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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4-01)


앤게디 광야에서 사울을 살려준 다윗

사무엘상 24장 1-22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길에서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선택 앞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관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원수를 보복하는 일이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 속한 권한이라고 가르칩니다.

 

  • 다윗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원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위대한 선택을 합니다. 다윗과 사울은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베는 다윗(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러한 기회를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칭찬받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1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1-7)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 앞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양의 우리에 가까운 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로 들어섰습니다.

 

(1) 동굴에 들어간 사울(1-3)

 

다윗은 십 광야에서 앤게디 광야로 이동하였습니다. 십 광야에서 다윗을 거의 잡을 뻔하다가 블레셋의 침략으로 실패한 이후로도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잡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이스라엘 군사 삼천 명을 선발하여 다윗을 잡기 위해 들염소 바위로 갑니다. 선발된 삼천 명의 군사는 다윗의 육백 명에 비하면 다섯 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입구에 양 우리가 있는 굴을 발견한 사울은 그곳에 잠시 볼일을 보러 들어갑니다. 앞에 양들이 얌전히 있는 것을 보고 굴에 아무도 없으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곳에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동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다윗과 그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혼자서 변을 보고 있는 사울을 본 다윗의 군사들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손에 원수를 넘겨주신다는 것과 다윗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는 약속을 해주셨는데, 지금이 바로 그 기회라고 말합니다. 군사들이 말하는 이 신탁은 그일라에서 블레셋을 칠 때 다윗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때는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본 군사들은 이 신탁을 블레셋뿐만 아니라 다윗의 원수인 사울도 다윗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울의 옷자락을 벤 다윗(4-7)

 

다윗도 눈앞에 일어난 우연한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가만히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베었습니다. 겉옷 자락을 베었다는 것은 사울을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를 죽이려고 다가갔다가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없을 좋은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3) 후회하는 다윗(5-7)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에 대해 심하게 자책합니다. 겉옷 자락을 베었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종종 불충성과 반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군사들에게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과 겉옷만 자르고도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함부로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는 사람들을 막았고, 사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사히 동굴을 나갔습니다.

 

다윗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8-15)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일에만 하나님의 뜻만 입에 올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순간에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돌아간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야 합니다.

 

8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8-15)

 

다윗이 사울을 제거할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을 제거함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요인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순전하게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처음부터 사울을 제거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 상황 설명(8-11)

 

다윗이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면 안 된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선택한 여호와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해를 가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악 간에 심판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과 대조적으로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놉의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둘의 이런 대조적인 태도를 통해 다윗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과 사울이 여호와를 무시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둘째 이유는 다윗 자신도 여호와의 기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반정에 성공하면 후대 사람들도 다윗의 본을 따라 얼마든지 왕을 죽이고 반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행동이 왕정 제도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제한 것입니다. 후에 북왕조 이스라엘에서는 남유다의 다윗 왕조와는 달리 계속해서 왕을 죽이는 반정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회도 마다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인 되심과 정의로움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며 그의 자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2) 다윗의 결심(12-13)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으로 그동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동안의 억울함을 사울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게 되자 다윗은 사울을 부른 뒤에 땅에 엎드려 절하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춥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왜 귀를 기울이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 직접 생각한 것이지만, 다윗은 사울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손에 있는 사울의 겉옷 자락을 보여주면서 사울이 굴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왕을 자기 손에 넘기셨고 사람들은 왕을 죽이라고 말하였지만, 자신은 왕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왕의 겉옷 자락만 베었다며,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비록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만 자신은 왕에게 무죄하다고 다시 한번 선언한 후에, 자신과 왕에 대한 심판을 여호와의 손에 맡깁니다. 자신과 왕 사이의 시시비비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셔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위해 복수해주시길 기원하며, 자기 손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후로도 자신은 사울을 해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다윗의 말의 핵심이자 사무엘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복수는 여호와의 것이며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13절의 속담은 자신은 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3) 여호와께 호소(14-15)

 

14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왕에 비하면 자신은 매우 하찮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존재로 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왕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니 추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여호와의 심판과 판단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왕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며 긴 연설을 마칩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인정하는 사울(16-22)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폭력이 아니라 복음과 사랑으로써 세계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해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16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16-22)

 

진실한 사랑은 악한 사람까지도 감동을 줍니다. 다윗의 진실한 변호 앞에서 사울의 마음이 감동됩니다. 다윗을 향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사울의 마음에 한줄기 사랑의 빛이 가슴에 비추었습니다.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다윗이 자신에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행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목 놓아 울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합니다. 다윗이 진정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1) 사울의 판결(16-17)

 

다윗에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준 것과 앞으로도 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는데, 이것은 이제까지 ‘이 새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대조됩니다. 다윗의 말에 감동을 받은 사울은 울면서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고, 자신은 늘 다윗에게 악한 짓만 했는데 다윗은 자신에게 이렇게 선한 행동만 하였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동을 선하게 갚아주시길 기원해줍니다.

 

(2) 사울의 축복(18-19)

 

본문에서 사울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며, 다윗이 원수인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서 깊게 감동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다윗의 손에 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보면서 사울은 부인하고 싶었던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 맹세를 요구하는 사울(20-22)

 

사무엘상 23장 17절에서 요나단이 한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요나단이 했던 것처럼 다윗이 왕이 되면 자신과 자기 집을 멸하지 않을 것을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맹세를 시키는 이유는 고대에는 반란으로 왕이 되면 이전 왕족들을 몰아넣고 한꺼번에 죽여 반란의 싹을 자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런 사울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맹세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각자의 길로 갑니다.

이제 다윗과 사울 간의 평화가 찾아온 듯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신앙고백이 힘 있는 자에 대한 힘없는 자의 변명인지, 아니면 진실한 고백인지 다음 나발의 이야기에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모든 일을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감정은 중요하지만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결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노로 인한 행동은 자칫 악을 불러 일으켜 그 악을 정당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른 선택을 하실 것입니다. 비록 승리할 때까지는 힘들겠지만, 지속적으로 선한 선택을 하면 언젠가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도 사울과 같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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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3-02)


다윗을 죽이려고 십까지 찾아간 사울

사무엘상 23장 15-29절


 

진실한 성도는 자신의 소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할 역할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내고 있는 모든 시간, 만나는 모든 사람,자신이 당한 모든 일들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조성하신 환경이라고 믿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항상 자신을 더 낫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다는 소식에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하러 갑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잡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군사를 모아 다윗을 잡기 위해 그일라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 뜻을 묻고 그일라를 무사히 탈출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줄 생각이 없으시지만,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기에 사울의 추격전은 계속됩니다.

 

십 광야에서 다시 만난 요나단(15-18)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앉은 자리를 탐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쇠하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갈 때와 물러설 때, 일어설 때와 앉을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5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5-18)

 

하나님께서는 그일라에서는 직접 다윗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다윗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될 수 있었지만, 도리어 사랑의 맹세를 기억한 요나단을 통해 위로와 확신을 주십니다.

 

(1) 십 광야 수풀로 피신한 다윗(15)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적으로는 그는 왕자이기 때문에 다음 왕이 될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사울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이 왕이 되어야 사울도 끝까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보복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왕권을 아들 요나단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요나단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진행된 상황을 보면 자신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자신이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서 십 광야로 도망갔을 때의 사건들로 십 광야로 도망한 다윗을 찾기 위해 사울도 십 광야로 옵니다. 그리고 그런 사울을 멀리서 보고 다윗은 재빨리 숲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모습을 요나단이 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쫓아다닐 때 요나단도 동행한 것 같습니다. 사울 옆에 있다가 다윗이 숨는 것을 보고 요나단은 사울과 다른 군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윗을 만나러 숲으로 들어갑니다.

 

(2) 요나단의 권면(16-17)

 

이런 요나단의 행동은 다윗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런 위험보다는 다윗을 보고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요나단은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다윗을 만난 요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힘을 내라고 위로한 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결코 다윗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한 말과 같은 의미로 두 문장 모두에 ‘사울의 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전에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함께하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길’이라고 하거나,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살려달라는 말로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번에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도 다윗을 위한 이 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신하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자기 아버지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3)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18)

 

이제 요나단은 여호와 앞에서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맺었던 언약들을 다시 한 번 여호와 앞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잠깐 만난 후에 헤어지는데, 이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요나단과 사울의 태도가 비교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다윗을 주군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충성을 다짐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다윗을 죽여 하나님의 의지를 막으려는 반역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자신을 반역했다고 죽이러 다니지만, 정작 자신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을 돕는 십 사람들(19-24a)

우리가 말과 삶이 일치하므로, 열매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론하다고 그 사람을 신령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열매로 우리의 삶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19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21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19-24a)

 

다윗이 도망한 십 지역 사람들은 도엑처럼 의와 불의를 따지지 않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권력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하였습니다. 사울도 그들에게 ‘여호와의 축복’을 비는 종교적인 제스처로 화답하며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1) 십 사람들의 고발(19-20)

 

사울은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지 못하자 다시 자신의 성읍인 기브아로 돌아갑니다. 그때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로 와서 다윗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인 여시몬 남쪽 하길라 산 숲속 요새에 숨어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왕이 내려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내려오시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윗을 왕의 손에 넘기는 것은 자신들의 의무 혹은 자신들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울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십 사람들의 말에 사울은 자신의 심정을 알아준 것에 고마워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십 사람들은 유다 지파 사람들로 같은 지파 사람인 다윗을 지지하지 않고 사울을 지지하며 사울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울이 같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슬퍼하지도 않는다고 꾸짖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무조건 같은 지파 사람이라고 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오직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은 불안한 새로운 권력보다는 안정적인 현재의 권력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2) 사울의 지시(21-23)

 

사울은 이들에게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자세히 살피라고 당부하는데, 장소뿐만 아니라 누가 보았는지까지 아주 자세하게 조사해서 확실해지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 소식을 듣고 움직였다가 허탕을 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자신이 듣기로 다윗은 너무 영리하게 행동해서 그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못 잡도록 막고 계신 것을 다윗이 영리하게 머리를 써서 도망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울은 이들의 협력에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도와준다면 유다 지파 사람들 수천 명 속에서도 다윗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죽을 뻔한 다윗(24-29)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불순종하는 것보다 알고도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멸망이 눈 앞에 있고, 하나님의 경고가 세찬데도 듣고도 못들은척하면서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권력자 사울보다는, 알고 있는 만큼 순종하고 있는 요나단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24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24-29)

 

사울과 십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빠질 틈 없이 촘촘히 포위망을 좁혀 다윗을 에워쌌지만, 블레셋의 출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 마온 황무지 피신(24-25)

 

사울의 요청을 받은 십 사람들은 다윗을 찾기 위해 사울보다 먼저 십 광야로 돌아갑니다(24a). 십 사람들이 다윗을 찾기 위해 출발한 즈음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십 광야 남쪽에 있는 마온 광야로 이미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사울이나 그를 찾는 자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데, 여기서 그 이유는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일라에서 도망한 사건에서 유추해 보면, 다윗과 함께 있는 아비아달을 통해 하나님께 어디로 도망갈지를 물으면서 다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울처럼 다윗에게도 소식을 전해주는 정보원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항상 사울의 움직임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사울이 다윗을 추격함(26)

 

다윗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절벽 혹은 바위산에서 내려와 마온 광야에 거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따라 마온 광야로 들어가서 바위산을 중심으로 한 쪽 방향으로 돌면서 다윗을 포위하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 다른 방향으로 피하려고 하였지만, 본문을 보면 사울의 인원수가 더 많기 때문에 다윗은 포위를 풀고 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것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다’는 표현은 다윗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십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윗을 찾아내어 거이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게 한 발짝만 나가면 다윗을 잡을 수 있었고, 다윗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옵니다.

 

(3) 블레셋의 침략으로 돌아가는 사울(27-29)

 

사울이 다윗을 거의 잡게 된 상황에서 갑자기 전령이 나타나 블레셋 사람들이 노략질하기 위해 쳐들어왔다는 급박한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는 것을 멈추고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하기 위해 셀라하마느곳(나누어진 바위)으로 갑니다. 아마도 사울이 다윗을 포기하고 달려가야 할 만큼 블레셋의 침략이 매우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사울이 달려간 것입니다. 일단 나라가 있어야 왕권 다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블레셋부터 막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블레셋이 쳐들어와 다윗은 사울의 포위에서 풀려나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도망하여 북쪽에 있는 엔게디 요새에 머물게 됩니다. 엔게디 요새는 샘이 풍부하고 동굴이 많은 지역으로 도망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블레셋이 이 시점에 쳐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위험한 순간에 그를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은 원수의 손과 악인들의 덫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전에 말씀으로 먼저 찾아오십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 후에 사울이 다윗을 추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만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을 통해서 들었던 위로의 말씀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울이 이리저리 쫓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고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는 것은, 혹시 고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고난 가운데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말씀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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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3-01)


블레셋이 침공한 그일라를 구하는 다윗

사무엘상 23장 1-14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만납니다. 가장 험한 일은 자신이 부모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는 일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일이니, 이런 일을 만나면 아파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가슴 아픈 일이 있다면,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일입니다. 약속을 어기고 배은망덕하게 거짓을 일삼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힘을 빼는 일입니다.

 

  • 사울은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죽이고 여호와를 예배하는 중심지인 놉 성읍을 진멸합니다. 그는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당장 눈앞의 다윗을 죽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 일로 졸지에 가족과 고향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된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에게로 갔고 다윗의 제사장이 됩니다. 쫓기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일라를 구한 다윗(1-5)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낮고 천한 세상에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 보호해줄 수 있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을 봅니다.

 

1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1-5)

 

사울은 다윗의 잡기 위해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사울은 자기 백성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은 오히려 어려움과 고난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1) 블레셋의 약탈(1)

 

다윗이 유다 땅으로 들어와서 지낼 때,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들어와 타작마당을 탈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일라는 블레셋 접경 지역에 있는 성읍으로 다윗이 있는 유다 평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타작마당을 탈취하고 있다는 것은 추수한 곡식들을 빼앗겼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런 소식을 전한 것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고 같은 지파 사람인 다윗이 자신들을 도와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동족이 블레셋에게 공격을 받고 약탈당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다윗은 고민합니다.

 

(2) 여호와의 뜻을 묻는 다윗(2-4)

 

다윗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유다 땅에서는 도망 다니기도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에서 남을 돕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고민하다 여호와께 블레셋과 전쟁해도 좋은지를 묻습니다. 당시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도망하면서 에봇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다윗은 에봇을 이용하여 여호와께 전쟁해도 좋은지를 묻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고 전쟁하러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다윗이 묻자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다니는 측근들에게 전달하니, 그들은 다윗이 고민했던 문제를 그대로 이야기하며 반대합니다. 숨어서 사는 처지에 누구를 구할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결정하기 힘들게 되었고, 확신을 얻기 위해 다시 여호와께 묻습니다. 이번에도 여호와께서는 ‘일어나 그일라로 가라’는 대답과 함께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주신다는 승리의 약속도 주십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두 번이 나가라는 명령과 함께 승리까지 보장해주시자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일라로 갔습니다.

 

(3) 전쟁의 승리(5)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한 끝에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가축을 이끌어오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일라 주민들도 구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사무엘서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다윗은 비록 도망자이고 군사도 많지 않았지만,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유다 땅의 구원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6절은 부가적 설명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물을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을 잡으러 그일라로 간 사울(6-12)

성도 중에도 기도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보이지 않는 기도는 등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야말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이끄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든지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6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7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8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9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2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6-12)

 

인간의 생각, 감정, 판단이 지혜로우면 얼마나 지혜롭겠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매 순간 그 지혜를 구하면서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노력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1) 아비아달과 에봇(6)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블레셋과 싸운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일라에서 싸우고 있는 다윗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일라는 성읍으로 성문과 성문을 잠그는 문빗장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문을 잠그면 다윗은 그일라 성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자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자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사울의 군대 이동(7-8)

 

8절에서 우리말 번역은 사울이 군사를 모아 다윗을 포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9절부터 나오는 다윗의 행동을 보면 사울이 자신을 잡기 위해 군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포위하기 전에 그일라를 떠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절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다윗과 사울은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로 자신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그일라로 옵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울은 거짓 목자로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식량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다윗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가 참 목자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지도자는 거짓 목자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도망할지를 묻는 다윗(9-12)

 

다윗이 이런 사울의 음모를 알게 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울처럼 누군가 다윗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 간에 치열한 정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계획을 알게 된 다윗은 그일라에 머물면서 계속 그일라 사람들과 함께 사울과 싸워야 할지 사울을 피해 달아나야 할지 고민하였고,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하여 다시 하나님께 어찌할지를 묻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사정을 아룁니다. 그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울이 자신을 잡으려고 그일라 성읍을 파괴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도망자는 목숨을 걸고 그일라를 구원했는데 정작 왕은 자신을 잡기 위해 그일라를 파괴하러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는 사울이 그일라를 파괴하겠다고 포위하면 그일라 주민들이 자기를 사울의 손에 넘길 것인지 여부입니다. 둘째는 사울이 정말 소문대로 내려올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질문부터 대답해주십니다. ‘그가 내려올 것이다.’ 이에 다윗은 다시 첫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럼 그일라 주민들이 자신을 사울의 손에 넘길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넘길 것이라고 답해주십니다. 다윗이 그일라 주민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사울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넘기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공격하면, 그일라 주민들은 살기 위해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일라 주민들의 모습은 한편으로 매정하고 배은망덕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약자가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입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도망감(13-14)

하나님께서는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이루십니다. 또 그 일을 구하는 자에게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은 내비게이션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목적지로 정확하게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정확합니다.

 

13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4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13-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사울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넘기시지 않는 이상 다윗을 잡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1) 그일라에서 도망하는 다윗(13)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다윗은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그일라를 떠납니다. 동사 ‘일어나다’를 같이 사용하여 급하게 출발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도착하기 전에 무사히 탈출해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그일라를 떠나느라 다윗 일행은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였고, 그들은 사울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도움(14)

 

14절은 다윗 일행이 돌아다닌 곳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 일행은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들에서 거하였습니다. 이곳은 유다 광야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도망자들이 숨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이들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와서 매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화자의 해설은 7절에서 사울이 한 말과 반대되는 것으로 사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울은 현재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왕으로서의 임무보다는 자신의 정적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자신의 백성도 죽일 수 있는 잔인한 사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람도, 하나님도 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백성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왕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유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세워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에 헌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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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2-01)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된 다윗

사무엘상 22장 1-23절


 

권력이란 ‘절대반지’와 같아서 한 번 잡으면 절대 놓고 싶지 않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점차 괴물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지도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모든 권력의 주체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권력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권력을 통해 백성을 섬기라고 주신 도구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안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 도망간 곳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양식과 무기를 얻은 후 블레셋 성읍 가드로 도망합니다. 가드에서 사울을 피해서 용병으로 활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미 골리앗을 죽인 일로 다윗의 명성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하고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둘람 굴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만들게 됩니다.

 

도망 다니는 다윗(1-5)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반드시 승리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현재 어려움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사용하셔서 잠잠히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빚으시기 때문입니다.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1-5)

 

도망자 다윗에게 돕는 손길들이 몰려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1) 아둘람 굴(1-2)

 

블레셋 가드 성에서 도망 나온 다윗은 아둘람 굴로 갑니다. 이곳은 유다 평야 지역으로 벧세메스 남쪽, 가드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아둘람 굴로 도망하자 형제들과 가족들이 다윗에게 옵니다. 사울이 다윗만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 모두에게 칼끝을 겨누었기에 가족들 모두 다윗의 지지자로 다윗에게 모인 것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많은 약자들이 다윗에게 모였고, 다윗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환난 당한 자’는 심한 곤란을 겪는 자들이며, 사회적으로 하층민이거나 정치적으로 사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빚진 자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말하며 ‘마음이 원통한 자’는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주변인들이며 사울 왕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거나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며, 다윗을 지도자로 세우고 새 나라를 만들고 싶어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대략 사백 명 정도로 후에 이들은 다윗의 군사가 되어 늘 다윗과 함께 다닙니다.

 

(2) 모압 땅(3-4)

 

다윗은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것이 어려웠는지 모압 왕에게 가서 자신의 부모님이 모압에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모압 왕과 친분을 가지고 부모님을 부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의 증조할머니 룻이 모압 여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3) 헤렛 숲(5)

 

선지자 갓이 아둘람에 있는 다윗에게 찾아와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서 유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서 유다 땅에 있는 헤렛 숲으로 갔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한 사백 명의 군사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사울의 반대 세력으로 유다 땅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에돔 사람 도엑의 고발(6-10)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나고 부족한 부분들을 고난을 통해 다듬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한 인격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6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7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9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6-10)

 

믿음의 사람 다윗은 거룩한 목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몹시 불안해합니다. 다윗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끊이지 않는 불안과 지속적인 갈등은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입니다.

 

(1) 사울과 그의 신하들(6)

 

다윗이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유다 땅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사울이 듣습니다. 사울은 이때 기브아에서 에셀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고, 손에 단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단창은 사울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단창이라도 손에 들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 것입니다. 사울이 중요한 나무 아래 앉아 단창을 들고 있고, 신하들이 그의 곁에 서 있는 모습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무대장치입니다.

 

(2) 사울의 한탄과 비난(7-8)

 

7절에서 사울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다윗이 너희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며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울의 지지기반이자 사울의 측근들이 주로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이며, 사울은 자신의 신하들과 전사들에게 자신을 위해 싸운 대가로 밭과 포도원을 하사하고 관직도 수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새의 아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은 사실을 아무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런 처지를 슬퍼해 주는 사람도 없고, 요나단이 자신의 신하들을 매복시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진 이후부터 요나단도 다윗과 같이 자신에게 반역하는 인물로 간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말은 다윗에 대한 분노와 요나단과 자신의 신하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 도엑의 고발(9-10)

 

사울이 신하들을 혼내고 있을 때, 에돔 사람 도엑도 듣고 있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윗이 놉에 와서 아히멜렉을 찾아간 것과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을 위해 여호와께 물은 적이 없는데, 도엑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도엑이 이 말을 가장 먼저 함으로써 아히멜렉이 음식과 골리앗의 칼을 준 것도 다윗을 돕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놉 제사장 학살(11-23)

성도는 악인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경계하고 눈앞의 유혹에 혼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형통함과 성공을 자랑하는 악한 자들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선한 행위로 맞서야 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손해를 보는 것과 같아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11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4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6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17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8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20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21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2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11-23)

 

기브아의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광기 서린 눈빛으로 앉아 있는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더 큰 죄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1) 사울의 심문(11-13)

 

사울이 이 말을 듣자 당장 사람을 보내어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왜 다윗의 반역을 도왔느냐고 추궁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모르는 아히멜렉은 이런 사울의 질책에 매우 어리둥절하였습니다.

 

(2) 아히멜렉의 대답(14-15)

 

아히멜렉은 두 가지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다윗과 사울의 관계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왕의 사위이고 왕의 호위대장으로서 왕과 왕실에 매우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다윗에게 잘해준 것은 다윗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울과의 관계 때문에 사울에게 충성하는 마음에서 잘해준 것이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 묻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늘 해온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부분을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행동은 오직 왕을 위한 일이며,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고, 다윗의 반란이나 왕에게 위해가 될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자신과 자신의 집에 혐의를 두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히멜렉의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을 속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명령을 비밀리에 수행하러 온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아히멜렉이 다윗을 최대한 도운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를 의심한 사울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아히멜렉과 그의 모든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3) 제사장 학살(16-19)

 

사울은 군사들에게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아무리 여호와의 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왕에게 반역하고 반역자 다윗을 도왔다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논리는 왕정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옳을 수 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반역의 불씨가 될 사람들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제사장들을 여호와의 제사장이라고 반복해서 부르면서 사울이 자기 정권을 위해서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들도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하들이 제사장을 죽이지 않자 그는 에돔 사람 도엑에게 제사장을 죽이라고 시킵니다. 도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인이라 아무 거리낌 없이 제사장들을 죽였고 이렇게 죽인 자가 제사장만 85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성읍인 놉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젖먹이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까지 죽였습니다.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 종교의 중심지 성읍을 진멸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여호와께 전면전을 펼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에게 어떤 징조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완전히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4) 아비아달의 도주(20-23)

 

모든 성읍과 가족이 진멸당한 와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한 명인 아비아달이 도망쳐 다윗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인 일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도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에게 자신이 그곳에 들렀던 일이 알려질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설마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죄책감에 아비아달을 자신이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비극을 통해 여호와의 제사장이 다윗과 함께하게 되었고 이후에 다윗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점차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 갑니다. 에돔사람 도엑에게 고발을 듣고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 80명의 제사장과 그 성읍 주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도 이 명령에 복종하길 꺼려하고 있을 때, 도엑이 칼을 들었습니다. 사울의 광기는 결국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임으로 하나님과 전면전을 펼치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권력 집착하여 괴물로 변해 가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권력 유지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한 광기 어린 지도자는 바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도 권력에 집착하여 주변 사람들을 내몰고 공격함으로 결국 하나님께 대한 저항을 하는 자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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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1-01)


블레셋 땅으로 도피하는 다윗

사무엘상 21장 1-15절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요즘은 더 많은 위기 상황들이 주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위기는 그 나라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어떤 나라들은 위기 극복을 위한 의견들을 모으고 정책들을 수립하는가 하면, 또 어떤 나라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맞이하게 될 때 당황하며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실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요나단은 사울의 진노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윗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다윗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며 다윗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그는 이 결정이 자신의 미래를 불확실하고 어렵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일단 옳은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중심은 다윗에게로 넘어가며 다윗의 길고 긴 도피 생활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망감(1-6)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믿음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항상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데로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므로 승리해 가야 합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회복의 길입니다.

 

1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4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1-6)

 

다윗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사울 왕의 진심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그는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서 서둘러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도피처로 생각했던 첫 번째 장소는 바로 놉이라 곳이었습니다.

 

(1) 아히멜렉의 질문(1-2)

 

다윗은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놉’Nob에 있는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갑니다. 놉은 예루살렘 북쪽, 기브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엘리의 죽음 이후 이곳이 제사장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곳에 거주하였습니다. 놉은 실로의 성소가 파괴된 후 새로운 성소의 역할을 감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아히멜렉은 사울 당시 대제사장으로 사울의 제사장인 아히야의 형제로 소개됩니다. 다윗이 나타났을 때 아히멜렉은 떨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혼자서 예고도 없이 나타난 것에 대해 무슨 안 좋은 일로 온 것 아닌가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16장 4절에서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왔을 때 장로들이 보인 반응과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1)라고 정말 혼자 온 것인지 묻습니다.

사울의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다윗은 목을 점점 조여오고 있을 때,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를 찾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이 하나님께 자주 질문하며 주님의 뜻을 찾고 구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놉으로 간 것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주님이 임재하신 성소를 향했고 그것을 섬기고 있던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 아이멜렉의 질문에 다윗은 왕이 자신에게 명령하기를 왕이 보내는 것과 명령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자신의 병사들은 모처에 가 있으라고 지시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은밀함을 강조하기 위해 병사들이 모인 가상의 장소를 익명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자신이 비밀 임무를 맡고 온 것이라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입장에서 정황상 사울과 가까운 사람인 아히멜렉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2).

 

(2) 양식을 얻는 다윗(3-6)

 

다윗은 아무런 준비 없이 도망쳐 왔기 때문에 상당히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은 먹을 것이 있으면 떡 다섯 덩이나 혹은 있는 대로 달라고 요청합니다(3). 떡 다섯 덩어리는 혼자 먹기는 많은 양이고 많은 사람이 먹기는 적은 애매한 양이지만 다윗과 그의 종 서넛이 먹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요청에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일반 사람들이 일반 떡은 없고 거룩한 떡밖에 없다고 합니다. ‘거룩한 떡’은 진설병으로 불리는데, 성전에 7일 동안 성소에 진설되었다가 나온 떡, 진설병입니다. 모세의 제의법에 따르면, 그 떡은 오직 아론과 그의 자손인 제사장만 거룩한 장소에서 먹어야 했습니다(레 24:5-9).

하지만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일행이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상태인지를 묻습니다. 일행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않았으면 떡을 기꺼이 주겠다고 합니다(4). 남녀가 관계를 가지며 설정을 하게 되면 설정으로 인해 하루 동안 부정해집니다. 아히멜렉이 여자와 가까이 있는 것을 물은 것은 소년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상태인지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3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세속적인 일을 수행하러 다닐 때도 거룩성을 유지하는데, 하물며 거룩한 성소에 올 때는 당연히 거룩한 상태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소에 오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왔다는 말로 사울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아히멜렉은 안심하고 거룩한 떡을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준 떡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는 이유는 일반인이 먹어서는 안 되는 떡을 다윗에게 준 이유를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6).

이런 아히멜렉의 행동은 레위기 제사법을 분명히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사법보다 인간에 대한 자비심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하시면서 이 예를 들고 있습니다(마 12:3-4). 구약 본문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없는 것을 보면 아히멜렉의 행동을 크게 문제 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골리앗의 무기를 줌(7-9)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좋은 칼’이라고 해도 아직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힘이 없을 때, 때가 될 때까지 친히 보관해 두고 합당할 때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제 ‘좋은 칼’만 있으면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 가지고 함부로 놀다가 사람 다치게 할 위험을 아십니다. 아직은 미숙하기 때문에 우리 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숨겨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7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8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9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7-9)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루신 승리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승리의 기억을 붙잡고 살아갈 때 더 큰 믿음과 담대함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떨며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을 환대해 주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1) 사울의 신하 도엑(7)

 

다윗이 놉의 성소에 갔던 그때 마침 그곳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그는 에돕 사람인 도엑이라는 사람입니다. 에돕 사울의 군사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아마 사울의 신임이 깊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에돔 사람이라는 신분은 소개한 것은 뒤에, 그가 제사장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의 존재는 다윗의 도망과 아히멜렉의 운명에 불길한 느낌을 줍니다.

 

(2) 무기를 요구한 다윗(8-9)

 

다윗은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양식을 얻은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자신이 급하게 오느라 무기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곳에 칼이나 창 같은 무기가 있는지 묻습니다. 군인이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변명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칼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골리앗의 칼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에 칼집에서 꺼내 골리앗의 머리를 벤 그 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골리앗의 머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골리앗의 갑주는 다윗이 챙겨서 자신의 장막에 두었습니다. 그동안 골리앗의 칼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자기에 둘둘 감겨 에봇 뒤에 놓여 있다는 것은 골리앗의 칼을 블레셋에 대한 승리의 기념으로 성소에 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에봇에 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에봇 뒤에 있다는 것은, 이 에봇이 기드온이나 미가가 만든 것처럼 금이나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상처럼 세워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시대의 제사 제도나 성전 제도가 아직 완전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이방적인 요소들이 간간히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윗은 그 검처럼 좋은 검이 없다고 생각하고 갖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우연히 자신이 죽였던 장수의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연을 통해 다윗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칼을 시작으로 다윗은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얻어가게 됩니다.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하는 다윗(10-15)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왕국에 왕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며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수 있게 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10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10-15)

 

다윗은 쫓기는 몸으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지만, 이스라엘 땅의 왕의 모습으로 적들이 가득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성소가 있던 놉에서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에 이스라엘과 원수 관계 있었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1) 아기스의 신하들(10-11)

 

놉에서 양식과 무기를 얻은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성읍 중 하나인 가드로 도망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의탁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으로 지금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고향으로 간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선택에 대해 본문은 어떤 이유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의 이런 선택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블레셋 도시로 도망한 것은 블레셋에는 사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사울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다윗이 어디에 있든지 소식을 듣고 바로 잡으러 올 수 있기에 다윗은 블레셋 도시로 도망한 것입니다. 둘째,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늘 전쟁 중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울과 블레셋은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으며 자신을 받아주면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하면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이 공통의 적이 되기 때문에 둘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27장에서는 이 방법이 아기스에게 먹혔습니다. 셋째, 지정학적으로 가드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블레셋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가드는 서쪽으로 직선거리에 있어 고향 집과 연락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다윗이 가드의 아기스 왕을 선택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보자 골리앗과의 전투를 기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 부르며 추앙하던 다윗이라는 사실을 아기스 왕에게 알려줍니다.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게 하는 말을 들은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의탁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고 오히려 적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온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2) 다윗의 연기(12-13)

 

다윗은 아기스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략을 바꾸어 자신은 죽일 필요도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믿게 하기 위해 미친 척하며 성읍 사람들이 늘 다니는 성 문짝에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을 그리고 침을 흘리며 돌아다녔습니다.

 

(3) 아기스의 반응(14-15)

 

이런 다윗의 모습에 아기스는 다윗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고 미치광이를 자신에게 데려왔다며, 신하들에게 화를 내고 자신의 집에 다윗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이 찾은 첫 번째 망명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도망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는 다윗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도피처를 찾으려다 실패한 다윗을 통해서 우리는 싸움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일이나 일상적인 부분까지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과 선을 강조합니다. 진설병은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떡이었습니다. 제사장 말고 이 떡을 먹는 사람과 건너 준 사람은 모두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사울의 신하 도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윗에게 진설병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아히멜렉이 망명을 앞둔 다윗의 요구를 들어준 이유는 사울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권력이나 율법이 사람의 생명보다 앞설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당장 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앞에서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로 도움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움이 필요한 곤란한 처지에 있는 자를 돕는 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주의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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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0-02)


다윗의 도망길을 도와준 요나단

사무엘상 20장 24-42절


 

최근에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사건 소식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그 이유가 사회가 불안해서입니까? 혹시 기도와 성찰의 시간이 갖지 못할 정도로 너무 바빠서는 아닙니까?

 

  •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대신 자신과 자기 집안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며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다윗은 구체적으로 사울의 의도를 알아낸 후에 연락할 방법을 논의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대로 들어 숨고 초하루 잔치는 다윗 없이 시작됩니다.

 

월삭일 잔치에 참석지 않은 다윗(24-29)

성도들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결말은 끔찍합니다. 한 사람의 조절하지 못한 감정은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악하고 잔인하고 비정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진한 것과 선하고 순한 것은 다릅니다.

 

24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25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26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27이튿날 곧 그 달의 둘째 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 하니 28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29이르되 원하건대 나에게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령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내가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24-29)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매월 첫 일의 잔치인 월삭일 잔치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1) 첫째 날 잔치에서 다윗을 찾지 않는 사울(24-26)

 

요나단과 약속한 뒤에 다윗은 계획대로 들에 숨습니다. 초하루 잔치의 첫째 날, 사울은 평상시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었으며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었고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부재에 뭔가 찜찜했지만 왜 안 왔는지 묻지 않습니다. 다윗이 피치 못하게 정결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 잔치에 올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26절에서 ‘부정한가보다 참으로 부정한가 보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그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 둘째 날 잔치에서 다윗을 찾는 사울(27-29)

 

불안한 첫째 날을 보내고 잔치 둘째 날이 왔습니다. 초하루 잔치는 보통 3일 동안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3일 동안 숨어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날도 다윗의 자리가 비어 보이지 않자, 드디어 사울은 요나단에게 왜 다윗이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27). 여기서 사울은 다윗을 자기 사위로 부르지 않고, ‘이새의 아들’로 부르는데 이것은 다윗을 폄하할 때 사용하는 호칭으로 이후에도 사울은 다윗을 계속 이렇게 부릅니다. 이미 이 호칭에서 사울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울의 질문에 요나단은 다윗이 부탁한 대로 대답하지만 좀 더 설득력이 있기 위해 ‘제발’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다윗이 자신에게 매우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29절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안 나타나는데 ‘나에게 가게 하라’로 번역된 것도 원문에서는 ‘제발 나를 보내주십시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자신에게 제발 잔치에 빠지고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에 자신이 허락하였고, 그래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요나단은 과연 사이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사울(30-34)

우리의 삶은 항상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뜻대로 안 되는 일, 마음을 거슬리며 다가오는 일,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어쩌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다가와 한바탕 전쟁과 같은 일이 연속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이어가고, 말씀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합니다.

 

30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30-34)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요나단은 다윗에 대해 변호하는 태도에 섭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참석하지 않음과 요나단의 변호에 대해 불과 같이 화를 냅니다. 그러한 행동에 저주를 퍼붓는 것도 부족해서 아들을 향해 칼을 던졌습니다.

 

(1) 요나단을 책망하는 사울(30-31)

 

다윗이 다해 화를 내는 사울이 요나단의 말에 사울은 물같이 화를 냅니다. 요나단의 말을 들으면서 요나단이 자기 뜻을 어기고 다윗을 살려주기 위해서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말에 속지 않았고 본심을 완전히 드러냅니다. 사울은 요나단을 ‘반항적이고 삐뚤어진 여자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요나단의 어머니 아히노말을 욕보이는 표현이자 더 이상 요나단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요나단이 자신이 아니라 다윗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너와 너의 어머니에게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울의 말은 일견 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순간 사울의 집안과 요나단의 집안은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1절에서 사울은 다윗이 살아있는 한 너와 너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사울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요나단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좀 더 깊이 사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가 단순히 요나단을 걱정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도 하나의 핑계가 될 수 있지만, 사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당장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깊은 속마음은 숨기고 오직 너를 위한 아버지 마음을 모른다고 요나단을 비난하며 반드시 다윗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단은 다윗의 편을 들며 ‘다윗이 무슨 일을 했느냐?’며 아버지 사울에게 대듭니다. 본문에서 사흘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요나단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사울은 요나단을 버렸지만, 요나단은 사울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나단은 비록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더라도 죄 없는 다윗을 죽이는 일과 아버지가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을 옹호하며 자신에게 대드는 요나단의 모습에 사울은 더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다윗에게 던졌던 단창을 이번에는 요나단을 향해 던져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울은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악령이 임해 이성을 잃고 다윗을 죽이려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2) 요나단의 분노(32-34)

 

이런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요나단은 정말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고, 지난번처럼 자신이 아버지를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이제 요나단도 화를 내고 식탁에서 일어나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모욕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식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윗을 모욕했다는 것은 사울이 다윗에게 죄가 없는데도 죽이려 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요나단이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다윗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는 것은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에 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나단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갈등에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 것뿐입니다.

 

사울 왕을 피해 떠나는 다윗(35-42)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셨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성실히 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이 하나님과 동역해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작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런 작은 일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나단이 다윗과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전장에 나갔던 것입니다.

 

35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36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37아이가 요나단이 쏜 화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이르되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38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39그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40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읍으로 가라 하니 41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2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35-42)

 

사울의 단창을 피한 요나단은 사울의 의도를 확신합니다. 사전에 계획된 대로 다윗을 찾아가 탈출 신호를 보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 다윗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한 요나단(35-40)

 

사울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중 한 명을 데리고 약속한 장소에 나가서 활을 쏩니다. 요나단은 시종이 활을 줍기 위해서 먼저 달려 나가는 것을 보고 시종을 훌쩍 넘겨 시종의 앞쪽으로 활을 쏜 뒤 다윗과 약속한 대로 도망가라는 신호인 ‘앞쪽에 화살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또한 요나단은 시종 뒤에서 빨리 서둘러라 서 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에게 당장 도망가라는 말을 하면서 사태의 시급함을 알려주었습니다.

시종은 영문도 모른 채 주인의 명령대로 열심히 달려가 화살을 주워가시고 돌아왔습니다. 본문에서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다고 하여 둘만의 은밀한 신호가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신이 다윗과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며 다윗이 도망가는 길을 도와주었습니다.

 

(2) 다윗과 요나단의 작별 인사(41-42)

 

요나단은 다윗에게 신호를 보내 상황을 알린 뒤에 시종을 먼저 성읍으로 보내고 자신은 들에 남습니다. 다윗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시종을 먼저 보낸 것입니다. 시종이 사라지자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던 바위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신하가 왕을 만났을 때나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인사로 그동안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준 것과 자신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마지막 인사로 매우 정중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경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입 맞추고 작별 인사를 하며 울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더욱 심히 울었다고 말함으로 요나단과의 작별을 다윗이 더욱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별 장면은 룻기에서 오르바와 룻과 나오미의 이별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나단은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고 인사하면서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자손과 나의 자손 사이에 계시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요나단이 한 약속에 대한 영원한 증인이시라는 의미로 반드시 지켜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왕권을 포기하고 다윗을 지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목숨과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의 인간적인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요나단의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그의 아이들을 살리는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아버지의 정적인 다윗을 눈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무사히 사울의 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분노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은 다윗이 초하루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심리적 정치적 분야 상태를 엿보입니다. 요나단의 해명에 사울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런 사울이 요나단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도 부족해 칼을 던졌습니다. 분노로 인해 다윗이 아닌 이제 자기 아들을 향해서도 칼을 던집니다. 사울이 단창을 피한 요나단은 사울의 의도를 확신하고, 이제 사전에 계획된 대로 다윗을 찾아가 탈출 신호를 보냅니다. 결국 이러한 사울로 인해 요나단과 다윗은 헤어지고 함께 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분노는 결국 우리 주변의 모든 관계를 망치고 맙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분노에 휩싸여 소중하게 지켜야 할 관계는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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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0-01)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 요나단과 다윗

사무엘상 20장 1-23절


 

사랑하면 자신이 위에 서려는 갑보다, 섬기려고 을(乙)의 자리에 섭니다. 끝없이 주고 주어도 감사함을 느끼며,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만 주어도 고마워합니다. 언약적 관계에서 헤세드(인내)는 줌으로써 마음을 얻고, 받음으로써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최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요나단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의 계획이 이번에는 딸 미갈에 의해 실패하였고, 다윗은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로 도망갑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사람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려 했지만, 전령들이 모두 황홀경에 빠짐으로써 실패합니다. 이에 사울은 자신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라마 나욧으로 가지만, 그 또한 황홀경에 빠져 꼬박 하루 동안을 사무엘 앞에 있게 됩니다. 그 사이 다윗은 요나단에게로 도망갑니다.

 

요나단에게 하소연하는 다윗(1-4)

 

대책 없이 사람을 믿었다가 사람도 잃고, 일도 그르치는 것은 지혜가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죽음의 경계를 넘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생명을 위해 자기 죽음조차 감수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다윗에게 요나단은 오히려 은총을 구합니다.

 

1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2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3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4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1-4)

 

사울이 라마 나욧까지 찾아오자, 그곳에서 도망한 다윗은 믿을 만한 조력자인 요나단에게로 갑니다. 정말 위험한 행동입니다. 사울의 정보망이 잘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너희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하는가?’라고 반복적으로 질문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사무엘서에서 골리앗의 방자한 말 때문에 화를 낸 이후 처음입니다. 그동안 사울에게 당한 것을 꾹꾹 참았다가 드디어 터트린 것입니다.

이에 요나단은 다윗을 안심시키며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2). 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했다면, 그 의중을 미리 자신에게 이야기하실 것인데,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장 1절에서 있었던 일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울이 알고 있고, 또한 다윗의 죽음에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나단에게 알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다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 사실이라는 맹세까지 하면서 요나단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런 다윗의 말을 듣고서야 요나단은 다윗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다윗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사울의 계획을 알려달라고 부탁한 다윗(5-10)

하나님 앞에 선 신앙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정황만으로 충분히 확실할 만했지만, 끝까지 신중히 행해야 합니다. 선입견과 경솔한 속단으로 하나님께서 보배같이 여기시고, 기다리시는 지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5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6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7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8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9요나단이 이르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10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아버지께서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알리겠느냐 하더라(5-10)

 

요나단은 왕위에 관심을 두기보다 정의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사울과 그는 부자지간이지만, 그는 관계를 따르기보다 옳고 정의로운 일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역학관계로 따져도 다윗은 요나단에게 큰 걸림돌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절망에 빠진 다윗의 말을 경청하고 위로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자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줍니다. 내일이 초하루 잔치를 여는 날이기에 자신도 잔치에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자신은 들에 3일 동안 숨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묻거든 가족들과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곡하게 요청하여 보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좋게 여기면 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줄 알겠고, 그러지 않고 화를 내면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전에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갈 때 사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요나단의 종이라고 지칭하면서 18장 3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인자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사정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마지막으로 강하게 말합니다.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차라리 요나단의 손으로 죽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억울함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요나단도 알고 있습니다.

요나단도 아버지에게 다윗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다윗을 죽이지 말라고 설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다윗의 말을 들은 요나단은 결코 다윗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고, 만일 아버지께서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신다면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며, 자신이 이 일만은 반드시 막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요나단에게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다윗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울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만일 사울이 자신을 죽일 계획을 요나단이 자신에게 알리지 못하게 강압적으로 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모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요나단이 어떻게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 사울을 떠나야 할 때를 안 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살아서 무사히 사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단의 말의 허점을 지적하며 더 확실히 도망갈 방법을 모색하고 요나단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맹세(11-17)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못합니다. 사람 사이의 약속과 신의도 의지만으로는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세상에 흔히 맺는 관계와는 다릅니다. 영원불변의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는 언약은 그 자체로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큰 복입니다.

 

11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12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13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17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11-17)

 

다윗의 절박하고 매우 현실적인 말을 들은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들로 나가자고 제안합니다. ‘들’이라는 장소는 상대적으로 다윗에게 안전한 장소로 다윗이 숨기도 좋고 도망가기도 좋은 곳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좀 더 유리한 장소로 이동하며 분위기를 전환한 뒤에 자신의 계획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내일이나 모레 아버지의 의향을 살펴고 다윗을 죽이지 않을 것 같으면 반드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요나단은 수사의문문을 써서 자신의 결심의 확고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울이 다윗을 해치기로 결심했다면 반드시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여호와께 맹세합니다.

요나단이 여호와계 맹세까지 하면서 다윗을 살리겠다고 말하는 이의는, 13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걸쳐서 나옵니다. 13절 첫반절에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은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될 것을 자신도 알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버리고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신 사실을 알고, 이에 순종하기로 확고하게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태도는 이전과 다릅니다. 조금 전까지는 왕자로서 다윗을 살려주겠다고 말하였지만, 이제는 왕이 될 다윗에게 신하로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14절에서 그는 자신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까지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15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책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집은 영원히 끊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끊어버리다’는 가문을 완전히 멸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든지, 사울이 죽어서 왕이 되든지 만일 다윗이 왕이 되면 왕자인 요나단과 그의 집안은 정치적으로 볼 때 제거 영순위가 되기에 온 집안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후에 사울 가문은 요나단의 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죽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요나단은 다윗에게 왕이 된 후에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한 요나단은 사울의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갈 때, 자신의 아들과 집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요청에 다윗은 요나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을 위해 ‘여호와께서 다윗의 원수를 치실지어다’라는 축복을 해줍니다.

17절은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이 자신의 집안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축원해주고 살려주려고 애쓰는 이유를 다시 설명합니다. 다윗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실한 애정과 충성심 때문에 후에 다윗은 요나단에 대해 여인의 사랑보다 더 낫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둘 사이의 신호를 정함(18-23)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면 만나는 관계는 상황에 따라 깨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인간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의 관계는 감정과 조건을 넘어서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로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18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19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20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 21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2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18-23)

 

성도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보내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볍게 약속하고 성황이 여의치 않으면 쉽게 말을 바꿉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중하게 말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1) 사흘간 숨어 있기(18-19)

 

모든 언약을 마친 후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울의 결심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지를 의논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들의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하면서 자신이 화살을 쏘아서 종에게 화살이 종의 이쪽에 있다고 하면 평안히 돌아와도 되고, 만일 종의 앞쪽에 있다고 말하면 네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이전에 블레셋 사람과의 전투에서 여호와의 뜻을 분별했던 방법을 여기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다윗의 앞길을 인도하시는지 보려고 한 것입니다. 약속한 후에는 이것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미로 여호와를 자신과 다윗 사이의 증인으로 세운다.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는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단은 끝까지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하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2) 화살 신호(20-23)

 

전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맹세와 언약, 죽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상황이 매우 비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고, 요나단도 아버지와 자신과 집안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요나단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기에 더욱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하나님의 인자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온라인의 발전을 통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도 인간관계들이 확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넓어진 만큼 깊어지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한 관계들은 더욱 우정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약화 되고 있습니다. 진실한 우정은 두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신뢰를 갖고 위기를 함께 이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돌아보길 원합니다.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단순히 많은 관계를 확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교제하는 귀한 동역자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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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9-02)


다윗을 죽이려 한 살의가 가득한  사울

사무엘상 19장 8-24절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질투가 증오심으로 발전하도록 방치할 때, 심각한 사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내면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상대를 향한 미움이 속임수와 거짓말, 이성의 마비를 넘어 광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사울은 다윗의 승승장구에 두려움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한편으로는 다윗에게 숨어 있으라고 조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합리적이고 간곡한 설득에 이성을 차리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그에게 악신이 임해 이성을 잃으면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창을 던진 사울(8-10)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질, 성공 또는 소유물 등에 집착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감정과 깊고 깊은 불만이 내재되어 있는 셈입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분노는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연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8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9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8-10)

 

사울이 다윗에 대한 맹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또 크게 공을 세우자, 사울은 다시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그 자체로 악령입니다.

 

(1) 다윗의 공적(8)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던 때에 다시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다윗은 군대장관으로서 전투에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크게 이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대신하여 전쟁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승리는 간신히 눌러두었던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크게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다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다윗을 위해 승전가를 불러주었고, 사울은 그 소리에 매우 불쾌해합니다.

 

(2) 다윗을 다시 죽이려는 사울(9-10)

 

사울은 자신의 집에 있고 자신의 단창을 손에 들고 있었으며, 다윗은 손에 수금을 들고 사울에게 연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여호와의 악령이 임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벽에 박기 위해 창을 던졌습니다. 이 구문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단창을 던진 것은 악령이 임한 후의 일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울은 자신이 한 맹세를 어기고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진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행동을 모두 여호와의 악령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습니다. 사울은 이미 자신의 집에서 심신의 안정을 주기 위해 무방비상태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보면서 손에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또다시 승전하고 온 다윗을 보면서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민하던 차에 악령이 임하자 사울은 정신을 놓고 다윗에게 창을 던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의 의지로 한 것이며 자신의 맹세를 어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사울이 창을 던졌지만, 다윗을 맞추지 못하였고, 다윗은 그 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도망시킴(11-17)

상황이 변했을 때 의리의 맹세는 쉽게 깨어집니다. 그럴수록 자기희생이 주목됩니다. 세월의 흐름에 닳아버리는 인간의 언약함을 인정하고 약속에 자신을 묶습니다. 실패한 일에 대한 집요한 시도가 굳은 의지를 반영하는가, 아니면 꺾지 않은 고집을 반영하였습니까?

 

11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12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13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14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15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6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7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11-17)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계획을 ‘참된 말’로 설득하여 가로막더니, 이번에는 딸 미갈이 ‘거짓말’로 아버지의 계획을 실패하도록 만듭니다. 사울은 병적인 분노와 탐심 때문에 자녀들과의 관계를 잃고, 원하는 것을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합니다.

 

(1) 창문으로 도주(11-12)

 

사울은 도망한 다윗을 잡기 위해 전령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냅니다. 실제로는 다윗을 죽일 병사들을 보낸 것입니다. 11절 이하에서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보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는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단순히 악령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전령들로 하여금 다윗의 집을 포위하고 밤새워 지키다가 아침에 다윗이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미갈은 다윗에게 이런 위험한 상황을 전하며 창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다윗은 그 길로 멀리 도망갑니다. 집에 남은 미갈은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우상, 즉 드라밤을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머리카락을 만들고 옷을 입혀 다윗이 자고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미갈은 사울이 보낸 전령들에게 다윗이 병들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것이 참인지 확인해보라고 다시 전령을 보내고 만일 병든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죽일 것이니 침상째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명령받은 전령들이 집에 들어가 확인하니 누워 있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미갈이 꾸며놓은 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미갈은 기지를 발휘하여 다윗이 자기 아버지 손에서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미갈을 보고 사울은 화를 내며 어떻게 자신을 속여 자신의 원수를 도망가게 했느냐고 야단칩니다.

 

(2) 미갈의 속임수(13-17)

 

본문은 미갈에 대해 사울의 딸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11절에서 미갈을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 속에서 미갈은 사울의 딸이 아닌 오직 다윗의 아내로서 행동하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사울은 미갈이 자신의 딸로서 행동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데, 이는 다윗이 자신의 딸 미갈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는 사울에게 미갈은 다윗이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비록 자신의 의지대로 도망가게 하였지만, 아버지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미갈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마나욧으로 전령을 보낸 사울(18-24)

인간은 권력을 잡는데는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바꾸는데는 유능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권력이 다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권력은 위임 받은 권력일 뿐입니다. 아무도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그 권력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18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18-24)

 

다윗은 자기 집에서 도망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과 함께 거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시 군사들을 보내어 그를 잡으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여 다윗 체포 의지를 꺾었습니다.

 

(1) 라마로 간 다윗(18)

 

사울에게서 도망한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갑니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다음 왕이 될 것을 알려준 선지자로 당장엔 그가 의지할 이는 사무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도움을 받으려고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말을 들은 사무엘은 다윗을 데리고 라마 근처의 거주지(나욧)로 데리고 가서 숨어 살게 해주었습니다.

 

(2) 부하들을 보내는 사울(19-21)

 

하지만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사실이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사울은 나중에도 다윗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정보는 늘 들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사람들을 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아내자 사울은 바로 다윗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전령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전령들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나욧에 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령들이 예언하는 선지자 무리와 그들을 지도하는 사무엘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 채 황홀경 혹은 광란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의식이 분명하고 자신에 대한 조절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령들의 상태는 일반적인 예언의 상태가 아닌 비정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이전에 10장에서 사울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이런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전령들은 황홀경에 빠져 더 이상 사울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또다시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그러자 사울은 또다시 전령을 보내지만, 그들도 이전 전령들과 마찬가지로 사무엘의 근처에만 가면 하나님의 영을 받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즉, 사울이 보내는 사람들을 사무엘이 모두 무력화한 것입니다.

 

(3) 직접 찾아간 사울(22-24)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자신도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예언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윗을 잡기 위해 나섭니다.

 

사울은 라마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는데, 아마도 이곳은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 라마로 왔을 때, 세 명의 젊은 여자들이 사무엘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다시 이곳에 왔고, 여기서 다시 사무엘이 어디 있는지를 묻습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행동을 하는 사울의 모습을 통해 사울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울은 결국 라마나욧으로 가게 되었는데 전령들과는 다르게 라마나욧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고, 거기서부터 황홀경에 빠져 라마나욧까지 가게 됩니다.

 

24절에서 사울이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가 수치심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이성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10장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는 비록 같은 황홀경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힘을 느끼고 새로운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왕으로서 희망을 가진 상태였다면, 지금은 실성한 사람처럼 추해 보입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이성을 잃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현재 사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실성한 모습으로 하루를 지내는 동안 다윗은 다시 라마에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하나님의 영으로 사로잡아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만, 나중에는 마비가 되어 수치를 잊게 합니다. 사울의 모습은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이 다른 사람을 파괴 시키는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투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증오심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증오심을 방치하면 그것에 지배받게 됩니다. 사람을 향한 미움이 극에 달하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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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9-01)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

사무엘상 19장 1-7절


 

동역자를 경쟁자로 여기기 시작하면 관계가 꼬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품고 갔다면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경쟁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때 동역자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경쟁심을 넘어서게 만드는 저력은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미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베어 오라고 명령하지만, 다윗은 이 명령을 두 배로 수행하였고 결국 미갈과 결혼하여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세웁니다. 그리고 사울을 대신하여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을 때마다 나가서 많은 공로를 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정보를 줌(1-3)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을 질투와 미움이 자라면 모든 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나중 결과적으로 미움이 살인까지 자랍니다. 그러나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2:6).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보다 사명이기에, 나의 유일한 경쟁자는 사명을 멸시하고 자리와 권력을 탐하는 나 자신뿐입니다.

 

1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2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1-3)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께 왕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은밀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들이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정식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1) 사울의 명령(1a)

 

사울은 겉으로는 다윗을 대우해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속으로는 다윗을 은밀하게 죽이기 위해서 매우 골몰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갈의 신부값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요구했지만, 다윗은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요구한 것의 두 배로 성취하여 미갈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의 입지는 점점 탄탄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다윗을 죽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사울은 이제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여기서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신하들은 사울이 가장 신뢰한 인물들입니다.

사울의 머릿속에는 오직 다윗에 대한 두려움과 그러므로 다윗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였을 때, 자신의 딸 미갈이 받을 상처와 백성들로부터 받을 비난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받을 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서 다윗을 제거하고 왕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지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된 것입니다.

 

(2) 다윗에게 말하는 요나단(1b-3)

 

사울이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이 명령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도와주십니다.

본문에서 요나단을 사울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과는 달리 다윗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을 ‘기뻐한다’고 표현한 것은 18:22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거기서는 사울이 다윗을 기뻐하는 것처럼 말하라고 속이는 상황에서 사용했지만, 이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요나단이 다윗을 기뻐한다고 표현하여 사울과 요나단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믿고 다윗 제거 명령을 하였는데, 요나단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이 사실을 즉시 다윗에게 알려줍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찾고 있으니 아침에 조심하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로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기꺼이 위험을 감사고 그의 편이 되어준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3)라고 자신이 다윗을 위해 어떻게 움직일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여기서 ‘나는’이라는 대명사와 ‘나의 아버지’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을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편에 있는 것처럼 아버지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윗에게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윗의 갈등 상황에서 아버지인 사울보다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과 다윗 사이를 중재함(4-7)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손익을 따지지 않고 상대를 위해 기쁨으로 희생을 자처합니다. 들어야 할 말이라면 아프더라도 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심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나의 사심 없고 두려움 없는 노력과 기도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4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7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4-7)

 

사울은 요나단의 말에 설득당하여 잠시 분노를 잠재웁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한 맹세를 잘 지켰는데, 과연 이들 요나단을 죽이면서까지 자기 맹세를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사울이 이번 명세는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1) 사울에게 말하는 요나단(4-5)

 

요나단은 다윗에게는 조심하라고 말한 뒤에 사울에게 가서 다윗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행위임을 말해줍니다. 다윗을 ‘왕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다윗이 죽여야 할 원수가 아니라 사울의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 이유가 첫째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구하는 선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왕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다윗을 죽이는 일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고 오히려 왕이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 선한 일을 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 골리앗을 죽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최대 업적인 골리앗과의 전투를 언급하면서 아무도 골리앗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상황에서 다윗 혼자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고 상기시킵니다.

요나단은 여기서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는 것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목숨 걸고 나서지 않았다면 여호와의 구원도 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왕도 이것을 기뻐하셨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사울과 온 이스라엘을 구원한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결정적으로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는 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살인죄인데, 왜 이것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묻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요나단의 간곡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2) 취소된 명령(6-7)

 

여기서 요나단의 입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사울이 죽으면 다음 왕위를 자연스럽게 이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왕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 다윗을 좋게 볼 수 없고, 사울처럼 요나단도 다윗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당연한 마음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모르는 척 눈감으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다윗을 제거하고 자신이 다음 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4장의 전투에서 보듯이 요나단은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진 신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권력이나 욕망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과 죄 없는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사울에게 강조했습니다. 그에게는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다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윗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다윗을 사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이 올라가야 할 왕좌에 다윗이 올라가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를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시는 분도 오직 여호와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요나단의 논리적이고 간절한 요청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사울의 이 맹세는 이 시점에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장의 금식 맹세와 금식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의 맹세에서 사울은 맹세를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고 일차적으로는 그 맹세를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사울이 두 번 다 맹세를 지키지 않았는데, 14장의 맹세는 백성들이 말렸기 때문이고 19장의 맹세는 그가 악신에 사로잡혀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울이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첫 번째 계획은 아들 요나단의 간곡한 만류로 실천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 요나단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는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나단은 직접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가서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킵니다. 다윗은 전과 같이 사울의 신하로, 그리고 궁중 악사로 사울을 섬기게 됩니다. 이렇게 순조롭게 일이 일단락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8장 29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평생 원수로 여겼다는 표현에서 사울과 다윗의 화해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본문은 다윗보다 사울과 요나단의 대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므로 자신의 욕망대로 살려는 사울과 자신의 욕망이나 출세보다는 자신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요나단의 신실한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만, 나중에는 마비가 되어 수치를 잊게 합니다. 본문에 사울의 모습은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은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투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증오심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증오심을 방치하면 그것에 지배받게 됩니다. 사람을 향한 미음이 극에 달하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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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8-02)


결혼 미끼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사무엘상 18장 17-30절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과 화합하며 살아간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실상은 그러지 못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고, 얼굴도 보기도 싫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도 싫습니다. 잠언에서는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언 14:30)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키려 합니다.

 

  •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먼저 자신의 큰딸 메랍을 다윗과 결혼시키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메랍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딸 미갈이 다윗과 결혼하게 되는데, 사울은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오라 명했습니다. 이것은 왕의 사위라는 신분을 내걸고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당하도록 만들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사울의 첫 딸 메랍과의 결혼 약속(17-19)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인간의 계책과 술수는 종국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사울의 미끼 결혼 전략이 대표적 예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적인 계책과 술수에만 집착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인간적인 대책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7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19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17-19)

 

다윗이 골리앗을 승리하자, 사울은 다윗을 수금 타는 역할이나 자신의 무기를 드는 역할만 하지 말고, 그를 국가의 국방을 맡은 장수로 임명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다윗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주의 영이 임했기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

 

(1) 사울의 첫째 제안(17)

 

다윗이 점점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는 것을 본 사울은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결정에 절대로 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적대자 역할을 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큰 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대신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어 블레셋과의 여호와의 전쟁을 싸워달라고 부탁합니다(17). 여기서 사울은 자신을 대신해서 싸우는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왕이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울이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한 것은 다윗을 옭아매기 위한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하면 하나님께 신실한 다윗이 거절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사울의 속내를 알려줍니다. 겉으로는 다윗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무서운 음모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 자기 손이 아닌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속내를 알려줌으로써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 딸과 여호와까지 이용하려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비정하고 비열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법과 거짓말과 무정함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2) 다윗의 반응(18)

 

그러나 다행이도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은 그럴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거절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딸 메랍을 이용해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겸손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주신 지혜로 사울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자신이 받을 것 외에 그 이상을 구하지 않는 것이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3) 메랍의 상황(19)

 

사울이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한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의 아내로 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울이 딸의 결혼을 미리 내정해놓은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메랍을 이용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 가족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 점점 더 비인간적이 되고 악해져 갔습니다.

 

미갈과 결혼(20-28)

세상에서 가장 잘 속는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직하고 겸손하며 자기 과시가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을 실수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뒷걸음질이나 거룩한 소극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위기에서 건지는 계기가 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기는 길은 이 세상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강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20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21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더라 22다윗이 자기의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23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2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7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20-27)

 

정직한 다윗은 악인의 간계를 비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자기 가족도 자신의 목적을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가련한 아버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떠나고 나서 점점 더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1) 사울의 둘째 제안(20-22)

 

20절에서 갑자기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애쓸 때 이들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사울은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이유는 21절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울의 속마음을 우리에게 전부 알려줌으로써 그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골몰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사울은 자신의 딸 미갈을 다윗을 잡을 덫으로 이용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녀를 이용해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큰딸 메랍 때 실패한 계획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다시 한번 자기 사위가 되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사울은 의도적으로 두 번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다윗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2) 신부 몸값 협상(23-25)

 

사울은 이번에는 다윗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행동들을 합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은밀하게 다윗을 만나 다윗이 사위가 될 수 있도록 설득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울 왕도 너를 기뻐하고 왕의 신하들도 너를 사랑하니 이번에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난번 메랍 때 자신의 자격이 부족하여 왕의 사위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이를 미리 막기 위해 왕도 신하도 다윗이 사위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빠져나갈 수 없게 미리 전략을 짰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말을 그대로 다윗에게 전달합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거절하는데,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은 가볍게 취급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처럼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중히 거절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가난하다는 말은 사울에게 신부값을 지불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윗의 말이 그대로 사울에게 전달되었을 때, 사울은 신부값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다윗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다윗이 걱정하는 신부값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고 미갈은 공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풍습상 상당한 액수의 신부값을 다윗이 지불 해야 하는데 물질로는 신부값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왕의 원수에 대해 보복해주는 의미에서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를 가져오라는 것은 그들을 죽여서 그 죽인 증표를 가져오라는 의미로, 블레셋 사용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피가 블레셋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사울은 반드시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기 위해서 이 본문에서 이 구문이 벌써 세 번째 반복되는데,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정말로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3) 몸값 지불(26-27a)

 

사울의 말을 다윗에게 전하자 마치 20절에서 사울의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좋게 여긴 것처럼 다윗은 이 일을 좋게 여겼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덫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좋게 여겼었는데, 26절에서 다윗이 좋게 여기므로 사울의 덫에 빠진 것처로 보입니다.

사울은 아마도 자신이 쳐놓은 덫에 다윗이 빠졌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사울의 일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사울에게 가져왔습니다. 사울이 원한 숫자의 두 배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에게는 사울의 덫이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못하고 약속대로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의 일원이 됨으로써 왕권에 한 걸음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후(28-30)

경쟁과 시기로 가득찬 사람은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점점 더 험악해지면서 사람의 목숨까지도 쉽게 생각하는 악행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평안함과 형통함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다윗은 사울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형통함을 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9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30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28-30)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갈도 그를 사랑하고, 사울의 모든 신하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합니다.

 

(1) 사울의 태도(28-29)

 

본문은 이 이후의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요약한 부분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리지 않고 형통한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윗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대조를 통해 사울이 점점 고립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고립감으로 사울은 더욱더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남은 평생 다윗을 원수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2) 다윗의 명성(30)

 

이렇듯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과는 달리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일어나면 사울의 신하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싸우고 승리를 이루어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다윗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고 사람들은 다윗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다’라는 표현은 명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이제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다윗을 좋아하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누군가가 길을 막으려 하고 비난하며 용기를 꺾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여시고 계획하신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다윗을 닮았는지, 아니면 그런 다윗을 보면서 질투에 사로잡혀 그를 비난하고 해하려 하는 사울의 모습을 닮았는지 늘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열등감과 증오심은 비극을 불러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납니다. 오히려 사울은 자기 딸 미가를 다윗에게 주게 되었고, 미갈까지도 다윗을 사랑하게 됩니다. 악한 계획은 아무리 완벽하고 지혜롭게 보일지라도 결과는 실패입니다. 사울처럼 열등감에 사로 잡히며 주변 사람들의 경쟁자로 보이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가까운 사람마저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을 인전하고 세워지는 사람이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깨닫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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