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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2-02)


거룩에 관한 율례

출애굽기 22장 16-31절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신앙과 예배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경한 제물이나 무시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성경적 기준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든 행위와 예배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아야 함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여러 징벌 규정과 함께 배상 원칙들을 말한 뒤, 이제 다양한 윤리적·종교적 문제에 대한 법들이 명시됩니다. 처녀, 나그네, 과부, 고아 같은 약자에 대한 보호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짐승과 관련한 배상법이 주어졌는데 이제 법의 초점이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악독한 죄가 몇 가지 추가되고 약자에 대한 다양한 보호 장치를 명령합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토라의 근본정신입니다.

 

처녀와 동침한 남자의 벌금(16-17)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개인은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섬기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16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16-17)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유혹해 동침하면, 상실된 처녀성의 대가로 납폐금(신부 값)을 물고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처녀의 아버지가 그 남자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신부 값만 치르게 하고 딸은 안 줘도됩니다. 딸을 맡길 만큼 신뢰하기 어렵다면 강간의 값만 치르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처녀의 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한다면 범죄자가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남자는 무거운 책임을 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충하는 법이 신명기 22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22:23-27에서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한 여러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만일 처녀가 아닌 ‘약혼한 여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죽입니다. 화간이기 때문입니다. 약혼은 법적인 결혼 관계의 효력을 갖기에 남자와 더불어 여자도 중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강간당했다면, 강간범만 죽이고 피해자인 여자를 문책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22:28-29은 현재의 시내산 언약 법전의 사례와 매우 비슷합니다. 남자가 처녀를 ‘붙들고’ 함께 동침한 것이라면, 남자는 은 50세겔을 배상하고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NIV는 ‘붙들고’를 강간이라고 번역하는데 너무 강한 번역입니다. 남자 쪽의 물리적 강제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처녀도 어느 정도 동조한 듯 보입니다. 이 신명기의 사례에서는 현재의 출애굽기 사례와 다르게 아버지가 신부 값을 받고 반드시 그 딸을 남자에게 아내로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아버지가 딸 주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강간한 남자에게 딸을 주지 않고 신부 값만 받아도 되는 출애굽기의 사례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신명기 법에서 남자는 여자를 데려가서 평생 살아야 하며 이혼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책임을 졌습니다. 따라서 이는 전적인 강간이 아닌 어느 정도 합의된 성관계일 것입니다.

 

몇 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18-20)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신앙과 영적 탐색을 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섬겨야 합니다. 마술, 점, 그리고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행위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올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18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19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0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18-20)

 

사형에 해당되는 세 가지 범죄가 추가됩니다. 매우 심각한 범죄들입니다. 첫째, 무당은 살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무당은 여성, 즉 무녀(巫女)입니다. 여호와의 뜻과 역사를 거부하거나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참조, 신 18:10-14; 왕하 9:21-26; 미 5:10-15; 렘 27:8-11).

둘째, 수간을 하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 짐승에 대한 처벌은 언급되지 않지만, 레위기 20:15에 따르면 짐승도 같이 죽여야 합니다. 이 언약법전에서는 사람의 사형에 짐승의 도살도 전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는 수간이 성행했습니다. 히타이트 법전은 양, 소, 돼지, 개와의 수간은 금했으나(187-188조, 199조), 말과 나귀와의 수간은 금하지 않았습니다(200조, 참고. ANET 196-197).

셋째, 우상숭배자는 멸해야 합니다. ‘멸하라’(하람)는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사형에 대한 표현이 다양해지면서 점점 강해집니다: 무당은 ‘살려두지 말고’, 수간하는 자는 ‘죽이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는 자는 ‘멸하라’라고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 명령(21-27)

오늘날 우리는 돈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이웃을 착취하거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우리의 신앙을 반영합니다.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고, 그들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1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21-27)

 

본문에서는 사회적 약자, 즉 나그네, 고아, 과부를 학대하지 말라는 경고와 더불어 그들의 억울함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또한,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말고, 담보로 받은 물건은 반드시 그날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1)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배려(21-24)

 

21-27절은 약자 보호법입니다. 오경의 율법은 약자에 대한 다양한 보호 장치를 마련합니다. 예컨대 나그네에 대한 수많은 법이 등장합니다(출 22:21; 23:9,12; 레 19:33-34; 민 9:14; 신 1:16 등), 나그네, 고아, 과부는 보호자와 부양자가 없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입니다. 이들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가 나누어 져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배려는 메소포타미아와 우가릿 문헌들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이러한 약자 보호는 일반 은총 영역에서 인류의 공통적인 책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경은 그런 인권법을 출애원 경험과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는 자신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가들이 고통 중에 외치는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십니다(23). 만일 약자를 보호하고 돕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서운 보응을 받아 아내와 자녀들이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될 것입니다(24).

 

(2)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25-27)

 

동포 이스라엘 사람을 가족처럼 대해야 했다. 타인으로, 채무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참고로 신 23:20은 타국인에게 이자 받는 것을 허용했다). 이자나 담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권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고대 근동의 법전에서는 이자 금지를 반대하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사회에서 돈의 이자율은 20%였고, 곡식의 이자율은 1/3, 즉 33.3%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법에서 금지되는데, 명백히 신학적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가족이다! 이자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 상황에서는 원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기에 돈을 빌려주는 일은 '자비심'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3, 24, 25, 27절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주어 '나'가 거듭 사용되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강조된다. 인간의 제도와 권력이 마련하는 구제책은 한계가 있었으나, 여호와께서는 직접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사회적 약자는 저항할 힘이 없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폭력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보응하신다. 23절에 이어 다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27절). 이 '자비'(하눈 17)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40에서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라 하셨다. 겉옷이 가난한 자의 생존을 위한 하한선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요구는 자신의 마지막 것까지 내어주는 '자비심'을 품으라는 주님의 새로운 계명이다.

 

몇 가지 준수 사항들(28-31)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삶은 성별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져야 합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인 헌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 재능, 그리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28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9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30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31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28-31)

 

“재판장”이란 단어 ‘엘로힘’은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경히 여기고) 지도자를 ‘저주’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땅에서 자비와 공평을 시행하는 지상의 주권자들도 존경해야 합니다. 여기서 징벌은 명시되지 않으나, 부모 저주가 사형을 받는 죄가 되듯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이 벌어진 레위기 24:10-16의 에피소드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투석형의 징벌을 당했습니다.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아마도 18:12의 ‘장로들’이거나 18:21-26의 백성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인데, 광야 생활 전반에서 그를 저주하고 대적한 백성의 반역이 반복되고, 그로 인해 거듭 징벌을 받습니다.

첫 번째 수확한 곡식과 포도즙으로 대표되는 과일의 첫 번째 생산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또 장자를 하나님께 봉헌해야 합니다(29).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이 다른 본문에서는 짐승의 속량으로 대체됩니다(출 13:12-13; 출 34:19-20). 소와 양의 첫 새끼도 바쳐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은 어미와 있게 해야 합니다(30).

마지막으로 들판에서 죽은 짐승은 정결한 짐승의 고기라도 먹어선 안 됩니다(참조. 레 17:15-16; 신 14:21). 그것은 피가 빠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피째 먹어선 안 됩니다. 언약 공동체의 백성들은 성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언약 관계에 따른 의무 사항입니다. 만일 그들이 성별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여호와를 경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고,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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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2-01)


재산에 관한 율례

출애굽기 22장 1-15절


 

옛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도죽질이 일시적인 충동이나 장난으로 하지만, 발각이 되지 않으면 쾌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점점 통이 커지고 담대해지면서 물건의 액수가 점점 커집니다. 결국에는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 더욱 고의적이고 대담한 큰 도둑이 됩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작아 보이는 나쁜 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 배상과 처벌하는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절도 행위에 대한 배상(1-4), 밭이나 포도원의 피해를 입힌 배상(5-6)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물건에 관한 배상(7-15)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 21장에서 사람을 죽임으로 배상하는 법인 동해동형제도와는 달리 훨씬 초과해서 배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절도에 대한 배상(1-4)

 

사람들은 실수나 범죄를 감추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으며, '증거가 없으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며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것을 몰래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정직함과 책임감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1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2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4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1-4)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욕심내서 도둑질하게 되면, 도둑질을 강하게 처벌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정상 참작을 하셔서 처벌을 달리하도록 하셨습니다.

 

(1) 가축을 훔쳤을 때의 배상(1,4)

 

각종 재산상의 피해를 일으키는 사례들에 대한 처벌과 배상 규정들이 나열됩니다. 피해를 유발하는 양상은 다양합니다. 절도와 과실, 전당물의 관리 소홀, 분실물의 착복 등입니다. 가축 도둑질에 대한 배상 규정이 2, 3절을 중간에 두고 갈라져 있습니다. 만일 소를 훔쳐서 도축을 했거나 팔았는데 발각되었다면, 다섯 배의 배상금, 즉 소 다섯 마리의 배상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양/염소(세)의 경우 네 마리의 배상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소는 가장 비싼 재산이었기에 더 큰 벌금이 내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가축 나귀가 누락되어 있는데, 양/염소에 준한 배상을 했을 것입니다. 훔친 가축이 아직 절도자의 수중에 살아 있다면, 두 배를 배상해야 했습니다(4). 한편 주변 나라들에서는 절도죄가 훨씬 가혹하게 다루어졌습니다. 히타이트 법전 57-59조와 함무라비 법전 8조는 절도죄를 30배나 되는 엄한 벌금으로 다스렸습니다. 히타이트의 경우 나중에 15배로 줄였지만 여전히 큰 벌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벌금은 최대 다섯 배에 그칩니다. 가끔 나오는 일곱 배의 징벌은 완전한 징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입니다(잠 6:31; 창 4:15; 레 26:24). 도둑이 자수했을 경우 레위기 6:4-5의 속건제 규칙이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범죄자는 장물의 원금에 20%를 추가해서 갚아준 뒤 성소에 올라가 속건제 숫양을 드려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런 자백의 기회는 절도범뿐 아니라, 타인의 물건을 우연히 습득한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었습니다. 가축 외에 옷, 귀중품, 생활 비품과 같은 다른 물건의 절도에 대해서는 두 배의 배상이 벌금으로 부과된 것으로 보입니다(7,9).

 

(2) 도둑에게 입힌 상해와 배상(2-3)

 

이 규정은 가축을 훔치려는 시도뿐 아니라 모든 도둑질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담이나 벽을 뚫고 침입한 도둑이 맞아 죽었을 경우, 야간 침입과 주간 침입으로 사례가 구분되었습니다. 야간에 침입자를 발견한 주인이 그를 때려죽이면, 그 주인은 무죄입니다. 날이 어두워 도둑의 무장 상태와 분명한 의도, 그리고 그의 몸집 크기 등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주인에게도 위협적인 상황이었으므로 그것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밝을 때 도둑을 때려죽인 경우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주인은 피를 흘리지 않고 도둑에 대처할 여러 가지 방안이 있었기에 그는 그 피값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만일 물건을 훔쳐간 도둑이 나중에 체포되었는데 배상할 돈이 전혀 없다면 그는 몸을 팔아 그 돈을 갚아야 하는데(3) 두 배의 배상금이 부과되었습니다(참조. 4,7,9).

 

농작물 피해에 대한 배상(5-6)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부주의로 인해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부주의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신뢰가 무너져 관계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교회 안에서도 신뢰가 중요하며, 만약 자신의 부주의로 손해를 끼쳤다면 삭개오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려는 책임감 있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5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6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5-6)

 

어떤 사람의 가축이 어쩌다 남의 밭이나 과수원에 침입해 작물을 망쳐놓았을 때 자신의 가장 좋은 농작물로 피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불을 놓다가 의도치 않게 타인의 밭에 불이 번져 곡식을 태우면, 불을 놓은 사람이 모두 배상해줘야 합니다(이와 비슷한 법 조항인 히타이트 법전 105-107조를 보라). 건기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불은 늘 위협적이었습니다. 특히 불이 잘 붙는 가시나무들이 주로 밭 가장자리에서 많이 자랐습니다. 추수기에 메마른 가시나무는 잎에 불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밭 전체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프리만(J. M. Freeman)에 의하면, 농부들은 이 시기에 대단히 조심했는데, 요단 골짜기 근처의 아랍인 지역에서는 실수라 하더라도 불을 낸 사람은 사형시키기도 했습니다.

 

전당물의 손실에 대한 배상(7-13)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맡긴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책임 없이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이는 신뢰와 관계를 깨뜨리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뢰를 깨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최근에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 책임감 있는 행동,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한 정직과 성실함이 요구됩니다.

 

7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집에서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8도둑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9어떤 잃은 물건 즉 소나 나귀나 양이나 의복이나 또는 다른 잃은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양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10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만일 자기에게서 도둑 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7-13)

 

본문에서는 누군가가 남에게 맡긴 재산이 도난당하거나 손실된 경우에 대한 배상 규정을 다룹니다. 도둑이 잡히면 두 배로 갚아야 하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재산을 맡은 사람이 법정에서 배상 책임 여부를 판단받아야 합니다. 또한, 맡긴 동물들이 다치거나 죽은 경우에도 책임자가 배상해야 하며, 증거가 없으면 하나님께 맹세하여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1) 도둑 체포 여부에 의한 판결(7-8)

 

이 사례는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맡긴 뒤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웃집에 맡겨놓은 물건이 도둑을 맞았는데, 도둑이 잡히면 도둑은 두 배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도둑이 잡히지 않았을 경우입니다(8). 집에서 물건은 없어졌는데 범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건 주인은 물건 맡은 그 집주인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물건 주인과 성소로 올라가 재판장 하나님께(개역개정 “재판장”) 판결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만일 판결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 본문이 침묵합니다. 당대 사람들이 다 아는 관행이기에 본문이 생략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우림과 둠밈과 같은 신탁을 통해 결정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율법의 한계 때문에 많은 경우 양심에 호소하고 신적 개입을 탄원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분실물 확인에 의한 판결(9)

 

사람이 분실한 물건이나 가축을 우연히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을 때, 만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성소로 올라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판결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유죄로 판결이 난 사람은 상대방에게 두 배로 변상해줘야 했습니다.

 

(3) 맡긴 짐승의 손실에 대한 판결(10-13)

 

만일 가축을 이웃 동료에게 잠시 맡겨놓았는데, 죽거나 상해를 입었거나 분실된 경우에 대한 판결입니다. 죽거나 상해를 입었을 때는 가축을 심하게 부리다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분실했을 때는 그 사람이 숨겨놓았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짐승을 맡아준 사람이 자신의 결백을 맹세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은 그 결백의 선언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11).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자체로 그 사람의 혐의가 벗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맡은 사람의 관리 소홀로 가축을 도둑맞으면 주인에게 배상을 해야 했고(12), 들짐승에게 물려 죽었으면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사체를 가져다 증명해야 했습니다(13).

 

빌린 짐승의 상해에 대한 배상(14-15)

우리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과와 보상이 필요하며, 이것이 진정한 회개로 이어질 때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빌려간 물건이나 동물에 손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갚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14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 15그 임자가 그것과 함께 있었으면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만일 세 낸 것이면 세로 족하니라(14-15)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짐승을 빌리거나 세를 냈습니다. 그런데 빌리는 것과 세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빌리는 것은 돈을 지불하지 않고, 세내는 것은 돈을 냅니다. 빌려온 가축이 주인 없는 사이에 다치거나 죽으면, 빌린 사람이 배상을 해야 합니다(14). 그러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일이 발생하면, 그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15). 만일 그 사람이 가축을 빌린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세낸 것이라면, 관리 소홀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 자동차를 친구에게서 빌리거나, 혹은 업자에게서 대여하는 것에 빗대볼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서 자동차를 빌린 후, 그가 동승하지 않은 채 혼자 몰다 사고가 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친구가 차에 함께 있었다면 사고 상황을 알기 때문에 면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여한 자동차라면, 돈을 지불하고 보험료도 지불하고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돌발 사고가 발생해도 내가 책임질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의 공동체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서로를 세우고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면, 즉시 회개하고, 책임을 지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뢰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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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1-02)


상해에 관한 율례

출애굽기 21장 12-27절


 

잊어질만한 하면 ‘연쇄살인’이라는 나라를 떠들썩 합니다. 연쇄살인범들은 자신들이 심리적 압박으로 연속적으로 받게 되면 폭발하면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생깁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와는 상관없는 연약한 여성들이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범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일은 그 사람의 인격을 철저히 짓밟는 행위 때문에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 현재의 본문은 사형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극악한 범죄 행위들과 신체에 상해를 입힌 경우에 적용되는 기준인 동해동형법, 그리고 몇 가지 배상 원칙들과 상해를 당한 종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례들의 토대와 기준은 결국 동해동형법(lex talion)입니다. 그러나 사회 체제의 유지를 위해 두 가지 중심축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법을 뛰어넘은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요, 다른 하나는 법적 통제가 수반되는 엄정한 문책과 공정한 징벌의 집행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12-17)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구절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행동이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시며,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인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12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4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15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16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7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2-17)

 

사형에 해당한 네 가지 범죄들로 계획된 살인(14), 부모님을 구타(15), 사람을 유괴하는 것(16) 그리고 부모님께 대한 폭언들을 중범죄로 제시합니다.

오경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다양한데 우선 살인이 포함됩니다. 살인은 그것이 홧김에 죽인 고살이거나 원한을 품고 교묘히 죽인 모살이었다면, 용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율법은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이라는 표현을 써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발생한 일로 규정합니다(13). 이런 과실치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13절을 보면 ‘한 곳’이 도피성인 것처럼 보이는데 14절에서는 그곳이 성소의 제단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제단은 도피성에 존재했던 제단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외 각처의 합법적 제단일 수도 있습니다. 필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방 곳곳에 합법적인 여호와의 성소와 제단이 존재했으며 중앙 성전에서 파견된 제사장과 근처 레위 성읍의 레위인들이 그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했다고 봅니다. 중범죄의 혐의자가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도피하여 제단 뿔을 잡는 사례가 구약에 나타납니다(왕상 1:50-53; 2:28-35). 한편, 도피성과 관련하여 만일 살인혐의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했을 경우에도 만일 그것이 과실치사가 아닌 고의적인 살인으로 판명되면, 도피성은 그에게 무용지물이 되어 즉시 사형을 당했습니다(민 35:31-34). 구약학자들은 제단 도피법과 도피성규례 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 이유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을 벌입니다. 사형에 처한 또 다른 죄는 부모 멸시와 폭행죄였습니다(참조. 신 21:18). 여기서는 부모 폭행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5). 사형에 처하는 세 번째 범죄 행위는 인신매매입니다. 인간 도둑질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생명을 훔쳐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사형감입니다. 이런 세 가지 극악한 죄의 처벌을 위해 신명기 24:7에서 예시된 바와 같이 가장 일반적이었던 회중에 의한 투석형(投石)이 집행되었을 것입니다.

 

동해동형법의 원칙과 배상법(18-27)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중요성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그분의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공정하게 대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입혔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며, 만약 피해를 주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18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 20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 22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26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27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18-27)

 

언쟁을 벌이다 홧김에 사람을 쳤는데, 만일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형벌은 모면하지만, 그에게 끼친 금전적 신체적 손해와 사업상의 피해를 철저히 배상하고 완치될 때까지 치료비를 대야 합니다(18-19). 만일 상대방이 죽었다면 형벌을 받는데 레위기 24:17, 21에 비추어 볼 때, 이 징벌은 명백히 사형이다. 만일 종이 매질을 당했는데 하루 이상을 연명하면, 주인은 징벌을 당하지 않습니다. 종이 그의 재산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종이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주인은 징벌을 면치 못했습니다. 역시 그 벌이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피해자가 종이라도 주인은 사형에 처해졌을 것으로 추론됩니다(레 24:17,21). 이런 엄격한 조치는 주인이 종을 함부로 학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싸움 중 폭행을 당해 낙태된 경우에 ‘해’를 입은 당사자가 태아인지 산모인지 논쟁이 되어왔습니다(22). 낙태 찬성론자들과 낙태 반대론자도 산모와 태아로 나뉘어 싸웁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양쪽 모두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해는 우선은 산모라기보다 태아에 대한 상해인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태아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면, 이 법이 여자의 임신 상황을 특별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2절의 ‘다른 해가 없다면’이라는 표현은 아기가 조기 출산 되었지만, 다행히 신체적 상해가 없고 죽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 폭행에 대해, 또한 아마 산모가 신체적 상해를 당했다면 그것에 대해 법정에서 정한 배상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3절의 “(태아나 산모에게)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는 만일 아기가 죽었다면, “생명은 생명으로”를 적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법칙을 동해동형법(lex talionis)이라 부릅니다. 즉, 아이를 낙태시킨 그 가해자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태아도 명백히 독립적인 한 인간 개체로 간주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체적 상해들에 대해서도 동해동형법이 적용됩니다. 의도적으로 좋을 때렸는데 눈이나 이의 손상과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주인은 종을 풀어줘야 합니다(26-27). 이때 종의 자유 방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다른 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인권적 조치입니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국들도 대부분 동해동형법을 형벌 집행을 위한 공정성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동해동형법이 고대근동 국가들에서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법이 문자적 실천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정한 징벌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구약 내에서도 신체 절단과 상해를 가하는 형벌이 집행된 사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참고. 비슷하나 정확하진 않은 두 사례, 신 25:12; 삿 1:6-7).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38-41에서 이 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동해동형법’을 뛰어넘어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원수에게까지 확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사고(28-32)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이며,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28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31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법규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2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28-32)

 

소가 사람을 들이받아 죽일 경우 우발적인 사고와 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로 나뉘어 사안에 따라 배상과 처벌의 수위가 다릅니다. 가축 중에 소에 의한 사고만 다루어지고 있는데, 아마 다른 가축의 사고 사례들 또한 소의 사고 사례에 준해서 적절한 형벌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평소 별 문제가 없던 소가 갑자기 사람을 들이받아서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면, 소를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때 주인은 예기치 않은 사고였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28). 그러나 그 처형된 소의 고기는 부정하므로 먹어선 안 됩니다(28). 반면에 소가 다른 소를 받았을 때 사고를 낸 소 자체가 부정해지지는 않습니다(35). 이런 차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만일 소가 최근에 갑자기 들이받는 이상한 증세가 발견된다면, 주인은 철저한 관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일 관리 소홀로 인해 소가 다른 사람을 들이받아 죽인다면, 소는 물론이고 주인도 사형에 처해 집니다(29). 소의 경우에만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언급되지만, 주인도 동일한 방법으로 처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사망자의 죽음에 대해 충분한 배상금(속죄금)을 지불한다면,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30-31). 마지막으로, 타인의 몸종이 쇠뿔에 받혀 죽은 경우에는 은 30세겔을 지불하고 소는 돌로 쳐서 죽입니다(32).

 

웅덩이에 가축이 빠진 사고(33-34)

우리 삶에서 실수나 부주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자세는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33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34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33-34)

 

누군가 구덩이를 열어놓거나 덮지 않고 방치해 두었는데, 그곳에 소나 나귀가 빠져 죽었다면, 구덩이 주인은 짐승 값을 배상해야 합니다. 대신 죽은 짐승은 구덩이 주인이 가져갑니다. 이 율법은 구덩이에 관한 사례만을 다루지만, 가축의 돌연사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위험 시설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변 환경의 안전을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구덩이 주인의 책임은 단순한 소유권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경계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인 사고(35-36)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공평함과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고의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거나,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면 그 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35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 36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지니라(35-36)

 

이제 소가 돌발적으로 다른 소를 받은 경우, 산 소를 팔아서 그 돈을 양쪽 주인이 반씩 나누고, 죽은 소의 고기도 반씩 나누어 가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산 소와 죽은 소를 팔아서 그 돈을 반으로 나눈다고 설명하지만, 에쉬눈나 법전의 동일한 사례를 보면 그 설명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소가 며칠 전부터 다른 소를 받는 습관이 있었다면, 주인은 그 소를 제대로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이 소가 뛰쳐나와 다른 소를 받아 죽였다면, 주인은 다른 소로 배상하고 죽은 소는 자신이 가져가야 합니다. 이처럼 소가 사고를 일으킨 사례와 이에 따른 배상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의 안전을 철저히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해동형제도에게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의 죄과를 담당하시고 대신 처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게 되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는 보복의 공동체가 아닌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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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1-01)


종에 대한 율법

출애굽기 21장 1-11절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항상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따라 살아가려면, 이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 언약서의 두 번째 주제는 남종과 여종에 대한 법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주제가 우상 금지와 제단 규정으로 시작하는 서론부였기에 21:1에서 이제 ‘법규는 이러하니라’라는 선언과 더불어 나머지 언약서의 율법들이 주어집니다. 종에 한 규정이 언약서의 첫째 법규로 등장한 이유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종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학대받았던 경험이 있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특히 종들을 학대해선 안 됩니다.

 

표제: 백성 앞에 세울 법규(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기 위해 법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단순히 감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1)

 

이후에 제시될 법들이 단순한 인간의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법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법이 가지는 신성한 출처와 권위를 강조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이 법규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일환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남종에 대한 규례(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 아닌, 사랑으로 선택한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단순한 의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발적이고 기쁨 넘치는 반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3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2-6)

 

히브리 종의 섬김과 해방에 관한 규정을 다룹니다. 히브리 종은 6년 동안 섬긴 후 7년째에 자유롭게 풀려나며, 만약 종이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과 남아 있기를 원할 경우, 그는 평생 그 집에서 섬기게 됩니다.

 

(1) 남종의 근무 기간(2)

 

우리는 종의 규례에서 히브리 종들이 단순히 노예가 아니라 언제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신분으로 일정기간 고용된 사람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결정으로 그들은 종신 노예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법은 남종과 여종의 경우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 남종은 6년간 주인을 섬긴 후 7년째에는 아무런 조건과 대가 없이 자유인의 몸이 됩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7년 주기의 안식년과 무관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7년 주기의 안식년에 종을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안식년에는 종의 해방은 없으며(희년에 모든 종이 해방됨) 빛의 탕감(신 15:1-2)과 토지의 휴경(출 23:10-11; 레 25:2-7)이 명령됩니다. 신명기 15:18은 종으로 인해 받은 복을 기억하라면서 그를 기쁘게 풀어줄 것을 권합니다. 덧붙여, 만일 그를 자유민으로 내어주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2) 남종의 사면 규정(3-6)

 

총각 신분으로 종이 되었으면 혼자 나가고 부부가 함께 종으로 들어왔으면 함께 나갑니다(3). 그러나 미혼인 상태에서 종이 되었다가 주인의 주선으로 가정을 꾸리면, 그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으므로 홀로 나가야 합니다(4). 그러나 그 종이 상전을 사랑하고 또한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주인의 종신 노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5-6).

그 경우 ‘하나님 앞에’(“재판장”), 즉 아마도 성전에 올라가 자유 포기를 선언한 뒤, 귀를 뚫어 주인의 소유권을 표시하였습니다. 문이나 문설주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었는데, 그곳을 성전의 문이나 문설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신명기에서는 그 행위가 주인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신 15:17). 아마도 그 특이한 행위는 그가 주인의 집에 소속됨을 표시하는 절차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와 마찬가지로 그런 행위가 주인의 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현재 노예 규정의 법 정신은 주인의 공정한 재산권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비심이 많은 어떤 주인은 종에게 아내 될 여자를 줬다 하더라도 가족 전체를 해방시켜 주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법을 넘어선 자비의 실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은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는 비인권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언제나 율법의 토대는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 법적 조항들은 사회적 정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였을 뿐, 법 자체가 사랑의 자발적 실천을 이끌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구약 율법 곳곳에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자비와 구제의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적 강제력은 없었으나, 율법의 근본 정신에 의거한 강한 호소와 권면이었습니다.

예컨대, 추수 후 밭에 떨어진 이삭들을 남기고 모퉁이의 이삭들을 남겨 놓으라는 법적 조항은 구체적인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레 19:9-10). 이것은 밭주인의 재량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율법의 근저에 놓인 자비의 정신을 더 철저히 실천하려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관례적 기준보다 몇 배의 이삭들을 떨어트려 놓곤 했습니다(예. 룻 2:15-16의 보아스의 선행). 이런 점에서 구약 율법은 결코 냉정하고 삭막한 법이 아니라 자발적 선행과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는 법이었습니다.

 

여종에 대한 규례(7-11)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사회에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사랑의 실천입니다.

 

7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8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9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10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11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7-11)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종에 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여종으로 팔린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종으로 팔린 여자가 주인의 아내로 삼아졌을 경우, 주인은 그녀의 의식주와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만약 이 권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 여종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1) 여종의 근무 기간(7)

 

아버지에 의해 종으로 팔려온 여자에게는 남종과 다른 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7년 혹은 다른 근무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종의 아내일 때는 남편과 동일한 규정을 따른 사실을 볼 때(3), 또한 신명기 15장의 다른 종류의 여종에 대한 법을 볼 때, 여종의 신분은 순수한 몸종이 아닌 첩의 신분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음을 뜻하는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8)에서 확인됩니다.

 

(2) 사면 규정(8-11)

 

여종에 관한 규정과 신명기 15:12-18에 있는 노예 규정과 상충되어 보입니다. 거기서는 여종의 경우도 남종과 마찬가지로 7년째에는 자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비평학자들은 신명기 법이 후대에 더 윤리적으로 발전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티게이(Tigay)가 말한 대로, 양자는 서로 다른 사례를 다룹니다. 현재의 법에서 말하는 여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첩으로 팔려간 몸종’이며, 신명기 15장은 순전한 몸종으로 팔린 나이 든 여자의 경우입니다. 이렇게 팔려간 첩/여종은 권리를 가진 주인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거나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동침 전, 즉 혼인 관계로 들어가기 전이어야 할 것이다). 이때 주인은 그녀의 몸값이 지불되면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8).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속량하였습니까? 그녀 스스로 몸값을 지불할 수도 있으나, 아마도 제3자가 그녀의 몸값을 지불한 후 자신의 아내 혹은 첩으로 데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그 주인이 아들 중 한 명과 혼인을 시켜 며느리로 삼아 딸처럼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9). 하지만 주인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언약 공동체 밖의 타국인(암 노크리)에게 그녀를 팔아넘겨선 안 됩니다(8).

만일 주인이 다른 첩을 맞아들인다면, 그는 먼저 들어온 첩의 세 가지 권리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의복, 음식, 남편과의 잠자리. 어떤 주석가는 음식(쉐에르)은 모든 육체적인 필요의 공급을, 의복(케수트)은 옷 이상의 ‘첩의 증서’ 역할을, 잠자리(오나)는 단순한 성생활이 아닌 자녀 출산권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주인은 몸값 지불 없이 그녀를 무조건 풀어줘야 했습니다.

하갈의 경우를 볼 때(창 21장), 주인은 오히려 그녀에게 넉넉한 여비를 챙겨줘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른 이스라엘 남자에게 몸값을 받고 시집갈 수 있었기에, 아마도 언제든 재혼의 기회는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노예 제도와 같은 구약 율법은 비인권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경의 노예법은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몸종의 신분을 선택하는 제도였습니다. 주로 극단적인 궁핍에 처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았습니다. 한순간에 사업이 몰락하면 그 사람은 잠정적으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잠재적 자유인으로서 권리를 간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또한 주인들도 종들을 학대하고 억압해선 안 되었습니다. 율법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것을 기억하여 종들을 학대하지 말고 넉넉히 필수품을 제공하고 후하게 대할 것을 권면하고 경고합니다(레 25:53-55; 신 15:12-15).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정의롭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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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0-02)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스라엘

출애굽기 20장 18-26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모세의 인도로 산기슭에 모여 하나님께 직접 십계명을 들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씀 전달의 중재자로 나서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강림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말씀, 곧 ‘언약서’라 불리는 언약 법전(20:22-23:31)이 주어집니다. 십계명이 부여된 후, 모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18-21)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분은 또한 경외와 존경을 받아야 할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18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18-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하며 모세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모세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백성들은 멀리 서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1) 두려워하는 백성들(18-19)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듭 드러내신 것을 열 재앙과 홍해 도하를 통해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이 얼마나 두려운지 경험합니다. 산 정상과 그들이 서 있던 장소 간에는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시내산 위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강림에 나무가 흔들렸고 땅이 요동쳤습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도 그 임재 앞에서 다리가 떨리며 오금이 저립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세에게 간곡히 중재를 요청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십시오. 우리가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입니다”(19). 간청을 담은 히브리어 문장의 뉘앙스는 매우 애절합니다. 동시에 화자(話者)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의지법동사(cohortative)인 “우리가 들으리이다”(니쉬마아)에서는 말씀을 경청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중재자 모세의 격려와 시험(20-21)

 

모세는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왜 강림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오신 것이며, 그분을 두려워하여(경외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험’에 관해 어떤 사람은 ‘시험하다’의 동사 ‘나소트’를 ‘(두려운 영광을) 경험케 하다’ 혹은 ‘단련시키다’로 해석하자고 제안합니다. 필자는 르비딤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17:1-7),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불평을 터트리며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시험한 반면, 하나님께서는 장엄한 현현과 능력을 보여주시며 그들의 순종 약속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와 경고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계선을 지키고 두려워하며 모세를 통해 응답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19). 백성들의 강력한 중재의 호소를 들은 모세는 백성을 멀리 두고 흑암, 즉 먹구름 속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21). 중재자 모세의 역할이 더욱 중대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려움’(야레)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공포심과 경외심입니다. 해밀턴은 두려움의 감정적 측면과 의지적 측면을 구분합니다. 백성들은 감정적 두려움은 버리고 의지적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두려워한 것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적 공포심이라면, 순종의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은 의지적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현현과 십계명을 반포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은 백성에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여호와 경외는 계명 준수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진정 두려워해야 합니다.

 

언약서의 서론적 명령들(22-26)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며, 어떤 다른 우상이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 예배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세상의 다른 가치나 우상들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로, 외적인 요소보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25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흙으로 단순한 제단을 쌓아 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제단을 장식하거나 계단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는 예배의 외형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22-23)

 

모세가 받아온 것은 ‘언약서’, 즉 언약의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최초로 율법들을 모아놓은 법전인데(20:22-23:33), 그 공식 명칭이 24:7에서 “언약서”로 명명됩니다. 이 언약서의 법들이 하나씩 나열되기 시작합니다. 언약서의 첫 번째 지시는 우상 제작 금지와 합법적인 토단과 돌단의 제작 규정입니다. 이것은 십계명과 더불어 언약 백성에게 최초로 주어진 용법들입니다. 의미 있게도 언약서는 십계명의 제1, 2계명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언약서의 율법들은 십계명이 여러 분야에 확장되어 적용된 것들임을 암시합니다. 한편, 금과 은으로 제작한 신상들이 금지되는데(23),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나오는 황금 송아지 제작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2) 토단과 돌단의 규정(24-26)

 

● 토단과 돌단의 정체

여기서 제단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선, 성막(성전)의 제단이 아닌 이 제단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구약은 여러 곳에서 이런 합법적인 제단들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출 20:23-26; 레 26:31; 신 27:4-8). 분명 현재의 토단과 돌단은 조각목과 놋으로 제작한 성막/성전의 제단이 아닙니다(출 25:1-8). 한편, 제단 형태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토단과 돌단이 별개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돌단은 토단에 돌이 섞인 형태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7:4-8에는 돌단만 나타나고 토단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토단/돌단과 신명기의 돌단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잠정적인 임시 제단으로 보이지만, 신명기는 분명히 에발 산에 짓도록 명령된 고정되어 있고 규모가 있는 공적인 돌 제단입니다. 따라서 토단과 돌단은 별개 양식의 제단이었을 것입니다.

 

● 자연석이 사용된 제단

토단과 돌단이 별개였든 혼합된 형태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다듬은 돌, 정으로 손질한 돌이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가나안의 제단 형식이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하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가나안의 제단들도 자연석 그대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 여호와 앞에 바쳐지고, 원형이 보존되는 것을 가치 있게 보는 사례들이 자주 나타난다. 첫 열매와 첫 새끼의 헌물, 멍에를 메지 않은 소(민 19:2; 신 21:3: 삼상 6:7), 처녀성의 간직, 흠 없는 짐승들, 아마도 제단을 위한 자연석의 요구는 이러한 신학적 배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화려했던 성막/성전과 달리 토단/돌단은 매우 단순하고 간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여호와의 제단이든 '내 이름을 기념하는 그곳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24절).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는 화려하고 장엄한 제단과 초라해 보이는 제단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 제단의 계단 구축 금지

층계로 제단에 오르지 말라는 명령에는 충계 구축 금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26):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성막(성전)에 설치된 제단을 오를 때와 내성소 안에 입장해서 직무를 수행할 때 제사장들이 속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나타납니다(출 28:42-43;레 6:10). 이것은 직무 중에 무심코 발생할 수 있는 하체 노출이 여호와를 욕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이 제단에서 내려온다는 진술들이 등장합니다(레 9:22). 이것으로 볼 때, 제단에 계단이 아닌 경사로가 마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43:17은 종말론적 성전에서 제단의 “충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라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성전에는 그 외에도 여러 계단들이 존재하는 등(겔 40:22,26,31,34,37,49)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는 성전 내에 층계 시설물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일단 이것은 전혀 달라진 성전 모형의 설계 도면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성전 도면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심과 순수한 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단순하고 겸손한 제단에서 예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배는 외형보다 마음의 정결함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 겸손하고 순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한 바른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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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20-01)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출애굽기 20장 1-17절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우리나라 헌법의 첫 조항들입니다. 헌법은 국가를 운영하는 모든 방법이나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법규의 기본이 됩니다. 헌법이 흔들리면 국가가 무법상태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열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 본문에서 시내산 도착 후 첫 번째로 주어지는 율법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모판이었으며, 세 가지 이유로 다른 모든 율법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반포된 모든 율법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백성들의 귀에 들리게 주셨으며, 또한 이후의 모든 모세 율법들(출애굽기 신명기) 중에서 가장 먼저 주어졌고, 돌판에 기록되어 법궤 안에 안치된 유일한 율법입니다.

 

십계명의 서론(1-2)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지도하고 변화시키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따를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자유와 구속을 제공하신 구속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경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1-2)

 

십계명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나는”으로 시작하고 이스라엘을 단수 “너”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단수 ‘너’는 십계명이 공동체의 질서와 삶을 위한 규약이면서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들이었습니다. ‘종들의 집’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애굽 땅에서 당했던 고통을 잘 표현해줍니다. 해방된 그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삶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은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그들을 위한 새로운 헌장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네 가지 계명(3-11)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소유, 성공, 권력 등 다른 것들에 우상을 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계명은 우리가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영적으로, 진정으로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유지하며,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기를 요구합니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3-11)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자신만을 경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켜 일곱 번째 날에는 일을 쉬고 거룩히 여길 것을 지시하십니다.

 

(1) 형상 금지와 이름 남용의 경고(3-7)

 

첫째 계명은 두 왕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주의 왕, 유일하신 창조주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거짓이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아래에서 애굽에서 숭배하던 황소 형상을 만들어 여호와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혹독한 벌을 받았는데도 우상숭배 본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의 신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가나안의 신들은 온갖 풍요와 때에 맞는 비를 내리는 다산의 신이요 번영의 신이었습니다. 황소도 여호와로 간주해 숭배했으며, 후대로 갈수록 아람, 시돈, 모압, 암몬, 블레셋 신들까지 수입해서 섬겼습니다(삿 2:13, 10:6; 삼상 7:3; 왕상 11:33;23:13).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일월성신까지 받아들였습니다(대하 33:3,5). 십계명을 따라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언약의 땅이 만국 신들의 종합 전시장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첫째와 둘째 계명을 엄중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금송아지 사례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아무 형상으로든 만들어 섬기면 즉시 가짜 하나님, 우상이 되고 맙니다. 나아가 모든 형상화된 신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모두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 숭배를 질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정서에서 ‘질투’는 너그러우신 하나님께 매우 안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이는 부부간의 정절을 파괴할 때 배우자가 분을 일으키는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심지어 질투가 없다면 애정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구약 본문들이 우상숭배와 다른 신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삼사 대까지 이어지는 죄의 앙갚음과 천대까지 장구한 은혜가 이어지는 순종의 대가가 대비됩니다(5-6).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개인의 책임과 공동의 책임 둘 다 이야기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죄에 대한 징벌이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각기 자기 죄로 망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 이어 징벌을 받는 이유는 자신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명기 24:16이 분명하게 진숱하고, 예레미야(렘 31:29-30)와 에스겔(겔 18:1922)이 재차 확인해줍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길을 거부하고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떠난 히스기야, 아몬의 아들 요시야.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고라의 아들들일 것입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습니다(민 26:9-11). 아버지는 망했으나 아들들은 놀랍게도 영광스러운 믿음의 가문을 세웠습니다. 고라의 후손에서 사무엘이 탄생하는가 하면(대상 6:34-37), 성전 음악을 비롯한 주요 직무를 맡고 시편의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대상 9:19;20:9). 반대로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신실한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패역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망하고 자기 순종으로 복을 받습니다. 동시에 죄에 대한 공동 책임 원리는 구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 원리는 수직적으로 세대 간에도 적용되어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레 26:40). 그리고 수평적으로 당대의 범죄에 대해 이스라엘은 항상 공동 책임의 짐을 졌습니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제외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가혹해 보이겠지만, 죄의 독성은 모든 세대와 계층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온 땅이 부패했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무론노소’하고 음란했습니다. 부패한 연못은 물고기 개체를 무력화합니다. 결국 물고기 전체가 같은 운명에 처합니다.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7). 이것은 그분의 이름이 함부로 남용되거나 오용되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들어올리다’는 말을 할 때, 특히 맹세, 예언, 기도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입술에 ‘갖다 붙이는’ 행위를 지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특히 맹세와 서약에서 경솔히 거짓되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2) 안식일 준수(8-11)

 

넷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 계명은 이중적인 준수 명령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십계명은 그날 노동을 금하고 쉬라는 명령을 창조에 연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 후 7일째에 쉬셨으니, 사람도 이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반면에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계명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거기서는 안식일 준수를 출애굽의 구원 사건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나 양자가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토대로 안식일 정신을 구원 사역으로 더 확대한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12-17)

우리의 삶은 인간 관계와 도덕적 삶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가정의 신뢰를 지키고, 정직하게 살며, 진실을 말하고, 탐욕을 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이 계명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살인하지 말라 14간음하지 말라 15도둑질하지 말라 16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12-17)

 

본문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금지하며,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계명들은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와 도덕적 행동을 강조합니다.

 

(1) 효도, 살인, 간음(12-14)

 

인간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 중에 위의 세 가지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의 히브리어 ‘키베드’의 원뜻은 ‘무겁게 하다’입니다. 이것은 21:17의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일지니라’라는 명령에 나오는 ‘저주하다’와 대조됩니다. ‘저주하다’의 히브리어 ‘칼랄’의 원뜻은 ‘가볍게 여기다’입니다. 이 두 동사는 효도와 불효에 대한 매우 적절한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살인”에 사용된 동사 ‘라짜흐’는 고의적, 비고의적 살인 모두에 사용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 잘 반영한 것처럼, 이것은 면책이 가능했던 과실치사가 아니라 모살(murder)입니다. 한편, 간음죄는 결혼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다. 즉, 배우자의 부정을 금하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에는 당연히 언약 백성에게 금지된 성관계들(레 18, 20장), 즉 강간, 동성애, 아내 외의 여자들과의 성관계(처녀나 창녀를 포함), 근친상간 등의 금지가 전제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행위는 그에 준한 책임과 징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2) 도둑질, 거짓말, 탐욕(15-17)

 

마지막 계명은 도둑질, 거짓말, 탐욕 금지인데, 탐욕은 약간 난해한 문제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내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생각을 어떻게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까? 분명 히브리식 사고에서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인간의 탐욕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70인경(LXX)은 “탐내지 말라”를 ‘우크 에피투메세이(ουκ επιθυμησει)’로 번역했습니다. 야고보는 이 동사에서 나온 명사인 ‘에피투미아’를 사용하여 ‘욕심이 죄를 잉태한다’고 경고합니다(약 1:15). 이것은 마음에 품은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소중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우상을 버리며, 그의 이름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금하고, 탐욕을 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 계명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정직하고 평화롭게 하며, 그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속에서 이 계명들을 실천하며, 그분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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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9-02)


언약 체결을 통한 축복

출애굽기 19장 14-25절


 

청와대 방문은 신분증 지참, 음식물 반입 금지, 제한된 사진 촬영 등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도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특히 대통령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처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준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에게 만나시고자 합니다. 시내산에 내려오셔서 언약을 체결할 준비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에게 성결하게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백성들은 순종하여 하나님과 대면할 준비가 끝나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십니다. 그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만남을 성결 준비(14-15)

성도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한 만큼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3일 동안 준비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준비하고 만나십니까? 신랑이신 주께서 보시기에 흡족히 여길 만큼 성결로 단장한 신부로 준비되었습니까?

 

14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15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니라(14-15)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후에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맺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준비를 하도록 지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압도적인 초자연적 현상으로 백성들을 두려워 떨게 하시고, 모세를 통한 직접적인 음성 경고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백성들은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옷 세탁, 부부간의 잠자리를 삼가는 것. 여기 목욕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위기의 정결 절차에서 목욕은 옷 세탁과 더불어 기본 사항입니다(레 14:8-9; 15:5-11). 그러나 레위기 내에서도 동일한 부정결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는 정결 절차인데도 목욕에 대한 언급 없이 옷 세탁만 언급된 경우가 많아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1:25, 28과 17:15에서 부정한 짐승의 사체 접촉 시 전자는 옷 세탁만 요구하지만 후자는 목욕까지 요구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목욕’이 기본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봅니다. 현재의 본문에서는 확정할 수는 없지만 목욕도 요구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합니다. 레위기 15장의 유출 규례에 의하면, 남성의 정액 유출과 여성의 자궁 출혈은 자연스런 생리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도 정액 유출로 저녁까지 부정하게 만듭니다. 여성의 경우 출산 후 자궁에서의 피의 유출이나(레 12장) 정기적인 생리나 비정상적인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레 15장)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피는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창 9:4,5; 레 17:11,14; 신 12:23). 남성의 경우 성기에서의 정액 유출과 비정상적인 비뇨기 질환 증상에 의한 분비물 유출이 부정하게 여겨지는데, 이 역시 ‘생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액은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분비물은 정액이 썩어서 유출되는 것으로 간주 되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와 정액의 유출은 생명의 액체의 유출이며, 이것이 몸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포함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인해 인간의 몸과 자연의 원래 창조 질서가 어긋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액이 부정결을 유발하기 때문에 성소에 올라갈 때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부부간의 성관계나 정액의 유출이 금지되었습니다(신 23:10-11; 삼상 21:1-6). 성 자체는 결코 더럽지 않고 하나님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오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집중하여 나아갈 때는 일시적으로 성적 절제가 요구되었습니다(참조. 고전 7:5).

 

하나님을 맞는 백성들(16-19)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와 기도, 말씀 묵상에서 하나님을 대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까?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준비된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상의 작은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엄을 기억하며, 그에 걸맞은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의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6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6-19)

 

셋째 날 아침에 천둥, 번개, 짙은 구름,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울리며 시내산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산이 크게 흔들리고,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나팔 소리는 점점 커지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1) 신현 현상들과 백성의 회집(16-17)

 

셋째 날 아침,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자신의 장엄한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하십니다. 16절과 18절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동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레와 번개와 짙은 구름, 그리고 나팔소리입니다(16). “빽빽한 구름”은 자욱한 연기와 같다고도 하고, 나중에는 “흑암”(20:21)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자연의 구름이 아닙니다. 그 구름 속에서 신적인 불이 발하고 있으며 역시 자연현상의 불이 아닙니다(18). 이 초자연적인 구름과 불은 전형적인 하나님 임재(신현)의 대표적인 징표입니다. 그 외에도 광채, 바람, 진동, 나팔 소리와 같은 현상이 동반되기도 합니다(출 16:10; 19:16; 24:16-17; 40:34; 신 5:4; 왕상 8:11).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이런 압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백성들은 산에 가까이 가기는커녕 각자의 텐트에 머물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16). 그러나 모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진에서 이끌고 나온 뒤, 그들을 산기슭에 집결시켰습니다.

 

(2) 신현의 현상들과 하나님의 음성(18-19)

 

18절에 묘사된 시내산의 모습은 마치 화산을 연상시킵니다. 이로 인해 시내산이 화산이었을 것으로 보고 그 위치를 추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 시내산이 어디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최근 몇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오즈 산이 부각되고 있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그런 주장의 왜곡과 과장, 오류를 지적하면서 라오즈 산이 시내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무덤과 더불어 시내산 위치를 감추셨기 때문에, 위치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연기(구름)와 불은 하나님 현현의 전형적 현상입니다. 또한 더햄(Durham)이 말한 대로 “옹기 가마”의 연기는 화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불같은 용암이 위로 솟구치며 연기를 뿜어내는 화산과 달리, 옹기가마는 불이 아래에서 붙고 연기가 위로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화산과 정반대로 옹기가마처럼 연기구름 속에서 불이 아래로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하나님께서는 신적인 소리를 발하여 모세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현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날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을 채웠고, 혀처럼 갈라지는 강력한 불이 그들에게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시내산(20-25)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준비가 부족하거나 경외심이 결여된 부분이 있습니까? 기도와 말씀 묵상, 예배 준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더욱 신중하고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일 예배 전에도, 개인적인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합시다.

 

20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3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5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20-25)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시자 모세를 불러 산으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이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경고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모세는 이 명령을 전달하러 내려가 백성에게 알립니다.

 

(1) 모세에게 하달된 조치와 경고(20-22)

 

20절에서 모세가 다시 시내산에 오른 것이 진술됩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입산과 하산이 몇 차례 진행되었는지는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되는 난제입니다. 21-22절에서 대조되는 동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밀고 들어오다’(하라스)와 ‘칠까 하노라’(파라츠)입니다. 둘 다 어떤 것을 무단 침범하여 파손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치실 것’입니다. 둘째로, ‘가까이하다’(나가쉬)라는 동사입니다. 여인에게 가까이하는 것은 성관계를 의미하나,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성소의 직무를 의미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의 직무자로서 몸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앞서 12-13절에서는 경계를 침범한 사람을 백성들이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십니다. 그러나 2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을 치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22). 이 둘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마 경계선을 넘은 사람에게는 백성들을 매개로 하나님의 심판이 가해지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시와 임재가 그대로 노출된다면 인간과 피조물은 파멸합니다. 마치 화염이 나비를 죽이는 것처럼 소멸될 것입니다.

 

(2) 모세의 답변과 반복된 경고(23-25)

 

여기서 다시 위에서 대조되었던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면서 재차 경고가 전달됩니다. 시내산은 거룩한 곳입니다(23). 그 산은 성막 건설 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아무 때나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됩니다. 광야에서 백성이 성막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막 바로 앞에 제사장들이 거주했고(민 3:38), 성막 사방 주변에는 레위인들이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민 1:50). 만일 어떤 사람이 무단으로, 즉 제사나 제의적 목적이 아닌 불법적으로 성막에 들어오면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그 사람을 죽여야 했습니다(민 1:51; 3:38). 마찬가지로 만일 백성들이 경계를 침범하여 시내산 성전에 무단 침입하여 ‘훼손한다면’(하라스), 하나님께서 즉각 그들을 치실(파라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임재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외심을 심어주시고, 그분의 거룩함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철저한 준비와 경계가 필요하며,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온전히 준비된 마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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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9-01)


시내산 언약체결을 위한 준비

출애굽기 19장 1-13절


 

결혼식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순서는 바로 '서약'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하나님과 모든 증인들 앞에서 부부로서의 약속을 하는 이 순간은 그들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확립하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언약식을 준비하십니다.

 

  •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시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해 먼저 거룩함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도입 : 시내산 도착(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언약을 준비하셨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려 하십니다. 언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중요한 약속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그분의 뜻을 따르고,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으며 신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1-2)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 생활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라운 기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지 3개월 만에 언약의 장소인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르비딤에서 역사하시고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시내산으로 백성들을 안전하게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12에서 이미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탎출한 뒤 한 달 반 정도 여행한 끝에 제3월, 아마 3월 1일에 하나님의 산, 곧 시내산에 당도했습니다.(유대 전통에서는 3월 6일).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3-9)

성도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분의 말씀은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3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7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8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3-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불러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울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과 구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살펴보면서, 이 시간 이후에 대한 약속을 세우십니다.

 

(1) 모세의 등산과 하나님과의 대면(3)

 

모세가 시내산을 오릅니다. 그가 정확히 몇 차례 산을 올랐는지는 모호합니다. 19장에서만 해도 3절에서 올라갔다가 7절에서 일단 내려와서 장로와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올라갔다는 기록 없이 8b절과 9절에서 다시 빽빽한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후 14절에서 다시 내려옵니다. 20절에서 또 시내산에 오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때로 시간 순서와 내용의 연결이 무시되면서 사건들이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언약 예고(4-6)

 

① 독수리 날개로 업으심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4)은 열 재앙과 홍해 도하입니다. 그 기적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여정에서도 기적적인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동행하셨습니다. 그것을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보살피는 것에 비유하십니다(참조, 신 32:11). 이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행동과 관련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둥지에서 떨어뜨려 스스로 날도록 훈련합니다. 제대로 날지 못하고 버둥거리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잡아채 자신의 날개에 태웁니다. 이는 완벽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우화적 비유입니다. 사람이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와 막막하고 거친 광야를 횡단하여 시내산에 도착한 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보물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언약 준수를 요청하십니다(5). 이 언약은 아브라함 및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그 언약에 부여된 모든 계명과 율법을(그러나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지칭할 수 있습니다(창 26:5). 그러나 또한 이것은 이윽고 체결하실 언약식에서 (24장) 백성들이 지켜야 할 십계명과 언약의 율법들을(20:1-23:33)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의 신분이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물’(세라)이 될 것이며,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세계와 열국이 하나님의 소유권 아래 있는 가운데(5),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헛된 신들 위에 있는 최고의 신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이 선택하신 열국 중의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창 12:1-3) 그들을 열국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사명을 감당할 민족으로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보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조건이 명시되나(5), 이것은 보물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준수해야 하는 순종의 삶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수리 날개로 업혀 온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이제 그들은 보배로운 삶의 준수, 즉 언약 준수의 의무를 지닙니다.

 

③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적 성격을 지칭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10절과 14절에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거룩케 하라’고 요구한 것에서 확인됩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로서 모든 삶의 분야에서 이방 민족들과 엄격히 달라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기본 직무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백성을 중재하여 그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제사장 나라로서 온 민족을 하나님께 중재하는 것입니다. 즉, 온 땅과 열국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이제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입니다(창 12:1-3).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신분과 사명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넘어왔습니다(벧전 2:9). 교회는 혈통을 넘은 영적인 12지파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약 1:1).

 

(2) 백성의 응답(7-9)

 

특별히 9절의 “빽빽한 구름”은 이집트를 떠난 직후에 백성들을 인도했던(출 13:21-23) 바로 그 구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구름이 이제 시내산에 머물러있습니다. 짙은 구름 속 하나님을 만난 후,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장로들(즉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담긴 모든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하고 모세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독대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9).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이제 짙은 먹구름 속에 숨으신 채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며, 또한 모세를 통해 자신의 일을 성취해나가실 것입니다.

 

언약식 준비(10-13)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그분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와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1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2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3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맞이하기 위해 성결하게 준비하라고 명령하시고, 그 경계와 규율을 지키도록 경고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앞에서의 경외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1) 성결 준비와 옷 세탁(10-11)

 

이스라엘은 제사장 백성으로 위임되기 위해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부부의 잠자리를 금하고 옷을 빨아야 합니다. 이때 옷을 빨 뿐 아니라 목욕도 했을 것입니다. 성결케 된 제사장들이 성전의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듯이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 그분께 제사장처럼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11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시내산에 강림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이미 임재해 계시는데 또 강림한다고 알리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정상 위에서 하늘 위를 오르락내리락하시는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2) 산의 경계 설정과 경고(12-13)

 

모세는 ‘주위에 경계를 정해야’ 합니다. 그 경계선이 실제로 어떻게 표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경계선을 그어 제한구역을 설정하고 엄정한 청결을 요구한 것은 마치 성전의 제한구역 출입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이야기해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몸과 마음을 씻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히 10:22). 함부로 경계선을 넘은 사람뿐 아니라 심지어 짐승까지도 돌로 치거나 화살로 쏘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13). 아마도 백성들이 위반한 사람을 경계선 밖에서 돌로 쳤으며, 짐승은 화살로 쏘았을 것입니다. 송장이 거룩한 영역내에 있게 되는 결과를 낳지만, 아마 그 자리에 돌무덤이 만들어져 부정함은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특별한 언약을 위해 그들을 성결하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 경외심과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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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8-02)


장인 이드로의 지혜로운 충고

출애굽기 18장 13-27절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만 합니다.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유익을 주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로운 말을 귀에 담고 그것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갔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출애굽 이후에 현실적으로 문제들이 발생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재판을 받는데, 너무 많은 재판으로 기진한 것을 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재판관을 세워 재판 업무를 나누라고 조언합니다. 지도자인 모세는 이 충고를 따릅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모세(13-16)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지도자나 책임 있는 자리는 단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자신의 책임을 넘어서서, 공정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드로의 조언은 우리에게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면서도, 적절한 시스템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13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14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15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16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7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18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13-18)

 

기쁨의 상봉이 있었던 다음 날, 이드로는 아침 일찍부터 백성의 일처리에 바쁜 모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드로는 모든 것을 지켜본 뒤 이것이 지혜로운 일처리가 아님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왜 모세가 홀로 재판을 하며 백성은 오직 종일토록 모세에게만 찾아오는지 물었습니다(2).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족속을 이끈 경험이 풍부한 지혜로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백성이 문제가 생길 때면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책을 찾기 위해(다라쉬, 묻기 위해) 모두 자신을 찾아온다고 대답합니다(15).

여기서 ‘묻다’, ‘찾다’라는 동사 ‘다라쉬’는 어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면밀히 탐문하며 따지는 것을 뜻합니다. 분쟁 당사자들이 이해관계가 다르고 사안에 대한 큰 입장차를 보이며 사실 관계를 따질 경우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양쪽 입장을 다들어 보고 판결을 내리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려주었습니다(16). ‘율례’(호크)와 ‘법도’(토라)는 원래 율법을 가리키는 용어들인데, 여기서는 판결의 규칙이나 기준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규범적 율법은 나중에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주어지므로(출 19-24장) 현재 그들에게는 그런 율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노아와 아브라함의 언약과 더불어 주어졌던 제한적인 구전 율법들이 전수되어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재판을 통해 가르쳐준 율례와 법도는 무엇보다 사법적 판결과 관련된 규정과 지침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드로가 조직개편을 제안(17-23)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지혜로운 조언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우리가 맡은 역할이 방대하고 복잡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조언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우리의 사역과 일상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체계적인 관리와 적절한 역할 분담이 필요합니다.

 

19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20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21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22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 23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19-23)

 

모세의 지도 방식은 지혜롭지 못했으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을 내놓을 생각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경험과 지혜가 풍부했던 이드로는 즉시 도내에게 조언을 하여 그로 하여금 과감한 조직개편를 시도하게 만듭니다. 이드로는 이 많은 백성을 홀로 진도하고 이끈다면 과중한 업무로 인해 백성과 모세 모두 탈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8). 이드로의 말대로 장정 60만 명 규모의 조직을 홀로 이끌 경두 도세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함으로 인해 백성들 또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의미입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우선 이드로의 조언을 진술하는 19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있으라.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라.”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수의 영역본처럼 그가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ESV;NTV NASB; RSV). 즉 모세는 하나님 앞에 백성을 대표하여 서 있는 가운데 백성의 제반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19). 그리고 송사 당사자들을 위해 판결을 내리고 그들에게 사법적 훈계와 지침을 경고하면서 백성이 마땅히 지킬 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20).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모세가 해왔던 일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과감한 조직개편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백성 가운데서 유능한 지도자들을 뽑아 중요한 직분을 부여하여 세워야 합니다. 그들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그리고 십부장입니다(21). 자격 조건은 첫째, 능력 있는 사람(이쉬 하일)이어야 합니다. ‘이쉬 하일’은 지도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셋째, 진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넷째, 권력을 남용하면서 백성을 갈취하여 불의한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일사분란하게 지도력이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서 적임자입니다.

사실 천부장을 비롯한 각 부장들의 1차적 임무는 사법적 역할보다는 군사적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천부장된 지휘관들’이 백성의 군사 행진에서 선두에 서서 이끌며(민 10:4), 싸움을 하러 전쟁터에 군사를 이끌고 나갑니다(민 31:14). 또한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으로 불립니다(민 31:48). 각 부장들은 군사적 임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조직개편의 목적에서 드러나듯이 백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재판하는 사법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백성들 또한 이 직책에 맞추어 단위별로 숫자가 분배되어 일사분란하게 통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안의 중요성을 따라 사소한 문제들은 각 부장들이 처리했으며, 중대하고 처리하기 까다로운 분쟁과 송사만 모세에게 직접 가져왔습니다(22). 무엇이 사소하고, 무엇이 중대한 문제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스스로 지혜롭게 판단하며 일을 처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중한 업무의 짐을 나눠지게 된 이 조직 개편으로 인해 모세의 어깨는 가벼워졌으며, 백성들 또한 체계적인 일처리에 평안을 느끼며 크게 만족스러워했습니다(23).

 

모세의 조직개편과 이드로의 귀향(24-27)

우리는 지혜로운 지도력과 효과적인 조직 개편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과중한 책임을 혼자 지려 하기보다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고, 능력에 맞는 역할 분담을 통해 공동체의 효율성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우리의 사역과 책임을 잘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4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25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26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 27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24-27)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과감히 조직개편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백성 중에서 지도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세워진 지도자들이 백성을 효율적으로 재판했으며, 해결이 쉽지 않은 중대하고 까다로운 문제는 상위 재판정의 수장인 모세가 직접 판결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모세는 중대한 일들을 직접 판결합니다. 신성모독죄를 범한 사람을 판결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레 24:10-26),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며(민 15:32-36), 슬로브핫의 딸들의 땅 상속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해결합니다(민 27:1-11; 36:1-11). 한편, 모세의 조직개편은 나중에 민수기에서 한 차례 더 실행됩니다. 그때는 백성의 반복되는 불평으로 인해 모세 홀로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연륜 있고 지도력을 갖춘 70장로들이 공식적으로 인선됩니다(민 11:10-17). 물론 앞서 이미 장로들이(출 3:16,18;4:29;12:21; 17:5,6;18:2), 또한 70장로들이(출 24:1,9)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거기서 장로직이 공식적인 직책으로 세워집니다. 여기서는 부장 체제의 군사적-사법적 조직개편이 이루어졌으나 거기서는 장로 체제의 행정적 조직개편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개편이 마무리된 후, 모세는 장인 이드로를 그의 거주지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결별이 아닙니다. 이드로의 거주지는 현재 모세가 머물고 있는 호렙 산 일대에서 멀지 않은 곳이 분명합니다. 이윽고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하여 거기에 정박할 것인데, 그들은 1년간 그곳에 머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날 때, 모세는 다시 장인 호밥, 즉 이드로를 찾아가 자신들과 동행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민 10:29). 그러나 호밥(이드로)은 처음에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은 고향 땅친족에게 돌아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민 10:30). 그러나 모세는 호밥을 설득하여 동행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더불어 모세는 호밥이 합류하면 자신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릴 것이라고 장담하고 모세 또한 그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민 10:29,32). 민수기 기사는 여기서 끊기기 때문에 독자들은 호밥이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모세와 동행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호밥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보고하므로(삿 4:11), 호밥은 모세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들과 여행길을 함께 떠났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모세는 조직개편을 통해 백성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이 변화로 모세는 핵심적인 지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집중할 수 있었고, 백성들도 체계적인 관리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교훈으로 조직 내에서 역할 분담과 효율성을 중시하며, 하나님께 의존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드로의 지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공동체와 사역에 큰 교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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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18-01)


모세의 신앙고백을 듣는 이드로

출애굽기 18장 1-12절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 것과 역사해 주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간증에는 피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만 세우는 것이 바른 간증입니다.

 

  • 본문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을 찾아옵니다. 그곳에서 이드로는 모세에게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일에 대해 전해 듣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이드로의 반응을 보면서, 오늘날 성도들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지에 대해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와 장인 이드로의 상봉(1-5)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정의 회복, 그리고 그분의 계획을 따르는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루신 일들을 믿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가득 차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2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3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4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5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1-5)

 

이드로가 모세의 장인이지만 그의 장인이 르우엘과 호밥이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나는 이유로 혼란을 일으키는데, 이 문제는 3:1에서 충분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르우엘이란 인물은 장인이 아니라 이드로(호밥)의 아버지이며 이드로 집안의 가장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드로와 호밥은 동일 인물로서 모세의 장인으로 받아들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국가의 최고신이 존재하면서도 여러 신들이 숭배되고 타국의 신들도 유입되던 시대였기에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명성이 여러 국가에 알려진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심지어 발람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여호와가 어떤 이방인 사제들에게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숭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또한 여호와를 알았으며 신들의 하나로는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세의 간증에 대한 이드로의 반응과 고백, 그리고 그의 태도는 평소에도 그가 히브리인의 신 여호와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다신론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특히 양쪽이 우호적 관계일 때는 상대의 신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방인 신분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복을 비는 사례가 여러 차례 발견됩니다(창 14:18-20; 왕상 10:6-10; 대하 2:11-12).

여기서 모세가 십보라와 두 아들을 전에 장인 이드로에게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2). 앞서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지 않기에 독자들이 다소 혼란을 느끼지만, 모세에게 초점을 맞춘 출애굽기 저자에게는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앞선 피 남편 사건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생명이 위협받은 긴박했던 그 사건은 장남 게르솜으로 추정되는 아들에 대한 십보라의 긴급한 할례와 더불어 수습되었습니다(4:24-26). 이 사건 직후에 모세와 아론이 함께 애굽으로 떠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때 모세의 가족, 아내 십보라와 그의 아들들은 거기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십보라는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 이드로에게 돌아갔습니다.

모세가 언약 백성을 구하는 대업을 위해 애굽 땅으로 가기 전에 그의 가족이 먼저 온전한 언약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의 두 아들, 특히 장남 게르솜의 할례가 실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시면서 게르솜의 할례를 압박하셨으며 결국 십보라의 신속한 할례 집행과 더불어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이 긴급한 조치의 목적은 모세의 가족이 온전한 언약 백성의 자격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아 모세는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는 중에 피 남편 사건을 겪었지만, 이제 굳이 가족이 함께 애굽으로 동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바로와 애굽 백성과의 대결은 그의 가족을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어차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드로의 거주지에서 가까운 호렙산, 즉 하나님의 산으로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참조. 5).

따라서 십보라와 모세의 두 아들은 거기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2-3절은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재번역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단순히 이드로가 십보라와 함께 돌려보낸 두 아들을 모세로부터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드로는 자신의 딸 십보라와 그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받아들였습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비로소 이드로와 모세의 가족이 함께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나간다는 진술이 나옵니다. 한편, 모세가 ‘그녀를 돌려보냈다’는 표현에 대해(2) 흥미로운 해석이 제안됩니다. 히브리어 ‘쉴루헤하’가 신부 값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가족을 장인에게 돌려보낸 모세의 의도나 이후 이드로와 모세 가족의 합류를 고려할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입니다. 모세는 결코 십보라와 이혼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장인의 집에 맡겼을 뿐입니다.

또한 아마 ‘쉴루헤하’의 기본 의미는 ‘보냄’, ‘보내는 것’으로, 이 단어를 여기서 문맥과 정황에도 들어맞지 않게 ‘신부 값’으로 번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드로는 십보라와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고 있는 광야로 길을 떠났습니다(3).

첫째 아들 게르솜의 출생과 그의 작명 이유는 2:22에서 진술되지만,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출생 사실과 그의 작명 이유는 여기서 처음으로 진술됩니다(4). ‘하나님은 도움이시다’라는 엘리에셀의 이름 뜻에는 바로에게서 구해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모세의 간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드로는 광야의 ‘하나님의 산’에 도착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산은 조만간 19:1에서 도착할 시내산이 아닙니다. 이 산은 앞서 3:1에서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 불린 산, 또한 17:6에서 반석에서 물이 난 호렙산이 분명합니다. 해밀턴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산을 포함하는 넓은 산악 지역일 것입니다. 아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르비딤 근처의 하나님의 산 호렙 일대에 진을 치고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5).

 

모세의 간증과 이드로의 신앙고백(6-1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 인식은 단순히 지식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6그가 모세에게 말을 전하되 네 장인 나 이드로가 네 아내와 그와 함께 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네게 왔노라 7모세가 나가서 그의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8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매 9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10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11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12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6-12)

 

본문에서는 이드로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광야로 찾아옵니다. 이드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을 찬양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드로는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기뻐하며, 모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축하합니다.

 

(1) 모세의 가족 상봉과 간증(6-8)

 

이드로는 모세와 상봉한 뒤 인사를 나누고 그의 가족들을 그에게 인계했습니다. 모세는 예를 갖춰 장인에게 절을 하고 입을 맞춰 문안하면서 상봉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막사로 이드로를 모신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그에게 상세하게 간증했습니다(8). 모세의 놀랍고 감격적인 간증은 이미 모든 일을 소문으로 들었던 이드로를 더욱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2) 이드로의 신앙고백과 기쁨의 제사(9-12)

 

이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신보다 크신 여호와의 구원과 승리를 찬양했습니다. 그는 ‘이제 알았도다’라고 고백하면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히브리인 모세를 사위로 받아들였던 그는 이미 모세의 민족 신인 여호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고백인 ‘이제 알았도다’는 그의 여호와 신앙이 개종 수준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칩니다(12). 어떤 랍비 전승과 해석에서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를 불편해하면서 이 제사를 모세가 주도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문맥을 보면 제사장 이드로가 제사를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는 표현은 거기에 임시 제단이 설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이 바친 제물은 번제물과 희생제물인데,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제바흐’는 화목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것은 화목제의 목적에도 잘 부합하는 번역입니다.

원래 화목제는 모든 제사들을 다 마친 후 마지막에 마무리와 잔치의 제사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바치는 전적 헌신의 의미가 있는 반면(레 1,3,9장), 화목제는 주요 기름 부위들과 두 콩팥, 간엽을 떼어낸 뒤(레 3:3-4), 남은 고기를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나누는 잔치의 제사였습니다(레 7:11-21). 따라서 모든 예식과 행사를 마친 후 마치 뒤풀이나 피로연처럼 화목제 고기와 여러 음식을 먹는 것이 전통적인 제사법에 따른 규칙이자 관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드로의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깊은 감사와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온전한 인식을 가지고, 우리의 예배가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는 자리이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결단을 통해 그분의 뜻에 맞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매일 경험하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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