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5-02)
잃어버렸던 아들에 대한 비유
누가복음 15장 11-32절
회개를 위선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고,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자존심과 두려움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과거의 죄와 상처가 마음을 억누르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유혹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회개 후에도 쉽게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그 비유는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받아 먼 나라에서 탕진하고 배고파 주립니다. 그 허랑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자 기쁘게 맞이하며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줍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는 아들(11-16)
불효자들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부모님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선택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1-16)
이제 예수님께는 또 다른 비유를 통해 교훈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들 중에 둘째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먼저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11).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12).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유산을 나누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민 27:8-11).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자식이 유산을 요구한 행위는 가문의 수치고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가족과 가문 안에서 살지 않겠다고 공언한 행위였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 아버지의 반응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각각 상속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며칠 만에 먼 나라로 갔습니다. 멀리 가려면 재산을 매각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생명 같은 재산을 한순간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가족에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심었습니다. 또한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나라에 갔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재산을 금방 낭비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 둘째 아들은 어느 농가에서 돼지 치는 일을 했습니다(15).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레 11:7; 신 14:8). 너무 배가 고파 돼지의 사료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17-24)
집 나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그리움과 후회가 밀려오고, 홀로 지내며 느낀 외로움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먼 곳에서의 힘든 경험은 고향의 따뜻함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여행은 새로운 시작과 용서를 향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7-24)
둘째 아들은 굶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죽어간다’를 뜻하는 ‘아폴뤼미’는 앞의 두 비유에서 ‘잃다’의 의미로도 사용됐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본 아들의 상태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24). 이처럼 둘째 아들은 잃은 양과 동전과 같이 잃어버린 신세입니다. 배가 고프고 나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아들인 자신은 이방 나라에서 굶어죽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17).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일한 생존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할 말을 연습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18). 아들은 집을 떠날 때의 죄가 얼마나 큰지 인정합니다. 아버지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여겨 주시도록 부탁하려 합니다(19).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낮아질 것을 각오합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호의를 베풀 때 가능합니다.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20).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았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환영했습니다. 아들은 오기 전에 연습했던 대로 말을 시작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그러나 품꾼으로 삼아달라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말을 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신을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22).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즐기자고 말합니다(23).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입니다(24). 주인의 말을 들은 집안사람들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앞 단락의 두 비유처럼 여기서도 찾은 자의 기쁨이 강조됩니다. 찾은 자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즉각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돈을 씁니다. 이런 아버지는 당시 문화에서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했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부자 지주가 아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아들로 지위를 회복하고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은 마을의 기강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부자인지주가 거리로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주는 것도 특이합니다. 큰아들이 지적하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문제는 낭비입니다(27,30). 둘째 아들도 재산을 낭비했고 아버지도 재산을 낭비합니다. 이런 점에서 둘째 아들이 탕자라면 아버지는 탕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낭비가 둘째 아들을 회복하는 길이었습니다. 아들의 신분을 즉각 회복하게 된 이유도 사랑입니다. 비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찾고 식사로 환대하셨습니다. 또한 비유에서 아들이 스스로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고 표현합니다. 잃은 자와 잃은 것을 찾을 때 사용되는 동사 ‘찾다’(휴리스코)는 연속되는 세 비유에서 반복됩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15:4,5,6), 여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8, 9[×2]),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24,32) 찾았습니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이 긍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환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들은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비유는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집 밖에서 불평하는 첫째 아들(25-32)
교회에 새신자가 들어올 때, 기존 신자들이 은근한 텃새를 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와 공로는 의미가 없고,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기뻐하며 서로를 환영해야 합니다.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25-32)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두 가지 비유 ‘잃어버렸던 양’,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통해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랑과는 다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사랑은 선민들만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1) 아버지 품으로(25-30)
이제 첫째 아들의 반응과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대화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서 잔치 음악과 노랫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습니다(25).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종을 불러 상황을 묻습니다. 좋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합니다(27). 첫째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28). 그러나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집 나간 탕자를 찾아가서 집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는 종과 같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여러 해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도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즐길 수 있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29).
(2) 아버지의 잔치(31-32)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낭비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30). 형은 동생과 자신의 관계를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큰아들은 그토록 심한 불명예를 안기고 떠난 아들을 영접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번 잔치가 정당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아버지의 재산이 그의 것입니다(31). 그러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아버지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32). 첫째 아들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 중 누구의 말과 행동이 합리적입니까? 큰아들의 논지는 분명히 강력합니다. 큰아들처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논지는 탄탄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항의에 대해 거론하거나 반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이유만 설명합니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아버지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큰아들도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호소하는 동시에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첫째 아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를 불평하는 탕자입니다. 아버지와 논쟁하고 형제 관계를 부정해버립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낭비하는 사랑을 비판했지만,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랑의 수혜를 입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12) 현재 재산은 자신의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31). 첫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부류를 첫째 아들에 빗댑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집 밖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의로운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낭비하는 사랑으로 낮은 자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가 중심 주제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힘든 상황에 처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형은 탕자의 회복을 질투하지만, 아버지는 모두가 소중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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