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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7-01)


이방인과 과부를 돌아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7장 1-17절


기도를 할 때 응답을 받으면 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응답을 받는데, 자신은 응답을 받지 못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응답되어진 것 같지 않으면, 종종 ‘왜 나는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라고 기도를 할 때 있습니다. 이때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큰 믿음에는 큰 역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 7-8장은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7:1-17은 백부장(1-10)과 과부(11-17)가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백부장의 종이 치유 받는 장면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백부장의 겸손과 믿음을 강조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실현된 장면을 담아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하시는데, 이방인의 간청에 응답하시고 시체가 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큰 믿음을 가진 이방인 백부장(1-10)

우리는 편견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하고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더 나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1-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는 평지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은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행위보다는 분명한 신앙 고백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본문에 나온 이방인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믿음을 놀라워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방인을 포함하는 우주적 공동체가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 요청하는 백부장(1-5)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마치고 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1).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입니다(4:23, 31-41). 어떤 백부장이 소중히 여긴 종이 중병에 걸렸습니다(2).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질병은 중풍병인데(마 8:5-10), 누가복음에서는 매우 위중한 병이라고 소개합니다.

백부장은 유대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장로들이 백부장의 종의 병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병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정도로 백부장은 종을 존중하고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3).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을 위해 회당을 건설하였습니다(5). 이런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당시 이방인 중에 있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중류의 이방인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고넬료도 이방인이었습니다(행 10:1-9). 베드로도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꺼리고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원리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고넬료와 베드로 사건이 있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구원에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앞으로도 사도행전에서 펼쳐질 이방인 구원의 전조 사건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대신 보내 종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게 합니다(3). 유대인 장로들은 지역의 공회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의 부탁을 주는 것이 ‘합당한’(악시오스 ἂξιός) 일이라고 주장합니다(4). 백부장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은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우리’를 두 차례 사용함으로써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으로서 백부장의 혜택을 받았으니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요구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신 예수님(6-10)

 

예수님께서는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십니다(6).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에 속히 반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백부장의 집에 ‘이미’(에데 ἢδη) 가까이 이르자 백부장은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들을 통해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6). 자신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거나, 이후에 나오는 백부장의 반응을 고려하면, 유대 장로들의 입장과 달리 백부장은 자기 공로를 근거로 예수께 의무를 이행하도록 요구한 게 아니라 치유해 주시도록 긍휼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합당하다’고 말했지만 백부장은 ‘합당한’의 동사 ‘악시오오’(ἁζιόω, 7)와 ‘주’(6)라는 칭호를 사용해 자신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우데 엑시오사, οὐδε ἠξίωσα)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지 말고 말씀으로 종을 치유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백부장은 장교와 주인으로서 명령을 받고 명령을 내리는 경험에 근거해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말의 능력이 즉각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내가 다른 권위의 수하에 있는 사람인데도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데, 당신의 권위는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겠습니까!’(8)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반응을 놀라십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놀랐는데,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람에 대해 놀라십니다(9a).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이 보여준 믿음과 겸손(‘주여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과 확신(‘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에 놀라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9).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이미 종의 병이 나았습니다(10). 유대 장로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공로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생각했지만, 백부장은 자격 없는 자에게 임하는 긍휼로 이해했습니다. 장로들의 주장과 달리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고,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에 오실 줄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백부장이 생각한 예수님의 치유는 자신의 공적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긍휼이었습니다(17:10).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헌신을 근거로 삼아 유대 장로들처럼 예수님을 의무를 수행해야 할 위치에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움은 무익한 종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또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초월해 능력으로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택함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들의 몫도 아니고 종교 생활의 기간이 길고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몫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피스티스 πίστις)는 모두에게 열려 있고, 신뢰하는 자는 능력을 경험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예수님(11-17)

세상을 살다보면 적당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정당히’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믿음의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길입니다. 기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묵묵히 가야합니다.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11-17)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깊은 연민을 느끼셨으며,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큰 예언자를 보내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1)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11-15)

 

예수님 일행은 나사렛에서 10km정도 떨어진 나인 성에서 도착했을 때, 수많은 무리가 장례 행렬을 따라 나옴으로 성문 앞에서 만납니다(11). 죽은 자는 청년이었고, 그는 한 어머니의 독자였습니다(12). 유대 사회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자식 잃은 정상적인 슬픔을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남성 중심에 고대사회에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과부는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에 상속에서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부는 이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가장 소외된 자 중에 하나가 됩니다. 처음부터 이 독자는 그녀의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독자를 이긴 과부와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이 아들이 자라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데 어머니의 유일한 가족이 죽었습니다. 이 아들은 청년이고,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참조. 행 23:18). 성경은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는 사람을 독자를 잃은 여자로 표현합니다(렘 6:26; 암 8:10; 슥 12:10).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렘 6:26). 청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카메라 렌즈의 초점은 외아들의 주검이 있는 관이 아니라 관을 쳐다보고 따르는 어머니를 클로즈업합니다(12). 죽음의 고통은 남은 어머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에는 연대감이 있어서, 어머니의 고통은 가족의 고통이고, 가족의 고통은 동네 사람들의 고통이고, 동네 사람들의 고통은 이 장례 행렬을 보는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이 슬픔에 연대하기 위해, 토라(모세가 쓴 다섯 권의 성경)를 공부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방해받지 말아야하는 행위였으나, 랍비는 장례를 위해서는 수업도 연기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중단한 채 과부의 슬픔에 참여하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서 한 사람의 고통은 그 통곡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자와 함께하며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읍의 많은 무리도 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12).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13). ‘보셨다!’ 예수님의 계획과 시선은 여자의 고통에 가 있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에 나온 것처럼(1:72,78) 긍휼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이유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주로서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사 54:7-10). 사람들이 보여준 위로는 여인과 함께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울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보인 행동은 관에 손을 대신 일입니다. 이는 장례 절차를 중지시킨 행동이었습니다. 관을 맨 자들이 멈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에 닿으면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으십니다(민 19:11,16). 그러고는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청년은 살아나 앉아서 말을 합니다(15). 청년의 생명은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십니다.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는 장면은 엘리야가 아이를 어머니에게 준 사건을 떠올립니다(왕상 17:23).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림으로써 장례식을 살아난 아들의 생일잔치로 만드셨습니다.

 

(2) 예수님의 기적과 결과(16-17)

 

이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16). 이는 하나님의 임재(1:12,65; 5:26)를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무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합니다. ‘방문하다’(“돌보다”)는 사가랴의 찬송에 등장한 용어로 하나님의 방문은 구원으로 나타납니다(1:68-69).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던 자신들을 ‘방문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출 3:16; 4:31). 나인성의 청년이 살아난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방문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성취된 사건입니다. 선지자(=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방문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예수님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심방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은 온 백성의 기쁨으로 번집니다. 고통의 연대성(아들의 죽음 → 어머니의 고통 → 나인성 사람들의 고통)은 구원과 기쁨의 연대성(아들의 소생 어머니의 기쁨 → 나인성 사람들의 기쁨 → 이스라엘의 기쁨)으로 바뀝니다. 고통의 연대성은 회복의 연대성으로 역전됩니다. 예수님의 방문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계기였습니다. 긍휼의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인생을 심방하시면 그 사람을 통해 기쁨이 확장됩니다.


신앙이란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삶이 없으면 규범과 교리로 신앙을 세우려 들고, 힘과 폭력에 기대게 됩니다. 사살이나 성경 이해도 중요하지만, 들은 대로 실천하려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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