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07-02)
임박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
에스겔 7장 14-27절
홍수가 나면 같은 크기와 모양의 집이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현재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심판 날에는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과 다른 것을 의지한 사람은 그 결과에서 큰 차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신앙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선택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바벨론 군대를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들은 단지 오물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기로 작정하시면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전혀 쓸모없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도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14-18)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범죄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중요시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4○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르렀음이라 15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16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17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18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14-18)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땅에 임할 파국적 재앙이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침략군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나팔을 불어 전투병을 모집하고 모든 준비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 났기에 아무도 싸움터에 나가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모든 무리에게 미쳤기에 멸망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 싸우시기에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도처에 죽음뿐입니다. 성안의 거리에는 칼이 날뛰고,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인 집안에서는 전염병과 기근뿐이다. 성 밖 들판에 있는 자는 칼에 맞아 죽고, 성벽으로 보호를 받는 성안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이 삼켜버립니다(참조. 렘 14:18). 칼과 전염병과 기근의 심판은 전쟁으로 인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참조. 5:12; 6:12). 전염병과 기근은 포위당한 성에서는 칼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산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슬피운다.’ ‘산과 골짜기’는 일차적으로는 적이 추적할 수 없는 험난한 산악 지대를 가리키지만, 문맥에 따라 읽으면 풍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는 39:11의 겨우를 제외하고 언제나 ‘산’과 함께 나오는데(참조. 6:3; 7:16; 31:12; 32:5; 35:8; 36:4,6), 이스라엘의 심판과 관련해서는 6:3과 7:16에만 나옵니다. 두 본문이 서로 연결된다면, 피난한 곳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찾아갔던 곳입니다. 풍요와 번성을 기대하며 산과 골짜기를 찾아가 우상을 섬겼지만, 그 결과는 적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안전하고 평안한 성을 떠나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16절의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는 심판의 개인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모든 무리에게 미친 여호와의 진노(14)는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의 폭발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쏟아붓는 분은 각 사람의 죄악에 따라 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입니다(8), 나팔을 불어도 싸움터에 나갈 사람이 없음은 성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침략하는 적을 보고 다들 공포에 사로잡혀 손에 맥이 풀리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해진다’(17). 놀라 손에 힘이 빠져 무기를 들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 오줌을 쌉니다. 성의 함락은 정해진 운명이기에, 죽음을 애곡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다’(18). 굵은 베로 허리를 이고 머리를 깎는 행위는 전형적인 애도 행위에 속합니다. 베옷은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참조 왕상 21:27, 왕하 6:30), 회개할 때나(참조 욘 3:5,6,8; 시 69:11), 죽은 자를 애도할 때(참조 렘 4:8; 6;26; 49:3; 욜 1:8) 입니다. ‘수치’는 단순한 감정적 부끄러움의 표현만은 아닙니다. 적이 침략하면 맞서 싸워야 하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싸우지 못하고, 패배를 막을 수 없기에, 얼굴에 수치가 가득합니다. 17-18절은 특이하게도 여러 신체 부위(손, 무릎, 허리, 얼굴, 머리)를 활용해 막다른 상황을 극적으로 서술합니다. 전쟁의 공포와 절망과 무력함을 온몸으로 절감합니다.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파국적 재앙입니다.
소용없는 재물(19-20)
위기가 닥치면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보다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재물에 의존하기보다는, 진정한 해결책은 회개와 영적인 준비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닌 신앙입니다.
19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20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21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22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19-22)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금과 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을 구해주지도 못하고 굶주림을 해결해주지도 못하기에 버려지는 ‘오물’(불결한 것)처럼 밖에 내던져집니다(참조. 2:20, 습 1:18). 포위당해 양식이 떨어진 성이나 점령군에 유린당해 폐허가 된 땅에서 금과 은은 평상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합니다. ‘오물’로 옮긴 ‘니다’는 특히 월경의 부정을 가리키는 단어로(참조, 레 15:19-33; 18:19), 에스겔은 36:17에서 피 흘림과 우상숭배로 인한 땅의 부정함을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부정함에 비교했습니다. ‘창자’와 나란히 사용된 ‘네페슈’는 여기서는 ‘식욕’(굶주림)을 의미합니다. 금과 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죄를 더할 뿐입니다. 금과 은은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악의 걸림돌’은 에스겔의 고유한 표현으로, 14:3,4,7에서는 우상을, 18:30에서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가리키고, 44:12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 들어 이스라엘 족속’을 실족하게 한 레위인들이 적용됩니다.
20절은 금과 은이 어떻게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의 아름다운 장신구’를 자랑스레 여기고 그것으로 그들의 역겨운 신상들, 혐오스러운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금과 은으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자랑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을 우상숭배에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남다른 축복에 속하는 금과 은이 이스라엘을 배반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주신 분께 감사하기는커녕 금과 은으로 역겨운 신상과 혐오스러운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죄악의 걸림돌’이 된 금과 은을 여호와께서 ‘오물’(불결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20절에서 19절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에 사용된 금과 은을 ‘오물’로 만드시기에, 그분의 진노의 날에 목숨을 구해주지도 배고픔을 달래주지도 못하는 금과 은을 사람들이 ‘오물’처럼 밖에 내버립니다. ‘그의 아름다운 장신구’를 성전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입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와 구원을, 곧 성전과 여호와를 일치시켰습니다. 성전이 구원의 보루가 되면서 여호와께서 성전에서 쫓겨나시고, 사람들이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만든 우상들로 성전을 채웠습니다.
침략자들로 더럽혀진 땅(23-24)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는 심각하며,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외부의 침략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침략과 더러움이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23○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24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23-24)
여호와께서 우상을 아름답게 치장하였던 금과 은의 장신구를 침략자들에게 노획물과 약탈물로 내주어 더럽게 하십니다(21). ‘장식물’을 성전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21,22,24절에 사용된 동사 ‘더럽히다’(할랄)에 근거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돌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내 은밀한 처소’(보물)에 들어와 그것을 더럽히게 하십니다(22). ‘은밀한 처소’는 성전으로 이해하지만, ‘성전’의 성은 남성인데 후반에서 이를 여성으로 받기에 예루살렘 성 또는 가나안 땅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자들을 데려다가 집들을 차지하게 하고, 강한 자의 자랑을 그치게 하고, 그들의 성소들이 더럽혀지게 하십니다(24). ‘그들의 성소(들)’는 예루살렘 주변이나 그 안에 있는, 또는 6장에 언급된 지방 성소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성소 또는 땅/성마저도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게 하신 이유는 땅이 피로 넘치고 성읍이 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23). ‘피 홀리는 죄’는 문자적으로는 ‘피들의 재판’(미슈파트 다밈)으로, 주로 지위가 높은 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법적 폭력을 가리킵니다(참조 9:9).
절망적 형편(25-27)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다면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황과 마음을 아시며, 그에 따라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보여주며, 우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순종이 필수적입니다.
25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26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27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5-27)
심판의 공포가 임하니 평강은 사라지고, 영적인 암흑과 두려움과 심판만이 임합니다. 재앙에 재앙이, 소문에 소문이 뒤따를 때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출구를 찾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묵시를, 제사장에게 율법을, 장로에게 모략(조언)을 구하지만, 이들도 속수무책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기에 그분에게 물을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서도 파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을 찾지 못합니다. 왕과 고관과 주민(‘땅의 백성’)도 당황하여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고, 그들의 판결에 따라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멸망의 심판을 통해서야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범죄하게 되고, 그 결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아시며,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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