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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5-01)


포도나무와 같은 이스라엘

에스겔 15장 1-8절


 

과일나무는 열매가 맺을 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그 나무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특히 포도나무는 더욱 그렀습니다. 열매가 아니면 나무는 땔감으로 밖에 쓸모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맺을 때, 그 나무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와 같아서 불에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목재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면 땔감으로밖에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민의 범법함으로 인해 그들을 불에 던질 땔감처럼 황폐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인 줄 알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무익한 포도나무(1-5)

하나님의 은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은 풍성한 포도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포도나무처럼 이스라엘은 열방보다 더 특별한 것은 없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가치 있는 나무가 됩니다. 하지만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와 같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는 하나의 가지가 여러 갈래로 퍼져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삶의 풍요로움과 행복과 생명을 상징했는데,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 이스라엘과 포도나무

 

민수기의 정탐꾼 이야기에서 포도나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풍요를 상징하는 표지로(민수기 13:23), 아들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에서 포도주는 메시아 시대의 축복을 상징하는 표지로(창세기 49:10-12) 등장합니다. 요담의 우화에 따르면 포도나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나무입니다(사사기 9:13). 이스라엘의 가장 이상적 삶은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평안히 사는 것이었습니다(열왕기상 4:25; 미가 4:4).

포도나무와 포도원의 표상은 일찍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데 사용 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약속의 땅에 심은 포도나무요(시편 80:8),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요(시편 80:15),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만난 포도요(호세아 9:10), 여호와께서 정성을 다하여 마련한 포도원이었다(이사야 5:1-2a).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포도나무로 그분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았지만, 은혜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시편 80:91; 호세아 10:1). 이스라엘은 그분의 축복에 배반으로 응답했다. 여호와께서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은 이스라엘이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됐습니다(예레미야 2:21).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란’ 포도원 주인의 기대를 배반하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이사야 5:2b).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데도 쓸모없기에 잘려질 수밖에 없습니다(예레미야 8:13; 미가 7:1a). 크게 실망하신 여호와께서 포도원의 울타리와 담을 허시고 숲 속의 들짐승에게 넘겨 황폐하게 하십니다(이사야 5:5-6; 예레미야 5:10-14;12:10; 시편 80:12-13).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라는 사실은 예언자들에게도 분명합니다(참조. 마태복음 21:33-46; 요한복음 15:1). 차이가 있다면, 이를 언제나 유효한 신학적 진술로 이해하는 동 시대 사람들과 달리 예언자들은 이를 회고적으로 바라봅니다. 한때는 여호와의 돌봄을 받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지만, 지금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퇴화된 포도나무일 뿐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잘려 땔감으로 불에 던져지는 것 외에 다른 용도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셨다는 값진 전통이 포도나무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포도나무 비유는 이스라엘이 이미 오래전부터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였음을 전제합니다.

 

(2) 포도나무 비유(1-5)

 

본문으로 들어와서 다른 단락의 경우처럼 계시의 전형적인 도입부로 시작합니다. 에스겔서에 도합 50회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는 말씀과 선포를 매개로 여호와와 에스겔이 긴밀하게 연합됐음을 보여줍니다.

6절의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가 예언자를 여호와의 메신저로 전제한다면, 이 말씀 사건의 양식은 예언자의 선포에 신적 권위를 더해줍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도발적으로 다가왔을 비유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일상적 삶에서 끌어온 비유를 통해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2-3절의 질문은 포도나무의 재목으로서의 가치와 유용성에 집중합니다. 포도나무가, 숲속 의 나무들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게 무엇입니까? 포도나무에서 무엇을 만들 나무가 얻어지겠습니까? 포도나무에서 물건을 걸어둘 못이라도 얻을 수 있겠느냐? 포도나무의 가치가 포도 열매에 있고 그 가지에 있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숲의 다른 많은 나무에서는 집을 짓게 나 가구나 물건을 만드는 목재를 얻을 수 있지만, 덩굴 식물에 속하는 포도나무 가지에서는 어떤 목재도 얻지 못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로는 작은 못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포도나무나 잘린 가지는 아무 쓸모가 없기에 땔감으로 불에 들어갈 뿐입니다(4a). 마른 포도나무 가지는 불이 잘 붙기에 불쏘시개로는 나름 유용합니다. 4b-5절의 질문은 ‘목재로서 쓸모없음’을 마지막 단계까지 끌고 갑니다. 땔감으로 불에 넣어진 포도나무 가지는 보통은 완전히 타서 재가 되지만, 불가에 떨어진 가지는 부분적으로만 타고 불이 꺼지는 경우도 있는데, 여호와의 질문은 이러한 일상적 경험을 배경으로 합니다. 불이 양쪽 끝을 살랐고 가운데는 그을었는데, 그것을 무엇에 쓰겠느냐? 보아라. 포도나무 가지로는 온전할 때에도 무엇 하나 만들 수 없었는데, 불에 타고 그은 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겠느냐? 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질문입니다. 잘린 포도나무 가지도 땔감 외에는 달리 소용이 없는데, 불에 타다 남은 포도나무 가지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쏘시개로 다시 불에 넣어질 뿐입니다.

에스겔의 포도나무 비유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로 알고 있는 청중의 허를 찌르는, 매우 도발적인 비유입니다. 비유의 초점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그 가지로 옮겨 청중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발가벗겨버립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또는 ‘잘린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를 자랑하고 싶으면, 심으신 분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셨을지라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더는 그분의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열매가 없을 때 신학적 전통은 죽은 전통이 된다. 예레미야도 유사하게 고발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었도다’(예레미야 11:16). 이스라엘이 좋은 감람나무였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선택하셨다는 신학적 전통이 이스라엘의 실존을 무조건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시든 나무에 불과하기에, 그것이 감람나무라 할지라도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기대하며 나무를 심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지금 어떤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심판받는 이스라엘(6-8)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매일 알아가는 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거룩함, 사랑, 공의를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은밀한 죄를 반복하다가 벌을 받은 후에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자 말아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포도나무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7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8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6-8)

 

여호와의 해석에 따르면 땔감으로 불에 넣어지는 포도나무 가지는 예루살렘 주민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6절은 2-4a절의 해석이고, 7절은 46-5절의 해석입니다.

여호와께서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불에 넣듯이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불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불이 다시 그들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두 번 불 속에 들어갑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불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빠져나온 포도나무 가지는 주전 597년의 재앙을 가리킵니다. 주전 598/7년의 겨울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배반한 여호야김을 징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성을 포위했습니다. 포위 직전 또는 직후에 여호야김이 죽고, 절박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저항을 포기하고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성문을 열고 굴복함으로써 멸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은 배반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주전 597년 여호야긴을 비롯해 예루살렘의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과 장인들이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주전 597년의 재앙으로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두 번째 불은 주전 587년의 재앙으로, 이때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포도나무 가지처럼 되고, 땅이 황무지가 될 때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8). 이들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4-5)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의 물질과 우상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뿌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게 됩니다. 나무를 떠난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쓸모없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잘 붙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만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쓰임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열매는 없지만 수려한 포도나무는 쓸모가 없습니다. 과실수에 과일이 없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라 그 나무의 생명과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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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4-02)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

에스겔 14장 12-23절


 

좋은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 계속되면 고통과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행은 견디기 힘들고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긍정적인 경험을 원하고 인생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交互에 일어나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가 죄를 범해 기근, 사나운 짐승, 칼, 전염병으로 심판하실 때, 노아, 다니엘, 욥이라도 자기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리라 하십니다. 또 예루살렘에 이 네 가지 벌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끊으실 것인데 남은 자로 인해 이스라엘이 심판의 이유를 알리라 하십니다. 예루살렘이라도 열방과 똑같은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12-20)

경고가 계속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고 때가 되면 징계하십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영적 무감각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어떤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그 땅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그 짐승 때문에 능히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자 16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가령 내가 칼이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칼아 그 땅에 돌아다니라 하고 내가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18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20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20)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가지 중한 벌(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쟁과 전염병)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모범이 되는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의로운 사람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막을 수 없으며, 이 심판에서 도움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1) 도입부(12)

 

예루살렘의 운명이 되돌릴 수 없게 최종적으로 확정됐음을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네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제 가능성의 영역을 떠나 확정된 사실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당신께 범죄한 어떤 나라를 여호와께서 굶주림으로(13-14), 사나운 짐승으로(15-16), 칼로(17-18), 전염병으로(19-20) 심판하실 때, 그 나라에 전설적인 의인으로 간주되는 노아(창 6:9)와 다니엘과 욥이 있습니다. 할지라도 심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질 뿐, 자기 자녀도 구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의인은 한 명도 없고 온통 죄로 물든 예루살렘과 유다의 경우에야 멸망의 심판 외에 어떤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2) 공의의 한계(13-20)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모세와 사무엘을 중보자의 대표로 내세우는데(렘 15:1), 에스겔은 전형적인 의인으로 이스라엘 밖에 속한 인물들을 언급합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은 이스라엘 이전 시대 또는 이스라엘 영토 밖에 속하는 인물로, 땅(‘어떤 나라’로 옮긴 ‘에레쯔’는 원래 ‘땅’을 의미한다)에 사는 인류 전체를 대표합니다. 대홍수 이전과 이후를 연결해주는 노아는 창세기 6:9에 따르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그는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여호와로부터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하고 인정을 받은 의인입니다. 그의 고향 ‘우스 땅’(욥 1:1)은 그 위치가 불분명한데, 일반적으로 에돔 남쪽 또는 북서쪽 아라비아에서 찾습니다. 어쨌든 욥의 고향 우스 땅이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노아와 옵 사이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여호야김 셋째 해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단 1:1) 다니엘서의 주인공하고는 다른 인물입니다. 우가릿 문헌 가운데 하나인 아크핫(Aqhat) 서사시에 나오는 전설적인 의로운 통치자 ‘단엘’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의인의 공의’가 자기 목숨만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일반화하기 위해 에스겔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밖에 속하는 의인들을 등장시켰습니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21-23)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징벌을 받을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벌을 겪을 때, 신속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받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22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1-23)

 

21-23절은 12-20절의 주장을 보충해줍니다. ‘자기의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리라’는 신학적 진술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은 분명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합니다. 전자에게는 구원(생명)이, 후자에게는 멸망(죽음)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신학적 진리가 현실 세계에 언제나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리라’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의인이 됩니다. 마지막 세 절은 결과(구출)에 근거해서 행위(의로움)를 평가하려는 잘못된 적용을 수정해줍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할 때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살아남아 바벨론으로 끌려오겠지만, 그들이 의인이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 다른 의도가 있으셔서 이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유배에 넘기신 것입니다. 주전 587년의 제2차 유배민들에게 부정적 증인의 역할이 맡겨집니다. 바벨론으로 먼저 유배 온 자들이 제2차 유배민들의 불의한 행동과 처신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예루살렘을 바벨론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제1차 유배민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고, '하나님의 길의 의로움'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이 구절은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며, 의로운 사람도 그들의 죄로 인해 구원받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와 돌아옴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은 결국 의로운 자의 기도를 통해 구원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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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4-01)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에스겔 14장 1-11절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얻기 위해 양쪽 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일컬어 양다리를 걸친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양다리는 양쪽을 모두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양쪽 다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뻔뻔하게 당신에게 고백한다면 그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들리겠습니까! 양다리를 걸친 상대와는 결코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본문은 에스겔을 찾아온 장로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장로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면서도 문제가 생기자 선지자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를 자기 앞에 두고서도 나아온 뻔뻔한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을 이제 백성들 가운데서 끊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선지자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1-3)

하나님께 나갈 때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 몸만 하나님께 나온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하려기보다는 그저 하나님을 간보려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인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섬기는 영적 우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1-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장로들은 혼합주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위선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장로 몇몇 사람들이 에스겔에게 무엇인가 물어보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왔을 때, 이들은 우상숭배자들로 고발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1-2; 8:1). 장로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하고 죄를 멀리하도록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적극적으로 우상을 받아들이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죄악의 걸림돌들을 자기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고도 문제가 생기면 뻔뻔하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에스겔에게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뻔뻔하고도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스라엘의 몇몇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왔지만, 그들의 마음에 우상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장로들에게 주는 대답(3-8)

아무도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갈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대적이 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기에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다. 먼저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이중적인 모습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3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5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6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 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3-8)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나온 장로들은 겉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우상과 죄악의 걸림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더불어 돈, 명예, 쾌락을 섬기며, 세상에서 누리길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께 묻기 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닌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우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섬기는 대상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 16:13)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위선적인 장로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 많은 우상 때문에, 우상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유배 공동체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의 의지를 묻고 따르는 신실한 자들이지만, 속으로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3). 하나님께서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단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보다는 그냥 어떤 마름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 외에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역사와 성경으로 계시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양다리 걸친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런 갈등 없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그들의 완악한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3)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물어보려 했는지는 본문이 언급하지 않기에 알 수 없습니다. 또 장로들이 마음에 품은 ‘죄악의 걸림돌’인 우상의 정체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는 우상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고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장로들의 두 마음은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유대 공동체 전체가 직면한 영적·신앙적 위기였습니다. 여호와의 고발과 징벌의 범위가 이스라엘 전체로 확장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머무는 이방인들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 우상을 마음에 품고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놓은 채 여호와께 묻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가는 자에게는 여호와께서 직접 응답하십니다(4,7). 두 마음을 품을 자들은 누구도 예의 없이 여호와께 등을 돌린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5절의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는 ‘그들의 마음을 움켜잡으리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죄악의 걸림돌을 여호와께서 그대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7절의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은 원래 가나안의 거주를 전제하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제의 안에 들어온, 즉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래도 아직 기회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징벌로 죽음에 넘겨져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지(8) 않으려면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6). 우상들에게서 돌아서고 모든 가증한 것에서 얼굴을 돌려야 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께 신탁을 구하기 전에 먼저 우상에게서 떠나 들을 수 없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12:2b). 현재의 문맥에서 ‘표징’은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경고의 표징이고, ‘속담거리’(12:22)는 신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징벌을 받은 자의 비참한 운명을 조롱하는 말입니다(참조, 예레미야 24:9).

성도들은 하나님께 나갈 때마다 수시로 마음을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들에게서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들을 마음에 들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상숭배와 탐욕을 지적할 때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집대로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심판이 임하게될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주는 대답(9-11)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이유 불문하고 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과 삶을 가지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시면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탐욕을 지적할 때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집대로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9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1)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우상과 가증한 것들을 떠나지 않으면 그들이 행한 죄악대로 갚으시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에게 묻고 따른 사람들에게도 죗값을 물어 함께 심판하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신탁을 구하는 자들의 깊은 곳을 살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우상을 품은 자들의 물음을 받아 무슨 말을 선포한다면, 여호와께서 그를 이스라엘 중에서 제해 버리실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와 그렇기 않은 자를 분별하지 못하는 선지자는 더 이상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마음에 우상을 두고도 선지자에게 묻는 자나 유혹에 빠져 예언을 주는 선지자나 모두 죄악을 범하였기에, 각자 자기 죗값을 짊어져야 합니다. 선지자의 영적 분별력은 개인적 자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영적 파수꾼으로 이스라엘 족속의 영적 상태를 바로 보고 필요하면 경고와 위협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우상숭배에서 떠나 온전히 여호와께로 돌아오도록 엄중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선지자가 영적 분별력을 갖고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어떤 파열음도 내지 않고 유지됩니다(11). 이스라엘은 다시는 여호와를 떠나 헤매지도 않고,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도 않게 됩니다.

당신 앞에 무엇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우상숭배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우상은 자신을 위해 섬기는 대상으로서, 결코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자리 잡고 있다면, 하나님과 병행해서 섬길 순 없습니다. 그 우상에서 속히 얼굴을 돌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성도들은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양다리가 없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곁눈질을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가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혹시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말씀을 따라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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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3-01)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심판

에스겔 13장 1-16절


 

누군가 하는 거짓말에 한 번쯤은 어려움을 겪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거짓말에 속는 이유는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고, 그 말이 귀에 솔깃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적 부분에서도 진리에 대해 참과 거짓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면 이단 사설에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실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시지 않았는데 가고, 보여주시지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거짓 평강을 전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마음대로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1-3)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거짓 선지자의 감언이설을 좋아합니다. 그 내용이 대부분 사람들을 미혹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상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게 하십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1-3)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순종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에스겔은 서로 연관된 두 관점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합니다. 먼저는 예언의 근원과 관련하여 이들의 거짓을 다양하게 지적합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2)요,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3)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인 것처럼 거짓의 내용을 꾸몄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거짓 메시지에는 오만하고 무례하고 그리고 어리석은 내용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모아놓은 말장난이었습니다. 우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기 좋은 말이기 때문에 쉽게 현혹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현혹시킨 거짓 선지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영적 파숫꾼이 아닌 거짓 선지자들(4-5)

사람을 분별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에서 맺혀진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이익만 좇는 사람은 끝까지 그런 타락한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끝까지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헌신합니다. 이스라엘을 더 타락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4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5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서 견디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4-5)

 

거짓 선지자들은 허탄하고 거짓된 것을 말함으로써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영적 안일함에 빠지게 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황폐한 이스라엘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참 선지자들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울타리 역할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에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진리로 돌아오도록 권고해야 했고, 무너진 진리를 바르게 세워서 악한 사설(私說)들로부터 나오도록 인도해야 했습니다. 악한 것을 악한 것이라 탐욕을 탐욕이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진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사랑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권에 어두워진 채 자신들의 안락과 안위만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경고의 나팔을 불기는커녕 마치 ‘황무지의 교활한 여우’처럼 백성들을 미혹해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삼았습니다. 폐허 같은 곳에서 자기 먹을 것을 찾아 뒤지고 돌아다니는 존재들입니다(4). 그들에게 백성은 천한 음식의 자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진정한 영적 복락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며 성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도 않으며 전쟁을 방비하지도 않았습니다(5).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대로 말하고 자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이나 행동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허탄한 것으로 미혹한 자들에 대한 심판(6-9)

자기 이익이 우선인 사람들은 모든 판단기준이 자신의 이권에만 집중해서 결정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것만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6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7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8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6-9)

 

하나님께서는 허탄한 환상과 거짓 점괘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치실 것입니다. 그들을 다시는 언약 백성의 무리에 들이지 않으시며, 다시 그 나라가 회복될 때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겉으로는 참 선지자와 다를 바 없었고, 듣고 보는 이들을 속일 만큼의 신비한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보내신 적이 없고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적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특이한 행동들만 하면 신비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현혹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 일도 그 사람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현혹되지 않도록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거짓 평화를 전한 자들에 대한 심판(10-16)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거짓은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고 구속합니다. 거짓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도 자신을 더 숭배하도록 만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만 이런 자의적인 행동들을 하지 않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습니다. 거짓 평화를 외치는 자들에게 어떤 심판이 임합니까?

 

10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11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몰아치리니 12그 담이 무너진즉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냐 하지 아니하겠느냐 13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14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5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모두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16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죄를 보시면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며 거짓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거짓 평안의 메시지로 그것들을 덮어버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외치는 자들입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이 있다고 외치면서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멸망으로 유혹합니다(10a). 백성과 거짓 선지자들이 서로 상부상조합니다. 백성이 담을 쌓으면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회칠을 합니다(10b). 부실한 담에 회를 칠해 마치 견고한 담처럼 보이게 만들어줍니다. 이들은 예언의 기술자들로, 예루살렘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도와주기는커녕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만 심어줍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성벽에 깔려 죽을 것입니다(11-14). 심판이 가까이 왔음에도 이를 보지 못하고 평강을 외치던 예언자들은 물론, 저들의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추종한 예루살렘도 완전히 멸망할 것입니다. 분노하신 여호와께서 폭풍과 폭우와 우박덩이를 보내 회칠한 담을 물어버리실 때, 사람들은 예언자들에게 ‘너희가 칠한 회가 어디 있느냐?’하고 절망하면서 그 책임을 묻겠지만, 그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난 후가 될 것입니다(12). 예루살렘에는 더는 성벽도, 회칠하는 자들도, 즉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의 묵시를 선포하는 예언자들도 없을 것입니다(15-16). 귀에 거슬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을 거절하고(12:21-28) 듣기에 좋은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게서 값싼 위로를 즐기던 자들도 저들과 함께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거짓 여자 예언자들(17-23)

우리는 다양한 정보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된 메시지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그분의 공의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17○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20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새를 사냥하듯 영혼들을 사냥하는 그 부적을 내가 너희 팔에서 떼어 버리고 너희가 새처럼 사냥한 그 영혼들을 놓아 주며 21또 너희 수건을 찢고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지고 다시는 너희 손에 사냥물이 되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22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은즉 23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17-23)

 

이 단락은 주술이나 마법과 관련된 여자들의 제의적 예언적 행동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예들이 없기에, 18절에 묘사된 주술적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과 의미를 갖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점보다는 악귀를 쫓거나 질병 치료와 관련된 주술적 행위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손목에 대는 띠’와 ‘머리에 쓰는 덮개’가 일종의 부적처럼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은 질병과 치료를 모두 여호와의 활동으로 돌렸기에 근동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스라엘에는 치료 행위를 직업적으로 전담하는 집단이 없었습니다. 대신 제사장이나 성전 소속 예언자가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바벨론 유배민들의 경우 레위적 치료를 받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아마도 바벨론의 영향을 받은) 주술적 행위가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주술적 도구를 사용해 예언하고, 귀가 가벼운 하나님 백성은 이들의 주술 행위에 빠져듭니다(19). ‘어떻게’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의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악인들에게는 뻔뻔스러움을 조장해 계속 그 악한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22). 여자들의 주술에 의한 치료 행위는 그 자체로 우상숭배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상응하는 징계를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 이들의 주술적 행위를 폐지하시고, 이들의 손에서 고통당하는 의인들을 구해내실 것입니다(20-21). 이들은 앞으로는 어떤 묵시도 보지 못하고, 어떤 점도 치지 못하게 됩니다(23). 이들에게서 예언의 기능이 박탈됩니다.


본문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하나님의 진리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하며,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말씀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우고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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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2-02)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

에스겔 12장 17-28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우리는 인내와 믿음으로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대로 놀라고 근심하며 음식과 물을 마시고 이스라엘 땅이 백성의 포악으로 황폐해질 것을 보여줍니다. 날이 더디고 묵시가 사라질 것이며 먼 훗날에 대한 예언이라 말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 생전에 말하고 다시는 더디지않게 이뤄지리라 하십니다.

 

두 번째 상징적 행위(17-20)

우리의 언행은 하나님 앞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신앙의 삶에서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알리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입니다.

 

17○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인자야 너는 떨면서 네 음식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네 물을 마시며 19이 땅 백성에게 말하되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그들이 근심하면서 그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은 이 땅 모든 주민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땅에 가득한 것이 황폐하게 됨이라 20사람이 거주하는 성읍들이 황폐하며 땅이 적막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17-20)

 

하나님께서 두 번째 표적 행위에는 실행 보고가 빼졌습니다. 에스겔에게 표적 행위의 명령(17)과 그 해석(19-20)만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순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그들의 고통과 심판을 예고합니다. 에스겔은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경고와 인내(17-1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다시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이번에는 떨면서 음식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이러한 행동도 장차 이스라엘이 당할 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떨면서 음식을 먹고 놀라고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는 행동은 이스라엘 족속이 예루살렘에서 절망적 형편(4:9-17)이나 포로로 잡혀가면서 두려움, 걱정, 염려 가운데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게 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떨면서 놀라고 근심하는 것은 정복당하고 포로가 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의 상황과는 정반대 양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신 26:5-9: 3-4장).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서 유월절 잔치를 벌였습니다(수 5:10-12). 그때가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로 인해 혼비백산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5:1:15:14-16).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가운데 가장 먼저 큰 성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쫓겨났고(8-11장),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다섯 왕을 물리친 후에 백성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같이 하시리라”(수 10:25)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수 11:23). 그런데 이제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입니다(1-14, 19-20). 예루살렘은 적군에서 포위당하고(4:1-3), 백성은 성안에서 굶주릴 것입니다(4:9-16, 5:10).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휩싸여 놀라게 될 것이고(4:16; 7:26-27; 12:17-19), 결국 멸망 당하고 쫓겨날 것입니다(5장). 그러한 운명으로 인해 조롱당할 것이고(6:11-12), 약속의 땅을 잃음으로써 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7장).

 

(2) 표적 행위의 해석(19-20)

 

이스라엘 백성이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고 놀라면서 물을 마시게 되는 이유는 ‘그 땅 주민의 포악’ 때문입니다. 성읍들은 황폐하게 되고 땅은 적막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 백성’, ‘예루살렘 주민’, ‘이스라엘 땅’, ‘이 땅 모든 주민’, ‘사람이 거주하는 성읍들’, ‘땅’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예루살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는 적들이 혼비백산했지만(수 5:1), 이제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면서 떨고 근심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 예언의 임박한 성취(21-2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2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2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 2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24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25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반역하는 족속이여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26○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7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 그가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멀리 있는 때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느니라 28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21-2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시하며 예언을 무시하는 상황을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주시며,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이 실현됨을 강조하고,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1) 예언 성취의 확실성(21-25)

 

이스라엘 백성은 묵시를 부인하면서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라는 속담을 말하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됨이냐”라고 탄식하신다. 이 구절에서 ‘묵시’로 번역된 단어(하존)는 10절에서 ‘묵시’로 번역된 단어(맛사)와는 다릅니다. 10절의 맛사는 ‘경고’라는 의미에 더 가깝고, ‘하존’(22,23,24,27)은 ‘계시’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속담’으로 번역된 ‘마살’은 주로 ‘잠언’, ‘격언’, ‘지혜로운 말씀’'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22,23[2번]). 이 단어는 주로 ‘금언’이나 ‘경구’'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문학적인 ‘은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에스겔에는 8번 사용되었는데(12:22,23; 16:44[2번]; 17:2; 18:2,3; 24:3), 다른 본문에서는 ‘발전적인 우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본문에서는 ‘금언’, ‘속담’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2) 예언의 임박한 실현(26-28)

 

여호와의 말씀이 또다시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26). 이스라엘 족속은 에스겔이 본 묵시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에스겔이 전한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뿐 아니라, 더디지 않고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25.28절에서 ‘더디다’로 번역된 동사 ‘마샤크’는 ‘끌다’, ‘연장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래 끌지 않으시고 속히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루다’로 번역된 ‘아사’는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반론입니다. 백성은 ‘예언이 여러날 후, 멀리 있는 때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가까운 것이며, 더디지 않고 속히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무가치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은 사라질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경고와 그에 대한 응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불신과 회피를 꾸짖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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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2-01)


깨우쳐 회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

에스겔 12장 1-16절


 

몇 년 전에 겨울에도 서울 시내를 맨발로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최춘선’이란 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미친 노인’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를 유심히 살핀 취재 PD는 미친 행동으로 보지 않고, 그 속에 메시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삶이 방송 후에, 사람들은 그 분을 ‘맨발의 천사’라고 물렀습니다. 이처럼 어떤 메시지를 몸으로 전달하는 행위를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행위가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 본문에 나타난 에스겔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짐을 싸서 포로로 끌려가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한 다섯 개의 표적 행위

에스겔 12장 1-16절(유배)과 17-20절(황폐해진 성읍)의 두 표적 행위는 주제와 사건의 전개에 있어 4:1-5:17에 수집된 세 표적 행위의 연속입니다. 첫 번째 표적 행위(4:1-3)는 적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을, 두 번째(4:9-17)는 양식이 바닥난 포위당한 성의 굶주림을, 세 번째(5:1-17)는 성의 점령과 멸망을, 12:11b의 네 번째 표적 행위는 사로잡힌 자들의 유배를, 12:17-20의 다섯 번째는 폐허가 된 땅에 남은 자들의 절망적 형편을 시연합니다. 포위-기근-함락-유배-황폐로 구성된 다섯 개의 표적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성을 공격해 함락해가는 일반적인 과정과 일치합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지 못하고 완전한 멸망에 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유배를 예고하는 상징 행위(1-7)

사역자들은 인간적으로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들에게 바르게 전달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고충이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완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지시하십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3인자야 너는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4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5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따라 옮기되 6캄캄할 때에 그들의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라 하시기로 7내가 그 명령대로 행하여 낮에 나의 행장을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내놓고 저물 때에 내 손으로 성벽을 뚫고 캄캄할 때에 행장을 내다가 그들의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니라(1-7)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은 상징적으로 자신의 짐을 지고 포로처럼 행동하며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을 알립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회개하길 바라십니다.

 

(1) 도입부(1)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전달하셨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들은 것을 부정했습니다. 표적 행위의 명령에 앞서 먼저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관한 고발의 말씀이 나옵니다.

 

(2) 책망의 말씀(2)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반역하는 집입니다(2, 참조. 사 6:9-10). 여호와께서는 환상과 말씀의 계시를 통해 당신의 심판 의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눈을 닫고 귀를 막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귀와 눈이 영적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의 자기파멸적 반역을 고발하신 후,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표적 행위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반복적이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세부적으로는 이해가 어렵지만, 전체적으로는 분명합니다. 그분의 명령은 함락한 성의 약탈에 뒤이은 유배를 배경으로 합니다.

 

(3) 표적 행위의 명령(3-6)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유배 짐을 싸서 끌려가는 것처럼, 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3). ‘포로의 행장’은 문자적으로는 ‘유배의 그릇’으로, 먼 길을 가는 여행에 가장 요긴한 최소한의 짐으로 꾸려집니다. 3-7절에 일곱 번 반복 사용된 ‘그들의 목전에서’는 에스겔의 행위가 반드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가운데 행해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낮에’도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선택된 시간 같습니다. ‘혹’은 ‘울라이’의 번역으로, 어떻게 해서든 당신 백성이 파국적 심판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분의 절망적 기대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지만, 그래도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다음 세 절은 3절의 명령을 시간별로 세분합니다. 유배 짐을 싸서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밖에 내놓았다가,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납니다(4). 성을 떠나는데 특이하게도 ‘그들의 목전에서’ 벽을 뚫고 나갑니다(5). 또 ‘캄캄할 때에 그들의 목전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않습니다(6). ‘성벽을 뚫고’는 적의 공격으로 무너진 성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 12절의 해석에 따르면 시드기야의 탈출을 위해 그의 부하들이 성벽을 뚫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가 유배와 관련해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불분명하기에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사로잡혀 떠나가는 수치나 강제로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고통이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려가는 두려움을 보여주는, 유배자의 감정과 관련한 표현으로, 또는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표적 행위를 낮과 저녁과 밤의 세 번에 걸쳐 행하게 하신 배경도 불분명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밤에 군대가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저물 때’와 ‘캄캄할 때’는 포로를 이송하기에 적합한 때가 아닙니다. ‘캄캄할 때’는 차라리 적의 눈을 피해 도주하기 용이한 때입니다.

 

(4) 명령의 행위의 명령(7)

 

에스겔은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낮에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내놓았다가 저물 때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의 목전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습니다(7). 행위만 간략하게 전하는 에스겔의 보고에 따르면 낮에는 유배 짐을 싸서 밖에 내놓고 저녁에는 벽에 구멍만 뚫고 밤에 짐을 메고 나간 것 같습니다.

 

표적 행위의 해석(8-16)

개인이나 공동체의 불순종은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종종 경고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므로, 그로 인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삶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8○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반역하는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10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 하셨다 하고 11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 대로 그들도 포로로 사로잡혀 가리라 12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장을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장을 메고 나가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리라 하라 13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14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15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 가운데에 헤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16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8-16)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를 전합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그들의 죄와 심판을 알리도록 지시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일부는 구원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1) 도입부(8-9)

 

표적 행위가 낮에(3-4a) 시작해서 저녁을 지나(4b-5) 밤에(6) 끝나기에(7) 여호와의 말씀이 다음 날 아침에 주어집니다(8). 모든 표적 행위를 ‘그들의 목전에서’ 행하였기에 ‘이스라엘 족속 곧 반역하는 족속’의 질문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말할 답변을 에스겔에게 주십니다(9).

 

(2) 왕과 백성의 유배(10-15)

 

먼저 표적 행위(신탁)의 대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제후’(나시)와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 언급됩니다(10). 에스겔은 왕을 자주 ‘나시’로 표현하는데, 여호와를 만왕의 왕으로 전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유배를 모면하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모두 사로잡혀 끌려가지만(11,15), 유배의 초점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운명에 맞춰집니다. ‘나시’의 (유배와) 탈주를 언급하는 12절은 5-6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합니다. ‘어두울 때에’는 히브리어로는 ‘캄캄할 때’와 같습니다. 시드기야가 부하들이 성벽에 뚫은 구멍을 통해 도망하지만, 사냥꾼이 길목에 쳐놓은 그물에 짐승이 걸리듯이, 여호와께서 그를 잡으시려고 친 그물에 걸려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서 그 땅을 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13). 여호와께서 그를 호위하는 자들과 군대를 사방으로 흩으시고 칼을 빼 들고 뒤쫓으시기에, 시드기야의 도주는 어떤 경우에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12절의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얼굴을 가리리라’가 13절의 ‘그 땅을 보지 못하고’에 연결된다면, 수치스럽게 성을 빠져나간 시드기야가 눈멀게 될 것을 암시해주는 말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12-14절의 서술은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을 보고하는 열왕기하 25:4-7에 대체로 일치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진입하자 어둠을 이용해 시드기야가 탈출을 시도합니다. 시드기야는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윗성 남동쪽에 위치한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을 통해 동쪽 아라바 길로 도망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여리고 평지에서 바벨론의 추격군에 따라잡힙니다. 호위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시드기야는 사로잡혀 느부갓네살의 사령부가 있던 리블라(6:14의 디블라)로 잡혀갑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간 시드기야는 주군을 배반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그는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후에 두 눈을 빼앗기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두 눈을 잃었기에 바벨론에 끌려가서도 바벨론 땅을 보지 못합니다.

 

(3) (제2차) 유배민들의 역할(16)

 

16절은 죄의 고백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역할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넘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족들 가운데 살며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동사 ‘사파르’를 번역한 ‘자백하게 하리니’는 ‘이야기하게 하리니’로 옮겨야 합니다. 주전 587년의 유배민은 하나님 백성의 계승자로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과 온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민족들 가운데 알리는 역할이 주어졌을 뿐입니다(14:21-23; 참조. 6:9). 이들을 통해 민족들은 하나님 백성의 타락과 불법이 그분의 심판을 초래했음을 알게 됩니다. 곧, 이스라엘의 멸망이 이들의 우상숭배와 불의를 징벌하시는 여호와의 심판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상징적 행동은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행동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올바른 선택을 통해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회복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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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1-02)


교만한 지도자에 대한 심판

에스겔 11장 14-25절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마음이 유순(柔順)한 사람은 잘 듣고 받아들이지만, 마음이 까칠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왜곡해 듣습니다. 자신의 마음 그릇만큼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그릇을 넓혀야 합니다. 그릇을 넓히기 위해서는 자신가 생각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각을 넓혀야 합니다. 항상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이제 그 땅이 자신들만의 기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겨난 포로된 자들 중에 자신의 성소를 마련하시고, 심판의 기간이 끝나면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유배민들의 구원(14-21)

“착각은 자유”라는 말처럼,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간과하며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착각은 그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5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16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2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 에스겔에게 임한 말씀(14)

 

구원 현재의 문맥에서 14-21절은 바로 앞에 나오는 에스겔의 중보기도(13)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입니다.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한 번 더 확증하는 것으로 끝난 그의 첫 번째 중보기도(9:8-10)와 달리 두번째 중보기도에는 긍정적인 응답이 주어집니다.

 

(2) 예루살렘 주민들의 주장(15)

 

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 사이에는 계속되는 긴장과 반목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연대기들이 보여주듯이, 유배민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좌에 앉혀진 시드기야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온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의 적법한 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예루살렘의 새로운 지배 세력은 구(舊) 지배 세력에 속했던 제1차 바벨론 유배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난 자들로 정죄하였습니다.

여러 면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공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유배가 하나님의 징벌에 속하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로 바벨론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됩니다. 성전 중심적 시각에서 보자면, 바벨론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없어 제사가 불가능하고, 그곳에 사는 유배민들은 제의적으로 부정하기에 여호와를 찾거나 부를 수도 없습니다. 유배민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과 신학으로부터도 유배를 당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은 신학과 전통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배민들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이미 징벌을 받은 유배민들에게는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선고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주장과 달리 유배는 뿌리로부터의 잘림이 아니라, 가나안에 다시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적통(嫡統)이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어집니다.

 

(3) 유배민들에게 주는 구원 약속(16-20)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유배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뿌리에서 잘려나간 자들로 간주합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사는 자들만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고, 바벨론으로 쫓겨난 자들은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난 자들로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은 간접적으로 예루살렘 주민의 이기심을 고발합니다. 유배민들이 에스겔의 형제인 것처럼 예루살렘 주민도 이들을 형제로 생각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재앙 당한 형제를 도와주기는커녕 형제의 어려움을 이용해 제 몫을 채우려 했습니다. ‘친척’으로 옮긴 ‘안셰 거울라’는 고엘의 의무를 지고 있는 피와 살을 함께한 친척을 가리킵니다. 씨족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이 어려움에 처해 자유를 잃었을 때 대속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언하신 여호와께서는 유배민들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쫓아내셨지만, 이들이 여호와로부터 완전히 버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성전도 없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이방 땅에 살지만, 여호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주시기에 유배지에서도 여호와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16). 유배가 징벌로 촉발됐지만, 다른 한편 여호와께서 이들과 함께하시는 (영적)회복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이들을 민족들 가운데서 모아 고토로 데려가 ‘이스라엘 땅’을 주시고(17), 돌아온 유배민들은 가나안 땅에서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치워버립니다(18). 유배민들의 귀환으로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죄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귀향민이 다시 죄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 당신의 율례와 규례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십니다(19). 여호와께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에 다시는 언약을 파기하는 일이 없어집니다(20). ‘한 마음’은 두 마음에 대조되는 표현으로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여호와와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는 혼합주의였습니다.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은 문자적으로는 ‘살(바사르)의 마음’으로 에스겔의 독자적 표현입니다. ‘살’로 옮긴 ‘바사르’는 인간의 피조성과 한계를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살의 마음’은 자신의 존재가 ‘바사르’임을 인정하는 마음, 곧 자신의 사멸적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주께 자신의 실존을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4) 우상숭배자들의 징벌(21)

 

원문이 훼손된 것 같아 21절은 대략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따르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그들의 길을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유배민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구원 시대에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섬기는 예루살렘 주민은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구원 약속이 주어진 유배민들의 운명과 멸망에 떨어질 예루살렘 주민의 운명이 대조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여호와의 영광(22-2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해 떠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정결한 삶을 살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결국,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22○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23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22-23)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그룹들이 날개를 펴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함께하는데, 그들 위에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한가운데서 떠올라 성읍 동쪽에 있는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성읍 동쪽 산’은 기드론 계곡 맞은편에 있는 감람산을 가리킵니다. 정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날 때 다윗도 성에서 나와 감람산 길로 올라갔습니다(삼하 15:30). 동쪽 산에 머물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어디로 옮겨갔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8-11장의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떠나시는 여호와의 영광에만 집중하고, 그 이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43:1-4에서 에스겔은 동문 어귀에서 동쪽으로부터 와서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여호와의 영광을 봅니다.

8-11장의 환상들은 여호와 영광의 이동 경로에 의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영광이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8:1-3) 그에게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주시고(8:4-16) 성의 멸망이 재고의 여지없이 확정됐음을 알려주십니다(8:17-18). 심판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읍으로 확장됩니다(9:6-7).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심판은 그분께서 성을 떠나셨음을 전제하기에 심판에 앞서 그분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지성소의 그룹 위에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고(10:4). 문지방에서 나와 성전 오른쪽에 서 있던(10:3) 그룹들 위에 머물다가(10:18)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으로 이동하십니다(10:19). 동문 안쪽에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 바깥쪽으로 나와(11:1) 성읍을 지나 성읍 동쪽에 있는 산에 머무십니다(11:23).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와 지리적 위치에 일치하여 여호와의 영광은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옮겨가십니다.

 

환상을 맺는 말(24-25)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신앙의 실천과 복음의 전파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24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25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24-25)

 

유배지의 자기 집에서 장로들과 함께 있던 에스겔을 환상 중에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셨던(8:3) 여호와의 영이 그를 다시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로 데려가십니다. 환상이 떠나간 후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유배민들에게 알려줍니다. 첫 번째 환상 경험에서는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반응하였는데(3:14), 두 번째 환상 경험에서는 예언자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새로운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앙의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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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1-01)


교만한 지도자에 대한 심판

에스겔 11장 1-13절


 

조직이나 단체 따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컬어 리더(leader)라고 합니다. 리더가 어디로 이끄느냐에 따라 전체의 방향이 정해지기에 리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듣고 보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환상 중에 성전 동문에서 악을 꾀하는 25명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헛된 낙관주의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들을 향한 심판을 선고하게 하십니다.

 

도입부(1)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화의 기회를 주시며,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1)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지역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에스겔에게 한 장면을 더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으로 데려가십니다. 10:19에 의하면 성전 오른쪽에 있던 그룹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으로 이동해 머물렀습니다. 이제 환상의 무대가 성전 울타리 안에서 성전 울타리 밖으로 옮겨집니다. 동문 어귀에서 에스겔은 백성의 고관 스물다섯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봅니다. 고관의 수 ‘스물다섯’은 성전의 현관과 번제단 사이에서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태양을 숭배하던 자들의 수(8:16)와 일치합니다. 숫자가 같기에 때로는 동쪽을 향하여 태양에게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백성의 고관들을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위치는 두 집단이 동일하지 않음을 시사해줍니다. 고관들이 모여 있는 동문 어귀는 번제단이 놓인 안뜰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들은 안뜰이 아니라 안뜰 밖에 있었습니다. ‘백성의 고관’은 이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고관들 가운데 두 사람은 실명으로 언급합니다.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로, 에스겔은 유배당하기 전에 이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환상의 내용에 역사성과 사실성을 더해줍니다.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는 13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고관들을 책망하시는 여호와(2-3)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경고를 통해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십니다.

 

2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3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2-3)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경고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1) 고관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2)

 

예루살렘 왕궁의 권력을 장악한 신흥 세력은 유배 이후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치명상을 입은 유다를 치료하기에는 전혀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들)’이었습니다(2). 백성의 지도자란 자들이 실상은 불법을 일삼고 악을 모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2) 인용문(3)

 

3절의 인용문은 이들이 꾸민 악한 꾀(계획)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참조. 8:12).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그 자체로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고관들의 자만심을 담고 있는 말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가마에 안전하게 보관된 고기에 비유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가마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우리’가 가마의 고기처럼 남아 있기에 예루살렘의 위기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집을 건축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전시의 위기를 반영한 언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집이 많이 남아 있기에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 때 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로잡혀 갔기에 집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새로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주전 597년의 파국에서 어떤 경고나 교훈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항복과 유배의 재앙은 이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속했기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고발과 심판(4-12)

하나님게서는 악한 행동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개인과 사회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진정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삶의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5○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6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그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7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죽인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인데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끌려 나오리라 8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이르게 하고 9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에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10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심판하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1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에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리니 12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4-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한 행동에 대해 심판하신다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회개와 진정한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일깨웁니다. 또한, 개인과 공동체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1) 예언의 명령(4-6)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자만심에 빠진 자들에 맞서 예언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혀 이들의 교만을 고발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것까지도 아시기에, 그분의 고발은 항상 정당합니다. ‘너희 마음’은 문자적으로는 ‘너희 영’으로, ‘여호와의 영’과 대조를 이룹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에 힘입어 말씀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족속(집)은 자기 영에 따라 처신합니다. 불의와 악한 계획만 자라나는 마음(영)이 동하는 대로 행동하기에 폭력과 불법이 일상사가 됩니다. 백성의 고관들과 이스라엘 족속 모두 제 마음의 악한 생각에 따라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예루살렘 거리가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의 시체로 가득 채워집니다(참조. 8:23b; 9:9a).

 

(2) 심판: 사로잡혀 끌려가는 자들(7-14)

 

고관들의 정치적 자만과 이스라엘 족속의 폭력성을 고발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고관들이 사용한 비유를 활용해 이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가마의 해석은 일단 같고, 고기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고관들이 자신들로 주장한 가마의 고기를 여호와께서는 이들에 의해 살해당한 자들로 해석하십니다(7). 고관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이 가마의 고기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불의와 불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살해당한 자들의 시체로 거리를 가득 채운 성입니다. 고기가 부패하면 가마에서 꺼내져 버려지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불법과 폭력의 성으로 만든 자들을 여호와께서 성 밖으로 끌어내실 것입니다. 10장에서는 불로 심판하시는데, 여기서는 칼로 심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이 두려워하는 칼을 불러들여서 징벌하십니다.

8절의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가 주전 597년의 경험을 반영한다면, 여호와께서 다시금 바벨론을 불러 예루살렘을 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자로 믿는 여호와께서 이들을 성읍에서 끌어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징벌하시고 이스라엘 국경에서 심판하십니다(9-10).

여호와께서 고관들의 말을 부정적으로 인용해 다시금 이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내용상 앞에 나온 것의 요약입니다. 가마 안에 있는 고기처럼 안전을 확신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은 결코 가마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11).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고기가 된다’는 주장은 위정자들의 허풍에 불과합니다. 성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이들에 의해 희생당한 자들뿐이기에, 부패한 고기가 가마에서 꺼내 버려지는 것처럼 모두 성에서 끌어내집니다. 예루살렘이 골짜기에 둘러싸여 있어서 정복하기 힘든 성이지만, 여호와께서 적이 되셨기에 물리적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1b절의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리니’는 10a절의 문자적 반복이고, 내용상 9절의 요약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예루살렘은 18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주전 587년 7월 말에 함락당했고, 지배 계층의 일부는 사로잡혀 바벨론 원정군의 사령부가 있던 리블라(다윗 영토의 북쪽 경계; 6:14)로 끌려가 처형당했습니다(왕하 25:1-7). 바벨론 침략군은 점령한 지 대략 한 달이 지나 8월 말에 예루살렘을 불살라 잿더미로 만들고, 성벽을 허물어버리고, 사로잡은 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왕하 25:8-11).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시고 이스라엘 족속을 국경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실 때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지 않고, 주변 민족들의 규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12). 6절에서 전제된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불법과 폭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즙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간에서도 여호와의 명령을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의 지위와 특권을 포기하고 민족들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연결구: 에스겔의 반응(13)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슬퍼하시며, 이는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나타냅니다. 개인의 행동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서로를 위해 올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며, 믿음의 회복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13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13)

 

에스겔이 예언을 하는 중에 스물다섯 명의 고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갑자기 죽고, 이를 보고 있던 에스겔은 땅에 쓰러져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에스겔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일종의 징조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브나야’는 ‘건축하다’를 뜻하는 동사 ‘바나’와 신명 ‘야훼’의 단축형 ‘야후’가 결합한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세우셨다’를, ‘블라다’(펄라트야후)는 ‘구하다’를 뜻하는 동사 ‘팔라트(피엘)’와 ‘야후’가 결합한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구하셨다’를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의 죽음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참조. 삼하 7장)의 완전한 멸망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모두 죽음에 처하게 될 여호와의 철저한 심판 의지를 읽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다시 한 번(9:8) 개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한 행동에 대한 심판과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아시며, 진정한 슬픔과 회개를 원하십니다. 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믿음의 회복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현대인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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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10-01)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예루살렘 성전

에스겔 10장 1-22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과 예배는 모든 성도들의 바람이고 소망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임과 예배에는 하나님께 함께 하심이 느껴지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모임과 예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고 계시지 않은 성전을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본 장은 이상의 세 번재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기 위해 불로 심판하시고, 그룹을 타고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심으로써 구분의 영광을 가두어 가시는 것에 관한 이상입니다. 이 같은 이상과 관련하여 에스겔은 1장에서 체험했던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이상을 반복해서 서술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심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불 심판(1-8)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심판할 불타는 숯불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죄악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심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납니다.

 

1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3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 구름은 안뜰에 가득하며 4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5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6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8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1-8)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심판받아야 할 이유를 인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심판이 필연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섯 천사의 재앙에 이어, 본문에서는 일곱 번째 천사가 그룹에게서 숯불을 받아 예루살렘 위에 흩뿌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 보좌 형상이 나타남(1)

 

하나님의 심판은 보좌 형상이 나타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보좌는 위(位)와 영광과 통치를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앉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직접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보고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이전에 그발 강가에서 본 것으로서 그 때와 동일한 보좌였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보좌는 남보석 같은 색을 띤 채 그룹들의 머리 위, 곧 그 머리 위로 한없이 펼쳐진 수정 같은 궁창 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곳입니다(참고 1:26-2).

 

(2) 여호와께서 심판하심(2)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아껴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9:10)고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가는 베옷 입은 천사에게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심판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친 심판의 주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심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를 다양하게 사용하십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칼이나 기근이나 질병 같은 것으로써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5:12; 6:11-12). 그리고 이제 본문에서는 숯불로써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숯불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에 성전과 왕궁과 귀족들의 저택과 백성들의 집을 불살랐습니다(왕하 25:8-9). 다시 말해 숯불이 예루살렘 성읍 전체에 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숯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운반하는 “그룹 밑의 바퀴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에스겔은 첫 번째 이상에서 생물들(그룹) 사이에 있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1:13). 이는 심판의 도구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의미하며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3)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임함(3-5)

 

이상 중에 에스겔의 관심은 계속 여호와의 영광에 있었는데, 이제 그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 곧 성전의 동편 문 입구에 임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영광’이란 곧 ‘여호와’를 의미하는 간접적인 표현으로서 그것은 여호와께서 계신 곳에 항상 영광의 광채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본래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 안의 지성소에 있어야 했지만, 지금 그곳을 떠나 성전 문지방에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러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주목하여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그 충만한 영광에는 현상은 구름이 가득함, 광채가 가득함 그리고 그룹들의 날개 소리가 가득함(1:24)으로 나타났습니다.

 

(4) 불 심판이 임함(6-8)

 

예루살렘에 임할 불 심판이 이상으로 암시되었습니다.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가는 베옷 입은 사람(참조 9:2), 곧 일곱번째 천사가 그룹 속으로 들어가 바퀴 옆에 섭니다. 한 그룹이 그룹들, 즉 하나님의 병거를 운반하는 호위 천사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천사에게 건네줍니다. 가는 베옷 입은 천사가 두 손 가득히 불을 받아가지고 밖으로 나갑니다.

이제 에스겔은 더 이상 가는 베옷 입은 천사를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불을 받아서 성전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천사는 그 숯불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읍 위에 흩뿌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전 바깥에서는 천사가 뿌린 숯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고통스럽게 죽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후에, 이상에서 보여진 것처럼 예루살렘 성읍은 그렇게 철저히 불에 타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대하 36:19).

 

그룹들과 바퀴들(9-17)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역사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서 늘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분의 위대함을 경외하며 신앙 생활을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9○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10그 모양은 넷이 꼭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12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13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부르며 14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15○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16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17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에 있음이더라(9-17)

 

에스겔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보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구성하고 있는 그룹들과 바퀴들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룹들과 바퀴들에 대한 묘사는 한두 가지의 세부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이미 그발 강가에서 체험한 첫 번째 이상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1) 네 바퀴(9-13)

 

하나님의 보좌 병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바퀴를 가지고 있었는데, 네 개의 바퀴였습니다. 그것은 네 생물, 즉 네 그룹과 같은 수였습니다. 첫째는 모양이(9-10) 네 개의 바퀴는 모두 같은 모양으로서 황옥 같은 색채를 띠고 있었고,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 있는 것 같은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참조 1:15-16).

또한 움직임에 대헤서는(11)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 있는 것 같은 특이한 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이끄는 네 바퀴는 좌우나 전후로 이리저리 돌이키지 않고도, 사방의 모든 방면으로 곧장 앞으로 직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참조 1:15-21).

특징(12)은 그발 강가에서 체험한 이상에서 에스겔은 네 바퀴의 둘레에만 눈이 가득한 줄 알고 있었는데(1:18), 여기서는 네 바퀴뿐 아니라 그룹들의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에도 눈이 가득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아래 있는 그룹들과 바퀴들 전체에는 눈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곳을 살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8:12; 9:9)라고 생각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1:18).

명칭(13)은 네 바퀴는 ‘도는 것’이라고 불렸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청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명칭은 분명히 ‘구르고 도는’. 즉 회전하는 바퀴의 기능에 근거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이 이 같은 바퀴의 기능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마도 바퀴가 회전함으로써 어디론가 떠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도는 것'을 타고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려 하였던 것입니다.

 

(2) 네 그룹(14-17)

 

이제 에스겔의 시선은 바퀴를 끄는 그룹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전에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생물들을 보았었기에 이제 그것과 관련지어 그룹들을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네 그룹의 얼굴 모양은 각각의 그룹이 네 개의 얼굴를 가지고 있었는데(14), 곧 그룹과 사람과 사자와 독수리의 얼굴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체험했던 첫번째 이상에서 본 생물들의 얼굴 모양과는 다른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생물들의 얼굴 모양을 각각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로 묘사했습니다(1:10). 그런데 본절에서는 ‘소’ 대신에 ‘그룹’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차이에 대해서 단순히 필경사의 실수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가장 적합한 추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에스겔이 보고 있는 이상은 이전에 보았던 생물과 동일한 것으로서, 곧 그때의 생물이 ‘그룹’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 대신에 ‘그룹’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룹이 이전에 보았던 생물과 같은 꽃이라는 사실에 매우 흥분되어 그것을 묘사하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겔이 보고 있는 그룹은 이전에 그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생들이었습니다(15). 그때에는 그 생물들이 그룹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제사장 집안의 출원으로서 제사장 수업을 받아왔던 에스겔은 그룹이 지성소 안의 법궤 위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열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의 이상을 통하여 생물들, 곧 그룹들은 어디든지 할 수 있으며 모든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룹(생물)과 바퀴의 행동은 완전히 일치했는데, 그것은 그룹의 영이 바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6-17). 그룹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룹과 바퀴로 구성된 하나님의 보좌 병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함께 가고자 하는 모든 곳으로 즉시 갈 수 있었습니다(1:19-21).

 

성전을 떠나시는 여호와의 영광(18-22)

하나님을 섬기는 중에 그분의 보좌 병거를 나르면서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의 존재는 그들의 섬김과 호위를 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거룩하심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단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가 저토록 위엄 있고 거룩한데, 하물며 그들을 발 아래 두고 그들의 섬김과 호위를 받는 그분은 얼마나 위엄있고 거룩할 것인가"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18○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20○그것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 21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 22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그 몸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가더라(18-22)

 

에스겔의 관심은 줄곧 “여호와의 영광”에 있었는데, 이제 그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러한 움직임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1)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머뭄(18)

 

하나님께서는 그룹을 떠나 성전 문지방, 곧 성전의 동편 문 입구에 임했습니다(10:4). 그곳은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곳이자 성전을 빠져나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본래 지성소 안에 계셨어야 할 하나님께서 지성소를 나와 그곳에 머무신 것은 성전을 떠나시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성전 문지방을 떠나 다시 그룹들 위에 올랐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호위 천사들인 그룹(생물)들은 성전 우편 곧 성전 남쪽에서 보좌 병거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습니다(10:3).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축복과 운명은 하나님께서 떠나심으로서 끝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의 광경은 아주 심각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에스겔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뭄(19)

 

하나님께서 보좌 병거에 오르시자, 그룹들은 힘찬 날개 짓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하나님의 영이 그룹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별다른 명령 없이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뜰의 문지방을 떠나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성전 동문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에 있는 성전의 출입구였습니다.

 

(3) 생물들과 그룹들(20-22)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본 생물들과 지금 보고 있는 그룹들이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그 사실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그발 강가에서 갑작스럽게 이상을 체험한 에스겔은 이상 속에서 자신이 본 생물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놀랍고 두려운 존재로만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 생물들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을 에스겔이 마침내 본문의 이상을 통하여 그 생물들이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호위하는 그룹들, 즉 천사들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구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결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지키기 어려워,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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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09-01)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명령

에스겔 9장 1-11절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성도는 정결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경건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에 임해야 합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죽이는 무기를 든 여섯 사람에게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부터 시작해 남녀노소 모두 죽여 시체로 성전 뜰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사람은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해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려 죽임을 면하게 합니다.

 

심판 명령을 집행하는 자들(1-7)

하나님께서는 엄중한 심판을 행하시는 중에도 여전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고 무자비하게 치시는 폭군은 아닙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애통하며 통회하는 가운데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1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2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1-7)

 

진노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신실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무서운 신판을 행하시는 중에도 죄를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의 날에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게서 인정해 주시는 표식을 갖는 것입니다.

 

(1) 여섯 명의 파괴자들(1-2)

 

부패와 타락의 늪에 빠진 예루살렘과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손에 죽이는 무기를 든 자들을 소환하십니다.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은 ‘이 성을 징벌하는 자들’로, 여호와의 심판을 집행하는 파괴 천사들을 가리킵니다(참조. 출 12:23; 삼하 24:15-17). 진노하신 여호와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전면적으로 실행됩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와서’ 북쪽에 위치한 ‘놋 제단 결에’ 서서 명령을 기다립니다. 파괴 천사들이 나타나는 방향 ‘북쪽’은 자주 심판의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1:4에서도 에스겔은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시사해줍니다(참조. 렘 1:1315;4:6; 6:1; 6:22). ‘놋 제단’은 아하스 왕이 다메섹의 제단을 모방해 새 제단을 만들고는 북쪽으로 옮겨놓은 예루살렘 성전의 원래 제단입니다(왕하 16:14-15).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자가 손에 죽이는 무기를 든 여섯 가운데 하나인지 또는 그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인물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개역개정은 전자를 전제했지만, ‘그 중의 한사람’은 원문에 따르면 ‘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있는데’입니다. 4절에 따르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는 사람들을 살리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차림새와 역할에 있어 그는 다른 파괴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당한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주전 587년에 실제로 발생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에스겔이 주전 592년 환상 중에 본 파괴 천사들을 통한 여호와의 심판이 현실화된 사건입니다.

 

(2)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3-4)

 

심판 집행에 앞서 여호와께서 당신 처소를 떠나십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의 일차적 대상이기에 그분께서 성전을 떠나십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지성소(내소)와 성소(외소)와 주랑으로 구성됐는데, 가장 안쪽의 지성소에는 한 날개는 벽에 닿게, 다른 한 날개는 가운데서 서로 맞닿게 활짝 펼친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두 그룹이 편 날개는 예루살렘 성전에 왕으로 임재하시는 여호와의 보좌를 상징했습니다. ‘성전을 떠나심’은 성전 제의의 거절을 넘어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자진해서 성전을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집의 우상숭배가 여호와로 당신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합니다(8:6). 우상들로 더럽혀진 성소에서 우상들과 동거하지 않으려면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전 문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신 여호와께서 놋 제단 곁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지침을 주십니다. 먼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필갑)을 찬 사람을 불러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다가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질투심(5:15)을 유발하는 가증한 짓거리들 때문에 슬퍼하며 탄식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마에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철자 ‘타우’가 표시됩니다. 이들은 여호와께 속한 자들로 멸망의 날에 보호 받고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엄중하지만, 그분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의로운 자를 불의한 자와 함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참조.14:12-20; 18:1-32; 33:1-20).

성경에서 ‘표, 표지’는 일차적으로 보호나 소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추방당한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표(오트)를 주십니다(창 4:15). 히브리 종이 종신토록 그 주인을 섬기기를 원할 때는 그의 귀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습니다(출 21:6; 신 15:17). 요한계시록 7:2-4(참조. 14:1)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이마에 인 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구원을 받고, 13:16에 의하면 짐승이 우상숭배자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7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3) 심판의 명령과 집행(5-7)

 

여호와의 심판 명령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손에 칼을 잡은 자들에게 서기관의 필갑을 찬 사람을 따라다니며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일 것을 명령하신비다. 심판이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여자도 다 죽음에 넘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지도 긍휼을 베풀지도 않기로 하셨기에 벗어날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판은 여호와의 성소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성소’는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다른 성소도 아닌, 여호와께서 특별히 당신 거처로 택하신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그분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먼저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 곧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던’ 자들(8:16)이 칼에 맞아 죽습니다. 번제단이 놓인 성전의 안뜰이 부정한 시체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장소인 성전이 가장 불결하고 위험스러운 묘지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신, 여호와를 떠난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무덤일 뿐입니다. 손에 칼을 잡은 자들은 성전을 시체로 채운 후 성읍으로 나가 살육의 임무를 계속 수행합니다.

 

에스겔과 여호와(8-10)

성도는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북돋우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이루는 데 큰 힘이 됩니다.

 

8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9○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8-10)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정결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더욱 경건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1) 에스겔의 중보 의지(8)

 

파괴자들의 칼이 성전과 성을 치는 것을 보고 있던 에스겔이 긴급하게 여호와께 용서와 긍휼을 호소합니다(8). 이마에 표를 맞은 일부가 살아남을지라도 성전이 완전히 더럽혀지고(파괴되고) 주민들이 거의 다 죽는다면, 저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심판이 이처럼 철저하게 집행된다면, 살아남은 자들도 결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심판의 정도가 자신의 생각을 훨씬 넘자 에스겔은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완화해보려고 개입합니다(참조. 암 7:2,5).

 

(2) 단호한 심판 의지(9-10)

 

에스겔의 중보 시도는 여호와에 의해 단호하게 거절당합니다(10-11).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은 한계를 넘었고, 용서를 받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들은 불의와 불법으로 땅과 성읍을 가득 채우고, 역사 안에 계시된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무시한 채 애굽의 신들과 정치권력에 의존했습니다(8:12).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위대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등을 돌린 것처럼 그분도 이스라엘에게 연민과 긍휼 베풀기를 거절하십니다. 중보기도의 거절은 ‘심판의 피할 수 없음’과 ‘여호와의 인내의 한계를 넘은 죄악의 정도’를 전제합니다(참조 렘 7:16; 11:14; 14:11; 15:1).

 

심판의 실행 보고(11)

성도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삶에서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개인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결하고 경건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신앙의 성숙과 성장에 필수적입니다.

 

11보라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11)

 

가는 베 옷을 입은 자가 심판이 명령대로 집행되었다고 여호와께 보고합니다. 누구도, 어떤 세력도 그분의 명령에 맞서거나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결정하신 심판은 그분의 의지대로 지체없이, 철저하게 이행됩니다. 우상들과 우상숭배자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된 운명입니다. 이미 정하신 계획대로 철저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느 민족에 의해 멸망할지는 계시되지 않았지만, 침략자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멸망되기로 결정된 자들을 모두 칼로 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를 구별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며, 정결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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