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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6-02)


마지막 권고와 송영(2)

로마서 16장 17-27절


다이아몬드와 큐빅은 비슷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차이가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이아몬드는 고유의 빛이 영롱하게 발하지만, 큐빅은 영롱한 빛을 내기 위해 코팅을 입혀 놓은 것들이 벗겨집니다. 벗겨진 모습을 보면 매우 지저분합니다.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진실한 사람과 거짓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진국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서 추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귀함이 풍겨 나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의 대단원에 막을 내립니다. 그 동안 로마서를 통해 주신 말씀을 소중이 간직하시며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로마교회에 있는 거짓 선생들을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그들에게 떠날 것을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동역자들의 안부를 로마교회에 접근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고(17-20)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서로 문안하고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인사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문안하면서 서로 축복을 나누어야 할 대상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멀리해야 할 대상도 있습니다. 멀리해야 할 대상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9-20)

세상에는 ‘좋은 것이 좋다’고 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법칙대로가 아니라 때로는 좋은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고, 안 좋아보이던 것이 좋은 것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좋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⑴ 영적인 분별력(17-18)

이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인들로서 지혜로운 분별력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으로 진리를 혼돈스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권고했습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반드시 분별해야 되고 분별의 기준을 다음과 같습니다.

① 거짓말 하는 사람(17)

첫 번째 특징은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척하지만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가짜 일수록 자신을 잘 포장하기 때문에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해서 마태복음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5-18)

이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는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② 이기주의적인 사람(18)

다음 특징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영적인 것들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라고 소개합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다서에서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7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6-19)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육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단에 속한 무리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직 로마 교회 안에 갈라디아 교회처럼 들어가서 가르침을 전했다고 보이지 않지만 곧 나타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탁월한 논리를 가지고 속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이 어리고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기 쉽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교활한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분별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이들은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17) 행하고, 둘째는, 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그들의 특징은 영혼에 악한 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는 선생이지라도 그 말이 자신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⑵ 분별력을 얻는 방법(19-20)

머지않아 로마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 것과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제대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순종할 것인지 계속해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해 보이고 화려한 교훈들이라도, 복음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안주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 가운데 서 있어야할 이유는 순결한 진리와 거룩한 교회를 깨뜨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20) 사탄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이미 패배한 사탄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미혹으로 아담과 화와가 죄를 짓고 심판 받은 후 쫓겨난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려들지 말고 경고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할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때마다 사탄은 패배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의 순결을 깨뜨리고,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사탄의 행위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ㅔ서는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확신과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불평과 비난의 말에 쉽게 동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진리 위에 서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축복과 찬송(21-27)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태어나면서 가정을 주시고 거듭나면 새로운 천국 가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함께 다양한 지체들을 각자의 기능과 책임과 은사를 따라 한 가족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사역의 동역자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선교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길 원합니다.

21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없음)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

본문은 로마서 1:1-7의 말씀과 대칭을 이루면서 복음에 대해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거론했던 표현들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들을 믿어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⑴ 또 다른 문안(21-23)

16장의 문안과 축복의 특징은 앞부분 사람들(롬 16:1-16)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바울과 함께 있는 성도들이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합니다.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사랑과 축복을 전합니다. 동역자 디모데와 친척들(21), 대필자 더디오(22), 그리고 바울에게 거처를 제공한 가이오(23)가 나옵니다.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23)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시회적 배경과 계급의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명단으로 보아 로마서가 기록된 장소는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격려할 자를 격려하고 축복할 자를 축복하고 문안할 사람들을 문안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삶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 땅에 퍼져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같은 주님으로 섬기기에 서로 문안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아름답고 복된 특권입니다.

⑵ 찬양(25-27)

바울은 마지막 송영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에서 로마서의 주제를 다시 반복 강조합니다. 로마서 1장 서두에서 강조한 복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봄으로,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 자기 삶의 목적, 복음 전파의 목적 그리고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성도들이 이 부분을 읽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길 바랍니다(27).

➀ 복음이란(25)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을 같은 의미로 말합니다(25).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그의 아들에 관하여 …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3-4)라고 설명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심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고 성장한 것입니다. 어떠한 다른 복음이라도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➁ 복음의 사역(25-26)

복음은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자’입니다(26). ‘능히’는 ‘강력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복음은 ……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고 한 맥락과 연결됩니다. 복음은 성도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성장하는 삶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력하게 견고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바울은 배경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어느 누구든 마음과 행동으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는 로마서의 핵심 주제로 되돌아 왔습니다.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 이 복음은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지금 바울을 통해서 사도행전 시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 복음은 우리를 능히 승리하며 견고케 할 수 있다는 확신과 격려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➂ 복음의 영광(27)

성도들이 누리는 이런 특권은 바로 복음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어 순종케 하시고, 복음으로 성도들을 능히 견고케 하신 결과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자신의 동역자들을 대신해 안부를 전했고 그가 전한 복음의 주제와 기원, 목적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재차 요약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장엄한 찬송으로 서신을 끝맺었습니다.

27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27)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되셨고, 나타나셨고, 선포되셨고, 그리고 믿음을 통한 순종으로 지금도 모든 인류를 그의 자녀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생각할 때 바울과 더불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깁니다. 같은 주님으로 섬기기에 어려움에 처한 다른 나라나 지역에 있는 성도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보석입니다. 그러나 어떤 보석입니까? 빛이 코팅 처리된 무늬만 큐빅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로마서를 통해 받은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 바울처럼 기꺼이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기도하며 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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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6-01)


마지막 문안과 권면(1)

로마서 16장 1-16절


함께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다른 교회로 부임하신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그 동안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했는데, 떠날 때 생각해보니깐, 남는 것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친구로 사귀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역은 지나가지만, 사람은 귀하게 남는 것입니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정말 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정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믿음의 동역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를 표하며,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사역에 남는 것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귀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뵈뵈를 추천한 바울(1-2)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서양 속담에 ‘원한은 바위 위에 새기고 은혜는 물 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좋은 감정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아픈 것들을 마음속에 많이 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반대로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물 위에 새겨야 합니다.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1-2)

바울은 로마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쓰는 편지를 맺고 있습니다. 지난 사역을 회고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는 약 30명에 가까운 동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합니다. 어떻게 자신의 복음 사역에 큰 힘이 되었는지를 밝힙니다. 그 후 그들을 기억하라고 거듭 부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 ‘많이 수고한 사람’, ‘사도들에게 뛰어난 인정을 받은 사람’,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 등 마치 훈장과 같은 수식어를 붙여 가며 사람들을 소개했습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겐그레아 지역 뵈뵈를 추천합니다. 아마 그녀는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면서 ‘나의 보호자’였다고 말합니다. ‘보호자’는 ‘후원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꾼’이라고 부른데, 이는 ‘집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에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뵈뵈는 고린도에서 수 킬로 떨어진 항구 도시 겐그리아에서 사업을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다른 사업 관계로 겐그리아에서 로마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로마서를 전달했고,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그녀가 도움이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지 도와주라고 권면합니다.

 

로마교회에게 서로 문안하도록 권함(3-16)

사람들이 서로 알아주는 것처럼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수고를 알아줄 때, 한순간에 모든 고생을 잊게 되어 집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수고를 알아줄 때 또한 한순간에 모든 고생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당신도 누군가의 수고를 알아주어야 할 분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이 나열한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3-16)

바울은 이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이름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외부에 있는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로마에 있는 자들을 문안하라고 요청하는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로마에 있는 여러 가정 교회들 사이에 불편함이 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동역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 대한 이후에 관계에 대해서도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바울에 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3-5a)

바울은 뵈뵈를 소개한 다음으로 가장 먼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부르고 그들을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부부는 사도행전에서 글라우디오 칙령(주후 49년) 시에 로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이들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먼저 그들을 찾아갔고(사도행전 18:2), 함께 살면서 일한 정황(사도행전 18:3) 등은 그들이 바울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음을 반증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로 갈 때 그와 동행하였습니다(사도행전 18:18). 그들의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칙령 해제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며, 또 신속하게 로마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기반이 확실했음을 반증해줍니다.

4절은 이 부부가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부유한 상인이었던 이들 부부가 바울의 후원자로서 상당히 큰 경제적 희생을 감수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인정하고 감사를 표할 정도로(4)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3절을 포함하여 성경 여러 곳에 이들의 이름이 함께 등장하는데, 아내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는 곳(행 18:18,26; 딤후 4:19)이 반대의 경우(행 18:2; 고전 16:19)보다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브리스가가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반증합니다.

5절은 그들의 집에 가정교회가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교회들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도시에 세워진 바울의 교회들이 가정교회의 형태를 띠었고, 그 구성은 로마의 일반적인 가징 속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로마의 일반적인 가정의 구성원인 주인, 아내, 자녀, 종, 예속인 등이 그대로 가정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16장에 와서야 1절에 이어 5절에서 처음으로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예외 없이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지칭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2) 로마에 있는 지인들과 가정교회들(5b-13)

5b절에서 언급된 이로 에베네도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으로 이방인이 확실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교회 뒤에 그의 이름이 바로 언급되는 점은 그가 이들 부부의 가정교회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케 합니다. 이 부부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도 사역했던 점을 고려하면, 에베네도가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라는 언급도 그들과의 연관성을 점치게 하는 부분입니다. 6절에서 언급된 ‘마리아’는 가장 흔한 유대인 여성 이름이다. 바울은 그녀가 ‘많이 수고하였다’고 강조합니다. 7절에 언급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두 사람 모두를 남성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차례로 남편과 아내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드로니고’는 흔한 헬라식 이름이지만, 바울이 그를 ‘친척’ 혹은 ‘유대인 동족’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보아 헬라식 이름을 쓰는 유대인임이 확실합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경험이 있으며, 사도들에게도 존중을 받고,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로 소개됩니다. 8절은 당시에 흔한 종의 이름을 가졌던 ‘암블리아’를 소개합니다. 그에게는 ‘주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9절에서 바울의 동역자로 소개되는 ‘우르바노’ 또한 당시에 흔한 로마식 종의 이름입니다. ‘스다구’ 역시 종의 이름입니다. 10절에 언급된 ‘아벨데’와 ‘아리스도불로’는 유대인 이름입니다. 학자들은 이 아리스도불로가 헤롯 대왕의 손자요 아그립바 1세의 형제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는 표현은 그가 가정교회의 리더임을 보여줍니다. 11절에서 소개된 ‘헤로디온’은 헤롯 가문에서 종으로 살다가 자유인이 된 남성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이는 10절의 아리스도볼로의 헤롯 대왕 연관설의 개연성을 더해줍니다. ‘나깃수’ 또한 종과 자유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이름입니다. 12절에서 소개되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자매의 이름으로 보이며, ‘수고하였다’는 수식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 자유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버시’는 흔한 여종의 이름입니다. 13절에 소개되는 ‘루포’는 마가복음 15:21에서 구레네 시몬의 아들 이름과 동일합니다. 마가복음이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가설이 옳다면, 마가가 의도적으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인물인 루포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만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3) 로마의 다른 성도들과 가정교회들(14-15)

다음에 나오는 다섯 이름은(14) 분명히 어떤 공통점을 가졌을 텐데, 아마도 각기 다른 가정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느 형제들’이란 말이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모두 노예들 중에서 평범한 이름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 성별,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상 스물여덟 명의 이름은 바울의 선교가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며, 세우는 과정에서 진행되었고, 수많은 인생의 친구들과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걸어간 여정이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 16:1-15은 로마서의 중요한 다른 본문을 바울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갔음을 반증해 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4) 그리스도 모든 교회들로부터 문안을 전함(16)

바울은 이 사람들을 로마 성도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서로를 ‘문안하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문안하라’라는 말을 15회 이상 반복해 말했습니다. 여기서 ‘문안하라’라는 말은 안부를 전하라는 것이지만, 더 깊은 뜻은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진심으로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문안하라’는 16절의 권면은 이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의 교회로 더욱 굳건히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바울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혼자 할 수 없고, 동역의 역사입니다. 모든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낄 때, 자연히 성령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몸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섬김은 헛될 수 없습니다. 참 헌신은 소망의 이유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사랑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횡행하는 시대 속에서 성도들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은 빛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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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5-03)

 


선교 사역을 위한 미래 사역 계획

로마서 15장 22-33절


사람은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혼자 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살는 사람들은 항상 외롭고 불안합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동역자나 같은 뜻을 품은 사람으로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런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동역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바울은 앞부분에서 지금까지 과거에 했던 사역을 소개했습니다(17-21). 이제는 앞으로 장차 해나갈 미래 사역을 언급합니다. 먼저, 지금 당장 해야 할 사역들에 관해 설명합니다. 바울의 향후 행선지인 예루살렘과 로마와 서버나가 모두 등장하고, 그 도시들을 둘러싼 바울의 소원이 함께 소개됩니다. 예루살렘에서 그의 복음을 확증 받고, 로마 교회가 그의 볶음을 듣고 화해에 이르라 그를 후원해 준다면, 서버나까지 같은 복음을 들고 갈 원대한 계획을 피력합니다.

 

로마 방문 계획과 목적(22-24)

흔히 바울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향해서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명에 매였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 중심적인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의 새로운 면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속에 여러 사람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22-24)

바울은 이 부분에서 미래 사역계획과 현재 진행 중인 사역을 설명합니다. 이제 바울이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 일할 곳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지중해 서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로마를 지중해 서부지역 선교 출발지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여러 번 가려고 시도했지만 막혔다고 말합니다(1:10,13). 로마로 가는 길이 막힌 이유에 대해 바울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처럼 ‘사단이 길을 막았다’거나 ‘성령이 막았다’는 언급은 여기서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은 미래 선교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전에 장애물들이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바울이 서쪽을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입니다. 바울에게 서바나(스페인)는 땅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 세계 동쪽 지역에서 자신의 선교 사명을 완수한 후, 땅끝까지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로마를 중간 경유지나 교두보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수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선지가 서바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예루살렘을 걸쳐 로마로 가기로 결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서바나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로마에서 ‘어떤 열매를 맺기 원한다’라는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가 원했던 열매 중에 15장 24절에서 암시하는 로마 교회의 재정적 후원인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라는 표현에서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들릴 때 그들의 사귐을 통해 기쁨을 나누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라는 길 안내 또는 물질적 지원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먼 여행을 위하여 특별히 후자를 더 기대한 것 같습니다. ‘보내다’라는 말은 선교 지원을 의미하는 초대 기독교의 언어 표현입니다. 로마는 바울에게 이방선교를 완수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해야 할 사역들(25-28)

큰 꿈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허풍쟁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 꿈을 현실적으로 이루어 가는 사람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꿈을 어떻게 세워 갈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지금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명을 완수하는 일도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25-28)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에 곧바로 수행할 일이 있었습니다. 25-27절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왜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는 ‘성도를 섬기는 일’(25)을 하기 위해서 그곳에 먼저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있는 이방인 교회들이 모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갈라디아가 언급되지 않는 것인데, 고린도전서 16장 1절에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도 헌금할 것을 부탁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역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구제 헌금을 모아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25절과 31절에서 바울은 헌금을 모으는 것을 ‘섬기는 일’ 또는 ‘사역’으로 묘사합니다. 바울이 ‘가난한 자들’(26)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속해 있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주제헌금을 전달하는 것의 목적이 재정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쁨으로 얼마를 연보하였습니다. 여기서 ‘연보’로 번역된 단어는 ‘코이노이아’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재정적인 것에 나눔과 더불어 가까운 관계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생각했던 것은 재정적인 것을 나누는 넘어서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친교였습니다. 27절에 바울의 언급은 이 점은 더 분명히 합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같이 나눠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제헌금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유대를 견고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수적인 신자 중 자기의 이방 선교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간격과 분리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힙니다. 오직 관대한 형제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방인으로부터 물질적인 선물을 받는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온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어 이제 그 열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직접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의 전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삶(29-33)

프로 바둑 기사들은 한 대국당 평균 150개의 돌을 놓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왜 저기에 놓나?’하는 순간이 많지만, 프로 기사들은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돌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시간과 상황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시간과 상황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가끔 이해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30-33)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후 여행 계획을 다시 언급하며 서방으로 갈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라는 표현은, 고대 편지를 쓴 다음 왁스를 사용하여 붙이고, 보낸 사람의 반지를 눌러서 인증하던 것을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자기가 전달하려는 헌금을 통하여 코이노니아가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29절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친교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복을 가지고 로마를 방문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그 복을 가지고 로마에 가기까지는 넘어야 될 장애가 많아 있었습니다. 유대 지방에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기도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자기가 우려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건짐을 받는 것과 그의 섬기는 일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에 의해 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사도행전이 이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이유가 실제로 바울의 구제헌금이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가서 좋은 사인과 심을 가질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33절에서 축복의 기도를 드림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평강의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평안의 근원입니다. 이 평안 샬롬은 단순히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함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식지 않는 선교의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여러 지역 교회들을 개척하고 많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한 탁월한 사역자였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보다 더 충성하였기에 자신을 개척한 교회에 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룬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표들을 향한 다름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빚진 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비친 우리, 또한 주님이 주신 그 일들을 끝까지 충성하며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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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5-02)


은혜로 부르신 사명과 복음 전파

로마서 15장 14-21절


잘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잘하는 일을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대부분 이 두 가지가 상충되곤 합니다. 더욱이 우리 인생은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양자택일에만 머물지 않고 훨씬 더 복잡합니다. 괴테는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좋아하는 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삶의 태도로도, 신앙생활에도 매우 타당한 견해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그의 사도적 정체성과 그간의 선교 사역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아울러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려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는 사역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교 원칙을 소개합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신뢰(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이런 자긍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역 가운데 비참한 상황까지 겪었음에도 이런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

첫 인사 중에서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1:8). 이제 서신의 결론 부분으로 돌아오면서 바울은 다시 로마 교회 성도들의 삶에 대한 신뢰를 표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이제 로마서의 본론 단락을 그들에게 전한 이후에 더 강해졌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들이 ‘선함으로 가득한 것’을 확신합니다. ‘선함’이라는 단어는 매우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아마 이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외적인 모습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선한 삶은 성령을 따르는 행동의 패턴에서 나오는 것으로, 8:1-8에서 말하듯이 성령과 동행하면서 누리는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삶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모든 지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구속사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 등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 지식의 가장 정제된 표현을 그들은 지금까지의 로마서 단락을 통해 들은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서로에게 조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로마서 12:3-8에서 바울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가르쳤고, 로마서 14:1-15:13에서는 자신이 믿는 바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지체들을 품을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이제 그 능력과 지혜는 신앙공동체를 굳건히 세워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그 향후 계획(15-21)

성도가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드려야 할 제물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산 제물입니다. 먼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다른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15-21)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사명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1)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15-16)

15-21절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그 향후 계획 15절은 역접 접속사를 통해 14절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이 14-15절의 흐름입니다. 이것은 아마 로마 교회 내부의 문제를 다루는 14:1-15:13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오히려 담대하게 그러한 권면을 준 근거를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에서 찾습니다. 로마 교회 내부에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바울이 왜 ‘오히려 담대하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더 이해가 갑니다. 16절은 그 ‘은혜’가 하나님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그에게 주신 사도직을 가리킨다고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에서 그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직이 ‘은혜’라는 바울의 이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또 제의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은유적 의미에서의 ‘제사장’을 일컫습니다. 그는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받음직 하고, 또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구별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방인이라는 제물이 성령을 통해 거룩케 된다는 생각은 새 언약을 예언하는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의 배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성령으로 씻으셔서 구별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예언의 성취가 이방인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자신의 지난 선교 여정을 돌아봄(17-19)

본문에서 바울은 지난 선교 여정을 돌아봅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앞세우는 것을 주목해보시길 바랍니다.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그 일을 자신이 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 이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역사하신 목적에 대해서도 주목하라. 바울은 ‘이방인들이 순종하도록’이라는 부사구를 덧붙여 이에 답합니다. 로마서 1:5; 16:26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사역의 목적이 이방인들로부터 ‘믿음의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적 복음 전파의 목적을 언급하는 구절에서 바울은 예외 없이 ‘이방인들이 순종에 이르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를 순종의 행위와 분리된 ‘믿음’의 책으로만 읽으려는 이들에게, 로마서가 궁극적으로는 ‘순종’을 목표로 하는 책임을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리스도는 바울의 말과 행동을 통해,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하셨습니다(18c-19). 그 결과를 설명하는 문장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다시 주어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일하신 결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의 지역에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19b).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의 지역은 지중해 북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바울은 ‘퀴클로’라는 부사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원 모양으로’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아마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안디옥과 소아시아 지방을 거쳐 마게도니아 지방과 인접한 일루리곤 지역에까지 이르는 아치형에 가까운 동선을 염두에 두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완료시제 부정사 ‘페플레로케나이’를 사용하여 이 지역에서의 그의 과업이 완료되었음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사도적 생애가 1기 사역을 마치고 2기 사역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을 16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의 승천과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자비하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다음 세대의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3)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 사역하지 않는다는 선교 원칙(20-21)

20-2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애쓴다는 그의 선교 원칙을 소개합니다. 동사 ‘필로티무메논’은 ‘어떤 야망을 가지다’, ‘애쓰다’ 혹은 ‘무언가를 명예롭게 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로마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그의 말(1:15)이 보여주듯이, 바울이 이 원칙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키려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울에게 이러한 원칙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당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간 이가 바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20b절에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목적절을 덧붙입니다. 바울의 이 선교 원칙이 암시하는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지녔던 복음 전파에 대한 긴박함일 것입니다. 바울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긴박하게 임할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이르기 전에,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이방인이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그의 선교적 비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비전을 이사야 52:15 말씀을 통해서 재확인합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는 이 말씀은, 로마서 10:15에서 인용된 이사야 52:17 말씀, 그리고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이사야 49:6 말씀과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사도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이들이 모두 이사야 49-52장에 집중되어 있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동일한 사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다를지라도 언제나 이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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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5-01)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공동체

로마서 15장 1-13절


기업이 성공하는 데는 어떤 훌륭한 제품 하나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데는 어떤 프로그램 때문이 아닙니다. 기업이 성장하는 것은 어떤 좋은 프로그램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팀워크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데는 어떤 프로그램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팀워크인 하나 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팀워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로마서의 가장 큰 주제이자 바울이 품었던 위대한 열정은 복음 안에서 하나 된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15장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 중심 주제이자 결론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일어났던 실체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원리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강한 자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실천(1-6)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하나 됨’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나 조직에는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직 안에 구성원들이 다양하고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하나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요한복음 17:20-23).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구성원 간에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6)
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윤리 단락의 큰 그림을 제시한 뒤에, 12:3-8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조화롭게 감당해나갈 것을 가장 먼저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공동체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12:9-13), 그 사랑을 외부인들에게까지도 확장하는(12:14-21)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주었습니다. 14장 전체에서는 12-13장에서 강조한 메시지들을 모두 동원하여 로마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에 흩뿌려져 있는 1세기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제국의 압력과 이웃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회학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워갔던 작지만 강하고 인격적인 공동체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속에서 그 적대감과 압력을 함께 견디어 나가면서 신앙적 가치를 타협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1) 덕을 세워야 할 강한 자들의 책임(1-2)
1절에서 바울은 14장 전체의 논의를 정리하며, 신앙 공동체 속에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연약한 부분을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공동체 속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1절 하반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로마서 내의 1:18-32; 6:1-23 등의 본문에서 바울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죄성이 육체에 속한 욕구들을 좇아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것으로 표출된다는 점을 설명하였고, 8:1-8에서는 오직 성령을 따르는 사람만이 그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절은 그런 점에서 로마서의 본론 부분의 핵심적인 교리들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2절에서 3인칭 단수 명령법을 사용하여 ‘우리 중 각각으로 하여금 이웃을 기쁘게 하게 하라’고 선언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국 ‘선한 것’과 ‘덕’을 세우는 삶입니다. ‘선한 것’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선행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선한 것’은 14:16에서와 같이 복음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선한 선물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절 끝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라는 부사구를 덧붙입니다. ‘건물’이라는 의미의 명사 ‘오이코도메’는 상징적으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세우는 이미지를 항상 내포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기쁘게 하는 삶은 공동체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2)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그리스도의 모범(3-4)
3절은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는 삶의 모델로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로마서 속에서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아버지께 신실함과 순종함을 다 보여주신 분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시편 69:9은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읽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여러 대표적인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는 고백은 먼저는 십자가 위에서 비방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임한 그 비방이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는 성도들에게도 임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바울은 이전에 기록된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어 소망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인내’를 언급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머물러 있기 위해 비방을 당하신 그리스도처럼, 성도들도 아버지의 뜻에 머물러 있는 이상 같은 비방을 당할 것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인내’의 과정을 지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69:9과 같은 성경 말씀이 ‘위로’와 ‘소망’을 주는 이유는 그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결국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비방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참조, 5:2-4).
(3)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권면(5-6)
5-6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로마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내할 이유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같은 생각과 마음을 품게 하시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에 있음을 바울은 6절에서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6절에 등장하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동격 표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하게 계시 되었음을 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고, 그를 따르는 공동체를 낳았습니다. 본문은 그 작지만 소중한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우려는 헌신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마음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를 수용하라(7-13)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낮아지셨고 섬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7-13)
예수님을 본받는 하나 된 공동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서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할 때 뜻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 용납(7-9a)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의 시작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받다’(프로스람바노)라는 동사를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서로를 받으라’는 명령의 토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14장에서도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연약한 자들을 받으라’(14:1),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14:3)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이유를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부사구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인과 원수라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신적인 성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충만하게 드러났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8절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 자손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부르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언약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 그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는 할례의 추종자이십니다(8).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 언약의 복이 마침내 이방인들에게도 흘러갔다는 점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영적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9).
(2)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가족(9b-12)
본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실 것이라는 예언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9b절에서는 사무엘하 22:50과 시편 18:49을 인용하여, 열방 중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예배하는 유대인들(‘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신명기 32:43을 인용하여, 주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시편 117:1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 즉 오경(신), 역사서(삼하), 시편으로부터 열방으로 구성된 하나님 백성의 출현을 읽어냄으로써,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모든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실 것이라는 점이 성경 전체의 약속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이사야 11:10을 인용하여, ‘이새의 뿌리’에서 왕이 일어나 열방을 다스릴 것이고, 열방이 그에게서 소망을 찾게 될 것을 재확인합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으로 충만하기를(13)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에서도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통’(13)으로 묘사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소망을 주셨습니다(13). 예수님의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기쁨과 평화를 충만히 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으로 충만케 됩니다. 로마서의 본론 단락 전체(1:16-15:13)가 어떻게 종결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이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 소망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 받으라는 부탁으로 로마서의 본론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진실하심을 알리기 위해 낮은 곳으로 오시고 비천한 자들을 사람으로 품으셨습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이스라엘의 주께서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오시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을 유대를 넘어 온 이방에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긍휼하신 통치가 온 열방의 소망이 되게 하시며 온 인류로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받아주심에 감사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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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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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02)


죽은 자와 산 자의 하나님

로마서 14장 7-13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일반적인 상식일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라면 기독교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외골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는 주장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십자가를 넘어섰는가?’ 또는 ‘넘어서지 못했는가?’가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실체적인 문제에 대해 논쟁과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연약한 자들을 비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날을 기억하면서 삶을 아름답고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언어가 거룩하게 기름 부음받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7-9)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의 시작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받아 들리고, 같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잘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7-9)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⑴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7)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7).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 판단, 시간, 재물 그리고 건강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하셨습니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46)

하나님 나라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 세상에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삼층천 하늘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장). 하늘의 것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이러한 모습이 있는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⑵ 자신을 위해 죽지 않음(8)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목숨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주권이 있습니다. 최근에 연예인들이 자살하니깐 연쇄적으로 모방 자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종 삶이 어렵다고 자살하는 경우가 뉴스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중에 무슨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잠시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생명을 버리는 일은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주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몸과 영혼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 하셨으므로 하나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혹시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서 41:10)

이제부터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할 때, 편안한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더욱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죽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⑶ 주님을 위해 사는 존재(9)

성도들의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쾌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삶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생명에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의 삶에 주인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만남과 모든 물질들을 소중하게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때, 실수를 하게 됩니다. 욕심에 집착하게 됩니다. 욕심이 성장하면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주님을 놓치면 금방 넘어지게 됩니다. 성도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까? 어디를 향해 나가야 합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생명의 권한은 주님의 손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 모두의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날(10-13)

공동체의 하나 됨은 각자 자신보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더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찾아옵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우리도 서로 인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0-13)

바울은 다른 지체를 비판하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경고했습니다. 자기 신앙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지체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다른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 날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한다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⑴ 하나님 앞에 설 날 기억함(10)

이제 바울은 형제우애를 위해서 마지막 심판의 날을 권고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 앞에 설 날 올 것입니다.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그날에 각자 과거의 살아온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의 삶이 평가되어 질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면 다른 지체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두 설 때, 정확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태복음 10:3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때도 공의롭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⑵ 성경적인 구약의 근거(11-12)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이사야 45:23) 말씀을 인용합니다.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를 토설해야 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해 줍니다. 바울은 이사야 말씀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서 소개해 줍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주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 형제 사랑 등의 주제를 어떻게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 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이야말로 ‘주를 위하여’라는 내적 기준의 실제적 구현에 해당할 것입니다.

⑶ 연약한 형제를 배려하라(13)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같아야 한다는 것은, 몸은 지체가 같아야 한다고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몸의 모든 지체가 같아야할 이유 없습니다. 모든 손과 발이 발처럼 되어야 하면 사람이 아니라 네 발 가진 짐승처럼 기어 다녀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심판의 날을 의식하면서도 계속해 다른 지체를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스스로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판단하기보다 사랑으로 연약한 부분을 감싸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사역들의 모든 시시비비의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교제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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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01)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연약한 자들

로마서 14장 1-6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있다면, 말씀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말씀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듣고 싶고, 더 가까이 하고 싶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는 열망에 가득찰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은혜의 초대로 함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안에 있던 형제들과의 관계들을 지적합니다. 음식 문제와 절기 문제로 빚어졌던 갈등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받으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세우시는 권능은 주님께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1-4)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남을 비판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고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성경은 서로를 향한 비판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비판할 때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가급적 비판하는 일을 삼가하면 좋겠다고 말씀을 전개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성도들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⑴ 연약한 믿음을 용납(1a)

바울은 먼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라’고 권고합니다. 믿음이 있지만 아직까지 연약한 사람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실수나 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점들을 수용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원하는 수준에 요구하는 사항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판단하고 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들과 생각과 견해가 다르다고 언쟁을 통해서 바꾸려고 해서는 교제를 맺을 수 없습니다. 처음 교회에 출석했을 때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은 모든 교회의 환경이나 예배가 매우 낯설습니다. 그들은 주기도문이나 사도행전도 더 나가서 헌금하는 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것 모릅니다. 모든 낯선 가운데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 성도들은 초신자를 위한다면 그들의 시선으로 보고 응대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연약함이나 미숙함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 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확실하고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의심(疑心)하고 회의(懷疑)하더라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러 가지를 질문하더라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항을 가지고 헐 트거나 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에게 ‘틀렸다!’,‘잘못됐다!’라고 말함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할 때는 상대를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비판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충고할 때 그 충고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준비 안됐다면 비판은 아무리 좋은 비판일지라도 삼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그 충고의 말이 그에게 가시가 되어서 박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지적을 받음으로 믿음에 낙망이 생기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생깁니다.

⑵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림(1b)

바울은 다음으로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믿음의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신앙의 훈련에 참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의 깊은 통찰의 내용을 나누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질이 불같이 급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판 하나를 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마다 그 나무판에 못 하나씩 박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들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되자, 아버지는 이번엔 화를 한 번씩 참을 때마다 나무판에 박힌 못을 빼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면 나중에 사과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잘 받아주고, 믿음이 원하는 수준만큼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들이 그런 생각을 했는가를 품어주고, 그리고 성숙한 성도들은 연약한 성도들의 눈높이로 내려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사람들이 성장할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에는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장한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고 기다리면서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시간과 때가 있는 성숙(2-3)

성급함으로 망치는 것을 콩나물국과 시루떡만이 아닙니다. 짐승이나 식물들도 성장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한 순간에 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우유를 먹을 시기가 있고, 채소를 먹을 때가 있고, 그리고 고기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에서도 더욱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2-3)

사도 바울에게 보고되는 문제 중 하나는 로마 교회 안에서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고기를 먹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비판하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습관에 따라서 짐승을 잡으면 이방신에게 들려진 후에 판매되었기 때문에 우상 제물로 바친 고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기는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는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상대를 헐뜯고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니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셨는데, 왜 너희들은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면 자신과 입장이 다르더라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각과 견해로 차이로 부딪친 것은 아무런 명분이 없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의 특징은 서로를 상대방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안에 권면하면서 성숙한 과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비판의 대상이 보인다면, 인내하시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판단의 주인이신 주님(4)

성도들은 영적 성숙에 있어서 서로 다른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태도나 행동을 결정짓는 가지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들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 중 첫째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한 가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비판할 수 있지만,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을 조절하라고 말씀합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하인은 그 주인이 알아서 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하인까지 간섭하는 것은 월권(越權)입니다. 그 주인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권리와 범위 안에서만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었고, 멋있게 주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또 ‘반석’이라는 ‘베드로’라는 멋진 이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에 베드로는 교만한 일을 행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니깐, 베드로는 주님께 십자가를 감당하지 말라고 참견했습니다.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베드로의 범위를 넘어선 교만의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베드로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서양 속담에 “상대방에 신을 신어보기 전에는 걸음걸이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서 다리를 절고 가는데, 그 사람이 장애가 있어서 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옛날에는 구두를 만들면서 못을 박았습니다. 그 못이 삐져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던진 말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우리 속마음과 동기를 보시고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편협하게 한두 가지로 속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정확하심과 넓으심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편이든지 넉넉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소위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약의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의 눈에 구약의 율례를 따라(레위기 11-16장)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비쳐졌습니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종종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로 성도들끼리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며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시했습니다(4).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5-6)

모든 영역과 삶의 경험 속에서 각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갖는 책임은 중요한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 앞에 있으며,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께 맡겨졌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 그 일이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를 위한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5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5-6)

구약 율법과 규례의 한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극복되어 가던 초대교회 안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일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 규정된 절기들을 옹호했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을 똑같이 강조했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강조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준이 되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 곧 주일이 거룩한 날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어떤 날을 따로 구별해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이 된 셈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감사함으로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격이 없는 연약한 존재인데도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여진 존재들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존재로 다른 사람들을 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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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3-02)


그리스도인의 생활하는 법칙

로마서 13장 8-14절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도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든지, 부모님이 자녀를 만나든지,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 만나든지, 어떤 만남도 반듯이 마지막 있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우리를 마지막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율법의 내용을 줄인다면, ‘사랑’입니다. 그것을 둘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있는 곳에서 거룩하고 빛 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한 율법 완성(8-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즐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때로는 즐김에 도를 넘어서 욕심 때문에 불건전하고 불량하게 즐기려고 죄를 짓는 일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이러한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8-10)

구약의 율법에는 다양한 계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계명들을 요약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⑴ 서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8)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다섯 번 사용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단락의 주제가 ‘사랑’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2:9-21에서 ‘거짓 없는 사랑’을 신앙 공동체 안팎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권면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사랑’이 하나님 백성이 실천해야 할 윤리의 핵심적인 원리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① 받을 사랑(8a)

바울은 ‘사랑’에 대해 받을 사랑과 나눌 사랑으로 말합니다. 첫째는, 받을 만한 사랑은 받아야 합니다. 그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때가 있고, 채우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죄성 때문에 사랑은 점점 고갈됩니다. 사랑이 갈증 날 때, 세상 속한 헛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실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사랑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때론 시간이 가면서 변질됩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38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편 37:38)

② 주는 사랑(8b)

다음으로 사랑을 넉넉히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권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에 관한 성경의 말씀입니다. 채워져야 넘치는 사랑의 에너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변에 사랑해야할 대상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2)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이 충분히 채워지고 소비되어지면, 사랑이 순환되어 건강하게 작용해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충분히 받고 충분히 주면 건전한 사회가 형성되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길 원하십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에 빚지시길 바랍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에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⑵ 이웃을 사랑한 진실한 사랑(9-10)

‘사랑’이란 무엇인지 또 다른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성취, 완성하고 율법이 사랑을 통해서 요약된다는 것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① 소극적인 사랑(9)

그래서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간음하지 않으며, 살인하지 않으며, 도덕절하지 않습니다. 악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것들을 끊는 것은 거짓 없는 사랑뿐입니다. 탐욕이 올라온다 할지라도 진실한 사랑하기 때문에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죄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죄성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올라온 지 모릅니다. 매일매일 회개를 해도 말씀을 접고 세상에 나가서는 이러한 탐욕적인 일들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을 끊을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이러한 일들이 더욱더 팽배해지고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가지고 승리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② 적극적인 사랑(10)

또 적극적인 의미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본과 가르침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곧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서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더욱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모두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 빚을 갚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웃에게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말씀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시작도 사랑이고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성도들의 시작은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도 사랑으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율법의 온전함과 완성됨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대해 규정하는 율법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해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보장하는 것과 관련되고, 그 조항을 실현하는 원동력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와 같이 여기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특별한 절기 때에만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사는 삶(11-14)

‘말세’ 또는 ‘종말’이라는 것은 긴장을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에게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마지막을 고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세에 대한 권면으로 초대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1-12)

사도 바울은 다음으로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합니다. 이전의 삶의 모습은 밤과 같이 어두웠던 밤과 같이 어두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낮과 같이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 주님을 만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말의 시기를 말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카운트다운(countdown)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말세를 준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⑴ 종말에 대한 경고(11a)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11a) 성경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 ‘종말은 현실이다.’, ‘종말은 사실로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모든 피조 세계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종말을 하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에 현실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⑵ 밤이 깊을수록 깨어 있어야 함(11b)

11 …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b) 종말이 오기 때문에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잘 때가 아니라 깰 때입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일들을 벗어나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깨어 있으면 긴장을 줍니다. 무엇이든지 준비해야하면 준비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영역에서 깨어나야 할 영역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로서 준비해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⑶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성도들이 깨어 일어날 때, 어두움을 벗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워할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마지막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두움의 세력인 죄와 마귀에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속한 행실을 하지 말고 빛과 같이 행동하며(12-13),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말미암아 종말이 더욱 가까이 왔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이나, 밤이 깊어 낮이 가까이 왔음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이와 같이 종말적 현실에 대한 인식은 성도들에게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나 빛의 갑옷을 입고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어둠의 일을 버림으로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등의 삶을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권고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거지 옷은 거지의 신분이고, 군복은 군인의 신분으로 절도가 있습니다. 예복을 입으면 예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백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의 옷, 진리의 옷을 입으므로 말세를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질 것입니다. 내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참 신앙인의 삶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은 종말론적 현실을 인식하고 현실에서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이 통치하는 절망의 세상에 의와 생명의 통치를 구현하러 오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아무리 갚아도 충분하게 갚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이웃 사랑으로 보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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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3-01)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

로마서 13장 1-7절


중년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월요일마다 ‘애국조회’때,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의식을 행했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이렇게 태극기를 보거나 국가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뛰면서 새로워집니다. 교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상 기도합니다. 나라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요, 이 세상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갈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따라서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단지 정치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말했다면 13장에서는 사회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국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권세 아래 순복함(1-2)

그리스도인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한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2)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황제의 통치에 의해 신앙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르쳐준 지침의 핵심은 로마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폭력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현실을 떠나서 성도들만의 공동체를 이뤄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본문 단락에서 말하는 ‘권세’는 세속 정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위의 근원이십니다. 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5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16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언 8:15-16)

이 세상에 있는 권세의 기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만물이 주로부터 나오고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름과 모든 권세, 모든 신 위, 그리고 모든 나라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세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입니다(다니엘 4:17,25,34-35). 그래서 권세 아래 굴복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줍니다. 이들을 통해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십니다. 이러한 로마서의 권면은 잠시 혼란스럽게 합니다. 성도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첫 핍박이 네로 황제에 의한 것(주후 64년경)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제국이 ‘본격적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한 것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됩니다. 로마 제국의 종교정책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로마는 사실상 모든 종교를 수용하려 햇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종교적 핍박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에 대한 제국의 핍박 또한 국지적, 한시적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제국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려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오스 칙령은 제국의 정책에 따라 교회의 구성이나 생태계가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속 정부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 권세에 대항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각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통치자이시고 인간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을 세우시고 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은 심판을 자취(自取)한다고 권고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세상과 무조건 분리되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살면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쉽게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고, 정치와 신앙을 분리하는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질서(3-5)

하나님께서 세상 주관자들에게 권세를 주셔야만 합니까? 사람들은 공동체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권세는 질서를 위해서 공동체의 균현과 조화를 이해 하나님께서 주신 힘의 균형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지킬 대, 질서가 지켜지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유익이 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입니다.

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3-5)

하나님께서는 권력자들을 통해서 악을 제어하고 선을 세우므로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또한 권력자들은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데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공평하며 진실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⑴ 권세에 대한 불순종의 심판(3-4)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최후 심판대 앞에서 얻게 될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세속 권세를 통해 집행되는 악한 행동에 대한 구체적 보응이라고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들에게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권세를 단순히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에게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른 것은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됩니다.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권세 아래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권세의 딜레마는 권세에 대해 저항감을 가진 것은, 그 권세자가 공공의 질서와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사리사욕과 만족과 탐닉을 위해 사용할 때나 부조리가 있을 때, 그 권세에 대해 굴복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실 모든 공동체 안에서 질서가 충돌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고 권고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선한 것 아래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목적이고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양(羊)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양심 아래서 선한 일을 행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게 하는 것, 생명을 더불어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권세와 질서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것은 권세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퇴보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함을 얻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집단만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풍성함 얻고 성장 가운데 나가게 하기 위함이 권세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권세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과정과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 뜻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위해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질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가진 사람이나 권세 아래 있는 분들이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질서와 균형이 생길 것입니다.

⑵ 권세에 순종해야 될 이유(5)

바울은 국가에 순종해야 될 이유들에 대해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5)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국가(권위)에 대해 순종해야 될 이유를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를 인하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하기 때문에 이 질서를 어기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진노’는 곧 악을 행하거나 세속 권위에 불순종함으로써 그 권위로부터 얻게 되는 처벌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과 질서 가운데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것임으로 심판에 대한 대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인하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인 질서와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만물 안에 하나님의 질서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순복하고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이라는 것을 모두 주셨습니다. 그 양심의 법칙을 따라서 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나님의 질서를 떠나면 죄책감(자책감)을 줍니다. 순종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폭행이나 살인 그리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양심에 찔림을 받습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힘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서와 권세 가운데 있지 않으면 양심이 발동해서 괴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 땅에 권세를 세우셔서 질서를 바로 잡으십니다. 따라서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을, 부모님과 선생님을 존경하며 잘 순종해야 합니다.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6-7)

그리스도인은 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권세에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백성으로서의 책임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책임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세금입니다. 바울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으로 납세와 의무를 지키려고 합니다. 나라의 통치자들은 정직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하며,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권세에 순종하고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6-7)

바울은 이제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고 세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세금’은 국가에 대한 백성의 의무입니다. 세금으로 공적으로 잘 사용해서 개인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간접자본(도로, 철도, 공항 그리고 도시 등)을 건설하고 유지보수를 합니다. 모두 공공의 질서와 선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니 그 의무를 항상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라고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세금을 집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세금은 정당하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 사람에게도 세금을 사용하게 되는 사람에게도 조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탈세로 인해 세상의 경제 질서가 무질서해졌고,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이때 국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금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비양심적인 책임 이행은 자신을 힘들게 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멍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물질에 대한 깨끗한 양심으로 세금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끗한 양심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때 국가는 건강해지며, 동시에 국민은 튼튼한 국가 안에서 보호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리라’(마태복음 22:21)는 말씀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국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국민으로서, 학생으로서, 자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대로 하라고 순복하면서 하나님의 질서와 기능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의무를 마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착복하거나 태만하지 말고 권고하십니다.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이 해야 할 국가와 권위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뜻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순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조화로운 유익과 풍성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국가와 권위를 주신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라는 영적 원리를 기억하고, 당신 위에 세우신 리더에게 순종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순종의 마음으로 세우신 리더에게 온전히 순종할 때 질서를 통해 온전한 기쁨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을 존중하며 잘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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