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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22-02)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잠언 22장 17-29절


 

우리나라에는 공직 혹은 후보자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공무집행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직자윤리법’이 존재합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궁의 관리가 되려는 이들을 향한 지혜자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혹은 사회의 공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본문은 잠언 22:17-24:22의 잠언 모음집을 시작하는 첫 부분으로, 이 새로운 모음집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서는 표제를 설명하였고, 19-21절에서는 이 잠언 모음집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22-29절에서는 본격적으로 여러 주제의 잠언들이 등장하는데, 곤고한 자, 분노하는 자, 보증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씀(17-21)

하나님의 말씀은 머릿속의 지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뱃속과 입속에 스며들어 완전히 체화해야 합니다. 머리는 잊을지언정 몸은 말씀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은 결심이나 의지만으로 안 됩니다.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서른 자기 교훈을 주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요구합니다.

17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17-21)

하나님께서는 지혜자를 세워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며, 깨달아 알게 된 진리를 삶에 적용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좋은 교사, 좋은 지도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1)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라(17-18)

17절은 22:17-24:22의 단락을 열어주는 첫 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먼저 이 모든 잠언들의 표제를 소개하는데,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이라 지칭합니다. 이제까지의 잠언들, 즉 잠언 1-9장과 10:1-22:16은 솔로몬의 잠언이었습니다(1:1; 10:1). 그런데 이제는 지혜자들의 잠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인데 의도적으로 지혜자의 잠언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잠언의 저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지혜자’라는 명칭입니다. ‘지혜자’란 지혜를 얻고 소유한 자들입니다. 잠언 전체의 맥락 특히 잠언 1-9장의 맥락을 생각해보면, 지혜자란 여호와 경외의 길을 선택하고 미련한 여인의 길을 거절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22:17 이하의 잠언들을 ‘지혜의 길을 선택하여 이미 그 길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의 잠언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이 지혜자들은 이제 잠언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을 통해 배운 지혜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지식에 귀를 기울이라’고 17b절에서 외치는 것입니다.

18절은 이러한 지혜자들의 잠언을 우리 속에 보존하고 입술에 머물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2) 지혜자의 말씀을 주신 이유(19-21)

‘지혜자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19-21절에 소개됩니다.

19절은 ‘지혜자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말씀을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지혜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22:17-24:34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0절은 지혜자들이 ‘예전에’ 한번 말씀을 주었다는 것을 되새겨줍니다. 여기서 ‘예전에’라고 번역된 단어는 학자들이 ‘삼십 가지’ 혹은 ‘아름다운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22:17-24:22에는 잠언 1-9장에 나타난 구절들과 어휘적, 주제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20절에서 예전에 이미 주었던 말씀이란 잠언 1-9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혜자는 그러한 1-9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또 다른 형태로 새롭게 들려주겠다는 것입니다. 19절의 ‘오늘’ 말씀을 준다는 표현과 20절의 ‘예전에’ 주었던 말씀은 서로 연결됩니다.

21절은 이렇게 1-9장의 말씀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금 가르쳐주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서 잠언을 읽는 독자를 보낸 사람(잠언 말씀을 배우게 한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가 잠언 말씀을 배워 진리를 실천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잠언 22:17-24:34을 읽을 때, 잠언 1-9장을 복습하는 마음으로 읽되,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지혜의 길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지혜(22-25)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사람 관계에서의 지혜입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약하고 곤고한 자를 보살필 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우리 예수님께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자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 대하듯 하는 자며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22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24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5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22-25)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십니다. 나눔과 배려 없는 인색한 세상에서 탐욕은 재능 또는 실력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배하신 약속의 땅마저도 경계를 바꾸는 이스라엘 민족의 간악함이나, 경쟁에서 이겼다고 당연하게 모든 것을 독식하는 우리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약한 자를 대하는 방법(22-23)

이 두 구절은 약한 자와 곤고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22절은 약한 자를 탈취하지 말고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성문은 고대 근동에서 사회의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이 처리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성문에서 어떤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한다는 것은 어떤 재판이나 절차를 통해 가난한 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22절은 그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2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곤고한 자가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변호해주실 것이고, 그 곤고한 자를 노략질한 자의 생명을 여호와께서 노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곤고한 자를 어렵게 하면, 그가 행한 바로 그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한대로 자신이 고스란히 당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원하시고 갚아주시는 공의의 주님이시므로, 곤고한 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2) 분노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24-25)

이 두 구절은 분노를 품은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분노를 품은 자와는 깊은 인간관계 맺기를 조심해야 하며, 심지어는 동행하기도 삼가야 합니다. 여기서 분노를 품은 자란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정당하게 분노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어쩌다 실수로 화를 내는 경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분노하여 그것이 자신의 성품의 일부가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25절에 나옵니다. 분노하는 자와 관계를 맺으면, 그 영향이 미쳐서 자신의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무란 새를 잡는 덫을 말한다. 새는 자신이 덫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잡힙니다. 마찬가지로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과 사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는 습관에 물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미련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게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삶에 나타난 지혜(26-28)

자신이 가진 힘과 지위로 약한 자를 누르면 안 됩니다. 힘없는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토지 착취는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능하다는 것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말씀을 실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26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7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8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29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26-29)

형편과 분수를 모르고 선 보증은 관계를 깨드리는 큰 고통이 됩니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섣부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내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한 후, 형편이 되지 않으면 말하기 어려워도 거절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1) 보증을 서지 말라(26-27)

이 두 구절은 보증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보증에 대한 문제는 6:1-5에서 자세히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보증을 서지 말라는 교훈은 아니었고, 보증을 섰으면 빨리 보증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제 22:26-27은 보증 자체를 서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가 27절에 주어집니다. 만일 보증이 문제가 될 경우, 내 재산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28)

28절은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9:14에서 모세는 각자에게 주신 지계석을 옮기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지계석이란 땅의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잘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주신 기업에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26-27절에서 보증을 서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해봅시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증을 잘못 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기업을 무너뜨리게 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기업을 무너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26~28절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영역을 감사함으로 잘 지키고 발전해나가라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일에 능숙한 자(29)

29절은 자신의 일에 능숙한 자는 왕 앞에 서게 된다고 서술합니다. 자신의 일에 능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그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제 잠언 22:17-24:34에 소개되고 있는 여러 잠언들을 잘 익혀서 실천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들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면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왕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잠언을 익히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에 있는 기독교인 중에 부정과 불법에 연루된 이들이 많아 교회가 종종 어려움을 겪습니다. 말씀이 머릿속 지식에만 머물고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에 능한 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제 몫을 감당해 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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