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05-01)
회복을 위한 회개와 정의의 실천
아모스 5장 1-13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실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불의가 있는지 점검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영역이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탄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이러한 성찰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행동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더욱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엎으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 살 것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슨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버렸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거운 죄 때문에 패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1-3)
우리는 영적으로 무너진 상태에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안하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라면, 지금이 바로 회개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회개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1-3)
아모스 5장은 ‘이 말을 들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아모스가 전하는 말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미리 애곡하는 애가입니다. 당대는 이스라엘의 전성기로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번성기인데 애가를 부르라는 것이 이상해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완료로 슬퍼합니다. ‘엎드러졌다’라는 단어는 병이나 자연사가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삼하 1:12).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부르는데 이는 젊음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혈기 왕성하다고 느낄 때 멸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엎드러졌지만 일어나지 못합니다(2). ‘던져졌다’와 ‘일으킬 자가 없다’는 동의어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쓰러짐을 말합니다. 자기 땅이란 이스라엘이 은혜로 얻은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그 땅에서 멸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천명, 백 명, 열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 편성을 전제로 서술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숫자나 열을 통하여 경제가 번영하고, 군대가 강건하던 이스라엘의 쇠퇴를 역설적으로 서술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4-6)
종종 교회 출석, 봉사, 헌금 등 외적인 신앙 생활을 통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겉모습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의미가 없습니다. 거짓된 의지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4-6)
살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기를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멸망에 직면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요청은 멸망의 운명이 회개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절과 6절은 여호와를 찾으라고 반복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찾는 것을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아모스가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암 5:14), 곧 정의를 추구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곳으로 알려진 세 개의 성소인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언급됩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이며(창 28장), 길갈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수치를 극복한 곳입니다(수 5:9). 브엘세바는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번성을 약속받은 곳입니다(창 22:19;26:23). 세 개의 성소는 당대에 호화로운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여호와를 찾기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지던 장소입니다. 제사의 남용을 배격하고 윤리를 추구하는 아모스는 성지순례를 반대하고, 정의를 추구하여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명한 성소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길갈의 백성은 포로로 사로잡힐 것이며, 벧엘이 비참한 운명이 될 것입니다. 아모스가 성소로의 순례를 막고 거부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북 왕국을 상징하는 요셉의 집은 멸망할 것입니다.
멸망의 선포(7-9)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불의가 만연하고, 정의가 왜곡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런 불의에 동참하거나, 불의에 대해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바로 세우고, 공의를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불의를 묵인하거나, 정의를 왜곡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7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9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7-9)
선을 추구하지 않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 선포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의란 법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법정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포함하는데, 특히 억울한 자를 없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쓴 쑥’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꾼다는 것은 억울하고 호소할 데 없어 목말라 찾아온 이들에게 정의의 물 대신 먹을 수 없는 쓴 쑥을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의란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를 뜻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교차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공의를 땅에 던졌다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공의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 정의와 공의를 버리는 자들을 판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찬양이 등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이름은 곧 여호와십니다.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황소자리에 있는 일곱 개의 별인 묘성과, 오리온 자리인 삼성을 만드셨습니다. 이 별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고대 세계에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별들이 기도하고, 별들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 별들이 단지 피조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고, 바닷물을 지면으로 쏟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서술은 곧 전능하신 창조주를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강한 자를 패망(멸망)으로 이끄시는데, 그 패망이 요새화된 도시나 성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는 곧 창조주께서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행위(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싸우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부패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직과 공의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정의로운 실천이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불안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10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10-13)
이제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구체적인 행위들이 나열됩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악한 일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성문은 장로들이 모여서 법적 문제를 다루고 판결했던 장소입니다. 백성은 공적으로 책망하거나 정직히 말하여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한 악은 어떠한 것입니까? 먼저 힘없는 자를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둔 것입니다. 밀로 번역된 바르는 일반적인 곡물을 뜻하는 1:1대 간과는 달리 거래용 농산물을 뜻합니다. 소작인들에게 벌금을 받거나 빌려준 곡식에 대하여 과중한 세를 받는 행위를 언급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벌은 다듬은 돌로 건축한 집에 거하지 못하고, 아름답게 가꾼 포도원에서 수확하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벌은 나라가 멸망되는 심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향한 저주 목록에 포함됩니다(신 28:30-44; 미 6:15).
아모스는 또 다른 죄 목록을 제시합니다.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다는 말은 사마리아의 지배층을 향한 언급일 것입니다. 성문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법적 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지배층은 거짓된 재판으로 의인을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했습니다. ‘지혜자’란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그들은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에서 진실을 말해도 소용이 없기에 차라리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와 회개의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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