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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9-01)

 


하나님의 정의와 최종적인 공의의 실현

아모스 8장 11절-9장 6절


 

하나님께서 말씀을 멈추실 때, 사람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헤매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삶을 지도하시며, 그 말씀 없이는 인간이 올바른 길을 찾기 어려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그날이 이르면 하나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해 결국 영혼이 목마르게 됩니다. 그날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멸망 당하며, 주께서 그들을 스올까지도 좇아가 심판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 여호와는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고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는 분입니다.

 

말씀의 기근(8:11-14)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우리의 영혼은 영적 기근에 빠져 방황하게 됩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으로 신앙의 중심이며, 말씀 없이는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 건강을 지키는 길입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14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11-14)

 

9절에 이어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선포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어떤 말씀입니까? ‘보라’라는 표현은 주의를 환기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날이 이를 지라’라는 구절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십니다. 이제 여호와의 주권으로 종말이 오고 재앙이 돌이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종말이 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시는데,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기근입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식의 기근이 아니고, 물이 없는 기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말씀의 기근입니다. 종말이 임박했을 때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끝이 가까웠기에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씀을 찾아 나섭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찾아 나섭니다.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채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등장하는 것은 신에게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맹세는 신 앞에서 만약 나의 무고함이 사실이 아니면 어떤 형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입니다. 또한 신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사마리아의 죄’란 말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거짓 우상을 뜻합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슈마트’가 우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대하 24:18; 33:23). 북왕국의 단과 남왕국의 브엘세바는 거짓 신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 마지막에 ‘쓰러진다’는 말이 나오고, 14절 마지막에도 역시 ‘엎드러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둘 다 같은 히브리어 말의 번역입니다. 13절과 14절을 연결시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우상에게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아무리 애써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이란,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상실한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요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곧 단과 브엘세바에서 우상을 두고 맹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혼합주의 때문입니다.

 

마지막 환상(9:1-4)

우리는 헛된 신앙과 우상숭배를 경계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우선시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2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3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4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9:1-4)

 

다시 마지막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전과는 달리 서론이 없고, 상징적인 요소도 없고, 아모스의 말도 없습니다. 이번 환상의 무대는 벧엘입니다. 여호와께서 제단 곁에서 바로 심판을 명령하십니다: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이 명령에 따르면, 제사를 드리는 자와 집례하는 자가 무너지는 제단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심판의 목표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남은 자가 있더라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살아남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같은 여호와의 의지는 다양한 표현으로 강조됩니다.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철저하고 완벽한 살육의 재앙 앞에서 도망할 자(누쓰)와 피할 자(말라트)가 없을 것입니다. 도망자는 달아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고, 피하는 자는 이제 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이 위에서 아래까지 무너져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깔려 죽을 것이고,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을 것입니다. 즉 한 사람도 여호와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2-4절에서도 남은 자들에 대한 철저한 살육이 명령됩니다. 여기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조, 시 139편). 하나님께서는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 들어가도 그들을 붙잡아내실 것이요. 하늘로 올라가도 끌어내려 죽이실 것입니다. 남은 자가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찾아낼 것이요. 혹시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눈을 피해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뱀에게 명령하여 물게 하실 것입니다. 혹시 남은 자가 원수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갈지라도,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칼에 명령하여 죽이게 하실 것입니다. 혹시 살아 남는다 할지라도 화를 내리시고 복은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5-6)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리는 올바른 신앙과 삶의 방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주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5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 6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5-6)

 

이 단락은 두 개의 심판 예언 사이에 있는 짧은 찬양시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를 주어로 시작하고,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라고 마감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세 개의 분사를 사용해 여호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땅을 만지시는 분’, ‘하늘에 그의 궁전을 세우시는 분’, ‘바닷물을 부르시는 분’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명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언급합니다.

찬송은 ‘주 만군의 여호와’로 시작됩니다. ‘만군’이라는 말은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땅을 만져 녹게 하는 것은 지진을 가리킵니다(8; 1:1; 2:13; 4:11; 6:11; 9:5). 여호와께서는 지진을 일으켜 땅에 거주하는 자들로 애통하게 하십니다. 전능하신 여호와는 땅을 강물처럼 오르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는 두 가지 동사로 묘사됩니다. 세우고(바나), 두는 것(야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성전을 세우시고,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십니다.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신다는 묘사 역시 하나님께서 가지신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과 영적 기근을 경고합니다. 이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함으로 새로운 소망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정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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