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08-03)
귀신들인 사람을 재창조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8장 26-39절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은 죽어서 하늘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통치 아래 해방, 자유, 평안, 쉼,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체, 내면, 영혼이 전인격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새로워지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 거라사의 광인이 회복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앞 단락(8:22-25)과 연결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나서 ‘그는 누구인가?’(8:25)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집니다. 본문에서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귀신들이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28)라고 말합니다. 두 단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한 남자를 공격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귀신들(26-29)
사단의 목표는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돈이나 권력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곳에 살더라도 의미 없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은 자연을 넘어 영적인 세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돕습니다.
26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26-29)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광풍과 물을 잠잠케 하신 자연을 다스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다스리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의 광풍을 뚫고 건너편 거라사인들의 땅에 이르렀습니다(26). ‘거라사’는 ‘열 개의 도시’를 뜻으로 헬라 문화가 발달한 데카폴리스에 속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부정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은 이 지역을 피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건너가셔서 사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이 유대를 넘어 이방인에게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뛰어 넘을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전혀 새로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거라사에 배에서 내리자마자 먼 먼저 맞이한 사람은 그곳 도시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27). 이 귀신들린 자는 세 가지 증상으로 소개합니다. 옷을 입지 않고, 집에 머물지 않으며, 무덤 사이에 거주 했습니다(27). 죽은 시체들이 있는 무덤 사이에 거주하는 것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짓입니다. 그의 겉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자비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죽은 시체들이 묻혀 있는 부정한 공간 무덤 사이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러운 지역에서 더러운 장소에 사는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방인인 지역을 복음으로 새롭게 하시고 귀신들린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한편 이 귀신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복수형인 ‘귀신들’은 남자가 많은 귀신들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귀신들의 규모는 ‘군대’라는 용어로 구체화됩니다. 이 남자를 많은 귀신들이 사로잡고 있는 증거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지내며 집을 떠나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습니다. ‘무덤들 가운데’ 거하는 모습은 그가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과 더 가까운 관계임을 내포합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시체가 안장된 무덤은 부정하며, 그는 무덤들이 있는 부정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28). 이런 행동은 귀신들이 조종한 결과입니다.
귀신들은 귀신 들린 자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귀신은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외칩니다. 앞서 제자들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39)라고 질문했습니다. 그의 대답이라도 하듯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귀신이 하는 말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심판 대상일 뿐입니다. ‘지극히 높은 자’는 누가복음의 전반부에 주로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으로 인정하는 칭호입니다(1:32,35,76; 2:14; 6:35; 8:28; 19:38; 참조. 행 7:48; 16:17),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귀신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겨루어 이길 수 없습니다.
한편 귀신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귀신의 정체를 알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29). 사실 귀신들린 이 사람을 제어하기 위해 사람들은 쇠사슬로 묶어두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는 그 매인 것을 끊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29b).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알기 때문에 전투를 벌이지 않고 협상을 시도합니다.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아줄 것을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가 2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도록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귀신에 속박된 남자는 가족과 사회에 해로운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사슬과 족쇄로 제어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귀신의 힘으로 그는 결박을 풀어버렸고 귀신은 그를 광야로 내몰고 가버렸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남자를 감금할 수 없는 모습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을 귀신들의 공격으로 진단했기 때문에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 거라사로 오셨고 선전포고를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귀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셨는지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들은 폭풍의 공격을 뚫고 거라사로 오신 예수님께 패배당하고 갇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은 그들이 피하려는 고통이 무저갱에 갇히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인 예수님 외에는 귀신의 세력에 속박된 남자를 해방할 수 없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30-33)
아무리 많고 강한 귀신들이라도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마귀인 더러운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온통 부정한 것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정한 곳에서 거룩한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는 내용입니다.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30-33)
예수님께서는 귀신과 협상하지 않고 그 귀신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30).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세력이 귀신들인 것을 드러내고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남자는 이름을 ‘군대’라고 말합니다. 약 5,600명의 군인들로 구성된 ‘레기온’은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귀신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자 무저갱에 던지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31). ‘무저갱’은 귀신들이 갇히는 감옥입니다. 한 남자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 가두었던 귀신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감옥에 갇힐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귀신들은 그곳 산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십니다(32). 귀신들은 남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 들어갑니다(33). 이 장면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괴롭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귀신들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돼지들은 귀신의 세력에 의해 혼돈에 빠져 비탈 아래로 달려 호수에 빠져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짐승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귀신들은 여전히 생명체에 들어가 활동할 줄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무저갱은 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생존한 것이 아니라 물 아래 무저갱에 갇힙니다. 다시 말해서, 돼지 떼가 물에서 몰살한 사건은 귀신들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즉시 심판받아 감옥에 갇히는 고통에 빠진 사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온 목적이 거라사 광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영혼이 돼지 이천 마리보다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희생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을 자학하며 살아가는 광인의 배후에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귀신’, ‘귀신들’, ‘더러운 영’ 등의 용어는 예수님과 사탄의 세력 간에 일어나는 충돌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혼돈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분이므로 예수님을 의존하는 길이 평화와 승리의 방식입니다.
선포하는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34-39)
우리를 온전하게 고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을 온전하게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배풀어 주신 구원은 귀신이 가져온 모든 파괴 상태를 역전시키고 새로운 상태로 주십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본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십니다.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만이 가자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34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34-39)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일어난 상황을 보고 도망쳐 자기가 실고 있는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34).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35a). 그들은 귀신들에게서 해방된 남자가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35). 발치에 앉는 것은 학생(들)이 선생에게 배우고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왕하 4:38; 행 22:3). 벌거벗은 채 돌아다닌 모습이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실존이었다면,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사회로 복귀할 수 있고 훈육이 가능한 상태로 회복된 것을 뜻합니다.
제어할 수 없었던 남자가 이제 예수님께 복종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됩니다. 사건의 전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주민들에게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36). 그가 지금 온전한 태도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구원받은 결과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 현장에 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라사 주변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37a). 예수님의 능력이 앞으로 초래할 문제를 염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그곳을 떠나십니다(37b).
귀신 나간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했습니다(38).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면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온 도성에 알리도록 지시하십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구원이 공동체로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귀신 들렸던 남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온 도성에 선포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대표인 아담은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떠나지만, 결국 사탄에 더 예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둠에 지배되어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의 욕망과 정욕에 사로잡혀 이성 잃은 짐승처럼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안에서 해방된 영혼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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