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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7-02)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교훈

여호수아 7장 16-26절


 

가나안 땅은 아름다운 땅이지만, 그만큼 죄의 유혹이 강한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저절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간은 실토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회개의 고백이 아니라 추궁 끝에 나온 자백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행한 첫 번째 범죄였습니다.

 

 

  •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레위 지파를 포함하면 열세 개의 지파로 구성되어 있으나, 각 지파는 또한 몇 개의 계파, 즉 문중으로 나뉩니다. 헤렘 물건에 손을 댄 범인을 색출하는 제비뽑기 과정은 이러한 민족 집단의 조직 체계를 상세히 보여줍니다. 최종적으로 이간이 범인으로 뽑히고 그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모면하지는 못합니다.

 

법인으로 재비 뽑힌 아간(16-19)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죄가 클 뿐입니다. 어리석은 계산이고 무모한 용기입니다. 죄의 혜택을 압수하고 죄의 공범자들을 같이 처형합니다. 죄는 구체적으로 지적받고 철저하게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단호하게 불순종한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점점 폭이 좁혀지더니 결국 아간의 정체와 그가 훔친 것의 진상이 드러납니다.

 

16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19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16-19)

 

이튿날 아침 여호수아는 각 지파들을 소집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구약에서 흔히 ‘온 회중’이 모였다는 의미는 대표들의 회집인 많은데(레 8:3; 9:1), 이때도 아마 각 지파의 대표들인 장로들이 소집되었을 것입니다. 제비뽑기의 결과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다시 유다 족속 중의 문중 대표들이 소집되어 제비뽑기가 실행되어 세라 족속이, 이어서 세라 족속 중에서는 삽디 집안이 뽑혔습니다. 문중부터는 아마 가장들이 대표로 소집된 것으로 추론됩니다. 최종적으로 아마도 삽디 일가의 가장들이 모인 가운데 제비를 뽑은 결과 아간이 범인으로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범인으로 결정된 아간을 ‘내 아들아’라고 부른다. 당시 전통에서는 흔히 권위자가 아랫사람을(삼상 4:16; 18:22), 스승이 제자를 ‘아들’로 칭했습니다(삼상 3:6; 잠 1:8; 전 12:12; 딤후 2:1; 히 12:5). 이것은 매우 인격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호칭이므로 현재 여호수아는 아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자백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앞에서 자복하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너는 자복하라’는 히브리어 명령형 동사 토다는 주로 시편에서 등장하는데, 대부분 ‘너는 찬양하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는 동사는 흔히 같은 어근 동사의 히트파엘형인 ‘히트봐다’가 사용됩니다(레위기 5:5; 레위기 16:21; 26:40; 민수기 5:7; 다니엘 9:4; 느헤미야 1:6 등), 이 동사의 ‘찬양하라’라는 의미는 직선의 ‘영광을 돌리라’와 짝을 이루며, 무엇보다 구두섬인 분리 악센트 아트나(atnah)가 둘을 묶어 문장을 공고 있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 앞에서 찬양하라. 그리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자백은 이어지는 그 일을 ‘내게 알리고 숨기지 말라’는 명령에서 분명하게 요구됩니다.

 

아간의 자백과 징벌(20-26)

탐욕을 충족시키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수행하는 대의명분이 있을 때 허용되는 것이 진멸 전쟁입니다. 명품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명분을 위한 전쟁이어야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철저히 진멸할 것은 진멸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희생제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20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22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23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가지고 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으니라 2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0-26)

 

아간은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간과 그의 가족을 처벌했습니다. 이는 죄를 숨기지 말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죄의 결과가 심각하다는 것을 경고하며, 공동체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 아간이 자백하다(20-21)

 

아간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헤렙 품목을 빼돌렸는지 자세히 털어놓습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아마 최고가의 물건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날 산은 시날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의미합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지역은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생산된 각종 진귀하고 사치스런 물건들은 주변에 수출되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는 매우 비싼 옷이라는 당시의 관례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아간은 매우 비싼 옷을 탐내 훔쳤습니다. 또 200세겔의 은덩이와 50세겔 무게의 금덩이를 훔쳤습니다. 아간의 고백 속에는 죄를 짓는 심리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귀한 것을 보고 탐을 냅니다. 특히 탐심은 죄의 근원이자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시발점입니다(창 3:6; 출 20:17; 신 5:21; 7:25; 미 2:2; 잠 6:25; 12:12). 특히 탐스러운 것을 ‘보고 탐을 내어’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에덴에서 최초의 범죄 과정과 동일합니다(창 3:6).

고대 근동의 전통에 의하면, 승전국의 전리품은 군주의 허락을 받아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전국 임금은 하나님이시므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리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멋대로 빼돌린 물건들을 자신의 막사 아래 땅 속에 숨겼습니다. 여기에 ‘진영에’를 덧붙인 70인경이 암시하는 대로, 그의 범죄는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2) 징벌을 받은 아간(22-26)

 

여호수아는 즉시 아간의 막사에 부하들을 보내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장물들이 거기 숨겨져 있었습니다. 군사들은 그 장물들을 모두 취해 여호수아와 백성 앞에 가져왔으며, 여호수아는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쏟아놓았습니다(23). ‘여호와 앞’은 통상적으로 성막 안쪽의 본당 건물인 회막 앞을 말하므로 성막 뜰일 것입니다. 이 행위는 그 물건들을 소유권자이신 여호와께 돌려드리는 의미를 지녔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백성은 범인인 세라의 아들 아간을 체포하였으며, 되찾은 그 헤렘 물건들과 그의 자녀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과 물건들을 취하여 아골 골짜기로 갔습니다. 이 골짜기의 이름 아골은 이 사건 후에 붙여졌는데(25), 범인 아간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의 말놀이이면서 아간의 범죄로 아이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의 고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모여서 아간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치고 불살랐습니다. ‘돌을 던져 죽이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라감과 사칼의 두 가지인데, 여기서 이 둘이 모두 사용됩니다(25). 먼저 아간과 사람들을, 그리고 모든 물건들을 돌로 치고 모두 불사릅니다. 개역개정에는 빠져 있는데 불사름에 이어 다시 그것들을 돌로 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돌무덤을 쌓습니다(26). 투석형으로 일단 사형을 집행하고 물건들도 돌로 친(라감) 다음, 죽은 시체와 부서진 물건들을 불사르고 그것들에 다시 돌을 던져(사칼) 돌무덤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간 사건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첫째, 아간은 회개를 했는데, 왜 사형을 당했습니까? 분명히 아간은 범죄 사실을 진정성 있게 인정합니다(20). 하지만 아간은 제비뽑기로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그때서야 ‘내가 범죄했다’고 말하며(25)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뿐, 그가 죄를 참회하고 회개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이와 흡사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초대 교회에 일시적으로 공동소유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가 심판을 받아 혼절하여 사망합니다. 한편,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왜 가족들이 함께 몰살을 당했습니까? 아간 가족들이 아간의 죄를 알고도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집에서 땅을 파고 장물을 감출 정도면 가족들 모두가 범죄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땅값을 감추었을 때, 사도행전 기자는 ‘그 아내도 알더라’라고 밝힙니다(행 5:2). 반대로 라합의 친족들은 모두 라합에 동조해서 그녀의 집에 모여 있다가 이스라엘 군사들에게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분명 구약의 연대 책임 사상은 중요합니다. 연대 책임은 수평적으로 현재의 공동체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수직적으로 세대 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의 죄를 자신들의 죄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곤 했습니다(레 26:40).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런 개인의 범죄는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듯 연대 책임의 원리가 작동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과 결단이 제외되거나 무시되지 않습니다. 헤렘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개인이(라합), 혹은 집단이 민족적으로(기브온 족속, 여호수아 9장) 결단과 개종을 통해 헤렘의 심판을 면할 길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간의 범죄와 그의 집의 심판은 라합과 그녀의 집의 구원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마찬가지로 고라와 그 일당이 모두 몰살을 당할 때, 고라의 아들들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아버지를 떠나는 결단을 내려 생존했습니다(민 26:9-11). 후대에 고라의 후손에서 사무엘이 탄생하는가 하면, 그들은 성전 음악을 비롯한 주요 직무를 맡고 시편의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대상 9:19; 20:9). 언약 백성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헤렘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무관하게 이방 풍속과 규례를 따르고 하나님을 반역하며 우상을 숭배했을 때는 진멸의 심판을 당했습니다(예, 고라 일당의 진멸(민 16장); 우상숭배 성읍의 진멸(신 13:12-18)). 결국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공동 책임과 개인 책임 둘다 적용하여 한 사람의 죄가 전체에 영향을 주는가 하면, 각 사람은 또한 각자의 죄로 망한다(렘 31:29-30; 겔 18:19-22).


아간의 죄는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숨기지 말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심각하며,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영적 상태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과 책임감으로 돌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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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7-01)


아이성 전투에서의 충격적 패배

여호수아 7장 1-15절


 

하나님의 자녀로서 칭의와 중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완전합니다. 구원에 다른 공로를 추가하려는 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정죄하고 심판하십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로만 구원이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다른 공로를 가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 헤렘 전쟁을 통해 헤렘으로 헌정된 물건은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사사로이 쉬할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지만, 최고 수위의 헤렘 전쟁에서는 모든 물건을 소각하고 가축은 모두 죽었으며, 금속류는 성전 창고에 보관해서 성전을 위해 재활용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바로 최고 수위의 헤렘으로 봉헌되었으며, 어떤 물건도 전리품으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실패한 아이 성 정복(1-5)

 

신앙 공동체는 한 사람의 작은 죄라도 방관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일처럼 비난하고 조롱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랑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아간의 죄 같은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1-5)

 

아간의 이야기를 잘 아는 독자들은 7장 서두에서 이상한 표현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1a)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간의 범죄에 대한 공범자라는 진술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공동 책임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트린 당사자는 아간입니다. 그의 상세한 족보가 제시되면서 아간과 그의 집안 내력이 함께 암시됩니다. 4대가 등장하는 아간의 족보는 선택적인 신학적 족보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간은 유다 지파이긴 하지만, 그의 조상이 다윗으로 이어지는 베레스가 아닌 세라인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족보가 명망가로서의 아간의 집안을 소개하는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범죄자 가인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을 고려해볼 때 혈통에 대한 부정적인 암시에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아간은 ‘온전히 바친 제물’에 손댔습니다. 이 물건은 ‘헤렘’인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진 것’을 뜻합니다. 아간이 헤렘 물건에 손을 대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범죄는 특별히 ‘마알’로 지칭되는데, 이것은 특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위반’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서약을 위반하는 범죄들을 ‘신실치 못하여 저지른’ 마알의 범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레 6:2). 이것은 서약 당사자인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현재 아간의 범죄 역시 마알인데, 이것은 11절에서 하나님께서 꾸중하고 있듯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것을 헌정해야 하는 헤렘 전쟁의 서약을(수 6:17-19) 위반하는 행위였음을 암시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에 분노를 뿜어내셨습니다. 범죄에 대한 상세한 내막과 설명은 아이 성 정복 실패담 이후로 유보됩니다.

1-3절은 아이 성 공략이 실패한 두 가지 원인을 서론적으로 꺼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헤렙의 규칙을 위반한 아간의 범죄(1)와 아이 성을 하찮게 본 이스라엘의 교만이었습니다(2-3). 실패한 아이 성 이야기의 서두에 아간의 범죄가 가장 먼저 언급된 이유는 실패의 주요 원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교만함이 부각됩니다. 요단강 근처 저지대의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내륙의 고지대 초입에 자리한 아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 밀정들을 보냅니다. 아이 성의 정탐꾼의 숫자가 명시되지 않고 정탐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보고되는데, 이는 아이 성의 경우 정탐부터가 매우 느슨하고 허술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오만함이 엿보입니다. 정탐꾼들이 파견된 아이의 위치는 벧엘 동쪽 벧아웬 근처입니다. 벧엘과 벧아웬은 아이보다 더 서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두 성의 위치에 대해 많은 제안이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해수면 아래 계곡에 위치했지만, 아이는 급격히 높아진 산악 지대 초입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정탐을 마친 밀정들이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지나치게 낙관적인 보고를 합니다(3). 그들은 소수 병력만으로도 아이 성 공략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불과 이삼천 명을 제안합니다. ‘그들은(아이 성 주민) 소수이니’라는 말에서 정탐 활동이 철저하지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나중에 아이 성 주민이 남녀 만 이천 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수 8:25). 정탐꾼들의 제안대로 선발된 군사 삼천 명이 아이로 올라가 전투를 벌이지만 쉽게 패주하여 36명의 군사를 잃습니다(4). 아이의 군사들은 ‘채석장’이라는 뜻의 지명을 가진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리막길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쳐부수었습니다. 냉정히 평가하면, 불과 36명의 전사자가 치명적 타격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중지란에 빠진 이스라엘은 그들이 얼마나 느슨한 정신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를 잘 암시해줍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 소식에 온 백성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마음이 녹은 상태를 표현한 마사스(분해되다)는 앞서 2:9에서 여호와의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여리고 주민들과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에게 사용된 바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그 동사가 이스라엘에게 사용됩니다. 그들은 완전히 사기를 잃었습니다. 반면에 아이 성 가나안의 사기는 충천했습니다.

세 번의 정탐 활동을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대조에는 흥미로운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민수기에서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파견된 열두 명의 밀정들은 불신의 비고를 가져와 백성을 낙담케 했습니다. 반면에 여리고를 탐문한 두 명의 밀정은 믿음의 보고로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정탐한 밀정들은 교만한 보고로 백성을 방심케 했습니다. 정탐 행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단지 정탐의 동기와 태도, 정탐 후의 평가가 중요했을 뿐입니다.

 

패배 후 여호수아의 탄원(6-9)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게 되면, 우리는 종종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 일에 대해 기도하지 않은 공범자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죄는 크며, 나중에 자신이 조롱한 대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6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6-9)

 

패배의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옷을 찢고 법궤 앞에서 땅에 엎드리며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는 행위는 전형적인 애도와 슬픔의 표현입니다. ‘법궤 앞에서’ 엎드렸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이 온종일 탄식하며 부르짖었음을 뜻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항변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반복적으로 쏟아낸 불평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습니다(출 14:10-12; 민 14:1-3). 여기서도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왜 여호와께서 우리를 요단 강을 건너오게 해서 다 죽게 만드시느냐고 따지면서 ‘우리가 요단 저쪽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고 덧붙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역시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압력을 행사하면서 흥정을 시도합니다. ‘우리가 적들에게 망해 이 소문이 세상에 퍼진다면, 당신의 명성에 스스로 먹칠하는 셈이 아닙니까?’ 이것은 물론 시편에서도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탄식 기도의 수사학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적으로 태만해졌던 그늘의 항변은 시편 기자의 탄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 동편을 떠나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탓이다!’ 그들도 결국 제1세대의 조상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범인 색출과 징벌(10-15)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물건, 즉 진멸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떠나겠다고 하십니다. 진멸하지 않고 가져온 물건과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훔친 사람을 진멸할 때 이스라엘로부터 수치가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때 그들 몫의 축복을 반ㄷ을 수 있습니다.

 

10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14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10-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왜 무기력하게 아이 성에서 실패했는지 알려주시면서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요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조항의 하나인 헤렘 규칙을 어기고 헤렘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패한 이유입니다(12). 아간은 해이해진 백성의 정신적, 영적 상태를 대표로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공범자로 취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이 공동 책임을 지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덧붙여 하나님께서는 만일 헤렘 물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더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범인 색출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절차를 알려주십니다. 모든 백성이 스스로 성결케 하고 다음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성결케 하는지는 출애굽기 19장에 암시되어 있는데, 옷 세탁과 부부관계의 금지입니다. 통상적으로 옷을 빨아 정결케 할 때는 목욕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성결케 된 백성 중에서 하나님이 차례로 ‘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취하실 지파’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방식은 본문이 말해주지 않지만, 아마 제비뽑기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흉패 속에 보관했던 우림과 둠밈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합법적인 제비뽑기는 분명 이방의 마술이나 점술과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잠언은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라고 천명합니다. 제비가 뽑히는 순서는 큰 단위의 집단부터 작은 단위로 내려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통해 특정 지파가 뽑히고, 그 지파 안에서 다시 제비를 통해 특정 가문이 뽑히고, 그 가문 내에서 다시 제비뽑기에 의해 범인이 뽑힙니다. 가문의 남자들이 가까이 온 가운데, 최후의 제비뽑기를 통해 범인이 드러납니다(14-15). 그는 형을 당할 것이고,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함께 불사름을 당할 것입니다(15).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간의 죄는 이스라엘 전체에 고통을 가져왔으며, 이는 한 사람의 죄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하며, 죄를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영적 상태에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과 책임감으로 돌봐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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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2)


하나님의 기적과 여리고의 붕괴

여호수아 6장 8-27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을 존중해야 하며,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순종의 결과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기이한 하나님의 전쟁 수칙을 묵묵히 따릅니다. 여기서 11절의 ‘여호와의 궤가 성을 한 번 돌았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쟁의 주체는 백성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법궤와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 침묵의 행진은 이것이 군사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예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리고 성 주변을 행진하는 백성(8-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협력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8-14)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은 백성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지침대로 특별한 대열을 갖추고 여리고 성을 향해 행진합니다(8-9). 군사들은 행진 중에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기괴한 침묵의 행진은 여리고 백성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최전선에서 행진하는 ‘무장한 자들’은 누굽니까? 원래 민수기의 진영 배치와 행진 대열 배치의 규정에 따르면, 행진 시에는 유다 지파가 법궤 뒤를 따라 모든 지파의 선봉에 섭니다(민 10:14). 전쟁 시에도 하나님께서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가 선봉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삿 1:2).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유다가 선봉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민수기 32장의 요단 동편 지파들과 모세의 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지파가 자원해서 선봉에 선다면 허용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2:16-27에서 요단 동편의 소유권을 부탁한 르우벤과 갓 사람들이 선봉대로 전투에 임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다짐한 대로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울 것을 요구합니다(20).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 싸운다’는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바로 법궤 앞에서 선봉대로 나가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민 32:20-22; 27,29,32). 따라서 현재 여리고 행진 대열 맨 앞의 무장한 자들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군사들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침묵 속에서 행진하는데, 이 침묵은 6일 동안, 일곱째 날에 여호수아가 함성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지됩니다(10). 우리는 여기서 여리고 성 행진에 동원된 ‘모든 군사’(6:3; 참조. 5:6)와 ‘백성’(6:5,7,16)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둘레의 규모에 맞는 군사들이 출동하여 그들이 온 백성을 대표해서 성곽을 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성을 둘러싸기 위해서는 수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 성과 진멸 전쟁(15-2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입장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합니다.

 

15○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15-21)

 

일곱째 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행동 지침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아주 길게 불 때,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함성을 지르라고 지시합니다. 백성의 함성 소리와 함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타고 군사들이 여리고 성안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은 진멸 전쟁임을 주지시킵니다. 진멸은 ‘헤렘’을 옮긴 말인데, 헤렘의 기본 의미는 ‘온전히 바친 것’을 뜻합니다. 헤렘 전쟁에서는 여리고 성의 사례에서 보듯이 물건 중에 금속류는 제외하는 것이 관례였을 것입니다. 가장 수위가 높은 우상숭배를 한 성읍에 대한 헤렘 심판은 금속류도 허용되지 않습니다(신 13:12-18). 때로 가축과 재산은 전리품으로 허용된 아이 성과 같은 좀 더 수위가 낮은 사례도 발견됩니다(수 8:2). 여리고 성은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헤렘 전쟁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금속류는 ‘여호와의 곳간(창고)’(오차르 아도나이)으로 옮겨 하나님께 바쳤는데, 이것은 여호와께 구별된 것(코데쉬), 곧 ‘성물’로 취급되어 녹여서 성막/성전의 시설에 재활용되었을 것입니다.

헤렘으로 바쳐진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댄다면,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 수칙을 어긴 것으로 이스라엘 진영이 오히려 ‘바치는 것’, 곧 헤렘으로 바쳐진 바가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약조를 주지시키면서 라합과 그녀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라고 명령합니다(17).

 

구원받은 라합과 가족들(22-25)

공동체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협력과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협력은 신앙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22○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22-25)

 

라합 한 명의 결단으로 그와 모든 살붙이가 함께 구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연대성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분명히 그의 부모와 가족, 친족들이 자동으로 라합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 각자는 아마도 그녀의 행위를 알고 동조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가족과 친족들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집으로 소집했을 것이며, 그들이 그녀에게 동의하여 여호와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에 합류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 모두가 라합의 집에 모여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지력과 분별력이 없는 유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더라도, 신앙과 구원은 궁극에는 언제나 각자의 결단의 문제입니다. 라합과 그의 친족들은 구출된 뒤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임시로 거하게 했습니다(23). 이는 그들이 아직은 부정한 이방인이었기에, 당장 진영 안에 들어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백성이 헤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언약 밖의 백성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라합의 위대한 결단은 여호수아서가 쓰인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라합이 영구적으로 정착했음을 뜻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면서 ‘오늘’을 그녀의 후손이 살던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NEB). 그러나 이것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이 현재 생존 중인 시기를 가리키는 진술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오늘까지’는 가나안 입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인 것이 명백합니다. 놀랍게도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뒤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의 가문에 들어갔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내려진 저주(26-27)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신성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하며, 후대에 교훈이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세대를 넘어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26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6-27)

 

헤렘은 일시적이 아닌 영속적으로 유효합니다. 따라서 헤렘의 심판을 당한 대상을 누군가 복원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성이라도 헤렘 심판으로 무너진 성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재건축이 금지됩니다(신 13:16). 따라서 누군가 여리고 성을 재건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기초를 쌓을 때(건축이 시작될 때) 맏아들을, 성문을 달 때(건축이 끝날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입니다(26). 이것은 무너진 성을 다시 쌓아 강력한 요새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며, 사람이 그 성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수 18:21; 삿 3:13; 삼하 10:5). 후대에 이 예언은 현실이 되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벽을 재건축할 때, 그의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아들 스굽을 잃습니다(왕상 16:34).

여기서 추가로 여리고 기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을 일곱 바퀴 돌았던 ‘일곱째 날’에 대해 탈무드는 안식일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에 동의합니다. 물론 안식일에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진멸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안식일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전쟁은 특별히 신성한 전쟁이었으며 나아가 특수한 예전으로 간주되어 성곽 돌기와 전투가 허용되었는지 모릅니다. 둘째, 여리고 성 붕괴는 역사적 사실입니까? 현대인의 관점, 그리고 제국의 거대한 성들의 규모에 비해 작은 성들이지만, 여리고와 같은 성읍은 이중으로 15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을 둘러쳐 중무장한 성으로 결코 공략이 쉬운 성은 아니었습니다. 여리고의 인구를 따져보면, 아마 성안의 주민들은 삼천 명 내외로 추정되며, 다만 성밖의 둘레에도 넓은 주거지가 발견되어 여리고 성과 그 땅의 총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호수아의 역사성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해석과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각의 학자들은 지진으로 성벽이 크게 무너진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붕괴 원인이 자연적 측면에서는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며,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신뢰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협력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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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1)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

여호수아 5장 13절-6장 7절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성을 정복하기 위해 성벽을 돌며 나팔을 불고 소리치는 것은 전쟁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한정된 시야를 넘어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랍고 깊은지 깨닫게 합니다.

 

  • 첫 번째 전투와 더불어 가나안 땅의 본격적인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여호수아를 대면하십니다. 앞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직접 그에게 출현하시는 대신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한 대화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과 마주친 여호수아(13-15)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3-15)

 

이 이야기는 갑자기 문맥을 끊고 끼어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비평학자들은 갑작스런 지리적 변화(길갈에서 여리고로)와 새로운 시간의 지시, 여호수아만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다른 자료와 구별되는 독립적 자료라고 말합니다. 또한 양자간의 대화가 마치 불완전하게 끝나는 듯해 뭔가 어색합니다. 여호수아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씀을 들으려 하는데(14), 군대 장관은 단지 그 장소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만 내리고 대화가 종결됩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6:1이 삽입구이며, 이 단락이 6:2-7의 여호와의 지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은 그 자체로 적절한 위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여호와를 만난 장면과 병행을 이루며(출 3장), 두 만남이 몇 가지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됩니다. 첫째, 출애굽기 3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는가 하면(출 3:2),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여 모세를 부릅니다(출 3:4).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현현과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 사이에 경계선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흔합니다(창 16:7-11; 18장;22:11,15; 48:16; 3:2; 14:19; 32:34; 22:31-35). ‘여호와의 사자’는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하나님 임재의 대행자이면서 동시에 여호와로 행세합니다(창 18장). 출애굽기 3장과 달리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며, ‘여호와’라는 말도 직접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와를 대신하며 여호와와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현이 발생한 곳을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라’로 칭합니다(출 3:5; 수 5:15). 개역개정은 두 표현 사이의 번역이 약간 다르나 히브리어 원문은 정확히 같습니다. 이것은 두 장면에서 출현한 신적 존재가 본질상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셋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적 존재가 인간 존재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권에서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기도 합니다.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는 보통 경고의 목적으로 등장합니다(발람 앞에 그의 길을 막은 칼 든 사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또한 ‘여호와’이기도 하다[민 22:31-35];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칼을 든 사자가 예루살렘 하늘을 향해 칼을 뻗는다[대상 21:16]). 군대 장관의 칼은 여호수아에 대한 경고의 의미입니다. 그 칼은 가나안 족속을 향할 수도,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을 결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그 칼은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의 칼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 앞에 칼을 빼들고 나타난 신적 존재에게 그가 누구 편인지를 묻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 이것은 마치 어떤 위엄 있는 장군이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음을 통보하는 뉘앙스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나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게 임재할 때는 반드시 전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파악한 여호수아는 즉각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엎드려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대화가 끝나면서 불완전하게 이 장면이 막을 내립니다. 정작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을 전달하려 했는지, 그가 왜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는지 본문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아마 이 장면이 6장의 여리고 전쟁 직전에 끼어든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여리고 전쟁에서 여호와가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간파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주’이십니다. 여리고 전쟁, 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은 결국 여호수아가 아닌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대화는 군더더기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장면만으로도 곧 시작될 여리고 전쟁과 이후의 가나안 정복을 진두지휘할 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을 위한 기이한 명령(6:1-5)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완전하고 선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1-5)

 

장면은 여리고 전쟁의 무대로 바뀝니다. 여리고의 성문은 철저히 봉쇄되어 철통같은 수비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 중입니다. 여리고가 굳게 닫혔다는 의미는 이중벽을 갖추고 있던 여리고 성벽의 특징을 반영한 묘사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첩보활동을 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명성을 듣고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넘겼다’는 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는 함락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리고 공략을 위한 전투 수칙을 알려주십니다.

(1) 모든 군사가 매일 성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육일 동안 반복합니다. (2)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행진합니다(8). (3) 선봉대가 일곱 명의 제사장들보다 앞에, 즉 맨 선두에 섭니다(7,9). (4) 나머지 군사들은 침묵하면서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5)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뒤 양각나팔을 길게 붑니다. (6) 이때 군사들 모두가 큰 소리를 외칩니다. (7) 이때 성벽이 무너지면 군사들이 올라가서 점령합니다.

이것은 전투 수칙으로 보기에는 매우 기이합니다. 이런 군사적 행동은 전쟁터에서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군사적 행진은 여리고 성이 통상적인 군사적 방식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며, 백성 편에서는 믿음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모든 가나안 전쟁의 기본 원리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전쟁을 통해 이 교훈을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여리고 전투는 추후에 다른 가나안 남부 지역 성들을 정복할 때 자주 모범으로 등장합니다(수 8:2; 10:1,28,30). 행동 지침에 따르면, 선봉대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서 대열을 이끕니다. 이 ‘양각 나팔’의 히브리어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모든 군사들이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도는데,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여기서 숫자 ‘7’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명의 제사장과 7일째의 7바퀴 행진. 익히 알려졌듯이,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흔히 일의 성취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 ‘7’들의 배열은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정복될 것을 암시합니다.

원래 일반 행진에서는 법궤가 가장 선두에 서지만(민 10:33-36), 전투 행렬에서는 법궤는 선봉대의 뒤로 빠집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선봉대가 맨 앞에 서 있으며, 양각 나팔을 부는 일곱 명의 제사장이 그 뒤를 따릅니다(7,9). 역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멘 법궤가 나팔 부는 제사장 뒤를 따라가고 나머지 군사들은 법궤 뒤에서 행진합니다. 참고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듯이 법궤가 모든 전쟁터에 출정했던 것은 아닙니다(7장의 아이 성 전투; 삼상 4장; 삿 20:27 등).

 

여호수아의 명령하달(6:6-7)

세상 지도자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반면,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먼저 순종하며, 신앙과 도덕적 가치에 따라 공동체를 이끕니다. 세상 지도자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물질적 성과를 중시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신앙 강화를 우선시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본이 되어야 합니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6-7)

 

여호수아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여리고 전투 수칙을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달합니다. 제사장들의 임무가 둘로 나뉘어 먼저 주어집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선봉대와 함께 선두에서 나팔을 불며 행진합니다. 그 뒤를 제사장들이 운반하는 법궤가 따릅니다. 군사들의 행진 대열도 둘로 나뉩니다. 먼저 중무장을 한 선봉대가 나팔수 제사장들보다 앞장서 맨 선두에 섭니다. 다음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선봉대는 동편의 두 지파 반일 것입니다. 나머지 군사들은 후방 부대로 법궤 뒤에서 법궤를 따라갑니다. 이런 대열은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안전하게 선봉대의 뒤에 서는 일반적인 군사 배치와 비슷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대장을 만나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기이한 명령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따를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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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5-01)


약속의 땅을 향한 첫걸음

여호수아 5장 1-12절


 

우리의 믿음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 1절은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에 퍼졌습니다. 긴장이 흐르며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할례 의식을 단행하고 며칠 후 가나안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킵니다.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진 요단강 기적(1)

하나님의 역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화됩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1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1)

 

본문은 요단강 이야기의 결론으로 묶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 도하 기적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가나안 부족들의 반응입니다. 두 종족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가나안의 대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경의 관례입니다. 아모리 종족은 많은 경우 가나안 종족과 번갈아 가며 가나안 부족들의 목록에서 먼저 등장하고(창 15;21; 출 13:5; 23:23; 33:2;34:11) 가끔은 가나안 족속 전체가 아모리 족속으로 지칭되기도 할 만큼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창 15:16;48:22 신 1:19,20,27). 아모리 족속은 세력이 강했으며, 오래전부터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이란 표현에서도 아모리 종족이 가나안 내륙의 대표 종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요단 동편을 차지하여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고, 서편에서도 여러 곳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해변에는 남쪽의 블레셋 족속과 북쪽의 페니키아가(두로와 시돈)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70인경(LXX)은 해변의 가나안 왕들을 페니키아 왕들로 대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변의’(알 하얌)이라는 말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 즉 해변에 인접한 내륙 지역을 말할 것입니다. 그 해변 쪽 가나안 사람의 왕들은 일반적 의미의 가나안 여러 족속의 왕들을 가리킬 것이며, 아모리 사람의 왕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부족의 총칭일 것입니다. 내륙과 해안의 가나안 땅 전역이 요단강 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술렁거린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혼(루아흐, 정신)이 나가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길갈에서 제2세대의 할례(2-9)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할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과도 같으며, 이를 따를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우리의 삶을 향한 완벽한 계획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2○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 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2-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중요한 순간을 나타냅니다.

 

(1) 할례를 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2-3)

 

길갈에서 ‘할례의식’을 거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재할례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못한 제2세대의 할례입니다(5). 3절은 이 할례식을 행한 장소가 ‘할례 산’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은 사실 ‘언덕’(기아)을 가리키므로 ‘할례의 언덕’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이 지명은 길갈의 어떤 야산에서 실행된 이스라엘의 할례식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였습니다(창 17:9-14).

 

(2) 제2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4-7)

 

광야는 남자아이들의 할례를 시행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후 일주일 정도의 회복 기간이 필요했을 것인데, 광야의 삶은 언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움직여 이동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들의 할례는 안정된 정착이 완료될 때까지 보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보되었던 제2세대의 할례가 이제 길갈에서 시행됩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의 거듭된 언약 파기와 불순종,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할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보지만, 그것보다는 5절과 7절의 진술을 볼 때(‘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무할례는 오히려 예고 없이 이동해야 하는 광야의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어쨌든 조상들인 제1세대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는커녕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들(‘전쟁의 남자들’), 곧 장정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하다가 결국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제2세대는 광야 여정이라는 사정 때문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무할례자로 요단강 건너 길갈에 이를 때까지 유랑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이제 그들이 드디어 할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3) 할례의 완수와 지명 길갈의 기원(8-9)

 

할례식이 끝난 뒤 모든 백성은 할례 부위가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포경 수술의 회복 기간은 통상적으로 일주일이므로, 이때의 할례도 회복을 위해 비슷한 기간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길갈에서 할례가 필요했던 이유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월절 규정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출 12:48). 1세대는 모두 율법을 따라 생후 8일 째에 할례를 받았던 세대이며, 그들은 출애굽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2세대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받고 새로운 백성으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애굽의 수치가 떠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애굽의 속박과 비참한 삶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그곳 지명을 ‘구르기’, ‘굴러감’을 뜻하는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는 성결한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고, 군인들은 거룩한 종교심을 품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전쟁 중에 군인들의 성관계를 금지시켰고(삼상 21:5-6), 진영 내에서는 배변을 못하게 했으며, 몽정을 했을 경우도 진영 밖으로 나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신 23:9-14).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법궤의 권위와 지휘 아래 부정결을 멀리하고 깨끗한 심신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리고 전쟁을 앞둔 그들의 할례의 시행은 이러한 준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할례의 시행은 사실상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회복 기간에 적들이 기습한다면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난다 해도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할례를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보호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직전에 여호와께서는 요단강의 기적을 행하셔서 온 가나안 족속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단된 만나와 그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10-1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성취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0-12)

 

며칠 후 약속의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았습니다. 음력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유월절에는 유월절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서 먹었습니다(출 12장). 1월 15일부터 7일간은 무교절 기간으로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은 일절 먹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었으며’라는 진술에 이어서 ‘다음날 만나가 그쳤다’는 진술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유월절 이튿날’은 무교절 첫날을 의미합니다. 그날 그 땅의 소산물로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는데, 볶은 곡식(칼루이)은 보리입니다. 이 기간에 수확되는 곡식은 보리입니다. 유월절-무교절 기간의 첫 번째 안식일 다음 날이 보리의 초실절인데(레23:10-15),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날이 음력 1월 16일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첫 보리 이삭을 수확한 뒤 그것을 볶아 가루로 만들어 하나님께 소제물로 바쳤습니다(레 2:14; 23:10-15).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첫 번째 음식을 먹었던 날은 유월절(1월 14일) 다음날인 1월 15일로 이날은 무교절 기간(1월 15-21일)의 첫날입니다. 그 직후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하늘 음식인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이후 보리의 초실절을 포함하여 무교절을 온전히 지켰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감사함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인도하심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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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2)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념물

여호수아 4장 15-24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순종은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자 하나님께서는 범람한 강을 틀어막은 자신의 기적을 거두어들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여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으로부터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육지에 닿는 순간 요단강이 다시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종료된 것입니다.

 

다시 흐르는 요단강(15-18)

기념석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기념물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기여합니다.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15-18)

 

이스라엘 백성의 도하가 완료되자 요단강은 놀랍게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지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처럼 변한 바닷길 건너기를 완료한 뒤, 홍해가 뒤쫓아 오던 애굽 군사들을 모두 수장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원상 복귀되었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오늘날과 달리 상류에 댐이 없던 시대에 요단강은 홍수기에 크게 범람하곤 했습니다. 당시 불어난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튼튼한 배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론되는데, 그 외에 앗수르 문헌에는 전투 중에 각 사람이 술을 담는 가죽 부대에 공기를 채워 그것을 튜브처럼 이용해 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에는 요단강이 크게 범람하는 우기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대규모로 그 강을 건널 만한 기술적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산사태나 신적인 기적만이 요단강 도하가 가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범람하던 요단강 물이 끊겨 강바닥이 드러나고 그들이 강을 건넌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토록 넓은 강폭과 깊은 수심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은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 못지않은 놀라운 기적이었으며, 게다가 홍해가 그랬던 것처럼 강바닥은 육지처럼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특이한 자연 현상으로 보고 폭우로 인해 거대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범람하던 요단강이 가끔 일시적으로 끊기곤 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그러한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그 강을 건너려던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섭리로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나 강물이 끊긴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그 지역에서 부는 강력한 동풍이 특수하게 불면서 발생한 기적일 수 있습니다(출 14:21). 다만 이것들은 자연 현상이 사용된 기적들이긴 하지만, 엄청난 양의 물이 터져 나오고 바다 밑바닥이 마르는 등, 그 과정에서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현상들이 동반되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놀라운 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갈에 세운 기념석(19-21)

기념석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신 일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기념물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설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듣고, 그들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념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의 유산을 전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자녀들이 기념석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하셨는지를 배우게 되고, 이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합니다.

 

19○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19-21)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도하한 날짜는 1월 10일로 적시되어 있습니다(19). 정확히는 출애굽 후 제41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제1세대는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광야 40년의 생활과 더불어 모두 광야에서 죽었으며, 이제 여호수아와 더불어 제2세대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실행한 날이 1월 10일이라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명령한 날은 새로운 세대의 막이 열린 제41년 1월 1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요단강을 건넌 당일인 1월 10일(4:3), 그들은 여리고 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길갈은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몇 군데 후보지가 거론되어 왔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 북동쪽 2km 정도의 지점인 ‘키르베트 엘메프지르(Kirbet el-Mefjir)’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아마도 세겜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갈을 거점으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공략한 점과 요단 도하 직후에 도착하여 진영을 구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 여리고 인근 동쪽(정확히는 북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이스라엘은 1월 14일의 유월절, 곧 가나안 땅에서의 최초의 유월절을 맞습니다(5장). 요단강을 건넌 날이자 길갈에 정박한 당일인 1월 10일은 유월절 양을 골라서 준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출 12:3).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서 유월절을 보낸 뒤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전투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타이밍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역사적-신학적 목적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할 때 1월 14일 유월절을 보내고(출 12-13장), 다음날 1월 15일에 즉시 애굽을 떠났습니다(민 33:3).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규례를 알려주셨는데, 백성들은 1월 10일에 유월절 양/염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빠져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정복할 것입니다. 정복은 출애굽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이 기념된 뒤에 실행될 것이며, 이 점에서 ‘정복은 출애굽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길갈에 도착해서 진을 구축한 후,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골라온 열두 개의 돌을 거기에 세웁니다. 그 돌들의 용도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 돌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증거하는 ‘기념석’입니다. 여기서 이 열두 개의 돌은 요단강 한복판에 세운 열두 개의 돌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비평학자들은 서로 상이한 열두 돌에 대한 전승이 뒤섞인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열두 개의 돌이 요단강에 잠시 세워졌다가 나중에 동일한 돌들이 길갈로 옮겨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서로 다른 종류의 열두 개의 돌들이 각각 요단강과 길갈에 세워졌음을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길갈 기념석의 목적(22-24)

기념물은 공동체 내에서 신앙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함께 경험한 공동체로서, 기념물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념물은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22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

 

장차 자녀들이 길갈에 세워진 돌들의 의미를 물을 때, 아버지들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그들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그 땅을 점유한 것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고대 근동의 전통과 관례에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기념석들이 세워진 곳은 모두 국가와 민족의 제의적 중심지로 여겼습니다. 이 돌들에는 그들의 신이 임재해 있으며, 따라서 그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그 돌들은 전혀 우상과 무관하게 오로지 증거석과 기념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는 반복해서 주상(주로 석상)과 목상, 조각된 신상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신 7:5;12:3;16:21-22;27:15). 특히 돌기둥인 주상(마체바)은 모두 제의적 용도로 만들어져 세워졌으며 때로 표면에 우상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기념석으로 세워진 돌들이라 할지라도 우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기념석의 용도와 관련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기념석이 세워진 이후로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성지가 되어 대대로 여호와 신앙을 위한 중요한 역사적 순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열두 개의 돌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하나씩 골라서 세운 돌입니다. 여기에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돌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간직해야 할 기억을 위한 공동의 유산입니다. 이 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까지 보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길갈을 방문할 때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1세대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2세대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강을 멈추게 하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온 땅의 주인이고 가장 강한 분임을 알게 하셨으며 가나안 온 땅이 그분의 명성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셨습니다. 이 돌들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듯이, 우리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념의 필요성을 통해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의 힘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다져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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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념하며

여호수아 4장 1-14절


시골 마을을 방문하면 마을 입구에 ‘효자비’나 ‘열녀비’가 종종 있습니다. 이 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대의 훌륭한 효자가 자기 마을에서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후대 사람들에게 효자를 본받아 충효사상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비석은 마을의 자부심과 교육적 가치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도하를 완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각 지파에서 열두 명의 사람을 택하여 각자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요단강에서 각자 돌 하나씩을 취해 총 열두 개의 돌을 그날 밤 유숙할 곳인 길갈로 옮겨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기념석(1-9)

순종은 단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고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1-9)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에서 12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돌들은 각 지파에서 하나씩 가져와서, 후대에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을 기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러한 기념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되새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1) 요단강에서 기념석을 취하라는 명령(1-7)

 

앞서 미리 뽑아놓은(3:12) 열두 사람의 할 일이 지시됩니다. 각자 제사장들이 서 있는 요단강 한복판의 그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골라 와야 합니다. 그 돌들을 그날 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놔야 합니다. 4:19에 의하면, 그곳은 인근에 위치한 길갈입니다. 그들이 각자 그 돌을 어깨에 메고 옮길 정도였다면, 아주 크고 무거운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돌들의 용도를 알려줍니다. 그것들은 장차 대대의 후손들에게 표징으로 삼기 위해 세울 돌들입니다(6: 4:20 이하). ‘표징’(오트)은 앞서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건넨 약조의 표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열두 개의 돌들은 요단강의 멈추어 백성이 마른 땅을 지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돌입니다. 이 돌들이 표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은 후손 대대로 자신들이 가나안 입성 과정에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6-7).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7월 10일 동쪽 길갈에 진을 친 뒤 여호수아는 그곳에 열두 개의 돌을 기념석으로 세웠습니다(4:20 이하). 그들은 약속의 땅에 안착하기 위해 홍수로 범람하던 요단강을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은 사람의 노력과 군사적 행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여리고 성점령 과정에서도 다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 편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에 따른 절대적 순종뿐이며, 견고한 여리고도 통상적인 군사 작전이 아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점령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가나안 입성원리는 인간의 구원 원리와 상응하는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의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열두 개의 돌은 대를 이어 그것을 항상 잊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다가 갈라져 그들은 애굽을 탈출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물이 멈추어 드디어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중 구원론’의 근거로 이 장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광야 40년의 훈련이 필요하고, 궁극에는 가나안 입성을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논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현재의 삶은 광야 생활과 같으니 아직 구원이 보장된 삶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구원론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행위 구원론과 율법 종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요단강에 세워진 별개의 기념석(8-9)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요단강의 제사장들이 선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고른 뒤 그날 밤 진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돌들 외에 또 다른 열두 개의 돌을 표징으로 세웁니다(9).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해 갔는데, 이제는 바로 그 자리에 여호수아가 별개의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 여기서 두벌의 열두 개의 돌이 등장하므로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4:15-24에서 살펴볼 것인데, 결론만 말하자면, 이 새로운 열두 개의 돌들은 분명히 거기서 취해서 옮겨간 열두 개의 돌과 별개의 기념석들입니다. 열두 개의 돌이 없어진 자리를 열두 개의 다른 돌이 채운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바로 그 현장의 한복판, 즉 제사장들이 제자리에 서자 요단 강물의 흐름이 멈췄던 바로 그 장소에 그 돌들을 기념으로 세웠습니다. 이 돌들은 여호수아 이후의 어느 시기까지(‘오늘까지’) 우기 때에는 물에 잠겼다가 건기 때에 드러나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여호수아로부터 먼 후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사이 홍수가 반복되고 특별히 큰 물살을 동반하는 큰 홍수가 발생할 때는 세워놓은 돌들이 휩쓸려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요약(10-1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그분의 보호 아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10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무장한 사만 명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14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10-14)

 

이 단락은 현재의 극적인 요단강 도하 사건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 진격 명령이 내려진 순서가 간결하게 정리됩니다. 모세는 죽음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이제 백성을 이끌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신 31:7-8).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지시를 받고 내린 명령입니다. 모세의 명령은 곧 언제나 그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단강 도하의 진행 과정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한복판에서 있고, 강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드러나자 모든 백성이 속히 강을 건넜습니다(10). 백성이 강을 모두 건넌 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법궤를 들고 강을 빠져나왔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다’는 말은 먼저 건너간 백성이 뒤따라 강을 빠져나오는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과 타나크 번역(TNK)은 법궤와 제사장들이 ‘백성 앞으로 나갔다(advanced to the head of the people)’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행진 시에는 법궤가 언제나 선두에서야 하기에, 요단강에서 빠져나온 법궤와 제사장들이 다시 백성들 맨 앞으로 이동했음을 반영한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선두에는 백성과 거리를 두고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백성의 대열에서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중무장을 하고서 선두에 섰습니다(12). 이 두 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모든 지파의 선봉대로 앞장선 것으로 보입니다. 두 지파 반의 무장 병력은 총 사만명이었으며, 그들이 선두에 서서 법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민수기 32장에서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의 광활한 목초지인 길르앗 땅을 자신들에게 할당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대신 그들은 좋은 목초지를 먼저 배당받은 만큼 자신들이 요단 서편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가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겠소’(민 32:17).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전쟁에서 공격의 선봉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장하고’에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선발대로 뽑혔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중간태 니팔형 ‘네할레츠’가 사용되며, 뒤에 신속함을 가리키는 ‘후쉼’이란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속한 무장을 지시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마치 특공대와 같이 특수정예 부대로 선발되어 신속한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에서 앞장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정복이 완료되고 그 땅이 각 지파들에게 분배될 때까지 요단 동편의 길르앗, 곧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민 32:18). 동편 지파의 이런 제안은 상당한 희생을 각오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을 땅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전 약속대로 지금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도하에서부터 백성의 대열의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총 사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실제 전투가 가능한 현역 전투 병력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기적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지도권이 확고해집니다. 앞선 세대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어 그의 지팡이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카리스마적 권위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앞서 3:7에서 예고하신 대로, 2세대 백성 앞에서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갈라지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온 백성이 여호와를 힘입은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멈추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여호수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를 삶 속에서 느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들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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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3-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라

여호수아 3장 1-17절


 

대부분의 일들에는 중요성만큼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위험부담이 없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부담이 큰 일을 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쉽게 나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뜻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큰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데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 무사히 귀환한 두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아마도 다음날 아침에 백성을 이끌고 싯딤을 떠나 요단강 강변으로 이동해 거기에 진을 쳤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관리들은 백성에게 요단강 도하를 위한 행동 지침을 내리고 주의사항을 알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날짜를 기준으로 할 때는 1-3장의 흐름이 잘 들어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소를 기준으로는 서사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예고하다(1-6)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마음과 행동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로 인도받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완벽하고 신실합니다.

 

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1-6)

 

서사의 순서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요단 강 도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와 백성은 2장에서 싯딤에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두 정탐꾼을 보냅니다. 3장에서 싯딤으로부터 요단강 강변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행동 지침은 여호수아에 의해 관리들에게 하달되고(1장) 이어서 관리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2). 우선 제사장들이 언약궤, 즉 법궤를 메고 앞장서야 합니다(3). 여기서 ‘레위 사람 제사장’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제사장은 신명기에서도 분명히 레위인과 다른 특별한 직책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평상시의 일반적인 법궤 운반은 레위의 고핫 가문이 맡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제사장들이 직접 법궤를 멨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신명기는 법궤 운반을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신 31:9). 이것을 민수기 신명기의 모순과 차이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성막의 모든 비품의 관리와 운반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와 뒤따르는 백성 사이의 간격이 이천 규빗(약 900m)으로 설정됩니다. 법궤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는 둘 사이 간격을 이천 규빗보다 좁히지 말고 언제나 그 간격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천 규빗의 간격은 아마 최장 거리로 그 간격 내에서 법궤가 앞장서 행진했을 것입니다. 접근 금지의 경고는 군사들이 법궤에 너무 근접해서 혹시라도 법궤와 접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대의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여행 가능한 거리를 이 규정에 근거하여 이천 규빗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여기서 법궤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민수기는 물론이고 신명기에서도 확인되는 바로는 신적 구름이 법궤 위에 현현하여 그들의 갈 길을 지시해주었습니다(신 1:33). 여호수아서는 성막과 법궤 위에 출현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신명기 전통을 잇는 여호수아서는 선두에 선 법궤의 행진에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제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궤/구름 기둥은 광야에서 생소한 환경 속에서 길에 익숙지 않아 갈 바를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이전에 지나가 보지 못한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4). 이때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할 방향의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생소한 길을 가는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과 절대 순종뿐입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준비 사항은 ‘성결함’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성결케 되는 방법이 여기서는 전혀 제시되지 않지만, 출애굽기 19장은 이것에 대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옷을 깨끗이 빨고(출 19:10,14; 흔히 옷을 빨 때 목욕도 전제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의 잠자리를 갖지 않으며(출 19:15)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선(여기서는 법궤와의 간격)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출 19:12-13, 21, 23-24).

 

요단강 도하를 명령하다(7-8)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는 우리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7-8)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행진하여 요단강을 걸을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개인적인 말씀을 통해 용기를 북돋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앞서 모세의 시대에는 자신이 모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광야에서의 숱한 이적과 기사가 모세의 손과 지팡이를 통해 발생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 여호와께서 분명하게 여호수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른 사건의 재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을 가른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가 동일한 능력으로 물을 가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것을 모든 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담대한 요단강 도하를 지시하시고, 이제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라고 명령합니다(8).

 

백성을 독려하는 여호수아(9-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면,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분의 놀라운 일을 체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은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기적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11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9-13)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요단강 도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으로서’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신명기에서 지목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다시 등장합니다(신 7:1; 20:17). 가나안 땅의 종족들을 대체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으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구약은 때로 그보다 적은 대여섯 족속을, 때로는 훨씬 많은 족속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예를 들어 창세기 15:19-21에는 열 족속이 나열된다). 구약에 나오는 가나안 족속은 열다섯 종족이 넘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일곱 족속은 ‘7’이라는 완전수에 맞춘 대표 종족들로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총 열두 명의 남자를 선발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선발된 사람들이 할 일은 4장에서 드러나는데, 요단강 한복판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4:1-9). 여호수아는 미리 백성에게 예고합니다. 백성은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에 닿는 순간 강물이 멈추고 흐름이 중단되어 한 곳에 물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이 멈춘 기적(14-17)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4-17)

 

여호수아의 명령과 함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계절적으로 이 시기는 성서력 음력 1월초로서 현대 태양력의 3-4월에 해당하며 봄철의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개의 댐들로 수량이 조절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에는 따뜻한 우기 막바지에 요단강이 급격히 범람하고 헤르몬 산 일대의 고산 지대에서 눈이 녹으면서 큰 홍수가 발생했습니다(15). 고대에 크게 범람하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4:15-24에서 더 자세히 논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 거대한 강줄기의 급류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강물이 쌓이면서 사르단 근처 아담 성읍의 변두리까지 뒤덮었습니다. 아담의 위치는 거의 확실하게 오늘날의 텔 에드-다미예(Tel ed-Damiyeh)로 추정되는데, 얍복 강이 요단강에 합류하는 곳입니다(텔[Tel]이란 도시나 주거지였던 곳이 흙더미가 되어 유적지가 된 곳을 말하며 고고학자들이 발굴된 ‘텔’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사르단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하로니(Y. Aharoni)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는 아담에서 가까운 얍복 강 너머의 텔 움하마드(Tel Umm-Hammad)로 추정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의 텔 엘사이디예 (Telel-Saidiyeh)로 간주합니다. 본문을 사르단과 아담이 가까이 위치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 경우 강물은 아담 성읍과 사르단 성읍 사이의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을 채우면서 쌓인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물이 끊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놀랍게도 강바닥은 마른 땅처럼 변했습니다(17). 이것 역시 홍해가 바닥까지 마르면서 갈라졌던 기적의 재현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던 제사장들은 마른 강바닥에 멈춰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백성이 계속 행진하여 요단을 다 건널 때까지 강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만큼은 법궤가 백성들 선두에 서지 않고 오히려 뒤 편에 위치했는데, 결국 법궤는 백성을 인도하면서도 때로 특별한 경우에는 백성의 뒤편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명령에 응답해야 합니다.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를 때, 기적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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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2-02)

 


라합의 믿음과 구원의 이야기

여호수아 2장 15-24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안하게 안주(安住)하는 것을 원합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사는 것이나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position)이나 지키고 안주하려는 자세는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주변 환경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다보니깐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민수기와 신명기 둘 다에서 정탐 활동 자체를 무제 삼고 비난하는 분위기는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탐 활동 후 그들의 불신과 낙심,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질책하고, 그것 때문에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현재의 여리고성 정탐 활동과 이어지는 아이 성 탐색 자체에 대해서 여호수아서는 아무런 부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으며 오히려 장당하고 필수적인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정탐꾼들의 탈출(15-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장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안주하는 것은 편안함을 줄 수 있어도 절대 성장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성장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장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본문의 라합 여인을 통해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5○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15-16)

 

라합은 지체 없이 정탐군들을 탈출시킵니다. 성문이 닫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분이 드러나 성중에 소식이 퍼졌을 것이기에 은밀한 탈출이 필요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져 눈에 띄지 않는 성벽을 통한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그녀의 집은 성벽에 있었고 그녀는 벽에 살고 있었다’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들이 매우 모호합니다. 특별히 그녀의 집이 ‘성벽의 바깥쪽에 있었다’는 번역은 여리고 성의 성벽이 이중 구조였다는 사실에 기반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집이 지어져 있든지 간에, 그녀의 집이 안쪽 성벽이 아닌 바깥쪽 성벽 바로 위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집 창문에서 성벽으로 곧바로 줄을 달아 내렸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을 자신의 집의 창문으로부터 줄을 매달아 탈출시킵니다. 날이 어두워졌고 인적이 드문 성벽 근처라는 특징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합은 그들에게 수색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 사흘간 숨어 지내라고 충고합니다. 라합의 말은 여리고 군인들의 수색 활동이 매우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정탐꾼들과 라합의 서약(17-21)

우리는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말로 끝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확신을 가질 때, 그분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원칙입니다.

 

17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17-21)

 

정탐꾼들은 라합과 약속한 서약에 대한 보증의 징표, 곧 앞서 라합이 요구했던 징표를 제시합니다. 그 징표와 더불어 정탐꾼들은 서약에 대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라합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면책될 것입니다. 그 징표는 붉은 줄입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온 가족과 친족이 함께 구출되도록 그녀의 집에 모여 있을 것을 당부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차례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이 연대 구원을 얻는 사례가 나타납니다(예,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노아와 그의 가족; 라합과 그녀의 가족;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 등). 또한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망하기도 합니다(예. 아간과 그의 가족). 마치 구원의 문제에서 연좌제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시에 멸족에서 개인의 결단으로 생명을 얻는 사례도 존재합니다(예. 고라의 아들들). 특별히 고라의 아들들이 구원을 얻은 사례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결국 가족과 공동체의 연대보다는 개인의 결단이 최종적이고 궁극적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라합의 가족과 가까운 친족들은 나중에 결국 라합의 집에 한데 모임으로써 모두 구원을 얻는다. 가족들 각자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민 26:10-11; 대상 9:19;20:9).

여기서 왜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징표로 제시했습니까? 분명 이 붉은 줄은 구원의 생명줄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티크봐’가 ‘희망’이라는 뜻의 단어이기도 하므로 학자들은 이 단어가 의도적으로 여기서 사용된 것으로 봅니다. ‘티크봐’가 ‘끈’으로 사용되는 것은 여호수아의 이 본문에서만 나타납니다(수 2:18,21). 여기서 ‘희망’과 ‘끈’의 의도적 연결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 소망의 끈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매달라 했습니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줄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밧줄이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라합이 내린 밧줄(헤벨)과 그 붉은 줄(후트)은 각각의 히브리어가 다르고 본문의 대화를 통해서 ‘붉은 줄’은 정탐꾼들이 단순히 성벽에 달아맬 표징으로 건네준 것으로 추론됩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창녀의 집 표시로 평소에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다는 견해를 내놓지만 증거가 없으며, 그 경우 다른 창녀들의 집에도 붉은 줄이 달려 있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라합의 집을 특정하는 표시 기능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앞서 말한 대로 정탐꾼들의 ‘이 붉은 줄을 매라’는 말에서 그 줄은 정탐꾼들이 건넨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이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찾으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생명을 구원한 피라는 것이 이 생명줄인 ‘붉은 줄’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붉은 줄은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해석인데, 일단 성경에서 ‘붉은 색’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피’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붉은색’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암시한다는 과도한 풍유적 해석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붉은 줄’의 기능을 볼 때 피와의 관련성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 시 유월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붉은 피’는 그 집안에 있는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장자를 죽인 여호와의 사자가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그냥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정탐꾼들이 요구한 ‘붉은 줄’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그냥 지나가게 함으로써 라합의 모든 가족과 친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19). 이런 측면에서 ‘붉은 색’이 이 줄의 색깔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붉은 색의 줄이 성벽의 색깔을 배경으로 단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그런 해석을 주의하라는 지적 또한 정당합니다. 그러나 또한 붉은 색을 피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정탐꾼들은 붉은 줄로 표식이 된 그 집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라합의 가족과 친족 중 누구라도 그 집밖으로 나온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반면에 아무라도 이스라엘 군인이 붉은 줄의 표식을 무시하고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 그들을 해친다면, 그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9). 이렇게 해서 라합의 집은 파도가 휩쓰는 홍수 속의 구원의 방주와 같고 유월절의 재앙 가운데 피가 발라진 안전한 집과 같습니다. 만일 노아 가족 중 누군가 방주를 타지 않는다면, 피가 발라진 문설주 밖으로 나간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듯이, 라합의 집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구원은 결국 무임승차가 아닌 개인의 선택과 결단의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정탐꾼들은 라합 또한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정탐꾼들은 만일 그녀가 여리고에 정보를 건네주어 배신한다면, 그 책임은 라합 자신이 져야 하며 그 서약은 파기되고 자신들은 무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다시 한 번 그들 간의 맹세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을 보낸 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살렸던 동일한 창문을 통해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정탐꾼들의 귀환과 보고(22-24)

우리는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동할 때 안전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인도하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때 우리는 안전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22○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3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22-24)

 

수색대를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한 두 정탐꾼은 라합의 조언대로 산으로 올라가 사흘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여기서도 사흘은 동태를 살피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하는 어림수의 기간일 수 있습니다. 여리고의 수색대는 ‘모든 길을’ 다니면서 정탐꾼들을 색출하려 애썼습니다. 이것은 수색대가 그들의 예상 탈출로를 모두 봉쇄하고 검문하면서 인근 지역을 뒤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이 이미 정보를 입수해 산에 잠복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주로 길목을 차단하여 수색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무사히 복귀한 뒤, 여호수아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보고했습니다. 아마 보고 내용에는 여리고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적 정보와 더불어 라합의 손에 의한 탈출극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고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이 이중벽으로 견고하게 차단된 요새화된 성이라는 것을 보고 왔지만, 여리고와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이 강 건너에 세력을 구축한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있음을 알렸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라합의 믿음과 용기는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정탐꾼들과 라합 사이의 약속과 신뢰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이 모든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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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2-01)


라합의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

여호수아 2장 1-14절


 

우리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누구나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용기와 결단력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입구에 위치한 첫 번째 도성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은밀히’ 보냅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현재 요단강 동편의 싯딤에 있습니다. 그곳은 민수기 25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이 머물기 시작하던 곳인데, 거기서 그들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두 정탐꾼의 여리고 탐문(1-2)

중요한 일을 앞두고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철저한 준비는 성공의 열쇠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는 안전하고 성공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1-2)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에 진을 구축한 뒤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 정탐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단절을 일으킨다고 말하나 1-3장 서사의 스토리 전개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도하 지시-정탐-도하 실행. 이 여리고 정탐 활동은 민수기 13-14장의 열두 정탐꾼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1세대의 정탐 활동과 더불어 이러한 정탐 활동은 여호와에 대한 불신을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의 열두 정탐꾼과 아이 성 정탐을 보듯이 정탐 자체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군사 활동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을 숙소로 잡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70인경, 신약에서도 그녀의 신분은 ‘기생’(포르네)으로 확정됩니다(히 11:31; 약 2:25). 이것의 어원인 동사 ‘자나’는 간통과 같은 남녀 간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지시합니다.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창녀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서로 낯선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자신을 은닉하고 은밀하게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출현이 외부에 발설될 위험이 적었을 것입니다. 또 라합은 당시 사회적 소외 계충의 신분으로 멸시받고 소외된 변방의 인물이었고 또한 집의 위치도 주변으로 밀려난 성벽 주변이었기에,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탐꾼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녀가 여리고에 우호적인 태도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아마도 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적극 동조합니다.

본문은 원인과 과정에 대해 침묵하지만, 정탐꾼들의 바람과 달리 그들의 신분은 노출되었습니다. 그 장소의 은닉성이 그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갑니다. 신고자는 생소한 외지인들을 인지한 뒤 인근까지 진격해 와 그 땅을 위협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계기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잠입해 왔다면 정탐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신고자가 ‘두 명’이라고 하지 않고 ‘몇몇’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정탐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여리고 성은 규모가 작고 주민도 최대 삼천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에 그들은 외지인에게 쉽게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두 정탐꾼을 숨기는 라합(3-7)

우리는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기와 결단력은 우리의 신앙과 행동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지혜로운 대처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함을 보여줍니다.

 

3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3-7)

 

여리고 왕은 즉시 라합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그곳을 수색합니다. 당시 가나안은 부족 중심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세력 경쟁과 더불어 전략적 공생을 하고 있었는데, ‘여리고 왕’이라는 표현에서 여리고 또한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미 두 정탐꾼을 숨긴 상태입니다(6). 여기서 우리는 정탐꾼들과 라합 간에 이미 모종의 거래와 대화가 있었는데, 그들이 이미 여호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겁을 먹은 라합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그들을 옥상의 삼대(stalks of flax) 속에 숨겼습니다. 당시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한 옥상이었습니다. 그 공간은 햇볕이 잘 들어 곡식을 말리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이 가능했습니다. 삼대는 당시 옷감 재료인 베실을 만드는 재료로서 상당히 중요한 작물이었습니다(베실 제조 과정이 이집트의 한 벽화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의 보리 수확은 성경의 음력 달력으로 1월의 유월절 어간 (태양력 3-4월)에 시작되는데, 키가 1미터 정도인 삼대는 한 달 앞서 (태양력 2-3월) 수확을 해서 말렸습니다(Howard; 요세푸스 역시 평평한 지붕에 삼대를 말리는 풍습을 기록한다[Josephus Ant. v, i, 2]). 이것은 그들이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인 1월 10일에 요단 강을 건넌 뒤 길갈에 진을 쳤다는 4:19의 보고와 맞아떨어집니다.

라합은 여기서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녀의 거짓말은 그 자체로 죄라고 지적하며 조직신학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소위 상황 윤리를 둘러싼 논쟁을 합니다. 전통적 견해와 조직신학의 윤리학에서는 상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위의 계명을 어쩔 수 없이 위반하는 경우 윤리적으로 죄로 간주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살인을 막기 위해 사람을 숨기고 추적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속임수로 정죄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여리고 군인들은 라합의 거짓말에 쉽게 속고 맙니다. 아마도 여관에 숱한 외지인이 일상적으로 드나들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라합의 말은 전혀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밀정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고 정탐 지역을 두루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들이 해가 지기 전에 급히 떠났다는 라합의 말을 쉽게 믿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한발 늦었다며 초조해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군인들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진영으로 원대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나루터까지 쫓아가서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닫아 혹시 성안에 아직 머물고 있을지도 모를 간첩들의 탈출로를 봉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성을 들은 라합(8-11)

우리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력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이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 나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8○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8-11)

 

여리고의 수색대를 따돌린 라합은 옥상으로 올라가 상황을 알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망명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녀가 수색하러 온 군인들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에 먼저 옥상에 정탐꾼들을 숨겼다는 것은 정탐꾼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그녀를 이미 설득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그들에게 협조한 이유는 현재의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녀와 여리고 주민들, 온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동안 행하셨던 일을 이미 모두 전해 듣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의 연달은 패배와 전멸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사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들은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 곧 하늘 위와 땅 아래를 모두 다스리는 진정한 신이라고 고백합니다(11).

 

구원을 부탁하는 라합(12-14)

인간 관계에서 신뢰와 서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뢰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반이 되며, 서약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요소가 없으면 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뢰와 서약은 관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합니다. 특히 신뢰는 상호 협력과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이로써 건강하고 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2-14)

 

아마 여리고에서 천대받은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위해 종교적 망명을 결단합니다. 각자의 국가 신을 숭배했던 고대 사회에서 다른 국가 신으로의 개종은 곧 국적을 바꾸는 정치적 망명이기도 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입장에서는 저주받을 배신자였겠지만,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선택했으며 참된 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뒤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얻을 기회를 부여잡은 것입니다. 그녀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지혜로웠습니다. 모압 여인 룻과는 다른 동기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라합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가족과 친족들의 생명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자비(헤세드)를 베풀었으니, 이제 그들도 자신에게 자비(헤세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서약(맹세)과 더불어 증표를 요구합니다. 증표(오트 에메트)는 문자적으로 ‘진실의 표식’을 뜻합니다. 라합의 요구는 그들의 서약이 참되다는 표시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증표는 바로 나중에 정탐꾼들이 구원을 위한 표시로 삼은 붉은 줄일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라합의 요구대로 맹세합니다. 그들은 만일 라합이 비밀을 지키면, 자신들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라합과 그의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겠다고 보장합니다(공동 번역과 새번역을 보라). 그리고 라합의 자비 (헤세드)에 보답하여 그들도 라합에게 자비(헤세드)와 진정성(에메트)을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획을 따를 때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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