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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5-01)


성막 건축을 준비하는 모세

출애굽기 35장 1-19절


선물은 주는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억지로 주는 선물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녀가 자신의 생일에 터무니없이 비싼 선물을 요구할 때, 그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선물은 자발적이고 진정한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드려진 선물만이 그 가치를 지닙니다. 결국, 선물의 진정한 의미는 주는 사람의 마음과 의도에 달려 있습니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갱신한 후,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하는 방법을 출애굽기 25-31장에서 주셨습니다. 이제 금송아지라는 엄청난 죄로 인해 멸절의 위기를 겪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난 후, 하나님께 커다란 용기를 받고 성막을 건축해 나갑니다. 그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안식일 준수 명령과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1-3)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그 자체로는 단순한 휴식의 날을 넘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신뢰를 나타냅니다. 현대인들에게 이 규정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경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여유와 쉼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규정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것을 경계하며,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성경의 원래 의도를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1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1-3)

 

모세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이스라엘을 모이도록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성망을 건축을 전달하며 제일 먼저 안식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안식일에 대해서는 여러 번 되풀이 되었습니다(31:12-17).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출애굽기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20:8; 31:13-16; 35:2-3). 특히 여기서는 안식일이 거룩하고 특별히 “엄숙한 안식일”(샤바트 샤바톤)로 규정됩니다. ‘샤바트 샤바톤’은 해석하기 어려운데, NIV는 이것을 ‘쉼의 안식일’(Sabbath of rest), ESV와 RSV는 ‘엄숙한 쉼의 안식일’(Sabbath of solemn rest), NASB는 ‘완전한 쉼의 안식일’(sabbath of complete rest)로 번역합니다. ‘샤바톤’이 추상명사 ‘안식’을 의미한다면, 문자적으로는 ‘안식의 안식일’일 것입니다. 이 어구가 속죄일에도(레 16:31; 23:32), 안식년에도 적용됩니다(레 25:4).

다른 절기들은 단순히 ‘샤바톤’이라 칭합니다(나팔절, 레 23:32; 장막절, 레 23:39). 안식일은 노동을 금지하고 쉬는 주기적인 휴식의 날이므로, 더 특별한 의미의 엄숙한 쉼이 필요한 날은 아닙니다. 따라서 ‘안식의 안식일’, 의역해서 ‘쉬는 안식일’이 적절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막 건설의 선포가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안식일에는 백성들이 성막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로 안식일과 성막 건설의 신학적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건설은 어떤 측면에서 두 번째 천지창조이며, 에덴의 건설입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6일 창조 후 7일째에 안식일이 선포된 것처럼 성막 건설 지침이 의도적으로 안식일과 관련지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31:31에서 설명한 대로 안식일은 영원한 언약의 징표 역할을 합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징표이자 언약의 기념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였기 때문에 안식일을 누리지 못하고 쉼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인이기 때문에 성막을 건설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쁘게 노동을 한 뒤 안식일에 쉼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은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고 불을 피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지침들이 필요한데도 구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백성들의 재량권에 맡기는 듯한 느낌입니다.

구약은 그 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체적인 법과 관행,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가이드 라인만 제시한 뒤, 노동을 중단하고 쉬는 가운데 알아서 하도록 백성들의 재량에 맡긴 것입니다. 구약에 명시된 몇 가지 금지 사항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제한적인 금지에 불과하다: ‘음식을 만들지 말 것’(출 16:23),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각 처소에 머물 것’(출 16:29;레 23:3), ‘불 피우지 말 것’(출 35:3), ‘나무하지 말 것’(민 15:32), ‘장사하지 말 것’(느 13:15-16); ‘짐을 옮기거나 집에서 짐을 밖으로 내지 말 것’(렘 17:21-22,27); ‘오락을 금할 것’(사 58:13).

그러나 후대에 바리새인들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안식일 금지규정을 서른아홉 가지나 양산했는데, 이것은 성경을 넘어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들은 씨 뿌리기나 추수 등 농사일의 금지나 요리나 옷감 제작의 금지, 빨래 금지, 불을 켜거나 끄는 것의 금지 등과 같은 일상의 크고 작은 노동의 금지가 주를 이룹니다. 특이한 것은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의 경우 두 차례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점입니다: ‘두 끈 만들지 말 것’, ‘두 실을 짜지 말 것’, ‘두 실을 가르지 말 것’, ‘바늘로 두 번깁지 말 것’, ‘두 뜸을 깁기 위해 찢지 말 것’,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등입니다. 이런 조항들은 또한 각기 상황에 따라 적용을 위한 별다른 지침과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라는 조항의 한 가지 적용으로, 유대인 집주인이 문 밖에 유대인거지가 왔을 때 동냥을 잘못 주면 물건 옮기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만일 거지가 먼저 손을 집 안으로 들이밀면 주인이 동냥을 내서 손에 쥐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인이 손을 밖으로 내밀고 거지가 동냥을 받아 가면, 이것은 물건을 나르는 죄가 됩니다. 이 규정들은 확대 적용되어 나중에는 더 시시콜콜한 것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 거리의 제한은 이천 규빗입니다. 즉 안식일에는 이천 규빗 이상 걷지 말아야 합니다(약 900미터). 이것은 여호수아 3:4에서 법궤와 진영 사이의 거리를 이천 규빗으로 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외 옷에 빈대가 있어도 털지 말 것 등 사소한 세부 규정으로 더욱 확대됩니다. 중간기를 거치면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이 새로운 안식일 조항들로 백성들을 압제하며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막 건설의 재료들(4-9)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역시 최고의 품질과 헌신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각기 다른 재료와 정성의 차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의 예배와 헌신이 진정성 있게 이루어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있어 마음과 태도, 그리고 노력의 질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성막 건설에 사용된 재료들은 당시 가장 귀하고 비싼 것들이었으며,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중요성과 경외심을 강조합니다.

 

4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6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7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8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9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4-9)

 

하란(Haran)이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한 대로, 이 품목들 중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이 더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청색 실은 대단히 비싼 실이었습니다. 6절의 “가는 베실”(쉐쉬)은 아마(亞麻)로 알려진 삼대 줄기에서 실을 뽑아 만든 하얀 삼베 천입니다. 이것은 당시 주로 애굽에서 생산되는 고급 천입니다. 염소 털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으로 실이나 천을 짤 수 있었습니다.

해달을 가리키는 타하쉬는 바다 생물인데. 홍해 연안을 비롯해 인도양과 태평양의 오세아니아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듀공(dugong)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동물의 가죽이 매우 질겨서 주로 샌들을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해달이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이것을 사용합니다. 해달 가죽이 비싸긴 했지만, 하란에 의하면, 숫양의 가죽이 해달 가죽보다 비쌌습니다. 아마도 숫양의 가죽을 고급 염료로 염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각목(싯딤나무)은 사막의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가시가 많은 나무인데, 벌레가 잘 안 먹고 잘 썩지 않는 단단한 나무입니다. 싯딤은 영어로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을 ‘아카시아’로 번역하면 혼동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조각목’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8절의 등유는 등잔대의 불을 밝히기 위한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불순물이 거의 없이 아주 깨끗한 올리브(감람나무) 기름으로 제조했습니다. 따라서 그을음과 퀴퀴한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유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과 향단에 매일 살라 향을 내는 향료가 여러 고급 재료들을 가루로 만들어 제조한 뒤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매우 비싼 향품들로 아주 강한 향취를 풍겼습니다. 이러한 관유와 향료 제조법은 출애굽기 30:34-36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향은 세 가지를 주성분으로 하여 여기에 소금과 특별한 향료가 가미되었으며, 사사로운 목적으로 함부로 이 향료를 만들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호마노를 비롯해서 대제사장의 복장 중 가장 화려하고 중요했던 에봇과 흉패를 장식할 보석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성막 건설의 품목들(10-19)

우리의 예배와 헌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여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헌신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성막 건축의 재료와 비품 나열은 거룩성의 수준에 따라 정리된 것을 보여줍니다.

 

10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11곧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12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13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14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15분향단과 그 채와 관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 문의 휘장과 16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17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18장막 말뚝과 뜰의 말뚝과 그 줄과 19성소에서 섬기기 위하여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니라(10-19)

 

위의 여러 가지 재료들로 만들어야 하는 성막 건설의 모든 비품들이 종합적으로 나열됩니다. 이 일의 책임자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며, 그 외 그들을 돕는 여러 기술자와 지혜로운 자들이 이 임무를 완수하게 됩니다. 나열 순서는 회막 건축에 소요되는 비품들과 재료들이 나타나고, 이어 지성소의 비품들과 내성소의 비품들, 마지막으로 뜰의 비품들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이 거룩성이 높은 순서에서 낮은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막 건설의 중요성과 그 준비 과정에서의 정성스러움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각자의 재능과 자원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한 협력과 헌신을 다하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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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4-02)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와 모세의 하산

출애굽기 34장 18-35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들을 준수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뜻에 순종하고 신앙의 본질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단순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강화하는 기회가 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비친 광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영적 변화를 경험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필수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절기들은 언약서의 일부로 23:14-19에서 법령화한 바 있는데, 현재의 언약 재수립에서 다시 선포됩니다. 안식일 규정 또한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기와 안식일이 여호와 예배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사건은 성막 건설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삼대 절기의 재확증와 첫 소산물의 제물(18-27)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이미 받은 구원과 은혜를 떠올리며 기뻐하는 교제의 축제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신앙의 기쁨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소중한 축제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와의 관계를 더욱 깊이 새기게 됩니다.

 

18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21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22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4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25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26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2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18-27)

 

본문은 세 가지 중요한 절기와 관련된 규정과 제사법을 다룹니다. 모든 첫 태생과 첫 수확물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특히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수장절에 성인 남자는 성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돌리고, 동물과 인간의 첫 태생에 대한 대속 규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삼대 절기와 추가 규정들(18-22절)

 

삼대 절기와 안식일은 여호와 예배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모든 성인 남자가 빈손이 아닌 제물을 들고(20) 성전에 올라와야 하는데(23), 여자와 아이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그들도 성소 소집 대상이었습니다(신 31:10-12).

3대 절기 히브리 명칭 일자(음력)
유월절
무교절
페시흐(유월절) 1,14
미초트(무교절) 1.15-2191주간)
비쿠림(보리 초실절) 1.16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샤부오트(밀 초실절) 3.6
초막절
수장절
수코트 7.15-21(1주간)
아차라 7.22(대회)

그들은 여러 이유로 성소에 올라오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성인 남자들은 매년 삼대 절기에, 즉 매년 세 번씩 의무적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우선 출애굽을 기념하는 무교절은 유월절 당일에 시작되어 8일간 계속됩니다(1월 14-21일). 14일은 유월절이고 15-21일(1주일)은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의 첫날, 15일과 마지막 날 21일은 절기 안식일로 모든 노동을 쉽니다. 절기 안식일은 정규 안식일보다는 느슨해 음식 준비와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1월 16일은 무교절 첫날인 15일 절기 안식일 후의 첫날인데, 이날 맨 먼저 영근 보리 이삭을 제단에 바칩니다.

보리의 초실절입니다. 이 절기에 발효되지 않은 무교병을 먹어야 했는데, 출애굽 당시 탈출의 긴급성을 상징했습니다(누룩을 넣어 하루 정도 발효해서 만든 떡이 유교병). 또한 누룩은 아마 부패를 상징하는 이유로 다른 제물과 섞여선 안 되었습니다(25). 초실절과 관련해서는 혼란이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비슷한 다른 두 날, 즉 ‘첫 추수물(처음 익은 것)을 바치는 날’(레 2:12)과 ‘곡식의 첫 이삭을 바치는 날’(레 2:14)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구분하자면, ‘곡식의 첫 이삭을 바치는 날’은 무교절 첫날인 15일(절기 안식일) 다음 날, 즉 음력 1월 16일입니다(레 23:15). 이날엔 추수물이라기보다는 최초로 영근, 아직 말랑한 보리 이삭을 취해서 제단에 바칩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뒤 하나님께 소제로 바칩니다.

반면에 칠칠절은 수확물 중 첫 번째 것을 바치는 날로 현재의 본문은 이날을 ‘맥추의 초실절’로 칭하고 있습니다(22). 칠칠절은 밀 추수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엄밀히 ‘밀의 초실절’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1월 14일) 돌아가신 뒤, 무교절의 첫날인 1월 15일(절기 안식일) 다음날(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해는 음력을 따르는 무교절의 첫날인 절기 안식일이 양력을 따르는 정규 안식일과 겹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은 보리의 초실절인 음력 1월 16일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보리의 첫 이삭, 첫 열매의 절기, 즉 보리 초실절의 의미는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19-20절은 유월절과 관련된 규정으로 모든 첫 태생이 여호와께 돌려져야 한다고 규정합니다(출 13:12-16). 정결한 가축의 첫 태생은 모두 제사로 바친 뒤, 기름을 태우고 남은 고기 부위를 화목제 규례와 비슷하게 제사장이 일부 가져가고, 나머지는 바치는 사람이 가져다 가족과 먹었습니다(민 18:17-19; 신 15:19-23).

그러나 부정결한 가축은 부정한 짐승이었기에 제단에 올릴 수 없었으므로 대속을 해야 했습니다(레 27:26-27). 레위기 27:27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그 부정한 짐승의 시장 가격에 (히브리어 숙어 ‘네가 정한 값’은 시장 가격을 의미한다) 1/5을 더하여 성전에 바쳐 대속한 뒤 개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대속하지 못했다면, 시장에 판 뒤 그 돈을 성전에 바쳐야 합니다.

특이하게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된 나귀의 첫 태생은 양으로 대속하거나 목을 꺾어서 죽여야 했습니다. 사람의 첫 태생(장자)도 대속 되어야 했는데, 정결한 짐승처럼 희생으로 바치진 않았습니다. 나귀의 첫 태생은 양을 잡아 대속한 것처럼 사람을 대신하여 양이나 어떤 짐승을 희생으로 바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 대신 생명’이라는 대속의 원리와 원칙에 잘 들어맞습니다.

민수기 18:15-16에 의하면, 첫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 후에 은 5세 겔을 바칩니다. 이것은 레위기 27:6에서 생후 1개월에서 5세까지의 남자아이(장자가 아님)를 성전에 바치기 위한 서원 값과 동일합니다(인간 서원은 연령에 따라 그 값이 차이가 났다). 은 1세겔은 대략 노동자의 한달 임금이었습니다.

 

(2) 삼대 절기를 위한 장소와 추가 규정들(23-27)

 

보리의 초실절로부터 7주, 즉 49일 후에 맞이하는 날을 칠칠절 또는 초실절(오순절)이라 부릅니다. 이 날은 음력 3월 6일에 해당하며, 보리의 초실절과는 달리 밀의 첫 수확물을 성전에 바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22절에 따라 이 날을 공식적으로 ‘초실절’(the Feast of the First Fruits)로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초막절 또는 장막절)은 일곱째 달, 즉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8일간 이어집니다. 첫날과 마지막 날인 15일과 21일은 절기 안식일로, 노동을 쉬어야 합니다. 21일까지 일주일 동안은 매일 가을 추수물의 소제와 함께 많은 짐승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어 22일, 즉 마지막 안식일에는 거룩한 대회(장엄한 성회)로 모여 더욱 많은 짐승들과 함께 추수물의 소제를 바쳤습니다(민 29장; 레 23:33-44).

하나님께서는 이 3대 절기에 성전에 올라올 것을 명령하시면서, 집과 토지를 비우고 온다 해도 직접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24).

피에 관한 25절의 규정은 유월절 제물뿐만 아니라 모든 희생 제물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피와 기름은 절대로 먹을 수 없으며, 반드시 제단에 바쳐야 합니다(레 7:22-27). 이것들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고, 기름은 힘과 풍요를 나타냅니다. 생명의 주인도, 힘과 풍요의 근원도 하나님이시기에, 그분께 피와 기름을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염소) 새끼를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는 명령은 출애굽기 23:19과 신명기 14:21에도 반복됩니다. 여러 번역본과 어근을 참고할 때, 이 명령은 염소새끼뿐만 아니라 모든 어린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단순한 법적 규정이라기보다, 동물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담은 인도주의적인 취지에서 제정된 명령일 것입니다.

 

모세의 하산과 얼굴의 광채(28-35)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진지하고 진정성 있게 만들어 주며,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영적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며, 신앙의 진정성과 헌신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28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29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28-35)

 

모세는 40일 동안 주야를 물조차 마시지 않는 금식 하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두 돌판에 새기셨고, 모세는 이 돌판들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40일간 구름 속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대면한 까닭에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묻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알지 못한 채 하산했습니다. 산 아래 백성들은 모세 얼굴의 광채를 보고 두려워 떨며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시내산에서 우레와 번개, 나팔 소리, 구름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장면과 유사합니다(20:18). 모세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주 희미한 것이었으나, 그조차도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을 안겼습니다.

‘광채 나다’의 동사 ‘케렌’은 모세의 얼굴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또한 31절에서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말씀을 전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십계명을 선포하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백성들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모세의 말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가리기 위해 수건을 썼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할 때는 수건을 벗었으나, 백성들에게 나아가 말씀을 선포할 때는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필자는 이 수건이 마치 구름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빽빽한 구름이 여호와의 불타는 광채를 가려 백성들을 보호했듯이, 모세의 수건은 그의 얼굴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백성들을 보호한 것입니다.

성막을 건설하기 직전에 모세의 위상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의 건설이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짓는 성막이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모세의 얼굴이 광채를 발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교제는 신앙의 진정성을 높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의 변화를 통해 신앙의 외적 증거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신앙 여정에서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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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4-01)

 


하나님과의 언약: 순종과 헌신의 길

출애굽기 34장 1-1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인 유혹과 우상 숭배를 경계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며, 모든 행동과 결정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십계명 돌판을 제작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다시 세우십니다. 모세는 새로운 돌판을 만들어 산에 오르고 여호와는 산 정상에 다시금 강림하십니다. 언약의 재수립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이 재언약에서 백성들에게 요구된 조건이 강화됩니다. 바로 금송아지 숭배 따위가 앞으로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언약의 재수립을 위한 모세의 재입산(1-9)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며, 예수님을 중보자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기억하고,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1-9)

 

본문에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준비하여 하나님과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성품을 선포하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간청합니다.

 

(1) 모세의 돌판 준비와 재입산(1-4)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 백성들의 대역죄의 책임을 물어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로 추정되는 삼천 명을 처벌하신 뒤 모세의 탄원을 받아들이시고 언약 재수립을 준비하십니다. 모세는 자신이 깨뜨린 증거의 돌판 두 개를 만들어 그것을 들고 시내산에 입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깨뜨린 십계명 돌판이 언약 파기를 상징했다면, 새로운 돌판은 언약의 재수립을 상징할 것입니다. 모세가 새로 깎은 돌판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말씀을 새기실 것입니다(1).

2절의 ‘아침까지 준비했다’는 표현을 볼 때, 모세는 밤늦도록 돌판을 다듬은 것 같습니다. 거룩한 구역인 시내산 입산 금지가 다시 강조됩니다. 이제 모세 홀로 꼭대기에 올라야 하고, 아무도 산에 들어가면 안 되며, 심지어 가축들도 풀을 뜯으러 접근해선 안 됩니다(3). 모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4).

 

(2) 여호와의 강림과 모세의 탄원(5-9)

 

해석에서 5절과 6절의 동사들은 주어가 3인칭 단수 ‘그’인데, 모세인지 여호와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5절 첫 번째 문장은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다’이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서 있었으며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외쳤다’입니다. 거의 대부분 의역본들과 학자들은 구름 가운데 강림하신 여호와를 이어지는 모든 동사들의 주어로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그와 함께 서 있었다’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외쳤다’의 주어는 모세라 주장합니다.

6절의 문장 ‘여호와께서 그의 앞을 지나갈 때, 그가 외쳤다(부르다)’에서 ‘그’가 모세라면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따라서 두 번 부른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33장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과 문맥을 고려해볼 때 설득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33:19에서 여호와께서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라고 약속한 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어서 7절은 20:5-6의 십계명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선포했던 여호와 자신의 속성에 대한 재진술입니다. 8절의 모세의 엎드림도 5-7절의 여호와의 영광의 나타남과 자기 속성의 선포 앞에 두려워 떤 반사적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다”의 히브리어 표현은 ‘나사 아본/페샤/하타’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죄를 들어올리다’, ‘죄를 짊어지다’ 혹은 ‘죄를 제거하다’라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주어일 때는 죄를 없앤다는 의미로 ‘사면하다’, ‘용서하다’로 해석됩니다. 물론 그에 따른 죄 사함(용서)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선포와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한 우렁찬 선언을 들은 모세는 두려움에 즉시 엎드려(8) 앞서 드린 기도의 내용을 반복합니다(9). 그것은 여호와의 동행에 대한 간청과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의 뻔뻔스런 범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2:9와 33:3,5에서 설명된 "목이 뻣뻣하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완고한 불순종을 나타냅니다. 이는 이후에도 오경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 배교를 표현하는 중요한 문맥으로 사용됩니다(출 33:3,5; 34:9; 신 9:6,13; 10:16; 31:27). 구약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완고함과 비교되며,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비난하는 문맥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왕하 17:14; 대하 30:8; 느 9:16-17,29; 렘 7:26).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는 하나님과 모세의 오랜 부재와 침묵으로 인한 조급한 배신이었으며, 당장에 자신의 필요와 안전을 보장해줄 대체 신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원래 그들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 아니라, 언약 관계 속에 선택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물’이었습니다(참고, 19, 24장).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왕과 신하의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신하는 왕의 소유로 그의 종입니다. 동시에 신하는 왕의 보호와 후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이 그 모든 혜택을 보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왕으로 먼저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시며 복과 더불어 보호와 후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도 이에 적극적인 순종으로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들의 배교는 매우 신속하게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산에 올라 십계명 돌판과 더불어 성막 건설을 위한 설계 도면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32:1).

산꼭대기의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산 아래 백성은 최악의 악령 충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늘이 맞닿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중재자 모세를 통해 모든 구원의 준비를 완료하셨으나, 산 아래의 땅에 있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배신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하늘 성전을 삼으며 지상에 오셨지만(요 2:21),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빛으로 오신 그를 배척하고 어둠 속에 헤매었습니다(요 1:10-12). 이러한 맥락에서 모세는 참된 중재자이자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언약의 재수립(10-17)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며 다른 우상이나 세속적인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거나 타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 유혹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11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12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13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5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16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10-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새롭게 하시며,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이방 민족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파괴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1) 가나안 족속의 추방을 약속하심(10-11)

 

돌판에 십계명을 새롭게 새기신 하나님께서 언약 재수립을 확증하십니다(10).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이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사역에 사용되는 동사 ‘바라’로 표현됩니다. 곧 이스라엘을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바로 가나안 땅 정복입니다. 백성들은 친히 그들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또한 사자를 그들 앞에 보내시는 여호와께서 행하실 일을 이제 잠잠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은 추방될 것입니다(11). 그것이 10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무 국민에게도 행한 적 없는 새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민족들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불순종과 죄로 인한 징벌과 멸절은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자비하십니까? 사람의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하나님은 세상의 물을 동원해 홍수로 멸절하셨습니다(창 6:5). 동일한 이유로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가득한 그 땅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동원해 전쟁으로 멸절하셨습니다(창 15:16). 자비로운 하나님께 심판이라는 단어는 매우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은 또한 죄에 대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시는 정의로운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엄중한 심판자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가나안과의 약조 금지와 우상 파괴 명령(12-17)

 

하나님께서는 앞서 23:33에서 엄중히 경고했던 것을 반복하십니다. 만일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체결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12).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출발점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독점적 충성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은 다른 민족과의 조약 체결이 금지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제의에서 자신들의 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함께 나누며 견고한 결속을 다지는데, 그들과 조약을 맺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이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과의 조약은 자연히 혼인 관계로 이어지며, 결국 가나안 민족이 그들의 한 식구가 되면서 그들의 신을 함께 섬기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조약과 더불어 우상숭배를 금지하시면서, 십계명 선포에서 사용된 표현을 재차 사용하십니다: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우리의 삶 속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만을 섬기며, 세속적인 우상이나 유혹에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니, 우리는 그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과 보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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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3-02)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하는 모세

출애굽기 33장 12-23절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활력을 주며,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그분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신앙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본문에서는 모세의 탄원 기도가 계속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오랜 실랑이를 하는 듯이 보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모세의 계속된 탄원과 더불어 구체성을 띈다는 것입니다. 사자를 보내달라는 부탁에 소극적인 답변을 주신 여호와께서 거듭된 모세와의 대화를 통해 마침내 ‘내가 친히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답변(12-17)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족과 이웃, 나아가 열방을 위한 기도의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나라들이 하나님께 굴복하도록 중보기도를 계속해서 쉬지 말아야 합니다.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12-17)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간청하며, 그들의 동행을 간절히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장면은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동행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안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스라엘이 정체성과 목적을 찾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핵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1) 사자를 보내달라는 탄원과 여호와의 답변(12-14)

 

현재의 장면은 진영 밖 회막에서 하나님과 대면한 모세의 마지막 기도와 탄원일 것입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의 책임은 하나님 없이는 버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오직 그분이 ‘내가 친히 가리라’고 약속하실 때 모세의 역할은 유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동행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그냥 여기 있게 하라고 호소합니다(15). ‘차라리 나를 죽이소서’(생명책에서 지우소서)라며 매달렸던(32:32) 모세의 절박한 탄원이 계속됩니다. 모세는 백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백성을 대신하는 자입니다. 모세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용서와 속죄를 위한 탄원을 드립니다. 약속하신 대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보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12). 이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동행해달라는 요구를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름으로도 알고 자신의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 이것은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앞에서의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을 배경으로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최초로 모세와 조우하셔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출 3:4).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름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한 사람을 안다는 의미는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긴밀한 친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모세를 알았습니다. 모세는 언제 은혜를 입었습니까? 물론 이름을 부르기 전부터 그는 파라오의 유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인물로서 오래 전에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 편에서 그 은혜는 구체적인 동행 약속을 통해 확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모세의 거듭된 탄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올라갈 것이고 모세 너는 쉬게 할 것입니다(14). 여기서 ‘쉬다’, ‘중단하다’, ‘머물다’라는 의미의 동사 ‘누아흐’는 앞서 모세에게 적용된 ‘인도하다’, ‘이끌다’(출 32:34)라는 의미의 ‘나하’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놀이(word-play)입니다. 모세는 더 이상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분주할 필요없이 이제 ‘쉴’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수행하실 것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모세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준비된 응답입니다. 물론 모세의 역할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세는 여전히 지도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인도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한 어미 독수리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한편, ‘내가 너를 쉬게 한다’는 표현은 신약의 예수님 말씀에서도 발견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2) 친히 동행해달라는 탄원과 여호와의 답변(15-17)

 

모세는 친히 동행하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음에도 확증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은총을 입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세는 말합니다: 이 백성은 만민들로부터 구별되어 여호와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이 아닙니까? 그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세가 요청한 증거란 18절에서 모세가 부탁하는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여호와께서는 ‘나의 선한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19). 하나님은 답변하십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행할 것이다”(17). 그분이 백성들과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광야의 여정은 이제 그분의 ‘영광’이 함께하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한 모세(18-23)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의 신앙에 힘과 방향을 제공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신앙 생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18-23)

 

모세가 동행의 징표로 ‘여호와의 영광’을 요구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행동이 아닙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 영광이 ‘성막’을 의미한다고 보며, “이제 성막을 완성시켜 주옵소서”라는 기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요청은 여호와의 ‘동행하심’을 확증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권능은 이미 많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에서 출발한 직후부터 하나님의 불구름 기둥이 시내산까지 이끌어 가셨으며, 이는 하나님의 동행의 명백한 징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호와의 동행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증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영광의 현시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시내산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 즉 불, 구름, 광채, 우렛소리, 신령한 나팔 소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모세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들 앞에 장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분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좌정하심을 의미하는 징표입니다. 따라서 영광의 사라짐은 하나님이 떠났음을 나타내기에, 모세는 ‘주의 영광’을 다시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동행을 보장받기 위한 간절한 요청이었습니다.

영광의 현시에 대한 요청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소서, 우리와 동행해주소서’라는 간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풀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베푸는 자의 재량입니다. 20절의 진술은 중요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인간은 죽습니다(출 19:21; 신 4:33; 삿 1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의 본체를 직접 보여줄 수 없습니다.

22-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얼굴을 직접 보여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모세를 손으로 덮었다가 등만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21-22). 이 ‘덮은 손’은 시내산 이야기의 맥락에서 초자연적 신적 현현을 의미하는 ‘구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빽빽한 구름 속에서 자신의 희미한 영광만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났다는 표현(출 33:11; 민 12:8; 신 34:10)이나 하나님을 뵈었고 만났다는 표현(사 6:1)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한적으로 보여주시거나 안전장치를 통해 이루어진 만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제한된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관련하여, 초자연적 구름에 대해 보충할 내용이 있습니다. 구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압도적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출 16:10). 이는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발현인 광채와 강력한 화염을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셔야 했습니다.

그 구름은 때로 ‘먹구름’(아라펠)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출 20:21; 한글개역의 ‘암흑’ 혹은 개역개정의 ‘흑암’), 이렇게 그분의 영광을 이중 삼중으로 가리지 않으면 견뎌낼 사람이나 피조물은 아무도 없습니다(출 19:21). 심판의 날이 이르면 여호와는 악인을 맹렬한 불로 태우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빛이신 그분은 불이 되고 불꽃이 되어 하루 사이에 숲과 기름진 밭이 모두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사 10:16-18).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라고 말합니다(딤전 6:16).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고 선언합니다. 또한 바울은 회심 전, 그리스도인을 체포하고 죽이고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영광의 광채 가운데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행 9장). 빛에 사로잡힌 그는 즉시 땅에 엎드려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후 그는 사흘 동안 눈이 먼 채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갈망하며, 그분의 영광을 경험하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신앙에 활력을 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그분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삶을 추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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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3-01)


하나님의 동행의 약속: 모세의 중재와 백성의 회복

출애굽기 33장 1-11절


 

도구의 용도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칼은 숙련된 요리사에게는 유용한 조리 도구가 되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사용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고리는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식이지만, 동시에 우상을 만드는 재료로 변질될 수 있었습니다.

 

  • 본문에서는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사자만 보내고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진 밖에 있는 회막도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회복할 수 있는 문은 열어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준한 말씀을 듣고 반성을 보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반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땅에 대한 약속과 여호와이 부재하심(1-6)

종종 자녀들이 부모와 담을 쌓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이러한 간극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진심 어린 기도와 순종, 그리고 꾸준한 신앙 훈련이 필요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을 대속하려는 계획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떠나시겠다고 경고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경고에 큰 슬픔을 느끼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겸손히 나아갑니다.

 

(1) 여호와의 부재 가운데 점령될 땅(1-3)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당혹케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이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닌 모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과 절교하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앞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산할 즈음 산 아래에서 광란의 배교 축제가 발생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네 백성이 부패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32:7).

황금 송아지 배교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했던 언약의 맹세는 유효합니다.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3). 하나님께서는 완고한 바로를 거듭 치셨던 것처럼 그들과 동행하면서 목이 뻣뻣한 그들을 진멸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를 보내 약속대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을 내쫓으실 것이라 하십니다(2). 그런데 3절에서 여호와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여호와와 주의 사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구분하십니다. 더불어 백성 앞에서 전진하시는 모습은 그분의 강력한 동행의 표시였지만, 불행히도 사자와의 분리는 백성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모순되어 보이지만 홀로 보내진 이 사자는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은혜의 끈이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뒷바라지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언약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2) 백성의 낙심과 장신구를 떼어냄(4-6)

 

백성들은 슬픔으로 인해 몸을 단장하지 않습니다. 진멸을 경고하신 하나님께서도 모든 장신구를 떼며 회개할 것을 강도 높게 요구하십니다. 70인경은 장신구(아디)를 ‘코스모스’로 옮기는데, 이것은 ‘우주’, ‘세상’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질서의 의미를 내포하는 ‘장식’, ‘화장’의 의미로도 쓰이며, 영어의 cosmetics(화장품)의 어원입니다. 이 장신구 제거는 자신을 낮추는 회개를 위함이며, 성막 건설에서 금은동과 각종 재료의 봉헌은 별개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진 밖에 세워진 회막(7-11)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그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 죄인인 우리와 거리를 두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돌이키시고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허락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장신구를 모두 떼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7-11)

 

본문 7절에서 동사가 갑자기 반복적 용법의 미완료로 바뀝니다. 이 시제의 전환은 11절까지 이어집니다. 모세는 진 밖에 회막을 세우고, 여호와께 간구하고 싶은 자(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두 진 밖의 회막에 모이도록 했습니다(7).

여기서 난제 한 가지를 다뤄야 합니다. 모세가 진 밖에 친이 회막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아직 회막(성막)은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막은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학자들 대부분은 ‘두 회막론’을 지지하고 소수는 ‘단일 회막론’을 따릅니다. 두 회막론에 의하면, 현재의 회막은 성막이라 불리는 회막이 지어지기 전에 사용된 임시적인 간이 시설물입니다. 두 시설물은 ‘회막’이라는 명칭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단일 회막론에 의하면, 성막이 곧 회막이며 이것이 종종 진영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의 에피소드는 곧 건립될 진영 중앙의 회막이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밖에 설치되곤 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임시로 진영 내의 시설물은 성막으로 칭하고 진영 밖의 것은 회막이라고 칭하여, 둘 사이의 주요 차이점 몇 가지만 살피려고 합니다. 첫째, 성막은 진중에, 회막은 진 바깥에 있습니다. 둘째, 성막은 제사용이고, 회막은 신탁용입니다. 셋째, 성막은 제사장이 지키고, 회막은 여호수아가 지킵니다. 넷째, 성막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고(샤칸), 회막에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십니다(야라드). 다섯째, 성막은 규모가 크지만, 회막은 모세의 개인 천막으로 혼자서도 칠 수 있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두 회막론이 다수의 견해인데 이들은 현재의 본문에서 언급된 회막은 회막 건설 이전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와는 별개의 회막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단일 회막론을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둘 사이의 차이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성막이진 밖으로 이동한 것이 진 밖의 회막입니다. 진 밖으로 이동한 이유는 백성의 범죄 때문입니다. 실제로 진 밖 회막에 대한 기사는 모두 범죄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민 11:14-17, 24-30; 12:4-10; 참조. 신 31:14-15). 둘째, 성막에서 제사만이 아니라 신탁도 역시 주어졌습니다. 셋째, 성막에서 제사장의 역할, 회막에서 여호수아의 역할이 반드시 바깥 회막에 제사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넷째, 성막에 사용된 동사 ‘시간’도 ‘이동성’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합니다(출 24:16; 참조. 출 40:34-35). 다섯째, 모세가 천막을 쳤다는 설명을 꼭 혼자 쳤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책임자 역할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현재의 본문 33:7-11에서 회막 건설 이전의 느닷없는 회막의 등장은 논리적 시간을 초월하는 탈시간적 혹은 몰시간적 문학적 기법 때문입니다. 즉, 앞으로 반복적으로 발생할 사건들의 패턴화한 패러다임으로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이 장면이 끼어든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세는 중대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회막을 취하여 진 밖에 치곤했다’(민 11:14-14, 24-30; 12:4-10). 회막의 진 밖 이동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의 진영으로부터 떠나심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시설물의 이름이 같다는 것은 두 실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필자의 견해로 단일 회막론의 반론 중 몇 가지는 매우 그럴듯합니다. 특히 추후의 같은 사례들에서 한결같이 백성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회막이 밖에 설치된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두 이론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단일 회막론의 어떤 논리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첫째, 물론 그들이 주장한 대로, 범죄로 인한 성막의 진 밖 이동이 회막일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진 밖 회막에서는 신탁이 주 기능이었음은 명백합니다. 필자는 이 이론이 맞다면 번제단과 마당의 기물, 울타리까지 이동했다고 보지 않고, ‘회막’이라 불린 천막 건물만 (지성소와 내성소) 이동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제사는 잠시 중단되고 신탁만 주어지게 됩니다. 셋째, 성막 책임은 제사장에게, 회막 책임은 여호수아에게 있다는 명백한 차이도 수긍해야 합니다. 만일 단일 회막론이 맞다면, 이 차이는 모세에 이어 그의 후계자로 성막을 총책임지는 여호수아의 임무를 미리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라 봐야 합니다. 넷째, 성막의 동사는 ‘샤칸’(거주하다), 회막의 동사는 ‘야라드’(내려오다)라는 차이도 조화를 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두 동사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단일 회막론이 맞다면 이런 차이는 진 밖으로 잠시 이동한 회막의 임시적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진 밖 회막으로 여호와께서 강림하여 내려오시고(야라드),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그 떠나심은 진 안으로의 복귀를 위함입니다. 필자는 이 모든 논리들이 두 회막론에도 모두 잘 들어맞는다고 봅니다. 즉, 성막과 상관없이 진 밖의 회막이 백성의 중대한 범죄로 인해 설치된 별개의 건물이라 해도 위의 논리는 모두 잘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회막’이란 용어를 성막에만 고정해서 적용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한편 현재의 문맥에서 성막과 상관없이 회막이 등장하는 이유도 몰시간적 기법을 끌어올 필요 없이 흐름상 잘 들어맞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회막 설치와 그곳에 온 백성이 나아와 집회를 가졌고, 모세는 거기서 하나님께 마지막 탄원의 기도를 올렸으며(33:12-23), 이 일로 금송아지 사건이 최종적으로 수습됩니다. 이 회막이 금송아지 사건 해결에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시에 이 장면은 반복성(frequent mode)을 나타내는 미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중대한 범죄 상황에 대한 패턴화한 사건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신 축복으로 우상숭배라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길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범죄 했을 지라도 회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간절히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하시고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 만날 것입니다. 죄인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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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2-02)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보기도

출애굽기 32장 15-35절


 

일반 사람들은 대형 사건을 뉴스나 소식으로 들었을 때, 이를 가볍게 넘기거나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 그 충격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커집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했을 때 그 심각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 본문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목격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노력을 다 하면서 완전히 용서를 받기 위한 둘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심각성(15-18)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넘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벌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15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15-18)

 

모세는 두 개의 십계명 돌판을 들고 시내산을 하산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글자를 새긴 돌판들입니다. 백성들의 광란의 배교에 대해 하나님께 듣고 하산한 모세는 상황을 직접 파악합니다. 축제의 현장에서 들리는 괴성이 어찌나 컸던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큰 싸움이 난 줄로 착각했습니다(17). 모세는 그 소음이 ‘노래 소리들’(아노트)인 것을 간파했습니다(18).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공포를 느끼게 한 여호와의 강림과 임재를 경험했고, 그분께 순종을 결단하며 언약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결연한 순종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24장에서 언약식을 마친 후 산위에서 하나님께 성막 설계를 받기 위해 40일간 머물렀습니다(24:18).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이 짧은 기간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제작하며 하나님과 모세에게 반항하는 배교의 길로 빠진 것입니다. 아론이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성의 타락을 그의 무능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토록 완악했던 바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모세의 분노와 질책(19-21)

세상에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은 진리보다 가장(假裝)하여 능력자처럼 현혹하지만, 진리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거짓과 진리를 분별해야 할 때, 진리 편에 서시겠습니까? 또한 성도들의 잘못을 보고 먼저 돌아보고 당신의 책임처럼 기도하는 지도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19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20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21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19-21)

 

백성들의 춤은 분명 소리를 지르며 온몸으로 추는 광란의 춤이었을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위한 의식이었던 이방 예배의 특징을 잘 암시합니다. 통음난무(痛飮亂舞) 의식은 종교 행사에서 신과 접속하거나 신을 부르기 위해 황홀경에 빠져 괴성을 질렀음을 암시합니다.

분노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트립니다(19).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파기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중재 기도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신 후에 이 깨진 돌판은 나중에 다시 제작되는데, 이때는 모세가 친히 깎습니다(34:1,3,28-29). 이것은 언약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송아지 숭배는 애굽의 영향이 분명합니다. 특히 애굽 도시 온은 고센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의 기원을 짐작케 합니다. 후대에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을 멋대로 벧엘과 단으로 모시고 와 송아지 형상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왕상 12:28). 그뿐만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로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과 아세라 상이 함께 등장하곤 합니다(왕하 17:16). 그리하여 여로보암의 이 배교 행위는 두고두고 ‘여로보암의 길’ 혹은 ‘여로보암의 죄’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르는 범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20절은 모세가 이 금송아지 형상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물에 타서 백성이 마시게 했다고 말합니다(참조. 왕상 23:6,12). 어떻게 금덩어리 형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들었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이것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나무 조각상에 금을 입힌 우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우가릿 문헌에 비슷한 기록이 나타납니다(ANET, 149:ii).

가나안의 신 못(Mot)이 아낫(Anat)에게 죽임을 당한 후, 아낫은 그 시체를 태워 맷돌로 갈아 들판에 뿌립니다. 이에 비추어볼 때, 아마 금덩어리로 된 송아지 형상도 불로 그을린 뒤 맷돌로 갈아 가루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금송아지의 크기는 황소의 실물 크기가 아니라 상당히 작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가나안 일대의 신전터들에서 발견된 몇 개의 청동 황소 주조물들은 크기가 불과 20센티미터 안팎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금송아지 형상은 그보다는 훨씬 컸을 듯합니다.

신명기 9:21에 동일한 이야기, 즉 금송아지 우상 파괴 장면이 나옵니다. 그 기록은 현재의 본문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가루를 시내산의 시냇물에 뿌렸다는 기록 외에 백성들이 마시게 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상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민수기 5:11-15의 시험 의례와 관련시킵니다: 의심받는 아내가 쓴물을 마심으로써 진실을 밝힙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어지는 26-29절의 레위 지파에 의한 심판의 학살에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그 우상의 가루를 마시고 범인으로 드러났습니다.

즉, 본문이 침묵하고 있으나 온 백성이 이 우상의 가루를 탄 물을 마신 뒤 어떤 분명한 징표에 의해 주동자들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견해의 장점은 이것이 백성들 중 삼천 명이 선별되어 학살당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것이 시험 의례라는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모든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책임을 묻고 그 범죄를 확증하는 상징적 행위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중에서 주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삼천 명을 색출해서 처벌했을 것입니다.

 

아론의 변명과 책임 회피, 레위인에 의한 징계(22-29)

공동체의 죄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에게 수치가 됩니다. 이는 외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공동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모든 구성원이 아픔을 감수하며 개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건강을 위해 헌신과 기도로 함께해야 합니다.

 

22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22-2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책임을 아론과 훌에게 맡기고 산에 올라간 바 있습니다(24:14). 그러나 아론은 이 직책을 배교의 길을 가는 데 사용하고 만 것입니다. 모세는 정당하게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아론에게 묻습니다(32:2-6, 21-24). 아론은 이 모든 일이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여호와를 신뢰하지 못한 인내심 없는 백성 탓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습니다(23-24). 아론의 이 비겁한 모습은 백성을 위해 백성을 위해 생명을 건 모세와 대조됩니다.

물론 더 큰 책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습니다. 22, 25절에서 모세는 은혜를 받은 이 백성이 악하고 ‘방자하며’ (파라 ‘멋대로 다니다’) 그들이 온 민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결국 무서운 징벌을 당합니다. 모세는 이 일을 주동한 사람들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의 형을 집행할 사람들을 찾는 데 레위인들이 앞장섭니다(26). 그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습니다(28). 잔인하게 보이겠지만, 이것은 에덴의 추방과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와 반역에 대한 정당한 신적 사형 집행이었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도 그러할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 사건의 해결에 앞장서 헌신을 한 이유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29). ‘오늘’ 복을 받을 것이라 표현되어 있으나, 이것은 앞으로 받을 복도 의미합니다. 그들이 헌신의 대가로 보장받은 복은 분명 레위인이 전담할 성막 직무일 것입니다.

 

모세의 탄원과 하나님의 응답(30-35)

기도는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요즘 당신은 무엇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있습니까?

 

30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4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0-35)

 

여호와 하나님을 잔인한 보복의 하나님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분이 죄에 대해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은혜와 자비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의 기도를 드립니다(30). 그의 탄원은 사생결단의 절박한 간구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건 일종의 대속의 기도였습니다.

11절에서 이미 모세의 기도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앞서 11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라는 말은 ‘구하다’의 히브리어 ‘할라’가 ‘아프다’, ‘안타까워하다’, ‘쓰라려하다’라는 뜻임을 고려할 때, 모세가 문자적 의미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애타게 구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죄를 위해 짐승이 희생되지 않았고 속전이 지불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모세의 탄원을 통해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앞서 삼천명의 희생은 백성의 죄에 대한 배상적 징벌의 의미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의 탄원이, 32절에서 보듯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드린 중재의 기도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속죄하여 구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매우 원론적입니다. 모세, 너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입니다(33).

하나님께서는 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보내신다고 한 사자는 약속대로 보내실 것이나 백성의 죄로 보응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그 죄를 보응하실 것입니다(34). 35절의 결론부에서 여호와께서 그 삼천 명의 죽음은 바로 금송아지 배교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였음을 다시금 천명하십니다. 모세의 대속의 기도와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인해 더 이상의 죽음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헌신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이웃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므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무지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이웃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지역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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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2-01)


모세의 중재: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다리

출애굽기 32장 1-14절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으로,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의 분노는 쉽게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예를 통해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른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를 반영하고 거룩하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분노를 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본문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율법들과 성막을 만드는 방법을 듣는 동안, 산 밑에서는 당황한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자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분노하셨고, 모세는 자기희생적인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킵니다.

 

금송아지 주조(1-5)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더 의지하게 됩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물질과 건강을 잃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우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곤 합니다.

 

1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1-5)

 

모세가 시내산에 오래 머물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아론은 그들의 금 장식품을 모아 송아지를 만들고 제단을 세웁니다. 백성은 그 송아지를 섬기며 이를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으로 여깁니다.

 

(1) 우상 제작을 위한 금모으기(1-3)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조해졌습니다. 아론에게 운집하여 대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시내산의 하나님을 대체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할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 어찌되었느냐’고 투덜거립니다. 겉으로는 모세를 지칭하지만, 은근히 모세를 지도자로 임명한 하나님에 대해 비아냥대고 있습니다.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사실상 자신들의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식양과 디자인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의 형상과 제단과 그것에 대한 신념이 모여 거짓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계시 종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의 초월적 법과 질서를 진리로 믿지만, 자연 종교는 스스로 관찰하고 파악한 자연의 내재적 원리와 법칙을 진리로 삼습니다. 백성들은 당장의 안전과 보호 속에 자신들을 인도할 구체적인 신을 필요로 했으며, 그 신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황금 송아지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신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왕의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불안해하며 눈에 보이는 지상 왕을 갖기 원하는 패턴은 반복됩니다(참조. 삼상 8:5). 아론은 영적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집단적인 종교적 타락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며, 적극 동조하는 모습마저 보였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백성을 단호하고 엄중하게 꾸짖은 뒤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탄원 기도를 드린 모세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여기서 백성들이 요구한 신은 복수 ‘신들’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4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금송아지에 더하여 부수적으로 여러 신의 형상들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금송아지의 형태가 다른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암시되듯이 반인반수(satyr)와 같은 복합적 형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더 그럴듯하게는, 금송아지는 하나지만 그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송아지 신에 덧붙여 많은 신들을 필요로 했을 수 있습니다. 신들이 많을수록 평안과 안전은 더욱 잘 보장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마 황금 송아지는 그리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일대의 신전에서 발견된 청동 송아지상들은 한결같이 불과 2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이며, 또한 백성이 모은 금의 총량은 단순히 금귀고리만을 빼서 녹인 소량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성령의 감동 속에서 백성들이 가진 대부분의 금붙이를 모은 금이 1톤가량인데, 이것 역시 가로 세로 높이 37센티미터 정도의 양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은 문자적으로 ‘우리 앞에 걸어갈 신들’입니다. 즉 시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신들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8절에서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 신이 바로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라고 선포하고 찬양합니다.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극단의 배신입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위한 신들을 ‘만들라’(아사)고 요청합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합니다. 말 그대로 ‘만들어진 신’입니다.

아론은 신의 형상을 제작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금귀고리를 빼서 금을 모으라고 지시합니다. 애초에 백성들이 모은 금붙이는 성막 건설에 쓰일 봉헌물이 되어야 했지만, 지금은 우상 제작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2) 송아지 형상의 주조(4-5)

 

소는 고대근동 지역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특히 고대 애굽의 멤피스에서는 황소의 신 ‘아피스’가 숭배되었고, 온에서는 역시 황소의 신 ‘므네비스’가 숭배되었습니다.

5절에서 아론은 제단을 쌓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아론은 금송아지 형상을 여호와를 형상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론은 자기 멋대로 여호와의 절기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시간표로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모세를 통해 선포되어야 하지만, 아론은 율법의 중계자를 넘어 스스로 율법의 창안자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송아지 형상을 여호와로 칭함으로써 그분의 신성한 이름을 모독하고, 불법적 제단을 쌓아 신성한 공간을 더럽히며, 절기를 임의로 지정해 신성한 시간을 오염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예배(6-8)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인간의 방식으로 종교적 행위를 왜곡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성경의 원칙을 신뢰하며, 자신의 신앙 생활을 정확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깊이 이해하고,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6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6-8)

 

아론이 절기로 지정한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론이 임의로 제단을 쌓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시내산 언약식에서 모세의 제단 축조(24:4)와 대조됩니다. 또한 아론의 제단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축제의 향연을 즐긴 것은 여러모로 24장의 언약식과 대조됩니다. 언약식에서도 백성들은 많은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바쳤고, 모세는 그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절반씩 나누어 뿌렸으며, 그 후 모세와 미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산 위에 올라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지금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그 언약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6절의 ‘뛰어놀다’의 의미를 종교적 축제의 광적인 음란행위로 보는 번역본(NIV, CJB)과 학자들이 많습니다(Childs; Durham; Rashi).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고대 근동의 정상적인 종교 의식의 순서에 따른 질서정연한 홍겨운 연회가 개최된 것으로 봅니다(Hamilton). 이 동사의 의미론적 범주를 볼 때, 둘 다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인용하는 고린도전서 10:7-8에는 그들의 종교 축제에 떠들썩한 음란행위가 수반되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전쟁의 소음과 같았다는 사실(17)은 축제의 성격을 짐작케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정상에서 산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즉각적인 하산을 명하십니다(7).

7절의 동사 ‘부패했다’(쉬헤트)는 파괴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참조. 창 6:11,12).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그 타락한 땅을 ‘파괴할 것이다’(쉬헤트)라고 말씀하시고(창 6:13),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파멸의 심판(쉬헤트)을 예고하십니다(창 18:28,31,32).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탄원(9-14)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 하나님이 진노하셨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재로 재앙이 거두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고 타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임을 일깨워줍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중재를 본받아 자신의 믿음을 깊이 새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9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9-14)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중재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그들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1) 하나님의 진노(9-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 전체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에 대한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나를 내버려두라’는 말은 그들을 멸망시킬 결심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내가 패역한 백성을 버리고 모세, 너를 통해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사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것이었는데(창 12:2), 그 언약을 파기하고 약속의 계승자를 바꾸시겠다는 선언입니다.

 

(2) 모세의 탄원과 하나님의 응답(11-14)

 

모세는 자신을 통해 대안적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32:32). 뜻을 돌이켜 달라는 기도는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탄원 형식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여기서 출애굽기 6:8 이후에 잠시 중단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재등장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조상들에게 선언하셨던 약속들을 상기시키며 자비와 용서를 구합니다. 모세의 결사적 탄원의 기도와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특별한 관계에 따라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그분을 최고로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섬기는 공동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모세처럼 사심 없이 중보기도를 통해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당신의 충성과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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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1-01)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성막을 제조할 사람들

출애굽기 31장 1-18절


 

교회마다 봉사할 일꾼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항상 봉사할 사람은 부족하고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하지만 준비나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교회를 섬길 일꾼을 세울 때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할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성막 건설이 본격적으로 준비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술자들을 불러 자신의 영으로 충만히 채우십니다. 브살렐이 실질적인 현장감독으로 임명되고 오홀리압은 그의 참모 역할을 합니다. 성막 건설에서 모세가 총감독이라면 브살렐의 임무는 현장 감독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원래의 재능에 신적 능력이 추가됩니다. 오홀리압과 다른 기술자들에게도 신적 지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기술자들의 임명(1-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여 그들이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능력은 그들의 자연적인 재능과 경험을 뛰어넘어, 신적인 지혜와 기술로 충만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막 건설을 맡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탁월한 기술과 지혜로 성막과 성물을 제작했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6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1-6)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성막 건설의 책임자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하셔서 지혜와 기술을 부여하셨습니다. 이들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성막과 기물들을 제작했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신성한 창조 사역으로서 성막 건설을 이루었습니다. 이로써 성막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완성된 신성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1) 브살렐의 지명과 그의 임무(1-5)

 

브살렐은 유다 지파 소속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입니다. 홀은 출애굽기 17장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등장한 인물로, 그는 아론과 더불어 모세의 팔을 붙들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출 17:10). 만약 홀이 브살렐의 할아버지라면, 브살렐은 매우 젊은 기술자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성막의 건설의 현장감독으로 임명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어 신적 지혜와 총명, 지식과 여러 기술을 겸비하게 하십니다(3). 브살렐은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 온갖 귀금속을 능숙하게 다루고 보석을 깎고 나무를 조각하는 등 다양한 재능을 지닌 사람입니다(4-5).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며 만물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고, 창세기 41:38에서 애굽의 바로는 요셉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 그의 지혜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그 동일한 지혜와 창조의 영이 브살렐과 성막 건설에 참여하는 기술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한 것입니다.

이 지혜의 영은 잠언 8:22 이하의 천지창조에서 역할했던 인격화된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막 건설이 또 하나의 창조 사역임을 암시합니다. 성막 건설은 새 에덴동산의 창설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성막과 제사장의 옷을 축조하십니다.

 

(2) 오홀리압의 지명과 그의 임무(6)

 

오홀리압은 브살렐을 돕는 자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지도하에 모든 능숙한 기술자들이 소집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적 지혜로 충만케 하여 성막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지어지게 하십니다. 성막과 제사장의 옷은 인간이 디자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지을 수 없습니다. 이 성물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지도하셔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을 충만케 하고 그분의 지혜가 그들의 심장에 가득 채워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손을 가득 채우심’(위임하심)으로써 그들이 성막 봉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기술자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우심’으로써 그들이 성막 건설의 임무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렇듯 성막은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십니다.

 

기술자들이 만들어야 할 성막의 품목들(7-11)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진정한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7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8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9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10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정교하게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의 아들들의 옷과 11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7-1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더불어 기술자들이 만드는 성막의 각 비품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럼 브살렐과 오홀리압, 모든 전문 기술자들은 아무런 지식과 경험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막을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그들은 기술과 재능을 겸비한 각 분야의 전문직 종사자였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부터 건축과 직조, 연금술과 세공 기술자로 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과 기술을 성막 건설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지혜와 경험, 능력을 뛰어넘은 신적인 은사가 추가로 부어져야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규례(12-18)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바쁘고, 쉬지 않고 일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리고,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법적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한 필수적인 시간입니다.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3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18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12-18)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성막 건설보다 우선시하며, 이를 지키는 것이 영원한 언약의 표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증거의 두 돌판을 주시며, 이 율법을 직접 기록하셨습니다.

 

(1) 안식일 준수의 명령과 위반에 대한 경고(12-15)

 

성막과 제사장 옷에 대한 지침이 주어지고 이제 성막 건설을 착수하기 직전에 안식일 규례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35장에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 본격적인 성막 건설이 실행되는 장면과 분명하게 비교됩니다. 거기서 성막 건설의 수행은 안식일 규례의 재확인과 더불어 시작됩니다(출 35:1-3).

이러한 특징은 성막과 안식일에 대한 몇 가지 밀접한 관련성을 재확인해줍니다. 첫째, 출애굽기 35장의 견지에서 성막 건설 직전의 안식일 규정 등장은 성막 건설이 안식일에 진행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 일 수 있습니다.

둘째, 성막과 모든 기물들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 장소에 이어 그분을 기억하는 예배의 시간, 곧 안식일 규정을 강조하면서 성막 건설 지침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성막 건설이 일종의 새로운 창조 사역(특히 에덴의 재창설)이라면, 6일 창조 후 7일째에 안식일이 선포된 것처럼, 성막 건설 지침이 의도적으로 안식일과 관련되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영원한 언약의 징표로서의 안식일과 돌판(16-18)

 

안식일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 징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징표가 된 것들은 이외에도 여럿이 있습니다. 증거막이라 불리는 회막(출 38:21); 증거궤라 불리는 언약궤; 십계명이 새겨진 증거의 돌판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징표이자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의 기념물입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쉼 없이 일했지만 이제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본받아 기쁘게 노동을 한 뒤 안식일에 쉬어야 합니다.

18절은 성막 건설 지침을 최종 마무리하는 진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증거의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24:12에서는 하나님께서 두 돌판에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했다고 합니다. 돌판에 새겨진 것이 십계명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4:28은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라고 말합니다.

한편, 출애굽기 32:15는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관례에 근거하여 두 돌판에는 각기 십계명이 모두 새겨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조약문이나 계약서를 두 부를 만들어 두 당사자가 한 부씩을 나누어 보관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견해는 돌판 하나에 예를 들어, 1-4계명의 하나님을 섬기는 계명들이, 다른 하나에는 6-10계명의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전자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 돌판은 ‘증거’ 혹은 단순히 ‘증거’라고도 불립니다(25:16,21).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증거(판)를 법궤 안에 두라고 명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법궤는 또한 ‘증거’라 불립니다(출 25:22;26:33-34; 레 16:13 등 21회). 나아가 이 증거궤가 안치된 성막은 ‘증거막’이라고도 불렸습니다(출 38:21;민 1:50; 행 7:44; 계 15:5; 참조. ‘증거의 장막’ 민 9:15; 17:7). 결국 증거판, 증거궤, 증거막은 십계명 때문에 붙은 명칭들입니다.

증거판의 약식 히브리어는 ‘돌판’(루호트)이 빠진 ‘증거’(에두트)인데, 이것은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럼 십계명은 무엇에 대한 증거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증거요 징표입니다. 또한 그것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큰 구원과 인도하심(출 20:2), 그분의 위대한 천지창조(출 20:10-11)에 대한 증거입니다.

법궤 앞에 놓인 만나 항아리(출 16:31-36)와 아른의 싹난 지팡이(민 17장)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사실 법궤 안이 아닌 앞에 두어 보관했습니다. 참고로, 히브리서 9장에서는 이것들도 법궤 안에 함께 들어가 있다고 보고합니다(히 9:4). 히브리서 9장은 향단이 지성소에 놓여 있다고 말함으로써 여러모로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보고하는 성막의 원래 상태와 어긋나 있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히브리서 9장의 이런 변경된 성막의 상태는 사사 시대 막바지의 엘리 제사장 가문에서 암시되듯이 배교가 절정에 이른 시대의 흐트러진 지상 성막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치 않는 하늘 성전과는 달리 인간의 불순종과 불성실로 인해 멋대로 변경된 지상 성전은 그 자체의 한계와 유한성을 지녀 하늘 성전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본문을 통해 안식일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자원을 충실히 사용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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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0-02)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물두멍

출애굽기 30장 17-38절


 

향유와 향단의 규정은 하나님의 명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보여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존중을 강조합니다. 또한, 향유와 향단의 사용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하고 구별된 것임을 나타내며, 우리도 하나님께 헌신하고 경외심을 갖추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마지막으로, 향유와 향단의 사용은 공동체의 참여와 정성을 요구하며, 교회와 공동체 내에서 모든 성도가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 본문에서는 성막의 마지막 물품으로 놋 물두멍(17-21), 성별하는 기름(22-33) 그리고 향(34-38)에 대해서 다룹니다. 물두멍 제작법과 사용법이 설명됩니다. 물두멍에 대한 내용이 향료 제조법과 더불어 뒤늦게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 이 비품이 향단 사용법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실제적 직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지막 물품들은 하나님과 성막의 거룩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물두멍의 제박법과 사용법(17-21)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만들어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은 제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반드시 물두멍의 물로 손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두멍에 비춰진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자세히 보고,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씻지 않은 채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17-21)

 

본문에서는 물두멍의 제작과 사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기 위해 사용되며, 이를 통해 제사장들이 정결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1) 물두멍 제작법(17-18)

 

성막 운용에는 물이 필요하고, 물을 담을 물두멍이 제작되어야 했습니다. 물두멍은 받침대와 함께 만듭니다(18). 재료는 놋입니다. 어떤 랍비들은 물두멍이 양쪽에 꼭지가 달린 대형 물주전자 형태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물을 깨끗이 유지하려면 물두멍의 뚜껑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물두멍의 모양을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38:8에 의하면, 그 물두멍을 제작한 놋의 출처가 회막에서 수종 들던 여인들의 거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용한 놋 거울을 성막과 제사장들의 아름다움을 위해 헌납한 것입니다. 여인들은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했습니다. 물두멍의 위치는 회막과 번제단 사이의 공간입니다.

 

(2) 물두멍 사용법(19-21)

 

19절에서 보듯이, 제사장들은 손발을 씻고 내성소로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그들이 지존하신 여호와 앞에서 신발을 벗고 수종드는 일을 했음이 암시됩니다. 평일에는 제사장들이 수족을 씻을 뿐이나 제사장 위임식에서는 임명받는 제사장이 자신의 몸을 씻어야 하고(레 8:6),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그 물두멍의 물로 목욕을 해야 합니다(레 16:24). 성막의 청결한 관리를 위해 이 물을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유 제조법과 사용법(22-33)

거룩한 기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성별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이는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어떤 형식이나 외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23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24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25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26너는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27상과 그 모든 기구이며 등잔대와 그 기구이며 분향단과 28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29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 30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31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32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33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와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라(22-33)

 

본문에서는 향유의 제조법과 사용에 관한 규정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향유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재료와 비율을 명시하며, 이 향유는 성소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향유는 제사장과 성소를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그 사용에 있어서 엄격한 규정과 제한이 있습니다.

 

(1) 관유 제조법(22-25)

 

관유 제조에는 다양한 고급 향료들이 섞입니다. 향료들의 양은 세겔의 무게 단위로 정확히 명시되어 있으나 구체적 제조법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카수토’(Cassuto)의 추론대로, 아마 이것들을 오랜 시간 함께 끓인 뒤, 감람유 3.6리터를 부어 섞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집트의 기름 추출법을 참고하여 우리가 한약을 끊일 때처럼 도자기에 넣어 끓인 뒤 헝겊으로 짜서 불순물을 걸러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이 액체가 “향기름”이라 표현된 것을 볼 때(25) 타당한 추론으로 보입니다. 이 성분들이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고대에 특별한 향을 내는 매우 비싼 재료였음은 분명합니다. 상당히 많은 기름이 필요했던 것은 제사장들에게 발랐을 뿐 아니라 성막 기물 전체에 발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2) 관유 사용법(26-30)

 

관유를 성막의 구석구석 모든 비품들에 발라야 했습니다. 이 관유로 인해 성막 전체와 각 공간에 비치된 모든 비품들이 거룩해집니다. 또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그들의 머리 위에)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행위는 출애굽기 29:7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름을 머리 위에 부은(야차크) 뒤에 발랐을 것입니다(마샤흐):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 이것은 또한 뒤에 이어지는 32-33절의 “사람의 몸에 붓지(수크) 말며”에 비추어 추론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수크’는 몸에 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관유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기록하게 만들지만, 인간과 사물의 궁극적 기록은 29:43-44에서 살핀 대로 거룩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관유는 단지 거룩성을 유발하는 매개물일 뿐 신적 개입 없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법궤를 비롯하여 다른 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앞서 29:37에서 잠시 미룬 토론을 여기서 이어갈 수 있겠습니다. 거룩한 비품에 접촉한 것은 ‘거룩해지는가’ 아니면 접촉하기 위해 ‘거룩해야’ 합니까? 이것은 히브리어 ‘이크다쉬’가 ‘거룩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룩해야 한다’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출 29:37; 30:29; 레 6:18). 다수의 학자들의 의견은 ‘거룩해진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하면서 구약에서의 거룩의 감염력을 주장합니다. 즉, 구약에서 부정결만 감염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룩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소수의학자들과 더불어 이런 견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구약의 제의 체계에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제단을 비롯하여 성막의 비품들에 단순히 접촉한다 해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 접촉하려면 거룩한 사람과 거룩한 사물이어야 합니다.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은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한 제단 위에 올리면 그것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거룩한 성물인 짐승이 도살되어 제단 위에 올라간다고 진술합니다(레 6:25;7:1). 만일 자격이 없는 사람과 물건이 제단에 올려지거나 거룩한 것과 접촉하면, 그 거룩한 것이 더럽혀집니다. 학개 2:12-13 또한 그런 원칙을 확증합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것이 접촉을 통해 거룩을 전염시키는 분명한 경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임재를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거하시는 곳, 임재하시는 곳, 머무시는 곳은 거룩해집니다. 성막은 물론이고,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주변 땅(출 3:5)과 시내산(출 19:11-12), 진영 밖의 회막(출 33:7)도 그렇습니다.

 

(3) 관유 사용의 주의 사항(31-33)

 

관유는 제사장들의 ‘머리’ 위에 부어 바르며 몸에는 바르지 않았습니다(출 29:7). 다만 제사장 옷들에 이것을 뿌립니다. 이 관유는 일반인이 제조할 수 없었으며 성소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특별한 관유를 멋대로 만들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부어서도 안 됩니다(33). 그런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끊어짐’의 형벌을 당합니다.

 

거룩한 향료 조제법과 주의 사항(34-38)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기름을 다른 데 사용해서는 안 되며 비슷한 기름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고 사용하는 것은 불순하고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성막의 물건이나 제사장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3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35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37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38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34-38)

 

금 향단에 태우기 위한 향료 또한 특별하게 제조되어야 합니다. 고가의 다양한 향품들을 유향에 섞어 향료를 제조합니다. 유향은 보스웰리아 나무의 진액을 채취해 건조시킨 향품으로 소제의 밀가루에 얹어져 태웁니다(레 2:2). 소합향, 낙감향, 그리고 풍자향에 다음 부분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향품들의 혼합물에 소금을 쳐야 하며, 그렇게 해서 그것을 성결하게 만들라고 지시합니다(35). 히브리어 구문은 소금을 쳐서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첨가한 전체 향품의 혼합물을 성결하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각 종류의 향품들을 같은 비율로 섞어서 제조하라고 할 뿐 구체적으로 전체 양이 명시되지 않는데,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양을 제조해서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체로 된 향품 덩어리들을 빻아 가루로 만든 뒤 환약처럼 만들어 향단 위에 태웠을 것입니다. 금 향단에 태우는 이 향료는 소제의 밀가루 위에 올린 뒤 번제단에 태웠던 유향 덩어리와는(레 2:2) 다른 종류로 훨씬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가루로 만든 향을 “증거궤 앞에 두라”고 지시하는데(36), 법궤와 가까이 마주보는 내성소의 금 향단 근처에 일정량을 가루로 제조한 뒤 보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매일 향을 피우기 위해 조금씩 사용했을 것입니다. 한편, 33절에서 관유를 멋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끊어짐’의 형벌과 더불어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37-38절은 사적인 목적으로 거룩한 향료를 제조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정결함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물두멍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정결을 유지해야 함을 배우고, 향유와 향단의 규정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존중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또한, 향유와 향단의 사용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며, 우리의 헌신과 경외를 요구합니다. 공동체의 참여와 기여를 통해 모든 성도가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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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0-01)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분향단과 속전세

출애굽기 30장 1-16절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냄새가 몸에 배이게 되어 있습니다. 불고기집에서 오래있으면 불고기를 먹지 않아도 고기 굽는 냄새가 배여 있습니다. 참기름을 짜는 집에 오래있으면 참기름 냄새가 몸에 배여 들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5).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말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길 수 있습니까?

 

  • 본문에서는 성막의 전체 도면과 비품 제작의 지침에서 유일하게 향단과 물두멍이 빠져 있었습니다. 본문은 자세한 향단 제작법과 사용법, 그것의 위치를 설명합니다. 또 20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성막을 위해 생명의 속전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향단의 위치는 내성소 안쪽 지성소의 휘장 앞입니다. 떡상은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교체했습니다.

 

분향단 제작과 사용법(1-10)

분향단이 내성소에서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에 놓인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심이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임을 재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1-10)

 

분향단은 내성소에서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에 위치하며, 분향단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향단의 뿔에 속죄제의 피를 발라 속죄하며, 향단에서 사용되는 향료는 하나님이 지시한 특정한 조제법을 따라야 합니다. 향단을 속죄하는 행위는 제단이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제단이 오염되었음을 배상하고 정화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1) 분향단의 재료와 규격(1-5)

 

분향단의 기본틀은 조각목으로 짜고 전체를 순금으로 싼 뒤 금테를 두릅니다. 다른 비품들처럼 전체 표면에 금물을 칠했을 것입니다. 분향단은 비교적 작은 비품이었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규빗/1규빗/2규빗입니다. 미터법을 따르면 0.5미터/0.5미터/1미터의 크기이므로 제사장이 향을 피우기에 적절한 높이였습니다. 상단 사면에 뿔이 만들어지고 아래쪽에는 금고리 둘을 장착하여 금으로 된 조각목 채를 만든 뒤 고리들에 끼웠습니다. 이 향단은 작고 가벼워 두 사람이 들고 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랍비들은 작은 향단에 채를 양쪽면에 끼우면 폭이 너무 좁으므로(50cm) 양쪽 모서리에 하나씩 두 개의 고리만을 달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4절에서 네 개의 고리를 달도록 지시된 다른 사각형 비품들과 달리 유일하게 “양쪽에 금고리 둘을 만들되”라는 진술에서 확인됩니다. 이 설계를 따르면 폭이 충분하기에 두 사람이 앞뒤에서 채를 들고 이동했을 것입니다.

 

(2) 향단의 위치와 사용법(6-10)

 

분향단은 내성소에 두는데 다른 비품들에 비해 가장 안쪽, 즉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향단이 갖는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향단은 내성소를 대표하는 기물로 나타납니다. 평일에 속죄제 짐승의 피가 내성소에 뿌려질 때는 향단에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10절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1년에 한번(속죄일) 대제사장은 지성소의 법궤와 더불어 향단 뿔에 속죄제의 피를 뿌려 향단을 속죄해야 한다는 점도 향단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궤 위의 속죄소에 왕으로 임재하셔서 백성들을 만나십니다(6). 향단 위에 향료를 피우는 일은 등잔대를 청소하고 등불을 교체하는 시간과 동일하게,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 두 차례 실행합니다(7-8). 향단 위에서는 아무 향료나 태워서는 안 됩니다(9). 반드시 지시한 제조법에 따라(30:34-38) 유향에 여러 재료를 가루로 빻아 만든 거룩한 특수 향료만 써야 합니다.

여기 ‘다른 향’이 꼭 이방 제단에 피우는 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금 향단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불법적 향료를 말합니다. 번제단에도 소제물에 얹어 향을 태웠습니다(레 2:2,15-16). 그 향은 아마 다른 재료들이 섞이지 않은, 가루가 아닌 작은 토막의 유향 덩어리로 밀가루 위에 놓였는데(Milgrom) 값이 더 쌌습니다. 이 또한 금 향단에 어울리지 않는 ‘다른 향’에 속합니다. 또한 향단에는 놋제단에 바치는 번제나 소제와 같은 제물은 물론 전제의 술도, 즉 포도주나 다른 술도 부어선 안 됩니다(9).

한편, 10절의 ‘향단 뿔을 속죄하다’라는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사실 무척 기이한 표현입니다. 향단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속죄합니까?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7월 10일) 대제사장은 지성소의 법궤 위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향단 뿔에 속죄제 짐승의 피를 발라 속죄소와 향단을 철저히 청소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가 ‘속죄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키페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29:36에서 제사장 위임식에서 속죄제의 피가 번제단에 뿌려져 그것을 ‘속죄한다’는 표현과 더불어 문제를 야기합니다. 과연 짐승의 피가 물건을 속죄(키페르)할 수 있습니까?

이런 곤란한 해석의 문제에 봉착하여 밀그롬은 ‘키페르’가 제단을 목적어로 취할 때는 결코 ‘제단을 대속하다’(make atonement for the altar)가 아닌 ‘제단을 씻다’(purge the altar)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단은 죄를 지을 수 없고 그래서 대속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단은 인간의 죄와 부정결로 더럽혀질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스클라(Sklar)는 인간의 죄가 제단(번제단이든 향단이든)을 더럽힘으로써 제단에 피해를 끼치게 되었기 때문에 그 피해를 ‘배상’하면서 오염을 ‘정화’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는 속죄제의 피로 ‘제단을 대속(배상)하며 청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도 이에 동의합니다.

이때 제단의 ‘대’ 혹은 ‘속죄’(atonement)는 ‘배상하여 씻어내다’라는 이중 의미를 가집니다. 이 ‘대속+정결’의 두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는 단어는 영어와 우리말 모두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속죄제 문맥에서 영어로는 ‘atonement’, 우리말로는 ‘대속’ 혹은 ‘속죄’라는 말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죄라는 말에는 ‘배상하고 씻는다’는 이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백성을 위한 생명의 속전(11-16)

속전의 납부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책임을 지고 참여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교회나 신앙 공동체에서도 각 성도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원하고 협력하며, 공동체의 영적 및 물질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11-16)

 

생명의 ‘전’(코페르)은 ‘대신 지불하는 몸값’(ransom)을 뜻합니다.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 한 명당 반세겔을 거둔 은전의 총량은 100달란트 1,775세겔(약 3,420kg)에 이르는 막대한 양으로 모두 성막 건설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20세 이상 성인들의 인구를 계수하여 반 세겔의 속전을 내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속전의 지불 목적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함이라”(12). 이 질병은 ‘네게프’로서 어떤 잘못에 대해 내리는 신적 재앙인데 흔히 ‘역병’으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언뜻 일종의 재앙을 막는 액땜인 것처럼 비칩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이 인구조사의 사례를 다른 유사 사례와 비교하여(삼하 24장, 민 31장), 인구의 통제와 관리는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인구조사 자체가 신적 권리를 침범하여 재앙을 초래하는 매우 부정적인 성격의 일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1장과 2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차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인구조사를 하도록 명령하시며, 현재의 본문 또한 하나님의 지시로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이 계수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구조사 자체가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경우(삼하 24장), 인구조사의 의도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다윗이 왕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데 있었기에(삼하 24:3) 재앙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기서 은 반 세겔이 생명의 속전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레위인을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성막 봉사자로 임명한 것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임재한 곳으로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그래서 따로 성별된 제사장 그룹만이 그곳에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그들을 돕는 레위인들이 백성 편의 조력자로 그 임무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성막에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행위입니다: “(성막에 레위인이 아닌)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민 3:10). 반면에 레위인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위임되어 성막 봉사자가 되었습니다(민 3:6-13; 8:5-26).

민수기 8:19에는 레위인들이 이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속전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언급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때 레위인들로 인해 징벌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의 속전’ 기능이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 접근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타격을 받지 않고 역병의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반 세겔의 속전은 모두에게 적용되었으며, 또한 성막 건설에는 모든 백성들의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의무적인 참여가 수반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모든 성도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최소한의 의무적인 헌신이 모두에게 공평히 요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향단과 생명의 속전은 신앙 생활에서 교제와 보호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평등하게 참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주신 규칙에 대한 순종과 정결함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공동체 내에서 공평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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