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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7-01)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지혜

잠언 27장 1-13절


함정에 빠진 이유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저는 자기 자신의 취약함에서부터 시작되는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사랑하는 자가 주는 진실한 통책(상처, 고언)에 귀 기울이기보다 원수의 거짓된 입맞춤에 더 기댑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입맞춤에 대한 갈증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갈망에 대하여 이미 지혜를 가지고 있는 배부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달콤한 꿀과 같은 유혹이라도 싫어 거절했을 것입니다.

 

본 단락의 내용은 주로 친구와의 우정 및 그의 진실한 충고에 대한 내용입니다. 친구가 베푸는 진실한 충고가 삶에 도움이 되니 그런 친구와 그의 충고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친구의 충고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칭찬, 자랑, 분노, 지혜로운 삶의 태도 등이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고, 진실한 친구를 가질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랑과 칭찬에 대한 교훈(1-2)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 앞에서 겸손합니다. 어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로 내일을 예측하고 대비하겠지만 장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말하지 않고 속단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일에 대해 모두 신중합니다. 오늘 자기 자랑하는 일이 내일은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칭찬이나 자랑은 자기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1-2)

1-2절은 자랑과 칭찬에 대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1절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권고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가 나의 인생을 통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계획이나 능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2절은 칭찬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의 내용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게 하라는 것이지만, 실제 핵심 의미는 자신을 칭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절을 함께 묶어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 계획을 신뢰하거나 자랑하려 하지 말고, 그런 것을 통해 칭찬받으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분노와 진실한 충고(3-10)

분노하면 감정만 전달되고 메시지는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질투는 그보다 더 강합니다. 하지만 책망이나 충고는 그 진실함과 사랑을 담으면 잘못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의 입에 발린 칭찬보다 쓰디쓴 충고가 유익합니다. 먼 이웃보다 충고해줄 수 있는 친구가 더 낫습니다.

3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4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5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7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9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3-10)

삶에 대한 일상적인 내용과 친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지혜로운 분별이 필요합니다. 특히 친구의 책망과 권고는 아플지라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1) 분노와 투기(3-4)

3절은 미련한 자의 분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과 모래보다도 무겁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의 화를 조절하거나 적절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분노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화를 쏟아내게 될 것이기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절은 3절의 분노의 주제를 계속해서 연결해 나갑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홍수와 같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와 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질투’입니다. 질투의 힘은 분노보다도 훨씬 더 강합니다. 여기서 질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남녀 간의 사랑 질투를 말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투가 일어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4절은 우리의 삶에서 분노의 힘보다 질투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상황에 대한 화가 일으키는 힘보다, 관계의 갈망에서 나오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갈망은 어떻게 올바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그 문제가 5-10절에서 다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주제입니다.

(2) 친구의 진실한 충고(5-10)

5절은 드러난 책망이 숨겨진 사랑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충고나 조언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드러내놓고 잘못을 꾸짖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충고와 조언이 필요할 때 모른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꾸짖어야 할 때 꾸짖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 질문을 던지고, 조언해야 할 때 조언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5절은 진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 대한 주제는 6절로 계속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자는 충직에서 우러나온 책망을 던져서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자는 입맞춤을 반복할 뿐입니다. 겉으로 위로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책망이 필요할 때 뼈아프게 책망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이 문제가 7절 이하에서 다루어집니다. 7절은 배부른 자는 꿀을 싫어하지만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의 필요를 모르면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지만, 그 필요를 알면 소중함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7절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책망해줄 수 있는 진실한 벗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 역시 이런 주제를 이어갑니다. 자기 장소를 떠나 유리하는 자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장소’란 어떤 장소입니까? 나 자신이 항상 머물러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을 떠났다는 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만족과 행복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8절은 7절과 더불어 자신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해줄 사람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8절이 진실한 친구의 책망에 대한 필요를 간접적으로 다루었다면, 9절부터는 이 주제를 다시금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9절은 기름과 향 즉 얼굴과 옷에 사용하는 향수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아름답다고 가르쳐줍니다. 기름과 향은 다른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 준비한 친구의 마음을 뜻합니다. 후각과 청각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그 준비한 정성으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친구의 진실한 권고는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의미입니다. 9절은 친구가 자신을 위해 진실한 책망을 하려고 할 때, 그 친구의 마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0절 역시 친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 형제보다 친구가 더 가깝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진실한 관계를 소중하게 가꾸어야 하고,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교훈(11-13)

아들의 지혜가 아버지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악을 보면 숨지만 어리석은 아들은 악에 노출되어 해를 당합니다. 때로는 친구를 위해 보증을 서는 것이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친구는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관계인데 보증은 둘 다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11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12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13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11-13)

11절은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잠언 1-9장에서 자주 보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이며, 솔로몬이 아들을 향해 제시하는 교훈입니다.

11절은 아들에게 지혜를 얻으라고 권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비방하는 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들이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면 그 비방에 아버지가 무력하게 당하게 됨을 암시합니다. 즉, 아들이 지혜를 얻게 되면 비방하는 목소리가 잠잠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이 지혜를 선택하는 여부가 아버지의 기쁨과 행복에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슬기로운 자가 되라고 조언합니다. 악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악을 보면서도 그대로 계속 길을 가면 악으로 인해 해를 받게 됩니다. 11-12절은 아들에게 지혜를 선택하고 악을 멀리하라고 조언합니다.

13절은 보증의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룹니다. 보증의 문제는 잠언6:1-2 및 20:16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왜 보증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까? 1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악한 상황을 보게 되면 슬기롭게 미리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친구를 위해서 보증을 서준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우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에게 도움이 되어, 그와 내가 다 같이 유익을 얻게 되는 관계입니다. 진실한 책망이 그런 예인데, 보증을 서는 것은 그와 나를 모두 망하게 하는 잘못된 길일 뿐입니다.

1-13절은 우리가 삶을 혼자서만 꾸려나갈 수 없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지혜를 간구해야 하며, 특히 정직하게 조언을 해줄 친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리는 참 지혜자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지혜에는 하나님께서 경륜하시는 세계 원리에 부합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이 그것입니다. 곧 지혜란 하나님 없는 세상과 그 방식과 우매함에 대한 신적 대응방식이고 대답이고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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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6-02)

 


 미련한 말하는 어리석은 자를 통한 지혜

잠언 26장 17-28절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볼 때 들춰지는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특히 말씀을 맡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들춰지는 자신의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종 늦게나마 말씀을 선포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선포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들춰내실 때 양심에 찔림 속에서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인하여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본 단락은 이웃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입술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18-22절에서는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해서 결국 다툼을 일으키게 됨을 말합니다. 24-28절은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자의 내면에는 미움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결국, 그런 미움은 밝히 드러나게 되고 자기 자신이 그 미움과 거짓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실수(17)

지나가다 상관없는 일에 개입하는 것은 들개의 귀를 잡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문제를 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입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해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17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17)

17절은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개입하는 것은 들개의 귀를 잡는 것 같아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17절은 18-28절 전체를 이끌어주는 서론으로,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 함으로써 심각한 피해를 스스로에게 입히지 말라는 화두를 던집니다. 본 단락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란 마음에 미움을 품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해를 입는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 입술의 사람(18-22)

사람을 속이는 길은 다양합니다. 이웃을 속이고도 농담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짓의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피해를 입히고도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험담하는 자들도 다툼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장적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험담꾼들의 말은 별식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옮기고 싶게 만듭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사람도 속이는 입술을 가진 어리석은 자입니다.

18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19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20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21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2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18-22)

18-22절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일련의 묘사합니다.

18절은 횃불을 던지면서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바로 19절에 나오는 거짓 입술을 가진 자입니다. 이웃을 속이고도 ‘내가 농담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이에게 말로 피해를 입히고서도 자기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거짓으로 해명하는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쏘아 죽게 만드는 미친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20절은 계속해서 이 거짓 입술을 가진 자를 묘사합니다. 불을 피우는 중에 땔감인 나무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는 것처럼, 다른 이를 험담하는 자가 사라지면 공동체 중에서 다툼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험담꾼이 공동체의 다툼에 땔감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서, 그런 자가 없으면 공동체에 평안과 사랑이 임하게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런 험담꾼에 의한 다툼을 불에 비유하는 것은 21절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은 숯불에 숯과 같은 역할 혹은 불에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역시 거짓 입술의 사람이 공동체의 분쟁을 심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험담꾼이 없다면 공동체에는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2절은 이러한 거짓 입술을 가진 자가 하는 말이 왜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험담꾼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험담꾼이 다른 이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기 쉽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 싶은 악한 욕망이 우리 안에서 꿈틀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22절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17절에서 말한 실수를 범하게 되어서 스스로를 해치는 길로 가게 될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듣기에 달콤하고 솔깃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옳기도 싶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거나 그런 말을 옮기는 행위는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고 그 다툼이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할 뿐입니다.

 

표리부동한 입술(23)

화려한 언변 뒤에 있는 악한 의도를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유창하고 부드러운 말 뒤에 그들의 의도를 감춥니다. 하지만 은 찌꺼기를 입힌 토기가 이내 그 저급함을 드러내듯, 악한 자의 숨은 의도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아첨하는 말 뒤에 가려진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23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23)

23절은 거짓 입술의 정체를 밝히는 구절입니다. 불타오르는 입술로 악한 마음을 감추는 사람은 나쁜 은을 입힌 토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나쁜 은이란 정제된 고급 은이 아닌 찌꺼기 은을 말합니다. 처음 볼 때는 은을 입힌 토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찌꺼기 은을 입힌 토기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가짜인 것이 바로 ‘낮은 은을 입힌 토기’입니다. 이런 토기와 같은 자가 바로 불타오르는 입술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자입니다. 불타오르는 입술이란 20-21절에서 말한 불타오르는 다툼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표현으로서, 공동체에 다툼을 일으키는 입술을 말합니다. 다툼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과 뜨거움 뒤에는 오직 악한 마음만 있을 뿐 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가짜 은을 입힌 토기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어떤 이웃에 대한 진실을 알려준다면서 이야기하지만, 그 뜨거운 열심은 가짜 토기의 ‘가짜 은’일 뿐입니다. 선한 마음이 아닌 악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3절이 보여주는 이런 거짓 입술을 가진 자의 악한 마음은 24절 이후의 미움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미움과 거짓말(24-28)

속임수는 상대를 향한 나의 미움의 감정을 숨기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속임수를 씁니다. 하지만 그 미움은 대중 앞에서 곧 발각될 것입니다. 미움을 감추고 험담을 하면 도리어 자신에게 험담이 돌아와 결국 멸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24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25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6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27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28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24-28)

24절부터는 ‘미움’이라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의 내면에 미움이 뿌리박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24절은 ‘원수’에 대해서 말합니다. 원수의 원어는 ‘미워하는 자’로서, 마음에 미움을 품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입술로 꾸미고 좋은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속에는 속임수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18-22절에서 기술한 거짓말하는 자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거짓말의 내면에 미움이 있다는 것을 24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25절은 그런 거짓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이 꼭 어떤 일곱 가지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일곱이란 완전수로서, 가증한 것이 그 마음에 있다는 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 말이 듣기는 좋지만, 내면에는 가중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미움을 품은 자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그 결국이 26-27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26절은 미움을 품은 자가 속으로 그 미움을 감춘다고 할지라도 내면의 악함이 결국 회중 앞에 즉 공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해서 다른 이를 해치려 하고 그 미움을 감추려고 노력할지라도, 언젠가는 만천하에 명백하게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7절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함정을 파면 결국 자기가 빠지게 되고, 무거운 돌을 언덕 위로 밀어 올리려고 노력하면 결국 그 돌에 자기 자신이 깔려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움을 품고 다른 이를 해하려고 하는 그 노력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미움은 거짓말을 낳고, 거짓말은 스스로에게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26-27절의 가르침을 28절이 명쾌하게 요약하고 정리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 해하려는 자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28b절에서 ‘아첨하는 입’이란 부드럽고 매끄러운 입이라는 말로서 ‘아첨하다’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듣기에 좋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들을 때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거짓말의 특성을 다시금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28b절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듣기 좋은 말은 결국 패망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28절은 미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이야기를 하는 행동의 결과는 멸망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내면의 미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미움에 빠지게 되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험담을 해서라도 그 사람에게 내 미움을 갚아주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고, 그 욕망에 휘둘리면 험담꾼으로 전락하게 되며, 결국 그 험담이 나에게 돌아와 나 자신을 멸망시키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입술의 정직함을 지켜나가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미움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뢰 회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뢰도는 우리의 정직한 삶을 통해 만회할 수 있습니다. 신뢰를 회복해야 갈등의 현장에서 갈등조정자로, 분열의 땅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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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6-01)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의 비교하는 지혜

잠언 26장 1-16절


지도자의 자질을 성실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이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이 항목에 포함된 답변으로는 정직, 신의, 도덕, 공평, 솔직, 성실, 믿음 등이 있었습니다. 모두 지도자들이 직접 한 말과 행동에 관련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과 안전이 좌우됩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모의 역할이 좌지우지합니다. 안전한 나라를 위해,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무엇이 있겠습니까?

 

본 단락은 잠언에서 ‘미련한 자’에 대한 단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12절은 미련한 자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10장 이후 보지 못했던 분명한 문맥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미련한 자를 가까이하거나 그에게 일을 맡기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13-16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게으른 자의 삶의 모습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미련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가르침(1-12)

미련한 자에게는 귀한 것을 주어 봐야 귀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예를 주어도 스스로 그 귀한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는 까닭 없이 저주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저주가 유효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예가 아니라 채찍입니다.

1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2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1-12)

 다양한 은유를 통해,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들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지혜자는 미련한 자나 게으른 자가 되지 말 것을 교훈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1) 미련한 자의 특징(1-3)

1절은 미련한 자에 대한 열두 개의 잠언 모음집(1-12)을 시작하는 첫 잠언입니다.

1절은 미련한 자에게는 영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을 제공합니다. 여름에 눈이 오는 것이나 추수 때에 비오는 것이 전혀 적절하지 않듯이, 미련한 자에게 영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이 어떠할지 추측하게 하는 내용으로 1절은 1-12절의 문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까닭 없는 저주에 대하여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나 근거 없이 저주한 것은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이나 제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절은 1-12절에서 미련한 자가 언급되지 않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2절은 1절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광이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까닭 없는 저주는 그 성취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광이 어울리지 않고, 여름에 눈이 어울리지 않으며, 추수 때는 비오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까닭 없는 저주는 성취됨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3절은 미련한 자의 주제를 계속 이어 나갑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채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한 것처럼, 미련한 자를 다스리기 위해서도 채찍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미련한 자는 쉽게 다스릴 수 없어서 힘과 권세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미련한 자를 대하는 방법(4-5)

1-3절이 미련한 자에 대해서 비교적 일반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면, 4-5절은 미련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4절과 5절은 서로 대조가 되는 잠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서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게 되면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합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미련한 자가 스스로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상당한 혼란을 줍니다. 어떤 때에 대답하고 어떤 때에 대답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4절을 일반적인 원리로 보고, 5절을 그 원리에 대한 예외로 생각해보려 합니다. 4절은 미련한 자와 대화하게 되었을 때 그가 미련한 것처럼 미련하게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미련한 자와의 대화를 통해 미련함에 물들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에게 대답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게 될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의 미련함을 고려하면서 적절하게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정도까지 가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것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악한 일입니다.

(3)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6-11)

6-11절은 미련한 자의 삶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묘사합니다.

6절은 미련한 자 편에 기별을 보내는 것의 위험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발을 스스로 베어버리는 것과 같아서, 미련한 자는 기별을 통해 유익을 가져오기는커녕 해를 끼치게 될 것이 분다 때문입니다.

7절은 미련한 자의 입에 담긴 잠언이 저는 자의 다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6-7절은 미련한 자에게 무슨 일을 맡기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8-9절은 미련한 자는 좋은 결과를 낳기는커녕 오히려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8절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면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맷돌은 곧 날아가서 여러 사람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9절은 미련한 자의 입에 담긴 잠언이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음을 알려줍니다. 가시나무처럼 미련한 자는 여러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끼칩니다.

10절은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마치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어떤 일을 갑자기 맡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우리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불합리한 일라는 뜻입니다.

11절은 미련한 자의 삶의 습관을 표현합니다. 그는 개가 자기 토한 것으로 돌아가듯이, 미련한 것을 거듭해서 행합니다. 미련한 자는 미련함을 버리지 못하며, 그 미련함을 즐겁게 여기고 미련함을 기뻐합니다.

(4) 미련한 자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12)

12절은 미련한 자에 대해 말하는 1-12절의 결론인데, 독자의 예상을 깨고 조금은 특이한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1-11절은 미련한 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계속 이어서 제시했는데, 12절은 미련한 자보다 더 나쁜 상황에 있는 자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 비하면,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12절의 결론이 단순히 미련한 자를 주의하라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주의해야 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김이 미련함보다 더 악함을 우리는 4-5절의 관계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13-16)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어려움을 줍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의 입에 있는 잠언은 저는 자의 다리와 같이 쓸모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미성숙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여호와의 법을 멸시하는 자입니다.

13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15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16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3-16)

13절부터는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13절은 잠언 22:13과 유사한 내용으로, 게으른 자는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변명을 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이 게으른 자의 특징입니다.

14절은 문이 경칩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게으른 자는 자신의 침대를 중심으로 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으름은 그 게으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게으름이 일상이 되고 만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5절은 잠언 19:24과 같은데,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놓쳐버리게 되는 게으른 자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16절은 13-16절의 결론이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특이한 결론을 보게 됩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 명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깊이 빠지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게 되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원문은 자기 눈에 지혜롭다는 것으로, 5절과 12절에 이미 나타났던 표현입니다.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가 바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인데, 16절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게으른 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16절 전체의 문맥을 생각해보면, 게으른 자가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소중하지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게으름은 미련함을 심화시키며, 그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에서 떠나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게 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그 나라의 축복이라면, 성실하고 신실한 부모를 만나는 것은 그 가정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좋은 지도자를 세우는 데 신중해야 하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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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5-02)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난 지혜

잠언 25장 15-28절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구원하라는 뜻도 되겠지만, 사람을 얻는 일이 소중한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손해 보거나 상처를 받으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똑같이 갚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고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반면 사람을 잃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자기 절제에 대한 여러 가지 잠언들을 소개합니다. 첫 부분인 15-17절은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시작하고, 마지막 부분인 27-28절도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위치한 18-26절은 삶의 현장에서 자기 절제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적절한 경우들과 적절하지 않은 경우들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신을 절제하면서 올바른 삶의 길을 가도록 문제들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자기 절제의 중요성(15-17)

절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분노를 참고, 과식을 금하고, 지나치게 이웃을 찾아 그를 질리게 하지 않은 것이 지혜입니다. 아주 좋은 꿀도 많이 먹으면 좋지 못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하면 절제력을 잃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은 성벽 없는 설과 같습니다.

15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6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7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15-17)

본문은 자기 절제의 중요성으로 시작됩니다. 15절은 분노를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를 참고 인내하면 지도자의 생각도 바꿀 수 있습니다. 부드럽게 설득할 때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절제는 적절한 삶의 태도로 이어집니다.

16절과 17절은 ‘만족’의 주제로 서로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동사 샤바가 공통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6절은 꿀을 족할 만큼만 먹고 과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17절은 이웃집에 많이 다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두 구절 모두 ‘내 만족’만을 추구하다가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족을 추구하지 말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적절한 정도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삶입니다.

 

적절하지 않은 삶의 예들 1(18-20)

남의 상황과 심정을 잘 고려하여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의 없이 대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기쁨의 노래를 불러주고, 추운 날에 옷을 벗기며, 상처 위에 식초를 붓는 것 같은 잔인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상황과 형편을 잘 살펴서 말하고 행동하야 합니다.

18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19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20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18-20)

18절부터는 이런 절제의 관점에서 잘못된 삶의 태도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18절은 이웃을 쳐서 거짓증거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칼과 뾰족한 화살 같아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을 해하려 하는 태도는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한 내면을 드러낼 뿐입니다.

19절은 어려울 때에 패역한 자를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패역한 자를 의지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흔들리는 발과 같습니다. 치아가 부러지면 사용할 수 없고, 발이 흔들리면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패역한 자는 이와 같기에, 그런 사람을 의뢰하는 것은 결코 삶의 적절한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도움이 필요하다 해도, 절제하지 못하고 패역한 자에게 가면 안 됩니다.

20절은 마음이 상한 자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마치 추운 날에 옷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소다 위에 식초를 붓는다는 구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 구절인데, 아마도 ‘소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네테르’는 깊은 상처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초를 상처 위에 부으면 쓰라리듯이, 마음이 아픈 자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18-20절은 적절하지 않은 행동들을 언급하는데, 이 행동들은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일들입니다. 이웃의 마음과 상황을 생각한다면, 또한 의지하려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적절한 삶의 예들 1(21-22)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어려움에 처했다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우너수는 그동안 내게 거짓말하고, 배신했으며, 마음이 상했을 때 기쁨의 노래를 부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화해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21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21-22)

이어서 21-22절은 적절한 삶의 예를 보여줍니다. 바로 원수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과연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일이야말로 자기 절제로부터 비롯된 가장 적절한 행동입니다. 원수에게 음식을 먹이고 물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첫째로, 그 원수가 스스로 지독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되돌아온 선함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기에,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그에게 줄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여호와께서 그런 선한 행동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원수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절제하는 것이 올바른 지혜의 행동이며, 위의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적절하지 않은 삶의 예들 2(23-24)

악인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이 흔들려서 악인과 타협하는 것은 마치 우물이 흐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이 흐려지면, 그동안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동일하게 사회를 맑게 해주던 의인이 타락하면 사회는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됩니다.

23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24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3-24)

23-24절에서는 다시금 적절하지 않은 삶의 예들을 소개합니다.

23절은 ‘참소하는 혀’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참소하는 혀란 ‘비밀의 혀’라는 뜻으로, 당사자의 뒤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본인도 모르는 잘못된 이야기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경우 즉 억울하게 험담을 당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바람이 불면 비가 올 것이 확실한 것처럼, 이런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확실합니다. 자신의 혀를 절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자신이 화를 당하게 됩니다.

24절은 다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구절은 21:9과 거의 동일합니다. 비교잠언(~보다 ~가 더 좋다)의 형태를 통해 적절함에 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툼을 일삼는 여인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붕 한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하지 못한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3-24절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혀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주면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절제하는 삶을 살 것을 가르쳐줍니다.

 

적절한 삶의 예들 2(25-26)

지혜롭지 못한 부적절한 삶의 예들이 나열됩니다.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 어려울 때 패역한 자를 의지하는 것, 마음이 상한 자 앞에서 노래 부르는 일, 참소하는 혀, 다툼 등은 모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며 이웃에게도 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25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26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23-26)

25-26절은 다시금 적절한 삶의 예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25절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음을 말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있어서 냉수는 가장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멀리 있는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며, 그것은 지혜로 삶의 적절함을 유지하는 좋은 예입니다.

26절은 의인이 악인에게 굴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의인이 적절하게 살기 위해서는 악인 앞에 굴복하지 말아야 함을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흐려진 우물은 우물이 아니며 더러워진 샘은 쓸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인 앞에 굴복한 의인 역시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있어도, 스스로를 잘 다스려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절제의 중요성(27-28)

지혜로운 삶은 절제하는 삶이며 또한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원수가 부끄러움을 느껴 자신을 돌아보게 하거나, 좋은 소식을 전하여 목마른 자에게 생수와 같은 시원함을 주는 것, 의인이 결코 악인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모습 등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27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28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7-28)

27-28절은 25장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27절은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함을 말합니다. 자기 절제의 중요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꿀을 적당히 먹으라는 조언은 오늘 본문 16절에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 초두와 말미가 서로 수미쌍관을 이루면서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27b절에서 자기 영예를 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절제를 잃게 되고, 결국 넘어져 실수하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것이 지혜와 절제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28절은 이 모든 논의를 최종적으로 결론짓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절제하는 것은 마치 성읍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성벽이 없는 무너진 성은 더 이상 성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은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므로, 멸망의 길로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기억하며 우리는 스스로를 절제하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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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5-01)

 


올바르게 통치한 왕의 지혜

잠언 25장 1-14절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 自我中心主義)는 자기(self)와 타자(other)를 구분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더욱 특정화하면,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서 자신 외에 다른 시각을 정확하게 인정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만을 내세우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잘 들어주고 상황에 맞게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본문은 주로 왕정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왕의 역할을 설명하고(1-2), 왕 앞에서 어떻게 행실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 후(4-7), 재판정에서 어떻게 행하고 말해야 하는지를 보이며(8-11), 지혜로운 삶에 대하여 조언합니다(12-15). 왕정생활에 대한 가르침인 동시에, 모든 언약 백성들의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표제(1)

성도는 사랑과 공의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죄와 악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자신도 물들어 잘못된 길을 가기 쉽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건 개인의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공통점은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과 마음을 잘 다스려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1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1)

25-29장은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들입니다. 열왕기상 4:32에서 언급한 것처럼 솔로몬은 3,000개의 잠언들을 지었고, 그중 새롭게 수집된 내용이 25-29장에 등장합니다.

1절의 원문에 보면 ‘또한’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이것들도 또한 솔로몬의 잠언이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5장 이후를 수집했던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25장 앞에서 이미 나타났던 솔로몬의 잠언 모음집(1-9장, 10:1-22:16)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17-24:34은 지혜자들의 잠언 모음집이었는데, 이제 다시 솔로몬의 잠언 모음집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왕의 역할(2-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신비를 살피며 지혜롭게 행하기 원하십니다. 사람은 말과 마음을 잘 다스려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전합니다.

2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3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2-3)

2절은 하나님의 영광과 왕의 영광을 대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살핀다는 것은 자세히 조사해서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데, 그 일을 실제로 이 땅에서 해나가는 것은 왕의 책무입니다. 이 구절을 이신론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은 해석이 됩니다. 2절은 왕의 책무를 강조하기 위한 구절입니다.

3절은 이어서 왕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아리다’로 번역된 단어와 2절에서 ‘살피다’ 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카르’ 동사로 동일합니다. ‘살펴 조사해서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즉, 2절은 왕의 임무가 일을 살피는 것이라고 말하고, 3절은 그렇게 살피는 왕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의 마음은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살필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왕 앞에서의 행실(4-7)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조급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해를 씁니다. 자신이 손해를 입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에게 바로 갚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을 넘어 지나치게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4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5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6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4-7)

4-7절은 왕 앞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은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는 과정을 거쳐야 그릇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찌꺼기는 무엇이며 그릇은 무엇입니까? 5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찌꺼기란 곧 왕 앞에 있는 악한 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왕의 통치가 견고해지지 못하게 하는 자입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면 그릇이 되듯이,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거하면 왕의 통치가 의로 견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6절은 이어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5절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왕 앞에서 제거될 만한 악한 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6-7절은 기본적으로 왕 앞에서 어떤 자리에 앉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왕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나중에 더 높은 이가 왔을 때 내려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므로,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나중에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겸손하면 나중에 존귀를 얻게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6-7절의 이야기를 4-5절과 연결시키면,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는 자야말로 왕 앞에서 제거해야 하는 찌꺼기와 같은 악한 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악한 자는 나중에 그 높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며, 그 자리는 처음부터 왕 앞에서 겸손했던 자에게 대신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왕 앞에서 겸손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문은 고대 왕 앞에서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내 삶의 자리에서, 리더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 경외의 경계 안에서, 리더를 존중하고 그 앞에 겸손히 행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판과 언어사용(8-11)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바르게 전하는 능력은 귀한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일방적으로 강의하고 듣기만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토론하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지만, 잠언의 시대나 지금이나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8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9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10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1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8-11)

이어서 8절 이하에서는 재판 및 언어 사용에 대한 주제를 전개해나갑니다.

8절은 우리에게 너무 급하게 재판정에 호소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나중에 이웃으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웃으로부터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재판에서 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미리 살피고 잘 판단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을 걸면, 나중에 오히려 재판에 져서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에 호소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 재판을 통해서 의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9절은 그런 재판 과정 가운데 필요한 말만 하고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하지는 말라고 조언합니다. 재판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비난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10절에 나옵니다. 은밀한 일을 누설하면, 듣는 자가 꾸짖으려 할 것이고 나 자신은 악평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11절은 ‘경우에 합당한 말’이라고 부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상황에 맞춰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적당히 둘러대는 말, 내 유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11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10절의 문맥을 생각해야 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바르게 행한 말입니다. 급하게 재판을 걸지 말고, 재판 중에도 상대방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않는 그런 말입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 꼭 필요한 내용만 말하고,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갈 만한 말은 삼가는 말이 바로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삶(12-14)

지혜로운 삶은 우선 잘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은 들리지 않습니다. 듣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에게 약이 되는 쓴 충고도 잘 들어야 합니다. 또한, 말을 신실하게 잘 전달하는 사신은 갈증을 해갈하는 음료수처럼 보낸 자의 마음을 회복시킵니다.

12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13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14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12-14)

12절부터는 여러 가지 주제를 통해 지혜로운 삶의 실제적인 경우들을 보여줍니다. 먼저 12절은 우리에게 듣는 귀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듣는 귀는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이라고 해도, 듣는 귀가 있어야 듣고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11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듣는 귀가 있어서 지혜로운 조언을 받을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13절은 충성된 사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충성된 사자란 ‘믿을 수 있는 사자’를 말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그런 충성된 사자입니까? 바로 추수하는 날의 얼음 냉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눈 녹인 물이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너무나 귀한 음료수가 되는 것처럼, 이런 충성된 사자는 매우 귀하여 찾기 어렵지만, 일단 그런 사자를 찾게 되면 그가 주인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충성된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14절은 과장하는 말에 대해 경고합니다. 마치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어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당황하게 되는 것처럼, 선물을 주겠다고 분위기만 만들어놓고 선물을 주지 않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14절은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언어행위의 허무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고, 듣는 귀를 가지고, 충성된 사자가 되어야 하되, 말 만하고 행동은 뒤따르지 않는 미련한 자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고, 악한 신하들을 제거함으로 공의를 세우고, 일시적 충동이 아닌 성령의 충만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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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4-02)


추가로 덧붙이는 지혜들

잠언 24장 23-34절


연인은 잠시라도 헤어져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를 그렇게 사모하고 애타게 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지혜는 성도의 삶을 형통하게 하며 실제적인 유익과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지혜를 산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지혜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다룹니다. 지혜자의 말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모음집으로, 지혜자들이 삶에서 경험한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악인을 견책하고, 스스로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게으름을 버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잘 지켜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의를 이루라(23-29)

재판 상황입니다. 지혜자는 악인을 악하다 하고 의인을 의롭다 합니다. 하지만 미련한 악인은 얼굴을 보고 안면이 있는 사람이면 편파적으로 판결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서도 미움을 받겠지만. 악인을 견책하면 기쁨과 복을 얻게 됩니다. 정직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평화와 친교의 입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23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24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26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7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28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9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23-29)

재판할 때 사람에 따라 재판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사사로운 정이나 이해관계에 이끌려 악인을 두둔해서는 안 되며,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것을 권면합니다.

(1) 악인을 견책하라(23-26)

본문은 22:17-24:22에 이어 등장하는 두 번째 지혜자들의 말씀 모음집입니다. 23a절이 이를 나타내는 표제입니다. 23b절부터는 본격적인 지혜자들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먼저 재판할 때 어떤 사람에게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두 번째 지혜자들의 말씀은 처음부터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은 악인을 옳다 하면 안 되며, 그렇게 하면 심지어는 이방 백성들에게서까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25절은 이와는 반대로 악인을 견책하면 기쁨과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계속해서 공동체 안에서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참 지혜를 지녔다면, 우리는 악인을 견책하는 바른 양심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만 합니다.

23-25절까지의 이야기가 2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26절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문장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적절한 말로 대답하라’라고 한 것은 원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한 말로 대답하라’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정직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입맞춤할 수 있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대답은 ‘정직한 대답’입니다. 앞선 23-25절에서도 편파적인 판정을 하지 말며, 악인을 옳다 하지 말고 견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언어사용이 바로 정직한 대답인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2) 바깥일을 잘 다스리라(27)

27절은 처음 보기에는 앞뒤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입니다. 바깥일을 먼저 잘 다스린 후에 자기 집을 세우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가르침에 익숙한 우리는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7절은 공동체를 하나님의 원칙으로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가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으면 가정의 일도 세우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 문맥에 잘 어울리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문맥이므로, 27절은 공동체의 일을 잘 돌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악인이 되지 말라(28-29)

28절은 잠언의 독자들에게 악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거하지 말고, 입술로 속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29절에서는 이웃에게 원수를 갚는 것과 같은 행동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공동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방법이 아닙니다. 참되게 정의를 세우는 것은 내가 당한 일을 갚아주겠다는 복수의 의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체를 돌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세우겠다는 참되고도 아름다운 목적을 세우고 실천할 때, 정의는 실현될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경고(30-34)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게 때문입니다. 영적 태만이요 자기 방치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지헤자는 깊이 생각하고 훈계를 받아서 게으름에 빠지지 않습니다.

30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34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30-34)

게으름이 가난을 부릅니다. 지혜자는 좋은 포도원에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았는데, 이 모든 것은 농부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이를 보며 지혜자는 ‘좀 더’ 자고, 졸고, 누우려는 게으름이 가난을 강도같이 빈곤을 군사같이 불러오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 게으른 자의 밭(30-32)

30절부터 갑자기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게으름의 주제가 문맥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30절의 내용은 지혜자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가면서 보니 포도원과 밭이 황폐해지어 덤불로 덮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 없는 자’로 번역된 원어는 ‘마음이 부족한 자로 판단력이 부족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잠언 1-9장에서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에게 주로 쓰였습니다(잠 7:7; 9:4, 26). 따라서 30절의 게으른 자는 곧 판단력이 부족하여 지혜를 버린 미련한 자입니다. 지혜 없음과 미련함의 결과, 게으른 삶에 천착하게 된 것입니다. 게으름이란 삶에서 어쩌다가 범하게 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는 삶의 형태요 습관입니다.

이러한 게으름의 결과가 어떠한지가 31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땅 전체에 퍼져 있고, 지면은 거친 풀로 덮였으며, 돌담은 무너져 있습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산업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런 게으름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입니까? 다음 구절로 계속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 게으름에 대한 경고(33-34)

지혜자는 이것을 보고 한 가지 ‘훈계’를 얻었다고 말하는데, 그 훈계의 내용이 33-34절에 나와 있습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누워 있자고 하면 빈궁이 강도처럼 찾아와 궁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33-34절은 잠언 6:10-11에서 미리 다루어진 잠언과 동일합니다. 6장에서는 부지런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 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성을 배우라는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서 게으름에 대한 경고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게으름은 ‘지혜를 버린 결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30절의 ‘판단력이 부족하다’라고 할 때 부족함이라는 히브리어 어근과 34절의 ‘곤핍’의 히브리어 어원이 ‘하사르’로서 동일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 없음과 게으름이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력이 부족하여 지혜를 버리고 결국 미련하게 된 자는 게으름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 없음의 결과로 게으름에 빠짐이 오늘 본문 전체의 문맥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까? 바로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잘못’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30-34절의 게으름은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먼저 돌보고 자기 일을 돌보라고 할 정도로, 공동체를 세우고 그 안에서 하나님 지혜의 가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이러한 일에 게으름을 부리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이 악인이 되거나 아니면 재판 중에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게 되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임으로, 참 지혜자가 되어 공동체를 하나님 지혜의 말씀으로 돌보고 바로 세워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을 듣고 지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 복을 받고 성공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돌보고, 억울함을 당한 자들을 도와주며,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세워지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참된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문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고난 중에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늘 사모하여 지혜롭고 형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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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4-01)

 


인생의 집을 건축한 지혜

잠언 24장 1-22절


왕을 비롯해 국정을 맡은 자, 가정을 책임지는 부모는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국정이나 가정을 이끌어야 합니다. 진정한 ‘왕다움’ 혹은 왕권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왕권을 주장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잠언 22:17-24:22의 마지막 단락으로서 지혜가 가져오는 유의들을 강조하며, 또한 교활하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인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는데, 그들을 시기하지도 말고 그들의 멸망을 즐거워하지도 말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왕을 두려워하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 22:17-24:22의 결론입니다.

 

악인을 시기하지 말라(1-2)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선하고 의롭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악하고 안하무인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무시하고 사람들을 우습게 여겨서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역사를 주락펴락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1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1-2)

인생의 집은 지혜로 지어야 합니다. 악인이 세운 인생의 집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튼튼해 보이지만, 심판의 재앙이 불어올 때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 단락은 악인을 시기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그런 자와는 함께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과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언 3:31과 23:17의 내용을 다시 거론하고 있는데, 24:19-20에 또다시 나옵니다. 동기를 제시하는 절에서는 악인들이 앞으로 할 일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의도(품다, 말하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혜가 베풀어주는 유익 1(3-7)

지혜를 담은 공동체는 번성과 안전을 누립니다. 그런 공동체는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의 전술과 전략을 가지게 됩니다. 지혜는 우리 각자의 영혼에 꿀과 같으며, 지혜가 있으면 미래가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열어 가시는 의의 실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5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6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7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3-7)

악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악함과 대비되는 것들이 지혜가 베풀어주는 유익입니다.

3절은 지혜로 말미암아 집이 견고하게 됨을 말합니다. 4절은 그 집의 방들이 지식과 명철을 통해 아름답게 채워진다고 말합니다. 3-4절은 지혜가 풍성한 보상을 우리에게 공급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집’은 ‘가정’, ‘왕조’, ‘나라’를 의미할 수 있으므로, 지혜가 공동체를 견고하게 건설하고 풍성하게 성장시킨다는 뜻이 됩니다.

이어서 5-7절은 지혜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5절은 지혜 있는 자가 강하다고 설명하고, 6절은 전쟁에서는 전술과 모략가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전술 및 모략가란 지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7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지혜를 얻지 못함을 말합니다. 마치 성문에서 너무 높이 있어서 미련한 자가 지혜를 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공개적인 토론(“성문”은 사법적인 모임을 암시한다)에서도 미련한 자의 의견은 무시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아무런 의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뭔가 쓸 만한 말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그는 입을 열지 못한다.” 지혜의 능력은 강하며 미련한 자는 취할 수 없으므로, 지혜를 지닌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지혜를 갖게 되면 풍성한 성장 및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받게 됩니다.

 

교활한 악인이 되지 말라(8-12)

기독교의 윤리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넘어섭니다. 복음은 가족, 친척, 동족, 동일 인종이라는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사건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위기에 처한 사람 누구라도 도울 준비하여야 합니다.

8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9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10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11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8-12)

 이어서 8절은 악한 일을 마음에 생각하는 자는 ‘교활한 자’임을 말합니다. 9절은 그런 교활한 계획은 죄임을 지적합니다. 그런 일을 꾀하고 실천하면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뿐입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생각합니다. 미련한 자는 거만한 자와 동일시되고 거만한 자가 얻는 이름(8)을 받게 됩니다. 잠언서에서 “미워하는 것”(가증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쓰입니다.

10절은 이어서 환난이 오는 날에 힘에 부쳐 약해지면 자신의 미약함을 보일 뿐임을 말합니다. 8-10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운 것 같으나 사실 속마음은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득만을 계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자는 나중에 환난이 닥쳐올 때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결국 버틸 힘이 없어 넘어지게 될 뿐입니다.

11-12절은 그러한 교활한 악인의 한 예를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사망으로 끌려가 학살을 당하게 된 자를 도와주지 않는 교활한 악인의 예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자입니다. 12절은 교활한 자가 내놓은 변명을 미리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둘러대려 해도 마음을 저울질하시고 영혼을 지키시는 이, 곧 여호와께서 모두 알고 계시기에, 결국 그분이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셔서 교활한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십니다. 8-12절은 겉으로는 지혜로운 척하지만 실제로 여호와를 경외하지는 않는 사람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지혜가 베풀어주는 유의 2(13-1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각자의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사회의 불의와 폭력으로 죽음의 위기에 놓인 약자들을 외면하고 돌아선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공동체 안 퍅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약한 지체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13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3-14)

이 명령은 1-9장에 자주 나오는 ‘내 아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3-14절에서는 지혜가 베풀어주는 유익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13절에서는 꿀을 먹으면 입에 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꿀은 14절에서 설명할 지혜에 대한 비유입니다.

14절은 지혜가 우리의 영혼(네페쉬)에 꿀과 같다고 밝힙니다. 지혜를 얻으면 장래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를 얻어서 장래의 소감을 가진 사람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까? 그것이 15-20절에서 의인은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15-20)

악인들은 교활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지혜로운 것 같지만 환난이 닥쳐오면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자를 외면하고는 자신들은 몰랐다고 발뺌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저울질하시고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그들이 자기 행위대로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의 번성은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15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15-20)

15-20절은 의인이 악인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먼저 15-16절은 악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15절은 악인에게 의인의 집을 헐려고 숨어서 기회를 엿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이유가 16절에 나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가도 일어나게 될 것이기에, 의인을 무너뜨리려고 매복하는 것은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악인은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17-20절은 의인에게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17-18절은 원수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 마음에 증거로 제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다음의 즐거움을 약하게 보시고서 그 원수에 대한 심판을 돌이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악인의 심판받는 것을 볼 때, 속으로 기뻐하는 것이 지혜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악인을 긍휼히 여기며 나 자신이 그러한 악인이 되지 않도록 주님 경외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19-20절은 악인으로 인해서 분노하지도 말고 시기하지도 말 것을 요청합니다. 19a절의 ‘악인으로 인해서 분노하지 말라’는 내용은 앞선 17-18절에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말라는 것과 내용상 연결됩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해야 하나, 악인을 미워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악인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며, 악인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도 말고, 오히려 선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악인들의 결국은 명확합니다. 그들은 장래의 소망이 없기에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와 왕을 두려워하라(21-22)

구약에서 왕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반드시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라고 하셨는데, 많은 병마를 두지 말 것, 많은 아내를 두지 말 것, 율법책을 묵상함으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서 그의 마음이 형제 위에 교만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21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21-22)

본 단락의 결론은 여호와와 왕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는 데 힘쓰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에게는 재앙이 급하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재앙과 왕이 보내는 재앙이 임하므로, 그들은 곧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핵심입니다. 악인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경외하기를 힘쓰면, 악인들의 악을 무너뜨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은연 중에라도 그들의 악행을 닮지 않으려면,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튼튼하게 세워가는 지혜로운 건축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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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3-02)


술과 음식에 대한 지혜

잠언 23장 15-35절


세상이 좀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원일 뿐이고 심하게 말하면 부속품일 뿐입니다. 필요할 때 쓰고 편하게 버리도록 법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는 현실은 이겨낼 대상이 아니라 체념하고 순응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사람들은 술을 찾습니다. 이런 때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은 크게 두 문단(15-21, 22-35)으로 나뉩니다. 각 문단은 지혜를 얻으라는 권고로 시작하고 술에 대한 경고로 마칩니다. 첫째 문단은 이 내용을 간략하게 가르치는 데 비해, 둘째 문단은 매우 자세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어야 하며, 술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의 술은 물론 술 자체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상징적 의미로 음녀의 유혹을 뜻합니다.

 

첫 번째 권고(15-21)

지혜로운 자녀를 보는 부모는 기쁩니다. 정직한 아들을 보면 부모는 유쾌합니다.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식을 보는 것이 부모의 소원입니다. 부모가 아니라 바로 그 지혜의 삶이 그들에게 안전한 미래, 의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5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16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17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18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9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20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22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15-22)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재물을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혹은 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1) 지혜를 얻으라(15-19)

오늘의 본문은 지혜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권고로 시작합니다.

15-16절은 마음이 지혜로워야 하고 입술이 정직을 말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여기서는 이해력을 담당하는 기관인 ‘마음’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직’은 ‘메샤림’이라는 단어로, ‘공평’으로도 번역되는데 올곧고 바름'을 뜻하며, 지혜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지혜를 선택하면 부모의 마음이 즐겁고 기쁠 것이라는 부탁입니다.

17-18절에는 지혜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먼저 17절에서는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여호와 경외에 힘쓸 것을 주문합니다. 여기 ‘부러워하다’라는 ‘시기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지혜자는 악인의 번영을 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시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18절에서 말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할 때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5-18절은 지혜를 선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잠언 기자는 19절에서 19장을 연상시키는 권면을 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2) 술에 대한 경고(20-21)

20-21절에서는 조금 갑작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술을 즐겨하고 고기를 탐하는 자와 함께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그런 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아서 술을 즐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가 되거나 잠에 취한 게으른 자가 되면, 지금 있는 재산조차 모두 탕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술과 고기를 탐하지 말라는 내용은 그 자체로는 유익한 조언입니다. 신명기 21:20에서도 제멋대로인 젊은이들은 공동체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언이 왜 이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며, 27-35절에서 명확해질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에 탐욕을 부리거나 게으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경고(22-35)

술이 주는 기쁨에 취해서 술의 노예가 되고 결국 죄악에 무감각한 자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이는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넘기는 사람처럼 어리석습니다. 술은 분별력과 절제력을 앗아가며, 아주 천천히 우리를 죽이는 독사의 족과 같습니다. 그 외적인 화려함과 거짓 만족의 늪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3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6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7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28참으로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29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23-35)

술 취함은 재앙과 근심, 분쟁과 원망과 상처의 원인입니다. 술은 마치 뱀과 같아서, 한번 물리면 감각을 마비시키고 허튼소리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 지속하면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누운 사람처럼, 또 몸을 가눌 수 없는 돛대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됩니다.

(1) 지혜를 얻으라(22-26)

먼저 22-26절은 다시금 지혜를 얻으라는 권고를 전해줍니다. 특별히 22, 24-25절은 부모와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지혜를 얻은 자가 되면 부모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합니다.

22절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어머니가 나이가 들어갈 때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23절은 그렇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중 중요한 부분이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24-25절은 자녀가 지혜를 얻게 될 때 부모가 크게 즐거워할 것을 말합니다. 26절 역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 술에 대한 경고(27-35)

이제 27절부터는 다시금 술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20-21절에서는 술, 고기, 잠자는 것에 대한 경고가 함께 등장했는데, 27-35절에는 술에 대한 경고가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술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27-28절에서는 기생과 이방 여인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27절은 기생과 이방 여인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깊고 좁은 구덩이여서, 한번 빠져들게 되면 헤어날 수 없는 덫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28). 그들은 강도같이 매복하고 있으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만듭니다. 여기서 기생과 이방 여인은 잠언의 독자들이 피해야 할 좋지 않은 여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29절부터 이어지는 술에 대한 내용과 병행되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됩니다. 이를 살피기 위해 29절 이하를 먼저 생각하고, 이후 이 두 가지를 연결해보시길 바랍니다. 29절은 ‘~이 뉘게 있느뇨’라는 질문을 여섯 번이나 던집니다.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그리고 붉은 눈이 뉘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30절에 나오는데, 바로 술입니다. 술에 의해서 삶의 모습이 흐트러진 사람에게 재앙, 근심, 분쟁, 원망 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31절은 그 술의 일종인 포도주를 언급합니다. 포도주는 매우 ‘올곧음’ 보입니다. ‘올곧음’으로 번역되는 ‘메샤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포도주가 순하게 내려감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올곧음’은 32절이 말하는 것과 같이 나중에는 뱀같이 쓰고 물것입니다. 즉, 처음에 좋게 보이는 포도주가 나중에는 생명을 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 보이는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포도주에 속아 넘어가 빠지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그 결과가 33-35절에 나옵니다. 먼저 33절에 나오는 것처럼, 눈에 괴이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때려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금 술을 찾는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즉, 술에 중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괴이한 것’으로 번역된 원어를 직역하면 ‘음녀들’입니다. 포도주에 빠지면 눈에 ‘음녀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27-28절에서 기생과 이방 여인이 언급되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1-9장에서 음녀와 이방 여인은 지혜 여인과 대조를 이루는 상징이었습니다. 지혜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23장 본문에서 ‘술’은 곧 ‘음녀’를 상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음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술을 멀리해야 하는 것은 처음에는 그것이 좋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술에 취해 맥이 풀린 상태이면서도 허세와 호기를 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가 생각하는 것은 또 한 잔의 술뿐입니다. 술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중독된 모습입니다. 이것은 음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잠언 5:1 이하에서 음녀에 대해 묘사하기를,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재가 바로 음녀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15-35절 본문 전체는 ‘지혜의 길을 가서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과 ‘술과 음녀와 같은 존재들을 피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으로 압축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며, 음녀와 술과 같은 것들을 멀리하면서, 겉보기에 우리를 만족시킬 것처럼 유혹의 손길을 뻗는 미련함의 길을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여 형통함을 위해 악인의 길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살 것인지 우리는 결정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한쪽은 거짓 만족에 취해 있느라 나와 타인을 망가뜨리게 되지만, 다른 한쪽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아무리 힘겨운 현실일지라도, 그 너머에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오늘도 지혜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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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3-01)

  


진수성찬이나 재물을 경계하라

잠언 23장 1-14절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런 식탁의 자리가 ‘회식’ 혹은 ‘접대’라는 이름 아래 탐심과 탐식으로 변질하곤 합니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그저 공허한 인사말이 되거나 무슨 의도입니까? 고민하게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밥과 말에 정직할 수 있습니까?

 

본 단락의 중심 주제는 탐욕에 대한 경고와 자녀 교육입니다. 1-5절은 탐욕에 대한 첫 번째 경고로서,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을 상징적 이미지로 사용해서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6-11절은 탐욕에 대한 두 번째 경고로,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12-14절은 자녀에 대한 훈계가 꼭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탐욕에 대한 경고 1(1-5)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음식을 먹게 될 경우, 차려진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 그가 나를 시험하는 자리일지 모릅니다. 그가 차려준 산해진미를 먹는 것이 내게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특히 인색한 자와 함께하는 식탁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1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2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3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4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1-5)

‘속이는 음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랫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통치자들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사람들을 대접하고 자기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식탐을 경고합니다.

(1) 음식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라(1-3)

23장의 첫 단락은 맛있는 음식을 상징적 이미지로 사용해서 탐욕을 부리지 말 것을 권합니다.

1절은 솔로몬은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을 상정합니다. 관원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관원’이란 ‘다스리는 자’로 정치적, 행정적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닌 사람과 식사 자리에 동석한 경우, 우리는 맛있는 음식에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되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내가 연약하고 민감하고 넘어지기 쉬운 영역’이 있다면, 그에 관해서는 더욱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목에 칼을 두라고까지 말합니다. 욕심을 내는 것을 반드시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목’은 탐욕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사용하는 탐하는 것의 원어가 ‘네페쉬’인데, 이 단어는 동시에 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탐욕을 부리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에 칼을 겨눠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절은 연이어서 음식을 탐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탐욕은 바로 ‘속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3절은 2절에서 제시한 권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목에 칼을 겨누지 않고 탐욕에 져서 그 음식을 먹게 되면, 먹을 때는 맛있게 느껴지겠지만 나중에는 그 음식이 나를 속이게 될 것입니다. 그 음식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나를 어려움으로 몰아넣는 쓰디쓴 음식임이 결국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2)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4-5)

4절은 부자가 되려는 욕심을 멀리하라고 권고합니다. 이 역시 탐욕에 대한 경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과하게 모으려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4b절은 우리에게 지혜를 사용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의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보다는 ‘네 지혜를 사용하여 욕심을 멈추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5절은 재물에 탐욕을 부리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재물에 눈길을 주는 순간, 그 재물은 없어집니다. 재물에 독수리와 같은 날개가 생겨서 하늘로 날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는 순간, 그 재물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바른 관점과 태도로 재물을 대해야 그 재물을 소유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 관점으로 재물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재물은 어느 순간 없어지고 맙니다. 좀 더 깊이 해석해보면, 설사 우리가 재물을 계속 갖고 있게 된다손 치더라도, 과욕에 치우쳐서 그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올바른 의미의 재물은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한 불의의 재물은, 올바른 의미의 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대한 경고 2(6-11)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구속자이십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기업은 지계석으로 표시되었는데, 권력자들은 그것을 옮겨 약자들의 권리를 발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자들을 대적하시고, 약자들의 구속자가 되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십니다.

6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7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8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9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10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11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6-11)

부자가 되려는 마음을 경고합니다. 이 역시 탐욕입니다. 재물을 과하게 모으려고 하거나, 남의 지계석을 옮겨서라도 모으려고 한다면 그 과정에 탈이 납니다. 과한 물욕을 절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재물은 손쉽게 우리 손에 들오지 않습니다.

(1)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6-8)

6-8절은 다시금 음식에 대한 욕심으로 되돌아갑니다. 악한 눈을 가진 자의 음식을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악한 눈’이란 인색한 자를 의미합니다.

6절에서 말하는 ‘악한 눈을 가진 자’는 1-3절에서 말한 ‘관원’보다 좀 더 직접적인 비유입니다. 이 사람은 음식을 나눠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음식은 결코 탐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그 사람은 겉으로는 ‘음식을 맛있게 드세요’라고 권하는데, 그의 속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라는 그의 권유는 유혹이요. 어려움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의 사람됨은 그가 겉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속으로 하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음식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음식을 먹으면 8절이 말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먹은 것을 다시금 토해내야 하게 되고, 아름다운 말은 헛된 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먹은 것만큼 다시 내놓아야 하므로, 그것은 먹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또한, 그 음식을 먹으려고 그 사람에게 해야 했던 여러 가지 말도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게 됩니다.

6-8절은 우리가 탐욕을 부리는 상황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내게 무언가를 줄 생각이 없는 사람이 겉으로 아무리 좋게 말하더라도, 그것이 정말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과욕을 부려 무언가를 취하더라도, 결국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뿐입니다.

(2)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9-11)

9절은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미련한 자는 더 이상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더 지혜로워지고, 미련한 자는 더 미련해지기 마련입니다(9:7-12 참고).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관점에서 살아야 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 한 예가 10절에 나옵니다. 10절은 선조가 세운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내 땅을 넓히고 싶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웃에게 주신 땅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부모를 잃어 자신들의 땅을 보호할 힘이 없는 아이들의 땅을 빼앗는 악한 행위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의와 악을 행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11절에 등장합니다. 탐욕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변호해주실 것이고, 결국 그들이 빼앗긴 것을 되찾아주실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훈계(12-14)

훈계를 위한 사랑의 체벌은 필요합니다. 아이를 위한다고 그릇된 행동에도 매를 아끼면 아이의 영혼과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물론 냉혹한 책망과 분노를 쏟아내는 체벌은 피해야 하지만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책망과 체벌은 꼭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책망과 체벌을 하는 부모나 받는 자녀 모두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12-14)

본 단락의 마지막 구절은 자녀에게 주는 훈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훈계란 단순히 누군가를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다. 훈계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누군가를 훈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고 바르게 지도하는 것입니다.

12절은 잠언 독자들에게 이런 훈계를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후, 13절에서는 이 훈계를 자녀들에게도 전달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잠언을 통해 배운 교훈을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며, 그것을 또한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훈계할 때 채찍으로 때려도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채찍은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사랑의 매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22:6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서 ‘아이’로 번역된 단어는 ‘나아르’로서 젊고 건장한 청년까지 포함하는 의미 범주를 지녔습니다. 건장한 청년을 채찍으로 내려친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지혜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관점으로 살아가도록 철저하게 지도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4절에서는 그 ‘나아르’를 채찍으로 때리면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스올’은 음녀의 집입니다(7:27:9:13), 따라서 훈계는 ‘나아르’를 음녀의 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12-14절은 잠언 독자에게 먼저 자신을 지혜의 말씀으로 채찍질하고, 그 후 자신이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사람들에게 지혜의 길로 가도록 엄중히 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는 진실된 밥상공동체입니다. 정직하고 검소한 음식이 차려지고 서로를 향한 사랑가 진리의 언어가 오고 가는 성도들의 식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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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2-02)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잠언 22장 17-29절


 

우리나라에는 공직 혹은 후보자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공무집행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직자윤리법’이 존재합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궁의 관리가 되려는 이들을 향한 지혜자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혹은 사회의 공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본문은 잠언 22:17-24:22의 잠언 모음집을 시작하는 첫 부분으로, 이 새로운 모음집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서는 표제를 설명하였고, 19-21절에서는 이 잠언 모음집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22-29절에서는 본격적으로 여러 주제의 잠언들이 등장하는데, 곤고한 자, 분노하는 자, 보증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씀(17-21)

하나님의 말씀은 머릿속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뱃속과 입속에 스며들어 완전히 체화해야 합니다. 머리는 잊을지언정 몸은 말씀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은 결심이나 의지만으로 안 됩니다.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서른 자기 교훈을 주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요구합니다.

17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17-21)

하나님께서는 지혜자를 세워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며, 깨달아 알게 된 진리를 삶에 적용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좋은 교사, 좋은 지도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1)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라(17-18)

17절은 22:17-24:22의 단락을 열어주는 첫 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먼저 이 모든 잠언들의 표제를 소개하는데,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 지칭합니다. 이제까지의 잠언들, 즉 잠언 1-9장과 10:1-22:16은 솔로몬의 잠언이었습니다(1:1; 10:1). 그런데 이제는 지혜자들의 잠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인데 의도적으로 지혜자의 잠언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잠언의 저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지혜자’라는 명칭입니다. ‘지혜자’란 지혜를 얻고 소유한 자들입니다. 잠언 전체의 맥락 특히 잠언 1-9장의 맥락을 생각해보면, 지혜자란 여호와 경외의 길을 선택하고 미련한 여인의 길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22:17 이하의 잠언들을 ‘지혜의 길을 선택하여 이미 그 길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의 잠언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이 지혜자들은 이제 잠언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을 통해 배운 지혜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지식에 귀를 기울이라’고 17b절에서 외치는 것입니다.

18절은 이러한 지혜자들의 잠언을 우리 속에 보존하고 입술에 머물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2) 지혜자의 말씀을 주신 이유(19-21)

‘지혜자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19-21절에 소개됩니다.

19절은 ‘지혜자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말씀을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지혜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22:17-24:34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0절은 지혜자들이 ‘예전에’ 한번 말씀을 주었다는 것을 되새겨줍니다. 여기서 ‘예전에’라고 번역된 단어는 학자들이 ‘삼십 가지’ 혹은 ‘아름다운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22:17-24:22에는 잠언 1-9장에 나타난 구절들과 어휘적, 주제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20절에서 예전에 이미 주었던 말씀이란 잠언 1-9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혜자는 그러한 1-9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또 다른 형태로 새롭게 들려주겠다는 것입니다. 19절의 ‘오늘’ 말씀을 준다는 표현과 20절의 ‘예전에’ 주었던 말씀은 서로 연결됩니다.

21절은 이렇게 1-9장의 말씀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금 가르쳐주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서 잠언을 읽는 독자를 보낸 사람(잠언 말씀을 배우게 한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가 잠언 말씀을 배워 진리를 실천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잠언 22:17-24:34을 읽을 때, 잠언 1-9장을 복습하는 마음으로 읽되,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지혜의 길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지혜(22-25)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사람 관계에서의 지혜입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약하고 곤고한 자를 보살필 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우리 예수님께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자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 대하듯 하는 자며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22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24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5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22-25)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십니다. 나눔과 배려 없는 인색한 세상에서 탐욕은 재능 또는 실력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배하신 약속의 땅마저도 경계를 바꾸는 이스라엘 민족의 간악함이나, 경쟁에서 이겼다고 당연하게 모든 것을 독식하는 우리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약한 자를 대하는 방법(22-23)

이 두 구절은 약한 자와 곤고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22절은 약한 자를 탈취하지 말고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성문은 고대 근동에서 사회의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이 처리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성문에서 어떤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한다는 것은 어떤 재판이나 절차를 통해 가난한 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22절은 그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2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곤고한 자가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변호해주실 것이고, 그 곤고한 자를 노략질한 자의 생명을 여호와께서 노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곤고한 자를 어렵게 하면, 그가 행한 바로 그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한대로 자신이 고스란히 당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원하시고 갚아주시는 공의의 주님이시므로, 곤고한 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2) 분노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24-25)

이 두 구절은 분노를 품은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분노를 품은 자와는 깊은 인간관계 맺기를 조심해야 하며, 심지어는 동행하기도 삼가야 합니다. 여기서 분노를 품은 자란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정당하게 분노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어쩌다 실수로 화를 내는 경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분노하여 그것이 자신의 성품의 일부가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25절에 나옵니다. 분노하는 자와 관계를 맺으면, 그 영향이 미쳐서 자신의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무란 새를 잡는 덫을 말한다. 새는 자신이 덫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잡힙니다. 마찬가지로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과 사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는 습관에 물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미련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게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삶에 나타난 지혜(26-28)

자신이 가진 힘과 지위로 약한 자를 누르면 안 됩니다. 힘없는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토지 착취는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능하다는 것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말씀을 실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26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7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8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29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26-29)

형편과 분수를 모르고 선 보증은 관계를 깨드리는 큰 고통이 됩니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섣부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내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한 후, 형편이 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도 거절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1) 보증을 서지 말라(26-27)

이 두 구절은 보증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보증에 대한 문제는 6:1-5에서 자세히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보증을 서지 말라는 교훈은 아니었고, 보증을 섰으면 빨리 보증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제 22:26-27은 보증 자체를 서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가 27절에 주어집니다. 만일 보증이 문제가 될 경우, 내 재산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28)

28절은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9:14에서 모세는 각자에게 주신 지계석을 옮기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지계석이란 땅의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잘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주신 기업에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26-27절에서 보증을 서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해봅시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증을 잘못 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기업을 무너뜨리게 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기업을 무너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26~28절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영역을 감사함으로 잘 지키고 발전해나가라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일에 능숙한 자(29)

29절은 자신의 일에 능숙한 자는 왕 앞에 서게 된다고 서술합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그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제 잠언 22:17-24:34에 소개되고 있는 여러 잠언들을 잘 익혀서 실천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들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면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왕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잠언을 익히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에 있는 기독교인 중에 부정과 불법에 연루된 이들이 많아 교회가 종종 어려움을 겪습니다. 말씀이 머릿속 지식에만 머물고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에 능한 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제 몫을 감당해 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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