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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06-04)


참 제자 분별하는 방법

누가복음 6장 39-49절


 

홍세화는 「쎄느강은 죄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우리 사회의 개성 없는 획일성과 권위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도 하셨는데 참 제자는 이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 본 단락은 네 개의 짧은 격언으로 구성됩니다. 예수님을 배우지 못하는 지도자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갑니다(39-40). 이런 지도자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남의 문제를 고치고 가르치려는 사람입니다(41-42). 기독교 공동체는 특별히 삶으로 지도자를 평가해야 합니다(43-45).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위기의 순간에 무너집니다(46-49).

 

맹인이 맹인을 인도(39-40)

다른 사람의 실수는 우리의 거울이 되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타인의 실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고 개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찰은 겸손하고 성숙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판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9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39-40)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지도자의 자격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도록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은 편협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안내하는 사람에 비유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은 편협적으로 보지 말고 완벽하게 보아야 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는 ‘맹인의 인도를 받지 말라’는 뜻으로 39-40절이 지도자들보다는 지도를 받는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와 가르침인 것을 암시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맙니다(39).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걷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맹인은 거짓 지도자를 지칭하는 비유어로,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40)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합니다(41-42). 맹인과 같이 위험한 길인 줄도 모르고 인도하는 지도자를 따르면 지도자나 따르는 자 모두 파멸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직한 지도자는 가르침과 삶에서 모본이 되는 사람입니다(40).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ξω)는 ‘준비하다’, ‘교육하다’, ‘갖추다’ 등의 뜻입니다. 잘 준비된 지도자는 좋은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배운 제자입니다. 유대교에서 학생의 교육 목표는 자신을 가르친 선생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과 선생 등의 용어로 공동체의 지도자를 파악할 수 있는 바른 관점을 가르치십니다. 특히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혈안이 될 때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지도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이므로 예수님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낮아져 섬기는 인생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가르치셨습니다.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섬김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인도하도록 준비된 지도자입니다. 한편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삶을 닮아가는 여부를 기준으로 지도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41-42)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타인의 실수나 단점을 쉽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점검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1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41-42)

 

39-40절에서 예수님께서 참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셨다면, 41-42절에서는 타인의 문제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찾아내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아델포스ἀδελφος)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 크기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태도를 언급하십니다(41).

형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티’는 들보에 비해 매우 사소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들보는 지붕을 지탱하는 서까래이므로 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형제를 향해 티를 제거하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42). 여기서 위선은 실제 상태와 스스로 평가하는 수준의 불일치를 말합니다. 내면의 모습과 타인을 대하는 행위에 불일치가 생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내면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타인의 사소한 문제를 들보처럼 크게 생각한다. 자신의 심각한 문제로 형제를 평가하는 시야가 가려져 오판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39-40절과 연결해 보면, 선생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 형제를 사랑한다면,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런 허물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체현되지 않을수록 형제의 작은 문제, 즉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특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일수록 예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먼저 점검해야만 밝은 시야로 형제의 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43-45)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통해 우리의 삶은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43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3-45)

 

본문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의 행동과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선할 때,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1)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43-44)

 

지도자든 따르는 자는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듯이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43).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지 열매가 나무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종류는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44).

 

(2)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이 나온다(45)

 

가시나무에서 무화과 열매가 맺힐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냅니다(45). 마음에 가득 쌓인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쌓은 선에서’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의 선한 보고로부터’(에크 투 아가쑤 쎄사우루 테스 카르디아스, ἐκ τοῦ ἀγαθοῦ θησαυροῦ τῆς καρδίας)이다. 보고 또는 창고(쎄사우로스 θησαυρός)는 선이 축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우물과 같아서 마음에 악이 쌓이면 악이 나오고 선이 쌓이면 선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마음의 상태는 언어생활을 통해 드러납니다. 언어는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행위의 한 부분입니다.

본문의 언어생활은 확신을 심는 말(참조. 39-40), 위선적인 말(참조. 41-42)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언어를 가리킵니다. 본 단락을 앞의 두 단락과 연결해 보면, 지도자의 자질은 선생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드러납니다(39-40).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는 악한 사람은 형제가 좋은 행위를 결실하도록 인도할 수 없고, 내면의 악한 상태는 언젠가는 나쁜 열매로 밝혀지고 맙니다(41-42). 기독교 공동체에서 거짓 선생들과 거짓 지도자들은 가시나무와 찔레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리 내면을 숨기려고 해도 쌓인 악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특히 언어생활로 악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좋은 나무를 증명하는 좋은 열매의 핵심은 낮은 자를 긍휼로 대하는 삶과 언어입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사랑의 말과 마음을 통해 변화로 이끌 수 있습니다(41-42).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속박과 눌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존중하는 말로 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좋은 열매입니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파괴됨(46-4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을 따라 행동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6-49)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 어려움 속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1) 말씀을 듣고 행하라(46)

 

예수님께서는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46). 예수님을 ‘주여 주여’로 부르는 것은 절대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2) 반석 이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음(47-48)

 

특히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인 ‘주’로 부르면서도 주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명목상 신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행동합니다(47). 세 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의 기초를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48). 팔레스타인의 땅은 주로 암석으로 구성돼 있어서 주추를 세우지 않아도 집을 짓는 데 문제가 없었고 재정도 절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탄탄해 보여도 굳건한 반석이 나올 때까지 더 깊게 파고 주추를 놓아야 튼튼하게 세워집니다. 이런 집은 홍수가 나도 기초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3)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음(49)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49).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인생의 기초를 놓지 않는 지도자와 이런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위기 상황이 닥칠 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 같은 자입니다.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그의 삶의 방식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는 자입니다. 곁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꾸미는 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도록 애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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