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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8-0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1-9절


천영희 시인에게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으로, ‘앎음다음’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꽃피운 아름다움만 봐도 수긍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앎음을 경험했느니 알기에 우리를 미물(微物)이 아닌 미물(美物) 되게 하신 주님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기에’를 외칩니다.

 

이 시편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달과 별들의 질서에 깃든 영광스러운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대적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과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과 사람의 작고 유한한 위치를 지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귀와 영광을 허락하시고, 친밀한 랑으로 돌보심을 노래합니다.

 

온 땅에 깃든 주의 영광을 찬양(1)

나이야가라 폭포나 그랜드케넨과 같은 위대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 그 피조물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것을 만든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피조물이 아니더라도 하늘에 해와 달과 수많은 별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편 8편은 시편 전에서 처음 나오는 찬양시입니다. 1-7편까지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8편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 주’라고 부르며 주 이름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윗은 ‘온 땅’인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안약적인 이름으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친밀성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이때 ‘우리 주’에서 ‘주’는 구약에서 왕을 부를 때 사용되곤 하는데(열왕기상 1:11,37,43), 시편에서는 온 땅의 주(97:5)를 찬미하거나 ‘주들 중에 뛰어난 주’(135:5; 136:3; 147:5), 곧 최고로 위대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칭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시인은 온 땅에 새겨진 그 이름의 위엄과 뛰어남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a)라고 찬미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감격과 감탄을 표현하는 것은 전형적인 찬양시의 특징입니다. 특히 첫 소절 ‘당신의 이름’은, 둘째 소절 ‘당신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1b)로 확장됩니다. 온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아름과 위엄을 하늘을 덮는 탁월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 ‘우리 주’, ‘아름다움’, ‘영광’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우주적 왕권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비천함(2-4)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관찰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그 거대함과 다양함과 오묘한 조화로 인해 놀람과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자연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2-4)

다윗은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시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약과 겸손과 온유함을 상징하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과, 거만한 자들과의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의 입으로 당신의 권능을 세우셨다고 찬양합니다(2a). 이는 당신의 원수와 보복자를 파멸하기 위함입니다(2b). 어린아이, 젖먹이와 원수, 보복자를 대조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그 목적이 주의 원수들에게 보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장 연약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적대자들을 어떻게 파멸시킨단 말입니까? 대적자들은 인간의 오만한 힘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가장 섬세한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젖먹이 아이들은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여호와 주님이 가장 연약하고 왜소한 존재에게 힘을 주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창조 솜씨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태곳적 창조행위를 가까이서 바라본 것처럼 친밀하게 묘사합니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당신의 하늘과 달과 별들’(3)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주님이 수립하신 질서로 운행됩니다.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멀고 드높아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 저 먼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과 같이 인간이 닿지 못하는 우주 공간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작동하는 광경입니다. 광활한 세계를 운행하시는 커다란 하나님의 손과 그것을 만질 수 없는 사람의 작음이 비교되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광활한 우주를 손수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람의 비천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그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십니까?’(4)

다윗은 광활한 우주에서 사람을 가장 작은 파편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시켜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낮고 낮은 인간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대비시켜 하나님을 높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우주 활동을 묘사하여 인간의 왜소함을 자각시킵니다. ‘땅’(아다마)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람’(아담)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한 더 큰 세계 인식입니다. 다윗은 광활한 우주의 활동을 기획하신 하나님을 통해 인간의 무기력함을 까발린 셈입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의 돌봄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사람의 존귀함(5-8)

세상에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고, 곳곳에 부조리가 만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으셨다거나 창조세계에 대해 그분의 무관심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음 창조 세계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처럼 결국 악인은 심판하시고 그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5-8)

사람의 작음과 비천함을 강조해야 하나님께서 위대해집니까? 그런지 않습니다. 다윗은 반대로 사람의 존귀함도 노래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습니다’(5).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셨을 뿐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하나님과 비등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편했던지 고대 역본들(70인역, 시리아어역, 아람어역, 라틴어역)은 ‘하나님’을 ‘천사’로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라는 표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당신의 통치권을 자기를 닮은 사람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7-28). 이것은 시인이 ‘여호와 우리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1) 선포적인 고백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과 위엄’관을 씌우셔서 통치권을 부여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마치 창조의 사건을 떠올리듯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것을 노래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그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6). 5절에서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다는 말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왕적인 통치권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특히 ‘그가 다스리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왕에게 부여된 권위를 일컫습니다(사사기 8:22-23; 사무엘하 23:3; 시편 103:19 등). 마치 한 국가의 왕이 나라를 통치하듯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하나님이 위임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부여된 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의 권위를 사람이 일부 위임받은 것이지 소유원의 의미는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3).

사람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통치권의 범위는 가축에서 야생의 들짐승, 새들, 물고기들, 바다의 모든 생물들에까지 미칩니다(7,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이 교감하고, 동물과 짐승이 사람을 따르고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우주의 왕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듯이(4), 사람은 각종 가축에서 바다 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돌봅니다. 사람의 왕적 통치대상의 순서가 점점 확장됩니다. 사람과 가까운 가축들(소, 양)에서 시작하여 고대인들이 혼돈의 장소로 여겼던 바다와 그곳에 사는 생물에까지 미칩니다. 바닷속 신비로운 생물까지도 사람의 관리와 보호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를 받는 사람이 그렇게 창조세계를 돌보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존재’(5)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통치권이 아니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약간 부족한 정도의 영광과 존귀를 주셨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각종 짐승들에게 폭력을 행사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류의 왜소함과 비천함(2-4)과 인류의 영광과 존귀함(5-8)을 서로 대비시켜 긴장감 넘치고 역동적인 관계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초대교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이후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와 관련시켜 기독론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수용되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 찬양(9)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손으로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통치하라고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성도들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이 시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은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이 영광과 위엄의 관을 쓰고 왕적인 통치를 시행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더라도 사람은 땅의 흙과 먼지로부터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까? 다윗은 처음 생각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다윗은 인간의 왜소함과 비천함뿐 아니라 사람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로 부름 받은 은총을 노래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영광이 하나님 은총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본연의 임무입니다.


온 땅에 드리워진 하나님 이름의 영광과 위엄은 찬양의 이유 그 자체입니다. 젖먹이들과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통해 원수를 제압하신 하나님께서는, 한낱 사람으로 광활한 우주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존재를 작다 않으시고 크게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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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7-01)


어려운 세상을 견디는 하나님의 힘

시편 7편 1-17절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웨런 위어스비 목사는 ‘하나님께는 시련과 시험에 대한 계획이 있다. 혹시 고난에 처해 있다면 그저 견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장을 위한 기회로 보고 당신의 마음을 점검하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당신의 삶에 어떤 영역을 개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시도록 의뢰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 중에 하나가 이유없이 고통을 받을 때입니다.
 
시편 7편도 다윗이 기록한 개인적인 애가, 곧 탄식시입니다. 이 시는 무죄한 사람이 원수들의 거짓 고소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무죄를 항변하며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고, 자기에게 누명 씌운 사람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공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1-5)

억울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새앆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만약 자신이 잘못이 있다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고 뉘우쳐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방 때문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본 시의 주인공인 다윗은 사울의 신하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공평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2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셀라)(1-5)
다윗은 사올 왕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하면서 탄식하며 기도하는 시입니다. 그는 원수들에 의해 찢고 뜯으려고 위협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주께 피하면서, 구원하고 건져 주실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1)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1-2)
다윗은 먼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기를 추적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암살자들의 추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내가 주께 피하오니’(1a)라고, 사울의 심복 중 한 사람으로 ‘베냐민인 구시’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도와주실 분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이요 간절한 호소입니다(삼상 24-26장).
둘째, 소절을 히브리어 어순 그대로 살려 읽으면 더 생생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1b) 피한다는 것은 구원과 구출을 전재한 것입니다. ‘구원하다’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구출하다’라는 말은 붙잡거나 낚아채고 움켜쥐는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1절은 시인의 긴급한 마음과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과 개입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2) 자신의 무죄 항변과 천명(3-5)
다윗은 여호와 이름만 부르지 않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친밀한 언약의 이름 여호와뿐만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며 주권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호명하여 다윗 자신과 밀착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계심을 인정합니다.
다윗이 신속한 구원을 요청했지만(2)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무죄 천명을 위해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개입을 바랍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일관되게 ‘만일…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행했다면’을 세 번 반복합니다(3,4,5). 그러니까 자신이 죄를 지었으면 원수가 자기 생명을 땅에 짓밟고 자기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해도 괜찮다는(5) 항변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이만큼 결의를 다지며 잘못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인은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3),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4), ‘땅에 짓밟히고 명예를 잃어도’(5)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무죄를 맹세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과 관련된 거짓 증거로 다윗을 옮아 매려 했던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 요청(6-13)

정기적으로 안전 교육을 받고 직접 모의 훈련에 참여하는 이유는 위기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통해서 어려운 순간에도 습관처럼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평상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찬양의 시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6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7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8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9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10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6-13)
어려운 상황 속에 있던 다윗에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며 악을 심판하시며 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가장 의로운 판결을 내려주실 재판장이십니다.
(1)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 요청(6-9)
다윗은 무죄 맹세를 하고서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정당한 판결을 요청합니다. 먼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시길 직접 간청합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6). 다윗이 무죄 맹세를 위해 ‘만일 ~했다면’을 반복한 것처럼(3-5), 세 개의 명령어를 내세워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합니다.
다윗은 ‘당신의 진노로’, ‘대적들의 격분’에 맞서 일어나도록 청합니다. 여호와의 분노와 대적들의 격분을 경쟁시켜 여호와가 꺾어 멸하시기를 호소하는 표현입니다. 그러고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판결하신 듯이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6)라며 정리합니다. 이후 다윗은 민족들의 모임에서 재판장으로 일하시는 법정 장면을 상상하며 하나님께 중재와 재판을 청합니다. ‘높은 자리에 돌아오십시오’,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십시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판결하십시오’(7-8), ‘악인을 끊어주십시오’, ‘의인을 세워주십시오’ 그러고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9)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셔서 악이 끝나기를 구하고, 의인이 세워져 정의가 수립되길 소망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법적인 문제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사람’, 곧 가장 비밀스러운 내면(‘마음’과 ‘성질’)을 면밀하게 조사하시고 숨겨진 마음의 깊은 동기를 시험하시는 분으로 명시하여 하나님의 신속한 개입을 촉구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재판장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은 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2)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10-13)
시인을 보호하는 방패는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선언합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다’(10). 방패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마음과 의지와 생각과 양심이 곧고 바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인의 방패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판결하시기를(8) 요청한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선언은 하나님은 매일 분개하는 분(11)이라는 선포와 연결됩니다. 시인에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에 분개하시고 호통치고 꾸짖으시는 분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칼을 가시며, 활을 당기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12). 정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을 무장한 전사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갈고 계시는 하나님은 상상만으로도 무섭습니다. 전사처럼 묘사된 하나님은 죽음을 부르는 살상무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이 만드신 무기는 불타는 불화살입니다(13). 고대 사회에서 불화살은 포위된 도시를 불태우는 무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불붙은 화살이 날아갈 준비를 마친 상황 묘사는 악인들이 심판받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표현합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을 찬양(14-17)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만한 공정한 판결과 공의를 행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알고 계십니다. 한순간도 악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분노하십니다. 악인들을 심판하려고 항상 준비하십니다. 선인에게는 방패가 되시지만 악인에게는 칼이 되고 불화살이 되고 무기가 되십니다. 다윗은 이제 공의로운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해 찬양합니다.
14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4-17)
불합리한 현실로 고통이 밀려올 때, 고통 그 자체에만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 넘어 있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때가 되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다윗은 공평하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1) 심은 대로 거두는 악인(14-16)
악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시인은 ‘보라, 악을 잉태한 자는 분쟁(재앙)을 임신하고 거짓을 출산했다.’(14)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잉태와 출산 은유로 악의 끊을 수 없는 파괴적인 생산성을 역설합니다. 또한 악을 잉태한 자는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웅덩이를 판 사람과 연결시킵니다(15a). 악인은 또한 짐승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곧 자기가 만든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15b).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진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좀 더 강하게 악의 연결 고리의 순환적인 성격을 묘사합니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린다(16)는 말로 악의 본질을 밝힙니다. 남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과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재앙이 ‘머리’로 돌아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정수리’에 내리게 되니 치명적입니다. 이는 악의 결말과 심판의 철저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악인 스스로 파멸의 주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갚으시는 방식이며, 하나님 심판의 엄중함을 제시합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옛 지혜자는 악인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잠언 26:27; 시편 9:16; 57:6; 141:10) 삶의 보편적 원리와 정의로 받아들였고, 이는 오랜 세월대중 속에서 회자된 진리입니다.
(2)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 찬양(17)
무죄를 항변하며 정의로운 재판장 하나님께 악인의 심판을 청구한 시인은 하나님께 찬미와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17a). 시인은 앞서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심판해주십시오’(8)라고 말했었는데 이제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17). 이 감사는 재판장이신 여호와의 '공평'에 대한 고백과 찬미입니다. 시인은 정의로운 판결을 앙망하며 높은 자리로 돌아오시기를 청했고(7), 절박한 상황에서 ‘의로우신 재판장’(11)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선포합니다. ‘내가 가장 높으신 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합니다’(17b). 여호와를 ‘가장 높으신 분’으로 호명하면서 악기로 연주하며 찬양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온갖 억울함을 해결하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통치와 정의를 신뢰하며 높이는 찬양이며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없는 사람은 그분의 공정한 재판장이라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결백하면 자신은 아직 썩지 않았다고 자신을 변호할 뿐 아니라 주님도 썩지 않았다고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썩은 나무를 도려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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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6-01)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시편 6편 1-10절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 매 순간마다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봅니다. 뭐 하나 수월한 게 하나 없습니다. 인생은 순간순간마다 수월한 곳 없습니다.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가 있습니다. ‘이 산을 넘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다음에는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 6편을 지은 다윗도 우리와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이며, 개인적인 탄식의 전형성을 가장 잘 드러낸 시입니다. 시인의 영적,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탄식(1-3)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 안에서 자신을 통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여호와만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분노하심으로 자신을 책망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3)

시편 6편은 구원의 간구하는 ‘탄식의 시’입니다. 5편과 함께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6편은 ‘밤의 기도’라고 불립니다. 시인이 어떤 사정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를 부르고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폭력과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시인의 어떤 불의 때문에 분노하십니까? 시인과 여호와만이 아는 생략된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와 격해진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징계를 철회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기에 꾸짖음과 징계를 거두어달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면책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자의식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내세워 은총을 구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그 비참함을 2-3절 시행에서 묘사한다. 시인은 반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해졌습니다. 내게 자비를베푸소서. 여호와여, 내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쳐주소서’(2). 시인은 몸과 마음이 병들어 매우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뼈마디가 떨릴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다. 뼈의 떨림은 육체적인 건강, 곧 몸의 기력이 쇠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극심한 내적 고통과 슬픔의 표현이기도 합니다(참조. 시편 31:10). 시인은 의욕과 활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조차 없어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이 와중에도 시인은 여호와가 참된 치료자라는 것을 알고(출애굽기 15:26; 민수기 12:13; 신명기 28:27,28; 32:39) 믿기 때문에 ‘나를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다음과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떨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3절). ‘영혼’은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고, 감각과 의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고통 중에 간절하게 도움을 바라는 한 인간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고, 그러한 인간 모두를 대표합니다. 뼈가 떨리는 것처럼 감정과 의지마저 떨리는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시인의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어느 때까지인지 묻는 것은 탄식시의 전형성을 드러낸 표현입니다(74:10; 80:4; 90:13; 94:3). 시인은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하나님의 침묵과 부제가 대비되는 긴장감 속에서 떨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구(4-7)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뿌리 뽑아 주실 것이며, 의인은 굳게 세워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옵니까? 다윗은 심신이 병들어 수척한 상태에 있었지만, 고통을 끝낼 분이 하나님뿐임을 알기에 강청합니다.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4-7)

시인은 또다시 여호와를 부릅니다. 절실함의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4a). 시인은 여호와의 분노와 침묵, 부재를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그의 직설은 거침이 없고, 구원을 청하는 근거도 분명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b). 구원을 청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헤세드입니다. 시인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 곧 흔들림 없는 견고한 사랑을 믿기에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언어도 점점 더 절실해집니다. 시인은 심각한 질병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죽으면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는다며, ‘스올’에서 당신을 찬미할 자 누구인가(5)라고 묻습니다. 죽으면 누구도 여호와를 기억할 자 없다는 반어적 의미의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듣는 이에게 생각의 짐을 지우는 설득의 방식으로 히브리 시인들의 문학적 관습입니다. 죽음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의 개념인 스올은 죽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구약의 세계관을잘 드러낸 말입니다. 구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유보합니다. 죽음은 땅 속 무덤으로 가는 일이고, 죽음의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입니다(전도서 9:10). 돌아올 수 없는 땅입니다(욥기 7:9; 10:21; 16:22). 망각의 땅입니다(시편 88:4). 그러니 시인은 잊힘의 땅, 죽은 자들이 가는 땅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처지를 더 상세하고 과장되게 묘사합니다. ‘내가 탄식하여 피곤해지고 밤새도록 나의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울 정도로 내 요를 적십니다.’(6) 강물이 범람하여 침대를 물에 띄울 정도로 눈물이 흐릅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외로움과 그 생생함에 몸서리치는 기나긴 밤입니다. 더군다나 시인의 눈은 근심 때문에 약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대적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7). 시인은 몸의 질병 때문에 마음까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적들 때문에 눈의 건강마저 극도로 악화되고 쇠약해질 만큼 고통스러워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확신(8-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셨다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차마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부딪쳐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부딪처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우묵한 기도를 통해 다시 용기를 회복한 다윗은 원수들을 행해 호통 칩니다.

8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8-10)

갑자기 시인의 어조가 바뀝니다. 암담한 고통을 버거워하며 탄식했던 목소리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던 모습과 완전 반대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모든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8a). 확신에 차서 강경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b)입니다. 이는 침묵하셨던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유달리 ‘여호와’ 곧 언약의 이름, 친밀하고 인격적인 이름을 여덟 번 부릅니다. 시인이 하나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 때문에 그의 간절함은 훨씬 더 강화됩니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고통과 근심을 가져오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7절에 언급된 ‘대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의 말이 더 확정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첫 번째 ‘들으셨다’는 완료된 상태지만, ‘받으시리로다’는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인의 확신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시인은 이전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두려움과 뼛속 깊은 떨림 속에서 여호와를 부르며 탄원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여호와가 자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셨음을 확신하면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명합니다.

이제 그 믿음대로 몸과 마음이 치료되고 회복된다면, 주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10). 이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장차 원수들이 당하게 될 일을 내다보듯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호와가 시인의 원수들에게 내릴 심판은 불명예와 수치로 인한 떨림입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이 매우 떨립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3)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제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시인과 그의 원수들 사이에 역전이 일어납니다.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번민으로 떨었던 시인은 이제 새로워졌습니다. 반대로 시인의 원수들이 수치심과 비참한 나락으로 던져질 두려움 때문에 떨게 될 것입니다. 끝내 시인의 원수들은 부끄러워 물러가게 됩니다(10b), ‘물러가다’의 원래 의미는 ‘되돌리다’인데, 시인이 여호와를 부르며 ‘돌아오십시오’라고 간청한 말과 연결됩니다. 시인이 자기를 떠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와 주시기를 간청했던 말을 상기시켜 이제 원수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역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느꼈던 시간들이 하나님의 응답과 현존을 확신하는 시간으로 뒤바뀐 것은 물론이고, 자기를 괴롭혔던 악인들의 운명이 뒤집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 괴로움을 호소했던 시인과 원수의 운명이 바뀐다면, 원수들은 악행 때문에 죽음 가까이까지 가야 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이야말로 죽음 너머에 있는 죽은 자들의 세계, 곧 ‘스올’에 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인에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보다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졌던 침묵의 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으신 주님을 고백하며 삶의 반전을 굳건한 마음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 임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더라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도에 자신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회복도 응답도 성장도 힘듭니다. 나뿐 아니라 절벽 끝까지 내몰려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를 협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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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5-01)


다윗의 아침에 드린 기도

시편 5편 1-12절


성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것은, 주위에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보호와 기쁨을 선물로 받아 어려움을 이겨 나가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기도한 것이 너무 오래된 옛 추억이 되진 않았습니까? 주님 앞에 어떻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겠습니까?

 

시편 5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게 이 시는 다윗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기쁨을 확신합니다.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는 기도(1-3)

다윗은 애타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아침부터 당신으 찾는 시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애끓는 생각까지 알아듣고 응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피 흘리는 것과 오만과 거짓과 행악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며,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을 멸망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1-3)

다윗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다윗의 첫 마디가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1a)입니다. 보통 히브리어 문장은 동사가 가장 앞에 위치합니다. 목적어 ‘나의 말’이 순서상 앞서도록 배열된 것은 목적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나의 말’이 무엇인지 집중해서 들어주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둘째 소절은 히브리어 본래 순서대로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b)이라고 합니다.

이 구성은 소절과 소절의 교차구조(X형)안에서 나의 말은 곧 나의 신음소리가 되고, 들어달라는 명령형은 헤아려달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관계를 형성해 히브리 시의 형식미를 오롯이 드러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표시하는 친밀한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간청했다면, 이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도움을 청합니다. 신음소리가 아니라 외치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달라고 간구합니다(2).

다윗은 자신의 부르짖는 목소리에 경청해주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부르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며 통치자로서 그분이 곧 ‘여호와’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이고 응답하시는 유일한 존재이며 참 재판관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요청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5:2).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하는 다윗의 마음은 한층 간절해집니다.

다윗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호명하며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아침에’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아침은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도착하는 벅찬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때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말은 제사 준비를 뜻할 수 있지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며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킬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시편 46:5;참조, 시편 130:6)라는 고백처럼 마음의 준비와 응답에 대한 기다림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악인(4-6)

악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다윗은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를 향하여 경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새앆하지 않았습니다. 악인과 다른 점은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의지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번제물보다 더 좋아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4-6)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그 행위를 미워하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4). 죄악과 악은 불법한 온갖 행위들과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 도덕적인 타락, 질적으로 나쁜 온갖 것입니다. 악 그 자체나 악행도 하나님 곁에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다윗에게는 오만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5a).

오만한 자는 자랑을 일삼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돋보이게 빼어나게 꾸미는 자입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결함이나 타락만이 악행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5b)라고 말하듯 ‘오만한 자들’과 ‘모든 행악자들’이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적 의미입니다. 그러니 자랑을 일삼는 것도 악행입니다. ‘행악자들’이라는 말은 시편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갖가지 고통과 슬픔,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거짓말하는 자이며,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속이는 자들입니다(6a). 시인은 하나님이 이들을 멸망시킬 것이고, 싫어하신다(6bc)고 확신합니다. 온갖 거짓과 자기기만으로 연약하고 무죄한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들의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물론 여기 묘사된 악인들이 시인의 실제적인 대적을 묘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기만으로 타인과 공동체에게 고통과 슬픔을 하거나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들, 사기 치는 자들은 모두 악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니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도하심(7-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형편을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빚고 계십니다. 억울한 처지에서도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숨 쉬고 있을 때가 아니 큰 숨을 몰아쉬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입니다. 바른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7-8)

다윗은 악인들과 반대입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당신의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해 두려움으로 경배할 것입니다(7).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나 선행 때문이 아닙니다. 두 시행이 완벽한 문법적 평행구조를 이루어 각 시행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당신의 집/당신이 거룩한 성전 //

당신의 풍성한 사랑으로 두려움으로//

내가 들어갈 것입니다. 내가 경배할 것입니다’가 서로 어울립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이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주의 사랑 때문이고, 거룩한 성전을 향해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때 ‘경외’, 곧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경험한 데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공경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 시인은 단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함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인도함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그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의로운 판단을 주님의 응답으로 믿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악인(9-10)

하나님께서 의롭게 판단하셔서 자신의 억울함이 해결되고 이제 아무도 자신의 길을 애매하게 가로막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신실하지 못하고 아첨과 악을 일삼는 인간에게 기대어 공평한 범과 제도가 세상에 서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지게 심판하시는 주권자 하나님만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9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9-10)

다윗은 악인들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9), 저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합니다(10). 왜 악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지를(5) 구체적으로 나열한 셈입니다. 악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아첨합니다(9). 다윗이 묘사한 원수들의 특징은 온갖 중상과 비방, 속임수가 섞인 거짓된 말과 파괴를 일삼는 마음입니다. 마음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묘사한 시인의 가차 없는 표현이 악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다윗은 파멸로 이끄는 악인들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격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악인들의 죄에 대한 판결을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해주십시오’(10). 하나님께서 벌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악인들이 자기 꾀에 스스로 빠지기를 요청합니다(10b). 악인들이 자기들의 음모와 사기 행각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곧 나락으로 떨어지길 요청한다. 끝내 하나님이 쫓아내시기를 간청합니다(10c). 다윗의 이러한 대담한 요청의 근거는 분명합니다. 간결한 이유 절이 이것을 반영한다. ‘그들이 당신을 거슬러 반역했기 때문입니다’(10d). 시인은 악인들의 배반과 반역, 곧 배역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의인의 행복과 은혜를 확신(11-12)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새가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지키시며 은혜로 큰 방패 삼아 보호하십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복을 누리며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11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11-12)

악인들에게 벌이 내려지기를 간구했던 격정적인 언어는 은총을 구하고 찬양하는 언어로 바뀝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이들이 그 보호 때문에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노래하며,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11).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왜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을 노예적인 삶에서 해방시켜 언약 백성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출범시키시던 때를 강조하면서 하나님 이름 여호와,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출애굽기 3:13-15; 6:2-3; 34장) 상기시키려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의인에게 복 주시고, 방패 같은 은혜로 의인을 호위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12).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악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모든 악으로부터 여호와가 의인을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며 선과 악 사이에서 판결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기도이며 기다림입니다.


외인과 악인의 그명한 대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의인은 결국 하나님께 닿겠지만, 의인들을 괴롭힌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도려내실 것입니다. 자신과 자녀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리에 남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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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4-01)


정직한 믿음의 기도

시편 4편 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기도도 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난 척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여과 없이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기쁘면 기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그백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안아 주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정직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시는 다윗이 자기의 의로움을 변호해주실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의 성품과 통치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당면한 현실에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더라도 정돈된 마음과 신뢰를 잊지 않도록 격려하는 찬양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여호와를 ‘내 의의 하나님’으로 호명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우선순위를 확정합니다.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1)

의의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자신을 허사와 궤휼을 써서 비참하게 만든 그들을 오히려 대담하게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나누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한 의인의 고난은 끊이지 않을 것이지만, 의로운 삶이 무익할 만큼 하나님도 가만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다윗은 번민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절은 네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입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곤경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구합니다. 다윗의 곤경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부당하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소를 당하기나, 무죄한데도 비난을 받는 치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간절함이 묻어난 표현이 집중적으로 반복됩니다. ‘내가 부를 때 응답하소서’, ‘막다른 곳을 나를 위해 넓히셨습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등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습니다.

또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내 의의 하나님’을 호명합니다. 1인칭 소유격 대명사를 반복 첨가하여 자신의 부끄럼 없는 삶을 강조한 것처럼 들립니다. 구약에서 ‘의’는 ‘정의’와 ‘공의’로도 번역되곤 합니다. 이것은 법정적인 개념으로 단순히 옳음을 변호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정의는 본래 ‘의’(rightness)와 ‘공평’(justice)을 말하며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관계된 법정 용어입니다(이사야 51:5,8). 그러니까 다윗은 ‘의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당당하게 확신에 차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요청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빠져나오기 힘든 협곡의 위험에서 넓고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넓은 길로 인도하신 것처럼, 위기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2)

언약의 관점에서 ‘의’는 구원을 베푸시는 능력으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결백함에도 비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단순하면서도 묵진한 믿음을 실행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의의 하나님으로 그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시고 구원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2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2)

다윗은 특정한 어떤 무리들을 호명하며 꾸짖습니다. ‘인생들아, 어찌하여 나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헛된 일과 거짓을 좋아하고 구하는가’(2).

다윗의 번민과 근심의 원천은 ‘인생들’입니다. ‘인생들’(개역개정)을 직역하면, ‘어떤 남자의 아들들’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다른 곳에서, 평범한 서민들과 대조되는 고관대작들 또는 귀족들로 해석됩니다(시편 49:2). 그러니까 다윗의 영광과 명예를 욕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들인 셈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공허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추구하며 괴롭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대체 ‘어느 때까지’ 헛된 욕망을 좇을 것인지 따져 묻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고통의 기간이 길어져 다윗은 괴롭힘을 견뎌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사람들에게 반성을 촉구(3-5)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대적들에게는 당당함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선 기븜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비웃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충고하고 호통 칩니다. 보통 애가에서처럼 원수에 대해 푸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원수에 대해 푸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5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3-5)

다윗은 헛된 일과 거짓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들을 향해 ‘너희들이 언제까지 거짓을 꾸밀 것인가’(2) 꾸짖었다면, 지금은 여호와가 경건한 자를 선택하신 것을 ‘알라’(3a) 경고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경건한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이 분명합니다. ‘경건한 자’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간절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곤란 중에 탄식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을 용감히 꾸짖기도 합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들, 헛된 것과 거짓을 구하는 자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3b)이라고 말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1)라고 기도했고, 여호와가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고, 침상에서 마음을 살피고 잠잠하라’(4bc) 경고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가장 은밀하고 조용한 시간, 곧 잠드는 침상에서 악한 행동과 말을 반성하고 억제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떨라’는 말은 매우 강한 발언입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감정이 전복되고 전율을 느낄 정도로 떨림을 뜻합니다.

‘범죄하지 마라’는 경고는 질책당할 만한 행동이나 비난받을 일은 죄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흠이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해야 할 일을 놓쳐서도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다윗은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권면으로 적당히 넘기지 않습니다.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양심과 의지를 스스로 치밀하게 조사하라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을 양심과 의지의 자리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밑자리를 살피라는 말입니다. 그러고서 여호와께 의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을 의지하라고(5) 권면합니다. 다윗이 믿는 의의 하나님(1)께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음을 살핀 후입니다. ‘의’의 제시는 진실한 제사, 올바른 제사입니다. ‘의의 제사’는 온전한 마음과 온 맘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신명기 33:10,19). 형식보다 의로운 행실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다윗은 거짓과 헛된 일을 꾸미는 고관대작들을 향해 철저하게 마음을 살핀 후에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6)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들에게는 곤란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합니다. 이 세상에는 괴롭고 슬픈 일들도 많지만 반면에 기쁘고 즐거운 일들도 있습니다. 곡식을 추수하는 일, 새 포도주를 대하는 일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결혼이나 취업, 자녀들의 건강과 형통 등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은 이처럼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향락이나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다윗은 많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애통합니다. 다윗의 주변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이것은 불평과 의심의 마음이 뒤섞인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인생들아’(2)로 호명된 권세 있는 자들인지 불만을 가진 백성들의 불평인지 모호합니다. ‘많은 이들’은 아마 다윗을 둘러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선’을 구합니다? 대체 이들이 말하는 ‘선’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1차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착함’을 뜻하지만, ‘좋은 것’, ‘기쁨을 주는 것’, ‘쓸모 있는 것’을 말하는 ‘토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채워줄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사적인 이득을 채워주는 실용적인 것들을 욕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의 통증을 느낍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다윗은 많은 사람들처럼 자기의 이득만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내려지는 여호와의 얼굴빛을 구합니다. 이 기도는 옛적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장 축복 기도문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비추사 …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6:25-26). 얼굴 빛은 여호와 임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완전한 복, 곧 샬롬이 구현되는 것을 함축합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임재가 가장 절실합니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란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경험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다윗은 다수가 추구하는 속물적 욕망이나 혼자만의 유익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구합니다.

 

신뢰를 고백하는 기도(7-8)

하나님께서는 곤란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곤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안이 눕고 자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거하게 하시는 분이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에 쫓겨나 경호원들만 데리고 도망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사람이 평안히 누울 수 있습니까?

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7-8)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빛, 곧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신뢰와 감사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더 큰 기쁨으로 내 마음을 채우셨습니다. 햇곡식과 새 포도주로 누릴 때보다 더 큽니다’(7). 추수의 기쁨보다 임재의 기쁨이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농경 사회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는 기쁨과 부의 상징이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 자체가 더 큰 기쁨입니다. 풍요를 갈망하는 거짓 신들을 찾아 숭배하며 이교적인 풍요 의식에 참여하는 시대의 지배적인 상황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무겁고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신뢰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잠잘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 여호와만이 나를 안전히 거하도록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8). 환경은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오직 여호와만이’ 안전을 책임지는 근원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 합니다.


대적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택하셨음을 알라고 한 호통은 한편으론 다윗 자신이 다져야 할 확신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단순한 애통과 간구에서 많이 진화되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빛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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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3-01)


여호와께만 있는 구원

시편 3편 1-8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신앙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이나 사회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주위에서 나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내 원수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격인 1-2편의 ‘행복’의 문을 통과했습니다. 3편은 원수들의 위협에 따른 고통과 좌절을 정직하게 호소하는 ‘탄식시’입니다. 이후 7편까지 시편의 많은 분령을 차지하는 탄식시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행복한 사람’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때로는 낯선 방문객처럼 찾아옵니다. 3편은 거친 현실에서 주님을 향해 탄원하며 평정을 찾아가는 진실한 노래입니다.

 

많은 대적들을 불평하며 탄식(1-2)

어느 때보다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반대로 조롱 당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 들 돌린 건 같은 상황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잊지말아야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1-2)

시편 3편에 첫 두 절은 시인을 둘러싼 적들에 대한 분노와 탄식이 동의적인 평행구로 배열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표제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라고 붙습니다. 제목을 제외한 시행의 첫마디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대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도망쳤을 때 쓴 시로서 그의 힘든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 너무 많은 이들이 자기를 대항하려고 일어나고 있다(1)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는 분 앞에서 위험을 무릅쓴 상태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그럴싸하게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탄식시들은 이보다 더 거칠고 위험스러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시인이 불평과 탄식의 언어를 쏟아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대적이 누구입니까? 구약에서 보통 ‘대적’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적대 감정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적의를 가진 원수나 경쟁자들 같은 자들이지 국가적인 전쟁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칠 때 지은 시라고 소개합니다. 이때는 아마 이스라엘의 민심이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즈음일 것입니다(사무엘하 15:13).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여호와께 고합니다.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조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셔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빈정거림이 괴롭습니다. ‘어찌 그리 많은지’,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많다’라는 형용사를 세 차례나 반복할 만큼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말로 왕의 사기를 짓밟습니다. 시인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까?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탄식의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확신(3-4)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난의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책합니다. 때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합니다. 성도라고 고난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성도이기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큰 고난의 때에도 부르짖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3-4)

그러나 시인은 거친 탄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꿔 여호와께 신뢰를 고백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둘러싼 방패십니다. 나의 영광이시고 내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입니다’(3). 탄식은 어느새 신뢰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시인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까? 그보다 탄식은 신뢰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없이 이름을 부르며 탄원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다시 부르는데, 이제 ‘당신’이라고 호명합니다. 시인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당신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만남을 확신합니다. 자신을 객체화하지 않고 1인칭 소유격 대명사(‘나의’)를 반복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거리를 밀착시킵니다. 시인에게 여호와는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실 방패이고 영광입니다. 영광은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 왕의 영광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니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시인 다윗은 자기의 위엄과 가치가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왕은 원수들과 많은 이들의 공격을 받았어도 여호와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메리를 드는 것은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 죄가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거나 이전의 지위로 복귀됨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공적으로 억울함을 풀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회복시키실 여호와를 굳게 믿습니다.

시인의 확신은 더 커졌고 여호와를 굳건히 붙듭니다. ‘나의 목소리로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가 그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십니다’(4). ‘거룩한 산’은 시온입니다. 다윗 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입니다(시편 2:6). 거룩한 산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정치적 힘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옛적 다윗의 조상들에게 시내산에서 계시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임재의 처소를 시온으로 옮기셨다는 데 있습니다(시편 68:8,17). 그러므로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예언자들도 정의와 평화의 세계 질서가 실현될 곳으로 간직합니다(이사야 2:2-4).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5-6)

사람은 대게 조금이라도 불안한 상황에 처하면 근심 걱정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겹쳐 오는 고난에 하나님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 자신을 왕위에 세우셨으니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5-6)

시인은 내가 눕고 내가 잠자고 다시 내가 깨는 것이 여호와가 자기를 붙들고 계시는 증거라고 노래합니다(5). 시인은 누구의 간섭과 방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주체적인 고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없어도 문장 구성에 문제없지만 1인칭 주격 대명사 ‘내가’를 덧붙입니다. 사람들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틀렸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사람들의 적의에 찬 말에 무너지지 않고 평안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는 밤의 어둠이 휴식이 되도록 잠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깨워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시인은 분통 터지는 마음, 고통과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한(1,2) 것만큼 강인합니다. 시편의 이러한 솔직함과 분노의 표현은 소망으로 이어지는 히브리 시인들의 문학적인 관행입니다. 시인의 대담한 표현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의 신뢰가 평정심을 찾게 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무리의 사람들’(새번역은 ‘천만대군’)이 나를 에워싸 끌어내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6). 시인은 어찌하여 나의 대적이 많은지를 탄식했지만, 이제 적대적인 위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도 잠자고 다시 깨어날 수 있을 만큼 깊은 고요와 확신에 차 있습니다.

 

원수의 패배를 구하는 기도(7-8)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방패가 되사 빗발치는 원수의 화살 속에서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이 되실 때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낙심하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얼굴을 당당히 들고 걸을 수 있게 하십니다.

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7-8)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승리를 간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7절 시행의 첫 소절은 강렬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7a) 이 말은 자기를 치려 하는 자들이 많다고 탄식을 것과(1) 대조됩니다. 시인은 지난날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회상하듯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셨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습니다’(7bc). 특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 말은 옛적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고 전쟁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갈 때 했던 말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민수기 10:35), 시인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떠날 때의 상황을 현재화합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가라앉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복을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8). 시인은 자기구원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에게 복이 내려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통치자로서 갖는 책임의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탄식을 멈추고 ‘구원’과 ‘복’을 하나로 연결시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구하는 ‘복’은 시편 1편의 ‘복’, 곧 ‘행복’과 다릅니다. 이 ‘복’은 흔히 신의 은총을 구할 때 사용하는 축복(blessing)이며 하나님의 선물 개념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여호와이듯 복의 주체도 하나님이기에 간청합니다. 이것은 구원과 복이 하나님 활동의 핵심임을 밝힙니다. 구원은 삶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위기나 억압의 현실에서 도와주고 다양한 필요를 채워줌을 뜻합니다. 복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복’을 구하는 시인들의 기도는 계속됩니다(5:12;28:9;29:11;67:1,6,7;115:12-13; 133:3;147:13). 무엇보다 시인의 최종 간구는 백성을 향한 공동체적인 복을 요청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시행은 믿음의 공동체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빛을 비춰줍니다.


피폐한 삶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이나 존재에 대해 무덤덤해질 때가 많습니다. 더는 믿음을 갖고 기도할 여력도 사라지고, 응답이 지체되면 그나마 있던 믿음의 뿌리도 흙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향한 구원이 반드시 다가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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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2-01)


복 있는 사람의 신앙관

시편 2편 1-12절


세상은 전쟁, 분노, 무질서 등으로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또 다른 소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휘둘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편 2편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의 왕권을 통해 인간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관계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열방과 통치자들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에 근거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나의 왕’과 ‘나의 아들’의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열방의 왕들, 메시아 왕권에 대적(1-9)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지만(시편 1:2), 세상 사람들은 헛된 일을 꾸밉니다. 그들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서 감히 허세 부리는 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꾸미는 헛된 일, 악인의 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거만함과 흡사하지 않습니까?(창세기 11:3-4) 그들은 복이 없는 죽음의 삶인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1-9)

시편을 읽을 때는 다윗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을 지금 우리 상황에 비추어 읽는 것이 잘 읽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 사이에는 표제어(標題語)가 없습니다. 표제어가 없다는 것은 이 시편에 대해 누가 기록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1편과 2편이 연결된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제왕시’, ‘즉위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1) 여호와와 왕을 대적하는 열방들(1-3)

먼저 시편 2편은 의문사 ‘어찌하여’로 묶이는 시행들의 집합입니다. 시인은 걱정에 찬 질문으로 말문을 열면서 의분을 표합니다. ‘어찌하여’로 시작한 질문은 뭇 민족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강렬하게 개탄하기 위해 의 도적으로 선택한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신 절대 주권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절대 주권의 왕을 대적하며 반역을 꾀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 전쟁을 위해 요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과 음모 꾸미는 것을 질타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항상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단위 전쟁을 치렀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공격으로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게 하면, 주변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벌벌 떨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먼저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소동을 피우고 법석 떨고, 민족들이 내용 없고 가치 없는 것들을 퍼뜨리고 꾸며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난합니다(1). 또한, 시인은 외칩니다.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곧 통치자들이 일어나 함께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향해 대적합니까(2)?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과 그가 세우신 왕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열방과 폭력과 위협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을 고발하듯이 말을 잇습니다.

시인은 열방의 왕들이 내거는 구호를 반박하려는 듯 그대로 인용하여 옮깁니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 ‘맨 것’과 ‘결박’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이는 통치와 통제를 뜻합니다. 곧 열국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2) 하나님, 시온에 메시아 왕을 세우심(4-6)

시인은 뭇 민족들과 열방 통치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전합니다. 하늘에 앉으신 자, 곧 주님이 그들을 비웃고 계십니다(4).

시인은 지상의 통치자들이 볼 수 없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땅 통치자들의 반역과 오만을 조롱하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불타오르는 진노로 호령하십니다(5). 시인의 상상력이 가미된 극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의 중요성을 각성시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지상의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십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후(사무엘하 7:16)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세워지는 새로운 왕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거처, 시온은 어디입니까? 본래 시온산은 다윗성을 일컫습니다(사무엘하 5:7). 그러나 이 의미가 확대되어 이후에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 서 있는 언덕이 됩니다. 사실상 시온과 예루살렘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시온산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산으로서 주님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나의 왕’(6),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는 포로기 이후에 새로운 왕권을 암시하는 새로운 계약으로 발전됩니다(예레미야 31:31-34). 이후 지상의 왕에게만 적용된 ‘메시아’(2:2)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식된 예수님은 히브리어 ‘메시아’에 상응하는 헬라어(그리스어)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받으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메시아 왕의 우주적인 왕권을 약속하심(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로 시작하는 7절 시행은 왕의 선언과 왕이 인용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앉은 후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은 왕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다윗의 왕권을 잇는 후손들입니다(삼하 7:14). 따라서 이것은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이 재천명 되고 갱신된 선포로서 기능합니다. ‘오늘 내가 낳았다.’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즉위식으로 세우지는 왕의 신성함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냅니다.

또한, ‘낳았다’라는 표현은 출생만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세워졌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는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구하라’(8)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구조, 왕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약속하십니다(8). 고대 근동 나라들의 왕은 신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열방을 ‘쇠 지팡이로 깨뜨리고 질그릇처럼 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받습니다(9). 매우 강하고 견고한 통치권의 상징인 ‘쇠 지팡이’와 그 반대 묘사인 ‘질그릇’이 대비되어 철저하고 완전한 파괴의 실행을 상상하게 합니다. 곧, 다윗 혈통의 왕이 실행하는 강력한 통치권이 ‘질그릇’ 같은 땅의 군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범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됨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권세는 반역적이고 오만한 나라들을(2:1-3) 향해 행사하는 힘과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왕의 인간적인 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기초한 것입니다.

 

열방의 왕들에게 메시아 왕권을 받들도록 권면(10-12)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시니, 그의 백성은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인간의 참된 지혜와 계획을 포기하고 하늘의 지혜와 교훈을 얻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아들에게 항복하고 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살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 세상에게 살길, 복의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0-12)

시온, 곧 예루살렘 왕이 등극하는 장면입니다. 시인은 오만한 지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을(2:1-3) 향해 경고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시인은 군왕들에게는 지혜를 얻고, 재판관들에게는 교훈을 받으라고(10) 경고합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통찰력을 얻으라는 권면이지만, ‘교훈을 받으라’는 말은 좀 더 엄격한 표현으로 징계를 받고 이치에 맞게 자기를 수정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한 조언은 계속되는데,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신앙 전통에서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잠언 1:7; 9:10). 그러면 어떻게 떨면서 즐거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개념적인 모순입니다. 그런데 11절은 시편의 평행 관계 속에서 두려워함과 떠는 것이 동의적인 의미인 것처럼, ‘섬기라’와 ‘즐거워하라’는 명령도 한데, 묶여 여호와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왕들은 ‘하늘에 앉으신 이’(4)에게 복종하라는 시인의 강력한 요청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12a)고 합니다. 여호와가 분노하여 길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그분의 진노가 일순간 확 불타오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12bc). 입맞춤은 경의와 자신을 맞추는 겸손과 복종의 표시입니다(참조, 삼상 10:1).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기쁨으로 섬기든지, 망하든지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향한 섬김은 반역적이고 오만한 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면 파멸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주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12d). 경고 후에 제시된 초대입니다. 이는 시편 1:1의 ‘행복한 사람’과 서로 어울려 ‘행복’이 1, 2편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시인은 시온에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왕의 통치를 받들도록 경고했고, 이제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피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목적 때문에 시편 입구에 자리 잡은 두 편의 시가 이러한 구성으로 배열되었습니까? 사람이든지 민족과 나라든지 삶의 ‘행복’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지, 시편 신학의 일면을 시의 언어로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행복한 사람’ 또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은 묵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처럼(1:1-2),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질 왕들과 통치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근원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며 권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2편은 각 사람에서부터 나라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과 통치권을 겸손히 받들고, 그 보호 아래 있는 것이 행복임을 역설합니다.


우리 시대는 실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을 지나치다 못해 활 시위를 겨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은 모든 권력이 무릎 꿇는 세상이요, 하나님께 피신한 자들에게 복 주시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휘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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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1-01)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편 1편 1-6절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복 없는 인생을 꿈꾸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2:6-7)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축복하지는 않으십니다.

 

시편 1편은 2편과 함께 시편 전체에 입문하는 서론처럼 놓여 시편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곧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1편은 이른바 ‘토라 시편’ 또는 ‘지혜 시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세기는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대비하여 의인의 길을 걷도록 교훈합니다. 의인은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1-6)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1-6)

시편을 처음 읽었던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에스라로부터 모세를 통해 받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자 시편의 핵심 주제를 나타내는 시편 1편도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합니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은 ‘아시와르’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줍니다.

(1) 행복한 사람의 길(1)

시편 전체와 1편을 시작하는 첫마디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소유와 번영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복 있는’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슈레’는 ‘행복하다’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의 넘침이나 세속적인 성공의 여부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 관련 있습니다. 시인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복의 개념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음모),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의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신명기 6:4-9). 그렇기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거나 죄인들의 길에 서거나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1). 악한 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습니다.

1절은 중요한 단어들이 점층적으로 나열되고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모두 동의적인 차원에서 연결되고, 이들의 행위와 존재를 특정 짓는 꾀-길-자리가 순차적으로 나열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과 어울려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곧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악인들의 음습한 음모, 죄인들이 매우 그럴듯하고 매끄럽게 다져놓은 길, 경건을 비웃는 거만한 자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2) 여호와의 법과 즐거움(2)

악하고 반역적이며 오만한 행위를 피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면(1), 시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을 노래합니다. 행복은 악한 무엇을 피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때 충만해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 ‘교훈’을 뜻합니다. 삶의 방침이며 지침입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에 오직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합니다(시편 1:2; 예레미야 17:7-8). 여호와의 율법을 버거운 짐과 의무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토라’의 본래적 의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위해 바람직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입니다. 길 없는 광야에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온종일 낮은 목소리로 여호와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건져 올린 깊은 성찰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함이 악인과 오만한 자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3) 시냇가의 나무와 같은 의인(3)

‘악인 죄인 오만한 자’의 길을 피하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온종일 읊조리며 깊이 새기는 사람의 행복은(1,2) 삶의 충만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강가에 심긴 나무가 됩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3).

악을 떠난 ‘행복한 사람’(1)은 생명의 활기로 충만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는 나무처럼 안전합니다(참조. 에스겔 47:12). 나무가 계절에 맞게 정해진 때에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질서와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순리에 맞는 삶입니다. 그러니 서두르거나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질서와 때에 따라 안전한 삶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의인인 셈입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은 의인이라는 직접적인 명시는 없으나 4절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은 악인과 6절의 의인과 악인 대비는 자연스럽게 ‘행복한 사람-시냇가에 심긴 나무-의인’을 질적으로 하나처럼 연결합니다.

(4)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4)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3절과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2절에서 ‘오직’이라는 한정 부사로 시행을 강조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겨’와 같습니다. 이 직유법은 악인을 가볍고 무익하고 텅 빈 껍데기 같은 존재로 그려냅니다.

더군다나 ‘겨’(모츠)와 3절의 ‘나무’(에츠) 비교는 의도적으로 비슷한 음가를 활용한 언어유희처럼 보여 악인의 운명을 암묵적으로 비유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겨’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언서의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에서 주로 발견됩니다(이사야 17:13; 41:15; 호세야 13:3; 스바냐 2:2 등). 반면에 겨와 대조되는 ‘나무’(3)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적시는 강가에 심겨 생명이 약동하는 ‘생명나무’(창세기 2:9)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5) 악인의 심판과 고통(5)

시인은 악인들의 최후를 묘사합니다. 악인들이 끝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행동하십니다. 4절에서 악인들이 ‘겨’와 같다는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과 연결된 것처럼, 악인의 최후 심판 장면이 묘사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공평과 정의로 악을 판결하시는 법정 소송에 불려나온 악인들을 연상시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떤 중재나 변호도 받을 수 없기에 자기의 권리 주장을 위해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평한 판결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의인들의 모임에 끼어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첫 소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a)는 것과 둘째 소절,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b)는 말은 같은 뜻 다른 표현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합니다. 그러니 의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악인들은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분리 자체가 심판입니다.

(6) 멸망하는 악인의 길(6)

마지막 시행에서 의인들의 길과 좀 더 악이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시인은 의인들의 길을 여호와가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멸망하한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호와가 ‘인정한다’는 말은 본래 ‘알다’라는 뜻으로 앞(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삶에 개입하셔서 꼼꼼히 보고 경험하시는 구체적인 앎을 통한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이렇게 1편의 마지막 시행은 시편 전체 문을 열면서 삶의 두 갈래 길을 제시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설득합니다. 이후 시편들도 의인의 평탄한 길(26:12)과 악인의 미끄러운 길(35:6)을 묘사하며 양 갈래 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명령과 설명이 아니라 시적인 묘사를 통해 삶의 진리와 진실을 밝힙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어울려 한길 걷지 않고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1).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고 온종일 읊조리며 삶을 반성합니다(2). 이것이 매일의 습관으로 내면화할 때 의인의 삶이 됩니다. 끝내 여호와가 ‘의인들의 길’을 아십니다(6). 눈여겨볼 것은, 악인들이 사악한 중범죄자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과 악인들을 같은 범주의 사람으로 묶고, 이들이 길을 잃어 멸망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것처럼 노래합니다.

정리하면, 1편은 ‘행복한 사람’과 ‘의인’의 삶의 존재 방식을 하나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이와 함께 시인이 말하는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로 대조되는 두 갈래길은 구약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전통의 흐름과 조화를 이룹니다(잠언 4:18,19; 15:9). 잠언의 지혜도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12:8), 악인의 길은 파멸과 죽음의 길이라고 교훈합니다(14:12). 이후 예수님도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과 지혜자처럼 두 갈래 길을 말씀하십니다. ‘파멸에 이르는 넓은 길’과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습니다(마태복음 7:13-14).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촉촉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을 따라 ‘걷고’, ‘서고’, ‘앉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매 순간 갈림길에 섭니다. 하나님과 세상 중 어느 리듬에 따라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말씀을 따라 살 때뿐입니다. 말씀의 리듬을 따른 의인의 리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가치 없는 인생으로 판명됩니다. 심판 견디지 못하며, 의인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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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서론


노래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애한이 담긴 많은 노래를 창작하고 대중들의 입에 불리고 있습니다. 많은 노래들이 불리지만, 노래 중에 노래, 제일 가치 있는 노래는 ‘사랑가’일 것입니다. 연인이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노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가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으로서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찬송가입니다. 이 노래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일하게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갑시다.

 

시편의 명칭

히브리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의 첫 번째 책으로서 기도문, 신앙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테힐림’인데, 이것은 ‘찬송’ 혹은 ‘찬양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영어 제목인 ‘Psalm’은 ‘노래’를 의미하는 헬라어 제목(70인역) ‘Psalmoi’에서 파생 된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들

시편의 저자는 다윗, 아삽, 고라의 자손들, 솔로몬, 모세 등 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73편으로 가장 많고 아삽은 12편 고라의 자손들 11편 솔로몬 2편 모세1편 등이 있습니다. 있으며 작장 미상이 여러 편이 있습니다.

시편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영감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아마 최종적으로 집대성 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손에 의해서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 직후의 시대에 몇몇 서기관들에 의해 집대성되었을 것입니다. 시편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시에 그 표제(제목)들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이야 말로 시편의 기원을 지적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시편의 표제들 가운데 8명의 개인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은 저자, 기고자, 편집자, 음악가들이거나 작곡, 편집, 거룩한 서정시의 사용과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다윗, 아삽, 고라, 모세, 헤만, 에단, 솔로몬, 여두둔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시편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엽부터 표제 속에 언급된 사항들을 연구하므로 시편의 저작권과 시기를 밝히려는 근대적인 시도가 행해졌습니다. 시편의 연대를 여호수아로부터 헬라 시대까지 잡았으며, B.C. 312년 이후에는 어떤 시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편이 일천 년 간의 역사적 배경을 무대로 지어졌다고 봅니다. 많은 각각의 시들이 모세와 다윗으로부터 곧 이어지는 포로기까지의 히브리인들의 역사 중 어느 시기에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정될 수 없지만, 이들이 기록된 시기는 이러한 범주에 해당한다고 결론짓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시의 저자와 그 역사적 배경이 비록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편 전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베드로후서 1:21)을 우리가 믿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시편의 기본적인 특징

시편은 모두 5권으로 되어있습니다. 1-41편이 한권이고, 42-72편이 제2권이고, 73-89편이 제 3권이고, 90-106편이 제4권이며, 107-150편이 제5권입니다.

시편은 모두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권의 끝은 모두 찬양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1권에서 3권은 애가가 압도적이라고 한다면 , 찬양은 제4,5권이 압도적입니다.

 

시편의 문학적 형식과 배경

시편의 구성을 애통의 시, 감사의 시, 찬송시, 즉위시, 왕에 관한 시, 예배에 관한 시, 지혜와 율법의 시 등으로 구성됩니다.

(1) 애통시 : 약 58편의 시는 애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42편은 개인적인 애가이며, 나머지는 공동체적인 애가입니다. 이러한 시들은 개인적, 혹은 집단 적인 방황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소망에 과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애가(시편 12,44,58,60,74,80,83,85,90편)는 패전 ,외부의 침입, 재앙, 기근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시에 사용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애가(3-4, 13,22,31,39,57,69, 88,139편)는 병, 불공평, 압제, 개인적인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고통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참회의 시(6,38,51,102,130,143편)가 이러한 부류에 속합니다.

공동체적인 애가와 개인적인 애가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

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한 간구

② 압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불평과 순결, 죄악에 대한 언급

③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고백

④ 하나님의 임하심을 위한 간구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⑤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에 대한 확신

⑥ 구원이 이루어질 때에 온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할 것에 대한 맹세

모든 애가는 오직 하나님만 상황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님의 중재에 대한 찬양을 고대하고 있다.

(2) 감사의 시 : 애가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중재로 말미암아 방황의 경험을 넘어선 후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송과 희생을 드립니다. 감사의 시도 역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찬양이요(묘사적), 두 번째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러한 상황에는 풍성한 추수, 혹은 원수로부터의 구원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시의 일반적인 구조는

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선포(서론)

②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간구의 반복과 하나님의 임하심(본론)

③ 대한 찬양과 미래의 도우심을 위한 간구(결론)

(3) 찬송시 : 묘사적인 찬양시는 공중 예배의 배경을 가지며, 어느 특정한 사건과 관련되지 않습니다. 찬송시는 우주, 세상의 왕국들, 특별히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찬송시의 본질은 ‘창조주와 주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위엄’, ‘겸손하고 약한 자에 대한 은혜’라는 두 가지 주제로 묘사 될 수 있습니다.

찬송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합니다.

①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명령 (서론)

② 하나님의 위엄과 자비에 대한 찬양(본론)

③ 찬송에 대한 명령의 반복(결론)

찬송시는 그 강조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분류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창조자로서(66:1-12, 100:, 111, 149편), 세상의 창조자로서(8편, 19:1-6,104,148편), 역사의 주관자로서(33,113, 145-147편)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4) 즉위시 : 시편은 애가, 감사의 시, 그리고 찬송의 시로 나누는 기본적인 분류외애도 몇 가지 분류가 가능합니다. 각기 다른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시도 그 주제와 예배에서의 사용에 따라서 나누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초창기 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용서로 묘사되는 승리의 노래로써 설명적입니다. ‘용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확신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여호와 말아크’(뜻: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47,93,96,99편)는 즉위시로 분류됩니다.

(5) 왕에 관한 시 : 여호와의 왕권에 대한 고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다윗 왕조에 관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들은 그 내용과 사용된 경우가 다양하지만, 모두 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72,101,110편은 대관식 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20,89,144편에서는 하나님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으며, 18,21편에서 왕은 승리를 허락하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45편은 왕의 혼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시들은 다윗 계통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2:7),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주’(110:1), ‘기름 부음 받은 자’(18,50,20:6)로 묘사함으로써 ‘하늘의 왕’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습니다.

(6) 예배 의식적 시 : 어떤 시들은 대화적인 노래로 볼때 예배 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15:24은 성전에 들어가는 의식이며, 24편은 언약궤와 함께 진행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115편도 역시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볼 때 예배 의식적인 시입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시(120-134편) 중에서 오직 122편만이 예루살렘 순례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134편은 찬양과 제사장의 축도를 요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성전 예배의 절정의 순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노래’(46,48,76,84,87,122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신 예루살렘과 시온산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7) 지혜와 율법의 시 : 어떤 시들은 노래나 기도로서는 분류될 수 없다. 이것들은 문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지혜서의 형식을 띤 교훈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물론 이러한 구별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은 다르지만, 36,37, 49,73,112,127,128,133편은 잠언적인 성격을 띄는 것으로 보입니다. 3편의 율법시(1, 19:7-14, 119편)는 주제에 있어서 이 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 율법에 올바르게 순종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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