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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4-02)


공생애 시작한 고향 갈릴리

누가복음 4장 14-30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종종 실수를 합니다. 작은 실수는 웃음을 짓게 하지만, 큰 실수들은 삶을 바꾸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 중에 많은 실수는 자신의 주변 사람에 대한 가치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을 때 비로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살아계시면 다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크게 후회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 4:14-9:50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내용을 기술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4:14-30은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모습이고 그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희년을 실현하는 것이며(4:14-21), 고향의 반대와 살해 위협은 앞으로 있을 부정적인 반응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14-15)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그 뜻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소망합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14-15)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과 마귀에게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일은 그의 공적 사역을 위한 예비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갈릴리 사역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네 부분으로 갈릴리 사역(4:14-9:50),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사역(9:51-19:44), 예루살렘 사역(19:45-21:38), 고난과 부활(22:1-24:53) 등으로 나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 진술입니다. 14절은 갈릴리로 돌아간 예수님에 관한 서술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구절에서 ‘성(聖)’과 ‘능력’이 나란히 나타납니다(1:35). 여기서 초점은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인한 능력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능력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실 것을 내다보게 합니다. 15절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간략하게 진술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서술과 유사합니다(2:52).

이 간략한 진술은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하게 합니다. 먼저 그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실행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의 능력으로 성취됩니다. 한편, 그의 사역은 가르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역입니다.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역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사역은 좋은 영향력이 드러나고 널리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16-21)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회의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합시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16-21)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성취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1) 이사야 글을 낭독(16-19)

 

나사렛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평소처럼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으로 회당 사역을 언급합니다. 16절에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라는 구절은 회당 에배의 순서를 담당하여 예언서를 읽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한 이사야 61:1-2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이사야서 61:1-2)

 

이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구절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수세 시 성령 강림(3:22), 그리고 그 강림 후에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한 임재(4:1,14)와 연결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을 포괄합니다. 또한 이것은 누가복음의 신학적 강조점의 한 요소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원문과 누가의 인용문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문에서는 ‘가난한 자’와 더불어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문맥에서 가난한 자는 이방 민족의 압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와 더불어 언급되는데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누가복음은 소외된 사회 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강조점은 마리아의 찬양(1:52-53)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세상적인 가치의 역전을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가치의 반전을 기대케 합니다.

19절의 내용도 이사야 원문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사야 원문의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라는 구절은 인용문에서 생략됩니다. 이것은 분명 누가의 의도적인 생략입니다. 복음의 보편성 차원에서 이제 이방 민족의 심판의 날에 대한 언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2) 청중의 반응(20-21)

 

이 말씀을 읽다가 멈추시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의 ‘주목하여 보더라’는 그들의 눈이 예수님께 고정되었다는 것으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21절은 관심을 보인 청중에 대한 예수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하였습니다. ‘주의 은혜’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이 그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한 예수님(22-30)

우리는 종종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이를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22-30)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에게서 놀라움을 받았으나,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쳤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분노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해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1) 청중의 증언(22)

 

예수님의 사역은 회당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봉독하신 후에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들은 청중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말씀은 갈릴리 고향 사람들이 듣기에도 “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탄할 정도로 놀랐습니다(마 13:54). 그러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증언하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호합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증언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상 부정적인 증언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22절에 언급된 놀라움(1:21; 2:18)과 질문은 그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청중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설교 후 청중의 과격한 분노도 22절에서의 반응과 상응합니다. 그리하여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을 들은 자들은 그에 대하여 비판적인 증언을 하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감탄이나 놀라움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경멸과 비판의 부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자신과 같이 살고 있는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는 너무 낯익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2) 예수의 메시지(23-27)

 

23-27절은 예수의 회당설교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예증하는 부분입니다.

23절에 속담이 인용됩니다: “의사야! 네 자신이나 고쳐라.” 이러한 태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며 조롱했던 관리들의 태도와 동일합니다(23:35). 결국 이 태도는 선지자를 윽박지르는 자세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견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대로 여기 고향에서도 행하라.” 그리하여 24절에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5-27절은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설명하시는 내용인데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 엘리사 시대 나아만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예증을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누가복음은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한 믿음의 사람 백부장(7:9)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묘사된 사마리아인(10:29-37)은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과 이방인 백부장의 접촉은 유대인의 장로들에 의해 중재됩니다(7:1-10).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선 백부장이 중재자 없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서술됩니다(마 8:5-13). 누가복음에서 이방인은 더 이상 복음에서 제외된 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2:10)이고 구원은 만민 앞에 준비된 것(2:31)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2:32)으로 선포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3:4-6; 참조. 사 40:3-5). 따라서 누가복음은 복음의 보편성을 추구하여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민족, 신분, 성별과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역설합니다.

 

(3) 청중의 반응(28-30)

 

본문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크게 화를 내다’라는 동사를 통해 분노나 놀라움 등의 강렬한 감정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나가서 낭떠러지에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분노한 군중들을 헤치고 떠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극도의 혐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혐오뿐 아니라 방화나 살인, 테러 등의 극단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한 반응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 결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함을 잃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미치며, 우리는 겸손하게 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며,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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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4-01)


시험 받은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4장 1-13절


 

다른 사람을 꾀여 그릇된 마음이나 그릇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을 ‘유혹(誘惑)’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혹 앞에서는 그럴듯한 수식들이 붙습니다. 예를 들어서 ‘달콤한 유혹’, ‘화려한 유혹’, ‘아름다운 유혹’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결말은 비참한 파멸과 불행입니다. 종종 많은 존경과 인정을 받던 사람들이 한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동안 쌓아왔던 명성과 인정을 모두 잃고 망가지는 모습들을 목격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 예수님의 시험은 세례의 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시 2:7)과 하나님의 종(시 42:1)으로 밝힙니다. 세 번의 시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아들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성격의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성취할 것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1-2a)

이스라엘의 본 역할이 자기들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선민의식이 그들을 망하게 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선택받은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은 점점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점점 공식적인 사역의 무대로 등장하십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1-2)

 

3장에서 예수님께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세례 요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했던 분으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38).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3:22, 4:14,18).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사건의 재현입니다. 홍해 후에 광야로 들어가서 40년 동안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가셨습니다(1).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되었던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방황하고 시험 받은 40년 동안 계속 되었던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적적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시험을 받는 기간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시고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두 가지가 흥미롭습니다. 광야 시험기간 동안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령께서 이끄신대도 불구하고 마귀가 시험했다는 사실이 특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광야 세상의 특징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도우시지만, 그렇다고 사탄이 쩔쩔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살던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갈지 이제 선택해야 됩니다.

 

성도들이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사단은 큰 시험꺼리들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만나면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이 점점 더 성장해집니다.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3-1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안 믿는 사람들보다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든지 수긍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신앙은 상식이나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의 장면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3-12)

 

마귀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매우 굶주리고 연약해진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인간으로 금식을 하신 것이 그 고통이 덜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을 세 가지를 통해 시험합니다. 이 시험은 우리들 꺾을 대표적인 시험입니다. 시험에서 승리하셨던 예수님을 보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육체적인 소욕의 시험(3-4)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먹을 것이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마귀가 배고픔 사람에게 양식으로 시험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격합니다. 마귀의 말은 부드러운 말처럼 느끼지만 강력한 무기가 숨겨 있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3)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돌들에게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가 주장하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굶고 있고,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없으면서 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말 중에는 틀린 것이 하나 없습니다.

마귀가 했던 첫 시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유한 권위와 특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마귀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단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과 순종심을 시험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4)고 신명기 8장 2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광야에서 빵이 없다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참 생명은 떡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세속적인 영광의 시험(5-8)

 

마귀가 두 번째 유혹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 국을 다스릴 수 있는 영광과 권세로 유혹합니다. 영광과 권세를 싫어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귀는 이것으로 유인한 것입니다. 마귀는 잠시 동안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유혹합니다. 마귀에게는 그만큼 마귀의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다스릴 권위와 통치자가 누리는 영광을 누리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마귀의 통치는 폭력적인 통치, 억압적인 통치입니다. 바로의 통치와 그의 영광, 로마의 통치와 그의 영광이 바로 마귀가 준 통치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왕이 되는 길을 매력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절하면’으로 번역되었는데, ‘마귀를 숭배하면’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경배하면 손쉽게 세계의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이번에서 성경 신명기 6장 13절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마귀가 주는 권력은 안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과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마귀는 하나님 밖에도 권세와 영광을 얻을 길이 얼마든지 있다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성공 후에 하나님께 돌아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얻어진 권세이기 때문에, 대부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되어집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말씀에 대한 믿음의 시험(9-12)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명합니다. 놀랍게도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했던 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시험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하나님만 경배해야 할 성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합니다.

 

11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2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12)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을 왜곡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귀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왜곡된 말로 유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넘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말씀은 편리에 따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순종’의 대상입니다.

 

마귀는 ‘말씀하신 대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에서 뛰어내리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하실 것이라고 시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우리에게 낯선 시험도 아닙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도(자식에게 아픔을 주시고, 직장에 이렇게 어려움을 주시면서, 우리 교회를 지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원망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전처를 밟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단호하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크기와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게 시험하는 것입니다.

 

마무리(13)

긴 터널이라도 마지막 출구는 있는 법입니다. 순간순간마다 괴롭히던 시험들이 지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결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13)

 

마귀는 모든 시험을 마친 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떠나지는 않습니다. ‘얼마 동안’은 ‘적절한 때가지’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시험할 것입니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겁낼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아들인 사실과 고난의 종으로서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역을 수행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시험의 과정에서 보여주신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세 가지 시험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과 관련 있습니다. 시험에서 나타나는 교훈을 이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해본다면, 신자들에게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의 뜻과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한을 오용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신뢰심을 바탕으로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때를 기다립니다. 마귀는 쉬지 않고 시험할 것이기에, 신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 할수록 마귀의 시험을 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되어지면 강한 성도되어지면, 마귀는 떠납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어떻게 유혹하며 시험하겠습니까? 마귀의 전략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이 유혹을 승리하는 비결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활화될 때, 마귀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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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3-0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3장 18-38절

 

 

사람들은 옷차림이나 겉모습으로 대부분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수수한 옷차림이나 평범한 옷차림을 입고 있으면 낮게 잘못 판단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화려한 옷차림과 뛰어난 외모를 보고 높게 판단했다가 스스로 속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함께 사셨다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세례는 죄씻음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 가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 강한 이를 소개한 요한(15-17)

우리를 변화시키는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궂은 소식’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겸손함이 없이는 변화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도 없습니다. 모세는 왕궁에 있는 세상의 능력으로 덧입었지만,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낮아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5-17)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광야에 몰려 온 백성은 임박한 심판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3:10-14) 요한이 ‘선지자’를 넘어서 ‘그리스도’가 아닌지 궁금해 했습니다(15). 이스라엘의 자유를 소망하며 해방의 통로인 광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해방을 이끄는 ‘그리스도’(기름 부음받은자)로 세우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보다는 다른 한 사람을 지위와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합니다(16-17). 첫째, 그리스도로 오시는 이는 요한보다 강한 분이기에 요한은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되지 못합니다. 당시 주인이 식사하려고 앉을 때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하인이 몫이었습니다. 요한은 오시는 이와 자신의 지위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둘째,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 용서와 구원을 상징했습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정화의 역할을 합니다. 씻음 받기를 거부하면 심판으로 귀결됩니다. 회개하는 자는 세례를 받고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세례를 거부합니다. 요한은 실제로 죄를 용서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물 세례는 죄 용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과 불은 물과 같은 정화와 씻음의 기능을 의미합니다. 다만 물 세례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성령과 불 세례는 실제로 구원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원의 상징인 물 세례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와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들은 곳간에 모이는 알곡과 같게 됩니다. 반면에 요한의 경고를 거부하여 예수님의 불과 성령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쭉정이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누가는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요한이 회개를 외치고 그리스도가 시작한 나라에 초대하지만, 그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태어나 자랐고 일생토록 광야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고 있어도 구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도 자신은 구원하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요한은 구약의 예언대로 태어나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7:26-28),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만 향하게 했습니다.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빌미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투옥된 세례 요한(18-20)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면,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인 요셉의 아들로만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구원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복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방방곡곡 구분 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요한처럼 누구에게든지 담대하게 전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길 바랍니다.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18-20)

 

요한은 16-17절의 내용 외에도 많은 경고와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으며,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가 왔다는 소식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모든 계층에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고 권력자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에 알맞은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뿌만 아니라 분봉왕(tetrach) 헤롯의 잘못도 책망합니다. 갈릴리 지역의 권력자인 헤롯은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악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헤롯의 악은 절대 권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경고(9)에 예외를 두지 않았고, 헤롯의 범죄를 단호히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악’(포네로스 πονηρός, 19)이 지배하는 나라를 물리치는 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투옥시키는 악한 일을 또 다시 행했습니다. 요한은 기쁜 소식을 전했으나 이 일로 참수형으로 소명을 다할 것입니다. 요한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생애는 세례와 투옥으로 요약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21-2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세례를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죄 씻음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같이 되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기도의 삶이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21-22)

 

누가는 다시 시신을 광야의 요단강으로 돌립니다.

광야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주실 자인데도 당신이 친히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백성과 동일시하십니다. 죄인들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는 예수님의 낮아짐을 의미하며, 그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기도하는 중에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하늘이 열렸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늘이 열리면 하늘의 비밀이 계시되고 천상의 존재가 강림합니다(예. 사 64:1). 여기서는 예수님의 정체가 하늘로부터 알려지고 성령께서 강림하십니다. 둘째,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임하심을 ‘비둘기 같은 형체로’라고 함으로써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실제로 경험했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비둘기가 새로운 창조를 알린 것처럼(창 8:8-12; 참조. 창 1:2의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 곧 회복의 나라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 사실을 입증합니다(사 61: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에게 임한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의 소리는 구약의 언어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시 2:7)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사 42:1)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으로서 아들의 사명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죄인처럼 낮아져 세례를 받으십니다. 베들레헴의 여물통에 태어나신 모습처럼 멸시와 수치의 자리까지 낮아져 죄인들을 섬기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실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며 고난의 길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왕의 대관식 모습을 보여주는 세례에서 예수님은 수치와 고난의 길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 시작되고 확장됩니다.

 

예수님의 계보(23-38)

세상이 자신보다 더 칭송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부인하려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곁모습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축복의 자리를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실수한 것이며 더 낫다고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입니다. 스스로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겸손히 내려오셨습니다. 그 과정을 예수님의 족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23-38)

 

누가는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고 나서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합니다. 첫째, 독특하게도 계보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아담에까지 올라갑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입니다. 계보에는 77명의 이름이 나오고 인간의 맨 위가 아담이며 78번째는 하나님입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족보를 통해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나옵니다. 이 족보들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달리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연결을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아들로서 온 인류와 결속된 아들이며(롬 5:14; 고전 15:22, 45-49), 참 인간입니다. 아담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23절의 ‘여겨진 것처럼’(호스 에노미제토 ὡς ἐνομίζετο)은 사람들의 이해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 즉 평범한 인간으로 이해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습니다. 둘째, 누가는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통치자들(예. 솔로몬)의 명단을 의도적으로 뺏습니다(스불바벨과 스알디알만 예외). 누가는 두 번째 책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행 13:16-37)에서 천 년을 뛰어넘어 다윗과 예수님을 연결합니다.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통해 그가 초월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과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임을 강조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은 단지 메시아 예수님을 예배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이지만, 그가 메시아인 소식은 모두에게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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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3-01)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누가복음 3장 1-14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변화하는 것은 쉽지 않고 그만큼 대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행해왔던 것에 익숙해져 있고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익숙하고 편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익숙하고 편한 것이 더 병들고 나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 3:1-4:13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준비에 해당합니다. 탄생 내리티브에 묘사된 요한(3:1-20)과 예수님(3:21-4:13)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준비하는 이야기에서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3:1-14은 요한을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는 선지자로 소개하고, 무엇이 회개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1-6)

말라기 이후로 400년 동안 가나안 땅은 아니 전 세계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빛이 등장했을 강조합니다. 어두운 세계에서 작은 희망의 불빛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빛은 전 세계를 태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사람들의 화려한 궁궐이나 성전이 아니라 초라한 광야에 임하게 되어집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1-6)

 

모든 사물은 역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다할 때는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합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안에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요한을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1-6절은 사가랴가 아들 요한에 대해 예언한 내용이 실현되는 것을 설명합니다(1:76; 1:16-17).

 

(1) 시대적인 배경(1-2)

 

누가복음 2장과 3장 사이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약 30년이 흘러,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30세가량이 되었습니다. 이제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사역을 거론하기 전에 시대적인 상황을 길게 설명합니다(1).

 

세례 요한이 선지자의 소명을 실행할 때는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 유대의 통치자 빌라도, 팔레스틴의 세 분봉왕,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이 패권을 쥐고 있었습니다(1).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에 주인으로 지배자들입니다. 왜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들은 세상에 성공과 실패, 생명과 사망의 법칙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것이 살길 이고 출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배경이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배경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기들이 이 세상 질서를 만들고, 자기들 중심으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말하는 권력자들이 있는 곳에서 사역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요한이나 예수님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받아 들린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틀렸고 예수님께서 맞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지배하던 이들이 가장 화려한 공간에서 권세를 행사할 때, 광야에서 지내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2). 기득권을 상응할 수 있는 성전이나 궁궐이 아니라 광야에 임한 것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질서가 작동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입니다. 선지자의 활동을 당대의 정치 상황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구약에 근거합니다(예 삼하 7:4; 24:11; 왕상 12:22; 13:20; 왕하 20:4; 미 11:1; 욘 1:1; 슥 1:1; 사 38:4; 렘 1:1-4; 겔 1:3). 이처럼 선지자의 소명과 권능을 받은 요한은 힘과 부가 지배하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곳을 예고한 선지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종교 권력을 행사하는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 있는 가난하고 경건한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 권력과 지위에 심취한 종교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사용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고독하게 살았던 요한처럼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명에 사로잡혀 광야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종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은 이런 사람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로마제국과 팔레스틴이라는 시회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했고, 결국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선지자지 소명은 공적인 영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3-6)

 

요한은 요단강 근처에서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3). 그의 세례는 죄사함을 줄 순 없지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회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회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죄 사함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고, 세례는 해방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물에 들어가는 세례는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4-6절에서 누가는 요한의 선포를 이사야 40:3-5을 인용해서 입증합니다. 아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3-5)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으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즉 해방을 경험하기 시작한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백성을 구원하고 환영하기 위해 광야로 오셨던 것처럼, 주(=예수)께서 광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주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1:17, 76; 3:4). 구약의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을 이제 예수님께서 ‘주’로서 행하실 것입니다(1:43, 76; 2:11). 그리고 ‘그의 길’, 곧 예수님의 길을 곧게 해야 합니다(1:76, 79; 행 9:2; 19:9, 23; 22:4; 24:14, 22). 누가복음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심을 곧게 하는 것이 회개며,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구원을 경험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광야로 오시는 주, 곧 예수님께 돌이켜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마다 이사야 40장에서 예고한 구원을 볼 것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의 핵심은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져야 한다’의 동사 타페이노오(ταπεινόω)는 겸손을 의미합니다(1:52; 14:11; 18:14; 행 8:21; 13:10). 겸손히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는 요한(7-14)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의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들이 누린 기득권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틀렸고, 요한과 예수가 맞는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반발할 것입니다.

 

7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7-14)

 

세례를 받으러 나온 이들 중에는 회개의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마저도 종교적인 통과의례나 종교적인 자격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메시아를 영접할 수 없는 마음이며, 그가 가져올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에게 회개의 열매가 맺힐 리 없고 열매 없는 이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1)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7-9)

 

세례 요한은 당시에 인정을 받은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세리들과 바리새인들도 세례를 받으러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곁인 모습인,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을 보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는 무리를 향해 담대하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부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합니다(7). 이 ‘독사의 자식들’이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붙인 욕설이었으나, 요한은 이 표현을 유대인들에게 사용합니다.

요한은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피할 방편을 보여주었느냐?’(7b)라며 거짓된 안전에 대한 약속을 떠올립니다. 무리는 안전에 대한 거짓 약속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정성 없는 회개는 진노로부터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8). 겉으로는 훌륭한 열매를 맺은 것 같이 보였지만, 회개의 열매가 없이는 선민이라는 자긍심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회개를 입증하는 구체적인 열매가 없이는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믿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아브라함은 구원받는 새로운 백성의 아버지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되는 사람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13:16; 16:24; 19: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창 18:14), 인종과 지위에 관계없이 회개하는 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됩니다. 요한은 도끼 은유를 사용해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9).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13:7, 9) 썩은 나무가 찍혀 불태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말 4:1). 그런데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기 때문에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자긍심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그럼 그들이 장차올 진노를 피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면 회개뿐입니다.

 

(2) 회개에 함당한 열매(10-14)

 

10-14절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은 참된 회개는 삶의 열매를 동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주인을 모시기 위해서 옛 주인과 결별하는 것, 그러므로 옛 가치, 옛 욕망과 옛 습관을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법이라고 하는 것은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지 정당화 되었을 것입니다.

회개는 소속을 옮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속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치관을 옮기는 것이며, 주인을 바꾸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법을 존중한 것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배치된다면 저항해야 합니다. 그 불의한 세상이 합법적으로 주는 권력이나 특권이나 해택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 해택을 거부하던지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변해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열거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무리들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라고 묻습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옷과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명령합니다(10-11; 12:23; 창 28:20; 신 10:18). 옷과 음식은 생필품입니다. 이를 더 가난한 자들과 나누어야 합니다(12:23; 창 28:20; 신 10:18). ‘옷’을 가리키는 키톤(χιτών)은 피부에 직접 닿는 긴 속옷을 가리킵니다(6:29; 9:3; 행 9:39). 이 속옷 위에 더 무거운 겉옷(히마티온 ἱμάτιον)을 걸쳐 입었습니다. 속옷은 겉옷보다 덜 비싸지만 그 정도의 생필품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을 음식도 궁핍한 사람들과 나눠야 합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요한은 부과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지시합니다(12-13). 세리들은 세금을 거두기 전에 액수를 먼저 제시해서 지역을 할당받았으며, 주민들에게서 갈취한 만큼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정직한 세리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세리는 사악하게 갈취하며 다녔을 것입니다.

군인들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14). 요단강 부근은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린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구역이었으므로, 이들은 헤롯을 위해 일하는 군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력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이득을 위해 힘을 사용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해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지 말아야 하고, 거짓 혐의로 무고한 백성을 고발하지 말아야 하고, 받는 급료 외의 것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회개는 상응하는 행위를 요구합니다. 선민의식이 강하거나 신앙의 배경이 좋을수록 열매 없는 회개로 만족하기 쉽습니다. 행위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자녀에게서는 합당한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16:19-31)에서 부자는 죽어서도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지만 아브라함과 한곳에 있지 못한 반면,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회개의 표현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유의 절반을 기부한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19:9). 둘째, 회개는 긍휼과 공정성으로 표현됩니다. 속옷과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회개의 행위가 긍휼임을 의미합니다. 세리와 군인이 이기적 욕심을 위해 공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공정성이 회개의 열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에는 인간의 탐욕이 가장 큰 문제로 강조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은 이런 탐욕의 회개를 뜻합니다. 셋째, 요한은 직업을 버리도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직장에서 윤리를 실천하도록 촉구한다. 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는 일상생활과 직업 현장에서 공공의 선을 위한 방향으로 표현됩니다.


회개는 주님 나라의 질서와 리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니라 광야가 현재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작동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권력자들에게가 아니라 광야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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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3)


하늘 아버지 의지와 부모 공경

누가복음 2장 41-52절


 

사춘기는 반항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부모님께 이유 없는 반항도, 동료들과 싸움을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본인도 조용한 사춘기를 보내진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반항하고 싶고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밑바탕에서부터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나 가출이라든지 큰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들의 마음을 종종 아프게 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은 어떠했겠습니까? 소년시절이 없는 청장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 건강하게 자라셨습니다. 율법을 따라 해마다 유월절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듣고 대답하는 예수님(41-47)

지혜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이 세상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다스리는데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조화롭게 운행하는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모든 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지혜로워지는 조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1-47)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곳에 남아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님을 찾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발견하였고,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참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1) 예루살렘으로 상경한 예수님(41)

 

예수님의 가족은 여느 가족들처럼 해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41). 유월절은 오순절 초막절과 더불어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중요 절기였습니다. 39절과 본문에는 하나님의 규례를 철저하게 지켰던 예수님의 부모님의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온 예수님(42-44)

 

소년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부모와 동행했습니다(42). 유대인들에게 나이 열 두 살은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3살이 되던 해에 성년식을 하였으므로, 12살은 소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일주일 동안의 유월절 절기를 모든 행사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43). 그런데 소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에 강도들의 위험이 도사린 길도 있었기 때문에 여행단을 이루어 이동했고, 부모는 당연히 아들이 내려오는 무리에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룻길을 간 후에 아들이 동행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44).

 

(3) 예수님을 찾는 부모님(45-47)

 

일행 중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소년 예수님을 찾으려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45). 아이가 없어진 줄 모르고 하루길을 갔다는 것은 유월절 순례자의 행렬이 얼마나 혼잡한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예루살렘을 떠난 지 3일 만에 아들을 성전에서 만납니다(46). 부모가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질문하며 토론하고 있었습니다(46). 예수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통찰력과 대답에 놀랐습니다(47). 앞에서 말한 지혜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모습입니다.

 

성전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학생보다 교사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교사’의 발치에 앉아서 배웁니다.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서 배웠고(눅 10:39), 바울은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공부했습니다(행 22:3, 개역개정은 ‘문하에서’로 번역함). 그러나 마치 예수님께 배우려고 선생들이 둘러앉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46). 적어도 예수님은 유대 교사들과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이뿐 아니라 47절에서 ‘듣는 자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는 표현도 학생이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보이는 반응과 비슷합니다. 이 장면은 앞으로 예수님의 주된 역할이 가르치는 것임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뿐 아니라 행위와 사건을 통해서도 주어집니다. 그래서 ‘놀라다’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본 사람들의 반응에도 사용됩니다(5:26; 8:56).

또한 예수님에게 있는 지혜와 통찰력은 그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입증합니다. 47절의 ‘쉬네시스(σύγεσις)’는 ‘지혜’, ‘이해’, ‘판단’, ‘분별’, ‘통찰’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소피아σοφία)는 예수님의 성장을 요약한 40절과 52절에 반복됩니다. 이사야는 ‘통찰력’(σύγεις)과 ‘지혜’(σοφία)를 메시아에게 임하는 속성으로 예고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σοφία)와 총명(σύγεσις)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메시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프뉴마 투 쎄우 πγευμα του θεου)은 지혜와 통찰력의 영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인용해 ‘주의 영’(πνευμα κυριου)이 자신에게 임한 내용으로 시작한 메시아 취임 설교를 마치고 앉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4:20-21).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은혜의 말씀에 놀랄 것입니다(4:22).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예수님(48-50)

자신이 속한 곳과 사명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가족과의 소통을 통해 이해와 신뢰를 쌓고, 서로의 사명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르침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48-50)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부모도 놀랍니다(48a). 누가는 47절의 ‘엑시스테미(ἐζίστημι)’가 아니라 ‘에크플레쏘(εκλησσω)’를 사용합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모가 47절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통찰력에 놀랐지만, 부모는 아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성전에서 활동하는 현장을 보고 놀랍니다. 이는 실망하여 화를 내는 뉘앙스입니다. ‘왜 너는 우리를 이와 같이 취급했느냐?’는 말은 성경에서 속았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창 20:9; 26:10; 29:25; 출 14:11; 민 23:11; 삿 15:11), ‘이와 같이’(후토스 οὔτως)는 부모에게 말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성전에서 대화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고통스럽게 찾았다’고 말합니다. ‘근심하여 찾았다’의 오뒤나오(όδυνάω)는 고통, 아픔, 분노를 느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냅니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의 불효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시므온의 예언을 떠올립니다(35). 예수님의 일생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므로 마리아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가 ‘왜?’(τί)라고 묻자 예수님도 ‘왜?’(τί)라고 되묻습니다. ‘왜 저를 찾고 다녔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의 핵심 용어인 데이(δεί, ‘반드시 해야 한다’)를 사용해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의 집, 곧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리아가 요셉을 ‘네 아버지’(48)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부릅니다(‘내 아버지 집’, 4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암시합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아버지인가?’,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집에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을 의도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유대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우선권을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 (22:41)에 순종하실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데이(δεί)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소명을 강조할 때 사용하실 것입니다(예. 4:43; 9:22; 13:33; 17:25; 19:5; 21:9; 22:37; 24:7; 24:44).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교육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씀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아들의 열정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는 아버지의 뜻과 목표를 행위로 가르치는 것으로(19:48-22:38),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20:1).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파트로스 무 πατρος μου)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하고 신뢰적인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순종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정체는 곧이어 등장할 세례 장면에서도 확인됩니다(3:22; 시 2:7; 사 42:1).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내 아버지께서(πατρός μου) 약속하신 것’을 제자들에게 약속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함을 다시 한 번 나타내실 것입니다(24:49).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신뢰성에 근거해 공생애를 준비하고 마치실 것입니다(2:49; 24:49). 이와 같이,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자와 성부의 친밀한 관계, 성부의 자비와 성자의 순종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예수님의 통찰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들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특이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천사로부터 들었습니다(1:32). 천사는 태어날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라고 거듭 확인시켰습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시점에 마리아는 아들의 행동과 말을 자신이 받은 예언과 연결하지 못합니다. 계시를 직접 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다면(51)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51-52)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지혜와 인격의 성장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린 시절을 알려줌으로 완전하신 인간으로 이 세상을 섬기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1-5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성전에서 아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두고 계속 고민합니다(51). 52절은 요한과 예수님의 성장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 1:80, 2:40과 비슷합니다.


성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의 소원이 눈에 보이는 것만 기도하면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보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더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권세를 구하기보다는,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지혜’가 풍성히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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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2)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누가복음 2장 21-40절


 

밤이라고 모두가 자는 것은 아닙니다. 야간에도 산업현장에는 불철주야 일하는 산업 일꾼들이 있습니다. 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신문과 우유 배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깨어서 전방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분들의 수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예수님 당시에는 대부분 영적으로 암흑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깨어있는 신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깨어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자로 드려지는 아기 예수(21-2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전통과 의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리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에 큰 의미와 방향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신앙 생활의 핵심으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듭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1-24)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8일째, 산모의 부정 기간(7일)이 지난 다음 날 할례를 받습니다(1; 창 17:9-14; 레 12:28). 천사가 지시한 대로 아기의 이름은 예수가 됩니다(1:31). 그리고 누가는 아기 예수의 부모가 율법이 요구하는 두 가지 규례를 준수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21-24).

 

(1) 할례 및 작명(21)

 

하나는 산모의 정결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예수님 모두의 정결 예식이기 때문에 복수형을 사용해 ‘그들의 정결의 날들’로 표현합니다. 부모는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레 12장)의 날을 위해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2; 레 13장). 주의 율법에 따르면 장자는 ‘주의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주께 드려졌습니다(3; 출 13:2,12,15;34:19-20; 민 8:15-19). 주의 율법은 가난한 백성에게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정결예식을 위한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했습니다(4). 예수의 부모는 가난했습니다!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드리는 사건은 한나가 사무엘을 실로의 성소에 드린 장면(삼상 1:11, 21-28)과 연결되는데, 한나와 비슷한 기도를 드린 마리아는 한나처럼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2) 정결예식(22-24)

 

누가는 경건한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아기 예수를 구별해 드리는 장면을 ‘주께 거룩한 자로 불릴 것이다’의 성취로 이해합니다. 거룩한 자로 불리게 되는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의 이름을 언급하고 나서(1:31) 전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구별된, 즉 거룩한 자입니다. 그는 낮은 가정에서 낮은 자로 태어나 자랐지만 ‘주께 거룩한 자로 불릴 것이다’(1:35; 2:23). 흥미롭게도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귀신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4:34), “하나님의 아들”(4:41)로 부를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 즉 사탄의 통치에 맞서 싸우는 점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의 활동으로 세상에는 거대한 충돌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구별된 분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에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로 드려지는 장면은 악이 득세하는 사탄의 통치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습니다.

 

시므온의 노래와 부모의 반응(25-35)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그분의 타이밍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경험할 때,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음을 보며,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 수 있습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25-35)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기쁨으로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빛이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사역이 많은 사람에게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1) 시므온에 대한 소개(25-26)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25). 누가는 성령이 시므온 위에 임하여(25),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고(26), 성령의 감동(27)을 받은 점을 부각시킵니다. 탄생 이야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의 역할을 수행합니다(요한-1:15; 마리아-1:35; 엘리사벳-1:41; 사가랴-1:67). 시므온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예언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은 신뢰할 수 있는 계시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위로’(파라클레시스)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참조. 사 40:1; 49:13; 51:3; 57:18; 61:2). 기다림은 기대함을 의미합니다(2:38; 12:36; 23:51; 행 23:21). 시므온은 자신의 위로가 아니라 민족의 위로를 소망했습니다. 시므온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렸고, 성령은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리셨습니다(26).

 

(2)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27-28a)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러 성전에 들어갔고,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습니다(27). 말하자면, 아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

 

(3) 시므온이 찬송(28b-32)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시작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28). 시므온의 노래(29-32)는 탄생 이야기에 기록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찬송입니다(1:46-55, 68-79).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신 그리스도를 목격했기 때문에 평안히 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29). 하나님의 종 시므온에게 주어진 평생의 임무는 만민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던 시므온은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노래합니다(30). 특히 시므온은 ‘지금’을 넣어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드디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시작된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가 기다린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선물로 예고된 것입니다(31). ‘예비하다’ 또는 ‘준비하다’는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 이제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1:17,76). 시므온이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위로’는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구원이었으며, ‘만민’은 32절의 ‘이방인들’과 ‘이스라엘’둘 다를 포괄합니다. 만민이 경험할 구원은 “이방을 비추는 빛”(사 42:6; 49:6)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32). 선지자들이 예고한 구원은 처음부터 이스라엘만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시작되고 만민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4) 시므온의 예언(33-35)

 

부모가 아들의 역할에 대한 찬송을 듣고 놀라자 시므온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분리가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34). 예수님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걸려 넘어질 것이고(사 8:14-15)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사 28:13-16).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겪을 일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35). 여기서 ‘칼’(롬파이아)은 양날 검으로, 십자가 현장에서 어머니의 영혼은 양날 검에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실제로 복음서에 등장할 것입니다(예. 5:21-22; 11:17). 시므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겠지만, 예수님 때문에 마음의 죄가 발각되는 자들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거부한 동족에게서 극심한 반대를 겪을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낮고 가난한 자들이 얻을 위로와 높고 부한 자들이 겪을 운명이 극적으로 대조됩니다.

 

안나의 경배(36-40)

우리는 꾸준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이 중요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더욱 강하고 풍성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36-40)

 

안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36-37). 안나가 밤낮 성전에서 기도한 것은 매일 드려지는 제사에 참여했음을 암시합니다. 누가는 38절에서 미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을 목격한 안나가 계속 감사하고(안토몰로게이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해 계속 말한 것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은 “이스라엘의 위로”(25)와 같은 뜻입니다(시 130:5-8; 사 40:9; 52:8-10; 63:4). 안나는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의 열망을 대변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나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주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 올라간 (2:21-24)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을 따라 모든 것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39).

예수님의 오심은 안나의 기도가 응답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던 시므온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안나와 시므온처럼 평생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한 사람들의 기도를 기억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게서는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사는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을 사용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은혜는 헌신되고 경건한 자들의 삶과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초기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구원의 기쁨을 배웁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의 빛은 우리 삶에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믿음과 헌신으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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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2-01)


섬기려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1-20절


 

오늘날 시대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간절히 기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힘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재력, 학력, 인맥 등과 같은 힘을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모든 자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 누가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인구조사 칙령과 세앙의 구주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난 장면을 대조합니다(1-7). 주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합니다. 구주의 표적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며(8-14),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합니다(15-20). 낮은 곳에 임하신 구주의 탄생으로 세계의 중심과 이스라엘의 중심이 옮겨집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1-7)

어두움 가운데 걷던 사람들이 말씀의 조명을 받아서 빛 가운데 걷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안과 염려, 또 무질서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샬롬을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소식이 복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은 엉망인 죄인이고, 혼자 힘으로는 이 길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주신 구원의 방식에 동의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그 선물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1-7)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냉혹한 세계사의 흐름에서 서술합니다. 1장이 유대의 왕인 헤롯의 때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 반면(1:5), 2장은 가이스 아구스도의 칙령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시기와 장소를 소개합니다. 그 시기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군대 징집과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인구 조사를 위해 천하에 호적하라고 칙령을 내렸고(1), 구체적으로 시리아 지역의 총독인 구례노가 유대 지역에 집행했던 때임을 소개합니다. 시편 87:6에서는 세계적인 호적조사 실시 때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호적하려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호적을 등록하려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4). 그때 임신 중인 마리아도 동행했습니다(5). 로마 제국의 황제가 내린 칙령 앞에 요셉과 마리아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 간 것은 태어날 아기 예수님께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미가 5:1-4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으로 예언하였습니다. 가이사는 자신의 왕권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하라는 칙령을 내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이용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베들레헴에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이라는 구약을 통해 하셨던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미 5:2). 그래서 다윗의 위(位)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세월은 세상의 권력자를 바꾸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쇠하지 않고 우리가 충성할 왕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빈 객실이 없었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러야 했고, 결국 약속된 메시아는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였습니다. 만삭의 어린 여성이 먼 길을 와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첫 아이를 낳는 장면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습은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지한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불리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1:32)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의 아들’이라 자처하던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한 부부의 첫아들(출 13:2; 민 3:12-13; 18:15-16; 신 21:15-17)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 천하에 칙령을 내리는 가이사 아구스도와 구유에 누인 메시아인 예수님은 완전히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세상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의 아구스도가 아니라 어느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미 5: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황제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구주의 탄생과 천사들의 찬송(8-14)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다윗의 왕에 이어 영원히 왕노릇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비천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부유케 하시려고 짐승의 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천사들은 찬양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8-14)

 

본문은 주의 천사(가브리엘)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정면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목자들은 천사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을 달려가서 누구 집인지도 알 수 없지만 마구간에 구유 안에 누인 예수님을 찾아간 사건을 소개합니다.

 

(1) 목자들에게 탄생을 알림(8-12)

 

예수님께서 태어난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8).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었습니다(9).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기 때문입니다(10).

누가복음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1:14; 2:10; 15:7,10)와 영적인 일(10:17)과 예수님의 부활(24:41,52)에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에 목자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 ‘그리스도 주’가 태어난 것입니다(11). ‘다윗의 동네’는 베들레헴(삼상17:12-15)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구주’입니다. 구약에서 ‘구주’는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구원자입니다(삿 3:9,15; 12:3; 느 9:27). 구주는 ‘그리스도 주’입니다. ‘주’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칭호이고, 로마제국에서는 ‘카이사르’가 ‘주’입니다. ‘구주’(1:47)는 구약에서 백성을 돕거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삼상 10:19; 사 45:15.21; 지혜서 4:30; 마카비1서 4:30; 집회서 51:1). 11절에서 ‘구주’의 역할을 행하는 주체는 예수님입니다(행 5:31; 13:23).

천사는 목자들에게 메시아라는 표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12)가 그들이 보게 될 표적입니다. 구주-주-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표적은 초라한 곳에서 옷(강보)에 싸여 있는 아이의 모습입니다.

 

(2) 천사들의 축하 찬송(13-14)

 

온 세상을 구원하는 너무나 초라한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이지만, 하늘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인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주의 천사와 함께 수많은 하늘 군대가 도열해 우렁차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13). 하늘의 군악대는 아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질 평화를 노래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선포합니다. 평화는 구주 그리스도의 통치로 주어지는 치유와 회복이며(참조, 4:18-19; 사 52: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장소로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인 예루살렘 성전이 걸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베들레헴 광야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세기에 온 세상에 미치는 기쁜 소식은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등극이었습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불리는 새로운 황제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생일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외양간의 구유에 누인 아이를 세상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구주와 메시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 세상에 미칠 진정한 기쁨, 사람들의 평화는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에는 ‘복음(유앙겔리온)’의 명사형은 나오지 않고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유앙겔리조마이)라는 동사형이 10회 사용됩니다(1:19; 2:10; 4:43; 7:22; 8:1; 9:6; 16:16; 20:1; 참조. 3:18). 이는 이사야가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한 방식입니다(사 40:9; 52:7; 60:6, 61:1). 이사야는 겸손하고 고난 받는 종(42:1-4; 45:4; 49:3-5; 52:13-53:12)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고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궁핍하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기 위해 예수님은 더 비천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구주는 낮은 곳에 임해서 고난의 길을 걸었고, 결국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주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 목자들(15-20)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여전히 우리의 삶의 조건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순종하는 믿음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난 곳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태도에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15-20)

 

천사 합창단은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15). 주의 천사가 아기의 탄생을 알렸는데도 목자들은 ‘주’(호 퀴리오스)께서 알려주신 사실을 확인하러 가자고 합니다.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대해 마리아처럼(1:39) 목자들도 빨리 반응합니다(16). 목적지에 달려간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하고 천사가 말한 표적을 확인합니다. 이제 목자들은 천사가 아기에 대해 말한 내용을 전합니다(17). 다윗의 아들과 구주를 통해 온 세상에 미칠 기쁜 소식을 맨 먼저 증언한 주체는 목자들입니다! 당시 목자들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아기를 둘러싼 사람들은 목자들의 증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18).

19절의 ‘간직하다’와 ‘고민하다’는 매우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마리아는 주의 천사에게서 들은 메시지와 목자들의 증언을 깊이 생각합니다. 일터로 돌아온 목자들은 표적을 확인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합니다(20). 목자들의 찬송은 하나님의 (찬란함을 뜻하는) 영광이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을 통해 드러날 사실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 적합한 곳은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으로 신앙의 중심이 옮겨집니다. 하루도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목자들이 일하는 곳에 하늘의 군악대가 등장했고, 목자들은 일터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립니다. 낮은 자들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들의 소망이며, 하나님은 이들의 찬송을 기뻐하십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이의 표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천사의 고지 사실을 예수님의 부모에게도 전하여 그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이처럼 친히 주께서 하시는 일을 많이 보고 더 풍성한 찬양과 예배로 화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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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6)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의 예언

누가복음 1장 67-80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한 것입니다.

 

  • 사가랴는 대제사장이자 경건한 종교 지도자로, 로마의 식민지 상황과 자식이 없는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례 요한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사가랴는 10개월의 침묵 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자보다 앞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가랴는 자기 아들이 예비할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고 죄를 용서하실 것을 찬양했습니다.

 

구원의 뿔을 찬양(67-75)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도 약속을 지키시고 신실하게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역사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67-75)

 

사가랴에게 주는 예언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양은 마리아의 찬양과는 달리 먼저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작합니다.

 

(1)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함(67-68)

 

사가랴는 처음에 자신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18).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전혀 보지 못하는 일까지도 믿음으로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경험으로 확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해 확신의 자리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사가랴의 찬양에서 핵심은 속량입니다. 본문에서 ‘돌보셨다’라는 뜻의 동사 ἐπισκέπτομαι(에피스렙토마이)는 출애굽기 4:31에서 고난 당하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유대 문헌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방문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고 보면, ‘돌보셨다’는 것은 고난 당하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사가라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속량’(뤠트로시스)은 팔린 가옥을 다시 회복하는 것(레 25:29), 종으로 팔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레 25:48).

 

(2) 구약성경이 성취됨(69-71)

 

사가랴가 언급한 구원의 뿔은 다윗의 집에서 일어날 것이므로(69), 레위 지파에서 태어난 세례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 다윗의 집에 태어날 아이를 가리킵니다. 사가라는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메시아가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뿔은 특히 군사력을 상징하므로(신 33:17), 사가라는 군사적 메시아를 연상했을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메시아의 오심이 구약의 성취라고 노래합니다(70). 그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노래할 때, 사무엘하 7:12~13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71). 이스라엘이 로마에 예속된 상황에서 ‘원수’는 특히 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 성취(72-7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때문입니다(73).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하신 약속입니다(창 22:16-18). 즉, 가나안 땅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내용(창 17:8)입니다. 그 후손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과 믿음으로 온 세상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76-77)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이 주시는 사명을 깨닫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

 

사가랴는 접속사 δε로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예언한 메시아와 대조하면서 자신의 아이에 관해 예언합니다. 그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입니다(78). 그 아이의 사명은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이사야 40:3에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는데, 사가랴가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문맥에서 그 길을 메시아의 길이라고 이해하게 합니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이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77). 이 예언은 죄 용서를 통해 회복되는 원리(레 26:38, 40-43)를 전제합니다. 세례 요한이 주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셈족어적 의미의 실천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오심(78-79)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자비로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음과 영혼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또한, 삶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핵심입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78-79)

 

사가라는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라고 예언합니다. ‘돋는 해’로 번역된 ἀνατολή(아나톨레)는 70인역 예레미야 23:5에 사용되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히브리어 본문의 ‘체마흐’를 따라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왕이 되어 새 출애굽을 이끄는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킵니다(렘 23:5,8). 이 단어는 70인역 스가랴 6:12에도 쓰였습니다(개역개정에는 ‘싹’). 이 싹은 사무엘하 7:12~13의 다윗의 자손처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메시아적 존재입니다. 70인역 스가랴 3:8에서도 이 단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도 이 단어는 메시아를 가리킬 것입니다.

‘임하여’로 번역된 ἐπισκέπτομαι(에피스켑토마이)는 68절과 7:16에서 하나님의 방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동사이므로, 이 동사의 주어 ‘돋는 해’는 신적 주체를 가리킵니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적 메시아가 세상 안에서부터가 아니라 세상 밖에서부터 오심을 강조합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높은 곳으로부터) 온다는 표현도 그러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높은 곳으로부터’가 ‘하나님으로부터’를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높은’ 대신 최상급 ‘지극히 높은’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32,76; 6:35; 8:28). 70인역, 구약 위경, 필로, 요세푸스,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에 ‘휩시스토스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70인역의 용례를 살펴보면, 시편 102:20(개역개정, 102:19)에서 ‘높은 곳으로부터’는 ‘하늘로부터’와 평행합니다. 사무엘하 22:17에서 ‘높은 곳으로부터’는 ‘주’를 주어로 하는 동사와 연결되는 문장 속에 위치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를 뜻하지 않습니다. 시편 17:17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43:7의 “높은 곳으로부터 당신의 손을 보내셨다”에서도 ‘높은 곳’이 ‘당신’(하나님)을 가리킬 수 없고, 5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애가 1:13의 “그의 높은 곳에서부터 불을 보내셨다”에서도 ‘높은 곳’이 그(하나님)를 가리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으로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를 뜻하고, 누가복음은 여기서 신적 메시아가 하늘로부터 온다고 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임합니다(79). ‘어둠과 사망의 그림자 속에 사는 자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묘사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이 표현이 연상시키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시 107:10,14; 사 9:2)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상태에 관해 묘사한합니다(참조, 시 107:2-4).

 

세례 요한의 성장(80)

우리는 지속적으로 배우고 발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전에는 충분한 준비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때때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교제하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시간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80)

 

세례 요한은 자라며 영적인 측면에서 강해졌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튼튼하게 자라났다고 언급하는 사무엘상 2:21을 연상시킵니다. 아이는 사역을 위해 등장하기까지 ‘빈들’(광야)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0:3에 따라 하나님의 새 출애굽 길은 광야에서 준비해야 하므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에 있는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키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사가랴는 주변 환경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기도해 나가는 성도가 될 때, 당신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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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5)


소망의 시작인 요한의 출생

누가복음 1장 57-66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 혹은 ‘다른 사람이나 교회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를 고민하며 전례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전례를 따르는 것은 창의력을 잃게 만들고, 다른 사람이나 교회의 사역을 답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놀라운 축복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의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신선함과 창의력을 부어주십니다.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출생과 그의 이름을 짓는 일과 관련된 사건을 기록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출산하니 이웃과 친족이 듣고 기뻐합니다. 8일이 되어 할례를 왔을 때,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하고자 하나 엘리사벳은 ‘요한’이라 하겠다고 합니다. 아이의 이름에 대한 물음에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라 쓰자, 곧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엘리사벳의 출산(57-58)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이루어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57-58)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던 불임(不姙) 병에 걸려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이제 죽은 날만 기다리던 엘리사벳에게 희망이 찾아 왔습니다. 그녀에게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케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테를 열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13). 엘리사벳이 드디어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엘리사벳의 출산 소식을 듣고 이웃과 친족이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산임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아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이웃과 친족들에게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라가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킵니다(창 21:6). 그리하여 사라-엘리사벳 모형론이 형성되고, 아브라함-사가랴 모형론이 암시됩니다. 이러한 모형론으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세례 요한과 이삭이 연관됩니다. 또 세례 요한 뒤에 오신 예수님을 야곱(이스라엘)과 연관 지어 이스라엘(야곱)-예수 모형론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이스라엘 예수 모형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로서 새 열두 지파를 형성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로부터 시작해 새 이스라엘을 형성하도록 하십니다. 다만, 새 이스라엘에는 야곱-열두 지파로 이어지는 혈통적 계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혈통과는 무관한 열두 사도와 제자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간주하십니다(8:21). 그러므로 새 이스라엘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과 무관한 이방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방문한 과부가 이방 땅 시돈에 있는 과부였으며, 엘리사가 치유한 나병환자도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도 구원하실 메시아십니다(4:25-27).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이방인을 향한 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믿은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시며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고(7:9-10), 치유받고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나병 환자를 이방인이라고 규정하시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17:19). 이 친족들의 기쁨은 이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새 시대의 기쁨과 즐거움의 약속의 시작입니다.

 

요한의 작명(59-6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를 때, 그 계획이 완성됨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베푸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59-63)

 

요한의 할례식 날, 이웃과 친척들은 그의 이름을 아버지와 같은 사가랴로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가랴도 이에 동의하며, 요한이란 이름을 쓰게 됩니다.

 

(1) 세례 요한이 할례 받음(59)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기가 태어난 지 8일 만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아이에게 할례를 주고 이름을 짓기 위해 모였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제8일에 할례를 줄 때, 사람들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자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기가 출생했을 때 이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생후 제8일에 할례를 행할 때 이름을 지으려고 한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는 아기가 출생한 지 7-10일째 되었을 때 이름을 지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헬라 제국의 치하에서 헬라 문화를 접한 유대인들이 이 관습에 영향을 받아 출생 후 8일째 할례를 주면서 이름 짓는 전통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 아기의 이름은 요한(60-63)

 

엘리사벳이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하자 친족과 이웃들은 그 이름이 친족들의 이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반대합니다(60-61). 유대인들은 아들의 이름을 대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었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기 이름에 대한 최종 결정을 사가랴에게 맡깁니다(62). 사람들이 신호를 하여 질문한 것이나 사가랴가 글로 답하는 것을 볼 때, 사가랴는 여전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엘리사벳과 동일하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요한’(요하난)은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은혜롭다’라는 뜻입니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입니다(13).

 

요한의 탄생 이후(64-66)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약속을 지키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앙을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64-66)

 

사가랴가 요한이라 이름 지으면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기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이웃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이 사건은 온 유다 산간 지방에 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요한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며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사가랴가 다시 말하게 됨(64-65)

 

사가라는 아기 이름을 지은 후에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다가 말하지 못하게 된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한이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부여한 후에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다시 말하게 된 현상은 사가랴가 지은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함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증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현상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65).

 

(2) 성령충만한 세례요한(66)

 

사람들은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는 구약성경의 표현입니다(민 11:23; 왕상 18:46; 겔 37:1). 열왕기상 18:46은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능력’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70인역에서는 ‘주의 손’,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으로 직역하여 표현했습니다. 에스겔 37:1은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권능’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70인역에서 ‘주의 손’,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으로 직역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그의 영과 평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손이 세례 요한과 함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성령이 그와 함께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어린 세례 요한과 함께 함을 보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대로였습니다. 천사는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15). 이 예고대로 세례 요한은 아기 때에도 성령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고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라고 말하며 기대했습니다. 이 아이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위대한 인물 됨됨이는 예수님의 평가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7:26).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 이상의 인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7:28).


요한의 탄생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일입니다. 요한의 탄생과 진행된 과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며 신선함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불순종했을 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이루었을 때, 임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시면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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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1-04)


두 여인의 축복과 찬미

누가복음 1장 39-56절


 

어린 시절에 장날이면 장이 서는 읍에서 내려오는 버스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다 자세히 말하면 어머니가 아니라 시장 보따리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반드시 자녀들을 위해 군것질 거리를 사오시곤 하셨습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 기다림이 축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 본문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아기가 태어날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인류가 기다렸던 그 메시아인 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39-45)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결코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신앙과 삶을 공유하고 응원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지지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공동체의 결속을 더욱 강화합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39-45)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기쁜 소식을 받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누군가에게 간증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녀를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1) 마리아의 문안(39-40)

 

마리아에게 찾아온 천사 미가엘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축복의 말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 동안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신다고 알렸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녀관계를 통해서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인간의 필요를 모두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로마 황제의 아들로 화려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국가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기지 않을 조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계시를 깨달은 후, 마리아는 ‘처녀가 임신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볼까?’라는 문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서 믿기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마리아가 결정적으로 믿게 된 것은 늙은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도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놀라고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예루살렘 근처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살던 곳은 북쪽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에 유대까지 먼 곳을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벳에게 내려갑니다. 즉시 유대 산지에 동네에 사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2) 성령 충만한 엘리사벳(41-42a)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매우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더 기쁘게 맞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벳 태중에 있는 요한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요한의 출생을 전한 천사의 메시지에서 예견되었고(1:14-17), 예수 탄생을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의 메시지에 의해 선포 되었습니다(2:10-12).

 

(3) 엘리사벳의 축복(42b-45)

 

여인의 만남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도착해서 인사를 받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보자마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2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42-43)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다가온 순간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태중에 있는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리아가 자신보다 어려도 더 큰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습니다.

더욱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 뱃속에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노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엘리사벳도 역시 그 후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녀도 ‘성령 충만하여’ 자기보다 훨씬 어린 마리아에게 ‘주의 모친’이라 부르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만남에 감격합니다. 성령 충만한 곳에는 시기와 질투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성취됨에 대한 순전한 기쁨만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임신을 축하하며, 믿음으로 순종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42)라고 축복합니다. 이것은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명예롭다는 의미를 수반합니다. 엘리사벳은 과거에 대제사장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잘 나가던 영화만 생각하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과거의 영광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라고 칭송합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하늘의 소식을 전할 때, 믿지 못하고 거부했다면 놀라운 소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받아 들렸습니다.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400년에 어두운 역사를 뚫고 온전히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녀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이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 그리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당신에게 있길 바랍니다.

 

마리아의 찬양(46-55)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울 수 있지만, 그것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정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킵니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의 신앙과 삶을 나누고 응원함으로써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46-55)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을 ‘마리아의 찬미’이라고 부릅니다.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기도와 비슷해서 비교가 됩니다.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에서 찬양으로 불리고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찬양(46-50)

 

마리아는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이 비천함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선택하심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드린 찬양을 살펴보면,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격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그녀의 찬양은 비천한 여인인 자신을 하나님의 크신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에 대해 찬양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만 더 있으면 교만해져 우쭐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이는 어리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을 분석해보면 그녀는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곁으로 겸손한 것 같지만, 내면에는 교만함이 까려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마리아처럼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자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중심을 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마리아를 선택하여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도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51-55)

 

때로는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아서 찬양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해 찬양합니다. 그녀의 찬양 속에 하나님의 권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은, 첫째로 교만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51).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실 것입니다(52).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누르는 사람들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평등하게 다스리실 것입니다. 세 번째, 주린 자들을 좋은 곳으로 먹이실 것입니다(53). 예수 그리스도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온 세상에 온전한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권세 있고 부유하지만 교만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흩으시고 낮추시고 빈손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비천하고 주리지만 주의 돌보심을 의뢰하는 사람은 높이시고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3) 역사를 통한 약속(54-55)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루실 일들에게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갑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약속을 아브라함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셨던 내용들을 자신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점점 임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베푸실 구원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회복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56)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과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게 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말씀과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격려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힘입니다.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56)

 

마리아는 3개월 동안 엘리사벳의 집에 지냈습니다. 엘리사벳의 집은 대제사장을 지낸 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풍부한 가정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말씀에 붙들려서 경건에 이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마리아는 고향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이 사역을 감당할 성령충만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을 서로를 세우고 돕는 일을 합니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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