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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9-05)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누가복음 9장 51-62절


 

살아가면서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해야 할 일을 있습니다. 이런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면 삶이 무질서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에 순서를 바로 세우고 그 순선을 따라 일을 해나갑니다. 이런 순서를 정하는 것을 ‘우선순위(優先順位)’라고 합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하면 자신도 편하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정하신 시간대로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제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여정이 시작됩니다(누가복음 9:51-19:27).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한 사람들과 뒤돌아보며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교훈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님(51)

하나님께서는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역사는 그 시간표대로 진행하십니다. 모든 인류는 이 시간표 사이에 과거, 현재, 미래가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시간표를 따라 사셨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면 화려한 삶을 사신 것처럼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말씀과 기적이 풍성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외로운 분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고난과 죽임 당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길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거쳐 하나님의 보좌 우편까지 오르는 여정을 향해 나갔습니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서 마음을 다잡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많은 환대와 환호를 받던 갈릴리를 뒤로 하고 배척과 거절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위해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는 당시 기득권층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항상 기회를 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과 환대가 아니라 핍박과 박해였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순종하며 올라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신 이유는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지만, 그곳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예수님은 그곳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과는 다를 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사명자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들이 살아야할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당신과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52-56)

세상은 나름대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만들어 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라면 임의로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높고 높은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누구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52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52-56)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자신보다 먼저 사람들을 보내어 준비시켰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중에 자신의 마을에서 머무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을 역사적으로 비하해 오는 관행을 따라 민족적 갈등 상대로만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는 구원의 길과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부에 화가 난 야보고와 요한은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자고 합니다. 그것은 엘리야 때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를 심판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격하게 반응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자신을 거절한 예루살렘을 위해서도 분노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위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향하신 예루살렘의 길에 해묵은 역사관이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목과 반대가 예수님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감정적으로 나오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셨습니다. 다른 마을로 지나시지만 결코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제자도(57-6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제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삶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많은 대가가 얼마나 큽니다. 이제 세 가지 경우를 들어 제자의 길을 말씀해 주십니다.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57-62)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것이 편안하지 않고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도가 요구하는 헌신과 전적인 순종을 보여줍니다.

 

(1) 제자도Ⅰ(57-58)

 

첫째,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 계심을 설명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을 등장시켜 예수님을 따라는 길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니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도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들 중에서 본문에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마태복음 8:19).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자신은 따르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응답은 자신을 따르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의 길은 양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의 음지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어떤 보장도 없으며, 그러므로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결과적으로 고난을 감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기꺼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제자의 삶은 그다지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인자’는 ‘사람’을 의미보다 다니엘 7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종말론적인 영광을 받을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누리는 영광보다 장차 받을 영광을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르겠다고 나온 사람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한 영광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영광을 취하려는 가능성을 배제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특징은 세상적인 영광과 연결되지 않고 영원한 나라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2) 제자도Ⅱ(59-60)

 

두 번째 경우는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명령해도 변명하며 주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따르겠다고 했던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사람은 자신이 따르겠다고 먼저 제안했지만, 이번 사람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이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만약 그 사람의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신 상태라면 자연스러운 요청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례는 사망한지 24시간 내 바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짐작컨대 그 사람이 앞에서 예수님께서 소개한 제자의 길을 듣고서, 따르지 않기 위해 핑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고 명령하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합니다. 매우 가혹해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의 의무와 책임보다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무엇인가 희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희생하는데 아직까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담대하게 제거하시길 바랍니다.

 

(3) 제자도Ⅲ(61-62)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전에 가족들에게 인사하려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앞 사람과의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던 어떤 사람 중에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감을 잃고 돌아가려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참 인간적인 요청에서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르기로 했으면 옛 삶에 매달릴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따를 순 없습니다. 단호하고 엄격하게 제자로서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가치 있어 보이는 일이라도 제일 가치 있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희생과 헌신이 지불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온전히 따라 갈 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고기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일행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배, 그물, 품꾼 그리고 부모님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가복음 1:16-20).

예수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앞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이나 가족과 작별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부르신다면 뒤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덜 중요한 일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지금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사역이 있다면, 그것을 우선순위로 정하시고 행하시길 바랍니다.


온전한 제자 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세상적인 영광이나 뒤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제자답게 겸손한 희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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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9-04)


사명과 능력을 잃어버린 제자들

누가복음 9장 37-50절


믿음은 다양한 욕망을 만듭니다. 거룩한 욕망도 있지만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갈망하는 바에 따라 진행됩니다. 제자들의 그릇된 욕망과 교만은 세상적 성공과 지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섬김과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 변화산 위에서의 영광과는 대조적으로 산 아래서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믿음이 벗어나고 패역한 세대는 그를 배반할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제자들(37-43)

사단은 얼마나 사람들을 위하는 척하는지 모릅니다. 결코 사찰 입구의 사대천왕처럼 험상궂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빛의 천사로 위장하고 속이고 거짓말합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인간을 파괴합니다. 얼마나 냉정하고 잔혹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책임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도록 만듭니다. 사단은 탐욕스럽고 불합리한 세상 체제를 통해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을 위해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고난의 장소인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37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37-43)

 

마가복음은 예수님과 변화산에 동행했던 세 명의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왔는데, 마침 큰 무리에 둘러싸인 채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곧바로 질문을 하나 던지신 것으로 소개합니다.

 

(1) 배경 설명(37-3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곧 돌아가셔야 할 분이지만, 하늘로부터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나 제자들 모두 십자가의 순종 후에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고 이 땅에 영광을 위해서 참된 영광을 버리는 삶을 살지 않아야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왜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2) 한 아버지의 요구(39-40)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37).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38). 자기 외아들(독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봐야 치료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아들을 보고 살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을 보는 중에 아버지는 아들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합니다(39; 마 17:15-16; 막 9:18). 문제의 원인을 귀신으로 판단합니다. 귀신이 그를 사로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만들었고 경련을 일으켰으며, 거품을 흘리게 했습니다. 몸시 상하게 하고 나서야 떠났습니다. 아들이 예측불허의 행동을 하는 원인은 귀신의 장난과 폭력성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신 중에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무기력했습니다(40). 제자들은 영적인 전쟁에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기 전에 재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권위를 받고도(9:1), 실패한 이유를 지적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영적으로 무능력해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능력보다 다른 것에 더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질 못해 집착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귀신을 제압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부여 받았습니다(누가복음 9:1-2). 실제로 그들은 귀신을 내 쫓고 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9:6). 그런데 본문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탄식과 치유(41-4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적하는 문제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에 관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주시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들이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실 새로운 삶에 대한 믿음입니다. 항상 사단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모습은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고 아무 일도 아직 못하는 제자들의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한 믿음보다도 눈에 보이는 귀신의 힘인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을 더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그들 마음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자 아무 능력도 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십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즉시 귀신을 내쫓고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인 아들을 고쳐 아비 품에 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외아들 같은 인류를 사망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두가 그 위엄에 놀라고 경이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도리어 자신의 받아야 할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묻는 것조차 회피했지만, 주님은 잠깐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제자(44-48)

사명을 잃은 사람들은 능력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자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사실을 자숙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집중해야할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다른 것들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44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4-48)

 

예수님께서는 다시 다른 동네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가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섬기시지만, 제자들은 이런 와중에 제자들은 논쟁이 붙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누가 크냐?’(46)라는 논쟁입니다. 몇 시간 전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며 민망하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누가 큰가?’에 대해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에서 큰 사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가 안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48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48)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들이 높은 사람을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많이 섬긴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린이는 대접받지 못하는 대표적인 ‘작은 자’였습니다. 이 작은 자인 어린이처럼 더 작은 자를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고 포기하고 희생하며 가장 작은 자인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하늘에게 가장 큰 자입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자가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3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3-24)

 

제자들은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전도 파송에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대단한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작은 성공에 도취될 때,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욕심을 쫓아가는 제자들(49-50)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관된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세상적인 욕심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49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49-50)

 

예수님께서 위에 같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전히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진 권위를 은근히 드러내고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끝에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의도로 말했겠습니까?

방금 전에 믿음이 없어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귀신을 쫓은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은 인정하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기득권만 주장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탐욕 때문에 자기만의 아성을 쌓지만 스스로 고립을 자초합니다. 점점 자기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곳곳에서 이러한 현상을 나타납니다. 자기 이권에만 관심이 중심 되어 있고, 소외 받는 이웃을 찾아 연약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 진리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능력을 세상에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요즘 매스컴에서 기독교의 비리가 자주 보도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깨어나도록 매스컴을 통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입니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보냈지만 사실상 예수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되고 그들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증인인 교회도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여 언제 어디서나 증인으로서 주님의 추수에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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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9-03)


변화산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

누가복음 9장 28-36절


 

삶에서 우리는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논리나 인간적인 가능성으로 예측할 수 없는 기적적인 상황들입니다. 기도 응답은 그러한 기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자들의 변화산 경험 또한 그와 같은 기적적인 체험입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신 후에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다고 언급하십니다. 문맥에서 이것은 분명히 변화산 사건과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구약의 그림 언어들을 배경으로 설명해갑니다.

 

본 모습을 변화된 예수(28-31)

 

드라마가 끝날 때 잠깐 다음 회를 요약해 보여주는 것을 ‘예고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변화 사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뒤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하늘나라에 대한 영적인 예고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고편’이셨습니다.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28-31)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하던 중 변형되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함과 다가올 고난과 영광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1)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28)

 

“이 말씀”이란 누가복음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등장하는 앞 단락 전체를 말하는 것일 수 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9:27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이 종종 재림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그렇게 이해했을 때 난제는 청중 가운데 누군가는 죽기 전에 이 일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해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적지 않은 누가 신학자들은 연이어 등장하는 변화산 사건을(9:28-36) 이 말씀과 연관하여 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즉 변화산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신 것에서 변화산 사건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일종의 분명한 암시가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의 경험이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에 대한 선취 혹은 미리 보여줌의 기능은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간 무리가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사건을 언급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생애, 가르침, 변화산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변화산이 어디인지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다볼산이 제시되었으나, 헐몬산이나 메론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세 명을 데리고 변화산의 경험을 하게 하셨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가 나중에 9:46에 등장하는 것처럼 누가 더 큰 자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2) 변모되신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의 등장(29-30)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변화산 사건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누가의 서술은 출애굽기 24장에 등장하는 모세의 모습과 사뭇 유사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한다면, 누가는 예수님께서 변모되셔서 광채가 나는 모습을 띠게 된 것을 마치 모세의 시내산 배경 속에서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시내산에서 변형된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것을 후일 유대문헌 전승에서는 모세의 대관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승에 익숙한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것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의 선취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가 종말론적 성취의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사건에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에 의해서도 지원됩니다. 신명기 18:15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라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때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변화산 사건에서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 등장하는 모세가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또한 말라기 선지자는 4:5에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종말론적인 문맥 속에서 역사의 마지막에 등장할 것이라 기대되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 문맥에서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 구약이 이야기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종말론적 사건의 성취와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엑소더스(31)

 

개역개정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번역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본문을 직역한다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그의 떠남(엑소더스)을 말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약이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출애굽의 그림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31절은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구원을 분명한 출애굽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출애굽의 구원(Exodus-deliverance)을 연례적으로 함께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종말론적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즉 출애굽의 이야기가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의 구원을 내다보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탈굼의 출 12:42 해석을 참조). 그런데 누가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구원의 이야기를 출애굽의 그림 언어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제자들의 반응과 하늘의 반응(32-36)

우리는 영적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인도합니다.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32-36)

 

베드로와 동료들은 예수님의 변형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깨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며 그의 말씀을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침묵을 지켰습니다.

 

(1) 제자들과 베드로의 반응(32-33)

 

32절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졸다가 깼다고 언급됩니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같이 보입니다. 자다 깨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느닷없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을 세 개를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초막을 짓는 이유는 그들이 그곳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게 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들도 이 장면을 목격한 후에 이 사건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3절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사건을 경험한 후에 자기가 하는 말을 자신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하늘에서 들린 음성과 제자들의 반응(34-36)

 

이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와 마태는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더합니다. 이 표현은 앞서 언급된 신명기 18:15의 말씀을 반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말을 들으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마지막에 일으키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맥에서 제자들은 종말론적 성취의 그림 속에서 하늘로부터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음성이 제자들에게 들렸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뜻과 기대와는 다르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이 일에 관해서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님의 침묵 요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의 침묵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영적인 예고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다가올 고난과 영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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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9-02)


바른 신앙고백과 제자로서 자세

누가복음 9장 18-27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이해하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구원을 주시는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갖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희생적 사랑과 섬김을 기대하셨고, 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헌신적 삶을 요구합니다.

 

  •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난 받는 그리스도로 밝히십니다. 문답 형식으로 시작하는 본 단락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18-20)을 듣고 나서 그리스도의 길을 드러내시고(21-22), 그리스도의 길에 합당한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23-26). 예수님께서 계시하는 그리스도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드러날 교훈과 사건의 바탕이 됩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18-20)

우리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각자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18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1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대화로 자신의 정체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십니다. 제자들과 대화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1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처럼 기도하는 장면은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순간마다 언급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3:21), 열두 사도를 선택하실 때도(6: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계시를 보여주실 때(9:29),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십니다(22:41).

본 단락은 오병이어 사건 후 제자들과 따로 모였을 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여행 후 그들과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려 하셨습니다(9:10). 그러나 뒤따라오는 무리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었고, 이제 오병이어 사건 후에 제자들을 이끌고 한적한 곳에 머무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와 이어지는 그의 질문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과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하였고, 아마도 무척 흥분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기적 때문에 장작 가르치려 하셨던 것을 놓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단락에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계시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무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들 중 한 명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19).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설명은 헤롯의 질문과 그가 받은 보고와 비슷합니다. 대중은 예수님을 선지자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셨지만, 그것은 메시아 사역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20).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와 대변인으로서 대답하기 때문에 그의 대답은 제자들의 견해를 반영합니다. 이제까지는 천사들(1:31-35; 2:11), 귀신들(4:41)과 같이 초자연적인 존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언급했으나, 처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칭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2:26의 ‘주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의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내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고 세우신 그리스도입니다. 변모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의 택함을 받은 아들’(9:35)이라고 부르십니다. 23:35에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메시아/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택하신 그리스도로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21-2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21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1-22)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21).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정치적-군사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의미가 빠진 그리스도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백성의 구원자로 통치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정체와 운명을 설명하십니다(22).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고 죽임당해야 합니다. 죽은 지 사흘째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데이(δεῖ)’를 넣어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시 2:7)과 하나님의 종(사 42:1)으로 선언했습니다(3:22).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예고된 고난 받는 종(예. 사 42, 53장)으로서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길이므로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운명을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은 십자가에 달려 죄를 용서하는 길을 열기 위함입니다.

 

제자의 길(23-27)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3-27)

 

신앙은 단순히 지식으로 꿑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제자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운명과 그의 제자들에게 제자로서의 삶인 제자도를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은 세 가지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너무나 중요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1) 자기 부인(23)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23).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에 따라오는 고난입니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로마의 배경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셨기에, 그를 따르는 제자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자기 십자가(24-25)

 

둘째,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24-25). ‘목숨’(프쉬케)은 그 사람의 생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26절처럼 예수님 때문에 수치를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을 피함으로써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는 행위는 제자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을 인내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결국은 목숨을 얻게 됩니다. 땅의 관점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위기로부터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현명하고 목숨을 잃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산법에 따라 이윤을 따져보면 정반대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빼앗기면 어떤 유익도 없고 온 세상을 얻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25). 세상을 얻고 목숨을 잃는다는 표현은 소유나 상업적 이미지와 관련됩니다. ‘얻다’를 뜻하는 ‘케르다이노’는 상업 용어로서 노력이나 투자를 통해서 무엇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제미오오’도 돈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상을 다 살 만큼 돈이 있다고 해도 목숨을 잃으면 얻는 것이 없어집니다. 24-25절에 반복되는 동사는 ‘잃다’입니다. 이 동사들의 용례를 고려하면,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게 될 때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현실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미래와 유익을 잃게 될 줄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거나 십자가를 제외한 방식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무엇이 유익이고 현명한 선택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따름(26-27)

 

셋째,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26). 26절은 재림과 연결해서 23-25절의 경고를 강화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오는 때는 재림입니다(12:40,17:22,24,26,30; 18:8; 21:27,3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1:27). 12:8-9은 마지막 재판의 상황을 인자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사용해 묘사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23) 자기 목숨을 구하는(24-25) 행동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수치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인자가 올 때 심판대 앞에 서서 삶을 반드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약속하십니다(27).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 나라로 시작될 것입니다. 몇 명의 제자들이 재림 때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볼 수 있는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9:28-37). 변모 사건은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들의 미래도 영광스럽게 될 것을 약속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신원 받게 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주를 선택한 제자들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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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9-01)


제자들에게 사명과 책임의 부여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9장 1-17절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실생활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열두 제자에게 사명을 맡기기 시작하며, 사명을 위해 권능과 권위를 부여합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정체와 운명을 배웁니다. 헤롯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부각된 예수님의 정체에 관심을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건에 열두 제자를 적극 참여시키십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1-6)

어떤 사람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내려는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욕이 넘치면 과욕을 부릅니다. 그것은 자신을 들어내는 욕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혼자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때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있음 또한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1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3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1-6)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권세를 주어 악한 영과 질병을 고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보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한 대로 각 마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을 전파하며 여행합니다.

 

(1)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신 예수님(1-2)

 

9장부터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합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십니다(1).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4:5,43;6:20; 7:28; 8:1,10) 치유하는 것(5:17; 6:18-19;7:7; 8:47)입니다. 이는 이사야 61:1-2의 실현이며,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자신의 사명입니다(4:18-19). 이사야 61장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받은 종의 사역을 예고했는데, ‘종’의 사역이 ‘종들’에게로 위임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권능(뒤나미스, 4:14,36; 5:17; 6:19; 8:46)과 권위(엑수시아, 4:6,32,36;5:24)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부름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실행해야 합니다. 오히려 부족할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과 권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2) 열두 제자에게 사역 지침을 주신 예수님(3-6)

 

이어서 예수님은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3-5). 제자는 무슨 사명을 맡았는지 알아야 하지만 어떻게 사명을 수행할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준비하지 말아야 한다(3절).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어야만 이 세상의 재물과 욕망에 눈길이 돌아가지 않게 된다(8:14). 제자들에게 요구된 준비는 광야 길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을 떠올린다(출 12:11). 하나님 나라의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표는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소개받는 사람은 전파자의 태도,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존하는 삶을 통해서도 복음을 봅니다. 제자는 어느 집에 들어가서 환대를 받으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집으로 옮기지 말고 끝까지 한곳에 머물러야 합니다(4). 제자는 기본적으로 섬김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배척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도시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도시를 떠날 때 발에서 먼지를 떨어내야 합니다(5). 이는 복음을 거부한 책임이 그 도시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명을 맡은 제자들은 여러 마을을 다녔고 모든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6). ‘복음을 전하다’(유앙겔리조마이)와 ‘치유하다’(쎄라퓨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명을 요약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고, 하나님 나라는 회복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돈과 부를 통해 안정을 얻으려는 욕망은 생명을 질식시켜버리고 맙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최고의 기쁨과 치유책으로 전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검소한 태도로 복음적인 삶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헤롯(7-9)

우리의 말과 행동은 주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믿음과 신앙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7○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7-9)

 

7-9절은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제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듣고 매우 당황합니다(7). 그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했으므로(3:1) 그곳에서 일어난 최근의 일을 보고받았습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헤롯이 보고받은 내용에 따르면, 대중은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했습니다(7b-8). 공통점은 예수님을 살아난 선지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이 요한을 참수형으로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요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헤롯은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들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합니다. ‘그를 보고 싶어하다’는 23:8에도 사용됩니다. 23:8은 헤롯이 예수님을 통해 표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부연 설명합니다. 헤롯의 관심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나 호기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을 획득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태도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을 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10-17)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필요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줍니다. 공동체의 힘과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10○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10-17)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돌아와 사역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외딴 곳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려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오고,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천 명을 먹이게 하십니다.

 

(1)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예수님(10-11)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사도들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보고합니다(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에 가십니다. 무리가 경로를 파악하고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선포하고 병을 치유하십니다(11).

 

(2) 먹을 것을 고민하는 제자들(12-14a)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무리를 보내 마을과 촌에서 식사를 해결하도록 지시하라고 요청합니다(12). 왜냐하면 무리가 모인 빈 들에는 먹을 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13). 이에 제자들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생선뿐이니 많은 무리를 위해서는 그만큼의 음식을 사야 할 정도라고 대답합니다(13). 그곳에 모인 무리는 오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리를 오십 명씩 앉히라고 지시하십니다(14).

 

(3)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신 예수님(14b-17)

 

제자들이 지시대로 앉히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도록 하십니다(15-16). 빈 들에서 오천 명이 음식을 공급받은 장면은 출애굽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이나(출 16:4-36) 엘리사가 무리를 먹이고도 음식이 남은 장면을 떠올립니다(왕하 4:38-44).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해석됩니다.

첫째, 오병이어 사건은 메시아의 만찬입니다. 광야 식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주의 만찬을 예고합니다. 두 사건 모두 빵을 취하고, 감사하고, 떼고, 주는 순서로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온 사람들을 앉게 하셨고 주의 만찬에서도 그들과 함께 앉으셨는데, 두 장면에 사용된 ‘카타클리노’는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비스듬히 기대는 자세를 가리키는 전형적인 동사입니다(9:14-15;24:30; 참조. 7:36; 14:8). 또한 오천 명의 식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식사(24:36-43)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의 식사(24:13-32, 33-35)처럼 일상의 음식을 나누는 식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광야의 식사에는 정결 예식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정하고 가난한 자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식탁을 통해 환대하시고 교제하십니다. 사회의 중심부에 들지 않은 자들을 언제나 식탁으로 환영하고 기뻐하십니다. 이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고 계시를 나누는 것이 그가 오신 목적입니다. 화려한 건물이 없는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정형화된 예전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일상의 소박한 만남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에 해당합니다. 무리는 예수께서 제공하신 음식으로 배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11) 배고픔도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계시는 점을 강조합니다(6:21). 마리아는 허기진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될 것을 예고했습니다(1:53).

셋째, 제자들은 식사를 섬기는 종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섬기는 책임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고, 이는 둘째 의미와 비슷합니다. 부를 사용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받아 사역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으로, 믿음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부족함을 채우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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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8-04)


질병과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8장 40-56절


 

현대 시대는 이전보다 더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시대정신이 실용과 물질, 쾌락을 선호하기에 믿음을 갖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마비나 지적 자살로서의 믿음이 아닌, 신뢰로서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뢰의 믿음이야말로 이 시대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도전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앞 단락에서 부정한 이방 지역에서 부정한 남자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의적으로 부정한 여자와 죽은 소녀를 시유하고 회복하십니다. 두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가 딸의 회복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딸이 회복되는 기적으로 마칩니다. 중간에 등장한 혈루증 환자는 회장장 야이로가 가져야 하는 믿음의 모본을 보여줍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40-42)

예수님께서는 장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믿음이 있는 곳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치유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40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40-42)

 

예수님 일행은 이방인 지역 데가볼리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 후 유대인의 땅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였으나 많은 유대인들은 환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7:19-20; 벧후 3:12-14). 예수님께 관한 소식이 유대 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다리던 사람 중에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41). 그는 회당의 지도자로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학식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열두 살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던 도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것(49)은 딸이 사실상 눈을 감기 직전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유대교에서 명망 있는 지위의 회당장은 예수님의 능력 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집으로 오실 것을 간청했고,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고 이동하는 동작만 언급된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딸을 고치러 갈 때 무리가 밀려들었습니다. ‘밀려든다’는 숨통을 막았다는 뜻으로(8:14)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에서 ‘기운을 막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원했고 질식할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이동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혈루증 여자의 치유(43-48)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숨기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해결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3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43-48)

 

무리가 밀어닥치는 가운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야이로만큼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왔습니다. 혈루증은 나병처럼 사회-종교적으로 부정한 병이어서 환자는 사회에서 격리되고 제의적으로 격리됐습니다.

여자는 12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했으므로 12년 동안 피가 나올 때마다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어버리는 부정결의 원인이었습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레 15:31). 환자는 피가 12년 동안 흘러 늘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고 부정결한 여자로 멸시받았을 것입니다. 여자는 오랜 투병생활로 나약해진 상태인데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집니다. 혈루증 환자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율법을 위반하는 죄입니다. 그녀가 만진 사람은 하루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정과 정결은 사회를 유지하는 원리였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방법을 눈앞에 두고서 물러나기에는 그녀가 그동안 겪은 고통과 수치가 너무 컸습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즉시 병이 치유됩니다. 여자에게서는 부정하게 하는 피가 흘러나왔지만 예수님에게서는 정결하게 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흘러 나왔습니다. 오랫동안 병의 상태에 민감했던 여자는 출혈이 멈추고 몸의 원기가 회복되는 것을 곧바로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묻자 모두 아니라고 말합니다(45). 베드로는 무리가 밀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45b).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이 분명하므로 손을 댄 자가 있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46).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부정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압도하므로 예수님께서는 오염되지 않고 부정을 정결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떨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손을 댄 이유와 나은 상태를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합니다(47).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을 믿고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믿음이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 무리 가운데 서는 것도 믿음입니다.

첫째, 믿음으로 여자는 병을 치유 받고 정결하게 됐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부정한 여자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일정 기간 정결 의식을 행해야 하고 여자는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행위를 위법한 것이 아니라 능력을 얻게 된 통로로 보십니다. 누가 행전에서 ‘믿음’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다른 존재(예수님)에게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5:20; 7:7-9, 50). 믿음은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여자의 믿음은 부정과 정결의 경계를 뛰어넘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40-56절에는 두 명의 절박한 사람이 등장하고, 여자의 절박한 심정은 부정과 정결의 규례를 넘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44-47절에 손을 대는 동작이 네 차례 언급됩니다(44, 45, 46, 47). 믿음은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의 절박한 행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렸으나(40)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손을 대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한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뒤나미스)를 경험합니다. 둘째, 믿음은 공동체로 회복되는 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는 신체의 치유를 얻었으나 아직 사회-종교적 정결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 여자를 딸로 부름으로써 그녀를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환영하십니다. 구원은 공동체로 회복되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평안히 가라’(48)는 작별 인사로 공동체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나누는 인사입니다(예: 7:50). 뿐만 아니라 평안(평화)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한 선물입니다.

여자는 부정과 정결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죄로 사람들의 정죄와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가족으로 복귀합니다. 외적인 조건에 의한 부정이 한 영혼이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공동체로 회복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위해 그녀를 중앙에 세우셨습니다. 질병은 여자를 격리시켰으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몸의 치유와 명예를 선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정결과 부정의 규례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합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49-56)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믿음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질병과 죽음이 가져다준 소외와 슬픔과 절망에서 구원하여 참된 자유와 쉼을 안겨 주십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8:12)을 좀 더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 있습니다.

 

49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49-56)

 

예수님께서 혈루증 앓았던 여자와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야이로에게 와서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합니다(49). 이는 야이로가 처음 예수님께 왔을 때 딸이 죽어간다(42)는 보고가 사실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집으로 올 이유가 없으니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49)라고 말합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혈루증 환자와 만나는 동안 시간이 지체되고 야이로의 딸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시체처럼 지냈던 여자는 딸로 살아났으나 12년을 살았던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소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50).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50).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게 하십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과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하십니다. 혈루증 여자의 역전된 운명이 야이로의 딸의 운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에게 있어서 믿음의 모본은 혈루증 환자의 믿음입니다. 야이로는 혈루증에서 치유 받은 여자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하고, 처음보다 더 강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긍휼을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누구도 함께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51). 집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했습니다(52).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53). 전문적으로 애곡하는 사람들은 비웃습니다(53).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54). 그러자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시체의 손을 붙잡는 것으로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혈루증을 앓은 여자처럼 소녀는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에 접촉됨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십니다. 혈루증 여자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열두 살 소녀는 아버지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아버지의 절박한 믿음과 사랑이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믿음을 사용해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믿음의 가족과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예수님에게 매달리고 기적을 공유하므로 이런 가족과 공동체에 속한 것은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을 본 자들은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허기와 기갈, 체념과 슬픔과 중독의 세상에 희망을 이야기하고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허황된 말로 희망고문하지 말고, 참 희망이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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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8-03)


귀신들인 사람을 재창조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8장 26-39절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은 죽어서 하늘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통치 아래 해방, 자유, 평안, 쉼,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체, 내면, 영혼이 전인격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새로워지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 거라사의 광인이 회복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앞 단락(8:22-25)과 연결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나서 ‘그는 누구인가?’(8:25)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집니다. 본문에서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귀신들이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28)라고 말합니다. 두 단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한 남자를 공격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귀신들(26-29)

사단의 목표는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돈이나 권력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곳에 살더라도 의미 없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은 자연을 넘어 영적인 세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돕습니다.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26-29)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광풍과 물을 잠잠케 하신 자연을 다스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다스리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의 광풍을 뚫고 건너편 거라사인들의 땅에 이르렀습니다(26). ‘거라사’는 ‘열 개의 도시’를 뜻으로 헬라 문화가 발달한 데카폴리스에 속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부정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은 이 지역을 피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건너가셔서 사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이 유대를 넘어 이방인에게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뛰어 넘을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전혀 새로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거라사에 배에서 내리자마자 먼 먼저 맞이한 사람은 그곳 도시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27). 이 귀신들린 자는 세 가지 증상으로 소개합니다. 옷을 입지 않고, 집에 머물지 않으며, 무덤 사이에 거주 했습니다(27). 죽은 시체들이 있는 무덤 사이에 거주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짓입니다. 그의 겉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자비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죽은 시체들이 묻혀 있는 부정한 공간 무덤 사이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러운 지역에서 더러운 장소에 사는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방인인 지역을 복음으로 새롭게 하시고 귀신들린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한편 이 귀신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복수형인 ‘귀신들’은 남자가 많은 귀신들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귀신들의 규모는 ‘군대’라는 용어로 구체화됩니다. 이 남자를 많은 귀신들이 사로잡고 있는 증거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지내며 집을 떠나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무덤들 가운데’ 거하는 모습은 그가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과 더 가까운 관계임을 내포합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시체가 안장된 무덤은 부정하며, 그는 무덤들이 있는 부정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28). 이런 행동은 귀신들이 조종한 결과입니다.

귀신들은 귀신 들린 자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귀신은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외칩니다. 앞서 제자들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39)라고 질문했습니다. 그의 대답이라도 하듯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귀신이 하는 말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심판 대상일 뿐입니다. ‘지극히 높은 자’는 누가복음의 전반부에 주로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으로 인정하는 칭호입니다(1:32,35,76; 2:14; 6:35; 8:28; 19:38; 참조. 행 7:48; 16:17),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귀신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겨루어 이길 수 없습니다.

한편 귀신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귀신의 정체를 알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29). 사실 귀신들린 이 사람을 제어하기 위해 사람들은 쇠사슬로 묶어두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는 그 매인 것을 끊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29b).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전투를 벌이지 않고 협상을 시도합니다.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아줄 것을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가 2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도록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귀신에 속박된 남자는 가족과 사회에 해로운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사슬과 족쇄로 제어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귀신의 힘으로 그는 결박을 풀어버렸고 귀신은 그를 광야로 내몰고 가버렸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남자를 감금할 수 없는 모습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을 귀신들의 공격으로 진단했기 때문에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 거라사로 오셨고 선전포고를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귀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셨는지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들은 폭풍의 공격을 뚫고 거라사로 오신 예수님께 패배당하고 갇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은 그들이 피하려는 고통이 무저갱에 갇히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인 예수님 외에는 귀신의 세력에 속박된 남자를 해방할 수 없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30-33)

아무리 많고 강한 귀신들이라도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마귀인 더러운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온통 부정한 것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정한 곳에서 거룩한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는 내용입니다.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30-33)

 

예수님께서는 귀신과 협상하지 않고 그 귀신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30).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세력이 귀신들인 것을 드러내고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남자는 이름을 ‘군대’라고 말합니다. 약 5,600명의 군인들로 구성된 ‘레기온’은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귀신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자 무저갱에 던지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31). ‘무저갱’은 귀신들이 갇히는 감옥입니다. 한 남자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 가두었던 귀신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감옥에 갇힐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귀신들은 그곳 산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십니다(32). 귀신들은 남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 들어갑니다(33). 이 장면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괴롭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귀신들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돼지들은 귀신의 세력에 의해 혼돈에 빠져 비탈 아래로 달려 호수에 빠져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짐승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귀신들은 여전히 생명체에 들어가 활동할 줄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무저갱은 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생존한 것이 아니라 물 아래 무저갱에 갇힙니다. 다시 말해서, 돼지 떼가 물에서 몰살한 사건은 귀신들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즉시 심판받아 감옥에 갇히는 고통에 빠진 사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온 목적이 거라사 광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영혼이 돼지 이천 마리보다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희생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을 자학하며 살아가는 광인의 배후에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귀신’, ‘귀신들’, ‘더러운 영’ 등의 용어는 예수님과 사탄의 세력 간에 일어나는 충돌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혼돈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분이므로 예수님을 의존하는 길이 평화와 승리의 방식입니다.

 

선포하는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34-39)

우리를 온전하게 고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을 온전하게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배풀어 주신 구원은 귀신이 가져온 모든 파괴 상태를 역전시키고 새로운 상태로 주십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본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십니다.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만이 가자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34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34-39)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일어난 상황을 보고 도망쳐 자기가 실고 있는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34).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35a). 그들은 귀신들에게서 해방된 남자가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35). 발치에 앉는 것은 학생(들)이 선생에게 배우고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왕하 4:38; 행 22:3). 벌거벗은 채 돌아다닌 모습이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실존이었다면,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회로 복귀할 수 있고 훈육이 가능한 상태로 회복된 것을 뜻합니다.

제어할 수 없었던 남자가 이제 예수님께 복종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됩니다. 사건의 전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주민들에게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36). 그가 지금 온전한 태도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구원받은 결과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 현장에 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라사 주변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37a). 예수님의 능력이 앞으로 초래할 문제를 염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그곳을 떠나십니다(37b).

귀신 나간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했습니다(38).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면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온 도성에 알리도록 지시하십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구원이 공동체로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귀신 들렸던 남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온 도성에 선포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대표인 아담은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떠나지만, 결국 사탄에 더 예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둠에 지배되어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의 욕망과 정욕에 사로잡혀 이성 잃은 짐승처럼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안에서 해방된 영혼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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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8-02)


자연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8장 16-25절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백성 없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을 통해 임했으며,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들로 인해 성장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말씀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18절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특권을 얻은 것과 이 비밀이 널리 공개되는 것을 말합니다. 19-21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족을 규정하는 기준임을 알립니다. 22-25절은 예수님의 정체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시련과 위험에 처한 제자들에게 필수적임을 말해줍니다.

 

등불의 비유(16-18)

하나님 나라는 ‘드러난 비밀’입니다. 죄가 진리를 아는 빛을 가렸기 때문에, 이미 알려졌지만 대분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 비밀로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등불처럼 진리의 빛을 드러냅니다.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16-18)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비유를 통해 말씀합니다. 네 종류의 땅에 대한 비유와 해설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의 중요성은 등불의 비유(또는 격언)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16). 등불은 밝히려고 켜는 것이지 감추려고 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녁 식사에 손님들을 초대한 경우 등불은 필수적입니다. 여기서 ‘등불’과 ‘빛’은 다릅니다.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제자들이나 신자들이며, ‘빛’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복음도 빛에 해당합니다. 등불은 ‘들어오는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등경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의 빛을 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8:10).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복음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통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사역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7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므로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 빛을 비추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등불의 빛은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고 감춰진 것을 알리고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은 숨겨지고 감춰진 것으로 제자들에게 계시됐습니다(8:10). 제자들이 깨닫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행 2:36). 이와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제자들을 통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듣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18a). 가진 자들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중하게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말씀을 소유하게 됩니다. 씨가 좋은 땅 ‘안으로’ 심긴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인내로 지키기 때문에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해 구현됩니다.

결국 종말의 잔치를 즐기는 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가지지 않은 자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8절은 씨가 뿌려진 땅의 비유와 연결됩니다(1-15).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종류의 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외면하거나 일시적으로만 관심을 두고 마는 사람들은 들었던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겨버립니다. 결국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는 기회를 놓침으로써 생명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시작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좋은 땅의 태도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르게 들은 말씀은 제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고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족(19-21)

하나님 나라에는 혁명적 가족관계가 전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자기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가족은 혈통을 따라 형성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가족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거듭나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자녀 됨의 증거입니다.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19-2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주제는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온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지만, 무리가 많아 예수께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습니다(19). 그러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보기 원하여 밖에 서 있다고 전합니다(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가족의 정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 들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신 예수님(22-25)

예수님을 향한 반응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가족이자 천국의 백성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그분을 붙드셔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참빛이신 예수님을 전하셔야 합니다.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22-25)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 시작했으나(8:10),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풍랑이 잔잔해지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들이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연을 제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에 바다가 고요해지는 현상으로 입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치유하는 권위뿐 아니라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갖고 계시며,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달리 기도를 하지 않고도, 즉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 없이 자신의 말로 혼돈을 잠잠하게 만들어버리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암시들입니다. 배에 올라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던 중에 일어났습니다(22). 배를 타고 갈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호수에 불어 닥쳤습니다(23). ‘광풍’은 아래서 위로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으로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광풍이 ‘내려오다’라는 표현은 호수의 서쪽 산과 골짜기에서 바람이 갑자기 하강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산과 골짜기에서 내려온 광풍이 호수 아래서 위로 휘몰아치는 식으로 제자들이 탄 배를 공격했기 때문에 배는 금방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24). 제자들은 이번 위기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시편 44:23-24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깨어 문제를 해결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자 호수가 조용해졌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이제까지 ‘꾸짖다’라는 단어는 귀신(4:35, 41)과 열병(4:39)을 꾸짖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을 명령하신 것으로 말합니다(25).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꾸짖고 제자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구약에는 폭풍이 잠잠하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시 65:7; 89:9; 104:6-7; 107:23-30),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제압하십니다(시 18:15; 104:7; 106:9; 사 50:2; 나 1:4). 유대인들은 무질서와 악의 세력이 바다에 출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시 89:8-11; 107:23-30; 참조. 시 69:1-3,30-36; 124편; 욘 1장).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은 그의 명령으로 보입니다. 충격적인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라고 서로 묻습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은 누가복음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1:13, 30, 50; 2:9-10; 5:10). 누가는 혼돈과 무질서를 제어하신 ‘그는 누구인가?’이 질문은 독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을 믿었지만, 바람과 물을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을 가진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시 104:6-9; 느 1:4). 바다의 바람과 성난 파도보다 예수님의 능력이 더 크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세 종류의 땅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더 깊이 아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고 험한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윤리적 열매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과 시련에 맞서는 태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들었는지 여부는 높은 수준의 윤리로 나타날 뿐 아니라 위기에 담대하게 대처하는 태도로도 판명 납니다. 예수님의 정체, 곧 그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때 위험과 시련을 담대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평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것처럼 보여도 인생의 위기가 외부에서 닥쳐오면 하나님의 부재를 불평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는 자입니다. 온 세상과 영합하지 않고 등경 위의 불처럼 세상을 비추셨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 나라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과 믿음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신뢰 속에 인생을 걸으셨던 그 본을 따라 잘 듣고 순종하여 하늘 가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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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8-01)


말씀으로 열매를 맺는 신앙

누가복음 8장 1-15절


 

간증자들이 자신의 은혜를 말할 때, 마치 방금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때로는 자신만이 큰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통해 은혜를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행실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받은 은혜와 행실의 불일치가 큰 혼란을 초래함을 보여줍니다. 신앙과 행실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네 종류의 땅에 대한 비유와 해설로 구성됩니다. 비유는 듣는 태도를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으로 시작됐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 가지 반응에 따라 열매가 결정된다고 말해줍니다.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1-3)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룹니다. 세상 나라는 나이, 성별, 인종 등으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차별 없이 사람들은 구원으로 초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순종과 헌신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1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1-3)

 

앞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발에 입을 맞춘 한 죄인이었던 한 여인의 헌신을 살폈습니다. 여인들은 당시 이방인이나 세리 그리고 죄인과 같이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다른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누가가 그들의 헌신을 강조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 있는 자들이 돈이나 칼의 힘으로 득세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피를 흘린 것이 것이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는 나라입니다.

1-3절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고 8장의 표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도시와 마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전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앞 단락에서 ‘복음’은 ‘죄용서’, ‘구원’, ‘평화’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목격자들인 열두 제자는 사도로 부름 받은(6:13) 이후 예수님과 함께했고(6:17), 8장에서는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표현은 ‘그와 함께’와 섬김입니다. 첫째, 1절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 하였습니다(1).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 제자들뿐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했으며, 이어 나오는 내용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자들의 신분과 섬김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2).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여인들의 활약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제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목격자와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확장되는 것을 먼저 목격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목격해야 증언할 수 있고 경험해야 전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처음부터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과 병에서 이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세 명의 대표적인 여자들(막달라 마리아, 수산나, 요안나)이 소개됩니다. 일곱 귀신에서 해방된 ‘막달라 출신 마리아’는 십자가와 빈 무덤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24:10). ‘요안나’는 헤롯의 청지기를 남편으로 두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빈 무덤의 증인이기도 합니다(24:10).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의 배경만 보아도 예수님의 공동체가 다양한 계층을 포괄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고통과 아픔, 사회적인 편견과 소외, 영적인 속박과 누림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고통을 격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들에게 자유와 해방, 그리고 평강을 주신 새로운 주인, 참 사랑이 많으신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주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섬기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들이 섬긴 대상인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가리킨다. 여자들이 ‘그들의 소유로’ 공동체를 섬긴 것은 자신의 재정을 사용하여 섬김을 의미합니다. 여자들의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귀신에서 해방된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은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비유처럼 빚을 많이 탕감 받아 예수님을 크게 사랑하는 예입니다(7:41-47).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처럼 은혜 입은 자들의 섬김을 통해 확장됩니다(예. 행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또한 이어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결해 보면 이 여자들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에 영혼을 빼앗겨 순종하지 못한 부류와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사람들입니다(8:14-15).

본문의 여자들은 재물로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의 모본입니다. 세상의 많은 소유가 주지 못했던 참된 치유와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치유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헌신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네 종류의 토양에 대한 비유(4-15)

하나님 말씀은 땅에 뿌려지는 축복의 씨앗과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씨앗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씨앗을 받는 모든 사람이 결실을 맺지는 못합니다. 말씀의 씨앗을 받고 백 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할 영적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뿌려진 씨앗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씀이 다른 결과를 내는 이유는 마음의 밭의 차이 때문입니다.

 

4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4-15)

 

신앙의 삶에서 백 배의 결실을 맺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은 이후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나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부터가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비유로 진리를 전파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제자가 누구인지 제자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할 때,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1) 네 종류의 땅에 뿌리진 씨(4-8)

 

4-8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설명하는 의도로 주어졌습니다. 각 도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종류의 밭을 소개합니다. 그 떨어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씨는 밭두렁에 떨어졌습니다. ‘길’은 밭을 구분하는 밭두렁을 가리킵니다. 두렁은 다른 밭과 구분 짓는 기능을 하고 밭 가운데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길옆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혔고 새들이 먹어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돌투성이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많은 땅은 석회석 위에 흙이 덮인 상태였기 때문에 흙이 깊지 않은 돌투성이 땅에 떨어진 씨는 물기에 빨리 반응해서 싹이 곧 돋기는 했으나 태양이 떠오르자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은 밭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짐승을 막는 용도였을 수도 있고, 지난해의 가시덤불이 밭에 마른 상태로 남아 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씨앗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씨앗과 달리 어느 정도 자랐습니다. 하지만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씨의 숨을 막아버렸습니다. 세 종류의 땅 어느 곳에서도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가장 깊이 심긴 씨는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갔고 백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백배의 결실은 완전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씨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네 종류의 토질에 따라 열매가 맺히는 여부가 달라집니다.

 

(2) 계시와 비유(9-10)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제자들에게 허락됐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전해졌다고 대답하십니다(9-10). 10절은 이사야 6:9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를 인용입니다. 비밀(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은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은 신비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으며, 계시자 또는 묵시자의 도움을 통해 알려질 수 있습니다(단 2:27-28). ‘주어졌다’는 신적 수동태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시되고 동시에 감춰지는데,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시할 목적으로 주어진 수단이지만 감추는 기능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관심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므로 비유를 듣고도 떠납니다. 비유에 대한 무관심이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지 않고 심판의 길을 선택해버린 상황을 이사야 6:9을 인용함으로 설명합니다.

 

(3) 비유를 해석하시는 예수님(11-15)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지만 모든 사람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십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1). 씨가 밭두렁에 떨어진 비유에서, 이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마귀가 가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습니다(12).

청중은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예수님을 대합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고 순종하지 않으면 듣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씨가 돌투성이에 떨어진 비유에서, 사람들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지만 뿌리가 없어 짧은 기간 믿어도 시련을 견디지 못해 배반합니다(13).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뻐하더라도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은 말씀이 심기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진 비유에서, 이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지내던 중에 생명의 염려와 부와 즐거움에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14).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고 부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지 않았음을 드러낼 뿐입니다(9:51-19:27). 시간이 지나면 돈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진 비유에서, 이들은 말씀을 들을 때 좋고 선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인내로 결실합니다(15).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복과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믿음으로 잘 받아야 합니다. 또한 받은 말씀을 잘 지키며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로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풍성히 누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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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7-03)


죄인인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7장 36-50절


 

일을 하다가 지치면, ‘며칠만 병원에 입원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분들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병원에 며칠만 입원한다면, 건강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 아팠던 경험한 분일수록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최선을 다해 건강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 7:35-50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으로 죄 많은 여자의 헌신을 제자도의 모본으로 설명합니다. 누가는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을 소개하고(36-39)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빛을 탕감받는 두 사람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십니다(40-43). 누가는 다시 여자의 헌신을 시몬의 태도와 비교해서 강조하고(44-46),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많은 죄가 사해진 것으로 거듭 강조해 설명합니다(47-50).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36-39)

현대 사회에서는 편견과 편애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분은 어떤 차별도 없이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사랑과 포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이가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36-39)

 

누가복음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의 잔치를 참석하셔서 죄인과 의인을 나누셨습니다(5:27-32). 또한 세례 요한에게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들로 나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를 받은 사람과 죄 용서를 모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죄 용서와 감사’라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1) 바리새인의 초대 받은 예수님(36)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36).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왜 초대했는지 배경 설명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헌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또 말씀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악의를 가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40). 아마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는 ‘시몬’입니다(40). 유대인의 만찬에 초대받아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은 사회적인 친밀감과 존중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의 식사는 정결한 사람들과 정결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2) 향유를 붇는 여인(37-38)

 

그런데 죄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소식을 듣고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찾아왔습니다(37). 죄 있는 여자와 바리새인의 만찬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초대자는 네 번에 걸쳐서 ‘바리새인’으로 언급되므로(36[×2], 37, 39), 죄 많은 여자가 들어온 것은 초대자와 손님들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엄격한 식사 자리에 도시에서 죄 많은 여자로 알려진 자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여자는 갑자기 난입했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장면은 곧이어 벌어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U자 모양으로 식탁을 둘러앉았으므로 여자는 예수님의 뒤로 왔습니다(38).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는 손님의 뻗은 발은 여자가 씻기에 적합한 신체 부위였습니다. 여자는 수건을 대신해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은 이 광경을 보고는 만일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면 이곳에 온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아야 했다고 마음으로 독백합니다(39).

예수님은 죄인들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베드로’와는 다른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초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는 일반적인 초대였습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왔을 때, 일반적으로 초대한 사람들이 발 씻을 물을 제공하거나 종을 시켜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죄 용서와 사랑에 대한 비유(40-43)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깨닫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4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40-43)

 

바리새인은 도시에서 잘 알려진 죄인, 곧 부정한 자가 수치를 모르고 남성들의 정결한 식사 자리에 난입한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수치스런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여자를 꾸짖어 쫓아내지 않은 예수님에게 식사를 망가뜨린 책임을 돌립니다.

바리새인은 여자의 실체를 모르고 섬김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비유로 그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40).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실체를 알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생각마저 아는 선지자의 능력이 있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한 명에게는 500데나리온을 다른 한 명에게는 50데나리온의 돈을 빌려주었습니다(41). 당시에 1데나리온은 군인이나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이었으므로 각각 약 2년 치와 2개월 치의 빚을 진 셈입니다. 두 채무자 다 돈을 갚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주인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42).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43).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십니다.

 

죄 용서와 사랑에 대한 설명(44-47)

헌신은 용서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느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의 빚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헌신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돌아보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여자의 행위를 주목할 것을 동작으로 요구할 뿐 아니라 ‘이 여자를 보느냐?’는 질문으로 요구하십니다. 여자를 신앙의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도로 여자의 행위와 시몬의 행위를 대조하십니다. 명예와 수치의 윤리가 사회의 근간이었던 문화에서 시몬은 예수님께서 여자의 환대를 수용함으로써 초대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시몬이 손님을 환대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은 점을 여자와의 비교로 드러내십니다. 유대인의 만찬에 초대받은 손님을 위해 주인은 씻을 대야와 포도주를 제공했는데,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왔을 때 시몬은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44). 시몬은 예수님에게 입 맞추지 않았으나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45).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으나 여자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46).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시몬이 예수님을 그렇게 무례하게 대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의 환대와 크게 비교됩니다. 발을 머리카락으로 씻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준으로 낮아져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36-39절과 본문이 묘사한 여자의 모습은 겸손과 헌신입니다. 40-43절과 47-50절에 따르면 많은 죄를 용서받은 은혜와 감사가 크기 때문에 여자는 가장 소경한 것을 드리기까지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자의 행위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한 것이므로 칭찬받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단지 존경과 예의로 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시몬처럼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신 은혜에 최고의 것을 드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헌신은 신자로 하여금 최고의 것을 주신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전합니다.

 

죄 용서를 선언하신 예수님(47-50)

우리의 과거 죄가 아무리 많고 크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큰 용서를 받은 자가 더 큰 사랑을 베푼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깨닫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47-50)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죄가 많기 때문에 큰 사랑을 보여준 것이라고 시몬을 향해 말씀하십니다(47a). 반면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합니다(47b).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에서 각각 ‘은혜로’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여자의 죄도 은혜로 사해졌습니다. ‘그녀의 많은 죄들이 용서받았다’에서 ‘용서받았다’(아페온타이 ἀφέωνται)는 수동태 완료형입니다. 여자의 죄는 예수님에 의해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죄를 사함 받은 감사와 은혜 때문에 크게 사랑했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어떤 죄를 언제 용서받았는지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의 사랑은 이미 얻은 용서와 구원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죄 사함에 대해 시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여자를 향해 ‘네 죄들이 사함 받았다’(48)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알기에 사랑을 표현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를 언급하셨겠습니까? 이는 여자의 죄를 용서한 주체가 예수님 자신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자 함께 앉아있던 손님들이 마음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말합니다(49).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50). ‘구원했다’(세소켄 σέσωκέν)는 완료형 동사입니다.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랑의 행위가 나온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듣도록 여자의 구원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여자는 죄를 용서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믿었기에 구원을 얻었습니다(예. 5:20). 구원은 죄 용서의 다른 표현입니다. 만찬에 모인 사람들은 여자의 신분을 죄 많은 여자에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딸로 인식해야 합니다. 여자 자신도 반전된 지위를 확신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용서받아 거룩하게 된 자로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하십니다.

본문은 시몬의 반응을 언급하지 않고 열린 상태로 마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여자의 변화된 지위를 인정할 것입니까? 열린 결말은 독자들에게도 반응을 요청합니다. 죄를 많이 지은 것으로 도시에 널리 알려진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제까지 공익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큰 빚을 졌을 수도 있고 성적인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여자가 체면과 명예의 질서에 들어와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하는 모습은 공동체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을 가족으로 환대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인사를 하신 예수님처럼 용서받은 상태를 인정하고 교제의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며, 우리의 과거 죄가 아무리 많고 크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큰 용서를 받은 자가 더 큰 사랑을 베푼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천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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