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로마서(08-04)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장 28-34절


어렸을 때에 한 번쯤은 ‘내 엄마가 진짜 엄마인가?’라는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할 때 가장 확실한 대답은 부모님이 ‘너는 내 자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를 낳을 때, 얼마나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축복했는지 아니?’라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합니다. 영적으로도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녀임을 확신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처럼 모든 만물들이 회복되는 것을 원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보면, 세상을 점점 멸망 길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으로 살펴보면, 정점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어 갑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성도들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선을 이루는 비결(28-30)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장래에 대해 긍정적 확신을 갖고 인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준비하신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일 수도 있고, 삶 가운데 탄식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해피엔딩’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8-30)

이번에는 성령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십니다(28). 교회에서 성도를 위로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미와 아직’ 과정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조물이나 성도의 탄식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선(善)’은 29-30절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과정을 뜻합니다. 성도에 대해 하나님의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게 하심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한 진행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는 미리 아심과 정하심인데,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또 다른 자녀가 되어 그분의 가족을 형성합니다. 이런 계획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복음을 통해 그 과정 안으로 성도를 부르고 의롭게 하는 현재 과정을 거쳐 장차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함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은 (1) ‘이미와 아직’ 과정 속에서 당하는 성도의 고난도 이런 구원 과정의 일부이며, (2) 성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자를 향한 구원 과정을 끝까지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구원 과정을 완성하실 것이기에 그 과정에 신실하게 붙어 있는 자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미래를 경험할 것입니다. 성도는 혼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새 언약 관계 안에서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으며(참고,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중보기도[34]), 그 관계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구원 과정을 완성하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고통과 탄식이 없을 수 없지만, 관점을 바꾸면 성도의 현재는 새 언약 백성의 의무이자 자랑이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동행입니다.

 

담대한 결론(31-34)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우리의 신앙고백도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1-34)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날까지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 닮은 형상으로 빚어가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 몰아넣고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게서 우리를 위하시니 걱정 없습니다.

(1) 도입 질문(31a)

구원 영역에 속한 성도의 삶을 성령을 중심으로 설명한 바울은 여기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해 다룹니다. 일련의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미와 아직’의 시간 속에 이중 정체성으로 사는 성도의 탄식과 그에 대한 미래 소망과 신적 도움을 설명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었습니까?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8장 앞부분 내용에 근거하지만, 5:12-7:25에서 설명한 어둠과 빛의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구원 과정과 1:18-5:11에서 상호 작용 과정으로 설명한 구원 과정과도 관련 있습니다.

(2) 구원의 법정적 차원에 대한 설명(31b-34)

구원의 확신에 대한 본격적 설명을 진행합니다. 첫 주제는 성도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우선 이런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본문의 상황은 죄와 죽음의 영역과 사탄의 영향력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이런 세력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지만, 완전한 승리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 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이 세력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인데, 그 영향력은 사람보다 강합니다. 특별히 사탄은 거짓으로 성도를 미혹하고 정죄와 고소로 흔드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고,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 또한 사탄처럼 성도를 고소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자 역시 자신의 연약함으로 외적 정죄와 반대 상황에서 스스로 주눅 들거나 위축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와 아직’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실재입니다. 둘째, 여기서 말한 상황은 성도의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 과정 안에 있는 성도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6:11-14 에서 몸의 지체들을 죄에게 종으로 내주지 말라고 명령한 것도 이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성도가 죄를 짓는 상황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빛의 새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고 살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구원 과정에 참여했기에 무슨 행위든 다 용서된다고 말하는 방종의 삶에 대한 면책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잘 사는 성도에게 힘을 주기 위한 설명입니다. 정죄와 대적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문답식 대화법으로 제시됩니다. 가상 대화 상대자와 주고받는 형식 대신 바울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인데, 세 가지 차원에서 답합니다. 첫째,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31).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기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의 적절성과 신뢰성은 하나님께서 최종 심판자요 권위자라는 점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를 대적하거나 반대하지 않기에, 성도에 대한 다른 피조물의 태도와 반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또 다른 수사적 질문으로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것입니다. 4:25은 ‘내어주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데, 4:25이 수동태를 통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과정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과정의 주체로 제시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속죄(화목)제물입니다(3:25-26; 8:3).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게 할 정도로 성도 편인데, 누가 감히 신자를 대적해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분은 아들까지 주셨으니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성도에게 기꺼이 은혜로 주실 분입니다(32). 둘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구원 과정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하는 과정을 거쳐 영광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고(29-30),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32절에서 말한 것처럼 아들을 내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의롭다고 평가한 자를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33)? 셋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앞의 두 경우는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 과정을 소개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3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을 통해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확증하고 죄/죽음/사탄의 통치에 대한 승리를 선포했습니다(참조. 4:25).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뜻이자, 성육신 이전의 원래 지위와 영광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어둠의 영역의 완전한 복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차 재림과 심판으로 모든 구원 과정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께서 성도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설명을 몇 가지 요소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모든 상황은 정죄와 고소를 중심으로 한 법적 차원에 대한 것입니다. (2) 문제 해결의 근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사함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모든 죄와 그로 인한 정죄와 심판을 완전히 처리한 과정이기에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한 성도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마치 변호인처럼 혹은 재판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성도 편에서 성도를 옹호하고 깨끗함을 확증합니다. 그분들은 ‘우리’ 편입니다. (4) 그렇기에 성도는 사탄을 위시한 세상의 정죄나 자책감에 눌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의 관계 차원에 대한 설명(35-39)

깊은 수렁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한 적은 고통이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

성도의 구원 확신에 대한 두 번째 설명으로 이번에는 관계 차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신자가 치한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성도를 두렵게 만드는 두 가지 외부 환경을 배경으로 하는데, 먼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움들입니다(36). 다른 하나는 사망이나 생명, 천사나 권세자들 같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 영적 영역이나 세력들입니다(38-39). 이 모든 환경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회복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도 편에서는 ‘이미와 아직’의 구원 과정 안에서 주를 위해(36)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상황의 성도에게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신적 사랑의 확실성입니다. 그는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씩 제시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수사적 질문과 답을 통해 먼저 소개합니다(35-37). 누가 ‘우리’를 메시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환란이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하는 환경이 그것을 끊을 수 있습니까? 비록 시편 4:22처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음의 위협에 처할 수 있지만, 성도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통해 넉넉히 이깁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내가 확신한다’ 표현을 통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39). 바울의 해결책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환경은 다 피조물입니다. 비록 사람보다 강하지만, 창조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예수님의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했고(5:8; 8:32), 아들은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5:6,8).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는 언약 관계의 의무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신실한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 한, 성도를 향한 그분들의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시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자기 백성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에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협 칼 능력 힘 권세 하물며 천사라고 할지라도 성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 앞에 대장부처럼 당당하게 서시길 바랍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성도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뢰하며 찬양하는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8-03)


영광을 기다린 탄식들

로마서 8장 18-27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6)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열매를 기대하면, 소망을 가지는 삶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은 앞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지만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희생이 무엇이며, 또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뜻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탄식하는 피조물(18-22)

어떤 분이 ‘고난은 지나가고 것이고 영광은 머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맞은 말입니다. 고난은 언젠가는 아침 안개와 같이 지나가게 될 것이고, 고난을 통한 영광을 삶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8-22)

이전 단락의 마지막 절에서 대조한 ‘성도의 현재적 고난’과 ‘미래적 영광’이라는 주제를 이어 받습니다. 다시 ‘영광’이라는 주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본 다락의 주제는 성도가 이를 미래적 구원의 영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⑴ 성도를 위해 준비된 영광(18)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는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고난을 통해서 시험과 연단을 받을 때, 온전한 자로 설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영광은 결합될 수 있습니다.

⑵ 피조물 탄식과 구속에 대한 기다림(19-2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를 영광의 소망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피조물까지도 구속에 참여하게 될 것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9)고 소개합니다. 피조물들도 썩어져 가는데서 피조물들의 영광도 회복될 그날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렸습니다. 이 아들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로 칭했습니다(8:14,16). 하나님의 아들들은 새 언약의 약속을 따라 성령이 내주하는 새로운 인류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고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피조물의 회복이 이루어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던 시간에는 만물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모든 동산이 에덴동산과 같이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으로 사람들이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까지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보겠습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6-19)

이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물들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당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주 중에서 피조물에 대한 저주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내리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인 자연의 탄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탄식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오로지 물질만능주의로 피조물을 통한 이익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갑니다. 만물의 영장이면서 이제는 만물에게 지배를 받는 종으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조물은 더욱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의 탄식은 자연 이변이나 지진 그리고 해일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이사야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때, 자연 만물도 그 해방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건하고 있습니다(이사야 35:1-2, 6-10; 41:17-20; 44:23; 55:12-13). 즉 선지자는 자연 만물이 누릴 미래적 회복과 영광이 하나님 백성의 해방과 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 포로 됨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이를 그때에, 자연문물도 그 영광에 함께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만물의 대표입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원래 원리대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신음하며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하며 인내로 기다리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현실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를 바르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최종적인 구원을 향한 소망(23-25)

원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만 급급합니다. 이렇게 현실만 급급하고 살아가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부분입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꿈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에게 장차 주어질 소망을 바라보라고 권고하십니다.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3-25)

앞에서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게 되면서 우리에게 확신이 생깁니다. 바울은 성령을 받은 성도들까지 여전히 탄식하면서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⑴ 성도들의 탄식과 몸의 속량에 대한 기다림(23)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처음 익은 열매’에 성령을 비유합니다(출애굽기 22:29; 레위기 2:12; 민수기 15:20). 그 첫 열매는 밭 전체 열매들의 일부이자, 밭 전체 열매들을 대표합니다. 그 열매의 체가는 밭 전체의 추수가 시작되었다는 시작을 알립니다.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완전한 구원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그 완전한 구원을 바울은 ‘양자 됨의 지위를 얻는 것’과 ‘몸의 속량’으로 표현합니다.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의 탄식입니다. 마치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탄식과 같습니다. 산모의 비명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고통이 동반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의 고통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되길 바라는 탄식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에게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부모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만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빚도 떠안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종이면 자녀들도 종으로 태어나서 평생 동안 종으로 살아야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유산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녀들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⑵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한 인내(24-25)

당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대부분 종이었지만, 종으로 남은 작은 권리까지 모든 권리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즐겁게 받아드렸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은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법적으로 주민등록상에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미 양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유산을 받음으로 자녀로서 대를 잇는 실질적인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미 양자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때, 자녀로 확실하게 확인이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그 영광을 바라면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 성도들이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마다 고난의 상황에 묻힌 것이 아니라 고난 뒤에 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을 묵상하지 마시고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처럼 우리들도 나름대로 고난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상속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고난이 전부인 줄 알고 낙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장차 우리들이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탄식하는 성령님(26-28)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 홀로 당하면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고아와 과부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영광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성도들을 도우시며 동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6-28)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살아가지만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십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6-18)

성령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영적인 가이드가 되어 주십니다. 히말라야 산을 등반할 때는 등반가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산의 속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들을 동반하고 오릅니다. 그 가이드들은 등반가들이 산의 정상에 오를 때까지 반드시 같이 동반합니다. 하지만 매스컴에는 등반가들이 올랐다고 하지 이 가이드들이 올랐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이 동행하며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하게 박수를 받게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교만한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스스로 한 것처럼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홀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엔 무척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거나 영적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으면 영적으로 회복하기 너무 힘듭니다. 우리들이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성령님은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이 완성되도록 간구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때문에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너무 힘이 들어서 탄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마음을 성령님께 열어놓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들과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지만 신앙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성령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고난이나 핍박이 있기 때문에 절망과 탄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소망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픔과 낙심 중에 함께하시면서 저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며,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 드리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8-02)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활

로마서 8장 9-17절


고위공직자 청문회를 볼 때마다 한 가지 공통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분수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돈스러울 때, 분위기에 편승해서 분수에 넘치는 행동할 수 있지만, 훗날에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올무가 되어서 넘어집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혼돈스러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걸맞은 생활을 하기 위해 자신에게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9)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선언하는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도의 이런 정체성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해 주어진 것입니다.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일반적으로 특권을 누릴 만큼 그에 상당한 희생이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슨 희생이 필요 하겠습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릴 수 있기 위한 대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지속적으로 교회를 출석한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

성령님께서 오순절 강림하신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은 부족하지만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했습니다.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점차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 때가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령이 임하신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새로운 생명을 일어납니다. 마치 여인들이 임신을 했을 때, 임신에 대한 징표가 일어나듯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입덧을 하고, 다음에는 배가 불러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출산을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엄마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면,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령의 임재도 성령께서 임하셨지만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생활을 시작할 때는 성도들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이 점점 성숙해지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녀인 것을 확증해 줍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들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윤리, 종교 그리고 문화까지도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분명한 삶의 가치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가치관이 있다 할지라도 복잡한 삶을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항상 힘들고 복잡한 삶 때문에 스트레스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순간적인 즐거움에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한 후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매우 후회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은 참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의 모든 것보다 성령의 인도하신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10-11)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성령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어난 일들은 무엇입니까?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0-11)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지만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은 죽게 되지만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성령께서 장차 우리의 죽을 몸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한 번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은 죄로 인하여 한 번은 죽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육체는 썩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으로 끝나버린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쾌락이나 권모술수를 통해 즐기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변화된 몸으로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0-44)

이러한 사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이 세상의 것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점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12-14)

성령님이 마음에 임한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에 의해 강압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2-14)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해 ‘빚진 자’입니다. 성령에게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서 살 의무가 없습니다. 이제는 영을 따라서 살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대로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죄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5-8)

어떤 분은 육신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면 자연스럽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면 순간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이 있을진 모릅니다. 하지만 반드시 영원한 죽음을 맛볼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으로서 육신에서 나오는 행실들을 죽여야 합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육신의 생각을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자학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방법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므로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6-17)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15-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고아와 과부처럼 방치하지 않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특권을 부여해 주십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5-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은 세 가지입니다.

⑴ 아버지 되신 하나님(15)

첫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입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이제는 사탄의 영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악령에 시달려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두려움은 악령에 시달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노예 상태에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감사한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는 삶에 있어서 실수를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사탄이 우리 실수할 때마다 징벌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실수를 해도 천진한 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서 용서해달라고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첫 번째 특권입니다.

⑵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음(17a)

하나님의 자녀된 두 번째 특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17a)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상속자가 됩니다. 이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종은 아무리 잘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무리 부족해도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상속자이면 상속자가 되면 아버지의 재산뿐만 아니라 권리나 특권까지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당신이 어느 나라에 왕자라면 왕의 특권을 모두 물려받을 것입니다. 잠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여서 모든 세상을 창조의 질서대로 회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누리게 될 영광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과 권세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하였습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디모데후서 2:11-12)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⑶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17b)

어떤 분은 ‘고난을 받는 것이 특권입니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17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b)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도 특권이라는 답부터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영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길을 가고 있는데 백발의 노인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당신의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형제들이 길거리에서 강도에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태도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에 동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다른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동참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 슬프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은혜와 기쁨이 넘칩니다.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슬프거나 위축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상속자의 영광과 소망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속자의 특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좇는 생활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점점 성숙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써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추어졌던 영적 세계의 비밀을 점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비밀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아바 아버지이란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8-01)


성령을 따라가는 삶

로마서 8장 1-8절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에 두 가지는 ‘죽음’과 ‘죄인’이라는 단어입니다.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하면, ‘죽은 줄 아는데, 재수 없게 말하느냐?’고 합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무슨 죄를 지었는데, 내가 죄인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죄수까지도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죄인’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서로 죄인된 모습과 장차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8장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화의 과정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에게 사로잡혀 노예살이 하고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변화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성도에게 율법의 요구(1-4)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즉 예수님의 구속 사건으로 믿음을 갖게 된 자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은 예수님 안에서 사망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1-4)

8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7절은 ‘이미(already)’가 강조되고, 18-39절은 ‘아직(not yet)’이 강조괴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인 1-8장의 결론인 8장은, 특히 5장부터 시작된 소망에 대한 결론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줍니다.

⑴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됨(1-2)

바울은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이자 매일의 영적 승리를 위한 비밀인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묘사합니다. 먼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논리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는 8장은 7:4-6, 특히 6절의 내용과 바로 이어집니다. 7:6에서 우리가 얽매였던 것들, 즉 죄와 육신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서도 벗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을 따라 산다는 주제를 이미 던졌습니다. 인류는 사망의 몸에서 율법을 이용한 죄의 간교한 즉 죄가 우리에게 탐심을 이루게 해서 얽어 매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만들어 우리의 내면까지 들어와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입니다. 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정죄함’은 유죄 선고를 의미합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유죄선고를 받을 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완수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 받는 선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선고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완전히 무효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는 효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덮어 씌어 눌러버린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원리)이 죄와 사망의 법(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⑵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하나님(3-4)

해방된 사실에 대해 쓴 바울은 이제 해방이 일어나게 된 근거를 제공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이기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지적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육신 때문에 약해져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했던 의와 생명을 주는 기능을 직접 해주셨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받아 육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육신의 모양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습니다(빌립보서 2:6-8).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육신의 모양을 가졌던 예수가 죽을 때, 육신이 정죄 당했고, 그 안에 갇혀있던 죄도 육신과 함께 정죄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요구(사망=죄의 삯)를 다 들어준 것뿐 아니라, 죄가 가장 큰 무기로 자랑하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망을 예수의 부활이 깨뜨려버림으로 죄의 능력이 무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목적이 4절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7장에서 계속 쓰이던 ‘나’와 2절의 ‘너’를 지나 1인칭 복수 ‘우리’로 바뀜)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육신과 성령을 따르는 자에 대한 대조(5-8)

율법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성령의 법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성령의 법은 단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 불의와 악을 따라 살지 않고 선을 행하며 진리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5-8)

 

⑴ 육신과 성령을 따는 두 열매(5-6)

바울은 유대인들의 문제가 율법이 아니라 ‘육신’이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율법은 육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육신 아래 있는 인간의 문제를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계획하셨다는 구속사적 이해를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속한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 육신을 따르는 존재 방식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구를 표출하는 방향의 사고를 전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다음 세대, 곧 하나님 나라 삶과 생명의 원리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존재 방식’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고를 이끌어냅니다(5). 전자의 삶이 사망으로 귀결된다면 후자의 삶은 다음 세대의 생명과 평화로 귀결됩니다(6). 여기서 ‘생명’은 부활 생명을, ‘평화’는 종말적 샬롬을 지칭하는 단어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완전한 구원에 대한 묘사들입니다.

⑵ 육신을 따르는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7-8)

이제 바울은 이상의 논의를 다시 정리합니다. ‘육신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육신 아래’ 거하는 삶의 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으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 영적인 생활에 힘쓰길 바랍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누리게 되는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골로새서 1:22).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7-03)


사망에서 건져내실 그리스도

로마서 7장 14-25절


 

모든 사람은 영적 고통, 곧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 받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실 뿐이 누구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율법이 오히려 죄에게 이용당하여 사망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환경이 ‘육체’에 있음을 밝힙니다. 즉, 인간이 ‘육체’에 거하는 이상, 아무리 선을 행하기 원해도 악을 행하게 되고, 선한 율법도 ‘죄의 율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나’의 분열(14-20)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4-20)

14절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죄 아래 있는 ‘나’의 고뇌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15), 혹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19) 등의 표현은 이 단락에서의 일인칭 ‘나’가 성화의 길에서 영적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적 구원 사이에서 내적으로 투쟁하지만 결국에는 이 땅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는 사실상 바울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로마서 5-8장 큰 단락의 전체 흐름 속에서 볼 때는 바울의 중요한 논점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선 7장 안에서만 보더라도, 바울은 4절과 6절에서 명확하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서 6장에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더 이상 ‘죄의 종들'이 아니라(17,20)고 못 박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을 깨뜨리고 의와 생명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죄에 대해서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살아났다는 5-6장 전체의 흐름에 반합니다. 바울은 5-8장 전체에서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대 한가운데에서 다음 세대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확신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의 특징들인 죄와 사망에 대해서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큰 흐름은 7장에서도 여전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12절의 진술을 되풀이합니다. 문제는 ‘내’가 ‘육신적’이라는, 즉 이 세대를 포괄적으로 묘사해주는 단어인 ‘육체/육신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통해 바울은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속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그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나’마저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5-20절은 선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마는 ‘나’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여전히 선한 것으로 묘사되고(16), 악을 행하게 하는 장본인은 내 속에 있는 죄이며(17), 그 죄의 다스림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환경은 ‘육신/육체’(18)입니다. 20절은 ‘나’라는 존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죄’의 노예 되어 있기 때문임을 명시합니다.

이러한 ‘나’는 누구입니까? 7-25절 전체 내용이 5절을 극화해 놓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육신’으로 대표되는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았지만, 결국 죄의 다스림을 면하지 못하였고 사망의 열매를 맺은 ‘나’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알고(14),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도 하고(22), 율법을 지키기 원하여 노력하고(15-21), 나아가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25) 사람입니다. 이는 ‘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나'쉽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죄의 종이 아니며(17,20), 이제는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18,22). 다음 단락인 8장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1),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2), 결정적으로 성령을 따라 이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4)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표현들과 7:14-25의 내용들이 정면으로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나’는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7,10,12,13,14,16)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에게 이용당하는 율법의 분열(21-23)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이 소단락에 등장하는 헬라어 ‘노모스’를 개역개정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법’으로 번역하였으나, 바울이 4-6절에서 자기주장의 핵심을 먼저 말한 뒤에, 줄곧 ‘율법’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습니다(21). 그런 다음 21b절에서 율법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죄 아래에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나’의 아담적 실존, 곧 ‘육체’라는 이 세대의 환경 아래에서 살면서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육체 아래 있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은 유대인과 함께 분열을 경험합니다. 유대인들은 속사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였습니다(22). 23절에서는 이를 ‘내 마음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헬라어 ‘누스’는 생각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내면적으로는 율법이 옳다는 것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율법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하는 순간에는, 너무나 허무하게 율법이 ‘죄’에게 굴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게 굴복하고 마는 율법을 ‘죄의 율법’이라 표현하고 이를 ‘하나님의 율법’과 구별되는 ‘한 다른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육체 속에서는 유대인도 율법도 다스림을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나'의 딜레마(24-25)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4-25)

24절에 이르러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유대인은 절규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실행하기는커녕,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호라 나는 절망적인/비참한 사람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자’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미 6장에서, 그리고 7:4,6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의 몸과 사망의 다스림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바울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바로 이 고백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즉,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설명한 셈입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25b절에서 바울은 7:7-25 단락 전체의 내용을 다시 정리합니다. ‘나’라는 내적 자아는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즐거워하지만, 육체/육신으로 대변되는 이 세대의 구조 속에서는 그 율법이 죄에게 이용당하여 ‘죄의 율법’으로 전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 전체는 율법을 지닌 유대인의 딜레마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풀어 쓴 것입니다. 즉, 유대인도 아담 안에 있어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유대인에게도 예수가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고 말했습니다. 7장의 ‘나’가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해서 7장이 다른 이들에게는 적용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먼저 부르심을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도 육체와 이 세대, 죄와 사망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다른 민족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7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자로 등장한 ‘나’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인지, 회심 전인지 아니면 회심 후인지,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면서도 죄의 법 아래에서 절망하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의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을 성취 못하는 우리 모두 인간인 ‘나’인 것입니다. 선을 원하고 악을 미워하지만, 정작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삐뚤어진 악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살지 않고 주님의 자비와 성령의 인도에 이끌려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7-02)


바른 백성으로 인도한 율법

로마서 7장 7-14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해력이 많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해서 방방 뛰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나중에 그것을 돌아보면 이해되고 후회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당시는 자기 기준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지금까지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이제 쓸모없어서 폐기처분해야 한가?’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패기처분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율법과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율법이 존재했던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율법을 통한 깨달음(7-8)

인간은 나약한 죄인이므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율법이라도 스스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 앞에서 죄성과 정욕이 자극받아 죄가 늘어날 뿐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죄가 범죄의 기회를 자꾸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은혜를 구하지 않고 율법적 행위에 대한 강박만 가지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율법의 역기능만 체험하게 될 뿐입니다.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7-8)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도구로 이용 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만들고 영적인 무지를 깨우쳐 줄 때 비로소 죄의식을 느끼며, 죄에 대해 고통하게 됩니다. 전에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계명을 알게 되어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님이나 윗사람에 대한 순종을 배우며 자라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을 하지만,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왜 간섭하느냐?’고 데듭니다. 그럴 때 어른들이 하신 말씀은 ‘너도 나중에 자식 나봐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는 모르지만 나중에 성장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불순종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후회하지만, 그때는 이미 부모님은 늙고 돌아가시고 난 후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죄가 무엇임을 알려는 ‘가이드라인(Guide lin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약속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못된 일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간섭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말은 옳은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순종하는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됩니다. 순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쉬운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습관대로 살고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선지자들이 자신의 걸림돌로 생각하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런 불순종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탉이 새끼를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까지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편안한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간섭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처럼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죄가 항상 틈을 타서 들어오려 한다고 말씀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단은 넘어지도록 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며, 편안한 방법대로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실수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사망(9-11)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사단은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의 영으로 작용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매우 고상한 신앙생활처럼 포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반대된 생활이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9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9-11)

바울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해 율법을 주셨지만, 죄로 인해 율법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앞서 율법을 죄와 연관 지어 살펴보며 매우 부정적으로 언급했던 것과는 기조가 달라집니다. 이 율법을 통해서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생명에 이르게 해야 할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전적으로 무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이 굴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이것도 죄이고, 저것도 죄이기 때문에 죄의 지뢰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죽음의 지뢰밭에서 나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방법, 당시의 종교적인 습관으로 생명의 길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하지 않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9:18).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율법(12-14)

많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우리를 억합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2-14)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율법이 죄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오히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특히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만약에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탐심이 죄라는 것을 율법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들추어 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바르게 보게 하는 선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나를 책망하고 가르칠 때 나의 전인격이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바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는 죄와 사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병을 앓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하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7-01)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로마서 7장 1-6절


사람들의 삶의 패턴은 ‘과거지향적인 생활’과 ‘미래지향적인 생활’인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것만 바라보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대부분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에 대해 후회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종종 과거의 영화를 생각하면서 ‘과거에 내가 누구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영화로운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현실 생활에 충실 합니다. 미래에 대한 꿈에 사로잡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현실에 최선을 다 합니다.

 

바울은 이제 7장에서 율법의 역할에 대한 가장 긴 논증을 제시합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지만, ‘육신’에 속해 있는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죄에게 이용당하여 사망을 낳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육신’의 상태를 벗은 이들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 7장 전체의 요지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지배(1-3)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잘 이해하면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그 의도를 잘 깨닫지 못한 채 잘못한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1-3)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죄의 종에서 이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었으니, 죄에게 순종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불의와 불법에 내주지 말고, 의의 종으로서 거룩함에 이루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배경은 로마서 6:14-15를 근거로 합니다. 6장에서 죄는 사람들을 노예로 가두어 놓으려고 하는 실제를 노예로서 꼼짝 못하게 만든 하나의 주권, 능력입니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설명하는 것은 죄와 율법의 관계입니다. 죄는 인간을 노예로 얽어매어 종노릇하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유대인의 입장에서 그 방법은 율법으로 사람들을 옭아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⑴ 율법이 사람을 주관하는 한시적 기간(1)

바울은 먼저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라고 운을 뗍니다. 그들은 로마 교회 안에 유대인 성도들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는 이방인 성도인 모두를 지칭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6:14)는 말은 틀림없이 바울의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한정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바울은 결혼 관계를 통해 이를 예증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 옛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6장 전체가 그 옛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7장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는 4-6절도 ‘육신 아래 있는 사람에게만 율법이 역사한다’고 주장하는 점을 고려할 때, 후자의 해석이 전체의 흐름을 더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⑵ 남편의 사망과 함께 혼인 관계에서 자유케 됨(2-3)

바울의 논리에서 율법은 사람이 사는 동안만 주관할 수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주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율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죄에게 보고할 필요도, 죄가 시키는 대로 할 필요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하는 그림 언어(metaphor)는 결혼 제도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내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더 이상 법적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간음하는 것이 되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에 여자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면 이를 간음이라 할 수 없는 쉬운 이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죄에 끌려 들어가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법적 관계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해주신 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죄와는 아무 관계없는 상태가 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음(4-6)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선물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선물을 어떻게 여기며 살 것인지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받을 상급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의도하신 하나님 구원에 관한 목표의 문제입니다. 율법을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물이 되셨습니다.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4-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새롭게 관계 맺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참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덕적으로바르게 살려고 했던 모든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음(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4)고 6장과 7장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 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4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도들이 이 세대의 특징들에서 해방되어 다음 세대의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하나니의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중간에 끼어있는 율법과의 관계입니다. 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바울의 설명은 율법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죄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해서도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시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2)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5-6)

바울이 4-5절에서 설명하는 것은 ‘열매’의 문제입니다. 율법에 얽매여 있을 때 죄의 종노릇하며 맺었던 사망의 열매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역사하여 맺었던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율법이 죄의 정욕을 통해 우리를 얽매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해로운 주인인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지의 종교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못하고 하는 경지의 종교(율법의 종교)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새 생명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즉 누구를 위한 열매를 맺고 살 것입니까? 결혼에 비유하면 여자가 누구의 아들을 낳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죄의 성육’이 율법을 통해 우리의 지체로 맺게 한 사망의 열매를 계속 맺을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다른 영혼이 살아나게 하는 열의 열매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하나님을 위한 열매입니다. 주의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생명을 찾는 것, 즉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섬기듯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새 계명ㅇ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를 그리스도께서 더욱 사랑하시고 가까이 해 주십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6-02)


삶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6장 12-23절


한 해군 장군이 병사 천 명으로 적군 만 명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행인 것은 적군이 기다리고 있는 한 가운데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 자신의 병사들을 적군 중심에 숨어 내려놓고 배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장군은 병사들에게 “이제 우리는 도망갈 배가 없다. 싸워서 승리해서 돌아가든지, 실패해서 전멸하는 길 밖에 없다.”라고 명령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군사들은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이유는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끝까지 의지하고 나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해결 받았기 때문에 죄악 가운데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1-11).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한 가지 문제는 죄는 해결되었지만, 죄의 속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죄 때문에 고민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종의 비유를 통해서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지침(12-14)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몸을 자신의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벧전 2:9).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과거의 잘못된 습관(舊習)을 버려야할 것과,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롭게 배워야할 선한 습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내용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2-14)

이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과거의 버려야할 부정적인 삶의 태도와 긍정적인 생활을 제시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우리들이 죄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⑴ 불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 것(12-13)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몸의 사욕을 쫓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기초로 육신의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되에게 드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육신의 사욕에 지배받아 살아가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생활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프게 합니까!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1서 2:16)

‘사욕(邪慾)’을 쫓아 사는 것은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도록 방치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습관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에 주인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삶의 결정권을 스스로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상의(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3)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寶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우리의 귀한 몸을 죄악에 내어 주어서 안 됩니다. 정말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순간에 변화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습관’은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대로 행동하면 편안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교정하는 데는 매우 어렵습니다. 치아를 바르게 교정하는 데도, 많은 돈을 투자하고, 시간은 6개월, 일 년이 필요합니다. 행동의 교정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더 힘이 듭니다.

⑵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14)

과거의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죄가 좋아하는 데로 우리 몸에서 죄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 신분을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13b)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죽은 자’은 아무런 희망이나 의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난 자’로 세우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는 노예(從)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노예의 모습을 벗고 새롭게 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죄가 우리의 왕이 되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조금이라도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우리는 적극적인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c)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의 삶은 자신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병기(兵器)’는 ‘무기’ 또는 ‘도구’를 의미합니다.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칼을 의사가 들면,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강도가 들면 생명을 죽이는데 사용합니다. 우리 몸을 죄에게 드려서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면, 죄의 노예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의의 병기가 되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행동 지침을 잘 실행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행동 지침을 실행하는 데 방해 요소는 무엇입니까?

 

의로운 통치를 받는 삶(15-20)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두 종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종으로 죄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15-20)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결정적인 진술을 서술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목적이 있음을 소개합니다. 구원 받음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다음 단계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완벽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죄가 주장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고 말합니다. 죄에 해방은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17-18). 옛날에는 노예가 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전쟁터에 포로로 잡아온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생활고로 인해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부잣집 사람에게 가서 자신의 빚을 감당해준 대가로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 다 이젠 신분이 종이기 때문에 자신을 선택한 주인에게 오로지 순종해야 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러한 선택 받은 종들의 모습에 대해 설명합니다.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1)

주인에게 선택 받은 노예는 어떤 주인에 선택됨에 따라 그들의 인생을 좌우되었습니다. 악한 주인을 만나면, 죽는 날까지 일만하다가 괴로운 인생을 살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주인을 만나면, 마치 자녀처럼 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주인을 만난 종은 평생 감사하며 행복한 생활을 살아갈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몸을 부정과 불법에 사용되도록 허락했습니다. 점점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술을 마신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스스로 마시지만 점점 술에 취하면 술이 술을 마시게 됩니다. 그런 죄의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생활이었습니까! 지긋지긋한 생활을 하던 종들에게 해방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해방될 방법을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보를 따라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을 받았습니다. 좋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이적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모습을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악한 주인에게서 이제는 좋은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 악한 주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한 주인에 의해 얼마나 죄악된 일들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왔을 때, 약속대로 우리를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좋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시고 살아갑니다. 이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드려 거룩함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의로운 통치에 대한 결과(21-23)

어떤 사람이 비참한 상태에 살던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죄의 노예의 모습과 현재 상태를 비교하면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가르쳐 줍니다.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1-23)

과거에는 악한 주인 아래서 죄의 종으로 괴롭게 살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뜨는 것이 지옥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바뀌고 나니깐 비참한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주인을 섬기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악한 주인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연히 불의와 사망의 옛 열매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면 다방면에서 죽음으로 그의 삯(代價)을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永生)을 선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말씀에 대해 순종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순종할 여건(터)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순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모든 책임을 우리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종은 철저히 자신을 주인에게 드립니다. 당신은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립니까? 죄의 종으로 마귀에게 드립니까? 과거의 지긋지긋한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삶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영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제는 다른 길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가서 죄와 싸우는 하나님의 의로운 병기로 자신을 드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생활을 통해 빛과 소금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6-01)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

로마서 6장 1-14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항상 ‘균형(balance)’ 있어야 합니다. 운동에도 건강을 위해 지나치기 운동하면 안 됩니다. 음식이 맛있다고 과시하면 안 됩니다. 신앙에도 마찬가지로 균형(均衡)이 있어야 합니다. 한 곳으로 너무 집착하면,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광신자가 될 수 있으며, 더 나가면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있는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고 집착하면 악을 조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 장에서는 그런 우려를 해소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범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다스림에서 벗어남(1-7)

사람들이 지혜로운 삶이란 그릇된 의견이나 이치로 어긋난 주장이 있을 때, 한 번 정도 자신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앞부분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을 들을 때, 문맥 전후를 살피면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1-7)

병원에서는 큰 수술에 앞서 반드시 마취를 합니다. 환자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수술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가 은혜로 사는 삶에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도 없습니다.

(1) 은혜가 죄를 조장한다는 오해를 차단함(1-2)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결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질문을 1절에서 던집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면, 논리적으로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 죄에 거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 이상 그 가운데 살 수 없다’(2)고 말합니다. 바울의 선언은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의 결과인 사망을 모두 소진하셨다는 점, (2) 부활을 통해 그가 죄와 사망의 다스림을 정복하셨다는 점, (3) 그리스도께서 부활 생명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대를 여시고 먼저 그리로 들어가셨다는 점, (4) 우리가 바로 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가 다스리는 이 세대를 벗어났다는 점을 차례로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의 강조점은 죄가 그 다스리는 힘을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성도가 죄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실제 죄에 빠집니다.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여전한 것처럼 반응하고, 이미 정복당한 그 권세에 굴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죄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다음 세대의 삶,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와 함께 죽고 부활함(3-5)

3-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통해 2절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바울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일 수 도 있고, 초대교회의 실재 세례 의식을 지칭할 수도 있으나, 후자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를 가리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음’(3:27)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갈 2:20)이라는 표현을 쓴 바울은, 3절에서 이 두 표현을 합하여(‘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세례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해결/정복하시고, 다음 세대의 의와 생명의 다스림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그와 연합한 자들도 이 땅에서부터 다음 세대의 생명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4절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다스림의 관점에서 재확인합니다. 자신을 우리와 하나로 여기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의 다스림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여 지금 이 땅에서도 ‘부활 생명’을 살아가게 합니다. 5절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 ‘부활 생명’의 미래적 완성에 대해서 재확인해줍니다.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 이 세대에 속해 죄의 다스림 아래 있던 자아를 ‘옛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이중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는 ‘죄의 소마(몸)’가 힘을 잃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는 ‘소마’라는 단어는 주변의 환경에 제한당하는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죄의 몸’이란 표현은 이 세대라는 환경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지칭합니다. 그런 점에서 같은 절의 ‘옛 사람’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그 옛 사람과 ‘죄의 몸’은 이제 힘을 잃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임한 다음 세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로 이미 '영역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3) 옛 사람이 죄의 노예 됨에서 벗어남(6-7)

6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가 더 강해집니다. 즉,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7절 전체는 ‘가르’로 시작하는 이유절에 해당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죄로부터 의롭다 함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놓임 받은 우리는 다시 그의 의로운 행동과 순종하심(5:18, 19)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진 부활의 생명(8-11)

우리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인들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함으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우리들의 죄도 죽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장사 지낸 바 될 때, 우리도 같이 묻혔습니다. 죄에 대해 이렇게 죽었기 때문에 다시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8-11)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사망이 죽임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얻게 될 생명(8)

이제 8절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래한 결정적인 구속사적 전환 혹은 ‘영역의 이동’에 근거해서, 성도가 살아갈 다음 세대의 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구속사적 계획의 절반에 해당할 뿐입니다.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부활 생명을 얻는다’(8).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계획한 완성된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 사망을 이기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신 그리스도(9-10)

9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사망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셨음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5:12-21에서도 전제되었고, 고린도전서 15:26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인간의 궁극적인 ‘원수는 사망이다.’ 하나님꼐서는 죄에 빠진 인간을 사망에서 건져내어 완전한 생명을 주기를 계획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 성취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10절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시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의 삯인 사망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헤파팍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강조해주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간을 대신하고 대표하기 위해 필요했던 ‘단 한 번’의 죽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완전한 부활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를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나섰다’(10b)고 표현합니다. 바울이 ‘산다’라는 동사를 쓸 때 부활 생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남(11)

11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해 6장에서는 처음으로 명령형을 던집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선언한 바, 즉 ‘너희가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살았다’는 진리를 사실로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순종과 의로움의 삶(12-14)

감옥에서 누군가의 희생으로 풀러나와 자유롭게 된 사람이라면, 세상에 살 때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대속으로 용서받고 자유를 누린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며 남은 삶 동안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을 위해 희생의 대가를 치른 존재를 생각하며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도록 애쓸 것입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2-14)

바울은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롭고 거룩한 피조물로 거듭난 존재이긴 하지만, 죄에 대한 욕망을 제어해야만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1) 죄의 다스림에서 떠나라는 명령(12-13a)

12-13절에서 바울은 다시 강력한 명령형 문장 두 개를 쏟아냅니다. 6절에서 ‘죄의 몸’이라는 표현을 쓴 바울은 이 세대의 ‘몸’을 입고 사는 성도들에게, ‘죄가 너희의 죽을 몸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몸을 입고 있는 인간은 여전히 어떤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정사 구문을 사용하여 ‘그 몸의 욕구들에게 순종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을 더합니다. 즉, 이 세대에 속한 몸/자아의 욕구들을 따르도록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2) 의로운 삶을 추구하라는 명령(13b)

본 13절에서는 ‘지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너희 지체, 곧 너희의 내적인 기능들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다스림이 우리 (지체)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3)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못하는 은혜 아래 있는 삶(14)

본 절에서 바울은 1-13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미래형 동사를 사용한 것에 근거하여, 현재는 성도들이 죄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1-13절까지의 주장과 나아가 로마서 5-8장의 모든 논의를 뒤집는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의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죄의 다스림은 현재적으로도 그 권세를 잃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더욱 선명하게 확증될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율법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진노를 소진케 한 그 은혜가 우리를 죄의 다스림에서 해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 속에는 죄와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은혜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부딪히는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정체성을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항하는 한, 죄는 우리를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비다. 우리는 항상 죄에 대해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5-02)

 


모든 세상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

로마서 5장 12-21절


신앙을 점검하는 두 가지 기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잘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들의 삶은 생활 가운데 자신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환경에 대한 ‘불평’이 아닌 삶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으심과 부활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시조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의 권세를 시작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권세를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한 사람의 행위가 선악 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첫 아담을 통한 사망(12-14)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면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는 주장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항변합니다. 그들은 ‘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반문합니다. 그 질문을 다음에서 설명합니다.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2-14)

하나님의 화해 사역의 대상인 인간들을 연약하고(6), 경건하지 못하고(6), 죄인이며(8), 하나님의 원수로 묘사한 바울은 이제 죄와 사망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⑴ 한 사람으로 시작된 죄(12)

사도 바울은 첫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면서 설명합니다. 먼저 시조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제시합니다(12). 이 말을 들으면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 첫 아담이 가져다준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자손인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력 아래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조상이 노예이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들은 모두 노예인 것과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합니다. 한국 대표 팀들이 경기할 때마다 열광적으로 응원합니다. 한국 대표 팀이 승리하면,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패하면 자신이 패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도 아닙니다. 축구장의 승패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우리들이 한국 대표팀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이러한 영적인 정체성 때문입니다. 첫 아담을 통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사망이 왕노릇 하고, 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사망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는 장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나 세상의 족보들은 모두 죽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그 죄악의 뿌리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범죄 하는 것은 그 죄의 뿌리가 낳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땅을 살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하심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대가)을 사망으로 지불해야할 원칙입니다.

⑵ 죄를 위해 투입된 율법(13-14)

사망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13-14). 죄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시절에도 아담 이후 모두가 죽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죽게 된 이유가 확연하게 들어났습니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먼저는 빛을 비추면 들어납니다. 그 먼저는 빛을 비추기 전에도 있었지만, 단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율법을 통해 알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율법 전에 살았다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 이후로 속한 모든 인류는 사망의 그늘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아담과 같은 또 다른 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둘째 아담을 통한 은혜(15-19)

첫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는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5-19)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사망이 왕노릇 함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사망의 효력을 발휘하였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효력을 발휘합니다(15-17).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아 넘칩니다. 결국 아담은 죽음을 가져다주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았는데, 또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첫 아담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지만 효력의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아담은 사망을 퍼뜨렸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퍼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미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원리로 하나님과 함께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말씀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한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입니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과 주변 국가들이 원자로에서 새어나온 방사능(放射能)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각 정부에서는 방사능 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맞지 말고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만약 그런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사능이 포함된 비를 맞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방사능의 영향력 아래서 피폭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음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인류를 살리셔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아담의 영향력 아래 존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노릇하고 사망의 권세 앞에 붙잡힌 인생으로 사망의 영향력 아래 존재하는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대표성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 아래서 율법의 역할(20-21)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라면 율법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은가?’라는 숙제가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0-21)

우리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에 대해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죄가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아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범죄하면서 양심이 마비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13).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범죄를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고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점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성이 들어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적인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모든 인류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감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에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잘 받아들여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당신을 지배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발견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담 이후 죄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통해 속죄해 주셨고 그 은혜 안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굳게 잡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