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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3-03)


정결을 이루시는 하나님

에스겔 23장 36-49절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지식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한국 부모들의 높은 학구열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참된 지식은 단순한 힘을 넘어서, 복되고 존귀한 삶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자기 개발의 필요성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앞에서와 달리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등장합니다. 고발의 내용도 정치적 영역을 넘어 종교적인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정치적 우상숭배와 종교적 우상숭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여호와 종교는 이방에서 유입된 가증한 것들로 완전히 더러워졌습니다. 여호와의 성전마저 더러움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의적 음행(36-39)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져야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짓거나 주님의 뜻을 벗어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바로 벌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6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그러면 그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 37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 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으며 38이 외에도 그들이 내게 행한 것이 있나니 당일에 내 성소를 더럽히며 내 안식일을 범하였도다 39그들이 자녀를 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으며(36-39)

 

이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운명이 예언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오홀라와 오흘리바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을 알려 심판하게 하십니다(36). 가증한 일은 제의적 음행(37-39)과 정치적 음행(40-42)을 다 포함합니다.

 

(1) 심판의 요청(36)

 

앞에서는 오홀라(5-10)와 오홀리바(11-35)가 따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함께 언급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오홀라)는 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기에 예루살렘(오홀리바)과 함께 고발될 수 없습니다. 고발과 심판 선고는 아직 살아 있는 오홀리바에게만 가능합니다. 물론 에스겔의 착각이나 실수 때문은 아닙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한 번 더 있는데, 2-4절에서 에스겔은 애굽에 체류한 이스라엘을 한 어머니의 두 딸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표현한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 단계에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함께 등장합니다. 에스겔은 이를 통해 예루살렘이 모든 면에서 사마리아에 비해 나올 것이 하나도 없음을 주장합니다.

 

(2) 우상숭배(37)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는 예루살렘은 북왕국의 왕도였던 사마리아와 확실히 달랐겠지만, 에스겔은 이를 부정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와 특권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정치가 거듭 강대국과 음행을 즐겼고 종교가 우상을 탐닉했다는 점에서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다르지 않습니다. 음란에 빠진 사마리아가 130여 년 전에 멸망했다면, 음란에 빠진 예루살렘의 멸망도 필연입니다. 오홀라가 여호와께서 내리신 멸망의 잔을 마신 것처럼 예루살렘도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을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해야 합니다(33). 가증한 일로 먼저 우상숭배와 어린아이 희생 제사가 언급됩니다(37). 개역개정은 ‘또’로 연결시켰지만, 후반절은 전반절을 구체화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은 우상과의 행음을, 그들의 손에 묻은 피는 자식을 우상에게 드리며 흘린 피를 가리킵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우상들과 행음하고, 더 나아가 여호와께 낳아준 제 아들들을 불 속을 지나가게 하면서 우상들에게 음식으로 바쳤습니다(16:20-21). 여호와의 자녀들이 그분의 아내에 의해 우상들의 양식으로 드려집니다. 물론 이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상들과 행음한 바로 그날에, 자기 아들들을 잡아 우상들에게 바친 바로 그날에 이들은 여호와의 성전도 찾았습니다(38-39). 우상들과 행음하고 자기 아들들을 잡아 우상에게 드린 자들이 같은 날에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립니다. 가증한 짓을 저지르면서 동시에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 의해 그분의 성소와 안식일이 더러워집니다.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공간적 거룩함과 시간적 거룩함이 철저하게 세속화됩니다. 39절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으며’에서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영적 무감각 또는 뻔뻔스러움에 대한 여호와의 당혹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성소의 더럽힘(38-39)

 

이 단락은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저지른 음행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여호와 종교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자식을 우상에게 드리고도 같은 날 여호와의 성전을 찾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여호와와 바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혼합주의자들로, 여호와 종교 안에 바알 제의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어린아이 희생 제사도 혼합주의의 한 예입니다. 가나안적 제의와 여호와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혼합주의자들은 바알에게 드렸던 어린 아이 희생 제사를 출애굽기 22:29의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에 근거해서 여호와 종교 안에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제 자식을 번제로 드리며 자신의 경건을 하나님께 자랑했습니다.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제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면서 상응하는 응답을 기대했습니다. 혼합주의적 경향은 에스겔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열왕기상 18:21) 하고 양자택일을 단호하게 요청했습니다. ‘여호와만’을 외치는 예언자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경건이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았지만,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여호와의 성전을 찾아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기에 예언자들의 고발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음행(40-45)

죄에 빠지는 일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죄로 인해 육신과 영혼이 피폐해져도 여간해서는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죄가 심해질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커집니다. 이스라엘의 운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실 때 순종해야 합니다.

 

40또 사절을 먼 곳에 보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41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차리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42그 무리와 편히 지껄이고 즐겼으며 또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을 청하여 오매 그들이 팔찌를 그 손목에 끼우고 아름다운 관을 그 머리에 씌웠도다 43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피차 행음하는도다 44그들이 그에게 나오기를 기생에게 나옴 같이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나왔은즉 45의인이 간통한 여자들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리니 그들은 간통한 여자들이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라(40-45)

 

본문에서는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그들의 음행과 배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내용이 다뤄집니다. 이들은 이방 신들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을 배역하고, 그 결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통해 정의를 세우고, 진리와 순결을 강조하십니다.

 

(1) 음행의 준비(40-41)

 

이스라엘의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이방 신들과 음행을 통해 하나님께 배신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들은 외부의 유혹에 빠져 정체성을 잃고, 그 결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시며, 신앙의 순수함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와 돌아섬을 원하십니다.

 

(2) 남자들의 선물(42)

 

남자들을 위해 몸단장과 화장을 하고 잘 꾸며진 방에서 음란을 즐깁니다. 한때 남편 여호와께서 주신 팔찌를 손목에 차고(16:11) 아름다운 관을 머리에 쓰고(16:12) 왕후의 지위에 올랐던 아내가, 이제는 창녀가 되어 팔찌를 끼워주고 아름다운 관을 씌워주는 정부들에게 몸을 맡깁니다(42).

 

(3) 늙은 창녀(43-45)

 

여호와의 아내(4)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정욕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가 됐습니다(44). 43절의 ‘음행으로 쇠한 여인’은 이들이 좋기까지 음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행에 빠진(3절)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늙은 창녀가 돼서도 여전히 음행을 즐깁니다. 본문은 특정 시대와 관련된 말씀이라기보다는 본성이 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정치적 음란을 요약적으로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5-8, 12-21).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처형(46-49)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대상을 의지하고 섬긴 결과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음란한 죄로 인해 자신만 상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자녀와 집까지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이런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모든 여인이 음행을 본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4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들에게 무리를 올려 보내 그들이 공포와 약탈을 당하게 하라 47무리가 그들을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그 자녀도 죽이며 그 집들을 불사르리라 48이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49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 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46-4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두 여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며, 그들의 죄와 배신에 대한 처벌을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고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한 결과를 드러내시며, 순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1) 의인에 의한 재판(46)

 

재판에 회부된 두 자매에게 간통하고 피를 흘린 여자에게 해당하는 판결이 내려집니다. 45b절에 사용된 표현이 16:37에도 거의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아, 제의적 간음이 두 자매가 유죄 판결을 받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제의적 간음을 범한 두 자매의 재판은 ‘의인’이 주관합니다. ‘의인’은 원문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들, 그들’입니다. 독립인칭대명사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 특정 집단임을 시사해줍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그들’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정부입니다. 24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22)에게 오홀리바의 재판을 맡기십니다.

또 16:37-38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아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홀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38)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이들이 ‘의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2) 무리에 의한 형 집행(46-47)

 

재관장의 유죄 판결에 따라 형이 집행됩니다(46-47), 형 집행은 ‘무리’가 맡습니다. 무리를 불러와 두 자매를 ‘공포와 약탈’의 대상으로 넘겨주면, 이들이 돌로 치고 칼로 죽이며, 자녀들도 죽이고 집들은 불에 태워버립니다. 16:40-41에서도 예루살렘의 처형이 유사하게 집행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은 죽음으로 끝납니다(참조. 24:13).

 

(3) 형 집행 결과(48-49)

 

음란의 잔에 흠뻑 취해 살다가 멸망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저지른 죗값을 짊어져야 합니다(49). 이들의 파국적 운명은 ‘모든 여인’(민족들)에게 반면교사가 됩니다(48; 참조, 10). 마찬가지로 음행의 유혹을 받는 주변 나라들은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엄중한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멸망당한 후에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죄를 심판하시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의 음행과 배신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과 진실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심판은 경고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회개와 돌아섬을 촉구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삶을 원하시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찾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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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3-02)


예루살렘의 심판하신 하나님

에스겔 23장 22-35절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신들을 따르는 모습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욕망에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고,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언니 오홀라보다 더 심하게 행동한 동생 오홀리바는 음행의 죗값을 혹독하게 치러야 합니다. 언니가 마셨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방에서 오홀리바의 옛 정부들을 데려와서 심판하게 하십니다. 더는 음행할 수 없게,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않게 여호와께서 질투를 쏟아 혹독하게 징벌하십니다.

 

오홀리바의 징벌(22-27)

언약을 파기하고 신의를 버리며 끊임없이 음행과 변질을 일삼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언젠가 나를 대적하는 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은 하나님을 버린 죄였습니다.

 

22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3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24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25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26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27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22-27)

 

사마리아를 상징하는 오홀라의 등장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마리아에게는 예루살렘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역할이 맡겨집니다. 예언의 선포 차원에서 보면 오홀리바가 고발과 심판 선고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양자를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오홀라에 대한 심판 선고(9-10절)는 단지 두 절에 불과하지만,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오흘리바의 심판은 22절부터 35절까지 열네 절에 걸쳐 상세하게 선고됩니다. 차이점은 양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단순히 심판 선포를 고발에 연결해주는 ‘그러므로’로 시작하지만, 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22,28,32,35)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심판 선포의 신적 권위를 더욱 강조합니다. 심판의 대상을 지칭하는 인칭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9-10절에서는 오홀라가 3인칭으로 언급되지만, 22절 이하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오홀리바에게 말씀하십니다. 오홀리바의 심판이 엄중하게 선포됩니다.

 

(1) 바벨론에 의한 징벌(22-24)

 

3인칭을 사용해 거리를 두고 말씀하시던(11-20) 여호와께서 이제 오홀리바에게 직접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예전 정부들을 부추겨서 오홀리바를 치게 하십니다(22).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은 전에 침상에서 함께 음행하다가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버린(17)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음행에 미친 오홀리바는 바벨론 사람들이 ‘싫어서’ 버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오홀리바가 ‘싫어서’(18) 오홀리바가 사랑하다가 ‘싫어’버린 자들을 데려오십니다.

배신당한 여호와께서 배신당한 옛 애인들을 불러다가 오홀리바를 징계하십니다. 심판이 철저하고도 잔혹하게 집행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봉신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열왕기하 24:17) 시드기야의 반역은 느부갓네살 개인에게도 심각한 좌절이었기에(참조. 열왕기하 25:6-7), 바벨론의 보복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와서’는 원정군이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침략할 것을 보여줍니다. 압도적인 대적의 공격이기에, 침략군의 배후에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에 오홀리바에게는 죽음만 남습니다.

‘충동하여’(‘잠에서 깨어나게 하여’)와 ‘그들을 사방에서 데려오리라’(개역개정의 번역은 ‘부정확하다’)는 오홀리바를 치는 전쟁의 참 성격을 보여줍니다. 겉보기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봉신 시드기야의 배반을 징계하는 전쟁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음행을 즐긴 예루살렘을 징벌하시는 사건입니다.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징벌하시는 데 사용하는 그 분의 도구일 뿐입니다(참조. 이사야 10:5). 개인적으로도 상처를 입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모든 병력과 무기를 동원해 보복에 나섭니다(23-24).

 

(2) 질투를 쏟으신 하나님(25-26)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사람은 물론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모든 앗수르 사람’이 크고 작은 방패와 투구로 무장하고 병거와 수레를 거느리고 올라와서 오홀리바를 사방으로 포위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변방에 속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한때 애굽까지 지배했던 앗수르 사람들도 바벨론 군대의 일원으로 참여합니다. 앗수르마저 멸망시킨 바벨론이 분노에 차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공격합니다. 사랑을 배반당한 여호와께서 오흘리바를 이들의 손에 넘기기로 결정하셨기에 멸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오홀리바가 바벨론 군대에 점령당해 그들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습니다. 자기 결정권자처럼 처신했던 오홀리바가 점령군의 판결에 운명을 내맡기는 신세가 됩니다. 재판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오홀리바는 옷과 패물을 빼앗기고 코와 귀가 잘리는 수치를 당하고, 자녀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거나 붙잡혀 가고, 거주지는 불에 타버립니다(25-26).

 

(3) 다시 기억하지 않을 애굽(27)

 

앗수르의 법에 의하면 간음을 범한 여자는 남편의 의사에 따라 코가 잘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에 의한 멸망은 애굽에 체류할 때부터 시작한 오홀리바의 음행이 종착역입니다. 멸망으로 정치적 음행, 특히 애굽과의 음행도 끝납니다(27).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음의 영역에 떨어졌기에 다시 애굽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할 일도, 애굽을 다시 기억할 일도 없어집니다. 오흘리바는 애굽에서 음란의 맛을 알았고, 그 이후에도 애굽 사람들이 젖꼭지를 어루만지고 젖가슴을 누르던 어린 시절의 음행을 잊지 못했습니다(21). 다른 애인들과 음행하면서도 애굽 사람들의 나귀 같은 성기와 말 같은 정액을 갈망했습니다(19-20). 오홀리바는 멸망에 떨어진 후에야 애굽이 구원자가 아님을, ‘손으로 잡으면’ 부러져 어깨를 찢는 갈대 지팡이에(29:6-7; 참조. 이사야 36:6) 지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29:15-16에서는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신 후에 ‘나라 가운데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로 회복시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의 의지가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홀리바의 심판(28-35)

하나님을 버린 자리에는 우상이 들어섰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외는 또 하나의 신을 겸하여 섬긴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순간 이미 하나님을 상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심을 원하십니다.

 

28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29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30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31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3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33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34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5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28-3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신을 심판하실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이방 신들과의 관계로 인해 큰 고통과 수치를 겪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1) 징계의 선포(28-29)

 

심판의 혹독함이 사랑을 배반당한 남자의 분노로 표현됩니다. 여호와께서 오홀리바를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넘겨 보복하게 하십니다(29).

 

(2) 징벌의 이유(30)

 

사랑을 배반당한 자들이 미움의 분노로 오홀리바의 모든 소유ᅟᅳᆯ 빼앗고 벌거벗겨 그 치부를 드러냅니다(30). 오홀리바가 복수심에 가득 찬 옛 애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벌거벗겨져 알몸이 되지만, 정부 애굽은 도무지 도와주지 못합니다. 29절의 ‘네 음란하여 행음하던 것’과 30절의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 음란과 행음이 너에게 이러한 일들을 가져왔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ESV; NRS). 오홀리바에게 선포된 심판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심판의 이유를 요약한 30b절은 내용상 7절과 같습니다. 민족들을 쫓으며 음행을 하고 그들의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이민족에 종속된 정치는 이방신들의 유입과 활동에 관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진노의 잔(31-34)

 

23장은 종교적 음란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정치적 음란을 말할 때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언니 오홀라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생 오홀리바도 언니가 마신 잔을 마셔야 합니다(31). 오홀라가 멸망의 잔을 마시고 주전 722년에 망한 것처럼, 오홀리바도 술이 가득 찬 깊고 넓은 잔을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해야 합니다(32). 술꾼이 질그릇 술잔의 깨어진 조각도 가리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의 술까지 마시듯이 ‘놀람과 패망의 잔’을 정신없이 마셔야 합니다(33-34).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자기혐오에서 나오는 절망적 행동으로, 유방의 애무를 맛본 애굽과 음란을 배경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성욕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바벨론을 버리고(17) 젖가슴과 젖꼭지를 애무해주었던 애굽(3,8,21)을 선택했다가 멸망당한 자신의 처지를 자학적으로 한탄합니다.

 

(4) 음란의 죗값(35)

 

강대국에 의존해서 생존을 도모하는 예루살렘의 정치는 한마디로 여호와를 잊는 배교 행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신 여호와는 예루살렘 왕궁의 주인이시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왕궁에서도 그분은 명목상으로만 이것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왕적 통치권은 성전 지성소의 어둠에 갇혀버렀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을 정치의 주인으로, 하나님 백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에 이스라엔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쓸모없는 물건 버리듯이 그분을 등 뒤로 던져버린 예루살렘은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35).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과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방 신들을 따르며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충실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필요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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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3-01)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행음

에스겔 23장 1-21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여정입니다. 그 길은 어둠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찬찬히 되새기며,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과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타산지석이 됩니다. 마음의 무게를 느끼며, 우리는 이 역사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각각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의인화해 이들의 무절제한 음란을 고발하며 멸망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고발은 이들의 종교적 음란(우상숭배)과 정치적 음란(동맹 정치)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한 어머니의 두 딸로, 이미 어렸을 때부터 행음에 깊이 빠졌습니다.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1-4)

음란과 사랑의 차이는 대상과 책임 여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결혼’에 비유됩니다. 혼인한 후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듯이, 다른 대상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1-4)

 

선포의 명령(16:1) 없이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1). 먼저 주인공들이 한 어머니의 두 딸로 소개됩니다(2). 어머니를 헷 사람으로 소개하는 16장의 경우와 달리 어머니의 신분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고, 두 딸이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자녀라는 사실만 알려줍니다. 특이하게도 두 딸의 음란한 행실이 먼저 소개되고(3) 뒤이어 이들의 신분이 밝혀집니다(4).

 

(1) 계시의 말씀(1)

 

처음부터 음행이 두 딸의 정체성의 핵심에 속함을 시사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두 여인을 비유로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신과 우상숭배를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은 상징적으로 각각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나타내며, 그들의 불신앙과 타락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모습을 드러냅니다.

 

(2) 한 어머니의 두 딸(2)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비유로 들어, 그들의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언급하십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신들을 따르는 모습을 강조하며,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백성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그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3) 애굽에서의 행음(3)

 

두 딸은 이미 애굽에서, 어릴 때(참조. 16:22,43,60) 벌써 음행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젖가슴이 눌렸고, 사람들이 그 처녀 젖꼭지를 어루만졌습니다. 애굽에서 음란을 행한 두 딸의 정체가 알려집니다. 언니는 오홀라(‘그녀의 장막’)이고 동생은 오홀리바(‘나의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인데,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체류할 때부터 두 정치적 단위로 나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에스겔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시작부터 예루살렘의 남다른 지위와 특권을 박탈해버립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한 어머니의 두 딸로 그 기원에 있어 같을 뿐만 아니라(참조. 16:45-46), 그 음란함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차이가 없다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4) 오홀리와 오홀리바의 속(4)

 

4절의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는 오흘라와 오홀리바가 여호와의 아내가 됐음을 시사합니다(참조. 16:8). 애굽에 있을 때 결혼한 것처럼 보입니다. 23장에는 광야 시대가 나오지 않기에 결혼 관계가 애굽 체류 시대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에 따르면 광야 시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신혼을 보낸 기간입니다(참조. 렘 2:2; 호 2:14-15; 9:10).

 

오홀라의 음행(5-10)

사람은 하나님도 믿으며 다른 것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 따르고 섬기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대상을 섬기면 결국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5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7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8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5-10)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야기는 광야와 가나안 정착과 초기 왕정 시대를 생략하고 앗수르가 패권을 장악했던 시대로 넘어갑니다. 여호와 아래 있으면서도 오홀라는 애굽에 체류할 때부터 해오던 음행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1) 앗수르와 행음(5-7)

 

이번에는 앗수르의 멋진 젊은이들과 미친 듯이 음란을 즐기고 저들이 가져온 우상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했습니다(5-8). 주전 9세기 중반 이후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시대를 제외하고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북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통치했던 므나햄(왕하 15:19)과 호세아(왕하 17:3)도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2) 애굽과의 행음(8)

 

이 절에서는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젊은 시절부터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음을 언급합니다. 특히, 그들은 이방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렸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경고합니다. 에스겔은 두 여인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젊었을 때는 애굽 사람과 동침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의 징벌(9-10)

 

앗수르와의 음행으로 생존을 도모하던 오홀라의 시도는 파탄으로 끝납니다. 배반당한 여호와께서 오홀라를 정부 앗수르의 손에 넘겨 칼로 죽여 버리게 하십니다(9-10). 앗수르 왕의 봉신이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아마도 애굽의 사주를 받아,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나라를 멸망에 빠뜨립니다. 주전 722년 사마리아는 3년간 포위당한 끝에 앗수르 군대에 의해 함락당합니다(왕하 17:4-6).

 

오홀리바의 더욱 심한 음행(11-21)

마지막 때에 성도는 롯의 처를 기억하며 죄를 떠나야 합니다(누가복음 17:32). 선도는 하나님을 택했으면 결단을 내리고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찾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일을 심치 가증하다고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가듭난 백성답지 않는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돌이켜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해야 합니다.

 

11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11-21)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이 사마리아보다 더 악하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모습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과 타락을 강력히 경고하며, 그로 인해 받을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회개와 돌아옴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오홀리바의 요약적 평가(11)

 

이스라엘의 두 여인, 즉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타락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사마리아보다 더 악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고, 더 많은 우상 숭배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언니 오홀라의 비참한 운명은 동생 오홀리바에게는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언니보다 더 심하게 음행을 즐겼습니다(11).

 

(2) 앗수르와 행음(12-13)

 

오홀리바는 욕정에 사로잡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음행했습니다. 언니의 뒤를 따라 앗수르에 몸을 팔았습니다(12). 다메섹의 아람과 북왕국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위협하자(주전 734-732년)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참조, 열왕기하 16:5-9). 그 후 요시야 왕이 등장하기까지 유다는 앗수르의 봉신국으로 있었습니다. 앗수르와 음란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음행에 깊이 빠진 오홀리바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채워줄 남자를 찾았습니다. 벽에 그려진 갈대아 남자의 준수한 모습만 보고도 음욕이 불처럼 타올라 사절을 보내 잠자리에 초대했습니다(14-16).

 

(3) 바벨론과 행음(14-18)

 

주전 605년 바벨론이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자 유다도 늦지 않게 바벨론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들과 침상에서 질탕하게 놀아보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애인을 찾았습니다(17). 바벨론과의 음행은 짧은 기간으로 끝났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3년간 조공을 바치다가(열왕기하 24:1)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바벨론에 등을 돌렸습니다.

 

(4) 애굽과의 행음(19-21)

 

정치적 음란에 빠져 음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오홀리바의 안중에는 여호와가 없었지만, 여호와는 오홀리바의 음행을 모두 지켜보셨습니다(13). 오홀라의 경우처럼 대놓고 음행을 하는 오홀리바에게 여호와께서도 등을 돌리십니다(18).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애굽은 음행의 뿌리이자(4) 가장 갈망하는 대상이었습니다(21). 오홀리바는 애굽에서 몸에 밴 음행을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습니다(19). 바벨론과 잠자리를 함께하면서도 어렸을 때 애굽에서 놀았던 경험을 그리워했습니다. 오홀리바는 성기가 나귀의 것만큼이나 크고 말처럼 힘이 무척이나 센 간부 애굽에게 추파를 던졌습니다(20). 가나안의 변방에 속한 이스라엘에 애굽은 신과 같았습니다(참조. 이사야 31:3). 오랜 역사와 놀라운 문명과 넘치는 부와 지식은 애굽을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17장의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가 잘 보여주듯이, 앗수르나 바벨론의 봉신으로 있을 때도 유다는 내부적으로는 애굽을 훨씬 더 신뢰했습니다. 오홀리바가 자신의 젖꼭지를 어루만지고 여린 젖가슴을 애무해준 애굽을 그리워했다는 고발(21)은 애굽에 의존적이었던 예루살렘 정치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사실 21절이 고발의 정점입니다. 여기에서만 2인칭을 사용해 오흘리바를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의 맹목적인 애굽 의존적 정치가 결국 유다를 멸망에 떨어뜨렸습니다. 여호와의 약속(삼하 7장)에 근거한 다윗 왕조가 자리 잡은 예루살렘 왕궁에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본문의 교훈은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타락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우상 숭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자를 환영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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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2-02)


하나님께서 찾으신 한 사람

에스겔 22장 17-31절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실존 인물이 하클리라는 바이올린리스트입니다. 영화 속에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수라장이 된 배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그의 악단들과 함께 끝까지 연주를 하는 장면입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명을 감당한 삶이 감동을 줍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아니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루살렘을 피의 성읍으로 고발한 후 다시 풀무의 비유는 통해 심판의 엄중함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이 풀무에, 그 주민들이 광석에 비교됩니다. 풀무의 불이 광석을 녹여버리듯이 여호와께서 진노의 불로 예루살렘을 뜨겁게 달궈 모든 것을 녹여버리십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족속이 찌꺼기가 되었기에 풀무 예루살렘 안에서 여호와의 진노에 모두 녹여버립니다.

 

풀무불에 들어간 이스라엘(17-22)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심은 백성들에게 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역하여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이 사람의 영혼을 삼킨다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에스겔 시대에는 약한 자들을 돌봐야 할 선지자가 오히려 사람들을 해치는 강도가 되었습니다.

 

17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8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 19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20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21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22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17-22)

 

에스겔은 피의 성이 된 예루살렘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한 뒤 풀무의 비유를 사용해 예루살렘에 엄중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풀무 불의 제련 과정은 불로 광석을 녹여 은이나 금속을 얻어내는 작업이기에 자주 하나님에 의한 연단과 시험의 비유로 활용되는데, 에스겔에게는 심판의 비유가 됩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께 ‘찌꺼기’, ‘은의 찌꺼기’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18).

제련의 목적이 여러 광물질이 섞여 있는 원석에서 은을 분리해내는 데 있기에, 제련 작업이 실패했음을, 곧, 예루살렘을 정화하려는 모든 노력이 헛수고로 끝났음을 전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풀무의 불 조절이 쉽지 않아서 제련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한 번 풀무 불에 들어갔던 광석은 다시 쓸 수 없어버려졌습니다. 찌꺼기가 제거되지 않은 광석처럼 깨끗해지지 않은 예루살렘도 버려질 뿐입니다.

에스겔 15장에서도 예루살렘 주민을 ‘불에 던질 땔감’에나 유용한 잘린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모두 찌꺼기가 되어버렸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예루살렘 한가운데로 모으십니다(19). 원래는 버려져야 하는데 (다시) 풀무 불 속에 넘겨집니다. 제련의 첫 단계가 심판의 의미로 전용됩니다. 정화의 불이 심판의 불로 바뀝니다. 예루살렘이 풀무가 되고, 이스라엘 족속이 버려질 광석이 되어 다시 풀무에 들어가 불의 심판을 받습니다. 제련하는 사람이 은과 놋과 쇠와 납과 주석이 섞인 광석을 풀무에 집어넣고 불을 지펴 녹이듯이 여호와께서도 ‘노여움과 분으로’ 은의 찌꺼기가 된 이스라엘 족속을 모아다가 예루살렘에 넣고 녹이십니다(20). 불을 더 세게 지피기 위해 세게 풀무질을 하듯이, 여호와께서 당신 분노의 불을 저들에게 불어 녹여버리십니다(21). 은이 풀무불 가운데서 녹듯이 저들이 예루살렘 안에서 녹아버립니다(22a).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심판을 당하고서야 저들은 여호와의 분노가 자신들 위에 임했음을 알게 됩니다(22b). 여호와께서 쇠 풀무 애굽에서 끌어내셔서 당신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신(신 4:20) 이스라엘이 그 사이에 찌꺼기가 돼서 풀무 예루살렘에 던져집니다.

 

선지자 제사장 고관들의 죄(23-31)

하나님께서 관리를 세우신 것은 백성의 삶을 편안케 하고 공의를 실행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편안하기는커녕 오히려 음식을 탐하는 이리들처럼 불의한 이익을 위해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해치는 데 열을 올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인자야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이요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 25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26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7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28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29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30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31)

 

제련에 실패한 ‘은 찌꺼기’가 된 예루살렘의 절망적 형편이 24절에서 다시금 비유로 묘사됩니다. 전반절의 ‘정결함을 얻지 못한 땅’은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하려는 시도가 헛되이 끝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예루살렘은 풀무에 들어갔지만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은 광석과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애쓰셨지만 피 흘림과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예루살렘은 깨끗해지지 않았습니다(참조. 24:13). 후반절의 ‘진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은 심판을 받은 땅을 되돌아보는 회고적 말씀으로 읽기도 하지만, 전반절에 연결해 정결함을 얻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비는 생명과 풍요의 상징으로 자연 현상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가나안의 농사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적으로 하늘의 비에 의존했습니다. 때를 따라 내리는 비는 여호와의 축복에, 가뭄은 그분의 징벌에 속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더러움에서 떠나지 않는 예루살렘에게 복 내리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 가운데서 저질러지는 온갖 종류의 가증한 일을 보여주었는데(6-12),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피의 성으로 만든 자들을 집단별로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의 정치와 종교와 사회를 책임진 자들은 제 유익만 추구하였습니다. 이들의 무능력과 탐욕 때문에 예루살렘은 깨끗하게 되지 않은 땅, 비가 오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변심 때문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자들의 부정부패가 파국적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25절의 ‘선지자들’은 죄악의 목록 처음(6)에 등장하는 ‘통치자들’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고발의 내용이 예언자들보다는 통치자들에 일치합니다. ‘반역’으로 옮긴 퀘셰르도 정치적 모반을 가리키는 단어로(참조. 삼하 15:12; 왕하 11:14; 사 8:12; 렘 11:9), 예언자에게 사용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예언자들에 대한 고발은 28절에 나옵니다.

왕들은 먹이를 찢으며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았습니다. 정의와 공의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고 보호해야 하는 왕들이 양들을 잡아먹는 굶주린 사자였습니다.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에서 양 떼를 보호하기는커녕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양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생명’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들은 백성의 생명을 먹어 치우고,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고, 과부를 많게 하였습니다. 통치자들의 어리석은 결정이 남자들을 사지(전쟁터)로 끌고 가서 죽임에 넘기고, 남편 잃은 과부만 많이 늘려놓았습니다. ‘반역’은 예루살렘 왕궁의 왕들이 하늘의 왕 여호와께 반역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의 양 떼를 그분의 목자들이 자기 양 떼로 주장하면서 임의로 처분했습니다.

 

두 번째 고발의 대상은 여호와 종교의 일차적 책임이 맡겨진 제사장들입니다. 여호와의 율법과 제의가 솔선하여 준수하고 본을 보여야 할 제사장들에 의해 것 밝혔습니다(26).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율법에 폭력을 가하고 거룩한 물건을 더럽혔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백성에게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차이를 알려주지 않고, 여호와의 안식일에서 눈을 돌려버렸습니다. 제사장들도 지키지 않는 제의적 정결 규정과 안식일 규정이 일반 백성에 의해 지켜질 리 없었습니다(8). 부정해진 자들이 부정한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고, 그분의 성물을 더럽혔습니다. 성과 속, 정과 부정을 무시하는 제사장들과 그들의 본을 따르는 백성에 의해 여호와의 성소가 더럽힘을 받았습니다. ‘범하였으며’는 ‘폭력을 가하다’, ‘해를 끼치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마스’의 번역으로 율법이 제사장들의 권력에 따라 왜곡되거나 무시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세 번째 고발의 대상은 ‘고관들’입니다(27). 왕들은 굶주린 사자와 같았고, 신하들은 탐욕스러운 이리와 같았습니다. ‘음식물을 삼키는’과 ‘영혼’은 원문에서는 각각 25절의 ‘음식물을 움킴’과 ‘사람의 영혼’과 똑같습니다. 왕들에게나 신하들에게나 백성은 먹이, 곧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왕들은 생명을 집어삼키고 재산과 보물을 빼앗고, 신하들은 피를 쏟아 생명을 멸하고 불의한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람들의 생명보다 재물 축적이 더 중요했습니다.

네 번째는 ‘선지자들’을 향한 고발입니다(28). 여호와를 위해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들이 왕들과 고관들을 위해 회철을 해주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짓 환상을 보며 속임수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께서 발하지 않았는데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떠들었습니다(참조 13:6). 거짓 예언으로 많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어 축게 하였습니다.

마지막 고발 대상은 ‘이 땅 백성’으로, 유다 사회의 주류에 속한 유력자들입니다. 이들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는 자들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학대하고, 객으로 사는 이방인들을 부당하게 억압했습니다(29). 부패와 타락은 일부 계층에 제한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제 유익을 위해 직분과 권한을 남용하는 대는 정치·종교·사회 지도자들이 한결같았습니다.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멸망을 막아보려고 여호와 앞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30; 13:5; 참조 사 59:16). 예루살렘의 부패는 지배 계급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같이 부패한 예루살렘에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불의한 행위에 진노의 불로 보응하십니다(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금과 은처럼 정제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가 없음을 지적하시고, 각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고 회개하는 자에게 새 삶을 주시는 분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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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2-01)


심판하실 이유를 말씀하신 하나님

에스겔 22장 1-16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심판주입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편안한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은 때로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롭고 심판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죄악에 대해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칼에 넘기실 그러실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피의 성읍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저질러지는 불의와 불법은 그 한계가 없었습니다. 정치와 종교와 사회와 가정이 모두 죄를 범하여 자신을 더럽히기에 열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은 여호와를 잊었습니다.

 

철저하게 심판받은 예루살렘(1-5)

요즘 주변에 관계가 어떻습니까? 관계에는 크게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로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관계 회복은 수직적인 관계 회복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할 때, 모든 관계 속에서 화평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3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4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1-5)

 

이스라엘의 죄는 피 흘림이라는 사회적 죄와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는 사회 전 영역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하나님 없는 영적인 공백을 다른 우상을 만들어 채우는 헛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날을 재촉하는 악행이며 하나님 주신 거룩한 이름을 스스로 더럽히는 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방인 가운데 능욕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1) 말씀의 계시(1-2)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칼에 넘기기로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이 피 흘린 성읍’(피의 성읍)에 그가 저지른 ‘모든 가증한 일’을 알려주도록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2; 참조. 20:4).

 

(2) 포괄적인 고발(3-5)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칼로 치실(21:1-23) 때는 그러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이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를 재촉하고 우상을 만들어 자신의 부정하게 만든 성이 됐기 때문입니다(3), 피 흘림과 우상승배가 예루살렘을 특징짓는 표지가 됐습니다. 전자는 윤리적 악행을, 후자는 종교적 악행을 대표합니다. 사회적 폭력과 제의적 타락이 함께 고발됩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명목상으로만 그분을 인정하는 예루살렘의 민낯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유폐당하시고, 사람의 탐욕스러운 힘과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든 신이 주인 행세를 합니다.

예루살렘은 흘린 피로 죄를 짓고 자기가 만든 우상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하면서 심판의 날을 앞당기고 정해진 심판의 연한을 다 채웠습니다(4a).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는 의역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네 날들을 가까이 오게 했고, 네가 네 해들의 끝까지 갔다.’ 얼마간 풍자적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열심히 가증한 일을 저지르면서 여호와께서 빨리 심판해주시기를 졸랐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쉼 없이 피를 흘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은 예루살렘이 자초한 재앙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민족들의 치욕거리와 조롱거리로 만드실 것입니다(4b). 땅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을 이름이 더럽혀지고 혼란으로 가득 찬 자로 조롱합니다(5). ‘어지러움이 많은’은 ‘소란이 큰’으로, 명성이 컸던 예루살렘이 피 흘림과 우상숭배 때문에 혼란이 큰 성이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폭력과 거짓이 지배하는 자기파멸적 사회가 됩니다.

 

구체적인 죄목들(6-12)

한 사회가 종교적인 부분에서 타락하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반드시 사회적인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그 다음 그 사람의 행위는 다시 볼 것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무시하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집니다.

 

6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7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8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1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 12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6-12)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왜 망하게 되는지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수평적으로는 사랑해야 할 이웃의 피를 흘리는 죄와 수직적으로는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 우상을 만드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더러워진 예루살렘은 다른 나라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심판의 날을 자초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피의 성으로 만든 가중한 일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오경의 법조문, 특히 레위기 18-20장에 나오는 계명들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전체 열여섯 개의 고발 가운데 세 개는 제의와, 다섯 개는 성적 윤리와, 여덟 개는 사회 윤리와 관련됩니다. 제의적 이탈보다는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18장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성적 타락에 관한 언급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로 가정의 무질서와 붕괴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무질서와 붕괴를 가져옵니다.

 

(1) 사회적 타락(6-7)

 

먼저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 모든 고관’의 죄가 언급됩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의 타락과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여기에서 ‘고관’은 왕실에 속한, 왕을 포함한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최고 권력층에 속한 자들이 저마다 제 권력에 따라 피를 흘립니다(6). 오경의 법조문에 상응하는 규정이 나오지 않는 유일한 고발입니다. 큰 권력을 가진 자나 작은 권력을 가진 자나 제 손에 있는 권력을 사적 용도로 사용합니다. 법을 책임진 자들이 정의와 공의에 따라 통치하지 않고, 제 유익을 위해 권력을 임의로 행사합니다. 예루살렘의 법질서가 그 유지와 준수를 위해 애써야 할 자들에 의해 무시됩니다. 둘째 고발은 무질서의 끝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깁니다(7a; 참조. 출 21:17; 레 20:9; 신 27:16; 참조. 출 20:12; 레 19:3a; 신 5:16). 어른의 지위와 권위가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권력과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부모는 짐만 될 뿐이었습니다. 부모조차 무시하는 사회에서 다른 계명들이 지켜질 리 없었습니다. 사회적·법적 약자에 속하는 자들이 악한 사회의 희생물이 됩니다. 나그네가 학대를 당하고 고아와 과부가 억압을 당합니다(7b). 고대 세계에서 집안과 친족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기에 이들의 권리는 쉽게 짓밟혔습니다. 특히 신명기 율법은 이들의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보입니다(참조, 신 14:29; 16:11,14; 24:17,19-21; 26:12; 27:19; 참조. 출 22:21-22; 레 19:10,33; 렘 7:6; 22:3).

 

(2) 종교적인 타락(8)

 

다섯째와 여섯째 고발은 제의적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물을 무시하고 그분의 안식일을 더럽힙니다(8; 참조. 레 19:30). 고발의 구체적 내용은 불분명합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규정에 따라(참조. 레 15-21) 먹지 않는 것을, 후자와 관련해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안식일에 쉴 수 없게 만들거나 재물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어 예루살렘(‘너’)은 이러한 제의적 불법이 편만했음을 시사해줍니다. 26절에서는 제사장들의 죄로 언급됩니다.

 

(3) 사회적·제의적인 타락(9)

 

일곱째는 중상모략으로 남의 피를 홀리게 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입니다(9a; 참조. 레 19:16; 잠 11:13; 렘 6:28; 9:4-5; 마 5:21-22). 이들은 제 이익을 위해 이웃을 불화와 분열에 빠뜨립니다. 여덟째의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9ba; 참조. 18:6)는 산당 제의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4) 성적인 타락(10-11)

 

9bβ절부터 11절까지의 다섯 개는 특히 집안의 성적 악행을 고발합니다. 도덕적·성적 타락이 가족과 이웃의 기본 질서마저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참조. 레 18:6-23; 20:10-21; 호 4:13-14; 암 2:7). 계모와 성적 관계를 갖거나(참조 레 18:7-8; 20:11; 신 23:1; 27:20), 생리로 부정한 여자를 범하기도 하고(참조. 레 18:19), 이웃의 아내와 역겨운 짓을 저지르거나(참조. 레 18:20), 며느리와 추잡한 짓을 하고(참조. 레 18:15), 자기 아버지의 딸인 누이와 관계를 갖기도 합니다(참조 레 18:9).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성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음란을 즐깁니다.

 

(5) 사법적·경제적 타락(12)

 

성욕이 가정을 지배한다면, 재판과 상업과 경제에서는 돈이 지배합니다. 열넷째는 불의한 재판에 대한 고발입니다.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법을 왜곡하여 의로운 자의 삶을 파괴하고(12a; 참조. 신 27:25), 부자는 변리와 이자를 받고 돈놀이하고(12bα; 참조. 출 22:24: 레 25:35-37; 신 23:20), 이웃을 억압하여 착취합니다(12bβ).

여호와 보시기에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은 총체적이었습니다. 왕궁과 가정과 사회 어디에도, 법과 제의와 윤리와 경제 어디에도 여호와의 계명은 없었습니다. 12절의 마지막은 이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너는) 나를 잊어버렸도다.’ 하나님께서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이 서로에게 주인이 되고, 서로를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살기에 피 흘림과 우상숭배가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징계의 선포(13-16)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을 열국 중에 흩으셔서 그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힘을 다 빼고 권력을 꺾어서 다시는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살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힘과 재물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서실 것입니다.

 

13네가 불의를 행하여 이익을 얻은 일과 네 가운데에 피 흘린 일로 말미암아 내가 손뼉을 쳤나니 14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 15내가 너를 뭇 나라 가운데에 흩으며 각 나라에 헤치고 너의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에서 멸하리라 16네가 자신 때문에 나라들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13-16)

 

이스라엘의 담대한 죄악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이었으므로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반드시 심판하겠다고 결심하십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1) 여호와의 징벌(13-14)

 

멸망을 재촉하기에만 열심인 예루살렘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열여섯 개의 죄악 목록이 ‘불의를 행하여 이익을 얻는 일’과 ‘피 흘린 일’로 요약됩니다(13).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처럼 경제적 탐욕과 사회적 폭력이 심판이 주된 원인으로 언급됩니다. ‘손뼉을 치다’는 적대적 반응을 보여주는 행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이 되어 치시기에 예루살렘이 버텨낼 수 없습니다(14).

 

(2) 유배(15-16a)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을 이방 나라들 가운데로 흩트리고 이들의 더러움을 예루살렘에서 제거하십니다(15). 이방에 흩어져 민족들에 의해 수치를 당할 때가 되어서야 이들은 죄를 깨닫고 여호와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게 됩니다(16).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심판주입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편안한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은 때로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롭고 심판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죄악에 대해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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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1-02)


바벨론에게 심판하실 하나님

에스겔 21장 18-32절


 

동물 중에 가장 용맹한 동물은 호랑이나 사자입니다. 하지만 호랑이 옆에 서 있는 여우가 있었습니다. 여우는 고개를 숙인 동물들을 보면서 자기를 두려워하여 고개를 숙인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여우 혼자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바벨론은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 옆에 선 여우에 불과합니다.

 

  • 에스겔을 통해 바벨론에 의한 칼에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바벨론의 칼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그 심판의 집행자인 바벨론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는 칼(18-27)

거짓된 안전과 헛된 환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과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암몬은 평화를 선언하는 예언자들의 환상과 예언을 의지하며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괜찮을 거라며 거짓 예언과 환상을 심어주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8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20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21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22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23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24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되살리며 너희의 허물이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 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25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 2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27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18-2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칼로 바벨론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칼에 쓰러질 것임을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선포하게 하십니다. 바벨론이 유다와 암몬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게 하시고, 세 가지 점술로 동일한 결과를 얻어서 유다를 먼저 공격하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1) 표적 행위의 명령(18-20)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시금 표적 행위를 명하십니다. 같은 나라에서 나온 길이 갈림길에서 두 길, 곧 암몬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로 나위도록, 그리고 각 성읍으로 행하는 길 어귀에 표시판을 세우게 하십니다(19-20).

요단 동편의 랍바와 서편의 예루살렘이 바벨론 원정군의 공격 목표가 됩니다. ‘바벨론 왕의 칼’은 여호와로부터 예리하게 날선 칼을 넘겨받는 ‘죽이는 자’(11)가 바벨론 왕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을 당신 분노를 푸는 칼로 사용하십니다. ‘큰 성’을 의미하는 랍바는 암몬의 왕도로, 현재 요르단의 수도 암만이 위치한 지역의 얍복강 상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요새화된 ‘견고한 성’으로, 예루살렘 주민들은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예레미야 21:13)하고 성의 절대 안전을 자랑했습니다.

 

(2) 표적 행위의 해석(21-23)

 

원정을 떠난 바벨론 왕은 갈림길에서 암몬의 랍바와 유다의 예루살렘 가운데 어디를 (먼저) 공격할지 세 가지 방식으로 점을 치게 합니다(21). 화살점은 표시된 화살들을 통에 넣어 흔들고 하나를 뽑아 신의 결정을 알아내는 일종의 제비뽑기입니다. ‘우상에게 묻고’는 문자적으로는 ‘드라빔에게 묻고’로, 가정에서 섬기는 신상인 드라빔에게 어떻게 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 점괘를 얻는 간점은 바벨론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점술이었습니다. 전문 지 식을 갖춘 제사장이 희생제물의 간을 꺼내 그 색깔과 형태를 관찰하여 점을 쳤습니다.

22절의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는 일부 부정확한 번역으로, ‘그것의 오른쪽에 점괘 예루살렘이 있었다’로 옮겨야 합니다. 간점과 관련한 언급으로, 간의 오른쪽 부위에 보이는 현상은 신탁을 구하는 자에게 길한 징조였습니다. 예루살렘과 관련해 간의 오른쪽에 길한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전쟁의 함성을 올리고 성문마다 공성퇴를 설치하고 공격 축대를 쌓고 공격 보루를 만들라는 점괘였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면 함락할 수 있다는 승리의 신탁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을 앞두고 신들의 의지를 묻는 일은 일반적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당연히 자기 신들에게 신탁을 구하지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를 미리 알려주심으로써 바벨론의 점쟁이들이 얻어낸 신탁이 당신의 결정에 속함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는 바벨론에서 통용되는 수단을 활용해 우상숭배 자들에게 당신 의지를 전달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들은 바벨론 왕의 결정을 거짓 예언으로 간주합니다.

23절의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는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거짓 점괘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장엄한 맹세들이 있다’로 옮겨야 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들에게 물었기에 유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짓 점괘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바벨론 침략군과 함께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3) 시드기야의 심판(24-27)

 

‘장엄한 맹세’는 구원 예언자들이 내세우는 여호와에 의한 예루살렘의 보호와 관련한 신탁 또는 애굽의 도움이 약조된 정치적 조약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점쟁이 들이 등장하는 현재의 문맥에서는 전자가 더 잘 어울립니다.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화한 신학과 예루살렘 성전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지켜주시리라 자신합니다. 이들은 바벨론 왕에 사로잡혀서야 자신들의 죄를 기억할 것입니다. 멸망한 후에야 바벨론 왕의 칼이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치도록 그에게 넘겨주신 칼임을, 자신들이 여호와께 맞서 싸웠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께 반역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멸망을 초래하기에, 열방 가운데 이들의 허물과 죄가 그대로 폭로되었습니다(24), 이스라엘은 변명의 여지없이 멸망의 차이를 온전히 짊어져야 합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하는 이스라엘 왕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당하고 그 주민들이 사로잡힐 때 왕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25절의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은 ‘비천하고 악한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죄악의 마지막 때’는 ‘마지막 징벌의 때’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심판을 받아야 할 날이, 마지막 벌을 받을 때가 왔습니다. 그에게서 관이 제거되고 왕관이 벗겨집니다(26).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는 여호야긴의 높임과 시드기야의 낮아짐과 관련한 언급이 아니라,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땅 위의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여호와의 시선이 왕에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내가 그것을 폐허로, 폐허로, 폐허로 만들리라. 심판(의 권리)을 가진 자가 올 때까지 이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가 (그에게) 그것을 주리라’(27절의 사역). 여호와께서 ‘폐허’를 세 번 반복 사용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주전 597년의 첫 번째 포위 공격과 달리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심판(의 권리)을 가진 자’(개역개정의 ‘마땅히 얻을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데 사용하시는 바벨론 왕을 고려해 볼 수 있고, 창세기 49:10과 관련해서는 멸망 이후의 메시아적 소망을 담은 표현으로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암몬을 치는 칼(28-32)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에도 제한받지 않으시고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우상에게 물어보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피는 바벨론의 다양한 점술까지 사용하셔서 유다를 심판하는 계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당신의 생각과 지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28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 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 29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30그러나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31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32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28-32)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사용하여 암몬까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셨던 바벨론이 암몬에게도 동일하게 칼을 겨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1) 암몬의 치는 칼(28-29)

 

갈림길에서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택한다고 해서 암몬이 바벨론 왕의 칼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예언하게 하십니다(28). ‘그(들)의 능욕’은 암몬 사람들이 당하게 될 능역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을 마구 죽이도록 칼이 칼집에서 뽑힙니다. 내리치면 번개 치듯 빛나는, 날을 예리하게 간 칼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준비하신 칼이 암몬도 칩니다. 암몬의 예언자들이 거짓 환상을 보고 속임수를 말하지만, 멸망의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29). 암몬의 예언자들의 등장은 아마도 23절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예언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멸망으로 오도하는 것처럼 암몬의 구원 예언자들도 제 민족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29절의 ‘중상 당한 악인’은 25절의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의 복수 형태로 ‘비천하고 악한 자들’로 옮기는 것이 좋고,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도 25절의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와 문자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런 일치에 따르면 암몬의 비천하고 악한 자들(‘중상 당한 악인’)은 암몬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이 됩니다.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에게 선포된 심판의 말씀이 암몬의 정치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됩니다.

 

(2) 칼의 운명(30-32)

 

바벨론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 유다의 예루살렘과 암몬의 랍바를 쳐서 멸망시키지만, 칼 또한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십니다(30). 여호와께서 위임하셨던 칼의 역할이 다 끝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간 칼이 그곳에서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는 문자적으로는 ‘네가 창조된 곳에서’로, 바벨론을 지으신 분이 여호와임을 시사해줍니다. 예루살렘에 당신 분노를 다 푸시는(17) 여호와께서 칼에게 진노를 불처럼 퍼부 오십니다(31). 예루살렘과 랍바를 바벨론 왕의 칼로 치신 여호와께서 칼 바벨론을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십니다. 멸하기를 즐기던 바벨론이 잔인하고 사나운 민족들에 넘겨져 흔적도 없이 땅에서 사라집니다(32).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을 통해 불의와 죄악에 대한 심판을 명확히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경고를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필요성이 강조됩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가운데, 각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분별하시며, 결국 각자의 삶의 선택이 심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 영광을 받으시는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에게 깊은 반성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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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1-01)


예루살렘을 심판할 칼의 노래

에스겔 21장 1-17절


 

기쁘고 행복할 때 노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도 노래합니다. 슬플 때 부르는 노래를 애가(哀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칼로 비유하는 '칼의 노래'는 슬프고 안타까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아픈 경험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러한 노래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과 그 성소에 거슬러 칼을 드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모두 이스라엘 땅에서 끊으십니다. 산림에 불은 불이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가리지 않고 태우듯이, 여호와의 힘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치십니다. 그분의 칼은 심판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까지는 다시 칼집에 쫒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할 칼(1-5)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이 심각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타락에 대해 탄식해야 할 때 탄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외면이거나 무지입니다. 거룩한 회복은 죄를 보면서 탄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칼을 준비하여 모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3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4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단락은 20:45-49과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모호성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1) 선포의 명령(1-2)

 

에스겔을 ‘비유를 말하는 자’로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번에는 분명한 언어로 말씀이 선포됩니다. 선지자가 부르는 칼의 노래를 들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성전을 거슬러 선포하고 이스라엘 땅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2).

 

(2) 칼로 치시는 여호와(3-4)

 

하나님께서는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땅과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심판의 칼을 뽑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칼은 원수를 대하듯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거나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때 여호와께서 아내로 삼으셨던 예루살렘과 그분의 거처인 성전과 약속의 선물로 주셨던 이스라엘 땅이 그분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을 이유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고발이 더는 필요하지 않는 단계가 됐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을 대적하십니다. 칼집에서 칼을 뽑아 이스라엘 땅에서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다 잘라내십니다(3). ‘의인과 악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칼을 빼 드신 여호와의 모습은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너에게서 의인과 악인을 잘라낼 터이니, 내 칼이 남에서 북까지 모든 육체를 치려고 칼집에서 나갈 것이다.’(4절 사역) 칼을 피해 도망할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온 땅이 칼에 넘겨질 것입니다.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칼을 칼집에서 뽑으시고, 4절에서는 여호와의 심판 의지에 따라 그분의 칼이 칼집에서 나갑니다. 칼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칼집에서 뽑히기만을 기다립니다.

 

(3) 다시 꽂히지 않는 칼(5)

 

한 번 뽑힌 칼은 다시 칼집에 꽂히지 않습니다(5b). 도중에 그치거나 경감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누구도 칼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칼집에서 칼을 뽑았음을 모든 육체가 알게 됩니다(5a).

4절의 ‘모든 육체’는 칼의 심판에 넘겨진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고, 5절의 ‘모든 육체’는 민족들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해 여호와의 능력이 온 땅 드러납니다. 전에 민족들 가운데 당신 이름이 더렵혀지지 않게 하려고 인내하셨던(20:9,14) 여호와께서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칼에 의한 완전한 멸망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분께서 칼집에서 뽑은 칼의 정체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19절에 가서야 바벨론 왕임을 알게 됩니다.

불을 놓아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모조리 태우시고, 칼로 ‘의인과 악인’을 다 잘라내시리라는 말씀은 에스겔이 앞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공의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스겔은 14:12-20에서 노아와 다니엘과 욥과 같은 의인도 자기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고 자녀는 건지지 못한다고 말했고, 18:1-20에서는 모든 영혼이 다 여호와께 속했기에 죄지은 자만 죽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신학적 전통의 차이보다는 관점의 상이성에서 기인합니다. 14장과 18장은 각 개인의 행위와 책임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의 공의를 논하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간주해 심판을 선포합니다. 전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율법적 측면에서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후자는 공동체에 임한 심판의 사회·정치적 영향과 범위에 주목합니다.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임하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재앙은 성격상 집단적이기에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아무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존에 서로 의존적인 나무의 가지와 잎의 경우처럼 개인과 공동체(사회)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두 실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각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 또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가 잘 보여주듯이, 이스라엘 전체가 그분과 언약을 맺고 그분의 아내 또는 아들이 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으로 책임을 져야하기에 순종한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물론 이들의 운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언약 백성의 배반을 징계하는 그분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포함한 이스라엘 땅이 여호와의 칼에 넘겨져 모든 육체가 잘림을 당합니다. 에스겔이 선포한 칼의 심판은 전쟁을 가리킵니다.

 

 

표적 행위(6-7)

하나님께서는 두렵고 무서운 심판자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돕기 위해 적들에게 사용했던 칼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악이 극심했음을 보여 줍니다. 혹시 우리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돌아서지 않으면, 어쩌면 하나님의 칼끝이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6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7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6-7)

 

말로 선포된 칼의 심판이 이번에는 행위로 선포됩니다. 백성들은 이 무서운 재앙을 통해서 심판의 칼을 뽑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심판을 앞두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허리가 끊어지도록 크게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1) 여호와의 명령(6)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멸망의 고통과 두려움을 표적 행위로 보여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끊어지듯이 괴로워하며 탄식해야 합니다(6). 상체와 하체를 이어주는 ‘허리’는 힘의 자리로(참조. 욥기 40:16;잠언 31:17), ‘허리의 끊어짐’은 버틸 수 없는 고통을 시사 합니다. 신명기 22:11은 적의 멸망을 ‘허리를 꺾다’로, 나훔 2:11은 저의 침략에 직면한 니느웨 사람들의 낙담을 ‘허리가 떨리다’로 표현합니다.

‘탄식하다’는 절망적 상황에 지면한 자들의 한숨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11에 따르면 온 백성이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고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을 먹을 것과 바꿉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표적 행위를 본 백성의 질문을 예상하시고 그들에게 줄 답변을 알려주십니다.

 

(2) 여호와의 해석(7)

 

7절의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해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는 7:17절의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를 정신적·심리적 차원에서 확장한 표현입니다. 들려오는 소문 때문에 사람은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혼이 나간 자들처럼 덜덜 떱니다.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칼의 재앙이기에 들려오는 소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칼의 노래(8-17)

하나님께서 사형 집행인에게 주신 칼은 무섭고 날카로운 칼입니다. 적들을 향하던 칼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겨누게 됩니다. 사방을 에워싼 칼날은 성문마다 지키고 있어서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다할 때까지 칼의 심판이 계속될 것입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1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 12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13이것이 시험이라 만일 업신여기는 규가 없어지면 어찌할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16칼아 모이라 오른쪽을 치라 대열을 맞추라 왼쪽을 치라 향한 대로 가라 17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노를 다 풀리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8-17)

 

전승 과정 중에 훼손을 경험한 것 같은 일부 구절 (10b, 13, 14a, 15a)의 원래적 의미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단락의 전체 내용은 단순합니다. 전쟁 무기인 칼에 집중합니다.

 

(1) 날카롭고도 빛나는 칼(8-13)

 

21장에 ‘칼’이 모두 15회(3,4,5,9(×2),11,12,14(×3),15,19,20,28(2)) 사용되면서 단락들을 유기적으로 연결 해줍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칼의 위용이 반복적으로 묘사됩니다. 날카롭게 잘 갈아 빛나는 칼이요(9,10,11), 내리칠 때마다 번개 치듯 빛나는 칼이요(10, 15), 마구 죽이라고 갈아(10, 15) 살해자의 손에 넘길(11) 살육의 칼, 큰 살육의 칼입니다(14).

 

(2) 죽이는 칼(14-17)

 

칼이 사람들을 에워싸고 휘둘러지면, 사람들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많은 사람이 비틀거릴 것입니다(15). 모든 관심이 칼의 무서움을 묘사하는 데 모아집니다. 날카롭게 갈아서 날이 선 칼이 행동에 나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성문마다 ‘번쩍번쩍하는 칼’(살 육의 칼?)을 세우십니다(15b).

칼의 배치가 끝나자 여호와께서 칼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십니다. ‘오른쪽으로 돌아라. 왼쪽으로 돌아라. 네 날이 향하는 곳으로 돌아라’(16절의 사역). 여호와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칼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칩니다(17). 문맥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칼을 가시는 분이지만, 이를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 칼을 휘두르는 ‘죽이는 자’가 누구인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 만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모든 고관이 칼에 넘겨집니다(12).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칼이 그분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시는 이스라엘을 칩니다.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에서 백성을 치실 수밖에 없는 그분의 슬픔 아픔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17절의 ‘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노를 다 풀리로다’는 그분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뼉을 치다’는 칼이 사납게 날뛰도록 부추기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배반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오직 심판으로만 가라앉혀집니다(참조 5:13;16:42;24:13).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에스겔은 무서운 심판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슬프게 울었습니다. 주위에는 아직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소유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의 영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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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0-04)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에스겔 20장 40-49절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우리들의 존재에 근거이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구원이나 축복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먼저 지키면 산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안식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체의 안식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 안식을 만들기 위해서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 광야에서 여호와의 몫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시온 산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졌던 시온 산이 다시 여호와 종교의 중심지로 회복됩니다. 애굽에서부터 계속된 우상숭배로 완전히 단절됐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거룩한 백성이 될 이스라엘(40-44)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동기는 사랑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회복에 있으며, 하나님은 여호와를 아는 백성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자신을 거룩하신 분으로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징계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회복과 성숙을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40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44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0-44)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심 있으시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의 영광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하거나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예배의 회복(40)

 

첫 번째 출애굽의 경우처럼 광야는 경유지입니다. 유배민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 나라의 광야’에서 당신께 반역하는 자들은 잘라내시고 신실한 자들만 골라 이스라엘 땅에 데려오십니다. 우상숭배에서 떠난 자들만 고향 땅으로 돌아옵니다.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2) 여호와의 거룩함(41)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거룩한 산,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께서는 ‘거기에서’ 그들을 기쁘게 받으시고 거기에서 온갖 성물과 함께 예물과 가장 좋은 선물을 요구하십니다(41). 시온 산을 중심으로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교통합니다.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다가 여호와의 분노로 심판을 당했는데, 앞으로는 시온 산에서만 제사를 드립니다. ‘요구하리라’와 1절의 ‘물으려고’는 동사 ‘다라슈’의 번역입니다. 장로들의 문의를 엄중하게 거절하셨던(3,31; 14:3) 여호와께서 구원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제물과 예물을 드리도록 요구하십니다. 여호와의 요구는 그분의 받으심을 전제합니다. 유배로부터의 해방과 귀향이 여호와의 주도로 이뤄지는 것처럼, 우상숭배로 중단됐던 성전 제의도 여호와에 의해 정상화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3인칭 ‘그들’로 지칭하는 40절과 달리 41-44절에서는 2인칭 ‘너희’가 사용됩니다. 형식 상 전자는 귀향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주는 말씀이고, 후자는 유배지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상응해서 다시금 귀향에 관한 언급과 함께 관계 회복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을 여러 나라에서 모아들이실 때 이들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십니다. ‘향기’는 28절에서는 ‘분향’으로 옮겼습니다. 산당에서 우상들에게 분향하다가 쫓겨났던 자들이 여호와에 의해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전에는 반역한 이스라엘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혀질 위험에 처했었는데(9,14,22), 미래에는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그분의 거룩함이 민족들 앞에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거룩함은 그분의 제의적 속성보다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그분의 왕적 능력과 관련한 표현입니다. 민족들이 유배민들의 해방과 귀향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과 권능을 보게 됩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온 자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3) 여호와를 알게 되는 이스라엘(42)

 

42절의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 게 주기로 맹세한 땅’은 유배민들의 귀향을 애굽 땅에서 이들의 조상들에게 맹세로 주신 약속(5, 28)의 성취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반역하며 약속의 땅을 더럽혔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 맹세를 끝까지 지키십니다. 그분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줍니다. 여호와의 은혜로 과거의 짐에서 놓여나지만, 과거의 수치스러운 흔적마저 지워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4) 잊지 말아야 할 과거(43)

 

가나안으로 돌아가 살 때 이스라엘은 지나온 길과 자신을 더럽힌 모든 행실을 기억하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하여 혐오스러움을 느껴야 합니다(43). 용서가 부끄러운 과거의 망각까지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으로 과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잊으면 언젠가 그 과거로 되돌아 갈 위험이 커집니다. 다시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악한 길과 행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는 행위는 인식 작용 이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악한 과거를 기억하고 멸망과 유배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더불어 새로운 출발이 철저하게 여호와의 은총 덕분임을, 곧 그분께서 맹세의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5) 당신 이름을 위하시는 여호와(44)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에 상응하는 징벌로 갚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달리 행하십니다(44). ‘내 이름을 위하여’는 여호와의 구원 결정이 이스라엘의 신학적 특권이나 권리에 조금도 근거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속의 확실성을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불타는 수풀의 비유(45-49)

여호와를 아는 백성을 창조하는 것은 징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의 명예를 되찾는 것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거룩하신 분으로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심판을 통한 징계의 의도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불러 인도하시며, 이러한 목적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결국,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5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6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47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48혈기 있는 모든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49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45-49)

 

불에 의한 심판을 선포하는 마지막 다섯 절의 비유적 말씀은 앞 단락의 연속은 아닙니다. 내용과 주제에 있어 21:1-5과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칠십인역 전통을 따르는 개역개정의 장 구분과 달리 히브리 성서의 전통은 45-49절의 말씀으로 다음 장을 시작합니다. 비유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비유의 문학적·역사적 배경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해석의 실마리도 본문 안에 없습니다. 17장의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보다도 더 수수께끼에 가깝습니다. 본문의 비유가 매우 모호하고 일반적이기에 보통 ‘여호와의 칼’을 선포하는 21:1-5의 도움을 받아 해석합니다. 두 말씀 사이에는 주제뿐만 아니라 문장이 구조와 표현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은 조금 달리 번역했지만, 46절과 2절의 명령 ‘인자야 너는 얼굴을 ~으로 향하라/향하며 ~으로 향하여/~를 향하여 소리내어 ~을 쳐서 예언하라/~에게 예언하라’는 그 구조와 표현에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47절과 3절 의 도입부 ‘~에게 이르기를’과 ‘남에서 북까지’도 동일하고, 48절의 ‘혈기 있는 모든 육체’와 4절과 5절의 ‘모든 육체’도 원어로는 같습니다. 47절의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는 3절의 ‘의인과 악인’에 상응합니다. 또 표현은 달리했지만, 문장의 구조와 내용 에서 48절과 5절은 차이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얼굴을 남으로 향해, 남쪽을 거슬러 설교하고 네겁의 삼림 지대를 거슬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46). 바벨론 유배지에 있는 에스겔의 입장에서 남쪽은 바벨론 남쪽도 레바논 남쪽의 이스라엘도 모두 가능하지만, 후자가 비유의 상징적 의미에 더 잘 어울립니다. 남쪽을 가리키는 세 개의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됐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상응하는 2절의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에 따라 ‘남쪽의 숲’은 ‘네겁의 삼림 지대’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유다 산지 남쪽의 네겝은 사막 지대로 수풀이 없지만, ‘불’과 관련해서 숲으로 언급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겝의 숲에 불을 놓아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모조리 태우게 하십니다(47).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숲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아, 남쪽에서 북쪽까지 모든 얼굴이 불에 그슬립니다. 여호와께서 일으키신 불이기에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는 꺼지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 불을 끄거나 피하지 못합니다. 맹렬한 불이 수풀을 모조리 태울 때, 불에 얼굴이 델 때, ‘혈기 있는 모든 자’(모든 육체)가 불을 지르신 분이 여호와임을 보게 됩니다(48). ‘알리니’는 ‘보다’를 의미하는 번역입니다. 특이하게도 주어 ‘모든 육체’의 동사로 여기서는 동사 ‘알다’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는 우선은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이차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땅의 모든 사람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민족들까지도 수풀을 맹렬하게 태우는 불에서 여호와의 영광, 곧 그분의 왕적 능력을 보게 될 것을 사시해줍니다.

에스겔이 선포한 메시지보다 이를 담아낼 비유에 듣는 사람들은 반응합니다.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 아니냐?’하며, 에스겔을 조롱합니다(49). 에스겔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게 비판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의 파격적인 언어와 표현 양식과 충격적인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에 이질적으로 보였기에 그를 ‘다른’ 예언자로 평가 절하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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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0-03)


반복되는 잘못에 대한 심판

에스겔 20장 27-39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아름다운 믿음을 닮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애굽에 있을 때부터 계속된 이스라엘의 반역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완전한 파국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심판 이후의 새로운 출발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첫 번째 출애굽에 사응하는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하십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27-3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른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땅에서 허락해 주신 복을 바르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허락해 주신 은혜를 반대로 범죄하는 곳에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27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29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30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느냐 31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27-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광야에서처럼 변함없이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 땅에서 높은 산과 무성한 나무, 산당에서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산당’은 그 지역 원주민들이 우상을 섬기던 터였습니다.

 

(1) 조상들의 반역(27-29)

 

새로운 도입부로 시작합니다(27). 예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에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바뀝니다. 고발의 말씀을 뒤따르는 서두의 ‘그런즉’(그러므로)은 심판 선고를 기대하게 하지만, 단락은 마찬가지로 고발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마도 23절과 연결해 읽도록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민족들 가운데 흩어짐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전제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작은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으로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야에서 선포된 심판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런즉’(그러므로)을 통해 가나안 시대가 심판의 표지 아래 놓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배신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갔더니, 그들은 높은 언덕과 무성한 나무를 볼 때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28).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던 높은 언덕의 무성한 나무가 이스라엘의 제의 처소가 되면서 가나안 의 풍요 제의의 영향을 받아 여호와 종교가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풍요 다산이 산당을 찾아 제사를 드리는 유일한 동기이자 목적이 됐습니다. 풍요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누가 풍요를 주관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산당 제의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황량하고 황폐한 심판의 땅으로 만듭니다.

29절은 산당 제의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찾아가는 산당이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높은 언덕일 뿐이 아니냐?’ ‘산당’으로 옮긴 ‘바마’는 원래 높은 언덕이나 산등성을 가리킵니다. 높은 곳은 신에게 좀 더 가까운 곳이고, 무성한 나무는 풍요다산의 축복을 상징하기에 가나안에서는 높은 언덕에 잎이 무성하고 큰 나무 아래 제의 공간을 마련하고 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2) 현 세대의 반역(30-31)

 

다시금 27절과 거의 유사한 도입부(30절)로 시작하면서 현 세대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길을 따라 자신을 더럽히고, 그들의 가증한 것들을 좇으며 음행하려느냐?’ 현재분사가 사용된 수사 의문문으로 현 세대가 가증한 일을 저지른 조상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자신을 더럽힌 가증한 일의 한 실례로 어린아이 희생 제사가 제시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해서 우상들에게 바쳤습니다(31a; 참조. 16:21; 23:7,39). 예레미야 7:31에 의하면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불살라 제물로 드렸습니다. 31b절은 이스라엘의 장로 대신 이스라엘 족속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3절을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문의 자체를 거절하시는 이유가 우상숭배로 밝혀집니다. 여호와는 마음에 우상을 두고 있으면서 당신께 묻는 자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유배민들이나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나 우상숭배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5-31절은 ‘가증한 일’에 대한 고발에 집중합니다. 광야에서 유배의 심판을 선고하는 23절과 간접적으로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보여주는 31b절을 제외하면 심판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33-35절은 23절의 예언이 성취됐음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불순종이 심판을 운명처럼 만들었기에,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우상승배는 죽음으로 끝나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32-39)

사람들의 사랑에는 종종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100%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99%가 아닌 온전한 100% 사랑을 원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완전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32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3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34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35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36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7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38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9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32-39)

 

연결구에 해당하는 32절은 유배민들의 절망적인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멸망이 일찍부터 결정된 운명이라면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은 헛된 꿈이 아닙니까? 이제 이방인이 되어 저들처럼 나무나 돌로 된 우상이나 섬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유배민들의 절망적 항변에 대한 위로의 답변으로 새로운 출애굽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혹독한 심판이기는 하지만, 구속사의 완전한 종말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1) 나라들에서 이끌어냄(33-34)

 

여호와께서 ‘능한 손과 편 팔과 쏟아지는 분노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33). ‘능한 손과 편 팔’은 애굽 왕 바로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여호와의 큰 권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표현이고, ‘쏟아지는 분노’는 30:15의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이스라엘의 심판과 관련해 사용된 에스겔의 고유한 표현입니다(참조, 7:8;9:8;14:19;20:8,13,21; 22:24;36:18).

이는 새로운 출애굽에 이스라엘의 심판이 연결됩니다. 문맥에 따르면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는 자들에게 분노를 쏟으십니다(38-39). 특히 여호와의 왕권에 관한 명시적 언급은 주목할 만합니다. 에스겔은 여기에서만 ‘왕이 되다’, ‘왕으로 통치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말라크’를 사용합니다. 아마도 32절의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와 관련해서 특별히 이 단어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32절은 사무엘상 8장을 연상시키는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하 8:4,20) 하고 왕정 도입을 강청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면서 도입한 왕정(삼상 8:7)은 그들이 원했던 대로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어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만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민족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2) 광야 인도(35-39)

 

여호와께서 흩어져 사는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광야로 데려가 거기서 직접 그들을 심판하십니다(34-35). ‘여러 나라 광야’(민족들의 광야)는 그 주변에 많은 나라가 있는 광야로, 36절에 나오는 ‘애굽 땅 광야’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처음 출애굽의 여정이 두 번째 출애굽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전에 ‘애굽 땅 광야’(시내 광야)에서 불순종한 출애굽 세대를 심판하신 것처럼(36), 여호와께서 유배민 들을 민족들 가운데서 끌어내 광야로 데려가 심판하십니다. ‘대면하여’는 ‘얼굴을 마주하고’로, 여호와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직접 판결하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는 광야가 불순종한 출애굽 세대가 징벌 받는 장소인데, 두 번째 출애굽에서는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온 유배민들을 구별하는 장소가 됩니다. 유배지에서는 다 나오지만, 나온 자들이 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38). 우상숭배를 떠난 신실한 자들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갑니다. 유배민들 가운데 일부만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됩니다. 여호와께 속한 자와 우상을 숭배하는 자의 구분은 재판장이신 여호와께서 직접 하십니다. 37절의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여’는 레위기 27:32의 반영입니다. 후자에 따르면 목자의 막대기 아래를 통과하는 열 번째 짐승은 십일조로 여호와께 바쳐야 합니다. 물론 십일조의 경우처럼 순서에 따른 기계적 구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모든 유배민을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해서 흠이 없는 자를 당신 몫으로 구별하십니다.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는 아마도 구별된 일부와 여호와께서 새로운 언약을 맺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패역한 자들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여호와의 이름만 더럽히지 않는다면 마음껏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도 좋습니다(39). 이들은 여호와로부터 완전하게 단절된 자들,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32) 된 자들이기에 원하는 대로 우상을 숭배할 수 있게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에게 멸망하기까지 우상을 숭배하는 징벌이 주어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항상 순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사랑하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발은 하나님께,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동일합니다. 신앙인들은 반복되는 죄의 유혹과 습관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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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20-02)

 


여전히 배반하는 백성들

에스겔 20장 10-26절


 

꾸중 듣고 매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매를 맞아도 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닌 경우는 그 꾸중한 사람에게 침을 뱉고 도망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하며 떠나갈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외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아무도 꾸짖거나 혼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것이 정말 자녀를 사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었던 일들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세대들에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길을 버리고 반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분노를 쏟아 그들을 멸하셔야 마땅했지만 그들을 아껴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반역한 첫 세대(10-16)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함부로 행하게 되면 화를 부르게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감으로 자멸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겨야할 뿐 아니라 은혜를 배반한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출애굽했던 첫 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화를 불러드렸습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13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15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허락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16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10-16)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실을 들추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인도하지 않고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이끄셨습니다.

 

(1) 계명과 안식일(10-12)

 

출애굽의 놀라운 사건을 경험했지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가나안 땅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그분의 율례와 규례를 수여하시고 그들과 당신 사이의 표징으로 안식을 주셨습니다(11-12).

 

(2) 이스라엘의 반역(13a)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하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율법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다음으로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삶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쉬신 것은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창조의 목적이 거룩한 백성을 창조하여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하고 또 경험하게 해주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칠일 중 하루를 쉬면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거룩한 날로 정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이것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이나 재물을 의지하는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생존을 맡길 때 거룩한 백성으로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애굽기 31:15)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일하다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민 15:32f). 이 사건은 안식일에 일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섬기지도 않은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 여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반응(13b-16)

 

분노를 퍼부어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려 했던 여호와께서 이번에도 당신 이름을 위하여, 출애굽 사건을 본 민족들 앞에서 당신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멸절하지 않으셨습니다(14). 민족들에게 이스라엘의 광야 멸망은 여호와의 한계를 보여주는, 출애굽의 능력마저 의심스럽게 보여주는 사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 반역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약속의 땅이 더럽혀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15-16절은 여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가서 규례와 율법을 무시하고 안식일을 더럽혔기에 여호와께서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인도의 약속을 되돌려버리셨습니다. 가나안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위해 여호와께서 ‘찾아두었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반역을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시길 바랍니다.

 

광야에서 반역한 다음 세대(17-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할 때 진노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심판이 내려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남은 자를 두어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항상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17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18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19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20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21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 22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23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에 헤치리라 하였나니 24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25또 내가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율례와 능히 지키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17-26)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대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새로운 언약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그의 길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1) 여호와의 계명(18-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안식일로 그 표징(標徵)을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대한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를 금하는 차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가서 안식일에 경배함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반역(21a)

 

출애굽한 일 세대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자 구원하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참지 못했고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말씀만 믿으면 양식이 끊어지지 않을 거라는 안식일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버렸던 그들이 우상에게는 아들까지 바치는 헌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해서는 그렇게 헌신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너무 무관심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반응(21b-2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도 않고 말씀도 무시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인정하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징계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은 이전 세대처럼 행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그들 역시 잘못된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진노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는 대신 아무렇게나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남겨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주 업신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없이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징계를 받았지만, 완전히 멸망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출애굽한 일 세대는 불순종해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했다고 해서 민족 자체를 다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은혜의 씨앗을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못을 했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돌이키지 않고 계속 잘못을 하다 보면 결국 파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크고 무서운 벌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혹시 걸리지 않아서, 혼나지 않아서 계속 반복하고 있는 잘못이 있습니까?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멈추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안식일로 설정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약을 파기시켰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불렀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매를 맞고 혼이 날 때, 정신 차리고 잘못에서 돌이켜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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