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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7-01)


이방인과 과부를 돌아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7장 1-17절


기도를 할 때 응답을 받으면 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응답을 받는데, 자신은 응답을 받지 못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응답되어진 것 같지 않으면, 종종 ‘왜 나는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라고 기도를 할 때 있습니다. 이때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에는 큰 역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 7-8장은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7:1-17은 백부장(1-10)과 과부(11-17)가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백부장의 종이 치유 받는 장면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백부장의 겸손과 믿음을 강조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실현된 장면을 담아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하시는데, 이방인의 간청에 응답하시고 시체가 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큰 믿음을 가진 이방인 백부장(1-10)

우리는 편견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하고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더 나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1-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는 평지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은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행위보다는 분명한 신앙 고백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본문에 나온 이방인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믿음을 놀라워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방인을 포함하는 우주적 공동체가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 요청하는 백부장(1-5)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마치고 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1).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입니다(4:23, 31-41). 어떤 백부장이 소중히 여긴 종이 중병에 걸렸습니다(2).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질병은 중풍병인데(마 8:5-10), 누가복음에서는 매우 위중한 병이라고 소개합니다.

백부장은 유대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장로들이 백부장의 종의 병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병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정도로 백부장은 종을 존중하고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3).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을 위해 회당을 건설하였습니다(5). 이런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당시 이방인 중에 있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중류의 이방인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고넬료도 이방인이었습니다(행 10:1-9). 베드로도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꺼리고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원리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고넬료와 베드로 사건이 있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구원에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앞으로도 사도행전에서 펼쳐질 이방인 구원의 전조 사건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대신 보내 종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게 합니다(3). 유대인 장로들은 지역의 공회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의 부탁을 주는 것이 ‘합당한’(악시오스 ἂξιός) 일이라고 주장합니다(4). 백부장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은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우리’를 두 차례 사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으로서 백부장의 혜택을 받았으니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요구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신 예수님(6-10)

 

예수님께서는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십니다(6).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에 속히 반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백부장의 집에 ‘이미’(에데 ἢδη) 가까이 이르자 백부장은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들을 통해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6). 자신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거나, 이후에 나오는 백부장의 반응을 고려하면, 유대 장로들의 입장과 달리 백부장은 자기 공로를 근거로 예수께 의무를 이행하도록 요구한 게 아니라 치유해 주시도록 긍휼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합당하다’고 말했지만 백부장은 ‘합당한’의 동사 ‘악시오오’(ἁζιόω, 7)와 ‘주’(6)라는 칭호를 사용해 자신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우데 엑시오사, οὐδε ἠξίωσα)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지 말고 말씀으로 종을 치유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백부장은 장교와 주인으로서 명령을 받고 명령을 내리는 경험에 근거해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말의 능력이 즉각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내가 다른 권위의 수하에 있는 사람인데도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데, 당신의 권위는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겠습니까!’(8)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반응을 놀라십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놀랐는데,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람에 대해 놀라십니다(9a).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이 보여준 믿음과 겸손(‘주여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과 확신(‘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에 놀라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9).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이미 종의 병이 나았습니다(10). 유대 장로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공로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생각했지만, 백부장은 자격 없는 자에게 임하는 긍휼로 이해했습니다. 장로들의 주장과 달리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고,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에 오실 줄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백부장이 생각한 예수님의 치유는 자신의 공적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긍휼이었습니다(17:10).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헌신을 근거로 삼아 유대 장로들처럼 예수님을 의무를 수행해야 할 위치에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움은 무익한 종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또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초월해 능력으로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택함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들의 몫도 아니고 종교 생활의 기간이 길고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몫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피스티스 πίστις)는 모두에게 열려 있고, 신뢰하는 자는 능력을 경험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예수님(11-17)

세상을 살다보면 적당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정당히’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믿음의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길입니다. 기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묵묵히 가야합니다.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11-17)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깊은 연민을 느끼셨으며,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큰 예언자를 보내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1)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11-15)

 

예수님 일행은 나사렛에서 10km정도 떨어진 나인 성에서 도착했을 때, 수많은 무리가 장례 행렬을 따라 나옴으로 성문 앞에서 만납니다(11). 죽은 자는 청년이었고, 그는 한 어머니의 독자였습니다(12). 유대 사회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자식 잃은 정상적인 슬픔을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남성 중심에 고대사회에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과부는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에 상속에서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부는 이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가장 소외된 자 중에 하나가 됩니다. 처음부터 이 독자는 그녀의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독자를 이긴 과부와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이 아들이 자라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데 어머니의 유일한 가족이 죽었습니다. 이 아들은 청년이고,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참조. 행 23:18). 성경은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는 사람을 독자를 잃은 여자로 표현합니다(렘 6:26; 암 8:10; 슥 12:10).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렘 6:26). 청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카메라 렌즈의 초점은 외아들의 주검이 있는 관이 아니라 관을 쳐다보고 따르는 어머니를 클로즈업합니다(12). 죽음의 고통은 남은 어머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에는 연대감이 있어서, 어머니의 고통은 가족의 고통이고, 가족의 고통은 동네 사람들의 고통이고, 동네 사람들의 고통은 이 장례 행렬을 보는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이 슬픔에 연대하기 위해, 토라(모세가 쓴 다섯 권의 성경)를 공부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방해받지 말아야하는 행위였으나, 랍비는 장례를 위해서는 수업도 연기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중단한 채 과부의 슬픔에 참여하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서 한 사람의 고통은 그 통곡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자와 함께하며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읍의 많은 무리도 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12).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13). ‘보셨다!’ 예수님의 계획과 시선은 여자의 고통에 가 있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에 나온 것처럼(1:72,78) 긍휼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이유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주로서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사 54:7-10). 사람들이 보여준 위로는 여인과 함께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보인 행동은 관에 손을 대신 일입니다. 이는 장례 절차를 중지시킨 행동이었습니다. 관을 맨 자들이 멈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에 닿으면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으십니다(민 19:11,16). 그러고는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청년은 살아나 앉아서 말을 합니다(15). 청년의 생명은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십니다.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는 장면은 엘리야가 아이를 어머니에게 준 사건을 떠올립니다(왕상 17:23).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림으로써 장례식을 살아난 아들의 생일잔치로 만드셨습니다.

 

(2) 예수님의 기적과 결과(16-17)

 

이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16). 이는 하나님의 임재(1:12,65; 5:26)를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무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합니다. ‘방문하다’(“돌보다”)는 사가랴의 찬송에 등장한 용어로 하나님의 방문은 구원으로 나타납니다(1:68-69).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던 자신들을 ‘방문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출 3:16; 4:31). 나인성의 청년이 살아난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방문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성취된 사건입니다. 선지자(=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방문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예수님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심방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은 온 백성의 기쁨으로 번집니다. 고통의 연대성(아들의 죽음 → 어머니의 고통 → 나인성 사람들의 고통)은 구원과 기쁨의 연대성(아들의 소생 어머니의 기쁨 → 나인성 사람들의 기쁨 → 이스라엘의 기쁨)으로 바뀝니다. 고통의 연대성은 회복의 연대성으로 역전됩니다. 예수님의 방문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계기였습니다. 긍휼의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생을 심방하시면 그 사람을 통해 기쁨이 확장됩니다.


신앙이란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삶이 없으면 규범과 교리로 신앙을 세우려 들고, 힘과 폭력에 기대게 됩니다. 사살이나 성경 이해도 중요하지만, 들은 대로 실천하려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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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6-04)


참 제자 분별하는 방법

누가복음 6장 39-49절


 

홍세화는 「쎄느강은 죄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우리 사회의 개성 없는 획일성과 권위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도 하셨는데 참 제자는 이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 본 단락은 네 개의 짧은 격언으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을 배우지 못하는 지도자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갑니다(39-40). 이런 지도자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남의 문제를 고치고 가르치려는 사람입니다(41-42). 기독교 공동체는 특별히 삶으로 지도자를 평가해야 합니다(43-45).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위기의 순간에 무너집니다(46-49).

 

맹인이 맹인을 인도(39-40)

다른 사람의 실수는 우리의 거울이 되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타인의 실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고 개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찰은 겸손하고 성숙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판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9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39-40)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지도자의 자격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도록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은 편협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안내하는 사람에 비유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은 편협적으로 보지 말고 완벽하게 보아야 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는 ‘맹인의 인도를 받지 말라’는 뜻으로 39-40절이 지도자들보다는 지도를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와 가르침인 것을 암시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맙니다(39).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걷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맹인은 거짓 지도자를 지칭하는 비유어로,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40)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합니다(41-42). 맹인과 같이 위험한 길인 줄도 모르고 인도하는 지도자를 따르면 지도자나 따르는 자 모두 파멸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가르침과 삶에서 모본이 되는 사람입니다(40).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ξω)는 ‘준비하다’, ‘교육하다’, ‘갖추다’ 등의 뜻입니다. 잘 준비된 지도자는 좋은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배운 제자입니다. 유대교에서 학생의 교육 목표는 자신을 가르친 선생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과 선생 등의 용어로 공동체의 지도자를 파악할 수 있는 바른 관점을 가르치십니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혈안이 될 때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지도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이므로 예수님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낮아져 섬기는 인생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가르치셨습니다.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섬김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인도하도록 준비된 지도자입니다. 한편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삶을 닮아가는 여부를 기준으로 지도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41-42)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쉽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점검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1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41-42)

 

39-40절에서 예수님께서 참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셨다면, 41-42절에서는 타인의 문제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찾아내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아델포스ἀδελφος)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 크기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태도를 언급하십니다(41).

형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티’는 들보에 비해 매우 사소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들보는 지붕을 지탱하는 서까래이므로 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형제를 향해 티를 제거하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42). 여기서 위선은 실제 상태와 스스로 평가하는 수준의 불일치를 말합니다. 내면의 모습과 타인을 대하는 행위에 불일치가 생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내면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타인의 사소한 문제를 들보처럼 크게 생각한다. 자신의 심각한 문제로 형제를 평가하는 시야가 가려져 오판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39-40절과 연결해 보면, 선생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 형제를 사랑한다면,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런 허물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체현되지 않을수록 형제의 작은 문제, 즉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특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일수록 예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먼저 점검해야만 밝은 시야로 형제의 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43-45)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통해 우리의 삶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43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3-45)

 

본문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의 행동과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선할 때,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1)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43-44)

 

지도자든 따르는 자는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듯이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43).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지 열매가 나무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종류는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44).

 

(2)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이 나온다(45)

 

가시나무에서 무화과 열매가 맺힐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냅니다(45). 마음에 가득 쌓인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쌓은 선에서’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의 선한 보고로부터’(에크 투 아가쑤 쎄사우루 테스 카르디아스, ἐκ τοῦ ἀγαθοῦ θησαυροῦ τῆς καρδίας)이다. 보고 또는 창고(쎄사우로스 θησαυρός)는 선이 축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우물과 같아서 마음에 악이 쌓이면 악이 나오고 선이 쌓이면 선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마음의 상태는 언어생활을 통해 드러납니다. 언어는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행위의 한 부분입니다.

본문의 언어생활은 확신을 심는 말(참조. 39-40), 위선적인 말(참조. 41-42)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언어를 가리킵니다. 본 단락을 앞의 두 단락과 연결해 보면, 지도자의 자질은 선생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드러납니다(39-40).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는 악한 사람은 형제가 좋은 행위를 결실하도록 인도할 수 없고, 내면의 악한 상태는 언젠가는 나쁜 열매로 밝혀지고 맙니다(41-42). 기독교 공동체에서 거짓 선생들과 거짓 지도자들은 가시나무와 찔레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리 내면을 숨기려고 해도 쌓인 악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특히 언어생활로 악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좋은 나무를 증명하는 좋은 열매의 핵심은 낮은 자를 긍휼로 대하는 삶과 언어입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사랑의 말과 마음을 통해 변화로 이끌 수 있습니다(41-42).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속박과 눌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존중하는 말로 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좋은 열매입니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파괴됨(46-4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을 따라 행동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6-49)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 어려움 속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1) 말씀을 듣고 행하라(46)

 

예수님께서는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46). 예수님을 ‘주여 주여’로 부르는 것은 절대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2) 반석 이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음(47-48)

 

특히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인 ‘주’로 부르면서도 주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명목상 신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행동합니다(47). 세 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의 기초를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48). 팔레스타인의 땅은 주로 암석으로 구성돼 있어서 주추를 세우지 않아도 집을 짓는 데 문제가 없었고 재정도 절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탄탄해 보여도 굳건한 반석이 나올 때까지 더 깊게 파고 주추를 놓아야 튼튼하게 세워집니다. 이런 집은 홍수가 나도 기초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3)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음(49)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49).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인생의 기초를 놓지 않는 지도자와 이런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위기 상황이 닥칠 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 같은 자입니다.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그의 삶의 방식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는 자입니다. 곁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꾸미는 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도록 애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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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6-03)


대적자들의 응대를 가르치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 27-38절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우리 문화는 다른 모습을 보면 때로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선진국으로 가면 역시 선진국다운 문화를, 후진국인 후진국스러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이민을 간다면 그 나라의 문화와 습관을 따라가야 합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차는 오른쪽이지만, 일본은 왼쪽으로 다닙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환경에 가면 적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 앞서 구약의 율법이나 유대 전통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5:38). 이런 원리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안식일도 재해석하셨습니다(6:1-1).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 중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평지에서 사역을 하시면서(6:12-19), 마침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6:12-19) 이제 이 단락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해 교훈하십니다(6.27-49).

 

하나님 나라의 대인관계(27-30)

사람은 이상하고 신비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는 것은 인격과 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자기 인생을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행복이 기다린 길이 있는데도 불행을 좌초하는 선택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27-30)

 

제자들의 온전한 삶에는 적대자들에 대한 응대도 포함됩니다. 적대자를 유형별로 여덟 가지로 나누고 대처 방안을 말씀하십니다. 27-28절은 한 문장이지만,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는 네 가지 명령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사랑법입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고

 

(1) 원수 사랑을 위한 네 가지 명령(27-28)

 

앞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네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윤리적 삶을 살 것인지 교훈하십니다. 가장 첫 번째 교훈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윤리를 함축하면서도, 더 짧고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 윤리를 설명하십니다. 레위기 19:18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결하지만, 더 직접적으로 원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단순히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처음 두 개의 구절(27-28)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십니다. 마태복음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 21:24, 레 24:20; 신 19:21)는 율법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재해석하시는 문짝에서 원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 5:38-48).

 

(2) 원수 사랑을 위한 네 가지 실천(29-30)

 

이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원수 사랑을 교훈하십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할 네 가지 예를 드십니다(29-30). 뺨을 치는 것은 폭력적인 공격이라기보다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겉옷을 빼앗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한사람의 겉옷은 해가 지도록 전당 잡을 수 없으니, 겉옷은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요이기 때문입니다(출 22:26-27). 예수님께서는 원수가 심각한 손실을 입힐 때조차도 복수를 하기 보다 오히려 속옷까지 주며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2)(31-34)

사랑과 선행을 베풀 때, 보답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들의 반응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보상보다는 진심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과 선행이 진정한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31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31-34)

 

본문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강조하며, 조건 없이 사랑과 선행을 베풀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기억하시고 기뻐하십니다.

 

(1)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는 말씀은 마태복음과 다른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마태복음은 이 황금률 구절을 ‘기도를 강조하는 단락’(마 7:7-11)과 ‘좁은 길의 제자도를 강조하는 단락’(마 7:13-14) 사이에 위치시킵니다. 그리고 이 황금률이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과 닿아 있음을 밝힙니다(마 7:12).

한편 누가복음은 황금률을 제자도 즉,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시킵니다. 원수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다르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황금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 황금률의 세 가지 예(32-34)

 

이어지는 구절에서(32-34) 황금률의 세 가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 예는 죄인들과 비교 대조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가 세상의 윤리보다 훨씬 탁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32). 죄인들도 자기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합니다(33). 죄인들도 되돌려 받기를 바라며 꾸어 줍니다(34).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를 선대하지 않는 자조차 선대해야 합니다. 돌려받을 수 없을지라도 꾸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윤리가 예수님께서 세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의무만을 나열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결국 풍성한 상으로 되돌아올 것임을 밝힙니다.

 

하나님 나라의 행동 수준(35-38)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베풀 때, 같은 조건으로 되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긍정적인 행동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넉넉하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측정하고 상을 주시는 기준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35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5-38)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정체성과 관련됩니다.

 

(1) 인자와 자비를 닮아감(35-36)

 

본문은 문자적으로 ‘원수 사랑을 실천할 때, 큰 상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35)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35b). ‘인자한’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크레스토스(χρησστος)는 ‘은혜로운’이라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특히 시편에서 자주 하나님의 선하심(은혜로우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시 24:8; 33:9; 85:5; 95:5). 베드로는 주의 인자하심(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모든 죄를 버리고 갓난 아기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벧전 2:1-3).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다른 말로 감사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은혜로우십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한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입니다(36).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같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출 34:6; 신 4:31; 대하 30:9).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런 자비로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그 자비의 최고봉은 원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세상을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비판하지 말고 너그러움(37-38)

 

하나님 나라 백성의 네 번째 삶의 원리는 비판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37).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는 것입니다(38).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12:57). 그러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시 5:10; 32:2; 잠 12:2). 따라서 바울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롬 12:19-20).

‘용서하다’를 뜻하는 아포루오(ἀπολύω)는 ‘풀어주다/놓아주다’를 뜻하기도 합니다(예, 23:16,18). 따라서 앞서 나온 ‘비판(심판)’과 ‘정죄’라는 단어와 함께 재판의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여, 감옥에 가두는 것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 아닙니다. 물론 공적인 영역에서 죄인을 판단하고 징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사적인 영역,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는 자가 받을 복을 말씀하시므로 주는 것을 격려하십니다(38). 3단계에 걸쳐 풍성하게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마침내 가지고 있는 되가 넘치도록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용을 가지고 너그럽게 베풀면,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갚아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대접하는 것이 현재에는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더 큰 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6:27-38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네 가지 원리는 ‘원수 사랑’이라는 한 가지 주제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곧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너그럽게 베푸는 것은 원수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이타적입니다. 지독한 타인 중심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안 사람만이 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격 없는 것을 알고, 나의 강력한 열망에 정직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이 나의 그것을과 땔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만이 진실하고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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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6-02)


열두 사도를 부르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 12-26절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황금률(golden rule)’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주라”는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 6:12-49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가르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로 부르시고(12-19), 그들에게 평지설교(20-49)를 전하십니다. 20-26절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는 자들과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상태를 네 가지 복과 화로 설명합니다.

 

산 위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심(12-16)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제자로서 살아갈 때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각자의 사명과 목적을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12-19)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때에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6:11).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의 다른 저서인 사도행전 속에서도 반복되어 있는 특별한 주제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누가는 매우 중요한 사건, 특히 구원 계획의 전환점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6:12; 9:28; 19:28,37; 21:37; 22:39). 큰일을 앞두고는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공생애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1) 열두 제자들을 세움(12-16)

 

예수님께는 밤을 새워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그 밤처럼 캄캄한 현실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물으셨을 것입니다. 날이 밝아오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새 이스라엘(교회)의 근간이 될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그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칭하시고 그들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므로 열 두 사도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4-16절은 열두 사도의 목록입니다(마 10:2-4; 막 3:16-19; 행 1:13). 첫 번째 네 명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시몬의 동생), 야고보, 요한, 두 번째 네 명은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세 번째, 네 명은,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시몬(열심파), 유다(야고보의 아들), 가룟 유다입니다. 누가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자로 소개합니다.

 

(2) 열두 사도의 사역(17-19)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17). 이 표현은 17-19절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신 결과임을 의미합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치유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평지로 내려오자 제자들 무리도 왔고 말씀을 듣고 병을 치유받기 원하는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17).

유대의 온 지역과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의 해안에서부터도 많은 백성이 몰려왔습니다. 이들 주 더러운 귀신에게 고통당하던 사람들도 치유 받았습니다(18). 예수님을 만지는 사람마다 나왔습니다(19). 누가는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다시 한 번 알립니다(19; 4:14; 5:17; 8:46). 희년의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하는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납니다. 가르침과 치유와 축귀는 나사렛 설교에서 예고한 사역입니다(4:18-19; 사 61:1). 기도로 열도 사도를 택하신 장면은 복음의 일꾼들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일임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파송한 사람의 권위와 역할을 대행하는 자이므로 열두 사도의 존재 가치는 그들을 택하고 파송한 예수님의 권위와 역할에 근거합니다.

 

네 가지 복과 화(20-26)

성도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신앙 생활을 이어나가기를 소망합니다.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0-2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과 치유 행위(17-19)로 보여주신 다음 하나님 나라의 헌법과도 같은 평지설교를 전하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에게 주어질 반전의 복을 소개하십니다. 이어서 네 가지 복과 대조되는 네 가지 화를 통해 반전의 화로 경고하십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복을 언급할 때 ‘너희’라고 칭하시는데 화를 거론하실 때도 ‘너희’라는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과 거부한 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1) 지금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20,24).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복됩니다(20).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ς)는 행복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고 바르고 좋은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부요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24).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호이 프토코이 οἰ πτωχοι)은 사회에서 낮아진 자들입니다. 경제적 문제나 사회적 여건 때문에 궁핍하고 소외된 자들입니다. 만일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가난한 자들을 복되다고 칭찬하기보다 책임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예, 잠 6:6-8; 10:4; 13:18; 23:21).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복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예수께 더 빨리 반응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복음, 4:18-19)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사 52:7)에 들어가 있으므로 복됩니다. 현재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실을 근거로 내세와 종말에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궁핍해지고 소외되더라도(18:18-30; 행 2:44-47;4:32-35) 가난한 자들은 복됩니다. 가난 자체는 복이 아니지만 궁핍의 문제 때문에 부한 자들에 비해 하나님을 더욱 의존할 수 있고, 세상에서 소외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할수록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가난한 자들과 대조적으로 부한 자들은 가진 것이 많아 오만하고 강한 자들입니다. 욕망이 크더라도 배고프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회에서 특권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부한 자들은 곤궁에 처한 자들을 무관심으로 대하기 쉽고(예. 12:16-21; 16:19-31), 사회적 위치를 강화하거나 높이는 데 관심을 둡니다. 부자들은 지상에서 충분히 즐겼기 때문에 종말에 더 받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현재 부하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종말의 반전으로 인해 긴장해야 합니다.

 

(2) 지금 주린 자들과 배부른 자들(21a,25a).

 

주린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같고(예. 시 107:36,41; 사 32:6-7; 58:7,10) 배부른 자들은 부한 자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을 넣어서 현재 주린 상태의 고통을 강조합니다. 주린 자가 채워지는 것은 마리아의 노래에서 예고된 약속입니다(1:53; 시 107:9). 지금 주리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지금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미래에 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현재 주린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주린 자들 가운데 실현되고 있으니, 제자들은 미래를 염려하지도 말고 현실을 비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지금 우는 자들과 웃는 자들(21b,25b).

 

소외와 상실 등으로 지금 탄식하는 자들은 웃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됩니다. 지금 웃는 자들의 웃음은 오만한 자들의 비웃음이나 조소에 가깝습니다(창 17:17; 18:12-15; 막 5:40; 약 4:9). 이들은 애통하고 울게 될 것이므로 화가 있습니다. ‘울다’(클라이오)는 이스라엘이 속박 가운데서 울었던 모습을 떠올립니다(“우리가 울었도다”, 시 137:1). 예수님을 믿는데도 탄식하고 슬피 울 때가 있겠지만 비관하거나 복음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척박함이나 신앙의 여정에서 오는 울음을 하나님이 웃음으로 바꿔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미움을 받는 자들과 칭찬을 받는 자들(22-23,26).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고 따돌리고 욕하고 버릴 때, 당하는 자들은 복됩니다. 고난의 때에 기뻐하고 뛰어야 합니다. 하늘에 준비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큰 상을 준비해두셨기에 복됩니다. 지금 성도를 공격하는 자들의 조상들도 선지자들을 미워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칭찬에 도취된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의 반전을 근거로 오늘을 견디도록 격려하십니다. 희년의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오늘 궁핍하거나 울 일이 있더라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복된 자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산상 설교를 통해 축복과 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겸손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신앙이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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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6-01)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 1-11절


 

종종 버스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파열로 사고 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정비 불량입니다. 시간에 정비를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영혼에 대한 정비하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달려온 시간과 방법을 체크해보고, 공급하고, 달려갈 길에 대한 바른 방향제시를 해보는 시간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바르게 세우고 달려야 합니다. 진정한 안식일을 바르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영혼을 살리는 지름길입니다.

 

  • 본문 6:1-11은 예수님의 사역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기록한 5:1-6:11의 마지막 단락으로 예수님의 반대가 정점에 이른 것을 묘사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건들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범한 자로써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1-5)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오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현 시대에서 소망을 찾지 못한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시대라면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시대라면, 그 시대를 저항해서 피해자일수록 새로운 시대를 꿈꿀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은 그런 것은 소망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대하는 사람인 남을 섬기는 사람은 될 수 없고, 그들은 점점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진 모습을 갔습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1-5)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떡을 먹었던 사례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주님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1)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1-2)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데려온 다는 죄인들과도 식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죄인으로 간주되기 쉬웠던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 분이십니다. 환자를 살리려 오신 영혼의 의사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소식이 주변으로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시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트집 잡기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일을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1). 누가는 사건이 ‘안식일에’(엔 사바토 έν σαββάῳ) 일어난 것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의 행위를 본 어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너희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께 항의합니다(2).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3-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다윗의 이야기(삼상 21:1-6)를 근거로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3-4). ‘다윗이 자기와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3). ‘읽지 못했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해석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알려주셨는지 드러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레 24:5-9)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습니다(4). 다윗이 먹을 것을 찾으러간 곳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둔 열두 개의 빵이 있었습니다(출 40:23; 레 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습니다. 다윗과 일행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어떤 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대답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5)에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례로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을 악용하기도 합니다(6-7).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퀴리오스 κύριος)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십니다.

5절의 다니엘 7:13(‘인자 같은 이’)에 근거하는 ‘인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호칭은 죄 용서의 권위를 주장할 때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 (5:24), 여기서도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명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해석자로 배고픔과 안식일의 관계를 해석했습니다(참조. 행 13:2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십니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선(6:9)과 자유(13:16)와 치유(14:3)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습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희년의 복음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입니다(4:18-19, 21).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맛본 것으로 변호하십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규정되고 추가되는 규례와 전통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항상 해석돼야 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점검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희년의 복음에서 멀리 이탈한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복하시는 예수님(6-11)

예수님을 거부하는 만족이라면 그 만족은 거짓 만족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있는 참 만족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은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하고, 더 소유하려고 합니다. 정작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는 그것을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다른 것을 원하고 가지려고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안식을 빼앗아서 자신의 안식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편안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6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6-1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켜보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함을 강조하시며,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 고발할 기회를 엿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6-7)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장애인을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 확보를 위해 이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변호한 행위와 더불어 안식일에 금지한 치유를 증거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2:35; 5:22; 9:47; 24:38).

 

(2)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키신 예수님(8-11)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초점이이 장애인에게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9).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가능했고, 실제적인 치료는 안식일이 지나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한 손 마른 장애는 안식일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응급 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악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회복하지 않고 도구로 악용했습니다. 사회에서 약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자체가 악입니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선생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장애가 있는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는 손을 숨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의 출발입니다. 그가 말씀에 순종해 손을 내밀자 회복됩니다(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신체의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빈궁한 인생에게 치유로 안식을 선사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4:21)에서 안식일이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한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사건이다 (4:18-19).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11절).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실현해야 할 신앙의 선생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오해가 유발하는 자기도취적 분노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으나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긍휼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합니다. 희생 없는 긍휼은 진정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사망과 사탄에 매인 인류에게 오늘 여기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안식의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며, 안식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선교는 안식을 나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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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5-03)


죄인을 의사이며 친구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5장 27-39절


 

사회적으로 낙인 찍혀 주류집단에 끼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취급을 받을까 봐 사람들이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들이나 정죄하던 이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셨습니다. 이런 교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 앞 단락에서 치유하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권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본 단락은 죄인들을 환대하는 예수님의 긍휼을 강조합니다. 27-32절은 예수님께서 부정하고 이기적인 죄인 레위를 부르신 사건이며, 레위와 같은 죄인을 환대하는 문제는 이어지는 혼인 잔치의 비유(33-35)와 옛 것과 새 것에 대한 비유와 격언(36-39)에서 계속 거론됩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27-3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 역사를 바뀌어 놓은 사건입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있듯이, 예수님 초림 사건은 새 시대를 열어준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도 예수님께서 초림하신 것은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섰습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27-32)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료하셨고, 다음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는 자신이 죄를 사하려 오신 인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그보다 한발 더 나가십니다. 죄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거리감 없이 ‘식탁교제’를 하신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식탁교제’를 하신 것은 사회적은 교제의 차원을 넘어 구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의 잔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 가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27-28)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찾아가셨습니다. 세관은 통행세를 받기 위한 장소입니다. 레위는 그 자리에서 통행세를 걷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제법 괜찮은 직업이었겠지만,

죄인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찾아가서 불러줍니다. 갈릴리 어부도 부르시지만, 돈 많은 세리도 부르십니다. 세리로서 레위에게는 두 가지 마음에 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로마 정부를 위하여 일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대 민족에 반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둘째는 당시 세리 직업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여 남은 이익을 은익 하였습니다. 따라서 백성을 속이고 착취하는데 한몫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레위를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레위의 반응도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부르십니다(27).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은 4복음서가 공동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리였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리의 직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 동안 생명처럼 여겼던 부와 재산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 5:1-11).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도 눈을 뜨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요 9:1-7).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을 나타냅니다. 부정하게 벌었던 재물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고 사람들을 속였던 자신의 탐욕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를 때는 무한한 자유를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채움을 얻기 위해서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자유가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레위가 보인 행위는 참 회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레위를 부르신 사건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레위에게 있어서 회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명예와 소유를 버렸던 것입니다(27,32). 이것이 바로 삶의 방향을 예수님께로 재설정한 자의 태도입니다. 레위를 부르신 장면과 이어지는 논쟁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는 유대교의 전통에서 레위가 얼마나 부정한 죄인이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행위인지 강조합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한 반응(29-32)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레위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친구 세리들과 많은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29).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마도 이 세리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큰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잔치와 비슷합니다.

현장에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유대교의 규례를 준수하는지 조사하기 위해 와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를 비난합니다(30).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비난을 받았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언약 식사이므로 거룩한 자들과 정결한 음식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정한 자들과 그들로 인해 부정하게 된 음식을 나눕니다. 바리새인들의 시각에서 세리들은 언약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자들이므로 이들과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부정한 자들과 의인들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다. 거룩한 식사 전통에 대한 도전은 유대교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환자와 의사의 비유를 들어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병자에게는 그 병을 고칠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31).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3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죄인을 환대하는 데 있습니다(5:27-32; 7:28,30,34,36-50;15:1-2;19:7). 의인을 있겠습니까? 의인은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롬 3:23). 따라서 이곳에서 의인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도무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르심을 응답하면 죄를 해결하며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회개할 기회를 잃고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죄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자신의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접촉하여 죄인과 접촉하여 그 죄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비유로 자신의 행위가 왜 정당한지 변증하시는데 본 단락에서도 의사가 환자에게 필요하다는 상식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는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비유, 18:9-14에 있는 바리새인의 기도, 19:1-10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죄인들이야말로 복음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에 해당하며(4:18-19) 회개로 치유 받아야 할 환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를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를 찾아다니십니다. 단순히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15:7;19:10). 예수님께서는 한 병자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찾아오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용인하기 힘든 죄인이 회개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논쟁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으로 알고 예수님의 사명을 긍휼의 사역으로 믿는 사람들도 심각한 죄인한 사람이 회개할 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을 수용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교회는 죄인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다른 어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세리는 로마 정권에 앞잡이로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요구하는 이상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자신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금식과 혼인잔치 비유(33-35)

익숙한 옛 것에 취해 예수님과 함께 찾아온 은혜와 사죄의 시대를 외면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새로운 감동으로 우리를 만나 교제하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신념이나 교리나 전통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온 것은 소수를 위한 특권적인 혜택이 아니라, 신분과 계급, 성과 나이, 민족과 나라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구언을 주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3-35)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은 이제 두 번째 이의를 제기합니다. 첫 번째는 죄인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의 제기는 금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제자라면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중심해야지, 왜 그렇게 잔치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냐고 따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과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세례 요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제자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지적합니다(33).

 

예수님께서는 결혼 잔치의 예로 설명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34).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당시 결혼 축하는 일주일 동안 펼쳐졌고 친구들과 손님들은 결혼 잔치를 즐겼습니다. 구약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하나님이지 메시아가 아니지만(사 5:1; 54:5-6; 62:4-5; 겔 16:6-8; 호 2: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결혼식 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금식하기보다 축하하고 즐겨야 합니다. 예수의 구원 사역은 지금 잔치로 펼쳐지고 있으며,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마련하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나라가 지금 임했기에, 이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수행했던 금식을 지금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메시아의 잔치를 맛보는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고대한 메시아의 잔치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메시아의 오심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알지 못해 계속 금식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먹고 마시는 반면,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금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35).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이사야 53:8을 떠올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에 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 이후로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금식하는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날에 참여할 메시아 잔치를 즐겨야 할 때입니다. 즉,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를 기뻐해야 합니다.

 

새 것과 옛 것의 비유(36-39)

오늘날 젊은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너무 고리타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을 향한 전도방법이 준비되지 못한 탓입니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교회는 과거의 방법에 집착합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걸맞게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다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6-39)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환대한 것(27-32)과 금식 대신 구원의 잔치를 즐기는 생활(33-35)을 비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두 개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새 질서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새 옷과 헌 옷은 공존할 수 없고(36)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도 공존할 수 없습니다(37-38).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을 버리게 되고, 새 옷감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습니다(36).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로 낡은 부대가터지고 맙니다(37). 그렇게 되면 부대도 못쓰고 포도주도 쏟아지고 만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38). 죄인을 제자로 부르고 죄인들을 환대하는 것은 새것에 해당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하신 희년의 복음(4:18-19)이 바로 새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오해한 유대교의 규례들은 복음과 공존할 수 없는 옛것입니다. 옛것으로는 죄인들을 긍휼로 영접하지 못하고 정죄하며 경계만 높게 설정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구약을 오해한 것일 뿐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복음을 예고했고 복음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이런 점에서 묵은 것은 원래 좋은 것입니다(39). 오래된 포도주 맛을 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듯이 구약의 오랜 목적은 참으로 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행위(19:10)는 하나님의 오랜 목적을 성취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16:19-31)에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에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는 것과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보상이 중요한 가치로 기록된 점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구약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예수님의 경고와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16:24-29). 죄인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긍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새 나라의 속성일 뿐 아니라 오래전에 구약에 기록된 가치입니다. 환대하는 긍휼이 새것이고 경계를 나누는 태도가 옛것입니다. 긍휼과 자비 없는 종교적 의식과 규례는 결코 새 시대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레위와 같이 공동체에 해를 끼친 자를 환영하고 수용하는 일은 오랜 가르침이고 좋은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이고 어려운 신앙은 죄인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뻐하는 것이 참된 의요 경건입니다. 형식으로 의를 세우고 경건을 드러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능력은 상실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자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 경건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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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5-02)


영육을 회복케 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5장 12-26절


 

우리는 회복이라는 표현을 여러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병에서 회복된다.’, ‘관계가 회복된다.’, ‘마음의 상처가 회복된다.’ 등등. 이 단어 안에는 주께서 주신 구원의 의미가 상당 부분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중거가 바로 이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 본 단락은 하나님께 속한 권위를 예수님께서 실행하신 두 사건을 포함합니다. 하나는 나병환자를 치유한 사건이고(12-16) 다른 하나는 죄를 용서한 사건(17-26)입니다. 두 사건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하신 복음의 실현, 즉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일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확고히 믿고 나오는 자마다 복음의 혜택을 누립니다.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12-16)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우리 인생에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부정한 우리를 만지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손을 잡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 육체적인 치유만이 아닌 근원적인 접근을 하십니다.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12-16)

 

첫 제자를 부르신 후에 공적 첫 사역이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43에서 다른 도시들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도시에서 온 몸에 나병이 퍼져 있는 환자를 만나십니다(참조, 막 1:40; 마 8:2). 나병환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에(레 13:45-46)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도록 ‘부정하다’를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1)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몸을 치유(12-13)

 

본문에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율법과 사회적 관습을 깨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슨한 시점과 장소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치유 능력에 의지해 절박하고 겸손한 자세로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나병 때문에 그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한 사회적 종교적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적으로 제의적으로 부정하다 선언되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료를 요청합니다.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그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12). 그는 치유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엎드리는 자세와 요청하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께 겸손하면서도 간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칭호인 ‘주’는 5:8에 이어서 단순히 존경을 표현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지만, 제의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자신이 과연 깨끗하게 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예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언하십니다(13). 그때 즉시 나병이 떠났습니다. 나병환자의 몸에 긍휼과 능력의 손을 댔을 때 부정은 결코 예수님을 전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과 거룩함이 그에게 전염됩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이 어떤 부정한 결과를 가져온 지에 대해 율법에 명확한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격리하라는 것을 볼 때(레 13:1-9), 부정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희생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추하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떠나다’(아펠센 απῆλθεν)는 귀신이 떠난 것처럼 나병환자를 부정한 자로 만든 나병이 떠난 모습을 시각화합니다. 나병에서 자유하게 된 상태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 선언에서 예고한 복음에 해당합니다(4:18-19).

 

(2) 예수님이 나병환자의 관계를 치유(14)

 

예수님께서는 나병에서 치유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치유의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참조. 4:41).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치유된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전하는 말씀보다 단순히 질병의 치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방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치유 소문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모세의 법에 따라 치유 받은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완쾌된 사실을 입증 받도록 명령하십니다(레 14:1-32). 이것은 환자들이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인 치유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사회적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 일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한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회복까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치유가 확인되면 치유 받은 자는 두 마리의 새를 잡아서, 한 마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를 목적으로 죽이고, 다른 한 마리는 풀어줍니다. 이는 죄 용서를 위한 절차와 비슷합니다.

 

(3)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15-16)

 

예수님의 치유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누가는 소문을 ‘말씀’(호 로고스 ὁ λόγος)으로 표현합니다(15).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말씀은 살아서 활동하는 선교의 도구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왔으나 예수님께서는 물러가 한적한 곳, 광야에서 기도하십니다(16; 참조. 4:42). 예수님께서는 인기나 명예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17-26)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병자들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새로운 교훈을 하십니다.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17-26)

 

하나님의 능력은 말보다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말보다 삶으로 보여준 것이 더 힘듭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전쟁은 육의 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17-19)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에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구경하려는 사람들과 은혜를 입으려는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습니다. 집 밖에까지 모여 집안에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인 무리들을 특색 있게 소개하는 것은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17)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서 듣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상황을 평가하는 자세를 의미하므로 그들의 등장은 긴장감을 불러옵니다.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날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쓰임을 받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 치료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예수님께 나갈 방법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들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그들의 믿음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2)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20-24a)

 

본문에서 그들의 열정을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놀랐습니다.

먼저 중풍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환자를 보면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 예수님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십니다(20). 본 단락에서 중풍병은 시작과 끝에 표현되는 반면(18-19, 24b-25), 죄 용서는 중심에 배치됩니다(20-24).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실행하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24절에는 죄를 용서한 주체가 예수님 자신인 사실이 명시적으로 묘사됩니다. 죄 용서를 선언한 것 자체가 당시 문화에서는 충격적입니다. 그래서 현장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런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십니다(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판단대로 죄 용서는 하나님께만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나님을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 것이었지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가 집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의 대행자가 아니며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권위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용서받았다’(아페온타이)는 완료 수동태이므로 중풍병자의 용서는 이미 실행됐습니다.

 

그곳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단번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는 것까지는 보고 있었지만,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22).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23). 실제로는 하나님만의 권한인 죄 용서가 더 어렵지만, 얼핏 보면 말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죄 용서 선언이 더 쉬워 보입니다. 죄 용서는 검증될 수 없어서 거짓말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을 치유하는 말은 금방 치유 여부가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검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리기 위해였습니다.

 

(3)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24b-26)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24).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즉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24). 누가복음에서 ‘인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이는 죄 용서의 권위가 인자이신 예수님께 있음을 입증합니다(단 7:13-14). 인자는 중풍병자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19:10).

본 단락의 핵심은 중풍병자의 병 치유보다 예수의 죄 용서 선언입니다. 그래서 죄 용서에 대한 내용이 네 번 등장합니다(20, 21, 23, 24). 죄 용서는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할 것이라고 선언한 내용의 성취입니다(4:18). 4:18의 ‘자유’(아페시스)의 동사형은 20절의 ‘용서하다’ 또는 ‘풀어주다’(아피에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죄 용서는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실제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속박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며, 무엇보다 죄에 사로잡힌 죄인들이 자유를 얻는 나라입니다. 이런 자유는 예수님의 권위로 주어집니다. 나병 치유가 하나님의 능력에 속했던 것처럼 죄 용서도 하나님의 권한에 속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죄입니다. 중풍병자의 죄는 민족적인 죄가 아니라 개인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죄인과 예수님의 관계는 죄 용서로 친밀해집니다.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오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변합니다.

병을 고침 받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5). 기적의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6). ‘놀라운 일’(파라독사)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말합니다. 종말에 일어날 것으로 약속된 죄 용서가 ‘오늘’(세메론) 예수님의 권위로 실현됐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침 받은 중풍병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여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 사람들도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소개하고 자주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강조합니다. 동일한 내용을 소개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이를 주목하지 않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요하며 서글픈 것은 그 사건을 통해 “믿었다”는 말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변하지 않으면 악순환은 거듭됩니다. 관계가 복원되어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고는 다시 죄의 굴례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두 발로 활보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의 마비보다 영혼의 마비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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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5-01)


사명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5장 1-11절


 

오래전에 충남 태안에서 어부가 자살했습니다. 그는 김 양식을 하는 어부였습니다. 그가 자살한 것은 태안 앞 바다에서 기름 유조선에서 벙커C유가 유출되어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던 어부들은 피해를 넘어서, 삶 길이 막막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씨와 같은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바다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바다가 살아 있으면 어부들은 살고, 죽으면 같이 죽습니다. 어부에게는 바다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 베드로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만선의 기쁨을 누립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고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 다가오신 예수님(1-7)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신 분입니다. 모든 만물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므로 만물은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명하신 것들이 이해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보다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1-7)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나와서 근처에 있는 게네사렛(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주위로 물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1) 베드로의 배에 가르치신 예수님(1-3)

 

예수님께서는 북쪽 해변의 호숫가 마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호수로 나갔습니다. 원형 경기장 같은 곳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있는 배 두 척과 배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의 배로 가셨습니다. 그에게 배를 육지에 뛰어 호수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2). 그리고 시몬의 배에 올라 육지에 있는 무리를 향해 가르칠 수 있도록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3). 예수님께서 말씀은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권능에 순간순간마다 놀랬습니다.

 

(2) 베드로에게 기적을 선물하신 예수님(4-7)

 

시몬과 동료들은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지쳐 있었습니다. 밤을 지새운 수고의 대가는 피곤뿐, 생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변에 동료 중에는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패로 좌절감이 밀려왔지만, 그날 저녁에도 또 다시 일을 나가야 하므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지친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장모의 병을 치유해주셨기 때문일 수 있고(4:38-39), 이제까지 보여주신 활동에 근거해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신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다 마치고 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4). 시몬의 전문 분야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시몬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4)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물고기가 낮에는 그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밤에도 헛수고를 했는데, 낮에 물고기를 잡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언제 어디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부로 일해 온 시몬으로서는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상식을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그물에 잡혔습니다. 잡은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것 같았고 도저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의 도움을 기다렸다가 두 배에 채우고 보니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신의 생각에는 아무런 결과가 없을 것 같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히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고,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경험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구두로 전한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릅니다(예. 1:2; 8:11). 구약에서 선지자의 핵심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예. 삼상 9:27-사무엘; 삼하 16:23-사무엘; 대상 17:3-나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을 통해 시몬에게 주어진 명령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실현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배 안에서 무리를 향해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을 때, 그 말씀은 다만 바람을 타고 전달되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순종했을 때 그 말씀은 목적을 담은 음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현 단계에서 베드로가 완벽하게 신뢰하며 예수님 말씀에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순종했다는 것 자체가 시몬의 훌륭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몬의 반응을 통해 능력으로 전환됩니다. 경험과 합리성을 뒤로 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겸허하게 다가가는 태도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점에서 모범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처럼 다양한 경로와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집니다. 이런 말씀에 겸손히 순종할 때 상식과 경험에 근거한 합리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능력에 전율하며 떨게 됩니다(8).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8-10a)

행복은 선택입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택에 따라 행복한 느낌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고, 불행하고 느끼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바다와 물고기를 주관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8-10a)

 

시몬 베드로는 깊은 곳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광경을 보고 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은 ‘선생’에서 ‘주’로 바뀝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권위 있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몬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외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 그는 깊은 곳에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고 놀랐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9).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전율했을 때의 고백입니다(사 6:5). 시몬과 동료들은 분명히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이고, 그것도 대낮에 깊은 곳에서 물고기가 그만큼 많이 잡힐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깊은 곳을 생생하게 알고 계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과 함께 계시기에는 너무나 거룩하신 분으로 인지하고, 도저히 그 앞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습니다. 베드로의 말과 태도는 신적 존재 앞에서 무가치함을 깨달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삿 6:22; 13:22; 왕상 17:18; 욥 42:5이하; 사 6:5). 특히 시몬은 이사야의 고백처럼 자신은 도저히 거룩하신 분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분인 줄 모르고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5)이라는 단서를 단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을 경험하자 자신이 참으로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몬은 예수님의 초월적 지식에 전율했습니다. 놀랍게도 22:61-62에서 시몬은 체포되신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 떠올라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그의 죄성을 시인했습니다(5:8). 그 결과 야고보와 요한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어부들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시몬과 동료들(10b-11)

새로운 사명과 정체를 수용하는 즉시 과거의 삶에서 떠나고, 과거의 가치관과 결별해야 했습니다. 시몬이 배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은 자기중심의 삶에 대한 적격적인 해체였으며, 예수 중심의 삶으로의 재창조였습니다.

 

10b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0b-11)

 

예수님은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10b).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하던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맡기셨던 것처럼(사 6:8)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시몬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전율하고 낮아지는 사람을 예수님은 더 가까이 부르십니다. ‘취하다’(조그레오 ζωγρέω)는 ‘산 채로 잡다’, ‘생명을 불어넣다’, ‘생명을 돌려주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취할 것이다’(안쓰로푸스 에세 조그론 ἀνθρώπους ἔση ζωγρῶν)는 ‘사람을 잡아 살려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회복의 소식을 떠올립니다(4:18-19; 사 61:1-2). 제자들의 사명은 갇히고 눌린 자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참조. 1:48; 2:52; 22:18, 69; 행 18:6)은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시몬뿐 아니라 같이 기적을 경험한 동료들도 반응합니다. 그들은 배를 그대로 두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따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기로 결단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사 6:8).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어떻게 그들은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고 일하는 생활을 버린 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권위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제자의 의미를 묵상하거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나서 따른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권위 앞에 죄인으로 겸손히 낮아진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 즉 물고기를 잡아주신 일을 통해 그를 따르는 인생이 은혜의 길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살리고 회복시키는 사명이므로 신뢰의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베드로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뀌고, 사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사는 방식과 가치관과 관계 맺는 방식이 변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내게 미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진실하게 그분을 상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존재와 내면에 혁명이 일어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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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4-03)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누가복음 4장 31-44절


 

날지 않는 독수리는 높이 날지 못하고, 먹이만 욕심내는 독수리는 비대해져서 점점 날지 못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땅의 것에만 욕심내는 독수리와 같아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사명을 이루는 것이며, 순간마다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신앙은 변화산의 화려함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인기를 얻으려다 실패한 사람들이 많으며, 인기에 연연하다 보면 실패하게 됩니다. 신앙은 인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시고, 더욱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스스로 권위를 나타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31-37)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승리를 원한다면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영적 권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 온전한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31-37)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치며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고, 그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를 깨닫고 놀라워했습니다.

 

(1) 권위 있는 가르침(31-32)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떠나서 갈릴의 도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1).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놀랐습니다(2). ‘권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증거(32,36)로 누가복음에는 15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복음(4:18-19)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악신 들린 자의 치료(33-35)

 

말씀의 권위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나타납니다(33).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 귀신이 들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귀에 의해 바른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들린 마귀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마귀는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크게 외치며 묻습니다(34). 예수님의 권위를 알고 인정했습니다. 서로 관심사가 없는데 자신들의 일에 왜 개입하는지 따지는 말투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아!’라는 감탄사를 사용해 괴성을 지릅니다. 귀신은 더 구체적으로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귀신들의 세계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밝힙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들린 칭호입니다(3:22).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뜻과 ‘거룩한’ 영, 곧 성령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3:22; 4:1,18). 예수님ㄲ[서는 더러운 귀신들의 세력(33,41)을 파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귀신들의 세력에 사로잡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4:18).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책망하면서 침묵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35). ‘꾸짖다’는 유대 문헌에서 하나님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가 악한 영들을 제압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말씀의 권위(32)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으로 실현됩니다.

 

(3) 치료에 따른 반응(36-37)

 

예수님의 책망과 명령에 귀신은 속주로 삼은 사람을 넘어뜨리기는 했으나 그 사람은 상처 없이 회복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랍니다(36).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쫒아낸 권위와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은 그 주변 사방으로 급속하게 펴졌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해지게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더러운 귀신을 만나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킨 장면은 예수님의 사역이 사탄의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미 시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와 충돌하게 될 것을 예고했습니다(4:1-13).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는 사탄의 집이 그리스도에 의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11:20-23). 누가의 다른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사명을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것으로(행 10:38), 병의 치유를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으로 묘사합니다(눅 13:16).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언제나 인간을 누르고 종속시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의 권위로만 가능합니다.

 

육신적인 치유의 능력(38-41)

우리는 다양한 문제와 질병 속에서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으며, 이를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38-41)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가 드러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1) 열병 앓은 자의 치료(38-39)

 

예수님께는 영혼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도 치료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서 회당 근처에 있는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열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치료되었습니다. 치료 받은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수종을 들 수 있도록 일시적인 치료나 약화된 상태에서 조금 나아진 상태가 아닌 완전하게 치료될 수 있습니다.

 

(2) 많은 병자들의 치료(40-41)

 

가버나움 치료는 계속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다 해질 무렵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40). 예수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하신 것은 긍휼한 마음을 전달하는 동작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의사임을 확증시켜주는 대목입니다(마 9:12; 막 2:17; 눅 5:31).

여러 사람에게서 쫓겨난 귀신들은 광야의 마귀처럼(4:3,9)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치며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막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간교함을 아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어리석은 수작(手作)에 불과합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42-44)

당신은 지금 어느 곳에 관심이 많습니까? 영적으로 보면, 땅이거나 비전,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땅에 대한 욕망을 세우는 사람입니까? 당신의 몸집은 비대해질 것입니다. 그 비대함 때문에 천국으로 날아오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영적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가벼워져서 하늘로 날아오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전에 집중하셨습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42-44)

 

예수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시자, 사람들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동네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명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1) 여러 동네에서 전파(42-43)

 

예수님께서는 날이 밝자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사역의 방향을 잡기 위해 시간을 내신 것을 보입니다(42). 기도하고 돌아온 예수님을 가버나움 사람들은 더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4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43)고 말씀하셨습니다. 간곡한 잔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찾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랐습니다. 사람이 찾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2) 회당에서 전파(44)

 

갈릴리 다른 마을에도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뿌리치시고, 다른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선포하다’(κηρύσσω)는 43절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유앙겔리조 εὐαγγελίζω)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보냄 받은 종으로서(4:18-19; 사 61:1-2)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활동(31-37)이 다른 도시들에게도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한 권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 무장을 강화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며,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합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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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4-02)


공생애 시작한 고향 갈릴리

누가복음 4장 14-30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종종 실수를 합니다. 작은 실수는 웃음을 짓게 하지만, 큰 실수들은 삶을 바꾸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 중에 많은 실수는 자신의 주변 사람에 대한 가치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을 때 비로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살아계시면 다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크게 후회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 4:14-9:50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내용을 기술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4:14-30은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모습이고 그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희년을 실현하는 것이며(4:14-21), 고향의 반대와 살해 위협은 앞으로 있을 부정적인 반응을 예고합니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14-15)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그 뜻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소망합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14-15)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과 마귀에게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일은 그의 공적 사역을 위한 예비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갈릴리 사역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네 부분으로 갈릴리 사역(4:14-9:50),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사역(9:51-19:44), 예루살렘 사역(19:45-21:38), 고난과 부활(22:1-24:53) 등으로 나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전체를 포괄하는 진술입니다. 14절은 갈릴리로 돌아간 예수님에 관한 서술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구절에서 ‘성(聖)’과 ‘능력’이 나란히 나타납니다(1:35). 여기서 초점은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인한 능력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능력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실 것을 내다보게 합니다. 15절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간략하게 진술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서술과 유사합니다(2:52).

이 간략한 진술은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하게 합니다. 먼저 그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실행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의 능력으로 성취됩니다. 한편, 그의 사역은 가르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역입니다.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역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사역은 좋은 영향력이 드러나고 널리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16-21)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회의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합시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16-21)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성취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1) 이사야 글을 낭독(16-19)

 

나사렛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평소처럼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으로 회당 사역을 언급합니다. 16절에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라는 구절은 회당 에배의 순서를 담당하여 예언서를 읽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한 이사야 61:1-2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이사야서 61:1-2)

 

이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구절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수세 시 성령 강림(3:22), 그리고 그 강림 후에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한 임재(4:1,14)와 연결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을 포괄합니다. 또한 이것은 누가복음의 신학적 강조점의 한 요소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원문과 누가의 인용문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문에서는 ‘가난한 자’와 더불어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문맥에서 가난한 자는 이방 민족의 압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와 더불어 언급되는데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누가복음은 소외된 사회 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강조점은 마리아의 찬양(1:52-53)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세상적인 가치의 역전을 시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가치의 반전을 기대케 합니다.

19절의 내용도 이사야 원문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사야 원문의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라는 구절은 인용문에서 생략됩니다. 이것은 분명 누가의 의도적인 생략입니다. 복음의 보편성 차원에서 이제 이방 민족의 심판의 날에 대한 언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2) 청중의 반응(20-21)

 

이 말씀을 읽다가 멈추시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의 ‘주목하여 보더라’는 그들의 눈이 예수님께 고정되었다는 것으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21절은 관심을 보인 청중에 대한 예수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하였습니다. ‘주의 은혜’가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이 그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한 예수님(22-30)

우리는 종종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이를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22-30)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에게서 놀라움을 받았으나,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미쳤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분노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해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1) 청중의 증언(22)

 

예수님의 사역은 회당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봉독하신 후에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들은 청중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말씀은 갈릴리 고향 사람들이 듣기에도 “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탄할 정도로 놀랐습니다(마 13:54). 그러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증언하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호합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증언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상 부정적인 증언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22절에 언급된 놀라움(1:21; 2:18)과 질문은 그들의 부정적인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청중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설교 후 청중의 과격한 분노도 22절에서의 반응과 상응합니다. 그리하여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을 들은 자들은 그에 대하여 비판적인 증언을 하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감탄이나 놀라움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경멸과 비판의 부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자신과 같이 살고 있는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는 너무 낯익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2) 예수의 메시지(23-27)

 

23-27절은 예수의 회당설교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예증하는 부분입니다.

23절에 속담이 인용됩니다: “의사야! 네 자신이나 고쳐라.” 이러한 태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며 조롱했던 관리들의 태도와 동일합니다(23:35). 결국 이 태도는 선지자를 윽박지르는 자세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견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대로 여기 고향에서도 행하라.” 그리하여 24절에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5-27절은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설명하시는 내용인데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 엘리사 시대 나아만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예증을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누가복음은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한 믿음의 사람 백부장(7:9)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묘사된 사마리아인(10:29-37)은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과 이방인 백부장의 접촉은 유대인의 장로들에 의해 중재됩니다(7:1-10).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에선 백부장이 중재자 없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서술됩니다(마 8:5-13). 누가복음에서 이방인은 더 이상 복음에서 제외된 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2:10)이고 구원은 만민 앞에 준비된 것(2:31)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2:32)으로 선포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3:4-6; 참조. 사 40:3-5). 따라서 누가복음은 복음의 보편성을 추구하여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민족, 신분, 성별과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역설합니다.

 

(3) 청중의 반응(28-30)

 

본문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크게 화를 내다’라는 동사를 통해 분노나 놀라움 등의 강렬한 감정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나가서 낭떠러지에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분노한 군중들을 헤치고 떠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극도의 혐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혐오뿐 아니라 방화나 살인, 테러 등의 극단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한 반응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 결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함을 잃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미치며, 우리는 겸손하게 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며,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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