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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7-01)


하나님의 부르심과 순종의 능력

출애굽기 6장 14절-7장 7절


 

우리는 종종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동역자들과 함께 그분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협력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공동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 긴장을 일으킨 모세와 바로의 담판, 바로의 거절에 따른 모세의 좌절, 자신감을 상실한 모세의 하나님과의 실랑이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이 갑자기 중단됩니다. 대신 이스라엘 자손의 족보가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낙심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다시 주어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중간에 끼어든 이스라엘의 족보는 레위 지파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야곱의 장차남 르우벤과 시므온의 족보(14-15)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소홀히 하거나 욕망을 따를 때, 축복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다시 부르십니다. 감정과 분노가 통제되지 않으면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실패와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14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14-15)

 

본문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제시됩니다. 왜 갑자기 족보가 나옵니까? 왜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의 족보만 소개됩니까? 우선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들 중에 첫째부터 셋째까지만 소개됩니다. 장남 르우벤, 차남 시므온, 셋째 레위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로부터의 후손의 번성을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세 아들 외에 나머지는 생략됩니다.

이 세 아들이 과거의 행적 때문에 야곱의 예언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기에 함께 나열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아내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는 어머니 레아와 경쟁자인 라헬의 사망 후 라헬의 몸종 빌하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빌하를 더럽힌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장자권이 박탈됩니다(창 49:4).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자 과도한 복수로 세겜 사람들을 모두 학살합니다. 야곱은 과도한 분노와 잔혹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땅을 얻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창 49:5-7). 이로써 야곱에게서 먼저 태어난 세 아들에게 나란히 부정적인 미래가 예고되며, 이것이 지금 세 아들의 족보가 나열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 아들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인 암시도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의 족보는 민족의 위대한 영웅 모세와 아론의 조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태어난 세 아들의 족보만 소개된 것은 분명 셋째 레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결국 이 족보의 최종 목적은 위대한 사명을 받은 모세와 아론의 혈통적 배경을 소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족보(16-19)

우리의 사명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삶 속에서 그분의 축복을 경험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재물과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사명을 소중히 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6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16-19)

 

레위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게르손, 고핫 그리고 므라리입니다. 레위의 아들들과 후손의 계보는 아래 도표를 보라. 주목할 가문은 고핫입니다. 고핫의 계보를 통해 모세와 아론이 태어납니다. 족보에서 수명이 언급된 인물은 세 명뿐인데, 레위와 고핫, 아므람입니다. 레위의 나이 137세(16), 고핫의 나이 133세(18), 아므람의 나이 137세가 언급됩니다(20).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모세와 아론의 계보와 뿌리를 선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은 레위 지파의 고핫 가문에 속한 아므람의 아들들입니다.

 

레위 아들 고핫의 족보와 아론과 모세의 계보(20-27)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사명과 역할을 위해 각 가문과 개인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가정과 공동체에서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20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 26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0-27)

 

레위의 세 아들의 계보가 소개된 후, 그중 고핫의 아들 아므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아므람의 결혼은 주목할만합니다. 아버지 아므람은 “아버지의 누이”, 즉 고모인 요게벳과 결혼합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요게벳이 고모이므로 상당히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레위기 18:12은 고모와의 근친상간, 곧 결혼을 금지합니다. 따라서 레위기법을 기준으로 볼 때 아므람과 요게벳의 결혼은 삼촌 사이이므로 불가능하며, 그런 결혼은 사형의 중벌을 받았습니다(레 20:19). 그러나 모세 이전에는 삼촌 간의 결혼이 잠정적으로 묵인되고 있었으며 레위기에 와서야 다른 근친 관계와 더불어 그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구약의 족보에서 여성이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여기서는 아므람-아론-엘르아살로 이어지는 대제사장 계보의 아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대제사장 가문이 될 아론 가계의 혈통적 순수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특별히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이자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유다 지파의 딸이었습니다(민 1:7; 2:3). 유다 족속 암미나답과 그의 아들 나손은 훗날 보아스로 연결되면서 예수님의 족보로 이어집니다(룻 4:17; 마 1:4; 눅 3:33).

아론은 엘리세바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낳습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그리고 이다말입니다(23). 나답과 아비후는 훗날 제단에서 취한 불이 아닌 불법적인 ‘다른’ 불로 분향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불을 맞아 사망합니다(레 10장). 아론과 달리 모세의 후손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레위 지파는 성직으로 구별될 예정이며, 그중에서 아론 가문이 제사장 집안으로 선별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향후 유다 지파로 이양됩니다. 여기서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 손자 비느하스까지 등장합니다(25). 모세와 아론은 1세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2세대, 그리고 사사 시대에 비느하스는 제3세대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합니다(삿 20:27-28). 참고로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언급된 사사기 20장은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사시대 초창기의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핫의 계보에서 고라의 아들들이 또한 특징적으로 소개됩니다(24). 고라는 훗날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하는 반역을 주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땅에 매장되는 심판을 받습니다(민 16장).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결단을 내린 뒤 심판의 자리를 피하여 결국 아버지 때문에 무너질 수 있었던 가문을 영광스럽게 재건합니다(민 26:9-11).

고라의 후손에서 사무엘이 탄생하는가 하면, 성전에서 음악을 비롯한 주요 직무를 맡고 시편의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대상 9:19; 20:9). 고핫의 계보에서 출생한 아므람의 두 아들 아론과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주어집니다(26). 여기서 족보에 이어진 그들의 사명과 관련해서는 형 아론이 먼저 언급됩니다. 이제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 인물이 바로 이 두 사람 모세와 아론입니다(27). 이와 같이 그들의 역할과 임무와 관련해서는 모세가 먼저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와 아론(6:28-7:7)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부르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서서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인간의 힘이나 능력은 초월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28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2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30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7: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7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6:28-7:7)

 

이 단락은 앞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의 재진술입니다. 모세의 부름과 그의 거절 및 변명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실랑이가 다시 한번 반복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은 앞서 있었던 상황에 대한 요약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요소가 발견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내 군대, 내 백성”을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군대’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바로와의 협상은 애굽과 하나님 백성 간의 전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완고하여 백성을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세와 아론의 나이가 언급됩니다. 모세는 80세고, 아론은 83세다. 형 아론이 향년 123세의 나이로 출애굽 40년 5월에 호르 산에서 죽고(민 33:39), 모세는 같은 해에 120세의 나이로 느보 산에서 죽습니다(신 34:5). 아마 해가 바뀌기 직전인 제40년 12월로 추론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순종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의 순종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끌어낸 것처럼, 우리의 작은 순종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큰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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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6-02)

 


다시 소명을 받는 모세

출애굽기 6장 14-3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실패와 실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사명을 수행할 때 종종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통해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명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 모세와 아론의 족보입니다. 르우벤과 시므온 자손을 간략히 소개하고, 레위 자손은 집중적으로 소개합니다. 아므람은 레위의 아들 고핫의 아들로,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장차 제사장 계보를 형성할 아론의 자녀들도 언급합니다. 출애굽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모세와 아론입니다.

 

이스라엘 가족의 족보(14-25)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과거를 되짚어 보면 그때도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과거를 뒤돌아볼 때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출애굽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애굽 땅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4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 16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20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14-25)

 

본문에는 있는 이스라엘 족보는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족보 속에도 하나님의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족보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어른들은 이러했다’고 시작합니다. 조상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야곱과 함께 70여명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가게 된 과정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지만,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합니다.

야곱의 아들인 르우벤(14)과 시므온(15), 레위의 족보(16)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족보를 거론 하면서 르우벤과 시므온 지파의 후손들을 먼저 거론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의 선조인 레위를 언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서 기록한 순서는 나이나 출생 순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주어지고 있음에 유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세 지파의 족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론과 모세가 출애굽을 주장하는데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이상 종살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정체감 다 잊어버려서 누가 지도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노동에 필요한 공사감독자들은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출애굽을 주도하면서 큰 민족 공동체에 주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치 추천서를 모세와 아론의 손에 들린 것과 같습니다. 그 지도자들이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떤 집안사람인지에 대한 밝히 보여준 것입니다.

우선 르우벤에게는 네 아들, 시므온에게는 여섯 아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다시 레위의 자손 중 고핫의 가문에 맞춰집니다. 모세와 아론 등 제사장들의 혈통이 된 고핫은 장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이 나온 가문만 부각을 시킵니다. 아므람에서 아론으로, 엘르아살로, 비느하스로 이러지는 한 가문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가문입니다. 하나님이 은밀히 제사장 집안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준비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들어 쓰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을 ‘선택받은 사람’ 또는 ‘소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소명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의 자격과 조건 그리고 배경을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카메라 초점을 맞추어 가듯이 한 민족에서 한 지파로, 한 지파에서 한 가문으로, 한 가문에서 한 가정으로, 한 가정에서 선택 받은 한 사람으로 집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시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해 나가십니다. 고핫을 구별해서 찬송을 시키고, 레위 지파 사람들이 제사의 집무를 부여 받았지만, 그들 중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아론의 지파를 구별하는 일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기대와 사명 그리고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달란트에 따라 맡기시기고 주신 만큼의 열매를 찾으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맡긴 것이 작다고 불평하면, 계속해서 작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긴 일은 정확합니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고 즐거워할 때, 자신이 맡겨진 직분이 점점 더 커지고 중대한 일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분깃에 감사하며, 끝까지 충성하고 최상의 것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더 아름답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26-27)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모세는 거듭된 실패로 크게 좌절했습니다. 좌절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세우신 지도자를 높여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26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26-27)

 

족보의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아론과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임을 강조합니다. 화자는 반복을 통해 모세와 아론의 권위와 지도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화자는 그들의 지도력을 확실하게 인정해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음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지도자들입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권위를 다시 인식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도구로서 그들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모세의 거절(28-30)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자신의 부족함은 그분의 계획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발견된 사명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8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2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30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28-30)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으면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신 분이 창조의 피조 세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인도하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 한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책임지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책임지시겠다는 의미로, “나는 여호와다.”(2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증거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해 주님의 명예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가문을 지키셨고,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가게 하셨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예비된 자라는 자신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연약할지라도 주의 권세와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약속을 붙들고 담대하게 일어서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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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6-01)


다시 소명을 받는 모세

출애굽기 6장 1-13절


사업에서 크게 실패한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일을 두 번 실패한 경우, 다시 시작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실패의 경험은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사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망을 제공합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여호와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자, 모세도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사명을 성취하실 것을 강조하시면서 다시 바로에게 찾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다시 알려주신 이름 여호와(1-5)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더 위대한 존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습니까?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1-5)

 

이스라엘 백성이 겪고 있는 고난과 모세의 고뇌는 성경 속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해방의 약속을 믿었지만,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안과 의구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만을 이해하시며, 그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금 자신의 계획과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모세에게 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신앙의 여정에서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두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고난을 통해 더 큰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뢰와 인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원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강한 손’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강한 손’은 6절의 ‘편 팔’과 비슷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은 애굽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것이며’, ‘쫓아낼 것이다.’ 동사 ‘가라쉬’는 보통 전쟁에서 승자가 적들을 영토 밖으로 쫓아낼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가나안 전쟁에서 승자인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낸다.’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패자인 바로와 에굽가 승자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추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는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창세기는 사람들이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셋의 아들 에노스가 탄생할 때부터였다고 말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여기서 ‘불렀다’는 것은 분명히 예배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족장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꾸준히 여호와와 만남을 지속하며, 그분이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가 빈번히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알고 있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직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에 대한 비평학자들의 설명은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자료가 섞여 들어간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여호와는 후대의 이름인데 창세기 편집자가 그 후대의 이름을 태초의 사건에서부터 시대착오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저작설을 떠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일관된 편집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자료의 충돌이나 시대착오적인 신명의 사용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뛰어난 히브리어 문법 학자인 드라이버(G. Driver)는 이것을 감탄의 부정문으로 본다. 그는 3b절은 ‘내가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을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한국 학자 중에 기동연(고신대학원)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을 조상에게 알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가 상당히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구문론적인 측면에서도 지지받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정경의 통일성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무난한 해석을 제안합니다. 이미 에노스가 탄생할 즈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간직하는 내재적 속성과 능력,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의 인격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계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여호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뒤이어 언약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4).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6-9)

오늘날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 그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만약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샤파’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신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9)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다’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반드시 애굽의 학정으로부터 건지시고 애굽에 큰 심판을 내려 그들을 속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강하시며, 그분이 팔을 펴시면 대적할 세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는 ‘속량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한 뒤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들의 영원한 유산(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계획을 전해 들었고, 그가 그것을 확증하는 기적을 시연하는 장면을 다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한 압박을 가해오는 바로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다시 바로에게 가라(10-13)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의구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상황이 아닌, 그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가 다시 바로에게 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로를 다시 찾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는 바로와 2차 협상을 벌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는 앞서 제시한 변명을 다시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언변이 부족하다는 핑계입니다.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어 협상을 진행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백성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신뢰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능한 혀와 입을 탓합니다. 특이하게 앞에서는 혀와 입이 ‘무겁다’는 표현을 쓴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부족한 언변을 ‘할례받지 않은 입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할례받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으로 부적격한 것처럼 비유적으로 할례받지 않은 입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뭔가가 덮고 있는 듯이 입술이 답답해서 협상이 원활하지 않다는 표현입니까? 필자는 후자의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말주변이 없다는 모세의 변명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정당하지 못한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대변인 아론을 그의 입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협상에 실패했다고 하여 낙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면은 모세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 이스라엘의 참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과 달리 모세의 변명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신 채 그저 다시 파라오에게 가라고만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와 협상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통해 바로를 굴복시켜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실 것입니다.


환자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호전 반응’이 나타나듯, 이스라엘 백성들도 겉으로는 더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불신앙을 초래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해도 삶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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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5-02)


세상을 본 사람들을 통해 본 모세

출애굽기 5장 15-23절


 

성경에서 형통의 삶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조차 왜곡될 수 있습니다. 문제에 갇혀 있으면 해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가운데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으며 해법을 여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길 바랍니다.

 

  • 본문은 바로 왕의 불합리한 노역에 이스라엘 기록원들이 호소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게을러 여호와께 제사 드리러 가려 한다고 하면서 더 가혹하게 일을 시킵니다.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만나 그들을 원망합니다. 모세의 탄식에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구원하리라는 약속을 하삽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백성(15-21)

흔히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쉽게 조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소한 일에 쉽게 상하고, 작은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때로는 작은 난관에도 마음이 약해져 주저앉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쉽게 동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16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17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18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15-18)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관들을 바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출애굽기 2:23에서도 이스라엘이 무거운 짐으로 인해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아바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고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바로에게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기록원들은 자신을 바로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바로에게 충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충성을 바쳐온 자신들에게 왜 이렇게 하냐고 항의합니다. 아마도 바로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상황이 매우 불합리하며 부당하다는 사실을 호소하는데 두 가지로 그 부당함을 말합니다. 첫째,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한 바로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로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것은 바로의 백성 이스라엘의 잘못인데 오히려 바로의 충성스러운 종인 자신들이 매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록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백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큰 차이가 있으며, 이스라엘을 단순히 노예로 여기고 있는 바로의 생각과도 다릅니다. 또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동일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자신들이 벌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원들의 간곡한 부르짖음을 바로는 듣지 않습니다. 바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기록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기록원들은 자신들이 바로의 종이며 애굽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바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는 게으르다는 말을 반복하며 기록원들의 말을 묵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가자’는 모세의 말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즉, 문제의 원인은 모세의 말에 있으니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가자는 선동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또한 원인을 모세에게 돌리며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 사이를 더욱더 이간질했습니다. 이렇게 바로는 기록원의 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빨리가서 일하라고 재촉하며 짚을 주지 않아도 벽돌을 수량대로 바치라고 다시 한 번 못 박습니다. 앞 단락에서도 보듯이 반복을 통해 이 명령은 절대 취소되거나 바뀔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간주되며 바로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기록원들이 모세에게 항의함(19-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이야기는 신앙의 갈등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분이 준비하신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9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21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15-21)

 

바로가 하루에 할당된 벽돌의 수를 감해주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이스라엘의 기록원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괴롭힐 것이고, 그 사이에서 자신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애굽 편에 붙어서 편하게 지내던 시절이 지나갔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심각한 상황을 깨닫고 화가나서 나오는 기록원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세와 아론을 만납니다. 아마도 모세와 아론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위해 기록원들이 왕궁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모세도 상당히 부담을 느꼈기에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자마자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노예 상태로 근근이 살고 있던 상황이 악화되어 미움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고 죽일 빌미까지 제공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들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능력과 권위에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사역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고, 처음에는 모세를 믿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처음부터 잘 되는 것도 있지만 확신을 갖고 시작한 대부분의 일은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히고 비난 받으며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신앙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점점 더 의지하는 모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모세(22-23)

삶이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욱 가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이자 인도자로 나타납니다. 모세와 아론의 첫 번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백성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모세는 큰 낙심에 빠져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22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23)

 

모세와 아론의 첫 번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백성을 향한 탄압이 가중되기만 하였습니다. 최악의 결과입니다. 모세는 크게 낙심하여 하나님께서 항의합니다. 그의 어투로 매우 강하고 단도직입적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황이 좋아지기보다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바로는 더 강퍅해지고, 애굽의 군인들은 순종치 않은 사람들을 더 학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무거운 짐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짐을 덜어준 것이 아니라 짐을 가중시킨 것에 괴로워합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패장들의 신랄한 비판과 원망은 크게 들었습니다(20-23).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가서 말할 때, 바로는 강퍅해질 것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원망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사람들의 원망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나가서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거운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오직 주님의 강한 능력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담대하게 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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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5-01)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

출애굽기 5장 1-14절


 

옛날에는 위생이 좋지 않아 작은 부스럼이 심각한 종기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속담으로 '긁어 부스럼'이라 표현했습니다. 모세도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일이 점점 꼬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일의 과정을 결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최종 선언을 하실 때까지 인내하며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 본문은 드디어 모세가 바로 왕에게 처음으로 마주합니다. 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이 노역을 쉬려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 혹독한 노동을 강요합니다.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1-4)

오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한결같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의 태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교만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오만함은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만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자신의 완전한 노예일 뿐입니다. 감히 노예가 어떻게 자기 의지가 살아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노예는 노예이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요구를 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그 자체가 바로를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1)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구(1-3)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장정만 60만 명인 엄청난 노동력입니다. 이들 때문에 국고성도 짓고 농사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세금도 거두어 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왕이 아무런 갈등 없이 종들이 원하는 데로 내어줄 순 없습니다. 바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로도 계속해서 강퍅하지는 것이고 이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국고를 부요하게 했던 대단한 업적은 4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일 것입니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랑이라도 하듯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는 바로(4-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고, 그들이 노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명령하여, 모세와 아론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 백성을 보내라”는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인류가 우상과 죄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하나님 앞에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 사단은 영혼을 쉽게 보내지 않습니다. 놓아주지 않으려는 끈질긴 세력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과정도 여러 어려운 과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이끄시는 놀라운 섭리요, 시련의 강도가 강할수록 더 아름답고 더 귀한 정금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6-14)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은 더 짙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수록 이를 가로막는 방해도 격렬합니다. 악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갈등합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의견 대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으로 발발합니다.

 

6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10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11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13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14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6-14)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일종의 속임수나 노림수로 평가절하 했습니다.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노역에서 쉼을 얻도록 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로는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혹독한 강제 노동이 실시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획을 수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1) 노동을 더욱 가중되는 이스라엘(6-9)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힘없고 고단해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큰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짚을 주지 않으면서도 이전과 같은 수효의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한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말씀을 듣지 않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의 희망이 멀어지는 듯한 절망감에 휘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구원의 염원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 큰 고난(10-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동 조건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재료조차 주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양의 벽돌을 만들어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남아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자,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또한 애굽인 감독에게는 매질을 더욱 혹독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염원은 죽음조차 막을 수 없는 강렬한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 보면 견디기 힘든 장애물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은 장애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확신과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탱해 주며,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바로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지한 인간의 오만한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최후 승리는 하나님과 그분을 믿는 자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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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4-02)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출애굽기 4장 18-31절


 

현대는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위기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부족해 개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디어의 발달이 없었기에 지도자들의 어두운 면이 감춰졌으나, 오늘날에는 쉽게 드러납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만들어, 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큰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는 곧장 장인 이드로를 찾아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한 남편과 아버지이자 양을 잘 치는 유능한 한 사위로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내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고 모세는 애굽을 향해 떠납니다. 도중에 시내산에서 형 아론과 만나 이집트에서 할 일을 준비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18-23)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은 가정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이라는 미명 아래 기본 윤리를 왜곡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하셨지만, 장인 이드로와 먼저 상의한 점에서 가족의 의견을 중요시했습니다.

 

18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18-23)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순종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 들린 후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부르심을 받은 직후 장인 이드로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모세는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돌아가 형제들이 아직 살아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까 염려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학대 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참고, 타나크 성경[TNK]). 미디안 제사장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이드로는 모세를 부르신 여호와의 뜻을 존중합니다. 사위의 위대한 꿈을 후원하면서 그의 이탈로 인한 집안의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각오합니다.

40년이 흘러 세대가 바뀌고 애굽에서 모세의 생명을 찾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19). 이것은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 대한 기시감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은 후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땅으로 돌아옵니다. 분명히 두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발생한 일이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모세의 도피와 귀환은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예표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아내 십보라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워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모세의 ‘아들들’로 표현되는데, 게르솜과 그 이후 태어난 엘리에셀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은 애굽이 그에게 더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쥐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 (마테 하엘로힘)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파라오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그대로 전하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여 이스라엘 백성 ‘보내주기를 거절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과 그분이 바로가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신다는 사실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십보라와 피 남편(24-26)

믿음은 삶 속에서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품으면 머뭇거림이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머뭇거림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리아 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24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24-26)

 

갑자기 장면이 바뀐 듯 보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에피소드 한 장면이 끼어듭니다. 이 단락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일단 모세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에 대명사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24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난 ‘그’를 모세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기로 하십니다. 그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십보라가 재빨리 아들을 할례하여 그 포피를 모세의 발에 갖다 댐으로써 위기를 넘깁니다. 십보라는 모세를 ‘피 남편’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인데, 이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일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자로 임명하여 부르셨는데, 느닷없이 왜 그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변덕으로 이해되는 기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이 짧은 에피소드가 갖는 문제는 수수께끼투성입니다. 이 난제를 둘러싼 숱한 의견들이 있지만, 우리는 가장 무난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봅니다. 숙소에서 여호와는 ‘모세’를 만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앞의 이야기와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우리는 서사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모세가 애굽으로 떠난 도중에 어떤 숙소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게르솜의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시도하셨지만(비케쉬) 실제 징벌을 실행하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모세의 생명을 ‘찾는 자들’(비케쉬 UP의 분사)은 실제로 그를 죽이려고 찾아다녔습니다(19). 우리는 바로처럼 실제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작정하셨다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지어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결국 그의 아들의 할례를 최종적으로 실행하게 만드셨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소명에서 아들의 할례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한 아들은 게르솜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모세는 십보라의 반대로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보수적인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께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자초지종은 생략되었지만 십보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자신이 직접 아들의 할례를 실행한 것입니다. 아내가 할례를 행한 이유는 남편의 생명이 위태로운 긴급 상황이기도 했고, 자신이 할례를 반대하여 생긴 문제였기에 책임을 지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십보라는 뒤늦게 과오를 깨닫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아들의 할례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십보라는 할례를 행함으로써 아들 게르솜을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합류시킵니다. 이 할례는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기준이고 표지이기에 생명이 걸릴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 언약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모세가 애굽으로 떠나기 전에 자기 가족부터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 비상조치를 취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십보라가 모세의 ‘발’에 아들의 포피를 갖다 대며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피 남편’의 의미도 할례가 지닌 이런 언약적 배경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피 남편’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아들과 더불어 자신이 할례의 피 흘림을 통해 남편이 속한 언약 백성의 혈통에 합류했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언약 백성이 된 가족과 더불어 모세는 애굽으로 떠날 준비를 완료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만남(27-31)

지도자에게는 고난의 길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 후에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종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27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27-31)

 

다시 장면이 바뀌어 애굽의 아론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날 것을 지시하십니다. 이 광야는 물론 미디안 광야일 것입니다. 아론은 길을 떠나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와 기쁘게 상봉합니다. 무려 40년만의 가족 상봉입니다. 모세는 형 아론에게 그동안의 모든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아론을 시내산까지 부르신 이유는 분명 대업을 앞둔 두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애굽으로 함께 돌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29). 4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늙은 장로들은 모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되어 장로들 앞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합니다(30).

이어지는 ‘그가 백성 앞에서 이적들을 행했다’에서 ‘그’는 모세로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문장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바로 앞에서도 모세를 대신해서 협상에 나서는데, 40년의 공백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라는 인물에 친숙하지 않기에 아론이 나섰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로들은 모세를 잘 아는 나이 든 계층이므로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마 40년 동안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세는 모국어와 이집트어 구사에 능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모세와 아론은 계속해서 나란히 등장하며, 아론은 말뿐 아니라 기적을 행할 때도 모세를 대신해서 그의 지팡이를 들고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론이 모세를 대신하여 ‘말’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장로들과 백성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외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줄곧 살피셨다는 말을 듣고 그분께 경배를 드렸습니다(31).


하나님께서는 훌륭한 지도자로 감당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그릇이 큰 지도자감을 찾고 계십니다. 지도자를 세우실 때, 먼저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만드신 후에 세우십니다. 당신이 준비된 그릇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십니다. 지도자로서 근심과 걱정을 다 버리고 큰 그릇이 될 때 큰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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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4-01)


확실한 증거를 통해 모세의 소명

출애굽기 4장 1-17절


 

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의 방법과 현실의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중요하지만, 과도한 신중함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생각을 우선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중함과 신앙의 균형을 맞추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 모세는 하나님께서 확고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보증을 받았지만, 그것이 모세의 행동이 바뀌어 실천에 옮기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미온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심(3:11, “내가 누구이기에”)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 부족(3:13, “그의 이름을 무엇이냐 하리니”)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자신이 지도자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마지막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모세가 받은 확실한 증거(1-9)

하나님의 이적은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심판을 통해 불순종을 경고하시고, 구속을 통해 회복과 새로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뜻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며,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1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1-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을 우려하실 때, 모세에게 세 가지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키고, 다시 지팡이로 돌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둘째, 손을 병에 걸리게 하고 다시 깨끗하게 회복시키며, 셋째, 나일 강물을 땅에 쏟아 피로 변하게 하여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1) 백성의 불신을 염려하다(1)

 

모세는 처음에 자신의 자격을 의심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의 망설임과 거부의 두 가지 추가적 이유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로 그는 백성의 불신을 염려하고, 두 번째로 자신의 언변 부족을 탓합니다. 첫 번째 핑계는 자신의 체험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실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푸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자신감 결여와 믿음 부족으로 인한 불순종의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품을 의심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3단계에 걸친 확고한 기적의 증표를 보여주십니다.

 

(2)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다(2-5)

 

갑자기 하나님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대해 물으십니다. 여기서 출애굽과 이후의 광야 40년 내내 중요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킬 모세의 지팡이가 최초로 등장합니다. 모세는 당시 목자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양 떼를 몰 때, 그리고 거친 광야 여기저기를 거닐 때 사용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흔한 지팡이가 이제 특별한 지팡이, 즉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뀝니다(20).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신 순간 아무리 평범한 물건일지 언정 특별한 물건이 됩니다.

하찮은 나귀 한 마리가 메시아 왕을 태우는 귀한 나귀로 쓰임받을 수도 있습니다(마 21:2-3).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최초의 기적은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명하시자 모세가 순종했습니다. 이때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모세 앞에서 꿈틀거린 뱀은 코브라와 같은 독사였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독사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명적인 독을 가진 코브라의 꼬리를 잡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용기 내어 손으로 뱀의 꼬리를 잡자 뱀은 다시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모세는 이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시연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들이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낸 구원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애굽의 마술사들도 일으킬 수 있는 일이기에, 백성들은 여전히 의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두 번째 기적을 준비하십니다.

 

(3) 손에 나병이 생기다(6-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손을 품에 넣자 손에 악성 피부병이 생겼습니다(6). 명사 ‘짜라아트’는 흔히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으로 번역되나 ‘악성 피부병’(공동번역 새번역)이 가장 타당한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짜라아트의 증상은 나병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고 건물의 벽이나 가죽 제품과 같은 사물의 표면에도 짜라아트(악성 곰팡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의상 이것을 ‘나병’으로 칭하기로 합니다. 손에 나병이 발생하자 모세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시고 모세는 즉각 순종했습니다(7). 이때 모세의 손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나병으로 물러진 피부에 다시 생살이 돋아 온전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에게 보여줄 두 번째 표적입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서 이것을 시연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확증할 것입니다. 나병의 기적을 통해 병을 일으키고 고치는 것은 마술사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병 치료는 의사의 영역일 수 있으나, 의사 역시 나병과 같은 무서운 병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마술사들이 흉내 낼 수 있는 첫 번째 이적을 믿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은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믿지 못하며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9). 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세 번째 표징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 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나일강에서 떠온 그 물이 땅 위에서 핏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일강 전체가 핏빛으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 번째 기적은 현재의 미디안 땅에서 미리 시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서 백성 앞에서 직접 실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애굽으로 가서 모든 장로를 모으고 백성 앞에서 이 모든 기적들을 그대로 시연했습니다. 이때 백성은 여호와를 믿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4:30-31).

 

모세가 언변 부족을 핑계하다(10-1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순종하며, 우리의 부족한 부분은 그분의 도움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자원에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움을 신뢰하며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10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0-13)

 

모세는 이제 자신의 자질 부족, 특히 부실한 언변을 핑계거리로 내세웁니다. 사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과 덕목은 말의 능력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말한 혀의 어눌함은 그가 40년 동안 이방인인 미디안 가족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의 모국어 히브리어와 이집트어의 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집트어의 어눌함은 바로와의 담판 협상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며, 히브리어의 부자연스러움은 백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인도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경에 나타나는 모세의 모습은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자주 백성 앞에서 연설하는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말과 하는 일들에 능하더라”라고 설교합니다(행 7:22). 그는 결코 언어장애인이나 말더듬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무난하게 모세는 언어 구사에 문제는 없었으나 스스로 자신을 말주변이 없는 인물로 격하하며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자신감 결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의 입과 눈과 귀를 주관하시고 통제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의 입과 함께하시어 해야 할 말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순종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모세의 입으로 세우시다(14-17)

하나님은 모세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필요한 동역자를 보내어 사역을 효과적으로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각자의 역할을 적절히 배분하여 사명을 성취하십니다. 우리의 순종과 협력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협력해야 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14-17)

 

모세의 거듭된 고사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화를 폭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신 이유는 그가 거듭 순종하기를 망설이며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끝까지 모세를 독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그가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를 부르실 때 결코 폭압적 독재자로서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이 도우미로 나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소통에 문제가 있으며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협상을 위해 아론이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모세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아론은 모세를 대변하며, 아론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 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형 아론의 합류와 지팡이의 기적 약속과 함께, 모세와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줄다리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아론을 동역자로 세워 부족함을 보완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자원이 부족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사명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역할을 적절히 배분하시며, 우리의 협력과 순종을 통해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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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3-02)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부르심

출애굽기 3장 13-2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그분은 그분의 계획 안에서 정확한 시간에 이루십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위대한 사명자로 부름받은 모세는 처음에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모세와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과 보증으로 사명을 확신시키셨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모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을 설득할 때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13-15)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의 신실하심은 우리 삶의 기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13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3-15)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그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와 속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어떠한 신들과도 다르게 자존하는 존재로 계시하십니다. 이로써 역사의 전환점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神)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장차 발생할 이적과 기사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더욱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난해한 문구에 대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숱한 토론과 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원문인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우리말로 ‘나는 나다’(공동번역) 혹은 ‘나는 나 스스로가 존재하는 자다’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문법적으로 특이하고 난해할 뿐 아니라, 이것이 신명이라는 사실은 더욱 기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에흐예’는 분명히 그분의 공식적인 이름 ‘야웨’와 깊은 어원론적 관련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에흐예’로 밝히신 곳은 이곳뿐입니다.

그 외에는 항상 그분의 이름은 ‘야웨’가 사용됩니다. 물론 ‘신명 네 문자’(Tetragrammaton)로 불리는 철자의 정확한 발음은 현재까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흔히 ‘야’가 가장 유력한 발음으로 인정되어 편의상 사용되는 중입니다. 그 이유는 יהוה의 약칭이 인명의 앞이나 뒤에서 흔하게 ‘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예, 엘리야, 예레미야 등).

만일 이 견해대로 이 단어가 ‘야웨’로 읽힌다면, 이것은 히필형으로 ‘그가 존재하게 한다’는 뜻을 갖습니다(ה가 사실상 묵음이므로 야훼보다는 야웨가 더 정확한 발음임). 이것은 야웨가 만물을 존재하게 한 신이라는 뜻에 잘 부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알리신 후 앞서 6절에서 밝히신 자신의 신분을 반복해서 알려주십니다: 너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보냈다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조상들과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말씀하실 때 가리키는 이름은 간략히 ‘여호와’로 이해됩니다. 말하자면, 나는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입니다. 그분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16-18)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짊어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지혜와 공동체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16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17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18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16-18)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고난을 돌아보고 (파카드) 계셨습니다(16). 동사 ‘파카드’는 ‘방문하다’라는 기본 뜻을 지니는데, 어떤 대상에 주의 깊은 관심을 갖고 직접 찾아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서 당하고 있는 모든 일을 분명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해내실 것입니다.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17)는 원문으로 볼 때 구출의 메시지가 간결하면서도 매우 선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으로부터 가나안 족속의 땅으로 올라오게 하리라.’ 동사 ‘알라’의 히필형 ‘올라오게 하다’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애굽으로부터 나옴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3:8에서 말한 대로, 현재 그 풍요의 땅은 가나안의 여러 종족들이 점유한 채 살고 있으나, 이제 그 땅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언약 백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말을 받아들이게 될 장로들과 함께 애굽 바로를 찾아가 애굽을 떠날 구실을 만들어 그에게 전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멀리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종교 행사를 위한 집단적 여행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뜻을 지닌 동사 ‘카라’의 사용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신의 계시가 떨어져 자신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이 피치 못할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장로들은 그들의 종교 행사를 위한 여행에 백성 대표로 일부만 갈 것이며 아내와 자녀들은 남겨둔다는 의미로 그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혹은 사흘길을 종교 행사를 위해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바로를 속이기 위한 선한 거짓말입니까? 그래서 이것은 전략적인 요구입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의 이러한 요구는 바로를 거짓으로 안심시킨 뒤 집단 탈출을 하기 위한 교묘한 협상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종교 행사를 위해서라는 그들의 집단 여행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 강도를 더욱 가혹한 수준으로 높입니다.

 

너희는 승전국이 되어 나오리라(19-22)

세상의 억압과 고난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그분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들고 어떤 시련 속에서도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곁에서 일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난 중에도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고 승리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9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20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21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2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19-22)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완고해질 것을 미리아십니다. 바로는 결코 그들을 호락호락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온갖 이적들로 그들을 친 뒤에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입니다. 그들이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의 호의를 얻게 될 것입니다(21).

애굽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열 번의 재앙을 겪을 것이기에 이스라엘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애굽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열 번의 재앙을 당한 뒤에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적대감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순순히 건넬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빈손으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웃 사람, 즉 애굽 여인들에게서, 또한 집에서 함께 ‘거류하는 여인들’에게서 금과 은의 패물과 의복(겉옷)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웃 사람은 히브리어로 ‘이웃 여성’을 뜻하는데, 이들은 애굽 여인들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집에서 함께 ‘거류하는 여인들’(가라)은 누구입니까? 노예 신분인 이스라엘의 집에 잠시 체류하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들을 위한 일꾼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들은 외국에서 온 여인들로 애굽인을 위한 노역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잠시 공동 거주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귀중품을 취하여 자녀를 치장하는 장신구로 사용할 것이며, 그 외 애굽 사람의 물품을 ‘강제로 취할 것이다’(나짤). 그들이 애굽 사람에게서 귀중품을 얻는 행위가 여기서 동사'나'로 표현된다. 신명기의 율법은 종을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신 15:12-18). 따라서 21절의 이스라엘이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라는 진술과 더불어 그들이 물건들을 취한 행동은 이 율법의 선제적 적용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오랜 세월 품삯도 받지 못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노예들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롭게도 현재 이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 ‘나짤’은 사실 전쟁터에서 약탈 행위나 전리품을 챙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행위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오래도록 밀린 품삯을 애굽인들에게서 정당하게 받아냅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애굽 바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기에 그들은 승전국의 자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승전국 국민으로서 패전국 국민의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은 그가 두려움 속에서도 순종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여 사명에 대한 확신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완벽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승리를 확신하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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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3-01)


모세의 소명 : 불타는 떨기나무

출애굽기 3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사명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습니다.

 

  • 대제국의 왕실에서 왕자의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모세가 이제 척박한 광야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위대한 조상들의 여호와이심을 밝히며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학대받는 동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라는 명령입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1-5)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어디든 거룩하므로, 우리는 경외심과 겸손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개인적으로 부르시며,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때에 따라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1-5)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모세가 이제 미디안 땅에서 장인의 양을 치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장인의 이름이 여기서는 르우엘이 아닌 ‘이드로’로 언급됩니다. 결국 모세의 장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인물의 이름이 출애굽기의 근접 문맥에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곤혹스럽게도 구약 다른 본문의 증거를 볼 때, 이드로와 르우엘은 동일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민수기와 사사기에서 모세의 ‘장인’ 혹은 ‘처남’(호텐)은 이드로가 아닌 ‘호밥’으로 나타나며(민 10:29; 삿 1:16;4:11), 특히 민수기는 호밥을 ‘르우엘의 아들’로 소개합니다(민 10:29). 따라서 르우엘과 이드로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이 경우, 이드로와 호밥이 동일 인물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이 제안됩니다. 첫 번째 대안은 2:18의 르우엘에 대한 언급을 ‘그녀들의 아버지’가 아닌 ‘그녀들의 조부’로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아브’의 용법상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때 르우엘은 이드로의 아버지로서 르우엘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여 손님 대접이나 결혼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출애굽기 2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의 아버지는 르우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대안은 ‘그의 장인’을 ‘그의 처남’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호텐’의 용례에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이 견해의 문제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드로가 제사장이자 가장 역할을 하면서 모세의 장인 지위에 걸 찾은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굳이 선택한다면, 첫 번째 대안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향하여’ 아마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갔습니다. 이것을 굳이 ‘서쪽으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산이었습니다. 이 산은 틀림없이 시내산을 가리킬 것입니다. 갑자기 호렙산의 어느 산자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덤불 나무인데 정확한 수종(樹種)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자신과 경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 2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는데, 4절에서 그가 동시에 ‘여호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전쟁을 수행하기 직전에 재현됩니다(수 5:13-15). 거기서는 여호와가 ‘군대장관’으로 나타나며, 여기처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합니다(수 5:15).

떨기나무가 불에 타오르는 현상에 대해 몰덴케(Moldenke)의 성경 식물도감은 이것이 덤불에 만발하게 핀 꽃에 대한 환각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TWOT). 그러나 카수토(Cassuto)는 이런 견해는 전혀 본문의 의도가 아니라고 적절하게 반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에도 건조한 사막에서 덤불들이 바람에 마찰되어 자연 발화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런 현상이 특별하게 기적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자연 발화가 아니라 나무는 실제로 전혀 타지 않고 있기에 놀라운 현상입니다. 이것은 ‘큰 광경’, 즉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가 크게 놀란 이유가 그 때문이며, 그는 그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나무를 살펴보기 위해 접근했습니다(3).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갑작스런 음성에 대한 모세의 반응과 모세 편에서의 음성의 주체에 대한 신분 확인 과정은 생략된 채 모세의 즉각적인 응답이 이어집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고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5). 신발을 벗는 행위가 지닌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가장 무난한 해석은 그것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높은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었으며, 종들은 주인 앞에서 통상적으로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직무할 때에도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성소에 입장할 때나 제단의 제물을 바칠 때 반드시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출 30:19-20).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그곳이 나무이든 산이든 여하한 장소이든, 거룩해집니다. 어떤 공간이 특별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비록 광야의 덤불일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한편,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은 분명히 앞으로 강력한 신현의 현상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불, 즉 불기둥을 예고합니다.

 

구원자의 사명을 받는 모세(6-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이해하시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하실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방식과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계획에 순종하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6-10)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여기서 위대한 세 명의 조상이 모두 거명된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최초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립니다. 언약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 32:30; 참조. 출 19:21; 신 4:33; 삿 13: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애굽에서 학대받는 백성의 고통을 다 보고 계셨다고 밝히십니다.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과 근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셨고’, ‘들으셨고’, ‘알고 계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들을 학대받는 땅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구원 역사를 위해 애굽으로 떠날 것을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10). 그는 바로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인도하여 내다’라는 동사 ‘야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현재 그렇게 애굽 땅에서 노예로 속박된 상태입니다. 이 어법은 신약에서 죄로부터의 속박과 해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지 않습니다(참조. 렘 1장). 그러나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문하는 모세의 응답은 매우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모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름 앞에서 자신이 위대한 소명자 자격이 있는지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학대받는 자신의 동포를 늘 안타까워한 것은 맞지만, 그들을 해방시켜야겠다는 비전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확신시키시는 하나님(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확신시키시고, 그 사명이 이루어질 것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실현되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증거’는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과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1-1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명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확고한 약속과 더불어 확정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은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분의 언약이 성취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모세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뒤, 만일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증거’를 뜻하는 ‘오트’는 이외에도 ‘표적’, ‘이적’, ‘징표’의 뜻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이적이나 기적의 의미의 ‘증거’가 아닌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적 증거로 드러나는 사례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모세를 부르시며, 그의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과 순종으로 응답할 때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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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2-02)


도망가는 모세, 기억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장 11-25절


 

우리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를 목격할 때, 공의와 정의를 지향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단순한 불만이나 분노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실지를 기대하며 행동합시다.

 

  • 모세의 오랜 성장기가 생략된 채 그는 이제 성인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판단력을 지니고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성장에 대한 표현에는 그가 이제 사람들을 지도할 역량을 충분히 갖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통상적으로 애굽의 왕실 교육 기간은 약 12년으로 알려집니다. 이는 모세가 지도자로서의 덕목과 자질을 잘 훈련받은 인물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임(11-14)

우리 삶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과정임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이 단순히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고, 그분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과정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찾으며 인내와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11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11-14)

 

전 본문에서는 모세에 부모와 누나 요게벳이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아기 모세를 살리기 위한 노력 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모세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동포인 이스라엘 백성의 중노동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형제들’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모세의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인해줍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한 애굽인이 자신의 동포 한 명을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모세는 사방을 살핀 뒤, 그 애굽인을 때려죽인 다음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모세의 행위는 민족적 정당방위처럼 읽힙니다. 애굽 사람이 동포를 ‘치는’ 것을 보고 모세가 그를 쳐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해석가는 모세는 처음에 학대받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도 없자 자신이 나섰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황은 모세가 그 사람을 처음부터 죽일 작정으로 사방을 살핀 다음 신속히 행동에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살인을 한 모세의 행위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동안 일어난 비참한 학대에 대해 누적된 모세의 분노가 최초로 터진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추정컨대, 모세는 오래도록 자신의 동포가 학대받는 현실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개인의 원한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지배를 받는 민족의 정당한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모세가 자신이 동포 이스라엘 사람을 구타하며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여 이스라엘 사람을 구한 것은 그가 장차 하나님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애굽 백성을 열 번이나 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것을 예고합니다.

모세는 애굽인의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었지만, 사실은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현장에 다시 나가보니 두 히브리인 형제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둘 중 명백히 먼저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두 히브리인 동포의 싸움을 말리면서 그 잘못한 사람을 꾸짖습니다. 동포의 싸움질을 말리는 행동 역시 모세가 자신의 동포 히브리인들의 삶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때 그 히브리인은 오히려 모세에게 대들면서 범행 장면을 다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나아가 그는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며 모세를 공격합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말에는 장차 사실로 성취될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모세에게 따진 사람이 전날 구출을 받은 히브리인 형제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잘못입니다. 그는 제삼자인 목격자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일이 들통났다’라며 염려하기 때문입니다(14). 아끼던 이스라엘 동포로부터 가해진 모세를 향한 공격과 비난은 앞으로 그들이 지도자 모세에게 거듭 반항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일이 탄로 났음을 알게 된 모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무리 왕자의 신분이라고 해도 애굽 시민을 살해한 행위는 중벌에 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세는 히브리인 양자였기에 괘씸죄가 적용되어 사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피(15-17)

우리의 인생에서 불확실하고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고,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신뢰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현재의 상황과 역할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의 위치와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15-17)

 

결국, 모세의 범행 사실이 파라오의 귀에 들렸습니다. 틀림없이 모세를 비난한 그 이스라엘 사람이 왕궁에 고자질했을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개인적 감정뿐 아니라 포상금이나 신분 상승과 같은 이익을 노리고 한 밀고였을 것입니다. 파라오는 모세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누군가 이 사실을 모세에게 귀띔해준 것 같습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피해 멀리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은 통상적으로 시내 반도 너머의 사우디아라비아 북부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간주하는데, 유목민이었던 미디안 종족의 활동 범위는 시내 반도도 포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디안 땅에 숨어 지내던 모세는 어느 날 어떤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아마 목을 축이기 위해 우물을 찾았을 것입니다. 마침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이 양 떼를 몰고 물을 먹이러 왔습니다(16). 이때 주변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늦게 양 떼를 몰고 우물로 와서 미디안 제사장 딸들의 양 떼를 내쫓고 물을 가로챈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새치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18절에서 그녀들의 아버지가 “너희가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놀란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못된 목자들의 새치기 행패는 늘 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나서 여인들을 도왔습니다. 숫자가 많은 목자를 물리적 몸싸움으로 저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말로 따져서 그들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사실 미래에 대한 징조입니다. 물에서 구출되었던 모세는 장차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의 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합니다. 여성들을 구조하여 물을 얻게 했던 모세가 장차 물이 없어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기적적으로 물을 얻게 하여 그들을 구조합니다.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18-2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분의 계획에 협력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헌신합시다.

 

18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18-22)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은 양 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들의 아버지 이름이 ‘르우엘’로 나타납니다. 이 르우엘이 이어지는 3장에서는 ‘이드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므로 혼란을 일으킵니다(3:1). 이 문제는 3장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르우엘은 그녀들이 ‘속히’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랍니다. 르우엘이 놀란 이유는 딸들이 다른 날과 달리 매우 일찍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못된 목자들의 횡포로 딸들이 항상 가장 늦게 양 떼에게 물을 먹였음을 시사합니다. 그 딸들은 아버지에게 ‘한 애굽 사람’이 목자들의 횡포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녀들은 모세를 애굽인으로 간주합니다. 틀림없이 그는 애굽 복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우엘은 예의를 중시하는 정중하고 교양 있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딸들을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다시 딸들을 보내 집으로 초대합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다시 급하게 모세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가 우물을 떠나기 전에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결국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습니다(21). 흥미롭게도 우물가에서 여인과의 만남이 반복해서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리브가, 야곱, 모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십보라의 결혼에서 십보라는 우물가 장면에서 전혀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십보라의 외모와 신상, 인물됨은 철저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과 기쁘게 ‘동거’하였고 미디안 집안의 사위가 되었지만(21), 첫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으로 부름으로써 히브리인 나그네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이름은 이어지는 뜻풀이에서도 나타나듯이 분명 ‘나그네’ 혹은 ‘외국인 거류민’을 뜻하는 ‘게르’를 포함하여 ‘객’, ‘나그네’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하나님이 기억(23-25)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어려움에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해결책을 찾읍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원하십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23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23-25)

 

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애굽 왕이 죽고 왕조의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자신들의 형편을 하나님께 울부짖어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무엇보다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형편을 ‘아셨습니다’(25). 여기서 백성과 하나님 편에서 사용되는 일련의 동사들이 크게 대조됩니다. 백성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그들의 형편을 ‘아셨습니다.’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개입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모세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도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준비시키시는 과정임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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