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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8-01)


다윗을 사랑하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무엘상 18장 1-16절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평안을 얻는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교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가장 존귀하게 우리를 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다 보면, 그 길목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진실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삶의 길목 길목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축복하길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블레셋과 전쟁하지 못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외치며 물맷돌만 들고 달려 나가 골리앗을 죽이자 비로소 용기를 얻고 블레셋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의 용맹한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음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등장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1-5)

마음이 연락되었다는 표현은 성벽을 쌓을 때 돌 위에 돌이 견고하게 쌓인 모양입니다. 세워져도 함께, 무너져도 함께,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디딤돌로 다윗이 소명의 지점에 서기 바라는 요나단은 빈 몸으로 내어주나 아깝지 않았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면 다 비워줘도 전부를 가진 듯 배부릅니다.

 

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1-5)

 

본문은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환영하는 사람 중에는 요나단도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봅니다.

 

(1) 요나단의 사랑과 사울의 총애1(1-2)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하고 사울 왕과 대화를 나눌 때 요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본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그를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이 사람들에게 점점 인기가 많아지면, 자신이 이어받아야 할 왕위가 위태로워집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얼마든지 경쟁관계 있을 수 있겠지만, 요나단은 그럴 생각이 없이 다윗을 사랑합니다.

나중에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 강했다고 말할 만큼, 요나단과 다윗의 결속과 애정은 매우 깊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단둘이서 블레셋 군대를 쳐들어간 것이나 다윗이 물매만 들고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데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신앙을 가진 요나단과 다윗은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됩니다. 이들의 결속은 요나단이 죽고 나서까지 이어집니다. 전쟁을 마친 날 사울은 다윗을 자기 있는 곳에 머물게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사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인데, 이제 이스라엘 군대의 중요한 인물이 되어 사울의 손님으로 머물게 된 것입니다.

 

(2) 요나단의 사랑과 사울의 총애2(3-5)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한다는 표현을 반복하는데, 이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3).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의 성격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후에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다윗이 요나단을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며 애통해하는 것을 보면,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같은 의형제 언약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요나단과의 언약으로 인해 다윗은 정치적으로도 사울의 궁정에서 요나단의 확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애정의 표현으로 자신이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요나단의 행동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요나단이 자신의 왕자로서의 권위와 왕위계승권을 다윗에게 넘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 요나단이 다윗이 다음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중에 20장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도피시키는 장면에서 자신의 집에 대한 인자를 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데, 여기서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음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요나단이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요나단의 행동을 의형제의 언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제 다윗을 자신의 형제로 여기고 자신과 같은 왕자로서 대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자가 입는 옷을 주었고 왕자들의 군복, 무기를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뒤의 관점에서 보면 다윗을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하는 예언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5절은 무시간적인 구문으로 다윗이 사울의 군대장관으로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궁정에 머물며 사울의 군대장관으로서 사울이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그 일에 심사숙고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울은 그런 다윗을 신뢰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울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다윗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무엘상 2장 26절에서 사무엘이 사람들과 하나님 눈에 좋게 여김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무엘처럼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백성의 칭송을 받는 다윗(6-9)

사랑하면 보이고, 사랑하면 움직이고, 사랑하면 지켜냅니다.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던 경험 때문입니까? 양들을 살피며 하늘의 지혜가 일상의 감각들에 새겨졌습니까? 다윗은 백성의 필요를 섬세히 살피고 위기에 솔선수범합니다. 사울의 아들, 사울의 딸, 사울의 백성들이 다윗을 사랑합니다.

 

6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6-9)

 

지혜는 공동체를 세우지만 어리석은 경쟁심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인간중심의 환호는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해도 사람들 사이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지혜로 행하여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무리가 다윗을 더 칭송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맙니다.

 

(1) 여인들의 노래(6-7)

 

다시 블레셋과의 전쟁이 끝나고 군대가 돌아올 때로 시점이 돌아옵니다(6). 여기서 화자는 특별히 다윗이 돌아올 때라는 말을 삽입하여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윗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승리를 축하하며 여인들이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사울 왕을 환영하였습니다.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면서 두 영웅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왔다고 칭송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는 이 노래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린다고 화를 내며, 마치 다윗에게 왕권을 넘기라는 말로 곡해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다윗이 자신과 같은 영웅의 위치를 차지하며 같이 칭송을 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빴던 것인데, 그것을 노래하는 여인들이 다윗을 더 칭송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를 낸 것입니다.

 

(2) 사울의 경계심(8-9)

 

사울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신이 더 칭송받아야 하는데, 애송이 다윗이 자신과 같은 영웅으로 불리는 것이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는데, 이것은 다윗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감시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 그 권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늘 경계하고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공격한 사울(10-16)

자기중심적인 성품은 타락한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지 못하고, 자신이 주인 되어 자기주장만 강하게 주장하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데도 스스로 지키려는 자기방어가 과도하게 작동되어 공격적으로 되고, 분노에 눈이 멀어 명백한 오류를 반복합니다.

 

10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10-16)

 

영적인 세계는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면 즉시 악한 영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사울 왕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하게 세워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1) 창을 던진 사울(10-11)

 

사울 왕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악령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마음에 다윗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제대로 발현되는 순간이 옵니다. 다음 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강하게 임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영이 사울과 다윗에게 강하게 내려 사로잡은 것처럼, 이번에는 악신이 강하게 내려 사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집 안에서 정신없이 횡설수설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사무엘상 10장 10절에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영에 사로잡혀 흥분상태가 되어 마구 말을 해대는 것은 동일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렇게 신령한 것과 악한 것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사울은 이제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던 다윗을 보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실제로 그를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마음에 있던 미움과 악한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성을 잃은 그는 살인이 죄라는 생각 없이 오직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한 것입니다.

 

(2) 천부장으로 임명하는 사울(12-14)

 

12절과 15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한 이유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사울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로 선택하신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도 하나님과 함께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려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만 합니다.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아 자신을 대신해서 전쟁하도록 여기저기로 보냈습니다. 위험한 전쟁 중에 다윗이 죽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윗은 그 모든 일들을 신중하게 잘 처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다윗의 명성도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계략도 권모술수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꾸몄던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름을 백성들에게 알릴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3) 다윗을 두려워하는 사울(15-16)

 

다윗의 형통함에 대한 사울과 백성들의 대조적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형통함을 보고 두려워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백성들도 자신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다윗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악한 계획을 바꾸셔서 다윗을 왕의 재목으로 백성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은 치열한 영적 싸움입니다. 악령이 심어놓은 온갖 악한 생각들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서운한 마음, 시기심, 열등감 등 관계를 허무는 감정이 찾아오거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도록 온전히 자신을 들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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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7-04)


블레셋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사무엘상 17장 41-58절


 

사람의 삶은 평가되고 견주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다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작은 체구나 그의 무기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비약함에 비웃습니다. 그의 평가는 상대적인 비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평소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느냐가 저마다의 평가 기준을 만들어냅니다.

 

  •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 때, 골리앗이 어린 다윗을 보고 비웃으며 저주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달려가면서 물맷돌을 던졌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에 맞아 쓰러진 골리앗의 머리를 베었는데, 자기들의 대표 전사가 죽은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도망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뒤따르며 공격한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말싸움(41-47)

자신의 실상을 모르는 세상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위협과 공갈과 협박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오만한 소음은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까지만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니 거만한 세상의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그들을 반듯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41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1-47)

 

온몸에 놋 갑옷으로 두른 골리앗에게는 도무지 빈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데는 조약돌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1) 골리앗이 보는 다윗(41-42)

 

이스라엘 군대에서 누군가 나오니 골리앗도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싸우기 위해 나갔습니다. 여기서 방패 든 사람을 앞세웠다는 이야기는 골리앗이 완벽하게 무장하고 전쟁터에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맨몸으로 나온 다윗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자신과 싸우러 오는 소년 다윗의 붉고 예쁘장한 용모를 보고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의 어리고 곱상한 외모는 건장하고 남자다운 용사로서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외모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의 비웃음을 사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곱상한 외모에 갑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무기도 막대기 하나 달랑 들고 오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어이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경멸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2) 골리앗의 저주(43-44)

 

그러므로 골리앗은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며 화를 내며, 다윗을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개는 고대 근동에서 하찮고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짐승으로 몽둥이로 개를 때려잡는 것처럼 자신을 잡으려고 하느냐고 조롱하며 불쾌한 심경을 드러냅니다.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것은 고대 전쟁 전에 흔히 있는 의식으로 고대인들은 전쟁을 신들의 싸움으로 생각하였고, 전쟁할 때, 신들이 적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재앙을 내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골리앗의 신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대표적인 신은 다곤과 아스다롯입니다. 골리앗은 계속해서 다윗을 도발하며 다윗의 살을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체를 묻어주지 않고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들판에 버려두겠다는 것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방식입니다. 이렇게 골리앗은 자신에게 맞서 싸우러 나온 소년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겁주기 위해 협박하고 있습니다.

 

(3) 다윗의 선언(45-47)

 

이런 골리앗의 협박에 맞서서 다윗은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보다 가까이에서 직접 마주했을 때 더 위협적이고 무서웠을 골리앗의 건장한 모습과 그의 살벌한 협박에도 다윗은 당당하게 맞섭니다.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으로 자신에게 오지만, 자신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간다고 선언합니다. 골리앗이 자신의 힘과 무기를 믿고 전쟁하러 나오지만, 자신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무기로 삼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골리앗이 비웃고 모욕한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골리앗의 무용과 모든 무기도 여호와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란 뜻입니다.

또한 46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골리앗을 자기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를 죽일 뿐만 아니라 블레셋 군대도 모두 죽여 새와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골리앗이 자신에게 퍼부은 저주를 더 확장시켜 골리앗과 블레셋의 군인들까지 포함시킵니다.

다윗이 전쟁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온 땅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온 땅은 주변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골리앗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며 하나님을 조롱했기 때문에 승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 무리에게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무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한 골리앗을 죽이지 못한 이유가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쟁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동족에게, 그리고 자신을 조롱한 골리앗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으니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외치며 연설을 마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며, 전쟁은 인간의 손이 아닌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신앙은 사무엘상 14:6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라고 고백한 요나단의 신앙과 같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48-54)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구원은 칼과 창과 같은 무기가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권능에 달려있습니다. 전쟁하는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의 승리나 그 대가로 얻는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기려고 하겠습니까? 무엇으로 싸우려고 합니까?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50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52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53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54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48-54)

 

다윗이 믿은 것은 자신의 막대기와 매끈한 돌 다섯 개가 아닙니다. 블레셋의 칼과 창과 단창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뿐입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자신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믿습니다.

 

(1) 다윗의 승리(48-51)

 

드디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골리앗은 천천히 걸어서 다윗에게 다가오는 반면,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재빨리 달려가며 물매로 돌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얼마나 재빠르고 능숙하게 물매를 던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물매를 던지는 동작 하나하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 한 번 물매를 던졌고, 그 돌은 정확히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이런 정확성은 여호와의 손이 다윗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그 충격으로 땅에 쓰러집니다. 골리앗과의 전투가 너무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나버렸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50-51절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장면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말을 50절과 51절에서 반복하여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윗이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이겼다. 골리앗은 자신의 칼에 최후를 맞이했는데, 이것은 골리앗의 죽음을 더욱더 치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칼도 없는 애송이에게 최강의 용사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것은 46절에서 다윗이 골리앗에게 했던 선언을 실행으로 옮긴 것입니다. 천하무적 같던 골리앗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소년 다윗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2) 골리앗의 죽은 후(52-54)

 

골리앗의 죽음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블레셋 군사들은 도망하였고, 이스라엘 군대는 일어나서 블레셋 군대를 쫓기 시작하여 그들의 고향인 가드와 에글론까지 쳐들어갔습니다. 부상자들이 길에 엎드러졌다고 묘사한 것 역시 46절에서 한 다윗의 선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크게 이겼고 많은 노획물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와 갑주를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에서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다윗이 승리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눈앞에 보이는 골리앗에게 겁먹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시 만난 다윗(55-58)

진정한 영광과 명예는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누립니다. 오직 사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소망하고 상상하고 확신한 다윗에게 그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벅찬 승리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55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58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55-58)

 

다윗은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쓰러뜨린 후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벱니다. 이를 본 블레셋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고,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을 쫓아가 쓰러뜨렸으며, 돌아와서는 그들의 진영을 노략 하였습니다.

55-58절은 사울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으로 시간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전으로 돌아갑니다.

 

(1) 다윗에 관해 아브넬에게 물어보는 사울(55-56)

 

사울은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 다윗이 누구의 아들이냐고 군대 장관 아브넬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다윗이 누구의 아들인지 몰랐습니다. 여기서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은 다윗의 가문과 그 가문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 등 다윗의 전반적인 배경을 질문입니다. 다윗이 이전에 사울을 잠깐씩 섬기기는 하였지만, 사울이나 신하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시동이었던 다윗과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피상적으로 대충 알았던 다윗의 배경이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아브넬에게 누구의 아들인지 알아보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다윗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사울이 다윗의 대담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에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는 금방 끝났고 아브넬이 알아오기도 전에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손에 들고 돌아왔습니다.

 

(2) 다윗에게 물어보는 사울(57-58)

 

아브넬은 다윗을 사울에게 인도하였고, 사울은 직접 다윗에게 누구의 아들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당신의 종인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종’이란 말로 다윗은 사울에게 철저한 충성맹세를 한다. 사울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의 음성이 두려워 집니다. 불법적인 외적인 형식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시신과 마음을 빼앗길 위험이 높은 미디어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앙훈련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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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7-03)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선택된 다윗

사무엘상 17장 24-40절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중심에 믿음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이란 착각에 근거한 교만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평소 주어진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즉 성실성과 책임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 쌓여 담대한 믿음을 이룹니다.

 

  •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결심하는 때부터 골리앗과 실제로 싸우려고 나가는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말을 듣고서 분노하여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사람들에게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 묻습니다. 이 광경을 보았던 큰형 엘리압이 다윗을 책망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자기 군복과 갑옷과 투구와 칼을 주지만, 다윗은 평소에 사용하던 막대기와 물맷돌을 들고 나아갑니다.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주어질 보상(24-30)

우리가 용기 있는 발언과 행동을 하려고 하면, 딴지를 걸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해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하려고 하는 일가 능력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짜 훼방하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합니다.

 

2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7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9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30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24-30)

 

다시 골리앗이 등장하자마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을 먹고 후퇴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골리앗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여 도망했습니다. 사울 왕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 대한 큰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상을 걸어놓아도 골리앗과 싸우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과 정면으로 맞붙고 있습니다.

 

(1) 골리앗에 대한 백성의 반응(24-25)

 

이런 골리앗의 등장과 도발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24). 이들은 여전히 골리앗을 두려워하며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술한 것은 현재 전쟁터에서 다윗이 보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반응입니다(25). 이들은 골리앗을 이스라엘을 모욕하기 위해 계속해서 올라오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40일 동안 동일한 상황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많은 재물과 자기 딸을 주고 집안의 모든 의무를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정보도 서로 주고받습니다. 이렇게 군사들은 골리앗과 전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뒤에서 이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고, 사울은 구원자로서의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 다윗의 질문(26-27)

 

골리앗을 본 다윗의 반응으로 다윗은 골리앗의 말과 행태를 보면서 두려워하기보다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26). 여기서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는 물음은 자신이 죽이겠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는 골리앗을 죽이는 것을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을 제거하는 일로 보았고, 그런 영웅에게는 응당 정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골리앗에 대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라고 경멸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라는 말은 감히 부정한 인간이 살아계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에 차서 한 말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짜 계시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말은 자신이라도 당장 나가 골리앗과 싸워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한 벌을 주어야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변의 군인들은 다윗의 말을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치기 정도로 생각하고 사울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한 상급을 다윗에게 알려줍니다. 이들은 다윗의 분노와 결심을 무시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골리앗과의 싸움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3) 엘리압에게 책망 당한 다윗(28)

 

다윗의 큰형 엘리압은 다윗이 골리앗의 행태에 분노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다윗에게 매우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왜 이 전쟁터로 왔느냐? 양은 누구에게 맡겼느냐?”고 묻는데, 이것은 다윗에게 왜 양치기나 하지 전쟁터에 얼씬거리느냐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원래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아이인데 여기 온 것도 전쟁을 구경하기 위함이라고 인신공격을 합니다. 그는 다윗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자신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골리앗을 죽이겠다는 다윗의 말에 화가 나 악의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엘리압이 이렇게 화를 내며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다윗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40일이 넘도록 조롱을 당하면서도 골리앗의 어마어마한 체구에 압도되어 엘리압은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큰 포상을 내걸어도 골리앗이 두려워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집에서 양이나 치던 막내가 자기가 나서서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하니 지금껏 전쟁터에 있던 자신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난 것입니다.

 

(4) 다윗의 대답(29-30)

 

형 엘리압의 질책을 받은 다윗은 자신은 말밖에 한 것이 없는데, 왜 화를 내냐고 형에게 반문합니다.

자기 말을 듣고 화를 내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다윗이 보기에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 맞서 싸워 그를 죽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이 화내는 것에 개의치 않고, 다시 군사들과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압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이새의 장자로 용사로서 풍모와 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다윗의 말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더라도 자신의 어린 막내 동생을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인신공격하는 것은 형으로서 어른으로서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윗이 신앙의 눈으로 골리앗을 본 반면, 엘리압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골리앗의 외모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압을 거절하시고 다윗을 선택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대화(31-37)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상대방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무모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도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모한 도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믿음을 보기가 어려운 이유는 믿음은 상식이라는 깨뜨리는 무모함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31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32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33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31-37)

 

신하들에게 골리앗과 싸움하겠다고 한 사람을 소개받습니다. 사울이 그를 보니, 다름 아닌 수금을 타던 미소년 다윗이었습니다. 사울은 당연히 작은 소년 하나만 잃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은 건장한 용사인데, 미소년과 같은 다윗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기에 얼마나 충분한 사람인지 근거를 대며 단호합니다.

 

(1) 사울에게 자신의 각오를 말하는 다윗(31-32)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 말한 것이 사울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부릅니다. 사울을 만난 다윗은 사울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한 뒤, 자신이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다고 합니다. 전쟁도 한번 해보지 않은 홍안의 소년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왕 앞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아마도 사울도 다윗을 보고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는 기대로 불러왔더니, 어린 소년이 나타난 것을 보고 실망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다윗 너는 골리앗과 싸울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다윗은 아직 어린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골리앗은 타고난 체격 조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참여하고, 이미 다윗만 한 나이에는 용사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윗을 소년이라고 부른 것은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2) 사울의 말과 다윗의 대답(33-37)

 

사울에게서 전투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받은 다윗은 자신이 왕이 생각하는 것만큼 싸움에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쫓아가서 곰이나 사자를 쳐서 그 입에서 새끼들을 꺼내왔다고 합니다(34). 또 자신을 해하려고 일어나서 공격하면 그 턱수염을 잡고 쳐서 죽였다고 말합니다(35). 사자와 곰과 싸우는 다윗의 모습은 삼손처럼 한 방에 사자와 곰을 쳐서 죽이는 멋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덩치가 큰 사자와 곰을 기를 쓰고 쫓아가 뒤에서 한 방 먹이고 정신없는 틈에 새끼를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새 정신을 차린 짐승이 다윗을 공격하려고 달려들면, 덩치가 작은 다윗은 짐승의 약점인 수염 같은 곳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죽을 때까지 때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다윗은 힘이 부족하여 삼손이나 다른 용사들처럼 한 방에 짐승을 때려잡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의 새끼 양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던 근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사자나 곰도 때려잡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도 그 짐승들처럼 때려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과 같은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싸우는 모습은 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곰이건 사자건 3미터의 거인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지금 골리앗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기에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맹목적일 만큼 혹은 무식하게 보일 만큼 용감할 수 있었던 이유가 37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자신을 사자와 곰의 손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곰이나 사자와 싸우면서 자신의 목숨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은 비록 어린 양치기였지만, 양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전쟁 원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움직이고 싸울 때 여호와께서는 그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시는 분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다윗을 더 말리지 못하고 사울은 다윗에게 싸우러 가라고 허락하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의 말을 해줍니다.

 

골리앗과 싸울 준비한 다윗(38-40)

위기가 찾아왔을 때 자기 능력만을 믿고 반응하는 것이나 두려워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것이나 분노하는 것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믿음 없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반면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무모할 정도로 담대했습니다.

 

38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38-40)

 

사울은 만류함에,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단호한 믿음을 보고 사울은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출전하게 합니다.

 

(1) 사울의 무기와 군복(38-39)

 

사울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을 걱정하여 자신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을 입혀주고 자신의 칼까지도 주었습니다. 사울의 칼은 이스라엘에 단 두 개밖에 없는 철로 만들어진 칼 중 하나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차례차례 갑옷을 입혀주는 모습은 마치 시종이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의 옷을 입혀주는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2) 다윗의 무기(40)

 

하지만 난생처음 완전 군장을 해본 다윗은 이리저리 걸어보다가 익숙하지 않아서 입고 가지 못하겠다며 전부 벗어버립니다. 그 대신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한 자신만의 무기인 막대기와 시내에서 고른 돌 다섯 개를 목자의 가방에 챙기고 물매를 손에 든 채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서 나갑니다. 철저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서 나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갑옷을 입고 칼을 쓰는 것이 유용합니다. 그래서 효율적이고 유용한 일반적인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이 남들과 다를 때는 다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완전 군장을 하고 있고 많은 군사도 데리고 있으며, 전쟁 경험도 많은 사울과 아무런 군장 없이 맨몸으로 막대기와 돌 다섯 개와 물매를 들고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가는 소년 다윗을 비교함으로써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소유한 권력이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한분만 의지하고 의기양양하게 나가는 소년 다윗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는 걱정스럽고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함께하신 신실하신 분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해 보았기에 두려움이 없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담대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을 모방하는 무기보다는 자신의 체질에 맞는 영적 무기로 나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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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7-02)


믿음의 시선으로 골리앗을 본 다윗

사무엘상 17장 12-27절


 

세상의 전쟁에서는 손자병법 모공편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적을 알고 나는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피지기가 승패의 큰 영향을 미치지만, 영적 전투에서는 승패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즉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하나님 앞에 있는 적과 자신을 바로 인식하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 이새의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터로 가고 다윗은 양을 칩니다. 이새가 다윗에게 곡식과 떡과 치즈를 가지고 가서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고 합니다. 다윗이 형들에게 문안할 때 전쟁터에는 골리앗이 나와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에게 분노합니다.

 

평범한 일상에 다윗(12-16)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경건한 소수를 통해서 이 땅에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모세가 가장 무능해 보이는 미디안 40년 무명의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을 제패했던 로마의 황제와 군대에 비하면 나사렛 목수를 따른 사람들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배우지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셨습니다.

 

12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3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4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15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16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라(12-16)

 

본문에서는 다윗의 모습을 부각 시키기 위해 골리앗과 다윗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양을 치는 평범한 소년 다윗과 전쟁터에 적국에 위험을 주는 위대한 장수인 골리앗을 비교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장수 골리앗의 등장으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전세는 단번에 블레셋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 일상적인 다윗(12-15)

 

이스라엘의 군대가 골리앗과 블레셋의 위협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휩싸여 제대로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한 믿음의 사람을 준비시켜 역사의 무대 위로 이끌고 계십니다. 이 대단한 사건이었기에 성경은 다윗 가정의 배경을 다시 소상하게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소년 다윗을 등장시키십니다. 본문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용사로 쓰임 받기 위한 자세와 원리를 소개합니다.

베들레헴 살고 있던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고 그중에 막내였던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 세 아들은 사울이 소집한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세 아들이 아니라 집에 남아서 양들을 돌보고 있는 다윗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는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어린 막내아들이었던 다윗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지만(16:14-23), 사울이나 그의 신하들의 눈에는 다윗은 그저 사울이 악령에 사로잡힐 때 수금을 타는 존재감이 없는 한 어린 소년일 뿐이었습니다(17:55-58). 그래서 이따금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러 왕궁에 갈 뿐,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치는 군사가 아닌 양치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현재 보잘것없게 여겨져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2) 전장에 장수 골리앗(16)

 

각각 언덕에 진을 치고 대치한 상태에서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되지 않은 채, 양쪽 군대는 40일간 교착상태로 있었습니다.

날마다 골리앗의 도발만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이스라엘을 조롱할 뿐이었습니다. 그 정도 모욕과 조롱이라면 누구라도 나설 법한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블레셋의 무기와 강성한 군대를 바라봤기에 두려워 떨기만 했던 것입니다. 대적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면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전쟁터에 나타난 다윗(17-21)

항상 위기와 고난은 개인의 운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줍니다. 국가적으로는 위기의 때에 영웅이 배출되고, 개인적으로는 위기의 때에 숨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마치 몸의 지체 하나가 장애를 갖게 되면 다른 지체들이 연약한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언제든지 우리를 하나님께 행하시는 새로운 사역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17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19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20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21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더라(17-21)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것은 나이가 어린 탓이고. 형제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생업과 군인들의 보급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기 속에서 역사의 전면에 믿음의 사람을 세우시는 사역을 해나가십니다.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전조가 됩니다.

 

(1) 아버지 심부름을 순종한 다윗(17-19)

 

다윗 여덟 형제 중에서 세 명이 전쟁터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전쟁터에 나간 세 아들들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이새는 다윗을 불러 세 아들을 위해 얼마간에 식량을 보내고, 세 아들들이 잘 있는지 안부를 알 수 있는 징표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시킵니다.

이에 다윗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엘라 골짜기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전장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투하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다윗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소를 몰다가 부름을 받았듯이(11:5), 다윗도 일상 가운데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일상 가운데 부르십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에도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2) 전장에 나타난 다윗(20-21)

 

다윗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이 치던 양들을 맡기고 전장으로 향했습니다(20).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이새가 명령한 대로’라는 말은 다윗이 아버지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일을 내버려 두지도 않고 차질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이렇게 철저한 순종의 자세와 맡겨진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엘라 골짜기에 등장한 골리앗(22-27)

세상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세력은 없습니다. 성도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믿음을 근거로 악한 세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진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악의 대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밥에 불과합니다.

 

22다윗이 자기의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23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2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7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22-27)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사울 왕이 내놓은 궁여지책은 그저 보상이었습니다. 사실 사울은 골리앗을 꺾을 자가 이스라엘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고 세상의 방법을 고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이 해야할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1)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21-25)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걸음을 역사적인 현장까지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지 이새의 심부름에 순종하여 가져온 짐을 맡겨 두고, 먼저 전장에 있는 세 형들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그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22). 다윗은 아버지 이새가 심부름시킨 일들은 다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살벌한 전쟁터에서 빨리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으로부터 싸움 돋우는 자인 골리앗이 등장합니다(23). 그는 전과 같이 블레셋이 전열을 벌리고 사기를 북돋우려고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조롱하며 위협하면서 고함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날마다 골리앗은 양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동안 이미 40일째 여호와와 이스라엘 군대를 목욕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의 등장만으로 이스라엘 군대 내부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철갑으로 무장한 거대한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더불어 두려움에 쌓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전해 줍니다. 이로써 긴장은 앞선 이야기보다 훨씬 더 고조됩니다(24).

사울 왕은 전령을 보내어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25)라고 약속했습니다.

 

(2) 분노하는 다윗(26-27)

 

다윗은 이 전령이 전한 말을 잘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주어질 보상에 관해 묻습니다(26). 그는 골리앗을 죽이는 보상에 관심이 아니라, 골리앗이 행하고 있는 일을 이스라엘의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조롱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장면을 보고 분노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울의 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것을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한 것으로 간주한 분노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근대를 조롱하고 있는데도 정작 선택된 백성들은 주눅 들어 있고 두려워하고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누구 하나 비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모하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향한 책임감이 그를 안전지대에 속한 다수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국면 전환 요소(Game Changer)로 등장합니다. 이제는 사울 왕 곁에서 수금을 연주하며 왕의 무기를 담당하는 소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로 당당히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때를 기다리며 다윗처럼 성실과 충성, 열정과 최선으로 준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골리앗은 겉으로는 크고 힘이 세어 누구도 이길 수 없어 보였지만, 본질적으로 죽을 운명에 놓인 자였습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은 사람의 눈으로 강하게 보여도 의의 세력에게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두렵지 않습니다. 악한 세력의 멸망과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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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7-01)


블레셋 골리앗에게 조롱받는 이스라엘

사무엘상 17장 1-11절


 

다른 사람을 보면서 비웃거나 얕보고 놀리는 것을 ‘조롱(嘲弄)’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롱당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조롱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타인들로부터 조롱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단은 조롱이란 도구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하지만 사단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조롱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롱하던 사람이 조롱받으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세상에 조롱받는 부분 또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요나단으로 인해 대승을 거둔 후 잠잠하던 블레셋이 이번에는 다윗의 지파인 유다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이번 전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 사울과 새롭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다윗이 처음 맞이하는 전투이며, 두 사람이 각각 어떻게 전투에 임하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 모두 거인 장수 골리앗을 만났지만, 사울과 다윗의 반응은 매우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다윗이 대중 앞에 나타나는 계기가 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1-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주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붙여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블레셋과 같은 존재를 두셔서,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과 불신앙을 책망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권능의 도구로도 사용하십니다. 성도들이 나아가는 길에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존재들이 앞을 가로 막기도 합니다. 그때에 자신의 믿음을 확실히 보여줄 기회입니다.

 

1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2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3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1-3)

 

16장에서 사울 대신에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에게는 악령이 임해서 다윗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다윗이 왕에 오르진 않았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요나단의 활약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다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유다 평지에 위치한 소고와 아세가 사이 에베스담밈에 진을 쳤습니다. 소고와 아세가는 블레셋 성인 가드에서 유다 지역인 엘라 골짜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역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곳은 유다 쉐펠라의 중심지역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에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을 막기 위해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블레셋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3절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 산과 저쪽 산에 위치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편에 진을 치고 있다는 의미이며,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사무엘상 13-14장의 전쟁에서 블레셋 군대가 철병거 30,000대와 마병 6,000명과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군인을 끌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블레셋 부대의 규모와 사울 부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외모(4-7)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유혹이 밀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게을리하면 대적들이 삼키려고 달려듭니다. 이스라엘의 침략은 블레셋이 강할 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세상의 유혹이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흔들리면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4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4-7)

 

이번에도 블레셋은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하며 나타났는데, 그것은 골리앗이라는 장수의 존재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싸움을 돋우는 자’로 소개됩니다. 이들은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하고 있는 군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싸움을 걸거나 상대방 장수와 일대일 결투를 하는 자들입니다. 한참 후대의 전쟁 문서에서는 이 표현이 보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골리앗의 경우는 주로 일대일 결투를 통해 상대방의 사기를 죽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세가에서 멀지 않은 가드 사람인데, 가드는 블레셋 다섯 성읍의 하나로 블레셋 평야에서 유다 평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으며, 여기서 아세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골리앗의 특징은 엄청난 거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의 신체적 특징을 자세히 언급하는데, 이것은 골리앗이 그 체구만을 가지고도 사울 군대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키는 6규빗 한 뼘으로 1규빗은 대략 45-50cm 정도 되므로 대략 3m 정도 되는 장신입니다. 사울도 일반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크다고 하였는데, 그런 사울보다 1m 이상 큰 체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전신에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비늘 갑옷은 놋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만들어 하나하나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보호와 가벼움과 활동의 자유로움이 충족되는 갑옷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갑옷의 무게가 5000세겔 즉, 57kg 정도 됩니다. 57kg의 갑옷을 입고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골리앗이 키뿐 아니라 체격도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리에는 놋 각반을 찼고 어깨에는 놋으로 만든 단창을 메고 나왔는데, 창의 두께는 베틀 채 정도로 두껍고 창날의 무게만 600세겔 즉, 6.8kg 정도 되었습니다. 창은 여러 번 던져서 공격하기 쉽도록 고리와 줄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골리앗이 가진 창의 모양은 전형적인 에게 해 지역의 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를 든 자가 골리앗의 앞에서 방어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아마 골리앗의 방패는 일반 방패의 두 배는 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골리앗이 엄청난 거구에 완전한 군장을 갖추고, 방패를 든 병사까지 앞세우고 이스라엘 진영 앞에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습에 완전히 기가 죽었을 것입니다.

 

골리앗의 조롱(8-11)

우리는 어두운 전망, 부정적인 말, 위협적인 말 등을 들을 때, 쉽게 의욕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케 하는 말을 들을 때, 반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로 대응하면 악한 기를 꺾을 수 있습니다. 불의 세력, 사단의 세력은 달콤한 말과 위협적인 말로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하지만 이것들과 맞서 싸워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8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11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8-11)

 

이렇게 완전군장을 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난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도발하기 시작합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서서 왜 너희가 전쟁을 위해 전선을 구축하려고 나왔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한 서론입니다. 골리앗은 자신은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종이 아니냐고 하는데, 이것은 블레셋 사람으로서의 자신과 사울의 노예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조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블레셋 대표로 싸울 것이니 사울의 종들 중 한 명을 뽑아서 자신에게 내려보내라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내려보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부대가 언덕 위에 있고 골리앗은 엘라 골짜기로 내려와서 이스라엘에게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싸워서 자신을 죽일 수 있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너희의 종이 될 것이고, 만일 자신이 이기면 이스라엘 사람이 블레셋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는 고대 전쟁에서 흔히 있는 일대일 싸움을 제안한 것입니다. 장수들의 일대일 싸움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군사들의 사기에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장수들의 일대일 싸움이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치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 골리앗은 일대일 싸움을 통해 전쟁 자체의 승패를 결정하자고 말하는데,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조롱입니다. 사울의 종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종이 되라고 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대놓고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며, 자신의 말에 열 받았으면 자신과 싸울 사람을 보내라고 약 올립니다. 일대일 승부로 전체 승부를 결정짓자는 골리앗의 제안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말로 백 명이 오든 천 명이 오든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결국 자신을 이겨야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길 수 있고, 자신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한 전면전을 한다 해도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승산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롱과 모욕을 한 후에 다시 한번 자신과 싸울 사람을 보내라고 통고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자신과 같은 장수도 없고 자신과 붙어 싸울 만한 실력을 가진 용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도전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겁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골리앗의 작전이 사울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무 잘 맞췄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블레셋 사람의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좌절하였고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성경에서 골리앗의 외모를 자세하게 묘사한 것은 백성들의 두려움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골리앗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적인 골리앗만을 보고 자신들과 늘 함께하시고 싸워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삶에서 무수한 골리앗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들과 힘과 권력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공의와 정직과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 수많은 골리앗들에게 우리가 전부 죽을 것 같고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으며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보지도 않고 골리앗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전쟁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것이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14:6). 아무리 골리앗이라도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교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전력과 상대의 전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대의 전력과 하나님의 전력을 비교해야 합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객관적 전력을 확보할 때 승리를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신뢰를 보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군사력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께 대한 강한 믿음입니다. 골리앗을 볼 것이냐, 하나님을 볼 것이냐? 이것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단단히 붙들고 계십니다. 어떤 골리앗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원망이나 두려워하지 않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성도들을 보호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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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6-02)


악령의 지배를 받은 사울

사무엘상 16장 14-23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작고 사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작은 섬김이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무슨 큰 영향을 미치겠나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거대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입니다.

 

  •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니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괴롭힙니다. 신하들은 사울에게 수금을 타면 나아질 것이고 하면서 다윗을 추천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해 자기의 무기 드는 자로 삼습니다. 사울이 악령에게 사로잡힐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나고 회복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떠난 사람(14-16)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탄이 만든 무질서와 혼돈을 질서와 조화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심령의 중심에 여호와의 영으로 채우지 않으면, 다시 악령에 속박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무질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악한 영에 미혹되어 혼돈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창조의 리듬과 하모니를 따르는 조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임을 암시합니다.

 

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16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14-16)

 

한 나라의 왕이 세워지고 폐위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인 변수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세워지고 폐위되는 과정은 다른 세속 국가와는 전혀 다른 차원과 원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치적이나 전쟁의 능력, 국민의 지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하나님 중심의 신정국가이기에 왕의 직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뜻을 백성들이 평안을 누렸습니다. 반대로 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숭배에 넘어지면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했고, 결국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1) 악한 영으로 괴로움을 겪는 사울(14)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는 그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악령이 차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사울이 자연인의 상태로 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떠난 그 빈자리에 악령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했다라고 하십니다.

후에 사울이 다윗에게 보인 행동을 보면, 악령으로 인해 사울에게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 피해망상증, 그리고 정신 분열 증세가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떠나자 악령이 그 빈집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예언도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10:9-13). 그런데 악령에게 지배당하며 시달리는 지금의 모습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확증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도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는 자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울에게 나타난 현상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임을 보여줍니다.

 

(2) 수금 타는 자를 추천하는 신하(15-16)

 

신하들은 사울에게 수금 연주로 증세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고, 사울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수금은 주로 기쁨과 회복의 목적으로 연주되던 악기였습니다. 왕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걱정해야 할 사울이 오히려 신하들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수금 연주로 사울의 상태가 잠시 좋아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음악 치료사가 아니라 영혼의 치료자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사람(17-20)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더 자유스럽고 편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악한 존재가 들어와 지배하고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진공상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어둡고 악한 영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악한 자가 마음을 지배하고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7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18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19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20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17-20)

 

사울은 신하들의 말을 듣고 수금을 잘 타는 자를 구해 오라고 명합니다(17). 신하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했습니다.

그는 특히 다윗에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고 설명하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라고 평가하는데, 사실 이는 왕의 자격을 말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18) 목동 다윗이 악신 들린 사울을 치료하는 음악가가 되어 궁중에 들어갑니다.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왕으로 그가 첫 번째 한 일은 나쁜 왕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사울은 이새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이때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이 아니라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보내라고 합니다(19). 이스라엘의 왕이 양을 치는 목자로 자주 비유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표현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목자, 곧 왕이 될 자임을 암시합니다. 이새는 예물을 준비해서 다윗을 사울에게로 보냅니다(20). 이렇게 이스라엘의 왕을 교체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차근차근 진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다스리는 자(21-23)

성도는 악한 길이 아니라 선한 길로 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산 제사, 영적 예배의 삶을 살아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해 하나님과 끊임없는 소통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21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21-23)

 

사울의 전령에 의해 부름받은 다윗은 사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다윗은 사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에 임명합니다(21). 그리고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 다윗의 왕을 모시는 자가 되었다고 알리는데(22), 이로써 이새는 근심을 덜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수금 연주자를 구한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다윗이 왕의 직무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괴롭힐 때, 다윗이 수금을 들고 연주하면 악령이 떠나는 일이 벌어집니다(23).

겉으로 보면 여전히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고 다윗은 사울의 신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사울 위에 다윗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체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역사를 주관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이런 영광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악신이 들 때마다 수금을 켜서 사울을 편안하게 하고 악신이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사울이 하나님의 영을 받기 위해 수금을 들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악신을 제거하기 위해 수금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수금을 타며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대신해서 선택한 왕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있고 그 결과 여호와의 악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평안하게 다윗의 수금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 오게 된 것은 우연히 다윗을 알고 있던 한 소년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우연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신 것으로 봅니다. 사울과 다윗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비극적인 모습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을 받은 다윗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울은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과 영적인 세상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악령도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으며, 여호와께서 누군가를 심판하실 때 악령을 보내어 재앙과 분란(삿 9:23; 왕상 22:19-22)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악령은 여호와께 버림받은 사울이 하나님께 받은 벌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살던 사람이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면 일반 사람보다 더 악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악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고 우리 영혼과 육신을 망가뜨립니다. 성도는 과거에는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악한 영이 틈타지 못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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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6-01)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는 사무엘

사무엘상 16장 1-13절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다양한 부분에 평가하며 점수를 줍니다. 외모와 개인의 능력에 시선을 보내고 능력에 관해 관심을 집중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는 사실에 더 중요한 사람의 됨됨이 중심을 놓치곤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선택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 선지자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 다윗에게 기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제사를 핑계로 이새의 가족을 초청하였습니다. 엘리압부터 시작하여 이새의 일곱 아들을 자기 앞으로 지나가게 했지만, 그중에 여호와께서 선택한 자가 없었습니다. 막내 여덟째 다윗을 데려왔을 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일어나 기름을 부어라’라고 명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였습니다.

 

사무엘의 베들레헴 방문(1-5)

모두가 두려워하면서 나서기를 꺼릴 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일꾼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늘 쉬운 길이나 탄탄대로만 지나지 않습니다. 역경 속에서 믿음과 용기를 발휘해 분연히 일어서는 이들에 의해 전개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공동체가 처해 있을 때,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지혜와 용기가 있습니까?

 

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2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3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4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1-5)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사무엘도 슬퍼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후회의 자리에서 일어나 전혀 낯선 고장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왕으로 보셨습니다.

 

(1) 여호와의 명령(1)

 

사울이 버림받은 일로 여호와께서 새로운 왕을 선택하기 위해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버림받은 일로 인해 깊은 슬픔과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며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슬픔에 잠긴 사무엘을 흔들어 깨우는 말씀이 ‘너는 언제까지 사울을 위해 슬퍼하겠느냐?’라고 임했습니다. 사무엘의 마음이 비통했던 것은 사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겠고, 이스라엘에 대한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새로 세워질 왕은 ‘나를 위한 왕’을 선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사울을 선택하실 때는 ‘백성을 다스릴 자’, ‘백성을 구원할 자’로 표현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을 위한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왕을 선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2) 사무엘의 염려(2-3)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있는 사무엘에게 다른 왕을 준비하러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직 현직 사울 왕이 통치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왕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에 사무엘은 사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며 두려워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령하신 것은 사울에게 반역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왔다고 하고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라는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왕을 뽑는 권한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였다는 표현을 통해 불순종한 사울과 순종하는 사무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3) 베들레헴 장로들(4-5)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성읍의 장로들은 사무엘을 보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사무엘 선지자가 자기들에게 어떤 재앙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평화를 위해서 온 것인지 재앙을 알리기 위해서 온 것인지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평화로운 일, 즉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다고 안심시킨 후 장로들을 제사에 초청하고 자연스럽게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초청했습니다.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성결하게 하라고 하는데,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만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6-13)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외적으로 스팩이나 여건에 따라 평가합니다. 중심보다 겉으로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에서 바르게 평가하고 선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시각을 가지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6-13)

 

진정한 왕은 여호와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입니다. 그가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의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 엘리압(6-7)

 

사무엘의 초청에 이새와 아들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사무엘은 그중에서 왕으로 세울 자를 찾습니다.

사무엘은 이세의 첫아들을 엘리압을 보았을 때, 첫눈에 반할 만큼 왕으로서 적합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엘리압은 그 가정의 장자였고 늠름하고 준수한 모습이 왕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품격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여호와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잘생기고 건장한 외모는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모습입니다. 백성들도 사울의 키가 다른 사람보다 머리하나 더 큰 것을 보고 자신들의 왕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압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기 때문에 마음을 보고 평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 다른 아들들(8-10)

 

장자 엘리압을 시작으로 삼마 등. 모든 이새의 일곱 아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일곱 아들 중에는 모두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 활동한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겠습니까!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리 분별도 탁월했을 만큼 그의 인생은 대단한 경륜으로 함께 해 왔습니다. 이렇게 탁월한 선지자의 판단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라고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하지만, 하나님께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새가 데려온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다 지나갔지만, 하나님께 지명하신 자가 없었습니다. 의아했던 사무엘은 이새에게 ‘내 아들들이 다 여기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이새의 말은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이새가 생각하기에도 막내 다윗은 왕이 될 제목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아직 어리고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는 다윗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리고 작은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항상 장자보다 차자를, 큰 자보다 작은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원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우선시하고 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은 단호하게 막내가 올 때까지 식사도 안 하고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3) 막내 다윗(11-13)

 

들판에 있던 다윗은 전갈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첫인상은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선택하셨지만, 인간인 사무엘의 눈에는 다윗의 뛰어난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쁜 눈과 잘생긴 얼굴과 붉은 피부색을 가진 다윗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울이나 엘리압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내고 구원할 강한 용사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조차 다른 아들들을 다 데리고 나오면서 막내 아들 다윗에게 들판에서 양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판단과 경험은 한계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다윗의 주심을 보셨습니다.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12)라고 새로운 왕을 지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여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크게 감동되어 함께하기 시작하였습니다(13). 이것은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은 얼마 후 여호와의 영을 받은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셔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다윗은 가장 작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이자 미래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셨지만, 여전히 그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구별하자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선택한 자를 합당한 그릇으로 빚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준비된 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자를 준비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시고 직분을 주셨다면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합당한 그릇으로 우리를 빚어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세상의 외모와 자격을 가졌던 그렇지 못하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할 지혜와 능력도 부어주실 것입니다. 부르심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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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5-02)

 


범죄한 사울 왕을 버리신 하나님

사무엘상 15장 16-35절


지도자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필요와 생각을 자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철저히 금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종종 자신의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데, 진행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진멸 명령은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좋은 가축들과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놓습니다. 이런 불순종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을 후회하십니다. 하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무엘(16-23)

순종의 3대 원칙은 일을 하면서 ‘즉각적으로’ ‘기쁘게’ 그리고 ‘온전하게’입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난 순종은 불순종에 가깝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한 후에도 그 진정성을 보이지 못하고 행동과 삶으로 변화된 모습을 입증해 보이지 못하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큼 기대와 열망 속에 왕으로 뽑힌 사울은 실망스러운 면모를 자꾸 노출합니다. 사울의 입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16-23)

 

사울은 이것도 하나님께 순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양과 살찐 소를 죽이는 것이 아까웠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묵과했습니다.

 

(1) 사무엘의 책망(16-19)

 

사무엘이 사울에게 진멸을 행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지만,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조용히 하라’고 경고하고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사울이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울은 자신의 지파와 집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피력하였고(9:21), 왕으로 선택된 순간에는 감당하기가 두려워 숨기까지 하였습니다(10: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감 없는 사울을 위해 세 가지 표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확신을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진멸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전쟁하라고 부가적으로 설명합니다. 19절은 수사의문문을 통해 사울의 죄를 지적하는데, 수사의문문은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비난의 논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탈취물을 취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이 여호와 눈에 악한 행동이라고 비난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하신 이유는 아말렉이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아말렉을 ‘죄인 아말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죄인인지는 이미 2절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심판을 하실 계획이었고 그래서 노획물을 얻는 일반 전쟁이 아닌 진멸 전쟁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노획물을 남겨 둠으로써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심판의 진멸 전쟁이 아닌 노획물을 얻기 위한 일반적인 전쟁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입니다.

 

(2) 사울의 변명(20-21)

 

하지만 사울은 이런 사무엘의 지적에도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각을 끌고 왔고 백성들을 다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사울의 말에 모순이 있는데 진멸했다면 아각도 죽였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아각을 살려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자신은 온전히 순종했지만, 백성들이 당신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또다시 변명합니다.

 

(3) 여호와의 선고(22-23)

 

이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번제나 다른 제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사 드리기 위해 가축들을 남겼다는 사울의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으로 제사나 번제를 싫어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종교적 행위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비교할 때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희생을 실천하여 약자를 보호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 없이 예배 드리고 헌금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순종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점치는 것과 우상숭배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존재를 의지하고 믿는 것을 말하는데, 불순종과 완고함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믿는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배교로 죽음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불순종과 완고함은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생각보다 우선시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모든 것은 전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사무엘은 불순종한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였다고 선언하며,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사울(24-31)

부모님은 우리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좋아한다고 커닝과 같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낮은 자리에 있을 때는 겸손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을 때도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2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30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1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4-31)

 

하나님께서 종들을 통해 책망하신 시점은 아직 늦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와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고 속히 돌아오라는 사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주어진 마지막 기회조차 변명과 핑계로 상황을 피해 보려고만 했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1) 제사를 요구하는 사울(24-25)

 

사울의 가장 큰 불행은 돌이킬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지 못한 것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죄를 지적했을 때,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손으로 아말렉 왕 아각과 남겨둔 짐승을 진멸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무지나 연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을 알고 찾아온 사무엘에게 승전보를 전하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좋은 짐승들을 살려 주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왕을 거절했다고 최후의 통첩을 보내자, 그제야 사울은 자신의 죄를 시인합니다. 두 가지 잘못을 깨달은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내가 맥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청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백성의 여론을 따랐습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울은 일단 권력을 갖게 되자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백성들의 눈치만 살피며 일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으니 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돌이킨 것입니다. 사무엘의 개인적인 인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2) 거절하는 사무엘(26-29)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라도 여호와의 자비를 얻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이런 사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23절에서 한 말을 반복하면서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26)라고 이미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죄를 지적받자 바로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가 비록 더 흉악한 죄를 지었지만, 회개의 기회에 올바로 반응했기에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왕권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일 죄를 지었다면 빨리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시인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고 사람과 같이 결정을 번복하거나 뒤집는 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해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어느 날에는 회개할 수 없는 시간이 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 회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고후 6:2).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키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 다시 제사를 요구하는 사울(30-31)

 

사무엘은 사울에게 최후의 통첩을 전하는 이후, 단호하게 돌아서자 사울은 다급하게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옷자락을 붙잡는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급하게 붙잡았던지 이때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져 버립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찢어진 옷에 대해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찢어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겠다고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번복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변개함’으로 번역된 단어 ‘이나헴’은 11절과 35절에서 ‘후회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11절과 35절에서는 후회하신 하나님께서 29절에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혹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9절의 ‘변함이 없다’는 표현은 미래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번에 사울에 대해 결정하신 것은 앞으로 절대 바꾸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성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11절과 35절의 ‘후회하다’라는 번역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내적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고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런 선언에도 사무엘에게 절박하게 매달립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강하게 붙든 이유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에 대한 슬픔은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요청한 것은 사울이 가진 신앙 인격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평가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왕의 최면을 구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죄인일지라도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조차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의 절박한 요청에 사무엘은 마지못해 사울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사울의 제사나 제물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에게 이제 남은 것은 겉모양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에 목말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1)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증이 되시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 환경과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보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아각을 처형한 사무엘(32-35)

하나님 뜻보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 인기에 영합하는 삶의 태도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넘어짐의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직위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32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34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32-35)

 

끝까지 사울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는 것보다 백성 앞에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죽음이 기다리는데도 즐거이 나아오는 철없는 아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에게 더는 희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안 사무엘은 크게 슬퍼합니다. 지도자의 헌신을 큰 슬픔으로 돌려주지 맙시다.

 

(1) 아각의 죽음(32-33)

 

사무엘은 자신의 손으로 여호와의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사울이 살려둔 아각을 여호와 앞에서 토막 내어 죽이고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무리합니다.

사무엘은 아각에서 칼을 들면서 ‘네 칼이 여인들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간 것처럼 네 어머니에게도 자식이 없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많은 무고한 살육과 전쟁을 일삼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지적은 여호와 앞에 많은 죄를 지은 아각을 처형하는 것은 합당한 벌임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2) 사울과 결별(34-35)

 

사무엘은 아각과 짐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멸합니다. 이 아막렉과의 전쟁은 여호와의 심판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아말렉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사울과 사무엘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더 이상 죽는 날까지 사울을 만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살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하실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 한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었지만, 사울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에게도 비극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며 남은 생애를 보냅니다. 히브리어로 ‘슬퍼함’은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함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죽은 사람 취급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에게 사울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정시대를 연 사람이었고 사무엘 그 자신이 사울을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겸손하고 능력 있는 준수한 청년인 사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왕으로 세울 때 사무엘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사울은 조금씩 변질되여 갔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 전쟁에서 자기 전공(戰功)과 업적을 내세우려고 기념비를 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도 변명과 핑계로 모면하려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해서 눈앞에 이익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작은 죄들이 쌓여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는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사울의 과정을 잘 알고 있고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왔던 사무엘이기에 더욱 마음 아프고 슬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의 음성이 두려워집니다. 성도들은 삶에 불법적인 외식적인 형식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신 회개의 기회를 놓지지 않길 바랍니다. 겸손하게 말씀 앞에 회개의 사역들이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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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5-01)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사울

사무엘상 15장 1-15절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불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고 말씀하셨으니 더 이상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 사울이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린 일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금식 맹세를 강요한 일로 일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잘했다고 평가받지만,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무엘과 마지막으로 만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명령(1-3)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후에 성도들에게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도록 촉구합니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1-3)

 

아말렉은 출애굽 후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을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했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고(출 17:14; 신 25:19), 이제 그 뜻을 실행하시기 위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1)

 

다시 사무엘이 등장하는데 그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사울을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여호와를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많은 군대를 거느린 여호와’라는 뜻으로 거룩한 전쟁의 문맥에 잘 어울리는 호칭입니다.

 

(2) 아말렉에 대한 명령(2-3)

 

2절에서 왜 아말렉을 쳐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역사는 출애굽기 17:8-16에 언급된 아말렉이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왜 아말렉에 대해 심하게 진노하시는지 그 이유가 신명기 25장 17-19절에 나오는데, 피곤하고 약한 자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공격을 정정당당한 전쟁이 아니라 약자를 약탈하고 짓밟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방 나라들이 알 정도로 출애굽하면서 큰 이적을 행하시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아말렉이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하여 대대로 싸우겠다고 선언하셨고, 지금 사울 왕에게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시행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멸을 선언하십니다. 진멸은 거룩한 전쟁 혹은 여호와의 전쟁의 한 요소로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 등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보면, 잔인해 보이는 이 진멸은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하게 받아야 하는 대상에게만 이루어진 것이며, 모든 전쟁에서 행해진 것은 아닙니다. 진멸의 대상이 되는 전쟁은 가나안 일곱 족속과 아말렉과의 전쟁에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 민족들과의 전쟁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재산은 노획하는 일반적인 고대 근동의 전쟁 규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에 대한 진멸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특별히 내리신 임무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지난 잘못들을 만회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 지난번과 달리 이번 임무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잘 수행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회개한 것으로 여기고 지난 잘못을 덮어 주려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가장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은 사울(4-9)

행복(幸福)은 물질적인 만족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쁨에서 얻을 수 있다. 개인주의자들은 무엇인가 손에 잡힐 때 행복합니다. 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마치 벌꿀처럼 말없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봉사와 희생을 통해 행복을 느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 생각과 다를지라도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4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5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6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4-9)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은 무거운 죄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겨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1) 군대 소집(4-5)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아말렉과 전쟁하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합니다. 자신의 상비군 이외에 전쟁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군사를 불러 모았는데, 숫자가 보병이 이십만 명이고 유다 사람이 만 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1:8에서도 유다가 독립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울은 군대를 모아 아말렉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공격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2) 겐 사람에 대한 조치(6)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아말렉에 거주하는 겐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공격할 것임을 알려주며 그곳에서 떠나라는 권고를 합니다.

본문에서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이스라엘을 선대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겐 사람은 모세의 장인의 후손들로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백성들을 통제하는 관리 제도를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사사기 1장 16절에 따르면 유다 자손과 같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유다 남방에 거하였다고 말하고, 겐 사람의 아내 야엘은 이스라엘의 적인 시스라를 죽이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3) 전쟁의 승리(7-9)

 

이런 사울의 경고를 들은 겐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서 떠나갔습니다. 이 부분에서 출애굽 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선대한 백성은 구원받고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은 심판을 받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사울은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사울이 매우 성공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9절에서 사울과 백성들이 아각과 소와 양과 살진 짐승들의 가장 좋은 것과 보기에 좋은 가축들은 모두 남겼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진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쓸모없어 버려질 만한 것들만 죽였습니다. 본문에서 ‘진멸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렇게 쓸모없는 것만 골라서 죽이는 것에 대해 ‘진멸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데, 이런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함으로 사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진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진멸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좋은 수많은 가축들을 죽이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진멸이란 모두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는 이런 진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보다는 같이 전쟁한 백성들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많은 노획물을 얻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백성들에게 왕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모두 죽이면 백성들의 손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울에 대해 불평하게 됩니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가르치고 백성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하나님께 완진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평가(10-15)

세상적인 기념비를 남기려는 관심에서 시작한 일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자신이 유능하다는 인생을 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삶을 살고 있거든 더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10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4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10-15)

 

사무엘의 숨은 동기를 여호와는 아시고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삶의 환호와 인정을 위해 진정한 왕을 버린 사울을 보고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10-11)

 

이런 사울의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섭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통해 사울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또다시 어긴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바로바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경고하시고 또다시 기회를 주시며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을 알게 된 사무엘은 하나님의 실망스런 마음을 이해하며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기회를 잃어버린 사울에 대해 일차적으로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울의 안타까운 운명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그를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여호와께 간절히 도움을 구할 때 쓰는 표현으로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하나님께 끝까지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2) 사울의 기념비(12)

 

다음 날 사울을 만나기 위해 가던 사무엘은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 하나를 더 듣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에 애쓰는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자 자랑스럽게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3)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13-15)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무엘은 사울이 남겨놓은 가축들의 소리를 지적하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사울의 말에 대한 비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했다면서 남아 있는 가축들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무엘의 지적에 사울은 백성들이 끌고 온 가축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가축들을 남긴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는 가축을 남긴 것은 백성들이라고 말하며 진멸을 행하지 못한 일차적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립니다. 또한 제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물질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신앙적 행동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이렇게 사울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것은 그에게 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기회를 저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승리를 자신의 전과로 바꾸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는 그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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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4-03)


하나님과 상관없는 결정한 사울

사무엘상 14장 36-52절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이나 자리는 저마다 다릅니다. 세워주신 자리에 따라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 또한 다릅니다. 무게는 다르지만, 그 하나님 나라를 섬김에 있어 요구되는 덕목은 같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느냐보다 더 앞서는 것은 어떤 태도로 섬기느냐입니다.

 

  • 사울은 여호와께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주시는 것을 보고 좀 더 많은 여호와의 도움을 얻고 싶은 생각에 백성들에게 금식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사울의 금식 맹세를 듣지 못하고 땅에 있는 꿀을 먹어 금식 맹세를 어기게 됩니다. 그날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하게 되어 사울의 금식명령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고기를 피째 먹는 죄를 저지르고 요나단도 맹세를 어긴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중단(36-37)

모든 성공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더욱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가족이나 연약한 지체나 공동체를 배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성공일 수 있습니다. 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악일 수 있습니다.

 

36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36-37)

 

누가 보아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놀랍게도 승기를 잡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사울 왕의 어리석음과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로 블레셋을 이스라엘 지경에서 쫓아내고 승기를 잡았을 때, 사울의 흥미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무모한 결정을 내립니다.

지도력의 부재로 사울은 승리의 기쁨은 누리지 못한 채 자식과 백성 모두의 마음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사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묘사와 함께 서술된 기사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1)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 함(36)

 

사울은 전쟁을 서둘러 하루 만에 끝마치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군사에게 금식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36절에 전쟁에서 승리하자 여세를 몰아 밤에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블레셋과 전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추격하여 새벽까지 블레셋을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제안합니다(36). 여기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는 표현은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의 요소 중 하나인 진멸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치고 또 금식 선언까지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밤에 추격전을 벌이게 합니다. 그는 이 전쟁을 완전한 여호와의 전쟁으로 만들기 원한 것입니다. 자신의 금식 맹세가 여호와의 전쟁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왕의 제안에 백성들도 찬성합니다(36b). 지금 기세로 보았을 때 충분히 블레셋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동기로 그리고 이기적인 동기로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서 백성의 상태, 군대의 사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자기 명성으로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리한 전쟁을 시도합니다.

이때 처음으로 제사장들이 나서서 하나님께로 가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러 올라갈지 말지를 여호와께 여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묻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물음(37)

 

사울은 제사장의 권고를 따라 하나님께 자신이 블레셋을 추적해도 될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실지 묻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응답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거절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의 물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이스라엘의 손에 블레셋을 넘기실 것을 알려주신 것과 대조됩니다(삼상 14:12).

 

전쟁의 중단의 원인(38-46)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을 때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당황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한 기도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분을 자기 정당화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8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40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43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38-46)

 

사울에게는 밤에 전쟁을 해야할 지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해야 할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속단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 죄가 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속단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모든 군대 지휘관들을 다 모아서 느닷없이 처형을 공언하며 주변 사람의 죄를 추궁합니다.

 

(1) 제비뽑기(38-42)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을 거절의 의미로 알아들은 사울은 자신들 안에 숨겨진 죄가 있어서 응답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누군가 몰래 금식 맹세를 어겼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울은 군대의 지휘관들을 불러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 알아보자고 말하며, 만일 요나단이라도 죄가 있다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기를 반드시 것이라고 합니다(38).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 때문인데 사울은 다시 어리석은 맹세를 반복한 것입니다(39). 그런데 사울은 자기 맹세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수사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 말은 실제적으로 끔찍한 현실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말에 모든 백성 중에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요나단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요나단이 사울의 금식 명령을 어기고 꿀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결과 사울의 맹세가 요나단을 죽게 만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백성들과 독자들도 알고 있지만, 오직 사울만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의 불일치를 통해 독자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울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할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지도, 누구를 고발하지도 않고 침묵하자, 사울은 이것을 승인으로 생각하고 여호와의 신탁을 통해 죄인을 밝히기로 합니다. 사울은 자신과 요나단을 한편으로 하고 나머지 백성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신탁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울의 결정에 백성들은 왕의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고 차마 자신들의 입으로 요나단의 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울이 하는 대로 내버려둔 것입니다. 결국 우림과 둠밈으로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들은 면제되었습니다(41). 여기서 의도적으로 사울과 요나단이 아니라 요나단과 사울이라고 이름을 바꿔 요나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과 요나단을 두고 다시 제비뽑기를 합니다. 사울은 자신들이 뽑혔을 때 혹시 요나단이 잘못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백성들 앞에서 맹세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강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울을 제외한 모두가 예상한 대로 요나단이 뽑히게 되었습니다(42).

 

(2) 요나단의 자백(43)

 

요나단이 뽑히자 사울은 그가 무슨 일을 했기에 뽑히게 되었는지 알기 원했습니다. 아마 사울은 상당히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는 무섭게 추궁합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맹세의 덫에 자신의 아들이 걸려 죽게 생긴 것입니다.

 

이에 요나단은 자신이 꿀을 막대기에 찍어 조금 맛만 보았다고 말합니다(43). 이 말은 27절에서 화자의 설명과 동일합니다. 다만 자신은 정말 맛만 보았다는 말 속에는 그의 억울한 심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작 꿀 한 번 찍어 먹은 것으로 죽어야 하는 상황을 믿을 수 없고 억울했던 것입니다. ‘보소서 내가 죽어야만 합니다’라는 말은 자신이 기꺼이 죽겠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정말 죽어야 하는지 아버지 사울에게 묻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어 NIV는 이런 의미로 ‘내가 죽어야 합니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은 요나단에게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맹세대로 자신이 여호와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요나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에게 재앙이 온다는 것입니다.

 

(3) 사울의 선고(44)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맹세하였기 때문에 비록 아들이라도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면적으로 사울은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맹세를 철회할 경우 왕으로서의 체면이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요나단을 죽이고 왕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재앙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4) 백성의 변호(45)

 

이런 사울의 모습은 맹세를 통해 자신의 딸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입다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둘 다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자식들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입다의 딸과 다르게 요나단은 백성들이 구해줍니다. 백성들이 사울과 요나단 사이의 재판관으로 나서며 오늘 이스라엘의 큰 구원을 이룬 사람이 요나단이며,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은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자신들을 구원하고 클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고 평가하며, 그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를 합니다. 사울의 맹세에 대해 백성들도 맹세로 대응하였습니다. 사울이 비록 금식을 맹세하고 하나님 앞에 맹세를 갖는 등 매우 신앙적인 것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단 둘이서 블레셋 진영을 쳐들어간 것과,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크게 이기게 한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동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평가는 곧 하나님의 평가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맹세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요나단을 죽이면 오히려 죄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고, 자신이 맹세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5) 전쟁 중단(46)

 

블레셋과의 전쟁은 완성되지 못하고 여기서 끝나게 됩니다. 전쟁이 갑작스럽게 끝나는 것을 통해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가 블레셋을 완전히 몰아낼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를 보면서 아무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의 업적과 그의 집안(47-52)

지도자들은 자신을 보좌해줄 영재를 영입하여 함께 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도 지도자가 되었을 때, 지도자로서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먼저 모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보다 그들을 더 의지한다는 말 같아 불안합니다.

 

47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47-52)

 

사울을 통해 블레셋을 중앙 산지로 몰아냄으로써 기름 부은 자를 통해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9:16)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1)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울(47-48)

 

사울이 왕위에 있는 동안 치른 전투에 대한 요약으로 사울이 많은 적들과 전쟁을 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사무엘서는 최종적으로 평가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도록 미워하였지만, 기본적인 왕으로서의 임무는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2) 사울의 가족(49-51)

 

그의 가족과 군대 장관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이름들은 후에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3) 사울 통치의 요약(52)

 

사울이 왕으로서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용사들을 모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후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울의 무기 드는 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공평과 정의, 자비심이 있는지 여부로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모자랐을 때, 주변 사람조차 가차 없이 회생시킬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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