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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2)


하나님의 공급과 사람의 가치

누가복음 12장 13-34절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물질과 명예보다 우리의 성품과 영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염려 대신 감사와 믿음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12:1-12에서 핍박받게 될 제자들이 종말의 시각에서 신실하게 대처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12:13~34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유와 재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설명하십니다. 구체적으로 13-21절에는 생명의 가치를 재물로 이해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평가가 나놉니다. 22-34절은 재앙으로 끝난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을 피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소유에 있지 않는 생명의 가치(13-21)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과 영혼의 가치에 있습니다. 물질적인 소유는 일시적이지만, 성품과 영적인 성장은 영원합니다.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소유보다 성품과 영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3-21)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재산 분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탐욕의 위험성과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중하는 삶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십니다. 그는 한 부자가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안락한 삶을 계획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요구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게서는 물질이 아닌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1) 탐심을 물리치라(13-15)

 

예수님께서 핍박 가운데서 신실한 신앙을 시켜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실 때(12:1-12)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유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3). 그는 동생으로, 자신이 결정한 해결책을 예수님의 권위로 승인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재자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그가 중재를 요청한 동기를 탐심으로 규정하십니다. ‘생명’(조에)의 가치는 소유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탐심’(플레오네시아)의 배후에는 불안이 존재하고,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확신이 생깁니다.

 

(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6-21)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한 채 탐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예로 들기 위해 비유를 전하십니다(16-20). 부자 농부는 풍성한 소출을 얻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탐심이 발동해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에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려 합니다. 곳간을 만들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마음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20). 그는 ‘나의’를 강조해 ‘내 곡식’,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17-19)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느날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자 자기를 위해 준비한 재산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부자는 지혜로운 계획을 세웠다고 확신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실 때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은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자신을 위해 쌓는 소유가 아니라(15)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21).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쌓아’ 두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 쌓은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탐심을 채우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자가 되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요해지는, 즉 깊어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고의 준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고 생명이 더욱 풍성해집니다(12:33-34).

 

궁핍함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말라(22-34)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먹고 마시는 걱정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합니다. 염려 대신 감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의 공급하심을 신뢰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평안과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22-34)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돌보시듯, 우리도 돌보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공급하심을 믿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염려하지 말라(22-30)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욕망이나 열망은 염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과 몸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고 입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대표하므로, 의식주를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필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제자들의 목숨과 몸은 먹고 입는 문제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22)은 탐심을 물리치라는 명령(15)과 비슷하고, 사람의 목숨이 먹고 입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23)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교훈(15)과 연결됩니다. 24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가치를 근거로 염려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까마귀는 씨를 뿌려 추수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곳간(골방)과 창고에 쌓지 않습니다. 까마귀는 탐욕스럽고 부정하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새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실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까마귀도 돌보십니다. 여기서 곳간과 창고에 저장하는 그림은 곳간에 재산을 쌓은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떠올립니다(12:18-19). 부자는 자신이 쌓은 재산에 근거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쌓아 놓은 곳간과 창고가 없어도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저장하지 않는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면 존귀한 자녀를 돌보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십니다(25-26). 염려한다고 해서 생명의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듯, 염려는 도리어 생명을 단축할 뿐입니다. 생명의 길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자신의 나약한 능력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염려에 시달리지 말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성부에 대한 신뢰가 염려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27-28절은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존귀한 가치를 피조물과 비교해서 강조합니다. 들꽃은 사람이 정성껏 가꾸는 정원의 식물이 아닙니다. 오늘 잠시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의 땔감으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하찮게 보이는 들꽃의 아름다움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인생을 산 솔로몬(왕상 10:4-5,21,23; 대하 9:4,20,22)의 업적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신 것 같지만, 돌봄을 받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들꽃, 하루를 생존하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가 되십니다. 자연의 미약한 풀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다면, 당신의 자녀를 얼마나 아름답게 돌보시겠는가! 제자들은 세상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코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돌봄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교훈을 요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아시므로, 근심으로 이런 것들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대표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채워주실(31)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녀의 필요를 아시는 능력의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자체가 신자들에게는 선물이며 감사입니다. 따라서 염려는 하나님을 망각할 때 생기고, 감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앞의 비유에 나온 부자가 그렇습니다. 비록 쌓을 곳간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한 것이 미래를 최고로 잘 준비한 것처럼 보였으나, 소망을 하나님께서 아니라 물질적 풍요에 두었기에 어리석었습니다. 특히 부의 원천을 ‘나’로 생각했기에 어리석었습니다(17-19).

 

(2)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31-32절)

 

제자들은 염려하는 것 대신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는 30절의 ‘너희 아버지’를 가리키므로, ‘그의 나라’는 자녀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시는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제자들은 큰 세상에 비해 ‘작은’ 존재고 맹수처럼 힘 있는 세력에 비해 약한 ‘양 무리’이므로, 강한 자들이 살아가는 큰 세상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양 무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분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뻐하다’(유도케오)의 명사형은 ‘선한 뜻’ 혹은 ‘은혜로운 뜻’(유도키아)입니다(예. 참조. 10:21; 마 11:26). 세상에서는 약해서 힘을 얻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작은 양 무리를 위해 ‘선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작은 양 떼를 기쁜 마음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와 목자이시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3) 낡지 않는 보물 가방에 채우라(33-34)

 

하나님을 아버지와 목자로 모시는 사람의 시선은 궁핍한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궁핍한 사람을 위해 긍휼의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는 하늘에 보물 가방을 만들고 그곳에 보물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재산이 보관된 곳에 늘 마음이 가 있게 마련이므로, 구제는 제자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필요를 상세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작은 수고도 정확히 보고 보상하십니다. 제자는 돈 때문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영혼이 되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 긍휼을 베푸는 것이야 말로 제자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생명의 주권자이신 주님뿐입니다. 본문은 물질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의 뜻을 따를 때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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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1)


하늘 법정에서의 신앙 고백

누가복음 12장 1-12절


 

세상에 질병은 무서워합니다. 질병을 통해서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큰 질병이 있습니다. 암도, 에이즈도. 급성전염병도 아닌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은 자신을 망가지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 이후에, 제자들에게 외식(外飾)에 대해 엄격히 가르치셨습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을 가르치시며, 또한 안심할 수 있는 이유들을 설명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주의(1-3)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비난한 것은 기독교에 대해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진실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안티 기독교인들은 성도답지 못한 위선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1-3)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들어내셨습니다. 즉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11:5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선(僞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또한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고 권고하십니다. ‘외식(外飾)’의 의미는 ‘마스크를 쓰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외식은 눈앞에 이익만 보고 먼 날에 일어날 일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눈앞의 사람만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외면하는 근시안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 서로 밟힐 정도로 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무리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무리가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위선’의 비유어로 사용하십니다.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침투력을 가진 누룩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급속히 침투해서 공동체를 부패시킵니다. 누룩이 침투한 여부가 반드시 겉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도 드러나고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2).

4-11절이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핍박을 소재로 삼는 것을 고려하면, 1-3절의 누룩은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8-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핍박 중에 제자들이 인자를 시인할 것을 강조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말과 관련해서 위선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서 말한 모든 것이 밝은 데서 들리고 어두운 데서 귓속말로 나눈 대화도 지붕 위에서 모두가 알아듣도록 퍼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인 줄 알면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진리로 믿고 있다면, 반대와 위협에도 믿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믿고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 위선은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의 핵심적인 특성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두려움을 가질 때 실현됩니다. 거짓으로 한순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진실을 공해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4-7)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은 환난이나 박해, 심지어는 죽음까지 따라오겠지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위해 사는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은 두려운 일이겠지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4-7)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적인 면에서 ‘외식’만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복음 사역하는 제자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진짜 두려어 해야할 분(4-5)

 

예수님께서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강조하기 위해 ‘나의 친구들에게’ 말한다고 표현하십니다(참조. 요 15:13-15). 제자들을 ‘친구’로 칭한 장면은 누가복음에서 이 구절뿐입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를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공유하며, 하나님 아버지도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인 제자들에게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4). 몸만 죽이는 자들은 죽음 이후의 더 무서운 행위는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분, 곧 하나님입니다(5). 지옥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던져질 최후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 ‘...곧 죽인 후에…그를 두려워하라 그를 두려워하라’의 헬라어 문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십니다. 제자들을 핍박할 사람들보다 당연히 하나님이 훨씬 강하십니다. 사람의 위협이 두려워 항복하게 되면 더 무서운 분의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통제권(6-7)

 

4-5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6-7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법에 따라 작은 참새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기억하고 참으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머리카락의 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급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알고 개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의 여정에 개입하고 섭리로 반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하나님의 시선이 언제나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비극적인 현실에서 돌봄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8-12)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고 시인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하늘 법정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게 되며,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의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8-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강조하시며,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시인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그들을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1) 하늘 법정에서 평가(8-10)

 

본문에서는 지상에서의 행위가 하늘 법정에서 평가받게 될 것을 땅과 하늘의 대조로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인자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실 것입니다(8).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될 것입니다(9).

8-9절은 전형적인 하늘 법정 또는 천상 회의 장면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하늘 법정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호하는 역할을 맡아 지상에서 고난 중에 신앙을 고백한 자를 변호하시고 고백하지 않은 자를 외면하십니다. 재판은 종말에 열리고 집행될 것입니다. 종말에는 현재 지상에서 살아온 삶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지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고난이 가중되고 부인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겠지만, 종말의 하늘 법정에서 내려지는 결과는 역전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핍박과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놓일 때일수록 더욱 시선을 미래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관점에서 고난을 견딜 것을 이미 5절에서 언급하셨습니다. 누가는 두 번째 책에서 죽음으로 핍박을 견딘 스데반이 하늘 법정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 모습을 묘사할 것입니다(행 7:55-56). 이처럼 제자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현재 이곳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자를 한 번이라도 부정한 자에게 기회는 없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도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사명을 수행합니다(22:54-62).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기 전에는 신앙이 참된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대와 달리 핍박과 위협이 닥칠 때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자는 잘못된 신앙관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배교와 같아서, 구원의 길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용서받지 못합니다.

 

(2) 제자들과 성령과의 관계(11-12)

 

성령을 언급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성령의 관계를 이어가십니다(11-12).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핍박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장소와 주체인 회당과 위정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유대와 이방의 환경을 포괄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뿐 아니라 앞으로 그를 따르게 될 제자들은 적대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대답할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6-7절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런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보호하시고 대처하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하늘 법정에서 어떻게 평가받게 되는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부인하면 부인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부정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며,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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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4)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하는 예수님

누가복음 11장 37-54절


 

인도 한 힌두교 신자가 힌두교 사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보았습니다. 집어든 종이를 자세히 보니, 종이에는 “새 생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 ‘사람은 한 번은 다 죽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자신의 죄의 대가를 받습니다. 이것이 심판이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었고, 그리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힌두교의 예배를 드려보고, 힌두교에서 요구한데로 살아보았지만, 자신에게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힌두교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종이를 읽고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 본문은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외적인 형식만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종교성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을 향해 사람의 겉만 중시하는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만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37-38)

종종 기도하다가 멈추고 멍하니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입술만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신앙은 마음의 문제이고 영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영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영을 가져야 신앙입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37-41)

 

이제에 등장했던 예수님에 대한 반대와 갈등이란 주제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으로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로 하나님의 뜻보다 외면적 열심과 성취에만 집중했고, 그런 사람은 교만으로 이어졌습니다.

 

(1) 바리새인 집에 초대된 예수님(37-38)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감동된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37). 그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문화는 오늘날의 식탁문화와는 조금 다릅니다. 반 안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반쯤 기대어 누운 모양으로 연상하는 것이 본문의 모습과 더 유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결 규례를 따라 식사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손 씻지 않고 식사를 위해 앉은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38). 초대한 바리새인은 손님이 식사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언짢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정결 예법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손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순히 위생상의 이유뿐 아니라, 손님과 집 안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만찬을 망치는 요인이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기본적인 예법도 준수하지 않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신 것을 보자 이상에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조상들의 유전으로 판단하는 이 바리새인에게는 빛을 알아보는 영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입니다(11:35). 예수님을 친절히 모셔놓고도 그분을 아는 데 관심이 없고 그분을 통해 나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천국의 식탁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2) 외식을 지적하신 예수님(39-40)

 

사람들은 외모뿐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겉모습에 대해서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중심까지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반응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이라고 바리새인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39).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 잔이나 대접은 깨끗하게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속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릇을 씻는 것과 같은 제의적 정결을 핵심 가치로 여겼으나(참조. 레 11:32-33; 15:12) 본질적인 가치와 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도 그 마음은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하고 취하는 욕심입니다. ‘악한 것들’은 ‘이 악한 세대’에 속하고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을 떠올리는 표현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막는 요인입니다(29,34).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식으로 실제 악한 모습을 덮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실제 모습을 정결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치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어리석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정결 예식을 지키기보다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내면의 더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남몰래 숨겨둔 소유를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될 수 있고(41) 신행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궁핍한 자들과 갇힌 자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4:18-19). 구제는 탐욕과 악독과 반대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이고 깨끗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신앙은 이웃을 위한 긍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세 가지 화(42-4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만 보지 않고 속도 보십니다. 사람의 겉만 만드시지 않고 속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사람들 앞에서는 숨길 수 있고, 멋진 말과 행동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면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2-4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정결 규례를 위반한 것을 목격한 바리새인이 놀라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단락은 바리새인들이 외적인 정결에 주목하는 만큼 자신들의 내면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42-44).

첫째,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42).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이웃을 위해 사용돼야 했습니다. 모든 채소에 십일조를 매겨도 탐욕을 채우는 행위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도, 이웃을 위한 공의도 아닙니다(미 6:8). 십일조의 규례도 행하고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도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일조 규례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합니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에 우선권을 둘 때, 십일조 행위가 의미 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43). 바리새인들은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즐겼습니다. 더 많은 인기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종교 시설인 회당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들락거렸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신앙을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무덤 위를 밟는 사람은 부정한 무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탐욕과 악독으로 부정해졌습니다. 겉은 품격 있게 단장했지만 속은 죽은 자들의 뼈가 보관된 무덤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이 무덤에는 표시가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무덤을 밟고서도 무덤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속이 부정결한 줄 모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오염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집단으로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길 바라십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가면을 썼다면 이제는 진실한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통해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율법 전문가들을 비판하는 예수님(45-52)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들어난 결과보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받는다면 기뻐하실 만한 마음의 의도와 동기를 보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그 신앙은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45-52)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던 율법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그런 비판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5).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지적이 율법 전문가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건방진 태도가 자신들을 모욕한 것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회의 근간인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뒤흔들고 이런 기준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을 폄훼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교사의 항의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문가들에게 임할 화를 세 가지로 선언하십니다(46-52).

첫째, 율법 전문가들은 지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면서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짐을 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46). 그들은 정결과 부정의 규례를 세밀하게 설정함으로 백성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엄청난 짐을 지웠습니다. 손가락은 신체에서 가장 움직이기 쉬운 부위인데도 불구하고 긍휼 없는 무거운 규례를 지키려고 애쓰는 백성의 고충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둘째, 율법 전문가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듭니다(47). 율법 전문가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입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율법 전문가들은 이 조상들의 증인이 되어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깁니다(48). 하나님의 지혜, 곧 성경은 말했습니다(49).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구원 역사를 박해의 역사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은 자기 백성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 세대’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들을 배척하고 제거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종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흘린 피의 책임을 이 세대가 지게 될 것입니다(50).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대한 책임이 이 세대에 돌아갈 것입니다(51).

셋째, 율법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가로막습니다(52).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근거로 수많은 규례를 만들고 강요하지만 실제로는 비본질을 본질로, 본질을 비본질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정결 규례를 준수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는 성경에서 명확하고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보다 모호하고 본질이 아닌 사항을 구체화하고 목숨처럼 강요한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강화할수록 그들의 기득권은 강화되고 전문가의 지위는 드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오만하고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집니다. 진리의 열쇠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겪는 고충에 둔감한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심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관심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항의(53-54)

하나님께서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꾸민 겉보다 속 품은 동기와 의도를 보십니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는지를 보십니다. 겉으로 들어난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른 말씀을 교육할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것을 듣지 않고 비난합니다.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53-54)

 

예수님께서 날선 가르침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맹렬한 기세로 달라붙어 책잡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항의했습니다(53). 이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꼬투리 잡기 위함이었습니다(5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성찰과 회개와 추구가 빠진 종교는 자존심의 껍데기만 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지적에 모욕감을 느끼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그때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자존심 세우느라 고개 빳빳하게 들고 예수님을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일입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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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의 삶

누가복음 11장 27-36절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문과 학식을 보고 ‘안목(眼目)’이라고 합니다. 안목은 시력과는 다릅니다. 시력이 눈으로 사물을 보는 힘이라면, 안목은 그 이면의 것까지 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안목이 낮으면 많은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키우고 높여야할 가장 중요한 안목은 무엇이겠습니까?

 

  •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를 책망하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영적인 안목에 중요성을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야할 이유를 세 가지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7-28)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합니다. 교회를 향한 손가락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것과 상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한 여인이 찬양합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27이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7-28)

 

이전에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논쟁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말씀을 나누시던 시점에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감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말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참조 눅 1:48).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의 말에서 빠져있는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앞서 언급되었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내용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는 도전으로 갈무리됩니다.

 

악한 시대의 보일 표적(29-32)

세상의 탐욕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깨어 분별할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청종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만 밝아질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도 밝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영적 분별력을 얻고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지역 사회가 함께 변화될 수 있습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29-32)

 

많은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세대의 표적 요구(29-30)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고 유일한 표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온 이방인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들어내십니다. 첫 번째 이방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마지못해 전한 메시지를 듣고서도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두 번째 이방인은 남방 시바 여왕이었습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남부 아라비아에서부터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솔로몬을 통해 전해진 말씀을 듣고자 땅 끝에서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건의 주인공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믿음으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신앙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불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방인들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2)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 예수(31-3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1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

32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

 

이방인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방인이었던 남방 여왕도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해 멀리서도 찾아왔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빗대어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이방인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다는 것은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판의 날에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34).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임으로 심판의 날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서 그들의 불신앙의 죄를 책망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많은 성경 지식이나 교회 안에 직분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는 지식은 강퍅한 심령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직책은 알맹이 없는 형식만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구원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증거로 요나보다도 크고 솔로몬보다도 위대하신 분으로서 구원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분명한 증거에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몸의 등불인 눈(33-36)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빛이 없어서 어두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어두워진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살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빛을 찾아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두움이 점점 빌려오고 있습니다.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3-36)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두운 상황을 통해서 비유로 설명합니다.

 

(1) 빛이신 예수님(33)

 

격언조의 다소 수수께끼와 같은 이 말씀은 종종 이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병행구들은 상당히 다른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등을 켜서 등경 아래에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들어가는 사람들이 빛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어구는 현 문맥 속에서 구체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참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2) 눈은 몸의 등불(34-36)

 

‘당신의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을 통해서 빛이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눈이 몸으로 하여금 그 길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얼마나 건강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눈이 건강하면 몸이 밝을 것이고 눈이 건강하지 못하면 몸이 어두울 것입니다. 이것은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빛이신 자신과 자신의 말씀이 사람들의 삶을 두루 비추고 있는지 질문하십니다. 이 빛이 사람을 밝히면 그 사람은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을 것이고 온전히 밝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수수께끼 지혜 문헌 같은 누가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이 세대의 거부라는 문맥 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게 될 것이고, 그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질 때 우리의 삶도 밝아진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득 충만해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길 바랍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말씀의 빛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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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2)


영적 전쟁에서 승리

누가복음 11장 14-26절


 

시골에서 목회할 때, 한 교회는 양반촌에 있었습니다. 양반촌답게 집이 크고 아름다운 몇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점점 퇴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이처럼 점점 퇴락되면 보기 정말 흉합니다. 그래서 ‘흉가(凶家)’라고 부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영혼이 집이라면 좋은 주인이 들어가서 관리해야 합니다. 그 좋은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들린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보고도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가서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귀신이 쫓겨난 일은 이미 사단의 나라가 패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 대한 비난과 불신(14-16)

옛 속담에 ‘가게는 게 편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어떤 일을 두고 한통속이 되어 서로 돕는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예수님과 사단도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단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14-16)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 놀랐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일어난 일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귀신과 한 편이란 주장입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로써 오는 다른 표적들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눈이 어두워졌기에, 공평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행하신 일을 통해 증명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도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가시길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기적을 본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으로 받아 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신비적인 경험이나 색다른 은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의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새롭게 임한 하나님 나라(17-23)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동시에 설 수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한쪽이 이기면, 한쪽이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부분에도 사탄과 예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7-23)

 

예수님께서는 사단이라도 스스로 분쟁하여 자멸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바알세일의 힘을 빌려 한 것이냐고 반박하십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모순을 낳는 비판이었던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귀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귀신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쫓겨나면 귀신의 요새가 무너지고 정복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사하신 것을 바알세불의 힘으로 비난하지만, 귀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사단의 왕국이 타격을 입었으며 점령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이 말씀은 실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이 말한 가장 큰 약속이며, 그 약속은 하나님의 위임 통치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강한 자입니다. 하지만 더 강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제압시키시고 굴복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단을 결박하고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 나라만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단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두 나라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의 편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탄인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보는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는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갈릴 것입니다. 양자택일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한1서 3:8)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적인 전투를 하는데 영적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영적인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사단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된 하나님 나라(24-26)

살아가면서 음식을 먹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워집니다. 허기질 때 양식으로 채워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사단이 임재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4-28)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잠시 귀신이 나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행되지 않은 땅이라면 그 귀신은 언제고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결국 악한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지금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영적 전쟁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욱 철저히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다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당신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의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채워가길 바랍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공격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빛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듯이, 하나님의 능력은 사단의 왕 능력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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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1)


하나님 앞에 엎드린 기도자의 자세

누가복음 11장 1-13절


 

어렸을 때 시골에는 ‘행정 전화’라 불리는 전화기 한 대만 있었습니다. 전화가 오면 동네 앰프로 ‘누구네 서울에서 전화 왔습니다’라고 알려 달려가서 받곤 했습니다. 전화기는 손잡이를 돌려 교환원을 통해 연결됐고, 때론 한 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응답될 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저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신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확실히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한밤중에 간청하러 온 친구의 비유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십니다. 아버지로서 자녀의 요청에 응답하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하십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1-4)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에 대한 내용이 특히 많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1-4)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1). 기도는 예수님의 습관이고 생활입니다(3:12-22; 6:12; 9:18,28; 10:21-22).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시자 제자들 중에 한 명이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배운 기도와 구별되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할 때 자신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선생이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색다른 모습으로 동산이나 골방에 가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당시에 선생들과는 비교해 볼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노력한 모습이 영력하지만, 예수님께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주기도’는 다른 종교의 주문과 같이 무조건이고 반복적으로 외우는 기도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형식입니다. 주님께서 기도의 주요 요소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늘을 선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의 기도는 지상의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 삶을 위한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합니다. 지상의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이 끊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 있어서 죄나 허물 그리고 상처가 없도록, 그러므로 분노나 아픔이 없도록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므로 용서함으로 아름다운 만남과 축복에 관계가 열려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전쟁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분노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시험과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사탄이 주는 교묘한 시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서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에 대한 내용이 특히 많습니다. 중대한 일을 만날 때마다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세상이 구하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5-8)

기도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원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염려와 소망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힘과 평안을 주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얻게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하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5-8)

 

예수님께서는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강청하며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간절히 갈망하는 필요에 대해 절박하게 느끼는 기도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갈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갈망입니다.

한밤중에 친구 집에 찾아가서 떡 세 덩어리를 빌리는 비유입니다. 자기 집에 밤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옆 집 친구에게 가서 밤중에 깨우면서 떡을 빌리려 갑니다. 하지만 친구의 집은 온 식구가 잠자리에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며 부탁한다는 것은 대단한 실례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행 중에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잠든 친구가 깰 때까지 강청합니다. 자신의 필요 때문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과 소원을 가지고 절박하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음식을 빌려줄 때까지 강청을 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절박함입니다. 간절한 원합니다. 강청함이란 부끄러운 것을 알지만 파렴치 하게 때나 장소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사람들도 강청하면 들어주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간청하는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끈질긴 기도는 바로 강청(强請)하는 기도입니다. 고집스럽고 막무가내의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기도는 꼼수이고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는 보험일 뿐입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것이 성취되면 만족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는 자기에게 있는 능력과 자원을 신뢰합니다. 세상의 의지할 것이 있으면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출구가 없어 볼 때, 간절한 심령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사모하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반기시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9-10)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찾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우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도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기도합니다. 기도가 간절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을 두드린다고 바로 열린 것은 아닙니다. 구한다고 곧 바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찾는다고 곧 바로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드리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한 두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으면 쉽게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길 것을 믿고 끈질기고 줄기차게 기도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인내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세(11-13)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응답하실 것을 믿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우리들이 기도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아버지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흠이 있고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하물며 가장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최상과 최선의 것으로 주실 좋아하신 분입니다. 그 증거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받았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구할 때마다 다른 선물 또한 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것은 말솜씨나 열심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첫 걸음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되 기도 응답의 방법과 시간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을 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점차 기도의 순서가 우리의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변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강청하는 기도에 가장 좋은 것을 응답하십니다. 세상의 친구도 강청하면 들어줍니다. 이 땅의 아버지도 자녀들이 구하면 가장 좋은 것으로 줍니다. 하물며 만유의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필요를 외면하실 리 없습니다.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하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약 1:5) 아바 아버지께 간청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을 따라 기도함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구할 때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무정한 친구나 악한 아버지라고 강청하면 어쩔 수 없이 라도 응답해 줍니다. 하물며 좋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면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끈질기게 기도의 문을 두드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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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4)


바른 하나님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

누가복음 10장 38-42절


 

우리는 한계가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항상 분주합니다. 하지만 너무 분주해서, 정작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다, 시간 없다 하는 말들로 핑계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해서 후회하곤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놓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율법의 주요 핵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으로 요약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오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27)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대 받으신 예수님(38)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한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을 모르면 그 사명을 찾기까지는 분주합니다. 분주한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사명입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38)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와의 대화를 통해 율법에서 분명히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임을 제시했습니다. 사마리아 비유는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마리아와 마르다의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한 마을에 들어가십니다(38). 그곳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으로부터 영접을 받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39-40)

사람들은 항상 바쁘다면서, 바빠서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주함’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선순위적인 문제입니다. ‘바쁨’과 ‘분주함’은 주님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바쁘면 그것에 대해 집착하고, 분주한 환경을 따르게 됩니다. 점점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39-40)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더 많은 음식을 대접하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혼자서 음식을 만들면서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매우 귀합니다.

자매지간인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39).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40). 그런데 동생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 언니 혼자 섬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일행을 섬기기 위해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구석구석 분주하게 챙겼을 것입니다. ‘분주함’이란 ‘끌러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져서 식사 준비하는 일에 끌려 염려와 근심 가운데 들어갔던 것입니다.

급기야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본 마르다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인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옳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동의할 줄로 생각하여 마리아에게 자기의 일을 돕도록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교훈을 가르친 예수님(41-42)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시기와 질투로 하는 경우를 봅니다. 더 나가서 싸우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 싸움의 시작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역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디서 누구를 사랑해서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통한 감동은 많은 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실천에 있습니다.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불러 친근한 마음으로 조언합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지 말고 한 가지만 준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면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42).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 필수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듣는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좋은 편’의 ‘편’(메리스μερίς)은 유산과 유업을 뜻합니다. 마리아는 영원한 유업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자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예수님과 그의 복음 앞에서는 상대화되고 맙니다. 환대는 예수께서 줄곧 강조하셨고 계속해서 강조하실 필수 사항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섬김도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봉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독자들은 앞 단락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의 선한 이웃으로 환대의 모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유일한 한 가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 단락과 연결해 보면, 율법사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10:25-26).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계명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시므로 언제나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도 말합니다(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선행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분주함과 불안감 속에서 주의 일을 하게 됩니다. 또한 본문은 섬기는 일을 주로 맡았던 여성의 역할을 충격적으로 설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집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고, 성경 선생의 가르침을 공적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말아야 하고 가장 좋은 유업을 빼앗기지 말아야 함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에서 누구도 제외되거나 소외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것이 낫다 할 것이 없이 둘 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진심이며, 각자가 생각한 예수님을 향한 대접이었습니다. 다만 서로 자신이 더 나은 섬김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이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권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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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3)


율법교사에게 비유로 대답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0장 25-37절


 

우리들이 가진 자원과 시간은 한정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시험 삼아 살아본 후에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하지만 한 번 허비해버리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선택과 선택한 것에 대한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택해야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 본문은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실천해야할 이웃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좀 도 상세하게 듣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25-28)

아무리 학생이 머릿속에 답을 알고 있더라도, 시험지에 정답을 표시하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격적인 지식일 뿐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5-28)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율법 전문가인 그의 질문은 이미 자신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정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지 않고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라며, 율법교사의 견해를 밝히도록 반문하십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성경의 요약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했습니다(27). 이는 신명기 6:5과 레위기 19:8에 근거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의 갈 길’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율법교사는 지식적으로는 영생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삶에 실천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나타납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고 말씀하십니다. 이론으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실천을 위한 촉구(29-37)

말씀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이어지는 앎, 삶을 통해 진정한 삶에 이르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행함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하나님이자 이웃인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한 이웃이 누군지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29-37)

 

본문은 우리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29).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은 실천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서 쓰러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두 가지로 선택이 달랐습니다. 이웃이란 단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가르쳐줍니다.

 

(1) 자기만을 위한 선택(29-3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난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반 주검 상태로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때마침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임무를 마치고 여리고의 집으로 가던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31).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지나가버렸습니다. 한 레위인도 현장을 보았지만 피해 지나가버렸습니다(32). 그들은 유대인 중의 참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라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라면 죽은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함께 부정해집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부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예 그 사람의 상태를 알아보려도 하지 않고 피해서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를 그 상태로 버려두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의 율법적인 정결을 위해 이웃의 어려운 일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일에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손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파묻혀 바른 율법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시면서 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잘못된 자화상이었습니다.

 

(2) 타인을 위한 선택(33-35)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33).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를 싸맸습니다(34).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주인에게 데나리온 두 개를 주고 보호를 부탁합니다. 나머지 비용은 돌아올 때 갚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참 이웃은 혈통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정교하게 설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은 참된 이웃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선민’의 상징 제사장과 레위인은 ‘동족’ 유대인을 외면했지만, 유대인에게 경별과 멸시의 대상이던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원수 유대인을 곤경에서 구해주었습니다.

 

(3) 진정한 이웃(36-37)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고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36).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긍휼을 베푼 자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37).

우리는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처음부터 시험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했기 때문입니다(25).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싶어 했다는 점입니다(29).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네가 힘든 처지에 있는 자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바꾸십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거룩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나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본으로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선행으로 구원 받는 사람의 케이스가 아니라 좋은 이웃의 예입니다. “너도 좋은 이웃이 돼라!” 영생을 얻은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 이웃이 됩니다.

 

사실은 율법교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의 양만큼 의롭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여겼던 율법교사는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역은 자신의 이익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편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편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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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2)


70인 제자들의 전도 사역에 대한 보고

누가복음 10장 17-24절


 

사람들은 무엇을 기뻐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간 입장권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살아가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 70명 제자들은 전도를 보고합니다(17-20).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뻐해야 할 이유(21-24)를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깨닫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21-22).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 했던 비밀을 예수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23-24).

 

70인 제자들의 전도 보고(17-20)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나 능력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겸손과 감사는 신앙 생활의 핵심 요소입니다.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7-20)

 

전도에 파송되었던 70인 제자들은 전도를 마치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건에 고무(鼓舞)가 되었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기쁨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17).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전도 여정이 힘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능력을 경험하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화답하십니다(18). 이 내용은 이사야 14:13-15에 근거하며, 이미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교만을 바벨론의 예로 지적하셨습니다. 미완료과거 ‘보고 있었다’(에쎄오룬 ἐθεώρουν)는 70명의 제자들이 전도 활동하는 기간에 사탄이 추락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고 계셨다고 시각화합니다. 제자들은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선교가 사탄과의 싸움이었다고 해석하십니다. 1:68-79(특히 1:71,74)에서 사가랴는 구원을 원수들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원수를 로마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원수는 로마가 아니라 그런 악의 체제를 이용하는 사탄입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고 나서 우주적 전쟁에 참여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싸움의 대상이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17절뿐 아니라 20절에서도 제자들이 싸운 대상이 ‘귀신들’로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행위를 사탄과 싸운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패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제자들의 활동으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고 사탄은 결정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때의 운명이 제자들의 권능에 의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제자들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역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가 사탄을 떨어뜨리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 근거를 설명하십니다(19).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19). 뱀과 전갈은 구약에서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예. 창 3:15).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뱀의 패배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탄의 힘을 무너뜨리며, 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은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을 무너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이 사탄과 싸울 정도인 것을 근거로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19b). 이 말씀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권위를 받은 제자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항복시키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할 것을 당부하십니다(20).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기록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참된 기쁨은 사역의 업적과 결과가 아니라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제자의 참된 기쁨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늑대 떼 속으로 보내지는 것처럼 위험 속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무서운 세상에 어린 양처럼 위기 가운데서 활동합니다. 그들은 낙심하고(10:2), 위험에 처하고(10:3), 궁핍한(10:4) 상황을 겪었습니다. 궁핍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지갑과 가방과 신발을 추가로 소유하지 말라는 명령대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4절은 온통 기쁨의 언어로 채워집니다. 제자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개입과 긍홀을 경험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10:9,11)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으로 치유할 때(17)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기쁨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는 생활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찾고 기뻐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복(21-24)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며 겸손함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특별한 계시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에 감사하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기 쉽지만, 감사는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줍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와 겸손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2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1-24)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를 나타내심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시며, 오직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강조하십니다.

 

(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21-22). ‘그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전도 사역을 평가하신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해진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감사합니다(21). ‘이것들’은 22-24절에 따르면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지식(22)과 구속 역사의 성취(24)를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계시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예수님의 사역, 즉 그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계시에 포함됩니다. 전통적으로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전수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간주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네피오스 νήπιος)처럼 예수님께 의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제자들이 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계시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작은 자들이 계시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이 제자들의 깨달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1:51-53).

감사의 기도를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신 것을 언급하십니다(22). ‘모든 것’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만 아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고 계시므로 아들과 그의 뜻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해 아들도 알고 아버지도 압니다. 구원 역사를 계획하고 전개하시는 아버지,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는 아들을 압니다.

 

(2) 선지자들과 왕들의 소원이었기 때문(23-24)

 

하나님과 대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향해 기쁨의 이유를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과 비교해 설명하십니다(23-24).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됩니다(23). 왜냐하면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을 보고 듣기 원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24). 선지자들과 왕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소망했던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과 활동으로 열리고 전개됩니다(렘 31:31-34; 겔 36:24-32).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통치하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현을 보고 듣습니다. 제자들은 왕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으며, 왕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아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 52:7)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제자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역시 아버지와 아들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누리는 복은 더욱 커집니다.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제압하고 기뻐하며 돌아온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능력이나 성과보다 구원받은 기쁨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권세와 승리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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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1)


하나님 나라 일꾼이 유념해야 할 것

누가복음 10장 1-16절


 

옛날에는 통신 수단이 발달되지 않아서 봉수대나 전달자를 세웠습니다. 정부나 왕은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기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냈습니다. 그 때 사자를 거부하면 그를 보낸 왕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위해 복음 전도를 위해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 선포와, 전도할 때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들에게 지참할 것과 전도할 때의 태도,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거절한 자들이 맞이할 심판의 내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 70인을 파송하신 예수님(1-2)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진리와 사랑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력과 동반자 관계를 통해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1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1-2)

 

예루살렘에서의 여정이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 70명을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나라의 숫자를 70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전 12명의 사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였다면, 70명의 제자들은 모든 나라를 위한 복음의 일꾼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방문한 적이 없는 마을들에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70명을 둘씩 앞서 보내셔서 추수할 것이 많은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추수할 사람들은 많은데 일꾼들이 적어 애타는 주님의 마음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전도대를 보낸 예수님의 마음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나가는 길은 평탄한 길은 아닙니다. 세상은 위험이 가득하고 고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은 사명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찾으실 때, 우리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전도자의 마음 자세(3-11)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일할 때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힘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과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3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3-11)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그들이 전도 여행 중에 마주할 어려움을 대비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마을에서 받아들여지면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절당하면 그 마을을 떠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 영접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3-9)

 

3-4절은 위험한 길로 보냄 받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을 어린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던지는 것과 같다고 보십니다(3). 제자들을 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리 떼에게 어린 양은 먹잇감입니다. 환대하지 않는 자들은 제자들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완전 무장으로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소유하지 말아야 합니다(4a).

신약에서 누가복음에만 언급되는 전대는 여윳돈을 보관하는 용도로 여행자들이 소지했습니다.(10:4; 12:33; 22:35-36). 배낭은 옷이나 음식을 보관하는 가방입니다. 거친 팔레스타인을 여행할 때 여분의 신발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여행에 필수적인 것들을 소지하지 말라는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5-7절은 제자들이 전도하러 간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70인은 거리나 시장이 아니라 가정으로 파송 받습니다. 가정에 가서 평화를 전하고(5-6),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7), 제자들의 선교는 관계성의 선교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의 관계 지향적 특징에서 상호 간의 유대감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평화(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어로 구원과 같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1:79; 2:14,29; 7:50; 8:48; 19:38,42; 24:36). ‘평화의 아들’(‘평안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화를 얻습니다. 평화의 아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평화, 곧 구원의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거부하면 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를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평화를 얻거나 거부하는 결과에 이릅니다.

8-11절은 제자들이 전도하러 들어간 동네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방문한 집에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7). 그들이 받는 환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받는 삶입니다. 일한 사람은 보상을 받습니다(참조. 고전 9:4-14). 그러나 환대가 부족하다고 다른 집으로 향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종들이므로 유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환대하고 음식을 제공해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8), 가정에서 섬김을 받는 제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이 그곳에 있는 목적입니다. 제자들은 환대의 정도에 따라 사역을 계산하지 말고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10:9, 11;18:35,40; 19:29,37,41; 21:8,20,28),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9).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으나 예수님의 활동으로 그 나라는 시작됐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2)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10-11)

 

치유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제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네를 떠나면서 행동과 말로 경고해야 합니다(10-11).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사실을 알도록 선포해야 합니다. 이방 지역을 거쳐 온 유대인들은 집에 돌아올 때 이스라엘 땅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이방의 먼지를 떨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이후로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영접하지 않는 자들(10-16)

힘과 부에 취하여 복음을 거부한 도시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대를 향한 경고이며, 그 세상에 잘 길들여진 자녀로 키우는 데만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이 정한 성공의 기준을 좇아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2-16)

 

예수님께서는 10-11절에서 어떤 도시들이 제자들을 부정적으로 대할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내용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영접하지 않은 동네의 운명을 예고하십니다. 심판의 날에 그런 동네는 소돔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2).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회복을 가져다주지만(4:18-19), 지금 회복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 미래에 닥칠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3-11절에서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과 도시들의 반응을 언급하고 나서 소돔의 심판을 언급하신 의도가 있습니다. 구약(창 19:1-23; 사 3:9; 겔 16:48)과 유대교에서 가장 타락한 도시의 예로 언급된 소돔은 성적인 문제(예, 희년서 16:5-6; 20:5; 유 7)와 더불어 환대를 보이지 못한 죄로 형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돔의 거주민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들을 환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갈릴리의 도시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16) 제자들을 환대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므로 제자들을 환대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죄를 짓는 것이기에 소돔보다 더 크게 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척한 도시로 고라신과 벳새다를 지목하십니다(13). 개별 가정은 제자들을 환대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갈릴리의 도시들은 제자들을 배척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두 도시에서 행한 권능을 이방인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처럼(욘 3:6) 회개하여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을 것입니다(13).

심판이 임할 때 두로와 시돈이 받을 벌이 고라신과 벳새다가 받을 벌보다 적을 것입니다(14). 이제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경고하십니다(15).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하늘과 음부는 수직적으로 양극점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 밑에 악인들이 던져지는 음부가 있습니다. 땅 아래 실제로 음부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악인들이 죽은 이후에 보내지는 신비한 영역을 음부라는 은유적인 용어로 빗대어 지칭합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고 음부에까지 낮아지는 이미지는 이사야 14장에서 바벨론의 강력한 왕이 일어나고 몰락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교만한 나라 혹은 도시는 하늘에 오를 정도로 오만하지만, 실제 운명은 땅 아래로 몰락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도시들의 운명은 제자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제자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낸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16).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깨닫고, 협력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거절당할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침을 통해 복음 전파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와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긴급성과 책임감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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