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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02)


잃어버렸던 아들에 대한 비유

누가복음 15장 11-32절


 

회개를 위선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고,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자존심과 두려움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과거의 죄와 상처가 마음을 억누르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유혹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회개 후에도 쉽게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그 비유는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받아 먼 나라에서 탕진하고 배고파 주립니다. 그 허랑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자 기쁘게 맞이하며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줍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는 아들(11-16)

불효자들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부모님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선택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1-16)

 

이제 예수님께는 또 다른 비유를 통해 교훈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들 중에 둘째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먼저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11).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12).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유산을 나누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민 27:8-11).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자식이 유산을 요구한 행위는 가문의 수치고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가족과 가문 안에서 살지 않겠다고 공언한 행위였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 아버지의 반응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각각 상속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며칠 만에 먼 나라로 갔습니다. 멀리 가려면 재산을 매각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생명 같은 재산을 한순간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가족에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심었습니다. 또한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나라에 갔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재산을 금방 낭비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 둘째 아들은 어느 농가에서 돼지 치는 일을 했습니다(15).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레 11:7; 신 14:8). 너무 배가 고파 돼지의 사료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17-24)

집 나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그리움과 후회가 밀려오고, 홀로 지내며 느낀 외로움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먼 곳에서의 힘든 경험은 고향의 따뜻함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여행은 새로운 시작과 용서를 향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7-24)

 

둘째 아들은 굶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죽어간다’를 뜻하는 ‘아폴뤼미’는 앞의 두 비유에서 ‘잃다’의 의미로도 사용됐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본 아들의 상태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24). 이처럼 둘째 아들은 잃은 양과 동전과 같이 잃어버린 신세입니다. 배가 고프고 나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아들인 자신은 이방 나라에서 굶어죽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17).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할 말을 연습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8). 아들은 집을 떠날 때의 죄가 얼마나 큰지 인정합니다. 아버지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여겨 주시도록 부탁하려 합니다(19).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낮아질 것을 각오합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호의를 베풀 때 가능합니다.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20).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았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했습니다. 아들은 오기 전에 연습했던 대로 말을 시작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그러나 품꾼으로 삼아달라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말을 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신을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22).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즐기자고 말합니다(23).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입니다(24). 주인의 말을 들은 집안사람들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앞 단락의 두 비유처럼 여기서도 찾은 자의 기쁨이 강조됩니다. 찾은 자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즉각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돈을 씁니다. 이런 아버지는 당시 문화에서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했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부자 지주가 아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아들로 지위를 회복하고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은 마을의 기강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부자인지주가 거리로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주는 것도 특이합니다. 큰아들이 지적하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문제는 낭비입니다(27,30). 둘째 아들도 재산을 낭비했고 아버지도 재산을 낭비합니다. 이런 점에서 둘째 아들이 탕자라면 아버지는 탕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낭비가 둘째 아들을 회복하는 길이었습니다. 아들의 신분을 즉각 회복하게 된 이유도 사랑입니다. 비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찾고 식사로 환대하셨습니다. 또한 비유에서 아들이 스스로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고 표현합니다. 잃은 자와 잃은 것을 찾을 때 사용되는 동사 ‘찾다’(휴리스코)는 연속되는 세 비유에서 반복됩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15:4,5,6), 여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8, 9[×2]),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24,32) 찾았습니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긍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환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들은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비유는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집 밖에서 불평하는 첫째 아들(25-32)

교회에 새신자가 들어올 때, 기존 신자들이 은근한 텃새를 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와 공로는 의미가 없고,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기뻐하며 서로를 환영해야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25-32)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두 가지 비유 ‘잃어버렸던 양’,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통해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랑과는 다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사랑은 선민들만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1) 아버지 품으로(25-30)

 

이제 첫째 아들의 반응과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대화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서 잔치 음악과 노랫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25).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종을 불러 상황을 묻습니다. 좋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합니다(27). 첫째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28). 그러나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집 나간 탕자를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는 종과 같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여러 해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즐길 수 있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29).

 

(2) 아버지의 잔치(31-32)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낭비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30). 형은 동생과 자신의 관계를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큰아들은 그토록 심한 불명예를 안기고 떠난 아들을 영접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번 잔치가 정당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아버지의 재산이 그의 것입니다(31). 그러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아버지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32). 첫째 아들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 중 누구의 말과 행동이 합리적입니까? 큰아들의 논지는 분명히 강력합니다. 큰아들처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논지는 탄탄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항의에 대해 거론하거나 반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이유만 설명합니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아버지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호소하는 동시에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첫째 아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를 불평하는 탕자입니다. 아버지와 논쟁하고 형제 관계를 부정해버립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낭비하는 사랑을 비판했지만,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랑의 수혜를 입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12) 현재 재산은 자신의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31). 첫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부류를 첫째 아들에 빗댑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의로운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낭비하는 사랑으로 낮은 자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가 중심 주제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힘든 상황에 처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형은 탕자의 회복을 질투하지만, 아버지는 모두가 소중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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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01)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 1-10절


 

사람들은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관점(觀點)’이라고 합니다. 관점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셈입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은 계속 충돌하는 이유도 관점에 차이 때문입니다.

 

  •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시 관점에 차이를 분명히 들어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를 하신 모습을 보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와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를 통해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죄인 한 사람을 찾으셨을 때의 기쁨을 말씀하셨습니다.

 

비난받는 예수님(1-2)∴(마태복음 18:12-14)

올바른 삶을 살다 보면, 때때로 잘못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을 환대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지 설명하게 된 배경입니다.

당시에 ‘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차갑게 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 준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며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비난합니다. 그리고 이에 예수님께서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교제 하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음식법’과 ‘정결 규례’를 파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밥만 먹는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제와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한 것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문제 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난을 조금도 계의치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께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 뒤에서 수군대며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들과의 모습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며 수군거리겠습니까? 그들은 죄인을 멀리하고 피해야할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얼마나 기다시리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들에서 잃어버린 것들(양, 동전 그리고 아들)은 예수님이 식탁에서 함께 교제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기쁜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3-7)∴(마태복음 18:12-14)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소중히 여기셔서 그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길 잃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다시 품으려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며, 우리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더라도 항상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십니다.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3-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흥분해서 비난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불편한 마음에 비유로 접근하십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에게 백 마리의 양이 있었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4). 양은 무리 지어 생활하는 짐승이어서 무리를 이탈한 양은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목자는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 무리를 광야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나머지 양 떼를 광야에 둔 채 급히 떠나는 목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 보여줍니다.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그림은 구약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이십니다(시 23; 80:1; 사 40:11). 비유 속 목자는 목자의 마음을 갖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다릅니다(참조. 겔 34:1-10; 요 10:1-16).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인도해야 할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가축은 배려해주면서도 18년 동안 몸을 펴지 못한 여자(13:10-17)와 수종병으로 온 몸이 부어오른 남자(14:1-6)의 치유를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죄인들을 환대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영혼들이 의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반대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비유의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만 집중합니다. 드디어 양을 찾으면 목자는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5). 집에 와서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입니다(6).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목자는 찾은 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잔치로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7).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죄인과 동일시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정죄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잃어버린 자들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들과의 식사는 찾은 자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6절과 7절을 연결해 보면 죄인들이 회개한 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목자가 먼저 죄인을 찾으러 나섰고 죄인은 회개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잔치를 망친 쪽은 예수님께서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찾는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회복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며, 그 회복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와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8-10)

 

본문도 비유(8-9)와 해설(10)로 구성됩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8). 드라크마는 그리스 은전으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무게와 가치가 다르긴 했으나 1데나리온 또는 1/4세겔과 같은 가치로 하루치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돌과 진흙 벽돌로 지어진 팔레스타인의 주택에는 창문이 없어서 실내가 어두웠습니다. 바닥은 돌이 아니라 흙이어서 어두운 곳에서 동전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등불을 켜고 바닥을 쓸며 열심히 찾았습니다. 드디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다. 여자는 잔치를 준비하고 이웃을 불러 모읍니다(9). 그런데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잃었다가 찾은 돈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여자의 행동은 어리석습니다. 낭비처럼 보이는데도 여자가 잔치를 준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아 함께 즐기자!” 찾은 기쁨이 컸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처럼 혼자 기뻐하기에는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해설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7절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회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과 같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그림과 같습니다. 비유와 10절을 연결해 보면, 한 사람의 회개는 찾는 작업에 따른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열심히 찾은 결과로 죄인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난을 감수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으면서도 찾은 한 영혼 때문에 하늘의 존재들이 기뻐합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은 격리 대상이므로 희생적으로 찾는 것은 사랑의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돌아온 기쁨을 가격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의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확대하고 그들과 식사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규범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의인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잃은 자를 찾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결과로 죄인들이 회개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소식은 죄인이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회개한 죄인들을 식사로 환대하시고, 하늘에서는 이 기쁨에 참여합니다. 둘째, 잃어버린 자를 찾는 과정과 찾은 결과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어리석고 낭비처럼 보입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무리를 광야에 두고 떠납니다. 여자는 드라크마 하나를 당장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방의 바닥을 열심히 훑습니다. 찾은 다음에는 찾은 것의 가치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 잔치를 벌입니다. 잃은 자를 회복하는 비용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낭비입니다. 영혼의 회복은 누군가의 낭비처럼 보이는 희생으로 가능합니다. 찾는 자가 없으면 잃은 것이 발견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찾는 희생을 보여주셨기에 회개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회개한 자에 대한 하늘의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까운 낭비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공동체는 잃어버린 자가 돌아온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궁핍한 자들, 허물이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쁨에 교회는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의 식사를 함께 나누자고 독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며, 특히 잃은 자를 찾는 데 열정적이십니다. 회개하는 한 영혼의 기쁨은 하늘에서 크며, 이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잃은 것을 찾고 회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잃은 자를 찾아 사랑으로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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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03)


주님을 따르기 위한 제자들의 희생

누가복음 14장 25-35절


 

제자도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에 깊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의 욕망과 편리를 내려놓는 것을 포함합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일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제자도는 외적인 열광이 아닌 내적인 변화와 헌신을 요구합니다. 결국, 진정한 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사람입니다.

 

  • 이 단락에서는 제자도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도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가치보다 예수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결단을 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제시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25-27)

함께 간다고 모두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평소에는 무리와 제자가 섞여 있지만, 주님이 제자도를 요구할 때 구별됩니다. 영광이 아닌 고난이 올 때 진정한 제자가 판가름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는 소수입니다. 우리는 무리인지 제자인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25수 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5-27)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과 자신의 삶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진정한 제자의 길임을 강조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25-26)

 

많은 무리와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기회를 얻습니다. 실제로 누가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복음서를 기술해왔습니다. 14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주제는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셈어적 용례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윤리적 요구와 분명하게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어구는 ‘~보다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곳에서 비교 대상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제자도(27)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제자도를 나타내기에 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이미지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26절과 27절의 하반절에 사용된 동일한 표현(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앞에 27절에서 조건절로 등장하는 표현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근접 문맥에서 이것은 자신의 부모, 처자, 형제와 자매,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이러한 것들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것이 이 문맥 속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구절이 가르치는 제자도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예수님을 우선시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가 보여주는 급진성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비유1-망대를 새우려는 사람(28-30)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신앙 여정을 진지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이는 믿음의 길에서 어떤 결단이 필요한지를 숙고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지속적인 헌신과 노력입니다. 결국, 참된 제자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망대(타워)를 지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그것을 세우기에 앞서서 자신이 그 사역을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중함을 가지지 못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29-30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의 상황을 미리 가늠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르게 실행에 옮긴 계획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연이어 제공하는 두 개의 비유의 논점은 문맥 속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비유들은 제자도가 요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따르기 전에 충분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비유2-전쟁에 나가려는 왕(31-3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단순한 감정이나 열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깊은 이해와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제자는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른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감정 이상의 깊은 이해와 책임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31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1-32)

 

누가는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에 연이어서 전쟁에서 다른 왕과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왕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기본적으로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과 유사한 논점이 발견됩니다. 이 왕은 자신의 병력이 적국 왕이 보유한 병력과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지 고려합니다. 자신의 병력이 일만밖에 되지 못하는데 적국의 이만 병력을 상대한다면 전쟁에서 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화친을 청하는 것이 적절한 정책이라고 합니다. 고대의 전투에서는 지상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강조되었고, 병력의 규모는 전쟁의 성패에 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비유의 논점은 문맥 안에서 제자도와 적절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전 비유에서 신중하지 못한 결단은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전쟁 비유에서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와 제자도(33-35)

신앙의 길은 헌신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편안함과 소유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헌신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희생이 없이는 진정한 신앙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 생활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33-35)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모없듯이, 믿음의 본질을 잃은 삶도 의미가 없음을 경고합니다. 참된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맞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1) 소유와 제자도(33)

 

‘자신의 소유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33절의 가르침은 28-30절의 비유와 31-32절의 비유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가르침은 26절과 27절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제자도에 대한 다른 가르침과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하라는 가르침이 주어진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논점인 제자도의 이슈로 바로 돌아옵니다. 26절과 27절에서 사용된 동일한 어구가 등장하고 있는데, 33절 상반절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제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도 예수님의 가치보다 못하다고 하는 가르침은 이 구절 속에서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르침이 개인의 소유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를 문자적으로 종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가 될 수 없는 조건들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들을 종합해서 고려한다면, 가족관계, 자신의 생명, 물질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포기를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십자가를 진다는 이미지는 상당한 고통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 고통보다 더 큰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수행하게 됩니다(참조, 마 13:44).

 

(2) 제자 소금(34-35)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세상 속에서 행하게 될 제자도의 이미지를 소금의 이미지와 결부시킵니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연결은 마태복음 5:13에서 더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문맥도 분명히 이러한 연결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소금이 짠 맛을 상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주석가들 사이에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상정된 이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상당히 가치 있게 취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소금을 특별한 저장고에 보관하였습니다. 고대의 소금은 오늘날의 정제염과는 달리 많은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보관소에 물이 유입되면 소금에서 염화나트륨 성분이 빠져나가고 소금과 결합되어 있던 불순물만 남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그 짠 맛을 상실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입니다. 이렇게 된 소금은 정말로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어져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소금에 대한 이미지를 제자도와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금이 음식 속에서 그 맛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세상 속에서 맛을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그 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아무 쓸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라는 관점에서 조언이 될 수도 있고, 그 말씀에 유념치 않았을 때 파생할 수 있는 결과의 관점에서 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자도가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는 깊은 헌신을 요구함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과 자신의 삶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걸으며 각자의 희생과 결단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소금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결국,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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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02)


천국에 초대받은 사람들

누가복음 14장 15-24절


각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취임식에서 외교 사절단의 참석을 통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냅니다. 참석하지 않는 것은 해당 나라나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전 대통령 취임식에도 많은 외국 사절단이 참석합니다. 대통령은 이들을 초청하며, 특별한 대우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이 대통령에 대한 호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 경우, 사소한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적대적인 감정이 없이는 어렵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해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잔치로 비유하십니다. 큰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합니다. 하지만, 초청받아서 참석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핑계로 참석을 거절합니다. 그들 대신에 이 세상의 외면 받는 자들과 길과 산에 있는 이들을 불러 만찬 자리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잔치에 초대하는 주인(15-17)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세상의 일들에 더 많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초대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이는 우리가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15-17)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이 잔치를 배설하고 예수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을 겁니다. 그는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먹게 될 모든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1) 이야기의 전환(15)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테이블에 기대어 듣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이전 단락과의 연관성 속에서 누가는 이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전 단락이 식사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식사 장면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식탁 교제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의인의 부활 시에 받게 될 상급에 대해서 언급했던 터라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되는 자가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이 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이사야 26장의 배경 하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종말론적 축복을 메시아의 연회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종말론적 메시아적 연회의 자리에서 떡을 먹는 것,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 되는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큰 잔치 비유(16-17)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식사 자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이어 받아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시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확실히 종말론적인 메시아적 연회라는 이미지와 매우 잘 부합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2장에도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부분에서 다소간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초청받은 자들의 거부와 전혀 예상치 못한 하객들이라는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나가게 됩니다. 팔레스틴의 (결혼)잔치는 초청장을 보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야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비롯한 제반 구체적인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이 잔치 시각이 되었을 때 자신의 종을 이미 청함 받은 자들에게 보냈다고 하는 것은 팔레스틴의 잔치 문화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이미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긍정적인 응답을 했던 사람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결혼 잔치 청첩장을 보내고 잔치 당일까지 청첩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청함을 받았던 자들이고 그들에게 확인을 위해서 재차 종이 보내진 것입니다.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18-20)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천국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입니다. 세상과 물질을 포기하더라도 천국을 취할 자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에 타협하려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저의 우선순위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결국,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20)

 

본문에는 처음에 잔치 초대에 참석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정작 음식을 장만하고 준비가 다된 후에는 종들을 보냅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참석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핑계를 댑니다.

 

(1)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거절(18-19)

 

원래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던 사람들은 잔치가 모두 준비되고 난 후 잔치의 주인이 종을 보내 잔치 자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했을 때 모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2장뿐만 아니라 도마복음서 64장에도 이와 유사한 비유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일련의 변명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밭을 구입했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변명을 제시합니다. 이 변명 자체는 그럴듯한 이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밭을 구입한 자가 그 밭에 일하러 나간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초대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때 통상 잔치 날짜가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잔치 날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밭을 산 사람의 태도는 궁색한 변명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소 다섯 쌍을 구입 했기 때문에 구입한 소가 제대로 된 소인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길을 나서고 있는 중이라고 변명거리를 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사람의 변명도 그럴듯합니다. 막 구입한 소를 점검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를 열 마리(다섯 쌍)나 구입했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예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그럴듯한 변명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변명도 역시 궁색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 결혼으로 인한 거절(20)

 

세 번째 사람의 변명은 결혼이었습니다. 앞선 두 차례의 상업적인 이유와는 다른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변명도 여전히 궁색합니다. 최근에 결혼했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참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결혼)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누리는 사람들(21-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의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세상의 유혹과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 초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은 자로서 우리는 구원의 기회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1-24)

 

하나님의 초대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거절하는 자들은 그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그분의 풍성한 잔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1) 화가 난 집주인의 뜻밖의 제안(21)

 

종의 보고를 받은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주인이 화가 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세 명의 초청받은 자들이 한 말은 나름대로 구실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초청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긍정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제시한 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구실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전혀 뜻밖의 사람들을 하객으로 초청하라고 종에게 지시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예수의 사역의 주된 대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비유는 원래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았던,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사람들의 거부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초청이라는 반전을 보여주게 됩니다.

 

(2) 여전히 열린 가능성(22-23)

 

주인의 명대로 좋은 나가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초청해서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대한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누가 당시에도 하나님 나라의 초청은 여전히 열린 가능성으로 남아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2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의미를 정리하시면서 원래 청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선언으로 보입니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견되었던 사람들이 전격적으로 거부되고 전혀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파격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선언이 예수님의 실제 사역 가운데 현실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장도 동일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대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배웁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자신의 이유로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 초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응답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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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01)


낮아진 자가 높아지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4장 1-14절


 

현대 사회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각종 잔치나 손님을 초청하는 모임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잔치를 참석하면서 조의금이나 축의금 명단을 살핍니다. 그리고 부의금이나 축의금을 가지고 온 사람들을 살핍니다. 이러한 잔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진행된 잔치는 아닙니다. 이러한 잔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잔치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공생의 필요에 따라서 모이는 잔치나 회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안식에 바리세인이 베푼 잔치에 초대받아 참석합니다. 그곳에서 안식일에 수종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상석을 좋아하지 말고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 갚지 것이 없을 만큼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잔치는 어떤 것입니까?

 

안식일의 사랑을 베풂(1-6)

성도들은 주변의 필요를 돌아봐야 하며, 사랑과 자비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여기십니다. 법과 규정보다 인간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1-6)

 

예수님께서는 그 잔치에 참석합니다. 아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안식일의 율법을 어기고 병자를 고칠 것인가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환자가 있는 집으로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1) 안식일에 식사 초대 받으신 예수(1)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가운데 지도적인 인물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신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이미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한 소문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정황을 암시합니다.

 

(2) 수종병에 걸린 한 남자와 안식일 법 준수에 관련된 질문(2-3)

 

안식일에 식사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식사 자리에서 수종병에 걸린 한 병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수종병은 창자에 가스가 차서 배가 땡땡하게 부어오른 질병을 말합니다. 누가는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집에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질병을 치유하신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아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 사람을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이 사람의 존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누가복음에는 아무런 질문이 제기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율법에 저촉되는 행위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3) 안식일 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4-6)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양이 우물에 빠진다면, 즉시 그/그것을 안식일에 건져내지 않겠는가?’라는 예수님의 수사학적 질문은 일반적으로 ‘예’라는 답을 기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 질문에 쉽사리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쿰란의 문서 가운데 다마스커스 문서는 명시적으로 예수님께서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웅덩이로부터 동물을 구해내는 일체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금했습니다(CD 11:13-14). 그러나 이 행위와 관련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 이해는 쿰란의 멤버들에 비해서 더 관대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부분에 관련해서 예수의 율법 이해와 흡사한 전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이나 재산인 동물이 우물에 빠졌으면 건져내려고 시도했지만,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동료에 대해서는 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절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수사학적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락은 짐승들이 안식일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전반적으로 당대의 엄격한 율법 이해에 비추어 볼 때 때 상당히 과격한 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따르면 이러한 예수님의 급진적 율법 이해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하게 높음을 받을 사람(7-11)

교회 안에 직분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직분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섬기는 모습을 벗어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대접받으려는 모습을 보면, 신앙의 오만에 극치를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의 화합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더 겸손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7-11)

 

예수님께서는 초대했던 사람들이 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릴 것인가로 생각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상석에 앉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주의 깊게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주인과 가까운 거리에 앉으면 앉을수록 그 손님의 직위는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 곁에 앉아 먹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셨습니다.

 

(1)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1(7)

 

다시금 장면은 1절과 마찬가지로 식사 초대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식사 자리에서 상석을 선택하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6절까지 안식일에 관련해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가르침을 제시하시고, 이제 주제를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와 관련된 것으로 전이시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서 진행되는 식사 자리에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그 식사 자리의 상석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모종의 신경전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식사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위를 미완료형태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그러한 행위가 지속적인 것이었다는 전망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제자도에 관련해서 가르침을 제공하실 기회를 얻게 됩니다.

 

(2) 비유를 통한 교훈(8-10)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문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장면 하나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비유로 제시하십니다. 이 장면은 일상적인 식사 초대의 경우가 아니라 결혼식 잔치임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석에 앉으려는 태도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가 종종 야기할 수 있는 부끄러운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상석에 앉았는데 그 사람보다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올 경우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고, 상석에 앉았던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예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리어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임이 분명합니하다.

 

(3) 보상에 관한 종말론적 약속 1(11)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은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11절은 10절의 스스로 낮아질 것을 권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7-10절까지의 비유적 가르침을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단순한 처세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 대한 종말론적 역전이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할 사람(12-14)

성도들은 겸손함이 삶에 깊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하며, 타인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스스로 낮아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잔치의 상석을 버리고 말석에 앉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은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2-14)

 

초대할 때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가난한 이웃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즉, 진정한 섬김과 나눔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 제자도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 2(12-13)

 

그(예수)를 초대한 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1절과 7절과 적절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가운데 유력한 자의 초대로 인해서 발생했습니다.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자를 통해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해석적 통찰력을 제공하셨고, 7-11절에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제자도의 삶의 방식 즉 자신을 낮추는 삶의 모습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12-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또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능히 갚을 능력이 되는 부유한 자들을 대상으로 나의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호의를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2) 보상에 관한 종말론적 약속 2(14)

 

그들이 너에게 갚아줄 것이 없기 때문에 의인들의 부활의 때에 (하나님이) 너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 구절은 왜 우리에게 갚아줄 능력이 있는 부유한 자가 아니라 갚아줄 능력이 없는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것이 중요한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갚아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사용된 안타포도쎄세타이(갚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동사는 미래 수동형으로 신적인 수동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역전에 관한 종말론적인 약속이 주어져 있었던 것처럼 연약한 자들에게 종말론적 보상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겸손과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낮은 자가 높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이웃을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진정한 영광은 자기를 낮추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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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3-03)


좁은 길을 걷는 신앙의 여정

누가복음 13장 22-35절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선택과 행동이 우리의 신앙을 반영하므로, 신중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질문을 계기로 구원을 받는 기준과 심판을 받는 대상을 설명하십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문은 좁기 때문에 모두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22-24). 혈통으로 구원의 문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며, 문으로 들어간 여부는 삶으로 입증됩니다(25-30). 선민의 도성인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31-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24)

우리의 신앙은 일상의 선택과 행동에서 드러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구원의 기회가 제한적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결국,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2-24)

 

예수님께서 각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가르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22).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한(9:51-62)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길 위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적은 수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23).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대한 질문은 당시의 관심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앞에서 18년 동안 꼬부라져 있던 여자를 회복하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가 놀랍게 성장한다고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의미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처럼 소수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질문자의 추정과 달리 소수만 구원받도록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할당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좁습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24; 9:23; 12:33; 14:26-27). “힘쓰라”는 운동선수가 시합을 하거나 군인이 전쟁을 치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제한이 없으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30절도 적합한 대답이 됩니다. 지금 구원의 문에 들어갔다는 확신이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구원의 문에서 멀다고 생각하더라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5-30)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민족이 포함된다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과 계획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킬 것을 촉구합니다.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25-30)

 

구원의 문은 열려 있으나 항상 열려 있지는 않습니다. 문이 좁을 뿐 아니라 들어가는 기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닫힙니다(25). 닫히기 전에 지금 반응해야 합니다. 내일로 연기해놓고 문이 닫힌 후에 열어달라고 간청해도 더 이상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문이 닫힐 때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문 밖에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주와 자신들의 관계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행위입니다(27). 예수님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그 문에 들어간 여부는 행위로 입증됩니다. 구원의 문은 특정 혈통을 위해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때가 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입니다(28). 28절의 ‘하나님 나라’는 문맥에서 최후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종말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기쁨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들과 식사를 나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동서남북, 즉 열방에서 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혈통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오직 너희”)은 밖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28).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에 6회, 누가에 1회)는 지옥에 던져지는 자들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역사의 끝에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29; 참조 사 59:19). 30절은 22절에 대한 답변입니다. 먼저 된 자들이 아니라 나중 된 자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1-3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불신과 거부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잃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1○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1-35)

 

구원은 예루살렘 백성이라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열린 문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구원의 문 밖에 서서 울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바리새인이 와서 위험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헤롯이 죽이려고 찾는 중이므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31). 예수님께서는 그의 정보를 계기로 예루살렘의 운명을 애가의 형식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저 여우”(헤롯)에게 경고를 전하라고 하십니다(32). 여우는 파괴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나 다른 맹수에 비해 위협적인 짐승은 아닙니다. 헤롯은 여우처럼 예수님을 위협하지만 그런 힘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32). “오늘과 내일”은 매일의 활동을 뜻합니다. “완전하여지리라”는 의도한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로 채워집니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는 일을 내일도 행할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님께서 줄곧 걸어가고 있는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이루는 것이므로 비극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여우인 헤롯에게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굳은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역할(4:24)을 예루살렘에서(9:31) 완성하실 것입니다(33).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인 곳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이게 될 예루살렘의 운명을 2인칭을 사용해 탄식하십니다(34-35).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곳에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도시입니다. 구약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신성모독(레 24:14,16,23)과 배교(레 20:2; 신 13:11)의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배교 행위를 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와 열정에 근거해 하나님의 목표를 수행하는 자들을 배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메시아입니다(3:15-16; 7:18,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잘못된 확신과 목표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예루살렘은 비극적인 운명을 자초할 것입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는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라고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내민 구원의 손길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어떻게 되습니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35).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지 않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십니다(렘 12:7; 22:5).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그의 대리자를 죽이는 것으로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망합니다. 예루살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와 같이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본문에서는 구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구원은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며, 이는 우리 각자의 노력과 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과 슬픔을 표현하며, 그들의 불신에 대한 경고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으며, 결국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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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3-02)


작은 시작, 큰 변화: 겨자씨의 비밀

누가복음 13장 10-21절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종종 물질적 성공이나 권력을 중시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겸손, 섬김을 중요시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를 통해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과 태도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 13:10-21은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자가 안식일에 치유 받은 사건(10-17)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로 구성됩니다. 두 비유는 치유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배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탄의 속박 가운데 살아가던 한 여자의 치유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치유를 통해 확장되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런 특징과 작고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누룩의 속성은 잘 어울립니다.

 

아브라함의 참 자녀와 거짓 자녀(10-17)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이 부족할 때에도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서로를 돌보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10). ‘보라, 여자가 있었다!’(11). 그러나 귀신이 18년 동안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고 몸을 펴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자는 사탄에게 매여 있었습니다(16).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오라고 지시한 회당장의 말에 따르면 여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해 회당에 나왔을 것입니다(14). 여자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회당구석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허리를 펼 수 없으니 예수님을 바라보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빛이 그녀에게 비쳤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녀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10절과 11절은 각각 문장의 맨 앞에 ‘보라 여자가 …’, ‘보셨다 그녀를’을 배열함으로써 예수님의 시선이 병든 여자에게 향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12). ‘네가 풀려났다’는 완료형으로 여자에게 병의 치유가 이미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권위로도 치유되기 시작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긍휼의 마음으로 손을 여자의 병든 몸에 얹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긍휼로 여자는 허리를 폈습니다(13).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사명으로 선언하셨습니다(4:18-19). 사탄보다 ‘더 강한 자’(11:22)로서 사탄의 속박 가운데 있던 여자를 풀어주고 가난한 인생에게 기쁜 소식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혈루증 여자의 경우처럼 여자를 앞으로 불러 사람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 목격하게 하고 여자를 공동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여자는 사람들의 외면과 무관심 가운데 18년을 살았으나 이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온전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유된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3).

이 광경을 목격한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치유한 이유로 화를 냈습니다(14). 일을 할 수 있는 엿새가 있으니 병 치유를 원하는 사람은 평일에 와야하고 안식일에는 치유받지 말라고 지시합니다(15).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여주셨고,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례를 침해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합니다. 회당장은 자신이 회당의 책임자이고 율법 해석과 적용의 권위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안식일에 치유받고 치유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회당장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여자는 18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안식일에 치유해야 할 정도의 응급 환자가 아닙니다. 사실상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주께서 회당장의 말을 듣고는 위선자들을 향해 책망하십니다(15). 안식일 규례를 사람과 짐승에게 차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끌고 가서 물을 먹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위해 자주 노동을 했습니다. 이는 가축에 대한 동정심에 기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귀한 딸을 풀어주는 것은 비판합니다. “안식일에 가축이 당장 갑갑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짐승을 풀어주느냐?” 하물며 18년 동안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의 속박 가운데 있다가 안식일에 매임에서 풀리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16). 회당장이 ‘해야 한다’고 권위를 주장하자 예수님께서도 ‘해야 하지 않느냐’의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로서 안식일 규례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안식일 치유를 반대한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무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스런 일을 기뻐했습니다(17).

본문은 사람의 가치에 대한 반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과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딸을 짐승보다 못한 가치로 취급한 것을 심각하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선자들로 질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적용할 때 짐승은 동정심으로 배려했지만 18년 동안 고통당한 병든 여성이 치유받은 것은 불법 시술과 같이 취급하고 경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보셨고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몸을 펴보지도 못한 여자를 치유하기에는 안식일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습니다. 사회의 바닥에 있는 인생을 예수님께서 존귀한 딸로 여기고 치유하신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전통과 규례에 얽매여 귀한 영혼을 그림자 취급한 사람들은 멸시받던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17).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갇힌 자들이 회복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나라입니다. 약하고 작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돼야 할 아브라함의 자녀로 가치 있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18-21)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안에 큰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작은 신앙의 실천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작은 행동이 하나님의 큰 사역에 기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18-21)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작은 시작이 큰 결과를 가져온다고 강조하며, 누룩 비유를 통해 작은 것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 확장되고 영향력을 미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겨자씨의 비유(18-19)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안식일의 치유를 해석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18).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그리고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로 대답하신다(19-21). 왜 예수님께서는 작은 특징을 내포하는 겨자씨와 누룩을 예로 드십니까?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은 병든 여자를 보고 치유하신 원리처럼 하나님 나라는 대중의 관심 속에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시작하고 확장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습니다(19).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가지에 몰려듭니다(20).

 

(2) 누룩의 비유(20-21)

 

본문에서는 밭 대신 정원이 언급됩니다. 정원은 밭보다 더 수고해야 결실을 얻는 곳입니다(참조. 13:6-9). 수고하는 예수님의 노동은 반대 세력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에서도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나무가 됩니다(시 104:2:겔 17:23; 31:6; 단 4:9-21).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것을 예고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합니다(겔 17:23;31:6; 단 4:9-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의 변화로 시작되고 확장되는 점을 겨자씨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영광을 충족시키는 나라인 것을 강조하려 했다면 능력(시 80:10; 92:12; 슥 11:2)과 웅장함(아 1:17; 22:23)의 상징이었던 백향목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부풀게 한 누룩과 같습니다(21). 밀가루 서 말(약 27킬로그램)은 150명을 먹일 수 있는 양입니다. 누룩온 적은 양이라도 밀가루 반죽을 전부 부풀어 오르게 만듭니다. 작아서 간과하고 무시하고 쉽고 인지하지 못할 수 있는 일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상의 삶에서 은밀히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했으나 크게 되는 속성과 처음부터 겸손을 특징으로 하여 자라는 속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상과 달리 놀라운 정도로 자랍니다.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활동처럼 여겨져도 실제로는 비유의 가르침처럼 놀랍게 확장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능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영웅담을 만들어주는 나라가 아닙니다. 8년 동안 사탄에 매여 고통당하다가 해방된 여자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적절히 반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의 주변부에 살고 있던 병든 여자를 회복시키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 살아나 예수님의 공동체에 참여합니다.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 곧 매일의 삶 가운데서 겸손히 낮아지는 속성을 유지합니다.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긍휼이 확장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그 확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또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통해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작은 행동을 실천하며, 사랑과 자비를 전파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작은 노력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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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3-01)


재난과 심판 그리고 회개

누가복음 13장 1-9절


논농사를 보면 모내기하기 전에 물을 잡아놓고 논두렁 붙이는 작업을 합니다. 논두렁 주변을 삽으로 깝니다. 전년에 쥐나 뱀 그리고 곤충들이 논두렁에 구멍을 내놓은 것을 막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 난 부분으로 물이 세기 시작해서 나중에 둑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 속에 둑을 무너뜨리는 죄의 구멍은 없습니까? 죄가 크든 작든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그들의 죄악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설명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과원지기가 1년만 더 기회를 줄 것처럼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회개할 기회는 제한됩니다. 그들의 상태는 안식일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모른 상태였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두 사건(1-5)

주변에서 갑자기 재난이나 사고로 어려움을 당한 소식을 듣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향해 죄의 대가로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범죄했거나 더 큰 죄를 졌다고 금방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5)

 

유대인들은 어떤 불행이나 급작스런 죽음을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앙이 닥치지 않거나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자신은 선한 사람이고, 또는 작은 잘못이기 때문에 넘어가려 할 수 있습니다. 2-3절은 갈릴리 사람들이 겪은 비국을, 4절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비극을 다룹니다.

 

(1) 갈릴리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1-3)

 

‘그 때’(1)는 앞 장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요청합니다(1).

이 비극은 누가복음 외에는 신약의 다른 책과 유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이 섞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총독은 사마리아의 가이사랴에 머물다가 명절이 되면 치안을 위해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렀습니다. 요새에서 성전 뜰을 감시할 수 있었습니다. 제물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올라온 어떤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 빌라도가 군인들을 시켜 살해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희생자들은 유월절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처럼 살육을 당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살해당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에 죽은 사건이므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희생자들과 자신들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그들의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해석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이 내린 결론과 같습니다(참조. 욥 4:7;8:20;22; 요 9:1-1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해석하십니다. 희생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에 비해 죄를 많이 지어 그런 비극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2).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비극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죄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심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비극을 맞았다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굳이 따지자면 식민지백성을 살육한 빌라도의 국가 폭력에 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나머지 사람들이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회개하지 않을 때 맞이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2)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일어난 비극(4-5)

 

3절과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비극을 해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최근에 일어난 비극의 이야기를 활용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번에 걸쳐 ‘모두’(2,3,4,5)를 언급하심으로써 회개하지 않을 때,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됨을 알리십니다. 갈릴리 사람이든 예루살렘 사람이든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심판이 내려지는 시기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두 비극이 갑자기 임한 것처럼 심판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심판은 개인의 생애 가운데, 사후에, 인자의 재림 때 집행됩니다.

본문의 경고는 사후나 재림보다는 개인의 생애 가운데 갑자기 닥치는 심판을 의도하는 것 같습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결정적으로 회개해야 하고, 무화과나무가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의 비극을 예로 들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4). 이 사건 역시 누가복음에만 기록됩니다. 실로암 연못 근처에 성벽이 있었고 벽이 만나는 곳에 망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비극 역시 희생자들의 죄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비극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단호합니다. 자동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비극의 원인을 희생자에게서 찾는 작업을 중단해야 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회개해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건의 해석을 통해 비극과 심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첫째, 비극은 더 많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희생자의 죄를 비극의 첫째 원인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성전과 같은 종교 기관에서 일어난 비극의 경우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자연재해를 당한 경우도 일반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단정하기 쉽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죽은 비극의 원인은 분명히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죄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생존한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두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폭력과 인재에 의해 희생을 당했고, 그들의 유가족이 위로와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죄와 비극은 무관하다는 논리 역시 거부하십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은 임합니다. 희생자들이 비극을 겪은 것처럼 비극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징계를 뜻하는 심판이 비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필수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6-9)

다른 성도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며 마치 상대방이 죄로 인한 심판으로 매도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실수는 작게 보고 다른 사람들은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일들을 보면서 자신의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은 더 큰 죄인에게 먼저 임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의 재앙이나 불행에서 그들의 죄를 찾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6-9)

 

1-5절에서 회개를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주어진 시간 동안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경고하십니다. 씨가 뿌려진 토양의 비유에서 좋은 땅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8:15) 회개는 열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실로 비유는 시작합니다(6). 안타깝게도 주인은 무화과나무에서 기대했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3년 동안이나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7). 3년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닙니다. 충분한 기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주인은 나무에 대해 매우 관대한 사람입니다. 인내할 만큼 인내했으니 나무를 제거하고 땅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인의 평가에 따르면 열매 맺지 못한 책임은 주인이나 포도원지기가 아니라 나무에 있습니다.

이 나무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토양을 망치는 것입니다. 무화과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내는 것이 농부의 자연스러운 판단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올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부탁합니다(8). 열매를 요구하는 기회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3년에 비해 1년은 짧은 기간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기간만 확보한 것이 아니라 나무둘레의 땅을 파서 토질을 부드럽게 만들고 거름을 주는 노력을 기울여 열매 맺는 나무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게 관리를 했는데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때 나무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합니다(9). 소망의 기회가 주어지고 동시에 심판의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는 징벌을 억제함으로써 긍휼로 행하실 것이지만, 심판의 지연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두 비극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과 달리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줍니다. 기회를 얻고도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내리는 데 관심을 두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거나 회복하는 것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회개는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것처럼 회개하는 자신과 타인의 회복을 위한 방편입니다. 회개의 기회는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를 대변합니다.


세상은 회개를 무시하고 교회는 회개의 방향을 타인으로 돌리곤 합니다. 쌍의 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이킬 것에는 용기 있게 무릎 꿇고, 그분의 자비에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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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4)


새롭게 임할 하나님 나라를 준비

누가복음 12장 48-59절


 

성도의 삶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자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주님의 사역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경각심을 위해 미래의 심판(46-48)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판이 재림 이전에 ‘분리’로 나타날 것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고 죽음의 세례 이후에 심판으로 인한 분리가 본격화될 것을 예고하십니다(49-50). 그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구원과 심판을 받는 사람들 간에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51-53).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구원의 시대를 지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54-59).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49-50)

신앙의 길이 때로는 어려움과 갈등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믿음의 여정은 불의 시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임을 상기시킵니다.

 

49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49-50)

 

예수님은 앞 단락(46-48)에서 심판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46) 임할 것을 예고하셨는데, 이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49). 이전 본문(3:9,17; 9:54)에서 불은 심판의 의미로 사용됐고,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도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은 심판과 더불어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불이 땅에 던져지면 악인들과 의인들 간의 분리가 일어납니다(3:16-17). 악인들에게서 분리된 의인들은 불로 정화된 자들입니다. 정화된 의인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에 긍정적인 태도로 반응하고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역설적으로 불이 던져지면 악인들은 심판에 이르고, 죄인으로서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정화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던져진 불이 온 땅을 태우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세례(50)를 통해 땅에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난해 구절인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는 심판의 실현을 의미하기보다 심판(과 정화)에 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현될 것이며,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화, 곧 구원이 됩니다.

불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50절의 ‘세례’로 이어집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6)라고 선포했는데, 불로 세례를 주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선포하는 두 가지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목표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서는 ‘별세’(엑소도스= 출애굽),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하는 결심을 말씀하실 때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한 ‘승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목표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인 것을 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뜻하는 세례에 대해 ‘그것이 이뤄지기까지’(직역)라는 표현에서 ‘목적’(텔로스)의 동사형(텔레오, 이루다)을 사용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목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인 죽음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걷고 계십니다. 개역개정에 ‘답답함’으로 번역된 ‘쉬네코’는 ‘사로잡히다’ 또는 ‘집중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예. 에스드라2서 16:10). 목표점을 향해 전진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표와 뜻에 집중하십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목표, 즉 구원의 목적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위해 목표점인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고 목표를 완수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분리를 일으키러 왔다(51-53)

신앙인들이 현재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믿음의 길은 때로 고난을 동반하지만, 진리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온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1-53)

 

51-53절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분리가 일어날 것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리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거부하는 자들의 분리를 말합니다. 믿는 자들은 구원의 선물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미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에 분리가 일어날 것을 예고했습니다(2:34).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훙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 자신은 ‘주의 구원’을 보았고 예수님을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2:30-32)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자신처럼 구원의 빛을 보게 되는 사람들로 나뉠 것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심지어 가족도 분리될 것입니다(52-53). 가족은 가장 끈끈한 결속력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족도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온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 때문에 생기는 분리를 가장 기본적인 숫자인 다섯(52)과 셋(53)으로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명과 두명, 두 명과 세 명이 맞서는 장면을 예로 드십니다. 다섯 손가락처럼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은 결속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숫자입니다. 또한 결혼한 자녀를 포함하는 가족의 경우에는 부자, 모녀, 고부가 예수님 때문에 갈등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결속력이 굳건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같을 수 없어 갈등이 생깁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시간과 관련해서 52절은 미래 시제(에손타이…디아메메리스메노이, 분리될 것이다)와 ‘이제부터’를 사용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이제부터’는 가까운 미래를 포함하고(1:48; 5:10; 22:18,69) ‘세례’(50)가 죽음을 의미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본격적인 분리가 땅에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역 기간에도 분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복음이 분열을 조장하거나 분쟁을 촉구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오셨고(1:79;2:14;7:50;8:48), 제자들의 주된 사명도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10:5-6). 그럼에도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예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모두가 아니라 믿는 자들만 경험하는 것이므로 양쪽의 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리의 고통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겪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세례)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세상에 삶으로 변증함으로써 사람들을 분리의 건너편에 내버려 두지 않고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느냐(54-59)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영적 민감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와 화해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갈등을 피하고 화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58-59)

 

사람들은 거주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에 대한 상식을 알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서풍은 지중해 지역에서 습기를 싣고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몰려오면 폭풍우나 소나기가 내릴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54). 남풍이 불어오면 남쪽에 위치한 네게브 사막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로 고생할 것을 예상합니다(55). 이처럼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기상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무리가 해석하지 못하는 원인은 예수님께서 ‘위선자들’로 칭하시는 부분에 암시됩니다. 기본적으로 위선은 불일치 또는 부조화를 의미하는 점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무리는 날씨처럼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으로 임한 나라를 쉽게 분별할 수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둘째, 무리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나라를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데도 생각보다 무지합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심판의 책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라며 결단을 촉구하십니다(57). 결단을 위해서도 앞의 경우처럼 상식적인 지식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만일 고발을 당한 경우 재판을 받기 전에 화해를 시도해야 합니다(58). 화해하지 못한 채 소송에서 지게 되면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59). 소송에서 패할 것이 예견될 때 먼저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는 상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실 재판관이시기에, 무리는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부하면 영원히 화해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과 자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영적 민감성을 유지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갈등을 피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되기를 기도하며, 이러한 삶이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기반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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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3)


맡겨진 사명에 대해 충실한 종

누가복음 12장 35-48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가지고, 그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과 자원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분의 뜻에 맞춰 행동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자의 재림을 제자들이 지금 깨어 있어야 할 근거로 사용하십니다. 본 단락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깨어 있을 것(35-36)과 청지기에게 지혜 있고 신실할 것을 촉구하고 나서(41-44) 주인이 오는 것을 준비한 정도에 대한 엄중한 평가 (37-40, 45-48)를 설명하십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받은 권위와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실히 오시는 예수님께서 차등하게 평가하실 것을 묘사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종들은 복되다(35-40)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의 모든 결정은 중요하며,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히 임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준비된 자에게는 큰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상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5○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35-40)

 

본문은 성도들이 항상 깨어 있고 준비된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준비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큰 축복과 상급을 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의 준비와 헌신에 따라 주어집니다.

 

(1) 종들은 깨어 있어야 함(35-36)

 

예수님께서는 35-38절에서 주인이 오는 것을 깨어 준비하도록 가르치면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청중이 잘 알고 있는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하십니다(35-36).

첫째, 제자들(‘너희’)은 허리를 동여매야 합니다(35a). 이는 언제든 신속히 도망하기 위해 준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에 허리를 동여매고 음식을 먹었습니다(출 12:11). 둘째, 제자들은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합니다(35b). 한밤중이라도 신속하게 출발하려면 등불을 켜야 하고, 앉거나 눕지 말고 서서 대기해야 합니다. 셋째, 제자들은 주인이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즉각 열어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36). 당시 종들에게는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주인은 아마 친구나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기 때문에 종들은 대기해야 합니다.

 

(2) 깨어 있는 종들을 위한 주인의 보상(37-40)

 

37-38절은 깨어 있는 종을 위한 주인의 보상을 약속합니다. 37-38절의 헬라어 문장은 ‘복되다 그 종들은’, ‘복되다 그들은’으로 시작하고 마침으로써 깨어 있는 종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 강조합니다. 가장 피곤한 시간(로마 시간으로는 밤 9-12시 또는 밤 12시-새벽 3시)에 주인이 오더라도 깨어 준비하는 좋은 복됩니다. 주인은 종들과 만찬을 즐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묘사하는 식사 장면은 청중에게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허리를 동여매고 종들의 식사를 섬기기 때문입니다(37). 주인의 섬김을 받을 만큼 깨어 있는 종들은 복됩니다. 본문의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비유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2:27)라고 말씀하시고, 재림 때 그런 모습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특히 35절에서 ‘동여매다’로 번역되는 ‘페리조뉘마이’는 37절의 띠를 ‘띠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제자들에게 준비하도록 명령하신 예수님이 직접 섬기시는 장면은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강화합니다.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인데도(17:8) 주인은 종의 위치로 내려가 제자들을 보상하실 것입니다.

39-40절에서 예수님은 주인을 ‘인자’, 곧 자신으로 바꾸어 재림을 깨어 준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도둑은 예고 없이 닥칩니다. 인자의 오심도 이와 같습니다. 재림의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재림이 확실하므로 깨어 준비한 제자에 대한 보상도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강조함으로써 깨어 준비하라고 명령하시고 이렇게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보상이 확실히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편하게 앉아서 식사를 즐기도록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땅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섬기는 것이 바로 깨어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깨어 있다’(그레고레오)는 누가의 두 번째 저술인 사도행전 20:31에서 바울이 눈물로 3년 동안 교회를 목양한 일을 회고할 때 사용됩니다.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을 섬기셨고 종말에도 섬기실 예수님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섬기는 행위로 깨어 준비하는 삶은 다음 단락에서 청지기의 자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는 복되다(41-48)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충실히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항상 결과를 동반하며,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믿음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신앙의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책임을 다하는 삶이 결국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1○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1-48)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충성된 관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충실하게 일한 관리에게는 큰 상을 주지만, 주인의 뜻을 어기고 게으른 관리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주어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주어진 만큼의 책임이 클수록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원칙을 설명합니다.

 

(1) 청지기는 지혜 있고 신실해야 함(41-44)

 

베드로는 예수께 그분의 가르침이 제자들과 모든 사람 중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묻습니다(41).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장면은 많은 경우 청중이 누구인지 모호하기 때문에, 대상을 명확히 밝혀달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보다 두 종류의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 비유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성도들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모든 이를 교훈의 대상으로 설정하십니다. 왜냐하면 47-48절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예수님의 평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42-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부재 시에 청지기가 보이는 두 종류의 행동과 그런 행동에 상응하는 주인의 평가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역할을 맡은 종을 예로 드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집의 종들을 위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줍니다(42). 42절의 ‘피스토스’(“진실한”)는 ‘신실한’ 또는 ‘맡길 만한’을 의미합니다. ‘프로니모스’(“지혜 있는”)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의 자질을 가리킵니다. ‘쎄라페이아’는 집안의 일을 섬기는 행위 또는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 등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이런 전체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즉 종들을 지칭합니다. 이들도 종이고 청지기도 종이지만, 청지기는 이런 종들에게 제때 음식을 제공하는 권위와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처럼 청지기의 임무는 돌봄의 일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이들의 필요를 신실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맡은 청지기 임무를 수행하는 종은 복됩니다(43). 주인은 신실하고 책임성 있는 청지기에게 모든 소유를 맡깁니다(44).

 

(2)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엄중한 심판(45-48)

 

청지기가 주인이 늦게 올 것으로 예상하여 종들을 학대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살면 주인은 그를 징벌할 것입니다(45-46). 예수님께서는 46-47절에서 의도적으로 청지기를 ‘종’으로 칭하십니다. 청지기도 주인에게는 종입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지 않은 청지기는 종의 역할을 망각하고 권위를 남용하거나 직무유기를 행합니다. 45절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청지기가 신분과 책임을 망각한 채 동료 종들을 섬기지 않고 개인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종이 생각하지 않은 날 갑자기 와서 종을 엄하게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에게 가해지는 벌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이 ‘주인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징벌의 수위를 달리합니다(47-48).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므로, 하나님의 뜻은 누가복음 전체에 나타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로 전해집니다. 특히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4:18-19)은 예수님의 사명인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가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깨어 준비하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고(47),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맞을 행위를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48a). 이처럼 주인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요구합니다(48b).

본문에서 청지기는 직접적으로 제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어입니다. 그런데 47-48절에서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대상에는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맡은 책임의 크기와 상관없이 주인의 뜻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책임을 많이 맡은 지도자들이 받을 평가의 기준은 더 높습니다. 회복의 사역을 위해 책임을 더 많이 맡은 사역자일수록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책임성 있게 실천해야 합니다(참조.19:11-27). 마지막 평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정도와 맡은 책임에 따라 차등하게 내려집니다. 구원의 길에는 차별이 없으나 삶에 대한 평가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맡은 책임이 클수록 평가 기준도 높아져 직무유기하면 더 많이 맞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충실히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항상 결과를 동반하며,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믿음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신앙의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책임을 다하는 삶이 결국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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