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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5-01)


저주가 기도가 될 때

시편 35편 1-18절


 

하나님께서는 행동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적인 분이 아닙니다. 동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역사에 대입하시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을 꾸려가시는 분입니다. 오늘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사로 움직이는 분이며 무엇을 창조하고 계시는 분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들과 싸워 자기를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원수들은 까닭 없이 그를 공격하고 거짓을 말하고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는 대신 그들을 사랑과 선으로 대하였습니다. 원수들의 억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촉구하며 간구합니다.

 

용사이신 하나님께 간구(1-8)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대양과도 같습니다. 그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두려움 없이 우리의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분이 아니고서는 안 될 일이 수두룩합니다. 다윗은 저주스러운 속마음까지 쏟아냅니다.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전투에 나서주시기를 애원합니다.

 

1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4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5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6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7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1-8)

 

시인은 자기 생명을 위협하고 거짓 고소를 일삼으려고 일어난 원수를 향해 하나님께서 완전무장하시고 일어나 싸우고 돕고 구원해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서시면 시인을 쫓던 원수가 하나님의 사자에게 쫓기게 됩니다.

 

(1) 용사이신 하나님께 간구함(1-3)

 

원수들과 싸움 중인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대신 그들과 싸워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시인이 사용한 ‘다투소서’와 ‘싸우소서’라는 단어는 각각 법정에서의 논쟁과 전쟁터에서의 싸움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원수와의 싸움은 말과 증거를 가지고 정의의 판결을 촉구하는 논쟁이면서도 육체적으로 싸우는 전투와 같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먼저 전쟁터의 싸움의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위한 전사가 되어 방패와 창을 잡고 나아가 자신을 원수로부터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도 용사이지만 자신의 힘과 지략을 의지하는 대신 전쟁의 용사이며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직접 원수와 대항하여 싸우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2) 원수를 벌해달라는 시인의 기도(4-8)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원수들을 벌하시라고 간청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원수들이 행악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까닭도 없이 시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자기들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은밀하고 비겁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마치 사냥꾼이 새나 짐승을 잡으려 하듯이, 그들은 시인이 가는 길목에 몰래 그물을 숨기고 함정을 파놓은 후 시인이 그물이나 함정에 빠지기만을 고대합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이러한 불의한 행위를 보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자기를 해치려고 꾸민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일로 수치를 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시인의 자취를 찾아다닐 때 그들이 다니는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만드시라고 간청합니다. 원수가 자신을 잡으려고 쫓아오므로, 하나님은 대신에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추적하게 하시고 그들을 겨처럼 날려버리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시인을 잡으려고 쳐놓은 그물에 자기들이 먼저 잡히고,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자기들이 스스로 빠져 멸망이 순식간에 임하기를 요청합니다. 원수에 대한 시인의 간구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악을 행하는 자가 그에 응당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건 사사로운 앙갚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악인의 불의와 부정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의와 공평에 위배되고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 이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이 주의 공평과 정의로 가득 차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시인(9-10)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장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선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미리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수들은 눈으로 보이는 모습들만 보았지, 시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9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10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9-10)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마땅히 심판하시기를 간구한 시인은 ‘그러나 내 영혼이’라고 외치며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을 자기의 몸의 모든 뼈가 증언할 정도로 확실하다고 진술합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강자와 억압하는 자에게 당하고 있는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건지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겠다고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른 시에도 이러한 시인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은 불의를 심판하시고 정의를 실현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행하신 일을 들었고 지금도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고백과 서원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한편으로 표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만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촉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불의한 증인들의 악행 vs. 시인의 의로움(11-18)

지속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감정을 재료로 삼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불의한 자가 무고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관망하지 않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시인은 곤란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준비합니다.

 

11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12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13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15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16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17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18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11-18)

 

시인은 곤란 가운데서도 여전히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준비합니다. 거래가 아니라 확신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신을 모른 척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서품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운수들과는 달리 뼈에 사무치는 감사로 화답하겠다고 다짐합니다.

 

(1) 불의한 증인들의 악행(11-12)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서원한 시인은 다시 자기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알리며 기도드립니다. 4-8절에서 시인은 전쟁의 싸움과 사냥꾼의 사냥을 비유로 들어 그의 원수가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 한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법정을 예로 들어 원수들의 불의한 행동을 고발합니다. 시인의 원수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 즉, 거짓을 말하는 위증자입니다. 그들은 시인이 알지도 못하는 관련 없는 질문으로 시인을 심문하며 곤경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지은 죄가 없는데도 이유 없이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서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불의한 증언과 사악함을 보고 낙심하고 괴로워합니다.

 

(2) 시인의 의로움(13-14)

 

또한 시인은 이들의 행위가 자신이 그들에게 베푼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시인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고 악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진술합니다. 자기의 형제나 친구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듯이 그들의 치유와 평안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어머니를 잃어 애곡하듯이 원수들의 고통을 슬퍼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원수들은 그가 보여준 긍휼과 사랑을 곡해하고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증오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결코 자신들의 친구나 형제나 부모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인이 재앙을 당하자 서로 모여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가 재난당한 것을 당연하고 고소하게 여겼습니다. 폭력배처럼 은밀히 일을 꾸며 시인을 비방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를 향하여 이를 갈며 조롱하였습니다.

 

(3) 불의한 증인들의 악행(15-16)

 

시인은 선을 악으로 갚는 원수들의 불의함과 자신의 의와 무죄함을 증명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라는 시인의 절규로그가 원수에게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께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도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을 개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자처럼 자신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9-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고대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면, 그는 여러 백성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을 간증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4) 시인의 간구(17-18)

 

이와 같이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행에 대하여 폭력이나 폭언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인의 거짓된 말과 비열하고 폭력적인 말과 행동이 시인 자신의 내면(마음)과 외면(태도, 말, 행동 등)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자신을 죄로부터 보호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앙갚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신 32:35; 잠 25:21-22). 앙갚음을 계획할 때에는 이미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지은 것이며, 그것을 실현할 때에는 더 큰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개인적으로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기눈앞에 펼쳐진 기가 막힌 상황과 자신의 절망감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기만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 찬양의 대상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한 결같이 시인에게 잘해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보응을 믿으며,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나서셔서 친히 창조하시도록 맡겨드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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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4-01)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시편 34편 1-22절


 

은혜는 말 그대로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같은 호의(好意)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주시더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것입니까?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고 경외하는 자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고난에서 구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아 그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으로 청중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고,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1-3)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한들 먹지도 못하고 단지 설명만 듣거나 구경만 한다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직접 먹어 그 맛을 음미할 때 비로소 음식은 그 존재 가치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이고, 먹는 사람도 큰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1-3)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송축하고 찬양할 것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선언합니다. 다윗의 입에서는 하나님 찬양이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이 찬양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 자랑의 내용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 특히 그의 구원과 선하심에 대한 내용임을 시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곤고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랑을 듣고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도 곤고한 자였으나(6)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난에서 구해주시는 체험을 했고,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간증을 그들에게 나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곤고한 자의 체험을 들으면 그들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청중에게 자기와 함께 찬양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광대하게 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호소합니다.

 

 

다윗의 간구와 구원자 하나님(4-7)

 

하나님께서는 실로 선하신 분입니다. 어질고 아름다우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 신앙은 진정한 기쁨과 풍요를 가져다주지 못할 뿐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위선적인 삶으로 귀결되기 쉽습니다.

 

4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4-7)

 

다윗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는 이유인 자기의 간증을 시작합니다. 그는 환난을 당하여 두려웠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는 그의 기도를 듣고 모든 두려움에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분의 선하심과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머물던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수치가 사라지고 얼굴에 기쁨과 감사의 광채가 가득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청했을 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모든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를 확신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곤고한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를 보내 환난에 처한 그를 보호하고 건지셨습니다. 다윗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 틀림없이 임할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지혜의 가르침(8-14)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몇 가지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혹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 분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을 간절히 찾지 못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 이유 있는 오해입니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8-14)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곤란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께 피하고 그 분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맛볼 것입니다. 이는 넉넉하고 편하고 안락한 삶도 아니고 고통의 즉각적인 제거만도 아닙니다.

 

(1)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행복(8)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확신하므로 청중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각자 체험해보라고 권유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분의 구원과 보호를 직접 경험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본인이 스스로 목격하고 누려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가 진정 행복한 자(시 2:12)라는 점을 밝히며, 청중들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행복을 경험하라고 권면합니다.

 

(2) 하나님 경외와 그 결과(9-10)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을 앞세우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잠 3:5-6).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며 그분의 영원한 기업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시 33:12). 다윗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다윗의 가르침은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잠 1:7; 시 111:10),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위에 언급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과 아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센 젊은 사자는 맘만 먹으면 먹잇감을 포획할 수 있지만, 이런 사자도 굶주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것, 그것도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 없이 다 만족할 것입니다. 사지는 먹잇감을 찾아다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를 친히 먹이시고 보살피십니다. 시인의 이 모든 말은 허중이나 과장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경험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곧고 했을 때 하나님을 찾아(4, ‘간구하매’로 번역됨)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두려움과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시인의 체험과 확신에 찬 증거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3) 지혜의 가르침(11-12)

 

시인은 ‘자녀들아’(원문에서는 ‘아들들아’)라고 청중을 부르며 교사로서 지혜의 교훈을 줍니다(11). 이스라엘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와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신 4:9; 6:7). 이 명령은 단순히 자식을 지혜롭게 교육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백성을 만들라는 명령이었습니다(창 18:19: 시 78:4,6). 이에 따라 시인은 청중에게 지혜의 교훈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시인은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누가 생명을 사랑하며 장수하기를 원하며 선을 보기(경협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장수와 복을 제시하는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임할 선물이 바로 장수와 선을 경험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청중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워 이 복을 받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 중에서도 특히 악한 말과 거짓말을 피하라고 예를 듭니다. 이 구절(13-14)과 유사하게 잠언 8:13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잠언에서는 악에 대한 예로 악한 태도(교만, 거만), 악한 행실, 악한 말(패역한 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인 정직과 선을 따라야 합니다.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을 택하여 행해야 합니다. 다툼이 아니라 화평을 찾아야 합니다. 시인의 가르침은 잠언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르치는 지혜와 동일합니다. 여호와 경외는 지혜로운 삶의 시작이며, 여호와를 경외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찾아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15-22)

의로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언제나 외적으로까지 승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의로운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스데반은 순교 직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15-22)

 

여호와 경외와 신뢰에 대해 교훈을 준 시인은 이제 청중에게 이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합니다. 시인의 여호와 경외와 신뢰에 대한 권면을 따르는 자는 의인이며 지혜자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권면을 거부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는 악인이며 우매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의무를 다하여 순종하는 의인이나 의무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교만하고 우매한 악인 모두 각각 마땅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집중적인 간섭과 보호와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는 항상 의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 듣고 그들이 처한 모든 환난과 고난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 또한 주의 깊게 감찰하십니다. 이들을 주목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행악을 확인하고 그들의 흔적을 땅에서 완전히 끊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의인에게는 생명과 장수가 있지만, 악인에게는 멸망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자도 죄를 지을 때가 있으나 죄로 인해 상한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이라 칭하시고 그를 벌하는 대신에 용서와 구원으로 감싸주십니다. 그에게 고난이 많을 수 있으나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속량하십니다. 그의 신체의 일부인 뼈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보살피십니다. 시인이 거듭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모든 환난과 고난에서 건지신다(17.19)고 강조하는 것은 그가 이미 모든 두려움과 환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4.6). 이와 같이 시인의 여호와 경외에대한 교훈과 확신은 그의 체험적인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가장 아픈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서 우리의 삶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풍성함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삶의 어려운 순간에 슬픈 노래를 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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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3-01)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래

시편 33편 1-24절


세상을 바라보면 한숨 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여느 때부다 희망 섞인 노래를 듣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취업난, 주택난, 경제난, 학자금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혹시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 지향적 신앙만을 추구한다는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창조와 통치 질서는 그분의 말씀과 공의와 인자하심으로 운영됩니다. 왕 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구원하심으로써 그분의 인자하심을 보이시며, 그분의 백성은 이런 왕을 신뢰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찬양(1-3)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보아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번 구원하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움과 방패가 되어주시기에 우리는 끊임없는 새 노래로 화답해야 합니다. 어제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1-3)

 

다윗은 그의 공동체인 청중을 향해 주 안에서 기뻐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의인과 정직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속성인 의와 정직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적절하고 마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 소리치라는 다윗의 권유는 말 그대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감추지 말고 표현하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즐겁고 기쁠 때는 목소리가 절로 커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악기와 노래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축제와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즐거운 웃음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금이나 비파를 아름답게 연주하며 흥겨워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새 노래를 부릅니다.

 

여호와 찬양의 이유(4-7)

하나님께서는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창조의 주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고 아름답데 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길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4-7)

 

다윗은 하나님 찬양에 초대한 청중에게 찬양의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을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행하시는 일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에서 그의 속성이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거짓이 없고 모든 것이 참됩니다. 그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행사가 다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인자하심이 한량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가 그의 인자하심으로 차 있습니다. 다윗이 말씀과 행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완벽하심을 설명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이며 통치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통치하시는 방법은 바로 그의 말씀과 행동과 속성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창조주이십니다. 그가 말씀으로 하늘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에 따라 그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원하시는 모양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그가 세우신 질서와 만물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히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창조주이신 여호와(8-11)

하나님께서는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나라의 염원은 부국강병이며, 돈과 칼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돈과 칼은 누군가를 짓누르고 짓밟게 됩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계획을 겪으시고 무효로 돌리십니다.

 

8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8-11)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정의와 인자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온 땅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모두가 경외해야 함을 천명합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강조했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땅과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과 주권을 보이셨듯이, 그의 통치 세계에서도 그의 계획과 생각대로 역사를 주관하셨습니다. 그가 세우신 계획이 세상의 질서가 되었으며, 이 질서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어떤 사람이나 일에게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나 민족이 자기들의 계획과 생각을 앞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이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세계와 역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에 속한 모든 만물과 사람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호와께 선택받은 백성의 행복(12)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따라서 말씀하시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것이 반드시 실현됩니다.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온 세상이 충만하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지금껏 이 세상이 존재와 유지, 인간 사회의 존속도 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나라와 백성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2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임을 설명한 후, 이 능력의 하나님께 선택받아 그의 백성이 된 자들의 행복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 창조되어 그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나라와 민족 중에서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모세도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축복하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 축복을 전했습니다(신 33:29).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기업으로 삼으셨습니다. ‘기업’이란 유산으로 물려주는 소유를 의미하고, 구약에서 보통 ‘땅’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업(신 32:9; 사 19:25)으로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기업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세대 동안만 자기의 백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한 세대 동안이라도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축복인데 그들의 자자손손 무궁히 백성으로 삼으신다니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행복을 노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통치자와 창조주이신 여호와(13-15)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 합당하신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거창한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인생과 내면까지 두로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창하기만 한 역사만 관장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과 내면도 두루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아시기에 용서하시고, 우리 고난을 아시기에 노래로 바꾸십니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13-15)

 

하나님의 백성이 된 기쁨을 선포한 후,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그의 백성을 돌보고 살피시는 분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거대한 우주의 주관자이시면서도 우주에 비해 작고 하찮아 보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피시는 분입니다. 높은 하늘에서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감찰하시며 주목하여 보십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일일이 점검하시므로 어느 것도 그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계획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이유(16-19)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 외에 구원 얻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과 민족의 생각과 계획을 거부하시고, 여호와의 생각과 계획을 영원토록 대대로 세우실 것입니다. 당장에는 세상이 자기 맘먹은 대로 역사의 주인 노릇하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무기력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여호와가 살아계시고 그 말씀이 서는 한 그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선민으로 사는 것보다 더한 축복은 없습니다.

 

16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8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16-19)

 

다윗은 세상 모두를 살피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 후, 갑작스레 ‘위기에 처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 설령 어떤 왕이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고 어떤 용사가 제아무리 힘세다 하더라도,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많은 군대나 용사의 힘이 그들 자신을 구해내지는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가진 힘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불가능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시지 않는 이상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위험에 처한 자를 구해낼 수 없습니다. 다윗이 인간이 구원받기 어려움과 구원자 하나님을 설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백성의 구원자가 되어주심을 상기시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나 그를 경외하고 인자하심을 기대하고 있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주목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지 혹은 어려움이 없는지를 살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그들을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여호와를 의지함(20-22)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십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또한 불의한 세상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런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위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며, 그분의 손은 그들을 붙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악인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얼굴을 마주하제 될 것입니다.

 

20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0-22)

 

다윗은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이시며 그의 백성의 왕이신 구원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시의 처음과 같이 자신과 함께한 의롭고 정직한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얼굴을 돌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신뢰하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도움과 보호가 되어주셨음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고 의지하였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즐거워하며 주의 이름을 신뢰하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그들에게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간구합니다.


찬양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세상이 힘들어지고 부조리해질수록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새로운 노래를 부릅시다. 하나님께서 신실함으로 통치하시는 세상,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 질서가 잡혀가는 세상을 노래합시다. 세상이 그런 노래를 들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백성들은 의식하며 올바른 통치를 하려고 긴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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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2-01)


죄를 용서 받은 자의 복

시편 32편 1-11절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복되게 살도록 지으셨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기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못 본 척하시겠다고 하십니다.

 

 

  • 시인은 한때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아 영육간에 극심한 고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사하셨고 시인은 놀라운 은혜와 자유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덕분에 죄 사함 받은 자의 행복은 말할 나위 없이 큽니다.

 

용서받음의 행복(1-2)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전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며 죄를 용서받는 것이 복의 출발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기에, 죄가 가득할 때는 어떤 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의 큰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2)

 

‘얼마나 행복한가?’를 두 번씩(1,2) 연발하며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 지은 자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서 들어 올리고 덮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니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아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다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시금 이것을 깨닫게 되었고 죄 사함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시인의 회개 전과 후(3-5)

회개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침묵은 죄를 고백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니까 차라리 시치미를 떼고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않으면 죄가 나를 괴롭히고 들들 볶아댑니다.

 

3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3-5)

 

회개는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다윗은 주님께 고백합니다.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실토합니다.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는 것은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이고 잘못을 범한 당사자에게 고백하는 연습을 미리하는 것입니다.

 

(1) 시인의 회개 전(3-4)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죄 지은 사실을 인지했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침묵했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침묵’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시인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죄에 대해 침묵하여 다문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종일 새어나왔고, 뼈가 녹는 듯 몸이 날로 약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까지 그에게 고통을 주시므로 그의 기력이 여름가뭄에 말라 없어지듯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몸과 마음의 고통의 근원이 그가 지은 죄와 죄를 고백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깨닫도록 채찍질하고 계신다는 점도 절대 모르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버티는 시인의 마음과 태도는 교만하고 완악합니다.

 

(2) 시인의 회개 후(5)

 

고통을 견디다 못한 시인은 마침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자신이 죄 지은 것을 인정하고 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침묵을 깨고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백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허물’과 ‘죄’와 ‘죄악’을 인정하고 회개한다고 언급하는데 이 세 단어가 1-2절에서 이미 ‘허물’, ‘죄’, ‘정죄’로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인의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2절에서 죄를 용서받아 행복한 자는 누구보다 먼저 시인 자신이었다는 점을 드러내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죄를 덮지(‘숨기지’로 번역됨) 않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덮어(‘가려진’으로 번역됨) 용서하심을 체험한 후, 죄 사함 받은 자로서의 행복을 선포하고 이것을 다른 성도에게도 알리고자 했습니다.

 

시인이 죄를 시인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이 나의 죄악을 사하셨나이다’라는 시인의 진술에서 시인을 용서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긍휼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백성으로 삼을 때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요구하셨습니다(출 19:6). 하나님이요 구하시는 거룩한 또는 성결한 삶을 위한 지침으로 십계명을 주시며 그것을 지켜 거룩한 삶을 이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약함과 악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면 성막에 와 제물을 드려 회개함으로써 죄를 씻고 다시 거룩한 백성의 삶을 회복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속히 떨어져 나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시인의 조언(6-7)

회개는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주님께 고백합니다.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실토합니다.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는 것은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이고 잘못을 범한 당사자에게 고백하는 연습을 미리 하는 것입니다.

 

6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셀라)(6-7)

 

회개하여 죄 용서를 받은 후 시인에게서 신음 소리와 고통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징계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시인은 다른 경건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어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시인의 권고는 그들이 소원하는 바를 구하라는 의미보다는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곧바로 그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 고백하여 죄 용서함을 받으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홍수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용서의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시인은 용서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동일시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이 용서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어떤 환란에서도 자기를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의 고통과 신음의 소리는 구원의 노랫소리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8-10)

회개한 자는 다른 죄인을 회개로 이끕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당사자 앞에서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는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됩니다. 목을 죄던 죄에서 자유하고 보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깊은 슬픔이 사라지고 자기도 모르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8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8-10)

 

죄를 숨기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악인들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겠고, 그들은 뻐가 쇠하는 고통으로 신음하겠지만,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여 용서받은 죄인들, 즉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 그 기쁨을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가르침(8)

 

시인이 하나님께 보호자와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의 말씀으로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교사와 멘토(mentor)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인을 가르치고 그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훈계하며 눈을 떼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하고 친밀한 인도와 보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의 약속이 죄인이었던 시인, 용서받은 시인에게 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1-2절의 죄 사함 받은 자의 행복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따르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포함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을 때 겸손과 신뢰가 요구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과 신뢰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과 노새의 예를 들면서 그것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말이나 노새의 주인은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길로 몰고 가려고 할 때 이 동물들이 무지하고 완고하여 말을 안 들으므로 재갈과 굴레를 꿰어 강제로 끌고 갑니다.

 

(2) 하나님의 훈계(1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만 피우며 자기 생각대로 가려 한다면 어떻게 인도를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교훈에는 시인이 한 때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저항하여 어리석게 행한 것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인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신뢰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겸손하게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악인과 의인의 결과(10)

 

이 경고를 듣고도 자기의 고집과 생각을 따라가는 자는 악인이며, 그들에게는 슬픔이 따를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신뢰하며 따라가는 자는 의인이며, 하나님의 인자가 그를 따를 것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11)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뻔뻔하게, 당당하게 살라는 이 시대에 이 다윗의 고백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하며 진부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만이 회복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1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지혜의 권면도 받은 행복한 시인은 함께한 무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시인은 성도들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께 죄 사함 받는 행복을 누리고 더불어 약속하신 보호와 인도를 축복으로 받기를 기대합니다. 시인의 간증과 하나님의 권면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성도들은 시인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받을 때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한 자신이 용서받고 받아들여질 때입니까? 후자입니다. 죄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인지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용서해주신 것을 알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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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1-01)


고통 중에도 주를 의지하는 다윗

시편 31편 1-24절


 

사랑이란 말이 드물게 많이 나오는 시편입니다. 고난 중에 그것도 목전에 둔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고난이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의 사랑의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 다윗은 원수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와 공의로 자신을 어려움과 고통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을 간구(1-4)

하나님께서는 의지하는 자들의 구원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를 묵상하다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위기가 아닌 위기 너머에 계신 구원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1-4)

 

다윗은 ‘당신께’라고 외치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직접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고난과 고통에 처했을 때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를 보호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 바위, 산성, 반석에 비유압니다. 대부분 산지에 주거하던 이스라엘인에게는 견고한 바위나 높은 산성은 종종 자연 재해나 강도나 적의 공격에서 그들을 보호해주는 보호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보호처와 같이 다윗을 위험에서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바위와 산성은 때로 다윗에게 충분한 보호막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다윗이 피난처 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다윗을 보호하고 구해낼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할 때 자기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할 때 그분이 귀 기울여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를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1,4).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다윗에게 닥친 상황을 의롭게 살피시고 마땅히 그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므로, 그분 이름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백성인 다윗을 돌보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처한 상황은 ‘비밀히 친 그물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냥꾼이 새나 짐승을 사냥할 때처럼 원수들은 다윗을 잡으려고 몰래 그물을 쳐 다윗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에 반해 다윗은 무고한 자임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5-8)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거니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반면 우상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도 알맹이도 없습니다. 우상은 돕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석이요 상성이시기에 삶을 믿고 맡길 만합니다. 당신은 영혼과 인생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습니까?

 

5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6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7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8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5-8)

 

다윗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적의 위협이 주는 두려움과 근심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고 슬픔과 한숨으로 남은 인생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립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목숨마저도 앗아가려는 대적들의 모략에 혼절할 지경입니다.

 

(1)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5-6)

 

5절의 첫마디인 ‘당신의 손에’라는 말은 1절의 ‘당신께’와 같은 맥락으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다윗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토록 신뢰하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 자신을 맡깁니다. 그의 생명까지 하나님께 내맡길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다윗의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동일하며, 이는 구원을 이루는 모든 일을 마치고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절정을 보여줍니다(눅 23:46).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7-8)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으므로 변치 않는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량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다윗이 구원을 받은 후에 이 사건을 회고하며 진술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일어날 구원을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음으로 선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5절 이후의 내용(5-18)이 다윗의 여전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후자로 이해하는 편이 1-18절의 문맥에서 더 적절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허탄한 거짓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지만, 다윗은 진리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난 중에 있어도 언약의 하나님이 그가 처한 상황을 아시고 원수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안전하고 자유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다’고 믿음으로 선언할 수 있습니다(8). 다윗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확신하고 기대하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 (9-13)

사실 고난이 예상치 못한 가운데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말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고난 중에 태어났고 고난과 함께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왔을 뿐이지 그 실체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9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9-13)

 

다윗은 고통 중에도 기도합니다. 육체(9-10)와 관계(11-13)의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일생을 마냥 슬퍼하며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럴지라도 내 하나님, 내 구원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주님을 목 놓아 부릅니다.

 

(1)하나님의 은혜를 간구(9a)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절박하고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며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구원을 재촉합니다.

 

(2) 영육간의 고통(9b-10)

 

다윗의 고통은 몸과 마음에 가득합니다. 이 근심과 고통은 하루나 이틀의 일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있어온 것처럼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고 약해집니다.

 

(3) 원수로 인한 고통(11-13)

 

다윗의 고통의 원인은 그를 욕하고 몰래 자신을 위기에 빠뜨린 원수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웃과 친구와 알지 못하는 행인조차도 그를 피하고 비방하였고, 더 나아가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미 죽은 사람과 깨진 그릇처럼 버려져 존재감을 상실하였습니다. 다윗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두려움과 고통이 엄습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합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구원을 간구(14-18)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피하기만 하면 자신의 음밀한 장막에 우리를 숨겨 주시고, 온갖 구설의 다툼을 막아주십니다. 다윗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8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14-18)

 

다윗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적의 위협이 주는 두려움과 근심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습니다. 슬픔과 한숨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변하자 모든 관계들이 돌변하여 떠나고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1)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14)

 

죽을 고통에 놓인 다윗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에게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언하며 ‘그러나 나는 주를 의지합니다!’ 라고 외칩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5-18)

 

그는 자기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여 자기를 원수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인자, 은혜 등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으며 그의 말씀과 행동이 이 성품에서 온다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면서 원수들에 대한 심판도 함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는 자는 무고히 고통받고 있는 자기 자신이므로 하나님이 그를 원수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되 그의 원수들에게는 수치와 멸망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이 원수들은 비겁하고 사악할 뿐 아니라 교만하고 죄 없는 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므로 이들의 입을 막아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양(19-24)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견고한 성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붙든다면, 고난 때문에 눈이 흐려지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라볼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이 진실함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이 진실함입니다.

 

19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3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19-24)

 

이제 다윗의 간구가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시작됩니다(19-24) 내용으로 보아 이 단락은 다윗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후인 듯합니다.

 

(1)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19-20)

 

먼저, 다윗은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찬양합니다(19-20).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피난처 삼는 자를 위해 최고의 것을 마련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람의 꾀와 다툼을 일으키는 말에서 구하시고,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밀 장소에 감추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음모를 꾸미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지목하는 이유는 그의 원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며 피난처 삼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자신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총과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2) 다윗의 찬양(21-22)

 

둘째로, 다윗은 자신이 기도한 대로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1-22).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7), 구원하시기를(16) 구하고 기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한 위기에 놀라 자기가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받기에 마땅한 찬송을 드립니다.

 

(3) 성도에게 권면(23-24)

 

끝으로 다윗은 성도들을 향해 권면합니다(23-24). ‘여호와를 사랑하라! 힘내라! 담대하라!’ 이 세 가지 명령으로 다윗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다윗을 포함한 하나님의 성도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고 사랑하시므로 그분의 성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존중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다윗의 경험을 함께 들은 성도들은 다윗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억울한 시기를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한 자를 엄중히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바로 그분의 사랑의 다른 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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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0-01)

 


헤아릴 수 없는 기쁨

시편 30편 1-12절


 

고통의 문제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고통을 제거해주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이러한 질문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신다’라는 대답이 늘 있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신음하던 시인이 고통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의 시로서, 다윗은 고통과 병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시는 감사제를 드릴 때 불리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 감사의 시에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가 성전 의식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시의 내용에 성전이나 봉헌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주께 감사 찬양하는 이유(1-3)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의 근거를 마련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구언하셔서 인생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 수 있게 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3)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림으로 시를 시작하고 또한 시를 맺습니다(1,12). 그의 감사의 내용에는 자신이 경험한 고난의 때와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때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병에 걸렸고 죽음의 위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세 가지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음에서 끌어내심으로써 다윗의 원수들에게 기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1). 둘째,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병을 치료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2). 셋째,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윗을 살리셨습니다(3). 이 세 가지 이유 속에는 다윗과 원수와의 관계 그리고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아파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런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치료와 생명을 공급하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끌어내신 사건(1)은 그를 죽음에서 끌어올려(lift up) 살리심으로써 무덤으로 내려가지(go down) 않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3)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그분이 죽음의 병을 치유하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능력자임을 밝히 드러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고, 구원을 얻었고, 이제 그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다윗과 원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마음의 태도와 행동에서 잘 나타납니다. 원수들은 다윗이 죽고 멸망할 때는 기뻐하지만, 다윗의 병이 치유되어 생명을 얻을 때는 그들에게 낙이 없게 됩니다. 다윗의 고난과 죽음을 기뻐하며 고대하는 원수들은 악인들입니다(시 35:15-16). 그러나 의인은 그런 악인들이 병들었을 때 그를 위해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입니다(시 35:13-14; 109:4).

 

성도들을 주 찬양에 초대(4-5)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치유 사역입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심은 물론, 환난에서 건져주시며 궁핍한 자들을 부요케 하여 주시는 것들도 하나님의 치유의 한 영역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한 자들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도 중요한 치유입니다. 그 치유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4-5)

 

다윗은 본인만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함께한 공동체를 기억하고 그들을 찬양에 초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공동체이므로, 한 사람의 감사의 이유는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에게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공동체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기억하기 위해 감사하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다윗을 구원한 사건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거룩함은 죄가 없고 공의로우며 은혜로운 성품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다윗을 병과 고통에서 구원하시며, 원수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하신 일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화답해야 하는 반응입니다.

이제 5절에서 다윗은 그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서 하나님 찬양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대조적인 성품인 노여움과 은총을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립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나 그의 은총이 평생에 임할 것임을 표명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과 은총은 성도의 울음과 기쁨과 직결됩니다. 하지만 노여움으로 인한 성도의 눈물은 저녁에 머물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아침에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만, 노하시는 때에라도 긍휼히 여겨 노여움을 오래 지속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출 34:6). 여기서 하나님의 노여움과 은총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의 6-12절에 좀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다윗의 형통의 때와 고통의 때(6-7)

기다림의 법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서두름은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알아야 하겠다는 성급함보다 사단의 덫에 걸린 결과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깊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회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자여야 할 것입니다.

 

6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6-7)

 

다윗이 앞 5절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언급한 내용은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다윗은 형통한 때와 고통의 때를 경험했습니다. 형통한 때라는 것은 그의 삶이 평화롭고 고요한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런 때에 그는 자신 만만하게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불행이나 악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서(시 46:5;10:6), 자신의 형통한 때가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시편 46:5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므로 예루살렘 성이 ‘흔들리지 (개역개정에서는 ‘요동하지’로 번역) 않을 것이다’와 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시 16:8; 62:2,6) 또는 하나님 덕분에 의인이 ‘흔들리지 않음’을 확증하는 표현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시 15:5;112:6; 잠 10:30;12:3). 그러나 여기서는 시편 10:4-6의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다윗의 교만한 발언입니다. 다윗의 흔들림이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표현은 ‘대대로’ 해악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악인(10:6)의 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만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다윗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7). 다윗은 자신이 산같이 흔들림 없이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고서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노하셨습니다(5). 그에게 근심과 고통을 주셨습니다. 삶이 안락하고 편했을 때에 다윗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은 듯 자기 자신과 형통한 현재를 보았고 앞으로의 형통한 미래를 자신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심과 고통으로 삶이 흔들리자 다윗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형통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현재의 고통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고통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린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간섭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달은 평생의 은총(5)인 것입니다.

 

다윗의 간구(8-10)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때에 따라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고 은혜의 기도를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8-10)

 

교만과 죄로 인해 고통과 죽음에 다다른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다윗은 “제가 살아야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죽는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치며 용서와 생명의 회복을 간청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과 긍휼을 가지신 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응답과 다윗의 화답(11-12)

다윗은 찬송할만한 이유와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도, 마땅한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찬송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엇 때문에 찬송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으로 찬송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11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1-12)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으므로 다윗은 감사와 찬양으로 화답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베옷을 춤으로 바꾸신 분이 하나님께서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와 고통으로 통곡하는 눈물을 바꾸어 그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춤을 추게 하셨습니다. 그가 참회하며 고통 속에서 입었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과 응답을 경험한 다윗은 잠잠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주께 노래하며 영원히 주께 감사합니다. 주께 영원히 감사드리겠다는 다윗의 고백에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사의 기회를 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찬송할만한 이유와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도, 마땅한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찬송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엇 때문에 찬송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으로 찬송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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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9-01)

 


여호와의 권능의 소리

시편 29편 1-11절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어떻게 선포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그의 목소리로 천지에 나타나 천지와 이방신의 세력을 굴복시키십니다. 세상의 무질서를 정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임이 밝히 드러납니다. 이 하나님께 하늘에서는 그의 천사들이 그리고 땅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1-2)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역사, 인간 등 모든 것을 다르시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하기에 당신의 모든 것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1-2)

 

시인은 하늘에 있는 권능 있는 존재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상에 있어 그분의 모임에 등장하는 자들입니다(욥 1:6, 2:1; 왕상 22:19; 시 89:6 등). 시인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세 번이나 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라는 점이 시인의 찬양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잘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들에게 그들이 인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그의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놀라운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땅의 성도는 하늘의 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거룩하고 구별된 옷을 입고 예배하는 모습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세마포를 입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거룩한 옷이 내포하는 의미는 예배자의 성결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가 흠 없는 예물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듯이(레 1:2-3),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성결한 마음과 행실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리(3-9)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다스리시는 영광의 왕이시며, 여호와의 소리로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영광은 인간이 조작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드러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3-9)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세계가 증명합니다. 온 피조물을 뒤흔들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소리가 그 영광의 증거입니다. 뇌성은 가나안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아무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1) 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3-4)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온 세상에 강한 폭풍우 속 천둥소리로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이며, 그의 능력과 위엄이 드러나게 되는 소리입니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쟁쟁하게 울립니다.

가나안 인들에게 바다는 바다와 혼돈의 신인 얌과 폭풍의 신인 바알이 싸움을 일으키는 전쟁터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천둥소리를 들을 때 바알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폭풍우 속에서 크고 강하게 울리는 이 천둥소리는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소리의 주인공인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시인이 힘과 위엄이 있는 소리를 내며 많은 물을 정복하신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자가 아무도 없으며, 바다나 혼돈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알립니다(시 89:9).

 

(2) 백향목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5-6)

 

천둥소리로 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 바다로부터 이동하여 이제 레바논의 산들에 임합니다. 시인은 여러 지역에서 특별히 가나안의 북쪽 지역에 있는 레바논 산과 시론(헤르몬 산) 그리고 그 산들의 명물인 백향목을 지목하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경에서도 ‘레바논의 영광’(사 6:13)으로 불릴 만큼 이스라엘과 같이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한 목재가 귀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알려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들여와서 사용했습니다(왕상 5:6; 6:9-10), 시론은 시돈(페니키아)인들이 헤르몬 산을 가리켜 부른 이름으로서(신 3:9) 해발 2800미터가 넘는 높이로 지중해 동해안 쪽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신에게 바쳐진 곳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이 산은 이방신들의 거주지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같은 장엄한 산들과 그 산들의 가장 빼어난 나무들이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천둥 번개 소리 앞에 맥을 못 추고, 흔들리고 뒤틀리고 꺾이며 부서집니다. 시인은 이 산들과 나무가 파괴되며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을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들송아지가 몸을 뒤틀며 걷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뛰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이 산과 나무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폭풍의 바다를 지나 산들에 임하여 그것을 뒤흔들며 제압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에 깃들어 있는 어떠한 혼돈과 신들의 세력도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앞에서는 일어설 수 없음을 표명합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압한 이 헤르몬 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세상의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즐거이 외치게 될 주체입니다(시 89:12).

 

(3) 광야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소리(7-9)

 

천지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뇌성이 바다와 산맥을 지나 광야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천둥 번개 소리가 광야를 뒤흔들고 화염이 치솟아 삼림을 불태웁니다. 화염을 가르신다는 표현은 불을 내신다는 표현으로 번개와 더불어 일어나는 화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과도 연결 지어 묘사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이 지목한 가데스 광야는 바란 광야 가데스(민 13:26)인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지명보다는 일반적인 사막 지역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광활한 지역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알리는 굉음이 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불과 지진이 나는 모습을 통하여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권이 세상에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산의 나무들에게 영향을 미치듯 광야의 짐승들에게도 임하여 새끼를 밴 암사슴이 예정된 시간보다 앞당겨 새끼를 낳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진동에 삼림이 눈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이미지들 모두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그의 통치 능력을 드높이는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통해 표현되는 초월적인 힘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을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전이 하늘의 하나님 계신 곳인지 땅의 성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늘이라면 시인은 우리를 다시 1-2절의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로 향하게 합니다. 땅의 성전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가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에서 울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시인이 의도하는 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천지에 충만하므로 그의 피조물 모두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0-11)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통치자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홍수는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이고 크나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복하고 통제하셔서 백성들에게 힘과 평화를 주십니다. 자연과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하나님과 달리인간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습니까?

 

10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0-11)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왕권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요동하는 바다와 산과 광야를 통제하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이 견고하게 세상에 안착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홍수 때에도 홍수를 정복하시고 세상의 왕으로서 견고히 세상을 통치하셨다. 위에서 본 우주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는 영원히 유지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복으로 주시고 보호하십니다. 1-2절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힘을 찬양하고, 3-9절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통하여 영광과 힘이 증명되며, 이제 영광과 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본 시에서 시인은 인간 세계에서뿐 아니라 우주만물 속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무질서와 도전을 단번에 압도하고 질서를 잡는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주의 질서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복을 주신다는 점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도리는 행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일일 뿐 아니라,.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고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평화로운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어떤 마음과 행실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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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8-01)


나의 힘과 목자이신 여호와

시편 28편 1-9절


찬양은 감사의 표현이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이미 얻은 승리로 드리기도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으로 미리 드리는 고백입니다. 오늘 시인은 믿음의 고백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기 때문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응답을 촉구합니다. 시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인들의 불의와 부정에 그의 기도 소리를 높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간구 소리를 들으셨고, 시인은 이에 기뻐하며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흔들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외적인 시련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는 듯 보여 더 가슴 아픕니다. 시인은 정신이 하도 없어 보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1-2)

 

시인은 ‘당신께’라고 외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간구를 들어줄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아주고 간구에 귀 기울이시길 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산에 있는 반석은 요새나 산성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난처가 되며 견고한 힘과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반석은 구원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구원’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됩니다(시 18:2,46; 62:2,6). 여기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부른 것도 사무엘하 22:47처럼 ‘구원의 반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지성소는 성소의 내부에 있는 방으로 언약궤와 그룹이 놓여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성소가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 성소 자체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지만, 지성소는 그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충만하고 밀집된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를 향한 시인의 자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현재 하나님은 시인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의 간구에 반응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귀를 막지 마소서. 내가 지금 부르짖고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손을 들고 지성소를 향하여 자기가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뿐임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주위를 돌려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덧붙여 하나님이 묵묵부답으로 대하시면 시인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이사야 14:15에 의하면 구덩이의 맨 밑바닥이 스올(죽은 자가 거하는 곳)인데, 이때 구덩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무덤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무덤이 죽음의 문턱을 의미하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지금 자기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구는 은혜를 구하는 간구이며 구원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외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통하여 응답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의 몫은 우리 자신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 덕분입니다.

 

악인의 심판을 촉구(3-5)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악인은 겉과 속이 판이해서 남도 파멸시키고 자신도 망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고 손으로 정의를 세우심으로 모두를 살리십니다. 악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심은 대로 수확하게 합니다.

 

3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3-5)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원인은 악인들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악인들과 함께 멸망으로 끌어가지 마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인은 그들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므로 악인의 운명에 휘말려갈 수 없습니다. 이 악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악을 품는 위선자들입니다. 이처럼 악인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탐욕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들의 잘못을 따져서 공의로 갚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그에 응당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악

안을 심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사적인 앙갚음 때문이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정의와 공용에 어긋나서 하나님이원하시는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5절에서 나타나듯이 악인들의 죄악은 인간관계에서만나타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 드러난다. 우선 그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신 창조 사역이나 출애급과 같은 구원 사역,하나님의 통치 등을 망각하고 주의를 가울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간과하고 자기 이익과 자기 자산을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악인들이 하나님이세우신 정의와 질서를 개고 하나님의 관계나 다른 아웃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시인은 이 점을 확실히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가 재정비되는 것을 보고자 기대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를 찬양(6-7)

하나님께서는 구한 대로 들으십니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건성으로 듣고, 두어 번 들으면 지겹다고 귀찮다고 멀리 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잘 들으시고, 들으신 대로 응답하십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 때문에 기ㅃ 어쩔 줄 모릅니다.

 

6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6-7)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절의 ‘나의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소서’가 이제 6절에서 ‘내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심이로다’로 변했고 ‘도움을 얻었도다’(절는 말이 추가된 점을 보면 1~2절에서 기도하던 간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침묵을 끼고 응답합니다.

 

시인은 찬양의 첫마디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라고 외치는데, 이는 ‘여호와를 송축함이여’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6-7절에서 ‘송축하라’로 시작한 찬양은 ‘찬양할 것이다’로 고조됩니다. 전체적으로 찬양(6)-찬양의 이유(6)-찬양의 이유(A-TD절의 순서로 전개되어 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납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힘’이고 ‘방패’입니다. 특히 힘과 방패는 용사에게 있어서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물리치는데 필수적입니다. 용사에게 힘과 방패가 있다면, 그는 전에서 든든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힘과 방패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전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만 의지한 결과 하나님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1)가 아니라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한 자입니다(7).

그는 기쁨과 감사에 겨워 자신만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노래’라고 지칭하며 다른 사람의 노래와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의 노래에 담긴 내용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두드러지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은 자는 이러한 개인적인 노래가 그의 삶 동안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찬양(8-9)

지도자들은 요새 같은 든든한 힘을 얻기를 바라고,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기를 구합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고, 이웃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로 확장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던 위치에서 이제 왕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8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9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8-9)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힘’과 ‘방패’만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신 왕과 그의 모든 백성에게 ‘힘’과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라고 표현한 데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를 통해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윗과 그의 자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통치하시며 친히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업(산업)입니다(신 4:20; 사 19:25; 렘 12:7-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며 목자입니다(시 23:1).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 복 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영원히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흔들리는 세상과 흐느끼는 신인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는 반석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눈에도 보이는 악인의 행실이 하나님의 눈에 괜찮을 리 없습니다. 때가 되면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응답과 심판으로 억울함으로 풀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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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7-01)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시편 27편 1-14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이 믿음에 관한 얼마나 적실한 정의 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100% 확률의 모험이기 때문에, 이미 현실이 된 것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의 희망도 없는 상황마저 뒤엎을 수 있고, 전혀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시인은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평안한 마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을 사랑하며 항상 그분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원수에게서 구원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며 찬양을 서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두려움이 없는 시인(1-3)

하나님만이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요, 내 갈 길을 밝히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합쳐도 더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시므로 겁나지 않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시인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을 ‘나의’로 부르는 시인의 모습 속에 하나님과 그의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빛이라 불렀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빛’과 ‘불’로(사 10:17; 미 7:8; 요 1:4), ‘영원한 빛’이 되십니다(사 60:19). 시인은 이 빛되신 하나님을 구원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같은 대적들을 몰아내고 시인에게 승리를 주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빛’과 ‘구원’이신 하나님을 생명과 연결한다. 특히 생명의 능력은 요새나 피난처를 가리키므로, 하나님이 시인의 피난처가 되셔서 그가 하나님께 피하면 생명을 보존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개인적인 보호자가 되어주시므로 시인은 두려워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 주변에는 시인을 노리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물어뜯어 해를 입히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구원자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의 원수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또한 시인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외에도 국가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적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시인을 공격하려고 에워싸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여 마음이 든든합니다(시 46편).

 

시인의 기도(4-6)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소원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원을 기도합니다. 그것은 주의 집에 살겠다는 오직 하나의 소원만 있을 뿐입니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4-6)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을 구합니다. 묵상 중에 주의 얼굴을 찾으라는 내적인 음성을 듣고 즉각 반응 합니다. 일생 내내 시인의 도움이 되신 주께서 이번에도 버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4)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마음이 담대한 시인은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평생토록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구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단호하고 강렬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단호하고 강렬합니다. 시인이 바라보기 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을 사모하거나 구한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원문으로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모두 시인으로 하여금 은혜와 기쁨이 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5)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시인이 환난당할 때에 피난처가 됩니다. 시인은 어려움에 처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처소에 숨기시거나 높은 바위 위에 두셔서 어느 누구도 시인을 찾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숨겨주는 모습은 시편 91편에 하나님의 날개깃으로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높은 바위는 성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므로 실제로 성전이 있는 시온을 지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시 46편)

 

(3) 하나님께 찬양(6)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원수들 앞에서 시인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주신 그 성전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간구(7-12)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자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습니다.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마저 자신이 정한 척도를 따라 판단에 따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분, 하나님만이 바라보시며 웃어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부모에게 버림받을 정도로 극도의 고독과 고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7-12)

 

시인의 소원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임재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이미 승리를 누리는 사람마냥 하나님께 제사와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는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임을 설명합니다.

 

(1) 응답을 촉구(7-10)

 

1-6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신뢰는 담대한 고백,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끝없는 사랑, 환난에서 승리하여 감사 제사를 드리게 될 확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7-14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가 그의 간구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합니다.

7절과 9절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들어주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응답하소서’,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떠나지 마소서’는 모두 ‘들어주소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단어와 형식(‘…하소서’, ‘…하지 마소서’)을 바꿔가며 같은 내용의 기도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원합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마치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인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기도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명령하실 때, 시인은 마음으로 주의 얼굴을 찾을 것이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환난이 찾아오자 시인은 결심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점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자신을 긍휼히 보시고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덧붙여 자기를 긍휼히 여겨 떠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시인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설령 이 땅에 있는 육신의 부모가 그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접하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현재 시인의 친구나 형제, 그의 부모조차도 다 그를 외면하여서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았으나, 하나님은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기대하는 자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입니다.

 

(2) 하나님께 간구(11-12)

 

하나님의 긍휼과 얼굴을 구하는 시인은 환난 중에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도로 원수들의 모든 장애를 벗어나 평탄한 곳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은 선과 정의가 있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력과 거짓을 일삼는 원수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시고 자신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려주시고 자신에게는 평안과 안전을 공급해달라고 간청 드립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림(13-14)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터무니없는 말로 몰아세우는데 우습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줍니다. 이러한 숨이 넘어갈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선하심을 의지하고 우리를 삼키려는 죽음의 땅을 산 자의 땅으로 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3-14)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선과 정의를 확신하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시인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마음에만 품지 않고 공동체에 선포합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그를 기다리라고 조언하며 시를 마칩니다. 현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이 이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구원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는 사실은 기다림이 가능한 이유요 두렵지 않은 이유입니다. 지금은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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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6-01)

 


나를 실피시고 시험하소서

시편 26편 1-12절


거친 텃밭에서도 보들보들한 새잎이 나듯, 연일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새잎을 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불안을 넘어 사회적 불안이 우리를 자극하고 공격할 때, 어떻게 담당하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상자가 있습니다.

 

  •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함과 진리 중에 행한 것과 주님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 자신은 모함하는 행악자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는 자로서 무죄함과 결백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시인은 악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염려하며 구속의 은총을 구하면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결백을 호소하는 기도(1-3)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호소할 사람도 호소할 길도 없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평하게 재판하시고 또한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샅샅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공평하게 재판하실 하나님께 간청하면 선하고 의로운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1-3)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자기 사정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믿고 호소합니다. 시인의 첫마디가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la)라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합니다. ‘판단하다’(샤파트)라는 말은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려달라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의 판단이 필요한지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을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1b). 이는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행실로 살아왔음을 천명하는 호소입니다(참조, 시 101:2; 잠 2:7; 10:9; 19:1; 20:7; 28:6). 또한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1c).

 

시인의 거침없는 호소는 계속됩니다. ‘여호와여 나를 조사해보시고, 내 뜻과 내 양심을 감찰하소서’(2). ‘내 뜻’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콩팥’(킬야)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심장’ 또는 ‘마음’을 뜻하는 ‘레브’입니다. 심장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의사 결정 기관이며, 지혜와 의지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남이 들추지 못할 내면 깊숙한 곳과 양심까지 샅샅이 조사해달라고 말할 만큼 깨끗합니다. 시인은 마음의 법정인 양심과 가장 깊은 내면의 깨끗함을 호소합니다. 시인의 뜻과 양심을 포함한 전부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요청은 뒤로 물러섬 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시인의 절박함에 당당함이 끼어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주장과 담대한 태도는 자칫 교만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자하심이 내 앞에 있고, 나는 당신의 진리를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3). ‘인자하심’은 언약적인 사랑이며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강렬했으니 여호와의 ‘진리’, 곧 진실함과 신실하심을 따라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의 온전한 삶의 실천은 여호와의 엄한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당신의 진리(진실하심) 안에서’ 자신의 투철한 의지로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절박함 속에서도 당당한 이유입니다.

 

악인들과 다름을 호소(4-5)

악한 무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무리들과 단절하면 많은 이익관계까지도 단절되는 위험을 수반합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운명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

 

하나님께 헌신된 시인의 온전하고 무죄한 삶은 악인들과의 관계나 그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진리에 부합하게 살았음을 호소했습니다(3). 그런 그가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와 동행할 리 없습니다(4). 시인은 헛것을 따르는 자들, 곧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4a). 따라서 마음속에 음흉하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사건을 덮어 은폐하는 ‘간사한 자’, 곧 ‘감추는 자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고(4b) 다짐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부류는 ‘내 뜻’과 ‘내 양심’을 샅샅이 조사해주시기를 구했던(2) 시인과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시인은 헛것을 추구하거나 숭배하는 자들과 비밀스럽게 뭔가를 감추는 자들을 동급으로 여깁니다. 그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나누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또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반역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5). 선행을 위한 ‘집회’(카할)가 아니라 행악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패거리 문화나 대중 집회를 시인은 ‘미워했고’, 악한 자들과는 동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백 호소와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6-8)

성도들은 거룩한 성도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는 손에 뇌물이나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불평 대신 감사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적을 더불어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한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삶을 꾸려나가는 것과 정확하게 대조되는 삶을 노래합니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6-8)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결백을 호소합니다. ‘내가 무죄하여 내 손을 씻고, 여호와여 당신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6). 깨끗한 손은 깨끗한 마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손을 씻는 행동은 다양한 정황에서 발견되지만, 무죄와 정결의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예배자의 선행 조건으로서 깨끗한 손(시 24:4)은 성전 입장을 위한 정규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시 73:13). 또한 제단은 하나님과의 친교와 임재를 알려주는 식탁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그 주변을 돌면서 ‘감사의 소리를 듣게 하고, 당신의 기이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입니다’(7)라고 다짐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사랑 고백이 독특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을 사랑하고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했습니다’(8), 시인은 마치 회상하듯이 완료형 동사로 말합니다.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과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내가 사랑했다’(아하브티)는 말은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했다(5)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건물 자체의 영광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처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사랑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드물지만(31:23; 97:10; 116:1; 145:2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이름(5:11; 69:36), 여호와의 법과 구원을 사랑합니다(119:47, 48, 97, 113, 119, 127, 159, 163)는 표현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악인들과 구별되기를 간구(9-10)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자신도 휩쓸려 갑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뇌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일삼는 자들과 함께 부당한 이권에 기웃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9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9-10)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4-5). 이제 시인은 자신의 다짐 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내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9). 시인이 악인들과 함께 휩쓸려 제거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는 여호와가 악인들을 박멸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시인이 죄인들(9)과 동격 관계로 설정한 살인자들(9b)은 주로 피에 굶주려 폭력적인 행위나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런 자들과 한통속으로 묶여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들의 속성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로 가득합니다’(10). 시인은 악인들의 사악함을 뇌물을 밝히는 손으로 특정합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무죄한 손을 언급했지만(6), 사악한 죄인들의 손은 부정하고 불법한 뇌물로 가득합니다. 뇌물과 관련된 자들은 대체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고, 이들은 자기보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고 불법적인 이득을 챙깁니다. 시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결백 확신과 구속의 은총을 호소(11-12)

완전할 수 없다고 해서 완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함이 아니라 세상과 달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들리고 떠나는 무리 가운데서도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도 많이 흔들렸고, 항상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1-12)

 

시인이 맨 처음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1a)라고 고백하고 호소한 것처럼 다시 반복합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호응하는 구성입니다. 시인은 ‘내가 흠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11a)라고 다짐하고 간청합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1b).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함을 맹세했지만(6), 여전히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속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속량하다’ 또는 ‘구속하다’라는 의미의 ‘파다’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처럼,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가 구원받는 것처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기백성 삼으신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삼하 7:23). 그러니까 시인은 자기 조상들이 맛본 구속의 은총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유효한 은총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여호와가 보이신 은총 속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고 싶습니다. 시인은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으니 내가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당신을 송축할 것이라’(12) 다짐합니다.

시인은 앞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고백했지만(5), 이제 ‘회중’(막헬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군다나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평탄한 데는 견고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평함, 정직함, 의로움을 표현한 은유입니다(참조. 사 11:4). 따라서 시인은 신앙과 윤리적인 삶의 일치를 다짐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완전함으로’(1,12) 살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올바른 삶의 방식은 변함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께 변호를 의뢰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책임 있는 자세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을 판단하실 하나님이 그날에도 재판장이 되어 모든 걸 판단하실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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