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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9-01)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

사무엘상 19장 1-7절


 

동역자를 경쟁자로 여기기 시작하면 관계가 꼬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품고 갔다면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경쟁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때 동역자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경쟁심을 넘어서게 만드는 저력은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미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베어 오라고 명령하지만, 다윗은 이 명령을 두 배로 수행하였고 결국 미갈과 결혼하여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세웁니다. 그리고 사울을 대신하여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을 때마다 나가서 많은 공로를 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정보를 줌(1-3)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을 질투와 미움이 자라면 모든 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나중 결과적으로 미움이 살인까지 자랍니다. 그러나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2:6).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보다 사명이기에, 나의 유일한 경쟁자는 사명을 멸시하고 자리와 권력을 탐하는 나 자신뿐입니다.

 

1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2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1-3)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께 왕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은밀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들이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정식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1) 사울의 명령(1a)

 

사울은 겉으로는 다윗을 대우해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속으로는 다윗을 은밀하게 죽이기 위해서 매우 골몰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갈의 신부값으로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요구했지만, 다윗은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요구한 것의 두 배로 성취하여 미갈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의 입지는 점점 탄탄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다윗을 죽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사울은 이제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여기서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신하들은 사울이 가장 신뢰한 인물들입니다.

사울의 머릿속에는 오직 다윗에 대한 두려움과 그러므로 다윗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였을 때, 자신의 딸 미갈이 받을 상처와 백성들로부터 받을 비난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받을 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서 다윗을 제거하고 왕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지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된 것입니다.

 

(2) 다윗에게 말하는 요나단(1b-3)

 

사울이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이 명령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도와주십니다.

본문에서 요나단을 사울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과는 달리 다윗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을 ‘기뻐한다’고 표현한 것은 18:22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거기서는 사울이 다윗을 기뻐하는 것처럼 말하라고 속이는 상황에서 사용했지만, 이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요나단이 다윗을 기뻐한다고 표현하여 사울과 요나단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믿고 다윗 제거 명령을 하였는데, 요나단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이 사실을 즉시 다윗에게 알려줍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찾고 있으니 아침에 조심하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로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기꺼이 위험을 감사고 그의 편이 되어준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3)라고 자신이 다윗을 위해 어떻게 움직일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여기서 ‘나는’이라는 대명사와 ‘나의 아버지’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은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을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편에 있는 것처럼 아버지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윗에게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윗의 갈등 상황에서 아버지인 사울보다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과 다윗 사이를 중재함(4-7)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손익을 따지지 않고 상대를 위해 기쁨으로 희생을 자처합니다. 들어야 할 말이라면 아프더라도 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심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나의 사심 없고 두려움 없는 노력과 기도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4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7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4-7)

 

사울은 요나단의 말에 설득당하여 잠시 분노를 잠재웁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한 맹세를 잘 지켰는데, 과연 이들 요나단을 죽이면서까지 자기 맹세를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사울이 이번 명세는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1) 사울에게 말하는 요나단(4-5)

 

요나단은 다윗에게는 조심하라고 말한 뒤에 사울에게 가서 다윗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행위임을 말해줍니다. 다윗을 ‘왕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다윗이 죽여야 할 원수가 아니라 사울의 충성스러운 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 이유가 첫째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구하는 선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왕에게 죄를 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다윗을 죽이는 일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이고 오히려 왕이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 선한 일을 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 골리앗을 죽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최대 업적인 골리앗과의 전투를 언급하면서 아무도 골리앗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상황에서 다윗 혼자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고 상기시킵니다.

요나단은 여기서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는 것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목숨 걸고 나서지 않았다면 여호와의 구원도 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왕도 이것을 기뻐하셨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사울과 온 이스라엘을 구원한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결정적으로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는 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살인죄인데, 왜 이것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묻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요나단의 간곡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2) 취소된 명령(6-7)

 

여기서 요나단의 입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사울이 죽으면 다음 왕위를 자연스럽게 이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왕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 다윗을 좋게 볼 수 없고, 사울처럼 요나단도 다윗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당연한 마음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모르는 척 눈감으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다윗을 제거하고 자신이 다음 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4장의 전투에서 보듯이 요나단은 다윗과 같이 여호와를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가진 신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권력이나 욕망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과 죄 없는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사울에게 강조했습니다. 그에게는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다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윗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다윗을 사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이 올라가야 할 왕좌에 다윗이 올라가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를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시는 분도 오직 여호와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요나단의 논리적이고 간절한 요청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사울의 이 맹세는 이 시점에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장의 금식 맹세와 금식을 어긴 자에 대한 처벌의 맹세에서 사울은 맹세를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고 일차적으로는 그 맹세를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사울이 두 번 다 맹세를 지키지 않았는데, 14장의 맹세는 백성들이 말렸기 때문이고 19장의 맹세는 그가 악신에 사로잡혀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울이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 첫 번째 계획은 아들 요나단의 간곡한 만류로 실천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한 요나단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는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나단은 직접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가서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킵니다. 다윗은 전과 같이 사울의 신하로, 그리고 궁중 악사로 사울을 섬기게 됩니다. 이렇게 순조롭게 일이 일단락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8장 29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평생 원수로 여겼다는 표현에서 사울과 다윗의 화해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본문은 다윗보다 사울과 요나단의 대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므로 자신의 욕망대로 살려는 사울과 자신의 욕망이나 출세보다는 자신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요나단의 신실한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만, 나중에는 마비가 되어 수치를 잊게 합니다. 본문에 사울의 모습은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은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투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증오심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증오심을 방치하면 그것에 지배받게 됩니다. 사람을 향한 미음이 극에 달하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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