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에스겔(08-01)


예루살렘 성소에 가득한 우상숭배

에스겔 8장 1-18절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을 사랑한다면 아마 그곳에는 질투의 불길을 이글거리며 타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와 분노는 사랑한 만큼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와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와 표현이었습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주의 영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온갖 죄악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장면이 에스겔 8-11장을 이룹니다.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행한 역겨운 일은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성소에서 하나님을 떠나가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는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본 환상(1-3b)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야 할 이유는 주거 환경의 악화, 안전 문제, 혹은 정서적 상처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를 떠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적인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솔로몬 이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며 성소의 거룩함을 훼손했습니다. 이러한 배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진정한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셨고, 이를 이루지 못한 백성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1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2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1-3b)

 

에스겔은 첫 환상을 본 지 14개월 만에 두 번째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환상 중에 예루살렘 성소에 우상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1) 시간, 장소, 청자(1a)

 

에스겔이 환상을 본 시기를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592년 9월 17일), 곧 그발 강가에서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대략 1년이 지나 에스겔은 환상 중에 예루살렘으로 옮겨가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과 여호와의 심판을 경험합니다. 장소는 집을 방문한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임했습니다.

 

(2) 여호와의 손(1b)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손(1, 3a)과 영(3b)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 아마도 예루살렘 성의 북문 입구에 놓인다. 예루살렘 성의 북문은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성문입니다.

 

(3) 불.사람 같은 형상(2-3b)

 

1:26-27의 요약에 가까운 2절은 에스겔의 집에서 경험하는 환상을 그발 강가에서 경험한 첫 번째 환상에 연결시켜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그발 강가의 영광에 연결시키는) 10장을 예비해줍니다. ‘불 같은 형상’은 ‘사람 같은 형상’으로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영을 보내셔서 사회와 교회의 어둠을 보게 하실 때, 예언자적 근심과 탄식, 긍휼과 비통의 감수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전 안에 우상숭배(3c-16)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곳에 주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가장 경건하고 종교적인 곳도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곳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건하거나 거룩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며, 말씀의 중요성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지켜주는 힘이 됩니다.

 

3…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4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 5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6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7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10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11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12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이 행하는 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4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3c-16)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우상숭배를 네 장면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성전 파괴의 필연성을 드러내며, 여호와께서 성전을 떠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에스겔은 성전 안으로 이동하며 우상숭배의 심각성을 목도합니다. 네 번의 장면은 예루살렘이 다양한 우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냅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1) 북향한 문의 우상(3c-6)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에스겔이 제일 먼저 본 것은 북쪽으로 향한 문 입구의 제단과 우상이었습니다. 제의적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한 두 번째 계명(출 20:4)이 예루살렘에서 공공연히 무시됩니다. 예루살렘은 대놓고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앞에 제단을 놓습니다(참조 렘 11:13). 여호와의 거룩함이 그분 백성에 의해 완전히 무시당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에 우상의 자리가 있었음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우상숭배가 노골적이고도 전반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북문 입구에서 에스겔이 본 역겨운 짓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 칠십인 장로의 우상숭배(7-13)

 

첫 번째 장면이 일반 백성에 의한 공개적 장소에서의 우상숭배를 고발한다면, 두 번째 장면은 정치·사회 지도자들에 의한 은밀한 우상숭배를 폭로합니다. 왕궁(?) 뜰로 들어가는 입구로 옮겨진 에스겔은 담에 구멍이 있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의 명에 따라 담을 헐자 그 안에 문이 있어 그리로 들어간 에스겔은 ‘가증하고 악한 일’을 봅니다. 담의 구멍과 젊은 각각 은밀함/부정함과 폭로/고발을 상징합니다. 사면 벽에 ‘각양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10)이 그려진 방에서 이스라엘의 칠십인 장로들이 손에 향로를 들고 우상들에게 분향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12)라고 탄식합니다.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은밀하게 애굽의 신들에게 향을 사르고 이들을 숭배합니다. 애굽에서는 신들이 곤충이나 짐승의 형상으로 표현됐습니다. 이들은 모든 핑계를 여호와께로 돌리며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정당화합니다. 이들의 항변과 불만은 아마도 주전 597년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의 첫 번째 유배를 여호와의 무관심 또는 무능력으로 간주했던 것 같습니다. 통속적 신학에 따르면 한 민족의 패배는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이들은 막강한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할 수 없었던 여호와를 포기하고 더 강력한 애굽의 신들에게서 보호와 안녕을 찾습니다.

 

(3) 여자들의 담무스 숭배(14-15)

 

세 번째로 에스겔이 본 것은 성전 북문 입구에서 행해지는 여자들에 의한 담무스 제의였습니다. 담무스 제의가 성전과 연결된 공개적인 장소에서 행해지고 있음은 여자들에 의한 담무스 제의가 제도권의 종교와 정치로부터 묵인 받았거나 또는 허용됐음을 시사해줍니다(참조, 렘 44:15-19). 원래 목자의 신이었던 담무스(Tammus)는 주전 8-7세기에는 식물의 신으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방에 널리 퍼졌습니다. 농경 사회의 풍요 제의에 속하게 된 담무스 제의는 자연의 순환주기에 일치하여 식물의 성장과 죽음을 신화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담무스는 하지(夏至) 때에 죽어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다시 소생했습니다. 숭배자들은 담무스가 죽어 지하세계에 내려가 있는 동안(식물이 죽은 기간) 그의 소생을 기원하며 애도했습니다.

 

(4) 제사장들의 태양 숭배(16)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예루살렘 성전 안뜰로 데리고 가십니다. 대략 스물다섯 명의 사람이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을 향해 절을 하며 경배합니다. 여호와의 성소를 등 뒤로 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을 경배하는 제사장들의 모습은 물론 성전의 물리적 위치에 일치하는 여호와에 대한 이들의 배교 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참조. 렘 32:33-34). 여호와를 섬겨야 하는 제사장들이 그분의 성전 안에서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적 타락은 여호와께서 인내하실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신 여호와는 이제 당신 성전에서 우상들과 함께 지내거나 더럽혀진 당신 처소를 심판/멸망에 넘겨야 하는 양자택일에 놓이십니다. 태양은 고대 근동에서 법과 생명을 지배하는 신으로 간주됐습니다. 아마도 앗수르에 종속됐던 므낫세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참조. 왕하 21:5). 열왕기하 23:11에 의하면 유다 왕 요시야는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거해버립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포(17-18)

사람의 심령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역겨워하시는 우상들이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우상이 나란히 세워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섬기길 원하십니다.

 

17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7-18)

 

네 번에 걸쳐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를 보여주신 후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심판 의지를 에스겔에게 밝히십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온갖 역겨운 짓들에 비추어 볼 때 심판의 정당성은 달리 변명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웁니다. 종교적 타락과 윤리적 타락은 서로 나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그분의 윤리적 계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당연합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우는 자들에게 분노로 응답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들에게 더는 동정심이나 연민을 갖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들이 살려달라고 곤경 중에 부르짖어도 이들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사함의 간구’나 ‘여호와께로 돌아감’은 아무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이 종말에 도달하면 구원 가능성은 완전히 상실됩니다. 때를 놓친 회개는 심판의 필연성을 무효로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의 우상숭배의 심각성을 드러내십니다. 에스겔은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패한 행위를 목격하며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결국 성전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경배와 순종을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7-02)


임박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

에스겔 7장 14-27절


 

홍수가 나면 같은 크기와 모양의 집이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바위 위에 지은 집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현재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심판 날에는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과 다른 것을 의지한 사람은 그 결과에서 큰 차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신앙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선택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바벨론 군대를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들은 단지 오물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기로 작정하시면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전혀 쓸모없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도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14-18)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범죄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중요시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4○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르렀음이라 15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16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17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18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14-18)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땅에 임할 파국적 재앙이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침략군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나팔을 불어 전투병을 모집하고 모든 준비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 났기에 아무도 싸움터에 나가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모든 무리에게 미쳤기에 멸망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 싸우시기에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도처에 죽음뿐입니다. 성안의 거리에는 칼이 날뛰고,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인 집안에서는 전염병과 기근뿐이다. 성 밖 들판에 있는 자는 칼에 맞아 죽고, 성벽으로 보호를 받는 성안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이 삼켜버립니다(참조. 렘 14:18). 칼과 전염병과 기근의 심판은 전쟁으로 인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참조. 5:12; 6:12). 전염병과 기근은 포위당한 성에서는 칼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산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슬피운다.’ ‘산과 골짜기’는 일차적으로는 적이 추적할 수 없는 험난한 산악 지대를 가리키지만, 문맥에 따라 읽으면 풍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는 39:11의 겨우를 제외하고 언제나 ‘산’과 함께 나오는데(참조. 6:3; 7:16; 31:12; 32:5; 35:8; 36:4,6), 이스라엘의 심판과 관련해서는 6:3과 7:16에만 나옵니다. 두 본문이 서로 연결된다면, 피난한 곳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찾아갔던 곳입니다. 풍요와 번성을 기대하며 산과 골짜기를 찾아가 우상을 섬겼지만, 그 결과는 적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안전하고 평안한 성을 떠나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16절의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는 심판의 개인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모든 무리에게 미친 여호와의 진노(14)는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의 폭발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쏟아붓는 분은 각 사람의 죄악에 따라 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입니다(8), 나팔을 불어도 싸움터에 나갈 사람이 없음은 성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침략하는 적을 보고 다들 공포에 사로잡혀 손에 맥이 풀리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해진다’(17). 놀라 손에 힘이 빠져 무기를 들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 오줌을 쌉니다. 성의 함락은 정해진 운명이기에, 죽음을 애곡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다’(18). 굵은 베로 허리를 이고 머리를 깎는 행위는 전형적인 애도 행위에 속합니다. 베옷은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참조 왕상 21:27, 왕하 6:30), 회개할 때나(참조 욘 3:5,6,8; 시 69:11), 죽은 자를 애도할 때(참조 렘 4:8; 6;26; 49:3; 욜 1:8) 입니다. ‘수치’는 단순한 감정적 부끄러움의 표현만은 아닙니다. 적이 침략하면 맞서 싸워야 하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싸우지 못하고, 패배를 막을 수 없기에, 얼굴에 수치가 가득합니다. 17-18절은 특이하게도 여러 신체 부위(손, 무릎, 허리, 얼굴, 머리)를 활용해 막다른 상황을 극적으로 서술합니다. 전쟁의 공포와 절망과 무력함을 온몸으로 절감합니다.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파국적 재앙입니다.

 

소용없는 재물(19-20)

위기가 닥치면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보다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재물에 의존하기보다는, 진정한 해결책은 회개와 영적인 준비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닌 신앙입니다.

 

19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20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21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22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19-22)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금과 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을 구해주지도 못하고 굶주림을 해결해주지도 못하기에 버려지는 ‘오물’(불결한 것)처럼 밖에 내던져집니다(참조. 2:20, 습 1:18). 포위당해 양식이 떨어진 성이나 점령군에 유린당해 폐허가 된 땅에서 금과 은은 평상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합니다. ‘오물’로 옮긴 ‘니다’는 특히 월경의 부정을 가리키는 단어로(참조, 레 15:19-33; 18:19), 에스겔은 36:17에서 피 흘림과 우상숭배로 인한 땅의 부정함을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부정함에 비교했습니다. ‘창자’와 나란히 사용된 ‘네페슈’는 여기서는 ‘식욕’(굶주림)을 의미합니다. 금과 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죄를 더할 뿐입니다. 금과 은은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악의 걸림돌’은 에스겔의 고유한 표현으로, 14:3,4,7에서는 우상을, 18:30에서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가리키고, 44:12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 들어 이스라엘 족속’을 실족하게 한 레위인들이 적용됩니다.

20절은 금과 은이 어떻게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의 아름다운 장신구’를 자랑스레 여기고 그것으로 그들의 역겨운 신상들, 혐오스러운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금과 은으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자랑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을 우상숭배에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남다른 축복에 속하는 금과 은이 이스라엘을 배반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주신 분께 감사하기는커녕 금과 은으로 역겨운 신상과 혐오스러운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죄악의 걸림돌’이 된 금과 은을 여호와께서 ‘오물’(불결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20절에서 19절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에 사용된 금과 은을 ‘오물’로 만드시기에, 그분의 진노의 날에 목숨을 구해주지도 배고픔을 달래주지도 못하는 금과 은을 사람들이 ‘오물’처럼 밖에 내버립니다. ‘그의 아름다운 장신구’를 성전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입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와 구원을, 곧 성전과 여호와를 일치시켰습니다. 성전이 구원의 보루가 되면서 여호와께서 성전에서 쫓겨나시고, 사람들이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만든 우상들로 성전을 채웠습니다.

 

침략자들로 더럽혀진 땅(23-24)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는 심각하며,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외부의 침략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침략과 더러움이 가득한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23○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24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23-24)

 

여호와께서 우상을 아름답게 치장하였던 금과 은의 장신구를 침략자들에게 노획물과 약탈물로 내주어 더럽게 하십니다(21). ‘장식물’을 성전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21,22,24절에 사용된 동사 ‘더럽히다’(할랄)에 근거합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돌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내 은밀한 처소’(보물)에 들어와 그것을 더럽히게 하십니다(22). ‘은밀한 처소’는 성전으로 이해하지만, ‘성전’의 성은 남성인데 후반에서 이를 여성으로 받기에 예루살렘 성 또는 가나안 땅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자들을 데려다가 집들을 차지하게 하고, 강한 자의 자랑을 그치게 하고, 그들의 성소들이 더럽혀지게 하십니다(24). ‘그들의 성소(들)’는 예루살렘 주변이나 그 안에 있는, 또는 6장에 언급된 지방 성소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성소 또는 땅/성마저도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게 하신 이유는 땅이 피로 넘치고 성읍이 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23). ‘피 홀리는 죄’는 문자적으로는 ‘피들의 재판’(미슈파트 다밈)으로, 주로 지위가 높은 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법적 폭력을 가리킵니다(참조 9:9).

 

절망적 형편(25-27)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다면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황과 마음을 아시며, 그에 따라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보여주며, 우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순종이 필수적입니다.

 

25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26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27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5-27)

 

심판의 공포가 임하니 평강은 사라지고, 영적인 암흑과 두려움과 심판만이 임합니다. 재앙에 재앙이, 소문에 소문이 뒤따를 때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출구를 찾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묵시를, 제사장에게 율법을, 장로에게 모략(조언)을 구하지만, 이들도 속수무책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기에 그분에게 물을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서도 파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을 찾지 못합니다. 왕과 고관과 주민(‘땅의 백성’)도 당황하여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고, 그들의 판결에 따라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멸망의 심판을 통해서야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범죄하게 되고, 그 결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상황을 아시며,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7-01)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과 인내

에스겔 7장 1-13절


 

한국은 매년 여름에 남쪽에서 태풍이 올라옵니다. 이 태풍들은 순식간에 큰 피해를 일으키며, 사람들의 경각심을 높입니다. 방송사에서는 태풍이 우리나라에 가까워질수록 관련 뉴스를 더욱 자주 내보내며,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수록 심판의 경고도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연재해와 신앙적 경고는 모두 위험이 가까워질 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패망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으로 하나님께 토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응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이 선포됩니다. 그로인해 바벨론의 침공을 통한 이스라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더 참지 않으시고 교만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재앙의 날이 다가왔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종말(Ⅰ)(1-4)

배고플 때 음식물의 냄새는 매우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썩은 음식물의 냄새는 역겨워 참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경고하고 계신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회개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3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4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4)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온갖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종말이 왔습니다.

 

(1) 도입부(1)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온 땅에 종말이 왔음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2) 심판의 선고(2-4)

 

하나님의 심판이 간결하고도 엄중하게 선포됩니다. 심판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축복으로 주신 땅이 이스라엘의 음란하고 부끄러운 우상숭배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전에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의 환상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끝’이 확정적임을 가르쳐주셨던(암 8:1-2) 여호와께서 이번에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땅의 끝이 왔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끝이다! 이땅 사방에 끝이 왔다’(2절의 사역). 이스라엘의 끝은 정치적 사건 이상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닥친 끝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 분노를 보내시고, 그 걸어온 길(행위)에 따라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가증한 (모든) 일’(3,4,8,9)은 주로 우상숭배와 관련된 죄를 가리킵니다(참조, 8장; 16장).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당신의 연민과 긍홀을 거두십니다. 더는 이스라엘을 아까워하지도 가엾게 여기지도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걸어온 죄의 길을 이스라엘에게 되갚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행위에 상응하여 벌을 받아야 합니다. 연민과 긍휼의 보호막이 거둬지기에 이스라엘의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멸망을 피할 길이 없어집니다.

3절과 8절의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너에게 주리라’이고, 4절과 9절의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도 ‘정녕 내가 길을 네게 주리니 네 가증한 일이 네 가운데 있으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모든 가증한 일과 걸어온 길이 징벌로 주어집니다. 죄가 곧 벌이 됩니다. 죄와 벌을 구별하는 현대적 사고와 달리 히브리인들은 죄와 벌을 동전의 양면처럼 이해했습니다. 벌은 먼 미래에 주어질 가능성으로서의 징계가 아닙니다. 죄는 그 자체로 벌을 함축합니다. 곧 죄를 저지르는 순간에 이미 징계(벌)가 시작됩니다.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징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종말(Ⅱ)(5-9)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자로서,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을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합니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5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6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7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8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9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5-9)

 

여호와께서 한 번 더 이스라엘 땅에 끝이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이 끝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아니라 행위대로 보응하는 재앙의 날입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하신 재앙은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계속되는, 이미 시작된 재앙입니다. 시점의 전환을 시사해주는 3절의 ‘이제는’ 대신에 5절과 6절은 ‘볼지어다’를 사용합니다. 3절에서 선포된 끝/재앙이 눈앞의 현실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6절은 동사 ‘오다’를 두 번은 완료로, 한 번은 현재분사로 사용하고, 그 사이에 동사 ‘깨다’를 위치시켜 생생하고도 현장감 있게 표현합니다. ‘끝이 왔다. 그 끝이 왔다. 네게 거슬러 (끝이) 깨어났다. 보아라, (끝이) 온다’ 잠을 자고 있던 ‘끝’이 잠에서 깨어 오고 있습니다. 7절은 이를 여호와의 날의 도래로 선포합니다.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왔다. 때가 왔다. 날이 가까웠다. 혼란의 날이요), 산(에서 지르는 환호)의 외침(의 날)이 아니다.’ 내용상 3절을 반복하는 8절에서 여호와의 분노의 강도가 더 고조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진노를 보내신 여호와께서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쏟아 부으십니다. 4절올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9절은 ‘때리는’을 첨가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심판주이심을 강조합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10-13)

우리는 각자의 선택과 결정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정기적으로 회개하며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더불어, 사회와 공동체의 죄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정의와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10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 11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며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 12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13파는 자가 살아 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묵시가 그 모든 무리에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사람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목숨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졌음을 강조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겪게 될 재앙과 고통을 예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날의 고통은 누구도 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칠 불행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 임박할 날(10-11)

 

심판의 몽둥이가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가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죄가 심판의 막대기를 불러 온 것이며 이 심판의 재앙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 재물도, 귀중품 하나도 남지 않는 철저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이 네 절은 원문의 상태가 매우 나빠 일부는 번역도 불확실합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는 10aba절은 내용상 7절의 반복에 가깝습니다. 10bb절의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의 의미는 전혀 불분명합니다. 10bb절을 받는 11절의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은 아마도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의 불법적 통치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10bb절과 11절은 이스라엘에 파국적 심판이 임하게 된 원인을 제시해줍니다. 본문이 훼손된 것 같은 11b절은 무엇을 말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2) 상거래의 중단(12-13a)

 

12-13절의 말씀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행위의 중단에 관한 일반적 언급이라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여 심판하시는 날에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절망적 상황이 코앞에 닥쳐왔기에 큰 이득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큰 손실을 보아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성이 함락되면 애써 얻은 금은보화도 점령군에게 약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적의 칼로부터 목숨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많은 재산이 있어도 사로잡혀 가는 자가 가져갈 수 없습니다.

 

(3) 취소할 수 없는 심판(13b)

 

13b절의 ‘이는 묵시가 그 모든 무리에게 돌아오지 아니하고’는 ‘그 모든 무리에 관한 이상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 번역이 맞는다면, ‘묵시/이상’은 앞에서 선포한 재앙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땅의 모든 무리(교만)와 관련해 선포된 멸망의 심판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지 않고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스라엘이 예외 없이 파국적 심판에 떨어짐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악과 불순종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주시며, 그 결과로 오는 재난을 예고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심판자임을 강조하며,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 가능성을 언급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회개와 변화를 통해 진정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6-01)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

에스겔 6장 1-14절


 

배고플 때 밥이 익어가는 냄새는 향긋하고 고소합니다. 그 고소한 음식이라도 변질되어 가면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음식이 정상적일 때는 맛있지만 상하면 식중독에 걸리고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변질된 음식이 위험한 것처럼 죄악은 상한 음식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세상을 밝힐 때는 훌륭하지만, 반대로 세상을 멸망시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사회악이 될 때가 있습니다.

 

  • 에스겔 4-5장에서 상징적인 4가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심판의 원인이 된 우상숭배의 실상을 고발합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산과 언덕, 계곡과 골짜기에서 자신들의 제단을 쌓고 우상을 숭배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넷째 상징: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경고(1-10)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데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보다 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침공한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3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4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5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 6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 7또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1-10)

 

이스라엘이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산들을 바라보며 심판을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며 멸망과 유대의 심판을 선언하는 6장의 전체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매우 짜임새 있습니다. 사소한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주석자들은 6장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1절을 제외하고 크게 2-10절과 11-14절의 두 단락으로 구분하고, 각 단락을 다시 인지 양식에 따라 2-7절과 8-10절, 그리고 11-13절과 14절의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 말씀의 계시(1)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기이하고 충격적인 표적 행위들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과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6-7장에서 이스라엘의 산들과 땅에 대해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대상은 이스라엘의 산들입니다(1). 가나안 땅에 대한 심판의 선고입니다.

 

(2) 선포 사명의 위임(2-3)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3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라고 이스라엘이 그 예언을 듣는 자들로 등장합니다. 선포의 대상이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로 확대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산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물 주신 땅에서 우상숭배가 음란하게 행해지던 모든 장소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풍요제를 드리던 방법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물론 산에서만 우상숭배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산당이 이스라엘이 풍요제를 드리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예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복되어 표현되는 바, 산당, 제단, 분향제단, 우상 그리고 다시 우상, 제단 사방, 각 높은 고개, 모든 산꼭대기, 모든 푸른 나무 아래, 무성한 상수리 나무 아래,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들입니다.

이스라엘도 산이나 언덕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산당 제사를 통해서 가나안의 우상 종교가 여호와 종교로 들어온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과 언덕에 산당은 혼합주의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점점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항상 성적 문란함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9; 호세아 4:13-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모든 면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자행한 우상숭배는 가치관을 비롯해서 선택된 민족의 삶의 모든 국면에 악한 향을 미쳤습니다.

 

(3) 칼의 심판(4-7)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계속 드렸지만, 동시에 전국 거의 모든 산에 우상을 위한 산당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자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빠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자손의 시체를 그 우상 앞에 두며 너희 해골을 너희 제단 사방에 흩으리라’(5)고 심판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1인칭으로 직접 이스라엘의 산들을 고발하시는 3절의 ‘나 곧 내가’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이 에스겔이 선포해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7절까지는 집중적으로 산당의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우상숭배가 산에서만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산당이 가나안의 중요 제의가 유입되는 주요 통로였기에 ‘이스라엘의 산들’이 심판의 대상이자 청자로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을 불러 산당을 없애버리시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은 죽음에 넘겨 그 시체를 우상의 제단들 앞에 놓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겼던 우상은 하나님께 심판 받는 자들을 절대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하실 때, 우상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모습을 ‘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6)라고 하십니다. 우상의 실체가 그대로 들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상이 얼마나 헛것인지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성읍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이 만든 산당과 우상과 제단들은 다 부수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4) 유배의 심판(8-10)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노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한편 긍휼을 베푸시고 ‘남은 자’를 남겨두셔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배의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앞에서 기술된 폐허의 심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많은 백성이 죽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안심하기 너무 이릅니다. 여호와께서 일부를 남겨두시겠지만, 칼에 피한 자들 중에 일부를 여러 나라로 흩어져 이방 나라에서 유배생활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구역질나는 것인지를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지만, 이는 냉혹한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자기 근처에 산당을 만들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점점 가나안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심히 패역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백성들보다 더 악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과 나무 그리고 골짜기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즐겨 찾던 산당이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될 것이며 제단들이 파괴되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 앞에 시체로 던져질 것임을 선언 하십니다.

 

온 땅에 임할 멸망의 심판(11-14)

하나님 앞에 예배의 삶을 게을리 할 때, 교회만 망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사업 그리고 자녀들 전체가 망가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철저한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듯이 오늘날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심을 보여줍니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12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13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 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4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11-14)

 

본문은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지 못하고 막연한 종교생활에 머무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경고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모든 열방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 선포 사명의 위임(11a)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언급합니다. 이처럼 철저한 심판을 행하시는 목적은 하나님만이 참된 주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점점 흘러갈수록 심판의 강도도 강해집니다. 2절에서는 에스겔에게 얼굴을 이스라엘의 산들로 향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번에는 손뼉을 치면서 발을 구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점 더 심각한 예언을 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2) 전쟁의 심판(11b-13)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통하여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지만, 죄를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칼과 기근과 온역으로 비참한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온 땅은 황폐하게 되며, 백성들은 이를 통하여 여호와의 절대주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우상을 섬겼던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3) 여호와의 손에 의한 심판(14)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지 모릅니다. 우상 숭배 곧 탐심을 품고서 죄악을 일삼으면서도 당장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 평안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공의를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신 그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인해 더할 수 없는 감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두려우신 하나님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와 두려운 심판을 기억함으로 우상 숭배와 죄악을 일삼는 것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남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돌아온 자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수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려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은총을 구하는 다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희망을 남겨두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5-01)


공의로운 심판으로 하나님을 배운 에스겔

에스겔 5장 1-17절


 

한 전도자가 이웃에게 전도를 했는데, 이웃의 대답이 ‘우리 친척 중에 목회자가 있는데, 그분의 행동을 보면 절대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사람도 ‘우리 직장 상사는 장로님인데, 그분의 행동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그 전도자가 ‘제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전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먼저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본이 되지 못했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하는 마음에 슬펐습니다.

 

  •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불사르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고 가중히 행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분노의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셋째 장면 : 정복당한 자들의 운명(1-4)

사람들이 말로는 듣지 않는 패역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삶에 대한 결론을 상징 행위를 통해 요란한 충격요법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위를 주목시켜야 조금이라고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고, 교훈을 받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강퍅한 이스라엘에게 머리털과 수염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1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2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3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4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1-4)

 

본 5장은 4장에서 시작된 한 단락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 세 가지 상징 행위는 예루살렘 포위와 예루살렘 기근과 같은 상징 행위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머리칼과 수염을 통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 결과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1) 주인의 절망적 운명(1-2)

 

여호와께서 다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멸망의 세 번째 단계(4:1-3, 9-17)를 보여주는 표적 행위를 실행하도록 명령하십니다(1-2; 12:3-20).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가져다가 그것을 삭도로 삼아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거룩한 백성이 아니며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과 그로 인해 애곡이 있을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저울에 달아 삼등분하여 나누고, 포위 기간이 끝날 때 삼분의 일은 성안에서 불태우고, 다른 삼분의 일은 (성 밖에서) 바람에 흩트리게 하십니다. 저울에 달아보는 것은 심판이 임의적인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정확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물샐틈없이 포위된 성에서 거듭된 공격에 지치고 양식마저 떨어져 주민들이 전투력을 상실하자, 공격군이 성안으로 진입을 시도합니다. 성벽을 뚫고 들어간 침략군에 의해 성은 점령당하고 주민은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 삼분의 일은 불에 타 죽고, 삼분의 일은 칼에 맞아 죽고, 삼분의 일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다가 포로로 사로잡힙니다(12).

2절의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는 예루살렘 주민들 중 한 명도 전란의 참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을 보여줍니다. 일부가 성을 뚫고 들어오는 적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칼을 들고 이들을 뒤쫓아 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 표적 행위가 보여준 그대로 진행됩니다(참조, 열왕기하 25:1-12). 바벨론 군대에 1년6개월 이상 포위당한 예루살렘은 주전 587년 양식과 물이 바닥이나 전투력을 상실하고 함락됩니다. 점령군의 약탈과 피의 보복에 넘겨진 예루살렘은 한 달이 지나 불바다가 되고 성벽은 헐리고, 성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2) 남은 자의 멸망(3-4)

 

연속된 3-4절의 또 다른 표적 행위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점령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는 아주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일부가 살아남을 것을 보여줍니다.

대다수의 주민은 멸망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분 사람은 목숨은 구합니다. 그렇다고 점령군의 칼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살라라’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금 목숨을 잃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래도 옷자락에 싼 터럭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뒤따르는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에 의하면 그 남은 터럭마저 불길에 휩싸입니다. 남은 자들 가운데 일부를 살랐던 불길이 이스라엘은 족속에게로 옮겨 붙습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 가운데 살아남는 자가 없습니다. 아마도 유다의 멸망에 책임이 있는 지배 계급에 속하는 자들이 죽음에 넘겨지고 그 결과 온 이스라엘이 다시 파국적 재앙에 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4b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맞는다면,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의 암살과 그에 따른 유다의 혼란과 애굽으로의 피신(참조. 열왕기하 25:22-26; 예레미야 41-43장)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표적 행위의 해석 : 심판의 배경(5-17)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높이 세우시기도 하시지만, 반대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기근을 보내 양식을 끊으시고 전염병과 칼을 보내 목숨을 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은 스스로 수치를 자처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이러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5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6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7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9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10그리한즉 네 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잡아먹으리라 내가 벌을 네게 내리고 너희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방에 흩으리라 11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12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 가며 칼을 빼리라 13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14내가 이르되 또 너를 황무하게 하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 중에서 모든 지나가는 자의 목전에 모욕 거리가 되게 하리니 15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 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6내가 멸망하게 하는 기근의 독한 화살을 너희에게 보내되 기근을 더하여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것이라 17내가 기근과 사나운 짐승을 너희에게 보내 외롭게 하고 너희 가운데에 전염병과 살륙이 일어나게 하고 또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5-17)

 

왜곡된 선민사상과 삶과 분리된 구원 신학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멸망되어져 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예루살렘 성의 포위 공격(4:1-3)과 에워싸인 성의 기근(4:9-17)과 성의 함락(5:1-4)에 관한 표적 행위는 독자적인 선포이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기에 해석이 뒤에 함께 주어집니다. 2절을 해석하는 12절과 4:9-11+16-17절에 연결되는 10절과 16-17절을 제외하면, 전체 말씀은 표적 행위 자체보다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과 심판의 철저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1) 예루살렘의 고발(5-6)

 

여호와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이 택하신 분에 의해 멸망의 심판에 넘겨질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민족들과의 지리적 관계에 입각해서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5절의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모호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특별한 지위를 강조하는 말로도, 단순한 지리적 환경에 관한 언급으로도, 예루살렘의 고립과 이방으로 흩어짐을 보여주는, 곧 예루살렘의 특별한 지위를 상대화하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모두 가능하지만, 민족들에 비교해서 예루살렘을 고발하는 6절은 첫 번째 이해를 좀 더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예루살렘의 과거(5)와 현재(6)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상의 중심으로 삼으셨던 예루살렘이 그분의 규례와 율례를 무시하며 세상 민족들보다도 더 악하게 행했습니다. 이런 대비는 고발뿐만 아니라 심판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신학적 특권과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민족들보다 더 악해진 예루살렘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겨질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루살렘의 악이 초래한 여호와의 징벌적 심판으로, 예루살렘을 택하셨던 여호와의 변덕이나 무관심 탓으로 돌려질 수 없습니다.

 

(2) 여호와의 징벌(7-17)

 

예루살렘의 악은 여호와의 규례와 율례를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은 것 이상입니다.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7). 율례와 규례의 무시를 고발하는 6-7절의 문맥에 따르면 ‘너희의 요란함’은 짓밟힌 법질서로 인한 유다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가리키는 표현 같고, 문자적 이해가 불가능한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을 최상급으로 고발하는 말씀 같습니다. 민족들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규례를 지키는 데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은 그분의 규례를 전혀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의와 불법과 혼란은 민족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9절의 ‘네 모든 가증한 일’과 11절의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은 종교적 불법, 곧 우상승배의 고발입니다.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보다 악한 사회가 된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불법을 행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로 여호와의 성전마저 더럽혀졌습니다.

민족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는 예루살렘에 여호아께서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혹독한 심판으로 응답하십니다(8-10). 당신의 ‘율례’를 지키지 않은 자들(6,7)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예루살렘이 대놓고 여호와를 무시했기에 여호와께서도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이방인의 목전에서’) 예루살렘을 징벌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멸망하고 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흘어 집니다.

10절의 ‘네 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잡아먹으리라’는 장기간의 포위로 양식이 떨어진 성읍에서 일어났던 고대의 식인 풍습을 배경으로 합니다(참조, 레위기 26:29; 신명기 28:53-57; 열왕기하 6:28-29; 예레미야 19:9: 예레미야애가 2:20; 4:10). 예루살렘의 철저한 배반에 맞서 여호와께서도 더는 은총을 베풀지 않을 것을 맹세하십니다(11). ‘나도 (네 수염을) 자르고, 내 눈이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나도 긍휼을 베풀지 않으리라!’ 사랑과 긍휼 대신 그분의 칼과 진노가 예루살렘에 임합니다. 주민의 삼분의 일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쓰러지고, 삼분의 일은 칼을 맞아 죽고, 삼분의 일은 사방으로 흩어지지만 그들도 여호와의 칼을 피하지 못합니다(12). 여호와께서 분노를 다 풀어 당신 속을 후련하게 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보응하십니다(13). 당신 사랑을 배반하고 돌아오길 끝까지 거절한 예루살렘에게 사랑을 저버린(언약을 파기한)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십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한’(5)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 중에서’ 황무지와 모욕거리가 되고, 수치와 조롱거리와 두려움과 경고가 됩니다(14-15).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과 살육과 칼의 심판을 선포하는 16-17절은 전체 재앙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보여주고, 모든 열방이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만 구원 받고 천국가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믿지 않고 있는 그들도 구원을 얻기 위한 선교의 도구가 되게 하는 것, 즉,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 명확한 심판을 경고하시며, 그들의 심각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상징적 행동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을 지키지 않았을 때 따르는 고통의 결과를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길 원하시며, 그분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4-01)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교훈 받는 에스겔

에스겔 4장 1-17절


 

신앙의 토대인 마음이 중요합니다. 감동을 받고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따라 살기로 의지적으로 결단할지라도 그렇게 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가변적이어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훌륭한 가르침도 ‘마음 지킴’위에 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자신이 행한 것을 알아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대로 행하지 않음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다 놓고 예루살렘 함락과 관련된 상징적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또 에스겔에게 왼쪽으로 390일, 오른쪽으로 40일 동안 누워 죄악을 담당함으로 남복 왕국의 멸망과 포로 기간을 보이시고, 예루살렘 포위시 나타날 대가근을 예고하십니다.

 

첫째 장면 : 예루살렘의 포위(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듣는 사람들의 생명이 달린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조금 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할 때에도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유린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1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4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7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8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1-8)

 

예루살렘의 평안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평안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는 사라집니다. 처음 두 절의 묘사는 성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 과정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1) 성의 포위에 관한 표적 행위(1-3)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다가 무엇인가를 작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토판에 예루살렘 성읍을 상징하는 한 성읍을 새기고, 그 위에 성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와 장비를 사실대로 그려 또는 모형물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이 공격당해 함락을 의미합니다.

포위망을 치고 보루와 축대를 쌓고 진지를 구축하고 성벽을 부술 장비도 성 둘레에 세워놓습니다. ‘사다리’로 옮긴 ‘다예크’는 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 이용하는 보루를, ‘흙 언덕’으로 옮긴 ‘솔러라’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성을 공격할 수 있도록 그 주변에 성과 대등한 높이로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높은 둔덕을, ‘공성퇴’는 성벽이나 성의 다른 방어 시실을 깨는 데 사용하는 장비를 가리킵니다.

‘진을 치고’는 침략군들이 조직적으로 구역을 나눠 성을 공격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3절의 명령은 공격 장면을 사실적으로 언급하는 1-2절의 사건적 연속은 아닙니다. 보루와 축대와 진과 공성퇴는 성을 포위 공격할 때 실제로 사용하는 시설물과 장비이지만, ‘철판’은 에스겔과 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로 된 벽’의 상징물로 사용됩니다.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으로 삼고 네 얼굴을 그쪽을 향해 고정해라’는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단호한 적대감을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적이 되셔서 당신께서 택한 예루살렘을 공격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이 침략군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여호와의 결정임을 보여줍니다.

 

(2) 죄와 징벌에 관한 표적 행위(4-8)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짊어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이 누워있는 날수가 이스라엘과 유다가 담당해야 할 죄와 벌의 햇수가 됩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죄를 짊어져야 할 기간으로 각각 390일과 40일이 할당됩니다. 그는 왼쪽으로 390일 동안 누워 390년 동안 저질러진 이스라엘의 죄를(4-5), 오른쪽으로 40일 동안 누워 유다의 죗값 40년을 담당해야 합니다(6).

이스라엘에게 정해진 390년이 역사적 기간인지 또는 신학적 언급인지 모호합니다.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390년을 계산해야 할지 불분명합니다. 남북왕조의 분열(926년)을 기점으로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기까지는 대략 340년이 되는데, 열왕기에 나오는 왕의 통치 기간을 그대로 합산하면 대략 393년 또는 390년이 나옵니다. 이 경우에 남북 분열의 역사가 죄와 그 죄로 인한 징계의 기간이 됩니다. 다른 가능성은 390년을 솔로몬 성전이 존속했던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주전 962-955년에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주전 587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불타서 파괴되기에, 368년이라는 엇비슷한 기간이 나옵니다. 에스겔은 남북 분열과 성전 건축을 넘어 이스라엘의 앞 역사를 우상숭배와 배반의 역사로(16장; 20장; 23장) 보기에 어떤 주석자는 390년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2:40-41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 만에 애굽 땅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390년과 유다의 40년을 합하면 430년이 됩니다. 이 경우 유다의 40년은 민수기 14:33-34에서 온 햇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징계를 당하는 기간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다가 멸망했다가 회복하기까지의 기간이 됩니다.

에스겔이 유다의 죄를 위해 누워 있는 40일은 유다가 범죄한 기간이 아니라 죄의 대가를 치르는 기간입니다(참조. 29:30). 에스겔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유다의 죄는 잠시 동안의 이탈(離脫)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으로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광야 시대의 기간에 일치하는 40년이 한 세대를 상징하는 수로 사용되었다면,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자들이 다 죽은 후에 심판이 끝나게 됩니다. 유다의 심판이 주전 587년의 파국과 직접 관련된 자들에게 한정되기에 멸망 이후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는 소망의 메시지가 되기도 합니다.

4-6절의 에스겔은 방 안에 누워 있는데, 7절은 에스겔이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고정하고 벗은 팔로 예언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벗은 팔’(‘팔을 걷어 올리고’)은 위협적인 행동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맞서 심판을 선포해야 합니다.

8절의 에스겔은 몸을 뒤척일 수도 없습니다. 옆구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리지 못하게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밧줄로 묶으십니다. 앞에서 표적 행위를 실행했던 에스겔이 그 대상이 되고 여호와께서 실행자가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묶어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묶으셨음은 예루살렘의 사로잡힘이 여호와의 뜻으로, 예루살렘이 적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밧줄에 묶여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에스겔이 바로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예루살렘의 운명입니다.

 

둘째 장면: 포위당한 성의 기근(9-17)

신앙인으로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자기 자랑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랑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아직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멸시하며 교만하게 행동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9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14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16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9-17)

 

이방인들보다 더 극심한 악을 저지르면서도 이스라엘은 정결하게 산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징계가 일하게 되면 큰 어려움이 닥칠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는 영적인 고통만 아니라 생존에도 위협을 주워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부족합니다.

 

(1) 표적 행위의 명령(9-11)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된 두 번째 표적 행위(9-11+16-17절)는 포위당한 성 안에 먹을 것이 떨어져 최소한의 양식만 배급해야 하는 궁핍한 상황을 극적으로 기술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곡식(밀,보리,통, 팥, 조와 귀리)을 섞어 떡을 만들어 옆구리를 방바닥에 대고 누워 있는 390일 동안 먹을 것을 명령하십니다(9; 5). 하루의 양식과 물로 각기 20세겔과 1/6힌이 정해집니다. 곡물을 섞는 것을 부정하게 보는 레위기 규정(레위기 19:19)에 비취 볼 때, 여호와의 명령은 양식이 다 떨어져서 종자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둔 것마저 긁어모아 먹어야 하는, 그러나 그것도 절대 부족해서 곡식은 하루에 230g, 물은 630mm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는 성안의 절망적 형편을 보여줍니다. 표적 행위의 해석은 16-17절에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서 양식을 끊어버려 사람들이 굶주려 죽게 하실 것입니다. 전통적·교리적 여호와 신앙이 일방적으로 구원자로 선포해왔던 여호와께서 당신께 죄를 범한 예루살렘에게 심판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2) 유배지에서의 제의적 정결(12-17)

 

12-15절에서는 주제가 ‘제의적 정결’에 관한 가르침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떡을 인분에 구워 먹으라고 명령하시고(12), 뒤이어 그 의미를 해석해주십니다.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13). 에스겔이 자신은 지금까지 정결 규정에 따라 제의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주장하면서 여호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자(14), 여호와께서 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여 인분 대신 쇠똥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십니다(15). 이 단락은 유배민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주제로 다룹니다. 제의적으로 더러운 바벨론에서 제의적으로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제의적으로 부정한 유배지에서도 거룩하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성전 중심적 제의 종교에서 제의적 정결은 여호와 예배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이방 땅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곳이기에 그곳에 사는 자들은 부정한 자들로 거룩하신 여호와를 찾거나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제의적 부정 때문에 원칙상 당신께 나올 수 없는 유배민들에게 여호와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부정한 곳에 살더라도 여호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처럼 이방 땅에서도 음식 규정과 정결 규정을 준수한다면 제의적으로 깨끗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의 제기를 계기로 이방 땅 바벨론에서도 여호와께 나아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여호와에 의해 열립니다(11:16).


복음을 전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말로만 할 수 업는 일이 아닙니다. 온 삶을 다하여 몸에 말씀을 짊어지는 과정이 있고서야 제대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지길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3-02)


하나님의 경고와 사명의 에스겔

에스겔 3장 16-27절


 

파수꾼의 역할은 적군이 침입해 들어오면 먼저 발견해서 모든 백성에게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적군이 쳐들어오는데도 경보를 울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의 파수꾼인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복음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파수꾼 역할을 맡기십니다. 심판의 예언자로 부름 받은 그는 칠 일이 지나 다시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성 밖을 감시하다가 위험을 발견하면 경고를 발하는 파수꾼과 같은 역할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 말만이 아니라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도 전하게 하십니다.

 

파수꾼으로 임명된 에스겔(16-2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처럼 우리가 죄의 문제를 경고하고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에게 이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16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16-21)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심판의 예언자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악인들과 공의를 저버린 의인들에게 죄의 문제를 경고하고 깨우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1) 도입부(16-17)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두 번째 소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으로 세우시면서 사명을 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제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임합니다. ‘칠 일’은 완전수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15절의 ‘두려워 떨며’ 지낸 기간에 연결되지만, 에스겔서의 넓은 문맥에서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번에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워 당신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듣고 당신을 대신하여 경고하게 하십니다(17). 성경에서 ‘파수꾼’은 ‘재앙’이나 ‘적군의 공격’을 경고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사무엘하 18:24-27과 열왕기하 9:17-20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2) 악인의 경우(18-19)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서 악인에게 경고할 사명을 맡겨집니다. 먼저 악의 경우를 예로 들어 구체적 가르침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려주셨음에도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을 구하도록 그 악인에게 경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경고하지 않은 예언자도 그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통해 이스라엘이 악한 길에서 돌아오도록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아 악인이 악한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피 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악인에게 경고 했는데도 악인이 돌이키지 않았다면 파수꾼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죽고, 파수꾼의 역할을 대한 예언자는 그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19).

 

(3) 공의에서 떠난 의인의 경우(20-21)

 

다음은 실족한 의인의 경우를 들어 가르침이 주어집니다(참조, 18:24).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불의를 저질렀는데도 경고하지 않은 예언자도 그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20). 그러나 의인이 실족하지 않도록 경고해주어서 그가 죄를 짓지 않게 되면, 그는 경고를 받아서 살고 예언자도 목숨을 보존합니다(21).

예언자는 경고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지고, 악인이나 실족한 의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20절의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는 현재의 실존적 결단이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여줍니다(참조, 18:21-24).

‘파수꾼 예언자’는 단순히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구별됩니다. 첫째, 적이 언제 침략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여호와의 경고도 언제 주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파수꾼 예언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되는 여호와의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깨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참조, 하바국 2:1). 둘째, 주님들이 안전한 곳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처럼, ‘파수꾼 예언자’는 사람들의 영적 형편을 주의 깊게 살펴 그 시점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전통에 입각한 교리적 가르침이 아닐, 영적 게으름과 무지를 책망하고 일깨울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야 합니다. 셋째, 의무를 소홀히 한 파수꾼에게 책임을 묻는 것처럼, ‘파수꾼 d{언자’도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때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탁을 선포하는 전통적인 예언자와 달리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은 예언자에게는 직무 수행에 따른 책임이 강조됩니다.

에스겔이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 받는 3:16-21은 문맥에 돌출적입니다. 1:1-3:15에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칠 일’의 간격을 두고 에스겔이 서로 성격이 다른 심판 예언자와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와 달리 ‘파수꾼 예언자’는 일차적으로는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 멸망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전자가 언약공동체로서의 전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다면, 후자는 이스라엘 안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다의 구별을 전제됩니다. 무게 중심이 백성/공동체의 심판에서 그 구성원의 회개로 옮겨지면서 개인의 주체적 책임이 강조됩니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주전 587년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기 전까지 에스겔은 심판 예언자로 활동하고(4-24장), 멸망 이후에야 ‘파수군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33-48장). 에스겔이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 받는 이야기는 회복의 말씀을 수집해놓은 단락의 첫머리(39:1-9)에도 장합니다. 33:7-9는, 18절의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 3:17-19과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정리하자면, 3:16-21은 넓은 문맥에서는 33장 이후를 예비해주고, 가까운 문맥에서는 2:1-3:11을 보충해 줍니다. 전자의 시각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벌써 심판 이후를 준비하셨습니다. 멸망의 심판과 심판 이후를 준비하셨습니다. 멸망의 심판과 심판 이후의 구원이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옵니다. 처음부터 심판 이후를 내다보게 해줍니다. 후자에 따라 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결정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의인과 회개한 죄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 공의의 실천적 모습인 그분의 심판은 죄인들에게 한정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에스겔은 벙어리가 되어 평소에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만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평상시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합니까? 어떻게 하면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벙어리가 된 에스겔(22-27)

사역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할 때 내는 열심이 간혹 사람에게서 비롯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데 자신의 욕심대로 행하다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워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학교와 가정에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22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 23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24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25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26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27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22-27)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셔서 백성을 깨우치게 하십니다. 놀랍게도 에스겔이 알려야 할 긴급한 대적을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1) 사건의 배경(22-24a)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거기서’) 본 여호와의 영광을 다시 경험합니다(22-24a). 명령에 따라 거주지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계곡으로 나간 에스겔에게 여호와는 그에게 임할 물리적 상황을 알려주십니다.

 

(2) 하나님의 명령(24b)

 

먼저 24b절에서 여호와는 에스겔에게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입할 수 없도록 문을 닫는 이유가 달리 언급되지 않기에, 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게 남습니다.

 

(3) 밧줄을 묶이는 에스겔(25)

 

24b절의 명령과 달리 25절은 서술문입니다. 사람들이 에스겔을 밧줄로 묶어 그들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24b절의 경우처럼 에스겔이 묶여 집에 연금되는 이유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26절에서 다시금 행위자가 바뀝니다.

 

(4) 벙어리가 되는 에스겔(26-27)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벙어리로 만드십니다.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하려 하심입니다.

에스겔로 꾸짖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청자들이 ‘패역한 족속’(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27절은 ‘입의 열림’에 의해 26절에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과 이야기할 때 그의 입을 열어주셔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언자의 사명이 단순하게 말씀의 전달에만 머무는 이유는 26절의 경우처럼 청중이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에스겔이 밖에 나갈 수 없게 문을 잠그게 하시고, 사람들은 에스겔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밧줄로 묶어 집에 감금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스겔을 벙어리로 만들어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공적 장소를 찾아가서 말씀을 선포해야 할 예언자가 활동의 자유를 빼앗기고 언어 능력을 상실합니다. 문의 잠금과 밧줄로 동여맴과 벙어리 됨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처음 두 상징 행위는 에스겔과 그의 청자 사이의 완전한 단절과 적대적 관계를 시사하고, 세 번째는 이 단절과 대립이 에스겔로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2-27절의 현재 위치는 물론 우연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22-27절은 처음부터 ‘파수꾼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3:17-21) 에스겔이 ‘꾸짖는 자’로 활동하지 못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10-15절과 16-21절을 함께 읽으면 마치 에스겔이 유배민들 가운데서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이스라엘 족속에 대해서는 심판 예언자로, 유배민들에 대해서는 ‘파수꾼 예언자’로 에스겔의 역할이 나뉘게 됩니다. 22-27절은 그러한 이해(오해)를 교정해줍니다. 여호와에 의해 입이 열린 후에야(33:21-22) 에스겔은 그들 가운데서 ‘꾸짖는 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파수꾼을 부르는 시대입니다. 말이 아니라 삼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미래를 전할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축복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을 가감 없이 드러낼 파수꾼을 부르십니다. 영과의 하나님을 드러낼,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경험한 자를 부르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3-01)


말씀을 선포할 사명을 받은 에스겔

에스겔 3장 1-15절


 

‘하나님의 사명’은 쉬운 숙제 같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고난이 동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사명을 감당하기에 합당할 만 사람을 찾으셔서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위협이 있어도 순종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확실했을 때, 그 사명에 죽기까지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보내시기 전에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야할 사명이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확신하도록 인도하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이 굳게 하십니다. 이제 에스겔은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됩니다.

 

두루마리를 먹는 에스겔(1-3)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더욱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권능과 본질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깨달아 순종해야 합니다.

 

1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1-3)

 

본문은 2장에서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책을 먹으라’는 명령으로 마쳤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확대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시는 명령은 ‘먹으라’, ‘가라’, ‘말하라’고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할 명령은 그리 쉽지만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할 이스라엘이 마음이 강퍅해서 곱게 듣지만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여호와의 명령(1)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 불과한 ‘인자’ 에스겔을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시고, 그를 말씀의 대변자로 세우십니다. 에스겔을 통해 얼굴이 뻔뻔하고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말씀을 거부한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1차로 바벨론에게 침공을 혼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로로 잡혀온 이 순간까지도 반역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은 굳었고 얼굴은 변했습니다. 어떤 변론이나 호소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애가와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펼쳐 보여주신 후,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1)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의 소명 체험에 등장하는 상징 행위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첫째, 보통은 여호와께서 예언자의 입에 말씀을 주신다는 표상이 사용되는데(참조, 신명기 18:18; 예레미야 1:9), 에스겔의 경우에는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을 먹게 하십니다. 말씀의 기록은 진정성과 확정성을 담보합니다. 에스겔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문자 그대로 여화께서 주신 말씀으로, 에스겔 선포와 여호와 의지의 완벽한 일치가 강조됩니다. 둘째, 두루마리의 내용은 명시적으로 알려집니다. 심판과 구원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1:9-10)와 달리 에스겔은 심판 예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두루마리를 먹는 에스겔의 상징 행위는 유다의 심판과 멸망이 확정됐음을 시사해 줍니다.

 

(2) 에스겔의 순종(2-3)

 

‘발견한 것을 먹으라’는 명령에 따라 에스겔이 입을 벌리자 여호와께서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주시며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2-3a). ‘배와 창자의 가득 채움’은 말씀의 충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완전히 말씀에 일치되도록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b)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하나님의 말씀은 ㅇ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로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그 두루마리는 그의 입에 꿀처럼 달았습니다(참조, 시편 19:10; 119:103; 잠언 16:24). 이 말씀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그렇게 단 말씀이 아닙니다.

 

에스겔의 파송(4-11)

사명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사명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마음을 굳게 무장시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만 그들은 강퍅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강퍅한 그들에게 사명을 감당할 때, 사명을 계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4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4-1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른 말을 사용하는 이방인에게 전파하라고 하지 않고,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고집이 센 마음의 상태를 가르쳐주십니다.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지만, 그들은 강퍅할 것입니다. 이 단락은 에스겔이 보내지는 대상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족속에게(4-9)

 

4-9절에서 여호와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파견하시면서 그들의 완악함과 단호한 거절에 관해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할 것입니다. 에스겔의 선포가 아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경고와 위협을 무시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역설적으로 심판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확인해주기도 합니다.

5-6절의 체념적 고발은 에스겔이 속한 유배민들의 현실 경험을 반영한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족속은 같은 언어와 말을 사용하는데도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차라리 말과 언어가 다른 이방 민족들에게로 보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참조. 요나 3:2-5; 마태복음 8:10-13; 11:21-23).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언어의 장벽은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언어가 달라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재앙은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귀에 예언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이방의 언어와 같습니다. 마음의 완악함이 그분 말씀에 귀를 닫게 만듭니다.

7절의 ‘네 말을 듣고 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 함이니라’는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여호와의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의 선포를 거절하는 행위와 여호와의 의지를 거절하는 행위가 하나로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비례하여 예언자의 임무도 힘들어지기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자세가 요청됩니다. 이마가 굳은 이스라엘에 맞서 두려움 없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처럼’ 만드신다(8-9; 참조, 예레미야 1:18-19).

내용상 3:4-9은 2:3-8의 반복이지만, 일부 새로운 모티브가 첨가됩니다. 후자는 역사적 관점에서 조상 때부터 현세대까지 계속되는 반역을 고발하는데, 전자는 이스라엘을 민족들에 비교해 그 완악함을 고발합니다. 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에스겔과 백성 사이에 의사가 소통되지 않습니다(참조, 이사야 28:11). 차라리 에스겔을 이방 민족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보다 더 완악합니다. 다음으로는 ‘굳은 이마’의 모티브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선포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에게 적대적으로 맞섭니다. 예언자와 이스라엘이 서로에게 이방인이 될 뿐만 아니라 전면적으로 충돌합니다.

요약하자면, 3:4-9은 여호와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2) 유배민들에게(10-11)

 

10-11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을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보내십니다. 파송 명령에 앞서 에스겔에게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낼 때는 유사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앞에 두루마리를 먹는 상징 행위가 나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1절의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2:5,7)는 유배민들 역시 에스겔의 선포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스겔의 선포는 가나안은 물론 유배지에서도 배척을 당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는 2:4에도 나옵니다.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시며 주신 말씀과 비교해보면 하나의 두드러진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경우와 달리 유배민들에 관해서는 특별히 부정적으로 언급 하지 않습니다. 전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방 언어의 모티브(5-6)와 굳은 이마의 모티브(7-9)가 유배민들에게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또 이스라엘 족속은 ‘반역하는 족속’으로(9), 유배민들은 에스겔의 민족을 ‘네 민족’으로 불립니다. 전체적으로, 부정적으로 기술된 이스라엘 족속과 달리 유배민들은 비교적 중립적으로 언급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바벨론 유배민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될 것을 암시해 줍니다.

 

환상의 종결(12-1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즉, ‘메신저(messenger)는 메시지(message)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명령을 순종하는 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12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니 13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14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15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12-15)

 

여호와의 영광의 찬양이 울려 펴지는 가운데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가십니다. 주의 권능이 힘 있게 그를 감동시키십니다. 에스겔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담겨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동족을 향한 애통의 마음을 모두 품었습니다.

 

(1) 크게 울리는 소리(12-13)

 

예언자적 사명의 위임 후에, 여호와의 영(2:2)이 에스겔을 들어 올리실 때 그는 생물들이 뒤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그분의 처소로부터 찬송을 받으소서’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크게 울리는 소리’는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로(참조, 이사야 13:14; 24:18; 시편 68:9; 77:18), 생물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합니다. 여호와 영광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보여줍니다. 찬송의 ‘크게 울리는 소리’가 13절에서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로 바뀝니다. 피조물인 생물들의 날갯짓과 바퀴 소리에 땅이 크게 요동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무한 통치권을 보여줍니다.

 

(2) 거주지로 돌아온 에스겔(14-15)

 

마지막 두 절(14-15)은 하나님의 환상을 경험한 에스겔에게 집중합니다. 주의 영이 들어 올려 유배민들이 정착한 델아빕으로 데리고 가실 때, 에스겔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는데, 여호와의 권능(손)이 그에게 강하게 임했습니다.

‘근심하고 분한 마음’(쓰라리고 흥분된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불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부정적 평가에 대한 에스겔의 고통스러운 반응입니까? 자기 민족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절망적 반응입니까? 또는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15)가 보여주듯이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혀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한 자의 감정적 홍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까? 히브리어 ‘델아빕’은 ‘이삭의 언덕’을 뜻하지만, 에스겔서에서는 ‘홍수의 언덕’을 의미하는 아카드어의 음역입니다. 유배민들이 폐허로 버려진 지역에 정착해 이를 새로이 개간하며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올려 가십니다. 주의 권능이 힘 있게 그를 감동시킵니다. 이에 어느새 에스겔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선민 이스라엘의 죄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하지만 받은 사명이 하도 황망하여 선지자는 7일 동안 얼이 빠진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동족을 향한 애통의 마음을 모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하시며 그 사명을 부여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받은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깊이 새기고 이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메시지를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에 연연하지 말고, 진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적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2-01)


하나님께 부름 받은 에스겔

에스겔 2장 1-10절


 

모든 육체는 음식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힘이 없어집니다. 또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에 달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혼이 약해집니다. 또 어떤 말씀을 먹느냐에 따라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있습니까?

 

  • 에스겔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보고서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말을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에스겔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당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전에 에스겔이 먼저 그 말씀을 듣고 먹으라고 하십니다.

 

환상과 파견(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대가로 벌을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깨닫지 못해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말씀을 전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1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1-2)

 

이 두 절은 하늘 보좌의 환상 경험(1:4-28)과 예언자의 파견 이야기(2:3-3:11)의 연결구에 해당합니다. 압도적인 환상을 경험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진 에스겔을 여호와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참조. 단 8:17-18; 10:9-11).

 

(1) ‘일어서라’ 명령하시는 여호와(1)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시고, 2절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에스겔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명령하실 뿐 아니라 명령을 따를 수 있도록 힘도 주십니다.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신 목적은 그가 당신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사 ‘말하다’(다바르)가 세 번 나오는데, 1절에서는 전치사 ‘~와’(에트)가, 2절은 전치사 ‘~에게’(엘)가 사용됩니다. 표현과 내용에 있어 1절과 2절은 대체로 일치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호칭으로 사용하시는 ‘인자’(사람의 아들)는 계시하시는(보내시는) 분과 계시를 받는(보냄을 받는) 자 사이의 절대 간격을 시사해줍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를 직접 볼 수 있었지만, 그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하늘 왕이 영원한 창조주시라면, 에스겔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온 땅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로 택함 받지만, 명령하시는 분과 명령을 받는 자는 본질적으로 상이합니다. 예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을 받는 자일뿐입니다.

 

(2) 일으켜 세우는 여호와의 영(2)

 

‘영’은 여호와의 능력으로 피조 세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합니다. 에스겔 안으로 들어가 그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2:2; 3:24) 에스겔 위에 떨어져 말씀하기도 하고(11:5) 에스겔을 들어 나르기도 합니다(3:12,14; 8:3; 43:5). 다른 예언서들과 달리 에스겔서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빈번하게 언급됩니다.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혀 활동한다는 점에서 에스겔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가깝습니다(참조. 왕상 18:12; 왕하 2:15-16;5:26).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은 황홀경(ecstasy)에 빠져 자의식을 잃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가나안의 예언(참조, 삼상 10:10-12; 16:14; 18:10)과 구별하기 위해 ‘영에 사로잡힘’에 관해 거의 침묵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보냄 받은 에스겔(3-7)

성도는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에서도 진리를 전하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책임이 필요합니다. 진리와 가치가 왜곡되는 시대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전달하며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합니다.

 

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3-7)

 

이 단락은 3-5절과 6-7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는 불순종하는 백성에게도 메시지를 전해야 하며, 그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자신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진리를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1) 에스겔을 보내는 이유(3-5)

 

먼저 3-5절은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시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배반과 죄악이 예언자 에스겔의 파견을 초래합니다. 파견의 말씀은 매우 포괄적으로 기술됩니다(3).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낸다.’ 바벨론 유배지에서 예언자로 부름을 받지만, 에스겔의 사역은 유배민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합니다. 선포의 대상인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부터 ‘여호와를 반역해 온 반역의 민족’(‘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으로 규정됩니다. 이스라엘은 종주를 배반한 봉신처럼 여호와를 배반한 민족입니다. 배반한 봉신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운명이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를 거스른 이스라엘의 반역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조상 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된 범죄입니다(3).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범죄사였습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4)는 현세대의 이스라엘이 대놓고 완강하게 여호와께 맞섰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패역한 자들에게 에스겔은 그때 그때 주어진 말씀을 선포하면 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4b)는 사자의 전언 양식으로 신탁의 도입부 역할을 담당합니다. 뒤따르는 선포가 모두 여호와에게서 온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5절의 말씀은 마치 예언자의 파견 목적이 이스라엘의 부패를 고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이들의 악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특징짓는, 반복적으로 사용된 ‘패역한 족속’(2:5,6,7,8; 3:9,26-27; 12:2-3,9,25; 17:12; 24:3)은 에스겔의 선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2:5,7; 3:11,27)는 청자의 반응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파견과 선포의 무조건적 성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냄을 받는 자는 보내시는 분의 명령에 따라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패역한 족속’에게 보내진 에스겔에게 선포의 열매는 사치에 속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좌절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말씀 선포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예언자적 책임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언자의 일차적 사명은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열매와 상관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의 수용과 거절은 오롯이 청자의 몫입니다.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는 것이 에스겔 활동의 유일한 결과입니다. 물론 이 말에서 하나님 심판의 결정론적 성격을 읽어낸다면 이는 본문 왜곡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부패가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보내도 결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죄는 가능성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멸망의 원인을 당신께로 돌릴 수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고발하고 이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도록 경고해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거듭 불순종과 완고함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주전 587년의 재앙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의 필연적 결과로, 에스겔의 선포를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2) 에스겔에게 주는 권면(6-7)

 

본문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에스겔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에스겔 앞에 놓인 길은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을 기다리는 것은 청자의 적대감입니다. 에스겔의 선포환경은 가시와 찔레로 둘러싸인 것과 같고, 전갈 떼 한가운데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적대적 환경에서 말씀을 선포해야 할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거듭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6). 네번 반복된 세 번의 ‘두려워하지 말라’와 한 번의 ‘무서워하지 말라’) 권면은 에스겔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말씀을 전해야 할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씀 다음에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오는데(1:8), 에스겔의 경우에는 다시금 사명을 위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7). 내용상 5절의 반복입니다. 반항하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반응과 상관없이 에스겔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적대적인 청자의 반응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두루마리 책을 받은 에스겔(8-10)

우리는 진리를 귀 기울여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나 가치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반대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와 인내로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8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8-10)

 

본문은 진리를 수용하고 책임 있게 전달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어려운 메시지를 전할 때의 준비와 용기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념을 확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8)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과 달리 반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8). 여호와의 부르심은 폭력적 강요도 아니고 동의를 구하는 요청도 아닙니다. 거절할 수 있지만, 그 거절은 수용되지 않습니다(참조. 출 4:10,13; 삿 6:15; 렘 1:6). 패역한 이스라엘과 대비시켜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부터 에스겔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3) 두루마리 책(9-10)

 

에스겔이 자신에게로 향한 손에 ‘두루마리 책’이 놓인 것을 보자 여호와께서 그 앞에서 두루마리 책을 펴 보이시는데, 안팎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9-10). ‘애가와 애곡과 재앙’은 에스겔이 선포할 메시지의 핵심으로, 에스겔이 심판 예언자로 부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바로 여호와께서 주셔서 먹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에스겔서의 문맥에서 보면 1-24장 또는 1-32장이 이 두루마리 책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메시지를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순종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에스겔(01-02)


환상으로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

에스겔 1장 15-28절


 

결실한 가을에는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잘 읽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성도일수록 엎드리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이도 예수님도 엎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에스겔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는 엎드리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네 바퀴와 궁창 위에 있는 보좌, 그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와 그를 둘러싼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수레의 바퀴(15-21)

사람들은 웅장하고 장엄한 자연 광경을 보면 감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광경을 봐도 그럽니다.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에 수례 바퀴를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15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6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7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 18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9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15-21)

 

에스겔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1장에서부터 끝까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 백성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환상을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1-3장),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8-11장),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40-4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생물들 밑에 있는 바퀴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바퀴의 위치(15)

 

선지자 에스겔은 네 생물 밑으로 있는 네 바퀴를 보았습니다. 보좌를 떠받치고 있는 네 생물에서 보좌 수레의 바퀴로 시선을 옮긴 후 계속해서 자신이 본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에는 네 날개에 따라 네 얼굴의 네 생물을 통해 과시된 여호와 보좌의 자유로움과 이동성이 바퀴에 의해 한층 더 강조됩니다. 네 바퀴는 구조와 모양이 같았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아서 선회하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아도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생물들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15)은 아마도 ‘네 얼굴의 생물에 하나씩’을 의미하는 것 갑니다(참조. 10:9). 이는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성,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2) 바퀴의 모양(16-18)

 

황옥 같이 빛나는 바퀴는 그 모양과 구조가 모두 같았는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16). 황옥 같이 번쩍이고 높고 무서운 바퀴는 정복자 바벨론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며, 네 둘레로 가득 달린 눈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요한계시록 4:8). 그 테두리는 ‘높고 무서우며’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습니다(18). 테두리를 묘사하는 ‘높고 무서우며’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무섭도록 높고’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눈’은 사방을 보며, 동시에 사방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눈이 가득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는 세상 모든 곳을 살펴보시고 당신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네 바퀴의 테두리에 가득한 눈은 네 생물의 네 얼굴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바퀴의 움직이는 모습은 생물의 움직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아갈 때 네 생물이 몸을 돌이키지 않고 저마다 곧장 앞으로 가는 것처럼(9), 네 바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사방 어디로나 갔습니다(17). 바퀴가 행하는 것은 사방 온 땅을 두루 감찰하기 위함인 것을 말해 줍니다.

 

(3) 생물과 바퀴가 일치(19-21)

 

생물들이 나아갈 때면 그 곁에서 바퀴들도 나아갔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들도 들렸습니다(19,21a). 생물들의 움직임과 방향을 결정하는 영이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에 생물들과 바퀴들이 하나로 움직였습니다(20,21b). 눈이 가득한 테두리의 바퀴와 네 얼굴과 네 날개의 생물은 기능상 상호 보충적입니다. 여호와의 전지적 능력과 자유로운 활동성이 후자에서는 정적으로, 전자에서는 역동적으로 표현됩니다. 똑 같은 움직임을 21절에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그것은 영과 바퀴들이 일체가 되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온 땅위를 운행하며 사람들을 감찰하심을 보여 줍니다.

환상의 구조에서 바퀴는 생물과 구별됩니다. 궁창에 연결된 생물과 달리 바퀴는 따로 서 있습니다. 생물은 보좌가 놓인 궁창을 떠받들고 있지만, 바퀴는 궁창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묘사에 따르면 바퀴는 생물에 연결되지도, 보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생물과 함께 움직이지만 독자적입니다. 네 바퀴의 표상이 전승사적으로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장과 10장의 묘사는 수레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퀴 달린 보좌를 염두에 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바퀴 달린 보좌는 (아직)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고,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만물을 감찰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진 분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네 생물 머리 위에 있는 창공(22-25)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포효 소리를 발하며 움직이실 때도 있고 날개를 거둬 잠잠하실 때도 있습니다. 직접 역사에 개입하실 때도 있고 잠자코 보고 계실 때도 있지만, 항상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전능한 주권자이십니다.

 

22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23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24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25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22-25)

 

에스겔의 시선이 생물과 바퀴에서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하늘의 판)으로 옮겨집니다. 천사들의 날개 위로 궁창이 나타납니다. ‘궁창(穹蒼)’을 보여주면서 땅 위와 대조적으로 하늘을 운행하시는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궁창은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 중간에 있었습니다.

 

(1) 생물들 머리 위 궁창(22)

 

생물이나 바퀴의 경우와 달리 ‘궁창’의 모습은 간략하게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보기에 ‘높고 무서우며’라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18) 궁창이 네 생물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22). 생물들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나타나는데(22),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세계를 상징합니다. 수정(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궁창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던 에스겔은 궁창 위를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궁창 아래로 돌려 생물들에게로 향합니다.

 

(2) 궁창 아래 생물들(23)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과 궁창 밑에 있는 생물들이 22-23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이 그 옷으로 몸을 가리듯이 그 생물들은 각 얼굴들의 몸을 두 날개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머리로 궁창을 떠받친 생물들이 두 날개로 몸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는 서로 맞닿게 펴서 움직였습니다(23; 11). 에스겔은 비록 땅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하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섬기고 있습니다. 포로기에 제사장 에스겔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생물들의 날개 소리(24)

 

생물들이 갈 때, 그 날개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다’(24)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43:2)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14:12)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전능자의 음성이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4) 궁창 위의 소리(25)

 

펼쳐진 두 날개가 내는 엄청난 소리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26)의 절대적 힘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레미야서에서 87회 이상이나 언급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드러내 줍니다. 땅 위에서 움직일 때는 바퀴가 움직였지만 궁창을 움직일 때에는 날개가 움직였습니다(24).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났으며 ‘그 생물들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다’는 말도 20, 21절의 바퀴들의 움직임과 영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처럼 두 번 반복하여 묘사하였습니다(24, 25). 에스겔이 생물의 날개에 주목하고 있을 때 ‘궁창 위에서부터 (나는) 음성’이 그의 시선을 다시 궁창으로 향하게 합니다(25). 궁창 위의 음성이 에스겔을 피조세계의 경계(궁창)를 넘어 창조주의 거룩한 영역으로(26-28) 이끌어 들입니다.

죄악에 가린 영안들은 이렇게 존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태양을 직접 보아도 두렵지 않듯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태양을 보면 두렵단 것을 압니다. 그래서 태양을 감히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태양도 직접 볼 수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랴 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26-28)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느 곳에도 계신 분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 하늘의 영광과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지만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26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28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26-28)

 

이스라엘 백성들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에스겔은 궁창 위에는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는 사람의 모양을 한 어떤 분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1) 궁창 위의 보좌(26a)

 

에스겔의 시선이 궁창 위의 보좌에 앉으신 분을 향합니다. 궁창의 경우처럼 보좌도 그 구체적 형태를 알 수 없게 간단하게 기술합니다. 궁창 위에는 남보석 같은 보좌의 형상이 있었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는 사람 모양의 형상이 있었습니다(26).

 

(2) 보좌 위에 한 형상(26b-28a)

 

놀랍게도 에스겔은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를 보고, 더 나아가 묘사까지 합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표상은 온 세상이 그 분의 통치 아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말둑(Marduk)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통치하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모습을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1:27의 진술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관련성이 있다면, 창조주 여호와와 그분의 피조물 사람이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연결됐음을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에스겔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절대 간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에스겔을 언제나 ‘인자’로 부르신다.)

에스겔의 대담한 묘사는 계속됩니다. 보좌에 않아 계신 분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빛나는 불과 같았습니다.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단 쇠’(빛나는 금속) 같아서 사방이 둘러싸인 불과 같았고, 그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27).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처럼 보였습니다(28a). 궁창 위의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의 영광이 마치 비가 온 후에 구름 사이로 빛을 발하며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았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을 무지개의 광채에 비교함으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합니다. 무지개의 비유가 창세기 9:1-16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홍수 후에 여호와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는데, 양자를 관련시켜 무지개에서 심판에 대한 암시를 읽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1절의 ‘하늘’처럼 여호와께서 창조주와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역사와 자연과 제의 안에 계시되는 여호와의 인격적 현존을 가리킵니다. 원래 ‘무겁다’를 의미하는 동사 ‘카베드’에서 나온 ‘영광’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속성에 속한 것이기에 그분께 영광을 돌림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권능의 인정을, 그분 앞에 엎드려 머리 숙임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광은 한편으로는 세상의 경계 저편에 실재하는 신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3) 에스겔의 반응(28b)

 

에스겔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28b). 2:2에 따르면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의 도움을 받아 일어섭니다(참조, 3:15). 전체적으로, 에스겔의 환상은 다양한 비유(수정, 남보석, 단 쇠, 불 무지개)와 ‘-처럼’, ‘모양’, ‘형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궁창(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과 보좌(‘보좌의 형상’)와 보좌에 앉아계신 분(‘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과 그분의 영광(‘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비적 분위기를 창출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환상의 구체적 모습에 관해 사변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경고합니다. 독자는 환산의 구체적 모습보다는 그 의미에 집중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즉각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는 깊은 존경과 복종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나는 깊은 존경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전능한 주권자는 오직 여호와뿐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히 엎드려 듣는 것뿐입니다. 이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회복은 바로 그 조아림과 순종에서 시작합니다. 엎드려 청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