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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5-01)


기다림과 기대 사이에서

시편 25:1-22


기다림은 시제를 바꾸는 일이라고 했던 한 평론가의 문장이 시편 25편과 맞닿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들춰보게 되고, 없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가까운 미래가 될 것 같은 기대랄까 기다림이랄까. 당신은 어떤 기다림으로 삶을 물들이고 있습니까?

 

  • 시편 25편은 죄와 아픔, 고독, 그리고 마음의 슬픔과 내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원수의 적대감과 싸우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안과 밖에서 밀려드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의로운 길을 걷고 찬양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합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1-3)

정직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선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공의와 도를 가르쳐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충실히 언약을 지키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돌아온 죄인을 받아주시고 갈 길과 행할 도를 알러 주십니다. 다윗은 애초에 고난과 원수의 위협 앞에서 죄에 빠지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1-3)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봅니다.’(1) 이것은 목을 들어 올려 간절하게 위를 바라보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응답의 주도권이 위에 계신 여호와께 있음을 인식한 태도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하루 품삯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신 24:15),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 올리듯(애 3:41; 시 86:4; 143:8) 시인은 절실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2a). ‘신뢰하다’(바타흐)라는 말은 어렴풋한 것이 아닌 어떤 의심도 없는 확신으로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고지식하고 그릇된 자기 확신이나 자기 과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터득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일하심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시인의 의심 없는 믿음은 당당한 요청의 근거가 됩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bc) 시인은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3d)이기에 상황이 뒤집혀 그들이 어떤 이득이나 성공, 은총도 없기를 간청합니다(3c). 반대로 자신과 하나님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들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3ab).

 

여호와의 가르침과 죄 용서를 구함(4-7)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려움만 주목하지 말고 고난 중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4-7)

 

시인의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지도와 교훈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4-5). ‘여호와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당신의 행로를 내게 가르치소서’(4). 시인은 삶의 여정, 곧 ‘길’(데렉)에서 방향을 설정해주실 여호와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삶을 위한 여호와의 ‘방식’(오라흐)을 구합니다. 시인은 삶의 방침과 그 이유와 근거를 여호와로부터 얻고 싶습니다.

시인은 더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당신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이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니/내가 온종일 당신을 기다립니다’(5).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참된 배움을 얻고 교화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시인은 가르치고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구원’을 온종일 열망하며 기다립니다. 그가 갈망하는 구원은 현재 당면한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구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당신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7a). 그 이유는 영원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7b). ‘긍휼하심’(라하밈)과 ‘인자하심’(헤세드)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긍휼하심은 어머니가 자식을 향해 품는 사랑의 감정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시인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실패하지 않으시는 ‘언약적인 사랑’(출 34:6)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자기 삶에서 그 따듯한 영향력을 발휘해주시길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의지하는 시인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젊은 시절의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7ab). 반면에 ‘당신의 선하심을 위해’ 나를 기억해주시길 간구합니다(7cd). 시인은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 성품에 위배된 것이요 주님이 손해를 볼 것처럼 하나님을 압박하듯 호소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죄의 사면을 청하고, 여호와의 어머니 같은 사랑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죄 용서를 구함(8-11)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인을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반대로 회복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죄인은 그 속성상 금방 깨닫지 못하고, 곧바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일깨우십니다.

 

8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8-11)

 

시인은 여호와가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 방식으로’(‘주의 도로’) 죄인을 교훈하실 것이라(8)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선함’과 ‘올곧음’은 죄인을 교훈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도)을 가르치실 것이라고(9) 선포합니다.

시인은 온유한 자(비천한 자)를 ‘공의’(미슈파트)로 지도하고 가르치는 스승 같은 여호와를 믿습니다. 이 시행은 시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이 돋보입니다. ‘지도하다’, ‘인도하다’라는 동사 다라크()와 ‘도’(길)를 뜻하는 명사 ‘데레크’를 연결시켜 주님의 길과 인도하심이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곧이어 시인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이며, 이는 그분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을 위함이라(10) 선포합니다.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하나님 성품을 압축한 말입니다. 따라서 인자와 진리는 ‘언약’(베리트)과 ‘증거’(에두트), 곧 경고의 법규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면서 간청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죄악이 클지라도 용서하소서’(11). 앞서 시인이 ‘당신의 선하심을 위하여’ 기억해주기를 청했다면(7), 이번에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명목을 내세워 죄 용서를 구합니다.

시인은 언약에 충성을 다할 때에야 여호와의 실패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맛볼 것임을 알지만, 동시에 그 언약적인 사랑 때문에 죄 용서를 적극적으로 청할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시인은 용기 있게 자신의 크고 무거운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구원을 확신(12-15)

과오를 저지르는 존재, 인간, 과오는 인간성의 기본적인 조건이자 불가피한 인간 요소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한계 속에서 과오를 범하게 되고 이는 다양한 생의 비극을 초래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회개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인도하십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어서 잚은 날에 범한 과오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2-15)

 

시인은 질문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 누구인가?’(12a) 시인은 여호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택하신 그 길에서 여호와가 인도하실 것이라(12b) 답합니다. ‘여호와 경외’는 이스라엘 지혜신앙의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잠 1:7).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하나님 신뢰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자는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13) 여호와가 친밀하게 대우해주시고, 그분의 언약을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을 믿습니다(14). 경험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고 반영된 이러한 말들은 기계적으로 수학적으로 주고받는 계약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그분만이 나의 발을 올가미에서 이끌어내시기 때문입니다’(15). 시인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위기에 봉착했지만, 여전히 여호와만을 앙망한다.

 

환난에서 벗어나기를 구함(16-22)

고난 중에 또 고난을 만나면 크게 고생합니다. 사람들은 고난당하기 전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고난에 빠진 이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겹치는 고난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안으로는 근심이 있고, 밖으로는 원수들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16-22)

 

시인의 탄식과 하소연은 여호와만을 앙망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깊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은혜를 구합니다(16). 시인은 적극적으로 호소합니다. ‘내 마음의 근심이 많으니 나의 곤경에서 나를 이끌어 내소서’(17) 애타는 간절함은 여호와를 향해 ‘보십시오!’(18, 19)라는 반복적인 외침에서 강화됩니다. 시인은 언약의 하나님을 향해 곤고와 환난, 그리고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라고 촉구합니다(18a; 19a). 또 시인은 자기 죄가 사함받기를 구하면서(18b), 원수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나를 미워하는지 알아주시기를 청합니다(19b). 시인을 향한 원수들의 미움은 폭력을 동반한 증오와 혐오로 표출됩니다.

 

시인은 절박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구출을 요청합니다(20). 그러고서 시인은 알파벳 마지막 자음 ‘타브’ 절의 첫 글자인 ‘온전함’과 ‘올바름’, 곧 ‘성실과 정직’이 보호해줄 것을 믿고 청합니다. 시인은 ‘내가 당신을 앙망하기 때문’이라는(21) 고백적인 선포를 끝으로 알파벳에 맞춘 시행을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처음처럼 마지막에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며 의지했습니다(1-2). 그리고 마지막 시행(22)은 알파벳 ‘페’로 시작하는 ‘구속하소서’에 초점을 둡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이스라엘을 모든 환난에서 구속(속량)해주시기를 구합니다. 22절은 마지막 알파벳 ‘타브’ 시행 이후에 덧붙였기 때문에 후대의 예배 공동체가 개인적인 환난을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첨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에는 간구와 탄원, 신뢰와 확신, 회개와 중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박합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이든 주를 경외하고 가르침 받기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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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4-01)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시편 24편 1-10절


한 공동체가 같은 마음과 정신을 공유함에 있어 노래한 요소도 없을 것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화답하며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백성들을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들의 정서를 완벽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감격과 기쁨만은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과 경배에 초점을 둔 시입니다. 물의 혼돈을 정복하시고 땅과 세계질서를 수립하신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찬미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묻는 질문과 응답 형식의 노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찬양(1-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한 모든 것은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그분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있는 것들을 호명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은 창조주요, 주권자로, 영광의 왕으로 그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시의 첫 시행부터 장엄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세계와 거기에 거주하는 것들이 여호와께 속했습니다(1). ‘땅’과 ‘세계’가 평행관계 안에서 안전한 거주지로서의 세상, 온갖 생물들이 활기 있게 살아가는 지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시인은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주인이 여호와라고 노래합니다.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람의 조화는 질서 잡힌 세계의 그림입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사람과 땅에 충만한 동식물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서 여호와의 통치권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땅과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구체적으로 소명합니다.

2절은 이유 접속사(키)로 시작합니다. 그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2). 여호와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묘사하여 주권을 강조합니다. ‘바다’와 ‘강’은 구약에서 주로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 ‘바다’는 ‘땅’과 구별되는 모든 물을 지칭합니다(창 1:10). 일반적으로 구약에 묘사된 바다와 강은 고대근동 세계의 우주론적인 또는 신화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초의 세상이 무질서와 혼돈의 상징인 강과 바다로 뒤덮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세력을 누르시고 땅과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신 분입니다(참조, 시 104:5; 욥 38:4-10). 이러한 의미에서 태곳적 홍수는 온갖 동식물과 사람 사는 땅 아래 큰 깊음의 샘들까지 분출한 사건처럼(창 7:11) 혼돈으로의 회귀이며 하나님이 창조 자체를 철회시킨 심판입니다.

 

예배에 합당한 자(3-6)

성도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지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의 복과 의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얻지 못한 이유는 삶이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말입니다. 손이 깨끗한 것과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웃 관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실 것입니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3-6)

 

본문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문지기들에게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성전 문지기들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대답합니다.

 

(1) 질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3)

 

3절에서 주제와 공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적인 창조 사건을 본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한 후(1-2), 질문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

여호와의 산, 그의 거룩한 산은 어디입니까? 시편 맥락에서 ‘오르다’라는 말은 예배하려고 성소를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시 47:5; 참조. 사 2:3; 38:22; 삼상 1:3,22; 삼하 6:12). 따라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언덕으로, 시온 산입니다(시 2:6). 문맥을 고려하면 여호와가 혼돈의 물을 장악하시고 질서를 세우시고 왕권을 수립하신 산입니다. 시인은 우주적 질서를 수립하신 여호와를 찬미하고서 예배의 상황, 곧 언약과 관련된 ‘거룩한 곳’으로 관점을 이동시켰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산은 예언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찾아올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사 2:3; 미 4:2).

 

(2) 응답: 손과 마음이 깨끗한 자(4-5)

 

거룩한 곳 시온 산에서 경배 받으실 여호와께 누가 올 수 있습니까? 시인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자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4). ‘손’은 외적인 신체 기관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행위 문제와 마음에서 발현되는 내면의 순결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깨끗하여 윤리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예배자의 자격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또한 허무하고, 가치 없고, 텅 빈 것에 자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4b). ‘뜻’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욕망과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깨끗한 자는 ‘속임’, ‘거짓’, ‘우상’으로 자기의 뜻을 치환하지 않습니다. ‘허탄한 데’ 마음이 향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4b). 행동으로 옮길 의지도 없으면서 허위로 맹세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윤리 도덕적인 삶과 우상을 따르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게 됩니다(5).

예배자의 손과 마음의 청결은(4) 결국 복과 의로 결실 맺습니다. ‘복’(베라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했던 복입니다. 독특하게 복과 의(체다카)가 시적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복과 의가 평행관계로 묶여 동의적 의미로 쓰인 곳은 오직 이곳뿐입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의롭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예배자로서 하나님 임재 앞에 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의로운 삶, 그리고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3) 확언: 여호와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6)

 

시인은 예배에 합당한 자들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확언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여호와를 찾는 족속(세대)이며, 야곱의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와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평행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찾다’(다라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고, 탐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며(시 69:32; 암 5:6),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입니다(창 25:22; 삼상 9:9). 현재 시행에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평행하는 소절처럼(6b),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구하기 위함입니다(시 77:2). ‘구하다’(바카슈)라는 말도 기대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며 찾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찾고 구하는’ 행위는 언약의 하나님, 곧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시인이 말하는 예배에 합당한 자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입니다.

 

만군의 주이며 영광의 왕 찬양(7-10)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용사이십니다. 세상은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만든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그로 인해 혼돈과 파괴가 들끓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압하시고 통치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승전하시고 성전의 문으로 들어가시자 문들이 소리치며 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7-10)

 

시인은 주제를 바꿔 여호와의 군사적인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역사적 정황이 시행 자체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인지(삼하 6장), 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후 법궤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인지, 예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극적인 표현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우주적 왕권을 고백하며 찬양한 처음 두 절(1-2)에 상응하는 만군의 주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이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시행이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형식미를 갖추었습니다(ABAB). 그 형식은 예술적이고 내용은 장엄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 올려라/영원한 문들아, 들어 올려라/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7,9). 이 시행이 두 번 반복되는 데, ‘문들’은 어떤 문입니까? 보통 성문을 떠올리게 되는데, 흥미롭게 성문이 인격화하여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문들’은 성전의 문지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평행하는 ‘영원한 문들’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뜻하는 ‘올람’은 태고성과 미래성 모두를 포함하는 미지의 시공간적 개념입니다. 옛적 ‘태고의 문들’로 해석될 수도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세의 문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은 현재를 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영광의 왕이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8a,10a)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강하고 전쟁에 능한 전사로서의 여호와의 영광을(8bc; 참조. 출 15:3)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시인은 군대를 통솔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그가 영광의 왕이심을(10bc) 칭송하고 높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만군의 주인이며 통치자로서, 태곳적 창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천상천하의 군대를 거느리는 영광의 왕입니다. 이는 우주론적인 창조 신앙과 언약백성의 역사적 구원 경험을 결합시켜 장엄한 하나님 왕권을 찬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혼돈을 정복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왕이고 주인이십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닫아둔 문을 열어 그분의 통치가 적용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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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3-01)


 어린양을 위한 목자의 헌신

시편 23편 1-6절


부족함과 넉넉함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인정할 때,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넉넉함과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내 삶의 목자이신 주님을 얼마나 잘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 23편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로 주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 시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다윗에게 여호와는 목자뿐만 아니라 위험에서 건져주는 용서와 같습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누이시고, 소생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실 ‘나의 목자’ 여호와를 향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내 목자이신 여호와(1-4)

양들은 제 길만 고집하고 근시안적이고 혼자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겁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밤낮들에서 지내며 한데서 자야 하는 고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물질문명의 기준에 따라서 생각하니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1-4)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왕이 뙤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고, 와이 되어서도 밧세바 사건, 아들 압살롬과의 달등 등, 그의 삶은 사실 부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1) 부족함 없으신 여호와(1-2)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는 나의 목자’(la)라고 고백합니다. 이곳 말고도 구약에서 주님을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시편 28:9; 77:20; 78:52; 100:3; 이사야 40:11; 49:9-10; 에스겔 34:11-16), 이는 히브리 전통에서 아주 오래된 칭호 중 하나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창세기 48:15)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고대근동 세계에서도 신들과 왕들을 묘사하면서 목자 이미지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권위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목자 이미지를 활용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이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부를 때, 자신을 그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고백한 것이며, 동시에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인 자기 정체성을 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시고 목자이며 왕이십니다(참조. 미가 5:5). 목자는 일차적으로 양을 먹이고 보호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목자 이미지는 구원 역사라는 더 큰 맥락에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시편 80:1; 95:7).

다윗의 고백은 자기 조상들에게 행하신 구원 행위에 근거합니다. 다윗의 고백적인 선언은 둘째 소절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덕분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1b)고 노래합니다. 본래 미완료형태인데, 히브리어 구문에서 미완료형은 지속되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다윗의 조상들에게 여호와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기억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들었던 절절한 당부, 곧 모세의 고별 설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명기 2:7).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가나안 땅을 먹을 것에 모자람 없고, 아무 부족함 없는 땅이라고(신명기 8:9) 했습니다.

다윗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현재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형의 문체로 노래합니다. 두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이 매우 음악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그가 나를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그가 나를 인도하신다’(2). 겨울철의 건기가 끝나고 봄비를 머금은 상쾌한 계절의 연둣빛을 연상시킵니다. 새싹이 돋는 봄날의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양들은 편히 누워 쉬는 목가적인 그림입니다. 옛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거룩한 ‘처소’(출애굽기 15:13),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장’(시편 83:12)에서 평화롭게 쉴 수 있음을 노래합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안식이었던 것처럼(신명기 12:9), 여호와의 목장은 다윗의 안식처가 됩니다.

 

(2)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3-4)

 

여호와의 푸른 목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누가 안식하지 못하겠는가?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3). 다윗의 ‘생명’(네페쉬)을 회복시킨 목적이 마치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들립니다. ‘의의 길’은 ‘바른 길’입니다. ‘의’는 바름과 ‘곧음’이며, 마땅히 행할 ‘표준’입니다. 또한 ‘길’(마갈)은 밟아서 다져진 길을 뜻하니 오랜 세월 합의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하나님이시니 그의 양도 마땅히 가야 할 그 길, 즉 ‘곧은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당신의 평판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여호와 그의 이름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오래전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으나, 악행에 대한 보응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4:5-7).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던 것처럼, 그의 백성도 그분의 존재 목적에 걸맞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그분’(3인칭)으로 불렀지만, 이제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호명합니다. 좀 더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당신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4). 다윗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에서도 ‘악’이 두렵지 않습니다. ‘해로움’이나 불운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언제 덮칠지 모를 위험과 외로움에도 함께할 나의 친구이자 나와 함께 걷는 일행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함께 계시면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해줍니다. ‘지팡이’로 번역된 말은,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미가 7:14).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목자는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막대기와 양들을 돌보는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팡이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재판장 또는 지도자들의 법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통치의 막대기’였습니다(창세기 49:10; 민수기 24:17; 시편 45:7; 에스겔 19:11, ‘규’).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다윗에게 위로의 도구입니다. 나의 안위가 된다는 말은 나의 위로와 안락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거나(이사야 66:13) 여호와가 나의 위로라는 다윗들의 언어에서(시편 71:21; 119:8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표현할 때 쓰입니다(이사야 12:13; 40:1).

 

내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5-6)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시름과 두려움으로 죽은 듯 쳐져 있던 양들에게 새 힘을 주는 목자입니다.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내가 의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밟고 간 땅을 좇아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걷는 길이 의의 길입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5-6)

 

여호와의 보호를 묘사하는 배경이 푸른 초장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나의 대적들 앞에서 당신이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고 나의 잔이 넘칩니다’(5). 갑작스럽게 다윗의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의 역사적인 정황이나 실존적인 상황 같아 보이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을 비방하고 미워하며 적대시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건 간에 여호와가 그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이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진설병을 두는 ‘상’(출애굽기 25:23)이나 희생제사를 위한 상을(에스겔 40:39) 언급할 때 사용되었지만, 왕을 위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열왕기상 4:27)에도 쓰였습니다. 이러한 문맥들을 고려하면, 이것은 필요한 식사와 잔치를 여호와가 직접 준비해주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생기를 회복시키는 은유입니다(잠언 15:30). 또한 고대사회에서 잔칫집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며 올리브기름을 머리와 얼굴에 바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는 의식으로서 전통적으로 잔치에서는 기름이 빠지지 않았습니다(아모스 6:6; 시편 45:7; 92:10; 104:15).

이러한 의식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보호에 대한 찬미입니다. ‘나의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으로 풍요롭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마지막 시행의 고백은 감격과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확신합니다. 첫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뒤따를 것인데, 살아있는 내 온 생애 동안(6ab) 이라고 합니다. ‘선하심’은 ‘좋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의 삶을 기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된 말입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의무와 사랑을 표현한 핵심적인 말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오래오래 살 것을 다짐합니다(6). 이는 잔치를 베푸신 여호와, 그분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림입니다. 23편은 마치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숲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보로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실한 자를 선대하시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에게만 의와 생명, 쉼과 평안이 있습니다.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거짓 목자의 음성에 현혹되지 말고 참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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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2)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2)

시편 22편 22-31절


복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만, 우리는 점점 복음이 위축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복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생명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 복음을 깊이 이해하며 능력을 맛보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 22편 후반부는 탄식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홀로 맞이하는 외로운 죽음과 어둠은 사라지고, 다윗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회중과 함께 찬양하며 구원을 선포합니다. 땅의 모든 끝과 열방의 모든 족속이 온 세상 주인이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하는 주님의 우주적 왕권의 성취를 예고합니다.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22-26)

하나님께서는 내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참 좋은 분입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기대를 품고 내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분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는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서원한 대로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십자가 고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반부와는 달리, 고난을 넘어선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맛본 사람들은 먼저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1) 회중 앞에서의 감사와 찬양(22-24)

 

더 이상 다윗의 절망과 좌절의 탄식 소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기에 여호와께 당신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속에서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22). 다윗은 혈연적인 관계를 넘어 함께 예배하는 언약 공동체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언약 백성인 회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라’(23). 독특한 점은 회중을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23a)라고 호명하면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라’(23c)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약 백성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로서 정체성이 전제되었음에도 주님을 두려워하라는 조언은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좀 더 강조한 셈입니다.

이어서 다윗이 회중에게 주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분은 곤고한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경멸하는 분이 아니며, 그의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4). 다윗은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고 외쳤지만(1-2), 완전히 뒤바뀐 상황을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2) 서원과 다짐(25-26)

 

이제 다윗은 ‘큰 회중’ 가운데서(25a) 여호와께 다짐합니다. ‘나의 찬송의 주제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겠습니다’(25). ‘큰 회중’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축제의 날임을 알 수 있지만, 다윗이 무엇을 서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에서 풀려나면 성전에 예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레위기 7:15-21). 서원과 갚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다만 서원 갚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총을 경험한 것을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알리고, 공동체는 서원 지킨 자의 구원에 동참합니다.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들’)이 배불리 먹으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고, 언약공동체인 회중의 생명이 항상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26). 두 시행의 이미지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 일부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 자리를 연상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또한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고 했는데, ‘마음’을 뜻하는 ‘레바브’는 ‘심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원히’라는 말은 늘, 항상, 언제나 지속되는 현재성을 표현한 것이지 내세적 가치를 표현한 말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배불리 먹고 찬양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주린 자는 배불리 먹게 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부를 미리 맛보는 듯합니다(참조, 누가복음 6:20-21).

 

모든 열방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27-31)

주님의 공의로우심은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상차 태어날 자에게까지,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찬양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듣고도 멀리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와 맺은 언약대로 언제까지든지 신실하실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의 공의가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27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7-31)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해야할 사람들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과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의 주재이시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이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1) 땅 끝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예배(27-29)

 

개인적인 감사는 회중 속에서 찬양으로 커지고, 예배자인 다윗의 서원 갚음은 공동체의 축제에서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로 확장되어 생명의 활기로 충만해졌습니다(24-26). 다윗은 이제 자신의 구원 경험을 더 폭넓게 확장시켜 땅 끝은 민족이 주 앞에서 예배하기를 열망합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은 공동체로 확장되고 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전환됩니다. 이를 표현한 시인의 언어는 장엄합니다. 당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모든 나라의 민족이 돌아와 경배할 것입니다(27). 모든 민족이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1차적으로 모든 열방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오는 것이지만, 결국 온 세계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민족들이 귀환하는 우주적인 사건과 우주적인 왕권의 묘사입니다. 창조를 받은 자들이 창조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마땅한 귀결로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합니다. ‘그 왕권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모든 나라들 가운데 계신 통치자시라’(28). 창조자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며 왕이요, 그분이 여호와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 왕권을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임을 선포합니다(29). 이는 매우 독특합니다. 생명 없는 죽은 자들, 곧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자기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가 어떻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는 구약 다른 본문의 입장과 다릅니다(참조. 시편 30:9;이사야 38:18).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포함되기에 찬송과 경배가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의 것만이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해석자들 중에는 온 열방이 경배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예루살렘(또는 시온)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다윗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장벽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통치권이 죽음의 영역까지 미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살아 있는 사람은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영역까지 포함시켜 여호와의 우주적 왕권을 노래합니다.

 

(2) 구원받은 후손들이 여호와 공의를 전파(30-31)

 

이 땅에서 고난당한 자들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고 구원받았으며, 온 열방의 증거가 되었습니다(24-29).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출생하지 않은 세대에까지 미칠 것입니다(30-31). 죽음은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맞이할 순간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가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음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은 후손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고, 세대를 거듭하며 나의 주가 회자되면서 전해질 것이라고(30) 예고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호명하여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해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친밀한 경험은 다윗만의 특별한 개별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세대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재현될 것입니다.

 

후손들은 와서 그분의 ‘공의’를 장차 출생할 백성에게 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행하신 것 때문입니다(31). 다윗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주님의 공의, 곧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로 규명되는 ‘구원’이 미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의 ‘공의’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구원’(salvation), ‘해방’ (deliverance)의 모든 과정과 관계된 하나님의 핵심적인 품성이며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22편은 고난 받은 한 개인만의 구원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메시아적인 관점으로 해석됩니다.

22편의 전반부(1-21절)에서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난이 메시아 예수의 사역과 연결되어 해석된 것처럼, 후반부(22-31절) 역시 세대를 거듭하여 메시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를 노래합니다(참조. 시편 78:6; 로마서 3:22).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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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1)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

시편 22편 1-2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선조들의 역사와 구원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계획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명료히 보여 주셨습니다. 신구약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를 찬찬히 생각하며 감사 찬양을 드립시다.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관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의인의 탄식(1-2)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하늘을 보면서 탄식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힘들고 홀로 남겨진 것도 더 견딜 수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멀리하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다윗의 첫마디는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1a) ‘내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르는 ‘엘리 엘리’라는 말은 구약에서 유일한 표현입니다(참조,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그는 하나님께서 아니라 ‘내 하나님’을 부릅니다. 깊은 유대감과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항의처럼 들리는 질문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는 친밀한 유대감 없이 불가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신명기 31:6, 8)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두었습니까? 적극적으로 어찌 나를 멀리하고 돕지 않으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지(1bc)따져 묻습니다. ‘신음 소리’는 괴로움과 번민으로 소리치고 신음하는 말들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응답을 촉구하는 반어적인 외침입니다.

다윗은 다시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신이 밤낮으로 부르짖고 잠잠히 있지 않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2) 묻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입니다. 밤낮없이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다윗은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묻고 또 물으며 절실함을 피력합니다.

 

조상들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신뢰(3-5)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렵기 시작합니다. 진퇴양난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상황에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뜻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선조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께 이제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찬양합니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3-5)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시며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좌정하신 분입니다’(3)라고 말합니다. ‘내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지만,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고백합니다. 마치 그룹 위에 앉으신 하나님(사무엘하 6:2; 시편 80:1; 99:1)을 떠올려 이스라엘의 찬송(또는 영광) 중에 앉으신 하나님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을 보좌삼아 앉으신 것을 상상하면서 하나님을 언약백성의 찬양의 대상과 본질로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신뢰해서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습니다’(4), 다윗은 ‘우리 조상들’과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다’는 말로 출애굽과 광야의 삶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은혜를 언급하며, 묵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때처럼 응답하시기를 촉구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당신을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5) 각성시켜 자신이 더 이상 유기되거나 수치 당하는 일이 없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다윗의 절실한 내적 투쟁은 ‘신뢰했다’(의뢰했다)라는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한 데서 드러납니다. 다윗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과거 사건으로 묻어두지 않고 다시 현재의 경험으로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공개적인 멸시(6-8)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롱합니다. 환경도 힘든데, 사람들까지 더 힘들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뢰로 가난을 이겨낸다면, 주님 따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3)이 ‘그러나 나는’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받은 자기 선조들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다윗은 ‘그러나 나는 벌레이고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비방거리이며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6)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한 처지인지 묘사합니다. 신체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 못지않게 타인의 비방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비웃고 입술을 비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합니다(7). 그 말은 더없이 다윗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8).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을 빈정대는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보상 체계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옵니다. 사람들이 다윗의 고통을 보응의 체계로 보면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숨통을 조여 오는 고통입니다. 반대로 죄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면 하나님께서 위협받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조롱입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신뢰(9-11)

참 신앙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지식적인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9-11)

 

다윗은 또 ‘그러나’로 말문을 엽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모태에서 끌어내셨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조차’(9). 다윗은 숨막혀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성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출생의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는 유아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음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지금 너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다윗은 몹시 걱정스럽고 속이 끓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으니(10) 멀리하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환난 날이 가까이 왔지만 도울 자가 없기 때문에(11) 더 간절합니다.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원수들의 위협(12-18)

들판에서 피폐해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주변인들을 보면,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사방에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답이 없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곡진한 신뢰의 고백이 때로 영광이 아니라 쓰디쓴 조롱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우리가 이 음란한 세대에서 당신을 인정하기를 기대하십니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2-18)

 

절망의 상황은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들 때문에 더 험악해집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는 고통을 축소해 말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이 입을 벌리고 사자처럼 달려든다고 말합니다(12-13). 공격적이고 잔인하고 위협적인 짐승들은 많고 강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는 물처럼 쏟아지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지고, 내 마음은 밀랍(초)처럼 녹았고,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14-15ab)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슬픔과 고통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이 시인을 짓누릅니다. 다윗은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견디기 힘겨워하며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죽음의 흙먼지 속에 두셨나이다’(15c). 그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궁지에 처한 사람이 되어 공포와 고통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죽은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개들이 에워싸고 악한 무리는 수족을 찌르고(16), 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주목해서 쳐다보고,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겉옷과 속옷을 나누고 제비 뽑습니다(17-18). 겉옷도 모자라 속옷까지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상황에 던져졌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데 옷 벗김을 당하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며 호소(19-21)

어려움이 닥치면 탈질하고 마음이 녹아 사라지듯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며 뼈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만큼 앙상하게 튀어나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여 내게서 말리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댈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19-21)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인이 멀리서 돕지 않으셨던(1)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여호와 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의 도움이 되소서’(19). 처음에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고(1) 불렀지만, 지금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고, ‘나의 도움’(‘나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시기를 요청했지만(11), 여전히 응답 없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듯 ‘나의 도움’이 되시기를 청합니다.

다윗은 더 필사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자기 ‘생명’과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칼과 개의 세력으로부터 낚아채 주시고(20), 사자의 입에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말입니다. 이후 ‘들소의 뿔로부터 당신이 내게 응답하셨습니다’(21b)라는 완료형태 문장으로 급전환합니다. 이와 같은 구문법적인 변화는 들소의 뿔처럼 위협적인 세력에 받히려는 순간 하나님의 신속한 개입과 응답이 실현되는 극적인 장면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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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1-01)

  


왕의 승리를 기뻐하며

시편 21편 1-13절


시편20편이 왕의 출전을 앞두고 그를 축복하여 승리를 기원하였다면, 21편은 승리한 후, 돌아오는 왕과 병사들을 맞아 기쁨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왕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과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왕의 기쁨과 근거(1)

하나님께서는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 않고 싸운 왕과 병사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왕과 백성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승리를 하늘의 승리로 완성하신 아들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탁월한 영광으로 승리를 이루신 주님을 기뻐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1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1)

 

첫 시행의 핵심은 왕이 승리한 사실보다 그 구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부르며 고백한 시인의 말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당신의 힘으로 기뻐합니다.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그가 즐거워함이 얼마나 큰지요!’(1). 다윗은 왕의 승리가 언약 관계로 묶인 여호와의 힘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시편 20편에서 백성들은 여호와가 왕을 ‘구원하실’ 것을 고대했습니다(20:5). 그 기대가 현실화한 것을 감격하는 감사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왕이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의 ‘힘’과 ‘구원’ 때문입니다. 두 단어는 주로 전쟁과 군사적인 맥락에서 발견되며(시편 28:8; 118:14; 140:7; 이사야 12:2; 26:1),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주님의 힘이 곧 구원(승리) 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20편에서 누군가는 군사력을 의지하나 언약 백성의 공동체인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20:7) 고백의 흐름을 잇습니다.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2-7)

시시각각 우리를 노리는 사방에 노립니다. 그런 악한 영들을 분별할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야 합니다. 사방에 도사린 영적인 어두움을 잘 분별하고픈 우리의 갈망과 기도 역시 주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대로 잘 분별된 영성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셀라) 3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4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5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6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7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2-7)

 

승리하고 돌아온 왕을 보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 기쁨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나열하는데,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에 감사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마음의 소원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2-3)

 

다윗은 왕의 기쁨과 큰 즐거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밝힙니다. 여호와 이름을 이미 부른 상태에서(1) 시인은 고백합니다. ‘당신이 그의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그의 입술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2). 여호와는 왕의 ‘마음의 소원’, 곧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는 간절한 열망을 주셨고, 왕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의 ‘마음의 소원’을 주신 주체가 여호와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왕의 마음에 타오르는 열망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뜻과 왕의 소원이 일치합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인간 왕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참조. 예레미야 32:38-39; 에스겔 11:19-20) 매우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왕은 한마디로 여호와가 지목하신 왕이었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3:14). 여호와가 왕을 위해 주신 마음의 소원은 왕의 입술의 요청으로 발설되니 거절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왕을 ‘아름다운 복’으로 기꺼이 맞이해주시고, 순금으로 만든 왕관을 씌우셨다고(3) 여호와를 찬미합니다. ‘복’(베라카)은 옛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세기 12:2; 28:4; 49:25). 이는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더군다나 순금의 왕관을 왕이 스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씌워주신 것에 시인은 감격합니다. 여호와가 왕의 적법한 통치권을 수여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2) 지속적인 복과 여호와의 인애(4-7)

 

왕이 생명을 구하면 여호와가 생명을 주셨고, 왕이 오래오래 영원한 날들을 살게 하셨습니다(4).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시는 분이지만, 놀랍게도 왕에게 ‘영원한 날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왕이 사람인데 ‘영원한 장수’(개역개정)가 가능합니까? 고대근동 세계에서왕의 장수를 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기도제목이며(열왕기상 3:11,14; 시편 61:6; 72:17) 문학적인 과장법입니다.

다윗은 생명과 장수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을 통해 왕의 영광을 크게 하셨고, 여호와가 왕에게 존귀와 위엄을 입히셨다(5)고 찬미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위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 왕은 하나님의 영광, 위엄, 존귀를 반영하는 자가 됩니다.

다윗은 참으로 여호와가 왕에게 ‘항상’ 지속되는 ‘복들’을 부으시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기쁨으로 즐겁게 하심을(6) 노래합니다. 이는 생명과 다양한 종류의 필요한 복들이 반복되는 현재를 항상 누릴 수 있게 하신 주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다윗은 ‘그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니(보테아흐), 가장 높으신 이의 인자함 때문에 왕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7) 고백합니다. 언급된 ‘왕’은 다윗입니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함’, 곧 실패하지 않는 ‘언약적인 사랑’이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삶의 안전은 보장됩니다. 무엇보다 언약 관계를 특징짓는 두 단어, ‘인자함’과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는 관계는 시 전체를 압축하고 요약하는 말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왕과 하나님의 관계를 특징짓는 말이며, 언약 관계가 지속되려면 ‘신뢰’가 유지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7절은 공동체가 예배 시간에 가장 엄숙하게 낭독하는 언약 신앙의 고백인 셈입니다.

 

왕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복(8-12)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 이루실 완전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왕은 남은 대적들을 섬멸하고 보좌를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 하늘에 오른 왕이 만국을 미혹한 자를 불과 유황 못에 던질 것입니다. 왕의 승리를 본 교회는 승리를 믿고 기도하며 마지막 싸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8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 9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10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11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12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8-12)

 

이 단락에서 문장 형식이 달라집니다. 6절까지 여호와를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언급했고, 7절은 다시 ‘여호와’(1)를 직접 거명했습니다. 다시 인칭대명사 ‘당신’을 언급하는데 ‘당신’이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인지, 왕인지 모호합니다. 그러나 ‘언약적 사랑’의 혜택을 누린 왕을 연속적으로 말하므로 8절의 ‘당신’은 왕입니다. 개역개정 본문도 ‘당신’을 ‘왕’으로 표기했습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문맥상 마치 왕을 위한 신탁 말씀이 전달되는 분위기입니다. 왕의 손은 모든 원수를 찾아내고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낼 것입니다(8). 왕이 노할 때, 원수들은 풀무불처럼 타오르고, 여호와의 분노는 그들을 삼켜 소멸할 것입니다(9). 여호와의 진노 자체가 불이 되어 삼켜버렸고, 왕의 분노는 곧 여호와의 분노와 동일시됩니다. 이는 또한 여호와의 뜻과 왕의 마음이 일치된 것을 표현한 2절과 비슷합니다. 원수의 완전한 소멸은 왕의 원수들의 후손까지 확장됩니다. 왕은 자기 원수의 후손을 땅에서 멸하고 완전히 씨를 말리게 될 것입니다(10). 후손들까지 멸하는 것은 고대 전쟁의 특징이고, 고대근동 세계의 종주권 조약에서도 불충성한 속국 왕의 후손들을 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시편 37:28; 호세아 9:11-14). 또한 왕을 해하려고 누군가 음모를 꾸미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11). 왕이 원수들의 등을 돌리게 하여 그들 얼굴에 활시위를 당길 것입니다(12). 겁에 질려 등을 보이며 도망치던 원수들이 얼굴을 돌리게 만들어 치명타를 입히는 장면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목한 왕에게 패한 원수들과 대적들은 세상에서 끊어질 정도의 철저한 패배가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처럼 다윗과 하나님의 언약은 왕의 모든 통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적들과의 전쟁에서 생존할 것이며, 그 생존의 필연적 이유는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을 신뢰하는 것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찬양과 근거(13)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날에 심판의 화살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위엄으로 옷 입히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왕은 전쟁에서 살아남기만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자손손까지 그 생명(왕위)을 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3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다윗의 감사 기도의 마무리는 찬양과 다짐입니다. 왕을 위한 이 기도문의 작성자가 예언자인지 제사장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든 21편의 기도문을 작성한 다윗은 최후 승리의 약속 또는 신탁의 말씀을(8-12) 받았기에 주님의 능력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합니다’(13). 여호와의 능력을 찬미하는 시인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여호와 ‘당신의 힘으로’(베아즈카) 왕이 기뻐한다고 감사를 드린 것처럼, 기도의 마지막에서도 ’당신의 능력으로‘(베우제카) 높여지기를 찬미합니다.

시인은 승리에 도취되어 여호와의 능력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이 높여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언약공동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힘’, 그의 ‘권능’(개역개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개입하셔서 그의 혁혁한 능력과 승리가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반응입니다.


 

인생은 날마다 전쟁 같은 날입니다. 생존을 위해 출정하듯 출근합니다. 슈퍼 갑의 세상과 분투하며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왕이 되셨고, 마침내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노래하며 세상의 맞서 그리스도의 남은 싸움을 싸워 승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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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0-01)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기도

시편 20편 1-9절


성도들이 힘들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탁하기만 하고 정작 자신을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기도를 부탁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 시편 20편은 환난의 날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이를 위해 핵심적인 용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과 ‘여호와’를 강조하며 다윗은 누군가를 위해 기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세계의 잦은 전쟁 경험을 고려하면, 이 시는 국가의 가장 큰 환난인 전쟁을 앞두고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승리와 구원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일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1-5)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의 왕이 불러 도움을 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건져내시며 또 높은 곳에 두어 보호하십니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염원을 품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될 때, 용기 있게 세상에 나설 수 있습니다. 전쟁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을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고 축복합니다.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1-5)

 

전쟁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승리한다 하여도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전쟁은 사람이 하지만,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할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의 하나님의 응답(1)

 

이 시는 여호와가 환난 날에 응답하시기를 축복하는 것으로(1) 시작하고, 공동체가 부를 때 응답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9) 끝납니다. 여호와의 응답을 촉구하는 주체는 ‘우리’입니다(5). 1절은 ‘우리’로 언급되는 공동체가 ‘너’(2인칭 남성 단수)로 호칭되는 누군가를 위한 기원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1a)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시 전체 분위기와 ‘기름 부음 받은 자’(6), 왕(9), 그리고 군사적인 용어들에서 ‘너’는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왕입니다. 이때 왕은 국가의 가장 큰 위기인 전쟁의 위협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언급된 백성들이 왕을 위해 축복합니다. 왕을 축복하는 백성들은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1), ‘우리 하나님의 이름’(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7)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야곱의 하나님’은 조상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을 연상시키기에 특별한 보호를 구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창세기 35:3;참조. 시편 46:7,11; 76:6; 84:8). 또한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름’이 내포하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신 친밀한 이름 여호와가 곧 우리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바탕에 둡니다. 그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도우시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기원이 담긴 소원입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은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습니다. 이는 용사이신 여호와가 백성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신 것에 근거합니다(출애굽기 15:3).

 

(2) 시온에서 도우심(2-5)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우시고 시온에서 붙드시기를 빌어줍니다(2).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군대 앞에서 전쟁을 이끄시는 분임을(사무엘상 4:3-9; 사무엘하 15:24-29; 시편 44:9) 확신하는 믿음에 기초한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있는 시온에서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 의식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백성들은 출전을 앞둔 왕 앞에서 왕을 위해 노래합니다. ‘당신의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당신의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한다’(3), 고대의 왕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종교적인 예식을 통해 하나님께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왕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왕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어 돕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제사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왕에게 ‘당신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고, 당신의 모든 계획이 성공하기를 빌어준다’(4). 이것은 백성들이 왕의 내적인 열망, 특히 전쟁 승리를 위해 도모하는 갖가지 계획이 성공하기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또한 왕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표명한 선언입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시행은 이것을 구체화합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왕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의 승리는 곧 백성을 위한 구원이기에 외칩니다. ‘당신의 승리로 인해 우리가 기쁨의 환호성을 외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높이 들리니 여호와가 당신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5). 위험한 전쟁 상황에서의 승리는 곧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다윗은 왕이 참여한 전쟁의 혁혁한 승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왕이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은 왕과 함께 기뻐하고 소리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 선언(6)

하나님의 공동체는 지지와 성원, 격려와 응원 속에 자랍니다. 진심으로 형제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주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들이 항상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염려하고 백성들은 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적인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6)

 

말의 주체는 ‘우리’에서 ‘나’로 바뀝니다. 6절 시행은 ‘이제 나는 압니다’로 시작한다. ‘이제’는 새로운 상황을 강조합니다. 말하는 자가 무엇을 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말을 들은 제사장이 백성의 바람대로 하나님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시고 구원으로 응답하실 것을 확언하는 듯합니다. 그 근거는 여호와가 제사장을 통해 왕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신탁 내용입니다.

제사장이 받은 신탁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을 구원하신다는 것이고(6), 둘째, 그분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왕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6bc). 구원과 응답은 ‘그분의 거룩한 하늘로부터’옵니다. 백성들이 왕에게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왕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축복한 것처럼(2), 제사장은 ‘거룩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신탁을 통해 알게 되어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름 부음 받은 왕은 땅의 ‘거룩한 곳’(성소)에서 예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하늘에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왕과 백성과 제사장이 함께 제의(예배)를 마치는 순간 이미 승리가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선언에 근거하여 왕은 출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승리를 위한 백성들의 기도(7-9)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보니,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유한한 것이지만 더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으로부터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군사적인 힘이든지, 자본의 능력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절대로 하나님보다 앞서는 안 됩니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7-9)

 

전쟁에서 백성들이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신뢰하며 응원하고 있지만, 왕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자랑임을 고백합니다. 백성들은 마지막으로 왕의 구원과 승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7)

 

백성들은 제사장의 선포를 듣고 환호하며 열광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의 주체가 ‘나’에서 다시 ‘우리’로 전환되어 백성들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합니다’(7). 말과 병거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누군지 밝히지 않지만,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자랑하는 자로서 그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고대의 왕들은 많은 말들을 비축하여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후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신명기 17:16).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호명하는 백성들이 그 이름을 자랑합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여호와 이름을 세상에 알려 기억하고 찬양하고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2) 여호와여 구원하소서(8-9)

 

백성들이 확신하며 고백하는 말은 계속됩니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이들은 비틀거리고 엎드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 똑바로 섭니다’(8). 이스라엘의 전쟁 상대인 대적들은 자기들의 군사력만 믿고 교만했겠지만, 백성들은 그들이 전복되고 함락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선다’(8b)는 말은 일어나 서로를 도와 일으켜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 본문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강조형 구문입니다. 환난으로 대표되는 전쟁에서 혼자만 살기 위한 비겁하고 이기적인 싸움이 아니라 전투력이 소진되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도우며 일으켜주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자들과 대비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은 전쟁에 나서는 왕을 위해 힘찬 목소리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처음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응답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1). 이제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으로 여호와께 ‘왕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이며, 왕의 구원은 백성의 구원입니다. 마지막 시행은 한 나라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승리와 구원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선포하는 언약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담긴 간구입니다.


 당신이 섬기고 있는 공동체는 서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을 책임져주는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싸움에서 전사할지라도 남은 이들을 돌봐줄 수 있습니까? 형제가 오룻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상호책임의 연대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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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9-01)


 신기한 하나님의 솜씨

시편 19편 1-14절


우리는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자신을 제시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지극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를 묵상하며 오늘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올려 드리겠습니까?

 

19편은 그 어떤 시편보다 히브리 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장엄하믈 묘사한 노래이며, 청조 세계를 통한 계시와 ‘토라’(율법)를 통한 계시가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총임을 노래합니다. 온 우주와 태양의 질서는 토라와 양심의 세계로 깊게 침투하여 구속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게 하며,정직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계시와 영광(1-6)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귀가 열린 이는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살면 영혼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때 밖으로 나가 창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6)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연이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은혜 되는 것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 하늘의 계시(1-2)

 

하나님의 계시는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시의 첫 단락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1).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하는 1절은 하늘과 창공이 이어져 자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강조는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낸다’는 분사 구문의 동사 활용에서 제시됩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2). 날은 또 다른 날에게 이어지고, 밤은 또 다른 밤으로 이어져 낮과 밤의 질서가 교란되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우주 질서를 대표하는 날과 밤이 지식의 계시자로 인간 세계에 공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만 언어로 소통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날과 밤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여 쉼 없이 서로에게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2) 말 없는 계시(3-4)

 

다윗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우주의 속삭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3), 온 땅에서 서로 어울려 그 무늬가 퍼져 나옵니다. 그 말이 세상 끝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셨습니다(4). 다윗의 묘사처럼, 우주 질서는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의 수단이며 우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입니다.

 

(3) 해를 통한 계시(5-6)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장막’(오헬)은 거주와 쉼을 위한 공간입니다. 해가 장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영상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5a)는 소절로 연결됩니다. 해가 마치 밀월의 기쁨을 나누는 신랑처럼 그려졌습니다. 또한 달리기를 기뻐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5b) 하늘 길을 달리는 태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 신화처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매일 영광스럽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힘을 노래합니다. 하늘에서 시작하여(1) 하늘 저 끝에 이르는 태양의 힘찬 운동을 통해(6)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가 우주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임을 깨닫습니다.

 

여호와의 가르침(토라)을 통한 계시(7-11)

해는 해맑은 모습으로 떠올라 힘센 용사처럼 하늘을 달립니다. 만물이 해의 온기에서 생기를 얻듯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서 인간은 생명을 얻습니다. 과학만능과 물질 최고의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 신비를 경험하는 감수성을 가다어야 합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7-11)

 

다윗은 시선을 바꾸어 여호와의 율법(토라),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찬미하며 묵상합니다. 다윗은 토라에 대한 아름다움을 완전하고, 확실한 것으로 규명합니다. 완전함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 증거의 확실함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만듭니다(7). 온 우주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토라’는 여호와의 증거입니다. 곧 ‘경고 표시’로서 어수룩한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8a). 교훈도 ‘토라’처럼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훈령으로서 사람의 의지와 정신을 즐겁게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여호와의 ‘계명’(미츠바)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8b).

불순물 없는 밝고 깨끗한 ‘명령’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빛나게 합니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관점과 인식의 체계를 얻은 상태를 말합니까? 이뿐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릅니다(9ab). 여호와의 ‘율법’이 증거, 교훈, 계명으로 분화되어 표현되었지만, 다윗은 ‘토라’를 ‘여호와 경외’와 동의어처럼 제사하여 영원히 가치와 삶의 원리로서 찬미합니다. 그 근거는 정결함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법’(미슈파트)은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9bc). 결국 여호와 가르침(토라)의 절정은 진실한 법으로서 의로움(체덱)을 그 속성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를 비유와 암시로 풍부하게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천체 운동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의 ‘가르침’, 곧 그의 법의 인간 삶에서의 기능을 밝혀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백성에게 베풀어지는 구속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여호와의 ‘토라’에 포함된 속성들이(7-9) 금보다, 순금보다 더 만족스러우며(10ab), 꿀보다 달콤하고 흘러넘치는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고(10cd) 고백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이 언약의 주님으로서 주신 포괄적인 ‘가르침’(토라)은 복된 삶, 곧 복음적인 삶의 바탕이 됩니다. 다윗은 ‘당신의 종이 이 가르침으로 경고를 받고 지켜서 받는 상이 크다’(11)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말은 여호와의 법을 중심에 둔 삶의 기쁨과 그 결과를 확신하는 믿음의 증언입니다.

 

토라에 대한 반응-고백과 헌신(12-14)

말씀은 태양처럼 백성을 살게하는 근원입니다. 시든 영혼을 소성케 하고,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참 되고 순수하여 우리의 눈을 밝혀 의의 길을 가게 합니다. 말씀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지친 영혼을 위해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2-14)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 영광 찬미는 다윗의 내적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낮과 밤의 교차와 태양의 운동을 보며 환희에 찬 하나님 영광을 맛보고, 그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가르침(토라)을 찬미했습니다. 그 영광의 빛에 자신을 비춰 봅니다. ‘허물들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나의 숨겨진 허물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12). ‘잘못’이나 ‘허물’은 ‘정도를 벗어나 곁길로 간다’는 말에서 파생되어 ‘오류’와 ‘무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수사학적인 질문의 숨은 의도는 죄에 대한 고발입니다. 누구도 숨겨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과 무지의 죄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당신의 종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소서’(13a)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기도는 구체화되어 ‘그 죄’, 곧 거만한 의지에서 발동한 ‘고의적인 죄들’이 나를 주장하지 말게 해달라는(13b) 간구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윗은 ‘내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큰 죄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13cd)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당신의 종’(주의 종)으로 낮추면서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결백하기를 구합니다.

마지막 시행에서 다윗은 엄숙하게 구속자 여호와를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합니다. 14절의 개역개정 배열은 본래 히브리 본문 시행과 다릅니다. 의미상의 차이는 없지만 묵직한 여운을 느끼려면 히브리 시행 순서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하늘과 태양, 곧 우주가 하나님 영광을 선포한 것(1)에 이어, 언약의 주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가르침의 아름다움을(7-9) 노래합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합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14ab).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2), 다윗은 자신의 말이 헛되지 않고 여호와가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 되길 빕니다. 더군다나 ‘묵상’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포함된 것입니다. 다윗은 앞서 자신의 내밀한 것들까지 하나님 앞에 수렴되기를 바라며, 거짓이 없고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13) 간구합니다.

마지막 그의 간결하고 확실한 고백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입니다’(14c). 그가 선포한 창조자 하나님은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의 피할 반석과 구속자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연대감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구속자’(고엘)는 구약에서 법적인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의 빚을 갚아주고 자유를 얻게 해주는 사람이 ‘고엘’, 곧 구속자입니다. 다윗은 옛 조상들을 애굽의 노역으로부터 빼내어 속량하신 (구속하신, 출애굽기 6:6)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의 폭압적인 통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로 고백하듯, ‘구속자’는 폭력적이고 노예적인 모든 종류의 삶에서 구출해주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참조, 이사야 54:8).


 다윗은 말씀에 비추었음에도 미쳐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만큼 완고한 종이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사람만이 죄의 무서움을 알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민감한 분별력을 구하며 말씀이 낳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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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3)

 


내가 승리 중에

시편 18편 30-50절 


우리는 환난의 시간보다 승리의 시간을 보낼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기 쉽고, 그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내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지입니다. 당신은 환난 중에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고 있습니까?

 

  • 시인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곧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셔서 구원하시고,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신 것을 찬송합니다. 이 일로 열방이 자기에게 굴욕감을 느끼지만 복종하게 되는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야)의 온 세상 통치라는 제왕시의 중심 사상이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다윗은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빅 불가능한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도와 안전한 구원(30-36)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순수하여 변치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되기에 다윗은 약속에 의지하여 신뢰하고 순종합니다. 말씀을 믿는 자만 세상을 이깁니다. 이제껏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신뢰와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0-36)

 

다윗은 환난 중에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움을 지나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1) 길과 방패 되신 하나님(30) 

다윗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며 그는 방패여서 피하는 모든 자가 안전합니다(30). 다윗은 독특하게 ‘하나님’ (하엘)앞에 정관사를 덧붙여 ‘신들 중에’ 신으로서 가장 탁월하신 하나님,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참조. 신명기 33:26). 비교 불가한 ‘하나님의 도’의 완전성과 ‘여호와의 말씀’의 순수성이 평행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뛰어난 신이 제시하는 ‘길’, 곧 ‘도’는 여호와의 정제된 말씀 안에서 구현됨을 선언합니다. 더군다나 군사적인 위협에서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라는 은유로 묘사하여 보호막이 되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30bc). 

(2) 나의 반석, 나의 길 되신 하나님(31-36)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시인의 고백적인 증언은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재차 강조됩니다. ‘참으로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인가,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반석인가?’(31) 이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참조, 출애굽기 15:11; 신명기 33:26, 29; 사무엘상 2:2; 이사야 46:9). 또한 다윗은 유일하시고 반석이신(31) ‘그 하나님’이 힘으로 자신을 꽉 묶으시고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32). 다윗은 하나님의 ‘도(길)’가 완전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병행시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밀착된 존재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시인을 자유롭게 대지와 언덕을 달리는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하시고 높은 곳에 서게 하셨습니다(33).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훈련시켜 화살을 당기게 하셨고(34), 승리의 방패를 주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그의 낮추심(온유함)이 자기를 크게 했다(35)고 증언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자신의 몸을 굽히시고 낮추셔서 돌보시는 영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발걸음을 넓게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으니(36) 이는 드넓은 영토를 거침없이 행보하도록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37-4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친히 전쟁을 주도하시고 원수들을 처서 굴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나갔을 때, 다윗이 본 것은 도주하는 적들의 등뿐이었고, 그가 한 일은 적을 추격하여 바람 앞에 티끌 같이, 거리의 진흙 ㄱ같이 부수고 발아래 짓밟는 것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대적의 부르짖음에 결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9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40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2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37-42)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 앞에서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 …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쫓는 자가 되어 도망치는 원수들을 추격하고, 그들의 멸망을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고백합니다(37). 마침내 대적들을 그의 발 앞에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했습니다(38).

다윗은 적들을 완전히 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39-40). ‘주께서…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40)라는 말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나라 밖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 없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셔서(41) 다윗의 대적들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다윗 편이셨습니다. 다윗은 대적들을 바람 앞에 티끌처럼 날려버렸고, 길거리 진흙처럼 쏟아버릴 수 있었습니다(42). 다윗은 자기를 공격하는 대적들을 ‘내 원수’(37, 40), ‘나를 치는 자들’(39), ‘나를 미워하는 자들’(40)로 다양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궁극적 승리의 원동력과 그들의 패배 원인을 하나님께 둡니다.

 

우주적 왕권(43-45)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때 흑암의 영들은 두려워 떨며 뒤로 물러납니다. 교회가 담대히 일어나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의 영을 꾸짖는다면 악한 영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우주적인 왕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고 계십니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43-45)

 

다윗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백성의 다툼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셔서, 나를 알지 못하는 배성까지 나를 섬길 것입니다’(43). 이 고백은 사울 집안과 오랜 시간 다투며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삼하 3:1), 그리고 이방 민족들과 벌인 전쟁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를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그의 왕권이 하나님에 의해 확장될 것을 믿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높이셔서 자기 언약 백성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섬기게 하셨습니다(사무엘하 8:6; 10:19).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계승하는 것이고, 다윗 언약(사무엘하 7장)의 확증이며, 장차 성취될 ‘메시아의 통치’를 내다봅니다. 다윗은 또한 다툼을 벌였던 자들과 열방이 자기 소문을 듣고 복종할 것이라고 믿습니다(44).

또한 이방의 자손들은 쇠잔해져 요새에서 떨며 항복할 것입니다(45). 꽃과 잎이 시드는 것처럼(이사야 1:30; 28:1)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서 힘과 용기를 잃는 모습을 그립니다. 더군다나 이방의 대적들이 지키던 ‘견고한 산성’에서 항복하는 것은 억압하려 했던 자들이 비굴하게 복종하게 되는 전복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반석이신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46-50)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니 언제까지든지 자기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켜내실 수 있습니다. 반석이 되어 보호하시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민족들 위에 세우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왕에게 언약적 사랑으로 큰 구원을 베푸시며, 믿음으로 그 언약의 후손 된 모든 자에게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더 큰 구원과 온전한 승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46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46-50)

 

다윗은 구원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과정과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다고 찬양합니다. 

(1)나의 반석이며 살아 계신 여호와(46-49) 

다윗이 곤경에서 구워해 주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시의 마지막은 송영입니다. 그의 첫마디는 우상처럼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분의 존재를 선포한 말입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되심을 찬양하라’(46a), ‘살아계신 하나님’(‘엘하이’, 42:2; 84:2)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여호와는 살아 계시다’라는 어법은 시편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다윗은 그가 내 구원의 하나님이니 그를 높이라고 외칩니다(46b). 이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 만세를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가 ‘내 반석’이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안에서 회자된 말일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큰 바위’되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합니다(참조. 사무엘상 2:2). 다윗은 자기를 위해 보복해주신 여호와가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길을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47; 18:32), 그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완전한 복수를 해주셨습니다. 이는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악을 갚아주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참조. 사무엘하 4:8). 다윗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열거합니다. 그분은 원수들에게서 구원해주시고, 대적자들 앞에서 높여주시고, 포악한 자들에게서 건지신 분입니다(48).

승리는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살아계신 여호와, 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가운데 여호와께 감사하며, 내가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49절). ‘이방 나라들’, 곧 열방이 그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오래전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고되었음을 전합니다(로마서 15:9). 

(2) 메시아의 영원한 통치(50)

마지막으로 시인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고,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시며, 다윗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50).

마지막 시행은 우주적인 왕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 왕 다윗,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지속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인자’(헤세드)를 찬미합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이 어느 특정 시대로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임을 선포하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행은 다윗 언약(사무엘하 7:12-16)에 근거하여 이미 다윗 당시 성취되었고, 장차 그 후손을 통해 완전한 성취로 이어질 것을 내다봅니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주셨기에 이룬 값진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승리로 이끄십니다. 용기를 낼 때 북돋아 주시고, 힘을 낼 때 크고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싸운 자만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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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8-02)

 

 


나를 도우신 하나님

시편 18편 16-29절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때 우리는 밖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현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믿음으로 도약을 시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인 다윗은 약자를 구원하시는 하니님을 선포하기 위해 옛적 애굽으로부터 자기 조상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켜 자신과 모세의 지도력을 연결시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의 규례와 율례를 따라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는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기초합니다.

 

악한 자들 구원하시는 하나님(16-19)

하나님께서는 홍해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듯 다윗을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넓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6-19)

 

다윗은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후(7-15), 그는 여호와가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셔서 자기를 붙잡아주시고,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동사로 표현합니다(손을 펴시고, 불잡으시고, 건지셨다).

그런데 다윗은 ‘그가 나를 많은 물에서 건져내셨다’(16b)고 할 때, ‘건져내다’는 ‘마샤’로 ‘모세’의 어근 동사입니다. 이는 ‘건져진 자’라는 뜻의 모세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나일 강에서 건져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출애굽기 2:10) 자신을 연결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물은 헤어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물이며, 위험한 물로서 죽음의 물을 상징합니다. 옛적 애굽의 범람하던 강물이 생명의 강이 아니라 영아를 학살하는 죽음의 강이었던 것처럼, 다윗은 많은 물의 위협에서 구원받았다고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다윗에게 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힘이 센 강한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주님이 구원하셨다(17)고 말합니다. 강자의 편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묘사입니다. 다윗은 이를 내세워 자기 원수를 힘 센 강자로 표현하고 반면에 자신의 무력함을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또한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몰려온 그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의지가 되셨다(18)고 회고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분으로 거칠고 험악한 삶을 살던 시절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 추적했던 때를(사무엘상 23, 24, 26장) 회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 왕의 강한 힘 앞에서 다윗은 무기력한 도망자였습니다. 왕의 군사들의 좁혀오는 추적 앞에서 두려웠을 다윗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를 위해 일하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진실의 문을 열어 현재의 고통에 희망을 건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19). 좁고 험하고 거친 협곡들과 동굴에 숨어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다윗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상태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은 여호와가 자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19b)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스스로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떠나지 않은 삶과 보상(20-2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우리를 대해주셨습니다. 자비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성품 그대로,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완전하며 깨끗한 마음을 품은 이들에겐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하시되, 사특한 자는 거부하십니다. 종종 세상은 의인의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인의 흥왕함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과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0-24)

 

다윗은 이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고, 내손의 깨끗함에 따라 내게 갚으셨다’(20)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충실히 지키신 것처럼, 다윗이 그 언약의 규범들을 지키는 일에 충실했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운 삶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특히 ‘내 의’와 ‘내 손의 깨끗함’은 살면서 올바름과 순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도덕적인 완결성을 표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상해주신 이유들을 더 상세히 나열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21).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나의 하나님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정하신 ‘길’,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양식’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고서 우주를 창조하신 보편적인 명칭, ‘하나님’과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동시에 언급합니다(21). 이는 세계를 지으시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구원하신 여호와라는 동일성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규례가 자기 앞에 있고,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22). ‘규례’는 세부적인 법률적 항목들을 가리키며, ‘율례’는 성문화된 법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신명기 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열왕기상 2:3) 이 둘의 예리한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언약 관계 안에서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세부 항목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들에서도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고,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합니다(23). ‘완전하다’라는 말은 흠이 없고, 지탄받을 만한 어떤 일도 행하지 않고 정직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평행적 관계를 고려하면, ‘완전함’은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규범을 버리지 않았고 완전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따라 되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4). 다윗은 ‘갚아주다’라는 말을 반복할 만큼(참조. 20)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확신합니다.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25-29)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에게는 신실함을, 흠 없는 자에게는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을 보이기고, 불쌍한 백성은 자비로움으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약하고 사특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여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성품 그대로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25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5-29)

 

지금까지 하나님을 ‘여호와’와 3인칭으로 호명하다가 2인칭 ‘당신’ 으로 바꿉니다. 자기 의를 갚아주신 하나님과 보편적 인류 사이에서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고 그분의 성품을 밝힙니다.

‘경건한 자에게 당신은 진심으로 대해주시고, 완전한 자에게 당신의 완전하심을 보이십니다’(25).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와 삶의 태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완전한 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맛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하심으로, ‘사악한 자’, 곧 비뚤어지고 거짓된 사람은 혹독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26).

요약하면, 여호와는 신실한 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하지만 불법적이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성에 기초합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당신은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사람의 눈을 굴복시키십니다’(27). 곤고한 백성은 가난, 궁핍, 환난으로 비참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지만, 이들과 대조되는 교만한 자는 눈을 낮추시고 굴욕을 당하게 하십니다. ‘교만한 눈’은 말 그대로 하면 높아진 눈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의 교만에 대한 외적 표현입니다. 오만하고, 도도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태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오만함을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자들을 깎아내리시고, 낮추시고, 창피를 주셔서 더 이상 오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삶을 성찰하며 고백합니다. ‘참으로 여호와 당신은 나의 등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28). 그는 앞서 자신을 죽음과 스올에 갇힌 사람 같았다고 했지만(4-5), 그 깊은 어둠의 세계에서 등불을 들고 어둠의 세계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등불 때문에 죽음과 시련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조는 성경 전체에서 고루 발견되는 일반적인 은유입니다. 어둠은 죽음의 세계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반면, 빛은 질서와 생명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원수들과 사울의 손에서 여호와가 구원하신 것을 찬미하며 노래할 때(사무엘하 22장) 고백한 말입니다(사무엘하 22:29).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에라도(사무엘하 7장) 자신의 등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참조, 열왕기상 11:36; 15:4; 열왕기하 8:19).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적군을 향해 나가고 하나님과 함께 적의 요새와 성벽을 무너뜨리고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9). 이는 다윗이 아말렉 군대를 비롯한 적의 군대를 추격할 때, 참 용사이신 하나님만 의지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캄캄한 어둠일지라도 주님께서 등불을 밝히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함께하시면, 내달려 적군을 쫓고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랜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능력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 확신을 위해 오늘 당신이 쌓아야 할 경험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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