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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9-01)


아버지의 잊어버린 나귀를 찾는 사울

사무엘상 9장 1-14절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할 때 그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다. 지도자다운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훌륭하게 사용됩니다. 현재 하나님은 세상을 책임질 합당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 하며, 그 부름에 응답할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짐합시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람들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왕으로 세워 가지시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 중에 합당한 사람 사울을 만납니다. 그 과정으로 사울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잊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두루 다니다가, 사환의 권유를 따라 한 마을로 들어가 거기서 사무엘을 만납니다. 그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듣게 됩니다.

 

사울에 대한 소개(1-2)

세상에서 지도자의 자격은 다양하게 평가됩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품격과 외모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만으로 일꾼을 세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며, 겸손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현재도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의 자질로 겸손함을 가장 먼저 보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1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2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1-2)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동안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고,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사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1) 사울의 가문(1)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기스의 집안에서 태어난 준수한 아들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입니다. 또한, 사울은 작은 가족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역대기의 족보(대상 8:29-33; 9:35-39)와 비교하며, 사울의 족보를 재구성하면, 기스의 아버지로 소개된 아비엘을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과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아비엘(여이엘)은 넬(1)을 낳았고, 넬(1)은 기스와 또 다른 넬(2)을 낳았습니다. 결국, 기스는 사울을 낳은 인물이 됩니다. 실제로는 사울이 아비엘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으로 묘사되며, 이는 능력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유력하다’는 용사, 부자 또는 권력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가족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강력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지도자로 부름받게 됩니다.

 

(2) 사울의 외모(2)

 

사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의 외모는 한마디로 매우 “준수한 소년”이라 평가합니다. 이는 장성한 성인을 가리키는 ‘청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다른 백성들보다 키가 어깨 위만큼 켰고, 외모도 매우 건장한 사내였습니다. 외모로도 왕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외모만 잘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될 만한 재목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당시 나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칠십인경(LXX)의 일부 사본이 사울이 30세에 왕이 되었다고(13:1) 말하는 것과 또 사울의 초기 전투에서 이미 군대를 이끌고 있는 요나단의 나이가 최소한 10대 후반인 점을 고려한다면(13:2), 청년 사울의 나이는 35-40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암나귀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3-5)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릴 때,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지도자가 됩니다. 따라서, 성실함과 이해심을 바탕으로 한 삶이 필요합니다.

 

3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4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5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 6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7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9(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10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3-10)

 

사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목소리를 청종할 준비가 되었으며, 사환의 말이라도 올바른 조언이면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겸허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선지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1) 나귀를 찾는 것을 실패함(3-4)

 

3절부터 사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암나귀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암나귀가 사라지자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아들에게 나귀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기스는 매우 급하게 일어나 가서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사울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과 사일림 땅과 베냐민 땅을 이리저리 두루 다니며 열심히 찾고 또 찾아다녔습니다. 그가 찾으러 다닌 범위는 에브라임 산지의 북서쪽 끝에서 남서쪽 끝으로 한 3일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매우 열심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찾아도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 또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2) 사울과 사환의 대화(5-10)

 

사울이 단락은 사울과 사환의 대화 부분으로 암나귀를 찾는 부분은 한 절로 간단하게 요약한 반면 사무엘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대화를 통해 자세히 설명함으로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이야기에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암나귀를 찾아다니던 사울은 숩의 땅 즉,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와 멀지 않은 곳까지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우연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사울은 자신들에 대해 아버지가 걱정할 것을 염려하며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에 대해 사환은 지금 있는 곳이 라마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울에게 좋은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자신들이 온 성읍, 즉 라마에 마침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니, 그에게 말해서 길을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환이 설명한 사무엘의 특징은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신명기 13장 1-3절에서 설명하는 참 선지자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이런 사환의 말에 사울은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3일 동안 다녔기 때문에 양식은 모두 떨어졌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선물을 드리는 관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걱정에 사환은 또다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자신에게 은 4분의 1세겔이 있으니, 이것을 선물로 드리고, 나귀의 길을 물어보자고 한 것입니다. 사울과 사환의 대화를 보면 사환은 매우 유능하고 지혜로운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9절은 당시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견자’로 불렸는데, 사무엘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선지자’로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환의 해결책을 들은 사울은 그 말에 동의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을 만난 사울(11-14)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바라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순간마다 정확하게 사람과 환경을 준비하시고 타이밍을 맞추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받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1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13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14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11-14)

 

사람들은 마음으로 자기 앞길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성읍으로 이끌리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신 사람들과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1) 소녀들의 안내(11-13)

 

사무엘을 만나려는 사울에게 또 다른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는데, 성에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입니다. 사울과 사환은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가다가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물 긷는 것은 소녀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창 24:15). 당시 이스라엘의 성읍은 주로 높은 곳에 있었고, 우물은 낮은 계곡에 많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 소녀들에게 선견자가 여기 있는지 물으니, 얼마 전에 성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무엘이 성읍에 들어온 것은 산당에서 제사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지방 성소로서 지역 주민들이 제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산당은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약간 높게 돋우어져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며, 제사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므로 흔히 이런 장소에 제단을 세웠는데, 때로는 부속된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숭배 제단이 있는 산당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제단이 있던 산당을 여호와께 예배하는 장소로 빈번하게 사용했습니다. 점차 이것이 문제가 되면서 분열 왕국 시대에는 산당 철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인정받았습니다(예. 왕상 15:3-4).

소녀들은 사울과 사환이 서둘러 간다면 선견자가 산당에 들어가기 전에 만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제사는 화목제로서 제사의 제물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눠 먹게 될 것입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은 선견자가 먼저 제물에 축사한 뒤에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2) 사무엘과 만남(14)

 

사울과 사환이 그 성읍으로 올라가서 성읍 가운데로 들어갈 때, 마침 사무엘이 산당에 올라가기 위해 성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을 만나는데 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사울이 언제쯤 자신을 찾아올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성읍에서 나오면서 우연히 그들을 만난 것이 아니며, 도리어 그들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성읍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침”은 히브리어 ‘힌네’의 번역입니다. 사울의 관점에서는 사무엘과 만난 것이 우연을 뜻하는 ‘마침’이지만, 사무엘의 관점에서는 사울과 만난 것이 ‘마침’ 있게 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무엘에게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네’는 ‘놀랍게도’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사무엘이 그들을 만나서 함께 산당에 올라가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라고 바르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 경솔한 요청에도 신중하게 이를 처리하십니다. 모든 사건과 상황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준비시키는 과정에 사용됩니다. 권력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허락을 통해 생명력을 얻습니다. 사울이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길을 묻자고 제안합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동기를 통해 하나님은 사울과 사무엘의 역사적 만남을 성사시키시며, 사울의 여정도 무의미하게 사용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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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8-0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무엘상 8장 1-22절


 

사람은 자신을 가르칠 어른이 있을 때 방자해지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도 진정한 왕을 바르게 모실 때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신정(神政) 국가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 다른 나라처럼 인간 왕을 세워서 왕정국가 체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 사무엘이 점점 나이가 들어갑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로 일했지만, 사무엘의 아들들까지 돈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합니다. 이것을 빌미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를 내세워 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왕을 요구한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무엘의 불량한 아들들(1-3)

신앙이 언제나 한결 같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항상 신실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육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노쇠해져 가듯이, 영적인 상태도 언제나 항상 젊고 순결하고 거룩한 형태만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 변화하지 않으려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하나님은 블레셋의 침략을 막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늙어 사사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두 아들을 사사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과는 달리 아버지의 영성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엘리의 아들들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방해받게 되었습니다.

 

(1) 사사가 된 사무엘의 아들들(1-2)

 

시간이 흘러서 사무엘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요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과 아비야(‘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였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을 브엘세바의 사사로 세웠습니다. 브엘세바는 블레셋과 경계선을 대한 이스라엘의 남단 지역에 있습니다. 블레셋에서 회복된 후, 이스라엘 땅이 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브엘세바의 사사직은 큰 권력을 가진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는 제사장을 제외하고 세습이 안 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서 지도자가 세습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사사’는 문자적으로 ‘재판하는 자’를 의미하며, 재판뿐만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백성의 다양한 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일을 담당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다스리는 사사가 아니라, 브엘세바 지역에서만 담당하는 사사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2) 사무엘 아들들의 부패상(3)

 

사무엘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려면 백성들에게서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바른 길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불의한 판결을 했습니다. ‘판결을 굽게 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판결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왕정 수립 요구(4-9)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은 유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형성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는 훌륭한 신앙적 분위기와 부모의 모범이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녀의 믿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가 주님 앞에 바로 서는 일입니다.

 

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4-9)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의 아들들의 악행 때문에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왕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요구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1) 왕정 수립 요구(4-5)

 

사무엘의 아들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은 그 두 아들이 사사로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라마에 사는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세워주길 요구합니다.

이 새로운 사사를 요구하지 않고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사 시대 삼백여 년 동안 사사들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실망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삿 21:25). 이뿐 아니라 왕정을 요구하게 만드는 시대적인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이고, 둘째 사무엘의 아들들이 잘못된 재판을 하는 등 사사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새로운 지도자를 요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사를 세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왕을 달라는 것은, 첫째, 통합이 필요성입니다. 비교적 평온했던 사사 시대는 지파별 혹은 지역별로 흩어져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고, 지역별 민간 지도자인 사사들이 자기 주변지역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그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했습니다. 둘째,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군대가 없으면서도 전체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가 계속해서 나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아들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강제력을 소유한 최고 지도자의 필요성입니다. 상설 군대를 조직하고, 재빠른 의사 결정을 통해 백성 전체를 영솔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전쟁의 위협에 대비할 한 명의 최고 지도자 왕이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권력을 한사람 왕에게 모아주기로 협의하고,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왕정 수립을 요구하면서 제안하는 왕의 기본 역할은 사사들이 하던 직무였습니다.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여기서 ‘다스리다’는 ‘샤파트’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사들이 하던 일을 왕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열방과 같이’. 다른 모든 민족처럼 이스라엘도 왕이 백성을 재판하는, 즉 왕이 전체 백성의 유일한 사사가 되는, 왕정을 요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여기서 왕정의 구체적인 특성에 관하여 열방과 같기를 원하지 않았고, 단순히 사사 제도가 왕정으로 발전한 정치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원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그 속박에서 해방시킨 애굽의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요구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무효화하고 자신들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습니다.

 

(2) 사무엘의 반응과 여호와의 허락(6-9)

 

사무엘은 백성들의 왕정 요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에게 사사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7).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 뒤에 사무엘에 대한 불신보다 여호와께 대한 불신이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려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인간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은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 왕이 없는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왕권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삿 17:6; 21:25). 그러므로 인간 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왕을 요구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 왕을 세우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엄히 경고한 뒤, 왕의 제도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인간 왕권을 반대하는 사상과 찬성하는 사상이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 타협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도 왕정에 반대하였으나 점차 왕정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왕권을 찬성하셨고 모세를 통해 이미 왕 규례를 선포해두셨습니다(신 17:14-20).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동기(하나님을 버리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지만 왕정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하십니다. 사무엘이 지금 가르칠 왕의 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엄히 경고하기 위해 주어진 왕 규정입니다. 왕의 일반적인 의무와 책임에 관한 규정은 신명기 17:14-20에 제시되었으며, 나중에 미스바에서 이에 관하여 선포될 것입니다(10:25).

 

왕정 제도(10-18)

한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 될 때, 국가를 다스리는 절대 권력이 국민을 괴롭힌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가 형성되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사상을 초월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10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11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3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18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10-18)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울 경우 나타나게 될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 난 장로들은 그것에 반발하여 왕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더욱 강하게 요구합니다.

 

(1) 군대와 왕궁을 위한 인력 동원과 세금(10-17)

 

사무엘은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 즉 왕정제도(王政)에 대한 위험을 전합니다.

첫째, 아들들이 왕의 군사로 징집당하고 전쟁에 나가며 그들은 왕을 위한 말과 병거를 몰아야 하고, 왕의 병거 앞에서 뛰는 사람, 즉 왕의 호위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왕을 위한 직책을 맡게 되며 왕을 위해 농사도 지어야 하고, 왕의 근대를 위해 무기들을 만들어 공급해야 합니다. 둘째, 딸들은 왕의 시녀가 되어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 왕은 백성들의 밭을 취하여 자신의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여기 밭을 취한다는 말은 여러 이유로 백성들의 밭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땅을 함부로 사고팔거나 경계표를 옮겨서는 안 되는데 왕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할 만한 강력한 권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땅을 받는 신하들은 왕을 섬기고 왕정에서 일하는 자들로 귀족들을 가리킵니다. 왕정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계급 제도가 생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왕은 이 귀족들에게 여러 권력과 부(富)를 주면서 충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넷째, 왕은 백성들에게 십일조의 세금을 거둘 것입니다. 세금으로 귀족들에게 부를 제공하고 왕도 부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는 세금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치던 십일조를 왕에게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종으로서 모두 평등한 형제였는데, 이제 계급이 생기면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왕이 압제한다고 백성이 부르짖어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선택한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인간 왕은 하나님 왕과는 다르게 백성을 종으로 부리고 재물을 빼앗고 압제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제 백성들에게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최후의 경고인 셈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정을 보는 관점이 대단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왕정 체제와 인간 왕의 한계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백성들의 고통(18)

 

왕이 세워져 왕이 다스리게 되면, 좋은 왕만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선택한 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날”을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왕정이 도입되는 날이 아니라, 왕정이 부패하여 백성을 학대하는 ‘그 날’을 가리킵니다.

 

계속되는 왕정제도 요구(19-22)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자아가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부딪쳐오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먼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21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22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19-22)

 

하나님께 왕을 달라는 요구는 강한 나라가 되는 대신에 왕의 노예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배부른 대신에 자유를 반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애굽의 종살이하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연민으로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이 백성을 출애굽시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유의 나라로 세워주셨건만, 지금 이스라엘은 역출애굽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무색케 하는 것입니다.

 

(1) 백성들의 요구(19-20)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 선지자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본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열방과 같이’ 왕이 있어서 그 왕이 자기들을 다스리고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열방과 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성이 원하는 왕정은 가나안 여러 민족들의 왕정과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어느 정도까지의 유사성을 의미하는지 불확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게 다스리는 것과 전쟁하는 것을 기대하는데, 전자가 내정과 관계된다면 후자는 외교나 국방에 해당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허락(21-22)

 

사무엘은 완강한 백성들의 모든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허용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귀에 그 말들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말을 들어서 그들에게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거부하고 인간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은밀한 의도는 하나님께 드러나며, 인간 왕을 세우면 왕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함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운 왕은 그들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자신을 낮출 때, 그 왕은 선한 왕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왕이 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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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7-01)

 


하나님께 미스바에서 회개하는 이스라엘

사무엘상 7장 3-17절


 

기도하는 지도자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더욱이 성실하기까지 하면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종종 하나님께 물질로 쓰임받기 위해 물질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권위로 쓰임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기도와 신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진실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에게 바르게 제시했습니다. 완악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도록 요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권고합니다. 미스바 기도회를 통해 어떤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1차 회개 운동(3-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버리고 취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기뻐하신 것은 취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어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3-4)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들어올 때, 그들이 오기심으로 언약궤를 열어보다가 칠십 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보면서 애통합니다. 이 사건을 개기로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1) 사무엘의 권면(3)

 

30대 초반인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처음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법궤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았고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일어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다른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은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으로는 당연하겠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 여호와의 종교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헌신(4)

 

우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습니다. 첫째는 이방 신들인, 이는 지역마다 존재하는 여러 바알 신을 가리킵니다(4). 둘째는 아스다롯입니다. 아스다롯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쉬타르 여신에 해당하는데, 가나안에서 바알의 누이이면서 배우자로 숭배되었습니다. 아스다롯은 전쟁과 사랑 그리고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가나안 경내에 가장 사랑받는 우상이었으며 많은 사람이 미혹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 얻을 유일한 방법은 회개를 통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손을 두려워하는 데 반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손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이방 신으로 표현되었던 것을 바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것은 일신론을 넘어서 유일신 신앙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권능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제2차 회개 운동(5-6)

우리가 여호와만 의지하기 전에는 여호와는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 아니라, 언제든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우상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구원과 평화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데서 새로움은 시작됩니다.

 

5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6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5-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돌아왔지만, 아직 변방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모든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촉구합니다.

 

(1) 미스바에 소집(5)

 

민간에서 일어났던 1차 회개 운동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하여 민족의 회개 의식을 거행합니다.

미스바는 사사 시대부터 민족의 집회가 개최되었던 장소입니다(20:1). 본문의 미스바(‘망대’)는 모압이나 길르앗 지역의 미스바와 구별되는 곳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성읍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예루살렘 북서쪽 7km 지점의 네비 삼월(선지자 사무엘)이거나 예루살렘 북쪽 14km 지점의 텔 엔 나스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백성의 회개 기도(6)

 

사무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중재자로서 사무엘의 역할은 그가 모세의 사역을 일부 물려받았음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모세와 사무엘을 중보자로 언급하셨습니다(렘 15:1).

모세의 후계자로서 사무엘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이며, 왕에 관한 법을 제정하며, 이스라엘에 왕정을 도입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미스바에서 그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 전부를 여호와께 드리며, 다시는 여호와로부터 돌이켜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 의식입니다. 또 그들은 그날에 금식하고, 죄를 자백했습니다. 금식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로 행해집니다. 죄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미스바에서 사무엘의 사사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7-14)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신앙적인 기도와 경건은 한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가 당신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며 해를 끼치지 않게 하십니다.

 

7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7-14)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며 영적으로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고 있을 때 블레셋은 이를 오히려 이스라엘을 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때 맞추어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1) 블레셋 군대의 진격(7)

 

이스라엘의 대규모 집회는 블레셋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블레셋의 방백들이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지배를 받았거나 연이어 패배했던 경험으로 인해 블레셋이 온다는 말을 듣자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2) 사무엘의 기도(8-9)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번제로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3) 이스라엘의 승리(10-12)

 

여호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여호와께서는 평범한 천둥이 아니라 큰소리의 천등으로 블레셋을 공격하셨습니다. 블레셋은 혼란에 빠졌고,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나가 도망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쳤습니다. 벧갈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스바 서편에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성공적으로 쫓아낸 후, 사무엘이 한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부르면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찬양했습니다. 엘리 시대 에벤에셀은 패배의 상징이었으나, 사무엘에 의해 승리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4) 전쟁의 결과(13-14)

 

이 전쟁의 결과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첫째, 블레셋이 굴복했습니다. ‘굴복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나’는 ‘자신을 낮추다’ 혹은 ‘대적을 굴복시키다’를 의미합니다. 한번 굴복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영토 안으로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패배가 사무엘의 죽음 이후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도 사무엘의 생존 시기 동안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막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성읍들이 회복되고 그 사방 지역을 도로 찾았습니다. 회복된 성읍들은 에그론과 가드를 포함하여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성읍입니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슈브’의 번역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왔을(슈브) 때, 잃었던 성읍들이 돌아왔습니다(슈브), ‘도로 찾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찰인데, 이 단어는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된 성읍들의 주변 지역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셋째, 아모리 사람들과 평화(샬롬)가 있었습니다. 아모리는 흔히 가나안 주민들 전체를 가리키거나, 그중 일부를 가리킵니다(창 15:16; 수 9:1).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을 크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주변 가나안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싸우기보다는 화평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무엘의 통치(15-17)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될 때 깨어진 모든 관계와 질서가 회복됩니다.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은 불편한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 두려움과 어려움이 가득합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15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5-17)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기념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승리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잃었던 옛 영토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사사 사무엘(15)

 

이 단락은 사무엘의 사역을 요약한 것으로 그는 에브라임 지역의 벧엘과 길갈과 베냐민 지역인 미스바를 순회하며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평생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사는 주로 재판과 상담을 통해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이스라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사사 자신이 사령관 역할을 하거나 혹은 군사 자문관 역할을 하면서 전쟁을 이끌게 됩니다.

 

(2) 순회 장소(16-17)

 

사무엘이 매년 순회하면서 다스린 장소들, 벧엘과 길갈 그리고 미스바는 모두 가나안 땅 중부에 속하는 성읍들입니다. 사무엘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이 그다지 넓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의 시대 모든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그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였고, 그 후에는 미스바로 그들을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3,5). 그의 고향인 라마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그가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라마에서도 했다는 것이고,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지방에도 제사를 드리는 장소들이 있었는데, 흔히 산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서는 시작이자 모든 문제의 마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또 이를 위해 신앙의 밭을 갈아엎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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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6-01)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사무엘상 6장 1절-7장 2절


 

“거룩”은 “타자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을 통제하거나 조종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길들이지 않는 것을 거룩 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유로운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블레셋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거룩은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지역에 머물 때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을 더 견딜 수 없어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새 수레에 속건 제물을 신고, 젖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그 수레에 메어 벧세메스로 끌고 가게 하였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 안을 보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만) 칠십 명의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그 궤를 기랏여아림으로 가져가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간 여호와의 궤(1-9)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1-9)

 

블레셋에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여호와의 법궤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승리자로서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전리품을 취하셨듯이, 이번에도 전리품을 취해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데 이스라엘의 칼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1) 제사장과 점술가의 조언을 구함(1-2)

 

법궤가 블레셋 땅에 머문 지 7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은 5장에서 언급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기간입니다. 재앙 때문에 블레셋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던 법궤를 원래 있던 곳인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어떻게 여호와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낼지 방법을 묻습니다(2). 제사장들은 다곤 신이나 기타 블레셋 신들의 제사장들이고, 점쟁이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점을 치고 예언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법궤를 보낼 때 반드시 속건제를 같이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손실을 입힐 경우 그 손실을 입힌 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는 속건제도 레위기에서 말하는 규정과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배상제입니다. 이들은 법궤를 가져온 것을 여호와의 거룩성을 훼손한 것으로 여겼고,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 소건 제물의 필요성(3)

 

그래서 속건제를 드려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병도 치료를 받고 왜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을 비껴가지 않는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만일 속건제를 드려서 재앙이 멈추고 병이 낫게 되면, 법궤로 인해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진노를 내렸다는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소건 재물의 내용(4-6)

 

이에 백성들이 속건제로 무엇을 드릴지를 다시 묻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은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보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블레셋 다섯 방백은 블레셋 다섯 도시의 지도자들로 이들은 블레셋 사람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은 블레셋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제물이 금 독종과 금 쥐의 모양을 한 이유는 독종을 쥐가 퍼뜨리는 질병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을 이야기한 후에 이렇게 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가볍게 해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손을 가볍게 하다’라는 표현은 5:6의 ‘여호와의 손이…엄중히 더 하사’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재앙을 약하게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혹시’라는 희망을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외심을 갖고 자신의 식견대로 하지만, 이 제물을 받고 재앙을 거두실지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로, 블레셋에 내려진 재앙을 애굽에 내린 재앙과 동일한 단어인 ‘마게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5절에서 ‘땅을 해롭게 하는 쥐’라는 표현에서 ‘해롭게 하는 것’이란 표현은 출애굽기 12:23에서 유월절에 애굽의 장남을 치기 위해 들어가는 ‘멸하는 자’와 동일한 단어인 ‘마쉬히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쥐를 블레셋 땅을 파괴하는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셋째로, 백성들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애굽 사람들과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재앙을 받은 예를 들면서 그들도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수사학적인 질문은 우리는 애굽 사람의 교훈을 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내린 재앙을 보면서 과거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가지신 두려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4) 새 수레와 젖먹이는 암소(7-9)

 

7-9절은 법궤를 보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재앙을 보고도 끝까지 이 재앙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제의에서처럼 법궤를 수레로 옮기려고 새 수레를 만들고 젖먹이 송아지가 있는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젖먹이 송아지가 있는 암소를 택한 이유는 암소들이 본능적으로 새끼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소들이 송아지들에게 가는지 혹은 본능을 거스르고 이스라엘 지역인 벧세메스로 가는지를 본 후 이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인지 우연히 온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께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여호와의 궤(10-18)

인간은 너무나도 간사하고 악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며 풍요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은혜를 망각하고 감사를 잃어버린, 지극히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세가 주는 교훈을 기억하고 신앙적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도 외부의 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경계 못지않게 내적인 교만과 방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10-18)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자고 결정하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재앙의 원인이 정말로 이 법궤 때문인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이 여호와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이 재앙이 우연이고, 여호와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신이길 바란 것입니다.

 

(1)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옴(10-16)

 

사람들이 제사장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서 암소 둘을 끌어오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금 쥐와 금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암소를 벧세메스로 가게 하자, 암소는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해 곧장 갔습니다. 송아지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울면서 계속 걸어가는 암소의 모습을 보면서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는 것을 한 번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때는 밀 추수기로 대략 5-6월 정도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추수를 하다가 돌아오는 궤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본 것을 기뻐하였다’라는 표현은 이것이 전혀 상상도 못한 상황이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법궤를 다시 본 후 찾아온 큰 기쁨을 의미합니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큰 돌 근처에 오자 멈춰 섰습니다. 이들의 걸음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멈춘 것입니다. 이 큰 돌위에 법궤와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두었는데, 이 큰 돌은 제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들을 잡아 여호와께 모두 태워서 드리는 번제를 드렸고, 다른 짐승들을 잡아 짐승제사를 드렸는데, 이 제사의 기름과 피는 여호와께 바치고 고기는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하는 형태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축하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법궤가 선물까지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블레셋의 신인 다곤을 이기고 전리품까지 챙겨 귀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승진을 축하하고 기뻐하며 여호와께 제시를 드리고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며 축하하였습니다. 대조적으로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암소들이 벧세메스에 도착한 것을 보고 재앙이 여호와의 권능이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 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에글론으로 돌아갔습니다.

 

(2) 블레셋이 드린 예물 목록(17-18)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 제물로 여호와께 드린 목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독종 형상은 블레셋의 다섯 도시를 위해 드렸고, 다섯 쥐들은 다섯 방백에게 속한 도시와 그 주변의 마을과 블레셋 들 등 모든 블레셋 지역을 위해 드렸다고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는 성읍과 그 주변의 마을과 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다섯 방백들이 다섯 개의 성읍을 중심으로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기랏여아림으로 간 여호와의 법궤(19-7:2)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신실하실 것이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7:1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19-7: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거나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자는 이스라엘이든 블레셋이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법궤를 함부로 들여다보다 한 날 70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1) 벧세메스에 임한 재앙(19)

 

벧세메스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고,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쳐서 (오만) 칠십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백성들이 여호와의 궤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본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만 칠십 명은 한 마을 사람들의 숫자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이기 때문에 어떤 사본의 경우에는 칠십 명만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70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함부로 행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2) 벧세메스 사람들의 요청(20-21)

 

“누가 능히 서리요.” 여호와 앞에 선다는 말은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옮겨 가라”(직역하면 ‘가지고 올라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랏여아림은 높은 곳(해발 약 700m)에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숲의 성읍’이며, 기브온과 연맹을 맺은 성읍일 것입니다(수 9:17). 이 성읍은 벧세메스 동북쪽으로 14킬로미터,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3) 기랏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여호와의 궤(7:1-2)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던 20년은 사무엘의 회개 운동 때까지를 말합니다(7:3). ‘사모하다’(7:2)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하’는 ‘애곡하다’의 뜻이므로 울며 사모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호와의 권능과 거룩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처럼, 이들도 법궤를 기랏여아림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법궤를 지키기 위해 엘리에젤을 선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자유하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자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며 응답할 때, 우리도 그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며, 생명을 만들어내고 샬롬 공동체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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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5-01)

 


법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사무엘상 5장 1-12절


 

오늘날은 다원주의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하나님과 분명히 구별되십니다.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이사야 40:19-20)고 말했습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이스라엘과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져다가 다곤 신전에 둡니다. 이후 다곤은 몸뚱이만 남은 채 엎어져 있고, 아스돗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망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옮겨 가는 가드, 에그론에도 재앙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아스돗의 재앙(1-7)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느낌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없다고 무시하거나 부인하다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뿐입니다. 시편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편 14:1)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

 

1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7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1-7)

 

불리하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스스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정말 아무 쓸모없는 우상일 뿐입니다.

 

(1) 다곤 신당에 머문 법궤(1-2)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자기 신 다곤에게 예물로 마쳤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획득한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둡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의 신상을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승리한 민족의 신이 패배한 민족의 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패배한 민족의 신앙을 무너뜨려서 그들이 쉽게 재기하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수호신으로 생각하는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스돗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53km 떨어져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당 안의 다곤 신상 곁에 두었는데, 이는 법궤가 다곤의 포로가 되었음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다곤 신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가나안의 곡식 신이며, 가나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바알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아스돗의 다곤 신전은 마카비 지도자 요나단에 의해 주전 147년에 파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가나안 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암시합니다. 첫째, 그리스 지역 지중해 연안에서 이주해 온 블레셋은 해양 민족으로서이 특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가나안의 다른 민족들처럼 농업을 주산업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둘째, 블레셋에 포함된 여러 민족 중, 해양 민족출신이 지배층을 형성했다면 피지배 계층에는 토착 가나안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 다곤 신상의 굴복(3-5)

 

다음 날 아침에 아스돗 사람이 신당 신전에서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3). 아침에 다곤 신전에 들어간 본 결과,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을 땅에 처박고 있었습니다. 엎드려져 땅에 얼굴을 처박고 모습은 완전히 복종을 표현하는 자세입니다. 아스돗 사람이 다곤 신상을 제자리에 다시 세워 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다곤 신이 거짓된 허상이란 것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게 합니다.

오히려 다곤 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한 아스돗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음날에 다곤 신상이 머리와 두 손목이 잘린 채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머리와 두 손은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후 아스돗 다곤 신전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다른 모든 사람이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머리와 두 손이 문지방에 놓인 사실과 문지방 아래에는 여러 영과 신들이 머물고 있다는 고대인의 미신을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곤 신상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분인 머리와 힘을 가진 부분인 두 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곤은 자신의 권능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을 여호와의 법궤에서 가장 먼 문지방에 두고, 몸통만으로 여호와 앞에 엎드려 복종했습니다.

 

(3) 독한 종기의 재앙(6-7)

 

여호와의 손이 그들 위에 엄중히 더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거나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권능을 가리킵니다(출 9:3; 수 4:24; 삿 2:15).

“엄중히 더하사”라는 ‘무겁다’를 뜻하는데, 엘리의 비대한 몸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4:18). 또 ‘영광’을 의미하는 이가봇 이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4:21,22). 그러므로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게 됨은 이스라엘의 영광인 법궤가 블레셋 땅에 이르러 스스로 영광을 쟁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므로(무거워지므로),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아스돗이 망했습니다. “망하게 하니”의 원문은 폐허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아스돗 지경의 땅을 황폐하게 하셔서 사람들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독한 종기로 아스돗과 그 지경의 사람을 치셨습니다. 독한 종기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시기 위해 독한 종기를 무기로 사용하셨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임한 재앙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신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과 그들의 신 다곤을 친다고 생각하여, 그 신의 궤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여기서 “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샤’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표현으로, 소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카베드’의 유사어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엄중하며, 또 아스돗 사람과 다곤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웠습니다.

가드의 재앙(8-9)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가장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이 잠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 없이 서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탄한 것을 의지함으로 넘어지는 백성되지 않길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 주실 것입니다.

 

8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8-9)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이 손과 머리가 잘린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 앞에서 다곤 우상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는 무능력한 것을 절감(切感)했습니다. 그래서 다곤 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 신만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에게 종기 재앙이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1) 가드로 옮기신 법궤(8)

 

아스돗 사람이 블레셋의 다섯 방백을 모두 모으고, 그들에게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곤란한 입장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가드로 그 궤를 옮겨가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옮겨 가다’는 ‘돌아가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갔습니다. 가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스돗에서 동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골리앗의 고향으로 유명하며, 다윗이 한동안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과 그 주변을 심판하십니다. 그 근처 곳곳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들어내십니다.

 

(2) 독한 종기의 재앙(9)

 

그들의 법궤를 가드로 옮긴 후에, 여호와의 손이 그 성읍에 임했는데 곧 심히 큰 환난이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심히 큰 환난이 이 손과 동격으로 주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강조를 뜻하는 두 단어“심히”와 “큰”을 사용하여 가드에 임한 환난의 극심함을 표현합니다. “환난”은 이 단어는 ‘혼란’이나 ‘소동’을 의미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 성읍의 사람들을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쳐서 그들에게 독한 종기가 나게 하셨습니다.

 

에그론의 재앙(10-12)

그들에게는 전쟁에서의 승리의 증거이던 언약궤가 오늘은 재앙의 근원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탄식으로 끝날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의 전능한 손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전서 4:7)고 권고합니다.

 

10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10-12)

 

하나님께서 무서운 신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우상의 한계를 발견했다면, 우상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겨야 했습니다.

 

(1) 에그론으로 옮겨진 법궤(10)

 

블레셋은 법궤를 다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겼지만, 에그론은 가드에서 동북쪽으로 약 20km,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법궤가 멈물렀던 세 도시는 아스돗과 에그론을 웟변으로 하고 가드를 꼭짓점으로 하는 역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에드론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10)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블레셋 안에서는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빨리 항복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데도 속히 돌아서지 않고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2) 에그론의 환난과 독한 종기 재앙(11-12)

 

결국은 블레셋의 지방 방백들이 모이게 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한 대책 회의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결과입니까? 본래 장소로 돌려보내서 그 궤가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그 온 성읍에 사망의 환난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환난이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여호와의 손이 그곳에 매우 엄중하게 임하여, 죽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 매우 엄중하게 임하여, 죽지 않은 사람들은 독종으로 침을 받아서 그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여기서 “부르짖음”은 주로 신의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을 의미합니다(출 2:23; 삼하 22:7; 렘 8:19). 하늘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하나님께 도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하늘에서도 들을 수 있음 만큼 부르짖는 소리가 크고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세 도시에 임한 재앙이 점점 강도를 높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스돗에서는 엄중하였고(6), 가드에서는 심히 큰 환난이 있었으며(9), 에그론에서는 사망의 환난이 있고 또 여호와의 손이 매우 엄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분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했던 다곤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다곤을 보호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은 후 겪는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한 주권자임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 이름을 높이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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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2)


제사장 엘리에 닥친 죽음들

사무엘상 4장 12-22절


 

‘성전(聖殿)’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더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자신들이 거룩하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 전쟁에 나간 두 아들의 소식을 엘리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도망나온 베냐민 사람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군사들이 3만이나 죽고, 엘리의 두 아들들도 죽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 것처럼 비운(悲運)은 없습니다. 엘리는 나쁜 소식을 듣는 순간 넘어져 죽습니다.

 

엘리의 최후(12-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면 눈이 밝아지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될 것입니다.

 

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12-18)

 

이스라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언약궤를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4:3). 전쟁터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은 앞세워 나갔습니다.

 

(1) 울부짖는 실로 주민들(12-13)

 

전쟁터에서 도망지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베냐민 사람이 전쟁터에서 도망해 달려와 실로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쓴 상태였습니다(12). 이 모습만 보더라도 성읍 사람들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사람이라는 점은 이제 베냐민 지파 사울의 시대가 열리게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냐민 지파이므로 실로에 자기 집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의 패배와 그로 인한 그의 비통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에벤에셀에서 출발했다면 실로까지 대략 3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것입니다.

그 베냐민 사람이 성읍에 들어올 때,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의자가 성전 문설주 옆 의자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 의자가 문 곁에 있었다는 설명을 고려할 때 아마도 같은 의자일 것입니다(1:9; 4:18). 엘리는 의자에 앉아서 길 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 98세로 비록 늙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눈이지만, 그 눈을 움직이려 애쓰면서 전령이 올 수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를 걱정하면서 크게 떨렸습니다. 엘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아들보다도 법궤의 안위였습니다. 엘리는 법궤를 가져가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지고 나오면서 대단한 행사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니깐,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다 승리할 것처럼 기세등등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성전 문 앞에 의자에 앉아서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3).

전쟁터에서 도망 나온 베냐민 사람이 실로에 도착했습니다(12). 이스라엘에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는 실로에 와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는 엘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2) 엘리의 기다림(14-15)

 

엘리는 성읍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식을 듣고 더욱 불안하였습니다. 그때 전령이 엘리에게 빨리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14). 엘리는 이때 98세이므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15). 하지만 엘리의 이러한 상태가 그의 영적 침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 현상일 뿐입니다.

 

(3) 전쟁의 결과를 알게 된 엘리(16-17)

 

베냐민 사람이 엘리에게 자신은 진중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합니다. 그는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처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고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자신이 오늘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합니다. 두 번 말하는 것은 늙은 엘리가 귀조차 어두워 못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또 자신의 보고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행동입니다.

엘리는 그를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16). 이는 그가 많은 고생을 하고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면서 여기까지 왔음을 알기 때문에 엘리가 그를 위로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칭호입니다. 엘리는 그에게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마음에 가득한 불안을 감추고 침착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전쟁의 결과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전령이 대답했습니다. 그 전령은 세 가지 내용을 전했습니다. 첫째, 전쟁에 져서 이스라엘이 도망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엘리의 두 아들이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4) 엘리의 죽음(18)

 

전령이 하나님의 궤에 관해 언급할 때, 엘리는 큰 충격을 받고서 실신하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그가 의자에서 뒤로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의자는 흔히 그 의자에 앉는 사람의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가 의자로부터 떨어진 것은 엘리 가문의 통치가 끝났음을 암시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사사로서 다스렸습니다. 엘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의 눈이 어둡고 몸이 비대한 것을 영적 타락 혹은 침체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서가 말하는 엘리의 잘못은 두 아들의 죄를 바로잡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이며 사사로서 자기 아들의 죄를 징계하지 못함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무엘 역시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입니다(8:3). 엘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사로서 백성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교육했습니다. 한나를 위한 그의 축복 기도가 한나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법궤를 위한 열심이 지극하였으므로 법궤에 대한 염려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연로한 몸의로 길가 의자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에 힘을 주면서 전령을 그토록 기다렸고, 마침내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서 그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요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자신과 가문은 여호와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엘리는 분명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를 책임지는 사사였으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무엘을 남겨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소망이 있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 감독해야 할 제사장 엘리의 가정이 백성들보다 더 타락해 심판을 자초(自招)합니다. 그 결과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 부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19-22)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들부터 존귀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업적이나 과업 성취를 위해 자기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야 합니다.

 

19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19-22)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립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그 영광으로부터 떠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곳이 이가봇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됩니다.

 

(1) 비느하스의 아내 해산(19)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습니다(19). 그러나 남편의 전사 소식과 시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한꺼번에 듣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쁜 소식에 갑작스러운 진통과 함께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2) 비느하스 아내의 죽음(20)

 

비느하스의 아내 또한 충격을 받아 출산 중에 죽습니다. 그녀가 죽어갈 때, 주변에 섰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후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비참한 미래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충격과 고통에 사로잡힌 그녀는 여인들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았습니다.

 

(3) 이가봇(21-22)

 

태어난 아기는 히브리어로 ‘나아르’라 불립니다. 이러한 표현은 독자들에게 이 아이를 아이 사무엘과 비교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죽어가면서 자기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이므로,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난 이유가 법궤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 번 더 설명합니다(22).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법궤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김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한편 아들의 이름을 정하는 사람은 아버지거나 어머니입니다. 이 둘 중 누가 정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녀 자신이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성령의 충만함을 풍성히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령이 가장 슬퍼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죄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전에 더러운 것이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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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4-01)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순종

사무엘상 4장 1-11절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언약궤의 존재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다음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영으로 가져옵니다. 다시 전투해 보지만, 또 패배하고 엘리의 두 아들은 죽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맙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를 우상화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블레셋과 전투에 패함(1-2)

패배와도 같은 상실 가운데 있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크고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이용한 이스라엘을 언약의 외인처럼 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대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1-2)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전투를 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4천명의 군사들을 잃었습니다.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위해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전쟁이었던 것을 가르쳐줍니다.

 

(1) 사무엘의 선지자 사역(1a)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나타났다는 3:21의 기록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에 말하였다고 기록하는 7:3의 기록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b-7:2이 4:la와 7:3 사이에 삽입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전파된 사무엘의 말(1a)이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을 초래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전쟁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2) 블레셋과의 1차 전쟁(1b-2)

 

1차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불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자기들 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에벤에셀(도움의 돌)에 진을 치자, 블레셋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아벡에 진 쳤습니다. 에벤에셀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아벡은 현대의 텔 라스 엘 아인인데, 텔아비브 동쪽에 있으며 야르콘 강의 수원지 근처에 있습니다.

 

“그 둘이 싸우다가.”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전쟁이 벌어졌을 때’가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면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사천 명가량 죽임을 당했습니다.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이 피해 규모가 전쟁을 포기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원래 진영으로 돌아와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2차 전쟁을 위한 준비(3-5)

우리의 생활 속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3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3-5)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보다는 자신들의 힘을 믿고 전쟁에 나가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런 패배의 모습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정보하려고 들어올 때, 여리고와 아이 성 전투를 기억합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서 정복되었지만, 아이 성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투했다가 패배를 한 적이 있습니다.

 

(1) 대책 회의(3)

 

백성이 후퇴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패하게 하셨는고” 이 문장의 원문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치셨는가’로 번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친 주체가 여호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잔영 안에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지 않고 같은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원수들의 수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법궤가 언약궤로 불립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체결된 시내산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법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언약궤를 가져온 홉니와 비느하스(4)

 

“그룹 사이에 계신(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 언약궤의 뚜껑에는 그룹이라 불리는 두 천사의 형상이 서로 한쪽 날개를 맞대고 다른 쪽 날개는 반대 방향으로 펼친 모양으로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많은 군대의 여호와)라 부르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생각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시는 여호와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수행하면서 전쟁터에 나아왔습니다. 언약궤를 메는 자는 반드시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직접 언약궤를 메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연로한 엘리를 대신하여 그들이 언약궤의 책임자로서 따라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여호와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기충천한 이스라엘(5)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소리로 외치니, 땅이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는 언약궤를 보면서 전쟁의 승리를 예감하고 사기충천했습니다. 여리고 이 언약궤를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루’는 흔히 전쟁 함성을 가리킵니다(겔 21:22).

 

블레셋의 전쟁 준비(6-9)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할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할 때, 세상은 우리를 심판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해서 인도하신 전능하신 신이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능력의 신이라고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서로 어리석은 독려(督勵)합니다.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6-9)

 

만군의 여호와를 언약궤 안에 가두다니 어이없스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부리고 사용할 수 있는 우상일 뿐이었습니다.

 

(1) 지켜보는 블레셋(6)

 

이스라열 진영에서 큰 함성이 있었으므로, 아벡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히브리 진영”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칭호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를 때 흔히 사용됩니다(출 2:6; 3:18).

 

(2) 블례셋의 두려움(7-8)

 

두려움에 사로잡힌 블레셋 사람들이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진정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화’는 ‘오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흔히 신의 심판과 형벌로 임하는 재앙을 가리킵니다(사 3:11; 렘 4:13). 이 단어를 7절과 8절에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여호와께서 출애굽의 과정 중에 바로와 애굽 군대를 재앙으로 치셨다는 기억에서 나옵니다. 블레셋은 그 재앙들이 광야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에 애굽조차 사막과 광야에 둘러싸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3) 블레셋의 각오(9)

 

“강하게 되며”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강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이때 ‘용기를 내다’(스스로를 강하게 하다)를 의미하게 됩니다. “대장부가 되라”는 문자적으로 남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두 번 사용됨은 전쟁에 패배할 것만 같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이 애초에 블레셋을 종처럼 섬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여호와의 법궤를 보는 순간 이제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블레셋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장부로 만들어 더욱 힘껏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2차 전쟁(10-11)

종종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일까지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커다란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언약궤가 전쟁터 앞에 나갔으니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10-11)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투가 벌어지며,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게 되며, 언약궤의 상실이 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위기를 나타냅니다.

 

(1) 이스라엘의 패배(10)

 

블레셋이 큰 두려움 속에서 결사 각오를 다지며 자신들과 달리 사기충천해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법궤를 모시고 크게 함성을 지르던 이스라엘이 힘을 쓰지도 못하고 패배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 패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줬으니, 죽은 자만 삼만 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전쟁터에 남아 있지 못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 집에까지 달려 도망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언약궤와 엘리의 두 아들(11)

 

11절에는 두 번째 전쟁의 참혹한 결과가 담담한 어조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내버렸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며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또 하나의 비참한 결과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제물을 모욕했던 두 제사장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이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지만, 패배를 주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출세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실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 유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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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2)


사적인 감정을 버리면 살아나는 사명

사무엘상 3장 11-21절


‘설교자(說敎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이런 것을 비유하면,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할 때, 설탕을 많이 집어넣은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은 단맛에 맛있게 먹지만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많아집니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듣지 못은 설교만 전하면 믿음은 연약하지고 영적인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사적인 감정에 메이지 않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최고 영적 지도자이고 자신의 스승인 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알립니다. 힘들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은 제사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오늘날 사명자들이 어떤 감당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까?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10-14)

사람이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귀를 막으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닫아버리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눈과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보면 안타 깝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서 계시를 들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0-14)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완악한 시대를 기쁘게 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불순종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듣고 그대로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의 집에 임할 심판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처음으로 들어야할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을 양육해준 엘리 제사장의 몰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엘리의 집에 관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다 이루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저주를 자청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엘리 역시 경고를 듣고서도 자기 아들들의 악행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14)고 결정하셨습니다. 엘리의 집은 어떤 것으로도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려도, 소제를 드려도 결코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 아들들은 배교 죄와 다름없는 죄였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습니다. 다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용서의 길을 넘어서버린 것입니다.

 

삶에 있어 습관적인 악행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과감히 돌아서길 바랍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해도 죄악의 행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 시키면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무엘의 태도(15-18)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 없이 전해야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부모이자 스승에게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15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15-18)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나이가 약 12살 정도 추정됩니다. 약 10년 동안 여호와의 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인 엘리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뜻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 심판의 말씀을 엘리에게 전하기가 상당히 어렸습니다. 매우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머뭇거리자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선지자적 소명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거부하지 않고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하나님께 회개와 금식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히스기야처럼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면 그의 가정은 회복이 되었을 것입니다(열왕기하 20:2-3).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질책과 심판 메시지 앞에 겸손히 회개하며 죄의 길에서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로부터 나오는 싫은 소리는 막으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거북스런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설교 속에서 ‘성공학’이나 ‘행복학’들을 풍성히 전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잠시 아픔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을 전하지 않고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점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사라져 갑니다. 말씀은 점점 기갈(飢渴) 되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명인은 인간의 이해관계나 육정을 초월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도들도 살고 교회에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지적을 분명하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설교자가 되려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방법은 모두 동원에 찾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성경에 대한 자료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대상에 관계없이 분명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듣기 좋은 말만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전하는 것은 그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질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전하는 사명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상 중에 들은 것을 말하는 사무엘(19-21)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무익하게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 뜻을 성취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19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19-2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성장하면서 함께 하시고, 그의 말씀의 능력이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으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권능 있게 하시고, 온 이스라엘 앞에 그를 권위 있는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동행’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전하는 말씀은 누구도 의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렸던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어두웠던 시대에 말씀이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꽉 막혔던 곳에 숨통이 트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참된 권위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부터 나옵니다. 성도는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며 말씀에 지배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말씀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참다운 설교자로 믿고 따릅니다. 그 설교자는 사무엘처럼 국민과 지역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켜 하나님을 축복을 받는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위한 기도가 강력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통해 그가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실 것이며, 그의 사역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결국,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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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3-01)


성전에서 성장해 가는 사무엘

사무엘상 3장 1-10절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말하는데, 들어야할 사람이 듣지 않고 다른 행동하면 말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다시는 그 사람에게 어떤 말도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없으니 결국에 계시와 말씀 그리고 환상도 없었습니다. 사사시대를 ‘영적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활동하기 전인 엘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지 못하고 고통하고 괴로운 장면을 봅니다.

 

  • 당시 이스라엘 상황은 영적인 지도자 대제사장 엘리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여 바른 훈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매우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1-3)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1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1-3)

 

이제 초점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사무엘 개인에게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시대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드물었고,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계시도 거의 나타나지 않은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제시해 줄 영적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방황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서를 기록한 분은 이 어두운 시대를 엘리 제사장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나를 술취한 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식이며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등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을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일상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엘리의 모습을 사역하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영적 나태를 표현하기 위해 자기의 처소에서 누어 자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없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을 부추긴 것과 같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편한 대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두움 속에서도 영적인 새싹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어린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이 밝게 켜져 있는 여호와의 전, 즉 성막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성전 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막에서 밝은 등불 아래 있던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어두운 가정에서 육신의 편안하게 쉬고 있던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름 받는 사무엘(4-7)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인 눈과 귀가 밝아야 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4-7)

 

다시 말하지만, 어두워진 엘리의 눈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감각은 어둡던 시대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어두운 제사장이지만 엘리를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막 안에 자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마음으로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계시가 없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을 직접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항상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달려갑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대제사장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즉시 그는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무엘을 보고 엘리는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가라고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지 않은 시대에 사무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계속해 부르십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고 소개합니다. 정확히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이 시대는 사무엘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세상의 소음이나 잡음 정도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적인 강연이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 연장선(延長線) 상에서 설교도 강의나 강연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길 바랍니다. 사역에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누가복음 5: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은 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말씀을 놓치지 않고 잘 듣게 됩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지루하게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장차 일에 비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 엘리의 조언(8-9)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큰일을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8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8-9)

 

똑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후에 엘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기가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준비를 하면서 두근거리면서 침대에 누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어린 사무엘에는 즉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라고 대답합니다.

이사야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이사야 6: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말씀에 들을 준비(stand by)되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시끄럽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매우 고독할 정도로 조용한 곳입니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러한 코스를 거치도록 합니다. 모세와 세례 요한의 광야와 같은 조용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다면 감사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행하실 비밀을 다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다락방과 같은 곳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축복의 비밀을 말씀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비전을 품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큰 사역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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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02-03)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사무엘상 2장 22-36절


 

요즘 자동차를 아주 잘 만들고 도로도 매우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좋은 승용차와 좋은 길에서 제동장치가 없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것은 사고를 목표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 나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사고 순간부터는 고통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수많은 쾌락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거룩함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 스승을 통한 통제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수가 있는데도 책망해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로 인해 그 집안의 내려진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악행과 이를 방관한 그의 잘못을 보시고, 무명의 선지자를 엘리에게 보내, 두 아들이 죽고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엘리의 집에 대한 심판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악행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기(22-25)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면 때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부모들이 도덕적인 바른 교육을 할 때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제대로 선악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실수를 제어할 수 없으면 그 때부터 자녀에게는 방치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는 악행을 행하는 사람들을 유기해서 방치해 버립니다.

 

22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2-25)

 

엘리 제사장이 그의 아들들이 성전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듣고 그들에게 경고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을 중재하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합니다.

 

(1) 아들들의 죄(22)

 

엘리에 대한 소개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나이가 93세였으므로, 이 당시는 적게는 잡아도 80세는 넘는 나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의 나이를 언급한 것은 그가 나이가 많아서 아들들을 험하게 훈육하고 징계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는 두 아들이 행한 일, 즉 악한 행동에 곤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결국 엘리의 귀에도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두 아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제물을 강탈한 것도 부족하여, 성전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에게까지 간음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인들과 간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의하고 경고했던 이방 종교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가 점점 심각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은 분명히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이런 범죄를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거룩성이 요구되는 제사장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렀다는 것은, 이들의 타락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과, 이러한 모습은 당시 사사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엘리의 책망(23-25)

 

늙은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간음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아들들은 무시합니다. 이런 완악한 아들들은 아비의 질책을 들릴 리 없습니다. 엘리는 그들이 어렸을 때 제대로 영적인 교육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들을 귀하게 여겨 바른 교육을 제대로 하질 못했습니다(26).

 

엘리의 권고에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권위에 대해 두려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질책이라고 들릴 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범죄하고 게으르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헤이로까지 이어집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영적인 모습에 일반 성도들에게 보여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 성숙해야 합니다.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살아갑니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명자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저주는 자신을 바르게 인도해 줄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이렇게 망령된 자녀들을 성경에서는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명기 21:18-21)

 

망령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 악인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신 것입니다. 더 나가서 악인들이 형통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고 답습합니다. 아주 망령된 행동하는 자녀들에게는 단호하고 따끔한 징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사무엘(26)

세상의 법칙은 수백만 어리석은 사람들보다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져 갑니다.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사무엘처럼 희망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6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6)

 

이 말씀은 사무엘의 삶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유능한 지도자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은 결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상처만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사람들이 존경받습니다.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물론이고, 제사를 드리러 온 백성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과 백성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9:2)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분노케 하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처럼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성장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의 성장은 예수님의 성장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에 대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고 소개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때문에 잃었던 이스라엘의 희망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세상에 죄악들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범죄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자신만은 거룩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이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두워져 갈지라도 거룩함이 사라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를 준비하신 것입니다(이사야 6:13).

 

심판을 선고하는 하나님(27-3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지 않는가?’라고 스스로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범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7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27-36)

 

하나님께서는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의 소식을 듣고 엄히 책망하였지만 자식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물어들어 회개치 않는 엘리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고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할 때까지 방치해 버리십니다. 이 유기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의 집안에 대해 그 동안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영원토록 축복된 제사장의 집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 남용으로 쓰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축복의 변경입니다(30). 가정에 재앙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로 자손들이 젊어 죽게 될 것이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루아침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사명을 잃은 엘리 제사장 가족은 구걸이나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도록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성경에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욱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인간의 감정으로 생각하거나 사역하지 않길 바랍니다. 제사장 엘리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주는 통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깐, 빼앗김을 당하고 축복도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면 피 흘리기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즐거움을 압니다. 그런 기쁨 가운데 사역을 감당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성스럽게 일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람들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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