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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4-01)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의 존재

시편 64편 1-10절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고 똑똑하고 과학이 발달한 첨단의 시대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금만 힘이 생기고 소유가 늘어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착각합니다.

 

 

  • 본 시편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며(1-2), 악인들의 계획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고(3-6),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용사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 후(7-9), 의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찬양하는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0).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 요청(1-2)

세상은 큰 울음소리도 흘려듣지만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고통당하는 백성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악인의 계략에서 건져 주십니다. 은밀히 공격하는 대적들에게서 ‘숨을 곳’이 되어주십니다. 그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숨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1-2)

 

시편 64편은 하나님께 대한 구원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라며 하나님을 부르고, 원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과연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는 것입니까? 그 내용이 2절에 간략하게 등장합니다. 악을 꾀하는 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들의 계획 때문에 시편 기자는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까지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묘사(3-6)

원수들의 무기는 칼처럼 날카로운 혀와 화살같이 독한 말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딥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과 비방으로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사냥꾼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예고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러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악인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정려하고 힘을 합쳤습니다.

 

3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6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3-6)

 

1-2절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 후 시편 기자는 이제 3-6절에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악인들에 대한 집중적인 묘사를 제시합니다. 먼저 3-4절은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3절은 악인들이 입으로 펼쳐내는 언사가 칼과 같고 화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칼과 화살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이며, 다른 이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됩니다. 따라서 악인들이 칼과 화살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악인들이 의인들을 죽이기 위한 말을 한다는 뜻이 됩니다. 4절은 이에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악인들은 그 독하고 악한 말을 칼과 화살과 같이 사용하되, 숨은 곳에서 갑자기 자신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 사람을 겨냥해서 씁니다. 즉 악인들이 하는 말은 의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의인들을 억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하는 악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 일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7절 이하에 내려가면 명확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5-6절은 악인들에 대한 묘사를 이어갑니다. 3-4절이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5-6절은 그런 악한 말을 하고 있는 악인들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5절에서는 악인들이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격려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격려합니다’는 말은 ‘강하게 합니다’는 뜻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강하게 붙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이것이 악인들의 정체입니다. 악한 일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하고 뭉치는 것이 바로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하려고 하는 일은 바로 ‘몰래 올무를 놓는 일’입니다. 원어를 보면 ‘올무들을 놓는다’라고 복수형태를 사용합니다. 즉 길을 올바로 잘 가고 있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올무를 여러 개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이것들을 보리요’ 하면서 의인들이 올무를 보지 못하여 그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속마음은 6절에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악한 계획을 꾸며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습니다’라며 기뻐합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행태를 향해 시편 기자는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다’고 한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곳까지 죄악으로 물들어 있기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역사와 죄에 물든 생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7-9)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맘 놓고 거만하게 떠들던 악인들의 입은 닫히고, 탄식하며 기도하던 의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즐거운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그들의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그들이 친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어 조롱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7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8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9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7-9)

 

이제 7절부터는 3-6절에서 언급한 악인들이 어떤 최종적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화살로 쏘신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화살로 쓴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4절에서 악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과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악인들은 의인들을 악한 말이라는 화살로 쏘아 넘어뜨리려 했으나, 정작 화살을 맞아 넘어지게 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악인들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인들을 향해서 화살을 쏘시는 분은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은 이러한 악인들이 맞게 되는 멸망이 바로 자신들의 악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이 엎드러지나니’라는 말은 ‘그들이 그를 엎드러지게 하나니’라는 뜻으로, 악인들이 스스로를 엎어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혀는 그 자신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3-4절에서 의인을 상하게 하려고 악한 말을 꾸며냈는데, 그 악한 말이 악인들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인들을 보는 자들이 다 머리를 흔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악인들이 받는 형벌을 보고 만족스러워하거나 혹은 그 형벌로 인해 놀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악인들이 받는 벌을 보고 놀라서 도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의인을 넘어뜨릴 줄로 예상되었으나, 놀랍게도 악인들 자신에게 그대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이러한 모든 일의 결과,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앞서 4절에서 악인들은 온전한 의인들을 향해 화살을 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악인들이 맞는 종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을 그 악인들에게 갚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10)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생각을 좇아 삽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반면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10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64편의 마지막 구절인 10절은 ‘의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64편에서 ‘의인’이라는 단어는 10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오직 ‘악인’ 혹은 ‘악을 꾀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해 왔습니다. 악인에 반대되는 말은 4절에서 ‘온전한 자’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10절은 64편의 마지막 구절로서, 악인들의 계획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졌지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의인’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그 앞을 막아서는 간교한 악인들의 계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도우심을 기대하고, 악인들과 싸우시며 그들의 악한 계획을 물리쳐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마음이 정직한 자 곧 마음이 올바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악인들의 계획을 만나게 될 때, 64편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악인들의 악함을 물리쳐주시고 의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믿으며 담대한 신앙으로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우리를 공격하고 힘들게 해도,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악인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악인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무지(無知)만 못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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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3-01)

 


광야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 63편 1-11절


 

인생은 고단합니다. 산을 넘으면 강을 만나고, 강을 건너 한숨 돌리면 깊은 계곡, 메마른 광야를 만납니다. 인생의 어느 한순간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 시편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윗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이 서론 역할을 하며, 11절이 결론 역할을 하는데, 그 중간에 나타난 2-10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다윗의 신앙을 묘사해줍니다. 다윗은 과거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자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를 멸하여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다(1)

하나님께서 고난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고 다시 성소로 돌아가 감격의 제사를 드릴 것을 소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이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절망 중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본 시는 다윗은 대적에게 쫓겨 유다 광야에 피신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기도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것이 우리가 시편 63편에서 찾아내야 할 주제이다. 다윗은 물이 없어서 마르고 지치는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광야에서는 물을 갈망하게 되는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은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사모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신앙이 가능할까? 다윗은 2절부터 자신의 이러한 신앙의 이유를 풀어나간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던 과거의 모습(2)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곳이 이미 성소입니다. 삶이 유린되고 일상의 무너진 시공일지라도 기도하는 곳은 어디든 성소입니다.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비롯 그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다윗은 자신의 과거 신앙을 회상합니다. 비록 지금은 광야에서 원수에게 쫓기고 있으나, 과거에 자신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지금도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회상하는 과거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해 성소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모습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모습인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I(3-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자에게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이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

 

이렇게 과거에 하나님께 제사로 예배드리던 모습을 회상하면서, 다윗은 매우 중요한 한 단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은 사무엘하 7:8-16에 나오는 다윗 언약의 결론부(삼하 7:15)에 나오는 단어입니다(개역개정에는 ‘은총’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헤세드’이다). 다윗 언약에서 인자하심은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뜻합니다. 즉 다윗 가문이 비록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인자하심’은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다윗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원수에게 쫓겨서 광야에 와 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윗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주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게 할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은 다윗이 평생에 하나님을 송축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임을 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므로,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Ⅱ(5-8)

우리는 물질의 축복을 늘 갈급해합니다. 그렇다고 축복의 기준이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물질의 욕심에 끌려 수많은 우상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신들 속에 파묻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5-8)

 

5-8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고 기대하며 찬양해야 할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5절 상반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이 기름진 것을 먹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기름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기름진 것과 만족의 주제는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광야의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지금은 광야에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모함과 신뢰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부터 6절까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5절 하반절은 다윗이 기쁜 소리로 주님을 찬양함을 말하며, 6절에서는 밤에 침상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밤이 새도록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다윗의 모습을 그립니다. 7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기뻐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7절 상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이 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광야라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기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5-7절에서 다윗이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은 광야라는 주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있지만 광야에 매여 있거나 광야로 인해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은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다윗을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어주신다고 표현합니다. 광야에서 즐거워하며, 고난 가운데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역사를 일으켜주심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멸망(9-10)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심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합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도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9-10)

 

이미지와 이어지는 9-10절은 다윗을 죽이려는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9절과 10절은 모두 상반절과 하반절을 대조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영혼을 멸하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9) 다윗을 칼에 붙이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광야에서 승냥이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10). 지금은 광야에서 다윗이 죽게 될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모든 일들은 새롭게 전환되어 오히려 다윗은 살아나고 대적들이 죽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땅입니다. 그 전환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왕(11)

광야는 시인을 절망에 빠뜨리지 못합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만을 따르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광야는 세상에서 버려진 자가 하나님을 얻는 곳이고, 헛된 것에서 멀어짐으로 참된 것에 가까워지는 곳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소가 아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장소입니다.

 

11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

 

본 절은 63편의 결론으로, 1절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왕’이란 물론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왜 ‘나’라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까? 바로 자신의 상황을 더욱더 객관화하기 위함입니다. 1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관계성을 표현했다면, 11절에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왕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관계임을 서술합니다. 광야에서조차 하나님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즐거워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객관적인 관점에서 담담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맹세하는 자는 자랑하게 될 것이지만,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으로 인해 맹세하는 자’란 63편 전체에서의 다윗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기대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지 않고 자 것입니다.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자는 그 입이 막히게 다윗은 하나님 편에 섰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뿐 아니라 앞으로도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면서 기쁜 소리를 외치는 감격을 계속해서 맛보게 될 것입니다.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신뢰의 노래를 불러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광야는 절망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광야와 같은 삶을 힘겨워합니다. 그 이유는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메마른 인생에도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걸어가도 영혼이 만족하여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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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0-01)


절망에서 승리로 나아가려면

시편 60편 1-12절


 

승리에 익숙한 사람과 실패에 익숙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승리에 익숙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어떤 실패를 만나도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덤덤합니다. 공부하기를 포기한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아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적을 높이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일등인 인생은 작은 실수에도 크게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발판으로 해서 더 열심히 보완하고 노력합니다.

 

 

  • 가나안 정복 전쟁의 상황에서 패배하여 다윗이 주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우리를 버리셨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시인합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선언합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애통과 간구(1-5)

환난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의 원인이 나태, 무분별, 무지 때문일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해결책은 하나,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승리의 깃발을 주셔서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4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5○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1-5)

 

시인은 하나님을 부른 후 곧바로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흩으셨습니다. 주님이 분노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도 없고 접속사도 없이 연이어 나오는 세 개의 동사로 자신들이 당한 상황을 하나님께 탄식하며 몹시 괴롭고 힘든 것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주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버리셨고 그 결과 그들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숴져 버렸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잘못한 자녀를 회초리로 때리는 어머니 품으로 자녀가 뛰어들 듯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2-3절은 주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주께서 지진이 나게 하셔서 땅이 흔들리게 하시고 갈라지게 하셨습니다(2). 지진으로 인해 땅이 흔들림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시 18:7; 46:3,6; 사13:13; 24:18–20). 시인은 하나님께 갈라진 틈을 메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지진은 전쟁에 대한 비유로, 땅이 갈라짐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혼돈과 좌절과 낙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은 이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고 합니다(3).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것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쓰러지는 비참함을 표현합니다.

 

4절은 여러 다른 번역들이 시도되고 있으며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고 했는데 “진리를 위하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단어는 ‘화살’로 보고 ‘달게 하다’는 ‘피하다’로 본다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활쏘는 자) 앞에서 피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3절의 내용에 애통이 나오고 간구가 나온 형식에 따라 4-5절도 애통(4)에 이어 간구(5)가 나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도움을 주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셔서 화살을 피하게 하셨다.’이처럼 이런 구원의 경험에 비추어, 주께서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주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호소(6-8)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는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붙잡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을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삶도 쉬워집니다.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들어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지라도 승리의 확신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승리의 가능성은 확실히 커집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받고 다윗이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6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7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8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6-8)

 

시인의 “응답하소서”의 간구가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다’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패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함으로 하나님께 구원과 승리를 요청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이 다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고 합니다.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한다는 것은 땅을 나누고 분배하여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장소이고 숙곳은 요단 동쪽에 있는 얍복강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세겜과 숙곳이 왜 언급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스라엘 북쪽 지역의 요단 동편과 서편의 땅 전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길르앗과 므낫세는 요단 동편 땅 전부를 가리킵니다. 길르앗 남쪽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차지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이고 유다는 남유다의 중심 지역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지역입니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라는 명칭이 붙습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전쟁 장비요 규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휘봉이라면, 에브라임은 방어를 유다는 공격을맡는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 주위의 주요 나라인 모압, 에돔, 블레셋이 언급됩니다. ‘모압이 나의 목욕통이라’는 것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돌아와 몸을 씻을 때 씻을 물을 가져오는 종의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모압이 정복됨을 암시합니다. ‘에돔에 나의 신발을 던진다’는 것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블레셋에게 ‘외치라’는 것은 패배로 인한 두려움으로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9-12)

생각이 행동을 규정짓지만 때로는 행동이 생각을 규정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생각이 짧아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패들이 큰 성공을 위한 학습과정이 되고 디딤돌과 발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생각만큼 좋은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처럼 승리의 확신과 승리의 기도만큼 승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9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9-12)

 

6-8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이스라엘의 영광된 모습과 대비되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곤경이 묘사됩니다. 9절에서 “나”는 시인을 가리키며 시인은 왕으로 보입니다. 9절과 10절에 의하면 왕이 에돔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돔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옵 3), ‘누가 난공불으로 보이는 성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궁극적으로 그 답은 여호와입니다. 이 진리 앞에 시인이 다시 한번 탄식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군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에 대한 경험은 주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과 확신을 가져옵니다. 시인은 구원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11절과 12절은 “대적”이라는 말로 서로 연관되어 뿐 아니라 교차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11절 상반점과 12절 하반절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그는 우리의 대적을 밝으실 이심이로다.” 11절 하반절과 12절 상반절은 인간의 도움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 대조적인 평행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구원은 첫됨이니이다//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승리를 위해 시도하는 인간의 모든 전략과 전쟁 기술과 무기와 군사에 따른 전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막강해도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대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과 함께 씩씩하게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전쟁의 패배로 인해 생긴 국가적 곤고함과 굴욕의 시기 동안에 드려지는 백성들의 기도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절과 유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절로 인한 패배의 경험은 백성들의 믿음과 방향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자신들에게 재확신시킵니다. 시인과 백성이 여전히 고통스런 상황에 있지만 그들의 전망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단념하고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의존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둡니다.


살다 보면 때로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패배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3가지 승리의 재료를 더해야 합니다. 바로 ‘승리의 확신, 승리의 기도, 승리의 행동’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수단과 방법만 의지하지 마십시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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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9-01)


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시편 59편 1-17절


 

항상 가시 같은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 가시는 성가시고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그 가시가 깨끗하게 정리되고 없어졌으면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 가시가 있는 것이 때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됨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과연 악인들을 보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 시인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악을 행하며 피 흘리기를 즐기는 강한 자들이 매복하고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힘과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찬양합니다.

 

도움을 위한 간구(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억울함, 부당하게 조롱과 핍박,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감수하는 손해 등을 아십니다. 성도가 부당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이유, 아무리 암담해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소망을 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셀라)(1-5)

 

1-2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며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때 네 가지 대적에 대한 표현과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가 나옵니다. 대적은 “나의 원수”, “일어나 치려는 자”, “악을 행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이 표현들은 대적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임을 보여줍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문자적으로 ‘피의 사람들’로서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폭력도 사용할 수 있는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나를 건지시고”(x2), “나를 높이 드소서”, “나를 구원하소서”입니다. ‘높이 들다’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다’는 의미입니다. 대적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다 복수형일 뿐 아니라 네 번 반복함으로 대적이 강력하며 시인의 상황이 매우 위협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간구 역시 네 번 반복됨을 통하여 시인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간청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3절과 4절 상반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로 대적들의 공격적인 행동이 묘사됩니다. 원문에서는 3절 앞에 간구의 이유를 표현하는 ‘왜냐하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보소서”가 나옵니다. 이는 대적으로 인해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하나님께 대적들의 행동을 주목해서 보시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회를 노려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는 것입니다. 이 대적들은 강한 자들이며 시인을 치려고 모여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해치기 위해 함께 매복해 있는 위급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대적에 대해 어떤 잘못이나 죄나 허물이 없음을 천명하며 죄에 대해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합니다. 시인에게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적들이 달려와서 시인을 칠 준비를 하는 적극성과 자발성을 보입니다. 시인은 무죄한 가운데 억울하게 공격을 당한다고 항변하며 자신을 돕기 위해 일어나 살펴주시기를 구합니다.

앞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구한 것과 달리 5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심판과 악을 행하는 모든 자의 심판을 구하면서 개인을 위한 기도에서 공동체를 위한 간구로 나아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깨어 일어나셔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행동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고 징벌하시기를 구합니다. 왜 시인이 자신의 위급한 상황에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자들의 심판을 구하고 있습니까?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합당하지 않은 행동이요 믿음이 없는 세상의 악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6-7)

세상은 그 어떤 것도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살아가면서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평소에 의지하던 대상은 다 무너지고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6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6-7)

 

시인이 대적들의 위협을 들개의 영상으로 다시 묘사합니다. 그들은 마치 들개처럼 밤에 나타나서 울며 성을 돌아다닙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암시하며, 밤에 울부짖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다’는 것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는 들개들처럼 대적들이 거리에서 떠들어대며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도시를 자기들 세상으로 만들고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즐기며, 거침없이 떠들어대고 말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위협하여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듣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 심중 깊은 곳에 어느 누구도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고 제지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시 10:4; 14:1; 53:1; 73:11; 94:7).

 

신뢰의 고백(8-10)

성도들은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연결성과 연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해야 합니다. 한순간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쉬지 말고 헌신과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8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8-10)

 

시인은 대적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고 하며 그들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시 10:4)하는 교만한 세상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시 2:4;37:13). 시인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며 요새이니 내가 주를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강한 대적들이 나를 죽이려 매복했지만 대적보다 강한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며, 대적들이 온를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는 요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계심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나를 맞아 주시고 앞서 가며 대적들을 물리쳐서 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11-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원수를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그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보응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한과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11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11-13)

 

대적들이 보응받는 것을 확신한 시인이 대적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구합니다(11).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잊지않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기 위해 죽이지 말고 그들을 흩으시고 낮아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대적들이 죽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낮아져서 과거에 함께 모여 강하고 교만했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셨음을 생생히 보여주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분임을 시인이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대적들의 입과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죄입니다(12). 그들은 교만하여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고 거짓말을 하므로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악인들이 멸망을 당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3).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이스라엘에서 드러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14-15)

성도의 삶은 탄식으로 시작해도 찬송으로 끝납니다. 억울함으로 시작해도 감사의 찬송으로 뒤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과 방패와 피난처와 요새와 구원이 되십니다. 다급하게 부르짖던 다윗의 탄식의 기도는 이번에도 역시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14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14-15)

 

부분에서 6-7절에 나왔던 대적들의 들개 영상이 다시 나타납니다. 14절은 6절과 동일하나 15절의 내용은 7절과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먹을 것을 찾는 배고픈 들개로 그립니다.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이 부분에서 다시 대적을 언급하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과 나아가 악인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고 있지만 대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가까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신뢰의 고백과 찬양(16-17)

다윗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며 위험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을 의뢰할 때 오히려 자기 대적들보다 훨씬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평안입니다.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

 

 

시인은 아침에 주님의 힘과 인자하심을 높이 노래하겠다고 말합니다. 밤새 돌아다니는 들개와 같은 대적의 위협을 받았던 시인이 죽음과 공포의 밤을 보내고 생명과 구원의 시간인 아침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의 내용은 여호와는 요새요 피난처이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지혜롭게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인들을 벌하기는 하시지만, 죽이지는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 또한 예수님처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성도가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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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8-01)

 


악한 통치자들을의 이를 꺾으소서

시편 58편 1-11절


 

악한 세상을 보며 낙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아도 별 변화가 없을 때에는 솔직히 절망에 빠지고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셨다거나 세상에 무관심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견해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악한 통치자가 정의롭게 재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과 폭력을 행함으로 사회에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시인이 탄식하며 악한 통치자들을 책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들을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보상해주실 것을 확신하고 사람들이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탄식과 책망(1-2)

성경은 사회지도층의 범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부분이 없는지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을 가진 자들의 부패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으심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1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1-2)

 

시인은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사람의 아들들아, 너희가 정말 올바르게 판결하느냐?’고 물으며 시를 시작합니다. 권력을 가진 왕들, 통치자들, 지도자들은 재판이 바르게 이루어져 사회에서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서로가 ‘옳다 그르다’하는 시비가 붙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여 해결이 나지 않을 때, 최종적으로 시비를 가르고 그 결정을 양편이 다 받아들이게 되는 최고의 권위가 재판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재판은 그 나라의 도덕의 척도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하는 지도자들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정의를 세우고, 또한 부자든 가난하든 힘 있는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판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 나라는 중심에서부터 부패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은 1절 질문의 대답이 ‘아니다’임을 전제하고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고 땅에서 손으로 폭력을 달아준다.’고 말합니다. 중심 곧 마음은 내적 생각을, 손은 외적으로 실제 행함을 말합니다. 이들은 마음속에서 악을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세상에서 악을 행합니다. 악행에 대한 최후의 보루인 재판정에서도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달아주는 저울이나 저울질하는 것은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는 재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달아준다는 것은 재판이 폭력을 일삼는 곳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회 전반에 온갖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인한 악들이 횡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모습에 대한 비유(3-5)

세상에는 어디든 불의한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그 세력이 나라나 공동체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세력은 때로 뱀의 독처럼 치명적이고, 사자의 어금니처럼 강력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에 대해 감히 대적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그 어둠의 세력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인 첫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3-5)

 

3절은 악한 통치자들로 인해 사회에서 악이 횡행하는 것을 통해 악인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그려봅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갔다.’ 이 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악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 악한 본성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시작할 때부터 악으로 물들어 있어 악과 거짓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악과 거짓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존재의 시작부터 악과 하나 된 악인들의 모습을 뱀과 독사로 비유합니다(4). 악인들이 품고 있는 악은 마치 뱀의 독과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뱀의 독처럼 악인들이 뿜어내는 악한 영향력은 사람들을 죽이고 치명적인 해를 끼칩니다. 또한 악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다고 합니다. 귀를 막았다는 것은 일부러 듣지 않고 불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을 강조합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는 술사가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듣지 못하고 능숙한 술객이 주문을 외우고 요술을 부려도 따르지 않습니다. 술사나 술객은 피리 소리와 요술로 무서운 독사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다룹니다. 그런데 독사가 귀머거리라면 술사가 아무리 능숙하다 할지라도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이 귀머거리 독사와 같습니다. 아무리 지도자들의 특권과 책무와 위치와 역할의 중요함을 말한다고 해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경고나 책망, 권면이나 회의 그 어느 것도 듣지 않아 그들을 설득하고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악을 행사하여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의 규정인 율법을 지킬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의 규정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듣고 배울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을 때 결국 자기 마음속의 악한 본성이 계획한 대로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6-9)

아무리 세상에서 큰 권세와 힘을 가진 자라 해도 하나님께서 한 번 일하시면 결국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의 불의한 힘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에라도, 우리에게는 그들의 모든 모의를 무효로 돌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6-9)

 

시인이 이런 악한 통치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6a). 먼저,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어달라’고 기도합니다. 5절의 독사를 연상하여 이를 말한 것인지 6절 하반절의 젊은 사자의 어금니와의 평행 속에서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는 악한 통치자들이 악과 폭력을 행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내시기를 구합니다. 젊은 사자에게 있어서 먹잇감을 사냥할 때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 어금니인데, 이것을 꺾는 것은 그의 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통치자들에게서 그들의 악한 영향력과 힘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7절에서는 악인들이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고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급히 흐르다가 사라지는 물은 여름철에 말라 있다가 우기에 갑자기 물이 많아져 급류가 되어 흐르는 이스라엘 지역의 와디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와디의 급류가 무섭고 위험하지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위협적인 악인들의 세력이 속히 사라지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화살을 쏘려고 겨눌 때 부러지게 해달라는 간구는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악인들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고 조산한 아이가 살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달팽이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따라서 가뭄에는 완전히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유산되거나 조산된 아이가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뭄에 말라죽는 달팽이처럼 유산되어 살지 못하는 아이처럼 악인들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9절은 본문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원문에 “가마솥”이라는 단어에 2인칭 복수 소유격이 붙어 ‘너희 가마솥’이라고 한 것을 볼 때 가마솥은 악한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마솥에 물이나 음식을 넣고 뜨겁게 데우려고 가시나무들을 모아 불을 지폈는데 솥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생나무든 불붙은 나무든 바람이 불어 다 날아가 버린 경우처럼 악한 통치자들이 가마솥에서 음식을 삶듯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계획과 실행을 다 날려버리고 제거해버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위의 비유들을 통한 간구는 통치자가 철저하게 악에 물들어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귀를 막아 어떤 권면이나 설득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수많은 악의 희생자들이 하나님께 악의 권세를 깨뜨려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확신(10-11)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세를 얻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비참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악한 자가 오히려 잘 되는 것 같은 현실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임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0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0-11)

 

시인은 심판을 간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고 의인들이 승리한 후에 의인들이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억울함이 해결되고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10).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악인은 심판하시지만, 의인에게는 반드시 보상하시는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인과응보의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비로 우리의 눈에는 세상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당하고, 억울한 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습니다. 이 진리를 믿으며 불의한 세상 가운데에서라도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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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7-0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성숙한 탄원

시편 57편 1-11절


 

우리는 문제 상황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느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숨었던 어둡고 음치만 동굴이 하나님의 날개 그 동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고난의 장소가 찬송의 장소로 바뀌는 기적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 시인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지존하시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보호를 위한 간구(1-3)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개 그늘’과 같은 말은 화석처럼 생명력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에게는 그 동굴이 자신을 덮는 안락한 이불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어디라도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장소가 되는 기적, 이 기적을 우리도 인생의 ‘동굴’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은혜는 대가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필요를 돕고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두 번 연이어 간구한 것은 상황이 위급하고 절박함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를 파멸시키려는 재앙을 만난 시인이 하나님께 이 재앙에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이요 그를 의지하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목적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2).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우주의 왕이요 가장 높으신 지존자이십니다. 또한 그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그들의 필요와 안전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는 절박한 위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보호를 간구합니다.

1-2절의 간구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3절은 서술보다는 소망을 나타내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시고’에서 무엇을 보내시는지, 목적어가 없는데, 3절 끝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에 근거하여 인자와 진리가 목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여주시고 나를 삼키려는 자를 꾸짖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인자와 성실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증언법으로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특히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에서 사용되며 하나님이 그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하신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는데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사랑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과 능력을 소유하신 지존자이시며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대적으로 인한 탄식(4)

하나님께서는 인자와 진리로 원수들의 날카롭고 살벌한 공격을 파하실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원수들의 공격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라고 찬송합니다.

 

4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4)

 

시인이 대적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합니다. 시인은 언제 달려들어 해칠지 모르는 사자들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상황(단 6:16-24)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불을 뿜어내어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람들 중에 누워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적대감을 뿜어내며 모든 것을 파멸시켜버리는 사람들 속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는 적대감으로 가득 찬 대적들 속에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 있습니다. 더구나 대적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며,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다고 합니다. 창이나 화살, 날카로운 칼은 모두 사람을 해치는 전쟁 무기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공격하되 전쟁의 무기로 공격하여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렴(5, 11)

캄캄한 동굴에서 절박하게 부르짖던 모습은 사라지고 높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이러한 반전을 가증케 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11)

 

5절과 11절에 나오는 후렴은 이 시를 크게 간구와 찬양,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5절은 첫 부분인 간구를 마치는 후렴구로 사용됩니다. 후렴구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절대주권을 가진 위대한 왕이심을 선언하며 그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 있는 시인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승리로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전제로 합니다. 특히 대적들이 절대주권을 행사함으로 이를 탄식하는 4절과 6절 사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는 5절은 이 시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대적의 멸망에 대한 확신(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 원통함을 다 헤아리십니다.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그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절박하게 부르짖은 다윗은 이제 구원의 확신과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6○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6)

 

6절에서 다시 대적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대적들은 몰래 그물을 치거나 구덩이를 파서 동물을 잡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잡으려고 은밀하게 함정을 파놓고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 영혼이 억울하다’는 것은 대적들의 공격에 시인의 기가 꺾이고 쓰러지는 경험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대적들의 공격에 쓰러지는 경험을 했지만, 대적들은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졌습니다. 여기서 “빠졌도다”는 완료형으로 나오지만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합니다. 대적들이 스스로 판 함정에 시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빠지게 될 것을 시인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악의 부메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찬양(7-10)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기간을 보내다 보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찬송이 사라지고, 이 터널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가운데 그 영광을 드러내어 주실 것임을 기억한다면,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기쁨과 찬송을 깨워서,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새벽을 깨워서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7-10)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좌신 가운데 시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집니다. 여기서도 두 번 반복하여 마음의 확고함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뢰가 견고하므로 노래하고 찬송하겠다고 말합니다(7). 8절의 “내 영광”은 결과 11절의 “주의 영광”과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오히려 “내 영광”은 7절의 “내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7절의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와 8절의 ‘내 영광이 깰지어다’가 서로 연관됩니다. 시인의 마음이 확정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찬양으로 자신을 깨우고 비파와 수금을 깨우고 새벽을 깨웁니다. 확신에 찬 시인은 새벽에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하루의 어떤 시간이기보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시간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새벽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 다른 것, 이전(어제)의 낮과 밤과는 대조되는 미래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새벽이나 아침에 기대되었습니다(시 46:5; 90:14; 143:8). 시인은 곧 있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대하며 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시인의 찬양은 개인에서 만민과 뭇 나라로 확장됩니다. 7-9절은 시인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찬양할 준비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10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찬양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와 진리를 인해 찬양합니다. 시인이 찬양으로 깨우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의 근거는 여호와의 변하지 않는 신실한 언약적 사랑입니다. 11절은 찬양의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절대주권을 가지신 우주의 왕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하며 찬양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문제에 사로잡혀 주위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자기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고통을 토로하되 자기 문제에 골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할 때, 하나님께서 울의 관점을 바꿔 주시고 찬송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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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6-01)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

시편 56편 1-13절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겉은 부드러운데, 속은 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숩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원수들이 끊임없이 시인의 생명을 노리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면서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자신에게 되물으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악인의 심판을 구하고 자신의 편이요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제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

 

간구와 원수의 괴롭힘(1-2)

누구나 살다보면 광야를 만납니다. 큭히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 광야를 통과하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강한 팔’을 구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이 원하는 성품이 형성되고 역경에 대한 인내력이 더 강해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1-2)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짧게 간구한 후 곧바로 은혜를 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가 시인을 종일 공격하고 괴롭히며 짓밟듯 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을 공격하고 해치는 자들은 그 수가 많으며 또한 교만한 자들입니다. 1절의 “사람”은 단수이나 2절의 “원수”는 복수입니다. 시인의 상황은 많은 원수들이 삼키고 종일 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1,2)에서 잘 나타납니다. 시인을 짓밟는 원수들의 괴롭힘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시인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시시때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합니다.

 

신뢰의 고백(3-4)

당신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그분께 직접 나아가 애원하며 통사정하고 싶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메마른 심령은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시원한 생수를 무첮 갈망하기 때문에, 이 시간 동 하나님의 조언과 인도하심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3-4)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시인은 ‘두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수 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 반복되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마다 시인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찬송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주님을 의지할 때 시인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시인은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다시 확신 속에서 담대함을 갖습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은 썩을 육체를 가진 사람,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말합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시인을 종일 괴롭히고 죽이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찬송하고 ‘연약한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하라’하고 자신에게 말하며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괴롭게 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고,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통해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음속에서 부단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원수와 싸움을 하고 안으로는 자신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에서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밖에 있는 싸움의 리를 확신합니다. 이것은 이 시를 읽는 모든 자들이 두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반응을 하도록 돕습니다.

 

원수들의 악행에 대한 탄식(5-6)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간에 잘못된 태도로 임하거나 어떻게든 ᄈᆞᆯ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면, 더 견디기 어려워지고 더 큰 좌절과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광야와 같은 과정을 지날 때에는 인생의 마른땅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5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5-6)

 

이 단락에서는 원수들의 악한 계획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말합니다. 원수들은 종일 시인의 말을 일부러 오해하여 비방합니다. 그들이 시인에 대해 가진 모든 생각은 악한 것뿐입니다. 시인의 원수는 단순히 시인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모든 좋은 것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숨어서 시인의 발자취를 지켜봅니다. 발자취는 발뒤꿈치를 뜻하며, 발뒤꿈치를 지켜봄은 뒤에서 은밀히 공격하려는 원수들의 비열하고 사악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어디로 가는지 미행하며 자신들이 모여 꾸민 음모를 실행할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치 야수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의 생명을 취하려고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간구(7-8)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방법은 성장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광야 같은 삶의 여정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도 우리의 삶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7-8)

 

7절 상반절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안전하오리이까”의 동사를 명령형으로 보고 ‘악행으로 인해 그들을 쫓아내십시오’라고 번역한다면, 하반절 ‘하나님이여 분노로 인해 뭇 백성을 낮추십시오’와 평행을 이룹니다. 만일 부정사로 본다면 ‘악으로 인해 그들에게 안전함이 있겠습니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동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으나, 내용의 의미는 악행으로 인해 그들에게 구원이 없고 그들이 멸망 당할 것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악을 행하는 민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이들을 낮추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낮추소서”는 악인들이 교만하게 시인을 쳤던 것(2)과 대조됩니다. 수많은 교만한 악인들에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인이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공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악인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방랑을 주께서 주의 깊게 보시고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방랑 생활에서 그가 고통 가운데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주시기를 구합니다. “병”은 물, 우유, 술 등을 담아두는 가죽으로 만든 자루입니다.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모든 상세한 것을 다 보고 계시므로 그가 고통 속에서 흘린 눈물을 잊지 마시고 기억하셔서 그의 고통을 해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들로 인해 시인이 유리방황하며 눈물 흘린 것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고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고백(9-11)

때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면 하나님께 주시는 힘과 기쁨으로 그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실히 함으로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감사의 예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에 우리 삶에 감사와 예배가 충만해야 합니다.

 

9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9-11)

 

시인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겠다고 하고(3), “내가 아뢰는 날”에는 내 원수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9). 두려움 속에서 주를 의기하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 주께 부르짖어 간구할 때 주께서 가신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확신하며 선언합니다. 시인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사정을 다 헤아려 아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며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10-11절에서는 3-4절에서 나왔던 신뢰의 고백을 반복합니다. 내용이 똑같지 않지만 많은 부분 비슷해서 마치 후렴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3절과 10절 상반절만 다를 뿐 4절과 10b-11절은 두 단어 외에는 동일합니다. 두 단락의 다른 점은 뒤에 나오는 신뢰 고백에 주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이 한 번 더 나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사정을 알고 기억하시며 그의 편이 되셔서 그가 기도할 때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에 대한 찬송이 강조된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서원(12-13)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어떤 난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진실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 쏟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12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

 

‘주께 서원함이 있다’는 것은 과거에 서원을 드려 그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또는 서원을 드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감사제를 드리0겠다는 서원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셔서 그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하셨고 생명의 빛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음’을 수사의문문으로 물어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13절은 동사의 완료형을 사용함으로 이미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시인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표족인 것 두 가지는 탐욕과 공포입니다. 특히 공포야말로 수천 년에 걸쳐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 온 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논리를 따르고, 세상의 요구에 응하려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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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5-01)


들으시며 심판하실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 55편 1-23절


 

운전자가 눈을 갈리고 운전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이런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빌 3:14; 롬 8: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르심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곁길로 빠지고 맙니다.

 

  • 거짓과 죄악과 폭력을 행하는 악인들로 인해 분쟁과 재난과 억압이 떠나지 않는 성에서 시인은 악인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도망가서 피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친구가 배반하여 시인을 대적하므로 괴로움과 분노 속에서 하루 종일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도움을 위한 기도(1-3)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제대로 보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집니다(히 4:12-13; 요일 1:5). 우리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눈이 건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눈이 악한 것에 고정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간청합니다(1).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마시고 굽어 살펴보시고 응답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근심과 한탄 속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방황하며 혼란스럽다고 합니다(2). 3절에서는 고통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원수들이 재앙을 내게 쏟아부으며 분노하고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향하여 분노와 적개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압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탄식(4-8)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은 무엇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4-8)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후, 이 속에서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립니다(4-8).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과 떨림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입니다(4-5). 죽음의 공포와 전율 속에서 시인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라도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6-7).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험악한 상황인가를 암시해줍니다. 시인은 피난할 수 있는 곳으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기를 바합니다(8). 폭풍과 광풍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원수의 소리와 압제(3)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내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9-11)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고시를 형성하고, 친구를 사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과 위협을 당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9-11)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오히려 피난처라고 생각할 만큼 시인이 사는 곳이 험악한 상황임을 앞에서 암시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시인이 사는 성 안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개정과 달리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이 원수의 심판을 구하는 간구, ‘멸하소서, 주여(아도나이), 혀를 나누소서(잘라 버리소서)’로 시작됩니다. 평행을 이루는 ‘멸하소서’와 ‘혀를 나누소서’는 혼돈과 나눔(분열)이 일어나게 하여 대적들을 심판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혼잡과 나눔으로 심판하셨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명령형으로 심판을 간구한 후,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 하반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심판을 간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시인이 성내에서 악인으로 인한 강포와 분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내에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싸움입니다. 10-11절은 성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10절의 “그들”은 강포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위는 성을 지키는 자들이 성 안팎의 문제들을 빨리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인데, 폭력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악인들이 성안을 휩쓸고 다녀서 성안이 폭력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성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고 파괴 행위들이 난무하며, 거리에는 압제와 거짓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할 성에 온갖 범죄가 자행되어 성안이 거짓과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배반과 심판 간구(12-15)

눈을 가린 베일이 주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들보도 동일한 작용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하십니다. 일단 내 눈의 들보가 맑고 순수한 동기로 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2-15)

 

앞에서 성안에 악이 가득 찬 것을 말하다가 12절 이하에서 갑자기 자신의 원수가 친구라는 내용이 나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원수를 멸해달라고 간청한 후, 하반절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나왔는데, 12절도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연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 내용을 보면, ‘원수가 나를 대적하여 과격하게 말한다면 참았을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대항하여 자기를 높인다면 그를 피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대적하면 원수니까 대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여 거칠게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나의 동료요,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다.’ 더구나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무리 속에서 함께 성전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14). 이들은 단순히 세상적인 우정만 있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귄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원수의 대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 아마도 2b-5절, 9-11절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이 친구의 배신일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원수들에게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죽음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하는 곳마다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15).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16-19b)

순종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밝아져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고, 급기야는 한낮의 태야과 같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의인이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마 13:43) 이 세상에서 온전케 되던 의인들은 심판의 날에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16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17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8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9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셀라)(16-19b)

 

배신의 상처로 인해 격렬하게 원수의 심판을 구한 후, 시인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여호와를 바라보며 주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하루 종일 근심하고 탄식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그 소리를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대적하는 자가 많고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원하다’는 완료형이지만 기원을 표현합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을 ‘태초부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악인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배신한 친구의 모습(19c-21)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닥쳤다면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려 하지 말고 먼저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했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에 응답하실 때, 구원과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19c…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20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19c-21)

 

시인은 친구의 교활한 모습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를 배반하고 언약을 저버립니다. 그들의 말은 버터와 기름처럼 부드럽지만, 마음은 전쟁터처럼 살벌하고 언제든지 찌를 수 있도록 칼집에서 뽑아놓은 칼과 같습니다. 언제든 손쉽게 악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고백(22-23)

우리가 짐을 지고 가면,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맡겨 놓을 곳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기꺼이 우리의 짐을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3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2-23)

 

22절 말씀은 시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네 짐 곧 너의 염려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신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만큼 든든한 위로의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 확신에 차서 이런 권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했던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악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며 속이는 사자들을 파멸시키실 것을 간구합니다. 자신은 변함없이 주를 의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가운데 보재진 양과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눅 10:3). 양이 이리 떼를 이길 수 없듯이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반드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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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4-01)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

시편 54편 1-7절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라는 말을 수없이 듣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믿음이 금세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비결을 배워보겠습니다.

 

  • 악한 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돕는 분이며 자신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에게는 악으로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ㄴ지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낙헌제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1-2)

 

다윗의 탄식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다윗의 환난과 위기 앞에서 얼마나 건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호소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이 소망이시기에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게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1-2)

 

시인은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네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먼저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심상치 않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기에 자신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구원해주시는 것도 포함하고, 또한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므로 주님께서 가지신 근본적인 성품(성실하심[5]과 선하심[6])과 권세와 능력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특별한 관계는 4절에서 설명해줍니다.

평행을 이루면서 나오는 간구,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는 앞의 간구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나를 변호해달라는 것은 시인이 강한 자에게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 ‘변호하다’는 옳고 그름을 가려서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강한 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잘못이나 불의한 일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재판장이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일을 공롭게 판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셔서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횡포(3)

이기적인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 인간은 자기만 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에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에 포악한 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는 명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3)

 

3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히브리 본문에서는 3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간청하는 이유, 즉 시인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낯선 자”들의 공격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낯선 자”(자림)의 의미에 대해 이방 민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방 민족이 이 문맥에서 어색하게 여겨져서 탈굼과 몇몇 히브리 사본에서는 ‘오만한 자’로 고쳐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이나 오만한 자로 보기보다는 3절 하반절의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낯선 자를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 또는 시인의 편이 아닌, 시인과 전혀 다른 뜻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에게 있어서(4) 낯선 자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고 언약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를 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 두 표현이 평행을 이루어 낯선 자들이 포악한 자들임을 말해줍니다. 포악한 자들이 시인을 죽이려고 그의 생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포악한 자들은 잔인한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자들입니다.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은 구약에서 다섯 번 평행을 이루며 나타납니다(시 86:14; 사 25:5;29:5; 겔 28:7; 31:12).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잔인함과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자들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시편 53편의 하나님께서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입니다.

 

심판을 구하는 기도(4-5)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을 멸하시는 섭리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약 1:6) 태도입니다.

 

4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4-5)

 

다윗은 포악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없애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로 고백합니다. ‘나의 생명을 수색하는 포악한 자들’ 앞에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내세운 것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4)

 

시인의 대적에 대해 말하는 3절과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고백을 표현하는 4절은 상반되는 표현을 통해 시인과 대적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4절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보라’라는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과 대적의 대조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시인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님(아도나이)으로 불러 자신의 주가 되심을 환기시키며 강조합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자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런 신앙고백은 1절에서 시인이 주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근거, 즉 하나님과 시인의 관계를 잘 드러내줍니다.

3절과 4절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인과 대적의 대조되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적들은 시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돕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인생에서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2) 심판을 구하는 기도(5)

 

시인과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힌 후, 5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간구합니다. 포악한 자로부터 억울하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했던 시인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그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이다’는 원수가 시인에게 행하려고 했던 악을 원수에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이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의 부메랑을 믿었습니다. 악한 자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실 것을 믿었다. 악은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악인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셔서 그들을 멸망시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서원과 확신(6-7)

어려움이 닥쳐오면 주저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생명을 붙드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가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6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6-7)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확신하며 서원을 다짐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자들이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니는 상황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1) 서원(6)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구원을 간구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자신의 피난처가되시고 악인들에게 합당한 징계를 내리실 것을 확신한 후 이제는 구원을 받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을 바라보고 있다(6절).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낙헌제로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악인을 멸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함으로 낙헌제를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2) 확신(7)

 

히브리 본문에서는 7절 앞에 '왜냐하면(키 2)이 나와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똑똑히 보게 하셨다'의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서 시인이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현재의 확신에 대한 근거로 과거에 구원받은 것을 암시하거나, 또는 시인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 너무 확신한 나머지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문제 한가운데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시인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미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믿음은 어려움의 한가운데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시인은 억울하게 당하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에게는 환난이 더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그가 이후에 어떤 영광을 얻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환난을 겪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고 나의 도움이심을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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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3-01)


하나님 없이 사는 어리석은 사람

시편 53편 1-6절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그분의 권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과 임재 안에서 떤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할 때도 하나님께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어서 죄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는 자들은 하나님이 흩어버리시지만, 이스라엘은 구원하셔서 그 포로된 자들이 돌아와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행동(1)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면서도 그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더러운 자요 선을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자기 힘이요, 재물뿐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실재적 무신론자입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

 

시인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시의 첫 구절을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면에서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재한다 해도 인간 사건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며 사람들의 행동에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10:4에서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실제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께서 없는 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기정사실화 해 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은 다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즉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자들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며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부패하다’는 비뚤어지고 망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지고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잘못된 전제로 인해 이들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왜곡된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비뚤어진 이들은 선을 행하지 않고 가증한 악을 행할 뿐입니다. 가증한 악이란 혐오스럽고 몹시 불쾌한 악이나 불의함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평가는 지적인 능력의 면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의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생각에서 악을 행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신앙과 윤리적인 삶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찾으심과 찾지 못하심(2-3)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찾으십니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진 않습니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2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2-3)

 

하나님께서는 몸소 몸을 굽혀 세상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심(2)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없다고 단정하고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피시면서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2).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땅은 인간의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각이 있는 자는 슬기로운 자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로운 자를 말합니다.

 

(2)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음(3)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지혜로운 자를 찾아보신 후 내린 결론은 모든 자가 바른 길에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즉 죄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더러운 자가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고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절과 3절에 ‘없다’라는 단어가 두 번씩 모두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중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를 표현하는 것으로 1절에서 한 번, 3절에서 두 번 사용하여 모두 세 번 사용함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논증할 때 인용했습니다(롬 3:10-12).

 

행악자의 무지와 멸망(4-5)

성도라면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인들은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며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셔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한 이들의 횡포로 처한 현실이 암담할 때,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4-5)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고 찾아보신 결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하나님께서 없다고 결론 내렸고, 하나님께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각각의 결론이 옳았는지, 어떤 결과를 이루는지를 이 단락에서 말해줍니다.

 

(1) 행악자의 무지(4)

 

4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를 “죄악을 행하는 자”로 부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무지한가?’,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하는가?’와 같은 어조입니다. 시인이 1절에서 어이없고 기가 막힌 심정으로 말했다면, 여기서는 답답함으로 탄식하는 듯 묻습니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어떤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다음 문장에서 말해줍니다. 이들이 행하는 죄악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없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밥을 먹는 것처럼 아주 쉽게 억압하고 착취하고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행악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해서 내 백성을 떡 먹듯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4절은 1절을 반복하는 질문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자가 아니냐?’

 

(2) 행악자의 두려움과 멸망(5)

 

5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다룹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므로 그들이 패배하여 물러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악자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원문에서는 5절 맨 앞에 ‘그곳’(거기)이라는 단어가 나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행악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던 장소로,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대로 악을 행하던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고통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무서운 공포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적들에게 임하게 하셨던 두려움이 이들에게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진을 쳤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시고 물리치시므로 적들이 패하여 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주려고 했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악행에 대한 심판을 받아 두려움과 실패와 수치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쁨(6)

순종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니라 진정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계시된 진리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친숙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순종에서 나옵니다.

 

6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

 

‘누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어줄 것인가?’를 묻는 이 질문은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온은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나오기를 소망하는 것은 시온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며 시인이 이를 기원합니다.


어리석은 자,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자신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 다른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보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채우는 삶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파멸로 몰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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