 능력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성도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에게서 온 의’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사형선고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에게 무죄 석방을 선언함으로 살려주신 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믿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인 상태로 태어납니다. 죄인 상태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의를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로지 믿음뿐입니다. 이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4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 있는 빌라도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정오에 태양 빛처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의 심령에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내린 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가는 사람들에게만이 구원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새롭게 탄생함을 느꼈고, 열린 문을 통해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대답해 줍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복음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실 의무가 없을 때조차도 얼마나 큰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단순하게 용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큰 희생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죄인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심판과 정죄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죄인의 사랑을 압도할 만큼의 큰 사랑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큰 영서와 자비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소식입니다. 죄인을 변화시키고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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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01-02)

 


로마를 위해 기도한 바울

로마서 1장 8-15절


한 신학자가 기독교의 성격을 ‘사도 바울의 열정은 식고, 차가운 가슴만 남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학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영적으로 뜨거운 분위기로 돌아 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초대교회처럼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정적인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판단하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열정은 식고 냉철한 가슴만 남습니다. 복음의 맛본 사람들을 보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의 마음은 열정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에 불타는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음에 대한 열정의 온도는 몇 도입니까?

 

바울은 공식적으로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그는 로마교회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소원을 표현합니다. 오래전부터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꿈을 꾸었습니다(행 19:21). 동시에 당장 로마에 달려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가는 대신에 편지로 복음 전하는 것을 돕고 싶었습니다. 본문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감사(8)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확실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 헌신의 정도가 커서 모든 곳에 전파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비열하며 오염되고 부패하더라도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견고하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8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바울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말하며, 세계의 수도이며 세계의 심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도 모든 주변으로 펴졌습니다. 지리적으로 로마가 중요한 만큼 로마교회도 중요했습니다.

 

로마는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권력과 물질을 가진 지배계급에는 살만한 곳이었지만, 일반인에게는 대부분 열약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노예 생활하고 있었으며, 일반인은 대부분 노예이거나 종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인은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식량도 충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생계형 범죄가 가득했습니다. 로마의 생활은 불안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모두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특히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고달픈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굳건히 서 있었고 흔들림 없었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하게 명맥 상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뿐만 아니라 매우 신실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세상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문이 얼마나 퍼졌던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도 로마 성도를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들로 인해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더욱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부터 성도들의 칭찬이 자자하니깐, 어디서나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 사역자라면 복음을 더 잘 전파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실에 매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알려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그들을 위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바울의 격려 편지에 자신들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2). 그것도 유명한 바울이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알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많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지만 우리 주변에 이름도 없이 선한 영적 전쟁하다가 지치고 넘어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지도자가 아닐지라도 그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시길 바랍니다. 그 위로가 그들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위로에 한마디로 그들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한 수고들이 부흥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할 목적(9-13)

믿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은 매우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해야만 하며, 전 세계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루에 몇 분만 하거나 친한 사람들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13)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신실한 믿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중보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⑴ 간절한 바울의 기도(9-10)

바울은 먼저 사역에 앞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 사실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유명한 교회 지도자인 바울에 대해 소식을 듣고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역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는데, 하나님께 그런 기회를 계속해서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역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증인이시라고 말합니다(9). 그래서 그는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여행하여 그곳의 시민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인해 얼마나 큰 자극을 받았는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0).

바울의 기도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항상 선교지에 대해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각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엡 1:15-16)이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빌 1:3-4)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살전 1:2-3) 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 다른 제목은 항상 로마로 나가길 원하는 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10).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로 나가는 길은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길이 막혔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로마의 문이 열릴 것인지 몰랐습니다. 언제나 실망하지 않고 로마의 길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간절하다 못해 뜨거운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선교사의 모습이 아니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행 28:16).

바울이 간절히 로마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화려한 문명이 있으므로 도시 문화를 관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그 명령이 무엇입니까?

 

18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19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19)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평생 동안 충성스럽게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습니다(행 9장). 평생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땅끝인 서머나(현 스페인)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로마를 통해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⑵ 로마 방문할 목적(11-13)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 싶은 목적이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고 있는 로마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를 나누어주길 원했습니다. 이 ‘신령한 은사’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상한 은사나, 성령에게서 나오는 초능력적인 어떤 능력도 아닙니다. 이는 자주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언급하는 것입니다(롬 12:6-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영적인 선물인 복음의 진리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전해주길 원했던 것입니다(11).

다음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 로마 성도들과 바울이 서로 안위(위로)를 주고받기 위합니다(12).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이나 경시하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주는 능력이 될 수 있고, 큰 실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만 위로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듣고 성장하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전하는 목회자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집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구나!’하는 성령의 위로가 넘칩니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 서로 위로를 받고, 그들에게 열매를 맺게 위함입니다(13). 이 열매는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심령의 변화입니다(갈 5:22-23). 내적인 열매가 맺어지면 외적인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는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서 성장하여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빌 1:22, 골 1:6).

변화된 당신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라고 물어 올 것입니다. 그때에 ‘난 하나님을 믿어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믿으시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믿어 보시죠?’라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당신처럼 믿게 되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바울의 기도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수고했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무엇을 하시길 원합니까? 또한 당신이 지금 뜨겁게 기도하는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항상 선교지를 향한 기도합니까? 복음을 위해 수고하신 선교사님을 들을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영적인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선교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합니다. 선교사님들을 돕는 방법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작은 일같이 느끼겠지만, 선교사님들에게 목회에 관한 월간지나 사모님들에게 여성 월간지를 보낸다든지, 선교사의 자녀들에게 한국 방송을 녹화해서 보낸 것도 선교를 감당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수고이지만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할 계획(14-15)

우리는 살아가는 힘을 어디서 얻고 있습니까? 세상 것들로부터 얻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을 세상에서 찾는다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복음에서부터 찾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빚진 자로서 절박한 생각이 그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

 

바울은 구원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빚진 자의 의식을 깊이 느꼈습니다. 복음으로 ‘빚진 자’의 심정과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준비된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매우 깊이 자신이 복음에 빚졌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강렬했고 흔들림이 없었으며 꾸준하고 강력한 의식이었습니다. ‘빚진 자’의 의식은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세계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14). 만일 그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 세계에 대해 자신이 복음에 빚졌다는 것을 어떻게 선언했는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을 대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민족과 문화, 문명화되었든 되지 않았든, 산업화되었든 원시적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할 것 없이 지구상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14). 그는 지혜로운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대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는 교육받은 자나 받지 못한 자, 학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자발적 의지와 긴급성 느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을 주목해 보면,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취하여 그것, 즉 모든 에너지와 노력, 복음의 모든 진리와 지식을 사람들에게 부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메시지에 영향을 주는 어떤 장애물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하는 각오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단순히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넘어서 당시에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버나(스페인)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대상은 특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예외일 순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라고 합니다(14).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에게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침략한 조국 유대의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복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비유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종교의 장벽, 국가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복음에 대해 열정적인 빚진 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린도전서 9:16)

 

이러한 선교의 자세는 자신의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진 것을 알았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모데전서 1:16-17)

사도 바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할 때, 먼저 외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기회를 놓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한 일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간절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온도가 몇 도나 되십니까? 현대인들이 회복해야할 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향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원수까지라도 구분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참 맛을 본 사람은 복음에 불타오르며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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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01-01)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1장 1-7절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명함을 나눠서 자기 소개합니다. 일부 명함에는 여러 직함을 빼곡하게 소개되어, 본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거짓된 내용들을 기록했다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의 기록자인 바울은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신을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종 바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를 따라가다 보면,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아름다운 명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서가 마칠 무렵에는 멋진 명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한 번 기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로마서는 성경 중에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읽고 회심과 개종으로 거룩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몇 가지 예로, 탕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 루터(Luther)에게 개혁의 불씨를 당겼고, 평범한 청년인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부흥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책입니다.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에는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역사를 바꾼 강력한 책이었습니다. 로마서는 당신도 확실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기 소개(1,5)

로마서를 기록 당시에 ‘복음’을 의미하는 ‘유앙겔리온’은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앙겔리온’을 통해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

 

바울은 당시 일반적으로 편지를 쓰는 방법을 따라서, 먼저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자신을 세 가지 직분으로 나열하며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다음으로 ‘부르심 받은 사도’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1) 구체적으로 기록해야할 이유(1a)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신앙을 독려하는 편지들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이 문서들은 마치 위경이나 외경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거짓 또는 위작 문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서에는 대부분 거짓된 주장과 이상한 교리들이 난무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일반인들이 진리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로 복음을 증거 하면, 복음의 내용 또한 불확실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목적은 이 서신이 사람의 편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도록 권고하기 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자신을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로마 교회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바르게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구체적인 직분 내용(1b)

로마교회는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디아스포라 로마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서 로마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는 기독교들의 성장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시민권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킵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 중심으로 교회는 형성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남아있는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바울은 방문해 본적도 없는 로마 교회를 향해 자신을 소개합니다.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매우 격식을 갖추어 소개합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엄청난 특혜를 가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다소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고(사도행전 22:25-28), 다소에서 성장하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대학보다 명망 높은 다소 대학을 다녔고(사도행전 22:3),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건너와서 유대인으로서 랍비 가말리엘의 지도 아래 율법을 정통으로 공부했습니다(사도행전 22:3). 그 결과로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으로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서신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자랑거리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당시에 ‘종(δουλος)’이란 정말 혐오감을 일으키는 단어였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버리고 혐오스러운 종으로 전환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변화된 사건을 사도행전 9장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는 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핍박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와 같은 사람들을 돌을 들었고(사도행전 7:58-8:1), 다메섹(Damascus)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되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삼층천 하늘에 올라가서 천국의 찬란함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2-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서 버렸습니다(빌립보서 3:8).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정”되었다고 소개합니다.

➁ 사도로 부름을 받음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고린도전서 9:1), 그 분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고, 복음 선포 사명을 평생토록 수행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마태복음 28:16-20; 요한복음 20:21-23; 사도행전 1:8; 로마서 10:14-17). 따라서 사도는 특별한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지상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다녔던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신이 사도라는 주장은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1; 고린도전서 9:1-2; 15:9-11).

 

(3) 구체적으로 소개한 이유(1c)

바울이 자신을 분명히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분의 근원을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5)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전해왔던 복음이 인간적인 권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사역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차라리 사단들이 이단의 얼굴을 가지고 나오면 분별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가짜들이 진리보다 더 진리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도들로부터 노략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당신이 바르게 설 수 있는 것은, 먼저 당신의 참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기 자신의 이해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나 복음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건전한 자아 형성할 때 자신의 삶 속에 확신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인격 형성은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당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을 유혹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2-4,6)

사도 바울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얻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열정과 생명까지 담보로 하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2-4,6)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정리해 보면, 2절 앞과 4절 끝부분을 통해 “이 복음은 ……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주춧돌이며 복음의 중심 주제이고 이 땅 위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이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 땅 끝까지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흑암 속에 헤매는 자들에게 비취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8:12, 9:5). 죄악에 굶주린 자들을 위한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요한복음 6:48).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주춧돌이며 복음의 중심 주제이고 이 땅 위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이라는 증거를 세 가지로 증명해 보여줍니다.

 

⑴ 오래전 하나님의 약속(2)

첫째는 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부터 가장 먼저 약속합니다.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그 후로도 수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3). 구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으로 직접적으로 350번, 간접적으로 100번 이상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도 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은 소개하겠습니다.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서 9:6-7)

 

이 약속에 근거하여 신약 성경의 첫 성경에는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혈통)’이라는 것은 다윗의 가문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예수님의 족보지만 다윗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번째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4)라고 소개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막을 내렸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 증명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시인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올바르게 대답한 사람들만이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신 사랑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 인격적인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며,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종종 주변에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위대한 성인(聖人) 정도로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론과 학문 그리고 학설까지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지식과 경험 그리고 상식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제시한 네 가지 증거들을 살펴봄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 망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서신을 받을 성도(7)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을 믿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은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삶이나 모든 역영에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도 그들을 향해 ‘성도(saint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원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바울이 당시에 사용한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를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성도(하기오스)’란 단어는 ‘거룩한 예식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교회 구성원에게 쓴 것은 ‘세상의 죄악들로부터 특별하게 구별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본문을 통해 성도의 자격을 정의해 보면, 첫째 소유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둘째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그들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인정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에 주인 되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법은 각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영접하는 방법이 달라도 한가지만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들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와 평강이라고 말합니다(7). ‘은혜와 평강’은 같은 의미인데, ‘샬롬(shallo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평강’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단어로 다른 이들에게 인사한 의미는, ‘약속의 가나안 땅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되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 성취를 기원한 인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도 동일한 말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19-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 하셨던 것들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커 보인다 할지라도,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서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주님께 맡김으로 인해 평강을 누리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유대인인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명함에 ‘예수 그리스도 종’과 복음 전하는 ‘사도’라는 직책을 동시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고 열정적으로 뛰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한 열정적인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명함에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적어 넣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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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개론《

 

기독교 신앙에서 로마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바르트 등등-이 로마서를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로마서를 언제부터가 정복해야할 큰 산으로 여기고 ‘어려운 서신’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를 둘러싼 신학적인 논쟁들이 로마서를 근접하기 어려운 서신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서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접하면 ‘로마서’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서신’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의 저자

이 로마서가 바울의 서신이란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의 오묘한 진리로 이끌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

⑴ 내적 증거 :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자임을 로마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1, 11:13, 15:15-20을 보면, 바울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⑵ 외적 증거 : 외증으로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편지, 폴리갑(Polycarp)의 편지, 히포리투스(Hippolytus)의 ‘이단비판’등에서 로마서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로마서의 저작 장소

주후 57년 겨울,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을 끝마칠 무렵인 고린도에 3개월간 체류하는 마지막 때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사도행전 20:1-6). 사도 바울이 겐그레아 출신의 집사인 뵈뵈를 추천하는 것을 보아서 고린도의 겐그레아 근처에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기가 쓰고 있는 글로부터 교회 전체의 주인인 가이오의 문안인사도 함께 보내고 있는데, 가이오는 고린도에서 두드러진 성도였습니다(16:23). 서신을 쓰고 있을 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연보를 가지고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57/58년의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로마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로마서의 수신인

본문에서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1:6)로 보아서 수신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설립자는 아니지만, 1세기경 로마에는 유대인만 40,000-50,000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귀의한 것을 보고 바울사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에는 누가 전도하지 않았는데 이미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10에 따르면 오순절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의 저작 연대

로마서의 기록 연대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57/58년 겨울이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 3개월 머무는 동안에 기록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전달하려는 중이었습니다(로마서 15:25-27). 바울은 이 헌금의 중요성을 고린도전후서에서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후 얼마 안 되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로마서 기록 동기와 목적

루터의 제자 멜랑히톤은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설명에 해당합니다. 로마서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는 이들은 서신의 가운데 단락인 1:16-11:36을 중요시 합니다. 한편, 점점 많은 학자들은 로마서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 기록된 서신이라 점에 동의합니다. 여기에서는 1:1-15과 12-16장 단락이 강조되고, 그 배경 속에서 1:16-11:36을 이해하려 합니다. 언뜻 서로 상반되어 보여는 두 가지 입장은 충분히 조화가 가능합니다. 즉,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제시가 필요한 구체적인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따르자면 그 구체적 상황은 세 도시, 즉 서바나, 로마, 예루살렘이 바울의 선교 계획 속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의 신학적인 특징

로마서의 특징은 서신이라기보다 논문 같은 인식이 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罪(죄), 震怒(진노), 사망, 율법, 義(의), 稱義(칭의), 신앙, 생명, 소망, 할례, 이스라엘 등 신학적인 용어들이 나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서신 중 신학 논문에 가장 근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서신과 달리 어떤 직접적인 문제, 긴급한 환경, 현재의 잘못, 위협적인 위험 등 그가 편지하는 교회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직접적인 주위환경과 동떨어져서 바울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조직적인 설명에 가까운 것입니다. 로마서의 제마는 1:16,17에서 말하듯이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5:1)입니다. 즉 로마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죄인을 위하여 율법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로마서에는 믿음, 율법, 모든 사람, 죄 등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주요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낱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즉 로마서는 구원론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인 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내용 분해

제1부 : 하나님의 의의 계시/1:1-8:39

Ⅰ. 머리말/1:1-17

1. 인사말/1:1-7

2. 바울의 관심사/1:8-15

3.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1:16,17

 

Ⅱ. 정죄 :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1. 이방인의 죄/1:18- 32

⑴ 정죄의 원인/무지/1:18-23

⑵ 정죄의 결과/ 하나님의 유기/1:24-32

2. 유대인의 죄/2:1-3: 8

⑴ 진리에 따른 심판/2:1-5

⑵ 행위에 따른 심판/2:6-10

⑶ 공평한 심판/2:11-16

⑷ 율법을 지키지 않음/2:17- 29

⑸ 약속을 믿지 않음/3:1- 8

3. 전 인류의 죄/3:9-20

 

Ⅲ. 칭의 : 하나님 의의 전가/3:21-5: 21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3:21-31

2. 의의 예증 : 아브라함/4:1-25

⑴ 행위와 무관함/4:1-8

⑵ 할례와 무관함/4:9-12

⑶ 율법과 무관함/4:13-15

⑷ 믿음에 의함/4:16-25

3. 의의 결과/5:1-11

⑴ 하나님과 화평/5:1,2

⑵ 환란 중에 기쁨/5:3-8

⑶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윈/5:9-11

⑷ 의와 정죄의 대조/5:12-21

 

Ⅳ. 성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6:1-8:39

1. 성화와 죄/6:1-23

⑴ 죄에 대해 죽음(원리)/6:1-14

⑵ 죄에 대해 죽음(실천) /6:15-23

2. 성화와 율법/7:1-25

⑴ 율법에 대해 죽음/7:1-6

⑵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는 율법/7:7-25

3. 성화와 성령/8:1-11

⑴ 육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성령/8:1-11

⑵ 양자의 권세를 주시는 성령/8:12-17

⑶ 장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성령/8:18-30

⑷ 승리를 보증하시는 성령/8:31-39

 

제2부 :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9:1-11:36

Ⅰ. 이스라엘의 과거 : 선택/9:1-29

1. 바울의 슬픔/ 9:1-5

2. 하나님의 주권/9:6-29

 

Ⅱ. 이스라엘의 현재 : 유기/9:30-10:21

1. 행위로 의를 추구함/9:30-33

2. 그리스도를 거부함/10:1-15

3. 선지자를 거부함/10:16-21

 

Ⅲ. 이스라엘의 미래 : 회복/11:1-36

1. 이스라엘의 부분적 유기/11:1-10

2. 이스라엘의 잠정적 유기/11:11-32

⑴ 유기의 목적/11:11-24

⑵ 회복의 약속/11:25-32

3.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찬양/11:33- 36

 

제3부 : 하나님의 의의 적용/12:1-16:27

Ⅰ.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의무/12:1-13:14

1. 하나님에 대한 의무/12:1,2

2. 교회에 대한 의무/12:3-8

3. 사회에 대한 의무/12:9-21

4. 권세에 대한 의무/13:1-7

5. 이웃에 대한 의무/13:8-14

 

Ⅱ.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자유/14:1-15 :13

1. 성도의 자유(원리)/14:1-23

2. 성도의 자유(실천)/15:1-13

 

Ⅲ. 맺는 말/15:14-16:27

1. 편지 쓴 목적/15:14-21

2. 여행 계획/15:22 33

3. 개인적 인사말/16:1-16

4. 끝맺는 교훈과 축복/16: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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