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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9-02)


다윗을 죽이려 한 살의가 가득한  사울

사무엘상 19장 8-24절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질투가 증오심으로 발전하도록 방치할 때, 심각한 사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내면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상대를 향한 미움이 속임수와 거짓말, 이성의 마비를 넘어 광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사울은 다윗의 승승장구에 두려움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한편으로는 다윗에게 숨어 있으라고 조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합리적이고 간곡한 설득에 이성을 차리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그에게 악신이 임해 이성을 잃으면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창을 던진 사울(8-10)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질, 성공 또는 소유물 등에 집착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감정과 깊고 깊은 불만이 내재되어 있는 셈입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분노는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연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8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9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8-10)

 

사울이 다윗에 대한 맹세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또 크게 공을 세우자, 사울은 다시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그 자체로 악령입니다.

 

(1) 다윗의 공적(8)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던 때에 다시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다윗은 군대장관으로서 전투에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크게 이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대신하여 전쟁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승리는 간신히 눌러두었던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크게 승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다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다윗을 위해 승전가를 불러주었고, 사울은 그 소리에 매우 불쾌해합니다.

 

(2) 다윗을 다시 죽이려는 사울(9-10)

 

사울은 자신의 집에 있고 자신의 단창을 손에 들고 있었으며, 다윗은 손에 수금을 들고 사울에게 연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여호와의 악령이 임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벽에 박기 위해 창을 던졌습니다. 이 구문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단창을 던진 것은 악령이 임한 후의 일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울은 자신이 한 맹세를 어기고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진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행동을 모두 여호와의 악령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습니다. 사울은 이미 자신의 집에서 심신의 안정을 주기 위해 무방비상태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보면서 손에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또다시 승전하고 온 다윗을 보면서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민하던 차에 악령이 임하자 사울은 정신을 놓고 다윗에게 창을 던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의 의지로 한 것이며 자신의 맹세를 어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사울이 창을 던졌지만, 다윗을 맞추지 못하였고, 다윗은 그 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도망시킴(11-17)

상황이 변했을 때 의리의 맹세는 쉽게 깨어집니다. 그럴수록 자기희생이 주목됩니다. 세월의 흐름에 닳아버리는 인간의 언약함을 인정하고 약속에 자신을 묶습니다. 실패한 일에 대한 집요한 시도가 굳은 의지를 반영하는가, 아니면 꺾지 않은 고집을 반영하였습니까?

 

11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12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13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14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15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6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7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11-17)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계획을 ‘참된 말’로 설득하여 가로막더니, 이번에는 딸 미갈이 ‘거짓말’로 아버지의 계획을 실패하도록 만듭니다. 사울은 병적인 분노와 탐심 때문에 자녀들과의 관계를 잃고, 원하는 것을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합니다.

 

(1) 창문으로 도주(11-12)

 

사울은 도망한 다윗을 잡기 위해 전령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냅니다. 실제로는 다윗을 죽일 병사들을 보낸 것입니다. 11절 이하에서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을 보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는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단순히 악령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전령들로 하여금 다윗의 집을 포위하고 밤새워 지키다가 아침에 다윗이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미갈은 다윗에게 이런 위험한 상황을 전하며 창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다윗은 그 길로 멀리 도망갑니다. 집에 남은 미갈은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우상, 즉 드라밤을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머리카락을 만들고 옷을 입혀 다윗이 자고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미갈은 사울이 보낸 전령들에게 다윗이 병들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것이 참인지 확인해보라고 다시 전령을 보내고 만일 병든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죽일 것이니 침상째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명령받은 전령들이 집에 들어가 확인하니 누워 있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미갈이 꾸며놓은 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미갈은 기지를 발휘하여 다윗이 자기 아버지 손에서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미갈을 보고 사울은 화를 내며 어떻게 자신을 속여 자신의 원수를 도망가게 했느냐고 야단칩니다.

 

(2) 미갈의 속임수(13-17)

 

본문은 미갈에 대해 사울의 딸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11절에서 미갈을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 속에서 미갈은 사울의 딸이 아닌 오직 다윗의 아내로서 행동하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사울은 미갈이 자신의 딸로서 행동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데, 이는 다윗이 자신의 딸 미갈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화를 내는 사울에게 미갈은 다윗이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비록 자신의 의지대로 도망가게 하였지만, 아버지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미갈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마나욧으로 전령을 보낸 사울(18-24)

인간은 권력을 잡는데는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바꾸는데는 유능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권력이 다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권력은 위임 받은 권력일 뿐입니다. 아무도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그 권력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18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18-24)

 

다윗은 자기 집에서 도망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과 함께 거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시 군사들을 보내어 그를 잡으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여 다윗 체포 의지를 꺾었습니다.

 

(1) 라마로 간 다윗(18)

 

사울에게서 도망한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갑니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다음 왕이 될 것을 알려준 선지자로 당장엔 그가 의지할 이는 사무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도움을 받으려고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말을 들은 사무엘은 다윗을 데리고 라마 근처의 거주지(나욧)로 데리고 가서 숨어 살게 해주었습니다.

 

(2) 부하들을 보내는 사울(19-21)

 

하지만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사실이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사울은 나중에도 다윗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정보는 늘 들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사람들을 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아내자 사울은 바로 다윗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전령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전령들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나욧에 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령들이 예언하는 선지자 무리와 그들을 지도하는 사무엘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 채 황홀경 혹은 광란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의식이 분명하고 자신에 대한 조절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령들의 상태는 일반적인 예언의 상태가 아닌 비정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이전에 10장에서 사울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이런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전령들은 황홀경에 빠져 더 이상 사울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윗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또다시 사울에게 전해집니다. 그러자 사울은 또다시 전령을 보내지만, 그들도 이전 전령들과 마찬가지로 사무엘의 근처에만 가면 하나님의 영을 받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즉, 사울이 보내는 사람들을 사무엘이 모두 무력화한 것입니다.

 

(3) 직접 찾아간 사울(22-24)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자신도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예언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윗을 잡기 위해 나섭니다.

 

사울은 라마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는데, 아마도 이곳은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 라마로 왔을 때, 세 명의 젊은 여자들이 사무엘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다시 이곳에 왔고, 여기서 다시 사무엘이 어디 있는지를 묻습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행동을 하는 사울의 모습을 통해 사울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울은 결국 라마나욧으로 가게 되었는데 전령들과는 다르게 라마나욧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고, 거기서부터 황홀경에 빠져 라마나욧까지 가게 됩니다.

 

24절에서 사울이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가 수치심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이성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10장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는 비록 같은 황홀경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힘을 느끼고 새로운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왕으로서 희망을 가진 상태였다면, 지금은 실성한 사람처럼 추해 보입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이성을 잃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현재 사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실성한 모습으로 하루를 지내는 동안 다윗은 다시 라마에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하나님의 영으로 사로잡아 다윗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신 것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만, 나중에는 마비가 되어 수치를 잊게 합니다. 사울의 모습은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이 다른 사람을 파괴 시키는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투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증오심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증오심을 방치하면 그것에 지배받게 됩니다. 사람을 향한 미움이 극에 달하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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