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33-01)
하나님의 동행의 약속: 모세의 중재와 백성의 회복
출애굽기 33장 1-11절
도구의 용도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칼은 숙련된 요리사에게는 유용한 조리 도구가 되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사용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고리는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식이지만, 동시에 우상을 만드는 재료로 변질될 수 있었습니다.
- 본문에서는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사자만 보내고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진 밖에 있는 회막도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회복할 수 있는 문은 열어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준한 말씀을 듣고 반성을 보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반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땅에 대한 약속과 여호와이 부재하심(1-6)
종종 자녀들이 부모와 담을 쌓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이러한 간극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진심 어린 기도와 순종, 그리고 꾸준한 신앙 훈련이 필요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을 대속하려는 계획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떠나시겠다고 경고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경고에 큰 슬픔을 느끼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겸손히 나아갑니다.
(1) 여호와의 부재 가운데 점령될 땅(1-3)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당혹케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이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닌 모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과 절교하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앞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산할 즈음 산 아래에서 광란의 배교 축제가 발생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네 백성이 부패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32:7).
황금 송아지 배교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조상들에게 했던 언약의 맹세는 유효합니다.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3). 하나님께서는 완고한 바로를 거듭 치셨던 것처럼 그들과 동행하면서 목이 뻣뻣한 그들을 진멸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를 보내 약속대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을 내쫓으실 것이라 하십니다(2). 그런데 3절에서 여호와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여호와와 주의 사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구분하십니다. 더불어 백성 앞에서 전진하시는 모습은 그분의 강력한 동행의 표시였지만, 불행히도 사자와의 분리는 백성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모순되어 보이지만 홀로 보내진 이 사자는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은혜의 끈이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뒷바라지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결국 언약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2) 백성의 낙심과 장신구를 떼어냄(4-6)
백성들은 슬픔으로 인해 몸을 단장하지 않습니다. 진멸을 경고하신 하나님께서도 모든 장신구를 떼며 회개할 것을 강도 높게 요구하십니다. 70인경은 장신구(아디)를 ‘코스모스’로 옮기는데, 이것은 ‘우주’, ‘세상’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질서의 의미를 내포하는 ‘장식’, ‘화장’의 의미로도 쓰이며, 영어의 cosmetics(화장품)의 어원입니다. 이 장신구 제거는 자신을 낮추는 회개를 위함이며, 성막 건설에서 금은동과 각종 재료의 봉헌은 별개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진 밖에 세워진 회막(7-11)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그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해 죄인인 우리와 거리를 두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돌이키시고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허락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장신구를 모두 떼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7-11)
본문 7절에서 동사가 갑자기 반복적 용법의 미완료로 바뀝니다. 이 시제의 전환은 11절까지 이어집니다. 모세는 진 밖에 회막을 세우고, 여호와께 간구하고 싶은 자(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두 진 밖의 회막에 모이도록 했습니다(7).
여기서 난제 한 가지를 다뤄야 합니다. 모세가 진 밖에 친이 회막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아직 회막(성막)은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막은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학자들 대부분은 ‘두 회막론’을 지지하고 소수는 ‘단일 회막론’을 따릅니다. 두 회막론에 의하면, 현재의 회막은 성막이라 불리는 회막이 지어지기 전에 사용된 임시적인 간이 시설물입니다. 두 시설물은 ‘회막’이라는 명칭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단일 회막론에 의하면, 성막이 곧 회막이며 이것이 종종 진영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의 에피소드는 곧 건립될 진영 중앙의 회막이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밖에 설치되곤 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임시로 진영 내의 시설물은 성막으로 칭하고 진영 밖의 것은 회막이라고 칭하여, 둘 사이의 주요 차이점 몇 가지만 살피려고 합니다. 첫째, 성막은 진중에, 회막은 진 바깥에 있습니다. 둘째, 성막은 제사용이고, 회막은 신탁용입니다. 셋째, 성막은 제사장이 지키고, 회막은 여호수아가 지킵니다. 넷째, 성막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고(샤칸), 회막에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십니다(야라드). 다섯째, 성막은 규모가 크지만, 회막은 모세의 개인 천막으로 혼자서도 칠 수 있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두 회막론이 다수의 견해인데 이들은 현재의 본문에서 언급된 회막은 회막 건설 이전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와는 별개의 회막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단일 회막론을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둘 사이의 차이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성막이진 밖으로 이동한 것이 진 밖의 회막입니다. 진 밖으로 이동한 이유는 백성의 범죄 때문입니다. 실제로 진 밖 회막에 대한 기사는 모두 범죄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민 11:14-17, 24-30; 12:4-10; 참조. 신 31:14-15). 둘째, 성막에서 제사만이 아니라 신탁도 역시 주어졌습니다. 셋째, 성막에서 제사장의 역할, 회막에서 여호수아의 역할이 반드시 바깥 회막에 제사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넷째, 성막에 사용된 동사 ‘시간’도 ‘이동성’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합니다(출 24:16; 참조. 출 40:34-35). 다섯째, 모세가 천막을 쳤다는 설명을 꼭 혼자 쳤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책임자 역할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현재의 본문 33:7-11에서 회막 건설 이전의 느닷없는 회막의 등장은 논리적 시간을 초월하는 탈시간적 혹은 몰시간적 문학적 기법 때문입니다. 즉, 앞으로 반복적으로 발생할 사건들의 패턴화한 패러다임으로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서 이 장면이 끼어든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세는 중대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회막을 취하여 진 밖에 치곤했다’(민 11:14-14, 24-30; 12:4-10). 회막의 진 밖 이동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의 진영으로부터 떠나심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시설물의 이름이 같다는 것은 두 실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필자의 견해로 단일 회막론의 반론 중 몇 가지는 매우 그럴듯합니다. 특히 추후의 같은 사례들에서 한결같이 백성들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회막이 밖에 설치된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두 이론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단일 회막론의 어떤 논리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첫째, 물론 그들이 주장한 대로, 범죄로 인한 성막의 진 밖 이동이 회막일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진 밖 회막에서는 신탁이 주 기능이었음은 명백합니다. 필자는 이 이론이 맞다면 번제단과 마당의 기물, 울타리까지 이동했다고 보지 않고, ‘회막’이라 불린 천막 건물만 (지성소와 내성소) 이동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제사는 잠시 중단되고 신탁만 주어지게 됩니다. 셋째, 성막 책임은 제사장에게, 회막 책임은 여호수아에게 있다는 명백한 차이도 수긍해야 합니다. 만일 단일 회막론이 맞다면, 이 차이는 모세에 이어 그의 후계자로 성막을 총책임지는 여호수아의 임무를 미리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라 봐야 합니다. 넷째, 성막의 동사는 ‘샤칸’(거주하다), 회막의 동사는 ‘야라드’(내려오다)라는 차이도 조화를 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두 동사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단일 회막론이 맞다면 이런 차이는 진 밖으로 잠시 이동한 회막의 임시적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진 밖 회막으로 여호와께서 강림하여 내려오시고(야라드),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그 떠나심은 진 안으로의 복귀를 위함입니다. 필자는 이 모든 논리들이 두 회막론에도 모두 잘 들어맞는다고 봅니다. 즉, 성막과 상관없이 진 밖의 회막이 백성의 중대한 범죄로 인해 설치된 별개의 건물이라 해도 위의 논리는 모두 잘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회막’이란 용어를 성막에만 고정해서 적용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한편 현재의 문맥에서 성막과 상관없이 회막이 등장하는 이유도 몰시간적 기법을 끌어올 필요 없이 흐름상 잘 들어맞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회막 설치와 그곳에 온 백성이 나아와 집회를 가졌고, 모세는 거기서 하나님께 마지막 탄원의 기도를 올렸으며(33:12-23), 이 일로 금송아지 사건이 최종적으로 수습됩니다. 이 회막이 금송아지 사건 해결에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시에 이 장면은 반복성(frequent mode)을 나타내는 미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중대한 범죄 상황에 대한 패턴화한 사건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신 축복으로 우상숭배라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길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범죄 했을 지라도 회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간절히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하시고 만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 만날 것입니다. 죄인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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