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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9-02)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약속

아모스 9장 7-15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인도하시며, 모든 일이 그분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셔서 멸하시지만 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은 온전히 멸하시지 않습니다. 체질하는 것처럼 그들을 만국 중에서 체로 거르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다시 심으실 것입니다. 그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고, 그들에게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온전히 멸하지는 않으리라(7-10)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에 따라 심판을 내리시면서도, 동시에 그의 사랑으로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되 회복의 길을 여시며,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8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7-10)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지만, 죄를 범한다면 다른 민족과 같이 멸망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스 족은 에티오피아와 누비야 지역에 사는 백성입니다. 구스 족속을 지목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갑돌(크레테)로부터 BC 12세기경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평야에 정착했습니다. 아람 사람들은 기르(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올라왔다. 이 민족들도 죄로 인해 심판받은 것처럼(1-2장), 이스라엘도 언약 백성이기는 하지만 예외 없이 죄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관성 있는 원칙은 죄를 범한 나라를 지면에서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 그것이 영원한 멸망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 이후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만국 중에서 이스라엘을 체질하는 것입니다. 체질의 목적은 선한 이들을 악인과 구별해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아직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심판의 목적을 정화로 이해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아모스의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심판을 받으면서 아직도 언약 백성의 특권의식으로 ‘우리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다시 선포됩니다: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10). 오직 소수만이 재앙 가운데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회복됨(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죄에도 불구하고 회복과 새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 약속을 의지하며,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2)

 

이제 아모스서에서 드물게 나오는 회복에 관한 본문입니다. ‘그날’은 종말론적인 회복의 시간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회복의 출발점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 아모스가 후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지 않고 남북의 통일을 전제한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했다는 면에서, 북이스라엘의 뿌리를 분열 왕국 이전인 다윗 왕국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은 다윗 왕조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메시아 사상의 표현입니다. ‘쑤카트’(장막)는 초막집으로 일시적인 쉼터(shelter)를 뜻합니다(레 23:43; 삼하 11:11; 사 4:6). 무너진 장막을 일으킨다는 말은 멸망하여 이미 무너진 왕조를 회복시킬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회복되는 대상을 ‘다윗의 왕조’라 하지 않고 ‘다윗의 장막’이라고 한 것은, 다윗 왕조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가 회복될 것을 포함하기 위함입니다. 즉 왕과 제사장의 개념, 정치와 종교의 개념을 포함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복은 둘 중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회복에 관한 용어가 이어집니다. ‘틈’을 막는다는 것은 벽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허물어진 것’(ruins)은 무너진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입니다. ‘옛적 같이’는 전성기 시절인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명성을 되찾는다는 뜻입니다. 즉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영광스럽던 과거를 다시 회복한다는 표현입니다. 신약에서 이 회복은 곧 메시아 시대의 도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루어집니다. 메시아는 다윗 언약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회복된 다윗의 장막에 속할 백성 중에는 심판 후에 살아남은 에돔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만국’(이방인)이 포함됩니다. 12절은 이방인들을 유대-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할 때 야고보가 인용했던 구절입니다(행 15:16-17). 야고보 사도는 히브리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70인역 본문을 인용했지만, 내용은 유사합니다. 히브리 성경이나 70인역은 모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들어올 것을 예언하고, 신약의 교회는 당대에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구약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새롭게 회복되는 다윗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나라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회복된 세상의 풍요로움(13-1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약속을 믿고,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방향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계획을 믿고 따르는 삶이 필요합니다.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15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5)

 

‘보라 날이 이를지라’로 시작하는 이 단락은 회복 이후에 펼쳐질 세상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풍족한 추수와 포도주입니다. 한쪽에서 곡식을 추수하고 있는데, 그 뒤를 이어서 파종하는 자가 지나가니 농산물의 소출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포도를 밟는 것은 8-9월에 이루어지고, 다시 포도의 씨를 뿌리는 것은 11-12월의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인지 앞에서 씨를 뿌리고 바로 이어서 포도를 밟을 정도로 빠르게 포도를 거둘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대풍년의 이미지는 산들이 단 포도주를 흘리고 산 전체가 포도즙처럼 녹아내린다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풍요로움은 회복과 번영의 시대를 알리는 표시입니다.

14절은 13절의 회복을 다시 설명합니다. 회복의 시작은 사로잡혔던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부터 다시 돌아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황폐한 성읍을 건축해 거주합니다. 포도원을 가꾸고 포도주를 마시고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습니다. 15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안전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땅에 심고, 다시는 뽑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 후손을 거하게 하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서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심는다는 것은 가나안 땅에의 거주와 같이 정착하는 것이고, 뽑힌다는 것은 그곳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심기고 뽑히지 않는다는 말은 예레미야서에서 회복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렘 24:6;32:41). 이는 이스라엘의 땅 소유에 관한 영원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의 역전입니다.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를 통해 이 예언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약속이 실현됩니다.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의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 회복의 약속을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해하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약속을 통해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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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9-01)

 


하나님의 정의와 최종적인 공의의 실현

아모스 8장 11절-9장 6절


 

하나님께서 말씀을 멈추실 때, 사람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헤매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삶을 지도하시며, 그 말씀 없이는 인간이 올바른 길을 찾기 어려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그날이 이르면 하나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해 결국 영혼이 목마르게 됩니다. 그날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멸망 당하며, 주께서 그들을 스올까지도 좇아가 심판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 여호와는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고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는 분입니다.

 

말씀의 기근(8:11-14)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우리의 영혼은 영적 기근에 빠져 방황하게 됩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으로 신앙의 중심이며, 말씀 없이는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 건강을 지키는 길입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14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11-14)

 

9절에 이어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선포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어떤 말씀입니까? ‘보라’라는 표현은 주의를 환기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날이 이를 지라’라는 구절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십니다. 이제 여호와의 주권으로 종말이 오고 재앙이 돌이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종말이 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시는데,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기근입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식의 기근이 아니고, 물이 없는 기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말씀의 기근입니다. 종말이 임박했을 때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끝이 가까웠기에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씀을 찾아 나섭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찾아 나섭니다.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채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등장하는 것은 신에게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맹세는 신 앞에서 만약 나의 무고함이 사실이 아니면 어떤 형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입니다. 또한 신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사마리아의 죄’란 말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거짓 우상을 뜻합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슈마트’가 우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대하 24:18; 33:23). 북왕국의 단과 남왕국의 브엘세바는 거짓 신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 마지막에 ‘쓰러진다’는 말이 나오고, 14절 마지막에도 역시 ‘엎드러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둘 다 같은 히브리어 말의 번역입니다. 13절과 14절을 연결시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우상에게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이란,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상실한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요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곧 단과 브엘세바에서 우상을 두고 맹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혼합주의 때문입니다.

 

마지막 환상(9:1-4)

우리는 헛된 신앙과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우선시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2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3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4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9:1-4)

 

다시 마지막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전과는 달리 서론이 없고, 상징적인 요소도 없고, 아모스의 말도 없습니다. 이번 환상의 무대는 벧엘입니다. 여호와께서 제단 곁에서 바로 심판을 명령하십니다: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이 명령에 따르면, 제사를 드리는 자와 집례하는 자가 무너지는 제단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심판의 목표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남은 자가 있더라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살아남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같은 여호와의 의지는 다양한 표현으로 강조됩니다.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철저하고 완벽한 살육의 재앙 앞에서 도망할 자(누쓰)와 피할 자(말라트)가 없을 것입니다. 도망자는 달아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고, 피하는 자는 이제 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이 위에서 아래까지 무너져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깔려 죽을 것이고,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을 것입니다. 즉 한 사람도 여호와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2-4절에서도 남은 자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이 명령됩니다. 여기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조, 시 139편). 하나님께서는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 들어가도 그들을 붙잡아내실 것이요. 하늘로 올라가도 끌어내려 죽이실 것입니다. 남은 자가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찾아낼 것이요. 혹시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눈을 피해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뱀에게 명령하여 물게 하실 것입니다. 혹시 남은 자가 원수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갈지라도,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칼에 명령하여 죽이게 하실 것입니다. 혹시 살아 남는다 할지라도 화를 내리시고 복은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5-6)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는 올바른 신앙과 삶의 방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주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5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 6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5-6)

 

이 단락은 두 개의 심판 예언 사이에 있는 짧은 찬양시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를 주어로 시작하고,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라고 마감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세 개의 분사를 사용해 여호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땅을 만지시는 분’, ‘하늘에 그의 궁전을 세우시는 분’, ‘바닷물을 부르시는 분’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명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언급합니다.

찬송은 ‘주 만군의 여호와’로 시작됩니다. ‘만군’이라는 말은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땅을 만져 녹게 하는 것은 지진을 가리킵니다(8; 1:1; 2:13; 4:11; 6:11; 9:5). 여호와께서는 지진을 일으켜 땅에 거주하는 자들로 애통하게 하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는 땅을 강물처럼 오르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는 두 가지 동사로 묘사됩니다. 세우고(바나), 두는 것(야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성전을 세우시고,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십니다.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신다는 묘사 역시 하나님께서 가지신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과 영적 기근을 경고합니다. 이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함으로 새로운 소망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정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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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8-01)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

아모스 8장 1-10절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삶 속에서 진리를 살아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탐욕에 빠져 하나님보다 세속적 성공을 우선시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탐욕은 그들의 신앙을 왜곡시켜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지 않게 만들고, 불의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결국,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끝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그날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날은 모든 사람이 애통하는 곤고한 날이 될 것입니다.

 

넷째 환상:여름 과일 한 광주리(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고, 진실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심판 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1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2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3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7장 1절부터 이어지는 네 번째 환상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가 아니라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같이 보이셨느니라’는 표현은 아래 내용이 환상 계시임을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아모스가 ‘여름 과일 한 광주리’라고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십니다. ‘여름 과일’을 보여 주시면서 ‘끝’을 말씀하는 것은 먼저, 언어유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름 과일’은 히브리어로 ‘카이츠’이며, ‘끝’은 히브리어로 ‘케츠’이므로 말놀이(word play)로 심판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로, ‘여름 과일이 딸 때가 가까울 정도로 무르익었다’와 ‘끝이 무르익었다’라는 말로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 환상은 7장에 이어서 주어진 것으로 세 번째 환상과 같은 형식으로 환상을 보여주고 심판을 선포하는 형식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끝을 선포하시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오랫동안 여러 번 용서하시다가 마침내 용서의 문을 닫는 느낌을 준다. 3절에서 '궁전'으로 번역된 '헤칼은 '집'이라는 뜻으로 '궁궐과 성전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다. '궁전의 노래'보다 '성전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축제기쁨의 날에 성전에서 불렀던 노래는 이제 심판을 슬퍼하는 애곡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 버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조용히 해라. 도처에 시체들을 내어 버리리라’는 말입니다. 심판의 결과, 곳곳에 시체가 쌓여 장사 지내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조용히 해야 하는 이유는 시체를 버리는 사람도 죽임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이 주 여호와의 말씀임을 다시 밝힙니다.

 

폭리를 취하는 부자들(4-6)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공정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직장에서, 사업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정직과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물질에 대한 욕심과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적 성공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우선해야 합니다.

 

4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4-6)

 

다시금 지도층과 부자들의 죄가 언급됩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와 힘없는 사가 착취의 대상입니다. 부사들은 그들을 삼키며 망하게 합니다. 이들이 범하는 죄는 5-6절에 나타납니다. 5절은 속임수로 이익을 취하는 악을 보여줍니다. ‘월삭’은 매달 첫째 날로서 쉬는 날이며(민 10:10; 28:11), ‘안식일’도 쉬는 날로서 장사나 상거래가 금지됩니다. 장사꾼들의 관심은 월삭과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기에, 그러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쉼과 회복의 시간이 아니라 돈을 벌지 못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약자를 착취합니까? 당시에는 ‘되’(에바)로 재고 그 값은 은을 저울로 달아서 치렀습니다. 밀을 팔 때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고, 거짓 저울로 속이는 것입니다(개역개정과 달리 세겔을 크게하는 것과 거짓 저울로 속이는 것은 서로 다른 행위다). 에바는 밀가루, 보리, 볶은 곡식의 양을 잴 때 사용하는 도구로(레 5:11; 룻 2:17) ‘되’로 번역됩니다. 장사꾼들은 에바를 작게 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적은 양을 줌으로 부당이익을 취했습니다. 세겔은 주로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공 모양의 측량 도구로, 세겔을 크게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금이나 은을 더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거짓 저울은 평행 저울로 양쪽을 달 때 부당한 방법으로 저울을 조작해서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저울, 공평한 추, 공평한 에바를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레 19:35). 6절은 상인들의 악행을 보여 줍니다. 탐욕스러운 상인들은 빚을 받기 위해 약자의 물건들을 취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사람을 은이나 신 한 켤레 값으로 팔곤 했습니다. 찌꺼기 밀이란 땅에 떨어진 쓰레기나 버려야 할 저질품의 곡식을 말합니다. 상인들은 저질의 양식이라도 먹어야 하는 힘없는 백성에게 속임수로 이러한 곡식을 팔았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7-8)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잊으시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기억하시고 공의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며, 철저히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7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7-8)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야곱의 ‘교만’(가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역개정의 ‘영광’이라는 번역보다는 ‘교만’이 더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에 탐욕을 채우기 위해 그러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행위를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층의 악행을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표시로 몇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땅이 떨고, 온 땅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땅이 오르내리는 현상을 나일강의 수면이 철에 따라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현상에 빗댄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 당시에 있었던 지진(1:1;14:5)을 서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든 주민이 애통할 것입니다.

 

곤고한 날(9-10)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와 변화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공의와 사랑에 합당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9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10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9-10)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으로써 여호와의 날에 있을 현상을 설명합니다. 낮을 밝히는 태양이 갑자기 대낮에 지고, 땅이 캄캄해집니다. 아마도 당대에 발생한 일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BC 784년, BC 763년), 아모스는 그날의 두려움을 연상하며 지진이 이스라엘의 운명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날은 그러한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서 곤고한 날이 될 것입니다. 기뻐하는 절기가 애통하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축제 때 부르던 노래들은 애곡으로 변할 것입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는 것은 슬픔의 표시입니다(창 37:34: 요엘 1:8,13). 머리를 대머리로 만든다는 표현은 죽은 자를 애곡할 것이라는 뜻입니다(스 9:3; 사 22:12;48:37). 즉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슬픔을 초래하는 재앙이 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미래의 소망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독자의 죽음 앞에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애굽에 마지막 재앙이 내렸을 때(출 12:29-30)보다 더합니다. 그때는 장자만 죽었지만, 지금은 외아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심판의 날은 희망이 없는 곤고한 날이 될 것입니다. 심판의 주체자인 여호와께서는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는 말씀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외형적인 신앙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신앙이 필요하며, 물질주의와 탐욕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의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언젠가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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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7-02)


거짓 제사장 아마샤에 대한 심판

아모스 7장 10-17절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바른 말씀이 전달될 때, 교회는 살아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교회가 점점 타락해 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이 부패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회복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다양한 종교개혁자들이나 신앙 개혁 운동을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를 모함하고, 아모스에게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유다로 떠나라고 협박합니다.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그가 더러운 땅에서 죽고 아내는 창녀가 되고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이스라엘이 포로가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아모스를 향한 아마샤의 기소(10-11)

참된 진리는 언제나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타락한 거짓 일군들은 변화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이권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신은 자신의 배뿐이지,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물질만을 추구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삯군’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10-12)

 

9절에서는 성소의 멸망에 대한 선포가 있었는데, 10-11절은 북왕국의 중요한 성소인 벧엘의 제사장으로 있는 아마샤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벧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거한 곳으로(창 13:3; 23:19), 여로보암 1세가 남왕국과 경쟁하기 위하여 국가의 중앙 성소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인 진정성을 답보하지 못한 정치적인 행위로 정통성이 약했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하던 시대에 벧엘의 제사장은 아마샤인데, 국가 중심의 종교 시대에 제사장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당대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으며, 이스라엘은 제2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마샤는 자신이 들은 말을 왕에게 전하며 적절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전하는 말은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왕과 백성의 멸망과 더불어 백성이 포로로 이방에 끌려갈 것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아마샤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을 선포하는 말을 견딜 수 없음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왕과 나라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을 왕에 대한 모반(카샤르), 내란 죄로 고소합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말을 북왕국에서 여러 번 이루어진 반란과 연결시키려 하였습니다(왕상 11:29; 왕하 9:6).

 

아모스를 향한 아마샤의 말(13)

우리는 종종 편안함과 익숙함을 추구하며 진리를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진리는 때로 우리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고, 기존의 안락함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불편할 수 있지만,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깊은 회복과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통해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13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13)

 

아마샤는 왕에게 아모스에 대하여 보고하고, 동시에 아모스에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이나 왕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벧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를 선견자(호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견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등장했으며 주로 환상을 보는 사람들을 뜻합니다(삼상 9:9,11; 삼하 15:27; 사 30:10; 미 3:7). 아는 아모스가 유다 사람임을 알고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가라고 외칩니다. 아마도 도망가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위협하였을 것입니다.

‘떡을 먹으며’와 ‘예언하다’라는 말은 직업적으로 예언하는 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땅에서 더 이상 예언자의 직책을 수행하지 말고, 자기의 고향인 유다 땅에 가서 예언자의 직업을 수행하라고 말합니다. 북왕국에도 많은 직업 예언자가 있기 때문에 아모스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넘어 북왕국에서 예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마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아모스가 공격하는 벧엘이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분히 아마샤의 권위에 근거한 말입니다. 벧엘이 왕의 성소요나라의 성소(‘궁궐’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베트’는 ‘성소(temple)’와 동의어 반복으로 쓰였다)라는 말은, ‘벧엘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성소요. 나라의 성소’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왕이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수장이므로 종교는 왕을 비판할 수 없고 찬양만 해야한다는 이해를 반영합니다. 한마디로 북 이스라엘 사회에서 위임받은 권위 없이 왕의 위신에 도전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모스의 심판 선언(14-17)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은 종종 세상의 반대와 비난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때 외부의 어려움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반대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신실함을 보시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해야 합니다.

 

14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17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14-17)

 

아마샤에 대한 아모스의 대답입니다. 아모스는 예언자도 예언자 학교 출신도 아닙니다. 예언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 즉 다른 직업을 가진 자로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즉, 생계를 위하여 예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양 떼를 따르면서 목자의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중에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급격한 부르심을 받아 강권적으로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의 출처는 바로 여호와입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권위로 예언을 금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하라는 명령은 아마샤보다 높은 여호와의 권위로부터 온 것이기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호와로부터 온 예언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직접 부르시고, 예언할 대상을 정하시고 예언할 내용을 정하셨으니 아무도 여호와의 권위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할 뿐입니다.

아마샤의 명령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거나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이삭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모스서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제 아모스는 아마샤의 명령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네 개의 예언은 아마샤 개인을 향한 것이고, 마지막 한 개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입니다. 아마샤의 아내는 땅과 남편을 잃고 창녀처럼 당할 것이고, 아마샤의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져 죽임을 당할 것이며, 아마샤가 살던 땅은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샤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땅은 ‘결례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더러운(부정한) 땅이 될 것이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아마샤에게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혹독한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어서 아모스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확실하게 예언합니다. 아마샤와 아모스는 서로 다른 권위를 가지고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마샤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력의 정점에 있는 여로보암의 비호 아래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아모스의 예언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나라로부터 녹을 먹으며 예언하는, 곧 바른 예언을 하지 못할 만큼 경제적으로 예속되지 않도록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맥과 학연과 경제적인 이익을 넘어서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북왕국의 종교적, 정치적 죄를 심판을 선포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위치에 있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아모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리도 받아들이고 변화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진리는 때로 우리의 안락함을 깨뜨리지만,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변화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진리를 수용하고, 그에 따라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허락하시길 기도하며, 그 길을 따르기로 결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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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7-01)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공의의 기준

아모스 7장 1-9절


 

어두운 밤에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진정한 삶의 방향을 알기 어렵습니다. 밤바다에서 자신의 길을 잃었다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항해를 멈추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다 보면 오히려 더 깊고 멀리,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풀을 다 먹어 버리는 메뚜기를 보이시고, 큰 바다와 육지를 삼기는 물을 보이십니다. 그때마다 아모스가 야곱을 위해 청하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또한 다림줄을 보이시며, 이스라엘 가운데 다림줄을 두시고 산당들 및 성소들과 여로보암의 집을 치겠다고 하십니다.

 

첫 번째 환상:메뚜기(1-3)

종교적 형식주의나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기회를 잘 활용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메뚜기 환상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1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2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3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1-3)

 

7:1부터 9:4까지는 세 환상이 등장합니다. 첫째 환상(7:1-9). 둘째 환상(8:1-3), 셋째 환상(9:1-4)이 등장하고, 이 사이에 아모스의 자전적인 이야기(7:10-17)와 아모스의 설교가 등장합니다(8:4-14). 7:1-9은 다시 이스라엘의 파멸에 관한 세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 환상의 출처는 여호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1). 말씀이 아니라 환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전체적인 문맥에서 아모스는 중보자로 나타납니다. 재앙을 들은 후에 아모스는 백성을 위하여 재앙을 돌이켜 달라고 중보합니다.

첫 번째 환상은 한해 농사를 망가뜨리는 메뚜기의 재앙에 관한 것입니다. 재앙의 원인인 메뚜기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메뚜기가 등장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 돋기 시작할 때’(1)입니다. 여기서 풀은 단지 들에 나는 풀이라기보다는 모든 곡식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첫 번째 수확한 것은 왕의 몫입니다. 일반 백성은 두 번째 수확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움 돋은풀은 첫 번째 수확후에 다시 자라는 풀을 뜻하는데, 3월 말이나 4월 초에 있는 늦은 비를 맞고 자라는 풀입니다. 이때는 왕이나 부자의 수확이 끝난 후 이기에 재앙이 온다 해도 왕이나 부자들에게는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가난한 백성에게만 위협이 됩니다. 아모스가 본 환상은 첫 번째 건초 수확 이후 두 번째 수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메뚜기 떼 환상을 본 아모스는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여기서 ‘사하소서’는 재앙의 원인이 되는 죄를 용서하셔서 임박한 재앙을 피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야곱이 미약해서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설 수 없다는 것은 재앙을 견딜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미약하다는 것은 아이가 잘못했을 때 부모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용서한다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용서가 의무 때문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측은 함에서 몸에 근거해, 곧 야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뒤를 잇는 중보기도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켜 메뚜기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중보기도에 성공한 것입니다(창 18:22-33; 출 34:6-7; 렘 18:1-10;욘 3:10).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인간의 심성이 변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거한 것입니다.

 

두 번째 환상:불(4-6)

우리는 개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환경 보호에 기여하며, 중재자로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서 실천해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5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6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5-6)

 

두 번째 환상은 큰 바다와 육지를 먹어 버리는 불로 인한 심판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창 19:23-28;민 11:1;신 9:3). 불은 땅을 마르게 하고 말을 갉아 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아모스가 본 환상은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 재앙’입니다. 큰 바다는 아마도 농토의 샘물들과 지하수를 공급하는 땅 밑 바다를 뜻할 것입니다(창 1:2; 7:11; 8:2). 육지는 이스라엘 땅만이 아니라. 땅 위에 사는 백성까지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을 본 아모스의 반응은 첫 번째 환상의 경우와 같습니다. 재앙을 내릴 것을 예고하신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은 재앙을 돌이키십니다.

 

세 번째 환상:다림줄(7-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사회적 및 공공 정책에 반영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회개하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7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9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7-9)

 

세 번째 환상은, 첫째 환상과 둘째 환상과 형식이 다릅니다. 처음 두 환상에서는 환상을 보이시면 예언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환상은 여호와께서 주도권을 자기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환상 중에 여호와께서 다림줄을 손에 쥐고 담 곁에서 계십니다. 담은 성읍이나 집을 둘러싼 담벼락으로, 전체적인 방어 시스템입니다. ‘다림줄’이란 무게가 가는 돌이나 금속을 매단 줄로, 벽을 쌓거나 벽의 수직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본문에서 다림줄의 역할은 성이 제대로 지어졌는지를 측정하여 결과가 불량이면 파괴를 명령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환상을 본 아모스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모스는 환상을 보고 다림줄이라고 확인합니다. 여호와께서 담벼락에 다림줄을 잡으시고 성을 평가하신 후에 그 행동을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가운데 두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에 대한 평가를 다림줄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부술 건물을 측정할 때 다림줄을 사용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다림줄로 평가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헐어야 할 건물과 같이 멸망 받아야 할 백성으로 봅니다. 그 측량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다시는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이미 여러 번 용서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임계점에 온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1~6절에서 멸망을 선포 받고 아모스의 중보기도에 따라 용서받고도, 여전히 죄를 짓는 백성을 향하여 언약이 담긴 내 백성이라고까지 부르면서 멸망을 통보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9절에서 두 종류의 종교 지역을 언급합니다. ‘산당’이란 성전이 아니라 제사를 위한 야외 제단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세운 높은 곳에 있는 제단이지만, 우상을 위한 제단으로 변했습니다. 아모스 서에서 ‘이삭’은 북왕국 족속을 의미할 때 등장합니다(16). 성소는 성전인데, 이스라엘에는 단과 벧엘이라는 성소가 있습니다. 그들의 안전에 대한 기대가 담긴 예배의 중심지인 성소가 완전히 멸망된다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개의 환상과는 달리 이 환상에 대해서는 아모스의 중보기도도 없고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돌이킴도 없습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침으로 이스라엘에 멸망이 임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집이란 여로보암의 왕조를 말하는데, 여로보암의 아들과 그의 계승자인 스가랴가 암살 되었을 때에 종언을 고합니다(왕하 15:8-10).


하나님께서 공의의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측정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메뚜기와 불의 환상은 심판의 경고를 담고 있으며,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이 우리의 도덕적 삶에 적용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회개하고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과 행동이 사회와 공공 정책에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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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6-01)


교만한 자와 하나님의 경고

아모스 6장 1-14절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고, 스스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흉한 날이 먼 줄 알고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합니다. 정의를 쓸개로 바꾸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자만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에게 넘기시니, 이스라엘 온 땅이 짓밟히고 백성은 학대당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1-2)

교만은 자신의 물질적 번영이나 사회적 지위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성취에 의존하며 자신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교만이 결국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에만 의존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1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2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1-2)

 

이스라엘에서 가장 우위에 있던 사람들이 제일 앞장서서 포로로 끌려갈 것을 선포하는 예언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시온에 살면서 더 이상 의지할 것 없이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권리를 보장받은 기득권층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들로, 백성은 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최고위급 인사들입니다. 2절에서 예언자는 그들에게 아람의 중요도시 갈레와 하맛, 그리고 블레셋의 유명한 도시 가드를 언급합니다. 이 도시들은 당대에 이름난 도시들이었지만, 멸망한 도시로 보입니다. 이 도시들은 사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중요도나 크기 면에서 비슷합니다. 이 도시들이 멸망한 것처럼 사마리아에도 멸망이 임할 것입니다.

 

상아 상과 어린양(3-7)

타락은 인간의 도덕적, 영적 상태가 병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하며, 그 증상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집착과 도덕적 무시는 타락의 두드러진 증상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적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3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7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3-7)

 

지도자들에게 ‘흉한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판의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악한자리’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폭력을 행하는 자리입니다. 아모스는 그들이 약한 자들을 희생시키며 누리는 화려한 생활을 언급합니다. ‘상아 상’이란 상아를 박아 장식한 침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은 값비싼 상아 장식을 위하여 백성이 눈물로 경작한 밀, 포도주, 그리고 감람유를 탈취했습니다. 즉 상아 상이면에는 농민층의 경제적인 몰락이 숨어 있습니다. ‘기지개를 켠다’는 것은 만취되어 대자로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고기 중에서 살이 연한 ‘어린양과 송아지’를 먹는다는 것은 특급 고기를 먹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5절은 이들의 고상한 취미를 보여줍니다. ‘비파’는 울림통이 있는 현악기입니다. ‘악기를 제조한다’는 것은 악기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면서 작곡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악기를 연구한 음악 전문가였음을 상기하며 다윗처럼 작곡하고 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르면서 다윗의 힘, 다윗의 부, 그리고 다윗의 예술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대접’은 위가 넓게 터진 그릇로, 포도주를 넘치게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귀한 기름’은 최고급 기름으로, 으깨진 올리브 열매를 압착하기 전에 얻어지는 일등품 기름을 말합니다.

지도자들은 농민들을 착취하여 얻은 기름을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요셉은 북왕국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파 이름으로, ‘요셉의 환난에 근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백성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책망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기소는 끝났습니다. 그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멸망인데, 예언자는 일등으로 살았던 지도자들이 일등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다고 역설적으로 묘사합니다.

‘떠드는 소리’란 이스라엘 엘리트 남성들과 몇몇 여성 지배계층, 대지주, 고관들로 이루어진 친목 단체들이 연회를 열어 만취하고, 함께 교제함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모임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치는 것은 나라가 멸망함으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말씀(8-11)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공동체를 부패시키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 하나로,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의 건강을 해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성취와 지위를 과도하게 자랑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9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10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더 있느냐 하면 대답하기를 없다 하리니 그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11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8-11)

 

다음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할 정도로 확실히 일어날 것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읍과 성읍에 거하는 모든 것을 원수에게 넘기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고 궁궐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라고 번역한 ‘나온’이라는 히브리어는 ‘교만’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야곱의 영광(교만)은 야곱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교만한 모습을 말합니다. 궁궐은 모여서 열방을 의지하고 악을 도모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그곳에 심판이 선포됩니다.

나아가 예언자는 성읍의 멸망이 어떻게 임하는지 설명합니다. ‘열 사람’은 구약성서에서 최소한의 구성원을 의미합니다. 심판으로 인해 남은 최소한의 공동체가 겨우 생존하지만, 그마저 다 죽게 됩니다. 10절은 사마리아의 철저한 멸망을 보여줍니다. 시체를 장사지내러 온 친척이 그 집 깊숙한 곳에 왔다가 생존자를 만나 살아있는 자가 아직도 있냐고 물으면, 생존자가 조용히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생존자가 있으면 그마저도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의 터진다는 말은 철저히 파괴된다는 말입니다. 큰 집은 부유하고 세력 있는 자들의 집이고, 작은 집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한 자의 집이나 약한 자의 집이나 모두 여호와의 심판에 의하여 전멸될 것입니다.

 

교만한 이스라엘(12-14)

우리는 교만이 가져올 결과를 인식하고, 자신과 공동체의 고통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고 스스로를 무너뜨립니다. 자랑과 교만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하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회개와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12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13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1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12-14)

 

12-13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을 동물의 본능과 대비합니다. 말이 바위 위에서 달리거나 소가 바위 위에서 밭을 가는 것이 본능이 아니기에, 동물들은 본능을 거슬러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본능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먹을 수 없는 쓸개로, 공의를 먹을 수 없는 쓴 쑥으로 바꾸었습니다. 13절에서 ‘허무한 것’과 ‘뿔들’로 번역한 단어는 고유명사로 보고 ‘로드발’과 ‘가르나임’이라는 성읍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두 성읍은 요단 동쪽 북부에 위치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성읍을 자신들의 힘으로 빼앗았다고 자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나라를 지명하여 전 이스라엘에 걸쳐서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시내까지. 왕하 14:25에 따르면, 여로보암 2세가 정복한 가장 넓은 영토가 바로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였다.) 교만한 백성을 학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심판을 초래함을 경고합니다. 교만은 자신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자랑과 교만 대신 겸손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하므로, 겸손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교만을 경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겸손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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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5-02)

 


형식이 아닌 마음을 드리는 예배

아모스 5장 14-27절


 

우상숭배의 위험을 경계하며, 우리는 하나님 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것이 곧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 이스라엘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빛이 아닌 어둠의 날이 임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14-15)

우리가 선을 구하고 악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현재의 삶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축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생명, 곧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속에서 누릴 삶을 의미합니다.

 

14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14-15)

 

아모스의 책망을 듣는 자들은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방법은 윤리가 실종된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선을 구하고 악을 찾지 않음으로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선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려면 성문에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장로들이 모여 법적 문제를 다루고 판결했던 성문에서 법정 정의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렇게 선을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분이 계획하신 재앙을 내리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혹시’라는 단어는 심판이 전적으로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북왕국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시조입니다. 북왕국 대부분이 포로로 사로잡혀갈 상황에서도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한다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로 지나가리라(16-17)

종종 우리의 소유와 성취를 축복의 증거로 여기며, 그것들이 안전과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 심지어 우리의 인간관계까지도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초로 삼고, 그것들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의지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인지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와 심판을 통해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16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17)

 

1-3절에 이어 조가가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멸망 후 있을 애곡할 상황을 미리 보여주는데, 어떤 재앙인지는 말하지 않고 재앙의 결과만 말합니다. 일반적인 장례식에서는 울음 꾼만 애곡하지만, 이 애곡은 농부와 울음 꾼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게 될 것입니다. 우는 장소로 모든 광장과 모든 거리가 강조되고 포도원까지 언급됩니다. 이는 원래 포도를 따는 기쁨이 있는 대표적인 장소에서조차 울게 될 상황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모스는 17절에서 우는 원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지나갈 것임이라’이는 하나님의 현현(출 34:6-7)을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로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18-20)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기대는 오히려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식적인 신앙이 아닌,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8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18-20)

 

‘화 있을진저’라고 심판을 선언하는 화 신탁(woe oracle)은 주로 장례식 탄원에서 나타납니다(왕상 13:30; 렘 22:18).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멸망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입니다(수 10:10-14: 삿 5장).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날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심판의 날이며, ‘어둠’과 ‘캄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예를 들어 표현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자를 피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곰을 만나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집에 들어가 안전한 줄 알고 벽에 손을 댔는데 뱀에게 물리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비극적인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악 때문에 하나님의 적이 되어 실패와 파괴를 경험할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21-24)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정의와 의가 필요한 순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1-24)

 

21절부터 여호와는 1인칭 형식으로 백성에게 제의의 문제점을 전합니다.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번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야 할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신 16:16)을 의미하며, '성들은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다른 절기들(암 8:5)이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열심히 지켜오던 이 절기들을 여호와께서 미워하고 멸시하며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중요한 세제사인 번제, 소제, 희생의 화목제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언급한다. '노랫소리'란제사를 드릴 때 함께하는 예배용찬송, 곧 시편 등을말하는데 이것까지도 거부하신다. '비'는 예배를 위하여 동원된 악기인데, 하프 모양으로 가죽이나 도기로 만든 울림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기 연주도 기빼하지 않으십니다. 제의 제도를 잘못 행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의는 화려하지만 윤리가 함께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제의 제도가 백성의 악을 합리화하여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예언자 아모스가 원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정의’(미쉬파트)란 법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법정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포함하는데, 억울한 자가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의’(체다카)란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로, 측은함과 환대로 베푸는 사랑을 포함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종교적인 열심의 외적 모습인 이웃사랑의 결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는, 상식적이면서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됨(25-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한 의식이 아니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5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25-27)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희생’은 동물 제사를, ‘소 제물’은 곡물 제사를 의미합니다. 26절에서 등장하는 ‘식굿과 기윤’은 바벨론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별의 신들 이름입니다. 앗수르의 전쟁 신 아다르는 ‘사쿳’이라고 불렸습니다. 앗수르 인들이 예배한 별들의 신은 ‘카이완’이라고 불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모스는 바른 삶이 없는 예배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예배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 시대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그 예배는 우상숭배와 함께 드렸던 혼합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형벌로 이스라엘이 식굿과 기윤과 우상들과 신들의 별들을 짊어지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메섹은 국제도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가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아모스는 다메섹을 지나 곳곳으로 흩어지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합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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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5-01)


회복을 위한 회개와 정의의 실천

아모스 5장 1-13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실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불의가 있는지 점검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영역이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탄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이러한 성찰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행동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더욱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엎으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 살 것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슨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버렸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거운 죄 때문에 패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1-3)

우리는 영적으로 무너진 상태에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안하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라면, 지금이 바로 회개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회개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1-3)

 

아모스 5장은 ‘이 말을 들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아모스가 전하는 말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미리 애곡하는 애가입니다. 당대는 이스라엘의 전성기로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번성기인데 애가를 부르라는 것이 이상해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완료로 슬퍼합니다. ‘엎드러졌다’라는 단어는 병이나 자연사가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삼하 1:12).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부르는데 이는 젊음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혈기 왕성하다고 느낄 때 멸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엎드러졌지만 일어나지 못합니다(2). ‘던져졌다’와 ‘일으킬 자가 없다’는 동의어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쓰러짐을 말합니다. 자기 땅이란 이스라엘이 은혜로 얻은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그 땅에서 멸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천명, 백 명, 열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 편성을 전제로 서술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숫자나 열을 통하여 경제가 번영하고, 군대가 강건하던 이스라엘의 쇠퇴를 역설적으로 서술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4-6)

종종 교회 출석, 봉사, 헌금 등 외적인 신앙 생활을 통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겉모습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의미가 없습니다. 거짓된 의지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4-6)

 

살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기를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멸망에 직면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요청은 멸망의 운명이 회개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절과 6절은 여호와를 찾으라고 반복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찾는 것을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아모스가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암 5:14), 곧 정의를 추구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곳으로 알려진 세 개의 성소인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언급됩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이며(창 28장), 길갈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수치를 극복한 곳입니다(수 5:9). 브엘세바는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번성을 약속받은 곳입니다(창 22:19;26:23). 세 개의 성소는 당대에 호화로운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여호와를 찾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지던 장소입니다. 제사의 남용을 배격하고 윤리를 추구하는 아모스는 성지순례를 반대하고, 정의를 추구하여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명한 성소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길갈의 백성은 포로로 사로잡힐 것이며, 벧엘이 비참한 운명이 될 것입니다. 아모스가 성소로의 순례를 막고 거부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북 왕국을 상징하는 요셉의 집은 멸망할 것입니다.

 

멸망의 선포(7-9)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불의가 만연하고, 정의가 왜곡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런 불의에 동참하거나, 불의에 대해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바로 세우고, 공의를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불의를 묵인하거나, 정의를 왜곡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7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9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7-9)

 

선을 추구하지 않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 선포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의란 법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법정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포함하는데, 특히 억울한 자를 없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쓴 쑥’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꾼다는 것은 억울하고 호소할 데 없어 목말라 찾아온 이들에게 정의의 물 대신 먹을 수 없는 쓴 쑥을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의란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를 뜻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교차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공의를 땅에 던졌다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공의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 정의와 공의를 버리는 자들을 판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찬양이 등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이름은 곧 여호와십니다.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황소자리에 있는 일곱 개의 별인 묘성과, 오리온 자리인 삼성을 만드셨습니다. 이 별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고대 세계에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별들이 기도하고, 별들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 별들이 단지 피조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고, 바닷물을 지면으로 쏟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서술은 곧 전능하신 창조주를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강한 자를 패망(멸망)으로 이끄시는데, 그 패망이 요새화된 도시나 성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는 곧 창조주께서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행위(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싸우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부패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직과 공의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정의로운 실천이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불안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10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10-13)

 

이제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구체적인 행위들이 나열됩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악한 일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성문은 장로들이 모여서 법적 문제를 다루고 판결했던 장소입니다. 백성은 공적으로 책망하거나 정직히 말하여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한 악은 어떠한 것입니까? 먼저 힘없는 자를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둔 것입니다. 밀로 번역된 바르는 일반적인 곡물을 뜻하는 1:1대 간과는 달리 거래용 농산물을 뜻합니다. 소작인들에게 벌금을 받거나 빌려준 곡식에 대하여 과중한 세를 받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벌은 다듬은 돌로 건축한 집에 거하지 못하고, 아름답게 가꾼 포도원에서 수확하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벌은 나라가 멸망되는 심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향한 저주 목록에 포함됩니다(신 28:30-44; 미 6:15).

아모스는 또 다른 죄 목록을 제시합니다.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다는 말은 사마리아의 지배층을 향한 언급일 것입니다. 성문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법적 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지배층은 거짓된 재판으로 의인을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했습니다. ‘지혜자’란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그들은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에서 진실을 말해도 소용이 없기에 차라리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와 회개의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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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4-01)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불순종

아스모 4장 1-13절


우리가 종종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보다는 종교적 형식과 의식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적 형식에만 집착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형식보다 내면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로 표현된 이들은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방탕하며 우상숭배하기를 기뻐했으니 포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아와 기근, 재앙과 전염병으로 치시고 성읍을 무너뜨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바산의 암소들(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자원과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유한 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공의를 실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1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아모스 4장은 ‘들으라’는 2인칭 복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들어야 할 청중은 ‘바산의 암소’들입니다. 3장이 악을 행하는 남자들을 겨냥했다면, 4장은 그 남자들을 조종하는 여자들을 겨냥합니다. ‘바산’은 울창한 숲과 목초가 있어서 질 좋고 힘센 가축 떼가 길러지는 곳입니다. 바산의 질 좋은 최상급 암소를 염두에 두고, 사마리아의 상류층 귀부인들을 ‘바산의 암소’라고 은유적으로 부릅니다. 1절은 범죄의 내용을 설명하고, 2-3절은 범죄에 대한 형벌을 보여줍니다. 원래 남편은 주인이라는뜻의 바알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가장이라는 뜻의 아돈을 사용했는데, 이는 ‘바알’보다 주인의 개념이 더 강합니다. 여인들은 남편들을 움직여 가난한 자들을 학대와 압제로 희생시킴으로 자기들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쾌락의 도구는 술입니다. 여자들은 남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남자들은 이를 위하여 모든 불의를 자행합니다. 남자들은 술을 단순히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강탈합니다. 여자들은 술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남편들을 채근함으로 남편들이 악을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자들의 악함에 대한 결과는 멸망과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보다 더 강력합니다.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2)라는 말은 심판이 이루어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모스는 2절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설명할 때, 갈고리와 낚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밧줄로 끌려가는데, 밧줄 끝에는 포로들의 코나 아랫입술을 뚫은 구멍에 거는 갈고리가 있었습니다. 아모스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함을 나타낸 표현은 실제로 포로들을 그렇게 끌고 갔다는 것인지, 아니면 도살된 소들을 취급하는 용어를 포로로 끌려가는 자들을 나타내는데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성 무너진 데’는 적들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할 때 성벽을 깨뜨려 생긴 틈을 말합니다. 하르몬은 아마도 바산 지역에 있는 헤르몬이라는 지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여자들의 운명은 헤르몬을 거쳐 앗수르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경고(4-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형식에만 치우친 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외적인 의식을 충실히 행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단순한 형식에 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적 형식에 만족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진정한 회개와 변화된 마음을 원하십니다.

 

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

 

아모스는 죄를 범하고 성대한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예배했음을 질책합니다. 벧엘과 길갈은 절기 때에 순례하는 곳입니다. 벧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예배 장소였습니다(창 12:8; 28:19). 길갈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 돌을 취하여 기념한 장소로(수 4:20-24). 이스라엘이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한 곳입니다(수 5:9). 본문에서 단이 아니라 길갈이 언급된 것은 아모스 시대에 길갈이 순례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들을 보여줍니다.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드리는 수은제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리 내어 선포하는 낙헌제는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본문에서 어려운 구절은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라고 말한 후에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벧엘과 길갈에 가서 새로운 범죄를 짓는다기보다는, 악을 저지른 후에 성소를 찾아가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고 돌아온다면 그것 자체가 범죄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 불의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행하고 제사를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이스라엘에게 아모스는 제사를 폐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5:21-24).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6-13)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전달하신다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현상을 통해서도 인류에게 자신을 알리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받게 됩니다.

 

6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13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6-13)

 

6-11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로 마칩니다. 이어지는 12절은 ‘그러므로’라는 언급을 통해 다시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만나기를 촉구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의 실제(6-11)

 

6-11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시도가 실패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6절에서 이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씹을 것이 없어서 이가 한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양식이 떨어지게 만드셨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추수하기 전에는 늦은 비가 필요합니다. 7-8절에서 하나님은 비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추수가 어렵습니다. 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추수에 어려움을 겪게 하고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해도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만드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7-8).

9절에서 하나님은 심각한 자연재해인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치시고 팥중이로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먹게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절에서 전염병을 보내고, 칼로 청년들을 죽이고, 말들을 노략하게 하고,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11절에서 이스라엘의 성읍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뜨리고 백성이 불붙는 가운데에서 빼낸 나뭇조각같이 되었지만, 이 역시 그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강퍅한 이스라엘은 여러 번 얻어맞고도 깨닫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의 최후(12-13)

 

1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실 것을 준비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것은 곧 다시는 기회가 없음을 뜻합니다. 종말을 부르는 심판이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13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권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과 진정한 회개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외적인 형식이나 종교적 의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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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3-01)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이스라엘

아모스 3장 1-15절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확실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며, 그 결과로 모든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며, 우리가 회개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 아모스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자신이 심판의 예언을 하는 이유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스돗과 애굽 사람을 불러 사마리아의 패역함을 보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물어 우상 숭배하는 제단을 파괴하며 큰 궁들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책임(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고, 그로 인해 큰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그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큰 책임을 지우시며, 우리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경고와 심판이 따를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1-2)

 

선택된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애굽 땅에서 종으로 압제당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 보응하십니다.

 

예언자가 침묵하지 않는 이유(3-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을 통해 전하십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의 경고를 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통해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경고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3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6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3-8)

 

본문에서 아모스가 하고 싶은 말은 7-8절에 있습니다. 아모스 자신이 예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3-6절에서 예언자는 인과관계를 따르는 일상생활의 예를 보여 줌으로 자신이 예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힙니다. 사자가 손에 움킨 것이 있기 때문에 수풀에서 부르짖습니다.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있기에 굴에서 소리를 냅니다. 덫을 땅에 놓았기 때문에 새가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잡힌 것이 있으니 덫이 튀는 것입니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니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재앙이 성읍에 임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습니다. 8절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예언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 여호와께서는 왜 말씀하십니까?

7절에 보니, 주 여호와께서는 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당신의 선지자들에게 자기의 비밀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기 전에 당신의 선지자인 아모스에게 그 비밀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선지자인 자신은 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을 선포(9-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확실히 선포하십니다. 그 심판은 모든 거민을 덮는 대재앙이 될 것이며, 왕의 성궁도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경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무자비한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9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9-12)

 

아모스는 사마리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두 증인을 세우는데, 그들은 블레셋의 도시 아스돗과 애굽입니다. 신명기는 사형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신 17:6). 갑자기 아스돗과 애굽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스라엘 못지않은 폭력과 압제의 전문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모스가 궁궐을 강조한 이유는 궁궐이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자들이사는 견고한 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의 중심지인 산에 모여 이스라엘이 행한 요란함과 학대함을 목격하라고 말합니다. 요란함은샬롬(평화)이 없는 혼돈의 상태를 말하며, 학대는 왜곡된 재판과 남용된 공권력을 통해 재물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한 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에서 이러한 악이 얼마나 넘치는지 이방 나라들에게 목격하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자기 궁궐에서 쌓는 것은 포학과 겁탈입니다. 포학은 폭력으로 남의 피를 흘리는 악이며, 겁탈은 물질적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바른 일이란 속임수와 거짓의 반대말로 정직을 의미하며, 법정과 상거래에서 지향해야 할 덕목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일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과 물욕에 어두워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호와의 결정은 이방 대적을 통한 심판입니다. 대적은 사방에서 나타나 이스라엘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며, 권력의 핵심인 궁궐을 약탈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권력을 통한 빈부격차의 심화인데, 심판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아모스는 12절에서 약탈의 결과를 당대의 관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자가 양을 잡아 찢었으면, 목자는 양의 주인에게 사자로 인해 죽은 짐승의 일부인 양의 뒷다리나 귀 조각을 증거로 제시해야 했습니다. 적들이 사마리아를 덮친다면 사치스럽게 살던 부유층들이 멸망하고 그들이 사용하던 사치품의 일부만 남아 비참함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남은 사치품의 존재를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남은 것이 있겠지만, 그것은 소망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파멸과 죽음의 증표가 될 것임을 말합니다.

 

야곱의 족속에 대한 증언(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재물을 탈취하시고, 부유한 자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모든 부유한 자들, 즉 타락한 지도층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암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부패한 자들은 처벌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3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5)

 

다시 아모스는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하는데 청자가 누구인지 나타나진 않지만, 아마도 9절에 나타난 아스돗과 애굽의 궁궐들일 것입니다. 그는 죄악을 나열하고,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는’이라고 말하면서 심판의 때가 임박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3장 2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선택에 맞는 요구를 하셨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상응하는 심판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 심판이 14-15절에서 나열됩니다. 첫 번째 제시된 것은 벧엘의 제단들과 제단의 뿔입니다. 벧엘은 북왕국의 중앙 성소로, 여로보암 이후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잘못된 예배 장소였으며, 모든 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한 혼합주의의 중심을 파괴하는 것이 심판의 내용입니다. 또한 제단뿔을 꺾어 땅에 떨어뜨린다는 말은 당시에는 쫓기는 자들이 속죄제물의 피를 바른 제단의 뿔을 잡으면 보호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제시되는 것은 왕과 지도자들의 집입니다. 상아궁은 내부를 상아로 치장한 호화스러운 집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상아는 구할 수 없는 사치품입니다. 당대에 상아는 백성의 농산물을 착취하여 팔아서 외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백성에 대한 약탈과 지배층의 사치를 상징합니다. 이로 인하여 지주들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농노가 되어 갔습니다. 또한 지배층들은 사치스런 집들을 계절별로 다른 장소에 두어 비싼 장식품들로 꾸몄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런 궁들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아모스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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