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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8-0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시편 18편 1-15절


사람들은 힘을 가지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평생 힘을 기르고 유지하는 데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어떤 힘보다 강한 힘은 여호와가 내 힘일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고, 아뢰며 부르짖으며, 피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8편 전체는 50절로 구성된 긴 시편들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다양한 주제들을 반영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찬양합니다. 1-15절 단락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사랑과 위대한 구원자 하나님을 ‘방패’, ‘구원의 뿔’,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 등의 은유로 묘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악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찬양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1-2)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싫든 좋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움과 고난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때로는 유혹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주 믿음의 시험대에 서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윗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2)

 

본 시편의 부제(副題)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입니다. 즉 다윗이 그 인생의 모든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사울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포함한 다윗의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견뎌낸 후에 그가 믿음으로 견디는 동안에 경험하고 누린 하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묻어나는 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의 첫마디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생소합니다. ‘사랑하다’로 표현된 ‘라함(רחמ)’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은 사랑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애절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근거한 충성을 표현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서 여덟 가지 은유로 하나님의 본성을 묘사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입니다(2). 이 은유들의 특징은 군사적인 상황과 지형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의 성격을 표현합니다. 특히 ‘나의 구원의 뿔’이라는 말에서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참조. 사무엘하 22:3). 이는 다윗이 군사적인 위협과 험준하고 거친 광야의 삶에서 체득한 하나님 묘사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3-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쉴 만한 반석으로, 견고한 요새로, 방패와 구원의 뿔로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윗은 어려움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삶 가운데 고비 고비마다 생생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어려웠던 상황을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당신이 묘사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3-6)

 

다윗은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자기 원수들에게서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 다윗은 치명적인 죽음처럼 강렬했던 위험을 회고합니다. ‘사망의 줄’과 ‘불의의 창수’가 자신을 얽어매고 두렵게 했습니다(4). 또한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자신에게 이르렀음을 감지했습니다(5). 4-5절에 죽음을 상징하는 은유들은 다윗을 얽어매고 잡아 묶어 죽음에 휩싸이게 하여 발현되는 두려움입니다.

더군다나 ‘불의의 창수’(4)는 위험한 강물입니다. 곧 ‘벨리알의 강물’은 고대근동 사회의 신화적인 용어를 인용한 말로 파괴적인 홍수이며 태초의 혼돈 세력을 상징하는 물입니다. 그 죽음의 강물이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 곧 ‘스올’로 다윗을 묶어서 가혹하게 끌고 가는 영상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에 갇힌 상태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혔지만(5), 무서운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청했습니다(6ab).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전’에서 들으셨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6cd). 그의 ‘성전’은 어디입니까? 다윗 통치 기간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으니 하늘의 처소일 것입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사람의 눈에 감춰진 깊은 지하, 곧 어둠의 세계인 ‘스올’(5)과 대비시켜 사람에게 가려진 하늘 성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깊은 어둠에 사로잡혔을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러 오시는 것을 확신합니다. 사망에서 구원받는 것은 구약의 세계관에서는 매우 독특한데, 다윗은 죽음을 돌파하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강림(7-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필요와 상관없이 아주 길게 침묵하시며 숨어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토록 오랫동안 쫓겨 다닐 동안 가만히 두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진노로 심판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물밑에 있는 땅이 보이도록 바다를 여시고 그 안에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우리에게도 일하실 것입니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7-15)

 

하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전쟁에 익숙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항상 접하는 지형들인 전쟁 중요한 피난처들로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수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소개합니다.

 

(1)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7-9)

 

마침내 하나님께서 강림하십니다. 땅이 진동하고 요동치며, 산의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7). 옛적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강림하셨던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묘사입니다(출애굽기 19:16-19).

죽음의 세계에 갇힌 다윗을 구원하기 위한 강림입니다. 다윗 생각에 지진과 폭풍우로 산들의 기초가 요동칠 정도의 강력한 흔들림은 하나님의 진노에 근거합니다. 계속되는 시행도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살라버리고, 그 불에 숯이 피었습니다(8). 연기와 불과 숯불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점점 불이 거세지는 영상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연기와 화염으로 강림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18; 20:18;신명기 4:11-12). 하나님의 코와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의 영상으로 소개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인 묘사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적인 문학기법입니다. 화염을 뿜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상상력 넘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두렵고 위엄찬 강림 후에 하늘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데, 그분의 발아래는 어둡고 빽빽한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9).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묘사하는 단락과 통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이사야 64:1-2).

 

(2) 그룹과 바람 날개를 타신 하나님(10-11)

 

빽빽한 구름을 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9b) 그룹을 타고 하늘을 나십니다.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십니다(10).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일이 펼쳐집니다. ‘바람 날개’는 바람이 날개를 달고 나는 새처럼 솟아오르는 영상입니다(호세아 4:19; 시편 104:3). 하나님께서는 타고 솟으시는 ‘바람 날개’와 평행되는 ‘그룹’은 무엇입니까? ‘그룹’, 곧 ‘케루브’는 최초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 동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입니다(창세기 3:24). 날개 달린 짐승으로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킵니다(에스겔 1:5-14; 10:21; 참조, 출애굽기 25:19).

또한 하나님께서는 흑암을 그의 숨는 장소로 삼으시고, 장막처럼 두르시며 하늘의 어두운 비구름(빽빽한 구름)을 주변에 두르셨습니다(11), 비를 잔뜩 머금은 시커먼 구름에 싸여 계신 장면입니다. 이러한 영상은 당대 가나안 신화에서 익숙한 폭풍의 신 바알을 연상시키지만, 다윗은 강력한 폭풍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변증한 셈입니다.

 

(3) 우레와 콧김으로 꾸짖으시는 하나님(12-15)

 

이제 하나님의 광채로부터 캄캄한 구름이 지나가고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이 지나갑니다(12). 하늘의 우박과 벼락이 동반되는 광경입니다. 다윗은 하늘의 우렛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으로 표현합니다. ‘지존하신 자’가 목소리를 발하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13). 여호와가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자신을 감추신 듯하지만, 우레와 같은 그분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존재감이 울려 퍼집니다. 이것도 옛적 조상들에게 구름, 번개, 뇌성, 우박과 번쩍이는 숯불처럼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와 비슷합니다. 그 옛날 시내산 강림의 하늘빛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하시는 모습입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영광과 위엄찬 강림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여호와가 원수를 직접 공격하십니다. 그분이 화살을 날려 원수를 흩으시고,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습니다(14). ‘그의 화살’은 둘째 소절에서 평행되는 ‘번개’입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서 번개는 자주 화살로 묘사되곤 합니다(시편 77:17; 144:6). 무엇보다 ‘날려, 흩으시고, 깨뜨리셨다’로 연속되는 동사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특히 ‘깨뜨리셨도다’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을 표현합니다(참조. 민수기 10:35; 시편 68:1; 사무엘상 11:11).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대동하시고 악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는 상황 묘사입니다. 이처럼 우주질서를 관장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을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목소리와 장면 묘사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여호와의 콧김이 폭발하자 바다 끝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발가벗겨지듯 드러납니다(15). ‘꾸지람’과 ‘콧김’이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입니다. ‘콧김’은 ‘콧바람의 기운’으로 여호와의 코에서 품어져 나오는 생명의 ‘바람’(루아흐)입니다. 여호와가 호령하시며 발하시는 생명의 기운이 물밑을 드러낼 만큼 강력합니다. 이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연상시켜(출애굽기 14:21) 다윗의 구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강림과 악인은 세상 근원을 통치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적인 권능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람 날개를 타고 솟구쳐 오르십니다. 구름으로 장막을 치시고 은밀한 중에 감수십니다. 나타나실 때는 광채가 발하고 우박이 쏟아지고 번개가 칩니다. 애굽을 심판하실 때도, 홍해에서 적들을 섬멸하실 때도 두려운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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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7-01)


억울한 고난 속에 있을 때

시편 17편 1-15절


예수님을 믿는다고 장밋빛 대로만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기대로 신앙의 길을 간다면 고난이 닥쳤을 때, 낙담하고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 또한 억울한 비방과 부당한 고난으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억울한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시편 17편은 자기의 결백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의 변호와 구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웃은 사방에서 조여드는 압력과 곤경에서 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악인들 때문에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세심한 보호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는 악인들에게서 여호와의 손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며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무죄 천명과 간청(1-5)

하나님께서는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목석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소를 세심히 듣고 계시며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공평하게 살펴 누가 옳은지 판단해주십니다.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탄없이 아뢰어야 합니다. 

1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1-5)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아뢰며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공평하게 판단해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진실을 입증해주시고 깨끗한 양심으로 외식 없이 외치는 부르짖음을 귀담아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1)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1-2)

본 시를 쓴 다윗의 상황이 무척 다급해 보입니다. ‘여호와여 옳음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하소서 나의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1a) 여호와를 부르며 외치는 다윗의 연속되는 요청이 눈에 뜁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 이러한 일련의 구문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한 정보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나 ‘의’ 곧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호소하고 법적으로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나의 부르짖음’과 ‘나의 기도’는 절박함을 강조합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거짓되지 않은 입술의 말(1b)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음을 당당히 밝힙니다. 자기의 부르짖음과 기도가 옳음을 호소하는 것은 자기 의를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비난과 공격에서 무죄 입증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판결은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눈이 옳은 것을 보실 수 있기를(2)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법적 판결을 적극 요청하는 것은 긴급한 호소와 함께 정당한 판결을 구하는 결백 주장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의 결백 주장의 언어는 좀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2) 다윗의 결백 주장과 이유(3-5)

다윗은 당당합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자기 마음을 시험해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3) 말합니다. 밤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깊은 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주님이 ‘방문하셔서’ 마음을 시험하셔도 다윗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3절 시행에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 기관에 속한 마음과 입이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 시행을 둘러싼 형태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생각, 지혜, 의지의 자리이며 의사결정기관입니다. 고대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나의 입술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3)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무죄와 결백이 말과 관계된 것이요, 생각과 말이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이후에도 말과 행위의중요성은 계속 언급된다. 다윗은 주의 입술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삼가고 포악한 자들의 길을 가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4).

또한 의도적으로 ‘강포한 자의 길’과 ‘당신의 길’을 대비시켜 주의 길을 굳게 지켰음을 강조합니다(5a). 이 때문에 다윗은 나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5b). 시편 1편처럼 다윗은 삶을 ‘길’에 빗대어 자신의 올바른 발걸음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악인과 대적의 위협에서 보호 받기를 간구(6-12)

떳떳한 사람이 강합니다. 기도의 힘은 정직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음을 호소할 정도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늘 하신 말씀과 발자취만을 따랐으며 벗어난 적이 없다고 탄원할 수 있습니다. 티끌만큼도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법에 신실했다는 뜻입니다.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6-12)

다윗은 하나님께 떳떳한 자신의 기도에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신을 그 능하신 오른손으로 구원해달라고, 주의 기이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뿐임을 호소합니다.

(1) 내 말을 들으시고 지키소서(6-9)

이제 다윗은 ‘하나님’(‘엘’)을 부르며(6) 응답하실 것을 믿고 간구합니다(6-8). 다윗은 부르면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전제한 듯 말합니다(6). ‘그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간구합니다(7a). 이 말은 히브리어와 한국어의 어순 차이 때문에 셋째 소절에 위치했지만, 본래 7절의 첫 소절입니다. 다윗이 담대하게 ‘그 기이한 사랑’, 곧 ‘헤세드’를 구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핵심으로서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기이한 사랑’(‘헤세드’)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7bc).

다윗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그는 이른바 바다의 노래로 알려진 모세의 노래를(출애굽기 15:1-8) 되풀이하듯 같은 언어를 소환합니다.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에 숨겨 주소서’(8; 참조, 신명기 32:10-11), ‘눈동자처럼’, ‘당신의 날개 그늘에’라는 말은 가장 소중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옛적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은총을 다시 보여주시길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이제 다윗의 기도가 실제적이고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자기를 압제하는 악인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9).

(2) 짐승처럼 달려드는 대적들(10-12)

다윗은 악인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기름에 잠겼고, 그들의 입은 교만합니다(10). ‘마음이 기름에 잠겼다’(개역개정)는 말이 모호합니다. 직역하면, ‘그들의 살진 마음(또는 심장)이 닫혔다.’ 또는 ‘그들의 살진 마음이 무뎌졌다’라는 말입니다.

이 소절은 악인들의 교만한 입과 평행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악인들은 몸의 중요한 기관들이 굳어지고 닫혀 겸손을 잃은 모습입니다. ‘이제’ 악인들은 걸어가는 길을 에워싸고 진로를 방해하고, 눈으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기까지 합니다(11). ‘이제’라는 부사를 덧붙여 악인들의 포악성을 드러냅니다. 악인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몸을 사용해 타인을 넘어뜨리는 데 있습니다. 다윗을 공격해 오는 악인들의 적대적인 성격묘사는 점점 더 실감나고 강력해집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포획한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 사자 같고, 은밀한 곳에 숨어 공격의 기회를 살피는 젊은 사자 같습니다(12). 이처럼 다윗은 악인들의 은밀함과 무자비한 공격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적극 요청합니다.

 

악인 심판 요청과 구원의 확신(13-15)

의의 길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은 탐욕이 가득하고 입술은 온갖 교만한 말로 가득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길 외에 어떤 불의의 길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고난과 조롱 속에 배고프고 초췌하고 불안합니다.

13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3-15)

다윗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외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그들을 대항하여 넘어뜨려주십시오. 당신의 칼로 악인들로부터 생명을 구원해주십시오’(13). 동사들은 다윗의 긴급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대항하십시오’, ‘넘어뜨려주십시오’, ‘구원해주십시오.’ 이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다윗의 절박함 자체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노려보며 맹렬하게 사자처럼 달려드는 대적들을 하나님이 직접 처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죄 주장으로 호소했다면(3-5), 기도를 마무리하면서는 대적들의 심판과 멸망을, 무죄한 자신의 안전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기도를 대충 멈출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구체적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이 세상에서 제 몫을 다 받은 사람에게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14ab). 이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삶의 전부인양 누릴 것을 다 누린 자들이며, 남은 것을 자기 자녀들에게까지 상속하는 자들입니다(14cd). 다윗은 자신이 마치 이생의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적들의 형통함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내가 의로움 중에 당신의 얼굴을 뵈오니 내가 깰 때에 당신의 형상에 만족하겠습니다’(15). 다윗은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로움보다 여호와의 얼굴과 형상, 곧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만족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의로움을 들어주십시오’(1)라고 기도한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로움’ 중에서 주님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깰 때에’라는 말에 부활이나 종말론적 의미를 부과하지만, 다윗은 현재의 위기와 고통의 문제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임재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의 언어는 기술적으로 더 교묘하고 교활한 악인들로부터 구원받고, 죽음의 잠처럼 위협적인 것을 초월할 만큼 희망을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억울하고 적대적인 현실과 위기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과감하게 요청하라는 본보기요, 하나님 임재를 확신하도록 도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해주십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십니다. 홍해를 건너던 위기의 현장처럼, 자비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곤경에 처하거나 부당한 일로 마음이 상하였습니까? 난관에서 건지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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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6-01)


주님만이 나의 유산

시편 16편 1-11절


살다보면 원치 않지만 때로 큰 시련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특히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분들을 보면 커다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순금같이 나와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피할 곳 없는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16편은 위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흔들리리지 않을 것을 찬양합니다. 이 때문에 신뢰의 시(또는 확신의 시)로 분류됩니다. 다윗은 주님을 섬기는 자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의 대조적인 운명을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주님의 복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주가 베푸신 생명의 길에서 다윗은 자신의 기쁨이 영원할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1-4)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시련의 한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그 백성들을 삼키지 못하게 하십니다. 경건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죽음을 걱정할 만큼 큰 고난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주님의 모범을 따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1-4)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며 보호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을 지켜달라는 요청과 당신께 피한다는 고백(1)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신뢰의 표시로 보입니다. 다윗은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아뢴 것이 이미 있어 보입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 말고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2).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신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하나님 말고 누구도 ‘나의 복’(2b)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은 직역하면 ‘나의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 곧 ‘토바(ה󰔧וֹט)’는 누군가의 ‘호의’, ‘행복’ 또는 ‘구원’, ‘성공’과 관계된 말입니다. 다윗은 행복과 성공, 구원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정확히 압니다. 또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자들이며 자기의 모든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3).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표현한 말입니다(레위기 19:2; 민수기 16:3; 신명기 33:3; 시편 34:9).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방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종 됨의 위치를 선언하고, 백성들과 자신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신들에게 달려가서 예물을 바치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고, 나는 그들의 피의 전제를 바치지 않을 것이며, 내 입술은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4)이라고 고백합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성도들과 다른 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때 이방 신들을 따르는 자들이 피로 빚은 술을 붓는 ‘피의 전제’를 다윗 자신은 하지 않겠다(4ab)는 표현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동물의 피를 부어 바치는 의식을 언급한 것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양상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시대에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불살라 바친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충격적인 이교 의식을 병행했던 역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입술로 그 어떤 신들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겠다고(4d) 분명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겠다는 선포입니다.

 

나에게 기업이 되신 여호와(5-8)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 내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신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른 신을 의지하는 것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주님이시고 주님밖에 행복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의지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8)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겠다고 하였고 그분만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고백했습니다(1,2). 우상 일상들을 향한 피의 제사와 우상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하고 비판한 만큼(4) 여호와가 나의 산업과 나의 잔 자기의 소득이고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5).

‘나의 산업’은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지파별 인구 비율대로 할당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1장). 그런데 다윗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 여호와가 ‘나의 할당 받은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가 ‘잔의 소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나의 잔’입니다. 이 말은 이방 신들에게 부어 바치는 ‘피의 전제’와 비교되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료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거기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꼭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5b). ‘분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을 분배받을 때 ‘분배받은 몫’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빗대어 하나님만이 자기 운명을 보장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적인 선포입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의 행복한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찬양합니다(6,7).

다윗은 여전히 옛적 조상들이 분배받았던 땅을 상기시키는 은유를 활용하여 노래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6a),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자기를 위해 주님이 행하신 모든 곳이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로 분배해주신 땅을 받고, 감격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나는 나에게 훈계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니,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다윗은 자신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고요하고 적막한 밤중에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양심’은 본래 고대인들에 의해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기관으로 불리는 ‘콩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체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기에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관입니다. 가장 깊고 내밀한 몸의 기관이 교훈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치열한 일상을 마무리하는 어두운 밤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기 행동을 바로잡습니다. 다윗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기 행위를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면밀히 듣고, 자기 교정이 가능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8a)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8bc). 다윗은 자기편이 되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드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자기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확신합니다.

 

나의 기쁨이신 여호와(9-11)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고 풍성한 소산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백성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잠시 기업을 잃고 방황할지라도 언젠가 되찾아주실 것입니다.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 유산을 기뻐하며, 빛나는 것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9-11)

다윗은 자신을 요동치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기에(8) 노래합니다.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겉 사람도 즐거워하니, 내 몸도 안전하리라’(9), 다윗은 주님의 붙드심 때문에 전인격적인 즐거움과 안전을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겉 사람’(카보드 דוֹבכּ)이 ‘영’(개역개정)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전적인 뜻은 ‘무거움’, ‘겉모습’, ‘영광’, ‘영광의 표시’, ‘탁월함’ 등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 몸의 안전까지 확신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 새겨진 속사람의 기쁨이 겉사람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안전함으로 확장되는 삶을 꿈꾸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의 충만함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는 표명입니다.

이후 자신의 기쁨과 안전의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내 생명을 스올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0a). ‘스올’은 지하세계이며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죽음의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죽음의 세계로 던져 넣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기쁨과 안전을 확신합니다. 이 또한 여호와가 당신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10a)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개역개정)는 ‘경건한 자’이며, 3절의 성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약속 안에서 신실하며 헌신된 자들입니다. ‘멸망’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표현하기 위한 ‘구덩이’ 또는 ‘무덤’을 뜻하며, 시행에서 ‘스올’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당신의 경건한 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신뢰에 칸 마지막 고백으로 남겼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길을 내게 알리실 것이고/당신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당신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11).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죽음을 극복한 내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는 것 소절, ‘당신이 내게 일평생 사는 방법(또는 길)을 알게 하셨다’(11a)는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의 임재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 넘치는 삶의 가치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다윗은 기쁨을 잃지 않고 평안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일깨워주시고 밤마다 교훈해 주시는 주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손상되면,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말씀이 당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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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5-01)


진정한 예배

시편 15편 1-5절


 예배란 어떤 의식이나 행위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식 예배보다 삶의 예배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내게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개선하면서 진정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 시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에 들어가기 전 예배자의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이 조건들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윤리적인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과 성산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예배하기 위한 열 가지 선행 조건들인데, 이것을 온전히 충족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여 죄사함의 필요성을 깨닫고 겸허히 예배하도록 교훈합니다.

 

[질문] 누가 당신의 장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1)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것이 구속의 이유는 아닙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고 유하면서, 그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내리시는, 살아있는 교제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열망이 있을 때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합니다. 두 개의 질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사는 자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요한 장소가 언급됩니다. ‘장막’과 ‘거룩한 산’입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께서 주신 도면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장막은 이동이 쉽도록 설계되었으며, 하늘 하나님께서는 땅에 거주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을 만나는 장소로서 회막(사무엘하 7:6)으로도 불렸으며 솔로몬의 성전으로 대체됩니다. 장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며 예배의 장소로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장소입니다. 15:1처럼 장막과 거룩한 산이 함께 등장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2:6; 3:4; 43:3; 48:1).

다윗의 질문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 반복했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항의합니다. ‘머무르고’ ‘사는’ 것은 비슷한 의미입니다. ‘머무르다’는 일시적 ‘거주’(구르)이고, ‘살다’는 ‘정착’ (샤칸)을 뜻합니다. 다윗은 성전과 거룩한 산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정착하든 누가 거기에 머물며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 임재 앞에서 보호받고 쉴 권리를 가진 자들이 누구인지를 새겨보라는 초대입니다.

 

[대답] 정직, 공의, 진실한 일상(2-5ab)

하나님께서는 책망 받을 것 없는 길을 걷고, 공의롭게 행하며, 맘속에서부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근사하지 않더라도 고백과 마음과 삶이 하나 된 백성의 찬미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받고 싶은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가꾸운 벗과 이웃조차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울 수 없습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2-5ab)

여호와의 성전, 곧 그분의 임재 앞에 거할 수 있는 조건이 열 가지로 제시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조건들입니다. 적극적으로 수행할 일과 금지 조항들이 각각 다섯 가지로 열거되었습니다. 먼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으로, 정직하게 걷고, 공의를 행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2).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서원을 했다면 해를 입더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4).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정직하게 걷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결점이 없고 비난할 것이 없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둘째,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공의’는 보편 타당하게 옳은 일을 행하는 것과 관련된 덕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평하고 법적으로도 결백하고 진실한 사람이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굳이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진실한 말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지혜와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이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진실’(에메트)은 구약성서에서 공의와 거의 항상 짝꿍처럼 함께 어울리는 말로서 믿을 만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러움을 가리킵니다. 이는 표리부동한 언어의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말이 일치하는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넷째 조건은, ‘망령된 자’를 거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4a). 이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4b)과 동의적인 평행관계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망령된 자’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망령된 자’는 비열하고 야비하고 깔보고 얕보는 사람입니다. 남을 얕보고 깔보는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비열한 태도를 보이거나 남을 얕잡아 보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예배자의 적극적인 행위로 제시한 마지막 요청이 있습니다. 주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는 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맹세한 것을 바꾸지 않습니다(4bc).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서원’은 자기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고 서약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은(27장) 서원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서원의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서원을 무를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구약 본문은 서원의 나쁜 예로 사사시대 입다를 지목하곤 합니다. 사사 입다는 무분별한 ‘서원’으로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4일 동안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사사기 11:34-40). 전도서는 서원한 것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서원’을 이행하라고 조언합니다. 서원하고 이행하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안하는 것이 낫다고 덧붙입니다(전도서 5:4-5). 이것은 서원의 신중함을 말한 것이지 서원을 장려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 본문의 전반적인 맥락처럼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것은, 예배자의 서원을 장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4절 시행에서 하나님께 서원하는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행위보다 ‘맹세하다’(샤바)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직역하면 ‘그는 잘못 행동하지 않도록 맹세하고, 취소하지 않는다’(4bc)라는 말입니다. 그릇된 행동을 안 하기로 맹세한 것을 철회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시행의 전체 맥락에도 어울립니다.

그러면 다윗이 말하는 예배자의 금지 조건은 무엇입니까? 3,5절에 제시되었는데, 이 사항들은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사항이 아니라 금해야 할 행동과 관련 있습니다. 첫째, 자기 혀로 남을 험담하고 뒷공론을 즐기며 떠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을 비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기 친구나 동료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셋째, 자기의 가까운 이웃을 경멸하거나 비웃고 모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3). 이 중에 하나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예배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일그러진 관계성 회복이 예배 행위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넷째, 이자를 받기 위해 타인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무죄한 사람에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5ab). 시인은 이자와 뇌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 밖 이방인들과의 사업상 거래는 예외였지만(신명기 23:19-20),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언약백성 사이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25; 레위기 25:36-37).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궁핍함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마땅히 할 일로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돈은 오직 도움을줄 목적으로만 빌려줘야 하며, 이자 없이 담보물로 저당 잡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신명기 24:6).

그러나 이 법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에스겔 18:13;22:12; 느헤미야 5:1-13; 사무엘상 22:2). 뇌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뇌물 받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예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뇌물 받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뇌물이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비틀어 곡해하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3: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경제적인 일상의 삶에서 약자와 무죄한 자에게 피해를 입힘으로 공평과 정의가 짓밟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결국 처음 시행으로 되돌아가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흠이 없고, 공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2) 집약됩니다. 한마디로 정의로운 삶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약속] 흔들리지 않는 삶(5cd)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더 괴롭게 하는 고리대금과 억울한 자를 더 억울하게 하는 뇌물을 싫어하십니다. 뇌물은 말할 것도 없고, 자ㅓ기 백성끼리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신명기 23:19-20). 지금도 처지가 궁한 성도들을 상대로 이득을 취하거나 뇌물을 받아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들 듣지 않으십니다.

5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cd)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열거되었지만,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예배자의 합당한 삶은, 공의와 진실한 마음으로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실천하며 사는 이들을 위한 약속이 선포됩니다. 이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삶의 다양한 문제들 앞에서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거나 요동칠지라도 하나님 가르침 안에서 의로운 삶을 위해 투쟁하며 사는 자들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돈으로 타인을 괴롭게 허거나 유혹받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이자나 뇌물은 궁핍한 형제를 절망으로 내몹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도리어 내쫓고 심판하십니다. 나눔과 선행으로 예배자의 모습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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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4-01)


 의인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14편 1-7절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허탄한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지혜를 자랑하나 실상 어리석고 부패하여 악한 행실만 가득합니다. 떡 먹듯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삼키면서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고 불의한 세계에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의 성격을 다룹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되고, 그는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지혜로운 의인의 탄식을 축발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14편은 어리석음과 의로움의 주제, 그리고 시온에서 시작되는 구원과 찬양의 주제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신학적이고 사색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악행과 착함의 부재(1-3)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십니다. 땅은 완고하고 타락한 죄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찾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찾으신 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3)

다윗이 게속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구한 결과, 인간들이 받은 큰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먼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규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1a).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나도 피할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리석다’라는 말이 구약성경에서 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습니까?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식과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는 지혜 있음의 반대적인 의미이며, 우매하고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신명기 32:6). 분별력이 없고 무감각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참조. 이사야 32:6).

다윗이 바라본 어리석은 자는 그 행실이 부패하거나 가증하며,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1bc).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과 ‘좋은’ 행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속 말은 생각을 반영하며, 생각은 행동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하고 가증한 행동을 낳습니다. 그 삶에 ‘좋은’ 행동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어리석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사고와 악한 삶의 방식으로 규명합니다. 무엇보다 ‘좋음’은 도덕적 기준에 맞는 정당함을 뜻하고 ‘선’(善)을 뜻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난 모든 행위들은 ‘선’, 곧 ‘좋음’과 ‘아름다움’이 없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하늘에서 인생들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고 계시다고 말합니다(2). 어리석은 자의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과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주를 기획하고 만드신 ‘하나님’이 그분을 찾는 자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시는 영상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과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면서 세계를 질서 있게 운행하는 이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안타깝습니다. ‘모두 다 치우쳐 있고, 함께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3). 다윗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1c)고 말했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선’(착함)의 부재를 탄식합니다. 흥미롭게도 시행의 평행관계 안에서 ‘좋음’(선)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그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두 치우쳤고, 모두 함께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는 부정한 뇌물이 통하는 방식을 서로 공유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군다나 모두 올바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한쪽으로 치우쳐 빗나간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모두’, ‘함께’라는 말을 덧붙여 악으로 치닫는 공동체의 결탁과 타락의 전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3:10-18). 이처럼 전부가 타락했으니 ‘선’을 실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창세기 6:12). 또한 온 인류가 공모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기 위해 바벨탑을 쌓던 태곳적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창세기 11:19). 한쪽으로 치우쳐 선이 부재한 시대를 바라보며, 쏟아내는 통렬한 탄식의 목소리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외침입니다.

 

행악자들의 무지(4)

악한 자들은 돈과 권력으로 약한 자들을 삼키려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만, 결국 두려움 가운데 살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도와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하다고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4절은 다윗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호합니다. 직접 인용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다윗의 연이은 탄식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쉬운 번역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은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밥 먹듯이 나의 백성을 먹어치우고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다.’ 다윗이 왕이라면,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구체적인 손해를 입히고,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끼니를 채우기 위해 먹듯이 백성을 먹어치운다고 하니 악행이 일상화된 상태입니다. 보통 이러한 사람들은 착취하기 쉬운 가난한 자들이나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대체로 부패한 종교와 정치 권력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리 없으니 어찌 깨달음을 기대하겠습니까!

 

의인 편에 계신 하나님(5-6)

아무리 고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은덕을 베푸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랍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종 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5-6)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의 최후를 밝힙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세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5). 이것은 시시때때로 일상의 삶에서 악인들에게 먹거리처럼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의인들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믿고 선포한 말입니다. ‘의로운 세대’라는 표현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희생물이 된 사람(4)을 통칭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세대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악행을 일삼던 무리를 심판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시행에서 의로운 세대와 평행관계를 위해 선택된 말인 ‘가난한 자’(6)의 피난처 되신 여호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제 다윗은 악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고발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계획을 수치스럽게 했다. 여호와가 그의 피난처다’(6), 다윗은 행악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삶의 계획을 좌절시킨 자보이고 반합니다. 악인들의 횡포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주인 삼아갈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펴며 착취하였는데, 이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행악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가난한 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행악자들의 행위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신 여호와가 피난처 되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7)

시온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고난 중에 인내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반듸 역경에서 건져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십니다. 당신이 포로가 된 듯 힘겹지는 않습니까? 때가 되면 억눌림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

지금까지 다윗은 지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성격을 묘사하여 행악자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무분별을 고발하며 탄식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탄식에 멈추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의인을 연결시켜 여호와가 그들의 피난처 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러고서 갑자기 시온에서 시작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그 마무리는 독특하게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시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베풀 것인가?’(7a) 곧이어 다윗은 여호와가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속박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기쁨으로 소리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7bc). 시온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포로의 땅에서 되돌려 보내실 여호와, 곧 운명을 되돌리실 여호와를 기대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전의 분위기와 달리 시행의 갑작스러운 내용 변화는 후대의 첨가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시행은 새로운 상황에 놓인 세대들에게 재해석과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악인들의 횡포가 만연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과 함께 해방을 경험한 세대를 지나 포로기를 경험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기쁨은 오직 옛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이 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정욕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인생의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약자를 짓밟다가 자신도 파멸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약한 자를 돌보고 행실을 의롭게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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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3-01)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시편 13편 1-6절


고난의 끝이 언제일 모를 때 삶은 얼마나 힘겹습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다윗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련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질문과 탄식이 중심이지만, 끝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다윗의 현실 경험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변화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다윗의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변주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시입니다.

 

탄식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1-2)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근심하고 눈물로 침대를 적시며 밤을 지세운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밤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탄식하거나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1-2)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어느 때까지입니까?’를 외치는 말에서 탄식과 절망 그리고 원망, 무기력함, 간청 등에 여러 가지 마음의 아픔이 읽힙니다. 다윗은 원수로 인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에게서 응답이 없자 너무 답답해합니다.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기를 잊고 그의 얼굴을 영원히 숨기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서 이렇게 대하시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서 더 큰 절망감과 망망함을 느낌입니다.

이 질문은 1-2절 시행에서 4회 반복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질문합니다.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실 것입니까?’(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여호와의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잊는 것’과 ‘숨기는 것’이 서로 평행관계를 이루어 시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를 상징합니다(민수기 6:24-26). 때문에 여호와가 얼굴을 숨기셨다는 말은 오랜 침묵과 관계 단절의 심각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교제가 중단된 것처럼 묘사하면서 비통함을 질문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신 것 같은 괴로움과 무거운 마음을 질문으로 담아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지만, 원망이 아니라 갈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멀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느 때까지 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하고, 날마다 내 마음속 비탄에 빠져 있어야 하는지, 내 원수가 내 앞에서 떠벌리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합니까?’(2) 개역개정은 다윗의 목숨을 건 투쟁을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2a)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곧 ‘네페쉬’는 한 인간의 생명, 곧 목숨 그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혼의 번민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생명을 걸고 내적 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 구문을 곧이곧대로 풀면 ‘내가 내 생명 다해 저항한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종일 근심합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민과 비통함이 언제 끝날지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자기 앞에서 떠벌리는 원수를 어느 때까지(2bc) 지켜봐야 하는지, 그것도 견딜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절박한 마음 상태로 죄 고백이나 참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자신의 극심한 불안과 마음속 불평과 저항감이 더 큽니다.

그러면 다윗을 괴롭히는 ‘내 원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인가, 집합적인 개념과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원수를 말합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다음에 나오는 ‘죽음’을 ‘원수’로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극심한 고통이 질병 때문이라면,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원수는 죽음을 인격화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간구 : 내 하나님여, 나를 보시고 응답하소서(3-4)

정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면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다윗이 목숨을 건 내적 번민과 투쟁의 시간을 보내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습니다. 창조자이며 보편적인 통치자를 강조하는 하나님을 호명하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엘로하이)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바라보시고, 내게 응답하소서’(3a).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셨다고 생각했기에 제발 자기를 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윗의 언어가 거칠게 들려도 계속되는 기도는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오직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혹시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습니다’(3b).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시기를 믿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단지 신체적인 건강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하나님이여’라는 외침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생명이 끊어질 정도의 내적 고뇌와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활력을 주셔서 밝히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두 번째 두려운 이유를 자기 원수와 대적들의 말과 생각을 인용합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자기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라고 말할까 봐 두렵습니다. 또 ‘나의 대적들이 내가 넘어질 때 기뻐할까 봐 두렵다’(4). ‘나의 원수’와 ‘나의 대적들’을 구분지어 말합니다. 둘이 다른 것입니까? 앞서 다윗은 ‘내 원수’(2)가 자기를 치고 자랑하는 것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2) 하나님께 묻고 따졌습니다. 4절 첫 소절의 ‘나의 원수’는 다윗이 죽음을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나의 대적들’은 단수 형태의 ‘나의 원수’와 다릅니다. ‘나의 대적들’은 실제적으로 괴롭히는 압박자들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듯 원수로 의인화한 죽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를 이겼다’(개역개정). 다시 말해 ‘내가 그를 정복했다’는 말입니다. 땅에 속한 누구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죽음을 인격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죽음은 정복할 수 없는 최후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살고자 하는 열망의 표시로 ‘여호와, 내 하나님’을 부르며 죽음의 잠에 빠져들까 두려워 호소합니다.

다윗이 세 번째 두려운 것은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4b). 이 시가 다윗에게 속한 시집이라기보다 다윗의 시라면, 그가 왕의 자리에 있는 상황이라면, 왕좌와 왕권이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이를 확실하게 보증할 만한 언어적인 표시가 시행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적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말한 것과 ‘기뻐 소리치다’(4b)라는 동사절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제의적인 문맥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소리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다윗의 대척점에 있는 위협적인 세력들이 기뻐 날뛰는 모습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죽음과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실제적인 대적들 전부가 두렵습니다.

다윗의 거룩한 근심하던 세 가지를 살피면, 자신의 욕망에 대한 근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a)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희망 : 나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찬송합니다.(5-6)

하나님께서 지금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고집 센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발짝 다가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고통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찬양할 수 있습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5-6)

그럼에도 다윗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2)를 외쳤던 다윗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마음 한구석에 일렁이는 죽음과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발설하고서야 시인에게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탄식과 고발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명은 없습니다.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나 동료들을 의지해야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신뢰합니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 소리칠 것입니다’(5). 5절은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당신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과 ‘당신의 구원’이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이루어 의미를 확장하고 보충합니다.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시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기뻐 소리쳤지만(4), 이제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다윗이 기뻐 소리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실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절망은 탄식과 고발을 거쳐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 몸서리치며 죽음이 두려웠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기쁨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절망과 두려움을 딛고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다윗이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를 다루셨던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덕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116:7; 142:7).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잊지 않고 어두운 현실로 소환하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귀결이며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절망적인 고통과 탄식을 통과한 희망은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를 고난에 두시지만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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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2-01)


신실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

시편 12편 1-8절


 어려운 시기가 되면 의인들은 사라지고 악인은 도처에 도사리며 약한 자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악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행하며 악인 담긴 말로 궁핍한 의인들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힘없는 자는 위협하고, 힘 있는 들에게는 아첨합니다. 비열함이 성공을 부르는 때에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 시는 경거하고 진실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속임과 아첨의 말을 생산하는 악인들이 득세하는 현실을 탁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은처럼 순결하고 완벽히 제련되고 단련된 여호와의 말씀이 ‘누가 우리의 주인가?’를 외치는 자들의 말을 제거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비참한 자들과 궁핍함에 눌려 탄식하는 자들의 안전을 간구하고 확신하는 노래입니다.

 

의인이 없어 도움을 구하는 기도(1)

우리 시대는 사람들은 온통 악인들의 비열하고 무가치한 말들만 칭송합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시대만 아니라 모든 시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광고, 유행어, 정치 구호, 독설이 숨 막힐 듯 난무하여 우리의 정신적, 영적 공간을 어지럽힙니다. 헛된 구호에 넘어가지 않고, 경건하게 신실하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1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다윗은 이 시 또한 첫 마디가 ‘여호와여 도우소서!’로 외칩니다. 갑작스런 외침으로 시작하니 도움이 절박한 상황입니다.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긴급하고 절박한 외침의 이유는 뒤따르는 시행에서 밝혀집니다. 사람들 중에 경건한 사람은 끊어졌고, 진실한 자들은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1b).

시의 첫 행과 마지막 행(8)에서 반복되어 호응하는 ‘인생 중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 중에 경건하고 신실한 자가 없어 탄식으로 여호와를 부르면서 긴급하게 구원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소리를 누가 들을 것입니까! 경건한 자들과 신실한 자들이 사라진 땅에서 호소하는 다윗의 목소리는 자신만 홀로 남은 것 같아 울부짖던 엘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닮았습니다(열왕기상 19:10).

‘경건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실하게 하나님께 몰두하여 헌신된 사람입니다. ‘충실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 진실한 사람이요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경건한 자나 충실한 자들은 하나님이 옛적 이스라엘에게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애’(헤세드)와 ‘신실함’(에메트)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사람들입니다(출애굽기 34:6).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사람들을 이 땅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갖춰야 할 삶의 본질인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는 세상에서 (호세아 4:1; 예레미야 5:1; 미가 7:2), 의인들이 악인들 앞에 불려가 제거되는(이사야 57:1) 참혹한 상황 때문입니까? 의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린 극한의 상황에서 시인이 여호와를 부르며 구원을 호소합니다.

 

거짓과 아첨하는 말이 난무하는 땅(2-4)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다들 자기 말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말을 꺾는 일입니다. 자신들의 말에 스스로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ㅍ빡하는 수단은 말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속이 텅 빈 헛된 말로 피해를 주고 감언이설로 마음을 흐리게 하며,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2-4)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 자취를 감춘 땅에서 세력을 떨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2).

다윗이 말하는 거짓말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공허하고 가치 없는 말입니다.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남을 속이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웃에게 부드러운 입술로 말합니다.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매끄러운 말로 마음을 훔칩니다. 그뿐 아니라 ‘두 마음으로’ 말합니다. 두 마음은 둘로 나뉜 마음, 이중 잣대를 가진 마음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의지, 양심, 지혜의 자리로서 생명의 중심 기관인 심장을 뜻하여 생명과 직결됩니다. 또한 마음은 생각이 만들어지는 곳이며, 한 인간의 의사결정기관입니다. 그런데 이중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땅을 차지했으니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 사람 사는 땅에서 사라졌고, 그래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1).

다윗은 ‘인생 중에’,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을 치고 들어와 맹위를 떨치는 자들과 거짓되고 아첨하는 말과 두 마음의 생각을 가진 무리를 특정하며 한탄합니다. 악한 행위 이전에 사람의 생각과 말의 본질이 갖는 위험성을 더 큰 문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제거해주시기를 여호와께 간청합니다(3).

악행의 근원인 말의 근원적인 기관을 끊어주시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간청입니다. 특히 ‘자랑하는 혀’는 거만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는 말들을 모조리 일컫는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아첨하는 말만큼이나 제거되어야 할 악이 교만한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말을 통해 세력을 키워 힘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그릇된 말로 구축한 힘을 가지고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을 억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그들의 허황되고 교만한 말이 근절되기를 요청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오만함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4).

거만한 언어를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말을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고 말로 무엇이든 다 성취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누가 우리의 주님인가?’라고 질문하며 오만함의 극치를 보이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우리 주’(8:1)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과 정반대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순결한 말씀과 구원(5-6)

악인의 말에는 온갖 거짓과 불순함이 섞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곱 번 제련한 순수한 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켜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악이 횡행하고 의의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진실함을 지켜 가야 합니다.

5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5-6)

여호와가 주님인 것을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의 말을 인용한 이후에(4), 다윗은 예언자가 계시 받은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비참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열망하는대로 내가 구원할 것이다’(5).

여호와가 말씀하신 강력한 두 문장이 눈에 띕니다. ‘이제 내가 일어날 것이다’, ‘내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문장이 또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문장 앞에 ‘이제’(또는 ‘지금’)에 해당하는 부사 ‘앗타’ 때문에 생생한 현장감이 전달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가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위해 친히 개입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개역개정)라는 말을 직역하면, ‘내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1)라는 외침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정확하게 실현됩니다. 다윗은 예언자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현실화할 것을 믿고 확신하며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여호와 말씀의 순결함과 완전함을 고백한 말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가치 없는 거짓말이나 겉만 번드르르한 아첨의 말, 두 마음을 품은 말로(2-3) 득세한 자들과 대비됩니다. 다윗은 일곱 번이나 정련한 은처럼 흠 없고 허위 없는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에 그분의 구원을 믿습니다.

 

비열한 자를 속에서도 안전을 확신(7-8)

교만한 세상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악이 횡행하며, 거짓과 처세에 능한 자들이 득세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자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은 의인들을 지키시고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7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7-8)

긴박한 외침으로 도움을 청했고(1),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구원의 확신을 표명했습니다(5-6). 이제 한 번 더 응답에 대한 확신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말합니다. ‘여호와여, 당신만이 그들을 지키시고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우리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7).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순결하심과 완전성을 믿기에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2인칭 독립인칭대명사 ‘당신’을 첨가하여 그 누구도 아닌 ‘여호와 당신만이’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윗이 살던 ‘이 세대’는 거짓과 속임과 아첨의 말이 난무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다윗도 우리도 모르는 감추어진 미래의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보호가 지속될 것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보는 세상은 여전히 악합니다.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인생 중에’ 높임을 받으며 날뛰는 세상입니다(8).

악인들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악인들이 마치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기막힌 세상입니다. 다윗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악이 곳곳에 만연합니다. 야비한 인간들이 창궐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기도는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사방으로 미쳐 날뛰는 사회일지라도 비참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는 시들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세상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말들로 넘쳐날지언정 정련되고 순수한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된 모든 말들을 제거할 날이 도래할 것을 꿈꾸며 기대하도록 마음을 붙들어줍니다.


 교회에서조차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의 지혜와 방법을 동원하고 입으로 시인한 것을 행위로 부인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실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악을 이겨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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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1-01)


꺾이지 않는 소망

시편 11편 1-7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만, 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에는 흔들리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진리가 아닌 부분은 진위나 흑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겸허히 반응하려면 어떤 훈련이 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시는 위기에 처한 시인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시입니다. 사회의 기초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탄식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기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위협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굳게 믿고 구원의 주를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피신한 다윗(1-3)

사람들은 옆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때,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서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께만 피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피할 곳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참되게 현실을 돌파하는 길입니다. 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느낍니까? 도우실 수 있는 참 피난처, 하나님께 피하시길 바랍니다.
1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3)
다윗은 첫마디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이라고 고백합니다. 원어성경에서는 부사구 ‘여호와께’를 맨 앞에 위치시켜 강조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여호와’가 자기의 은신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당한 어려움 때문에 여호와 임재의 상징인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하며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는 뜻인지 모호합니다. 시편에서 이러한 표현은 도피처를 찾을 때 문학적인 습관처럼 사용되고 있으며(7:1; 31:1; 64:10; 71:1), 현재의 문맥에서는 둘의 기능적 차이를 구분하는 것보다 통합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후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이상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내게 말할 수 있느냐?’(1b) 질문에 분노가 섞인 듯합니다. 누군가 다윗에게 ‘새처럼 너희의 산으로 도망하라’(1c)고 말했습니다. ‘너희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이 친구들의 말인지,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인지, 누군가의 조롱 섞인 충고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상황이 다윗을 추적하던 사울과 관련된 맥락이라면, 다윗이 사울에게 사냥꾼이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듯이 벼룩 한 마리 같은 나를 잡으려고 나를 찾아 나섰느냐고 질문한 상황을 연상시킵니다(사무엘상 26:20).
다윗이 자기의 위기 상황을 분명히 직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기에서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고 냉정해지는 것은 쉽지 않은데 다윗은 도망치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를 은신처로 삼고 여호와께 피할지언정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악인이 이미 활을 당겨 공격할 준비를 끝낸 상황입니다.
‘보라, 그 악인들이 활을 당겼다’(2a). 개역개정은 감탄사 ‘보라!’를 생략했지만 이 감탄사는 놀람과 두려움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더군다나 ‘그 악인들’이라고 정관사를 붙여 악인들을 특정하고 있기에 훨씬 생생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2cd).
다윗은 위험하고 절박한 이 상태를 정확히 자각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 악인들이 정직한 자들을 겨누고 있으니 불안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입니까? 다윗은 혼잣말로 탄식합니다. ‘기초가 무너지는데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3) ‘터’, 곧 ‘기초’가 무너졌습니다. 기초 질서가 무너져 법과 공의가 무너진 상태를 표현한 은유입니다(시편 75:3; 에스겔 30:4).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새번역), 즉 법과 질서가 무너져 악인들이 어두운 데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과 의인들을 죽이려는 위기 상황입니다.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기초적인 체계들이 흔들리는 상황에서(참조. 에스겔 30:4) 의인의 무력감은 커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말하지만(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이 질문은 예나 지금이나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정의는 항상 늦게 도착하니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까?
 

성전과 하늘에서 감찰하시는 여호와(4) 

성도들은 썩어가는 세상을 보며 냉소와 체념과 한탄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꿰뚫어 보시고 구석구석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잠시 이기는 듯 보이더라도 이에 영합하거나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 탄식하야 합니다.
4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다윗은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께 시선을 고정하며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회복합니다. 자기 시선을 위협적인 적들에서 하나님께로 고정합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도다. 여호와가 하늘 보좌에 계심이여 그가 인생들을 통촉하시고 그의 번쩍이는 눈으로 감찰하신다’(4).
거룩한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는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입니다. 성전은 이 땅에서 하나님 임재의 처소이자 이스라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은 건물을 초월하여 하늘 보좌에 계신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 끝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 초월적인 전능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지극히 높으신 이’(시편 7:17)로서, 세상을 판결하시고(시편 7:6) 지상 성전에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인식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가까이 계시면서 동시에 멀리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시인을 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지상 성전과 하늘보좌에 계신 여호와가 인생들을 치밀하게 주목해서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감찰하시다’라는 말은 검사하고 조사하고 심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안목으로 감찰하신다고 할 때, ‘그의 안목’은 문자적으로 ‘그의 눈꺼풀’입니다. 이 단어는 ‘빛을 발하는 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가 빛나는 눈으로 치밀한 조사를 하십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땅의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조목조목 사람의 사정을 살피시는 분, 곧 통촉하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멸망과 의인의 안전(5-7)

악으로 잔을 채운 자는 심판 때 그 잔을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행하는 자는 그분을 뵈옵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몸과 마음의 잔에 무엇을 채우며 살아갑니까? 세속의 욕심을 채운 자는 진노의 잔으로, 정직과 신실을 채운 자는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 편이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5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5-7)
악인과 의인을 다루시는 여호와의 공정함과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고백합니다. 다윗은 앞서 여호와를 인생들을 속속들이 조사하시는 조사관처럼 고백했는데, 동시에 의인을 시험하시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들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을 마음속 깊이 미워하십니다(5). 의인을 감찰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감찰하다’라는 말은 금속을 녹여서 불순물을 없애고 검사하는 뜻을 포함하기에 의인에게 좀 더 순도 높은 정화를 목표합니다. 어쩌면 의인이 당하는 삶의 고난은 삶의 순수성을 높이는 훈련일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들과 폭력을 일삼는 무리를 몹시 싫어하시며 악인들에게 그 어떤 것도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악인들에게 줄 것이 있다면, 불시에 덮치는 그물이며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이며 태우는 바람입니다. 이것들이 악인들의 잔에 채워질 소득입니다(6).
다윗은 악인에게 내려질 여호와의 심판을 확신합니다. 비처럼 쏟아지는 불과 유황, 불태우는 바람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을 연상시킵니다(창세기 19:24-25). ‘유황’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불입니다(창세기 19:24; 에스겔 38:22; 누가복음 17:29; 요한계시록 9:17-18). 이 모든 일들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새들을 잡기 위해 던지는 덫 같습니다. 비처럼 내리기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잔은 구원의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기 꾀에 넘어져(시편 7:16) 심판받는 차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직접 행하시는 심판입니다. 악인들과 폭력을 즐기는 자들을 미워하시는 여호와(5)가 그들의 철제한 파멸을 어떻게 실행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정의로우시고 정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7a). 번역 과정에서 소실된 이유 접속사 (키)가 7절 맨 앞에 위치하므로 6절과 7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악인에게 무섭게 쏟아지는 불과 매우 대조되는 분위기입니다. 여호와의 정의로움 때문에 정의로운 행동과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라(7b) 선언하며 마무리합니다. ‘정직한 자’는 올바르고 비뚤지 않고 곧은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고백적 선언은 첫 소절, ‘정직하다’와 서로 호응하여 의로우신 여호와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 정직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묘사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실질적인 힘이 작동합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실제적인 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변호를 받는 것이요, 구원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개입을 알기에 ‘여호와께’ 피신했다고 말한 것처럼(1), 그는 위기 상황에 던져졌어도 여호와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의인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다른 피난처를 생각하라며 유혹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고난의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만 피난처 삼겠다는 시인의 결기를 배워서 우리도 단호하고 의연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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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10-01)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님

시편 10편 1-18절


말씀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의 앞길에는 환란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계속해서 세상 가운데 역사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잘 될 것야!’라며 희망의 기대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지 않고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이 ‘여호와여 어찌하여’라고 질문하며 환란의 때에 멀리 숨으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질문하는 호소하며 악을 꺾고 처벌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탄식시입니다. 시인은 생생하게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솔직하게 악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악을 갚아주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탄식(1)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악인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상황에서 항상 손해를 보고 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침묵하고 숨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심판하실 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시인은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여 멀리 서 계십니까, 숨으십니까?’ 시인은 자기의 불행 그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숨으심, 곧 하나님의 부재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무참한 고통에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확신하건만 그 분이 숨어계신 것 같습니다.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어찌하여’라는 시인의 질문은 여호와를 향한 비난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악인들의 포악함을 고발(2-11)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통치하신다면 왜 세상에 악이 성행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는지에 대한 주제는 자주 떠오르는 화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상 속에 존재하시면서 상상 속에서만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기다린다면 모든 구부러진 것들을 바로 잡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2-11)

시인은 ‘환난의 때’ 왜 여호와가 숨어 계시는지 따져 묻고서(1), 환난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듯 악인들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악한 자의 교만 때문에 가련한 자가 심하게 압박당합니다. 이 때문에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엎어지기를 요청합니다(2).

악인의 특성을 교만으로 꼬집습니다. 악인의 거드름피우는 거만함이 ‘가련한 자’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습니다. ‘가련한 자’는 주로 ‘가난한 자’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로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하게 멸시하는 교만한 악인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음모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요청합니다. 악인에 대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얼굴을 드높이 쳐든 악인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합니다(3). ‘마음의 욕심’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동의어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악인은 교만한 얼굴을 하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의 모든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4). 악인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돌봄도 없고, 어떤 개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악인의 길은 언제나 번성하고 주님의 심판은 높기만 해서 악인에게 미치지 못하여 악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언제나 비웃고 경멸한다(6)고 탄식합니다.

본래 의인의 길이 견고하고 번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악인이 굳건하게 사는 것이 시인은 고통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악인들의 말은 점입가경입니다. 악인이 마음속으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6). 악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 포악이 충만합니다.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 곧 속임과 위법적인 행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7). 한마디로 시인이 보기에 악인의 말과 행위는 환난과 시련의 원천입니다.

시인은 은유와 직유를 통해 악인의 본성을 계속 열거합니다. 악인은 마을의 구석지고 후미진 골목,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고, 희생자들을 비밀리에 지켜봅니다(8). 악인은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 덮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다가 ‘가련한 자’를 사로잡습니다(9). ‘가련한 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시인의 눈에 악인들은 유달리 ‘가련한 자’를 자신의 포획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련한 자’들은 악인들의 포악스러움 앞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10). 더군다나 악인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셔서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11). 그러니까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통치를 멈추셨고, 세상에 관심도 없으시고,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면 악인들의 이러한 확신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활동도 안 하고 계신 것입니까? 시인의 마음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위한 기도(12-14)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것 같을지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세상이 점점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정의 실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변에 전쟁 같은 경쟁에서 떠밀려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악을 갚아주실 하나님에 대해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평한 상황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2-14)

시인은 더 이상 악인의 활동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침통해하며 우울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며 재촉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을 드십시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12). 시인은 하나님 손의 힘과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악인을 체벌하시기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시인은 ‘가련한 자’들을 짐승 사냥하듯 포획하는 악인들(9)의 흉악스러움을 처벌해주시길 재촉하고 심판을 청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악인의 오만함을 고발하면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13, 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말에 반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은 하나님을 믿기에 아룁니다. ‘당신은 고통과 번민을 보셨습니다’(14a). 시인은 세상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빠짐없이 보고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고통과 번민을 주의 손으로 갚으실 것이고, 불행한 자가 주를 의지하며, 이미 고아를 도우셨다(14bcd)고 증언합니다. 시인은 최우선적인 도움을 받아야할 고아와 불행한 사람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회복될 것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통치와 심판을 확신(15-18)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하나님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기대와 달린 그들을 보시면서 비웃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5-18)

시인은 가련한 자, 불행한 자, 가난한 자, 고아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악인의 심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명령형으로 여호와께 요청합니다. ‘간악한 자’와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인의 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15), 시인의 요청은 대담합니다. 이는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악인들의 악을 하나님께서 찾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은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11)고 말하지만, 시인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 어떤 악도 하나님에게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끝까지 찾아 처벌하시고 끝장내시기를 바라고 믿는 시인의 언어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하는 찬양으로 바뀝니다(16-18). 시인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 선포합니다(16). 지금까지 여호와의 왕권을 암시적으로 말했지만, ‘여호와는 왕이시다’라는 직접 진술이 시편에서 처음으로 천명됩니다. 시인은 옛적 조상들이 출애굽할 당시 애굽의 악하고 강한 군대와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심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건넌 후 구원에 감격하여 ‘여호와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출애굽기 15:18)라고 노래했습니다. 시인도 그 신앙의 전통을 따라 이 땅의 모든 악한 나라와 통치자들을 완전히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고한 믿음을 재천명합니다. 여호와의 왕권을 이스라엘 땅에만 제한하지 않고 온 세상 끝까지 박해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왕권을 소망하고 확신합니다.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지만, 이름 부르기를 순서상 뒤에 위치시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원을 당신이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여!’(17) 시인은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을 강조하기 위해 문장 맨 앞에 두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횡포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일하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시고, 귀기울여주실 것입니다(17b). 또한 고아들과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여호와가 심판하시고,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강자들이 더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18). 이것은 가난한 자들, 고아들, 압제 당하는 자들을 위한 악인의 심판을 열렬하게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해주시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희망과 기대를 끝까지 붙듭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11)고 말하는 악인의 조롱에 시인은 휘말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믿는 시인의 신학적인 입장이 오롯이 반영되었습니다. 악이 당장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로운 재판장이며 왕이신 하나님의 신성한 원수 갚음의 날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랜 기간 고통과 고난에 처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잊어버리는 법을 모르십니다. 인내를 통해 더 성숙한 기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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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9-01)

 


결과를 아는 여유

시편 9편 1-20절


참된 빛은 번쩍거리지 않는다며 ‘지금 너무 눈부시고 찬란한 빛을 경계하라’던 박노해 시인의 시구처럼, 한낱 사람인데 별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별들의 진위를 가려 그 광도를 조절하실 것입니다. 가짜 변들은 꺼뜨리시고 숨은 별들을 띄우실 것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악인을 심판하시며 압제 당하는 자들의 요새가 되시며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원수를 고발하고, 구원을 요청하며, 찬양과 신뢰를 고백하고, 맹세를 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다윗은 압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무죄한 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찾아내 심판하심으로 정의가 성취되기를 희망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주님을 찬양(1-4)

하나님의 원수들은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의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고하게 공격을 받고 불의한 일을 당하는 것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성도들의 송사에 대해 의롭게 판결해 주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찬양합니다.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1-4)

본 시에는 감사와 찬양도 나오지만 간구도 나옵니다. 현재 다윗이 간구하는 맥락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어떻게 봐야할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다윗은 감사와 찬양하겠다고 선언하며 찬양을 시작합니다.

(1)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찬양(1-2)

두 절의 시행은 각각 히브리어 첫 자음 ‘알렙(א)’으로 시작됩니다. 각 시행의 ‘알렙’은 모두 1인칭대명사로서 ‘내가 찬양합니다.’, ‘내가 전합니다.’, ‘내가 기뻐합니다.’, ‘내가 찬송합니다.’로 시작하여 모두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다윗은 ‘전심으로’, 곧 ‘내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모든 일들을 자세히 말하겠다는(1)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표현했습니다.

이후 다윗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 지존하신 분, 곧 주님의 이름이라는 표명입니다(7:17; 47:2; 78:35). 그리고 곧바로 가장 높으신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양할 이유를 제시하듯 주님의 행하신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찬양합니다.

(2) 정의로운 판결을 하신 여호와를 찬양(3-4)

3절의 시행은 둘째 자음 ‘베트(ב)’로 시작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기이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말하는데, 3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원수들이 이방나라들이 침략했으나, 주님 앞에서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는 일입니다.

다윗은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 당신 앞에서 멸망할 것입니다.’(3)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보좌에 앉으셔서 나의 송사와 판결을 내리실 때, 정의로운 판결을 하시기 때문입니다.’(4) 이것은 다윗이 법적인 송사에서 재판장이신 주님의 개인을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원수의 파멸을 아직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며 표명한 것입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열국을 판결하시는 여호와(5-8)

하나님께서는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 완전히 살라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후에 후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원수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뿌리째 뽑힌 나무나 풀들이 다시 살 수 없듯이 주께서 심판하신 성읍들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5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5-8)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하신 일들과 미래하실 일들에게 대한 한 가지 기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에게 과거에 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의 죄악을 물으시고 그 악을 갚으시되 전쟁 등을 통해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1) 악인의 멸망(5-6)

5절 시행은 히브리어 셋째 자음 ‘김멜(ג)’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주님이 열방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셔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음을 선포합니다(5). 다윗은 범세계적인 하나님의 통치권과 열국을 심판하실 대법관으로서의 주님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옛적 이스라엘을 위해 원수와 뭇 나라들을 멸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그 이름을 지우셨다는 것은, 악인들이 후세대에 의해 잊힌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던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 철저한 파멸을 뜻합니다.

다윗은 곧이어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했고, 주님이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합니다(6). 다윗은 옛적 조상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심판으 자기 백성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의 도시를 파괴한 일뿐 아니라 그들이 도무지 회복할 수 없게 만드신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름’을 지우신 것처럼(5), ‘기억’에서 지워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 거주할 때 아말렉 족속에게 내린 저주였습니다(출애굽기 17:14). 그러나 이때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모세를 제외한 백성들은 똑같은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신명기 17:14). 언약 백성도 하나님을 떠나면 공평한 재판장의 판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2) 공의롭고 정의로운 판결(7-8)

7절은, 심판을 위해 보좌를 준비하시고 영원히 앉으시는 여호와를 상상하는 묘사입니다(7). 여호와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8). 지금까지 다윗은 여호와를 ‘당신’으로 호명하며 관계적 거리를 좁혔지만, 이제 3인칭으로 ‘여호와’를 언급하면서 객관적인 거리를 설정하고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말합니다. 개인의 송사를 변호하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4)는 온 세상을 재판하실 하나님으로 확장시킵니다. 무엇보다 심판을 위해 여호와가 보좌에 ‘영원히’ 앉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태초의 시간부터 미래의 알 수 없는 시점까지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9편을 기록한 시인도 그분이 공의와 정직으로 만민을 심판하고 판결하실 것을 믿습니다.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는 시온의 주를 찬양(9-14)

고대 왕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들 중에 하나는 백성을 재판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세상 왕들은 제대로 된 심판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공의로운 심판으로 선한 힘이 없는 자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다윗은 구원받는 날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저 악인들이 유린하는 시온의 성전에서 구원의 역사를 다 전하겠다고 선포합니다.

9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9-14)

하나님께서는 주를 찾는 사람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기에, 주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주님만 의지합니다. 연약한 자들이 언제든지 문을 두드려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피난처를 제공해 주십니다. 소리 없이 사라진 억울한 빛들을 기억하시고, 작은 신음도 놓치지 않습니다.

(1) 압제 당하는 자의 요새(9-10)

다윗은 압제당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해 여호와가 요새가 되어 구원해주시길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보좌에 앉으신 의로운 재판장의 비유로 말했다면, 이제 여호와가 ‘요새’,곧 ‘높은 곳’에 위치한 ‘피난처’ 되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9).

다윗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압제당하는 자의 높은 요새가 되셔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당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10).

(2)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심(11-12)

다윗은 ‘시온’에 앉으신 이, 곧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열방 중에서 선포하자고 청합니다(11). ‘시온에 계신 여호와’(11)는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12)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12). 시인은 하나님을 타인을 해치는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시고 보복하시는 피의 보복자로 묘사합니다. 이는 압제 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를 잊지 않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보복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3) 시온의 문에서 구원을 기뻐함(13-14)

이제 다윗은 간절하게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아룁니다(13-14).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나의 고통을 보십시오.’ 이렇게 부르짖는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을 봐주시기를 기도합니다(13).

다윗은 주를 향한 모든 찬양을 속속들이 전부 전할 수 있도록, ‘시온의 문’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14). 시온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인 만큼 시인은 ‘시온의 문’과 ‘사망의 문’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켜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보좌를 강조합니다.

 

악인과 이방 나라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15-20)

악을 행한 자들은 그 악이 자신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모든 이방 나라들이 알게 하십니다.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다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결과입니다. 악인의 심판과 함께 의인의 구원은 동전에 양면과 같습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15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17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15-20)

여호와께서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시면 다윗은 사망의 문에서 일어나지만(13), 하나님을 잊은 열방은 심판을 받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찮은 인생인지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1) 악인의 멸망(15-16)

악인들과 이방 나라들이 자기들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 멸망하기를 바랍니다(15-16; 참조. 5:11). ‘열방은 자기들이 판 웅덩이에 빠졌고 자기가 숨긴 그물에 발이 걸렸다’(15). 평행을 이루는 ‘웅덩이’와 ‘그물’은 둘 다 짐승을 잡기 위해 사냥꾼들이 만드는 함정입니다. 다윗은 열방이 자기들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을 여호와의 심판 때문이라고 믿습니다(16).

(2) 이방 나라의 심판 요청(17-20)

악인들과 하나님을 잊은 열방의 최종적인 심판과 멸망을 간청합니다. 그들이 ‘스올’, 곧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청합니다(17). 스올은 어두운 땅이며 죽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궁핍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실망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18).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궁핍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빈곤은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인생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시오’(19a), ‘인생’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함,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힘자랑하는 ‘이방 나라들’(열방)이 ‘사람’일뿐임을 각성시킵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착취와 억압으로 고난당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두려워 떨기를 간구합니다(20).


오늘날에도 공의로 세상을 다스려주시길 탄원하는 기도가 만연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를 섬기는 자들을 어떻게 보호해주는지, 주를 거역하는 자들을 어떻게 멸망시키는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큰 일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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