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23-03)
정결을 이루시는 하나님
에스겔 23장 36-49절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지식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한국 부모들의 높은 학구열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참된 지식은 단순한 힘을 넘어서, 복되고 존귀한 삶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자기 개발의 필요성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앞에서와 달리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등장합니다. 고발의 내용도 정치적 영역을 넘어 종교적인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정치적 우상숭배와 종교적 우상숭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여호와 종교는 이방에서 유입된 가증한 것들로 완전히 더러워졌습니다. 여호와의 성전마저 더러움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의적 음행(36-39)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져야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짓거나 주님의 뜻을 벗어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바로 벌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6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그러면 그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 37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 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으며 38이 외에도 그들이 내게 행한 것이 있나니 당일에 내 성소를 더럽히며 내 안식일을 범하였도다 39그들이 자녀를 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으며(36-39)
이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운명이 예언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오홀라와 오흘리바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을 알려 심판하게 하십니다(36). 가증한 일은 제의적 음행(37-39)과 정치적 음행(40-42)을 다 포함합니다.
(1) 심판의 요청(36)
앞에서는 오홀라(5-10)와 오홀리바(11-35)가 따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함께 언급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오홀라)는 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기에 예루살렘(오홀리바)과 함께 고발될 수 없습니다. 고발과 심판 선고는 아직 살아 있는 오홀리바에게만 가능합니다. 물론 에스겔의 착각이나 실수 때문은 아닙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한 번 더 있는데, 2-4절에서 에스겔은 애굽에 체류한 이스라엘을 한 어머니의 두 딸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 단계에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등장합니다. 에스겔은 이를 통해 예루살렘이 모든 면에서 사마리아에 비해 나올 것이 하나도 없음을 주장합니다.
(2) 우상숭배(37)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는 예루살렘은 북왕국의 왕도였던 사마리아와 확실히 달랐겠지만, 에스겔은 이를 부정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와 특권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정치가 거듭 강대국과 음행을 즐겼고 종교가 우상을 탐닉했다는 점에서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다르지 않습니다. 음란에 빠진 사마리아가 130여 년 전에 멸망했다면, 음란에 빠진 예루살렘의 멸망도 필연입니다. 오홀라가 여호와께서 내리신 멸망의 잔을 마신 것처럼 예루살렘도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을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해야 합니다(33). 가증한 일로 먼저 우상숭배와 어린아이 희생 제사가 언급됩니다(37). 개역개정은 ‘또’로 연결시켰지만, 후반절은 전반절을 구체화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은 우상과의 행음을, 그들의 손에 묻은 피는 자식을 우상에게 드리며 흘린 피를 가리킵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우상들과 행음하고, 더 나아가 여호와께 낳아준 제 아들들을 불 속을 지나가게 하면서 우상들에게 음식으로 바쳤습니다(16:20-21). 여호와의 자녀들이 그분의 아내에 의해 우상들의 양식으로 드려집니다. 물론 이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상들과 행음한 바로 그날에, 자기 아들들을 잡아 우상들에게 바친 바로 그날에 이들은 여호와의 성전도 찾았습니다(38-39). 우상들과 행음하고 자기 아들들을 잡아 우상에게 드린 자들이 같은 날에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립니다. 가증한 짓을 저지르면서 동시에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 의해 그분의 성소와 안식일이 더러워집니다.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공간적 거룩함과 시간적 거룩함이 철저하게 세속화됩니다. 39절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으며’에서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영적 무감각 또는 뻔뻔스러움에 대한 여호와의 당혹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성소의 더럽힘(38-39)
이 단락은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저지른 음행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여호와 종교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자식을 우상에게 드리고도 같은 날 여호와의 성전을 찾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여호와와 바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혼합주의자들로, 여호와 종교 안에 바알 제의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어린아이 희생 제사도 혼합주의의 한 예입니다. 가나안적 제의와 여호와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혼합주의자들은 바알에게 드렸던 어린 아이 희생 제사를 출애굽기 22:29의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에 근거해서 여호와 종교 안에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제 자식을 번제로 드리며 자신의 경건을 하나님께 자랑했습니다.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제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면서 상응하는 응답을 기대했습니다. 혼합주의적 경향은 에스겔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열왕기상 18:21) 하고 양자택일을 단호하게 요청했습니다. ‘여호와만’을 외치는 예언자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경건이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았지만,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여호와의 성전을 찾아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기에 예언자들의 고발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음행(40-45)
죄에 빠지는 일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죄로 인해 육신과 영혼이 피폐해져도 여간해서는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죄가 심해질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커집니다. 이스라엘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실 때 순종해야 합니다.
40또 사절을 먼 곳에 보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41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차리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42그 무리와 편히 지껄이고 즐겼으며 또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을 청하여 오매 그들이 팔찌를 그 손목에 끼우고 아름다운 관을 그 머리에 씌웠도다 43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피차 행음하는도다 44그들이 그에게 나오기를 기생에게 나옴 같이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나왔은즉 45의인이 간통한 여자들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리니 그들은 간통한 여자들이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라(40-45)
본문에서는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그들의 음행과 배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내용이 다뤄집니다. 이들은 이방 신들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을 배역하고, 그 결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통해 정의를 세우고, 진리와 순결을 강조하십니다.
(1) 음행의 준비(40-41)
이스라엘의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이방 신들과 음행을 통해 하나님께 배신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들은 외부의 유혹에 빠져 정체성을 잃고, 그 결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시며, 신앙의 순수함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와 돌아섬을 원하십니다.
(2) 남자들의 선물(42)
남자들을 위해 몸단장과 화장을 하고 잘 꾸며진 방에서 음란을 즐깁니다. 한때 남편 여호와께서 주신 팔찌를 손목에 차고(16:11) 아름다운 관을 머리에 쓰고(16:12) 왕후의 지위에 올랐던 아내가, 이제는 창녀가 되어 팔찌를 끼워주고 아름다운 관을 씌워주는 정부들에게 몸을 맡깁니다(42).
(3) 늙은 창녀(43-45)
여호와의 아내(4)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정욕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가 됐습니다(44). 43절의 ‘음행으로 쇠한 여인’은 이들이 좋기까지 음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행에 빠진(3절)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늙은 창녀가 돼서도 여전히 음행을 즐깁니다. 본문은 특정 시대와 관련된 말씀이라기보다는 본성이 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정치적 음란을 요약적으로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5-8, 12-21).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처형(46-49)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대상을 의지하고 섬긴 결과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음란한 죄로 인해 자신만 상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자녀와 집까지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이런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모든 여인이 음행을 본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4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들에게 무리를 올려 보내 그들이 공포와 약탈을 당하게 하라 47무리가 그들을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그 자녀도 죽이며 그 집들을 불사르리라 48이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49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 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46-4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두 여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며, 그들의 죄와 배신에 대한 처벌을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고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결과를 드러내시며, 순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1) 의인에 의한 재판(46)
재판에 회부된 두 자매에게 간통하고 피를 흘린 여자에게 해당하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45b절에 사용된 표현이 16:37에도 거의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아, 제의적 간음이 두 자매가 유죄 판결을 받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제의적 간음을 범한 두 자매의 재판은 ‘의인’이 주관합니다. ‘의인’은 원문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들, 그들’입니다. 독립인칭대명사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 특정 집단임을 시사해줍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그들’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정부입니다. 24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22)에게 오홀리바의 재판을 맡기십니다.
또 16:37-38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아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홀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38)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이들이 ‘의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2) 무리에 의한 형 집행(46-47)
재관장의 유죄 판결에 따라 형이 집행됩니다(46-47), 형 집행은 ‘무리’가 맡습니다. 무리를 불러와 두 자매를 ‘공포와 약탈’의 대상으로 넘겨주면, 이들이 돌로 치고 칼로 죽이며, 자녀들도 죽이고 집들은 불에 태워버립니다. 16:40-41에서도 예루살렘의 처형이 유사하게 집행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은 죽음으로 끝납니다(참조. 24:13).
(3) 형 집행 결과(48-49)
음란의 잔에 흠뻑 취해 살다가 멸망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저지른 죗값을 짊어져야 합니다(49). 이들의 파국적 운명은 ‘모든 여인’(민족들)에게 반면교사가 됩니다(48; 참조, 10). 마찬가지로 음행의 유혹을 받는 주변 나라들은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엄중한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멸망당한 후에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죄를 심판하시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음행과 배신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과 진실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심판은 경고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회개와 돌아섬을 촉구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삶을 원하시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찾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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