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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6-01)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

고린도후서 6장 1절- 7장 1절


은혜는 성도의 존재 기반이며, 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은혜의 직책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지만, 대가를 치를 만한 일이었다고...

 

  • 5:20-21과 연결해 화목 사역자로서 독자를 권면합니다. 이전 설명의 요약과 적용입니다. 네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2절은 독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둘째, 3-10절은 바울의 사역 변호를 다시 언급합니다. 앞부분 내용의 재진술입니다. 셋째, 11-13절에서 사역 변호에 근거해 자신을 영접하라고 독자에게 요청합니다. 넷째 14-7:1에서 믿지 않는 자와 함께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구체적 적용의 하나다.

 

권면 2: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말라(1-2)

우리가 주의 일꾼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목사 안수증이나 어떤 학위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살전 2:19). 이처럼 우리가 전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영혼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친필로 만들어 주신 자격증이요 추천서입니다.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1-2)

 

앞부분인 고린도후서 5:20-21에 이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화목 사역자로서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 증거로 현재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무위로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역시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곧이어 이사야 49:8 인용과 그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부연합니다(2). 진지하게 권면하고 ‘지금’이라는 때를 강조한 것을 보면, ‘그 때’ 있을 주의 엄위한 심판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서 독자에게 경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5:10).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부각하며 반응을 요구합니다. 일부 불순종하는 자들과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경고하고 있지만, 바울에게 돌아온 교회에 대해 감사하고 그들을 향한 온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3-10)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을 말합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고 성장시켰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은 불신한 것입니다.

 

3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3-10)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은혜로 자녀 삼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일입니다.

 

(1) 바울의 사역 변호(3-4a)

 

바울의 사역 변호가 다시 이어집니다.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자신의 사역이 비난받지 않게 하기 위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3). 여기에는 장사꾼처럼 복음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은 진리의 차원(1:17)과 무보수로 고린도 교회를 섬긴 사역자로서의 삶의 차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11:8-9). 바울은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자들처럼 자신을 추천한다고 합니다(4a).

앞에서 자신의 사역 변호를 자천이 아니라고 말한 것(5:12)과 비교하면 일관성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사역 변호는 철저히 거짓 사도들 영향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들처럼 인간적 조건들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겠다는 말이며, 참 사역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2) 구체적 예들(4b-10)

 

4a절에서 말한 ‘모든 일’의 구체적 내용을 소개합니다.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역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입니다(4b-5).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입니다. 편지 첫 부분(1:3-11)과 4:7-9에서 말한 내용과 잇닿아 있습니다(참조. 고전 4:9-13). 이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한 태도는 정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좌우에 의의 무기를 통해서 사역했고 영광과 욕됨이나 악한 폄훼와 선한 칭찬을 함께 받으며 사역했습니다(6-8a).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속이는 자와 이름 없는 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들, 징계 받는 자들, 근심하는 자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자고 그분이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분 앞에서 살아있는 자고, 죽임 당하지 않으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진리로 부요케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관점을 대조함으로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를 핵심으로 한 표현입니다.

이런 바울의 삶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합니다. 첫째, 하나님/예수의 사랑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의 소명과 독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셋째, 미래 부활의 소망과 하나님께 받을 칭찬과 인정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거짓 사도들과 대조됩니다(참조. 10-13장).

 

권면 3 : 바울에게 마음을 열라(11-13)

복음은 우리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며,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기에 새 언약의 복은 옛 언약인 율법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신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약속을 전하는 직분은 세상에 있는 어떤 직분보다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11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1-13)

 

사역 변호의 목적을 소개합니다. 독자들이 바울을 더 받아들이기를 바라서입니다.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전달합니다. 첫째, ‘고린도인들이여’라는 호격입니다. 여기서만 사용합니다. 독자의 집중을 유도합니다. 둘째, ‘우리’에서 ‘너희’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우리’의 입과 마음이 독자인 ‘너희’를 향해 열려 있기에 고린도 성도도 바울에게 마음을 더 넓게 하라고 합니다. 사실, 교회의 문제는 바울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한 갈등이나 지금 교회에 존재하는 문제도 독자들이 바울에게 마음을 활짝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2). 셋째, 독자를 복음으로 낳은 ‘자녀’ (참조. 고전 4:15)로 부릅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상기시켜 마음을 더 열어줄 것을 호소하는 표현입니다.

 

권면 4: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라(14-7:1)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현재 정죄와 심판의 일을 하는 옛 언약(율법)의 사역을 감당하던 모세도 그 얼굴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주며 성령께서 직접 효과를 창출해 내시는 새 언약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에게는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겠습니까? 세상의 직업이나 업적이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사역을 하는 것이 최고의 자부심입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14-7:1)

 

질그릇 속 보배처럼 성도의 삶은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비를 품고 살아갑니다. ‘존경과 비방, 영광과 욕됨’, 이런 역설적인 삶은 은혜가 머무는 조건이자, 은혜가 머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5:14)이 바꾼 것은 삶의 목적만이 아닙니다.

 

(1)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a)

 

주제가 사역 변호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메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내용 이해에 몇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본문의 문맥적 연결입니다. 이 부분 주제는 믿지 않는 자와의 관계성인데, 앞뒤 문맥은 바울의 사역 변호입니다. 주제적 불연속성이 있어 보이기에 바울의 다른 편지를 삽입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현 문맥을 떠나 다른 곳에 기록된 사본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정체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불신자를 의미할 수 있지만, 문맥을 고려하면 거짓 사도들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과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묘사하고(11:4), 사탄의 일꾼이라고까지 말합니다(11:15). 진리와 상관없고, 세상 방식으로 일하는 자들이기에 믿지 않는 자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셋째, 다른 멍에를 멘다는 말입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교제나 함께함을 상징합니다. 많은 경우 함께 일한다는 뜻으로 보고 불신자와 동업하지 말라는 식으로 적용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 요소를 고려하면 굳이 일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제와 영향력의 차원에서 거짓 사도들과의 관계성을 끊으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부연 설명(14b-18)

 

불신자 같은 거짓 사도들과 왜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다섯 가지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14b-16). (1) 의와 불법, (2) 빛과 어둠, (3) 메시아와 벨리알,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5)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 나라와 반역의 통치 영역 간의 대조입니다.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는 핵심 이유는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6b; 고전 3:16). 새 언약 약속(겔 36:27-28)의 성취, 곧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그분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여 독자의 상태와 명령의 근거에 대해 부연 설명합니다. 독자 상태에 대한 것은 모두 새 언약을 담고 있는 본문들입니다(16, 17b-18).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함께하시고 ‘하나님 백성’ 관계(32:38; 겔 37:27)를 만들고, 그들을 영접해(20:34, 41) 아버지-자녀 관계(호 1:10)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의무에 대해서는 이사야 52:11을 통해 언약 백성이 부정한 것에서 떠날 것을 말합니다(17a). 새 언약이 성취되었기에 의무와 관련한 말씀도 따라야 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3) 결론적 권면(7:1)

 

그 의무는 7:1에서 결론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이라는 넓은 범위의적용이 가능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참 사역자와 거짓사역자를 분별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주변사람들에게 편지로서 그리스도를 소개시켜주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당신을 살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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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5-02)

 


하나님과 화목을 위한 메시아처럼

고린도후서 5장 11-21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이 바뀐 사람입니다. 바울의 생애를 바꾼 것도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아났고 이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 사역에 수반된 고난과 부활 소망 설명(4:7-5:10)을 마치고, 사역 자체에 대한 변호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분에 대한 변호입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5절에서는 바울의 사역 동기가 메시아의 사랑에 근거해 독자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16-21절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권한다.

 

고린도 성도를 향한 바울의 사역 동기 변호(11-15)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시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의 모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때문에 매사를 바르게 행할 때는 그로 인해 염려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를 자기를 스스로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1-15)

 

바울은 자신이 심판대 앞에 설 사람임을 기억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성도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자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즌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 자랑 또한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미쳤다는 비난이 사실일지라도 그것 또한 성도들을 위한 미침입니다.

 

(1) 독자를 향한 바울 사역의 진정성 변호(11-13)

 

다시 바울의 사역 변호가 진행됩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11). 10절에 언급한 마지막 심판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 표현으로 시작한 것은 바울의 사역을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평가자 하나님 앞에서 알려지고 인정받은 사역자이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양심에도 알려져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11). 복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니 독자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3:1).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사역 내용의 진정성이나 방법의 적절성은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적 조건들로 환심을 사면 그만입니다(12). 그들이 교회를 흔들고 자신을 폄하하기에(13: 미쳤다) 바울은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절에서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자기를 비롯한 동역자들의 진정성을 변호하면서도 거짓 사도들처럼 자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거짓 사도들에게 응답할 거리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에 대해 바울을 인정할 거리를 주는 것도 사실이고, 독자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천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이미 새 언약 사역 내용(3장)과 사역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응답(4장)을 통해 자신이 참 사역자임을 증명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천입니다(4:2).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거짓 사도들과의 차별성을 만들기 위함인 듯합니다. 바울과 거짓 사도들 모두 사역을 하고 자천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다릅니다. 바울은 그들이 폄하하듯 미쳤든지 그렇지 않든지 오직 두 가지 목적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독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13).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가르는 중요한 구분점 중 하나입니다.

 

(2) 바울 사역의 근간인 메시아의 사랑(14-15)

 

왜 하나님과 독자들을 위해 사역하는지를 추가로 설명합니다. 메시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였습니다. ‘강권하다’(쉰에코)는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메시아의 사랑이 강렬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생각과 판단을 배제한 채 감정에만 치우치거나 비인격적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한 논리적 사고가 수반된 결과입니다. 판단과 결정을 의미하는 ‘크리노’ 동사의 분사 형태를 사용해 추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14).

바울의 생각과 판단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메시아 사역의 의미입니다(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사야 53장처럼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방법으로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함께 죽었고(롬 6:3), 어둠의 영역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5:6). 메시아와 연합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고 세상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새 생명 얻은 자가 됩니다. 여기에는 바울과 독자도 포함됩니다. 둘째, 메시아 사역의 결과와 신자 삶과의 연결입니다(15).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었기에 그와 연합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은 자기 대신 죽고 부활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죄의 모습을 포기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죄의 핵심은 창조주 대신 자신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우선시하는 것은 죄와 반대로 사는 것이고, 피조물로서 자기를 사랑하신 분에 대한 합당한 반응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독자들에게 하는 모든 사역과 행동은 메시아의 사랑으로 인한 구원과 그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여러 가치들을 분별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과 바울의 사역(16-21)

예수를 믿지 아니한 사람은 다시 살아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우리의 죗값으로 자신 대신 주님께서 죽으셨음으로 이제부터는 나는 없는 것으로 하고 내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해 나머지 생애를 살아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말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먹으나 굶으나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길임을 분명하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6-21)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의 사역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를 화목의 사신으로 부르신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들과 화목하게 하고,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부르신 사건합니다. 평화를 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평화를 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1)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과 바울의 소명(16-19)

 

메시아의 사랑이 강권하는 것에 따라 주를 위해 살아가는 순종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한 모습은 이제부터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 것입니다(16). 세상 대신 하나님 나라에 속한 관점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다는 말입니다. 어둠의 영역에 대해 주와 함께 죽고 빛의 영역에서 다시 살게 되어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도 이전에는 세상 관점으로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 새로운 관점은 누구든지 메시아 안, 곧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와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이전과 다른 소속과 정체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것입니다(17).

이 관점으로 사역하고 독자를 대하겠다는 말입니다. 한편, 메시아의 사랑의 강권에 순종하는 또 다른 모습은 바울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에 순종하는 모습은 20절에서 설명합니다. 그 전에 바울은 그 직분이 무엇인지 먼저 소개합니다(18-19).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사역과 관련한 모든 것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18). ‘모든 것들’과 기원을 의미하는 전치사(에크)와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 보여줍니다. 사역과 관련해 14-15절은 메시아 중심의 설명인 반면, 이 부분은 하나님 중심의 설명입니다. 둘째, 바울의 사역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의 일부입니다. 화목 사역은 18절에서 소개되고 19절에서 부연됩니다. 두 설명을 정리하면 일련의 과정이 보입니다. (1) 시작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세상과 화목한 것입니다(19). 이 과정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21절 표현처럼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저주와 심판을 받아 죽게 하셨습니다. 죄 용서의 문을 열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모든 사람들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구원의 문과 길이 확실하다는 증거입니다. (2) 사람들에게 화목의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의 길이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 방법입니다(19). 사람들을 살리려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3)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화목의 과정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18). 21절 표현처럼 죄인인 ‘우리’가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4) 화목의 말씀을 ‘우리’ 안에 두어 사역하게 하셨습니다(18).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을 죄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바울의 사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부심을 주고 독자들에게는 권위의 진정성을 주는 내용입니다.

 

(2) 권면 1: 하나님과 화목하라(20-21)

 

18-19절의 화목 사역과 연결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편지의 첫 명령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명령은 이미 하나님 백성이 된 독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상당히 적절한 말입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 과정, 곧 칭의는 일회성 차원이 있지만, 그 관계를 실제로 누리는 화목은 지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볍지 않습니다. 명령 앞뒤로 진지한 내용이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명령은 (1) 메시아를 대신해 화목의 사신이 되어 (2) 마치 하나님이 권면하시는 것처럼 (3) 메시아를 대신해 간청한다고 말합니다(20).

하나님/예수의 직접 명령 같은 엄숙한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이뿐 아니라 명령 뒤에 ‘우리’가 예수로 인해 얻은 구원을 첨가합니다(21). 화목 사역을 설명한 18-19절과 연결된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통해 화목 과정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사역자로 부름 받은 자임을 부연합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거짓 사도에 휘둘리지 말고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명령을 따라 하나님 앞에 충실히 살기를 결정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피조물’(5:17)이지만 이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인도 바뀌고, 삶의 방향도 이유도 동력도 목적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져온 놀라운 역사요, 창조다. 주님을 만난 이후 내게서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을, 그 화해를, 그 변화를 전하고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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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5-01)

 

 


영생과 최후 심판을 준비하는 삶

고린도후서 5장 1-10절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다. 바람, 하중, 진종,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다.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신앙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에게 그 내력은 무엇이겠습니까?

 

  • 앞에 4:16-18과 연결해 현재와 미래 소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설명과 맥을 같이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5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를 기반으로 현재의 탄식 상황 속에서 미래 부활을 간절히 기대한다고 합니다. 6-10절은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 소망을 품은 삶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사역 차원뿐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의 실제를 소개합니다.

 

현재의 탄식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1-5)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창조의 원형인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호화 주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1-5)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육체가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육체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나라에 육신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 낙심하지 않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1)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18절과 연결해서, 계속해서 부활 소망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이어갑니다. 새 언약 사역 과정의 고난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 문맥, 그리고 바울과 동역자를 의미하는 ‘우리’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생명과 관련한 두 차원 중 예수님과 연합해 미래 부활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의 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간적 지속성과 가치 경중에 집중한 16-18절에 비해 이 설명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몸을 집으로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없는 표현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처럼 부활 이후에도 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몸은 다릅니다. 현재의 몸이 임시로 거주하고 무너질 운명을 갖고 있는 장막이라면, 미래의 몸은 영원한 건물 집입니다. 지속성과 안정성이 다릅니다.

둘째, 바울은 땅과 하늘의 대조합니다. 현재 몸을 땅의 것으로 말하고 부활의 몸은 하늘의 것으로 표현합니다. 소속과 정체성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땅에 속한 자였기에 후손들도 땅에 속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담 메시아가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그에게 속한 자들은 하늘의 생명과 몸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고전 15:47-50).

셋째, ‘손으로 짓지 않은’이란 표현입니다. 몸의 기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 표현과 반대되는 ‘손으로 지은’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신적 기원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상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신의 부모에게 받은 몸과 하나님께 직접 받는 몸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부활의 몸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2) 현재의 탄식 상황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2-4)

 

계속해서 바울은 1절의 내용을 부연합니다. ‘탄식하다’를 주동사로 한 주절과 그에 딸린 종속절 구조가 두 번(2-3과 4)반복됩니다. 주절 내용은 육체의 장막에 있는 현재 상태를 전제로 탄식한다는 것이고, 종속절은 미래 부활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앞부분처럼 사람이 거하는 처소로 현재와 미래 몸을 묘사하고 있고 하늘과 땅의 대조를 갖고 있지만, 미래를 소망하는 현재 상태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의 설명은 공간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반역의 나라의 충돌과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반역의 통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와 새 언약 관계 안에 거합니다. 하지만 반역의 통치가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시작되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 완전함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무거운 짐 진 것같이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요소가 있지만, 여전히 망가진 세상에서 질그릇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4:1,7).

바울과 동역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박해와 답답한 일과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온전함을 더 소망합니다. 그 소망은 단순히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마치 죽을 육체가 생명에 의해 삼켜지듯 혹은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을 덧입듯 주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것입니다(고후 3:18; 빌 3:21). 예수님의 재림 때 경험할 것이며,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독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3) 부활과 관련한 하나님과 성령의 역할(5)

 

미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자의 부활을 포함한 구원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메시아를 다시 살려 새 언약 약속을 이루셨고(4:14), 성도들에게 정체성과 미래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십니다(1:21-22; 엡 1:14). 성령은 예수 부활의 능력이며 새 언약의 영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들을 동일한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실 분입니다(3:18; 롬 8:11). 마치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 2:7), 성령을 통해 부활의 몸을 온전히 덧입는 새 창조의 완성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은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 과정을 이루실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고, 그 완전함의 보증인 성령을 경험하고 있는 자입니다. 바울도 그중 하나입니다.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6-10)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 오는 차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땅이 삶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 안에서 이 땅의 삶을 설계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눈에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6-10)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몸으로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 부활의 몸을 입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기쁘게 영접 받을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1) 부활에 근거한 바울의 소망(6-8)

 

지금까지의 설명을 근거로 오늘을 살아가는 바울의 두 가지(6-8, 9-10절) 태도를 언급합니다. 첫째,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소망으로 산다고 합니다. 미래 소망을 주목하고(4:18), 육신의 몸을 벗고 영원하고 신령한 몸 덧입기를 사모한다(2)는 이전 설명의 연장입니다. 그 내용은 ‘담대하다’(타레오) 동사와 함께 지식과 사고의 동사를 통해 두 번 표현됩니다.

6-7절에서는 ‘항상 담대하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탄식과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다는 말입니다. ‘안다’ 동사의 분사형(에이도테스)으로 현재 상태에 대한 지식을 소개합니다. 현재 몸, 곧 장막 집에 거할 때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신의 몸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고 친밀한 교제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을 언급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신자 삶의 한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고 담대하게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미래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예수를 통해 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 과거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의 현재 실제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오늘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담대하다’를 주동사로 사용하고 이어 ‘유도케오’ 단어를 써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선택 내용은 육신의 몸을 떠나 주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보다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가 더 중요하다고 가치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또한 바울이 부활을 기대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버지-자녀 관계‘ 또는 ’사랑을 주고받는 이로서의 관계(새 언약)‘를 온전히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구원의 본질임을 알기에 새 언약의 바울은 오늘을 담대하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활 소망에 근거한 바울의 현재 삶과 그 근거(9-10)

 

둘째, 부활 소망 때문에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씁니다. 바울의 이런 삶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주님과 떠나 있든지 아니면 죽어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있든지 바울의 유일한 초점은 자신을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 방법으로 지금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에게 맡겨진 새 언약 사역을 정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위대로 평가하시는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힘쓴다고 합니다. 선한 행위로 최후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 과정에 참여했다고 해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있을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조심히, 귀히 여기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경험하고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을 담대히 사는 것, 그것이 바울 사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육신을 벗고 싶을 만큼 삶이 고단합니까? 사명이 힘겹습니까? 부활의 약속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합니다. 잠깐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지 않고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영혼으로 준비하며 살아온 당신의 삶을 주님을 다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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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4-01)


그리스도의 진실한 추천서

고린도후서 4장 1-18절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자기 연민’이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인생은 실패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앞부분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 시역이지만, 항상 긍정적 모습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에서 새 언약 복음을 방해는 세력과 이에 반하는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이 설명됩니다. 둘째, 7-15절은 사역에 수반된 고난과 그것을 견디는 목적을 언급하고 그 경험으로 독자와 연결합니다. 셋째, 16-18절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6)

생명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답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1-6)

 

바울의 사역 변호가 이어집니다. 새 언약 사역의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역 과정에서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의 직분에는 영광과 함께 고난도 따릅니다. 바울은 갖은 반대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반은 긍휼이 크고, 맡은 사명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4)

 

‘낙심’(1,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1:3-11과 2:14-16에서 비슷한 상황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부터는 그런 상황에 굴하지 않는 확신과 당당함을 소개합니다.

핵심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 사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1a). 쉽지 않다고 낙심하고 내려놓기에는 그 사역이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1b-2). 숨은 부끄러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묘함과 약빠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과 섞어 전하지 않고, 사람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드러냄으로 자신을 추천하는 것에 더 힘쓴다고 합니다. 자신을 추천한다는 말은 거짓 사도들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그들과 달리 어려울수록 인간적 방법으로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공법으로 진리를 더 진리대로 바르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역 과정의 어려움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3-4).

바울은 이 상황을 복음이 가려진 것으로 묘사합니다.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 편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것은 복음의 광채,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광스런 예수 메시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제는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과 그 영역의 통치 세력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각각 망하는 자들과 이 세상의 신이라고 묘사합니다. 둘 중 누가 더 문제일까를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망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롬 1:28). 사탄은 그 믿지 않는 마음을 더 혼미케 합니다. 에베소서 2:1-3은 이 둘의 관계를 말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어둠의 영역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탄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복음의 진리가 막히고 가려지고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으로 회개한다는 것이 더 신기합니다.

 

(2)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5-6)

 

3-4절 상황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내용을 소개합니다. 복음이 막힌 것이 자신의 무능함이나 전파 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증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를 높여 섬김 받거나 세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메시아가 주님인 것과 바울이 독자들의 종이 된 것만을 증거합니다. 바울의 주인이 둘인 셈입니다. 하나는 독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더 높은 주인 예수입니다. 예수가 주인 것은 이해되지만, 두 번째 표현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독자들을 예수와 동급으로 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신 예수의 섬김을 따라 그들을 섬김다는 말입니다(참조. 요 13:14-15). 예수님을 주로 모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면, 예수를 따라 그분 백성을 섬기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하면서 사역한 것이나, 그들을 배려함으로 방문 계획을 수정한 것도 섬김의 표현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증거는 말뿐 아니라 주를 따르는 삶도 같이 있습니다. 그가 그런 증거의 삶은 산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6). 마치 어둠 속에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듯(창 1:3), 어둠의 영역에 있던 바울에게 예수 메시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자녀’의 친밀한 관계, 곧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바른 증거와 삶을 살게 하는 이유이자 동력입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과 성도들(7-15)

세상에는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눈을 가려 영적 장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들의 영적 눈을 여시고 하나님이 비추시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7-15)

 

바울은 영광스러운 직분자임에도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종 된 태도를 견지합니다. 전해져야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실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상전이 아닌 종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바울의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7-11)

 

3-4절과 연결해 새 언약 사역 과정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고난 상황들과 그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앞 경우는 복음 전파가 막히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라면, 이 경우는 바울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연약한 육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연약하기에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뿐입니다(7). 그렇기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완전히 절망하거나 사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8-9). 오히려 그 고난을 예수를 위해 그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10-11). 그분을 따르고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예수의 죽음이 생명으로 연결되었기에 바울 역시 그 생명의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생명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과정이었습니다. 둘째, 예수의 실제 부활입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통해 믿는 자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고난이 또 다른 이에게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의 완성이 있기에 지금의 고난이 끝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죽음과 생명의 이런 역설적 모습을 사역에 담고 있는 자가 참 사도입니다. 인간적 성공의 모습만을 강조한 거짓 사도와 대조됩니다.

 

(2) 바울의 상황과 독자와의 연결(12-15)

 

‘우리’와 ‘너희’ 표현을 통해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킵니다. 사망이 ‘우리’안에 일하고 생명이 ‘너희’ 안에 일한다고 합니다 (12). 예수님의 죽음을 깊어지는 고난 사역을 통해 그의 생명이 건달되는 실재가 독자와의 관계성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독자들은 바울의 그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환난과 독자의 구원을 연결시킨 1:6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입니다. 장차부활의 날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이 바울과 독자 모두를 예수의 부활과 연합해 다시 살리시고 그분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14).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소망을 증거했고 언젠가 그 증거대로 부활의 실제를 경험하게 될 것을 믿었기에 자신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공유한다고 말한 것입니다(13). 둘째, 독자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고난이 독자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배경으로 독자들에게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한 1:11 내용과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즉, 바울의 고난 사역에 기도 등으로 함께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사역의 긍정적 결과로 감사할 것이 많아지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인간적으로 실패한 듯 보여서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 같은 것이 바로 독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16-18)

성도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초대교회 선배들은 목숨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보다 귀한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명함(名銜)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속사람 보다는 겉사람으로 여전히 행사한다면, 그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날이 갈수록 속 사람이 새로워진다면 그가 참 성도입니다. 그의 영적인 실존이 나날이 강해진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6-18)

 

바울은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하고, 그 사역이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질그릇 같은 겉 사람, 곧 사람의 육체는 사라질 것이지만, 주님을 믿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믿음으로 보고 산다고 합니다.


바울의 행적과 열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드러난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했습니다. 성도들도 그 예수를 알기를, 닮기를 바랐습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광체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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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3-01)


그리스도의 진실한 추천서

고린도후서 3장 1-11절


 

일반적으로 비밀에 부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편지를 ‘공개편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낸 ‘공개편지’입니다. 정성이 가득한 편지는 겉포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내용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어 있으면 언젠간 진짜 모습이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록된 성도이길 바랍니다.

 

  •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음해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사도로서 추천서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야말로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추천서이었습니다. 참된 섬김의 표지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추천서(1-3)

살아가다보면 누군가의 추천장을 써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추천장(推薦狀)’이란 지명도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직장이나 학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추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에게 추천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1-3)

 

2:14-17에 이어 바울의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앞부분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었다면, 여기부터는 고린도 교회 성도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제 추천서 문제로 시작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랑 사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아무 사역자나 받아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거짓 사역자들이 들어와서 점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문제가 발생하자 거짓 교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교회에서 파송하는 사람에게 추천장을 주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이 추천장을 보고서 그 사역자를 인정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교회의 추천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경쟁과 인간적 조건을 중시했던 고린도 분위기와 잘 맞았고 교회에도 통했던 모양입니다(10:7).

 

반면, 바울은 그런 추천서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비록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이기 때문에,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추천서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대응해야 했습니다. 수사적 질문들로 시작합니다. 그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처럼 독자에게 추천서를 보내거나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1)? 수년 전에 교회를 개척한 장본인에게 추천서 요구는 어불성설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형태의 추천서가 있습니다. 바로 독자들입니다. 바울은 독자들을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로 묘사합니다(2; 참조. 고전 9:2). 성도는 바울과 동역자들 마음에 각인된 존재들이며 사랑으로 표현된 사역의 결과입니다. 그들의 사역자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이뿐 아니라, 독자들은 메시아를 드러내는 편지입니다(3). 가장 확실한 추천서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동안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의 진실한 사도됨을 증명하는 ‘추천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메시아로 인한 구원 과정에 참여하고 있고, 구원의 보증인 하나님의영(1:20-21)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먹과 돌판으로 상징되는 옛 언약이 아니라 성령으로 상징되는 새 언약 백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새로운 언약 사역자(4-18)

선물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포장된 것보다 진실적인 내용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려면 자신을 잘 포장하고 멋있게 나타내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내적으로 실력이 없으면 결국 실체가 들어나고 결국에는 무너집니다.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4-18)

 

사도 바울은 복음을 새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섬기는 새 언약의 사역자입니다. 사람의 추천장이나 거짓 교사들처럼 율법이나 문자에 의존한 사역과는 다릅니다. 성령은 살지지만, 문자(율법)는 사람을 정죄함으로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로서 자격은 율법을 통해 사람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1) 새 언약 사역의 자격(4-6)

 

추천서가 왜 필요 없는지를 부연합니다. 사역 자체에 대한 확실성과 자신감 때문입니다(4). 자신감의 시작은 사역의 신적 기원 때문입니다(5). 바울 스스로 시작한 사역이 아니기에 인간적 조건이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사역을 맡기고 이루어 가실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면 됩니다. 진정한 평가와 만족은 그분에게서만 나옵니다. 사역의 기원과 평가에 대한 이 확신 때문에 그는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도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교회에게는 사역 변호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사역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자신감의 또 다른 근거는 그가 예수님께서 가져온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6). 바울은 성령을 새 언약의 대표적 특징으로 묘사합니다. 옛 언약에서는 문자로 쓰인 조문이 언약 관계를 규정하고 유지하는 통로였다면, 새 언약에서는 신자 안에 거하는 성령이 관계를 증거하고 규정하며 미래 온전함을 보증합니다. 새 언약과 성령과의 연결은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며, 예수를 통해 실현되어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실제입니다.

 

(2) 새 언약 사역의 영광스러움(7-11)

 

문자와 성령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를 사역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역시 거짓 사도들과의 대조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새 언약 사역과의 관련성이 적은, 유대교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인 듯합니다. 옛 언약 사역은 돌판에 새긴 문자(예, 십계명)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관계 유지 방법과 그분의 뜻을 어길 때 받을 심판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사역에도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고 내려와 백성에게 말씀을 전할 때 그의 얼굴에 영광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출 34:29-35).

그러나 새 언약 사역은 더 영광스럽습니다. ‘만일 옛 언약 사역이 라면, 새 언약 사역은 훨씬 더~’라는 세 개의 비교 조건문을 통해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새 언약 사역은 성령의 사역입니다(7-8). 옛 언약 사역은 돌판 문자를 통한 것입니다. 기원이 하나님이란 면에서는 같지만, 일의 진행 과정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새언약 사역이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둘째, 새 언약 사역은 생명의 사역입니다(9-10). 옛 언약 사역은 문자조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하지 못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옛 언약 사역은 죽음의 사역입니다. 새 언약 사역은 다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죄 용서와 그로 인해 하나님과 새롭게 맺어진 화목의 관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영광스러웠다면, 생명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셋째, 영광의 지속성이 다릅니다(11). ‘없어짐’과 ‘거함’의 대조로 설명합니다. 모세 얼굴에 있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옛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반응 조건을 핵심으로 하기에 인간의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그 관계 유지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를 맺고도 하나님을 거절한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새 언약은 다릅니다. 비록 관계 유지를 위해 인간이 애써야 하는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새언약 관계는 예수로 인한 죄 사함 이후 얻은 것이고, 그 관계 유지와 보증을 위해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거절하지 않는 한 새 언약 관계는 유지됩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새 언약 사역은 옛 언약 사역보다 훨씬 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역을 위해 부름 받고 섬기고 있습니다.

 

(3) 새 언약 사역의 내용과 그 결과(12-18)

 

앞서 언급한 옛 언약 사역과의 대조를 바탕으로 더 강한 확신으로 자신의 사역을 변호합니다. 바울의 확신과 담대함은 모세의 사역과 비교하는 13절에 나타납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반영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너울로 가렸습니다(출 34:22-35).어차피 사라질 것이지만, 그 끝을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사역은 사람들의 눈을 가린 너울을 걷어내는 길을 전해줍니다. 모세의 사역과 반대일 뿐 아니라 더 뛰어난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임을 감안한다면 모세와의 비교는 놀랍도록 담대한 표현입니다. 개인적 탁월함에 근거한 자만심 표현이 아닙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비교할 수 없는 요소들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첫째 요소는 예수와 모세의 차입니다(14). 모세는 옛 언약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자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4:6). 감히 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전하는 자입니다. 둘째 요소는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새 언약의 성취입니다(15-16).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얼굴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모세가 얼굴에 너울을 쓴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가림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구약성경을 읽고 가르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그 가림막이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연결이 가능합니다. 셋째 요소는 성령입니다(17-18). 가림막을 제거하고 새 언약 관계를 맺는 과정에 성령이 일하십니다. 죄로 인한 심판에서의 자유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의 회복을 경험케 합니다. 넷째 요소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영광스런 미래입니다(18). 신자들은 부활을 통해 영광스런 주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가린 것을 완전히 걷어내고, 그분과 얼굴과 얼굴로 교제하며 영원히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성령은 그 보증이며, 실제로 그 변화를 행하실 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가진 새 언약 구원을 전하는 사역자입니다. 충분히 담대할 만하고 추천서가 필요 없을 만큼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이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않습니다.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가질 감사와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복음으로 당신을 살려주셨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된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들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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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3)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인 성도들

고린도후서 1장 23절 – 2장 17절


타락(추락)은 자기 자리를 떠나고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 확장’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옛 자아들이 활보할 때 교회는 세상에 향기가 아닌 악취만 풍기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여러 내용을 짧게 전달합니다. 첫째, 1:12-22과 연결해 방문 계획 변경과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를 설명합니다(1:23-2:4). 둘째, 여전히 바울에 대해 의구심 품은 자들을 용서하라고 요청합니다(5-11). 셋째, 디도를 통해 교회의 회기 소식을 듣기 전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갔을 때 상황을 다룹니다(12-13). 넷째, 사역에 대해 변호하기 사적합니다(14-17). 앞부분 주제와 구분됩니다. 일차적으로 4:6까지 이어지지만, 길게는 7:4을 거쳐 7:16까지 진행됩니다.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23-24)

복음 사역자는 사역 철학이 필요합니다. 평신도 사역자에게도 사역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의 원리입니다. 바울의 사역 원리가 용해되어 잘 나타나는 본문에서 우리는 건강한 사역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2: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1:23-2:4)

 

사도가 방문 계획을 변경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써서 호소한 것은 독자를 아끼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억지로 그들을 바꾸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고 싶었으며, 격한 마음으로 방문하였다가 영적인 자녀들인 그들에게 상처만 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과하다 싶을 만큼 혹독하게 편지를 썼지만 그 안에는 그들을 향한 사랑과 눈물을 담았다고 합니다.

 

(1)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23-24)

 

12-22절과 연결해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제시합니다. 2:4까지 이어집니다. 핵심 이유는 하나입니다. 독자들을 아꼈기 때문입니다(23b). 24절부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계획 변경의 이유를 설명할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걸고 말한다는 표현입니다(23a). 자기 말이 진실임을 강조하는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표현입니다. 동시에 매우 슬픈 표현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세운 교회에게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바울이 인식하는 교회 상황, 즉 여전히 그를 거절하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과 특히 거짓 사도로 인한 상황이 아주 심각함을 짐작케 합니다.

독자를 아껴 방문하지 않은 이유가 24절부터 설명됩니다. 첫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이 기쁨을 만들어 가는 데 함께하는 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불순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째 방문을 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계속 바울을 거절하자 바울은 맘이 상해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가서 호되게 책망할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먼저 갈 것을 언급한 16절 계획은 그런 마음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가지 않기로 합니다. 교회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불순종하고 있지만, 여전히 믿음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여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2) 방문 대신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2:1-4)

 

독자를 아껴 방문하지 않은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입니다. 24절처럼 바울의 고심과 독자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고심은 ‘스스로 결심했다’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1절). 많은 갈등과 기도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또 다시 고통과 슬픔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상처를 주고 불순종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백성이 된 영적 자녀들입니다. 다시 방문해서 그들과 언쟁하고 서로 상처 받아 기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문제는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바울이 선택한 것은 방문 대신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4). 세 번째 편지는 많은 눈물로 썼습니다. 진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과하다 싶을 만큼 책망했습니다(7:8). 바울도 편지를 쓰면서 교회가 힘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혹시 계속 거절하면 어쩌나 염려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기도로 썼습니다. 바울은 그 선택을 독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방문 계획을 바꾼 이유입니다.

 

의구심 품은 자들을 용서하라(2:5-11)

회개한 성도는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마 6:12,14-15). 또한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사람 앞에서 하는 회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하는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중에 자신에게 대해 의심을 품는 자들을 해야 논하고 있습니다.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2:5-11)

 

시점과 상황이 전환됩니다. 4절까지 방문 계획과 세 번째 편지를 보낸 배경을 다루었다면, 이 부분은 그 이후 교회의 회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대부분은 디도 편에 보낸 ‘눈물의 편지’를 통해 바울에게로 돌아왔지만, 소수가 여전히 불순종을 고집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처리도 중요했습니다. 기존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교회 분열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반대자와 관련한 정황 기술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 아마도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 계속 불순종해서 바울을 지속적으로 근심하게 한 듯합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교회를 근심하게 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반대자 문제가 바울만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상황 해결도 바울과 교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교회가 회개하여 그 사람의 영향력이 작아졌습니다. 그의 태도는 벌을 받듯 교회에 의해 비난과 제지를 당한 듯합니다(6).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반대자와 교회의 처신 여부에 따라 이후 양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단순합니다. 용서하고 위로해서 사랑을 나타내라고 합니다(7-10).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반대자를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그가 너무 근심할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이전 문제에 대해 교회가 회개하고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반대자를 사랑하라는 권면에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용서하면 바울도 용서하고, 그 용서를 메시아 앞에서 한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둘째, 사탄의 계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교회 분열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진리로 거짓을 솎아내는 것은 분명한 진영 구분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끝나 거짓을 제거하면, 분별 과정에서 나뉘었던 아픔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방치하면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사탄의 놀음에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반대자에게 교회가 사랑을 보이라고 권한 것입니다.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에 갔을 때의 상황(2:12-13)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런 사실을 교정할 때,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도록 경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하신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변경하는 일에 매우 신중한 것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고 어떻게 하여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12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12-13)

 

다시 시점 변화가 일어납니다. 5-11절보다 앞선 시점으로 디도 편으로 ‘눈물의 편지’를 보낸 4절 이후 상황입니다. 폭동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습니다. 복음 증거의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 문제 때문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이후 상황은 7:5-16에서 다시 진행됩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 고난이 수반된 순전한 말씀 증거 사역(2:14-17)

하나님 일군의 인식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여서 하나님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의식하며 철저히 종으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내고 전한 말씀대로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4-17)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여전히 바울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내라고 당부합니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받은 벌로 충분하며,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거나 아예 그들이 공동체에서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지혜롭지 못한 방식 때문에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고난이 수반된 사역(2:14-16)

 

자신의 사역 변호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여전히 불순종하는 자들을 설득하고, 이후 언급할 거짓 사도 문제와 관련해 자기변호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역과 관련해 하나님이 행하신 두 가지에 대해 감사하면서 시작합니다(14). 첫째, ‘우리’를 사로잡아 사역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사역의 기원과 특징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듯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절하던 죄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포로가 전리품으로 끌려가듯 그 사역에는 세상에서의 수치와 환난도 있습니다(고전 4:9). 둘째, 각처에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를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메시아를 전하고(1:19; 4:5)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식으로 살기에 그분의 향기가 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에 대해 부연합니다(15-16).

 

(2) 순전한 말씀 증거 사역(2:17)

 

바울은 자신의 증거와 삶을 하나님 앞에서 나는 향기로 표현합니다. 메시아를 담고 있고 그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그 사역이 귀한 향기로 인식됩니다. 모든 사람이 메시아에 대한 증거를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삶 역시 세상이 환호할 만큼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6:4-10). 이런 면에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는 세상 관점에서는 코를 막고 기피해야 하는 사망의 썩은 냄새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냄새와 연결해 자기 사역의 특징을 대조의 방법으로 제시합니다(17). 어떤 이들, 곧 거짓 사도들은 마치 장사치처럼 자신의 인간적 조건들을 떠벌이고, 이를 바탕으로 사역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말합니다. 첫째,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이익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예수 앞에서 전하는 것처럼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사람에게 전했지만, 환심이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 앞에서 하듯 조심히 정성스럽게 전했습니다. 이것은 참 사역자를 분별하는 중요한 조건이며, 사역자도 교회도 들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것을 중요시 여겼다면 세상에서 지탄받는 것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생은 가져야 할 것보다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습니다. 자기 ‘자리’, ‘사명’, ‘형제’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을 살게 한 ‘복음’ 또한 지켜야 합니다. 지켜내기 위해서는 복음에, 믿음에 다른 것을 섞지 않는 ‘순전함’(2:17)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향기 나는 교회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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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2)

 


자신과 사역을 변호하는 바울

고린도후서 1장 12-22절


 

퍼즐은 서로 모양이 다른 100조각이나 1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퍼즐이 서로 다른 모양이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하나하나 맞추어서 완성된 그림이 되어질 때, 참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양한 성도들이 하나하나 맞춰져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클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신실하게 퍼즐을 맞추어가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환난과 위로가 담긴 송영으로 독자와의 연결을 꾀한 바울은 이제 교회에게 자신과 사역에 대해 변호합니다. 7:16까지 이어지는 본문의 첫 시작인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2-14절은 독자를 향한 바울의 태도를 변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했다고 합니다. 둘째, 15-22절은 이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변호합니다. 경솔한 계획이나 개인적 변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전한 복음 역시 일관성과 신뢰성이 있음을 변호합니다.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변호(12-14)

사람들을 대할 때는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신실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했다는 고백입니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없는 것을 과정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양심껏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참 사역자일 것입니다.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2-14)

 

앞 단락에서 환난 때마다 위로를 주심으로 능히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있었던 그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일축시키고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사역 자세에 대한 정당성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의 건실성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향한 바울의 태도 변호(12)

 

‘우리’의 자랑을 소개하여 본격적으로 편지 몸말의 문을 엽니다. ‘자랑’은 거짓 교사들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교회에 떠벌인 것을 배경으로 바울이 그들의 자랑을 부끄럽게 하고 자신이 참 사도임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편지 전체에서 바울의 자랑은 주로 사역과 독자들을 향한 태도를 내용으로 합니다.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와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조와 관련해, 바울은 ‘우리의 자랑은 이것이다. 즉…’ 형태로 전달합니다. 자랑을 먼저 언급하고 내용을 나중에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자랑’을 힘주어 소개하려는 의도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도는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는 추가 표현에서도 확인됩니다. 사도의 양심을 걸고 독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참 자랑이라는 말입니다. 자랑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 방식으로 살거나 사역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는 표현에 하나님의 은혜와 육체의 지혜의 대조를 첨가한 것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독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특별히 너희에 대해서’라는 표현을 추가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인간적 자랑 또는 자신에 대한 그들의 비난에 대해 참 자랑을 소개함으로써 자기의 사역을 변호합니다. 화려한 인간적 조건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독자들을 향해 사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가 제시한 참 사역자를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2) 이전 편지 내용에 대한 변호(13-14)

 

자랑을 통한 자기변호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첫 내용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방문에 대해 썼지만(고전 16:5-9)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은 일부 교인들과 거짓 사도들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방문 계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전 편지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계획 언급이 경솔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 인격에 대한 회의입니다. 계획에 문제가 없다 해도 이행하지 않은 것은 신실하지 않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의 진정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권에 대한 도전은 그의 사역 결과인 교회의 정체성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즉, 신실하지 않은 자가 사도일 수 있으며, 자격 없는 자가 세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소지들에 대해 바울은 이전 편지 내용의 진실성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이전 편지를 읽고 이해한 내용 외에 다른 것을 쓴 적이 없다고 합니다(13). 또한 그들이 온전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도 첨언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는 그날에 독자는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은 독자의 자랑이 되기를 원합니다(14).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기에 오해도 있지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의도와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서 그들이 바울을 자랑하게 되고, 바울 역시 그들을 자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방문 계획 변경과 복음 전파의 신뢰성 변호(15-22)

모든 성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약속한 바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인격에 따라 그 복음에 대한 신빙성이 듣는 사람들에게 좌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능력이 있거나 부족할지라도 사용하십니다.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15-22)

 

자신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에 근거한 것임을 변호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부터 2:13까지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를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게 된 이유로 작용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수차의 방문 계획변경과 관련하여 해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방문 계획을 변경시킨 것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한 변호(15-17)

 

이전 편지 속 방문 계획의 진실성에 대해 계속 변호합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기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얻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가 바울의 권면을 거절하기 이전에 쓴 것이기에, 바울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방문 계획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의 계획은 에베소 → 고린도 → 마게도냐 → 고린도 → 유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15-16)

16절).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와 관련한 여행입니다(고전 16:1-4). 하지만 이 계획은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 계획이 고린도전서 16:59에서 밝힌 내용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거기서는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 고린도 →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주후 53년 여름이나 가을에 에베소를 출발해 고린도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문 계획과 관련해 두 번의 변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전 편지와 다르게 마게도냐를 거치지 않고 고린도에 직행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고, 둘째는 그마저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계획 변경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방문과 관련한 전체 과정의 방향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교회가 고린도전서의 권면을 거절한 사건입니다. 고린도에 갔던 디모데가 아픈 마음으로 바울에게로 돌아와 교회 상황을 전했고, 이에 바울은 예상에 없던 방문, 곧 고통스러운 두 번째 방문을 합니다. 그 방문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때 바울은 15-16절 계획처럼 다시 고린도에 방문해 상황을 종결짓겠다고 말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 설명은 1:23-2:4에서 제시됩니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방문 계획 수립 과정에 문제가 없었음을 먼저 설명합니다(17). 특별히 계획 과정의 무책임성에 대해 변호합니다. 두 가지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계획을 세울 때 경솔하게 혹은 무책임하게 했겠습니까? 또 육체를 따라 계획해서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하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했겠습니까? 모두 독자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계획 과정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2)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일관성과 신뢰성에 대한 변호(18-22)

 

방문 계획을 왜 이행하지 않았는가를(23f) 설명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복음 증거 내용의 일관성을 변호합니다(18-22). 앞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계획 변경은 신실성이 없다는 증거라고 폄하하고, 그것을 통해 그의 사도권과 복음 증거 사역의 신뢰성까지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입니다.

바울은 삼위 하나님께 근거하여 자신의 증거사역의 신뢰성을 설명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18,20-22). 그분은 증거 과정과 관련한 구원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이루시는 분입니다. 오래전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를 증거하는 자들(‘우리’)을 부르시고 사역을 맡길 뿐 아니라, 그 증거 사역을 통해 구원의 실제를 경험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보내 구원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신실함입니다(19-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입니다. 그에게는 ‘예’와 ‘아니오’가 공존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만 있는 신실한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전파로 그를 믿으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21-22). ‘우리’의 증거 사역 결과로 구원 과정에 참여하면, 그 증거이자 미래 과정의 보증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이미 독자들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경험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바울의 사역은 삼위 하나님이 행하시는 커다란 구원 과정 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분들에 의해 시작하고 그분들을 통해 수행하고 그 결과를 그분들이 보증합니다. 사역의 신뢰성에 대해 이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바울의 이런 변호는 교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와 관련해 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입니다. 구원 과정의 전체 그림을 갖고 삼위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의 실제를 경험케 하는 통로가 진짜 사도입니다. 이후 바울의 새 언약 사역 설명과 거짓 사도 비판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둘째, 후대 교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진리를 전하는 자가 참 사역자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위로하거나 교회를 경영하는 능력은 본질이 아닙니다. 진리 전달이 중요합니다.


진실에 응답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도 때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은 더 큰 결단과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삶으로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마음 다해 아멘으로 화답하고, 아멘을 살고, 아멘의 사람이 되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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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1)

 


역경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1장 1-11절


‘제 코가 석자’란 속담은 ‘자기도 어려워 주변을 돌아볼 여우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이 자기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로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자기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네 번째 편지입니다. 1:1-11은 시작 부분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2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와 문안 인사가 있고, 둘째, 3-11절은 하나님을 향한 송영입니다. 메시아 예수로 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경험한 것에 감사하고(3-5), 그 과정을 독자 상황과 연결시킵니다(6-7). 특별히 아시아에서의 환난과 구원 경험을 부연함으로써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합니다(8-11).

 

서신의 서언(1-2)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고난을 제거해 주시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기에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들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 한다면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2)

 

바울은 사도로서 권위와 고린도교회 설립한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책망과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답변을 담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발송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의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악화 되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눈물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후에 감사하게도 그 편지를 통해 교회가 회개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어지럽히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전 문제 상화 해결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과 거짓 사도라는 새로운 문제에 관해 편지를 씁니다. 본문은 그 편지의 시작입니다.

 

(1) 발신자와 수신자(1)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다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됨과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역했던 일 그리고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의 편지 양식을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➀ 발신자(1a)

 

발신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함께 편지 보내는 사람으로 디모데를 소개합니다. 평범한 표현이지만,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사도’라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고린도후서와 관계된 상황에서는 특별히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며 갈등이 일단락되었지만,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므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인정한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이후 전개될 사도권 변호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둘째, 바울과 함께 이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소스데네(고전 1:1) 대신 디모데를 언급합니다. 이렇게 디모데를 언급한 이유는 디모데의 상황이 특별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 간의 갈등과 회복의 전 과정을 경험하고 목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기쁨으로 바뀐 디모데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전하는 증인입니다.

 

➁ 수신자(1b)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묘사합니다(고전 1:2).

이전 고린도전서의 수신자에 대해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고 장황하게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본 고린도후서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백하게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이 해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의 정체성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한 것은 이 편지에만 있습니다. 아마도 이후에 제시할 연보(9:2)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경고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듯합니다(11:10). 또한 그의 편지가 점진적으로 모든 교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회람(回覽)해 가면서 읽기를 원했습니다.

 

(2) 문안 인사(2)

 

바울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이라고 인사를 전합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의 인사는 바울의 초기 서신들로부터 후기 서신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딤전 1:2과 딤후 1:2에는 ‘긍휼’이 첨가되기도 함). 바울이 인사로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동등하게 공급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은혜’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총애,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이며, ‘평강’은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사말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평화와 안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은혜와 평강은 진정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찬송(3-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도 주십니다. 고난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할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따라서 문제는 환난 자체가 아니라 환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3-7)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본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며 겪었던 일들이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1) 메시아로 인한 고난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찬양(3-5)

 

바울의 서신에서 이곳과 에베소서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신령한 복으로 소개하고, 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은 송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영 내용인 바울의 환난과 주의 위로가 이후 내용에서 계속 언급되기 때문입니다(2:14-17; 4:1-5:10; 7:4-16; 거짓 사도와 관련한 10-13장). 송영을 이후 전하려는 내용의 밑그림으로 제공하는 전략적 구성입니다. 송영의 구조 역시 의도적입니다. 환난과 위로의 과정을 하나님 – 바울(‘우리’) - 독자(‘너희’)로 두 번 연결합니다. 첫 연결은 3-7절이고, 두 번째 연결은 8-11절입니다. 3-5절은 하나님과 바울의 연결입니다.

 

송영은 하나님의 속성 묘사로 시작합니다(3). 그분은 우리 주 예수 메시아의 아버지이고 위로와 자비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입니다.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와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아버지, 곧 예수를 통해 구원 과정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둘째, 새 언약 관계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 신자들과 새 언약 관계를 맺은 분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이자 아버지입니다. 또한 새 언약 관계 안에서 신실함과 사랑의 의무를 행하시는 의로운 분입니다. 그 사랑의 의무는 위로와 자비로 표현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4-5절에서 바울(‘우리’)의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먼저 위로와 관련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4).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위로하신 분입니다. 그 위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 환난 받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바울 사역의 핵심 형태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의 관계안으로 들어간 언약 백성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 곧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 역할입니다(출 19:5-6; 벧전 2:9).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이에게 흘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자신과 관련한 이 의무를 새 언약 사역(3:6)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5:18)으로 표현합니다. 한편, 예수와의 연결은 바울이 당하는 환난과 위로가 어떤 의미인지를 서술하는 5절에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메시아의 고난, 즉 그분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위로는 메시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4:11). 제사장 역할을 하는 새 언약 백성의 특권입니다. 이런 면에서 송영은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 변호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2) 환난과 위로를 통해 바울과 독자를 연결(6-7)

 

바울은 자신이 환난과 위로를 경험한 것은 독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 그 연결이 생뚱맞다. 독자 때문에 환난 받은 것도 아니고, 바울의 위로 자체가 독자들에게 구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열쇠는 앞서 언급한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예수와 바울의 사역이다. 바울의 고난은 단순한 삶의 어려움이 아니라 복음 사역과 관련 있다. 이런 고난은 교회도 겪을 수 있다.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과 벗하는 삶을 거절하고 복음의 통로로 살기로 결정했기에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과정에서 교회도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은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더 굳건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망이다(7절). 바울의 경험은 교회를 향한 모범이다.

 

환난을 주시는 목적(8-10)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고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열매를 바라보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롬 5:3-4). 고난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이웃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유사한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 냄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8-10)

 

8-10절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과 하나님의 구원 ‘형제들아…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표현으로 바울의 상황을 독자와 공유한다(8절). 4절을 부연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다. 아주 심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듯 바울 스스로도 살 소망을 접을 정도였다. 상황 자체가 초점이 아니기에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의도는 두 가지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소개하고, 그 상황을 독자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얻은 교훈을 언급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9b-10).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당했고(11:23; 참조. 고전 4:9-13),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경험과 주의 도우심은 마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듯한 경험으로 인식되었고, 믿음과 진리의 관점을 더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역의 모든 초점이 주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언급은 이후 내용을 위한 복선 설정으로 보입니다. 자기사역에 부정적인 일부 교인들과 특별히 인간적 자랑거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 문제에 대해 바울이 사도권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적 조건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그분의 도우심만을 구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역한 자가 참 사도임을 보여주고픈 것입니다.

 

기도 부탁(11)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놓여 보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우실 것을 확신합니까?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독자들에게 기도로 도울 것을 요청하며 자신의 환난 경험을 독자와 연결합니다. 성도의 중보기도는 사역자가 흔히 요청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요청에는 두 가지 의도가 담긴 듯합니다. 첫째, 독자들의 유익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많이 경험해서 그로 인한 감사가 많아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자의 신앙이 더 견고해지는 방법이다. 둘째, 바울과의 관계입니다.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문제 상황에서 참 사도인 바울의 사역에 함께하라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3-11절은 복음 증거 과정에서 경험한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바탕으로 두 가지를 전달합니다. 1) 하나님/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 사역자로서 바울의 사역 변호, 2) 독자와의 연결입니다. 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하고 진리 편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다’는 말이 이렇게 풀어봅니다. 고난이 있으니 위로도 있습니다. ‘무통분만의 시대’는 참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통증이 있어야 통감도 가능하기에, 성도에게 고난은 필연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위로의 샘’입니다. 그 샘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동체를 새롭게 만나고,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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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서론)

 


고린도후서 서론


 

사도 바울은 교회 내부의 반대자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대적들로 둘러싸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헤쳐 나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는 13장으로 구성된 성경입니다. 내용상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을 읽은 사람마다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의 이름

본 고린도후서는 사본들에 의하면 이 서신서에 대해 단순히 ‘고린도인들에게 Ⅱ’라는 표제를 붙입니다. 최고의 사본, 즉 주후 3세기경 사본에서도 나타납니다.

영어 성경에서 긴 표제인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두번째 서신’(The Second Epistles of the Apostle Paul to the Corinthians)으로 표기한 것은 후대 일입니다. 이 서신서가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라는 것과 또는 ‘후서’라는 말이 사용된 유래에 관해서는 아래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바랍니다.

 

고린도후서의 저자

본서의 기록 배경과 내용 등 모든 면에서 고린도전서의 연속인 본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외적 및 내적 증거는 바울이 이 편지서의 저자임을 결정적으로 말해 줍니다.

 

(1) 내적인 증거

 

고린도후서가 바울이 저자임을 가리키는 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우선 그 문체가 바울의 것입니다. 이 서신서는 바울에 대하여 고린도에서의 그의 경험에 대하여, 그 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서신서가 바울의 성질과 개성과 기질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신서에 기록된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이 자연스러운 점은 그것의 진실성을 방증(紡證)하는 것이다.

 

(2) 외적인 증거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썼다는 외적 증거는 사도 시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수의 초기 교부들과 저술가들이 이 서신서로부터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은 이 편지서의 진실성과 완전성에 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이 편지서보다 약 35년 뒤에 기록된,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주후 95년 경)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형편과 꼭 같은 고린도의 형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전에 문제들의 다수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155년 경 사망)는 고린도후서 8장 2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Epsistle 6). 리용(Lyons)의 감독 이레내우스(Irenaeus)는 고린도후서 12:2-4에 기록된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실을 인용하고 언급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00년 경)는 20번 이상이나 고린도후서를 인용합니다. 소위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르타고(Carthage)의 터툴리안(Tertullian, A.D. 220년 경)은 고린도후서를 빈번히 인용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배경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적어도 세 번 방문했고, 세 번, 어쩌면 네 번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에 있은 주후 51년 경 첫 방문 때에 그는 1년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행 18:11). 이때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조직했습니다. 그 후에 종종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 교회와 접촉을 계속하였습니다(고후 12:17). 첫 번째 서신은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오늘날 상실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2년 이상을 보내면서 그 끝 무렵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서신서입니다(고전 16:8).

고린도전후서, 즉 에베소에서 보낸 ‘전서’와 마게도냐에서 보낸 ‘후서’ 사이에는 여러 기간이 경과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유하다가 그 후에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여행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행 19:21). 그러나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생명까지 위협하던 그 당시의 강한 반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행 19:24-41). 에베소에서 겪은 반대는 바울에게 큰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반대자들을 ‘맹수’(고전 15:32)라고 일컬었고, 또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할 때의 상황이 이러하였습니다. 그는 마게도냐로 향하기 위한 승선 항구인 드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전번 편지에 대한 고린도 사람들의 응답에 관한 보고를 가지고 돌아올 디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기대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여(고후 2:13)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는 잇점도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마게도냐로 행하여 그는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가져온 좋은 소식을 바울은 기쁨과 안도의 마음으로 청취했습니다. 바울이 이번에 고린도로 돌아온 것은 두 번째 방문이었던 것 같습니다(고후 2:1; 12:14; 13:1,2). 그는 전번 방문이 실망이었음을 말하고(고전 1:11), 그 후에 견책과 권면의 편지(고린도전서)를 써 보냈고 또 다시 계획한 방문의 준비를 위해 디도를 파견했습니다(고후 8:6; 13:1,2).

고린도후서 2:4에서 바울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고린도에서 보낸 먼저 번 편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편지는 그들을 ‘근심하게’하였습니다(고후 7:8).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이며 이번에 다시 쓴 편지는 따라서 ‘둘째’ 또는 ‘후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 편지 사이에 또 하나의 다른 편지를 써 보냈을 가능성을 시사 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2:13; 7:5; 8:1; 9:2,4 등에 비춰볼 때,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곳은 마게도냐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는 주후 57년경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바울의 편지들과 방문은 그 목적을 성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 16:23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한사람(가이오)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변화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기록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근심과 염려로부터 회복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 사실로 말미암아 더욱 더 확증됩니다(고후 2:13; 7:6,13,14).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고린도에서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일도 성공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롬 15:26).

이 둘째 편지의 기록과 바울의 그 다음번 방문 이후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불과 몇번의 산발적인 언급 밖에 찾아볼 수 없다. A.D. 95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하여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전에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악들이 적어도 얼마가 다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클레멘트는 그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 행실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으나 그 교회가 여전히 분쟁과 당파 정신을 가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또한 질책을 가하였다. 이것이 사도 시대 동안의 고린도 교회에 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마지막 정보이다.

 

고린도후서의 기록 장소와 연대

 

(1) 기록 장소

 

본 고린도후서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7:5). 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의 연보 모금 소식을 통해 고린도와 아가야 지역의 교인들을 교훈하려 한 정황 중기를 통해 뒷받침됩니다(8:1, 9:2-4). 빌립보란 설도 있지만 빌립보 넓게 보면 마게도냐에 포함된다.

 

(2) 기록 연대

 

기록한 연대를 추정해 보면, 고린도전서의 기록과 연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보내고, 수개월 또는 1년 전후로 이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기록 시간을 주후 55년 봄으로 추정하면, 본 고린도후서는 가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에 대한 단서들을 종합한 것입니다.

 

고린도도시의 지형

고린도후서를 이해하는 데는 골로새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는 동양과 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골로새는 루고 골짜기(Lycus Valley)에 있는 골로새(Colosse, 고린도후서 1:2), 라오디게아(Laodicea, 고린도후서 2:1, 4:3-16), 히에라볼리(Hierapolis, 고린도후서 4:13)라는 “세 고을”중에 하나입니다. 골로새는 계시록에 나와 있는 라오디게아에서 약 11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에베소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전 5세기경에 골로새는 “부루기아의 커다란 성읍”이라고 알려 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골로새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여 바울 당시에는 작은 고을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있는 에베소 지방에서 유브라데 지방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던 교역의 통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골로새 근처에는 교회가 3개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4:13).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헬라인과 부르기아인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잡다한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상당 수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특산물은 산간지역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양털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목적

이 고린도후서는 첫 번째(고린도전서)에 이어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전정한 의미에서 사도가 아니라고 선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필요했다.

 

(2) 고린도 교회와의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이간하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진리의 복음을 다시금 확실하게 전하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3)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의 모금을 호소하기 위함이다.

 

고린도후서의 개요

서론 1:1-11

1. 인사 1:1, 2

2. 시련 중에서의 감사 1:3-11

 

고린도 교회와의 최근의 관계 1:12-7:16

1. 여행 계획의 변경에 대한 설명 1:12-2:4

2. 그리스도를 향한 비도덕적 범죄자를 회복시키라는 권면 2:5-11

3. 고린도로부터 소식을 들으려는 갈망과 들은 기쁨 2:12-17

4. 사도권 신임장 3:1-18

(1) 진정한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임장 3:1-6

(2) 사도 직분의 영광 3:7-18

5. 사도는 그의 봉사를 거룩한 능력의 지지를 받음 4:1-5:10

(1) 견디는 힘: 거룩한 은혜의 증거 4:1-18

(2) 영원의 관점에서 본 생명과 사망 5:1-10

6. 화해의 봉사 5:11-6:10

(1)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으로서의 사도 5:11-21

(2) 사도직을 위한 필수적인 훈련 6:1-10

7. 악행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호소함 6:11-7:1

8. 따뜻한 응답에 대한 바울의 기쁨 7:2-16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연보 8:1-9:15

1.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적인 관대함 8:1-6

2.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8:7-15

3. 고린도에서 헌금을 받아올 디도에 대한 칭찬과 사명 8:16-24

4. 각각 자기의 몫을 담당하라고 고린도인들에게 호소함 9:1-15

(1) 연보를 위해 준비하라는 호소 9:1-5

(2) 너그럽게 내라는 호소 9:6-15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옹호 10:1-13:10

1. 사도로서의 바울을 경시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 10:1-12

2. 그의 지정된 봉사 영역 안에 있는 고린도 10:13-18

3.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 사이의 특징적 차이점 11:1-12:18

(1) 거짓 사도의 음흉함 11:1-6

(2) 바울이 생계를 고린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음 11:7-15

(3) 바울이 위기와 궁핍을 만남 11:16-33

(4) 거룩한 계시를 받은 자 바울 12:1-5

(5)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겸비해짐 12:6-10

(6) 바울이 그들의 재물로 치부하지 않음 12:11-18

4.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호소 12:19-13:10

 

결론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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