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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5-02)

 


형식이 아닌 마음을 드리는 예배

아모스 5장 14-27절


 

우상숭배의 위험을 경계하며, 우리는 하나님 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것이 곧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 이스라엘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빛이 아닌 어둠의 날이 임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14-15)

우리가 선을 구하고 악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현재의 삶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축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생명, 곧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속에서 누릴 삶을 의미합니다.

 

14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14-15)

 

아모스의 책망을 듣는 자들은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방법은 윤리가 실종된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선을 구하고 악을 찾지 않음으로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선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려면 성문에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장로들이 모여 법적 문제를 다루고 판결했던 성문에서 법정 정의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렇게 선을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분이 계획하신 재앙을 내리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혹시’라는 단어는 심판이 전적으로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북왕국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시조입니다. 북왕국 대부분이 포로로 사로잡혀갈 상황에서도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한다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로 지나가리라(16-17)

종종 우리의 소유와 성취를 축복의 증거로 여기며, 그것들이 안전과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 심지어 우리의 인간관계까지도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초로 삼고, 그것들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의지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인지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와 심판을 통해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16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17)

 

1-3절에 이어 조가가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멸망 후 있을 애곡할 상황을 미리 보여주는데, 어떤 재앙인지는 말하지 않고 재앙의 결과만 말합니다. 일반적인 장례식에서는 울음 꾼만 애곡하지만, 이 애곡은 농부와 울음 꾼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게 될 것입니다. 우는 장소로 모든 광장과 모든 거리가 강조되고 포도원까지 언급됩니다. 이는 원래 포도를 따는 기쁨이 있는 대표적인 장소에서조차 울게 될 상황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모스는 17절에서 우는 원인에 대해 언급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지나갈 것임이라’이는 하나님의 현현(출 34:6-7)을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로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18-20)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기대는 오히려 우리에게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식적인 신앙이 아닌,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8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18-20)

 

‘화 있을진저’라고 심판을 선언하는 화 신탁(woe oracle)은 주로 장례식 탄원에서 나타납니다(왕상 13:30; 렘 22:18).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멸망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입니다(수 10:10-14: 삿 5장).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날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심판의 날이며, ‘어둠’과 ‘캄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예를 들어 표현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자를 피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곰을 만나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집에 들어가 안전한 줄 알고 벽에 손을 댔는데 뱀에게 물리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비극적인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악 때문에 하나님의 적이 되어 실패와 파괴를 경험할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21-24)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정의와 의가 필요한 순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1-24)

 

21절부터 여호와는 1인칭 형식으로 백성에게 제의의 문제점을 전합니다.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번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야 할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신 16:16)을 의미하며, '성들은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다른 절기들(암 8:5)이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열심히 지켜오던 이 절기들을 여호와께서 미워하고 멸시하며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중요한 세제사인 번제, 소제, 희생의 화목제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언급한다. '노랫소리'란제사를 드릴 때 함께하는 예배용찬송, 곧 시편 등을말하는데 이것까지도 거부하신다. '비'는 예배를 위하여 동원된 악기인데, 하프 모양으로 가죽이나 도기로 만든 울림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기 연주도 기빼하지 않으십니다. 제의 제도를 잘못 행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의는 화려하지만 윤리가 함께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제의 제도가 백성의 악을 합리화하여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예언자 아모스가 원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정의’(미쉬파트)란 법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법정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포함하는데, 억울한 자가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의’(체다카)란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로, 측은함과 환대로 베푸는 사랑을 포함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종교적인 열심의 외적 모습인 이웃사랑의 결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는, 상식적이면서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됨(25-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한 의식이 아니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5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25-27)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희생’은 동물 제사를, ‘소 제물’은 곡물 제사를 의미합니다. 26절에서 등장하는 ‘식굿과 기윤’은 바벨론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별의 신들 이름입니다. 앗수르의 전쟁 신 아다르는 ‘사쿳’이라고 불렸습니다. 앗수르 인들이 예배한 별들의 신은 ‘카이완’이라고 불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모스는 바른 삶이 없는 예배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예배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광야 시대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그 예배는 우상숭배와 함께 드렸던 혼합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형벌로 이스라엘이 식굿과 기윤과 우상들과 신들의 별들을 짊어지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메섹은 국제도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가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아모스는 다메섹을 지나 곳곳으로 흩어지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합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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